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어원적 의미와 예배자의 모습 마4:10,요4:23
지난주 우리는 \"예배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는 성령께서 우리 영 안에 나타날 때 가능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 보좌 앞에 전심으로 나아가면서 영혼을 하나님을 향해 여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찬양\"의 원어를 살펴보면서 노래로 찬양하는 것은 물론이고 손을 들면서, 큰 목소리로 외치면서, 엎드리거나 무릎을 꿇고 심지어 춤을 추면서도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거룩한 기대를 가지고 공중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갈 때 예배는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은 \"예배\"란 무엇일까? \"예배\"의 어원적 의미를 살펴보면서 예배자로써 모습을 배워보려고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예배의 의미로 사용된 낱말이 2개 있는데 이 두 낱말이 마 4:10 말씀에 동시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십일 금식 기도 후에 사단의 유혹을 이기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말씀하시면서 오직 한 분 참 되신 하나님께만 예배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첫 단어 \"경배\"하고에서 헬라어는 \"프로스퀘네오\"이고 두 번째 낱말인 \"섬기라\"는 할라어 \"랴르듀요\"입니다. 이 두 낱말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예배자로써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 지를 배우고자 합니다.
성경은 \"예배\"를 육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내는 용어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경배(예배)를 나타내는 프로스퀘네오(προσκυνεω)는 \"향하다\"라는 의미의 프로스와 \"입맞추다\"라는 의미의 쿠네오가 합성된 말입니다. 이 말은 \'누구누구에게 입맞추다\', \'누구누구에게 부복하다\', \'엎드리다, 승복하다, 경배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이방인들이 땅의 신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땅에 몸을 굽혀 입 맞추면서 절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손에 입 맞추기 위해 나오다라는 의미로 통치자에게 몸과 마음을 바친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경배하기 위해 납작하게 엎드리어 순종과 겸손을 나타내는 외적행위 그리고 존경심을 나타내는 내적 자세의 의미가 있습니다. 요 4:23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할 때 이 \"예배\"의 원어적 의미도 \"프로스퀘네오\"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의 태도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 그 분의 권위 앞에 완전히 엎드리면서 왕이신 그 분께 순종과 복종을 나타내는 것이 예배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분과의 온전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친밀한 관계입니다. 우리 주님은 친구이시고 스승되시고 하나님은 아바 아버지 즉 \"아빠\"처럼 친근하고 다정한 아버지이시고 성령님은 보혜사이십니다. 보혜사라는 의미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힘있게 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호칭으로는 상담자, 돕는 자, 안내자 인 것입니다. 이렇게 친밀한 관계로 있으신 분은 우리의 사고를 초월한 크신 분입니다. 온 세상의 창조자이십니다. 또한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셔서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훗날 최후의 심판자로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주님을 섬기고 경배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은 이 세상의 왕이요, 주로써 도 나 개인의 왕이요, 주로써 경배하고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인 것입니다. 그 크신 분이 나의 구원이 되시니 우리는 경배하고 찬양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예배자의 태도는 이렇게 나를 다스리기에 충분하신 그 분께 겸손하게 나아가 그 분의 권위 앞에 엎드리면서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만왕의 왕께서 임재하셔서 다스리시며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소생시키시고, 치유하시며 말씀하시고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 시간에 경배하며 주께 나아가는 모습이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 분을 찬양하며 기뻐하면서 전심으로 그 분을 찾는 예배가 적어 보이기만 합니다. 아니 오히려 구경꾼으로 앉아 있는 사람도 정직하게 많은 것 같습니다. 성가대를 구경하고 설교하는 목사님을 그냥 구경하다가 머릿속과 감정에서는 아무것도 이루워지지 않고 그냥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배의 형식에 참여한 것이지 진정한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프로스퀘네오\"의 의미와 비슷한 의미인 용어가 구약에서도 있습니다. \"샤하마\"입니다. 뜻은 \"엎드려 절하다\", \"굴복하다\"로 마음과 몸으로 존경을 표시하는 태도입니다. 이 단어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권위 앞에 겸손하게 순종함으로 나아갈 때 그분과의 온전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음을 개닫게 해 줍니다. 이 경배(샤하마)라는 낱말이 사용된 대표적 성경 사건이 창 22:1∼5 말씀입니다.
창 22:1∼5 교독
예배의 근본적인 의미가 무엇인가를 우리는 이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배란 무엇입니까? 여기보면, 아브라함은 삼일 길을 아들 이삭과 종들을 데리고 같이 왔습니다. 그러나 산 아래 왔을 때, 종을 그 아래에 두고, 모든 장작더미를 이삭의 어깨 위에 짊어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올라가면서 종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했습니다. 이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가장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받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생각하기를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시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배의 가장 첫째가는 의미는 \'나의 가장 귀한 것, 내가 가장 아끼는 그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받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있는 전부를 드리는 것이며, 헌신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장 아끼는 것인 이삭인데,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 앞에 드리러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께 가서 경배하고 돌아오리라\"고 합니다. 그때 주님은 양을 이미 준비하시고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시 99:5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이 시 한 구절을 찬송으로 작곡한 곡을 저는 즐겨 부르면서 저의 개인 예배 때 그 분께 예배할 때가 있습니다. \"주를 높일지라 여호와 하나님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하며 저는 엎드려 그 분을 경배합니다. 그때 대부분 주님께서 저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저에게 사랑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넘치는 그 사랑으로 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또 고백하지요 \"사랑해요 목소리 높여 경배해요 내 영혼 기뻐 오 나의 왕 나의 목소리 주님 귀에 곱게 곱게 들리길\"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은혜를 받으려고 예배에 온다고 말합니다. 설교 잘 들어서 은혜받아야지 생각하고 앞 시간에 우리의 드림이 있는 예배시간은 중요하게 생각지 않고 소홀히 여깁니다. 설교만 들으면 예배에 참석한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예배는 받는 것보다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자기 중심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서나 어떤 이득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며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에게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른 태도로 나아갈 때 그때 주님은 만나주시고 채워주시고 주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왜 예배시간에 드리지 못하고 받으려고만 할까요? 감사를 드리고 그 하나님께 진심으로 찬양을 드리고 경배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 예배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에게 회중 예배도 중요하지만 개인 예배가 더 강조되어져야 하는데 주일 성수만 강조되고 있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주일날 회중 예배를 드리지만 일주일 개인 예배가 무너지면 삶에 실패하고 패잔병이 되어 교회에 오게 됩니다. 그러니 무슨 찬양과 경배가 나오겠습니까? 저는 종종 주일을 제외한 6일동안의 삶이 예배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주일날 드리는 예배는 의미가 없다는 얘기를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과 반대로 살다가 주일 아침에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깊이 예배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주일 예배의 경험은 평일에 주님께 드리는 예배의 소산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출 33장을 보면 모세는 사람이 친구하고 얘기하는 것처럼 날마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얼굴을 대면하고 만났다고 했습니다. 다니엘 6장에서 다니엘은 조서에 왕의 어인이 찍힌 것을 알면서도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개인적으로 기도했던 것입니다. 막 1:35 예수님께서도 새벽 미명에 일어나서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눅 5:15 예수는 물러가사 기도하셨다고 했는데 \"물러가사\"는 원어로는 습관적으로 물러가 습관적으로 기도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진실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창조주의 손에 맡기며, 무슨 일에든지 주님 내가 어떻게 행하기를 원하십니까? 라는 말을 하루에 백번이라고 중단없이 말하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경배의 뜻은 통치자이신 하나님께 몸과 마음을 바친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공중 예배 때만 \"경배\"하라는 것이 아닌 것이죠, 삶에서 \"왕이신 그 분께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인 것이고 예배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이 불가능하게 보입니까? 우리가 이와 같은 일이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이유는 예수님을 우리의 현재의 스승으로 알지 못하고 있는데 있습니다. \"보혜사\"란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힘있게 하시는 분(나를 돕는 분)\"이란 뜻을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바 아버지 \"아빠\"로서 다정하시고 용납하시고 은혜가 많으신 분임을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동안 주님의 보호와 인도 아래 있는 체험을 가진다면 우리는 우리 생활의 모든 행동의 뿌리를 하나님께 두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고요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가운데 아침에 일어나게 되고 그리고 밤에 잠자리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루의 삶을 어떻게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제가 배우로 안 방법은 묵상입니다. 예배가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면 묵상도 예배인 것입니다. 아침 첫 시간을 경배하는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서 하나님 이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제게 말씀해 주시옵소서. 제가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제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간절히 기도하면서 말씀을 읽을 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새벽기도 시간도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필요한 것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께서 제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들으며 순종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이렇게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의 힘을 얻어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가장 좋은 것으로 유익한 것으로 사랑으로 완전하게 합당한 것으로 다스리는데 부족한 것이 없으신 분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주님께 나아가지 않는데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묵상\"모임이 시작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몇몇 그리스도인만 공유할 모임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을 왕이요 주인으로써 신실한 분임을 믿는다면 우리 교회 모든 성도가 기쁨과 소망으로 해야할 사역인 것입니다. 이 모임에 부득이한 분을 빼고 모두 참석하기를 저는 원합니다. 고전 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우리의 부르심 (Calling) = 주님과 교제케 하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High Calling = 가장 높은 소명인 것입니다. 교회 사역에, 직장에, 가정 일에, 공부에 우선 순위를 두면 영적으로 메마르게 되는 것입니다. 궁중 예배에 참석해도 무미건조하고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오래 믿어 왔는데도 그 분을 잘 모르겠다고 한다면 그 주님과 교제치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삶의 우선순위는 주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경건의 시간이나 Q.T.는 성경 묵상이지만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것입니다. 오래전 한 선교사님께 들은 말씀입니다. 사막 지대에서 선교하는 분이셨는데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없는 불모의 지대에 선교사님의 집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선교사님의 사모님께서 부엌 바로 뒤에서 아름다운 한 떨기의 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기적이 어떻게 일어난 일일까 생각해 보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모님은 설거지 할 때마다 설거지한 물을 뒤뜰의 같은 장소에 매일 버리셨다고 합니다. 늘 같은 장소에 내버리자 어느 순간 토양이 바뀌었고, 그곳에 한 씨앗이 바람에 날려와서 떨어져 어느날 갑자기 아름다운 꽃을 피워 낸 것입니다. 한순간에 생활이 바뀌는 것이 어렵다 할지라도 이렇게 말씀과 기도를 가까이 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매일 아침 5분간 성경을 일고 5분간 기도를 하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5년후, 10년후, 15년후에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많은 불평과 불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엔가 다른 사람에 의해 내 삶이 객관적으로 관찰되었을 때 \"저 친구 정말 변했다\"고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날마다 주님과 교제할 때 공중 예배가 살아납니다. 감사와 찬양과 경배가 솟아나고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어로 예배라는 의미는 worship입니다. 하나님 앞에 최상의 것을 드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어 예배도 잘 번역되어 있습니다. 예의 예(禮), 절할 배(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의를 갖추어서 절한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경배\"-공경할 경(敬), 절배(拜) = 공경한다는 것은 그 분을 높인다는 것이고, \"절 배\"는 내가 그 분 앞에 겸손하게 낮아진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에는 마음이 깃들여야 합니다. 마음이 깃들어 있지 않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이는 예배를 드렸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예배는 최상의 가치 있는 것을 최고의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히 13:15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예배를 제사라고 표현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사라고 하는 것은 희생을 의미합니다. 예배는 희생을 드리는 제사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 예배이기 때문에 그 예배를 찬미의 \"제사를 드린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배에 대해 다른 면을 말씀하신 곳도 있습니다. 그 다음절을 보면(히 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예배는 우리의 물질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상의 가치있는 것을 최고의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선을 행하는 것과 서로 나눠주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서로 물질을 나눠주는 것, 즉 선을 행하는 것과 서로 나눠주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서로 물질을 나눠주는 것, 즉 선을 행하는 것이 예배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물질은 우리의 내적 헌신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헌납의 가장 큰 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로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예배는 받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배는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롬 12장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죽은 예배가 아니라 산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시며 받기 원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몸인 것입니다. 여기서 \"예배\"라는 의미는 노예나 종이 주인을 섬긴다는 의미로써 형사형 \"라트레이아\"즉 \"섬김\"이라는 의미입니다. 마 4:4 \"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섬리라 = 동사형 \"라트류오\"입니다. 영적이라는 단어는 \"합당한\"이라고 번역하면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드릴 \"합당한 섬김\"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생활 전체를 의미합니다. 예배는 생활의 모든 경험에 하나님의 임재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뿌리인 청교도들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는 이원론을 거부했습니다. 교회에서는 거룩하고, 나가서는 멋대로 사는 것은 성도의 삶이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삶 전체가 예배다. 설교하는 일도 거룩하지만, 목동이 양떼를 지키고, 농부가 농사를 짓는 일도 거룩하다\"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심지어 직업을 \'소명\'이라고까지 물렀습니다. 천직, 곧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사명입니다. 따라서 \'있는 힘을 다해 모든 일들을 하겠노라\' 이것이 청교도들의 결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배드리는 마음으로 장사하고 예배드리는 마음으로 가르쳤습니다. 예배드리는 마음으로 모든 사회활동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회 전체가 변화되는 혁명적인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가는 곳마다 경제가 부흥되고 정직한 전통과 도덕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우리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서는 예배드린다고 하고 나가서는 완전히 예배를 떠난 이원론적인 삶을 삽니다. 어떤 교회에 부흥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부흥회 마지막날 어떤 집사의 부인이 이불을 싸들고 와서는 하는 말이 \"우리 남편은 교회 나오면 천사인데 집에만 오면 악마가 됩니다. 그래서 이불을 싸와서 교회에서 살려고 합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이게 우리의 삶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천사의 모습, 거룩한 모습인데 교회 밖에만 나가면 야수로 변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주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나가서도 예배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개인 예배가 살 때 생활 예배가 살아나고 공중 예배가 부흥합니다.
저는 이제 이 세대를 본받기를 거절하고 이 세대 속에 빛나고 아름다운 증거를 남겼던 미국의 한 크리스천의 얘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오페라 가수였던 제롬 하인즈의 소원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의 오페라 무대 위에 서서 노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목표를 향해서 피나는 연습을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가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페라단의 가수가 되자마자 자신이 그 동안 추구해 온 것이 겨우 이것이었단 말인가 하며 말할 수 없는 공허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그 는 자신의 뉴욕의 아파트에서 공허한 가슴을 달래기 위해 텔레비전을 켰습니다. 그런데 텔레비전에서는 마침 빌리 그래함 목사의 전도대회가 방영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시작되기 직전에 한 분이 나와서 찬양을 시작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조지 베벌리 쉐아라는 분이 바리톤의 영감있는 목소리로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롬 하인즈는 충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저 사람도 나처럼 자신의 길을 걸어갔으면 내가 설 수 있는 무대에서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인데 왜 저기서 저런 노래를 부를까!\' 그는 의아해 하며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설교 말씀을 통해서 죄악 속에 있었던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 자백하고 텔레비전 브라운관 앞에서 하나님께 항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이제 그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변하자 많은 사람들로부터 충고가 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당신은 오페라 무대를 떠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혹 어떤 사람은 오페라 무대는 당신과 같은 사람이 필요하니까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노래하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는 고민 끝에 오페라 무대에 계속 서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의 박수 갈채를 즐기거나 자신이 스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목소리가 어떤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기 위해서 그는 오페라 무대에 당당하게 서서 창조의 하나님을 계속해서 노래하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는 거의 10년간 탁월한 오페라 가수로서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았으며 주께 영광을 돌리면서 오페라 가수로서의 삶을 지속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오랫동안 소원하던 오페라 작품의 주인공으로 뽑히게 되었습니다. 계약서에 사인한 후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연습 중 서곡에서 춤이 나오는데 그 춤은 거의 나체의 몸으로 춰야했습니다. 본래의 작품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기 때문에 왜 이런 내용이 필요하냐고 묻자 오페라 감독의 말이 현대인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이런 방법이 필요하다는 대답이었습니다. 또한 자기가 부르는 노래의 가사 가운데에는 저질스런 욕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이 아파서 원래 이런 가사가 없지 않았느냐고 항의하며 부를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감독은 현대 오페라에서는 이것이 필요하고 현대인들은 이것을 원한다고 강요했고 부르기 원치 않으면 매니저를 찾아가 보라고 했습니다. 그는 당시의 유명한 빙이라는 매니저를 찾아가서 항의를 했습니다.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하자 그는 그렇다면 할 수 없다며 다른 사람을 쓰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롬 하인즈가 계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막대한 벌금을 지불하고 오페라의 가수직을 떠났습니다. 그의 간증집을 보면 그는 오페라단 사무실에서 사표를 던지고 나오는 그 순간 이 세상에 태어나서 최초로 진정한 기쁨을 경험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해가 저무는 뉴욕의 밤거리를 걸어 나오면서 그는 자기에게 감동을 주어 자신을 변화시켰던 조지 베벌리 쉐아의 복음성가를 밤 하늘을 향해서 홀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도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여러분, 제롬 하인즈는 실패자요 어리석은 사람일까요? 세상은 그를 냉소할지 모르나 그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진정한 자유와 참된 기쁨을 경험한, 이 세상에서 승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본받는 유혹에서 승리하였고 지금도 주님을 위한 사역자로 귀하게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당신과 나의 삶은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예배는 \"경배\"하고 \"섬김\"입니다. 예배는 거룩한 기대 가운데 시작되는 것처럼 거룩한 순종 가운데 끝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를 섬기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말입니다. 제목 : 예배의 어원적 의미와 예배자의 모습 본문 : 마 4:10, 요 4:23
지난주 우리는 \"예배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는 성령께서 우리 영 안에 나타날 때 가능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 보좌 앞에 전심으로 나아가면서 영혼을 하나님을 향해 여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찬양\"의 원어를 살펴보면서 노래로 찬양하는 것은 물론이고 손을 들면서, 큰 목소리로 외치면서, 엎드리거나 무릎을 꿇고 심지어 춤을 추면서도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거룩한 기대를 가지고 공중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갈 때 예배는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은 \"예배\"란 무엇일까? \"예배\"의 어원적 의미를 살펴보면서 예배자로써 모습을 배워보려고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예배의 의미로 사용된 낱말이 2개 있는데 이 두 낱말이 마 4:10 말씀에 동시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십일 금식 기도 후에 사단의 유혹을 이기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말씀하시면서 오직 한 분 참 되신 하나님께만 예배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첫 단어 \"경배\"하고에서 헬라어는 \"프로스퀘네오\"이고 두 번째 낱말인 \"섬기라\"는 할라어 \"랴르듀요\"입니다. 이 두 낱말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예배자로써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 지를 배우고자 합니다.
성경은 \"예배\"를 육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내는 용어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경배(예배)를 나타내는 프로스퀘네오(προσκυνεω)는 \"향하다\"라는 의미의 프로스와 \"입맞추다\"라는 의미의 쿠네오가 합성된 말입니다. 이 말은 \'누구누구에게 입맞추다\', \'누구누구에게 부복하다\', \'엎드리다, 승복하다, 경배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이방인들이 땅의 신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땅에 몸을 굽혀 입 맞추면서 절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손에 입 맞추기 위해 나오다라는 의미로 통치자에게 몸과 마음을 바친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경배하기 위해 납작하게 엎드리어 순종과 겸손을 나타내는 외적행위 그리고 존경심을 나타내는 내적 자세의 의미가 있습니다. 요 4:23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할 때 이 \"예배\"의 원어적 의미도 \"프로스퀘네오\"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의 태도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 그 분의 권위 앞에 완전히 엎드리면서 왕이신 그 분께 순종과 복종을 나타내는 것이 예배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분과의 온전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친밀한 관계입니다. 우리 주님은 친구이시고 스승되시고 하나님은 아바 아버지 즉 \"아빠\"처럼 친근하고 다정한 아버지이시고 성령님은 보혜사이십니다. 보혜사라는 의미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힘있게 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호칭으로는 상담자, 돕는 자, 안내자 인 것입니다. 이렇게 친밀한 관계로 있으신 분은 우리의 사고를 초월한 크신 분입니다. 온 세상의 창조자이십니다. 또한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셔서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훗날 최후의 심판자로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주님을 섬기고 경배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은 이 세상의 왕이요, 주로써 도 나 개인의 왕이요, 주로써 경배하고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인 것입니다. 그 크신 분이 나의 구원이 되시니 우리는 경배하고 찬양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예배자의 태도는 이렇게 나를 다스리기에 충분하신 그 분께 겸손하게 나아가 그 분의 권위 앞에 엎드리면서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만왕의 왕께서 임재하셔서 다스리시며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소생시키시고, 치유하시며 말씀하시고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 시간에 경배하며 주께 나아가는 모습이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 분을 찬양하며 기뻐하면서 전심으로 그 분을 찾는 예배가 적어 보이기만 합니다. 아니 오히려 구경꾼으로 앉아 있는 사람도 정직하게 많은 것 같습니다. 성가대를 구경하고 설교하는 목사님을 그냥 구경하다가 머릿속과 감정에서는 아무것도 이루워지지 않고 그냥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배의 형식에 참여한 것이지 진정한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프로스퀘네오\"의 의미와 비슷한 의미인 용어가 구약에서도 있습니다. \"샤하마\"입니다. 뜻은 \"엎드려 절하다\", \"굴복하다\"로 마음과 몸으로 존경을 표시하는 태도입니다. 이 단어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권위 앞에 겸손하게 순종함으로 나아갈 때 그분과의 온전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음을 개닫게 해 줍니다. 이 경배(샤하마)라는 낱말이 사용된 대표적 성경 사건이 창 22:1∼5 말씀입니다.
창 22:1∼5 교독
예배의 근본적인 의미가 무엇인가를 우리는 이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배란 무엇입니까? 여기보면, 아브라함은 삼일 길을 아들 이삭과 종들을 데리고 같이 왔습니다. 그러나 산 아래 왔을 때, 종을 그 아래에 두고, 모든 장작더미를 이삭의 어깨 위에 짊어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올라가면서 종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했습니다. 이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가장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받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생각하기를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시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배의 가장 첫째가는 의미는 \'나의 가장 귀한 것, 내가 가장 아끼는 그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받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있는 전부를 드리는 것이며, 헌신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장 아끼는 것인 이삭인데,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 앞에 드리러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께 가서 경배하고 돌아오리라\"고 합니다. 그때 주님은 양을 이미 준비하시고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시 99:5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이 시 한 구절을 찬송으로 작곡한 곡을 저는 즐겨 부르면서 저의 개인 예배 때 그 분께 예배할 때가 있습니다. \"주를 높일지라 여호와 하나님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하며 저는 엎드려 그 분을 경배합니다. 그때 대부분 주님께서 저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저에게 사랑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넘치는 그 사랑으로 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또 고백하지요 \"사랑해요 목소리 높여 경배해요 내 영혼 기뻐 오 나의 왕 나의 목소리 주님 귀에 곱게 곱게 들리길\"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은혜를 받으려고 예배에 온다고 말합니다. 설교 잘 들어서 은혜받아야지 생각하고 앞 시간에 우리의 드림이 있는 예배시간은 중요하게 생각지 않고 소홀히 여깁니다. 설교만 들으면 예배에 참석한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예배는 받는 것보다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자기 중심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서나 어떤 이득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며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에게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른 태도로 나아갈 때 그때 주님은 만나주시고 채워주시고 주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왜 예배시간에 드리지 못하고 받으려고만 할까요? 감사를 드리고 그 하나님께 진심으로 찬양을 드리고 경배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 예배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에게 회중 예배도 중요하지만 개인 예배가 더 강조되어져야 하는데 주일 성수만 강조되고 있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주일날 회중 예배를 드리지만 일주일 개인 예배가 무너지면 삶에 실패하고 패잔병이 되어 교회에 오게 됩니다. 그러니 무슨 찬양과 경배가 나오겠습니까? 저는 종종 주일을 제외한 6일동안의 삶이 예배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주일날 드리는 예배는 의미가 없다는 얘기를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과 반대로 살다가 주일 아침에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깊이 예배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주일 예배의 경험은 평일에 주님께 드리는 예배의 소산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출 33장을 보면 모세는 사람이 친구하고 얘기하는 것처럼 날마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얼굴을 대면하고 만났다고 했습니다. 다니엘 6장에서 다니엘은 조서에 왕의 어인이 찍힌 것을 알면서도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개인적으로 기도했던 것입니다. 막 1:35 예수님께서도 새벽 미명에 일어나서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눅 5:15 예수는 물러가사 기도하셨다고 했는데 \"물러가사\"는 원어로는 습관적으로 물러가 습관적으로 기도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진실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창조주의 손에 맡기며, 무슨 일에든지 주님 내가 어떻게 행하기를 원하십니까? 라는 말을 하루에 백번이라고 중단없이 말하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경배의 뜻은 통치자이신 하나님께 몸과 마음을 바친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공중 예배 때만 \"경배\"하라는 것이 아닌 것이죠, 삶에서 \"왕이신 그 분께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인 것이고 예배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이 불가능하게 보입니까? 우리가 이와 같은 일이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이유는 예수님을 우리의 현재의 스승으로 알지 못하고 있는데 있습니다. \"보혜사\"란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힘있게 하시는 분(나를 돕는 분)\"이란 뜻을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바 아버지 \"아빠\"로서 다정하시고 용납하시고 은혜가 많으신 분임을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동안 주님의 보호와 인도 아래 있는 체험을 가진다면 우리는 우리 생활의 모든 행동의 뿌리를 하나님께 두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고요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가운데 아침에 일어나게 되고 그리고 밤에 잠자리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루의 삶을 어떻게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제가 배우로 안 방법은 묵상입니다. 예배가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면 묵상도 예배인 것입니다. 아침 첫 시간을 경배하는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서 하나님 이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제게 말씀해 주시옵소서. 제가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제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간절히 기도하면서 말씀을 읽을 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새벽기도 시간도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필요한 것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께서 제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들으며 순종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이렇게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의 힘을 얻어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가장 좋은 것으로 유익한 것으로 사랑으로 완전하게 합당한 것으로 다스리는데 부족한 것이 없으신 분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주님께 나아가지 않는데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묵상\"모임이 시작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몇몇 그리스도인만 공유할 모임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을 왕이요 주인으로써 신실한 분임을 믿는다면 우리 교회 모든 성도가 기쁨과 소망으로 해야할 사역인 것입니다. 이 모임에 부득이한 분을 빼고 모두 참석하기를 저는 원합니다. 고전 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우리의 부르심 (Calling) = 주님과 교제케 하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High Calling = 가장 높은 소명인 것입니다. 교회 사역에, 직장에, 가정 일에, 공부에 우선 순위를 두면 영적으로 메마르게 되는 것입니다. 궁중 예배에 참석해도 무미건조하고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오래 믿어 왔는데도 그 분을 잘 모르겠다고 한다면 그 주님과 교제치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삶의 우선순위는 주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경건의 시간이나 Q.T.는 성경 묵상이지만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것입니다. 오래전 한 선교사님께 들은 말씀입니다. 사막 지대에서 선교하는 분이셨는데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없는 불모의 지대에 선교사님의 집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선교사님의 사모님께서 부엌 바로 뒤에서 아름다운 한 떨기의 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기적이 어떻게 일어난 일일까 생각해 보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모님은 설거지 할 때마다 설거지한 물을 뒤뜰의 같은 장소에 매일 버리셨다고 합니다. 늘 같은 장소에 내버리자 어느 순간 토양이 바뀌었고, 그곳에 한 씨앗이 바람에 날려와서 떨어져 어느날 갑자기 아름다운 꽃을 피워 낸 것입니다. 한순간에 생활이 바뀌는 것이 어렵다 할지라도 이렇게 말씀과 기도를 가까이 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매일 아침 5분간 성경을 일고 5분간 기도를 하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5년후, 10년후, 15년후에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많은 불평과 불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엔가 다른 사람에 의해 내 삶이 객관적으로 관찰되었을 때 \"저 친구 정말 변했다\"고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날마다 주님과 교제할 때 공중 예배가 살아납니다. 감사와 찬양과 경배가 솟아나고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어로 예배라는 의미는 worship입니다. 하나님 앞에 최상의 것을 드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어 예배도 잘 번역되어 있습니다. 예의 예(禮), 절할 배(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의를 갖추어서 절한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경배\"-공경할 경(敬), 절배(拜) = 공경한다는 것은 그 분을 높인다는 것이고, \"절 배\"는 내가 그 분 앞에 겸손하게 낮아진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에는 마음이 깃들여야 합니다. 마음이 깃들어 있지 않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이는 예배를 드렸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예배는 최상의 가치 있는 것을 최고의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히 13:15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예배를 제사라고 표현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사라고 하는 것은 희생을 의미합니다. 예배는 희생을 드리는 제사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 예배이기 때문에 그 예배를 찬미의 \"제사를 드린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배에 대해 다른 면을 말씀하신 곳도 있습니다. 그 다음절을 보면(히 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예배는 우리의 물질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상의 가치있는 것을 최고의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선을 행하는 것과 서로 나눠주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서로 물질을 나눠주는 것, 즉 선을 행하는 것과 서로 나눠주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서로 물질을 나눠주는 것, 즉 선을 행하는 것이 예배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물질은 우리의 내적 헌신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헌납의 가장 큰 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로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예배는 받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배는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롬 12장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죽은 예배가 아니라 산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시며 받기 원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몸인 것입니다. 여기서 \"예배\"라는 의미는 노예나 종이 주인을 섬긴다는 의미로써 형사형 \"라트레이아\"즉 \"섬김\"이라는 의미입니다. 마 4:4 \"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섬리라 = 동사형 \"라트류오\"입니다. 영적이라는 단어는 \"합당한\"이라고 번역하면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드릴 \"합당한 섬김\"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생활 전체를 의미합니다. 예배는 생활의 모든 경험에 하나님의 임재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뿌리인 청교도들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는 이원론을 거부했습니다. 교회에서는 거룩하고, 나가서는 멋대로 사는 것은 성도의 삶이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삶 전체가 예배다. 설교하는 일도 거룩하지만, 목동이 양떼를 지키고, 농부가 농사를 짓는 일도 거룩하다\"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심지어 직업을 \'소명\'이라고까지 물렀습니다. 천직, 곧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사명입니다. 따라서 \'있는 힘을 다해 모든 일들을 하겠노라\' 이것이 청교도들의 결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배드리는 마음으로 장사하고 예배드리는 마음으로 가르쳤습니다. 예배드리는 마음으로 모든 사회활동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회 전체가 변화되는 혁명적인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가는 곳마다 경제가 부흥되고 정직한 전통과 도덕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우리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서는 예배드린다고 하고 나가서는 완전히 예배를 떠난 이원론적인 삶을 삽니다. 어떤 교회에 부흥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부흥회 마지막날 어떤 집사의 부인이 이불을 싸들고 와서는 하는 말이 \"우리 남편은 교회 나오면 천사인데 집에만 오면 악마가 됩니다. 그래서 이불을 싸와서 교회에서 살려고 합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이게 우리의 삶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천사의 모습, 거룩한 모습인데 교회 밖에만 나가면 야수로 변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주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나가서도 예배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개인 예배가 살 때 생활 예배가 살아나고 공중 예배가 부흥합니다.
저는 이제 이 세대를 본받기를 거절하고 이 세대 속에 빛나고 아름다운 증거를 남겼던 미국의 한 크리스천의 얘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오페라 가수였던 제롬 하인즈의 소원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의 오페라 무대 위에 서서 노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목표를 향해서 피나는 연습을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가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페라단의 가수가 되자마자 자신이 그 동안 추구해 온 것이 겨우 이것이었단 말인가 하며 말할 수 없는 공허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그 는 자신의 뉴욕의 아파트에서 공허한 가슴을 달래기 위해 텔레비전을 켰습니다. 그런데 텔레비전에서는 마침 빌리 그래함 목사의 전도대회가 방영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시작되기 직전에 한 분이 나와서 찬양을 시작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조지 베벌리 쉐아라는 분이 바리톤의 영감있는 목소리로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롬 하인즈는 충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저 사람도 나처럼 자신의 길을 걸어갔으면 내가 설 수 있는 무대에서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인데 왜 저기서 저런 노래를 부를까!\' 그는 의아해 하며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설교 말씀을 통해서 죄악 속에 있었던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 자백하고 텔레비전 브라운관 앞에서 하나님께 항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이제 그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변하자 많은 사람들로부터 충고가 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당신은 오페라 무대를 떠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혹 어떤 사람은 오페라 무대는 당신과 같은 사람이 필요하니까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노래하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는 고민 끝에 오페라 무대에 계속 서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의 박수 갈채를 즐기거나 자신이 스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목소리가 어떤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기 위해서 그는 오페라 무대에 당당하게 서서 창조의 하나님을 계속해서 노래하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는 거의 10년간 탁월한 오페라 가수로서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았으며 주께 영광을 돌리면서 오페라 가수로서의 삶을 지속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오랫동안 소원하던 오페라 작품의 주인공으로 뽑히게 되었습니다. 계약서에 사인한 후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연습 중 서곡에서 춤이 나오는데 그 춤은 거의 나체의 몸으로 춰야했습니다. 본래의 작품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기 때문에 왜 이런 내용이 필요하냐고 묻자 오페라 감독의 말이 현대인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이런 방법이 필요하다는 대답이었습니다. 또한 자기가 부르는 노래의 가사 가운데에는 저질스런 욕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이 아파서 원래 이런 가사가 없지 않았느냐고 항의하며 부를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감독은 현대 오페라에서는 이것이 필요하고 현대인들은 이것을 원한다고 강요했고 부르기 원치 않으면 매니저를 찾아가 보라고 했습니다. 그는 당시의 유명한 빙이라는 매니저를 찾아가서 항의를 했습니다.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하자 그는 그렇다면 할 수 없다며 다른 사람을 쓰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롬 하인즈가 계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막대한 벌금을 지불하고 오페라의 가수직을 떠났습니다. 그의 간증집을 보면 그는 오페라단 사무실에서 사표를 던지고 나오는 그 순간 이 세상에 태어나서 최초로 진정한 기쁨을 경험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해가 저무는 뉴욕의 밤거리를 걸어 나오면서 그는 자기에게 감동을 주어 자신을 변화시켰던 조지 베벌리 쉐아의 복음성가를 밤 하늘을 향해서 홀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도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여러분, 제롬 하인즈는 실패자요 어리석은 사람일까요? 세상은 그를 냉소할지 모르나 그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진정한 자유와 참된 기쁨을 경험한, 이 세상에서 승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본받는 유혹에서 승리하였고 지금도 주님을 위한 사역자로 귀하게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당신과 나의 삶은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예배는 \"경배\"하고 \"섬김\"입니다. 예배는 거룩한 기대 가운데 시작되는 것처럼 거룩한 순종 가운데 끝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를 섬기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말입니다. 제목 : 예배의 어원적 의미와 예배자의 모습 본문 : 마 4:10, 요 4:23
지난주 우리는 \"예배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는 성령께서 우리 영 안에 나타날 때 가능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 보좌 앞에 전심으로 나아가면서 영혼을 하나님을 향해 여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찬양\"의 원어를 살펴보면서 노래로 찬양하는 것은 물론이고 손을 들면서, 큰 목소리로 외치면서, 엎드리거나 무릎을 꿇고 심지어 춤을 추면서도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거룩한 기대를 가지고 공중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갈 때 예배는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은 \"예배\"란 무엇일까? \"예배\"의 어원적 의미를 살펴보면서 예배자로써 모습을 배워보려고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예배의 의미로 사용된 낱말이 2개 있는데 이 두 낱말이 마 4:10 말씀에 동시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십일 금식 기도 후에 사단의 유혹을 이기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말씀하시면서 오직 한 분 참 되신 하나님께만 예배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첫 단어 \"경배\"하고에서 헬라어는 \"프로스퀘네오\"이고 두 번째 낱말인 \"섬기라\"는 할라어 \"랴르듀요\"입니다. 이 두 낱말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예배자로써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 지를 배우고자 합니다.
성경은 \"예배\"를 육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내는 용어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경배(예배)를 나타내는 프로스퀘네오(προσκυνεω)는 \"향하다\"라는 의미의 프로스와 \"입맞추다\"라는 의미의 쿠네오가 합성된 말입니다. 이 말은 \'누구누구에게 입맞추다\', \'누구누구에게 부복하다\', \'엎드리다, 승복하다, 경배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이방인들이 땅의 신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땅에 몸을 굽혀 입 맞추면서 절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손에 입 맞추기 위해 나오다라는 의미로 통치자에게 몸과 마음을 바친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경배하기 위해 납작하게 엎드리어 순종과 겸손을 나타내는 외적행위 그리고 존경심을 나타내는 내적 자세의 의미가 있습니다. 요 4:23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할 때 이 \"예배\"의 원어적 의미도 \"프로스퀘네오\"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의 태도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 그 분의 권위 앞에 완전히 엎드리면서 왕이신 그 분께 순종과 복종을 나타내는 것이 예배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분과의 온전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친밀한 관계입니다. 우리 주님은 친구이시고 스승되시고 하나님은 아바 아버지 즉 \"아빠\"처럼 친근하고 다정한 아버지이시고 성령님은 보혜사이십니다. 보혜사라는 의미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힘있게 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호칭으로는 상담자, 돕는 자, 안내자 인 것입니다. 이렇게 친밀한 관계로 있으신 분은 우리의 사고를 초월한 크신 분입니다. 온 세상의 창조자이십니다. 또한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셔서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훗날 최후의 심판자로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주님을 섬기고 경배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은 이 세상의 왕이요, 주로써 도 나 개인의 왕이요, 주로써 경배하고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인 것입니다. 그 크신 분이 나의 구원이 되시니 우리는 경배하고 찬양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예배자의 태도는 이렇게 나를 다스리기에 충분하신 그 분께 겸손하게 나아가 그 분의 권위 앞에 엎드리면서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만왕의 왕께서 임재하셔서 다스리시며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소생시키시고, 치유하시며 말씀하시고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 시간에 경배하며 주께 나아가는 모습이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 분을 찬양하며 기뻐하면서 전심으로 그 분을 찾는 예배가 적어 보이기만 합니다. 아니 오히려 구경꾼으로 앉아 있는 사람도 정직하게 많은 것 같습니다. 성가대를 구경하고 설교하는 목사님을 그냥 구경하다가 머릿속과 감정에서는 아무것도 이루워지지 않고 그냥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배의 형식에 참여한 것이지 진정한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프로스퀘네오\"의 의미와 비슷한 의미인 용어가 구약에서도 있습니다. \"샤하마\"입니다. 뜻은 \"엎드려 절하다\", \"굴복하다\"로 마음과 몸으로 존경을 표시하는 태도입니다. 이 단어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권위 앞에 겸손하게 순종함으로 나아갈 때 그분과의 온전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음을 개닫게 해 줍니다. 이 경배(샤하마)라는 낱말이 사용된 대표적 성경 사건이 창 22:1∼5 말씀입니다.
창 22:1∼5 교독
예배의 근본적인 의미가 무엇인가를 우리는 이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배란 무엇입니까? 여기보면, 아브라함은 삼일 길을 아들 이삭과 종들을 데리고 같이 왔습니다. 그러나 산 아래 왔을 때, 종을 그 아래에 두고, 모든 장작더미를 이삭의 어깨 위에 짊어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올라가면서 종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했습니다. 이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가장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받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생각하기를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시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배의 가장 첫째가는 의미는 \'나의 가장 귀한 것, 내가 가장 아끼는 그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받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있는 전부를 드리는 것이며, 헌신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장 아끼는 것인 이삭인데,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 앞에 드리러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께 가서 경배하고 돌아오리라\"고 합니다. 그때 주님은 양을 이미 준비하시고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시 99:5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이 시 한 구절을 찬송으로 작곡한 곡을 저는 즐겨 부르면서 저의 개인 예배 때 그 분께 예배할 때가 있습니다. \"주를 높일지라 여호와 하나님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하며 저는 엎드려 그 분을 경배합니다. 그때 대부분 주님께서 저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저에게 사랑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넘치는 그 사랑으로 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또 고백하지요 \"사랑해요 목소리 높여 경배해요 내 영혼 기뻐 오 나의 왕 나의 목소리 주님 귀에 곱게 곱게 들리길\"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은혜를 받으려고 예배에 온다고 말합니다. 설교 잘 들어서 은혜받아야지 생각하고 앞 시간에 우리의 드림이 있는 예배시간은 중요하게 생각지 않고 소홀히 여깁니다. 설교만 들으면 예배에 참석한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예배는 받는 것보다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자기 중심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서나 어떤 이득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며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에게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른 태도로 나아갈 때 그때 주님은 만나주시고 채워주시고 주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왜 예배시간에 드리지 못하고 받으려고만 할까요? 감사를 드리고 그 하나님께 진심으로 찬양을 드리고 경배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 예배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에게 회중 예배도 중요하지만 개인 예배가 더 강조되어져야 하는데 주일 성수만 강조되고 있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주일날 회중 예배를 드리지만 일주일 개인 예배가 무너지면 삶에 실패하고 패잔병이 되어 교회에 오게 됩니다. 그러니 무슨 찬양과 경배가 나오겠습니까? 저는 종종 주일을 제외한 6일동안의 삶이 예배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주일날 드리는 예배는 의미가 없다는 얘기를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과 반대로 살다가 주일 아침에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깊이 예배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주일 예배의 경험은 평일에 주님께 드리는 예배의 소산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출 33장을 보면 모세는 사람이 친구하고 얘기하는 것처럼 날마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얼굴을 대면하고 만났다고 했습니다. 다니엘 6장에서 다니엘은 조서에 왕의 어인이 찍힌 것을 알면서도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개인적으로 기도했던 것입니다. 막 1:35 예수님께서도 새벽 미명에 일어나서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눅 5:15 예수는 물러가사 기도하셨다고 했는데 \"물러가사\"는 원어로는 습관적으로 물러가 습관적으로 기도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진실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창조주의 손에 맡기며, 무슨 일에든지 주님 내가 어떻게 행하기를 원하십니까? 라는 말을 하루에 백번이라고 중단없이 말하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경배의 뜻은 통치자이신 하나님께 몸과 마음을 바친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공중 예배 때만 \"경배\"하라는 것이 아닌 것이죠, 삶에서 \"왕이신 그 분께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인 것이고 예배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이 불가능하게 보입니까? 우리가 이와 같은 일이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이유는 예수님을 우리의 현재의 스승으로 알지 못하고 있는데 있습니다. \"보혜사\"란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힘있게 하시는 분(나를 돕는 분)\"이란 뜻을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바 아버지 \"아빠\"로서 다정하시고 용납하시고 은혜가 많으신 분임을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동안 주님의 보호와 인도 아래 있는 체험을 가진다면 우리는 우리 생활의 모든 행동의 뿌리를 하나님께 두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고요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가운데 아침에 일어나게 되고 그리고 밤에 잠자리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루의 삶을 어떻게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제가 배우로 안 방법은 묵상입니다. 예배가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면 묵상도 예배인 것입니다. 아침 첫 시간을 경배하는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서 하나님 이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제게 말씀해 주시옵소서. 제가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제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간절히 기도하면서 말씀을 읽을 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새벽기도 시간도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필요한 것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께서 제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들으며 순종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이렇게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의 힘을 얻어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가장 좋은 것으로 유익한 것으로 사랑으로 완전하게 합당한 것으로 다스리는데 부족한 것이 없으신 분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주님께 나아가지 않는데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묵상\"모임이 시작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몇몇 그리스도인만 공유할 모임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을 왕이요 주인으로써 신실한 분임을 믿는다면 우리 교회 모든 성도가 기쁨과 소망으로 해야할 사역인 것입니다. 이 모임에 부득이한 분을 빼고 모두 참석하기를 저는 원합니다. 고전 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우리의 부르심 (Calling) = 주님과 교제케 하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High Calling = 가장 높은 소명인 것입니다. 교회 사역에, 직장에, 가정 일에, 공부에 우선 순위를 두면 영적으로 메마르게 되는 것입니다. 궁중 예배에 참석해도 무미건조하고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오래 믿어 왔는데도 그 분을 잘 모르겠다고 한다면 그 주님과 교제치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삶의 우선순위는 주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경건의 시간이나 Q.T.는 성경 묵상이지만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것입니다. 오래전 한 선교사님께 들은 말씀입니다. 사막 지대에서 선교하는 분이셨는데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없는 불모의 지대에 선교사님의 집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선교사님의 사모님께서 부엌 바로 뒤에서 아름다운 한 떨기의 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기적이 어떻게 일어난 일일까 생각해 보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모님은 설거지 할 때마다 설거지한 물을 뒤뜰의 같은 장소에 매일 버리셨다고 합니다. 늘 같은 장소에 내버리자 어느 순간 토양이 바뀌었고, 그곳에 한 씨앗이 바람에 날려와서 떨어져 어느날 갑자기 아름다운 꽃을 피워 낸 것입니다. 한순간에 생활이 바뀌는 것이 어렵다 할지라도 이렇게 말씀과 기도를 가까이 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매일 아침 5분간 성경을 일고 5분간 기도를 하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5년후, 10년후, 15년후에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많은 불평과 불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엔가 다른 사람에 의해 내 삶이 객관적으로 관찰되었을 때 \"저 친구 정말 변했다\"고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날마다 주님과 교제할 때 공중 예배가 살아납니다. 감사와 찬양과 경배가 솟아나고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어로 예배라는 의미는 worship입니다. 하나님 앞에 최상의 것을 드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어 예배도 잘 번역되어 있습니다. 예의 예(禮), 절할 배(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의를 갖추어서 절한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경배\"-공경할 경(敬), 절배(拜) = 공경한다는 것은 그 분을 높인다는 것이고, \"절 배\"는 내가 그 분 앞에 겸손하게 낮아진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에는 마음이 깃들여야 합니다. 마음이 깃들어 있지 않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이는 예배를 드렸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예배는 최상의 가치 있는 것을 최고의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히 13:15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예배를 제사라고 표현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사라고 하는 것은 희생을 의미합니다. 예배는 희생을 드리는 제사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 예배이기 때문에 그 예배를 찬미의 \"제사를 드린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배에 대해 다른 면을 말씀하신 곳도 있습니다. 그 다음절을 보면(히 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예배는 우리의 물질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상의 가치있는 것을 최고의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선을 행하는 것과 서로 나눠주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서로 물질을 나눠주는 것, 즉 선을 행하는 것과 서로 나눠주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서로 물질을 나눠주는 것, 즉 선을 행하는 것이 예배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물질은 우리의 내적 헌신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헌납의 가장 큰 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로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예배는 받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배는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롬 12장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죽은 예배가 아니라 산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시며 받기 원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몸인 것입니다. 여기서 \"예배\"라는 의미는 노예나 종이 주인을 섬긴다는 의미로써 형사형 \"라트레이아\"즉 \"섬김\"이라는 의미입니다. 마 4:4 \"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섬리라 = 동사형 \"라트류오\"입니다. 영적이라는 단어는 \"합당한\"이라고 번역하면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드릴 \"합당한 섬김\"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생활 전체를 의미합니다. 예배는 생활의 모든 경험에 하나님의 임재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뿌리인 청교도들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는 이원론을 거부했습니다. 교회에서는 거룩하고, 나가서는 멋대로 사는 것은 성도의 삶이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삶 전체가 예배다. 설교하는 일도 거룩하지만, 목동이 양떼를 지키고, 농부가 농사를 짓는 일도 거룩하다\"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심지어 직업을 \'소명\'이라고까지 물렀습니다. 천직, 곧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사명입니다. 따라서 \'있는 힘을 다해 모든 일들을 하겠노라\' 이것이 청교도들의 결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배드리는 마음으로 장사하고 예배드리는 마음으로 가르쳤습니다. 예배드리는 마음으로 모든 사회활동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회 전체가 변화되는 혁명적인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가는 곳마다 경제가 부흥되고 정직한 전통과 도덕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우리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서는 예배드린다고 하고 나가서는 완전히 예배를 떠난 이원론적인 삶을 삽니다. 어떤 교회에 부흥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부흥회 마지막날 어떤 집사의 부인이 이불을 싸들고 와서는 하는 말이 \"우리 남편은 교회 나오면 천사인데 집에만 오면 악마가 됩니다. 그래서 이불을 싸와서 교회에서 살려고 합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이게 우리의 삶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천사의 모습, 거룩한 모습인데 교회 밖에만 나가면 야수로 변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주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나가서도 예배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개인 예배가 살 때 생활 예배가 살아나고 공중 예배가 부흥합니다.
저는 이제 이 세대를 본받기를 거절하고 이 세대 속에 빛나고 아름다운 증거를 남겼던 미국의 한 크리스천의 얘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오페라 가수였던 제롬 하인즈의 소원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의 오페라 무대 위에 서서 노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목표를 향해서 피나는 연습을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가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페라단의 가수가 되자마자 자신이 그 동안 추구해 온 것이 겨우 이것이었단 말인가 하며 말할 수 없는 공허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그 는 자신의 뉴욕의 아파트에서 공허한 가슴을 달래기 위해 텔레비전을 켰습니다. 그런데 텔레비전에서는 마침 빌리 그래함 목사의 전도대회가 방영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시작되기 직전에 한 분이 나와서 찬양을 시작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조지 베벌리 쉐아라는 분이 바리톤의 영감있는 목소리로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롬 하인즈는 충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저 사람도 나처럼 자신의 길을 걸어갔으면 내가 설 수 있는 무대에서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인데 왜 저기서 저런 노래를 부를까!\' 그는 의아해 하며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설교 말씀을 통해서 죄악 속에 있었던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 자백하고 텔레비전 브라운관 앞에서 하나님께 항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이제 그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변하자 많은 사람들로부터 충고가 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당신은 오페라 무대를 떠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혹 어떤 사람은 오페라 무대는 당신과 같은 사람이 필요하니까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노래하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는 고민 끝에 오페라 무대에 계속 서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의 박수 갈채를 즐기거나 자신이 스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목소리가 어떤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기 위해서 그는 오페라 무대에 당당하게 서서 창조의 하나님을 계속해서 노래하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는 거의 10년간 탁월한 오페라 가수로서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았으며 주께 영광을 돌리면서 오페라 가수로서의 삶을 지속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오랫동안 소원하던 오페라 작품의 주인공으로 뽑히게 되었습니다. 계약서에 사인한 후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연습 중 서곡에서 춤이 나오는데 그 춤은 거의 나체의 몸으로 춰야했습니다. 본래의 작품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기 때문에 왜 이런 내용이 필요하냐고 묻자 오페라 감독의 말이 현대인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이런 방법이 필요하다는 대답이었습니다. 또한 자기가 부르는 노래의 가사 가운데에는 저질스런 욕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이 아파서 원래 이런 가사가 없지 않았느냐고 항의하며 부를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감독은 현대 오페라에서는 이것이 필요하고 현대인들은 이것을 원한다고 강요했고 부르기 원치 않으면 매니저를 찾아가 보라고 했습니다. 그는 당시의 유명한 빙이라는 매니저를 찾아가서 항의를 했습니다.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하자 그는 그렇다면 할 수 없다며 다른 사람을 쓰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롬 하인즈가 계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막대한 벌금을 지불하고 오페라의 가수직을 떠났습니다. 그의 간증집을 보면 그는 오페라단 사무실에서 사표를 던지고 나오는 그 순간 이 세상에 태어나서 최초로 진정한 기쁨을 경험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해가 저무는 뉴욕의 밤거리를 걸어 나오면서 그는 자기에게 감동을 주어 자신을 변화시켰던 조지 베벌리 쉐아의 복음성가를 밤 하늘을 향해서 홀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도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여러분, 제롬 하인즈는 실패자요 어리석은 사람일까요? 세상은 그를 냉소할지 모르나 그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진정한 자유와 참된 기쁨을 경험한, 이 세상에서 승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본받는 유혹에서 승리하였고 지금도 주님을 위한 사역자로 귀하게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당신과 나의 삶은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예배는 \"경배\"하고 \"섬김\"입니다. 예배는 거룩한 기대 가운데 시작되는 것처럼 거룩한 순종 가운데 끝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를 섬기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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