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참예배자가 됩시다

먼저 참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신12:1-7/2005-01-05

먼저 참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12:1-7





저는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시험에 들뻔 했습니다. 찬양과 관련된 부서의 헌신예배의 설교를 제가 연속으로 세 번이나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까지 하면 연속으로 찬양에 관련된 설교가 세 번째입니다. 그래서 이런 푸념이 섞여 나왔습니다. “하나님 저 이번에 하면 세 번째입니다. 이제 별로 할 말도 없습니다. 도대체 무슨 설교를 해야 합니까?” 그러자 하나님은 제 마음 속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또 찬양에 대한 설교를 해야 한다고? 너는 찬양에 대한 설교를 걱정하지만 정말로 너는 나에게 얼마나 찬양하고 사니? 너에게 찬양에 대한 설교가 주어지는 것은 찬양하지 못하고 사는 너에 대한 나의 배려다. 불평하지 말고 찬양해라. 진실로 네 마음을 다해 찬양해라.” 이것은 하나님이 제게 주신 응답이었습니다. 오늘 찬양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말씀을 주고 계십니까?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하게 됩니다. 많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사람은 성실하고 신실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가 하는 사랑은 진실된 사랑이라고 믿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세 쌍의 남녀가 있는데 그들이 하는 말과 모습을 통해서 그들이 연인 사이인지, 결혼한 다음 시간이 좀 지난 커플인지, 아니면 멋없는 중년부부인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전철에서 졸려서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서 잠을 자려고 할 때 지금도 한창 연애중인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그래 내 넓은 어깨에 기대서 편히 자. 내가 내릴 때 깨울게~” 결혼한 다음에 시간이 좀 지난(이제 깨소금은 조금 사라진) 남편은 아내가 어깨에 기대어 자고 싶다고 하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다른 사람 이목도 있으니 제발 침만 흘리지 말고 자라.” 갱년기에 접어든 중년 남편은 말합니다. “빨리 돌머리 치워라. 내 어깨에 쥐난다.”

또 있습니다. 남녀가 데이트 약속을 했습니다. 남자가 먼저 약속 장소에 나왔고 뒤늦게 여자가 도착합니다. 여자는 조금 미안해서 애교를 떱니다. 남자 친구의 눈을 가리면서 “내가 누구게?”라고 물으면 남자친구는 대답합니다. “당신은 언제나 나를 눈멀게 만드는 군요! 나는 당신에게 눈먼 사람입니다.” 참 멋있는 대답입니다. 조금은 닭살이 돋기는 하지만요. 결혼한 지 10년쯤 지나면 남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람도 많은데 장난 이제 그만 쳐라. 빨리 저녁이나 먹자.” 결혼한 지 30년이 지난 멋없는 남편은 벌컥 화를 내며 말한답니다. “셋 셀때까지 손치워라. 콱 쎄라뿔기 전에. 하나, 둘, 셋.....”

오늘 집에 가서 여러분의 남편의 사랑을 시험해보기 바랍니다. 원하기는 셋 셀 때까지 손을 못 치워서 코 깨지는 아내가 없기를 바랍니다.



그 상황 속에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와 사랑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것처럼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응답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상태에 대해서 진단할 수 있습니다.

남자들이 만나면 자주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군대이야기입니다. 또 축구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진짜로 많이 하는 얘기는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입니다. 여자들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 드라마 얘기를 자주 하는 것 같아요. 금쪽 같은 내 자식이 파리의 연인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 뭐 이런 얘기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들만 들으십시오.)

우리들도 만나면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요? 사실 우리들은 예배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러 모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예배를 잘 드리고 있는지? 나는 지금 예배의 어떤 부분에서 부족하고 약한지? 내가 드리는 기도와 찬송은 주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실 만한 것인지?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했는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고 나는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응답할 수 있는지? 과연 내 예배를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평가할 것인지? 등등을 우리는 말해야 합니다.

오늘 시온 찬양대의 헌신예배인데 왜 다짜고짜 예배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요? 그 이유는 찬양하는 것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하고 높은 목적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직분이 주어졌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성가 한 곡을 노래하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진실로 예배하는 사람으로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배를 돕는 찬양대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참된 예배자로 서야 합니다. 그것은 목사인 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지만 저는 인도자이기 전에, 설교자이기 전에 하나님 앞에 바르게 경배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예배를 인도하고 나서 제 자신이 받은 은혜가 적을 때는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너무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하나님 앞에서 참된 예배자로 서지 못했음을 용서해 주세요.”

그러므로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시온 찬양대 여러분! 여러분이 드리고 있는 그 예배를 한 번 평가해 보세요. 나는 하나님 앞에 단순히 노래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진실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는 예배자인가?



오늘 성경 말씀에는 참된 예배의 모습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예배를 진단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나의 예배를 평가할 수 있는 첫 번째 진단지는 “나의 예배는 참 예배인가? 우상 숭배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 그것이 어떻게 우상 숭배로 전락할 수 있는가? 왜 그런 망발을 하는가?” 이렇게 말씀하실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신명기는 가나안을 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들려주는 모세의 긴 설교입니다. 모세는 여기에서 가장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것을 주의시키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거기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높은 산, 작은 산, 푸른 나무아래에다(다시 말하면 자기들이 원하는 곳이면 아무 곳에든지) 주상, 아세라 상, 갖가지 신상들을 만들어 놓고 우상을 섬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된 너희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하나님께서 택하신 예배의 장소, 성전)곳에 가서 예배해라.” 하는 것입니다.

이방 사람들은 아무 곳에서나 우상을 섬기지만 너희들은 아무 곳에서나 예배해서는 안되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장소에 가서 예배하라는 모세의 권고입니다. 아마도 모세가 이런 성전 중심의 예배를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스라엘의 신앙이 우상을 숭배하는 가나안 족속의 풍속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장소의 문제인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우상 숭배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상 숭배의 특징은 아무 곳에서나 한다는 것입니다. 높은산, 작은 산, 푸른 나무 아래 어떤 곳이든지 상관없습니다. 내 마음에 따라. 자기 욕구, 자기 용도, 자기 이익에 따라 신을 섬기는 것,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신을 섬긴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 안에 자기 자신, 자기 중심성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예배하는 열린 예배가 있습니다. 이런 예배는 참 좋은 예배의 형식이지만 이런 예배의 함정은 찬양과 경배가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기 감흥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될 수도 있다는데 있습니다. 내가 찬양하고, 소리를 지르고, 몸을 흔들면서, 워십 댄스하고 찬양하지만 조금만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 음악, 그 열광적이고 감정적인 분위기를 즐기는 (enjoy, amuse) 것에 그칠 수도 있다는데 있습니다.

우상숭배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참되신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그 분만을 생각하며, 그 분께 집중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고, 나의 죄 속함을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여러분은 내 자신을 위하는 우상숭배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진실로 섬기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나는 이 음악과 음악적인 분위기를 단순히 즐기고 있습니까? 찬양이 끝난 다음에 성도들이 화답하는 아멘의 목소리가 크냐 적으냐에 영향받습니까? 오늘도 성가 한 곡을 끝냈다는 안도감으로 찬양대의 직분을 대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예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제는 나의 중심성, 사람의 중심성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향하고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참된 예배자가 됩시다.



두 번째의 진단지는 “나의 예배는 산 예배인가? 죽은 예배인가?” 입니다.

오늘 6절 말씀에는 여러 가지 제물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번제, 제물, 거제, 서원제, 낙헌제, 소와 양.... 이 모든 제물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불태워서 드려졌습니다. 그것이 제사였습니다. 바로 그것이 제물이요, 제사요, 예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번제와 희생제물은 머리만 드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몸만 드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제물 전체를 드렸습니다.

내 몸만 여기에 앉아 있고 정신과 영혼은 다른 곳에 있다면, 예배당에 앉아 있으면서 어제 꽝 된 복권만을 생각한다면, 예배하면서 예배 후에 만나서 성사시켜야할 회사 일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산 예배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배하면서도 내 마음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다면 그것도 산 예배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말씀을 듣지만 여전히 내 고집, 내 생각을 붙잡고 변화되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산 제물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돈으로 헌금하고, 아무리 많이 기도하고, 아무리 말씀을 들으며 아멘이라고 외쳐도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신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겠다는 결단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제물이요 죽은 예배입니다.

오늘 6절 말씀에는 많은 제물들이 등장하지만 거기에 언제나 먼저 언급되는 것이 있습니다. “너희”라는 말입니다. 너(YOU). 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렇게 “너희”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을까요? “눈에 보이는 그 제물만 드리지 말고 그 제물을 드리는 너 자신을 나에게 다오. 나는 너의 마음을 원한다.”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찬양하는 시온 찬양대 여러분의 입술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찬양하는 여러분의 마음을 더욱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찬양하는 너의 목소리를 다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찬양하는 너의 그 간절한 마음을 다오.”라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우리의 예배를 평가할 수 있는 세 번째 진단지는 “나의 예배는 기쁨이 있는가? 괴로움이 있는가?” 입니다. 나에게 있어서 예배는(찬양은) 즐거움과 기쁨인가? 아니면 고역이요 힘든 일인가? 현대사회는 너무나 바쁘다 보니 모든 일을 주일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그렇게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즐거워야할 주일이 너무나 괴롭고 힘든 짐으로만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예배는 즐거워야 합니다. 예배는 축제요, 잔치가 되어야 합니다. 기쁨이 있고, 감격이 있고, 눈물이 있고, 웃음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설교 중에 실없는 이야기를 자주 하는 것은 우리 예배가 즐거운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따분하거나 싫증나거나 단조로우며 지루한 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예배할 때 참으로 행복해야 합니다.



13세기 신성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는 ‘인간이 타고나는 자연 그대로의 선천적인 언어는 어떤 것일가?’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풀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 막 태어난 아이들 6명을 방에 넣고, 6명의 유모를 통해 키웠습니다. 단 말은 한 마디도 해서는 안됐습니다. 결과는 어떤 말이든지 하는 아기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결국 6명의 아기들은 날로 쇠약해지더니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아기의 생존에 의사소통은 필수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의사소통(커뮤니케이션)하지 않으면 살수 없다는 진리를 보여줍니다. 이제 우리는 인간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란 커뮤니케이션 하는 존재”이다.

의사소통, 커뮤니케이션은 흐름, 파장, 옮겨감, 흘러가는 것입니다. 현대 물리학은 모든 운동과 에너지를 흐름으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양자 물리학, 양자 역학, 전자의 이동, 이 모든 것을 입자의 파동으로 설명합니다. 예배도 흐름과 파동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영적인 에너지(파워)가 우리에게 번져오는 사건, 그것이 예배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죄를 이길 만한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 힘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 있는 그 힘과 능력은 예배를 통해서 우리에게 흘러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힘과 능력, 에너지를 공급받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찬양, 기도, 묵상, 눈물, 감동, 결단을 통해 거대한 영적인 흐름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로 밀려들어 왔으니 나도 하나님을 향하여 기쁨과 감사, 찬양과 고백과 기도를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도, 재능이 뛰어난 사람도 아닙니다. 참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예수님은 요 4:23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청교도 신앙의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리챠드 벡스터 목사님은 그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는 다시는 설교할 수 없는 사람처럼 설교하였고, 죽어 가는 사람으로서 죽어 가는 사람에게 절규하듯 설교하였다.” 지금 죽어 가는 사람의 심정으로, ‘이게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하고 설교하는 그 설교는 얼마나 간절하고 진실하고 능력이 있었을까요?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요? “나는 다시는 예배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하였다.”라고요.

설암에 걸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부득이하게 혀를 절단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내일이면 나의 혀를 잘라야 하고 그러면 나는 이제 말할 수 없게 되는데 나는 마지막 무슨 말을 할까?’ 그는 밤새 고민하다가 한 마디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그가 했던 마지막 말은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였습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시온 찬양대 여러분! 여러분이 벡스터 목사님처럼, 마지막 말해야 하는 그 사람처럼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나는 다시는 찬양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정성껏 찬양하였습니다. 나의 마지막까지 노래할 제목은 오직 ‘하나님께 감사’, ‘하나님께 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