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자에게 임하는 부흥/느8:1-12

준비된 자에게 임하는 부흥/느8:1-12

준비된 자에게 임하는 부흥
느8:1-12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 재건을 마친 후에 새롭게 시작한 것은 심령 부흥 운동이었습니다.
8장 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은 7월 초하루에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그리고는 학사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라고 부탁합니다. 무너진 성벽을 다 재건했으니 이제는 무너진 믿음을 재건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백성들이 자진해서 말씀을 들려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을 갈망하는 마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팽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시119;31)의 시인의 고백이 바로 느헤미야 당시의 성도들의 고백이였습니다. 이 고백이 오늘 나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길을 소원합니다.

백성들이 말씀을 요청하자 에스라가 어떻게 했습니까?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얼른 설교 준비하고 나오겠습니다\\\"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 즉시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에스라는 준비된 자였습니다. 백성들이 말씀을 들려달라고 하니까 준비도 안 된 채 즉홍적으로 말씀을 선포한 것이 아닙니다. 에스라를 보면 그가 얼마나 용의 주도하게 이때를 준비해 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로 귀환이 세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 귀환은 스룹바벨이 두 번째 귀환은 에스라가/ 그리고 세 번째 귀환은 느헤미야가 주도했습니다. 에스라는 느헤미야보다 15년쯤 앞서 예루살렘에 돌아와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행정적인 지도력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심새라는 사람이 성전 재건을 방해하자 낙담해서 자포자기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말씀을 증거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이제야 비로소 자기가 할 수 있는 손에 잡게 된 셈입니다. 에스라는 성벽 재건에 실패한 후 독한 마음을 먹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결심합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더라](스7:10)
에스라가 무슨 결심을 합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열심히 연구하고, 연구할 뿐만 아니라 그 말씀대로 실제로 살아 보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준비하는 자에게 길을 열어 주십니다.

지난번 말씀묵상 강의를 하던 강사가 간증을 했지만 말씀묵상을 하면서 저에게도 동일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아침에 그 말씀을 묵상할 때는 그래 말씀은 좋은 거야 하면서 말씀 자체에서 은혜를 받는데, 하루를 살다 보면 꼭 그 말씀이 적용되는 상황이 전개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으로 권면해야 할 상황, 그 말씀으로 말씀을 전해야 할 상황들이 전개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은 생명력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들이 평소에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을 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비젼이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 언제 저를 써 주시나요?]하지말고 하나님 앞에서 먼저 준비되는 자가 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와 여러분들을 반드시 들어 사용하실 것입니다.
저희 교회가 이번 주간에 부흥회를 갖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름난 부흥사를 저희 교회에 모시고 싶은 마음은 솔직히 없습니다. 경제적인 부담도 부담이겠지만, 저희의 교회를 잘 알고 우리 성도들의 상황을 잘 아는 목사님이 기도하시면서 준비하시는 말씀이 훨씬더 우리에게 유익하고 오래 남는다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저는 요즘 이갑형 목사님에 대해서 소식을 친구를 통해서 듣게 됩니다. 그리고 기대하게 됩니다. 얼마나 순전한 마음으로 말씀을 준비하시며 기도하시며 성도들에게 기도의 부탁을 하고 있는지 소식을 접할 때마다, 제 자신이 이미 많은 부분에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은혜를 받기 위해 준비하십시오. 준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이루실 줄 믿습니다.

에스라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치겠다고 결심하며 준비했을 때 비로소 수문 앞 광장의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에스라의 준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준비하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 가족을 말씀으로 변화시키겠다] 마음먹고 지금부터 준비하고 기도하면 그 가정은 이미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준비된 자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일학교 교사가 [내가 올해 말씀을 통해 20명 이상의 어린 심령을 살리겠다]고 결심하면 주님께서 반드시 그 교사를 통해서 부흥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런 결심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중요합니다. 에스라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부흥을 일으키겠다고 결심하는 종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결심이 장차 수문 앞 광장의 큰 부흥과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준비하는 주의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 중심의 삶
에스라가 말씀을 선포할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느헤미야서 8장 2-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
지금 수문 앞 광장에는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다 모였습니다. 그러니까 어린아이들도 온 것입니다. 이것이 부흥의 참 모습입니다. 과거 한국 교회의 부흥회의 모습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망을 알아들 수 있는 사람들은 다 모여서 함께 은혜를 받았습니다. 유치원생이라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속단하지 마십시오. 목사님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많은 분들이 어릴 적에 부흥회에 참석해서 뒷자리에서 누워 자던 기억, 자면서 은혜 받던 기억들을 간증합니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세였습니다.

에스라가 율법책을 펼 때에 백성들은 일제히 일어섰습니다. 일어선다는 것은 유대 문화권에서는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행위입니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자세를 가다듬고 마음을 집중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준비를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아멘\\\"은 무슨 뜻입니까? 아멘은 [진실로 그렇습니다,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뜻으로 [사람을 통해서 전해지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인되는 시간]입니다. 그들은 에스라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인하며 확증했습니다. 이게 바로 말씀에 대한 그들의 자세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말씀 중심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뼈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누가 당신에게 \\\"왜 그렇게 행동하느냐\\\"고 물으면 적어도 [성경 말씀에 이러이러한 말씀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을 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없다고 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으려면 논문을 써서 통과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논문의 가치는 무엇으로 평합니까? 논문 아래 달아 놓은 각주를 보고 평합니다. 각주를 보면 논문 제출자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각주가 괜찮으면 그 논문 역시 좋은 책으로 인정받습니다.
예를 들어서 중국사를 전공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의 논문에는 어떤 책들이 각주로 등장해야 합니까? 수준 높은 [중국 통사]라든지 사마천의 [사기]같은 것들을 인용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야 논문의 가치가 어느 정도 인정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논문 쓴답시고 [만화 삼국지]나 인용하면 교수가 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래, 저는 만화나 그려라고 할 것입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만약 성도에게 [당신은 왜 그렇게 사십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유행가 가사 따라 사느라 이렇습니다]라고 말하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또 [저 옆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살갈래 저도 덩달아 그렇게 삽니다]라고 답하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중고등학생들이 TV를 보는 이유 가운데는 TV를 보지 않으면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본다고 하는 아이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만났을 때 그 이야기의 근거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일날 만나서 집에 갈 때까지 주말드라마 엄마야 누나야가 어떻게 왕건이 어떻고 하다가 집에 가면 얼마나 허전합니까?
적어도 성도들의 삶의 각주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와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기 때문이고,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이유는 성경이 이렇게 명령하기 때문이며, 내가 이것을 하지 않는 이유는 성경이 그것을 금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의 각주]가 없으면 우리는 실패한 인생이요, 참 성도가 아닙니다.

기뻐하고 기뻐하라
말씀을 듣고 난 뒤에 백성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8장 9-12절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 백성들이 다들 울었습니다. 회개와 감격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칠 줄 모르고 우니까 지도자들이 와서 뭐라고 합니까?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고 합니다. 오늘 같이 기쁜 날 왜 우느냐. 오늘은 우는 날이 아니다 하는 얘기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당시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안목이 대단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한국 교인들은 애통하기를 참 잘합니다. 그런데 너무 울어서 이제는 우는 것이 체질이 되어 버렸습니다. 기쁘면 기쁘다고 울고, 슬프면 슬프다고 맨날 웁니다. 논에 가면 개구리 울고, 길에 가면 매미 울고, 집에 가면 애기 울고, 교회 근처에 가면 교인들이 우니 듣는 사람인들 심난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교회 주변의 집 값이 떨어지는 것인가 봅니다.

그런데 성도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회개할 때는 물론 울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성도의 삶 자체는 기뻐하는 삶입니다. 주일은 원래 무엇을 기념하는 날입니까?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주일 아침예배 때만큼은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기뻐해야 합니다. 그 날은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해야 하고 성도의 얼굴에 밝은 빛이 감돌아야 합니다.
울고 난 다음에는 기뻐해야 합니다. 축제 분이기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 성도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혹 마음 가운데 아직도 어두운 구석이 많이 남아 있습니까? 애통하는 마음으로만 계속해서 머물러 있습니까? 그것은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과 말씀과 은혜를 힘입어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장로님의 장례식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장례식장의 분이기는 대개 다 어둡지 않습니까? 고인의 사진도 대개가 검은 양복에 멍청한 듯 바라보는 그런 사진들 일색인데 이 분은 화사하게 웃는 사진을 걸어 놨습니다. 화사하게 웃는 장로님의 모습을 보니 보는 이의 마음도 참 좋았습니다. [이 분은 웃으면서 천국에 가셨구나]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장례식 사진조차도 웃는 사진을 걸어 놓을 수 있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웃는 모습, 감격하는 모습, 이게 바로 성도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이번주간 [영적각성 부흥회]를 맞이하면서 먼저는 우리 자신의 준비됨이 필요합니다. 준비한 만큼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기대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실 것입니다. 갈망하는 자에게 당신의 은혜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수문앞 광장에서 에스라를 모셔놓고 말씀을 듣던 이스라엘 백성의 심정으로 돌아가 말씀 앞에 서고자 하는 간절한 기대로 우리의 삶을 말씀의 든든한 반석위에 세우시는 시간이 되시며, 여러분 안에 있는 모든 근심과 걱정, 근심의 문제들이 여러분의 심령의 누르고 있는 어둠의 영적 권세들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 깨끗이 물러가고 우리 안에 기쁨과 감사의 고백이 채워지는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