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이 있는 예배 마11:28-30
I.M.F 이후 대도시 곳곳에 교회나 사회복지 단체에 의해 일자리를 잃은 자들을 위한 쉼터가 많이 생겨났습니다. 점심을 주고 일자리를 구해 주고 심지어는 예배 참석하면 용돈까지 주었는데 대부분의 쉼터가 흐지부지해 지고 있습니다. 먹을 것 주고 일자리를 구해주고 용돈 주면 면 다 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마음의 쉼을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합니다. 왜 인생이 이렇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이 되었나? 본래 하나님이 창1: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합니다. 특히 여섯째 날에 사람을 지으시고는 보시기에 시~임히 좋았더라 합니다. 그러니 본래 인생이 수고하고 짐진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창3:에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따먹지 말라한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는데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여자는 해산의 수고를, 남자는 평생동안 땀흘리며 수고해야 하며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이 쉼을 얻을 시간과 공간을 잃어버렸습니다. 인간이 행복을 잃어버렸다는 말입니다. 행복을 잃은 인간은 삶을 살아갈수록 경제문제, 가정문제, 건강문제, 정신적 공허 나아가 사회적 문제 등을 통해 고통을 당합니다. 이 고통을 잊기 위해서 오락, 취미생활, 스포츠, 도박, 기 수련, 심지어는 술, 마약에 빠져보지만 결국은 만족이 없고 공허만 느끼고 고통은 가중해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결국은 자신이 알던 모르든 마귀의 지배를 받으며 마귀의 종이 되어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상을 섬기고, 점을 치고, 굿을 하며 미신을 지키며 이사, 결혼 날짜, 묏자리, 심지어 대문 방향도 마음대로 못 정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원을 모르니깐 그렇습니다. 마음에는 늘 불안, 허무, 불만족, 우울증, 노이로제, 등 걱정 근심 벗어날 날이 없고 심지어는 꿈자리가 뒤숭숭하고, 가위눌리고, 우환에 늘 시달립니다. 그리고 육신에는 왠지 피곤하고 원인 모를 질병이 찾아옵니다. 병원에 가면 다 신경성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큰 문제는 영혼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어떻게 되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마치 하루살이와 같은 인생입니다. 하루살이 이야기 아시죠? 어느 날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같이 놀았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만나자」고 말했습니다. 그때 하루살이가 하는 말이「내일이 뭔데?」하니 「내일은 캄캄한 밤이 지나면 밝은 날이 오는데 그것이 내일이야」 하루살이는 메뚜기의 이 말을 듣고도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이 세상의 삶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영원한 삶이 있습니다. 영원한 삶도 다 똑 같은 삶은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하나님 떠난 영혼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옥은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이 있는 곳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떠나 우상을 섬기며 마귀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 이상 행복이 없습니다. 더 불행한 것은 자기만 여기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자손들까지 구렁텅이에 빠트려 놓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 무거운 짐을 지고가는 인생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예수님 앞으로 나아올 때 죄 문제가 해결됩니다. 인생의 고통이 해결됩니다.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앞으로 나아 오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몸은 가까이 있어도 마음은 끝없이 멀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 온다는 것은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다고 해서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앞에 나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털어놓아야 합니다. 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배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와 복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에 쉼을 주십니다. 예배에는 항상 쉼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가 짐이 되거나 부담스러워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잘못된 예배입니다. 내가 쉬게 하겠다는 말 죄에서 자유함을 말합니다. 삶의 갈등에서 해소를 말합니다. 종교적인 멍에에서 해방을 말합니다. 가난과 질병과 삶의 고통에서 벗어남을 말합니다. 결과적으로 마음의 평안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예수님 앞에 나아와 마음을 쏟아 놓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생길 짐을 맡아주실 것입니다.
찬487장1절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인생 길에 진정한 친구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 나의 인생 길에 가이드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나의 생명 되시고 소망되시는 주님께서 나의 가는 길에 빛이 되어주실 것이며 나의 고달픈 인생 길에 쉼을 안겨다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초청에는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쉼을 얻으려면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어야 합니다. 29절「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와서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합니다. 우리가 마음의 쉼 즉 안식을 얻으려면 예수님의 멍에를 메어야 하고, 멍에를 메고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바로 알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멍에를 메라고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멍에를 멘다는 것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어떤 고난도 각오해야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좁은 길을 걸어가라고 하면 좁은 길을 걸어가고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면 죽도록 충성하고 죄와 세상을 멀리하라고 하면 경건한 삶을 살도록 힘쓰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 어떤 불이익이 있더라도 주님을 따르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멍에를 멘다는 것은 주의 뜻을 다르겠다는 각오를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게 되면 한 짐지는 것 같이 보입니다. 매 주일 교회 안 빠지고 출석해야 하고 주일 성수 해야 하고, 세상의 쾌락 취하지 말아야 하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고 따라가야 하니 겉으로 보기에는 무거운 멍에인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우리의 부패한 본성과는 다르고, 세상의 처세술과 반대되고 나의 인생 계획과는 모순되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 믿는 다는 것이 내게 멍에인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합니다. 왜?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합니까? 우리 가운데 많은 교인들이 예수 믿으면 멍에를 메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주저합니다. 왜냐하면? 무거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쉼을 얻으려면 멍에를 메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평안이 없는 이유는 주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는 각오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는 각오가 없는 교인은 그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왜? 내가 보기에는 무거운 짐같이 부담스러운 멍에인데 주님은 내 짐은 쉽고 가볍다고 합니까? 멍에가 어떻게 쉽고 가벼울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성경에 역설적인 진리 많이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고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우리가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한 자요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사방에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이 모두가 세상사람들이 보기에는 역설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역설적인 진리의 수호자들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저들이 역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진리인 것을 나타내 보여주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삶을 통해서 진리를 나타내 보여주므로 예수님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님은 요셉과 함께 멍에를 잘 만드는 목수였다고 합니다. 전설이기 때문에 신빙성은 없습니다만 이스라엘 각처에서 사람들이 좋은 멍에를 사기 위하여 주님이 운영하는 나사렛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깐 주님은 멍에에 대해서는 잘 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합니다.
왜 쉽고 가볍다고 했을 까요? 1. 우리는 그 멍에에 맞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본래 천성적으로 태어나면 쉬운 법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살아 라고 하면 한시도 못삽니다. 마치 노예가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벗어나려고 아우성을 칠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주님 뜻대로 살아야 만이 평안을 누립니다. 이미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멍에를 매는 것이 더 평안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선하게 살고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께 복종하는 삶을 살아 야만이 사는 맛이 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삶을 살아 야만이 사는 맛이 납니다. 아무리 돈을 벌고 세상에서 즐긴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도무지 체질에 맞지 않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사의 보고에 의하며 아직도 아프리카에는 나체 족이 있는데 그들에게 옷을 한번 입히려면 여간 힘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나체가 몸에 베여있기 때문에 옷이 너무 거추장스럽습니다. 그러나 문명세계 사는 사람들은 옷을 입는 일을 즐깁니다. 아프리카 토인이 볼 때는 옷을 입는다는 것이 너무 벅차고 힘든 일이지만 문명인들에게는 너무 자연스럽습니다. 옷을 입지 아니하면 더 이상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멍에를 메는 것이 체질이 맞기 때문에 주님은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멍에는 바로 체질에 맞은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 처음 믿을 때부터 이 멍에를 메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것같이 보이지만 습관이 안되어 그렇지 습관이 되어져 버리면 되려 쉬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는데 가장 걸림돌이 무엇인가 하면 도덕심과 질서의식의 후진성입니다. 이 나라 지도자들 대부분이 G.N.P 10,000불만 넘어서면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OECD에 가입하곤 했습니다. 저는 외국인들이나 유학파 인사들이 아직 우리 나라가 선진국이 되려면 20년이 걸려야 된다고 할 때 너무 얕잡아 보는 것이 아니냐고? 거부감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인정합니다. 우리는 도덕과 질서가 아직도 후진국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인 관광객만 만나면 바가지 요금 여사로 씌웁니다. 일본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에서는 유치원 때부터 철저하게 질서의식과 도덕심을 가르칩니다. 그것도 몸에 베일 때까지 가르칩니다. 그러니 습관이 되니 자연스럽게 질서를 지키고 도덕을 지킵니다. 우리는 그런 교육을 못했습니다. 어른들이 하는 것보고 따라하니 교육 따로, 행동 따로 입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2건국이니 해서 기초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구호는 외치는데 국민적 반응이 미약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마찬가지입니다. 멍에를 메고 예수님 따라가는 것 처음부터 배워야 합니다. 신앙체질이 멍에를 메는 체질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멍에를 메는 것이 훨씬 체질적으로 맞다 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 다..
2. 멍에가 쉬운 이유는 주인이 좋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좋으면 멍에는 가볍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 감옥 안에 갇힌 상태에서도 주를 위해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다고 할 수 있으며 어떻게 획득한 로마 시민권이고 배운 학문인데도 예수님 앞에선 배설물같이 여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섬기는 예수님이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6:14절에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삼하15:13절 이하에 나오는 잇대 장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돈에 팔려온 다윗 휘하에 용병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주인으로 섬기다 보니 주인이 너무 좋아서 이제는 돈이 생기는 일이 아니지마는 다윗의 피난길을 따라가면서 「여호와의 사심과 내 주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무론 사생하고 왕이 계시는 곳에 종도 있겠나이다」고 합니다. 이렇게 주인이 좋으면 얼마든지 멍에를 멜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랑의 멍에라고 합니다.
우리는 억지로 메는 멍에가 아니라 나의 주인 되신 예수님이 좋아서 자원해서 메는 멍에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멍에가 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위로와 쉼이 있습니다.
3. <성 어거스틴>은 「이 짐이야 말로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하늘을 날을 수 있는 날개이다.」했습니 다. 날개도 짐은 짐입니다. 그러나 하늘을 훨훨 날아가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수고하며 지고 가는 짐 죄의 짐, 근심과 고통의 마음의 짐, 생활고의 짐, 질병의 짐, 이 짐은 우리를 좌절 속에 몰아 넣으며 결국은 사망의 골자기로 몰아 가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무거운 짐 갖다놓고 가벼운 것으로 걱정스러운 짐 갖다놓고 기쁨의 것으로 무가치한 것 갖다놓고 가치 있는 것으로 일시적인 것 갖다놓고 영원한 것으로 가져가라고 나의 멍에를 메라고 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를 각오를 해라고 합니다.
예수 믿는 다는 것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멍에는 내게 날개가 되어 나의 삶을 더 가볍게, 더 기쁘게, 더 보람있게 해 줄 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 나와 쉼을 얻으려면 멍에를 멜 각오를 해야 합니다. 각오하고 나면 멍에가 나중에 나의 삶에 날개가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자식을 키워 다 학교에 보냅니까? 지금은 고생스럽더라도 그 고생이 그의 앞날에 날개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믿으려고 하면 멍에를 메는 것 같지만 그러나 결국 그 멍에는 우리의 삶에 날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쉼을 얻으려면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나아와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주님을 만나 주님을 배워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배우는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배우려고 하는 스승 예수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도 배우려는 자세가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온유가 뭡니까? 자신의 마음에 열처리가 된 안정된 상태입니다. 본래는 짐승의 잘 길들려진 기질입니다. 우리는 잘 길들여지려고 해야 합니다. 교회 나와서 잘 길들여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훈련되어지려고 해야 예수님을 잘 배울 수 있습니다. 고집과 아집과 오만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잘 길들려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겸손한 자세로 나아야 합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버리는 것입니다. 욕망을 버리는 것입니다. 허영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고집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기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낮아져서 예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을 바로 배울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로 배우려면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주님께 잘 길들여지려고 해야합니다.
그럼 주님을 배운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주님을 본 받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아 간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주님께 잘 길들여지려고 할 때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주님을 닮아갑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에 평안이 있습니다. 쉼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러면 삶의 원천인 주님의 평안이 우리 마음에 솟아납니다.
우리가 피곤하다는 것은 힘이 소모되었다는 것입니다. 밧데리가 다 소모되어 버리면 그 밧데리 잠시 쉬게 한다고 전기가 충전되는 것 아닙니다. 다른 밧데리와 연결 시켜서 충전을 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이 피곤할 때 가만히 있는 다고 쉼을 얻는 것 아닙니다. 평안의 원천이 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평안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예배는 바로 이 은혜를 충전시키는 시간입니다. 사40:31절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 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배우지 안 한다면 마음의 쉼은 얻지 못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본받는 생활을 하지 아니한다면 우리 마음의 평안은 쉽게 사라질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가 제일 마음에 기억되는 사람인 줄 아십니까? 내게 물질적 도움을 주고 나를 칭찬하던 사람들 보다 내 마음에 감동을 준 사람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가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삶의 에너지가 꺼져갈 때 불을 지퍼 주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항상 그런 사람들의 빗을 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내 인생에 불을 지퍼 주는 사람, 바로 내게 감동을 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자신의 마음속에 평안과 쉼이 있는 자만이 다른 사람의 인생에 불을 지퍼 줄 수 잇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를 배우기로 한다면 28절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합니다. 예수님이 만들어 주신 어떤 동산이나 공원이 우리의 쉼터가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쉼터가 되어 주십니다. 즉 이 말은 교회 온다고 다 쉼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배워야 쉼을 얻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그분의 멍에를 메고 온유와 겸손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배우는 예배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에 위로와 쉼이 있을 줄 믿습니다.
<결론> 예배는 쉼이 있어야 합니다. 쉼이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멍에를 메고 주님을 배워야 합니다. 멍에를 메는 것이 우리의 체질에 훨씬 맞습니다. 그리고 온유와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배우는 예배가 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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