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예배 계4:6-11
찬양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실 때 이런 찬송 부르셨겠죠? 오실 때도 아마 이렇게 찬송부르면 다시 오실 겁니다.
오늘 우리가 승천주일로 지키는데 기독교 전통이 강한 나라들은 지난 목요일에 예수님이 승천하셨다고 그 날 다 쉽니다. 제가 지난주 목요일에 제네바에서 회의가 있어서 잠깐 갔는데 그날 모두가 문을 닫았길래 알아보니까 승천날이었습니다. 세계보건기구인 WHO 총회만 열리고 있었습니다.
전날 우리 한국 출신의 유엔총장인 반기문 총장이 오셔서 특별 연설을 했습니다. 가보니까 분위기가 ‘코리아, 코리아 ’ 하면서 한국을 달리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한국인 유엔총장. 그런가하면 3년 전에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 가운데서 아주 훌륭한 일을 많이 해서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있는 분이 계십니다.
이종욱 총장님이신데 3년 전에 업무 중 급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기리는 뜻에서 상을 만들었는데 마침 지난 목요일에 첫 상을 주기로 하고 상을 공여한 재단이 제가 맡고 있는 재단이어서 그 날 가서 첫 번 째 상으로 10만불을 주고 매년 주기로 했습니다. 왜 상을 주기로 했는지 시상 연설을 제가 하고 상을 주고, 상을 받은 연구소 소장이 나와서 총대들 앞에서 수상 감사인사를 했습니다. 또 한 번 ‘코리아’, 이렇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강 목사님 추모예배를 드리면서 우리가 했던 테마 하나가 있습니다. “그는 가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보내지 않았다.” 기억하시죠? 그때처럼 저희가 시상연설을 할 때 처음에 ‘이종욱, 그 사람은 우리를 떠났지만 우리가 그를 보내진 않았다. 그분은 여기 계시다. 전염병 이야기, 세계 보건을 위해서 노력한 이야기, 우리가 그를 추모하는데 추모로 그치는 게 아니고 그분이 하던 일을 우리가 지금 해야 하고 앞으로도 해야 한다.’ 고 시작했습니다. 유가족 몇 분이 오셨는데 눈물을 많이 흘리셨습니다. 그렇게 훌륭하신 분의 시상을 하는데 그 날도 아마 ‘코리아, 코리아’ 그랬을 겁니다.
그렇게 금요일에 비행기를 타고 토요일 아침에 한국에 도착했는데 도착하자마자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직 대통령이 서거하셨다.’ 아마 어제도 WHO 총회는 계속 열리고 있었을 겁니다. 위대했던 코리아, 그러다가 토요일부터는 ‘코리아’라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받아들일지 궁금했습니다. ‘대통령이 자결했단다. 자기 죽음으로 인생을 마쳤다더라.’ 세계를 향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마음이 아팠습니다.
여러분도 저도 우리 모두가 다 이런 죽음 앞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의 죽음에 관해서 개인 한 사람이 죽는 것도 서글프고 안됐지만 이 나라를 다스렸던 국가 지도자가 죽는 것도 우리 모두의 관심이고 아픔입니다.
더군다나 자결했다는 이야기는 더욱 더 우리 가슴을 어렵게 만듭니다. 옛날에 저희들이 이준 열사 같은 분이 민족 독립을 위해서 남의 나라에 가서 자결했다고 그랬는데 그 때 자결을 인간의 죽음이긴 한데 그 죽음을 우리 모두가 다 장엄하다고, 고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제 죽음은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에서 선녀가 분신자살 합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분신이 안됐지만 ???? 구원을 위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모두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높은 이도 죽고 낮은 이도 죽고 비범한 사람도 죽고 평범한 사람도 죽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일까요? 죽음으로 인해서 법정인 모든 소속과 판단은 일단 무효가 됐다고 합니다. 법적 절차의 종결, 하지만 우리 뇌리에서도 종결되었습니까? 법률 행위나 제도 행위는 종결할 수 있으나 죽음 자체는 우리한테 근심, 걱정, 분노, 회한, 수많은 것으로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몸이 죽는다고, 몸이 이 땅에 없다고, 우리가 완전히 없어지는 겁니까? 우리의 관이 끝나는 겁니까? 가장 작은 소자 하나의 죽음도 몸이 없어져 강에 뿌려지고 땅에 묻혔다고 완전히 이 땅 역사 속에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어제부터 우리가 경험하는 새로운 현실입니다. 죽음은 비록 몸이 죽는 것이지만 혼도 함께 죽는 것이지만, 그러나 죽음은 우리 인간이 말하는 죽음이지 사실은 또 다른 영역에서 보면 몸이 없어도 역사로 기억으로 기록으로 사상으로 영향을 미치며 계속 살아갑니다. 이것을 우리가 편의상 영은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어떻게 죽는 것이 좋습니까?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어떻게 죽어야 합니까? 죽음은 무엇을 남겨야 합니까? 이런 질문이 우리를 슬프게도 하고 때로는 위로받게도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이 분은 사실은 죽으십니다. 우리 때문에 죽었고, 우리 때문에 피를 흘렸고, 그 분도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죽는데 전능하신 아들도 죽음이라는 운명을 타고 났는데 왜 우리는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도 죽습니다. 중요한 것은 죽어서도 죽은 자가 말을 해야 하고 죽어서도 죽은 자가 영향을 미쳐야 하고 죽어서도 죽은 자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것, 그런 죽음은 아름다운 죽음일 겁니다. 예수의 죽음이 그렇다고 믿습니다.
오늘 이렇게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희망이 하나 있다면 인간의 죽음에 관해서, 한 대통령의 죽음에 관해서, 정치적 입장으로 해석하기보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두 대통령의 죽음을 생각해 봅니다. 한 분은 산업화를 이루어서 철강 공업도 세웠고 이 땅을 정말 부유하게 만들었는데 정치적인 문제로 가장 믿었던 부하의 총탄에 사살되었습니다. 다른 한 분은 정반대로 민주화를 했고 소신껏 정치를 했다고 하였으며 인덕과 도덕성이 있다고 자부했는데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는 길을 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우리한테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는 이 땅에 평화를 준다.” 평화가 뭡니까? 평화란, 하나님 나라에 있을 때는 영광이고 이 땅에 오면 평화입니다. 평화는 구체적으로 어떻다고 설명하기보다 성경말씀에 있는 평화란 하늘 나라에서 이루어질 때는 영광이라 이름하고 그 영광이 땅에 내려와서 인간의 언어가 되면 그것을 평화라고 합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평화라고 배웠습니다.
이 말씀을 누가복음에서 2:14에서 배웠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 “하늘에서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메시지는 하나님은 영광이고,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 땅에 오면 평화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땅의 평화란 하늘의 영광을 육화한 것이 평화입니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 것이 평화이지, 하나님이 저주받는 것이 평화가 아닙니다. 그런 평화는 거짓 평화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나는 평화의 왕으로 왔다.” 오늘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하늘나라 올라가셔서 영광의 왕이 되십니다. 승천하시면 영광의 왕, 땅에 오시면 평화의 왕, 이 땅에 평화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 일이 이 땅의 평화입니다.
예수가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 인간을 위해서 세상에서 죽은 예수가 다시 말한다. 나도 죽었다. 십자가에서 타살을 당했다. 많은 인간의 죄 값 때문에 죽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계획, 그걸 내가 받아들인다.” 죽고 나서 부활하신 다음에 승천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평화를 이루려고 하는 세상에서 영광의 나라로 돌아간다.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줄 것인데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전혀 다른 평화다. 무슨 평화냐?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 평화다.”
하나님의 평화는 총살로 죽이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죽이는 게 평화가 아니고 죽기까지, 목숨이 살아있는 순간까지 최선의 의술을 다해서 진료를 다해서 살리는 것이 평화입니다. 밉다고 저주하고 싶다고 총으로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평화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땅에 평화를 주고 간다.
다시는 이 땅에 사람 죽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 평화스럽게 진실로 평화를 이뤄야한다.” 또 말씀하시길 “내가 주는 평화는 아무리 어렵고 모독을 당했다고 해도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는 자기 살해, 자살은 하나님 평화가 아니다. 죽기까지 복종해야 한다.” 죽을 때까지 헌신해야 합니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은 하나님께 성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이고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죽음에 관한 논란을 벌이기 이전에 이제 우리 이렇게 삽시다. 우리는 죽음을 죽는 죽음이 아니고 죽음을 뛰어넘는 새로운 모두의 생명을 위해서 사는 그런 세상의 역사를 이번 기회를 통해서 다시 한번 깨달아봅시다. 삽시다. 같이 삽시다. 살립시다. 그래서 위대한 사람들, 범인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이룬 모든 것을 다 합쳐서 모두에게 평화가 되고 하나님도 영광 받는 그런 삶을 삽시다.
이 교훈을 우리가 이번에 얻을 수 있으면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그렇게 믿습니다. “내가 평화를 주노라.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평화, 그래서 이 땅에서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 사실을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쓴 요한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 하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환상을 봤습니다. 네 생물이 면류관을 쓴 것을 다 내려놓고 주님께 찬양을 하고 영광을 돌리는 장면을 환상으로 봅니다. 네 생물은 해석이 여러 가지입니다. 사람, 사자, 소, 독수리 이렇게 표현했는데 옛날의 상징적 신화적 표현이라고 봅니다.
이 네 생물은 예수님의 행적과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인품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는데 그것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네 성경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하늘나라 승천은 예수와 함께 자기들이 받았던 면류관을 앞에 놓고 찬양을 드린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면류관을 받고 싶습니다. 면류관이라는 말은, 희랍어 원어가 ‘스테파노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이름 중에 ‘스테반’이 있습니다. 스티븐, 스테파노스, 스테판, 이 ‘스테파노스’라는 희랍어 명칭은, 운동경기에 나가서 메달을 받는 것입니다. 메달 대신 받는 관이 월계관인데 이것을 헬라말로 ‘스테파노스’라고 합니다.
스티븐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면류관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자기들이 신앙으로 애써서 받은 신앙의 면류관을 다 내려놓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셔서 오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당신은 거룩하십니다. 당신은 거룩하십니다. 당신은 거룩하십니다.” 이렇게 꼭 세 번을 거룩하다고 했습니다
.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님, 당신들 정말 위대하시고 거룩하십니다.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을 베풀어주시고 십자가에 죽으셔서 모든 인간과 똑같이 죽으시고 죽은 자도 살아난다는 부활의 가능성을 주시고 직접 승천하셔서 오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면서 내가 다시 오마, 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 거룩하십니다.” 이렇게 거룩하다고 칭찬하는 영광을 이야기하는 것이 하늘나라 예배의 뜻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거룩하신 주 하나님, 거룩하신 예수님, 거룩하신 성령님, 이렇게 거룩하신 분을 예배하는 것이 땅의 예배에서도 중요한 대목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셨지만 우리를 위해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죠? 승천해서 지금 오셨죠? 당신은 창조 이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계실 분입니다
. 예수님은 창조 이전에도 계셨고 이 땅에 살아가는 상황 속에도 계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셔서 앞으로도 오실 분, 옛날도 지금도 앞으로도 계실 분, 우리의 죽음과 삶, 태어남과 영생, 이 모든 것은 거룩, 거룩, 거룩하신 하나님의 가슴 속에 있소이다.”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 영광입니다. 이것이 하늘 예배입니다.
오늘 우리 예배의 초점은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평화의 복음을 통해서 영광 받으옵소서.’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역사 속에서도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께서 사실은 우리한테 몸을 입고 오셔서 이 땅에 계셨는데 승천하셨다는 말은 자기가 본래 온 곳으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 예수님 말씀입니다. “나와 함께 사는 사람은 나와 똑같은 과정을 밟는다.”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볼 때, 누구에게서 나왔느냐 하면 하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이 땅에서 삽니다. 죽음까지도 삽니다. 부활까지도 삽니다. 그리고 어디로 돌아가느냐 하면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예레미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수천 년 전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다 주었는데 이제는 그런 율법 안 주겠다. 나 하나님의 율법은 이제 문서나 돌판으로 주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 속에 심어주는 말씀으로 주겠다. 마음속에 심어주겠다.” 제 마음 속에 제 가슴 속에 예수가 오셔서 성령을 통해서 오셔서 지금도 제 속에서 예수가 살아계시는 방식으로 저한테 축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제가 죽어도 제 안의 예수는 죽을 수 없습니다
. 제가 살아도 예수가 살고 몸이 죽는다고 저한테 들어오신 하나님이 어디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이 하나님 경험 없이도 몸이 죽어도 사람은 계속해서 기억으로 살아남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저한테 계시다는데 제가 죽었다고 제가 없어질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는, 저를 통해 주신 역사는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 제대로 삽시다. 똑바로 삽시다. 주님의 말씀대로 삽시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죽음 자체를 비난하고 죽음 자체를 칭송하고 죽음 자체를 가지고 논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걸 통해서 새로운 생명의 존엄성을 다시 배웁시다. 그 생명은 아름다워야 합니다. 생명은 모두에게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이런 사실을 통해서 이렇게 생각을 모두어 보았습니다.
어제 저희들이 나눔과 비움 바자회를 했습니다. 세 종단이 모여서 바자회를 했고, 어렵게 사는 가정들을 돕자며 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종단끼리 모였다고 해서 기독교와 불교가 합쳐질 수 없습니다.
같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천주교와 개신교가 합쳐질 수 없습니다. 같은 하나님이지만 종교가 다릅니다. 종교 간의 대화나 평화를 위해서 종교를 합쳐서 혼합 종교를 만들면 제대로 되는 겁니까?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기독교 방식대로 천주교 방식대로 불교 방식대로 자기 진리를 구사하면 됩니다. 합쳐서 비빔밥 만들자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을 같이 생각해 봅시다.
사랑하는 종교인 여러분, 하나님 믿는 여러분, 부처님 믿는 여러분, 지금 어머니와 아버지들이 자기 자식들 버려서 병든 할아버지, 할머니가 힘 없는 손자 손녀와 억지로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곳에 기독교 사랑이 있는 겁니까? 불교 자비가 있는 겁니까? 정신 차리고 모여서 이 사람들을 도웁시다. 각자 신념을 갖되 이런 사람들 돕는 길로 이 땅에 인간적인 아주 인간적인 작은 평화를 이루며 우리는 사랑을 실천합시다.
우리는 예수께서 주시는 사랑을 바탕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신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 반가워서 고마워서 우리는 어제 바자회에 참석했습니다. 다른 종교는 다른 종교대로 참석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이 땅에 살면서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의 의견이 달라도, 세월이 좀 바뀌었어도, 우리 마음에 이념적 기초가 달라도, 정권을 감당했느냐 안 했느냐가 달라도, 이 땅에서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가장 작은 봉사에는 손을 합칠 수 있습니다. 과거 오래 전의 한 대통령의 죽음, 어제 한 대통령의 죽음, 이런 사실을 보면서 이 땅에 복 받는 길은 하나 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나눔, 나비바다의 가치, 정치하는 사람들도 여야가 합해져서 좀 싸우더라도 이 땅의 백성들을 위해서는 합동하여 바자회 하나 하십시오. 노사간의 갈등이 있을 수 있지만 ‘노’가 어떻게 ‘사’가 되고 ‘사’가 ‘노’가 됩니까? 그러나 둘이 합하여 이 땅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 때로는 바자회 비슷한 일을 할 수 없는 것입니까?
교사와 학생, 우리 사회에 너무나도 갈등과 대결이 심합니다. 이것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마시고 각자 대결하며 다양성 속에서 살되 어느 때는 합하여 하늘 뜻을 세우는 인간의 가장 깊은 뜻을 세우는 작은 봉사에 일조할 수 없습니까? 이 땅이 복 받으려면 진실로 복 받은 나라가 되려면 정치 바자회, 경제 바자회, 가정 바자회를 하도록 할 수 있으면 각자 길을 가지만 다원 속에서의 하나됨을,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늘에서 예배드리는 예수, 그분 하시는 말씀이 “나 예수를 믿으면 이런 일에 자신있게 나가서 신앙이 돈독해지면서 이 땅에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종교의 벽도 넘고, 이념과 정치, 이해관계의 차이를 넘어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성숙한 나라 아닙니까? 성숙한 백성이 아닙니까?
신앙이 깊으면 깊을수록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어설픈 신앙을 갖기보다 깊고 성숙한 신앙을 갖자. 어설프고 알지도 못하면서 다스리는 것보다 실력있는 신앙이 되어라.” 정치도 그렇습니다. 경제도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는 모두 다 그런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성숙한 신앙으로 열심히 하나님이 주신 뜻을 이 땅에 실현하면 하나님은 영광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의 이름으로, 부활하신 그 분의 이름으로, 승천하셔서 다시 오시겠다고 하는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때를 넘어 장소를 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곳에서 실현합시다. 주님의 평화는 죽이는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평화는 죽이는 일보다 살리는 일로, 스스로 죽는 일보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로, 이렇게 한번 다시 손잡고 일어서서 이 땅에 우리 자신에게 평화를 만들어봅시다. 주님의 부탁입니다. 할 수 있습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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