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엔 어떤 예배를 드리면 좋을까 계19:1-8
[서론]
새해 두번째 주일이 되었습니다.
새해를 맞아 저는 오늘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담임목사로서 사랑하는 성도님들께 한 가지 축원을 드리고 싶습니다. 신년 새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되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해 동안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한다면 공식적으로 교회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 횟수가 200번을 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볼 때 100번이 안 되는 분은 비정상입니다. 주일 오전, 오후, 수요일 예배 참석하면 1년에 150번 이상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니다. 성숙한 성도는 (주일, 수, 금요 구역예배) 200번을 드립니다
장성한 성도는 (주, 수 금, 새벽기도회) 500번 이상예배 드립니다. 교회 같은 가정을 이루어 사는 성도는 (주,수.금,새,가정예배) 700번 이상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면 1년 내내 예배만 드리다가 끝나는 것처럼 대단하게 생각하는 분이 계실 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어떤 분이 우리 인생을 70년으로 놓고 재미있는 계산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인생을 70년으로 볼 때 20년은 직장에서 일하면서 보내고, 20년은 잠자면서 보내고, 6년은 먹고 마시면서 보내고, 7년은 쉬고 즐기면서 보내고, 3년은 남을 기다리는 것으로 보내고, 1년은 전화거는 것으로 보낸다는 것입니다. 참 그럴 듯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중 장성한 성도가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는 데 보내는 시간을 1년 반 정도로 잡았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1년 반이 별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1년 반을 채우기 위해서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1년 반을 채우기 위해서는 매주 주일, 수요일, 구역예배에 나와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만 70년 중에 1년 반이나마 예배하는 시간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어떻습니까? 이러 저러한 이유 때문에 1 주일에 1 시간조차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 드리는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다 보면 우리는 70 평생 동안 1년 반조차 제대로 예배 드리지 못한 채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아니 천국에 잘 들어갈 수나 있을지 조차 의심스럽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1년 반을 채우려고 해도 예배를 위해 지극 정성을 쏟아야 하는 것입니다.
[본론]
예배는 특권이다
사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귀찮은 의무라기 보다 구원받은 성도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럽고 보람되고 감격스러운 특권입니다. 성도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가 없는 일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배를 어떤 일보다도 앞세우고 또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계시록 19장 말씀은 우리의 예배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가를 잘 보여 줍니다. 아울러 우리는 본문 말씀에서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누가 예배를 받으시는가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예배를 받는 대상이 누구시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성 삼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절“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2절.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만유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6절.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만유를 통치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사, 자기 백성을 삼으신 하나님, 또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영원히 통치하시는 그 높으시고 크신 하나님 앞에 예배해야합니다.
2. 누가 예배를 드리는가
예배자는 누구입니까?
1절. \'하늘에 있는 허다한 무리’가 예배한다고 말씀합니다.
5절‘하나님의 종들’이 예배드린다고 합니다. 이들은 예수 믿고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배는 아무나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만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특권이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에 있습니다. 찬송하는 특권, 기도하는 특권, 말씀 듣는 특권을 우리는 누리고 있습니다.
3.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나
우리는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예배자들은 한결같이 할렐루야’로 예배했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할렐루야’라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5번) 할렐루야로 예배한다는 말은 찬양과 경배로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역시 찬양과 경배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큰 소리로 찬양했습니다(1,6절). 뿐만 아니라 그들은 엎드려 경배 했고 크게 기뻐하면서 예배했습니다(4,7절). 오늘날 하나님께 예배하는 우리의 태도 역시 이와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면 영원히 해야 할 일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지상에서 예배 드리는 것은 그 일을 미리 연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부터 우리가 누리고 사는 천국 생활의 일면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구원과 영광과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귀한 일은 없습니다. 로마서 1장 21 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에 대해 진노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뻔히 알면서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예배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그 무수한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특별히 뽑아 내어 자기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로 하여금 예배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지를 분명히 알고 1999년에는 예배드리기에 힘써야 합니다. 주일예배도 중요하지만 수요예배, 개인예배, 금요예배, 가정예배도 중요합니다.
1) 나 중심의 예배를 탈피하자
우리가 예배자로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개인적인 이해타산을 생각하고 예배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중심이 된 예배를 드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하면 내가 중심이 되는 예배를 드릴수 있습니다. 내 기분에 따라서 마음을 열기도 하고 닫아 버리기도 하고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하고 방관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마치 자기 소원을 꼭 이루는 기회인 것처럼 여기고 하나님께 욕심과 고집을 가지고 예배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지만, 인간의 욕심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이지 인간의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채우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배에 대해 ‘은혜를 받아야만 한다’라고 말하는 것도 사실 문제가 있습니다. 은혜가 예배의 전제 조건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 성도는 은혜를 전혀 못 받는 다 해도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성도는 이미 예배할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배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영광 받으셔야 할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엎드려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 시간에 은혜를 받느냐, 못 받느냐와 상관없이 우리는 정성을 다해 예배해야 합니다. 예배는 먼저 하나님과 그의 영광으로부터 출발을 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들 가운데 은혜를 조건부로 예배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령께서 그 심령을 반드시 고쳐주시기를 바랍니다.
2) 병든 예배를 드리지 말자
저는 담임 목사로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병든 예배가 되면 어쩌나 하고 늘 걱정합니다. 성경에 병든 예배가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어마어마한 성전에서 화려한 의식과 의상을 입고 예배를 드리지만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돌려버린 예배가 너무나 많지 않습니까? 이것은 2천년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라고 그런 병든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혹시 그렇게 되지는 않을까 하고 제가 염려하는 것입니다. 개인 심령이 살려면 개인의 예배가 살아야 합니다.
병든 마음-불평하는 마음,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서는 정상적인 예배가 되지 않고, 예배를 드려도 그 심령은 건강치 못합니다. 교회가 살려면 반드시 예배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배는 개인과 교회의 심장과도 같습니다. 심장이 고장나면 전신에 문제가 일어나듯이 예배가 고장나면 개인이나 교회 전체가 문제가 일어납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맛봐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력 있는 성도와 교회가 됩니다. 예배가 살아야 교회에 열매가 맺습니다.
예배가 병들면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요란하게 늘어놓는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그래도 주일과 수요일이라고 정성을 다해서 나오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2시간 이 상을 운전해서 오신 분들, 전철을 타고 오신 분도 있습니다. 그 분들에게 참 감사합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그 먼길을 달려왔음에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정성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그냥 앉았다가 허탈하게 돌아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예배가 병든 예배가 되지 않도록 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3) 마음을 묶어 드리는 예배를 드리자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우리의 마음이 따라가는 예배입니다. 쉽게 말해 마음을 담은 예배, 정성을 담은 예배라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잠언에“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달라”(잠23:26).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어떤 순서가 아니라 예배하는 우리의 정성된 마음입니다. 또 신명기 6장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요 구하십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 곧 우리의 전인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자기의 속을 들여다보는 사람만큼 무섭고 부담스러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의 깊은 곳까지 모두 통찰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 마음에도 없는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이 받으시겠습니까? 우리 마음이 엉뚱한 곳에 가 있는 것을 뻔히 아시는데 어떻게 하니님이 그 예배를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결론]
1999년에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은 성삼위 하나님께 할렐루야로 영광 돌리며 찬양 드리고 나 중심의 예배, 병든 예배, 마음에도 없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성 삼위 하나님께 마음을 묶어 바치는 예배정성을 다하는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4)준비된 예배를 드리자
우리는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림으로써 우리 예배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만 되면 우리가 특별히 색다른 은혜를 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그 예배를 기쁘게 받아주시는 그 자 체가 우리에게 엄청난 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우리의 예배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면 그것만으로도 우리 마음에 있던 모든 상처가 치유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드리는 참된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히 노력해야 할 일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1) 예배를 기다리는 예배자
준비된 예배를 드린다는 말은 예배를 사전에 준비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과연 예배를 위해 얼마나 준비하고 사모하며 기다리고 있습니까? 시편 130편 5절, 6절에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 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하도다.” 우리의 귀한 아들들이 영하 30도를 밑도는 혹한과 싸우며 최전방 휴전선 철책에서 밤새도록 경계를 서고 있지 않습니까? 밤새도록 불침번을 서는 우리 아들들이 가장 고대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침이 오는 것입니다.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추운데서 발을 동동 구르며 보초를 서며 아침을 기다리는 그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하겠습니까?
예배를 대하는 우리의 심정 역시 그와 같아야 합니다. 파수꾼의 간절함으로 하나님을 사모하고 예배를 고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배자의 마음입니다. 요즘 끼니를 때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하루 세끼를 굶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얼마나 밥이 먹고 싶겠습니까? 누가 따뜻한 밥을 준다고 하면 얼마나 기다려지겠습니까? 예배를 대하는 우리의 심정이 이래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것을 기다리고 바라는 사람은 미리 마음을 준비합니다. “아, 주일이 다가 오는구나. 수요일이 다가오는구나. 금요일이 오는구나.-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려야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달려가야지. 예배를 통해서 시온산 대로를 향해 나는 달려가야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면서 기뻐 춤추고 싶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힘입게 되면 내 마음의 상처나 염려와 걱정이 씻은 듯이 사라지겠지. 아, 주일이 어서 빨리 왔으면 좋겠다.”수요일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우리가 준비된 예배를 드린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예배를 위해 기도하는 예배자
하나님을 이처럼 바라고 기다리는 자는 반드시 예배를 위해 기도합니다.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해서 하던 일을 신속히 마칩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 예배에 참석하기 전에 예배를 위해 얼마나 기도했습니까? 금년에는 예배 중보 기도팀을 만들려고 합니다. 모든 공 예배를 위해 기도하려고 합니다. 예배순서를 맡은 분들을 위해 기도하려고 합니다. 구역예배 드릴 때 에도 이틀 후 우리가 함께 드릴 주일 예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의 골방에서도 예배를 위해 기도해야 됩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사모하듯이 예배를 사모하고 배고픈 자가 밥을 기다리듯이 예배시간에 달려나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하나님이 은혜 주실 줄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준비된 예배자가 됩시다.
찬양에 힘쓰는 예배자
찬양에 힘쓰자는 것입니다. 요즘은 지성보다 감성을 앞세우는 시대입니다. 30대 이 하에 속하는 우리 아들, 딸들을 보면 빵이 없이는 살아도 노래가 없이는 살 수 없다고까지 말하는 이상한 자들입니다. 당연합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풍류를 좋아했습니다. 열린 음악회가 성공하고, 노래방이 우후죽순처럼 곳곳에 생겨나고, 집집마다 자녀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느라고 허리띠를 졸라매며 과외를 시키고 법석들을 떠는 이 모든 일들이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음악에 대한 이와 같은 집착은 과거보다 요즘이 훨씬 더 한 것 같습니다. 잘못 된 극단은 피해야겠지만 우리가 이처럼 음악의 가치와 위력을 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신구약을 보면 위대한 예배자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예배자를 들라 면 저는 다윗을 꼽을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한마디로 예배를 잘 하는 사람입니 다. 그의 별명은 노래 잘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면 다른 사람이 볼 때 미쳤다고 할 정도로 힘을 다해 노래하고 춤을 추며 악기를 연주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예배는 곧 찬양이었습니다. 찬양이 예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는 신약시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을 보십시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 고.” 에베소서 5장 19절에도 똑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저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 것인 지에 대해서 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 세 가지 모두 찬양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사실입니다. 찬양을 굳이 세 가지 다른 말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신약시대 예배에서 찬양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든 신약시대든 예배에 있어 찬양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저는 노래 가사에 대해서는 거룩한 가사가 있고 속된 가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중생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기도하면서 지은 가사라면 그것은 거룩한 가사입니다. 은혜가 되는 가사지요. 그리고 성경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부르는 곡이면 거룩한 가사입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곡에 대해서는 저는 거룩한 곡과 속 된 곡이 어느 정도로 구별될 수 있는 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초대 교회가 시와 찬양과 신령한 노래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것을 이미 확인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불렀던 찬양의 곡들이 전문적인 음악가가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작곡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부른 찬양의 곡들은 대부분 어디서 왔을까요? 평소에 세상에서 많이 불렀던 곡 중에서 마음 에 드는 곡들을 선택해서 거기에 성경의 가사를 붙이거나 거룩한 기도를 붙여 가지고 부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찬양의 곡에 대해 하나님께 합당한 곡이냐 아니면 세속적인 곡이냐 하고 지나치게 따지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제가 사탄의 곡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사탄의 무리들이 부르는 곡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문적 인 음악가들이 구별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곡들은 우리가 거기에 성경의 가사, 아니면 신앙의 고백을 붙이기만 하면 우리 마음에 와 닿는 아름다운 찬양이 될 수 있습니 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라는 가사를 붙이면 세속 곡이지만 “예수님 예수님...”이 라는 신앙고백을 담는다면 그 노래는 거룩한 곡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찬양의 곡이란 옷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카톨릭에서는 성직자들만 입을 수 있는 옷이 있습니다. 소위 ‘성복’이라고 하는 예복입니다. 평신도들은 절대 그 옷을 입을 수 없습니 다. 그래서 평신도들은 세상 사람들이 입는 옷 그대로 입고 다닙니다. 이 옷은 유행에 따라 서 바뀌고 시대에 따라서 바뀝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평신도들이 입고 다니는 옷을 거 룩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교회 올 때 그 옷들은 모두 벗어 놓고 다른 거룩한 옷을 입고와야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노래의 곡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면 그것 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찬송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예배를 드리시는 동안 예배가 벌써 달라졌다는 것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예 배에서 특별히 찬송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충분히 아셨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찬송을 많이 부릅시다. 찬송을 힘있게 부릅시다. 마음이 열릴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 찬송을 부릅시다. 힘있게 부릅시다. 마음이 열릴 것입니다. 찬송 부르는 자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어두운 지하 감옥에 갇혔 을 때 밤중인데도 불구하고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 까? 손에 있는 쇠사슬이 풀어져 내리고 옥문이 열리고 자기를 때리던 간수가 와서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놀라운 일을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저는 오늘날에도 찬양이 살아 있는 예배 에는 이와 같은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리라 분명히 믿습니다. 우리 모두 찬송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우리의 손발에 있는 염려의 쇠사슬과 불안의 쇠사슬, 공포의 쇠사슬이 다 풀어져 내리고 옥문이 열리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줄을 굳게 믿습니다.
예배를 방해하는 것들을 처리하라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부탁 드리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마음을 담아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를 원한다면 예배를 방해하는 것들은 과감하게 처리하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예배를 방해하는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각이 예배를 방해할 수 있습니다. 자주 자각하시는 분들은 잘 들으십시오. 지각은 나쁜 습관입니다. 나쁜 습관을 고치는 것은 간단합니다. 만일 10분 지각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으면 10분 빨리 출발하면 됩니다. 물론 주차 때문에 여러분들의 애로가 많을 줄 압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어쩔 수 없다손 치더 라도 뻔히 지각할 줄 알면서도 매일 꼭 같은 시간에 출발한다는 것은 정말 문제가 있습니 다. 하나님이 그 예배를 과연 어떻게 보실까요? 예배에 지각하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옷매무새도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청바지를 입고 올 수도 있고 실내화를 끌고 올 수도 있겠지만 우리 동양 사람은 정서가 다릅니다. 그러므로 정성을 다해 옷매무새를 준비하는 것도 예배를 방해하는 것을 처리하는 한 방법입니다. 또 예배 중 에 핸드폰이나 삐삐 소리가 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핸드폰이나 삐삐가 예배를 방해하 는 거라면 차라리 집에 두고 오든지, 꺼 놓으십시오. 이 바쁘고 복잡한 세상에 그렇게 노예 가 되어서 살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좀 자유하자구요. 법정에서 ‘삐삐’하면 백 만원 이 하의 벌금을 물든지 아니면 20일 이내의 구류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와서 예배 드리는 사람이 누구한테서 전화 오지 않을까 하고 신경 쓰고 앉았다면 하나님의 마음 이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이외에도 많을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예배를 방해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과감하게 처리합시다.
사랑 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마음을 담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이사야처럼 하나 님의 보좌와 그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담아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의 음성 을 들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 영혼의 귀에다 은은하게 속삭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 고 그 자비로우신 품안에 안겨서 하나님이 주시는 신비로운 행복을 맛볼 수 있으리라 믿습 니다. 우리가 예배를 하나님께 바로 드리기만 하면 성령의 능력과 역사와 치유하심을 체험 할 수 있으리라 분명히 확신합니다. 예배를 바로 드립시다. 하나님 앞에 바로 나아갑시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빈 마음을 가지고 섭시다. 모든 것을 주께 드리는 자세로 하나님의 이 름을 높입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세상의 수고와 슬픔으로 상처 입은 우리의 마음을 씻어 주시고, 싸매어 주시고, 하루하루를 힘있게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 두 금년 한 해 동안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진정한 예배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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