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교회와 예배의 영성 (1) 창2:7.요4:24.마12:48
그리스도를 믿고서 새로운 영적인 삶을 시작하는 일은 하나님께 다시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다가간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주님께 맡기고 그의 뜻에 따라 합당하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다시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거쳐야 할 과정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총의 선물 중의 하나입니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은총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태초의 아름다움은 상실했지만 은총으로 그 형상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는데 바로 죄를 깨닫고 회개를 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잃고 상실했는지를 정확히 알 때에야 비로소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삶에 있어서 단순히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계속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 죄의 유혹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끊임없이 하여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과의 친교가 지속되어야 합니다.
회개는 생각의 바뀜 사고의 변화 생활의 변화 의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행위와 그 죄를 미워하고 자신의 생각과 말 그 밖의 모든 그릇 된 것을 버려야 합니다. 회개는 세례를 받은 후 거듭,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성 요한 클리막스가 말하듯이 회개는 \\\\\\\"반복되는 세례\\\\\\\"이며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 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에게서 회개의 자세를 찾아볼 수 없다면 그는 은총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마치 영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더 이상의 영적인 삶이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초자연적인 목표에 도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성령께서 역사 하시고 일치가 되게 합니다. 인간이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하나님과 하나가 됨은 두 가지의 동등하지 않으면서 똑같이 필요한 힘의 상호 작용이 요구됩니다. 즉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의지가 그것입니다. 의지(지성이나 감성이 아닌)는 하나님과 일치가 됨에 있어서 인간의 주된 요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에 전적으로 맡겨지지 않는다면 하나님과의 밀접한 일치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약한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의 붙들어 주신다는 기대와 희망이 없다면 아무 힘도 없는 무기력한 상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안에서 의지와 행위를 올바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은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영성의 경지에 이르러 그리스도와 일치가 되기 위해서는 영성 수련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불행하게도 개신교의 영성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확실하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개신교에서 영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약 30여 년 전이되며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한 후 믿음으로만 의로움을 얻는다는 생각 때문인지 개신교에서 영성이 메말라 가고 경건한 삶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영성 생활은 곧 내적 생활이며 초자연적 생활이요, 신비적 생활입니다. 마음을 수련하고 양심의 순수를 파고드는 것입니다. 한국 개신교 기도 영성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금식 기도\\\\\\\", \\\\\\\"철야 기도\\\\\\\", \\\\\\\"새벽 기도\\\\\\\", \\\\\\\"산기도\\\\\\\", \\\\\\\"백일기도\\\\\\\", \\\\\\\"방언기도\\\\\\\", \\\\\\\"통성 기도\\\\\\\" 등이라 할 수 있으나 그 대부분의 내용이 중보적인 것이나 내면적 마음의 기도가 아니라 기복적 기도에 머무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배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예배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경험해야 하나 개신교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또한 개신교에서는 특별히 영성 수련이라고 할 것이 거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한국 개신교의 영성 수련을 위해서는 건전한 수도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더불어 한국 개신교가 21세기에 필요한 종교가 대기 위해서는 현재 끝을 모르고 발달하고 있는 과학과의 대화가 꼭 필요합니다. 한국 개신 교회는 그 동안 지나치게 성장주의에 매달려 왔으며 내적 생활을 도외시 해왔습니다. 21세기 밀레니엄 시대에 개신교가 하나님의 교회로 그 역할을 감당하려고 하면, 영성 곧 내면의 깊이를 파내려 가야 할 것입니다. 5백년 전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하고 난 후 개신교 교회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첫째로 개신교 교회의 강단이 굳어져 버렸습니다. 강단에 영성이 메말라 신령한 은혜가 없어 졌습니다. 둘째로 개신교 교인들의 생활에 경건미가 없어졌습니다. 믿음으로만 의로움을 얻는다는 생각 때문인지 개신교 교인들은 함부로 살았습니다. 셋째로 개신교 신학자들은 크지 않는 문제로 계속 분열하였습니다. 루터도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지나 그 동안의 개신교는 내적 생활을 도외시 해 왔음을 직시합니다.
우주 산천 초목 삼라만상에는 그 표면상이 있고 그 내면적 실질의 구별이 있습니다. 종교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 생활에 있어서도 교파, 교리, 교회소속, 신앙 조문, 성서, 예전 등 모든 것은 표면적인 것입니다. 표면적 종교 생활은 세속화되고 형식에 흐르고 따라서 겉을 꾸미는 인위적 외식주의에 빠집니다. 사람의 기술 방법 테크닉을 씁니다. 이면(裏面)적인 내면은 내실, 마음, 심층, 영적 깊음, 은밀, 생명의 맥락, 영성을 의미합니다.
\\\\\\\"신령\\\\\\\"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작은 연못\\\\\\\"입니다. 이 속에 우주 그 자체의 깊이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는 그 동안의 지나친 외부적 발전에만 미쳐 날뛰는 성장주의 활동을 이제 중지하고 21세기 새 밀레니엄 시대에 맞추어 내면의 깊이를 파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영성 발전입니다. 더구나 성서는 하나님이 인간과 사기는 곳이 마음이라고 합니다. 신비주의는 그것을 강조합니다. 서양의 심리학은 \\\\\\\"마음\\\\\\\"(mind)을 \\\\\\\"정신\\\\\\\"(psyche)속의 지적인 기능으로 알고 있으나, 동양에서는 마음을 우주적인 것으로 보고 인간 존재의 핵심이며 개인적인 마음과 우주적인 마음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 자신은 우주의 이상(理想)된 존재로서의 소우주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인격을 이루는 지(知), 정(情), 의(意)의 골체가 되는 것이 마음입니다. 사람의 일생에 유일한 과제는 \\\\\\\"마음\\\\\\\" 하나 찾는 일입니다. 모든 종교의 중심과제는 마음입니다. 인생이 산다는 것은 마음이 사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의 영성 생활은 마음의 수련에 의거합니다. \\\\\\\"영성\\\\\\\"과 \\\\\\\"마음\\\\\\\"은 똑같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영성의 바탕은 마음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3). 그것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이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입김(프뉴마)을 불어넣으신 것 그것이 인간의 영성입니다. 마음은 영성의 바탕입니다. 이 무변 대우주 은하계 삼라만상을 꿰뚫고 파동 하는 것은 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받으려는 것 그 마음에 통하는 마음이 되려는 것입니다. 이런 우주의 기운 우주심(宇宙心)을 흡수하고 대우주와 함께 숨쉬고 소리 없이 우주와 통하는 것은 마음 하나입니다. 사람과 우주, 사람과 사람사이에 유통하는 유일한 것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마음입니다. \\\\\\\"심심불이\\\\\\\"(心心不異) 즉, 나는 곧 그대이며 그대는 곧 나다. 모든 생명체가 나와 조화를 이루고 소리가 내 안에서 합장하고 모든 아름다움이 내 눈에 녹아들어 황홀하고 대우주의 조화로운 대합창에 나의 가슴을 열고 함께 하모니를 이룬다.
서울 교회가 교회의 특성을 내세우려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변신으로 가족 단위의 가족 교회가 되며, 이웃과 함께 더불어 예배함에 있어 그 의의를 살리려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 교회와 영성 예배가 함께 어우러짐에 공동체의 체험을 갖고자 합니다.
한국의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한국 교회와 신학이 서구 특히 북미의 교회와 신학에 지나치게 매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국에 맞는 교회와 신학의 양상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가족 교회의 특성을 살리려고 할 때 예수의 뜻을 따르면 누가 내 이웃이 되든지 간에(눅10장) 인간의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한 규정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마22;39). 예수님은 자연적 혈연관계를 근본적으로 문제시하기까지 했다는 사실(눅9;57-62, 마12;46-50, 마19;10-12)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또한 가족에 대한 예수님의 비판적 태도는 그가 가족의 존재를 전적으로 거부하지 않았다는 사실 앞에서도 그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베드로와 그 가족을 만나기 위해 집으로 방문했습니다. 그 당시 베드로는 그의 가족과 장모도 함께 한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마8;14). 예수님은 아버지의 아들들을 향한 사랑에 대한 비유를 말했고(눅15;11-32),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가 사랑하던 제자에게 서로를 어머니와 아들로 받아줄 것을 부탁했습니다(요19;26-27). 그러나 여기에서도 예수님이 전통적인 가족사상을 넘어선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사상은 고대 교회시대에도 이미 이상하게 여겨졌으며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부들의 편지들과 성서 외에 있는 문서들을 보면 주로 가족을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공동체가 초기부터 가정집에서 모였기 때문에 이러한 사상이 더 강조되었을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보아 성서는 가족 사상에 있어서 양면성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교회의 역사가 성서 안에 있는 양면적 가족 사상을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수도원 제도나 성직자 독신 제도에서 볼 수 있는 부부와 가족에 대한 비판적 사상이 있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가족이 중시되는데 특별히 개신 교회들 내에서 더 그러합니다. 여기에는 마틴 루터가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을 함으로써 생겨 난 루터교의 이상적 가족상(像)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한국의 교회는 유교 문화권에서 가족이 사회의 기둥으로 이해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점점 더 손상되어 가고 있는 가족 상황의 위기가 한국사회에 큰 문제로 제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가족을 주요 주제로 삼는 것은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차제에 오늘의 한국 교회의 가족의 분열 요소를 지적해 봅니다.
첫째, 교회는 조금밖에 없는 가족들의 여가 시간들 중 대부분을 요구합니다. 거의 하루밖에 없는 휴일인 일요일에 많은 가정들이 아침부터 늦은 오후 혹은 저녁때까지 교회에서 보냅니다. 새벽 기도에도 역시 가정 손상의 한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을 끝낸 후 집에 와서 저녁이 되면 피곤하기 때문에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혹은 등산을 가거나 아니면 함께 윷놀이를 한다거나 함께 음악을 들으며 공작을 하고싶어 하기보다는 조용히 쉬고 싶기만 할 것입니다. 수요일과 금요일 저녁들도 교회가 모이기를 요구하는 시간들입니다. 그러고 나서도 매일 성경 공부를 하고, 기도 시간을 가져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것들은 다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들이지만 가족들의 공동 생활은 어느 정도 도외시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둘째, 교회 활동들은 가족들을 대상으로 한다기보다는 가족 구성원들로서의 교인 전체의 개개인들을 대상으로 삼습니다. 이것도 물론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이 중심으로 구분된 각 부서들을 위한 활동은 개개인의 필요를 채우기에 더 수월합니다. 어린이들이 어른예배에 참석하게 되면 설교 시간이 고통스러워질 것입니다. 큰 교회에 다니게 되면 부모들과 어린이들 그리고 청소년들이 서로 분리되어 예배에 임합니다. 예배가 끝난 후에도 각자 자신들이 속한 서로 다른 부서에서 활동합니다. 청소년부, 유년부 등이 그 예입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에는 적어도 부부가 함께 앉아 있을 수 있지만 예배가 끝나자마자 부인은 여선교회에서 남편은 남선교회에서 각각 활동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원하든 원치 않든 가족의 분열 요소로 작용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가족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수준 높은 설비들이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가족 친화적인 교회가 되어야 함을 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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