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받은 한 여인의 예배 눅7:36-50
\\\"고마우신 하나님, 이 귀한 주일에 주님의 사랑을 나눌수 있도록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 고요히 찾아오셔서 우리를 안아주시는 사랑을 체험하게 하옵소서. 주님을 정말 사랑했기에 주님께 평생의 옥합을 깨트렸던 사랑을, 그리고 그 발에 입 맞추었던 사랑을 이 주일에 체험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영이 우리가운데 충만하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말씀으로 들어감(Enter the Word)
이번 주 저는 결혼 9주년을 맞이했어요. 미국이야 이혼율이 높아 2년만 지나면 \\\"너 아직도 같이 사니\\\"라고 한다는데 여전히 저와 아내는 신혼 같은 마음입니다. 결혼 9주년을 맞이하면서 마음속으로 참 미안했어요. 선물도 사주지 못하는 나의 상황이지만 그러면서도 저는 좀 뻔뻔하게 아내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을 9년전 신혼 처음보다 지금 당신을 더 사랑해\\\". 제 마음이지요. 그리고 이 말에는 저의 미안한 마음도 담겨있었습니다. 저의 사모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의 마음은 참으로 우리 사모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연세가 들었다고 깨가 쏟아지는 신혼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데 저는 이런 말을 아주 싫어합니다. \\\"지금은 그렇지! 나도 그랬어, 하지만 너도 좀더 살아봐라. 그렇게 죽자살자 하는 것도 3년이면 끝나, 그렇게 좋아하는 마음이 10년 갈 것 같니, 20년을 갈 것 같니? 여자는 남자는 초장부터 잡아야해\\\" 별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아요, 도대체 이것이 할 말인가요? 실제 이런 말을 자신이 꺼내지 않는다 할지라도 오랫동안 계속 사랑이 이어진다는 것이 참 힘들다는 것을 많은 사람이 공감합니다. 그런데 저의 마음은 이런 마음이 있어요. \\\"아니 정말 사랑이란 것은 3년 가는 거야? 신혼은 3년이면 다 끝나는 것인가\\\" \\\"아니 10년을 20년을 30년을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사랑이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신앙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제 초신자인데, 그리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이런 사람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합니다. \\\"응 나도 3년전에 나도 10년전에는 그렇게 열심히 믿었어. 나도 뜨겁게 주님을 위해서 살았어. 하지만 너무 크게 교회 생활과 신앙생활에 빠지지 마! 상처받아! 목사님 너무 좋아하지마, 상처받아! 성도들에게 너무 사랑을 주지마, 자네가 상처받아!\\\" 목사는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를 알고 있어요. 교회를 10년 20년 다니면서 볼 것 못볼꺼 다 보았다는 것이지요. 교인들 나쁜 것 다 보고 목사 나쁜 것 다 보고, 나도 다 보았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자신의 신앙관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나는 미지근한 신앙이요, 냉냉한 신앙이요, 나는 사랑도 없는 신앙이라는 것이지요. 신앙생활 하면서 처세술만 늘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할 소리인가요? 자랑할 것이 없어서 그런 것을 자랑합니까? .
첫사랑을 잃어버리는 사람을 보면 저는 갈증이 있습니다. \\\"하나님, 꼭 저래야 하는거에요? 3년전 10년전, 그 하나님은 사랑했던 마음, 그 뜨거운 첫사랑을 계속 유지하면 안 되는 거예요? 아니 첫사랑보다 더 사랑하는 마음, 더 풍성한 사랑을 주님께 드리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 오래 신앙생활하면 다 저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 난 언제 저렇게 미지근한 믿음이 되는거에요. 나는 언제 저런 냉냉한 마음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 나도 저렇게 되는 것입니까? 믿음이라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저렇게 형식적으로 사는 것입니까? 저런 것이 하나님 믿는 것인가요?\\\" 목사의 질문이요 고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자들은 첫사랑보다 더 뜨거운 사랑을 할 수 있어요. 과거 예수님을 사랑했던 그 마음보다 더 깊고 깊은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2년전 맨몸으로 개척했던 나의 마음이 저는 나의 일생에서 가장 뜨거운 마음인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런게 아니더라구요. 가면 갈수록 나의 마음은 더 뜨거워져요. 믿음을 갖지 않은 영혼을 보면 너무 불쌍하기만 합니다. 복음을 모르는 자들을 보면 너무 불쌍합니다. 저는 2년전 개척했던 그 뜨거운 마음보다 지금이 더 뜨겁다고 저 자신을 바라봅니다. 과거 주님과 친밀했던 것보다 더욱 친밀해요. 지금도 하나님의 대한 갈증이 더 강하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주님의 귀한 영성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사랑이 강해지고, 영성이 깊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과의 Intimacy라는 것입니다. 친밀감이라는 거예요. 주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주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욱 더 Intimacy, 친밀감으로 들어갑니다. 첫사랑보다 더 뜨거운 사랑을 합니다. 이거 아세요? 믿음 생활하면 할수록 주님의 신비에 더욱 들어갑니다. 오늘 참여한 성도가운데 10년 믿어도 마음이 냉냉합니까? 미지근합니까? 주님을 향한 친밀감, Intimacy가 사라졌음을 고백해야 하는 거예요.
사람은 친밀하게 살려고 하는 것에 항상 몸과 마음이 가게 되어 있어요. 당구를 친밀하게 사귀면 모든 것이 다 쓰리쿠션으로 보인데요. 당구와 매일 친하면서 사는 사람이 한번은 교회에 나왔는데 목사님의 얼굴이 힌공으로 보이고 성도들의 얼굴이 빨간 공 파랑공 노란 공으로 보이더래요. 어떤 방향으로 볼을 쳐야 할지 머릿속에 그것 그리고 있데요. 왜 그럴까요? 이 사람은 당구와 친밀하게 되니까 당연히 그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예배를 안 드리고 맨날 골프만 치러 갔데요. 하루는 교회에 나온거에요. 그래서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하려고 하니까 손이 기도하는 모습이 되지 않고 골프 잡는 손(골프 쳐본 사람은 다 알거에요) 이렇게 된거에요. 왜 그럴까요? 골프와 친밀하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바둑을 좋아해서 교회 나오니까 나이 드신 머리 힛긋 힛긋 한 분은 다 힌돌이고 젊은 사람의 검은머리들은 다 검은 돌로 보이더랍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바로 누구와 친밀하게 지내는 가가 문제입니다.
왜 우리는 주님과의 사랑이 식어졌다고 말합니까? 왜 나는 냉냉하다고 말합니까?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누구와 친밀하게 지내는가에 그 문제를 찾아볼 수가 있어요. 여러분, 주님과 친밀하게 지내면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기 원하는 마음이 되어요. 하지만 세상과 친밀하면 교회에 나와서도 나가면 또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하고 친밀하게 지냈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내일이 보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목사님이 말하는데 교회에 와서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 약효가 예배 끝나고 돌아갈 때 15분동안만 지속된다고 말하데요. 난 무슨 말인가 했더니 돌아가면서 다시 옛 모습으로 간다는 거예요. 여러분, 15분만이 아니라 일주일 내내, 아니 평생 주님과 친밀하게 지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간절히 원해요.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예배를 참여하면서 한가지에 초점을 맞추는데 바로 주님과 친밀해 져야 합니다. 예배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주일만이 아니라 내일도 모래도 그리고 끝까지 더욱 주님과 Intimacy해야 합니다. 친밀해 져야 합니다. 친밀감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예배입니다. 예배는 영혼의 갈증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주님과 Intimacy가 더 가까워 지는거에요. 예배를 통하여 주님과 사귐이 있는거에요. 그래서 온 마음속에 이런 기도를 합니다. \\\"주님 내가 10년이 흐른 후에 나의 주님 사랑하는 마음이 지금보다 더 친밀해 지길 원합니다. 주님과 더욱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주님, 제가 예배에 목숨을 걸꺼에요, 주님 내 마음과 뜻을 다해서 주님께 예배드릴게요\\\"
지난주도 예배드렸습니다. 2주전에도 한달 전에도, 일년 전에도, 5년 10년전에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마음속에 어떤 마음이 듭니까? 사람들은 말합니다. 결혼하면 3년까지는 노력하지 않아도 사랑한데요, 왜요? 너무 좋으니까? 그러나 3년이 지나면 사랑이 식어진다나요! 왜요? 3년 간 볼 것 못 볼 것 다 보았다는 것이지요. 사랑이 3년째부터 식는다나요! 그렇다 치면 그러면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합니까? 3년 이후부터는 어떻게 사랑합니까? 그때는 사랑하면서, 사랑을 노력하면서, 힘쓰면서 배우면서 사랑하는 거예요. 사랑은 내가 주는 만큼 사랑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배우는 것만큼 사랑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만큼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을 저는 믿습니다. 주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이 3년전의 그냥 좋았던, 그저 예배만 드려도 좋았던 것이었다면 지금은 내가 교회 경력도 있고, 예배경력도 있고 뭐 지식도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노력하는 것입니다. 힘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잘 아시지요, 내가 예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가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것을요. 이것이 무엇입니까?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애쓴다는 마음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힘쓰는 것입니다. 노력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려는 몸부림이 예배에 있는거에요. 저와 여러분들에게 예배를 사랑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가 가장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배를 사랑하고 예배에 목숨거는 성도들이 되길 원합니다.
어떤 분은 말해요. \\\"목사님, 난 저 사람 도저히 사랑하지 못해요. 우리 남편 도저히 사랑하지 못해요. 우리 아내 내 도저히 사랑할 수 없어요. 난 죽어도 못해요.\\\" 이렇게 말하는 분이 있어요. 여러분, 사랑이 무엇입니까? 말을 그대로 생각해보면 사랑 못하니까 사랑하라는 것 아닌가요?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 아닌가요? 내가 노력하지도 않고 사랑하는 것 그게 무슨 사랑입니까? 내가 가만히 있어도 사랑하는 것, 남들도 다 하는 것 그게 정말 사랑입니까? 아니에요.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려는 몸부림인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주님의 계명이 정확히 맞아요. \\\"하나님을 네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서 사랑하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라는 명령형입니다. 이 세상 사람이 다 예수님을 몸과 마음으로 뜻으로 사랑 못하니까 \\\"너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내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라.\\\" 내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니까 사랑하라는 거예요.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왜요? 사랑 못하니까 노력하면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힘쓰면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애쓰라는 것입니다.
우리 생애에 가장 고귀한 것은 사랑이고 생애 마지막까지 남을 수 있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우리 인간이 죽는 것을 두려워 하지만 죽는 것 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한번도 살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살아도 한번도 사랑해 보지 못하고 사는 것에요. 에릭 프롬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죽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한번도 태어나지 못한 것이다.\\\" 태어나 보지도 못하는 것, 주의 사랑으로 태어나 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을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교회에 나와서도 주님의 사랑 안에서 태어나 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태어나는 거예요.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대화함(Engage the Word)
오늘 성경본문은 한 인간이 예수님께 보여주었던 가장 아름다운 Love Story, 사랑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말씀은 오늘 본문에도 나오지만 마가복음에도 요한복음에도 나와요. 그만큼 중요한 사건입니다. 오늘 사건이 보시면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러 가셨습니다. 그리고 일이 벌어져요. 바로 한 보잘 것 없는 여자 한 분이 예수님의 뒤편에서 와서 하염없이 눈물을 뚝뚝 흘립니다. 그 여인의 눈물이 어디로 떨어지는가 하면 바로 예수님의 발에 뚝뚝 떨어집니다. 예수님의 발은 금새 그 여인의 눈물로 졌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무릎을 굻습니다. 그리고 몸을 숙여 자기의 머리를 가지고 예수님의 발을 씻겨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춥니다. 한번도 아니고 수도 없이 입을 마쳐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자신의 전 재산과 같은 향유를 깨트려서 예수님의 발을 부어요.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요. 온 방이 향유로 아름다운 향기가 가득합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이 여인이 누굴까요? 성경학자들은 창기와 같이 몸을 팔아서 생활하면서 사람들에게 돌을 맞을뻔 했던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그 말씀을 기억하시는 지요? 창기였던 여인이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게되었을 때 주님이 그곳에서 막아주었던 여인입니다. 이 여인이 눈물 콧물을 주님 앞에 흘리는 거예요. 무릎을 꿇고 몸을 숙여 자신의 귀한 옥합을 깨는 사건이에요. 이 옥합을 세상 돈으로 환산하면 하루에 노동자들이 벌어들이는 돈을 1년치를 모아야 하는 엄청난 돈입니다. 이 불쌍한 여인이, 이 가난한 여인이 자신의 모든 재산을 그 값진 재산을 예수님께 솥아 부은거에요. 왜 그렇게 했는가? 왜 이 여인이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무엇 때문에? 딱 한가지 사실입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이 너무 감사해서 그리고 주님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너무 사랑했기에\\\"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너무나 사랑했기에 자신이 드릴 수 있는 것을 다해서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귀한 사랑에 주님이 이 여인의 삶을 칭찬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런 것 아세요. 사람은 사랑을 받을 때 사랑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요! 이 사실을 아세요?
이 여인은 사랑이란 것을 몰랐던 여인이에요. 성경에 보시면 이 여인은 몸을 팔아 살았어요. 어느 남자들도 이 여자를 사랑해 주지 않았어요. 다만 육체를 요구할 때만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그 충동이 끝나면 여자의 싸늘한 몸을 느끼면 돈 몇 푼을 던져주고 떠났어요. 한번도 이 여인의 존재가치에 대해서는 한번도 인정해 주지 않았어요. 이 여인은 생각했을거에요. \\\"나 같은 여자를 누가 사랑해!\\\" 자신을 한탄했어요.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해서 아주 낮은 생각을 하면서 살았어요. 바로 이런 여자에게 창기라는 이름 하나로 여인을 향해 돌을 집었어요. 그리고 돌로 창기같은 여자라고 하면서 치려고 했어요. 죽이려고 했어요. 바로 이때 예수님이 나타나 이 여인을 보호해 주었어요. 이 여인을 존귀히 여겨 주셨어요. 이 여인을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 여인이 바로 주님의 사랑을 느낀 거예요. 예수님의 사랑, 세상사람은 나를 욕하고 버릴지라도 주님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이 여인은 주님의 사랑을 받은 그 날 이후부터 하나 하나 삶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우리는 읽으면서 오늘 말씀이 굉장히 중요한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옥합을 깨트리고 주님의 발 앞에 눈물 콧물을 흘렸던 이 여인의 행적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이 있는 바로 그 전날 가장 중요한 일을 했다는 거예요.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4장 8-9절에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장사를 미리 준비한 여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놀라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몬의 집에 함께 했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왜 이 여인이 그렇게 예수님의 뒤편에 와서 우는지를 몰랐어요. 그리고 왜 그렇게 귀중한 옥합을 깨트리는 지도 몰랐어요. 다만 돈으로 계산했습니다. 마음속에는 남녀 칠세 부동석인데, 유대인의 사회에도 엄격하게 지키는 규율에서 벗어난 이 여인이 행동을 나무랍니다.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자신의 머리고 예수님의 발을 씻기십니다. 자신의 귀한 향유옥합을 깨트리는 거예요. 주님의 머리에 발에 발라줍니다. 아마도 그때 대부분이 다 남자였을거에요. 남자들은 몰랐어요. 아니 남자들은 몰라요? 왜 이 여자가 이런 사랑을 하는 지를요! 도대체 예수님과 이 여자와 무슨 관계가 있길래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의 발을 씻기고 있는 지를요! 주님의 친밀한 관계를 모르는 것입니다.
왜 이 여인은 이런 행동을 했습니까? 주님을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 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자신의 육체만을 원했지만 주님은 그 아픔들을 싸매 주었고 감싸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려 했지만 주님은 돌을 막아 주었습니다. 남자들은 몰라요, 여자가 그것도 창녀 같은 여자가 주님 앞에 와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요? 알량한 지식으로 그것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은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이 그 여인을 막지 않았어요. 왜 예수님이 막지 않았는지를 그들은 몰랐어요? 교회에 나와서 어떤 성도님은 통곡하며 웁니다. 수요예배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주님 앞에 웁니다. 기도하는 시간 흐느낍니다. 사람들은 몰라요? 목사도 모를 수 있어요, 하지만 주님은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주님 앞에 나와서 울고 있는 가를요! 주님의 위로가 젖은 심령, 눈물의 심령에게 임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이 옥합을 깬 여인에게 크게 칭찬해 주셨습니다. 한번 이 여인의 행동을 유심히 머릿속에 그리십시오. 말씀에 보니까 주님 발 앞에 엎드려서 자신의 머리로 주님의 발을 씻깁니다. 그리고 그것에 그치지 않아요.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향유를 부어요. 여러분, 주님 발 앞에 엎드린다는 것, 그리고 주님의 발에 입을 맞추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예배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입을 맞추는 거예요. 예배라는 것은 깨지는 거예요. 주께와 엎드리는 것입니다. 나 죽었다라는 것입니다. 제가 보여 드릴게요?
(바닥에 엎드리는 모습)
여러분 중에 신부들이 서품을 받을 때 이렇게 합니다. 저는 그 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봅니다. 똑같습니다. 바닥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배 깔고 엎드리고 움직이지 않는 거예요. 우리가 예배에 나오지요,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이렇게 하는거에요. 고개 들을 수 없는 거예요. 몸을 가지고 우리가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각을 뜨는 거예요. 움직일 수 없어요. 그래서 예배란 하나님 앞에 발발 기는 행위입니다. 예배 잘못 들이면 과거 구약에서는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 자신이 예배를 통하여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거 아세요. 오늘 이 옥합을 깬 여인의 행동이 바로 예배하는 모습이라는 사실을요! 남들은 욕을 할지 몰라요. 남들이 보면 챙피할수 있어요. 그런데 자신의 옥합을 깨어서, 아니 마음을 깨어서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실한 예배입니다.
교회 나와서 찬양하면서 손뼉 치면 안됩니까? 돈은 내가 낼 수 있을망정 나는 절대로 손은 안들꺼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요? 왜 손을 한번 들라고 하면 왜 그렇게 힘드는지 아세요? 목사도 압니다. 꼭 그렇게 해야지만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이 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못해요? 우리 자아가 깨지지 않아서 그래요? 그래서 예배를 드리면서 목사는 성도의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안 넘어 가려고 굉장히 애쓰는 사람이 있어요? \\\"목사님은 말씀하세요, 나는 내 사고가 있어요, 남들은 손뼉을 치든, 손을 올리든 난 내 식으로 할것에요\\\" 꼭 그렇게 해야지만 되는 것이 아닌 것 알아요? 하지만 그 안에 깨지지 않는 마음이 있다면 다시 생각하십시오. 영적인 실리가 그렇게 온다면 계속해도 좋아요, 하지만 깨질 것은 깨져야 합니다. 저는 압니다. 하루아침에 자아가 깨질 수 없지만 자아가 깨지지 않으면 주님 앞에 엎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요! 과거에 부모에 버림받았던 사람, 내가 상처받았던 사람은 자신이 잘 깨지지 않는 다는 사실을요! 왜 오늘 말씀에 나오는 이 불쌍한 여인은 엎드렸을까요? 왜요? 그 인생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갈 때까지 갔었고 그리고 바닥까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요\\\"
죄가 있어서 힘드니까?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아는 것 자체는 벌써 그 안에 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는 죄를 회개하는 곳에는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who care, 왜 내가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who care, 나는 영적인 것, 당신과 함께 친밀감을 갖기 원하는 데. 끝날 수 없는 거예요. 자아가 깨져야 합니다. 예배를 통하여서요. 주님 앞에 엎드리고 주님의 발 앞에 나의 입술을 갖다 대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해야지요. \\\"주님 내가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내가 깨집니다. 주님, 난 갈데 까지 갔어요, 주님 용서해 주세요\\\"
왜 이 여인은 자기의 옥합을 깨트릴까요? 왜 그 비싼 옥합을요? 이것 아세요. 사람은 자기를 인정해 주는 사람에게, 자기를 존귀히 여기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바친다는 사실을요. 이 여인이 그런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하길 자기를 다 깨트리고도 부족한 것입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여인은 참 행복하다고 여겼습니다. 다 깨트리고도 아깝지 않은 사람을 만난거에요. \\\"불쌍한 사람은, 정말 불쌍한 사람은 한번도 사랑할 대상을 만나보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거예요.\\\" 그것이 불쌍한거에요. 우리가 돈을 벌어도 써줄 사람이 있어야 행복한 것입니다. 돈만 많이 벌면 뭐해요. 중요한 것은 열심히 벌어서 써줄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거에요. 신앙적으로 돈을 벌어도 내가 섬기는 교회에 바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한 신앙생활입니다. 이런 축복을 다 받기 원합니다.
어제 남성들의 기도모임에 우리 귀한 형제들과 참여했습니다. 미국사람이 대부분이 모인 자리이지만 아시안 인으로서는 꾸준히 저희 교회가 참여하고 있지요. 어제 함께 참여하면서 은혜를 받는 사실은 찬양 중에 이런 마음이 듭니다. \\\"내가 두 개의 입술을 가졌다면, 내가 세 개의 입술을 가졌다면\\\" 이중주로 삼중주로 사중주로 주님께 찬양할텐데\\\" 이런 마음이 왔어요. 주님을 더욱 아름답게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어제 남성들의 기도모임에서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이 있는 그 시점에 제가 잘 아는 목사님이 나와서 찬양을 드리자고 하는데 그게 무슨 찬양인지 아십니까?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 If I have a thousand mouth, 난 이 찬양을 그렇게 많이 부르면서도 이 찬양이 이런 찬양인줄 그때야 알았습니다. 만 입이 내게 있으면, 내가 두 입이 있으면, 내가 세입이 있으면, 주님을 더욱 찬양하고 싶은 마음을 담은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한 입만 있으면 안돼요, 두입, 세입, 네입, 만입이 있어 주님을 찬양하는 마음, 예배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 고침을 받은 소경을 아시지요. 주님을 만나 소경이 눈이 떴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물어요? \\\"야 너 어제까지 못 보았던 소경 아니야, 너 누가 이렇게 했니?\\\" 그러니까 소경이 말합니다. 난 몰라요. 하지만 내가 아는 사실은 난 어제까지만 해도 소경이었는데 지금은 내가 볼 수 있다는 거예요. Once I was blind but now I see, 난 어제까지 볼 수 없었어요. 그런데 그분이 나를 이렇게 보게 해 주셨어요. 마음속에 주님을 찬양하는 마음입니다.
\\\"This is my story this is my song Praising my saviour all the day long.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이라고, 예수로 나의 구주를 삼고 보니, 성령과 피로 거듭나보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보이도다.\\\" 찬송가 204장입니다. 다함께 이 찬양 함께 불러 볼까요?
찬양 204장
Once I was blind but now I see. \\\"난 과거에 몸파는 여자였어요. 사람들은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았어요. 하지만 저분만은 나를 사랑해 주었어요.\\\" 이 여인은 그 안에 사랑이 있었던 거예요. 주님을 너무나 사랑했던 그 마음 말이요.
이 땅에 살면서 우리는 꼭 이런 사랑을 한번 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미치도록 사랑해 보는거에요. 모든 것을 다 주어도, 다 바쳐도 아깝지 아니한 사랑이에요. 예수님께 사랑을 받은 여인이 깨달은 것은 살아야 되는 존재이유를 발견한거에요. 그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길 결정한거에요. 주님을 사랑하면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것이 놀라운 스토리입니다. 살아야 하는 이유를 결정한거에요.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응답함(response the Word)
마태복음 20장, 누가복음 7장에도 오늘 말씀은 나옵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 이 여인이 옥합을 깨트렸는가에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깨트렸다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가장 고독한 시간에 찾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고작 생각한 것은 누가 좌정승, 우정승을 할 것인가 그런 것 가지고 싸웠습니다. 가롯유다는 돈에 탐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이 다 도망칠 것도 아셨습니다. 수제자 베드로가 세 번 자신을 부인할 것도 알고 있습니다. 모든 제자들과 사람들은 주님을 알지 못했어요. 그 시간은 주님이 가장 고독한 시간이었어요.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아무도 그 주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직 한 여인이 주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고독한 주님의 시간에! 이 여인은 주님을 사랑하는 그리고 참으로 친밀한 사랑으로 찾아 왔습니다. 그렇게 제자들은 자신의 자랑만을 일삼고 있던 그 때에 이 여인은 그 주님의 고독한 마음에 찾아왔어요. 그리고 한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뚝뚝 눈물이 예수님의 발 앞에 떨어집니다.
어떻게 그렇게 몇 년 동안 따라 다녔다는 제자들도 자신의 입신양면만을 위해서 노력할 때, 그저 예수님 팔아서 치부할 생각만 하는데 어떻게 이 여인은 주님의 고난에, 주님의 참 고독한 시간에 찾아갈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 지성보다 더 강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온몸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깊은 감성입니다. 주님과의 한번의 만남이 여러분, 가장 큰사랑을 깨닫게 되지요. 이것을 바로 초월적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충만한 감정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기쁨도 보이고 그리고 슬픔도 보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은 집중된 관심입니다. 이 여인은 깊은 감성으로 주님이 본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니까 주님의 슬픔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독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깊은 관심이요 깊은 감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탕자 이야기를 아시지요. 세상에서 나갔다가 돌아온 탕자가 누가 먼저 모았어요. 젊은 눈을 가지고, 시력이 더 좋았던 아들이 먼저 본 것이 아니라 나이든 아버지, 시력도 나쁜 아버지가 먼저 본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그 아들에게 달려가는 거예요.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아버지가 저를 보고 상거가 먼데 알아본 것입니다.\\\" (눅 15:20) 사랑은 거리를 초월합니다. 사랑은 우리의 눈을 아주 밝혀 줍니다.
저는 성경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들라고 하면 이 장면을 들고 싶습니다. 간음현장에서 붙들린 여인, 귀신들린 여자, 이 여인이 주님의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감격해서 눈물로 옥합을 깨트려서 드린거에요.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들은 내게 입맞추기도 안 했지만 이 여인은 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경배와 찬양은 예배는 입맞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입을 맞추고 옥합을 깬 이 여인에게 제자들 왜 돈을 허비했냐고 말합니다. 맞아요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면 여러분 교회에 헌신하고 주님께 헌신하면 욕먹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이 여인의 옥합을 돈으로 계산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꾸지람도 하지 않았어요. 정말 사랑하면 말이 나오지 않아요. 고통을 감수합니다. 이 여인의 귀한 옥합은 거룩한 낭비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일어난 귀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절대로 값으로 따질 수 없어요.
주님이 이 여인을 사랑해 주니까 이 여인은 두 가지의 중요한 변화된 모습을 보입니다. 첫 번째로는 예수님의 발을 씻겼고요, 그리고 또 하나는 자기 몸을 깨트려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세족식 사건이 나중에 나옵니다. 도대체 이 세족식을 발을 씻겨주는 이 일을 누구한테 배웠겠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는데 바로 이 여인을 통해서 주님이 그런 일들이 생각하셨을 것이다라는 묵상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바로 이 옥합을 깨트리는 여인의 사건이 나오고 13장에 보시면 예수님이 발을 씻겨주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누가 먼저 예수님의 발을 씻겨 주었는가라는 거예요. 바로 온몸을 다해서 씻겨주었던 이 창기와 같은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씻겨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여인은 바로 고독한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 그 고독한 예수님의 발을 씻겨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씻겨 주셨던 발들이 있었어요. 예수님이 씻겨 주셨어요. 그 발들이 어떤 발이었어요. 바로 예수님을 팔자들, 예수님을 나 몰라라고 도망치려는 자들의 발이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들에게 무릎을 꿇고 씻겨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앞으로 지을 죄 까지도 용서해 주었던 용서의 사건입니다. 용서를 해 주는 대상이 발을 씻겨 주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 여인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옥합을 깨트리는 사랑을 주님께 보여주니까 주님은 십자가에서 진액을 다해서 깨트리십니다. 다 주십니다. 모든 물이 다 흘러나올 때까지 주십니다. 옥합을 깨트린 여인은 모든 것을 깨트린것에요. 주님도 그 사랑을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너무나도 중요한 여인입니다. 너무나도 친밀한 주님과의 관계에 들어간거에요.
말씀으로 나감(Go with the Word)
세상사람들은 왜 주님 앞에 와서 눈물을 흘리고 그리고 엎드리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친밀한 사람은 압니다. 여러분, 친밀한 것이 교회에서, 세상에서 항상 환영을 받는 삶은 아니에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공격이 있어요. 꼭 이렇게 해야 하냐고? 왜 그렇게 낭비하냐고? 우리는 우선순위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 우선순위를 말한거에요. 세상사람들이 볼 때 예배보는 것이 비생산적인 것이라고 떠듭니다. 하지만 우리는 왜 예배에 나옵니까? 예배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선순위가 먼저 예배에 있기 때문입니다. 찬양을 한 곡만 부르면 되었지 그것은 3곡 4곡 아니 10곡 부르냐고! 예배를 설교를 20분 30분 40분만 하는데 2시간 3시간 하냐고? 목사님 설교가 왜 그렇게 기냐고! 잘 모르는 거예요.
오늘 예배에 참여한 성도 여러분,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절대로 영광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자랑을 이곳에서 하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영광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오로지 영광과 경배 찬양은 하나님만이 받는 것입니다.
다 눈을 감으십시오. 그리고 상상해 보세요. 간음하다 붙잡혔던 그 여인, 주님이 고쳐주었던 여인,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주님의 뒤편에서 눈물을 떨구었던 여인, 그리고 무릎을 꿇고 주님께 자신의 머리로 쓰다듬었던 그리고 입을 갖다 맞추었던 여인, 자신의 모든 값진 것으로 모두 드렸던 여인 이 여인을 상상하십시오.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함께 찬양합니다. 기도합니다. 간구합니다. \\\"주님 내가 주님께 드리기 원합니다. 주님 내 젊음을 가지가세요. 주님, 나의 것을 가져가세요. 주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다같이 찬양합시다.
\\\"주께와 엎드려 경배 드립니다. 주 계신 곳에 기쁨 가득, 무엇과도 누구와도 바꿀 수 없네 예배드림이 기쁨 됩니다.\\\"
여러분, 예배드리면서 누군가를 의식하면서 경직될 때가 많이 있어요? 순간 주시는 말씀이 있어요? 찬양을 하면서도 목사가 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있을거에요. 그리고 행동으로 옮기세요. \\\"너는 잠잠하고 내가 말할 테니 듣고 있어라.\\\" 주위 사람의식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자유 속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강하고 급한 바람으로 우리 찬양가운데 찾아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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