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보다 더먼저 할일

예배보다 더 먼저 할 일/마5:21-26

예배보다 더 먼저 할 일
마5:21-26





추석명절을 앞두고 벌써 우리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추석에도 3,000만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부모친지들을 만난다고 합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우리 민족만의 특이한 미풍양속입니다. 저는 오늘 주일예배를 마치고 추석기간 동안 선교지 일로 출국해야 하기 때문에, 지난주일 밤에 미리 어른들을 찾아뵙고 형제들 가족을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어릴 때부터 기독교 가정과 가문에서 자란 덕택에, 집안에서 종교적인 갈등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지만, 많은 교우들 중에는 집안의 대소사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종교적 갈등이나 신앙적인 아픔을 겪는 분들이 많습니다. 특히 명절이 되면 어김없이 차례(茶禮)를 지내야 하고, 기일(忌日)이 되면 제사를 지내야 하는 가정에서는 그 어려움이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전에 사역하던 교회의 어느 권사님 가정은, 조금 과장(誇張)하면 1년 52주 내내 조상제사를 지내던 철저한 유교가정이었습니다. 그런 가정이 예수를 믿고 개종하였는데, 1년에 수십 차례 지내던 제사는 중단했지만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수십 번 지내던 그 제사를, 일대일 대응 예배로 다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그 권사님이 개종하면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당연히 제사 문제였습니다. 그 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면, 기독교를 믿지 못할 이유도 없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만큼 제사문제는 그 권사님과 가정의 중대사였습니다. 결국 그 권사님이 예수 믿기로 작정하면서, 수십 번의 제사대신에 돌아가신 어른들을 추모(追慕)하는 ‘추모예식(배)’를 일대일(一對一) 대응 식으로 맞바꾼 것입니다.

그 권사님 가정 때문에, 갑작스럽게 고생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이겠습니까? 목사입니다. 주일마다 오시면, “목사님, 이번 주에는 우리 집안의 누구누구의 기일입니다”는 말씀이 인사말씀이었습니다. 그 분이 개종한 후 몇 해 동안은 1년 내내 그 가정의 추모예식(배)을 인도해야만 했습니다. 생각만 해 보십시오. 그 일이 쉬운 일이겠는지…. 저는 목회하면서 1년에 38번 장례를 인도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38번의 장례 중에, 8번은 연속해서 그것도 월요일 장례를 인도했는데, 솔직한 심정으로 그해에 저는 적잖은 목회적인 갈등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장례가 산 자를 위한 목회사역이지만, 내가 산 자를 위한 목사인가? 죽은 자를 위한 목사인가?” 고민이 생길만큼 장례가 힘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교우들 중에는, 이와 같은 가정의 신앙적인 갈등의 문제가 있거나 가족간의 풀지 못한 아픔이 있을 때에 몇 가지 대응하는 방식을 보게 됩니다.

영적으로 싸워 이겨야 한다는 ‘영적전투형’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서로 다른 신앙과 문화, 삶의 가치를 영적전투적인 입장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상대방과 싸워서 승리해야 한다는 식의 신앙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외로 우리 주변에 소위 믿음이 좋다는 분들 중에, 이와 같은 전투적인 입장을 가지고 문제를 푸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분들에게는 싸워야할 영적인 대적들이 늘 많은가 봅니다.

영적인 전투와는 조금 다른 형태이지만 ‘순교형’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 초창기에 제사 문제로 인해 순교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이승훈(李承薰)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천주교가 제일먼저 부딪힌 문제가 제사문제입니다. 이승훈을 통해서 전해진 천주교는 처음부터 조상숭배를 반대하는 순교적인 신앙을 낳았습니다. 순교(殉敎)는 어느 시대에나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기독교의 복음이 전해진 지, 수백 년이 된 우리나라 같은 곳에서는 더 이상 의 ‘순교’는 불가능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순교는 기독교의 복음이 처음 전해질 때, 전혀 다른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인 상황과 대치될 때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매우 대립적인 역사적 정황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우리나라 과거역사에 80여 년 동안 이와 같은 순교적인 박해사건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1815년 박해, 1819년 박해, 1827, 1839년 박해, 1866년 대원군 때까지).

회피형이 있습니다. 신앙은 포기하고 싶진 않고, 그렇다고 신앙적인 갈등의 문제로 부딪히기 싫어서, 그 갈등의 현장과 만남을 회피하는 형입니다. 그런 분들 중에는 가족모임이나 집안의 대소사에 잘 참석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말이 통하지 않는 가족들이나 사람들과는 아예 상종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소극적인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형의 신앙을 가진 분들은, 집안에서 아예 제쳐놓은 식구처럼 여김을 받습니다.

그런가 하면, ‘타협형’도 있습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의 신앙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둘 다 좋게 한다는 식의 신앙은 말은 쉽지만, 그것을 바른 신앙적인 자세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신앙의 기준이 없는 사람이거나, 혼합형의 신앙관을 가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입장입니다. 요즘 쓰는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종교다원주의적(宗敎多元主義)인 입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타협적인 신앙은, 궁극적인 신앙의 기준과 진리를 상대화시켜버릴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한국교회의 역사에도 이런 타협형의 신앙이 있었고, 이런 식의 신앙은 후기현대 사회(post-modernism)를 거치면서 요즘 더 많이 팽배해지고 있는 현상입니다.
한국의 로마천주교회에서는 1939년 12월 18일 교황 피우스 12세(Pius Ⅻ)의 교서에 따라서, 한국의 유교적인 조상숭배제사는 종교적인 우상숭배가 아니라, 한국인의 시민적인 의식(市民的 儀式, civil rite)이라고 규정하면서, 조상숭배제사를 허용했습니다. 제사를 단순하게 조상에 대한 효의 표시로 간주한 것입니다. 결국, 로마천주교회는 한국의 80여 년 동안 천주교 박해 때 순교하였던 萬여 명의 순교자의 죽음을 스스로 헛된 죽음이라고 규정하고 만 겁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통치 하에서는 신사참배도 우상숭배가 아니라 하나의 시민적인 의식이라고 허용했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한국개신교회도 신사참배 때문에 순교한 신앙인들도 있었지만, 장로교회가 앞장서서 1938년 9월 총회에서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며, 기독교교리와 모순 되지 않는 하나의 애국적인 국가의식이기 때문에 우리는 솔선해서 신사참배에 참여하기로 결의했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한국교회가 가졌던 공식적인 타협적인 신앙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신앙은 ‘복음적인 입장’입니다. 복음적인 신앙은 이원론적인 시각의 ‘전투적인 신앙’을 말하지 않습니다. 갈등과 문제를 피해가는 소극적인 ‘회피형’의 신앙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다 가하다는 식의 ‘타협적인 신앙’ 또한 아닙니다.

복음적인 신앙이 무엇이냐 할 때,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선순위(優先順位)’의 문제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하신 말씀도 오늘 본문과도 일맥상통하는 동일한 말씀입니다(마 6, 33). 본문의 말씀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말씀을 하실 당시의 유대종교는 ‘제사종교’입니다. 그런 유대종교적인 상황 하에서 주신 말씀임을 고려해야 합니다.

너희가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제단에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 23-24).

예수님은 여기서 우리에게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하나는, 복음적인 신앙과 삶은 우선순위(優先順位)의 문제라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우리 안의 삶의 갈등과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종교적인 의식(儀式)이나, 교리적인 믿음의 문제로 풀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삶의 방식’으로 내가 직접 상대방과 풀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복음적인 삶의 원리입니다. 사람 사는 곳에 어떻게 갈등과 문제가 전혀 없을 수 있겠습니까? 갈등과 아픔이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갈등과 아픔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선순위가 바릅니까? 내가 추구하는 목적 때문에, 비록 그것이 선하고 바른 목적이라 하더라도, 혹 그것의 우선순위 바르지 못하지는 않습니까? 지금 내게 있는 삶의 갈등문제, 내 삶 속에 얽히고 꼬인 문제를 풀 때, 매우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문제를 풀어가는 나의 우선순위가 옳은가 옳지 못한가가 내가 복음적인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인가, 그렇지 못한 비복음적인 사람인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는 겁니다.

삶의 아픔과 갈등, 염려와 근심걱정거리는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이나 상관없이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적인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는 한 가지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복음적인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자기 삶의 문제와 갈등, 아픔이 있을 때 그 문제를 풀어가는 우선순위가 바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복음은, ‘목적’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목적이 아무리 선하다고 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복음은 ‘선한 목적’과 ‘바른 우선순위의 과정’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분명하게 말씀드리면, ‘반드시 선하고 바른 과정을 거쳐서’ ‘선한 목적’ 곧 ‘하나님의 뜻’(God\"s Will)을 이루는 것이 복음이라는 겁니다. 그럴 때, 그것이 복음적인 신앙과 삶이 되고, 그것을 통해서 내 삶의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가 구체적으로 임하는 것입니다(마 6, 10).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우선순위’라는 과정의 문제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적은 선하고 좋습니다. 목적이 나쁜 경우는 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적에 앞서는 ‘우선순위’라는 과정이 무시되거나 잘못된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럴 때 그 결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낱 비복음적인 나쁜 열매를 거둘 뿐입니다(마 7, 15-20).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단에 예물을 드리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예물드림이 어떻게 나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예물드림보다 앞서서 예물을 드리는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예물 드리는 사람이, 형제간의 화목하지 못한 일이 있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 사람에게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하나는, 예물드림의 ‘제사의식’과 ‘종교적인 행위’가 형제간의 화목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죄의 방법이 아니라는 겁니다. 교리적인 신앙이나, 종교적인 제사나 기도나 예배행위로 형제간의 화목하지 못한 갈등의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는, 그 반목과 불화의 문제는 가져온 예물을 그냥 제단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직접 만나서 자기 자신이 직접 그 불화(不和)한 문제를 상대방과 직접 서로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와서 그 후에 예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화목의 예물을 기뻐 받으신다는 겁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 20, 23). 즉, 우리가 형제의 잘못과 죄에 대하여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형제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할 수 있고, 나아가 그의 생명과 삶을 살리고 죽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으로 간곡하게 당부하신 것이 아닙니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 34). 이것은 주님이 저와 여러분과 온 인류에게, 지금 예수를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모두에게 최종적으로 주신 지상명령(至上命令)이며, 지상계명(地上誡命)입니다.

조상숭배 제사문제와 복음적인 신앙의 문제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조상숭배의 제사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양보할 수 없는 궁극적인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신앙을 지키는 것이 선하고 바르다고 해서, 우리의 신앙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에게 우선순위의 과정을 무시한 일방적인 제사거부행위는 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영적전투적인 입장에서 그 문제를 푸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회피하거나 도망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즘 그 문제 때문에 우리에게 순교를 요구하는 가정이나 가족은 더구나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복음적인 바른 자세일까요?

제사 문제에 대한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의 문제는 가족들의 제사행위를 긍정하느냐, 긍정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조상숭배제사(祖上崇拜祭祀)라는 의식을 통해서 ‘효(孝)’를 주장할 수밖에 없는 불신가족들의 방식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랑하고, 그 가족들을 인정해 주는 일입니다. 제사를 긍정하고 인정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제사에 동참하면서, 절을 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렇게 밖에 할 줄 모르는 가족들을 사랑하고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은 부모나 조상에게 절을 하지 않는 것은, 효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죽은 부모나 조상은 더 이상 우리에게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절을 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산 부모님은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절도 하고 공경을 표하는 것입니다.
내가 우상숭배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제사지내는 가족들을 정죄하는 일은 극히 삼가 해야 합니다. 더구나 그 힘들고 어려운 제사와 관련된 가사 일을 가족으로서 함께 돕는 일도 정죄할 수 없는 일입니다. 불신가족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인 가족들이 너무 융통성이 없고, 까다롭기만 하다면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마저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도와 줄 수 있는 일은 오히려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열심히 도와주고, 할일은 다 하고, 제사 때에는 자리를 정중하게 피하거나, 제사상 앞에 서서 절을 하는 순서가 되면, 절을 하는 대신 조상의 은덕을 생각하며 추모하는 의미에서 머리를 숙여 가정과 가문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내 신앙만 지키겠다는 신앙목적 때문에, 가족들의 이교적인 풍습이나 신앙을 정죄한다든지, 그 어렵고 힘든 가사 일조차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것 이전에, 보다 더 중요한 천하보다 귀한 가족들의 생명과 사람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진리를 지키면서도 사랑해야 할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랑해야 하는 일에는 힘껏 헌신하고, 지켜야 할 진리에는 양보하지 않는 복음적인 삶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복음적인 신앙은, 종교적인 행위나 의식보다 내가 잃어버리기 쉬운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회복하는 데 관심을 가집니다.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정이요,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사람을 잃어버리는 형식적인 종교적인 행위나 의식보다는 사람을 회복하고, 사람을 살리는 생명가치와 인간가치가 더 중요한 복음의 본질입니다. 제단에 나아가 예물 드림보다 더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가서 화해하지 않으면 잃어버릴 위기에 처해 있는 가족들이나 이웃들과 화해하고 용서해 주는 일입니다. 또 나로 인해서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가족과 가까운 형제가 있다면, 기도하고 예배하고 예물 드리는 나의 종교적인 열심보다, 먼저 직접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아 그의 아픔을 회복을 시켜주는 복음적인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이번 추석 명절에,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고향 부모님과 가족들을 꼭 찾아뵙기를 바랍니다. 부모님이 불신자이든 가족들이 불신자이든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른 형제들보다 먼저 찾아뵙고 함께 가족들과 사랑으로 정을 나누어야 합니다. 혹, 부모님과 형제들 간의 갈등이나 아픔이 있다면, 모여서 예배드리기 전에, 혹 믿지 않는 가정이라면 다른 가족들이 제사 드리기 전에 먼저 화목하는 기회를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관계회복의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아직도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죄하고 미워하는 마음부터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용서하고 기다리면, 그 사람은 그 죄에서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요 20, 23).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영영 잃어버리고 말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로 인하여 사람을 잃어버리는 불행한 사건이 없어야 합니다. 용서와 사랑의 선물을 준비하여 부모님과 형제들을 만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