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평생의 예배/레1:1-9/2005-01-10

내 평생의 예배/레1:1-9/2005-01-10

내 평생의 예배
레1:1-9





저는 목사란 직이 헌신의 열매인 줄만 알았었습니다. 그러나 목사의 직을 감당하면서 제가 느끼고 깨닫는 것은 목사란 헌신을 한 사람이 얻게 되는 영광의 직분이 아니라 새로운 헌신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직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목사란 헌신의 종착점이 아닌, 헌신의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 순간부터 제게는 늘 견딜 수 없는 도전이 있어 왔고, 그로인한 고민은 앞으로도 저와 제 가족의 삶에 끊임없이 새로운 헌신의 방향을 제시해 줄 것입니다. 지금은 아주 작은 일에 적은 헌신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큰 헌신과 더 깊은 헌신을 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헌신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면서 저는 자연히 “하나님은 어떤 헌신을 기대하시며 무엇을 헌신이라고 여기실까?” 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볼수록 깨닫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큰일을 요구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요구할 것이라 생각하고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을 헌신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제나 일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세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성경의 많은 곳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헌신이란 내 일을 하다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세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삶의 자세를 우리에게 가장 상세히 가르쳐 주는 성경은 바로 레위기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레위기는 제사의 방법을 알려주는 성경입니다. 제사의 아주 상세한 부분까지 알려주는 그런 성경이기에 많은 사람들은 제사의 방법과 삶의 자세가 어떻게 연결이 될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하시겠지만 하나님은 레위기의 제사 방법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성경 중에 가장 재미없다고 말하는 그 레위기로 함께 여행을 떠나고 싶은 것입니다.



대게의 모든 종교들은 고등종교나 하등종교 할 것 없이 그 나름대로 제사의 의식이 있는데, 그 제사의 의식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 의식이 얼마나 복잡하고 많은 정성을 요하는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유교의 제사의식만 봐도 어동육서(魚東肉西) 라든지, 홍동백서(紅東白西), 또는 조율이시(棗栗梨柹) 등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제사상의 의식을 정확하게 지켜 정성을 다 하려는 것이 유교의 제사정신이라는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무당이 굿을 준비하는 것도, 불교 사찰의 불공도 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정성과 의식의 절차 면에서는 모두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제사라고 할 수 있는 예배의 의식과 그 예배에 참여하는 우리들의 마음가짐을 놓고 유교의 제사와 한 번 비교해 보면 상대적으로 많은 정성을 쏟고 있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 때문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게 됩니다. 이것은 목사인 저의 직업병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우리의 예배가 이렇게 편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우리의 이 제사가 참여자들로 하여금 부담이 되지 않는 그런 쉬운 제사는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기독교의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와 예배는 하나님께서 남다른 예식과 정성을 우리에게 요구하셨고 우리 기독교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옛날부터 무던히도 애를 써 왔었습니다.

레위기 1장부터 27장까지는 제사에 있어서 그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요구가 나와 있는데, 화제, 번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등 많은 종류의 제사 가운데는 그 방법에 있어서 몇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의 방법을 알려주면서 그 제물에 대해서 ① 피를 쏟고 ② 가죽을 벗기고 ③ 각을 뜨고 ④ 불 위에 다 태우라 명령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셨던 제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만든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혹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너무 잔인하다”, “사랑과 자비의 종교라고 하면서 어찌 이렇게 무참히 동물을 죽이도록 하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정말 잔인하신가? 대답은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잔인하십니다. 제물을 드리는 방법에 대해 정말로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면 하나님은 진정 잔인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반대의 논리로, 하나님께서 잔인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하나님은 이 제사의 방법을 통해 뭔가 우리에게 얘기하고 싶으신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가장 훌륭한 교사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안다면, 이 제사의 방법을 통해 하나님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으신 것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제사의 방법에 있어서 마지막 공통점을 유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쳐진 제물의 전부를 하나도 남김없이 단 위에서 불사르라는 것입니다. 그 전부를 하나도 남김없이 불사를 때 하나님은 그때서야 비로소 말씀하십니다.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이미 다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또 다 불태우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 즉 아름다운 제물이 되기 위해 전부를 불살라야 한다는 것,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참 뜻이 무엇인가? 그것은 죽음입니다. 완벽한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그것은 여러 차례 나오고 있습니다.

창4:3-4 에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나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더니......

형제인 가인과 아벨이 정성스럽게 드린 이 제사에서 하나님은 둘의 제물을 다 똑같이 받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동생인 아벨의 제사만을 기쁘시게 받았다 했습니다. 결국 가인은 분해서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이게 됩니다.

여러분 이 제사에서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은 아벨이 그 형 가인보다 믿음이 좋았다고 생각하며 바로 그 믿음 때문에 제사에서 차이가 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차이라는 것에 대해 성경 히11:4 을 그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러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 의해서 <믿음>이라는 단어에 관심을 많이 갖습니다. 아벨이 가인보다 더 믿음이 좋았다고 말을 하고 그 믿음의 차이로 인해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께로부터 거부당했다고 막연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누구의 믿음이 좋은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그들의 믿음의 차이를 얘기해 주는 대목은 없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차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뿐입니다. 따라서 제사의 차이는 믿음의 차이에 의해 구별된 것이 결코 아라는 것입니다.

혹자는 아벨이 양을 드렸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 했는데, 하나님은 양만 좋아하시는 분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양을 드린 것이 믿음이라면 땅의 소산을 드린 것은 믿음이 아닙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있는 양 중에서 한 마리 잡아 하나님께 드리는 것 보다, 일년 동안 정성을 다 해 농사를 지어 얻은 소산을 드리는 것이 어떻게 보면 더 깊은 정성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받고 안 받고, 그 차이는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히11:4의 말씀을 자세히 보면, <믿음>이라는 단어 뒤에 <예물>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이란 단어보다 제물이라고 하는 단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즉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께로부터 더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은 그의 마음의 믿음이 아니라 그 드려진 <예물>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해 증거하심이라


그 예물의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히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피를 흘려야 했다는 것입니다. 피를 흘려야 된다는 것, 다 불태워야 된다는 말과 같은 뜻인데, 이것은 완전히 죽인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기뻐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은 무엇인가? 우리가 드려야 할 제사에 대한 설명에 모든 귀결은 바로 ‘죽는 것’ 입니다. 그것도 철저히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그 제물에 대한 결론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피를 흘리게 하고, 다 태워서 완전히 죽여야 하며, 그럴 때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향기롭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신약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떻게 보면 구약시대의 가르침은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또 이런 구약의 제사의 가르침은 은혜의 시대를 사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무의미한 옛날의 가르침정도로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제사를 드리지 않는 요즘에는 정말로 의미가 없는 가르침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이라고 한다면 피를 흘리고 다 불태워 드리는 것, 즉 나를 온전히 죽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매 주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은 무엇을 근거로 해서 우리의 예배를 흠향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제물 된 우리의 자세에 의한 것입니다.

일본에서의 목회기간에 장례를 많이 치렀습니다. 일본의 장례문화가 한국과 많이 다른 것은 일본에서는 전부 화장을 한다는 것입니다. 화장을 하고 난 뒤 그 다 타고 난 뼈들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거기에서 사람의 말과 생각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거기에는 자신의 생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말이나 욕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가치관이나 자기의 주장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침묵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자신의 존재는 온데 간 데 없고 그저 타다 만 앙상한 뼈 조각만 있을 따름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에게 그런 자세를 요구하십니다. 나를 죽이되 철저히 죽이는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인정을 잘 해 주실지 안 해 주실 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제 뜻을 왠만해서는 잘 말하지 않는 스타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예 생각이 없는 사람 취급을 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좀 기분은 나쁘지만 분명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저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저도 어떤 문제에 대한 판단이 있고 시각이 있고, 해결을 위한 생각이 있는 사람입니다. 제 인생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것이 있고 누리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입니다.
저도 넓은 집에 살고 싶고, 좋은 차를 타고 싶습니다.
목사라도 가난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돈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 남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받고 싶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살고 싶고
남은 여생 여행을 하며, 좋아하는 일을 하며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또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게 되는지도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목사는 헌신의 완성이 아니라 헌신의 출발이라는 것이 자꾸만 저를 괴롭게 합니다. 그러한 나의 생각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꼭 낮아져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꼭 가난해져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낮아져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높아지려는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생각이 내 마음에 있는 한 하나님의 생각이 자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죽여야 합니다. 아직도 우리가 감격스러운 예배를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도 내 안에 내가 너무 강하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피를 다 쏟을 때만이 참 제사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나를 죽일 때만이 참 예배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나를 죽일 때만이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나를 전부 불태울 때만이 옆에 앉아 있는 교우들이 진정 형제와 자매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나를 철저하게 부인할 때만이 내가 교회에서 하는 봉사가 기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피를 흘려 철저히 죽는 나의 모습이 있어야, 그때서야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십자가의 그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죽여야 합니다. 더 철저히 태워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아직 완성된 교회가 아닙니다. 높은뜻 숭의교회는 아직 개인의 생각이 많은 교회입니다. 각자의 생각이 너무나도 많은 교회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생각이 아직도 많이 있다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교회가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해 나갈 때,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자세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한 번씩 더 죽고, 한 번씩 더 헌신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향기가 되기 위해서는 목회자들이 먼저 한 번 더 죽어야 합니다. 교인들이 한 번 더 헌신해야 합니다.



1948년에 대구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납니다. 잘 알다시피 그가 태어난 지 두 해 만에 6.25 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그 가족도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올라온 그들은 아버지가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나갔지만 점점 살림이 여의치 못하게 되자 서울 남대문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던 아들이 학교를 중퇴하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거리로 뛰쳐나갑니다. 구걸과 신문팔이와 거리의 가판생활을 하다가 17살 때 평화시장의 삼일사에 취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취직이 가족의 생계에 도움이 되지 못할 정도로 하루 14시간의 노동에 매우 적은 월급 (당시 고급호텔의 커피 한 잔 값)이 손에 쥐어졌고 그는 한국의 노동현실을 바로 보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1970년 11월 13일 그 노동의 현장을 고발하기 위해 온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분신자살을 하게 됩니다. 그 청년이 바로 그 유명한 전태일이라는 청년입니다. 한국의 노동운동의 시발점이 된 날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항상 의식 있는 대학생들이 그 곳으로 몰려가게 되는데 그 중 서울대 법대를 막 졸업한 한 법학도가 있었습니다. 이 학생은 전태일의 죽음을 정리해 주기 위해 그 자리에 갔다가 그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그 일기장을 읽게 됩니다. 일기를 읽어 내려가다가 이 법학도는 전태일이 쓴 한 구절에 숨이 멋습니다.

“내게 대학생 친구가 한 명 만이라도 있었더라면...... 그 어려운 노동법에 나오는 한자를 빨리 알 수 있었을텐데....”

이 글을 접하고 난 후 그 청년은 자신의 삶을 전태일을 위해 살아야겠다 다집하고 노동운동을 위해, 민주화를 위해 온몸을 바치게 됩니다. 노동운동,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계속 하다가 1971년 사법연수원에 있을 때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1년 6월), 출소 후 민청학련 사건으로 또 구속(6년). 그 후 1980년 복권이 되면서 1982년이 되서야 변호사생활을 하게 되는데, 인권변호를 하며 닌주화를 위한 삶을 살다가 1990년, 5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가 바로 <전태일평전>.의 저자인 조영래 변호사입니다.

저는 여기서 전태일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전태일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시대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저는 전태일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전태일과 조영래의 만남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조영래는 생전에 전태일의 얼굴을 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글 한 구절 때문에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전태일을 위해 쓰게됩니다. 그도 변호사로 편안하고 존경받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그런 마음을 버릴 때 바로 전태일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이었고, 자신의 가치관을 버렸을 때 전태일의 가치관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와의 만남 속에 그 분의 마음을 읽고 그 삶을 따르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들어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것은 내 의지와 내 생각을 비우는 것입니다. 즉, 나를 철저히 죽일 때, 그 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비로소 들어오실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헌신이 무엇입니까? 일입니까? 아닙니다. 삶의 자세입니다. 나를 죽이고, 내 성격과 내 고집과 내 경험과 내 지식과 내 가치관을 버릴 때, 그때야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를 받아 주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내 평생 드려야 할 예배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날마다 나를 죽이고 내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간직하는 일일 것입니다. 나를 죽이고 내 안에 그리스도 예수를 간직할 때 하나님은 비로소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설교 후 기도 〉

하나님 아버지
너무 많은 분야에서 나를 죽이지 못했습니다.
거진 삶의 모든 기간동안 나만을 내세워 왔습니다.
대접받기를 바랬고,
나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바라 봤으며,
나의 지식으로 교회를 판단했고,
나의 경험으로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그 교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얼마나 더 낮아져야 합니까?
얼마나 더 나를 부인해야 합니까?
피 흘리기까지, 모든 부분을 전부 태우기까지
나를 죽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죽여야 향기로운 제물 되는 줄 믿사오니,
나를 죽인 후에 진정한 십자가의 기쁨과 참된 부활의 감격을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평생 그런 예배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