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가 보고 싶습니다
(마가복음14:66-72)
지난 주간에 우리들 모두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 일이 있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법정스님의 입적이었습니다. 법정스님의 죽음은 종교를 떠나서 모든 국민에게 진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왜 이토록 법정 스님의 죽음에 감동을 받는 것일까요? 언론 보도에 의하면 어제 송광사에서 있었던 다비식에 삼만 명의 추모객이 모여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고 합니다. 이 스님이 세상적으로 높은 자리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불교종단에서 총무원장을 했다거나 종정을 한 높은 승직에 있었던 분이 아닙니다. 이분이 돌아가신 후에 조계종에서 뒤늦게 대종사라는 칭호를 내렸다고 합니다. 평생 동안 본인의 말대로 주지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스님입니다. 그렇다고 대단한 학문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전남 대학교를 중퇴했다고 하니 연구 실적이 있을 리 없습니다. 사회 봉사활동이나 민주화운동, 인권운동을 했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감옥에 갔다온 것도 아닙니다.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혼자 살아가던 분입니다. 다만 사람들의 심령을 울리는 몇 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언론의 보도를 보면 법정스님은 생전에 무소유의 삶을 살아왔다고 합니다. 법정스님의 죽음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 것은 그가 철저하게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삶 무소유의 삶을 살았던 모습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죽음과 장례를 보면 수의도 입지 않고 관도 없이 대나무 평상 위에 가사 한 장을 덮고 가는 마지막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숙연해졌던 것입니다. 본래 불교는 세상의 것들을 다 버리고 살라고 가르칩니다. 머리카락도 버리고 세상이 인연을 다 버리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법정스님이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이렇게 큰 감동을 주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승려로서 마땅히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이 그런 삶을 살았다고 감동을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세상을 살아갑니다.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가가 그 사람의 능력을 말해 줍니다. 우리의 소유가 성공의 척도가 되는 세상입니다. 이런 자본주의 세상에서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는 것이 어찌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조금이라도 더 가져보려고 날마다 안간힘을 쓰는 우리들의 추한 모습이 그 분 앞에 머리를 숙이게 합니다. 결국 우리가 날마다 살면서 더 가져보려고 하지만 우리의 생각 가운데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 그렇게 살았던 사람을 존경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정스님은 베스트셀러가 된 책의 인세만 하더라도 큰 부자로 살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삼청동의 길상사는 삼청각이라는 유명한 음식점이었습니다. 수천억의 재산 가치가 있는 것인데 어느 불자가 그것을 스님에게 드렸는데 그것을 자신의 재산으로 소유하지 않고 사찰을 지은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의 무소유의 삶에 존경을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유에 집착하는 우리에게 부끄럽고 미안한 생각이 들게 하여 더욱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같은 종교인으로서 지난해는 김수환 추기경님 때문에 그리고 올해는 법정스님 때문에 도전을 받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천주교에는 김수환 추기경님이 있고 불교에는 법정스님이 있는 것처럼 우리 기독교에도 저런 성직자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번 법정스님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유명한 부흥강사가 수천 수만 명을 모아놓고 집회를 한 것보다 더한 감동과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기독교에도 이런 사람이 나와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갑자기 베드로 생각이 났습니다. 베드로가 그리워졌습니다. 베드로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법정스님이 돌아가셨는데 생뚱맞게 베드로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베드로에게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여서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었으니까 베드로에게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에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베드로를 좋아하는 이유는 좀 색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베드로는 고매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흠이 있고 실수가 있고 부끄러움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냥 나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라는 생각에 베드로를 좋아합니다.
성경에 많은 훌륭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러나 모세는 너무 위대하고 요셉은 너무 완벽하고 다윗은 너무 대단해서 그 사람들 앞에서 기가 죽습니다. 구약 성경의 시편 23편은 다윗의 기도인데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니 아쉬울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을 믿고 저도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인데 다윗은 하나님만으로 아쉬울 것이 없다고 하는데 저는 계속 다른 아쉬운 것이 많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너무 외롭고 고고해서 힘들고 세례 요한은 너무 깐깐하고 원칙적이어서 정이 안 갑니다. 사도 바울은 너무 유능해서 열등감이 듭니다. 성경의 위대한 사람들은 보통 우리들과는 차원이 달라서 존경과 숭상의 대상은 되지만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기 힘듭니다.
베드로는 성경속의 그 어떤 사람보다 인간적이고 친근감이 있습니다. 베드로 하면 떠오르는 것이 경건하고 근엄하고 완벽한 성자의 모습이 아니라 다듬어지지 않은 우락부락한 성격, 수양이 덜 된 충동적인 사람, 실수도 많고 욕심이 많아서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고, 성급하고 의협심이 강하고 무엇이든지 깊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길을 따르겠느냐고 했을 때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인 줄도 모르고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잡아가려는 시종 말고의 귀를 자른 사람입니다. 마지막 죽을 때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너무도 인간적이고 친근감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성경의 베드로의 모습은 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엉뚱한 말을 해서 핀잔을 듣기도 하고 솔직하고 속을 다 내보이고 적극적입니다. 때로는 실수를 해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마가복음 14장에 보면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리라는 말이 생각나서 통곡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웃을 줄도 알고 울 줄 알아야 합니다. 장점보다는 단점이 훨씬 많았던 사람입니다.
제가 갑자기 베드로가 생각나는 이유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첫째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베드로처럼 계산 없이 순진하게 어리숙하게 사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법정 스님이 그런 사람이어서 베드로가 생각났던 것 같습니다. 현대인의 특징은 절대로 손해보지 않고 분석하고 따지고 계산합니다. 현대 사회는 이성이 우상이 되고 감성은 천박하다고 업신여깁니다. 실없이 웃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바보취급을 당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사회는 빈틈없이 빡빡한 사회 피도 눈물도 동정도 없는 세상입니다. 내가 속아 넘어갈까 긴장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우리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옳은 일, 선한 일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따지지 않고 달려들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처음 갈릴리바다에서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앞뒤 생각하지 않고 그물과 배 그리고 가족을 버리고 따라갔습니다. 성경의 기록이지만 가족이 있는 베드로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그때 가진 것도 없고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인데 이것저것 따지고 계산해보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길을 같이 가자고 하셨을 때 베드로는 어디든지 따라가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신중하게 생각해보고 간다고 해야 하는데 베드로는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따라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베드로같은 단순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따지고 재고 분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리석고 다른 사람에게 속기도 하고 손해도 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살면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냥 무조건 따르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말씀하시니 따져보지 않고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비현실적이지만 그냥 따랐을 때 놀라운 일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비현실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냥 계산없이 단순하게 주님이 하라고 하니까 옳은 일이고 좋을 일이니까 했던 것입니다. 법정스님의 삶도 그런 삶이었을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베드로는 흠과 단점과 부족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의 단점과 약점, 부족한 것을 감추지 않고 스스로 인정하고 다 내어놓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부끄러워하고 고민하고 그것 때문에 기가 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 잘난 사람입니다. 우리 가운데 약점이 있다 부끄러움이 있다고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모두가 다 깨끗합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다 옳고 남들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잘못될 수도 있고 내가 하는 판단이 잘못될 경우도 있고 이렇게 나는 흠이 많은 사람이지만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 잘났습니다. 위선이며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한없이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을 그대로 내어놓고 부끄러워하고 고뇌하는 모습 때로는 눈물 흘리며 뉘우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베드로의 위대성은 완벽하고 흠이 없고 약점이 없어서가 아니라 흠이 있고 부족한 모습을 다 드러내놓고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덕군자처럼 깨끗하고 흠이 없이 살았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은 슬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약점과 실수와 부족함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고뇌하며 인생을 살았던 사람,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 때문에 아마 사람들은 우리가 세상을 떠나면 슬퍼할 것이고 우리를 그리워할 것입니다.
세 번째 참으로 이상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시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약점이 많고 흠이 많은 베드로를 통해서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열두제자 중에 베드로를 일등제자로 삼으셨습니다. 학식이 높고 출신이 좋고 인품이 훌륭하고 성격도 좋은 사람이 많은데 자주 실수하고 결점이 많은 잘 다듬어지지 않은 베드로를 일등제자로 삼으시고 교회를 맡기고 양떼를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잘 다듬어지지 않은 사람을 통해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십니다. 이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결점 많은 우리 인간의 실수를 통해서 큰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참으로 답답합니다. 이 답답한 세상에서 누군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줄 사람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누군가 한국교회의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게 할 능력있는 사람을 보고 싶습니다. 남북이 꽉 막혀 있습니다. 누군가 능력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서 이 남북의 문제를 해결했으면 좋겠습니다. 사회의 갈등,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를 다 해결하는 능력있는 사람이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들어서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학식이 높고 출신이 좋고 흠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흠이 많고 실수가 많고 결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 그러시면 계산 없이 가고 하나님의 뜻이면 생각없이 순종하는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 우리 시대에 필요합니다. 흠이 많고 죄가 많고 결점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에 위대한 쓰임을 받는 것을 세상이 알고 세상이 보게 될 때 사람들은 감동할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스스로 고백하기를 부족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능력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그의 죽음으로 가슴아파하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우리 사회에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수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고 그리워하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다가 세상을 떠나면 몇 사람이나 우리의 죽음을 아쉬워하고 슬퍼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의 삶이 베드로와 같은 삶이 되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죽음이 세상에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죽음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을 많이 가져서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고 좋은 집이나 차, 명품을 가졌다고 감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베드로처럼 살아갈 때 그 죽음이 오늘까지 우리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세상에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삶을 사는 은혜와 축복이 우리들의 삶에 있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