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예배를 회복하라 롬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우리가 지난 주일부터 목적이 이끄는 40일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힘든 가운데서도 이 여정을 함께 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늘은 두 번째 주 입니다. 이번 주 주제는 ‘예배’입니다. 여러분! 오늘 교회보 속에 보면 ‘예배 주간 캠페인’이라 해서, 예배에 임할 때 우리 자신들이 수정하고 바꾸어 나갈 것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잘 기록해 놓았습니다. 우리 장로교회 신앙의 틀이 되는 웨스터민스터 소교리 문답 제1문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하고 묻고 거기에 대한 대답으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다섯 가지 목적입니다. 예배, 교제, 훈련, 사역, 전도가 그것입니다. 그 가운데 제일 첫 번째가 예배입니다. 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에 예배는 참 많이 있는데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한국교회 교인들만큼 예배를 자주 드리는 교인들은 드물 것입니다. 그 반면에 성경에 비추어볼 때 우리의 예배가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변질되어 있고 왜곡되어 있는 현상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라는 단어를 쓸 때 우리는 그 단어를 다 알아 듣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배가 무엇인가 했을 때,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바로 알고 있는 분들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책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 헌법 책 속에는 신앙의 원리들을 규정하고 있는데, 그중 ‘예배 모범’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배 모범 제1장 예배란 무엇인가에서 예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대표적인 행위이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심으로 신자들은 언제 어디서든지 예배할 수 있으나 특별히 성별된 장소에서 주님이 부활하신 주의 날에 함께 모여 공동으로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이렇게 예배의 정의를 내려놓고, 주일 예배에 대하여 예배 모범 제1장 제7조에는 예배 참석자의 자세가 나옵니다. 제1항, 주일예배 참석자는 다음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한다. 예배 시간이 되면 예배실에 들어가 각기 자리에 앉되 단정하고 엄숙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목사나 참석자나 결석한 자들을 위해 기도함으로 준비해야 한다.
제2항, 예배 시간에는 모든 사람이 엄숙한 태도와 공경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목사가 봉독하는 성경 이외의 다른 서적을 보거나 귓속말이나 곁눈질이나 인사나 졸거나 웃거나 등의 일체의 불필요한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 참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성경 외의 다른 서적을 보거나 귓속말이나 곁눈질이나 인사나 졸거나 웃거나 등의 일체의 불필요한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하면서 예배의 기본정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에서 이 예배 모범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첫째는 예배를 인도하는 목회자들이 예배의 원칙을 파괴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교인들도 그기에 동참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우리 한국교회가 예배를 다시 회복시키는 운동이 절실합니다.
1. 예배란 무엇입니까?
여러분! 예배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여러 각도에서 예배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입니다. 시편 138편 2절에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높게 하셨음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며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경배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여러분! 영어에서 예배라는 말은 Worship(워십)인데 Worship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가치를 돌린다, 하나님을 경배한다, 숭배한다, 복종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워십은 하나님의 존엄성과 가치를 인정하고 숭배하고 존경하는 것을 뜻합니다.
또 예배는 섬긴다, 헌신한다, 봉사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배를 영어에서는 Christian Service(크리스챤 서비스)라는 단어를 씁니다. 독일어로는 Gottesdienist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 봉사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를 예배로 번역할 수 있는데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을 드리며 하나님을 위해 섬기는, 봉사하는 행위가 바로 예배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9절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겼는가, 너희가 어떻게 하나님께 봉사했는가, 너희가 어떻게 하나님께 경배했는가, 너희가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했는가를 바울이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배라는 말은 희생제물을 드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역대상 16장 29절에 ‘예물을 가지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제사를 보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짐승을 끌고 가서 그 짐승을 내 죄를 대신해서 잡아 그 피를 뿌리든지 아니면 각을 떠서 불에 태워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우리 자신 전부를, 내 존재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며 희생제물로 드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신학자 쥴리우스 멜톤(Julius Melton)같은 분은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전부와 전 시간을, 전 인격을 드리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내 일부분을 드리는 것이 아니고, 내 많은 시간 가운데 일부분을 짬 내어서 드리는 것이 아니고 내 삶 전체를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또한 예배는 순종한다, 순복한다, 복종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내 뜻과 내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전적으로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을 책망할 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라고 했습니다. 잘못된 예배 행위,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예배 행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에 내 자신이 전적으로 무릎 꿇고 내 자신을 낮추면서 아멘으로 받는 행위입니다. 또한 예배는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의 보답으로서 나타나야 합니다.
2. 우리가 회복해야 할 영적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
우리가 회복해야 할 영적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잘못된 예배가 올바른 예배인 것처럼 사람들을 오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일은 기독교 역사 초기에도 있었고,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시면서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심지어는 하늘에 있는 일월성신을 섬기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신을 섬기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사람을 대상으로 섬기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형식은 예배의 형식을 갖추었는데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으로 대체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다가 수가 성이라는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 여인과 주고받는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영적 예배란 무엇인가하는 해답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22절에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지고 난 후에 북쪽 나라의 왕이, 북쪽 나라의 백성들이 남쪽 유다 나라의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하나의 수단으로 북쪽에 우상을 만들어 세우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께서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고 하시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고 하셨습니다.
올바른 예배의 대상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될 줄 압니다. 예배는 설교 듣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배는 설교 듣는 시간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편의 원맨쇼를 즐기는 것처럼 앉아서 구경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여러분! 예배는 설교자나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이 함께 공범이 되어서 하나님을 예배의 중심에서 소외시키고 우리들끼리 바보의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하나님 중심의 예배, 말씀 중심의 예배, 교회 중심의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말은 하나님께, 하나님을 위하여 예배드린다고 하면서도 그 예배의 대상이 자꾸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다. 말씀 중심의 예배가 되어야 하는데 자꾸 군더더기들이 예배 중간에 끼어듭니다. 사람이 하나님 자리에 앉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중심의 예배가 되어야 하는데 점점 우리의 신앙이 세속화 되어 가면서 교회와 멀어진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가정에서, 일터에서 곳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몇몇이 모인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그 모임이, 그 회가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비약시키다 보니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전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귀찮으니까, 이렇게 하면 힘드니까, 편한 방법 편리한 방법을 찾다 보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 할 목적대로 살아가지 않고, 그냥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방송을 듣고 있는 극동방송 청취자 여러분! 분명히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나가지 않고, 나는 집에서 방송을 듣고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잘 못된 것입니다. 기독교 T.V. 방송을 보면서 내가 예배드린다는 것은 잘 못된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나와의 인격적인 만남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리모콘을 들고 편안히 소파에 누워서 이 프로그램, 저 프로그램 왔다 갔다 하면서 예배를 평가하고 예배를 구경하는 그런 신자들이 점점 늘어 갑니다. 교회 가면 골치 아프다, 부담스럽다,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많은 문제들, 그것들을 피해서 도피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익명성을 즐기는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예배는 만남이요, 예배는 희생이요, 예배는 헌신이요, 예배는 봉사요, 예배는 내 자신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는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한국교회에 예배 구경꾼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말 가운데 예배를 본다라는 말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예배를 본다라는 표현보다는 예배를 드린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예배는 본다라고 해도 그 뜻은 알지만 우리가 자꾸 본다 본다 하다 보면 진짜 예배를 구경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내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산 제물이 되어야 하는데 오늘 본문 말씀처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영적 예배니라고 했는데, 우리는 드림도 없고, 헌신도 없고, 희생도 없는 그냥 예배를 구경하다 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목사가 앞에서 깔깔거리며 설교를 해나가면, 거기에 그냥 이끌려 다니는 예배 구경꾼들은 평가자가 됩니다.
오늘 찬양대 점수는 90점, 좀 더 줄까 95점, 오늘 마음에 안들어 60점, 뭐 이렇게 하고 있기도 하고 예배 순서 순서 하나하나를 자기 나름대로 전부 평가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배 시간에 주보만 보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이런 경우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 예배 순서만 단순히 내고, 글을 많이 싣지 않는 교회도 있습니다. 식자공처럼 오자가 있나 없나를 하나하나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자를 발견해서 동그라미 쳐 놓았다고 교회에 전화해서 목사님 몇 페이지에 단어가 오자인 것 같습니다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설교가 이렇다 저렇다 합니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께 내 자신을 드리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이요, 봉사하는 것입니다. 정말 산 제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짐승을 죽여서 피를 뿌리고 제물로 드리듯이 내 자신을 하나님 앞에 죽이는 내가 이 예배를 통해서 내가 죽는,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한 것처럼, 우리가 날마다 내 자신을 죽이는 훈련이 되어야 만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가 내 중심에 있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결단코 섬길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라고 했는데 오늘날 얼마나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많습니까? 우리도 모르게 형식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 형식은 필요하지만 형식주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예배가 우선순위에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가 있는 헌신, 예배가 있는 봉사, 예배가 있는 희생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든 것들도 해야 하지만 예배가 온전치 못하면 그 사람의 신앙에는 반드시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 본질과 형식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날 때 웃지 못할 일이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볼셰비키 극렬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을 일으키고자 하고 있는데 그 시간에 러시아 정교회 종교 지도자들은 모여서 뭘 토론하고 있었는가하면, 지금 나라가 망하려고 하고 있고, 세상이 뒤집힐려고 하고 있는데, 성직자들이 모여서 성직자들의 까운에 색깔을 붉은 색으로 할 것이냐, 황금색으로 할 것이냐, 깃을 어떻게 달것이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몇날 며칠 싸우면서 편을 가르고 있었습니다. 결국 제정 러시아가 망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정교회도 몰락을 하는 그런 역사의 아픔이 있습니다. 우리가 본질적인 것을 잘 보존하기 위해서 형식이 필요하지 형식적인 것을 위해서 본질을 끌어 들여서는 안됩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얼마나 시끄럽습니까? 지금 우리가 가장 시급히 해야 하고,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이 있는데도 엉뚱한 것 가지고 서로 싸우고 편을 가르고 하는 이런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예배를 바로 회복하기 전에는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고, 우리 사회를 치유해 나갈 힘을 회복할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3. 예배회복을 위해서 내가 고쳐야 할 점들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예배 회복을 위해서 내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 캠페인 쪽지를 한 번 보시고 여러분 자신을 거기에 한번 대입해 보시기 바랍니다. 일주일의 시간 속에서 내 시간의 우선순위를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데 우선순위를 둘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때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합목적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러 나올 때 우리의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정결케 하고 잘 준비된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 드려야 합니다. 준비 없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온당치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캠페인 쪽지에 보면 10분 전에 나와서 예배드리자, 10전에 나와서 기도하고 마음으로 예배를 준비하자, 허겁지겁 그렇게 예배에 참석하는 분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10분만 빨리 움직이면 우리가 준비된 예배, 경건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내가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음으로 다른 사람의 예배를 방해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훼방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예배를 보는 자가 아니라 예배의 구경꾼이 아니라 예배의 적극적 참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주의 깊게 읽고, 설교를 잘 들어야 합니다. 사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 된 것은 종교개혁 시대부터 입니다. 마틴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때부터입니다. 과거에 1500년 동안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의식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종교적 문제가 있음을 발견한 종교개혁자들이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기치를 내세우면서 예배 시간에 설교시간을 늘였고 설교를 강화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런 결과 오히려 예배가 설교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 또 다른 잘못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설교가 예배는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의 선포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여러분! 예배는 설교 듣는 시간이 아니라 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시간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 설교를 들을 때 설교자가 잘 준비한 설교를, 책을 읽으며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간 나에게 설교자를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하고 받을 수 있는 긍적적이고 신앙적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 오늘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니 꼭 누구를 빗대어서 하시는 말씀이구나 그렇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문제있는 교인들이 많으면 목회자가 설교를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구약 본문을 택해야 할지 신약 본문을 택해야 할지, 본문 결정을 한 주간 계속 고민하다가, 설교가 더욱 꼬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 은혜 받을 수 있는 마음, 평안한 마음과 믿음의 마음, 긍적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설교자도 설교를 듣는 사람도 함께 하나님 앞에서 성숙해져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설교를 듣고 아! 오늘 이 설교는 나에게 합당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안듣고 착 옆으로 돌아보고 저 박집사님이 꼭 들어야 하는 설교다, 오늘 또 김사님이,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빠졌구만, 김집사님이 오늘 나와서 이 설교를 들어야 하는데, 깨져야 하는데, 그래야만 해결이 되는데, 이런 식의 심보를 가지고 예배 시간에 앉아 설교를 들으면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설교 시간에 조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까? 청교도들의 예배는 아주 엄숙했습니다. 예배시간에 감시원들이 있었습니다. 누가 조나 안조나를 지켜보다가 조는 사람이 있으면 긴 작대기 앞에 솜뭉치를 달아서 옆구리를 콱 쑤시고 다녔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영국에서도 그랬고, 미국에 건너간 청교도들이 그랬습니다. 유럽교회들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설교 시간에 조는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 하는 책임론을 따진다면 설교자들이 생각할 때는 교인들이 영적으로 나태하고 게을러서 저렇구나하고 생각하면 안되겠죠? 또 교인들이 생각할 때는 목회자가 설교준비를 제대로 안해서 했던 말 또하고 또해서 자장가처럼 들려서 우리는 자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곤란합니다. 우리는 설교 듣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이 시간 제물이 되어서 온전하게 드려지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을 해야 합니다.
교회헌법 예배 모범 제3장 제7조 제2항을 보면 곁눈질 하거나, 인사하거나, 졸거나, 웃거나 등의 일체의 불필요한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웃으셨죠? 사실 이것도 우리가 헌법에 위배된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만큼 예배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자세로 경건하게 드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대통령을 만나러 청와대에 갔습니다. 갔을 때 우리가 옷도 깨끗한 것 입고 머리도 다듬고 합니다. 가서 옆 사람하고 쿡쿡 찔러 가면서 이야기하거나, 대통령 앞에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이, 이 세상의 하잘 것 없는 한 사람의 정치가 앞에서 취하는 행동보다 더 경솔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복장을 단정히 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고급스런 옷이 아니라 가장 경건하고 가장 깨끗한 옷을 입고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슬리퍼 질질 끌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젊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우리가 가진 자유도 스스로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버릇없이 하면 안 됩니다. 서양 사람들은 아주 자유분방하고 버릇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독일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릴 때 정말 경건합니다. 목사 앞에서도 경건합니다. 그 버르장머리 없는 대학생들이 막 함부로 놀다가 파러(Pfarrer, 목사)가 나타나면 헤! 파러!(He! Pfarrer!) 하면서 자세를 딱 고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 온 가족들이 정말 깨끗한 옷을 입고 나와서 양 부모가 의자의 양쪽에 앉고 그 사이에 아이들을 앉혀서 예배 시간에 꼼짝달싹을 못하도록 부모가 통제를 합니다. 주일학교 예배를 따로 안 드립니다. 예배는 다같이 드립니다. 어릴 때부터 예배 훈련을 철두철미하게 시킵니다. 그런데 우리 어린아이들을 데려다가 앉혀 놓으면 이 예배 시간은 엉망진창이 되지 않습니까? 그것은 바로 훈련이 안돼서 그런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예배 훈련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공적 예배에 열심히 함께 잘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일 대예배라는 표현도 없애야 합니다. 그러면 주일 오후 예배나 수요예배는 소예배입니까? 이런 의식이 상대적인 의식을 갖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담임목사가 설교할 때와 부교역자들이 설교할 때 교인들의 참석숫자가 다릅니다. 담임목사 설교할 때는 내가 눈도장 찍으러 나가자 합니다. 이런 심보를 가지고 나와 있는 사람도 사실은 있습니다. 그런데 부목사님들이 설교한다 하면 아이고! 오늘 안 나가도 되겠구나 합니다. 이런 분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것도 고쳐야 될 부분입니다.
우리가 주일이 기다려지고 예배가 기다려지는, 예배를 회복하는 우리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내가 가지고 있는 예배의 문제점들을 하나하나씩 고쳐 나가고 나의 게으르고 나태하고 온전치 못한 신앙생활로 말미암아 왜곡되어진 예배를 다시 회복시킬 수만 있다면 우리 하나님 앞에 더욱 축복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되리라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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