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히13:10-16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히13:10-16
2008-06-03 16:30:56 read : 83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심으로 이루어놓은 구원의 은혜를 누리도록 주신 외적인 시스템이 교회와 성경과 기도입니다. 이 점은 우리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의 중심에 있는 “생명의 삶” 과정에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믿음이 성장할 뿐만 아니라 구원의 은혜를 현재적으로 경험하려면 세 가지 시스템을 잘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시스템 가운데 교회가 하는 일 네 가지를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교회가 하는 일은 첫 번째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입니다. 두 번째로는 성도들을 세우고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교육합니다. 세 번째로는 복음을 전파하여 생명을 얻게 하고 가르쳐 제자를 삼게 합니다. 네 번째로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을 합니다.

이 중에 교회가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입니다. 예배는 우리 삶의 목적 가운데 한 가지인 하나님을 인정하고 영화롭게 하는 방법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예배 가운데 임재하시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주간에 QT교재로 히브리서 본문을 마지막으로 다루면서 예배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본문을 다시 확인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히브리서 저자가 이 편지를 쓸 당시에 성도들은 그들에게 복음을 가르쳐 준 영적 지도자들의 가르침에서 떠나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 구약의 제사의식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외적으로 여러 가지 어렵고 힘든 핍박과 박해들이 있었고 처음에는 성령의 다양한 은혜를 경험하기도 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열심히 배우지 않음으로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여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히브리서 1:1-10:18까지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어떤 일을 하셨으며 우리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0:19-13:18에 그 실제적인 적용문제를 여러 가지로 설명하였습니다. 그 실제적 적용가운데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려면 예배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참된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속의 은혜를 경험할 뿐만 아니라 복음의 원리를 좇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F. F. 브루스(F. F. Bruce)라는 유명한 신약학자는 히브리서 13:9을 포함시켜 히브리서 13:9-16의 제목을 “참된 기독교 제사”(The true christian sacrifice)라고 붙였습니다. 이 본문은 더 이상 구약의 제사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아갈 수 있고, 또한 특별한 방식의 삶을 담아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주제입니다. 이 주제를 중심으로 첫 번째로는 예배의 기초, 두 번째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배의 기초

히브리서 저자는 앞서 히브리서 13:7-9에서 당시 히브리서 저자가 이 글을 기록할 당시의 성도들에게 복음을 가르쳐준 영적 지도자들의 믿음에 서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서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시스템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 시스템은 구약의 제사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오늘날 우리 기독교 예배의 기초가 무엇인지 설명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3:10에 보면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그런데 여기에 “우리가 제단이 있다”라고 하였을 때 어떤 제단을 말하는 것일까요?

QT를 하면서 히브리서를 처음부터 자세하게 읽은 분들은 연구하였습니다만 예수님은 구약시대에 예표적으로 보여주었었던 모든 제사의 실체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구약시대와 같이 제단에서 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히10:18). 그렇다면 여기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제단이 있다고 하였을까요?

이 제단은 환유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환유법”(metonymy)이란 어떤 사물을 직접 가리키기보다는 그 속성이나 특징을 통하여 사물이나 사건이 의미하는 바를 나타내는 수사법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왕관을 썼다”라고 함으로 “왕이 되었다”라거나 “최고 높은 위치에 앉게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서 “우리에게 제단이 있다”라고 하는 것은 성소에 제단이나 동물제사를 통하여 나아가듯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다른 제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제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론의 제사장직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오시고 언약의 중보자로 오셔서 구약의 제사와 제사직분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성취한 십자가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 길을 의미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제단은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로서 영원토록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데,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 길은 구약의 제단과 다릅니다. 더 이상의 제사음식을 통하여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구약의 제사법에 따라 사람들, 곧 유대교 방식에 따라 사는 사람들도 말합니다. 이들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차려진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음식”이라는 말도 환유법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구약시대의 “제사 음식”과 대조하기 위함입니다. 존 브라운은 이 음식을 가리켜 “주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성찬, 곧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떡과 잔에 참여하는 성찬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데 이 본문의 내용으로 볼 때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구약시대의 제단처럼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단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그리스도라는 제단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 이유를 히브리서 13:11-12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그 이유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구약의 제사법을 보면 죄를 위한 짐승의 피를 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대속죄일에 드리는 속죄제사를 말합니다.

대속죄일에 대한 규례는 레위기 16:1-34에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 레위기 16:27에 보면 “속죄제 수송아지와 속죄제 염소의 피를 성소로 들여다가 속죄하였은즉 그 가죽과 고기와 똥을 밖으로 내어다가 불사를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3:12에서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그러므로 예수도”(Διο και Ίησους)라는 말을 유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의 속죄일에 속죄제물의 피는 성소로 가져가 속죄하고 나머지는 진 밖으로 내어다 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자기 자신의 피로써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구약의 대속죄일에 희생당한 속죄제물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거룩하시기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제단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의 제단이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의 제단이 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드리는 기독교 예배의 기초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제단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히브리서 저자는 이 점에 대하여 히브리서 13:13에서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하였습니다. 이 문맥에서 “영문”(παρεμβολη)은 문자 그대로 하면 “진”(camp)을 말합니다만 예루살렘 성안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가셔서 해골이라는 곳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가신 것처럼 우리도 모든 고통을 담당하고 성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는 말씀은 어떤 뜻일까요? 이것도 어떤 사물을 직접 가리키기보다는 그 속성이나 특징으로 진리를 나타내는 수사법으로 역시 환유법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저주받은 자로 십자가에 달리셨고 거룩한 도성에서 죽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고 영문 밖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요? 문맥에서 성 안은 유대교와 교제하고 그 규례를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오랫동안 구약의 전통 하에 있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나오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성 밖으로 나오면 그리스도처럼 능욕을 당하고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당시에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는 자들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일로 인하여 능욕과 불명예를 당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지고 그 성을 떠나도록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를 때 어려움이 있다고 하여서 옛날의 방식인 유대교로 돌아가면 안 되고 그리스도께서 행한 구속사역을 통하여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 예배의 기초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그 성을 떠나야 할까요? 히브리서 저자는 그 이유를 히브리서 13:14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γαρ)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왜 당시 유대교에서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성도들은 다시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 될까요?

이 땅에서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장차 오게 될 완전한 도성인 새 예루살렘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땅에서 잠시잠깐 누리게 될 유익들 때문에 세속 도시에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장차 도래하게 될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 가운데 바라보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소망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이 다릅니다.

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할까요? 어떤 방식으로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될까요? 그것은 구약의 희생제사가 아니라 찬미의 제사입니다. 여러분! 히브리서 13:15-16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그러나, δε)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여기에 오늘날 우리 기독교의 예배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이러므로”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속죄제물이 되어주시고 영문 밖으로 나가신 주님을 따라 유대교에서 벗어나 만인을 위하여 하늘보좌로 나아가게 하시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도성을 예비해 주셨으므로 이러한 방식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기독교 예배는 어떤 방식으로 드려야 하며, 어떤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될까요? 여기에 오늘날 기독교 예배의 아주 중요한 원형적 모델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첫 번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하고, 두 번째로는 합당한 삶이 있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신앙고백이 있는 예배

첫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3:15을 보십시오.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οὑτος, this)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말은 늘 찬양하는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성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말이 뒤에 있습니다.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여기에 “증거하는”이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 “호모로게오”(ὁμο-λογεω)의 현재분사형인데, 신앙을 고백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신앙을 고백하는 일은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이 말이 왜 중요한지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몇 개의 본문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0:32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라고 하셨고, 로마서 10:9에는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1서 2:23에서는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시인하다”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 히브리서 본문에서 사용한 동일한 용어인 “호모로게오”(ὁμο-λογεω)라는 말입니다. “같은 것을 말하다,” “인정한다,” “공적으로 말한다”라는 뜻으로 “신앙을 고백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을 고백하는 것은 구원을 얻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고, 또한 예배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은 시편이나 선지서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자기 백성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지를 다양한 말씀으로 계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하면서 믿음으로 응답합니다. 이것이 교리요 신앙고백입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교리적인 진술일 뿐만 아니라, 교리적인 진술 이상의 실천적인 부분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신부”인 교회가 “남편”인 하나님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자녀”인 교회가 “아버지”되신 하나님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과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오늘날 예배에서 『사도신경』을 통하여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찬송과 설교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배우며, 어떤 일을 하셨는지 배우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종교인 기독교 예배의 중심부분을 우리고 있으며,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믿는 핵심교리를 고백하지도 않고, 또한 이 내용과는 관계없이 자기 유익이나 자기를 즐겁게 해주는 곳에서 스스로 예배를 드린다고 자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약 16년 동안 한국기계연구원과 한국해양연구원 신우회 예배와 성경공부를 인도하였습니다. 몇 해 전에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고백문서인 『사도신경』을 공부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여러 명이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왜 공부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내가 그분들에게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다 침례교와 성결교회와 감리교회를 다니는 분들이었습니다. 그 이전에 제가 한 주를 휴가를 받아 침례교회와 감리교회 한 곳에 예배를 참여하였는데 역시 사도신경을 예배 시간에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왜 고백하지 않는지 문서를 찾아보았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핵심교리인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창조교리와 하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태어나셨고, 부활하셨고, 또한 하늘우편에 앉아계신다는 교리내용을 어떤 사람은 믿고 어떤 사람은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가 회중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믿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2) 합당한 삶이 따르는 예배

그러나 신우회원 가운데는 사도신경에 기록된 내용도 알고 있는 사람은 말은 그럴듯하게 하는데 거의 많은 부분에서 행실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저의 딜레마가 있었습니다. 바른 신앙고백이 없지만 삶은 정직하고 성실하였지만, 신앙고백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삶이 따르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저의 딜레마(dilemma)였습니다.

아무리 올바른 신앙고백을 한다고 할지라도 신앙고백에 합당한 삶이 따르지 않는다면 이 역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하나님께 올바른 신앙고백을 한다면 반드시 거기에 합당한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여러분! 히브리서 13:16을 보십시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이 말씀을 하는 것은 우리가 주일에 모여 신앙고백을 하며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신자의 신분에 합당한 삶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있어서 잊지 말아야 할 일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선을 행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서로 나누어주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일상생활에서 선을 행하는 일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구약성경 이사야 1:11-12에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이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방법이 구약시대에는 제물을 통하여 나아가는 것인데 왜 이러한 예배를 싫어하실까요?

그것은 그들의 삶에서 선을 행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15에 보면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손을 편다”는 말이나 “기도한다”라는 말은 같은 뜻입니다. 도덕적인 삶이 수반되지 않는 기도는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많은 제물을 드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 시대에 적용하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오늘날 구약시대의 성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당에 출입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헌금을 드리는 것은 한편으로는 주님의 섬긴다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교회당에 출입하면서도 불법을 행하고, 악을 일삼으며, 거짓을 행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준다면 교회당에 출입하는 일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에 합당한 삶이 따르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일들 가운데 아주 중요한 것 가운데 한 가지가 예배입니다. 모든 세속적인 생각과 일들을 멈추고 오직 하나님께 찬송하고, 주님의 나라의 사역을 위하여 헌금을 드리며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 가운데 임재하셔서 하나님과 교제를 즐기는 축복을 경험하게 해 주십니다. 이렇게 귀중한 예배도 예배드리는 사람이 일상적인 생활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수반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오는 은혜와 기도응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예배에 있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서로 나누는 일”입니다. 우리 번역 성경에 “서로 나누는 일”은 좀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우리가 헬라어 용어로 잘 알려진 “코이노니아”(κοινωνια)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성도 간에 서로 교제하는 말로도 사용되지만,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에 동참한다는 뜻도 있고, 복음사역에 참여하는 일에도 사용됩니다.

이 두 의미는 빌립보서 4:14-15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여기에 “참예하다”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코이노니아”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일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어려움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도우는 일도 포함됩니다(고후8:1-5). 그러나 이 문맥은 예배생활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성도 상호 간에 서로 교제하며 섬기는 일도 포함되고, 또한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고 참여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성도들이 바른 예배생활과 신앙의 성숙을 위하여 성도들과 교제하고 복음에 참여하고, 어려움 가운데 처한 사람을 돕는 일은 참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한 사람이 주 안에서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은 각자 개별적으로 고립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전체 공동체 속에서 성장한다는 것을 많이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서로를 통하여 배웁니다.

특히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한다”(엡4:16)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같이 성장하고, 복음의 능력과 영향을 보고 성장하게 되고, 하나님을 잘 예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생활에서 성도들과 교제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 일을 효과적으로 잘 할 수 있는 시스템 가운데 하나가 우리 교회에서 시행하는 가정교회 시스템입니다. 우리 교회의 가정교회에서 서로 교제하며 서로의 필요를 공급하고 나누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제사를 기뻐 받으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13:16)

여러분! 예배는 교회가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그 은혜와 능력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이 양육되기도 하고,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주기도 합니다. 때로는 치료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예배학자 가운데 미국의 휘튼대학의 로버트 웨버(Robert Webber) 교수가 쓴 『예배가 보인다 감동을 누린다』라는 책은 예배에 관한 많은 통찰력을 주는 책입니다.

그 중에 이러한 글이 있습니다. “예배는 실제로 예배하는 자가 하나님의 변혁시키는 힘을 경험하는 특별한 장소이다. 그러나 우리 개인의 회개와 갱신은 우리의 전도하는 삶, 기독교교육, 헌신된 영성, 적극적인 사회참여로 이끈다.

예배는 우리가 세상에 나아가서 소금과 빛이 되도록 촉매제가 되어 왔고, 계속해서 그렇게 이끌어 줄 것이다.” 그리고 예배에 대한 그의 다른 책의 제목은 Worship Is a Verb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 제목 자체가 예배가 역동적인 힘을 느끼게 만들고 하나님을 만나고 그와 동역하는 이미지가 연상됩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능력을 경험하며 우리 자신이 변하고 헌신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핵심기능인 예배를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배에 올바른 신앙고백을 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배우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배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예배가 주는 놀라운 은혜와 역동적인 힘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