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의 긴박성

   부흥의 긴박성/막9:28-29

부흥의 긴박성
막9:28-29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부흥”이라고 하는 주제는 반드시 교회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이 부흥이라는 단어가 꼭 한 군데만 나와 있습니다. (합 3: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부흥이라는 말은 쇠퇴하였던 것을 다시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의 성장과 그 촉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모든 설교는 부흥을 촉진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모든 삶을 회복시키고 세워줘야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부흥의 긴박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부흥이라고 하는 주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몇 가지 중요한 요점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것이 바로 우리가 평소에는 잘 깨닫지 못하는 섬뜩할 정도의 “영적인 궁핍”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매우 충격적인 기사를 접하였습니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마이너스 성장에 관한 보고였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침체나 정체라는 소리는 간혹 들었는데 마이너스 성장에 대한 공식적인 보도는 처음입니다.
우리는 지금 Again 2007! 이라고 하는 표어와 함께 1907년도에 평양에서부터 시작된 교회의 대 부흥을 다시 시작하자고 하는 부흥운동을 교단마다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보도는 우리의 마음을 매우 당혹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회개의 운동을 위한 접촉점이나 분기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절망적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역사적인 시기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시 발견한다는 것 자체가 더 큰 희망이요, 새로운 부흥운동의 시작이며 전환점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좀 더 관찰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구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라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다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변화산상에서 기이한 사건을 목도한 후 내려 왔고, 남아있던 제자들이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대단한 논란을 벌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불쑥 나서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는 이 불쌍한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이 아이는 어릴 때부터 전신경련을 자주했고 거품을 흘리며 쓰러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 아이를 고쳐 달라고 했더니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보시다시피 이 일에 실패했습니다”

여러분도 잘 이시다시피 주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신 다음 그 아이에게서 즉시 귀신이 나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순식간에 회복이 되었습니다.
▶이 일이 있고난 다음에 얼마 되지 않아 제자들은 너무 궁금하여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우리는 왜 안 되는 것입니까?”
이 때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와 금식)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핵심과 우리의 관심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날 우리들의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숫자적으로는 옛날 보다 더 많은 발전과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불우하고 가련한 상황에 대처하는데 있어서는 대다수의 교회가 여전히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시의 제자들의 당혹스러운 느낌이 어떠했을지 너무나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다시 던져야 할 긴박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왜 그 귀신을 능히 쫓아내지 못한 것입니까? 왜 우리는 안 되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
그런데 그 대답은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기도(와 금식)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당시에 제자들은 어떤 경우에는 승리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매우 환호하고 흥분하고 그래서 뽐내며 의기양양했습니다. “아 우리도 되는구나” ▶그러나 그 때 예수님께서 그러한 그들을 보시고 어떤 반응을 하셨습니까? (눅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그 당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에 다가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되잖아요! 그러나 오늘은 웬일인지 귀신들린 아이가 전혀 낫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실패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귀신의 세계가 다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귀신과 귀신 사이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 악한 나라에도 등급이 있고 일종의 계급이 있다는 사실입니다.(처음 기도에서 영계를 보았다. 아이들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기도도 회개의 기도의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알았다)
▶그래서 에베소 6:12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런 유”는 결국 더 큰 힘을 가진 영의 세계를 뜻합니다. 이 영은 지금까지 그들이 주관할 수 있었던 다른 어떤 악한 영들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유는 전혀 다릅니다. 이러한 영계의 원리는 오늘 날에도 진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중요한 요점은 진단의 문제입니다. 당시 제자들의 문제는 문제의 본질, 즉 그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는 것보다도 급한 처방을 내리는 것이 먼저였다는 것입니다. 의사가 진단 없이 처방을 먼저 낸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둘 중에 하나가 되겠지요? 신의가 아니면 돌파리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문제의 원인을, 즉 그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지 않고 처방에만 너무 급합니다. 우리는 먼저 황급히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잠시 멈추어 서서 “이런 유”를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경우에서 실패합니다. 문제나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도 전에 어떤 유의 처방이든지 쓰려고 하는 것은 순전히 미치광이 짓이거나 힘의 낭비입니다.
물론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위안이 항상 본질적인 처방이 잘 되어서 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이비 평안도 있습니다. 마귀가 교활하게 속이는 평안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나간 날 이스라엘이나 유다의 멸망을 앞둔 시기에 거짓 선지자들을 통해서도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큰 위안거리입니다. 그러나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언제나 현명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직면한 난제의 본질을 충분히 인식하기도 전에 행동으로 성급하게 옮길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서 우리는 실패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유”의 정체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문제의 본질을 잘 알아야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항입니다.
▶예를 들어 당뇨가 있는 분이 저혈당으로 쓰러졌을 때 무언가를 삼킬 수 있다면 쥬스나 콜라나 쵸코릿 등을 주어서 먹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킬 수 없다면 즉시 병원 응급실로 옮겨서 의사의 처방을 받게 해야 할 것입니다.
▶박창근 집사의 간증, 교통사고 쓰러져 있을 때 무조건 업고 뛰는 바람에 다시 회복되지 못할 몸으로 망가져 버렸습니다. 안정적으로 들것에 실어 잘 처리했으면 그는 걸을 수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문제의 본질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입니다. 무조건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도 교회도 지나간 날 제자들처럼 당혹스러운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이런 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들 교회의 문제는 예전보다 더 심각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려서 마귀의 수준이 옛날과는 게임이 안 될 정도로 쎄고 강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은 옛날 같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날의 사람들은 옛 날과 같이 진리를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그냥 위대한 사람들 중의 한 분으로만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탄생도 속죄의 죽음과 부활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사회의 개혁자나 정치적인 선동자나 단순히 훌륭한 윤리 선생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버트런트 러셀 같은 사람은 기독교회가 나라와 정부에게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하여 말해 주어야 한다고 강력히 말했습니다. 핵무기에 대하여도 교회가 어떻게 해야 될 것인지 말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어째서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보는 “이런 유”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날의 사람들은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 惡이여 너는 내 善이로다”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풍성하고 돈이 많으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영적인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자 이것이 옛날과는 다른 “이런 유”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려서 “이런 유”란 마귀에게도 등급이 있다는 말입니다. 기존의 방식이나 영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떤 영적인 세계나 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인식이나 이해가 없으면 삶은 더 이상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오늘 말씀은“이런 유”가 지금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제자들에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보다 오히려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절망하지 않는 것은 “이런 유”를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기도와 금식입니다. 기도입니다. 특별히 회개의 기도는 매우 강합니다. 영적전쟁에서 필수가 회개의 기도입니다. 회개는 다시 돌이키고 회복시키고 세우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유”때문에 혹시 당혹스럽고 힘이 드십니까? 우리는 “이런 유”를 무능하게 묵어버리고 다시 삶이 부흥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