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제목 : 뜨겁든지 차든지

계 3:14-20

본문은 참 유명한 말씀으로 신앙인들이 지침으로 삼아야 할 메시지입니다. 주님은 계시록에서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일곱 개 교회에 메시지 보내셨습니다. 로마제국은 당시 행정구역상 그 지역을 “아시아 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소아시아는 아시아 도 안에서도 3분지 1정도 밖에 안 되는 작은 반도였습니다. 그래서 소아시아라는 말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 좁은 지역에 일곱 개의 교회가 집중해 있었습니다. 그 일곱 개 교회들은 모두 장단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일곱 개 교회에 각각 편지를 보내면서 칭찬도 하시고 책망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라오디게아 교회만은 칭찬이 없이 책망만 나옵니다. 그 책망의 내용이 신앙이 “미지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망하시기를 “네가 뜨겁든지 차든지 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니면 내 입에서 내쳐 버리겠다”고 경고도 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에베소 동쪽으로 160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맞은 편 서쪽으로는 10km지점에 히에라볼리라는 온천 도시가 있습니다. 그리고 남쪽으로 약 14km지점에 골로새가 위치해 있는 곳입니다. 라오디게아 지역은 교통 중심지였고 양을 많이 사육하기 때문에 모직을 수출하는 무역도시였고 브루기아 가루라는 안약재료가 나와 안약이 생산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안약을 사서 바르라는 말은 그곳이 좋은 안약 생산지였기에 하신 말씀입니다. 또 그곳에 그 옛날인데도 의과대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14km떨어진 골로새에서 찬물을 수로로 받아 마셨고 10km떨어진 히에라볼리에서 온천수를 수로로 끌어다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그 찬물이 14km의 수로를 통하여 오는 동안 미지근하여 지고 온천수가 10km를 오는 동안 미지근하여 졌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물이 미지근하여 마시다 토하여 버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 물과 같이 생활이 풍족하니까 신앙이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 믿음이 뜨겁든지 차든지 하라, 아니면 미지근한 물을 마시면 뱉어버리고 싶듯이 너를 내 입에서 내치리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 미지근한 것이 문제입니다. 물도 미지근하면 마실 수가 없습니다. 마셔도 해갈도 안 되고 뱉어버리고 싶어집니다. 성격도 미지근하면 신뢰감이 가지 않고 일하는 모습도 미지근하면 일을 믿고 맡길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아주 미지근한 분들이 있습니다. 몇 년을 교회에 안 나옵니다. 그래서 교적을 정리하려고 카드를 뽑아들고 보면 어떤 분의 것은 한참을 만지작거리게 되는 분이 있습니다. 빼야 되나 그냥 놔두어야 하나 아주 애매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 빼냅니다. 그런데 다음 주일 보니까 와 앉아있습니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만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라오디게아교회에 하신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제발 뜨겁든지 차든지 하라, 계속 미지근하여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하면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15)”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이 열정입니다. 원래 신앙은 열정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데 그냥 앉아만 있을 수 있습니까. “성령의 역사”를 “데몬스트레이션 스피릿”(demonstration spirit)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성령이 내 안에서 데모를 하신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그 마음에 뜨거운 성령의 임재를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이 열정을 잃게 되면 다 잃게 됩니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정이 없으면 사랑도 잃게 되고 직장에서 자리도 잃게 되고 친구도 잃게 되고 사업에서도 실패하게 됩니다. 더구나 신앙인은 열정을 잃으면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토하여 내 버리겠다”고 경고 하셨습니다. 신앙의 열정을 회복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본문을 보면 라오디게아교회에 몇 가지 지적사항이 나옵니다.

미지근한 신앙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15)” 라오디게아 교회는 아주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온천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이었습니다. 안약도 생산하고 모직도 수출하는 무역중심지였고 의과대학이 있던 부한 환경이었습니다. 좋은 환경은 주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더 좋은 열정적인 신앙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의 약점이 그것입니다. 환경이 좋아지고 넉넉해지면 더 신앙이 감사하며 좋아져야 하는데 오히려 안주의식에 빠져서 마침내 미지근한 신앙으로 변질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안주의식은 신앙의 나태로 빠지고 영적 잠을 자게 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래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고난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난의 시기에 기독교 신앙이 불일 듯 뜨겁게 일어났습니다. 초기 기독교에 핍박이 가해오고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환란의 때에는 지하 동굴 속에서 살면서도 신앙의 지조를 지켜왔습니다. 그러다가 기독교가 로마에서 국교로 받아들여 마침내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이제는 마음껏 신앙생활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그런 자유가 주어지고 부해지면 그 믿음의 질이 더 좋아질 것 같은데 정반대입니다. 기독교에 자유가 주어지기 시작하던 그때부터 기독교가 형식화되기 시작하고 중세에 와서 기독교는 온갖 타락의 길을 걷게 되어 마침내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초창기 우리나라에서도 신앙이 얼마나 뜨거웠습니까. 3•1운동 때 한국의 기독교 인구는 전체가 30만 명 정도였습니다. 그 30만 명이 3•1운동을 주도해 나갔습니다. 오늘은 천민이라는데도 이렇게 미지근합니다. 집안에서도 핍박이 있으면 그 믿음은 더 굳세게 발전하였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세상에서 기독교를 박멸하는 한 가지 방법은 평안하게 주는 방법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소리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빌리 그래함은 가마솥 이론을 말했습니다. 가마솥에 물을 넣고 개구리를 넣은 다음 불을 서서히 붙이면 개구리는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고스란히 삶아낼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어떤 부인은 온갖 핍박을 견디며 신앙생활 유지하였습니다. 온 가족들이 신비하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남편을 전도해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고 남편이 집사가 되었는데 그때부터 그 부인은 나태해지기 시작하여 급기야 남편은 열심히 교회에 나가는데 부인은 쉬고 있습니다. 아이러니 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도 처음 수난을 받을 때에는 그렇게 느슨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평안해지게 되니까 차지도 덥지도 않은 신앙으로 변하여 책망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점이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주는 말씀입니다.

좋은 환경 활용 못함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15).” 그 말은 “할 일은 하라”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아주 좋은 환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믿음을 발전시키고 삶을 향상시킬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좋은 환경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고 축복이고 선물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활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신 은혜의 보답이고 주신 은혜를 오래 지속시키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곧 편안함과 안주에 빠져 믿음이 미지근하여 졌습니다. 주어진 환경을 개선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 중에서 가장 좋은 은혜는 “지금, 오늘, 이 시간”입니다. 현재를 영어로 “present”라고 합니다. 선물이라는 영어 단어와 동일합니다. 이 두 단어는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 중에서 가장 좋은 선물은 “현재”라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선물”이라는 영어의 present 와 “현재”라는 영어의 present 가 어원이 같습니다. 현재에 성공한 사람이 미래에도 성공합니다. 현재 성공한 사람은 인생도 성공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탄은 어떻게 해서든지 현재의 우리의 마음에서 기쁨과 행복함을 뺏으려고 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감이 없다면 모두 사탄으로부터 공격받고 있는 중입니다. 신앙의 삶은 미래도 중요하지만 현재는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기뻐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힘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아주 좋은 환경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너무 쉽게 안주에 빠지고 맥 빠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직무유기입니다. 그래서 책망받은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다 은사가 주어져 있습니다. 사역의 은사와 직무의 은사와 나눔의 은사가 있습니다. 은사는 활용해야 더 발전하고 빛이 납니다. 그래야 주신 목적을 이룰 수 있고 활용에서 주어지는 행복이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것을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신앙도 챙기고 못하고 영적인 잠을 자고 할 일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면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 내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닌지 보아야 합니다.

자화상 망각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의 자화상의 진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17)”고 평안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현대인들을 향하여 주시는 아주 뼈아픈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영적으로 가난하고 벌거벗고 눈이 멀었는데도 자신들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17). 우리는 자신의 자화상을 찾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자화상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신앙의 영적 수준을 엄격히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나를 살펴볼 때 내 잣대로 보면 안 됩니다. 내 잣대는 너무 너그럽습니다. 그래서 공주병이 생기고 왕자병이 생기고 자기 과신과 교만이 만들어집니다. 나의 지금 영적 수준과 영적 온도가 얼마인지 정확히 보려면 내 시각이 아니고 십자가의 렌즈를 통해서 나를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렌즈로 나를 보면 내가 보지 못하던 곳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볼 때 나는 아무 죄도 없는 것 같은데 주님의 렌즈로 나를 보니까 나는 흉측한 죄인이고 십자가에서 죽으면서까지 죄 값을 치루어야 할 죄인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십자가 렌즈롤 통해서 나를 보아야 정확합니다.

사람은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엄청나게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검은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세상이 온통 검게 보입니다. 파란 안경을 쓰고 보면 온통 파랗게, 불신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믿을 것이 하나도 없게 보입니다. 편견의 안경을 쓰고 바라보면 이 세상의 것은 모두 편견에 가득 차 있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렌즈를 통해서 나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를 볼 때 대견하게 보였고 부자같이 보였고 자신들이 풍부한 것으로 보였고 자신들이 아주 건강한 신앙인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님의 렌즈로 보실 때는 라오디게아교회는 “아주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얼마나 한심하게 보일 것입니까.

오늘은 외모와 겉모습만 보는 시대입니다. 내면이나 속마음이나 속생각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속는 것입니다. 겉과 속은 다릅니다. 겉모습은 다 꾸며져 있습니다. 이력서를 보면 완벽하게 포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속을 보면 실망하게 됩니다. 어느 여성단체에서 미스터 모범남성을 선정하기로 해서 접수를 했더니 수 만 통이 접수되었습니다. 그중 이력서를 보고 가장 좋은 모범자를 선정했습니다. 자기소개서를 보니까 술도 담배도 여성문제도 여성을 구타하는 일도 없고 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고 주일날은 틀림없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나는 지금 이런 생활을 7년째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모범적이니까. 너무 괜찮아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여기는 안양교도소입니다”라고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자신의 모습을 모릅니다. 부자인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족함이 없다고 자만해 있습니다. 그때 주님이 경고하셨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17).”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 네가 만일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면 내 입에서 토하여 버리라(15-16).” 그리고 주님은 한 가지 처방을 내 놓았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18).” 이 말씀은 오늘 이 시대에 주시는 아주 강렬한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오늘 현대인들을 향하여 주시는 따끔한 메시지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너무 풍부해서 갈급함이 없이 살아갑니다. 간절함도 없이 너무 느슨하고 형식적으로 신앙을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는 동안 내 신앙과 내 영적인 생명이 고갈되어 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내가 지금 고갈상태인 줄도 모르고 여전히 나는 부자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 자신의 자화상을 바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속 모습을 보려면 눈이 밝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안약을 사서 바르라고 했습니다. 여기 안약은 그 지역에서 안약재료가 생산되니까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나의 지금 영적 온도가 얼마인지 영적 수준은 얼마인지 내 영적 형편은 어떤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급선무입니다.

열정 회복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19).” 우리 신앙인들, 사역자들, 제자의 삶에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신앙인은 현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현재에 열정을 가지고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열정”을 영어로 “enthusiasm” 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라틴어의 “하나님”이라는 뜻의 “theos” 와 “안에” 라는 “en”이라는 두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열정이 발생 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나는 비로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목적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정이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도박자들이 며칠씩 밤샘을 하는 열정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인쓔지애즘” 즉 “하나님 안에서 얻어진 열정”이어야 합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송두리째 깨서 예수의 머리위에 부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이다”라는 말 한마디에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이사야가 주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할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즉시 응답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다 버려두고 따라나섰습니다. 이것이 열정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열정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영적 온도가 상승합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서 이 열정을 불태울 심지를 주셨습니다. 성령의 불을 댕기기만 하면 내 안에서 열정의 불이 활활 타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내 안에서 성령이 주시는 열정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 부활 후에 그 열정의 불을 가지고 돌아다니며 전도자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우리는 오늘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면서 혹시 그것이 나의 형편이 아닌가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지금 영적 온도는 얼마나 됩니까.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책망이 곧 나를 향하신 책망이 아닌가를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더욱 큰 은사

고린도전서 12:28~31

 

 

지난 시간에 제가 은혜와 은사 개념의 차이를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물로서 내게 성령이 임해서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구원받은 단계로 이것을 은혜 받았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은혜로만 끝나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의 큰 축복이 내게 임한 것이고 하늘나라 가라고 보장된 것입니다. 은혜 수준에 머물러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은사는 뭐냐? 이것은 하나님의 특혜적 선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서 은혜 받은 사람 중에서 어떤 목적으로 쓰시기 위해 선택을 주시는 부분을 말합니다. 그래서 은혜에 머무르는 신자도 많습니다. 그런데 은사와 은혜가 함께 가는 성도들도 아주 많이 있습니다. 은사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각 지체의 역할입니다. 몸의 구조를 비유해 유기체적 협력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역할을 함으로써 나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져 가는 그런 은사의 목표가 있는 사람, 그래서 은혜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은혜 위에 은사가 임해 은사와 은혜로 함께 가는 성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혜적 선물이라 미리 정하셔서 필요할 때 필요하게 쓰시기 위해 준비시킨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사도 바울 선생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미리 택정하신 바가 지금 나타났다고 말한 것입니다. 은사의 다양성과 일체성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설명 드렸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은사 중에 제일 큰 은사가 있다면 무엇인가에 대해 은사 개념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선, 은사의 구체적 개념을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특혜적 선물이라 했는데 선물이란 일반적으로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선물은 내가 일한 것의 대가성이 아닙니다. 그냥 주는 것이 선물이지 “저 사람이 이렇게, 이렇게 했으니까 그 대가에 대한 선물로 주는 것이다.”라는 선물이 아닙니다. 대가입니다. 마땅한 대가를 받은 것이지 선물이 아닙니다. 줄만한 대가나 공로가 있어 주는 것은 값을 받은 것이지 선물이 절대로 아닙니다. 가끔 TV에서 뉴스를 심각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정치인이 어떤 사람으로부터 돈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검찰에서는 대가성이냐, 선물이냐 이것을 항상 따집니다. 만약 대가성이 있을 때는 법적으로 처벌을 받게 되고 선물일 때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선물은 아무나 내 마음대로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가성만 없다면 선물은 안 받아도 괜찮습니다. 줘도 괜찮고 받아도 괜찮습니다. 선물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선물이 없으면 세상을 무슨 재미로 삽니까? 피차 마음의 선물과 물질적인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사랑이 교환되는 선물은 참 아름답습니다. 잠언에서 선물은 사람의 마음을 아주 편안하게, 훈훈하게 한다고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나 은사는 대가성이 아닙니다. 공짜로 주는 겁니다. 본래 은혜라는 말은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데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다 선물입니다. 믿음은 그래서 선물이라고 했지 대가성이 아닙니다. “네가 공로가 있어서 이만하면 내가 이런 거 하나쯤 줘도 괜찮다.”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냥 주신 겁니다. 이것이 은사와 은혜에 절대적으로 작용합니다. ‘내가 마음이 착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해서 하나님이 이걸 주신다.’ 절대로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에게 가장 나쁜 일을 하던 사람입니다. 예수 믿은 사람들을 다 잡아 죽였던 지독스럽고 잔인스럽게 하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에게 무슨 공로가 있습니까? 아무 공로 없잖아요? 그런데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왜 그 사람에게 그렇게 주신 것인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은혜가 주어진 것이나 은사가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아이디어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조금 전에 찬송했잖아요? 이것이 맞습니다.

두 번째 단계로, 선물은 감사하게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당연한 일을 하고 대가로 받은 것은 감사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내가 어디 가서 하루 종일 일했는데 품값을 지불 받았으면 주는 자에게 감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만한 충분한 대가를 내가 했으므로 주는 대가성이지 선물이 아닙니다. 선물은 그냥 감사하게 받으면 그만입니다. 지금 우리 갈보리교회는 일주일에 돈 좀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이 지난 주일에 세어보니까 350명이 옵니다. 그들의 모습을 제가 쭉 살펴볼 때가 많습니다. 경비 아저씨 두 분이 앞으로 나란히 해놓고 나눠주는데 어떤 사람은 약습니다. 맨 앞에 서서 앞으로 나란히 하고 받았잖아요? 정신없이 몇 백 명 나눠주면 또 한 바퀴 돌아서 뒤에 또 나란히 서기도 합니다. 그냥 주는 겁니다. ‘너는 돌아온 보람이다.’ 그런 사람도 있고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받는 분들이 똑같이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오히려 받으면서 막 야단을 칩니다. “날씨도 추운데 빨리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빨리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시간 좀 지키세요. 벌써 와서 30분 기다렸습니다.” “알겠습니다. 시간 지키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좀 올려주면 안됩니까?” 그런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친구가 아파서 못 왔는데 대신 받으러 왔습니다.”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이야! 다양하다.’ 그런데 지난번에 설날 연휴였습니다. 우리 직원들이 아무도 안 나온 날입니다. 그날이 돈 드리는 날이 되어서 그날 아무도 안 나오니까 생각을 못했잖아요? 밖에 써 붙였습니다. “오늘은 공휴일로 모두 고향에 갔기 때문에 나눠줄 수 없으니 그렇게 아시기 바랍니다.” 그랬더니 제가 옆에 있었는데 “당신 누구요?” “제가 이 교회 목사입니다.” “그러면 진작 알려줬어야지요? 여기까지 헛걸음치게 하다니!” “죄송합니다. 다음에 또 오시면 되잖아요? 매일 오시잖아요? 죄송합니다. 다 고향에 갔습니다.” 그때 아무도 없고 교회에 저 혼자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투덜투덜 대면서 “그러면 다음에 올 때는 두 배로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기도 하고 그래서 ‘이야! 내가 이것에 대해 세미나를 한번 할까 말까….’ 그러고 있습니다. “여보시오! 벌써 내가 온지 7년째인데 7년째 계속 돈 받아 가면서 당신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교회에 대해서 감사하다는 말을 해봤습니까?” 안합니다.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잘못하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귀중한 은사와 은혜 선물에 대해서 우리가 그럴 수가 있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고 불만스럽게 할 때가 생깁니다. “하나님! 나한테 주신 게 뭐가 있어요? 이런 것 주면서 그렇게 생색을 내십니까?”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경건한 자세를 가질 때가 있다는 겁니다. 선물은 크던 작던 감사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주신 것은 절대적 가치입니다. 얼마나 필요한 겁니까? 안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받지 않았습니까?

공산주의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공산당들이 자고 깨면 외치는 구호가 하나 있습니다. 혁명이라는 것입니다. 항상 혁명이라고 빨간 줄을 그어놓고 “와!” 하는 그림을 그렸잖아요? 그래서 정치혁명, 노동혁명, 통일혁명, 여성혁명…. 이 혁명이 뭐냐? 인민들을 못살게 구는데 정책을 두고서 혁명이라고 그러는 겁니다. 노동혁명! 1000삽 두고 허리 한번 펴기 운동! 천리마 운동! 부려먹는데 초점을 맞춰서 혁명을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혁명 투쟁을 합니다. 그러니까 주어지는 모든 것이 뭐냐? 혁명투쟁으로 내가 쟁취한 것이라는 생각이 아주 머리에 박혔습니다. 그러한 문화 속에서 수십 년을 살다 보니까 이 사람들에게는 절대 없어진 문화가 생겼습니다. 언어가 없어진 게 있습니다. 감사할 줄 모릅니다. 감사가 없어졌습니다. 공산당 사회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없습니다. 안 씁니다. 여러분, TV에서도 보셨죠? 뉴스를 보면 남한에서 쌀, 비료, 의약품을 모두 갖다 줬습니다. 그러면 그쪽 책임자가 나와서 우리 같으면 북한 주민들을 향하여, 남한 주민들을 향하여 “여러분들께서 사랑으로 보내주신 이 쌀을 우리 굶주린 북한 주민들이 잘 사용하고 언젠가는 당신들이 우리가 갚아드리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래야 되잖아요? 그러는 것을 들어보셨어요? 10년이 지나도 한마디 안합니다. 여기서 그렇게 의약품, 비료를 많이 보내줬으면 책임자가 나와서 방송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 남한 기자 앞에서 “여러분, 같은 동포들이 이만큼 무리를 생각해서 이런 것을 보내주신 것에 대해서 동포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남북통일이 되어서 모두가 잘 살기 바랍니다. 참 감사합니다. 금년 농사를 동포들이 보내주신 비료로 농사를 잘 지어서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남한 주민들, 감사합니다. 남한 정부 감사합니다.” 한마디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을 한 번도 못 봤습니다. 안합니다. 절대로 안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혁명투쟁해서 저 놈들이 죽을까봐 우리에게 상납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공산당 사회가 그렇습니다. 누구한테도 감사하다는 말을 절대 안합니다. 제가 식량, 의약품 보낸 것만 해도 산더미같이 보냈습니다. 롱비치 항구에서 의약품 컨테이너로 토렌스 교회 마당에서 기자 회견하고 컨테이너에 그 의약품을 가득 싣고 북한 남포항으로 보내는 작업을 제가 맡아서 했습니다. 편지 한 장 없습니다. 인편에라도 “이렇게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없습니다. 10번 해도 한 번도 없습니다. 100번 해도 한 번도 없습니다. 실종된 언어! 그 사람들이 미국에 와서 비행기표, 호텔비도 다 주고 그랬어도 “이 목사님! 이번에 우리 일행을 이렇게 교회가 책임져서 같은 동포애를 발휘해서 이렇게 불러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나와 조선연맹 기독교 위원장과 둘이 기자 인터뷰를 하는데 TV 방송 다섯 군데에서 와서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나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환영사를 해서 “이번에 우리 PCUSA 교단에서 이렇게 북한 조선연맹기독교위원장 강영섭 위원장과 해외 동포 위원장 이런 분들이 오시도록 초청을 했는데 이렇게 먼 길을 와주신데 대해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참 오신 것을 환영하고 감사합니다. 미국에 있는 동안 절대로 불편 없이 저희가 잘 돌봐드릴 테니 어디에 초청받았든지 가서 마음 놓고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에 그쪽에서 “이렇게 초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야 되는 것 아닙니까? 안합니다. 한마디도 안합니다. 나중에 남북이 끌어안으라고 하는데 제가 끌어안아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할 수 없이 끌어안기는 했지만 이렇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여기서 우리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에 가셨잖아요? 그러면 국제 관계는 거기서 또 와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안 오잖아요? 오려면 오고 말려면 말고…. “빨리 가져와!” 또 안주면 안준다고 투덜거리고…. 군인 대장이 나와서 전쟁이 일어날 것처럼 말을 합니다. 그러는 게 공산당입니다. 그러니까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북한에 복음을 전해도 참 오래갈 것 같습니다. 말부터 가르쳐야 할 것 같습니다.

선물에는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어떤 때 선물은 마치 그의 심장이 함께 온 듯 한 느낌이 있을 때가 있잖아요? 또, 내가 줄 때도 마치 포장지에 내 심장을 싸서 보내는 듯 한 선물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버리기에는 아깝고 쓰기에는 헐었으니 너나 가져라!” 이것은 선물이 아닙니다. 마리아의 선물에 예수님 마음이 감동된 사건! 300데나리온의 향유를 발에 붓고 머리털로 발을 씻었을 때 깜짝 놀라 가룟 유다가 “왜 이렇게 허비하느냐?” 그랬잖아요? 예수님이 그때 그 가격을 모르시겠어요? 다 알지만 감동되신 겁니다. “300데나리온의 향유를 내 발에 쏟아 부었다니! 마리아, 잘했다. 괜찮다.” 감격하신 겁니다. 이것이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진 선물을 내가 어떻게 사용해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죽도록 그것에 대해 충성을 합니다. 여러분이 누구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쓰레기통에 버리며 “고맙다.” 그런다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소중하게 생각하고 10년이 지났는데도 그 선물을 가지고 있으면 “이야!” 감격하게 되잖아요? 하나님은 어떠십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십니다. ‘이 얘는 내가 은사 하나를 줬는데 이것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 아닙니까? 이것이 은사 개념입니다. 마치 ‘나는 이것 하다가 죽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하는 것이 은사 개념입니다. 누구에게 언제 선물을 받았는지 자기 죽으면 관 속에 그것을 넣어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이렇게 취급하는 겁니다. ‘이것은 내가 마지막 순간까지 가지고 갈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것이 은사입니다.

은사는 다양성을 일체성이 있으며 유기체적 협력성이 있는데 오늘 말씀에는 몇 가지 중요한 대표적 은사를 발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도요”라고 했습니다. 사도 줄에 있는 것은 최고의 은사를 선물 받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첫째, 둘째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직의 권위는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부러워하지 말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나님이 주시는 첫 번째 은사를 받은 당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직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행자 역할입니다. 왜 이것이 첫째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로 부르신 사람들이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고 하셨습니다. “아들과 아버지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사도를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문제를 이렇게 해결하지 않은 사람은 목사는 하지 말아야 됩니다. 이것 해도 안 되고 저것 해도 안 되니까 ‘에이! 모르겠다. 목사나 해먹자.’ 이런 사람은 하지 말아야 됩니다. 왜?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만듭니다. 내가 목사고시 볼 때마다 항상 이 질문을 제가 합니다. “당신 왜 목사 되려고 합니까? 여기에 대한 답변을 해보세요. 왜 세상에 할 것이 그렇게 많은데 당신 목사가 되려고 그러는 겁니까? 거기에 대해 신앙 고백해보세요.” 이 질문을 제가 지나간 6년 동안 1년에 두 번씩 담당해서, 한번에 150명씩 하니까 1년에 300명씩이니 1800명을 한 겁니다. 제가 일일이 다 질문했습니다. “왜 목사가 되려고 합니까?” 이런 첫 번째 큰 은사인 것을 인식한 사람만이 목사가 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까지 불행해 집니다. 여기 “둘째는 선지자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영적 지도자 역할의 사람인데 구약시대 많은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여기 말하는 것은 신약 시대의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특별히 설교자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설교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선지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선지자들을 귀하게 생각하지 아니하는 자여!” 그 다음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말하기를 “선지자 중에 하나라 하더이다.” 선지자가 이렇게 귀하다고 했습니다. 또 사마리아 수가성 물가에서 예수님을 보고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 이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선지자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째와 둘째는 모두 선지자를 뜻하는 은사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도 마찬가지입니다. 세 번째는 “교사요”라고 했습니다. 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부름을 받은 사람을 말하고 그 다음에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요 그 다음은 서로 돕는 것과 방언이라.”라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삶의 과정에서 지켜 나가야 할 일이 세 가지입니다. 첫째,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성경마다 고백하고 성경을 시작했잖아요? “내게 주신 이 은사는 하나님의 뜻이다. 무엇이 되었든 하나님의 뜻이다.” 그 다음에 어떠한 은사이든 감사한 마음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은사는 활용하지 않으면 빼앗깁니다. 저 같은 사람은 설교가 하나님이 주신 은사입니다. 그러니까 계속 하잖아요? 제가 설교를 안 해버리면 하나님은 설교의 능을 뺏어서 다른 사람에게 촛대를 옮기십니다. 은사는 활용해야 됩니다. 주신 것을 자꾸만 사용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의 은사와 우열을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왜 나한테는 이것을 주고 다른 사람에게는 저것을 주나?’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준 것만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은사자가 가져야 할 실천적 행위입니다.

저는 선교를 다녀보고 우리나라 역사에 매우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늦게 들어왔다는 겁니다. 너무나도 아쉽습니다. 유럽은 기독교 복음 역사가 2천년 아닙니까? 우리나라는 2백년입니다. 어떻게 유럽이 저렇게 서구 문명이라고 하는 찬란한 인류 문명에 앞서가는 나라가 되었는가? 기독교 복음의 힘입니다. 그래서 ‘서구문명’ 하면 ‘기독교문명’, ‘기독교문명’하면 ‘서구문명’이 됩니다. 기독교 문명이 왜 이렇게 발전했느냐? 성경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삶의 가장 훌륭한 창조적 정의가 모두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다보고 성경을 따르다보니까 자연히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실천하기 때문에 문명국이 이루어졌고 잘 사는 문화가 형성되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왜 일본이 한국보다 앞서가는 나라가 되었는가? 사람도 비슷하고 문화도 비슷하고 거리도 가깝고 일본과 한국은 차이가 없습니다. 지역도 같고 사람도 인종도 거의 비슷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일본이 그렇게 앞서가는 나라가 되었는가? 이유는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서구문명을 한국보다 먼저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만큼 빨리 간 겁니다. 서구문명이 기독교문명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나라가 발전한 것은 5천년 역사에서 지나간 2백년입니다. 지나간 2백년 중에서도 발전한 것이 개신교가 들어온 1885년부터입니다. 이 땅에 기독교 복음이 들어오면서부터 이 나라 발전이 시작되었지 그 이전에 무슨 발전이 있었습니까? 우리 역사를 다 보세요. 5천 년 전이나 3백 년 전이나 뭐가 달라요? 아무 문명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똑같이 수천 년이 그냥 그대로였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이 조선 땅에 뿌리 깊이 박혀있는 잘못된 사상을 복음이 들어와서 하나씩, 하나씩 뽑아내기 시작한 것이 이 나라에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우선, 우리나라에 아주 고질적 나쁜 문화가 있었습니다. 양반, 쌍놈이라는 인간 차별 계급의 문화가 뿌리 깊이 박혀있었습니다. 조선의 양반 문화는 추악한 차별 문화라서 인간 권리를 박탈하는 성경에 위반되는 문화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양반 문화에서 파생된 못된 질병이 또 생겨 나갔습니다. 노동을 천박하게 취급했습니다. 그러니까 발전이 되겠습니까? 성경에 노동은 신성한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서구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노동의 신성을 인정을 하고 즐겨서 땀을 흘려 일했기 때문에 문명국가를 이루었는데 ‘땀 흘려 일하는 것은 쌍놈 계급의 하인들이나 하는 짓이다.’ 이렇게 믿고 가능하면 노동에 몸을 쓰지 않는 선비적인 삶만 좋아하는 문화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 노동하는 사람을 뭐라고 합니까? “하인들이나 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즐겨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쇠고기를 먹고, 갈비를 먹는데도 그것을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을 백정 놈이라고 해서 쌍놈 중에 쌍놈이라고 하며 상대도 안하고 그러면서 고기는 또 우질우질 먹었습니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문화를 우리나라가 만들었습니다. 선교사들이 와서 테니스장을 만들어놓으니까 처음으로 테니스 경기를 봤잖아요? 땀을 뻘뻘 흘리면서 테니스를 치니까 양반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렇게 힘든 일을 하인들을 시키지 왜 저렇게 쩔쩔 매고 하느냐?” 더군다나 국가 발전과 경제 발전에 가장 중심적 역할을 하는 상업 거래는 천박하게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상업인을 보고 쓰는 말이 장사치라고 합니다. 그러면 상업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라가 발전합니까? 경제 발전이 어떻게 됩니까? 한때 유럽에서 이런 사상이 있었습니다. “장사를 해서 이윤을 남기는 것은 죄다. 나쁜 놈들이다.” 그래서 이 상거래인들이 교회를 못나왔습니다. 나와도 저 뒷좌석에 앉아서 고개도 못 들고 그랬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혁명적 신학 사상의 칼뱅선생이 칼뱅신학을 발표했습니다. “농사짓는 것도 성직이다. 장사하는 것도 성직이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일은 죄의 부분을 빼놓고 다 성직이다.” 그래서 만사 성직개념을 신학적으로 발표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신이 나서 “그러면 그렇지!” 그래서 노동에 뛰어들고 생산 의욕이 높아지고 상업거래 무역이 활발해지니까 유럽 경제가 하루아침에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저렇게 잘사는 나라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스칸디나비아에 가보시면 바이킹 축제라고 합니다. 바이킹이 뭔지 아시죠?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해적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탔던 배를 박물관에 다 보관해서 그것을 보러 가고 그러는데 그러면 ‘해적 생활이 무슨 잘한 일이라고 덴마크를 비롯한 그런 스칸디나비아의 기독교 국가들이 왜 바이킹 축제를 하는가? 그러면 지금도 해적, 도적질을 하라는 말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의미가 이렇습니다. “바이킹이 비록 해적이지만 전 세계 무역을 최초로 열은 것이 이 바이킹들이다.” 이쪽 나라에서 훔쳐다가 저쪽 나라에 가서 팔고 저쪽 나라에서 훔친 것을 또 이쪽 나라에게 팔고 그 사람들 때문에 해상무역 제도가 처음으로 생겨졌다는 겁니다. 더 의미가 있는 것은 이 바이킹들이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해적인데 우리가 바다에 나와서 한 달, 두 달 해적 생활을 하는 동안 우리 자식들이 잘못되면 어떡하나?’ 그래서 나쁜 해적이지만 좋은 생각을 하나 한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여자 도둑질을 했습니다. 누구를 했느냐? 예수를 참 잘 믿고 깨끗하게 사는 청교도들이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신앙 규범이 아주 철저합니다. 죄라는 것은 생각지 않고 깨끗하게 살기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라고 합니다. ‘퓨리턴(Puritan)’이라고 하잖아요? 기독교 여자들을 납치해서 잡아서 강제로 아기를 낳게 했습니다. 그런데 청교도 여자들이 잡혀서 아기를 낳았으니 어떻게 합니까? 이것도 하나의 숙명적 나의 삶이라고 생각하고 자녀들을 기독교인으로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그래서 그 후손들이 서구 사회의 주인공들이 된 겁니다. 그래서 자기 조상들이 한 일이니까 좋은 면을 보고 축제를 여는 것입니다. 노동을 신성시 안하고 천박한 것이라고 하고 상거래도 장사치라고 하는 이런 이상한 문화 때문에 우리나라가 발전을 하지 못한 겁니다. 그러던 것이 기독교 복음이 들어오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그렇지!’ 여러분 여기 지금 90퍼센트 이상이 여신도들입니다. 여자를 안방에서 사회로 끄집어 낸 것이 누굽니까? YWCA입니다. YMCA는 청년들인데 YWCA는 여자들을 주로 교육시켰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에 YWCA에서 교육받은 사람이 우리나라의 임영신, 한명숙 국무총리, 김활란 등입니다. 그래서 여자들이 이 사회에서 공헌할 수 있는 길을 기독교가 와서 그때 비로소 여러 가지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5천년 역사의 지나간 2백년이 우리나라가 제대로 발전하는데 유럽은 벌써 2천 년 전, 예수님 때부터 벌써 그런 일이 이루어졌으니 우리나라가 그래서 늦어진 것입니다. 왜 우리나라에 복음이 늦게 들어왔는가?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대한민국은 지구의 정반대에 있었습니다. 너무 거리가 멀어서 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복음 들고 여기까지 찾아오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겁니다. 지금 복음이 들어간 나라는 세계 어디나 인간다운 삶이 주어지고 창조적 건설이 이루어지고 앞서가는 나라로 변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주신 은사의 최대한 활용 때문입니다. 돈 잘 버는 사람은 어떻게 머리가 돌아가는지…. 팽팽 돌아가서 그 사람은 길거리 지나가는데도 돈이 다 보인답니다. 저는 안경을 쓰고 봐도 안 보이는데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음으로 세상이 발전하는 겁니다. 유럽은 이것이 이루어져서 앞서가는 나라가 된 겁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하는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러고 나서 고린도전서 13장이 이어지는데 고린도전서 13장은 뭡니까? 사랑장입니다. 사랑이 제일 좋은 은사인데 사랑의 마음을 가진 은사는 사도보다 선지자보다 교사보다 능력 행하는 사람보다 병 고치는 사람보다 방언하는 사람보다 앞서간다는 겁니다. 가장 좋은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려고 다양한 은사의 종류를 바울이 지금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기초로 하지 아니한 은사 활용은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나중에 다 나오잖아요?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이 제일이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은 이 사랑의 문제를 잘 해결해야 됩니다. 이 문제만 해결하면 아주 훌륭합니다. 사람들이 열정은 자기고 있는데 사랑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곁길로 나가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사랑을 기초로 해서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저 같은 목사도 주님의 사랑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보세요. 제가 갈보리교인들을 사랑해야 됩니다. 그러면 갈보리 교회의 교인을 목사가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뭔가? 어떻게 해야 사랑하는 건가? 저는 지금 여러분을 지극히 사랑합니다. 생명을 다해서 사랑합니다. 그러면 ‘목사가 나를 위해서 뭘 했다고 사랑하는 거야?’ 내 사랑의 방법은 내게 주신 은사의 활용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은사를 주셨으므로 하나님께서 나의 입을 통해 최대한 노력해서 말씀을 사랑으로 전하는 것이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이 사랑의 문제를 우리가 잘 해석하지 않으면 오해도 있을 수 있고 사랑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유행가를 잘 모르는데 한번 들어보니까 이런 유행가가 나옵니다. 그래서 제가 한번 적었습니다. “사랑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왜 사랑이 눈물의 씨앗입니까?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사랑 자체로 아름답고 거룩한 것이지 그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의 이기적 욕심을 갖다 붙였는데 그 욕구 충족의 결핍 때문에 눈물의 씨앗이 된 것이지 왜 사랑이 눈물의 씨앗입니까? 아닙니다. “나한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거룩하고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라 말하겠어요.” 여러분, 우리 사랑하면서 삽시다.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저희들에게 제일 좋은 은사, 사랑의 은사를 가르치기 위해 많은 말들을 서론적으로 바울이 열거했습니다. 우리 13장을 통해서 사랑의 정의를 배워 충성스럽게 사랑하면서 사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우리가 항상 짊어지는 예수님의 죽음

본문 : 고후-04-10-

( 고후 4 : 10 )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가 항상 짊어지는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살기 위하여 먹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 아침을 드셨을 것입니다. 점심은 못 드시고 오신 분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또 저녁은 꼭 드실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 명령이 있어서 금식을 안 하는 이상 사람들은 먹어야만 삽니다. 초식동물들은 풀을 먹고 육식동물들은 초식동물들을 잡아먹고 삽니다. 그래서 삶의 에너지를 얻습니다. 약한 생명체를 강한 생명체가 잡아먹고 사는 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좀 비극적인 것 같습니다만 죽음과 생명이 우리 주변에서 동시에 늘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왜 죽어야 하는지를 마음속에 깊이 생각해 보아야 될 것인 것입니다.

<본론>

1. 예수님은 왜 죽으셔야 했나?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당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53절로 58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40년 동안 방황할 때 만나를 먹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을 먹어야 되는 것입니다. 안 먹고는 못삽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서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시라고 한 것입니다. 제일 처음에 이 말을 들을 때 깜짝 놀랍니다. 우리가 식인종도 아닌데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어떻게 마시느냐? 그러나 주님은 엄하게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 우리가 음식을 먹지 아니하면 굶주려서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의 에너지는 음식을 먹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영적인 영생의 생명의 에너지는 예수님을 먹어서 힘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먹지 않고 종교를 먹어서 힘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의식을 행하므로 힘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먹고 마셔야만 우리가 삶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이 정말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므로 매일 매일 살아간다는 심각한 내용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살을 주고 피를 흘려 마시게 하기 위해서는 고난을 당하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구원하는 것은 무슨 수양이나 도덕을 통해서 구원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직접 당신이 죽어서 살을 찢어 주시고 피를 흘려 주셔서 먹고 마시게 하시므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죄로 죽은 우리를 십자가에서 걸머지고 매달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하여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살은 우리를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그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쓴「파우스트」라는 책에서, 파우스트는 문학가이자, 법학가이고, 철학자이자 신학자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인생 문제에 부딪혀 마음에 심각한 고민을 한 끝에 도저히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리고 자살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부활절의 종소리가 나면서 “네 문제로 내가 죽었고 너도 나와 함께 부활했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후, 파우스트는 기쁨과 소망으로 새 삶을 시작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삶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 옛사람을 걸머지고 찢어지고 피를 흘리시고 옛사람을 청산해 버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새생명을 주기 위해서 찢어진 살과 피를 먹고 마시도록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먹으므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2. 우리가 항상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이유는?

성경은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무엇 때문에 항상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것입니까? 몸에 짊어진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저는 지난 50년 동안 항상 순복음교회를 몸에 짊어지고 살았습니다. 잘 때도 순복음교회를 짊어지고, 깰 때도 순복음교회를 짊어지고,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여행할 때도 항상 순복음교회가 내 어깨 위에 얹혀 있었습니다. 순복음교회를 걸머지고 50년의 세월을 지냈습니다. 순복음교회를 걸머진다는 것은 내 모든 관심이 순복음교회에 있고 내가 순복음교회에 그만큼 친밀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는 것은 예수님이 날 위해서 죽은 그 심각한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내가 굉장히 친밀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은 이유가 뭡니까? 왜 내가 예수의 죽음을 항상 몸에 질어지고 살아야 됩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내 죄의 용서를 염려하기 때문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일생의 죄를 짊어지고 빚을 갚으므로 우리는 값없이 빚에서 해방되고 용서와 의로움을 얻게 되었으므로 예수의 죽음이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이기 때문에 관심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항상 예수의 죽음이 내 관심사가 되고 예수의 죽음을 몸이 짊어지고 자고 깨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 부패한 삶이 청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마귀에 잡혀서 꼼짝을 못합니다. 세속적인 인생이요, 마귀의 종으로 살았는데 이 세속과 마귀에서 우리를 놓아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를 흘려 마귀를 멸하고 세속을 청산하고 우리에게 용서뿐 아니라 거룩함과 성령충만을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1절에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성령과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함을 공짜로 받은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몸에 짊어지고 친밀할 때 그리스도의 거룩함과 의로움과 성령충만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절과 19절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의 헛된 행실에서 값 주고 속량을 받았던 것입니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행위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항상 몸에 걸머지고 깊은 관심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또한 우리의 병을 대속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병을 주님께서 청산하기 위해서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매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가 상함 받기를 원하사 우리의 질고를 당케 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을 걸머지고 간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 죽음을 통해서 나의 마음과 몸의 병을 짊어지고 청산했다는 것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친밀해지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았음으로 너희는 여러분 개인을 보고 말씀합니다. 나음을 얻었느니라. 이미 여러분은 법적으로 2천년 전에 나음을 입었습니다. 현재 여러분 몸에 붙어 있는 병은 거짓되고 헛된 것입니다. 실제로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우리가 볼 때는 예수님이 다 청산해 버린 병이므로 거짓되고 헛된 것으로 알고 대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너희 원수 병마는 물러가라! 나와 상관이 없다. 이미 청산되어 버렸다고 우리는 늘 믿고 외쳐야 될 것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진다는 것은 언제나 예수님이 내 병을 청산하고 치료했다는 것을 깨달음을 갖고 살기 위한 것입니다.

그 다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저주를 대속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에덴에서 쫓겨나올 때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생활이 고생스럽고 말할 수 없이 괴롭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렸습니다. 제3세계 오늘날 그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지 수많은 어린이들이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 저주에서 해방시키려고 사람들은 노력을 해도 어느 정도 성공하는지 몰라도 문명국을 내놓고 난 다음에는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우리 인류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죽었다는 말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저주를 주님이 다 담당하시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을 항상 짊어진다는 것은 예수의 죽음을 깊이 관심을 가지고 그 죽음을 통해서 나의 가시와 엉겅퀴 저주가 청산되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내게 다가오는 인생살이의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과 가난이 십자가를 통해서 청산 되었다. 그 사실은 내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 예수의 죽음 속에 나는 저주에서 해방된 것을 깊이 인식하고 그 사실을 친밀히 마음속에 알고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의 죽음을 대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다 죽어야 돼요. 저는 옛날에 우리 할아버지가 92살이 되셨을 때 할아버지는 영원히 살줄로 알았었습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세상을 뜨셨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결코 세상에서 안 죽을 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94살이 된 아버지, 어머니는 세상을 뜨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별 도리 없이 죽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너 나 할 것 없이 한번 태어났으면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은 육신이 사라지는 것이지 그 속에 사는 영혼 사라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영혼이 육체라는 옷을 입고 살다가 그 두꺼운 옷을 벗어버리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옷을 벗어 버리고 영혼은 새로운 영적인 세계 속에 들어가서 깨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주님이 예비한 아름다운 천국에서 깨어나야지 버림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지옥의 고통스러움 속에 떨어져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죽음에 이른 사람들이 가는 곳은 둘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영원한 기쁨이냐, 영원한 슬픔이냐. 영원한 즐거움이냐, 영원한 고통이냐. 둘 중에 한곳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지옥에서 건지기 위해서 당신이 지옥의 고통을 걸머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그 영혼이 사흘 동안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그리고 지옥의 세력을 멸하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로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

디모데후서 1장 10절에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다 썩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썩지 않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영광의 약속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걸머진다는 것은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았다는 것을 마음속에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영양분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지지 아니하면 그를 통해서 나타나는 용서와 의, 거룩함과 성령충만, 치료, 저주에서 해방, 아브라함의 복, 영생복락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을 통해서 용서도 받고, 의롭다함도 얻고, 거룩함을 얻고, 치료를 받고, 축복을 받고, 영생복락을 얻는 것이지 예수님의 죽음 아니고는 그것을 얻지 못하므로 우리는 예수의 죽음을 항상 몸에 짊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잘 때도 예수의 죽음, 깰 때도 예수의 죽음,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일할 때도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최고 관심을 가지고 마음에 친밀하게 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한가지 물건을 24시간 걸머지고 평생을 지낸다면 그것하고 굉장히 친해지지 않습니까? 예수의 죽음을 늘 몸에 걸머지고 있다는 것은 예수의 죽었다가 부활하심과 내가 친밀하여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무덤 내 무덤,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천당 내 천당, 예수 그리스도와 나는 분리 할래야 분리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도망을 쳐도 예수님이 우리 등에 얹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멀리 달아나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그리스도와 우리는 불가분하게 하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이 있어야 우리에게 생명이 있지 죽음이 없는 곳에 생명이 없습니다. 어떠한 공로를 세워도 수양과 도덕을 닦아도 연구를 해도 그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는 못합니다. 날 위해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생명이 되지 예수님 떠나서는 생명이 없습니다. 종교 좋지요. 철학 좋지요, 학문 좋지요, 수양과 도덕 좋지요. 훌륭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은 없습니다. 오직 생명은 날 위해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가 끌어안고 짊어지고 의지할 때 생명이 내 속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11절로 12절에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님이 없는데 무슨 생명이 있어요? 예수님의 생명을 심지 않았는데 무슨 생명이 있어요?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 예수가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평생 교회 나와도 예수님을 내 구주로 모시지 않는 사람은 생명이 없습니다. 금식을 아무리 하고 철야를 아무리 하고 아무리 헌신해도 예수가 마음속에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의 죽음, 예수의 부활이 나와 하나가 되어서 예수의 죽음을 항상 몸에 짊어지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50년 동안 여의도순복음교회를 항상 짊어지고 있는 것과 같이 자나 깨나 먹으나 안 먹으나 순복음교회를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나 깨나 마음에 안고 걸머지고 최고의 관심을 가지고 의지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생명의 원천인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 없이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에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지고 예수 중심으로 살면서 사람들에게 핍박도 당하고 손가락질도 당하고 고난을 당하나 우리는 결국에 예수와 함께 영원한 천국을 상속으로 받을 상속자인 것을 알고 마음속에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될 것인 것입니다.

물고기 가운데 연어는 큰 바다에서 3~4년 동안 살다가 알을 낳을 시기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하천으로 정확히 찾아오는데, 폭포를 만나도 포기하지 않고 뛰어 오릅니다. 그러다 보니 막상 태어난 강으로 돌아왔을 때는 온 몸이 깨지고 지느러미도 상해 거의 기력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알을 낳기 위해서 연어는 강 바닥에 가로 세로 1미터, 깊이 40센티미터 정도의 구멍을 또 팝니다. 그리고 2~3회에 걸쳐 7백 개에서 7천 개까지 알을 낳은 후 팠던 모래나 자갈로 그 자리를 덮어놓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 알을 낳은 후에 연어는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연어가 죽고 난 다음에 그 알이 60일이 지나면 그 알에서 수백, 수천 마리의 연어 치어가 나옵니다. 연어의 삶을 통해 우리는 생명이란 죽음을 통해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연어가 죽어야 새끼들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연어가 죽지 아니하면 새끼들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태평양인 바다에서 우리 동해까지 와서 강을 타고 또 하천에 자기가 태어난 곳까지 찾아옵니다. 그 동안 돌멩이에 치이고 찢기고 곰에게 잡혀 먹기도 하고 새들에게 찢기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와서 자기가 태어난 그곳에 새끼를 낳고 자기는 그곳에서 죽습니다. 그러면 60일 후에 새끼들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죽음과 생명은 언제나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죽음만 있고 생명이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의 죽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을 항상 몸에 짊어지라는 것은 예수의 죽음이 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살고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서 온 몸의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죽으심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져야 돼요. 예수 죽음이 있으므로 내 생명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마음속에 예수 죽음을 내가 걸머지고 예수 죽음을 내가 의지하고 죽음과 함께 있을 때 내게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기 위하여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난다는 것 얼마나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의 죽음만 걸머지고 있으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예수를 죽음을 걸머지면 예수의 부활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용서와 의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거룩함과 성령충만의 생명이 예수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입니다. 치료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활 영생 천국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죽음을 걸머지면 생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 있는 곳에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지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걸머지라고 한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만들어 가지고서 내가 진짜로 등에 걸머지고 다니라는 것은 아닙니다. 등에 걸머진 것처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날 위해서 십자가에 죽었는가 그 의미를 끊임없이 묵상하고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루도 잊지 말고 예수님이 날 위하여 죽은 의미를 생각하고 마음속에 받아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장 1절에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깊이 예수님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옛날 로마의 사형 가운데 죄를 가장 크게 지은 사형수는 참으로 고통과 두려움으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죽은 시체를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그 시체와 눈은 눈대로 코는 코대로 입은 입대로 몸은 몸대로 맞춰 가지고 같이 매달아 놓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가므로 시체에서 썩은 물이 몸에 베어 들어와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선생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은 그 옛날 흉악한 죄수가 시체에 묶여서 시체와 더불어 같이 죽어가는 것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기록했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린도후서 4장 10절의 말씀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우리가 끌어안고 그리스도와 함께 늘 죽음을 생각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도 어찌할 수 없이 우리의 생활 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죽으신 의미를 깊이 생각하여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설교를 하지 않고 죽음에 대한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이 없습니다. 부활의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생명이 있어야 돼요. 증거가 있어야 돼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야 돼요. 씨앗이 심어지면 열매를 맺어야 돼요. 우리에게 용서와 의로움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충만과 거룩함과 회개가 있어야 됩니다. 우리에게 치료와 건강이 와야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이 와야만 되는 것입니다. 부활 영생 천국이 와야 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예수의 죽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을 끌어안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옛날에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굉장히 가난했습니다. 우리 아랫집에 학교가자고 제가 가면 아침을 먹는데 맑은 국물만 있는 죽을 먹어요. 그것을 먹고 힘이 없어서 허덕허덕하는데 그런데 그 윗목에서 볏가마가 한 3개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물었습니다. 그 우리 친구 이름이 수진이인데 “수진이 아버지여, 수진이 아버지여, 이렇게 맑은 죽만 먹고 살아갈 수가 없지 않습니까? 저 윗목에 벼가 3가마니나 있는데 저것을 찌어서 밥을 해먹으면 어떻습니까?” 아이 숟가락을 탁 놓으면서 저를 정면을 보고서 “누구를 죽이려고 그런 소리하느냐? 저 벼 3가마니는 우리 가족의 생명이다. 봄이 오면 벼 이삭을 뿌려야 되는데 봄에 저것을 먹어 버리면 씨가 없어져. 종자 씨앗이 없으면 우리 식구들은 다 굶어 죽어! 지금 굶어서 고생하더라도 종자씨앗은 먹으면 안 돼!” 그 말이 내 마음속에 지금도 쟁쟁하게 울리고 기억나는 것입니다. 종자를 심어야 열매를 얻는 것입니다. 종자가 없이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의 종자는 뭡니까? 예수의 죽음인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이 우리 생명의 종자씨앗인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심지 않고는 종자씨앗이 없는데 무슨 새로운 생명이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까? 종자씨앗을 항상 우리 마음속에 우리는 간직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늘 꿈 꿀 것은 내가 예수의 죽음을 마음속에 모시고 걸머지므로 내게 예수의 새로운 생명이 나타날 것을 꿈꿔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상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유 있는 시간에 헛된 생각하지 말고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이 넘쳐 남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와 의로움이 들어와서 내가 변화 받고 의롭게 되는 나를 상상하고 거룩함과 성령충만이 들어와서 나를 변화시키는 것을 상상하고 내가 치료받아 건강하게 되는 것을 상상하고 내가 가시와 엉겅퀴에서 해방되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모습을 상상하고 부활영생 천국을 얻는 것을 상상하고 꿈을 꾸고 기뻐하고 그를 믿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이 우리의 생명이 된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바라봄의 법칙으로 예수 죽음은 내 죽음이 되고, 예수 부활 내 부활이 된 것을 늘 마음속에 바라보고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를 일으켜 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12절에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항상 바라보고 죽음에 의지하고 예수님의 부활이 내 몸에 넘쳐나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를 채운다는 것을 마음속에 상상하고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입으로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생명 내 생명 늘 그렇게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의 큰 지방마다 선교회를 설립하고 큰 희생과 겸손으로 복음을 전하여 중국 선교의 문을 연 분인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 자신이 극심한 영적 빈곤으로 고통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자기는 죄인이고 무력하고 무능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고통 때문에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아무 힘도 없는 것을 알고 자기는 무능력해서 쓸데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친구 메카티가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를 받고 난 다음에 이 테일러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 친구 메카티가 쓴 편지 내용은 “이 세상에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었으면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이다.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예수 이름으로 사는 것이다. 예수 죽음이 내 죽음이 되면 예수 부활도 내 부활이 되는 것이다. 부활은 예수님이 내 속에 계시고 내가 그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면 내 힘으로 살지 않고 예수 힘으로 산다. 예수 힘으로 의롭게 살고 예수 힘으로 거룩하게 살고 예수 힘으로 건강하게 살고 예수 힘으로 저주를 이기고 살고 예수 힘으로 영생천국을 누리게 된다. 나를 의지하지 말고 내 안에 계신 부활한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믿고 살아라.” 이것이 허드슨 테일러의 생애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날부터 그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내 속에 예수님이 나의 생명을 살아준다고 믿었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굉장한 기도의 힘이 생기고 믿음이 생기고 활력이 생겨서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수많은 일을 중국에서 한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이제 이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그가 여러분 속에 살아 있다고 믿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죽으시고 나와 함께 부활하셔서 내 안에 지금 사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명을 의지하면 새로운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TV를 보고 제게 그런 말을 합니다. “조목사님 몸이 요사이 약하고 그래서 부흥회도 안 나가고 해외여행도 안하고 선교도 안한다고 하는데 TV에서 설교하는 것 보면 빨갛게 거짓말 아니냐? 말도 똑똑하고 기운차고 괜찮은데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느냐?” 강단에서 일어섰을 때하고 강단에서 내려가는 조용기는 다른 사람이다. 강단에 내려 갈 때는 조용기가 내 힘으로 살기 때문에 힘이 없고 지치고 피곤하고 능력이 없지만 강단에 올라올 때는 내가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 업고 사는 것이므로 예수의 생명으로 설교한다. 저는 저의 스스로를 봐도 언제는 느끼는 것입니다. 내가 강단 밑에 내려갔을 때 얼마나 힘이 없고 지치고 피곤한데 강단에 올라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는 완전히 새사람이 되고 새로운 능력과 힘이 솟아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나타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우리가 인지하면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들어오면 우리 생애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김준호 씨는 대학교 2학년 때 기술 병으로 군에 입대하여 탱크 위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목을 다치게 되어서 전신마비가 되어 일거수일투족을 남의 도움을 받지 아니하면 못살게 되었습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그는 처절한 상황 속에서 매일 절망과 슬픔 가운데 자신을 저주하며 죽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휠체어를 탄 여자 전도사님 두 분이 그에게 와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마음에 평안을 얻으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고통스런 짐을 대신 짊어져 주시는 분으로 참 구세주가 되십니다.\" 가만히 보니까 그 여자 전도사 둘이도 서서 걷지 못하는 휠체어에 탄 불구자임에도 불과하고 얼굴이 태양같이 빛나며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를 믿어 새사람이 되라고 해서 거기에 감동을 입고 이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셔 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칠흑 같이 어두웠던 그의 마음에 형언할 수 없는 평안의 빛, 생명의 빛이 비춰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자 광명한 빛이 마음속에 들어오고 삶의 기쁨이 용솟음치며 무언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긍정적인 희망찬 생각이 들어 왔습니다. 게다가 그가 입원하고 있던 병원에 간호 실습생으로 나온 아가씨와 사랑을 하게 되었고, 병원 원목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소명을 주셔서, 그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생겨나게 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입술이 부르터서 몇 번이나 좌절하고 포기하려 했지만 아내의 격려와 그 자신의 끊임없는 기도와 노력으로 결국 놀라운 예술의 경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면서 그린 동양화와 서예 수십 점을 모아 드디어 그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그의 그림은 절망과 좌절의 운명 속에서 고난을 딛고 일어선 성공적인 모습의 작품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많은 사람들이 그 작품을 사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완전히 버림받은 사람인데 그 속에 다른 생명이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용기와 힘과 능력을 얻게 된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생명의 영양분이 되신다고 생각하니 황송하지요. 내가 밥 먹듯이 예수님의 살을 먹고 물 마시듯이 예수님의 피를 마시고 산다니 이렇게 황송할 수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날 위하여 그 살을 찢어 양식으로 주시고 피를 흘려 음료로 주셨으니 나는 감히 하나님의 아들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고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황송한 일인 것입니까? 성찬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매시간 마다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면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항상 예수님의 몸을 먹고 항상 예수님의 피를 마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뿌리가 예수님의 죽음에 뻗어있지 아니하면 우리에게 결코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천국 내 천국 우리 기독교 신자들은 우리가 예수를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와 하나된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같이 되어서 죄인이 되고 고통을 받고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할 때는 자기와 같이 되기 위해서 부활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와 같이 되어서 예수님의 의가 나의 의가 되고 예수님의 거룩함이 나의 거룩함이 되고 예수님의 치료함이 나의 치료함이 되고 예수님의 축복이 내 축복이 되고 예수 천당이 내 천당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와 같이 되기 위해서 오신 것은 예수님이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게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계신 곳에 우리도 가서 있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다는 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철학이 아닙니다. 수양도 아니고 도덕도 아닌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처럼 되어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시므로 말미암아 우리도 예수님처럼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이제는 의롭게 되고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되고 예수님처럼 건강하게 되고 예수님처럼 축복받게 되고 예수님처럼 천국백성이 되어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삶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우리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시여,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항상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위해서 죽은 예수님, 우리는 예수 위해서 살아나야 되는 것입니다.

죽음과 생명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그것이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의 생명의 씨앗이 된 예수님 우리가 항상 몸에 짊어지게 도와주시옵시고

그리스도를 떠나서 존재하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오늘 예수의 죽음을 몸에 받아들이므로

예수의 부활에 참여하는 우리들이 다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쟁기를 잡은 사람

누가복음 9:57~62

 

누가복음 9장에는 예수님의 초능력 사건이 많이 기록된 성경입니다.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니었고 제자들도 능력이 주워졌습니다. 9장 1절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라고 해서 능력장으로 아주 유명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중에 제일 많은 사람이 동시에 참여하는 것이 오병이어 기적인데 바로 이 9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이 자꾸 일어나니까 이것을 목격하는 현장에 몇 종류의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 게 보였습니다. 그 반응에 대해 예수님이 답변하신 말씀이 오늘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 첫 번째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묻지도 않은 말을 합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쫓아가겠나이다.” 이 사람은 그 당시 사회에서 굉장히 성공한 서기관입니다. 그의 말 속에는 대단한 각오와 결심이 들어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인생을 바꾸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별안간 주님이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왜 예수님을 따라가겠다는 인생 전환의 선언을 하였는가? 이것은 매우 간단히 짐작이 갑니다.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초능력적 기적 사건에 황홀해 졌습니다. ‘이분은 결코 보통 인간이 아니시다. 이분을 따라나서면 틀림없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는 순간적 계산이 그의 마음에 작용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그 사회에서 최고로 성공한 수준 있는 사람이 제자가 되겠다고 선언했으면 반가워하시고 좋아하셔야 할 터인데 어려운 자신의 위치를 조금은 서글프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이런 날을 네가 따라오겠느냐?” 이런 대답을 하셨습니다. “너는 이 사회에서 최고로 성공한 사람이다. 그 좋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나같이 갈 곳이 없는 사람을 과연 따라올 수 있겠느냐? 네가 혹시나 더 큰 성공을 기대하고 계산적으로 나한테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냐?” 이렇게 답변하신 겁니다.

실제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엄청난 각오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온 세계 어디서나 기독교 초기 사역에는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망하는 길이었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겠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선언하고 나서는 순간부터 그에게는 말할 수 없는 불이익이 닥쳤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문에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 때문에 이혼을 당했고 조상의 유산 상속에서 제외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마을에서 집단 핍박을 받아 삶의 거처를 쫓겨나게 되는 경우도 있었고, 맨 나중에는 생명까지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순교자가 그토록 많이 나온 것 아닙니까? 죄도 없이 감옥에 갇히고 선한 일을 하고도 악한 대접을 받았고 멸시와 핀잔과 왕따를 당했습니다. 우리가 평생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은 순교자적으로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에서 불과 40년, 50년 전만 해도 어떤 가문에서 한 두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교회 다닌다는 것은 그 가문에서 쫓겨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서기관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네가 나를 따르는 이 순간부터 너는 그 좋은 서기관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고 온갖 비난의 말과 시선을 받아야 할 터인데 그래도 나를 따라오겠느냐?” 지금 예수님을 따라나서겠다고 말하는 이 사람은 충동적 성격의 소유자라서 순간적으로 예수님의 주변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기적을 보고 순간적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라고 하는 최소한의 식량을 가지고 1만 명이 배부르게 먹고 남는 그 현장을 목격하였을 때 이 사람은 ‘이야! 이 사람만 따라다니면 먹는 문제 절대 해결이다!’라는 계산을 금방 하게 됩니다. ‘굶지는 않겠다. 이 사람을 따라나서는 것이 좋겠다.’ 이런 생각을 자연히 하게 됩니다. 또 온갖 불치의 환자들이 예수님 곁에 몰려와서 구원을 요청했을 때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를 절대 거절하지 아니하시고 다 현장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 사실을 목격했을 때 그들은 또 ‘이야! 이 분을 따라다니면 우리 인생에 질병의 문제는 완전한 해결이다.’ 자연히 그렇게 계산하게 됩니다. 또, 예수님은 당시에 국민적 인기도 있었습니다. 온 국민이 가는데 마다 에워싸서 발 디뎌 놓을 틈도 없이 예수님을 보려고 인산인해를 이루고 5천명, 1만 명씩 떼를 지어 따라다니는 그 인기도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예수를 볼 때 아주 황홀합니다. ‘와! 이분이 이렇게 국민적 인기가 있으니까 무엇을 해도 되겠다.’ “주여! 나는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저는 외국을 많이 다니기 때문에 이야깃거리가 많습니다. 또 어떤 때는 재미난 일도 많이 생깁니다. 제가 지난 1월에 외국에 가기 위해서 4부 예배 마치고 급하게 인천공항 카운터에 가서 수속하려고 통로로 걸어가는데 별안간 고등학교, 대학교 여학생들이 한 100여명은 될 겁니다. 저를 보자마자 “와!” 소리를 지르면서 “오빠! 오빠!” 핸드폰 카메라를 갖다 대고 난리를 치는 겁니다.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아니, 얘들이 왜 나를? 한국은 왜 이렇게 오빠 부대가 많아? 이게 웬일인가?’ 그런데 나를 보고 그런 게 아니라 내 뒤에 가수 비가 걸어왔습니다. 그 인기를 보세요. 얼마나 살맛납니까? 예수님이 이런 인기가 있었습니다. 국민적 인기를 한 몸에 지니고 떼를 몰고 돌아다니신 겁니다. “주여! 나는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 생각이 없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지금 교회를 다닐 때 예수를 믿고 사는 신앙생활을 이 서기관과 같이 생각하면 절대 실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이렇게 자신의 위치를 처량하게 표현한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 바로 전의 말씀은 무슨 기록이냐 하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마리아 초원에 들어갔다가 봉변을 당하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예루살렘에 가려면 중간에 사마리아 땅을 밟고 지나가야 됩니다. 그 길로 지나가다가 이 사마리아 사람들이 떼를 지어 나와 예수님의 제자 일행을 다 내어 쫓았습니다. “당신들 여기 밟고 지나가지 마시오. 딴 데로 가시오.” 야고보와 요한이 하도 자존심이 상해서 “아니, 너희들마저 우리들을 이렇게 멸시하느냐?” 그래서 예수님께 요청하잖아요? 기적을 베풀어서 하늘에서 불덩어리를 내려서 이놈들을 새까맣게 다 태워 죽여 버리자고 합니다. 성경 기록에 있습니다. 사실 이 사마리아 사람들은 당시 사회에서 말단 계급으로 취급받았는가 하면 유대 나라 남쪽 사람들은 사마리아 놈들과는 더러워서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나사렛 출신이요 갈릴리 북쪽 빈민촌 사람들입니다. 아주 가난해서 취급도 못 받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마리아 사람들마저 예수님의 일행을 멸시했습니다. “이 너절해 보이는 촌놈들이 왜 여기를 지나가느냐? 나가라!” 사람들이 어느 때 제일 자존심이 상하는가? 차별대우를 받았을 때입니다. 우리나라에 와서 살고 있는 외국인들이 지난번에 TV에 나와서 말했습니다. “대한민국을 꿈이라고 찾아온 당신들이 여기 와서 일을 할 때 제일 슬펐던 때가 언제이냐?” 그랬더니 “한국 사람과 똑같은 현장에서 똑같은 일을 하고도 인격적으로 임금에 차별대우를 받았을 때 너무 슬펐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맞는 소리입니다. 일본에 살고 있는 제일교포들이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찾아와서 “목사님, 미국은 인종차별이 없습니다. 일본은 인종 차별이 심해서 우리 같은 사람 국적을 속여야 할 때가 많이 있는 게 슬픈 현실입니다.” 그런 소리를 저한테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사회에서 취급을 받지 못하는 사마리아 사람들마저 예수님의 일행을 멸시했습니다. “이 땅 밟고 지나가지도 말라.” “그러한 내 공동체에 서기관께서 과연 나를 따라오겠느냐? 이런 대접을 받고도 괜찮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네가 내게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 무엇 때문에 나를 따른다고 일생 선언을 하는 것이냐? 오늘 저녁 당장 어디를 가서 잠잘 곳이 분명치 않은 초라한 나를 따라오겠느냐? 이런 면에서는 여우만도 못하고 공중의 새만도 못하다. 나를 따르겠느냐? 그래도 좋다면 나를 따르라.” 그랬더니 그 말을 듣고 그는 슬며시 빠져버리고 다시는 안 나옵니다. 그러고 나서 군중을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나를 따를 사람이 있느냐?” 그랬더니 두 종류의 사람이 예수님께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하나는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것만 해결되면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 대단히 합리적 말을 했다고 봅니다. 이렇게 합리성 있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아주 이상한 답변을 하시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들이 장사하게 하고 나를 따르려면 이 자리에서 따르라.”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성경말씀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 말씀은 지금 어떤 사람이 금방 부친이 돌아가셔서 오늘이나 내일 장례식을 해야 되는 말이 아닙니다. “내 아버지는 이제 늙으셨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세상을 떠나시게 될 터인데 이 사회 문화는 이렇게 늙은 부친을 버리고 나갈 수가 없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나로 하여금 그런 일을 다 마칠 때까지, 부친이 돌아가시고 장례를 마치고 이런 내 인생의 급한 일을 먼저 한 다음에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 이렇게 말한 겁니다. 이 사람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인생의 우선순위를 자기 주변에서 따지는 사람입니다. “내 인생에는 더 급한 일이 있고 덜 급한 일이 있어서 부친 섬기다가 장례 모시는 일이 이 사회 문화로 봐서 급한 일이기 때문에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려주시면 다 해결한 후에 제가 주님을 따를 수 있겠나이다.” 사실 이 말은 간단하게 들리지만 우리들의 모든 의식 구조 속에는 이런 생각이 항상 작용합니다. ‘내 인생의 중대사가 무엇인가?’ 각자 나름대로의 계획이 모두 다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련된 그 모든 계획을 삶의 우선권으로 정하는 생각이 항상 있어서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언제나 그 다음 차선의 문제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아! 나는 지금 가난하게 사는데 자립의 길이 더 바쁘다. 어느 정도 그 길을 마쳐놓은 다음에 하나님께 충성하는 일도 그 다음에 생각하자.’ 우리 보통 상식적으로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나는 최소한 안정권에 들 수 있는 정도의 경제 기반을 마련해 놓은 다음에 하나님께 충성을 하던지 헌금을 하던지 해야지 지금은 내가 아무것도 마련된 것이 없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고 ‘나는 지금 급한 일이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는 일이요 아들딸 시집, 장가보내는 일이요 내 나이 환갑이나 지난 다음에 이제 내가 급한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한 다음에야 하나님께 충성을 하든가 말든가 해야지 지금은 내가 도저히 할 수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경제적인 일도 ‘적금이나 끝나고 곗돈이나 끝나야지….’ 이런 생각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는 일이 있는데 미국에 있을 때 한국에서 상이용사 출신 목사님이 저에게 전화를 하셔서 “이 목사! 내가 슬픈 일을 당했는데 이 목사님이 오셔서 부흥회 하는데 기도도 좀 해주시고 교인들도 좀 데리고 오시고 그래주세요.” “그러세요.” 그래서 제가 그분의 요청대로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날 저녁에 뭐가 슬픈 일인가 했더니 그분이 설교를 하시면서 막 우시는데 자기가 한국에서 목회할 때 교회에서 충성을 다하던 아주 훌륭한 집사님, 마음에 가장 아끼는 집사님 부부가 7년 전에 캘리포니아로 이민을 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이민을 와서 충격을 받았나 봅니다. ‘이거 만만치 않다. 이민 생활 철저하게 해야지 까딱하다간 이질 문화권에서 우리가 밥도 못 먹겠다.’ 이런 생각을 해서 ‘사회에서 자리 잡을 때까지 우선순위를 경제 자립을 위해서 일하자.’ 그래서 교회 나가는 것도 그만두고 7년 동안 열심히 일하고 주일도 지키지 않고 주일날 일하면 돈을 배로 주니까 오버타임해서 열심히 일해서 7년 만에 목적이 달성되었습니다. 모텔 하나를 잘 장만하고 너무 기뻐서 “이제 우리가 목표대로 잘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7년 동안 교회 한 번도 못나갔는데 다음주일부터 우리가 교회 나가고 신앙생활도 하자. 우리 다 자리 잡히지 않았느냐?” 그런데 그날 밤에 강도가 들어와서 이 분이 다 총에 맞아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까 담임 목사님이 그 소식을 듣고 여기 오신 겁니다. 와서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면서 “이럴 수가 있느냐?” 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을 제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의 철학이란 종말론적 인생이란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여기 지금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말하잖아요? “부친 장례식 같은 급한 문제가 끝난 다음에 내가 하겠습니다.” 그랬는데 예수님의 생각은 “너희 아버지보다 네 장례식을 먼저 하게 되면 어떡할 거냐?” 그런 말입니다. 인생의 문제는 아버지도 아내도 자식들도 가문도 누구도 책임져 줄 수 없는 문제입니다. “네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이다.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 이러한 중대사를 중대사로 선택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저는 어쩔 수 없이 임종하는 교인들과 마지막 비밀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그때가 되면 다 목사를 찾습니다. 그때가 되면 누구도 참석 안하고 목사와 둘이 마주서야 합니다. 그래서 누구도 모르는 이야기를 저에게 남기고 세상을 떠나시는데 공통적인 게 있습니다. “목사님! 내 인생 헛살았습니다. 가치관에 있어서 내가 일생동안 그렇게 가치를 두고 그렇게 피땀을 흘려서 내가 수고했던 그 일이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까 이렇게 헛되고 분토만도 못된 것을 위하여 내가 일생을 바쳤는가 말입니다. 이제야 와서 내가 깨달으니 만약 나에게 1년만 건강을 회복시켜 주셔도 내가 보람 있게 살다가 죽을 거 같은데 내가 가치 있다고 평가하고 그렇게 피땀 흘려 내가 열심히 수고한 내 인생의 가치가 지금 나에게 도움도 주지 못하는 이게 뭡니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이 말씀의 해석도 “지금 당장 주님을 따라 나서는데 한 시간 정도 집에 가서 가족들과 작별인사라도 하게 허락하소서.” 그런데 예수님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라고 마치 예수님은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어서 가족들과 마지막 작별인사마저도 못하게 하시는 야박스러운 느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내가 예수를 따르는 일은 이미 내 마음에 결정을 하였지만 나에겐 이것보다도 더 중대한 일이 있는데 내 가족과 의논해야 합니다.” 그런 말입니다. “나는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이 조상에 대한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대로 내려오던 가문의 문맥을 끊는 일이 사실 쉽지 아니한데 이것은 가문과 가정에 가서 의논해서 작별인사를 한 다음에 깨끗하게 정리해야 그 다음에 내가 편안하게 내 인생에 전환을 할 수 있고 주님을 따를 수 있겠나이다. 이런 일을 먼저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면 내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삶의 가치관의 첫 번째와 두 번째를 서열을 놓고 그것을 먼저 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주님은 절대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 것도 못한다. 이것 따지고 저것 따지고 이거 한 다음에 저거 한 다음에….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에 창조적 일을 한 적이 있느냐? 없다. 버려두고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하라. 하나님의 일을 먼저 하라.”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교문화 영향권에서 살아왔으므로 어린 아기를 낳으면 그 부모들이 절에다 입적시켰습니다. “예수여! 나는 본적이 불교입니다. 그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내 가족과 의논해야 합니다. 이런 문제를 깨끗하게 잘 해결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시면 무리 없이 내가 주님을 따를 수 있겠나이다. 3대 독자의 종손이 조상 모시는 일을 어떻게 간단히 끊을 수 있겠나이까? 작별하는 시간까지 나를 기다려 주십시오.” 이런 문제를 지금 예수님 앞에 다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복음서에 나타난 말, 예수께서 제자들을 처음 만났을 때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낳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는 말씀을 듣고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12사도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이유를 갖다 대고 기다려달라고 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된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쟁기를 잡은 사람과 같도다.” 우리 농경문화에서 살아온 사람은 한두 번쯤은 쟁기를 잡아본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 쟁기에는 원리가 있습니다. 절대로 뒤로 가면 안 됩니다. 이 소에 씌운 멍에는 앞으로 갈 때 멍에가 소의 목과 등에 연결되는 부분에 걸려서 그것이 쟁기에 댕겨짐으로 밭이 갈리도록 그렇게 되어있는 기구란 말입니다. 만일 이 소가 몇 발자국만이라도 뒤로 물러나게 되면 멍에를 씌운 것이나 쟁기를 가진 시설들이 벗겨져서 처음부터 다시 작업을 해야 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원리는 마치 비행기나 자전거와 같습니다. 이 비행기와 자전거는 절대로 뒤로 갈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만 가야 합니다. 서 있어도 안 됩니다.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사람들은 그런 것입니다. 이 쟁기를 잡은 사람은 시선이 절대로 밭고랑의 맨 끝을 바라보면서 몰고 가야 합니다. 이 쟁기를 잡은 사람은 잠시라도 뒤를 돌아보았다가는 그 사이에 밭고랑이 갈지자로 고불고불해 집니다. 여러분이 곁에서 보면 밭가는 사람이 소와 함께 아주 천천히 가는 것이 낭만적으로 보이지요? 쟁기를 잡아 보세요. 얼마나 당황스럽게 빨리 가는지 정신 차리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시골에서는 이 쟁기질 잘하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 품값이 다른 사람의 배를 받고 일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은 바로 이 쟁기를 잡은 사람과 똑같다는 겁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앞만 보고 가야 된다는 겁니다. 과거와 의논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과거의 잘난 것도 돌아볼 것이 없고 과거에 잘 못한 것도 신경 쓸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내 운명적 새로운 역사의 길을 가는데 이제는 쟁기를 잡은 순간 앞으로만 가야지 뒤로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교회 부흥회를 하러 갔더니 주일 낮에 부흥회를 네 번 설교해야 되는데 2부 예배 마치고 점심시간이 되어서 점심을 먹고 3부, 4부 설교를 해야 되는데 담임 목사님이 그래요. “목사님! 오늘 아주 특별한 점심 드시게 됐으니 그런 줄 아세요.” “그래요?” 그랬더니 정말 점심을 마련해 나왔는데 임금님 수랏상같이 숟가락도 번쩍번쩍 하는 거에 아주 잘 차렸어요. “목사님이 이렇게 잘 잡수시면 교인들한테 책망 들을 텐데요?” “네, 저도 압니다. 내가 이렇게 하지 말라고 얼마나 말리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안 됩니다. 절대로 안 되는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에 어떤 여신도가 한분 오셨는데 이 주일날 목사님 식사는 나한테 맡길 수 없나요? 그것도 마음대로 못하죠. 목사님은 공인이라서 그것도 결정해서 해야지 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못하게 합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막무가내로 제발 나한테 일을 달라고 하셔서 그분이 점심식사를 해오는데 그 분이 누구냐 대한 불교회 여신도 회장으로서 육영수 여사 안방으로 날마다 드나들던 사람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여신도 불교는 그 사람 손에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성령을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니 내가 하나님을 믿는 진리를 미리 알았었다며 하면서 사람이 변해 지금은 담임 목사님을 부처님과 같이 생각하고 이렇게 하신단 말입니다.” 과거로 돌아갈 것 없습니다. 앞으로만 가야 합니다. 이거 신경 쓰고 저거 신경 쓰고 이거 한 다음에 저거 한 다음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언제 합니까? 평생 못합니다. 또, 하나님의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은 손해나나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세요. 롯의 아내는 소돔과 고모라 심판 때 뒤를 보다가 소금기둥 되었다고 했습니다. 영적 교훈입니다. 애굽의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들 애굽 생활 그리워 뒤 돌아보다가 수만 명 심판 받았습니다. 영적 교훈입니다. 바울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뒤엣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나라 신라 시대 때 화랑도의 율법 “싸움에 나가서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며” 그래서 빛나게 된 것 아닙니까? 쟁기를 잡은 것은 뒤로 물러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최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생각하는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합당한 사역자라고 지금 말씀하는 겁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항상 마음이 급합니다. ‘내가 벌써 이 나이가 되었는데 하나님의 나라에 내가 무엇을 했는가?’ 그리고 하나님 나라 확장시킬 소식만 들으면 가슴이 뜁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동티모르에 있는 사람이 와서 만났습니다. 신생 국가로 세상에서 제일 가난하고 조그만 나라지요. 우리나라 제주도만 할까요? 그런데 소식을 듣고 나를 찾아왔습니다. “동티모르에 현지 선교사 100명만 파송하면 한 교회로 한 나라는 복음화 됩니다. 한 나라를 다 책임질 수 있습니다. 갈보리교회가 세계 선교 한다고 말을 들었는데 이 신생국가 동티모르의 현지 목회자들을 잘 교육시켜서 100명 파송하는 프로젝트를 우리 갈보리교회에서 해주시면 다른 데 요청할 것도 없이 갈보리교회 하나가 동티모르 하나를 다 복음화 시킬 수 있는 그런 나라인데 목사님이 좀 관심 가져 주세요.” 저는 그날부터 지금까지 가슴이 뛰는 겁니다. 밤잠을 못잡니다. ‘동티모르에서 또 사명이 와서 나한테 와 닿는구나!’ 제가 도저히 부정할 수 없어서 한번 가겠다고, 성령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환율이 오르는 것만큼 저는 가슴이 뜁니다. 이것저것 계산하고 이것저것 다 들여 보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 합니까?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평생 못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오죽 하나님께서 잘 아시고 “너희는 그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왜 그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열매 맺는 가지는 더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손에 들려진 쟁기, 소를 모는 채찍 놓지 말고 앞으로만 가야 합니다. 밭을 다 갈은 농부는 정렬된 밭고랑의 자취를 돌아보면서 미소를 짓고 땀을 닦잖아요?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쟁기를 잡는 쓰임 받는 사역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시여! 오늘도 주님은 하늘의 진리의 말씀으로 저희들을 조명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말씀의 영적인 뜻을 저희들이 잘 깨닫고 믿음 없는 사람같이 말하고 행동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어서 하나님 나라에 쓰임 받는 사역자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려운 때일수록 하나님의 역사에 몸과 마음을 바칠 때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이 세상의 것도 축복하심을 저희들이 믿습니다. 우리 갈보리교회를 힘 있게 하셔서 온 세계를 향하여 하나님 나라 확장하는데 계속해서 쓰임 받는 교회가 되고 교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천국과 지옥

본문 : 눅-16-19-

(눅 16:19~31)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천국과 지옥”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어느 날 설교를 하면서 “만약 내가 여러분에게 단 5초만 지옥을 보여줄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존 웨슬리도 가장 효과적인 설교는 지옥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유명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이 세상에서 부조리하고 불공평한 처사를 볼 때마다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동물들은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습니다. 잘 먹고 잘 살면 되지 천국과 지옥이란 개념은 동물에게는 없습니다. 인간도 불신앙에 있는 분들이 종종 천국과 지옥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심지어 불신자라 할지라도 누구나 그의 마음의 깊은 잠재의식 속에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후의 세계에만 천국과 지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세계 속에 이미 우리는 천국과 지옥이 있는 것을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천국이 어디 있느냐. 지옥이 어디 있느냐? 죽어서 갈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이미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우리는 천국도 체험하고 지옥도 체험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체험하는 천국과 지옥이 미래에 있을 천국과 지옥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론>

1. 마음속에 체험하는 천국과 지옥

육체적인 쾌락과 욕망에 끌려 살며 거짓과 미움과 분노와 불안, 공포, 낙심, 좌절, 절망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이며 사는 삶은 이미 그 마음에 지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불안과 공포와 초조와 좌절과 절망과 미움과 분노에 꽉 들어 쌓여서 술로 세월을 보내고 폭력으로 세월을 보내는 그 사람의 마음에 지옥이 안 들어 있고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지옥 같은 마음의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마음의 지옥을 체험한 사람이 많습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오늘날 우리가 역사를 보면 자기 동포 3천만에서 5천만명을 죽이고 독재를 행한 독일의 히틀러,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모택동 등 사악한 권력을 행한 자는 이미 다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지만 살아있을 동안에도 그들은 지옥 속에 살았었습니다. 사랑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고 동정이란 한 방울도 없었습니다. 무자비하게 자기 동족 3천만에서 5천만명을 죽였으니 얼마나 무지무지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마음에 평안을 가질 도리가 있습니까? 절대로 없습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 같은 자기 생명 마음대로 주장하지 못할 생명을 가지고 있으면서 수많은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고 고통을 줄때 자기 마음에 평안이 있을 턱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히틀러도 평안하게 죽지 못했습니다. 스탈린도 눈을 뜨고 미친 듯이 괴성을 부르고 몸부림치다가 죽었습니다. 고통을 당하다가 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히브리서 9장 27절처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누구든지 반드시 이 세상에 산 그대로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심판을 어떻게 받을 것이냐. 이미 내 마음속에 내 심령이 나를 심판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에 고통과 괴로움과 불안과 처절한 고통이 있으면 지옥이 벌써 내 마음에 있고 지옥의 심판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영화 제작자로 20대에 세계적인 억만장자가 된 미국의 하워드 휴즈는 말년에 정신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많은 재산이 있었지만 머리도 깍지 않고 손톱도 매 손톱같이 길어지고 병균이 있을까 싶어서 사람들과 만나지 아니하고 음식도 닭 스프만 먹다가 영양실조에 걸려서 죽었습니다. 그가 죽고 난 다음에 누구 한 사람 와서 울어줄 사람도 없고 위로해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억만장자였지만 그 마음은 생지옥이었습니다. 그렇게 살아서 무엇 합니까? 벌써 살아있을 동안에 그는 지옥을 체험한 것입니다. 미국의 석유 왕 폴 게이트는 역시 엄청난 부자로, 말년에 그가 영국에 있을 때 한번 신문기자가 물었습니다. “폴 게이트씨 당신의 인생은 행복했습니까?” 그러자 그는 “행복이 어디 있느냐?”고 버럭 고함을 치고 말았습니다. 세계적인 부자였지만 그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돈이나 지위나 명예나 권세가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가져오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쾌락과 부귀영화와 공명으로 인생의 자랑을 삼고 그것이 인생의 참 가치인 줄 알고 그 안에 안주하는 사람들의 최후는 이처럼 외롭고 쓸쓸하며 처참합니다. 이들의 삶은 재물과 명예와 영화로움으로 겉으로는 화려한 듯 하지만 마음속에는 지옥을 경험하고 산 것입니다. 벌써 지옥에 내려가기 전에 마음속에 지옥으로 꽉 들어찬 것입니다. 욕심과 탐심과 욕망으로 꽉 들어찬 그 마음에는 지옥불이 활활 타고 마음에 기쁨과 평안은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고 죄를 회개하고 마음에 믿음, 소망, 사랑, 평강, 희락, 진실, 거룩함을 갖고 살며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감사하며, 교회에 나가고 성도들과 교제하며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갖고 살면 이미 천국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우리가 옛날에 예수를 모르고 세상에 살다가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맡기고 성령으로 충만할 때 마음에 얼마나 놀라운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이 강물같이 넘치지 않습니까? 벌써 마음속에 천국이 들어와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21절에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마음속에 언제나 임하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환경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예수님이 마음 중심에 계시고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고 기도하면서 살면 마음의 평화가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부귀영화 공명보다 더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의 평안입니다. 마음의 평안은 돈 주고 못삽니다. 지위나 명예나 권세를 주고 살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서 성령이 임재하실 때 주는 평안 이것이 참된 평안이요, 평안이 있어야 행복한 것입니다. 평안하게 잠자리에 들어가고 평안하게 깨어나고 하루를 살아도 마음속에 평안을 가지고 살 수 있으면 그것이 행복이요, 천국이 바로 그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평안이 없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공포가 있고 마음이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자도 편하지 않고 깨어나도 편하지 않고 밥을 먹어도 편하지 않고 하루 종일 친구를 만나도 편하지 않고 마음속에 불안이 꽉 들어차면 그는 사는 것이 아니라 벌써 지옥을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2. 사회적 천국과 지옥

우리가 또한 사회적 천국과 지옥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가 지옥 속에 있는 세계도 있고 천국 같은 세계도 있는 것입니다. 정부의 권위와 법질서가 무너진 나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폭력과 집단 난투와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고 빈부격차가 심하고 가정과 사회질서가 문란하고, 평화가 사라지고 도적이 들끓고, 신용이 사라지고, 사회보장이 무너지고, 이러한 생지옥의 사회가 되면 벌써 이 세상사는 것이 지옥인 것입니다.

여러분,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에는 세계 기아 현황이 보고되어 있는데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2006년 10월 로마에서 제출한 보고서에 의하면 2005년에 기아로 인해 희생당한 사람은 이렇습니다. 10살 미만의 아동이 5초에 1명 씩 굶어서 죽었고, 비타민A 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하는 사람이 3분에 1명 꼴고 있었으며, 세계 인구의 1/7에 이르는 8억 5천 만 명이 심각한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는 말했었습니다. 또한 FAO 평가에 의하면 북한은 2006년 식량부족으로 2천 3백만 인구의 다수가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가 바로 지옥 아닙니까? 못 먹고 못 입고 못 살고 그리고 폭력이 난무하고 부정부패가 심하고 인종차별이 심한 이러한 세계와 상황이 바로 살아있는 지옥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정부의 권위와 법질서가 무너져 폭력과 집단 난투와 부정부패가 만연하면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평화가 사라지고 약자는 무참히 짓밟힙니다. 바로 이러한 것을 ‘생지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문에 보면 범죄천국이라 그런 말이 있는데 범죄천국이 어디 있습니까? 범죄지옥이지.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범죄가 횡행하면 범죄천국이 아니라 범죄지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회가 생지옥이 될 수 있고 정부가 생지옥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라크를 봅니다. 나라가 무너지고 날마다 폭력이 있고 테러가 있고 사람은 죽고 파괴가 이루어지는데 생지옥입니다. 그것 살아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나라에 살지 않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6.25사변을 통해서 나라가 무질서하고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파괴될 때 온 나라 전체가 생지옥 같았습니다. 내일을 예언할 수 없는 비극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비교하면 지금 우리가 사는 우리 한국 사회는 천국입니다. 이만큼 질서가 잡히고 평안하고 안전한 나라가 또 어디 있습니까? 그래도 평안한 마음으로 밤거리에 걸어 다닐 수 있는 나라가 오늘날 이 세상에 얼마나 있습니까? 벌써 나라도 지옥 같은 나라도 있고 천국 같은 나라도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로 9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마귀는 우리의 환경을 혼란하게 만들고 부정적으로 만들고 살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마귀를 경계하고 대적하고 물리쳐야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마귀는 수많은 귀신 떼를 거느리고 개인도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혼란과 고통 속에 빠뜨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 무질서하게 만들어서 생지옥을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주님 앞에서 기도하고 마귀를 대적하여 물리쳐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치가 안정되고 정부의 법질서가 확실하고 사회질서가 정연하고 부정부패가 사라지고, 빈부격차가 줄어들고 사회보장제도가 견실하고, 신용이 살아나고, 집단폭력이 사라지고 윤리와 도덕이 서고, 교회가 그 사명을 다하여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며, 시민이 평화롭고 꿈과 희망을 갖고 사는 사회는 이미 천국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벌써 그런 나라는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한 부인이 세상살이가 너무나 힘들어서 자신을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루는 천사가 나타나서 “하나님이 네 기도를 응답 했으니 곧 너를 데려 가겠다. 그러나 네가 할 일이 있다. 집안을 깨끗이 정리해 놓고 와야지 이렇게 어지럽게 해놓고 너만 천당 오면 어떻게 하느냐? 집안을 깨끗이 정리정돈 하라!” 그래서 열심히 집안을 소재하고 정리정돈을 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집안 정리정돈을 다 했으니까 이제 데려가 주십시오.” 천사가 와서 “저 마당에 저 잡초가 저게 뭐냐? 마당에 잡초가 많아서 보기가 흉하고 다음 사람이 와서 살더라도 이런 집에서 살려고 하겠느냐? 잡초를 정리하고 아름다운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고 난 다음에 천당에 오너라!” 그래서 열심히 정원을 가꿨습니다. 잡초를 뽑고 아름다운 꽃을 심고 나무를 심고 정원을 돌보고 난 다음에 “이제 천국 갈 때가 되었으니 이제 나를 데려 가 주십시오.” 하니까 천사가 나타나서 “아직 멀었다. 왜냐하면 너의 집 앞을 봐라! 거지가 나와 있는데 먹이지도 아니하고 입히지도 아니했지 않느냐? 너 이웃집하고 사이가 나쁘지 않느냐. 그것을 정리해 놓고 난 다음 천국 와야지 그것을 그대로 두고 천국 올 수는 없다.” 그래서 그때부터 거지에게 잘 먹이고 입히니까 거지들이 줄을 서서 옵니다. 그래서 다 먹이고 입히고 이웃 사람들에게 친절히 하고 사랑을 베풀고 또 남편과 자식들에게 아주 사랑과 친절을 베풀어서 인기 100%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이제는 다 되었지요?” 하니까 천사가 와서 그 부인의 손을 잡고 창문가에 나와서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바깥을 한번 바라보라!” 보니 정원에는 꽃이 만발하고 나비가 날고 새들이 노래하고 사람들이 보는 곳마다 손을 흔들고 감사하고 남편도 우리 집사람이 제일이라고 하고 자식들도 우리 어머니가 제일이라고 하니까 가만 보니까 천당에 갈 필요 없이 여기가 천당이거든요. 그래서 천사보고 “아이 나 천당은 좀 있다가 가겠습니다. 여기서 좀 더 살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은 자기가 만들기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천국을 만들 수도 있고 지옥을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3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우리가 스스로 마음에 화평을 가지고 가정과 생활에 화평을 가지면 천국을 우리 환경 속에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13절에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성령이 오시면 소망도 있고 마음속에 평강이 충만해야 되는 것입니다. 소망과 평화가 넘치면 마음속에 천국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을 다른데서 찾지 말고 우리의 마음에서 우리의 환경에서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보고 온 이야기를 적은 것을 읽어보았었습니다. 그가 꿈에 천국에 갔는데 지옥에 갔는데 지옥에도 좋은 방에 사람들이 다 앉아 있는데 모두 다 빼빼하게 야위고 못 먹어서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방 가운데는 큰 항아리가 있고 정말 맛있는 스프가 있는데 사람들이 전부다 스프를 숟가락에 떠가지고서 등 뒤로 자꾸 던져 버립니다. 왜냐하면 전부 뻐덩팔이라 그러니 스프를 떠서 입에 못 넣고 등 뒤로 던져 버립니다. 그러니까 스프는 많은데 전부 등 뒤에 스프를 던져 버려서 굶주려서 얼굴이 뀅하고 볼모양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천국에 올라가서 똑같은 좋은 방에 스프가 있고 사람들이 있는데 거기도 전부 뻐덩팔인데 전부 살이 찌고 포동포동하고 좋습니다. 어떤가 보니까 전부 뻐덩팔이지만 스프를 떠서 서로 먹이니까 뻐덩팔이라도 서로 다 먹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다 살이 찌고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거기에서 잠에서 깨어나서 그가 깨달은 것은 지옥은 욕심과 탐심으로 나만 알고 다른 사람은 모른다. 너는 죽어도 나는 살고, 너는 굶어도 나만 먹고, 너는 발가벗어도 나만 입겠다. 자기중심으로 사는 것은 어떤 환경에 갖다 놓아도 지옥이 되고 행복과 사랑을 나누는 사람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남에게 나누어 주고 또 서로 같이 공유하고 서로 사랑하게 되면 어떠한 환경에서도 행복하게 서로 같이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서로 사랑하고 나누는데서 천국이 있고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과 행복나누기 운동을 하는 것도 이와 같이 천국을 우리 삶속에 갖다 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의 마음속에 이미 지옥도 체험하고 천국도 체험하고 우리 사회생활도 이 천국도 체험하고 지옥도 체험합니다. 그런데 진짜 천국과 지옥은 죽음 그 후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으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육체에 옷 입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육체는 언제고 늙어지고 다 썩어지고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이 세상에 영원히 살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육체를 떠날 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사람은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내가 지옥 갈까요? 내가 천국 갈까요? 그렇게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은 지금 내속에 천국이 있으면 반드시 천국에 갑니다. 그러나 내 속에 지옥이 들어 있으면 반드시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지금 천국이 있느냐. 지옥이 있느냐가 나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3. 영원한 천국과 지옥

여기에 한 부자가 있어 권력도 있고 돈도 있고 연락하고 즐거움을 가지고 살지만 그 대문밖에 거지 나사로가 병들고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데 나누지 않습니다. 밥 한 숟가락도 나누지 않고 국 한 숟가락도 나누지 않고 의복 하나도 나누지 않고 자기만 잘 먹고 잘 입고 희희낙락하고 나는 유태인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선택받았으니까 천당 갈 것이라 생각하고 행위는 완전히 나쁜 행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문밖에 있는 거지 나사로는 그 부자의 밥상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개들과 함께 있다가 병들어서 죽었습니다. 죽자 천사들이 와서 그를 데리고 하늘에 올라가서 낙원에 들어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안 죽나요? 부자도 나이가 들어서 죽어서 거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영화롭게 화려한 공동묘지를 만들었지만 그 공동묘지 속에 그가 들어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옥에 떨어져서 불꽃 가운데 고통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지옥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꽃과 같은 고통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마음에 지옥도 고통스럽고 사회적인 지옥도 고통스러운데 진짜 지옥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곳에서 하늘을 쳐다보니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서 낙원에서 즐기는 것을 보고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는 지옥에 떨어져서 이렇게 고생하니 저 나사로를 보내어서 손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서늘하게 해주소서.” 그때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예~ 너는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살면서 이 나사로가 헐벗고 굶주리고 아프고 죽어갈 때 옷 한 벌, 밥 한 숟가락 나누지 않지 않았느냐? 너만 자신 위해서 살다가 너는 지옥에 떨어지고 이 나사로는 천국에 와서 즐거워하고 있다. 또 그뿐 아니라 너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어서 그곳에서 이리 오지도 못하고 여기서 거기 넘어가지도 못한다.” 그러니까 그 부자가 하는 말이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사로를 다시 세상으로 보내서 우리 집에 가서 전도하게 해주십시오. 내 형제가 다섯이 있는데 전부 다 나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또 다 지옥에 오면 이 고통을 당할 것이니 제발 그들에게 전도하게 해주십시오.” 그것도 아브라함은 거부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성경이 있는데 성경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면 죽은 자가 살아나서 간증을 해도 믿지 않는다. 여러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셨는데 우리가 말씀을 저버리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와도 그 말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 속에 우리는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나는 죄가 너무 많고 불의하고 추악하기 때문에 천국 못 간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우편과 좌편에 강도가 들렸는데 흉악한 강도입니다. 살인하고 방화를 하고 흉악한 죄를 짓고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그 강도 중 한사람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회개하고 주여, 주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여 달라고 했었습니다.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그는 마음에 예수께서 하나님 아들인 것을 십자가에서 비로소 깨닫게 되고 입술로 시인하니까 주님이 말씀하기를 오늘날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구원의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구원이 순식간에 그의 마음속에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계셨는데 그 아들이 병들었는데 아들이 자꾸 포도가 먹고 싶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는 포도를 구하기가 힘들었어요. 어머니가 포도를 구하러 온데 돌아다녀도 없는데 왕궁에 담벼락에 포도가 탐스럽게 달려 있는 넝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궁 지기에게 가서 포도를 한 송이만 팔아 달라고 한 송이에 100불 주겠다고 하니까 안판다고. 그러면 한 송이에 200불 주겠다고 해도 그래도 안판다고.. 300불 주겠다고 해도 그래도 안판다고 그래서 그 어머니는 땅에 주저앉아서 울었습니다. 통곡을 하고 울고 있으니까 공주가 나와서 “왜 우느냐?” “포도를 가져가야 우리 아들이 먹고 살겠는데 포도를 안판다고 하니..” 그렇다니까 그 공주가 “이 포도는 파는 포도가 아니다. 이 포도는 임금님의 포도인데 임금님은 포도를 팔지 않고 공짜로 준다고 당신 같이 필요한 사람이 구하면 공짜로 주는 것이지 이것 돈 주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달라고 구하면 주겠다.” 이러니까 그래서 포도를 달라고 하니까 임금님이 나와서 포도를 따서 탐스러운 포도를 공짜로 주시더랍니다. 여러분 구원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구원은 돈 주고 못 사요. 100불, 200불, 1,000불, 10,000불, 100,000불, 1,000,000불, 10,000,000불, 1억을 줘도 못 사요. 구원은 임금님이 원하는 사람에게 주는데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구하기만 하면 구원은 공짜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강도가 낙원에 가는 것처럼 낙원에 갑니다. 바울선생이 셋째 하늘에 올라가서 사람의 말로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선생 같은 분도 낙원에 올라가서 낙원을 보고 감탄을 했습니다. 그 낙원에 우리는 들어갈 것입니다. 성경에 요한계시록에 요한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고 말한 것입니다. 불신앙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예수님을 끝까지 잘 믿은 사람은 낙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낙원에 못 들어가면 그 다음 갈 곳은 음부 아닙니까? 음부에 들어가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미국의 목사요, 교수요, 시인인 밴 다이크의「대저택」이라는 소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천국에 가서 천국의 안내를 받으며 여기저기 보고 다니는데 굉장히 좋은 저택이 있거든요. 감탄을 하고 “야~ 이렇게 좋은 저택을 누구를 위해서 지은 저택입니까?” “당신 하인을 위한 집입니다.” “우리 하인을 위해서 어떻게 이 저택을 지었습니까?” “하늘은 잘못한 것이 없어 지상에서 올려 보내는 것을 가지고 집을 짓는데 당신 하인이 정성으로 하늘나라에 보화를 심었기 때문에 이런 큰 저택을 지었다.” “아~ 참 놀랍다.” 그 다음 쭉 구경을 하다가 아주 낡은 집을 하나 보았었습니다. 그래서 “이 저택은 누구 것입니까?” 그러니까 “바로 당신 저택이요.” “아, 내 저택이 이럴 수 있습니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당신이 하늘나라를 위해서 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늘을 위해서 올려온 재료가 없습니다. 하늘은 정직한 곳이니 당신이 올려온 재료를 가지고 저택을 지어보니 이런 저택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꿈에서 깨어나고 난 다음부터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 나라 위해서 수고하고 일했다는 글을 읽어 본적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힘써 일하는 것은 장차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사람이 임종이 되면 그 사람이 천국 가는지 지옥 가는지 알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자이자 장로교의 창시자였던 존 칼빈은 “사람은 그 죽는 것을 보아야 그 삶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지옥같이 산 사람은 죽을 때 눈을 감지 못하고 얼굴에 흑암의 권세에 잡혀서 이를 갈고 안 죽으려고 발버둥치며 온몸이 경직되어서 죽습니다. 저는 50년 목회하면서 많은 사람을 수의를 입히고 관속에 넣는 일을 했습니다. 옛날에는 다 가난했기 때문에 장의사가 와서 못하고 목사가 그 일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보면 아주 옷을 입히는데 팔이 나긋나긋해요. 다리도 나긋나긋 하고 옷 입으라고 하면은 싹싹~ 관에 들어가라고 하면 살살 들어가고 어떤 사람은 팔이 너무 뻣뻣하고 다리가 뻣뻣해서 옷을 입힐 수가 없어서 팔을 꺽고 다리를 꺽어야 넣습니다. 그래서 그 가족들이 제게 그런 질문을 합니다. “우리 아버지 천국 갔겠지요? 우리 어머니 천국 갔겠지요?” 내가 보기에는 죽은 시체를 보니까 천국 간 사람도 있고 안 간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간 사람은 “틀림없이 천국 갔습니다. 이렇게 마음에 기쁨을 가지고 갔기 때문에 몸도 부들부들 하고 야들야들하고 좋은 것 보니 천국 갔습니다.” 그런데 몸이 뻣뻣하고 굳어지고 긴장되어 있는 사람 가족이 “우리 아버지 천당 갔겠지요? 우리 어머니 천당 갔겠지요?” “갔겠지요?” 갔다는 말을 할 수도 없고 또 안 갔다고 할 수도 없고 갔겠지요 그렇게 말합니다. 확실히 죽은 시체를 보면 천국 간 사람은 얼굴에 웃음을 웃고 몸에 긴장이 하나도 없어요. 몸이 다 야들야들하고 부드러워요. 왜냐하면 속에서 너무 즐겁고 기뻐서 할렐루야를 하고 가니까 몸도 긴장이 안 됩니다. 그러나 천국에 못가고 지옥에 가는 사람은 마귀에게 끌려갈 때 이를 깨물고 반발을 하고 주먹을 쥐고 몸부림을 치기 때문에 몸이 긴장이 되고 뻣뻣한 것입니다.

한국의 유명한 부흥사이며, ‘사랑의 배달부’라고 불리던 길선주 목사님은 임종 시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내게 전보가 왔어. 이제 떠나야 돼. 다들 잘 있게.”그렇게 말하고 떠났습니다. 주변에 있는 친구들을 보고 하늘에서 내게 오라는 전보가 왔어. 이제 내가 떠나야 돼. 잘 있게. 그리고 떠났습니다. 천당 간 일이 얼마나 확실합니까?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무디 목사님은 죽기 직전에 그를 임종하려고 모여 있는 자녀들과 많은 일가친척들 앞에서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광이로다! 땅이 물러가고 하늘이 내게 다가 오는 도다. 그리고 여러분 내일 아침 신문에 무디가 죽었다고 보도 되더라도 믿지 마세요. 무디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대로 이렇게 하늘로 올라갑니다.”라고 하더니 쓰러져서 눈감고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우리의 사후의 세계는 분명히 있습니다. 인간이면 누구든지 낙원 아니면 천국의 음부로 가야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뿌린 씨앗의 열매를 그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선한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와 절망을 걸머지고 십자가에서 한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다하여 우리의 죄악을 다 청산해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야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한 행위로써는 결코 천국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은 어떠한 죄인도 씻어주고 구원해 주고 천국에 가는 확신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가장 큰 보배가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신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귀한 보배는 없습니다.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돈이나 세상 부귀영화는 일시로 있다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또 그런 것들은 겉으로 보면 호화롭게 보이지만 마음속에는 절대로 평안과 기쁨과 천국을 주지 못합니다. 사람의 겉과 마음속은 다릅니다. 육체적인 쾌락과 즐거움이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주지는 않습니다. 마음의 평안과 기쁨은 하나님 앞에 화해해야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하나님과 우리는 화해되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거하므로 우리는 평안하게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

천국과 지옥은 이 세상과 사후의 세계에서 다 같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마음에 천국이 임한 분은 저 세상 천국에 반드시 갈 것이요, 이 세상에서 마음에 지옥이 이뤄진 사람은 저 세상에도 지옥에 반드시 갈 것인 것입니다. 나는 우연히 천국 갈 것이고 우연히 지옥 갈 것이다. 그것은 절대로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죄를 다 청산하고 평안을 마음에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산 사람은 이미 마음속에 천국이 이루어졌으니까 저 영원한 천국에 반드시 들어가지만 이 세상에서 세상의 쾌락을 쫓아 살고 마귀를 따라 살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세상의 자랑을 따라 산 사람은 마음에 벌써 지옥이 이루어져 있는 사람인데 반드시 음부로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사람들은 죽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는 천국에 가기 위한 준비기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 예비하는 기간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준비된 사람은 올라갈 것이고 준비 안 된 사람은 쓰레기 더미인 지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도 남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섬기며 마음속에 천국을 가지고 살다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머리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가야만 합니다. 한 사람도 없어지고 사라질 사람이 없습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 천국 길을 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 죄를 청산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믿음으로 그 보혈의 능력으로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이 와서 하나님의 평화로 우리 마음속에 채워 주시고 천국을 마음속에 주심을 감사합니다.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요 우리 마음에 있다고 말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이미 마음에 천국을 체험하는 사람도 있고 지옥을 체험하는 사람도 있고 우리 사회와 국가가 천국 같은 곳도 있고 지옥 같은 곳도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사후에는 반드시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습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는 다 예수님을 통하여 회개하고 주님 믿고 천국가게 도와 주시옵시고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 한사람도 없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 나라가 이런자의 것이니라

누가복음 18:15~17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만져 주시기를 원하여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제자들은 이를 보고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자기에게 가까이 오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눅 18:16) 유대인들에게는 훌륭한 랍비에게 그들의 자녀를 데리고 가서 축복 기도를 받는 관습이 있었습니다(눅 2:28).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도 자기 아이들을 예수님께 안수 받게 하려고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비정하게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도 어린아이들을 귀찮은 존재로만 여기고 있지 않은가요? 예수님께서는 왜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첫째,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3,4) 어린아이처럼 겸손한 자세로 낮아져 자발적으로 남을 섬기며 순종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심에도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는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빌 2:6~8).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①지혜를 주십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1:2) 진정으로 존귀케 되는 길, 정죄 받지 않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은 교만이 아니라 겸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②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시 10:17)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그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여주십니다.

③붙들어주십니다.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는 붙드시고, 악인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시 147:6)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연약한 마음도 강하게 붙잡아주시고, 기울어지는 사업도 강하게 붙잡아서 부요하게 해주시고, 또 우리의 육체가 약할 때도 강하게 붙잡아서 건강하게 해주시고, 국가가 약할 때도 국력이 강하게 붙잡아주십니다.

④기쁨이 있게 해주십니다.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 29:19) 사람마다 기쁘게 살기 위해서 쇼도 보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며, 영화나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면서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은 순간적이지 영원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만이 영원한 기쁨을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영원한 기쁨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둘째, 의지하는 마음이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가 잠시라도 곁에 없으면 웁니다. 부모를 의지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의지하듯이 여호와를 의지하게 되면 ①복이 있게 됩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잠 16:20)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창 12:2). ②풍족하게 됩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잠 28:25) 자기 자신이나 재물을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번영과 행복을 풍족하게 누리게 됩니다. ③안전하게 됩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보호와 안전을 믿지 않기에 자신에게 해악을 미칠 수 있는 인간 존재를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늘 공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아무도 접근하여 해악을 끼칠 수 없도록 안전하게 보호하여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흑암 중에서라도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소망의 빛을 보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사 50:10).

셋째, 순진하고 온유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는 순진하고 온유한 자입니다. 온유한 자는 ①땅을 차지하는 복을 받게 됩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온유한 자는 외부로부터 닥치는 억압과 고난에 대하여 거칠게 반발하거나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결사적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에서 벗어나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영적 평정을 유지하는 자입니다. 마음이 온유하신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향해서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눅 23:34).

②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되게 해주십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 12:3)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모든 섭리에 겸손히 순복하는 자입니다. 모세는 고난의 세월을 통해서 오로지 하나님 앞에 철저히 낮아져서 전적으로 순복하는 삶을 배우고 행한 자입니다. 모세는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에 대해 직접 반응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인내함으로 온유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온유하신 예수님은 죄 없이 애매하게 누명을 쓰고 고난을 받으셨어도 결코 다른 사람을 비방하거나 분을 내지 않으셨습니다(사 53:7). 성도는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에도 온유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 의지하는 마음이 있는 자, 순진하고 온유한 자가 되어 천국의 축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누가복음 18:15~17]

15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6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바벨론의 압박들을 이기는 원리

다니엘 1장 8-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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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9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10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내 주 왕을 두려워하노라 그가 너희 먹을 것과 너희 마실 것을 지정하셨거늘 너희의 얼굴이 초췌하여 동무 소년들만 못한 것을 그로 보시게 할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되면 너희 까닭에 내 머리가 왕 앞에서 위태하게 되리라 하니라 11 환관장이 세워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게 한 자에게 다니엘이 말하되 12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13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보이는대로 종들에게 처분하소서 하매 14 그가 그들의 말을 좇아 열흘을 시험하더니 15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인지라 16 이러므로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분정된 진미와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

서론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이 이방땅 바벨론에 끌려가 많은 고생을 했다는 강력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그 고생을 이겨냈습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많은 압박을 받았지만 믿음으로 이긴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기었노라”는 뒤에 말씀하셨고 앞부분에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바벨론 같은 세상에 살아가면 환란과 압박과 고통이 오는데 그것을 예수님이 확증적으로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다니엘서의 의미는 이렇게 환란과 압박과 스트레스가 많은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 성도는 이길 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겪은 압박은 밖에서는 압박이지만 다니엘 개인적으로 느낄 때는 스트레스가 되는 것입니다. 민족적인 스트레스도 있었지만 다니엘 개인적으로 겪은 스트레스가 훨씬 더 컸습니다.

1. 다니엘이 겪은 네 가지 압박

첫째, 변화의 압박(Pressure of Change)입니다. 사람들은 단조로운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변화는 때로 좋은 것입니다. 옛날에는 음악다방에 가면 DJ(Disk Jockey)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청곡을 받아 레코드판을 틀어줬습니다. 그런데 판이 어느 지점에 가면 어떤 때는 고장이나 판이 튑니다. 그래서 동일한 소리가 계속 나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고향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 얼마나 되나? 얼마나 되나?......” 이렇게 같은 구절이 2분만 계속 나오면 어지간한 사람은 성질을 냅니다. 그리고 5분 동안 계속되면 분노를 폭발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변화가 없는 삶은 지루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집안에 살면서도 가구의 위치도 바꾸고 옷도 바꿔 입고 넥타이도 바꿔 맵니다. 그런데 이 변화가 너무나 크고 급격하면 쇼크가 되고 파괴적이 됩니다. 다니엘은 세 가지 큰 변화를 겪었는데 이것이 모두 크고 급격한 것이었습니다.

첫째로는 문화적인 변화입니다. 히브리어를 쓰던 사람이 갑자기 갈대아어를 쓰는 바벨론으로 잡혀갔습니다. 한국 사람들도 학교에서 영어를 많이 배웠지만 미국에 가면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쓰던 언어뿐만이 아니라 문화와 음식도 바뀌었습니다. 음식이 바뀌는 것도 괴롭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이 여기서 김치찌개, 된장찌개, 냉면 등을 실컷 먹다 다른 나라에 가서 기름진 음식을 먹게 되면 처음에 잘 맞지 않아 고생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가리켜 문화충격(Culture Shock)이라 합니다. 문화변화가 크면 이것도 스트레스가 됩니다.

둘째로는 가족적인 변화입니다. 다니엘은 지금 바벨론에 혼자 잡혀갔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예루살렘에 남아있었습니다. 편지도 전화도 전보도 인터넷도 없는 먼 이방땅에서 가족들과 연락할 수 없는 외롭고 쓸쓸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6.25 때 한국에 온 미국 군인들이 많이 불렀던 바비 빈튼(Bobby Vinton)의 “Mr. Lonely”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Lonely, I\"m Mr Lonely(나는 외로운, 외로운 사람이에요). I have nobody for my own(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I\"m so lonely. I\"m Mr Lonely(나는 너무나 외로워요. 외로운 사람이에요). Wish I had someone to call on the phone(전화를 걸 대상이 있으면 좋겠어요).

Now I\"m a soldier, a lonely soldier(지금 나는 군인이에요, 외로운 군인이죠), away from home through no wish of my own(내 뜻과는 달리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요). That\"s why I\"m lonely. I\"m Mr Lonely(내가 외로운 이유가 바로 그것이지요. 나는 외로운 사람이에요). I wish that I could go back home(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Letters, never a letter(편지, 결코 한 통의 편지도). I get no letters in the mail(내게 온 한 통의 편지도 없어요). I\"ve been forgotten, yeah, I\"m forgotten(나는 잊혀진 사람이죠, 예 잊혀졌어요). Oh, how I wonder how is it I\"ve failed(오, 어떻게 해서 내가 실패를 하게 되었는지)....

6.25 때 이런 노래를 부르다가 5만 명 이상 넘는 미국 군인들이 죽어갔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있는 것이 얼마나 쓸쓸했겠습니까?

셋째로는 영적인 변화입니다. 다니엘은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킬 수 없고 성전 제사를 드릴 수도 없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껏 섬길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문화적, 가족적, 영적으로 변화가 급격할 때에는 자기 신앙이 견고해야 이길 수 있습니다. 남의 신앙에 얹혀서 의존하는 신앙으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분에게 천국에 갈 확신 있냐고 물으면 자기 부인이 강남중앙침례교회에 잘 다니니 부인치맛자락 잡고 나도 올라 갈 줄로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치맛자락잡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남의 신앙에 얹혀서 가는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어떤 분에게 복을 받느냐고 물으면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예수를 잘 믿어서 나는 그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렇게 받는 복도 있지만 왜 자기가 직접 잘 믿지 못하느냐는 말입니다. 변화가 크고 스트레스가 클 때 남의 신앙에 얹힌 간접적인 신앙으로는 이기기 어렵습니다. 자기의 신앙, 본인의 확고한 신앙으로 이겨나가시기를 바랍니다. 21세기에는 얼마나 변화가 급격합니까?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과학도 변합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오면 벌써 이론이 바뀌어 가르칠 수 없게 될 정도로 빠르게 변합니다. 이것이 변화의 압박입니다. 그러나 세상 것이 아무리 변해도 신앙이 확고한 사람은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줄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세뇌교육의 압박(Pressure of Brain washing)입니다. 느브갓네살이 왕이되어 바벨론을 통치하는데 바벨론이 워낙 강력해지고 하나님이 역사하시자 문화와 언어가 다른 나라들을 지배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그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젊은 엘리트들을 잡아와 세뇌교육을 시켜 바벨론 사람으로 동화되도록 했습니다. 바벨론을 위해 살고 바벨론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바벨론을 위해 살고 죽으면 내가 너희를 축복하여 이 땅에서 돈도 많이 주고 출세하도록 해주겠다고 유혹하는 전략을 썼습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그 젊은이들의 종교를 잊게 하는 것인데 종교를 잊게 하기 위해서 이름을 바벨론 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를 통치할 때 맨 처음 한일이 창씨개명입니다. 이름을 바꾸면 자기 사고가 일본사고가 되어 대한민국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바벨론에 잡혀가 처음 당한 것이 이름이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사람 이름 끝에 히브리어로 ‘엘’ 혹은 ‘야’라고 끝나는 것은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름을 바꿔 버렸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재판관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벨드사살’로 바꿨습니다. 벨은 바벨론 신의 이름으로 ‘벨의 금고를 지키는 자라’고 바꿔버렸습니다. ‘하나냐’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는 뜻의 이름인데 ‘사드락’ 즉, ‘태양신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자라’ 이렇게 바꿉니다. ‘미사엘’은 ‘하나님 같이 강한자가 누구냐?’는 뜻의 이름인데 ‘메삭’ 즉, ‘미의 여신을 예배하는 자라’ 이렇게 바꿉니다. ‘아사랴’는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뜻의 이름인데 ‘아벳느고’ 즉, ‘느고라고 하는 바벨론 신의 종(Servant of Neco)이라’ 이렇게 이름을 바꿨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이 젊은이들의 이름을 바꾼 이유는 “너희가 그동안 섬겼던 여호와 하나님은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즉, “너희의 흘러간 과거는 잊어버리라. 그래야 너희는 바벨론 사람이 되고 바벨론 신을 섬기면 너희에게 장래가 있고 행복이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느브갓네살 왕의 세뇌교육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신문, 잡지, 방송, 인터넷 등 각종 미디어를 통해 우리를 세뇌교육 시킵니다. 특히 우리 자녀들을 세뇌교육 시킵니다. 세뇌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을 빼내려는 것입니다. ‘엘’과 ‘야’ 를 빼내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빼내고 하나님은 잊어라(Forget your God). 그러면 너희는 세상에서 쾌락을 누리며 살고 출세할 것이다. 너희 이름 속에서 ‘엘’과 ‘야’를 빼버려라.” 이렇게 우리를 세뇌교육 시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 교회에 잘 나오다가 고등학교에 가면 교회에 빠지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학교에 가면 아주 빠지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서 ‘엘’이 빠져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빼앗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자신도 이 세속의 세뇌교육에 넘어가서는 안되겠고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하나님을 빼앗겨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셋째, 핍박의 압박(Pressure of Persecution)입니다. 바벨론은 피정복 국가에 잔인한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잘 살 수 있도록 해줬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단지 종교문제만큼은 엄격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에 대해서는 강한 핍박과 극심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니엘 3장과 6장이 핍박으로 유명한 장입니다. 다니엘 3장에서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에게 느브갓네살이 황금 신상을 만들어놓고 거기 절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절하지 않으면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에 던지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는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풀무 가운데 던져졌습니다. 그런데 세 명을 던졌는데 네 명이 뛰어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같은 이가 거기 같이 뛰어놀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생명을 보존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풀무 가운데서 그들은 살아나왔습니다.

다니엘 6장에 보면 바벨론이 망하고 메대 왕 다리오가 다니엘을 좋게 보아 전국을 다스리는 세 명의 총리 가운데 하나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워낙 곧은 사람입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뇌물이라고는 단 돈 일원도 안 받는 사람입니다. 털어도 먼지가 안 나오는 사람이 다니엘입니다. 이처럼 다니엘의 흠을 잡으려고 해도 잡을 것이 없는데 한 가지 다니엘을 넘어뜨릴 것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루 세 번씩 창문을 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메대 왕 이외의 존재에게 기도하거나 절하는 자를 사자 굴에 던지는 악한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이 이법을 알고도 하나님께 계속 기도하자 그를 잡아 사자 굴에 던져 넣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자의 입을 막아서 다니엘은 사자 굴에서 사자와 안고 자고 놀아도 사자가 잡아먹지 않습니다. 이것이 다니엘 6장의 내용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핍박 시에 죽음을 택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려내신 것입니다.

17세기 유명한 청교도인 사무엘 러더포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만든 주역이기도 했는데 그는 신앙 때문에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그가 “천국은 아무핍박이나 아무 반대 없이 은밀히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는 자기 혼자 믿는다며 교회도 안나오고 전도도 안합니다. 그러면 천국가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모르겠다”며 부인하시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 주의 이름을 시인해야 하나님 앞에서도 예수님이 우리의 이름을 시인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야 됩니다. 그러다 핍박이 오면 당해야 됩니다. 저는 신학교 시절 독일어 단과반 강사로 돈을 벌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학원 원장님이 주일날 와서 강의하라고 하고 회식에 가면 술을 마실 것을 계속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내가 지금 주의 종으로 훈련받는 사람인데 이런 것 싫습니다. 저를 해고시키려면 시키십시오.”하고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해고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단호하게 신앙을 지켜나가면 세상이 우리를 쓰러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조그만 핍박에도 쉽게 타협하고 굴복합니다. 요즘은 공무원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드러내기를 아주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종교편향이라고 자꾸 그러니까 드러내기를 아주 싫어하고 이것을 내가 드러냈다가 혹시 종교편향이라고 인터넷에 뜨면 어떡할까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조금 핍박이 왔는데 피해야되겠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핍박에도 당당히 서서 “내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 정직하게 일하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 이렇게 세게 나가면 세상이 꼬리를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은 핍박이 왔지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드러내면 직장에서 해고당한다고 걱정하시는 분 계십니까? 그렇게 해고당하시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 위해서 조금 손해 보십니까? 그러면 백만 배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일은 억지로 해도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서 목사님한테 좋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여러분의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핍박이 와도 굴하지 아니했습니다. 우리도 핍박이 와도 굴하지 않는 단호한 신앙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절망의 압박(Pressure of Dispair)입니다. 다니엘 9장 2절에 보면 다니엘은 예레미야의 말씀을 알았습니다. 포로생활이 70년 갈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그 70년 이후의 계시까지 다 주신 것입니다. 짐승이 나오고 적그리스도가 일어나며 전쟁과 황폐함이 있으리라는 것을 다니엘은 다 뇌 속에 이상으로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 밝은 그림이 아니고 어두운 그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괴로워 절망하는 것입니다. 다니엘 7장 15절에 “나 다니엘이 중심에 근심하며 내 뇌 속에 이상이 나로 번민케 한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뇌 속에 이상이 오는데 그것이 번민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8장 27절에 “나 다니엘이 혼절하여 수일을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 역사의 비밀이 자기의 뇌 속에 이상으로 계시가 되었는데 그것이 밝은 그림이 아니라 어두운 그림이었으니 얼마나 절망감으로 홀로 몸부림 쳤으면 혼절했다는 용어를 썼겠습니까? 다니엘은 앓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2. 압박을 이긴 다니엘의 원리

다니엘은 이처럼 급격한 변화와 세뇌교육과 핍박과 절망의 4중 압박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우리 삶 속에는 갖가지 압박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쓰러지지 마시고 이겨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집안에서도 신앙생활하려면 가족들이 핍박하고 직장에서 상사가 핍박합니다. 그래도 이겨내야 됩니다. 다니엘이 이런 4중의 압박을 이기는 세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다니엘은 하나님을 아는(Knowing God)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성경을 많이 알고, 하나님을 종교적으로 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단순히 머리로만 알았다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개인적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신앙이 진실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육신적인 유대인이라고 해서 다 하나님 백성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로마서 2장 28절로 29절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만이 참된 유대인이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다니엘 11장 32절에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아야 이 세상이 아무리 핍박해도 강하고 용맹스럽게 세상을 물리치고 신앙으로 살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많이 아십니까?”라는 질문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개인적으로 아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과 동행하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성령이 여러분 마음속에 내조해 계신다는 것을 아십니까?”라는 질문입니다. 히브리어로 알다는 뜻인 ‘야다’라는 단어는 지식을 말하지 않고 언제나 체험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 영혼에 말씀하기도 하시고 때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기도 하시며 때로 우리의 길을 열어주시기도 하시고 때로 우리 육신의 병을 고쳐주기도 하시며 때로 우리 안에 들어와서 괴롭히는 더러운 악령들을 쫓아내 주시기도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다양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더 깊이 알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다니엘은 뜻(Determination)을 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뜻이 확고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 1장 8절에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왕의 진미와 포도주가 나쁜 음식이어서가 아닙니다. 왕의 진미와 포도주는 우상에게 먼저 바쳐지고 그들에게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인데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어 내 영혼을 더럽히지 아니하겠다.”라고 확고하게 결단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니엘에게 “왜 너만 유별나게 살려하느냐? 왜 너만 미친 사람 취급받으려하느냐? 신앙은 은밀히 지키면 됐지 왜 네 앞에 놓여있는 부와 명예와 권력과 지위를 버리려 하느냐? 그것을 먹어라. 진미를 먹어라. 포도주를 마셔라. 그것은 우상에게 바쳐진 것이지만 먹고 마셔라. 네 신앙은 너 혼자 속으로 가지면 되는 것 아니냐?”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마음에는 우상에게 바쳐진 것은 안 먹겠다는 확고한 결단이 섰습니다. 바벨론 같은 이 세상에 살아가시려면 이런 거룩한 결단으로 무장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이 확고해야 됩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나는 강남중앙침례교회에 뿌리를 내린 성도다” 이렇게 확고하게 결단을 내리고 하나님을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셋째, 다니엘은 참된 믿음(Real Faith)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이 믿은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Living God)이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지식의 하나님(All knowing God)이시며 당신의 백성을 구체적으로 돌보시는 하나님(Caring God)이십니다.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Able God)이셨습니다. 풀무 가운데서도 건져내고 사자 입에서도 지켜내는 전능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의 하나님은 조금의 헌신에도 축복으로 보답하시는 하나님(Blessing God)이셨습니다. 다니엘은 이런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을 소유했다는 말입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우상들은 거짓인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돌을 갖다 놓고 조각해서 신이라고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빌고 절합니다. 그리고 나무를 가져다가 못을 박아 페인트칠해 놓고 그것을 신이라고 섬기고 거기다 빕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도끼로 찍어도 말도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도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다리가 달려도 걷지도 못하는 것이 무슨 신이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섬기면 왜 희한한 역사가 일어나느냐? 그 우상에 귀신들이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악령을 섬기면 집안에 각종 우한이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멀리하시고 악령을 떨쳐버리십시오. 예수 이름은 악령의 세력을 향해서는 원자폭탄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시고 예수의 이름을 찬양하시고 확고한 믿음으로 굳건히 서시기를 바랍니다. 21세기에도 그런 우상에 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그런 것을 가지고 종교라고 합니까? 그러나 다니엘의 시선은 언제나 하늘의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천지를 지금도 운행하시는 하나님, 지금도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그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눈이 하늘의 하나님께 고정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갖가지 압박과 환란과 고통이 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리고 너희도 넉넉히 이기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기는 사람으로 승리자입니다. 그러므로 패배자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패배자와 같은 얼굴을 가지고 살아서도 안됩니다. 승리자가 승리하고 와서 인상 쓰고 다니며 슬프고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살면 안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모든 압박을 이기고 신앙을 지키고 승리할 수 있다는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다니엘은 성경 가운데 참으로 독특한 인물입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솔로몬 모두 위대하지만 잘못이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잘못이 있습니다. 자기 부인 사라보고 내 누이라고 거짓말하라고 했습니다. 모세도 성질을 내고 반석을 하나님이 가리키라고 했는데 두 번이나 때려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다윗도 밧세바와 간음하고 밧세바의 남편을 간접 살인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지만 그의 말년에 많은 여자들을 데려와 그로 말미암아 우상이 들어오게 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허물이 있다는 기록이 하나 없습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다니엘은 잘못했다는 얘기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얼마나 축복하셨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도 인간인데 왜 허물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다 가려주셨습니다.

에스겔 14장 20절에 보면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믿음의 사람 세 명의 이름으로 나옵니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 있을찌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세상이 다 망해도 노아, 다니엘, 욥은 자기의 의로 생명을 건진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것을 예언한 사람이 에스겔인데 욥과 노아는 오래전에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 예언을 한 에스겔과 동시대(contemporary)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동시대 사람인 다니엘을 놓고 이렇게 의로운 사람이라고 에스겔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다니엘 10장 11절에 보면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와 풀무 가운데 같이 들어갔던 예수님께서 다니엘에게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 다니엘아”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은 이 세상의 압박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와서 예배드리고 있는 우리는 다니엘보다 더 큰 은총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를 주시고 우리는 예수를 직접 믿어 구원받고 죄사함 받은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크신 은총을 받았기 때문에 바벨론 같은 세상 속에 살면서도 패배하지 않고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 살아가며 다니엘처럼 승리하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니엘의 기도

다니엘 6:10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만일 내가 새벽에 두 시간 이상을 기도하지 않았다면, 그날의 승리는 마귀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나에게는 너무나 할 일이 많았다. 그러나 날마다 세 시간 이상 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다. 그 기도가 모든 일을 지탱해 나가게 하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라고 간증한 바 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기도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통로입니다. 또 불의한 세상과 더불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할 성도가 승리를 체험하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최강의 무기입니다.

다니엘은 당시에 어명을 어기면 사자 굴에 던져지게 되는 위기의 상황에서도 한결같이 기도한 위대한 신앙의 승리자입니다. 그러면 다니엘은 어떻게 기도했을까요?

첫째, 생명을 내걸고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은 30일간 왕 외에는 아무에게도 구할 수 없게 하는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혀 있으며, 이를 어길 경우 사자 굴에 던져진다는 사실을 알고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메대와 바사 제국의 총리라는 자리, 더 나아가 자기 생명까지도 위험에 던져지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위기에 직면할수록 기도를 쉬지 말고, 생명을 내걸고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솔로몬은 훗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범죄하여 이방 땅으로 사로잡혀 가게 될 경우, 그들이 그 흩어진 곳에서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 쪽을 향하여 기도할 경우를 가정하고, 그에 대해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해주실 것을 기도하였습니다(왕상 8:46~53). 다니엘은 비록 포로로 끌려온 이들 가운데서 매우 높은 위치에 올라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형편이었지만, 그는 자기 민족들이 고난당하는 것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파괴되고 없지만, 솔로몬이 올린 기도의 내용을 생각하고, 또한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70년으로 정한 포로 기한에 대한 말씀을 생각하면서(렘 29:10), 포로된 선민들의 회복을 기원하며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셋째, 지속성 있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를 사자 굴에 던져 넣는다는 법령이 반포되기 전부터도 하루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그는 기도로 인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졌다고 해서 기도를 중단하지 않고, 전에 행하던 대로 기도했습니다. 제국의 총리로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도, 그는 지속성 있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다가도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를 쉴 때가 있는데, 지속성 있는 기도를 드려야 되겠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넷째,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최대한 낮춘다는 마음의 자세이고, 참으로 절박한 상황에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릎을 꿇고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될 정도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눅 22:41~44). 시편 65편 6절을 보면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자세로 기도해야 합니다.

다섯째, 위기 속에서도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니엘은 ‘선민 회복’이란 거룩한 소망을 이루고자, 자신의 몸이 사자 굴에 던져지게 될 위기 속에서도, 자기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에 보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내걸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루에 세 번씩 지속성 있게, 무릎을 꿇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니엘에게 사자 굴속에서도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않도록 보호해주시고, 그의 대적들을 물리쳐주셨으며, 그를 사자 굴에 던지도록 명령했던 다리오 왕으로 하여금 오히려 그가 섬기던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셨고, 그의 시대를 형통하게 해주셨습니다(단 6:23~28).

다니엘의 기도를 본받아 신앙의 위기에 직면할수록 생명을 내걸고 기도하며, 성전을 향하여, 지속성 있게, 무릎을 꿇고 겸손한 자세로, 감사의 기도를 드림으로 신앙생활에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니엘 6:10]

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기도의 생활화

다니엘 6:10 ~ 17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 그들이 왕 앞에서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사로잡혀 온 유다 자손 중에 그 다니엘이 왕과 왕의 어인이 찍힌 금령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하나이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그로 인하여 심히 근심하여 다니엘을 구원하려고 마음을 쓰며 그를 건져 내려고 힘을 다하여 해가 질 때까지 이르매 그 무리들이 또 모여 왕에게로 나아와서 왕께 말씀하되 왕이여 메대와 바사의 규례를 아시거니와 왕의 세우신 금령과 법도는 변개하지 못할 것이니이다. 다니엘서 6:10~17

사람에게는 저마다 습관이 있습니다. 습관이란 한 가지 행동을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연습, 훈련되어서 익숙하게 잘 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무의식적으로, 또 본능적으로 제2의 천성이 된 것들입니다. 좋은 습관을 가진 사람과 나쁜 습관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습관은 공동체와 나라에도 있습니다. 어느 분이 새벽기도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아서 ‘어떻게 이렇게 경건한 사람이 있을까!’ 생각하며 물어보았습니다.

“언제부터 새벽기도에 나오기 시작하셨습니까?” “초등학교 때부터요.” “아니 어떻게?” “저는 새벽 4시만 되면 눈이 떠집니다.” 이런 좋은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밤 12시가 되어야 눈이 번쩍 뜨여서 새벽까지 공부하고 활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각자 습관이 다릅니다.

술이나 담배, 마약 등에 손을 대는 나쁜 습관으로 건강을 해치는 경우도 있고, 군에 가서 좋은 습관을 들여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군에 가서 저녁시간에 열심히 공부해서 학사 학위를 받아 온 젊은이가 있어서 깜짝 놀았습니다. 개인시간을 내기 힘든 군 생활 중에도 공부하는 습관을 드려 그렇게 훌륭한 결과를 얻었고, 제대 후에는 대학원까지 진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반대로 어떤 젊은이는 군에 가서서 담배와 술과 욕설을 배워왔어요. 늦게 집에 들어와서 욕설을 하고 가족과 다투고 집안에 불화를 일으키는 바람에 어머니가 가슴 아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좋은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만약 나에게 나쁜 습관이 있다면 나 스스로는 그것을 잘 고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변화를 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의 이 나쁜 습관을 고쳐 주옵소서.” 내게 있는 나쁜 습관들은 하나씩 고쳐가고 좋은 습관들을 새롭게 개발하도록 해야 합니다.

생각도 습관입니다. 습관적으로 나쁜 생각을 하면 인생이 잘 풀릴 수 없습니다. 생각이 어두우면 어두운 결과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좋은 생각을 하는 습관을 키워야 합니다.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4:8). 우리의 생각을 잘 통제해서 늘 좋은 생각을 반복하여 마음속에 어둡고 더럽고 악한 생각이 자리 잡지 않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습관은 연습입니다. 예배를 마치자 어느 분이 저를 찾아와 말씀하셨어요. “목사님, 저는 모든 일이 잘 되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혹시 잘 안 되면 어쩌나 걱정을 하게 됩니다.” 그 분이 왜 그럴까요? 젊을 때부터 염려하는 연습을 많이 했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 걱정의 습관이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늘 두려운 마음이 있다면 두려워하는 훈련을 했기 때문입니다. 생각도 습관입니다. 반복해서 자주 하다 보니 두려운 마음, 염려, 불평이 생기는 것입니다. 불평도 늘 하는 사람이 하지요.

제가 미국의 교회를 떠난 지 20년이 넘었는데 최근에 어느 분이 저에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제가 “요새 교회가 어떠합니까?”했더니 “말이 좀 많고 복잡합니다”라고 해요. “왜 그렇지요?” “아무개가 자꾸 문제를 일으켜서 그렇습니다.” 그 아무개라는 사람은 제가 있던 때도 문제를 일으키던 사람입니다. 30년 전에도 비판, 불평하고 문제를 자주 일으켰던 그 사람이 지금은 더 잘 한대요. 무엇을 말합니까? 습관과 연습입니다. 오랫동안 똑같은 생각, 행동, 말, 태도, 좋지 않은 감정을 훈련하면 습관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은혜 베풀어 주셔서 우리는 언제든지 좋은 생각, 긍정적인 생각을 늘 해서 좋은 생각이 습관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를 방문하신 우간다 대통령 수석 보좌관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찾아오신 후에 한국 사람들에게 정신적, 심리적, 정서적, 영적, 경제적 혁명이 일어났다”고 말했습니다. 그전에 우리는 귀신이 해칠까봐 늘 두려움과 불안에 떨며 얼마나 많은 고사들을 지내며 애를 썼습니까! 그러던 우리가 귀신을 이기신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겁날 것이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전능자 하나님, 모든 마귀의 세력을 십자가에서 패배시킨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엇이나 할 수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사람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이것은 생각입니다. 믿음입니다. 태도입니다. 느낌입니다. 이런 믿음이 확실해 져야 합니다.

부정적인 단어, 좋지 않은 단어, 상처 주는 단어가 하나라도 내 입에서 튀어 나오면 바로 붙잡아서 하나님께 내려놓고 “하나님, 이 단어가 아직도 나를 괴롭힙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고쳐주옵소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새로운 단어를 주실 것입니다. 새로운 좋은 단어를 배워서 입을 열 때마다 축복의 단어, 친절의 단어, 격려의 단어, 사랑의 단어, 생명의 단어들이 습관적으로 쏟아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적극적, 긍정적, 상향적, 진취적, 희망적인 태도가 예수 믿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의 삶에 이런 변화가 나타나서 이제부터는 말과 행동에 모든 좋은 것들이 우리의 습관이 되기를 원합니다. 좋은 습관들을 많이 개발해 놓으면 그것들이 모여 좋은 인격이 형성됩니다. 좋은 인격이 형성되면 저절로 그 분에게서 좋은 것들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 말, 태도, 느낌, 행동, 결정 등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것들을 선택하며 좋은 습관을 만들면 좋은 인격을 갖추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해도 성공적인 인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러 가지 습관이 있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난 지 8일 째에 할례를 하고, 1년에 한두 번 자녀들을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자녀들을 축복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좋은 관습들이지요. 예수님도 12살 때 예루살렘에 가신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도 좋은 습관이 여럿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습관을 따라” 하셨다는 말씀들이 여러 번 나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의례 회당에 가는 습관이 있었습니다(눅4:16). 예배를 드리고 성경 말씀을 읽고 토론하고 강론하셨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는 토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늘은 날씨가 특별히 좋은데 교회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것이 아닙니다. 날씨가 좋든지 나쁘든지 안식일에는 회당에 가는 것이 예수님의 습관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주일이 되면 하나님의 전에서 예배드리는 습관이 철저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주일에는 여러분을 기다리십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것이 습관이 된 사람이 어쩌다 한 번 주일 예배를 참석 못하면 참 마음이 불편합니다. 저는 70년 만에 한 번, 건강문제로 3주 전에 부활주일 예배에 참석을 못했지요. 제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그날 단 한 번 빠졌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불편하든지요! 인터넷 동영상 예배를 드렸는데, 그것도 참 좋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주일날 교회에 갈 것인가 안 갈 것인가는 논의의 대상이 아니요 입에 꺼내지도 못할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고 2때, 교회 가는 것이 힘들고 싫다고 느껴진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팔자가 사나워서 예수 믿는 집안에 태어나 매주 교회에 가야 되나? 이제 교회 안 가!’하고 성경을 방구석으로 집어 던졌습니다. 하지만 주일 아침이 되자 던져버렸던 성경을 주워서 교회에 갔습니다. 안 가려고 했는데 마음이 답답하고 어두워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습관은 아름다운 습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반드시 회당에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습관을 따라 안식일에 회당에 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자식들에게 정말 큰 유산을 남겨 주려거든 믿음의 유산을 남겨 주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나를 기다리신다, 내가 그곳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기쁨과 기대감으로 주님의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좋은 영적인 습관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께는 제자들을 데리고 감람산에 올라가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눅22:39). 그룹기도입니다. 마치 여러분이 매 주일 사랑방에 모여 기도하는 것처럼 좋은 습관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말씀을 함께 읽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인생을 나누고, 힘을 합해 주님의 일을 도모하는 것은 좋은 습관입니다. 이런 것을 삶의 습관 중 하나로 만드십시오.

셋째, 예수님께는 새벽에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 너무 바쁘고 많은 사람들과 계속 같이 있으면 마음도 몸도 피곤해 집니다. 그런 때 무엇이 필요한가? 조용한 시간입니다.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님과 만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편저자가 주님께서 “내 얼굴을 찾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한 것처럼 여러분이 정기적으로 조용한 시간을 가지면 몸과 마음과 영혼이 편안해져서 우리 속에서 내적인 힘이 솟아오르며 우리의 몸, 마음, 영을 회복시킵니다.

넷째, 저녁에 산에 가서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마태14:23). “저녁에 조용한 산으로 혼자 가셔서.” 주님은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자주 대화하면서 수많은 사역의 문제, 인생의 문제를 나누면 모든 문제가 다 풀리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할지 모든 것이 눈에 보입니다. 왜? 주님의 기도생활 때문입니다.

다섯째, 예수님께서는 무리가 몰려오면 가르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막10:1).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좋은 신앙의 습관을 가져서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만날 때마다 여러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교훈이 되고 여러분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축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모일 때마다 행동으로, 말로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시편 119편 132절을 보면 하나님께도 한 가지 습관이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당신의 습관대로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자비와 긍휼과 은총을 베푸시는 습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찬양하기를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좋아하시면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시는 자신의 습관에 따라 반드시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 좋은 습관을 가지고 계시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그 좋은 습관이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니엘에게도 좋은 습관이 있습니다.

첫째, 다니엘은 기도의 습관이 있습니다. 기도가 생활화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10절). 이 때 방은 다락방입니다. 자기 집의 다락방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다니엘처럼 기도 습관을 만들고, 기도 장소도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일터로 가기 전의 자동차 안이든지, 집이든지 사무실이든지 일정한 기도장소가 있으면 기도 습관에 좋습니다. 성도들의 가정을 방문해 보면 기도자리가 따로 있어요. 방 한쪽에 작은 책상이 있고 성경과 오늘의 양식이 놓여있고 방석이 하나 있는 것을 봅니다. 습관을 따라 그곳에 앉으면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좋은 습관입니다.

다락방에서 기도하는 습관을 지닌 다니엘은 많은 일을 했습니다. 포로로 잡혀온 이래 16살 때부터 궁전에서 일하면서 느부갓네살, 벨사살, 다리오, 고레스 왕의 총리로서 70년간 섬겼습니다. 총리의 일을 맡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아이디어를 내고 얼마나 중요한 결정을 많이 해야 했겠습니까! 온 나라와 백성과 왕에게 축복이 되도록 하나라도 실수 없이 하기 위해 얼마나 기도를 했겠습니까! 매사에 기도하고 일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에게는 따로 기도하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간구하는 다니엘에게 많은 지혜를 주셨습니다. “왕이여 나는 왕 앞에서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단6:22). 늘 기도하면서 국정을 다스렸기 때문에 왕과 나라에 해를 끼친 적이 없이 무사히 잘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니엘의 기도 습관처럼 늘 기도하며 일하면 같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둘째, 다니엘은 “창문을 열어 놓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의 습관입니다. 창문이 예루살렘 쪽을 향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포로로 잡혀 온 지 70년인데, 아직도 창문을 열어놓고 자기의 고향과 민족, 훼파된 예루살렘을 생각합니다. ‘왜 우리 민족이 이런 고생을 하고 있나?’ 조상들이 범죄하고 우상을 섬기고 불의를 행하면서도 선지자들이 회개하고 돌아서라는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반항하다가 결국은 포로로 잡혀 온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 놓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조상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우리도 교회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에 우리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시되, 특별히 고생하는 북한 동포들을 위해 계속 기도하는 습관이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다니엘은 하루에 3번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씩 문을 열어 놓고 기도하니까 사람들이 그것을 다 알았습니다. “그 무리들이 모여서 다니엘이 자기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간구하는 것을 발견하고”(11절). 하루 세 번의 기도가 생활화되었습니다. 사사건건 기도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일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특별히 잘못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기도가 습관이 되고 생활화 되어서 악한 생각이나 마귀가 틈 탈 겨를이 없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드리고 다시 가정과 직장으로 돌아가는 순간, “하나님, 이번 한 주도 무엇을 하든지 악과 싸워서 이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악과 싸워서 이기는 습관이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제가 젊었을 때는 늘 패배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또 지면 어떻게 하나, 또 범죄하면 어떻게 하나, 또 실수하면 어떻게 하나.’ 쓸데없는 부정적인 걱정을 했습니다. 습관적 염려, 근심, 두려움, 나쁜 습관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나쁜 습관이구나. 이제부터는 긍정적인 생각, 신앙적인 생각과 습관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삶이 어둡고 불편해서 못 살겠습니다.” 다음부터는 그런 유혹이 오면 “또 한 번, 이길 기회가 왔도다!”하고 생각을 바꿔서 반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시간이 왔구나!”하고 외쳤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주시고 해결해주셨습니다. 한 번, 두 번, 승리의 경험을 하고 나니 믿음이 커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좋은 신앙의 습관을 계속 만들어 가기를 바랍니다.

넷째, 다니엘의 기도내용은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기도의 특징은 감사와 찬양입니다. 불평이 아니고 감사가 습관입니다. 오랜 동안 기도하는 인생을 사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많은 기도의 응답을 하셨습니다. 옛날에 기도한 것이 지금 응답되고, 두 달 전에 기도했던 것들도 오늘 응답되고, 하나님의 응답이 계속 나타나니까 다니엘에게 감사가 계속 있었습니다. 무조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습관을 따라 한 지속적 기도에 지속적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감사입니다. 여러분도 기도의 습관과 생활화를 통해 하나님의 응답을 많이 체험하며 감사가 습관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런 훌륭한 다니엘을 질투해 해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죄없는 다니엘과 같은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못이 없다고 모두가 우리를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 총리와 120명의 도지사들이 기도의 사람 다니엘을 모함하고 사자 굴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돌보시기 때문에 해칠 수가 없습니다. 왕은 다니엘이 죽은 줄 알고 새벽에 달려와서 “다니엘아, 다니엘아, 네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너를 돌봐 주셨냐?”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니엘은 기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사자의 입을 막고 다니엘을 구했습니다. 여러분도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적들은 반대입니다. 도와줄 하나님도 돕는 천사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자 굴에 떨어지자마자 모두 사자의 밥이 되었습니다. 기도도 안 하지요, 보호해줄 천사도 없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인 여러분과 저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의 기도가 있고 우리를 도와줄 천사들이 있습니다.

기도의 습관 때문에 다니엘의 인생은 형통했습니다.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28절). 매순간, 모든 일에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의 삶은 형통하고 번창하고 성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좋은 신앙의 습관들을 만들기 원합니다. 특별히 기도를 생활화하여 다니엘이 체험한 하나님의 보호, 다니엘이 응답받은 하나님의 손길, 다니엘이 경험한 번창하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라 (대상22:14-19)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의 인구조사를 명하고 시행하도록 재촉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크게 죄를 범하고는 하나님으로부터 뼈아픈 징벌을 받은 후 속죄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님께서는 그 제사를 받으시고 사흘 동안 이스라엘 땅에 칠만 명의 인명 희생자를 낸 전염병의 재앙을 거두셨습니다(대상21:1-14, 26-27). 다윗은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이스라엘과의 화해를 이루신 그 자리를 하나님의 성전이 건축되어야 할 자리로 정하고는(대상22:1) 건축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석수를 시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돌을 다듬게 하고(대상22:2) 각종 못을 만드는 데 쓸 철도 많이 준비하며 무게를 달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은 놋도 준비했습니다(대상22:3). 또 백향목을 무수히 준비했습니다(대상22:4). 다윗은 하나님을 위하여 건축할 성전은 극히 웅장하여 만국에 명성과 영광이 있게 하여야 할 것이라 하며 죽기 전까지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대상22:5). 오늘 본문은 그렇게 준비를 마친 다윗이 솔로몬과 이스라엘 모든 방백을 차례로 불러 성전건축을 시작할 때가 되었음을 알린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16절에서는 다윗이 솔로몬에게 말하기를 “금과 은과 놋과 철이 무수하니 너는 일어나 일하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실지로다” 했으며, 19절에서는 “일어나서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하나님 성전의 기물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에 들이게 하라” 한 것을 봅니다.

다윗은 성전건축을 위하여 참으로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본문 첫 절을 보면 다윗이 말하기를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금 십만 달란트와 은 백만 달란트와 놋과 철을 그 무게를 달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이 준비하였고 또 재목과 돌을 준비하였다”고 합니다. 그저 “금 십만 달란트와 은 백만 달란트”라 하면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2005년에 나온 한 고고학적 주석 성경에서 이 본문에 대한 각주를 보니까 한 달란트는 적어도 30킬로그램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10만 달란트는 적어도 300만 킬로그램 즉 3000톤입니다. 이것을 오늘의 시세로 환산을 해봤습니다. 물론 다윗 당시와 오늘의 금의 용도와 가치가 다를 것이기에 여기서의 수치는 절대적 의미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참고로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에서 한번 계산을 해봅니다. 어제 날짜로 금 한 돈에 156,800원이었습니다. 계산을 쉽게 하기 위해 우수리 떼고 15만원이라고 합시다. 한 돈은 3.75그램입니다. 한 달란트는 최소한 30킬로그램 즉 3만 그램이라 했으니 3만을 3.75로 나누면 딱 8000입니다. 한 달란트는 최소한 8000돈입니다. 한 돈을 15만원으로 치고 8000을 곱하면 12억 원입니다. 금 한 달란트가 12억 원이면 다윗이 준비했다는 금 10만 달란트는 120조 원이 됩니다. 거기에 은 백만 달란트와 그 무게를 달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이 준비했다는 놋과 철과 재목과 돌은 아직 계산에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새 성전 건축을 위해 헌금목표로 정한 500억 원은 그러니까 다윗이 준비한 금값의 2400분의 1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도 허락하지 않으신 성전 건축을 우리에게는 허락하셨다고 좋아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다윗이 가졌던 정성의 2400분의 1만큼의 정성이 우리에게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최소한 다윗이 가졌던 정성의 2400분의 1만큼의 정성을 드린다면 우리의 새 성전 건축은 무난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경제는 심한 불황기에 있으니 다윗 때와는 사정이 다르지 않느냐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첫 절에 보면 다윗이 뭐라 했습니까?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금 십만 달란트와 은 백만 달란트와 놋과 철을 그 무게를 달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이 준비하였고 또 재목과 돌을 준비하였다.” 했습니다. 여기서 “내가 환난 중에”라는 말이 눈길을 끕니다. 다윗이 “환난 중에” 그 엄청난 건축자금을 마련했다는 것입니다. 그 “환난 중에”라는 말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여러 주석과 번역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 거의 모든 영어 번역 성경들은 그 말을 “큰 고통을 겪으며” 또는 “열심히 노력해서”라고 옮겨놓고 있습니다. 다윗이 그저 편하고 쉽게 건축자금을 마련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무진 노력을 했고 엄청난 자기희생을 감수했다는 뜻입니다. 프랑스천주교의 수도사 학자들이 예루살렘에 세운 유명한 성경연구기관인 <예루살렘 성경학교>에서 번역해내서 유명해진 <예루살렘 성경>에서는 우리 성경에서 “내가 환난 중에”라고 번역한 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내가 가난해지기까지”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자기 자신은 가난해지기까지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위해 바쳤다는 것입니다. 프랑스가 내놓은 또 하나의 유명한 번역 성경인 <에큐메니칼 번역 성경>에서도 이 말을 “나의 가난에도 불구하고”라고 옮겨놓았습니다. 즉 다윗이 그렇게 모든 것을 오로지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서 바치고 모은다면 자기 자신은 가난해질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번역 성경은 각주에서 그 말을 “나의 겸손 가운데”라고 옮길 수도 있다고 밝혀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가장 중요하고 귀한 일로 여기고 그 일 앞에서는 자기 자신의 호의호식이나 안락함 같은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겸손함 속에서 가진 모든 것을 성전건축을 위해 다 바쳤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2000년에 유대교출판공회가 내놓은 권위 있는 히브리어-영어 대조 성경에서의 번역입니다. 거기서는 우리말로 “내가 환난 중에”라는 말을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의 언어였던 아람어로 구약성경을 번역한 탈굼(Targum)에서처럼 “나 자신을 부인함으로써”라고 옮겨놓은 것입니다. 그리고는 또는 “나의 가난 가운데”라 해도 좋다고 각주를 달아놓았습니다. 다윗이 말한 것은 “내가 가난하지만” 그렇게 많은 건축자금을 마련했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가난해지겠지만” 그래도 그 많은 건축자금을 마련했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후 이웃 모든 나라들과의 전쟁에서 전승하고 천하를 평정하여 모든 나라들로부터 예물과 조공을 받게 된 다윗이 가난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 그는 어마어마한 부를 창출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다 바침으로써 스스로 가난해진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는 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호사와 안락함을 먼저 생각하는 교만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부인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최우선의 아니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겸손함 가운데 모을 수 있었던 모든 재물을 모아 성전건축에 바친 것입니다.

솔로몬이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른 제오년에 이집트 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침공해왔습니다(왕상14:25). 그는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모두 빼앗고 또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를 다 빼앗아 갔습니다(왕상14:26). 그래서 르호보암은 금 대신 놋으로 방패를 만들어 왕궁 문을 지키는 시위대 대장의 손에 맡겨야 했습니다(왕상14:27). 그 시삭은 이집트의 제22대 왕조를 세운 세숑크 1세를 말합니다. 그는 솔로몬의 신하 가운데 느밧이라는 자의 아들 여로보암이 솔로몬에게 반기를 들고 대적하였다가(왕상11:26) 솔로몬이 죽이려 하자 애굽으로 도망했을 때 그를 받아주고 솔로몬이 죽기까지 이집트에 머물게 해준 바로입니다.(왕상11:40). 그런데 그 시삭이 예루살렘을 침공해 와서 약탈해간 것으로 이집트의 신들에게 바친 금이 이백 톤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일찍이 이집트의 바로들이 그들의 신전에 바친 헌물로 기록된 것 중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열다섯 배나 되는 금 삼천 톤을 하나님의 성전건축을 위해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그 어느 신전도 감히 비교될 수 없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지기를 원한 다윗의 정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많이 바쳐야겠다는 그의 헌신을 엿보게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아들 솔로몬을 불러 단지 성전건축만을 부탁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바로 앞의 11-12절을 읽어봅니다: “이제 내 아들아,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며 네가 형통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며 여호와께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사 네게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게 하시기를 더욱 원하노라.” 다윗은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기를 원한다고 하며 그러나 그가 더욱 원하는 것은 솔로몬이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기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다윗은 또한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든 규례와 법도를 삼가 행하면 형통하리라고 말하기를 잊지 않았습니다(대상22:13). 이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합니까? 성전건축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을 잘 지키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성전을 건축하면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바르게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성전을 건축한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실 줄로 알아서는 안 될 것이 무엇입니까? 건축을 핑계로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안 하는 것입니다. 심심치 않게 계속 들리는 말이 “건축도 해야 하는데 이것 하지 맙시다, 저것 없앱시다”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성전건축도 해야 하는데 <새문안 새 생명 운동> 같은 것은 또 왜 한다고 하느냐?” 하며 불평한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아무리 설명하고 이해시키려 해도 안 듣기로 작정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어찌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성경의 가르침은 알고 불평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모든 방백에게 성전 건축을 지시하면서 다윗이 그들에게 한 말이 무엇입니까? 본문 19절 말씀을 다시 봅니다: “이제 너희는 마음과 뜻을 바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라. 그리고 일어나서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하나님 성전의 기물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에 들이게 하라.” 다윗의 이 말을 우리는 귀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성전건축보다 우선하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라” 하기 전에 먼저 “마음과 뜻을 바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라” 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라 한 것입니다.

“마음과 뜻을 바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라”는 말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를 기쁘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우리와 함께하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 계신데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 줄도 모르며 성전만 건축해서 뭐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때만 성전은 우리에게 복된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그리고 항상 마음과 뜻을 바쳐서 하나님을 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일어나 성전을 건축할 수 있을 것이고 그 건축이 하나님의 은혜로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이며 완성된 건축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우리에게 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오랫동안 기다리며 기도로 준비해온 새 성전 건축을 위한 헌금작정의 날이 두 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두 주 동안 더욱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겸손하여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윗처럼 나 자신을 부인하는 결단이 있기를 빕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전건축을 하면서 더욱 더 믿음에 합당하고 교회 본연의 사명에 충실하게 살아가기로 다짐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일어나 성전을 건축합시다.

 

성전을 건축하며 함께 준비할 것 (역대상 23:27~3...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역대상 23장 바로 앞에 있는 22장에는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많이 준비했다는 사실(1-5절)과 그의 아들 솔로몬을 불러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부탁한 사실(6-16절)과 이스라엘 모든 방백에게 명령하여 그의 아들 솔로몬을 도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라 한 사실(17-19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22장의 내용은 28장과 29장에서 다시 보다 길고 상세하게 기술되고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22장과 28장 사이에 있는 23장부터 27장까지 다섯 장에 걸쳐서는 이스라엘의 지파들과 그 자손들의 족보와 명단과 인원수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역대기 기자가 이 지루한 족보와 명단과 인원수를 나열한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먼저 그 족보와 명단과 인원수의 대부분이 레위 지파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레위 지파는 성소에 관련된 모든 일을 전담하도록 구별된 지파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역대기의 기자는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와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우던 시대의 사람이었다는 사실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성전건물도 새로 지어야 했지만 성전에서의 예배와 이에 관련된 모든 기능을 온전히 회복시켜야 했던 시대의 필요성 또한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역대기 기자에게는 하나님의 성전이 건축되기를 열망하던 다윗이 성전건축에 필요한 물질적인 준비와 함께 진행시켰던 또 다른 준비 즉 제사와 예배를 비롯한 모든 성전기능이 바르고 원활하게 수행되도록 하기 위한 제반 조직과 정비는 지대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이 성전으로서 바르게 존재하기 위해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전사역의 모든 직무를 수행할 사람들을 확보하고 바르게 배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다윗이 레위 지파 사람들을 계수하고 각 직무를 따라 안배하며 능률적으로 조직한 사실과 그 내용을 사료로서 남긴 것이 바로 그 족보와 명단과 인원수를 나열한 역대기의 기록인 것입니다.

다윗은 왕으로서의 그의 생애의 뒷부분을 훗날 그의 아들 솔로몬이 건축할 하나님의 성전을 위한 준비에 다 바쳤습니다. 그는 성전의 외형적 건축을 위한 물질적 준비에만 골몰한 것이 아니라 그 성전에서 행해질 제사를 제도적으로 견고하게 정비한 것입니다. 그 정비의 핵심은 성전에서 봉사할 레위 지파 사람들의 책임을 체계적으로 분담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원래 레위 지파는 하나님의 율법을 맡은 자들로서 성막 봉사 등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출생을 전하는 출2:1-2에 보면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어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다”고 합니다. 즉 모세와 그의 형 아론은 레위 지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나온 후 하나님께서는 아론에게 명령하셔서 그와 그의 자손들이 성소의 직무와 제단의 직무를 담당하게 하셨습니다(민18:5). 하나님께서는 아론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와 네 아들들은 제단과 휘장 안의 모든 일에 대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지켜 섬기라. 내가 제사장의 직분을 너희에게 선물로 주었은즉 거기 가까이 하는 외인은 죽임을 당할지니라.”(민18:7) 하신 것입니다. 대상23:13에도 보면 “아론은 그 자손들과 함께 구별되어 몸을 성결하게 하여 영원토록 심히 거룩한 자가 되어 여호와 앞에 분향하고 섬기며 영원토록 그 이름으로 축복하게 되었느니라.” 합니다. 이렇게 아론의 자손들에게 제사장의 직분을 선물로 주시고 성소와 제단에서 독점적으로 섬기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같은 레위 지파 사람들로 하여금 그 외에 성막에서의 여러 가지 일들을 위해 제사장들을 돕게 하셨습니다. 민18:2-4를 봅니다: “너는 네 형제 레위 지파 곧 네 조상의 지파를 데려다가 너와 함께 있게 하여 너와 네 아들들이 증거의 장막 앞에 있을 때 그들이 너를 돕게 하라. 레위인은 네 직무와 장막의 모든 직무를 지키려니와 성소의 기구와 제단에는 가까이 하지 못하리니 두렵건대 그들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레위인은 너와 합동하여 장막의 모든 일과 회막의 직무를 다할 것이요 다른 사람은 너희에게 가까이 하지 못할 것이니라.” 다시 말하면 레위 지파 사람들만이 성소가 있는 장막과 회막에 나아갈 수 있고 그 중에서도 성소와 제단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만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엄한 명령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 사사시대 동안에는 레위 사람들의 역할과 활동이 극히 미미한 상태로 퇴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레위 사람들의 역할과 활동의 중요성이 다시 서서히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사무엘 시대였으며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내다본 다윗이 비로소 레위 지파 사람들의 본연의 사명을 재점검하고 체계화하며 전문화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다윗의 이런 조치는 성전업무를 능률화하고 효과적으로 인원을 관리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역대상 23장의 첫 몇 절은 다윗의 성전 업무 조직과 그 능률화 작업의 요점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먼저 1-5절을 봅니다: “다윗이 나이가 많아 늙으매 아들 솔로몬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고 이스라엘 모든 방백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모았더라. 레위 사람은 삼십 세 이상으로 계수하니 모든 남자의 수가 삼만 팔천 명인데 그 중의 이만 사천 명은 여호와의 성전의 일을 보살피는 자요 육천 명은 관원과 재판관이요 사천 명은 문지기요 사천 명은 그가 여호와께 찬송을 드리기 위하여 만든 악기로 찬송하는 자들이라.” 여기서 우선 우리는 다윗이 제사장들의 직무 외의 레위인들의 직무를 크게 네 종류로 나눴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전의 일을 보살피는 직무입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는 데 직접적으로 관련된 제반 일들을 돕는 직무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일들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8-32절을 다시 봅니다: “그 직분은 아론의 자손을 도와 여호와의 성전과 뜰과 골방에서 섬기고 또 모든 성물을 정결하게 하는 일 곧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는 일과 또 진설병과 고운 가루의 소제물 곧 무교전병이나 과자를 굽는 것이나 반죽하는 것이나 또 모든 저울과 자를 맡고 아침과 저녁마다 서서 여호와께 감사하고 찬송하며 또 안식일과 초하루와 절기에 모든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가 명령하신 규례의 정한 수효대로 항상 여호와 앞에 드리며 또 회막의 직무와 성소의 직무와 그들의 형제 아론 자손의 직무를 지켜 여호와의 성전에서 수종드는 것이더라.”

둘째는 예배 할 때 하나님을 찬송하는 데 사용할 목적으로 만든 각종 악기를 연주하거나 찬송을 부르는 찬양대원의 직무입니다.

셋째는 문지기의 직무입니다. “문지기”라는 것은 단순히 문에 서서 파수 보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자들이 함부로 성전에 들어가 성전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문을 지키는 일만 아니라 성전의 보안과 유지와 개보수 업무, 성전의 모든 설비와 사무용품 등의 관리 및 공급 업무, 성전의 재정관리 등 예배와 제사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업무 외의 성전에 관계된 일체의 업무를 관장하는 직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넷째는 관원과 재판관으로서의 직무입니다. 이것은 레위인의 직무가 제사장과 그를 돕는 이, 찬양대원, 성전문지기로서의 직무에만 국한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다윗 시대에 들어와 레위인의 지위는 급격히 격상되어 국가통치조직의 행정요원으로서 각 지방에 흩어져 행정과 종교의 제반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그들의 역할은 종교적 업무뿐 아니라 국민생활의 전반에로 확장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서는 신앙의 문제가 일상생활의 문제가 깊숙이 개입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재판하는 일에도 레위인들의 참여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백성을 재판하는 일에 레위인들을 지원했던 것이라 봅니다. 사실 지파의 방백들보다는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레위인들이 사법상의 업무수행에 더 적절하였을 것입니다. 다윗은 또 국고에 충당될 세금과 하나님께 드릴 십일조 등의 수금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관원의 직무에도 레위인들로 하여금 주도적 역할을 하게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절에 보면 “레위 사람이 다시는 성막과 그 가운데에서 쓰는 모든 기구를 멜 필요가 없다 한지라.”(대상23:26)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는 성소가 장막으로 되어 있었고 종종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그때마다 언약궤가 놓여있는 지성소와 성소에 있는 각종 기물들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규례를 따라 거두고 옮기고 다시 진열하기 위해 많은 일손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고정된 성전이 완성되면 더 이상 언약궤를 비롯하여 성소를 옮기는 일과 관련된 업무들은 필요 없게 될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큰 성전이 완성되고 예배처소가 한 곳으로 고정되며 집중되게 되면 성전 안에 새로운 직무들이 생겨날 것이고 일 자체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질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각 지방에서 한 곳으로 제사 드리려고 몰려올 사람들이 가지고 오는 제물들을 수납하고 저장하고 뒤처리 하는 일만 해도 어마어마한 일이 될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첫 절에 보면 “다윗의 유언대로 레위 자손이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되었다”고 합니다. 대상23:3에서는 레위 사람은 “삼십 세 이상으로” 계수한 결과 남자의 수가 삼만 팔천 명이었다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했다는 것은 그만큼 성전직무에 따른 수요가 급증할 것을 예상한 조치였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성전의 모든 직무는 일사불란하게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이 많고 사람도 많다 보면 직무수행을 두고 갈등도 일어날 수 있고 직무수행에 공백이 생길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다윗은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에 대비한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대상23:6에 보면 다윗이 레위의 아들들을 “각 반으로 나누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다윗은 레위인들을 24개 반으로 조직하고 그 직무를 순번제로 질서정연하게 수행하게 했습니다. 제사장 직무뿐 아니라 찬양대 직무와 문지기 직무도 24개 반이 순차적으로 수행하게 했습니다. 이 24순차제도를 통해 대부분의 레위 사람들은 일 년에 두 주씩 성전봉사를 하게 되었으며 남는 기간에는 율법연구와 기타 업무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대상 24:5에 보면 “이에 제비 뽑아 피차에 차등이 없이 나누었으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또 대상 25:1에 보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로 일하는 자의 수효는 이러하니라.” 하며 그 8절에서 “이 무리의 큰 자나 작은 자나 스승이나 제자를 막론하고 다같이 제비 뽑아 직임을 얻었으니” 한 것을 봅니다. 대상 26:12-13에서도 “이상은 다 문지기의 반장으로서 그 형제처럼 직임을 얻어 여호와의 성전에서 섬기는 자들이라. 각 문을 지키기 위하여 그의 조상의 가문을 따라 대소를 막론하고 다 제비 뽑혔으니” 하는데 이것은 레위인들의 모든 직무가 공평하고 질서 있게 이루어졌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함으로써 성전에서의 모든 사역이 빈틈없이 수행되게 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역대상의 마지막 여덟 장에만 있는 성전건축을 위한 다윗의 준비에 관한 기록은 새 성전을 건축하기를 원하며 이를 위해 헌금 작정을 시작한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성전건물뿐 아니라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것은 새로 세워질 성전에서 예배를 비롯한 교육, 전도, 봉사, 성도의 교제 등 모든 교회의 사명과 역할이 바르게 수행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명과 역할을 수행할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바른 신앙의 자세를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부탁하며 한 말을 기억하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대상22:11-13입니다: “이제 내 아들아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며 네가 형통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며 여호와께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사 네게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게 하시기를 더욱 원하노라. 그 때에 네가 만일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든 규례와 법도를 삼가 행하면 형통하리니 강하고 담대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지어다.” 또 다윗과 온 백성이 다 성전건축을 위하여 자원하여 성심으로 즐거이 드린 후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드린 감사의 기도 속에서 한 말도 다시 들어봅니다. 대상29:19입니다: “또 내 아들 솔로몬에게 정성된 마음을 주사 주의 계명과 권면과 율례를 지켜 이 모든 일을 행하게 하시고 내가 위하여 준비한 것으로 성전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이제 새문안교회의 새 성전 건축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새 성전에서 교회의 사명과 역할이 새롭고 더욱 바르게 수행되게 하기 위한 눈에 보이지 않는 준비도 계속해서 진행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 일의 하나가 [새문안 새 생명 운동]입니다. 현재로서 우리의 바람은 적어도 2500명이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본당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본당의 2.5배 되는 본당을 가득 채울 성도를 또한 열심히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큰 예배당을 주실 하나님께 빈자리로 응답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새문안 새 생명 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빕니다. 새 성전으로, 그리고 거기 가득 찬 성도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새문안의 새 생명, 새 성전], 이것이 우리의 향후 수년간의 목표요 구호가 되어야 할 줄 압니다.

Things We Should Prepare for Building the Temple

(1 Chronicles 23:27~32)

Chapter 22 of First Chronicles, which comes immediately before the passage we read in Chapter 23 records how David prepared many things for the construction of the Lord\\\"s Temple (verse 1~5); how he called his son, Solomon, and charged him with the responsibility of building the temple (verse 6~16); and how he brought the participation of the entire people of Israel in building the Temple of the Lord alongside Solomon (verse 17~19). Additionally, the contents of Chapter 22 are repeated in greater detail in Chapters 28 and 29. An interesting insert between Chapter 22 and 28, which contain essentially the same narratives, is the list of tribes and families of the household of Israel, and their numbers found in Chapters 23 through 27. Why would the writer of the Chronicles insert this long and monotonous list of names and numbers?

One thing we should remember is that this list of names and numbers is that of the tribe of Levi. Also, when we think of the Levites we must remember that they were the single tribe of Israel that had been set apart to serve the work of the Tabernacle of the Lord. Additionally, we need to bear in mind that the writer of the Book of Chronicles was a person who was part of the exiles that had returned to Babylon and would probably have been involved in the rebuilding of the temple. We need to take into consideration the fact that the people of Israel were not only concerned with rebuilding the temple but with restoring the entire liturgy of worship associated with the House of the Lord. In this respect the efforts that David put into ensuring that the function of worship and sacrifice would be performed in a perfect manner in the soon to be built Temple of the Lord was just as important as the narrative describing how David prepared the necessary gold and other precious metals and materials for the actual construction of the temple. In order to ensure that the various religious functions of the temple were properly conducted it was important to ensure that the appropriate people were allocated to each task. Therefore, the reason why the list of names and numbers was inserted into the text was to show how David counted the number of Levites and allocated the appropriate numbers of people to each responsibility was important in showing how the temple should function as the House of God.

David dedicated the latter part of his life to preparing everything that would be needed for his son, Solomon, to build the temple of the Lord. Not only did he faithfully work to prepare the necessary material for the building he also sought to strengthen the structures for ensuring the worship of the temple was adequately prepared. Part of this preparation was systematically dividing roles and responsibilities among the Levites who were to serve the temple. This is because the Levites were those who had been set apart to serve the Tabernacle of the Lord and to play a central role in the communal life of the people of Israel.

When we look at the Biblical account of Moses\" birth we read, \"Now a man of the house of Levi married a Levite woman, and she became pregnant and gave birth to a son. When she saw that he was a fine child, she hid him for three months.\" (Exodus 2:1~2) Moses and his brother, Aaron, were from the tribe of Levi. After they had led the people of Israel out of Egypt God told Aaron that he and his sons were to be responsible for the task of looking after the Tabernacle and the duties of the altar (Deuteronomy 18:5) God said to Aaron \\\"may minister in the name of the LORD his God like all his fellow Levites who serve there in the presence of the LORD.\\\" (Deuteronomy 18:7) In 1 Chronicles 23:13 also we see, \\\"Aaron was set apart, he and his descendants forever, to consecrate the most holy things, to offer sacrifices before the LORD, to minister before him and to pronounce blessings in his name forever.\\\" Not only did God set Aaron and his sons apart to serve the work of the Tabernacle he also gave the same duties to the other people of the tribe of Levi so that they could assist in the work of organizing the offerings and worship. If we look at Deuteronomy 18:2~4 again we see, \"They shall have no inheritance among their brothers; the LORD is their inheritance, as he promised them. This is the share due the priests from the people who sacrifice a bull or a sheep: the shoulder, the jowls and the inner parts. You are to give them the firstfruits of your grain, new wine and oil, and the first wool from the shearing of your sheep,\" Although the Levites could approach the tent of holies only Aaron and his sons were allowed to approach the altar. However, when the people of Israel arrived in Caanan the role of the Levites had become considerably weak. It was during the time that Samuel was the prophet that their role and import!ance increased and it was David who revived the original role of the Levites and systemized their function. This made a great contribution to effectively managing the work and function of the temple.

The first few verses of 1 Chronicles Chapter 23 provide a good summary of what David did to make the work of the Levites in the temple effective. Let\"s look first at verses 1 through 5: \"When David was old and full of years, he made his son Solomon king over Israel. He also gathered together all the leaders of Israel, as well as the priests and Levites. The Levites thirty years old or more were counted, and the total number of men was thirty-eight thousand. David said, \"Of these, twenty-four thousand are to supervise the work of the temple of the LORD and six thousand are to be officials and judges. Four thousand are to be gatekeepers and four thousand are to praise the LORD with the musical instruments I have provided for that purpose.\\\" In this passage we can see that David divided the role of the Levites into four categories.

The first is supervising the work of the temple. This was assisting the work of the priests while they were performing their duties for the offerings. Today\\\" s reading shows us what these duties entailed. Let us look at verses 28 through 32: \"The duty of the Levites was to help Aaron\"s descendants in the service of the temple of the LORD : to be in charge of the courtyards, the side rooms, the purification of all sacred things and the performance of other duties at the house of God. They were in charge of the bread set out on the table, the flour for the grain offerings, the unleavened wafers, the baking and the mixing, and all measurements of quantity and size. They were also to stand every morning to thank and praise the LORD. They were to do the same in the evening and whenever burnt offerings were presented to the LORD on Sabbaths and at New Moon festivals and at appointed feasts. They were to serve before the LORD regularly in the proper number and in the way prescribed for them. And so the Levites carried out their responsibilities for the Tent of Meeting, for the Holy Place and, under their brothers the descendants of Aaron, for the service of the temple of the LORD.

The second category was playing instruments and singing praises to the LORD as a choir.

The third role was that of gatekeeper. The term \\\"gatekeeper\\\" her is not simply one who stand guard at the entrance. It included the responsibility of preventing those who should not be there from entering the temple and ensuring the security of the temple as well as managing it and supervising the repairs as they were necessary so that all of the instruments and tools and other items that were used in the temple, and also the finances of the temple.

The fourth category is that of official and judge. This shows that the role of the priests was not simply limited to that of choir, assistant to the priest or gatekeeper of the temple. During David\"s reign the status of the Levites was significantly raised to that of administrative officials of the kingdom who were responsible for administrative and religious affairs throughout the kingdom. Their role was not simply limited to the religious sphere but the daily lives of the people. This was because for the people of God daily activities were deeply religious and it was necessary for the Levites to be involved in the judicial process. This was why David assigned the Levites as judges. As those who studied the Laws of Moses the Levites were better equipped to be judges than the leaders of the tribes. David also charged the Levites with the role of officers because they were responsible for the collection of taxes that would be used for the kingdom and also the tithes of the people.

The verse just before our reading today states, \\\"the Levites no longer need to carry the tabernacle or any of the articles used in its service.\\\"(1 Chronicles 23:26) Before the temple in Jerusalem was built the Tabernacle was a tent and was occasionally moved from one place to another. Whenever the tabernacle was moved all of the articles used in the Tabernacle had to be moved according to the regulations set forth by God, and this required a lot of manpower, time and energy. However, when the temple, a permanent structure, was completed it would not be necessary for them to move the Tabernacle. However, because the size of the temple was larger than the Tabernacle there would be different roles and responsibilities that would need to be fulfilled. For example, people and space for collecting and preserving all of the offering material from those who came from the regional districts to offer their sacrifices was a big task on its own. The first verse of today\"s Scripture reading says, \"According to the last instructions of David, the Levites were counted from those twenty years old or more.\\\" Verse 3 of chapter 23 said that the total of people counted were more than thirty years old and they amounted to 38,000 persons. However, the fact that the Levites over the age of twenty were counted means that there was a great increase in the duties of caring for the work in the temple.

The work of overseeing the duties in the temple needed to be performed flawlessly. However, with many people given responsibilities there was the possibility that conficts of interests would arise or that there would be certain areas of work that were overlooked. David planned for all of theses contingencies. 1 Chronicles chapter 23 verse 6 states, \\\"David divided the Levites into groups.\\\" David actually divided the Levites into 24 groups and drew lots to assign them their duties. Not only the priests but also those in the choir and the gatekeepers were divided into 24 groups and ordered to work in turns. Through the division of work into 24 groups most Levites were required to work in the temple for two weeks out of the year and spent the remaining time in studying the Laws of Moses and other activities.

1 Chronicles chapter 24 and verse 5 says, \"They divided them impartially by drawing lots.\" Also, 1 Chronicles chapter 25 verse 1 says, \\\"David, together with the commanders of the army, set apart some of the sons of Asaph, Heman and Jeduthun for the ministry of prophesying, accompanied by harps, lyres and cymbals. Here is the list of the men who performed this service\\\" and in verse 8 says, \\\"Young and old alike, teacher as well as student, cast lots for their duties.\\\" In 1 Chronicles chapter 26 and verses 12 to 13 we also read, \\\"These divisions of the gatekeepers, through their chief men, had duties for ministering in the temple of the Lord, just as their relatives had. Lots were cast for each gate, according to their families, young and old alike.\\\" This shows that the work was divided between the Levites without interests. In this way David sought to organize the work of the temple so that everything could be performed flawlessly.

The final eight chapters of First Chronicles that contain the narratives of how David prepared for the construction of the temple contain important lessons for us as we begin to offer our monetary pledges for the building of our new church facilities. It is the import!ance of the work for worship, education, evangelism, service and felloship of believers that will be an integral part of the new building. It is also of the import!ance of the saints who are to worship God. It is worthwhile for us to look once again at the words David spoke to Solomon in preparation for the building of the temple found in 1 Chronicles chapter 22 and verses 11 through 13: \\\"Now, my son, the Lord be with you, and may you have success and build the house of the Lord your God, as he said you would. May the Lord give you discretion and understanding when he puts you in command over Israel, so that you may keep the law of the Lord your God. Then you will have success if you are careful to observe the decrees and laws that the Lord gave Moses for Israel. Be strong and courageous. Do not be afraid or discouraged.\\\" Also, we can turn to the prayer of thanksgiving that David gave after the people of Israel gave joufylly for the building of the temple found in 1 Chronicles chapter 29 and verse 19: \\\"And give my son Solomon the wholehearted devotion to keep your commands, requirements and decrees and to do everything to build the palatial structure for which I have provided.\"

The work of constructing a new building for Saemoonan Church has begun. We must now begin to prepare the things that are neede for the church to be the Church, much more than simply money. One of these things that we must do in preparation is the Saemoonan New Life Movement. We are planning to enlarge the place of worship, the Sanctuary so that it can seat 2,500 people at one time. This means that we need to do our very best to prepare the saints so that they will come and fill the place of worship. We cannot simply come in small numbers before God who has granted us a large place of worship. Therefore, I hope that we will renew our energies in ensuring that the Saemoonan New Life Movement is as fruitful as we can make it. May we glorify God with a new building, but more than anything else with new souls won in his name. A New Building and New Life for Saemoonan sould be constantly in our minds as we work together.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므로 (역대상 29:1~9)

오늘 본문은 부분적으로 지난주의 설교에서 이미 인용된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다 하고 자기 자신이 먼저 개인 재산 전부를 성전건축에 다 바친 후 온 백성을 모아 말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내 아들 솔로몬이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택하신 바 되었으나 아직 어리고 미숙하며 이 공사는 크도다. 이 성전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여기서 우리는 먼저 “이 성전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한 말에 주목합니다. 우리가 새 성전을 건축하는 목적이 그저 우리 자신의 편의와 즐거움과 자랑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새 성전 건축이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위한 일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다고 해서 사치와 낭비가 허용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사치와 낭비를 삼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성을 기울여 건축해야 한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이시니까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 안에 계시지도 않을 것인데 아무렇게나 지은들 어떻겠느냐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눈에 보이도록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성전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하고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는 수단이고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다윗이 자기 혼자 성전건축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온 백성으로 하여금 힘껏 참여하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다윗이 왕권으로 비축한 나라의 재원만으로도 성전건축은 충분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려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자기 자신을 비롯해 온 백성이 개인적으로 성전건축에 헌신하게 했습니다. 그는 먼저 자기 자신이 백성 앞에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의 말을 다시 들어봅니다. 본문 2-3절입니다: “내가 이미 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준비하였나니 곧 기구를 만들 금과 은과 놋과 철과 나무와 또 마노와 가공할 검은 보석과 채석과 다른 모든 보석과 옥돌이 매우 많으며 성전을 위하여 준비한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마음이 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므로 내가 사유한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렸노니” 했습니다. 다윗은 성전건축에 필요하고 도움이 될 만한 나라의 재물은 다 동원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에 자기의 “사유한” 금은보화를 또한 다 바쳤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유재물은 순수한 개인 소유의 재산만이 아니라 옛 근동의 군주들이 정치적 곤경에 처할 때나 재난을 당할 때 등 비상시 자신의 안전을 위해 비축해 놓는 준비금까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윗은 순수한 개인재산보다 훨씬 더 컸을 그 비자금까지 다 성전건축에 바쳤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 앞에서 자기 자신의 안위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길 수 있었던 그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믿음으로 새 성전 건축에 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 4-5절에 보면 다윗은 개인적으로 “오빌의 금 삼천 달란트와 순은 칠천 달란트”를 바쳐서 “모든 성전 벽에 입히며 금, 은 그릇을 만들며 장인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쓰게” 하였다고 밝혔습니다. 그가 바친 것 중에 금 삼천 달란트의 가치가 얼마나 나가는 것인지만 알아보겠습니다. 지난주 설교 때 한 대로 다시 한 번 계산해 봅니다. 1달란트는 적어도 30킬로그램 즉 3만 그램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3.75그램이 한 돈이니까 3만을 3.75로 나누면 8000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 달란트는 8000돈입니다. 요즘 시세로 금 한 돈에 우수리 떼고 적게 잡아서 15만원 치면 금 한 달란트가 12억 원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3천 달란트는 얼마가 되겠습니까? 12억 곱하기 3000 하면 3조6천억입니다. 다윗이 개인적으로 바친 금값은 오늘날의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최소한 3조6천억 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성전건축에 개인적으로 바친 재물의 총액을 밝힌 다윗은 이어서 온 백성에게 호소했습니다: “오늘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본문 5절 하반절) 그 경과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6-9절을 또 봅니다: “이에 모든 가문의 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지도자들과 천부장과 백부장과 왕의 사무관이 다 즐거이 드리되 하나님의 성전 공사를 위하여 금 오천 달란트와 금 만 다릭 은 만 달란트와 놋 만 팔천 달란트와 철 십만 달란트를 드리고 보석을 가진 모든 사람은 게르손 사람 여히엘의 손에 맡겨 여호와의 성전 곳간에 드렸더라. 백성들은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기뻐하였으니 곧 그들이 성심으로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다윗 왕도 심히 기뻐하니라.” 온 백성이 자원하여 성심으로 드리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새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도 이처럼 표출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새 성전 건축을 위한 헌금을 작정하려고 하는데 지난 주일부터 많은 교우들이 침통해하거나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침통함과 고민은 이미 끝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헌금 작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적지만 있는 힘껏 내는지 또 누가 많은 것 같지만 인색하게 내는 것인지를 하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같이 불쌍한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한 말을 귀담아 들읍시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6-8)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능히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넘치게 하시며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게 해주실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고 행하는 이에게 하나님께서는 상상도 못할 놀라운 은혜를 베푸심을 확신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빕니다.

집안이야기 한 번 더 하는 것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큰 딸네가 작년에 미국으로 갔습니다. 사위가 공부하러 갔기 때문입니다. 여러 학교의 문을 두드려보았지만 장학금을 충분히 주겠다는 데가 없어서 원래 계획보다 일 년 늦어졌습니다. 부모 된 심정에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여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재원은 제가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직을 떠난 후부터 다달이 받는 연금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첫 달 연금부터 전액을 만 8년간 독일에 유학 간 제자 목사 한 사람을 돕는 데 다 보내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제자가 작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올 것이 확실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후부터는 사위를 도울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딸네도 일단 그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사위지만 정말 신앙 좋고 반듯하며 성실하기 이를 데 없는 청년이기에 당당하게 장학금으로 줄 만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작년 봄 새 성전 건축에 집을 바치기로 우리 부부가 작정을 하자 이래저래 다 없어진 전세금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세금 갚을 길은 연금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연금으로 사위 유학을 돕겠다는 계획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애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우리 도움 받아서 유학 갈 생각을 버리라고 포기시켰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대단히 마음이 아팠지만 성전 건축이 우선이었습니다. 사위는 그래서 당분간 공부하기를 포기하고 국제기관에 취직할 생각을 했습니다. 마침 유엔에서 직원을 뽑는 일이 있어서 사위는 거기 응모를 했습니다. 1차 합격이 되었습니다. 2차 시험을 기다리는 한 편 그래도 장학금 받으며 공부할 수 있을 학교가 어디 없을까 하며 계속해서 입학청원서류를 보내고 있었는데 한 군데서 답이 왔습니다. 교수가 직접 두 차례나 국제전화를 걸어 면접을 하더니 연락이 왔는데 등록금 전액 면제해주고 연 이만오천 달러의 장학금을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연 이만오천 달러를 우리 돈으로 환산해보니 딱 우리가 다달이 보내줄 수 있는 연금 액수였습니다. 등록금 전액 면제라는 더 큰 혜택은 빼고 그렇습니다. 게다가 그 학교는 미국의 동부 명문대학의 하나인 브라운대학입니다. 애들 말로는 유엔기구의 직원채용에 일차 합격한 사실이 그 대학에서 입학허가결정을 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으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하시는 일이 이렇게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를 여러분도 다 같이 누리실 수 있기를 빕니다. 믿고 행하는 이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놀라운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 교우 모두가 이런 감격을 맛보며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새 성전을 건축할 수 있기 바랍니다. 저희는 그래서 미쁘신 우리 하나님께 다시 한 번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며 즐거운 마음으로 작년 제자 유학 돕기를 끝낸 다음 달부터 다달이 나오는 연금으로 <전세금 갚기>작전 적금을 신나게 붓기 시작한 것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만일 우리가 새 성전 건축헌금 내는 것보다 애들 유학 돕기를 우선시하기로 하고 애들도 그것 믿고 유학 갔더라면 작년말부터 불어닥친 환율급상승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 달러환율이 아무리 올라도 미국에서 받는 그 나라 돈으로 받는 장학금이니 염려할 것이 전혀 없이 한 해를 지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은 가난하여지기까지 자기의 모든 사유재산을 성전건축에 바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가난해지기까지 다 바치겠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가난해지게 내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역대상의 끝부분에 뭐라고 기록되었는지를 봅니다. 대상29:28입니다: “그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를 누리다가 죽으매 그의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다윗처럼 이번 새 성전 건축을 위해 힘껏 바치고 하나님의 은혜로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를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레데에 남겨두신 이유 (디도서 1:4-5)

1. 들어가는 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국의 제 35대 대통령 케네디가 저격당하기 전날 밤에 만찬회에서 행한 인상 깊은 연설이 있습니다. 케네디는 그 연설에서 우리 모두가 개척자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역사의 법정 앞에 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 자리에서 네 가지의 질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첫째, 당신은 참으로 용감한 사람이었습니까?

둘째, 당신은 현명한 판단을 했습니까?

셋째, 당신은 당신의 맡은 일에 성실을 다했습니까?

넷째, 당신은 하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을 하였습니까?”

그는 이 연설에서 사람들에게 참으로 용기 있게 살았는지, 아니면 타협하면서 비겁하게 살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현명하지 못한 판단으로 인하여 후회스러운 일은 없었는지, 내가 맡은 일에 성실을 다했는지, 그리고 그 일에 전적인 희생과 헌신을 했는지를 물어보라고 요청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이 연설에서 우리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이끌어 가는 사명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가 처한 상황에서 용기있게, 지혜롭게, 성실하게,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헌신을 하며 섬기는 사명자들을 사용해서 역사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 힘들고 어렵다 하여 불평하고, 피하거나, 때로는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쓰임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2. 믿음의 아들 디도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는 너무나도 척박한 환경에 홀로 남겨진 채로 사명을 부여받는 한 믿음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디도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읽은 디도서는 바울이 그의 믿음의 아들 디도에서 보낸 편지입니다. 디도는 유대인이 아닌 헬라인이었지만,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 듣고, 또한 바울의 믿음 안에서의 양육을 통해 바울이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를 향해 오늘 본문 4절에서 “나의 참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디도는 바울이 힘들고 어려운 선교 여행을 하는 동안 줄곧 따라 다니며 바울의 사역을 도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종종 그에게 매우 중요한 임무를 맡기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보면 바울이 특별히 어려울 때에 늘 그와 함께 동행 한 사람이 바로 디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을 형제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순간에도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이었던 디도를 데리고 그 회의에 참석을 하였고(행전 15장),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꾸짖는 편지를 보낼 때에도 디도를 통해서 그 중요한 편지를 보냈습니다(고후 2:4). 그리고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을 때 이방지역에 있던 교회들의 구제헌금을 모아 어머니 교회(mother church)인 예루살렘 교회를 돕게 하는 일도 역시 디도에게 맡겼습니다(고후 8:16-17).

따라서 이런 여러 가지 성경의 기록들을 보면 디도는 분명히 바울이 가장 신뢰하고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 8:23에서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디도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디도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디도는 바울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3. 그레데에 남겨두신 이유

그런데 이토록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디도를 그레데 섬에 보내면서 바울은 그 보낸 이유를 오늘 본문(딛 1:5)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남은 일을 정리하기 위함(부족한 일을 바로 잡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1) 그레데란 어떤 곳인가?

부족한 일을 바로잡다니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바울의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그레데라는 곳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타나 있는 그레데라고 하는 곳은 어떤 곳입니까? 오늘 디도서 1장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먼저 그레데는 복종치 않는 자들이 많은 곳이라 했습니다(10절). 헛된 말을 하는 자가 많은 곳이라 했습니다(10절). 속이는 자가 많은 곳이라고 했습니다(10절). 특히 할례당이 교회를 어지럽히는 곳이었습니다. 더러운 이익을 구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11절). 뿐만 아니라 가정을 무너뜨리는 자들이 많은 곳이었습니다(11절). 한마디로 그레데는 악명 높은 곳이요, 참으로 골치 아픈 곳이요, 문제가 가득찬 곳이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술꾼들이요, 무례하고 거만하고 믿을 수 없는 자들이고, 거짓말을 잘하는 자들이고, 탐욕스런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어에 “크레티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거짓말하다” “속인다”는 뜻인데, 그레데가 바로 이 “크레티조”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즉 그레데라는 호칭 자체에 “속이는 자”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이름만 보아도 그레데라고 하는 곳이 얼마나 험악한 곳이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딛 1장 12절에서 말하기를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이 증언이 참 되도다”라고 했습니다.

고대의 저술가인 폴리비우스(Polybius)는 “탐욕과 허세가 그레데 토양에 본래부터 뿌리 내리고 있으므로 그들은 어떤 식으로 수입을 얻든 상관하지 않는 유일한 백성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유일한 백성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그레데의 현실을 볼 때 바울이 디도에게 말하기를 이렇게 말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디도야, 내가 너를 그 문제 많은 곳에서 데리고 나온데는 이유가 있다” 그래야 맞을 것 같습니다. “디도야, 내가 너를 그 악한 곳에서, 그 골치 아픈 곳에서 데리고 나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은데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정 반대로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럽고, 문제 많은 그곳에 너를 남겨 둔 이유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도도 이것에 대해서 불순종하거나 거역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왜 이런 곳에 둡니까? 좀 좋은데 두지” “왜 나를 이렇게 골치 아픈 곳에 두십니까? 왜 나를 이렇게 문제 많고 힘든 곳에 두십니까?” 라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새문안교회 성도 여러분, 바로 여기에 오늘 아침 우리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믿음의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오늘 칭찬과 긍정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세상의 악한 것들, 더러운 것들만 가득한 곳에, 아들처럼 사랑하는 디도를 그곳에 남겨둔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 바울의 음성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도 문제 많은 곳에(그레데에) 남겨두신 데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2) 그레데에 남겨두신 이유

남은 일을 정리하기 위함(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디도는 문제 많은 그레데 섬에 홀로 남겨져 있을 때 바울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내가 너를 문제 많은 그곳에 남겨둔 데는 이유가 있는 데, 그것은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함이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언젠가 그레데 섬을 방문하여 그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 때문에 그는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레데에 있는 교회는 여러 가지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았고, 미완성된 많은 과제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남은 일이 있다” “부족한 것이 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레데에는 어떤 문제들이 있었을까요?

예를 들어 9-10절에서 볼 수 있는 대로, 그레데에는 우선 처리해야 할 거짓 교사들과 할례당의 잘못된 가르침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즉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는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14절)를 전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14절에서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배반하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또 그레데 교회는 교회를 계속해서 든든히 세워 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기둥 같은 존재들인 장로들, 즉 교회의 지도자(leadership)들을 세우는 일도 남아 있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개척하고 곧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을 아직 세우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곳에서 장로들은 어떤 사람들이어야 한다(6절). 혹은 감독(오늘의 목사)은 어떤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7-9절)는 것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본문 16절에서 볼 수 있는 대로, 그레데 교인들 가운데는 믿음의 실천을 가르쳐야 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계속해서 지적하는 바대로 그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들,” “복종치 아니하는 자들”(16)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들”(16)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디도는 바로 이런 부족한 모습들, 남겨진 문제들을 바로 잡기 위하여 문제 많은 그곳에 남겨진 것입니다.

3) 우리의 그레데: 조국, 한국교회 그리고 우리 가정과 일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해볼까요? 생각해 보면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한국사회도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지금 넘어야 할 산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는 요즈음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 조국 한반도가 바로 그레데와 같은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면에서 지금 우리 사회는 그 무게중심을 잃어버린 체 흔들리고 있습니다. 특별히 정치와 사상 면에서 온 나라가 좌우로 양분되어 6.25 때보다 더 심한 분열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저 이북에서는 세계현대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3세대 부자세습을 위하여 계속해서 장거리 미사일과 핵으로 한반도와 동북아의 위기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20대 태반이 백수(이태백)로 지내고 있는 청년실업문제를 비롯하여, 계속되는 경제 불안으로 인하여 우리는 지금 모두 다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살기가 너무 힘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지금도 매일같이 35명이 자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문제 많은 한반도에 살아가면서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직접 간접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가 바로 그레데가 아닌가요?

그런가 하면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있는 한국교회에서도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교회만은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교회까지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실망을 하여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개독교”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큰 교회들은 담임목사직을 자식에게 세습을 하면서 교회를 마치 목사 개신의 사유재산인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큰 교회들이 리더십의 바톤 터치를 하는 과정에서 서로 power 게임을 하다가 분란이 생겨 교회가 나누어지고, 나누어지다 못해 교인들끼리 서로 폭력을 가하는 모습이 TV 등의 언론매체에 여과 없이 그대로 보도가 되어 교회가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와 민족이 심각한 어려움에 빠져있는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눈물로 중보기도를 해도 부족할 판에, 교회는 오히려 자기모순과 자기만족에 빠져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마도 우리들 가운데는 가정과 일터에 어려운 문제들이 있는 분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사업의 문제로 인하여 고통 받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가장의 실직으로 인하여 온 가족이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자녀의 문제들로 인하여 한숨짓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우리 젊은이들은 진로문제로, 직장문제로, 직장에서는 인간관계로 인하여 고민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또 우리 가운데는 가족 간의 불화로, 가족 가운데 사랑하는 이가 병들어 누워 고통을 받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왜 이렇게, 우리 집에는 왜 이렇게 문제가 많은가 탄식하며 한숨짓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이미 잠시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오늘 문제 많은 가정에, 일터에, 한국교회에, 그리고 이 나라와 민족에 하나님께서 나를 남겨두신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우리는 세상의 악한 것들, 그리고 어려운 문제들로 가득한 곳에, 아들처럼 사랑하는 디도를 남겨둔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 바울의 음성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로 저와 여러분을 통해 문제 많은 곳에, 그 문제를 회복하게 하기 위하여,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하여,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하여 우리를 그곳에 두셨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가정의 아픔과 일터의 문제와 한국교회의 문제와 이 나라와 민족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을 바로 이곳에 부르시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그레데의 현실에서, 즉 한반도의 현실에서,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우리 가정의 어려운 상황에서, 나의 문제 많은 일터에서, 그리고 내가 처한 문제 가운데서 도피하려고 하지 말고, “왜 나에게만 이런 어려움이 계속되는가?”라고 원망도 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 문제 많은 곳에 나를 남겨두신 이유가 있다”는 사명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발견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문제 가운데 있을 때, 문제를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들의 존재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문제가 있으면 회피하려고 합니다. 무엇인가 부담이 되면 먼저 도망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오히려 문제 가운데서 나의 존재의 가치를 역설적으로 발견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우연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필연, 아니 하나님의 섭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에 의해서 움직여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사상을 철저히 믿고 고백하는 청교도들의 후예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우연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일들 속에서, 그 일이 어렵고 힘든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이 내게는 너무나 괴로운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곳에 두셨는지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런 어려운 상황에 두셨는지를 오히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나의 사명을 발견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지금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간에, 문제 많은 그곳에서 그 문제를 회복하게 하기 위하여,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하여, 그 상처들을 치유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그곳에 두셨음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성도들이 가져야 할 바른 신앙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명의식이 있는 자를 우리 가운데서 부르고 계십니다.

4. 주기철 목사님의 예

하나님께서 나를 고통스러운 곳에, 문제 많은 곳에 두신 이유가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온갖 종류의 고난과 시련을 견디고 승리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반대하시다가 고문 끝에 순교하신 순교자 주기철 목사닙입니다. 저는 저의 할아버님을 생각할 때마다 그는 실로 문제 많은 그레데에 남겨진 디도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분은 일제의 강점 아래서 7년간 5차레 감옥에 드나들면서 온갖 종류의 고문을 당하다가 결국 순교하셨습니다.

일제의 형사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목사님에게 매질을 하였고, 매질이 지루해지면, 가로지른 각목에다 발목을 묶어 매달아 놓고 가죽 채찍을 휘둘러 때리면서 “비행기 타는 맛이 어떤가?”(비행기 타기) 물으며 비웃었습니다. 그리고 일제는 전기 고문에 고축가루 주전자를 강제로 들이 붓기, 손톱 발톱을 대나무 바늘로 후벼 파기 등의 온갖 종류의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언젠가 저의 선친께서는 할아버님께서 할머니에게 하소연 하듯이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다고 제게 말씀해 주셨는데, 할아버님께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문이 두 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잠을 안 재우며 괴롭히는 고문이요(정신이 몽롱해져서 신사 앞에 절을 하겠더라는 것), 또 하나는 사람을 널빤지 위에 눕혀 놓고, 사지를 묶고, 아랫도리를 벗긴 다음 알코올에 적신 탈지면을 심지로 감은 꼬챙이를 요도에 쑤셔 넣는 고문이었다고 합니다. 주 목사님은 그런 고문을 당하실 때에는 살이 찢겨서 피가 흐르고, 면도날로 아랫도리를 저며 내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와서 기절을 하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목사님께서는 “주님, 차라리 제 생명을 빨리 거두어 달라”고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고문을 당하고 나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그 통증에 소변을 잘 볼 수가 없어서 감옥 안에서 변기를 붙잡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고문은 계절도 없이 7년간 계속되었는데, 특히 겨울에는 견디기 힘든 혹독한 세월이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할머님이 면회를 가셨는데, 솜을 두둑히 넣은 저고리와 바지를 받으시다가 목사님이 낯을 찡그리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발 옷 속에 솜을 넣지 마시오”

“그러면 이 추위에 솜 두지 않은 옷으로 어떻게 견디시려고 하십니까?”(할머니)

“내가 일일이 설명을 해야만 알겠소? 입을 열면 엄살이 될 것 같아서 말하기 싫었소. 고문이 끝난 뒤에 돌아올 무렵이면 내 옷은 피에 흠뻑 젖는 게요. 그 피가 두툼한 솜에 스며들어 마르지를 않소. 피에 젖어 축축한 옷 밑에서 터진 살이 자꾸 곪으면 고름이 흐르고, 피와 고름이 섞여 얼어붙으면 그것이 칼처럼 다시 살을 찢어서 그래요. 고문 끝에 기절하면 일제가 양동이로 찬물을 끼얹는데, 그 찬물이 옷에 배어서 피와 고름이 함께 얼어붙으니 나는 옷 얼음판 위에서 떨게 되는 거요, 그러니 제발 솜을 넣지 마시오.

내 한 마디 더하리이까? 고문 끝에 감방으로 돌아가면 간수가 하루 두끼 밥을 넣어 줍니다. 손바닥 만한 식구통에다 밥을 끼어 주면 그것을 내려다가 먹어야 해요, 때때로 단식을 해서 목숨을 단축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것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기에 그럴 수도 없었소. 그러나 그 밥을 먹으려면 뭉그러진 내 육체를 바로 세울 수가 없어서 언제나 기어서 다가가야 하오. 그럴 때마다 시멘트 바닥에 쓸리는, 피가 엉긴 체 얼어서 뻣뻣한 옷이 내 상처를 다시 쑤셔 놓아 그것이 터지고, 피고름이 흘러서 밥을 먹는 고통이 또 하나의 고문이 되고 마는 거요.

그러니 제발 솜을 넣지 말라는 것이오. 솜을 넣지 않으면 피가 흘러도 시멘트 바닥으로 다 흘러 버릴 것이고, 그들이 물을 끼얹어도 나중에 쉽게 마를 테니, 차라리 추위를 견디는 것이 나을 것이오. 미안하오, 이런 말을 하지 않으려 했건만 당신이 여기 형편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부득불 설명을 했소”

목사님은 평소에 감옥에 있을 때에도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수갑이 채워지고, 그 수갑에다가 쇳덩어리를 달아 맨 쇠사슬이 매어있었습니다. 그는 감방에서도 쇠사슬에 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쇳덩어리가 매어 달린 쇠사슬은 천근 무게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번 움직이려면 뼈만 남은 어깨가 으스러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식사 시간이 되어 식구통에 끼워 주는 밥 덩어리를 먹으려면, 그 무거운 쇳덩어리와 쇠사슬로 묶인 몸을 이끌고 문이 있는 자리까지 기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배고픔과 그 고통 중에 어느 것을 견딜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차라리 배고픔을 견디는 편이 나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분은 굶는 편을 택하려고 했던 자신의 생각을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아직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다. 이 쇳덩어리의 무게가 주님께서 십자가에 메어 달려 겪으신 고통의 무게에 비하랴?”

그래서 그는 한 뼘 또 한 뼘 그렇게 콩밥을 향하여 앞으로 갔습니다.

“고난과 고통의 시간을 단축하려는 내 의자가 있었다면 그것도 주님 앞에는 말할 수 없는 죄악이다. 이 밥은 일본이 주는 밥이 아니라, 주께서 내게 주시는 밥이다. 이 밥을 먹는 것이 성찬이다. 이 시간은 일본이 내게 주는 고난의 시간이 아니라.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시간이다. 이 밥을 먹고서야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다. ‘나는 기념하라’하시며,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신 주님의 뜻은 주님께서 겪으신 모든 것을 잊지 말고 간직하라는 뜻이다. 예수님, 그분이 겪으신 수치를 기억하기 위하여 나는 이 밥을 먹는다. 예수 그 분의 참혹한 처형과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내 영혼과 내 몸에 새겨 넣기 위하여 나는 이 쇠사슬을 이끌고 밥을 향하여 나아가며, 개처럼 혹은 다른 더 천한 짐승처럼 이 밥을 먹어야 한다.

오, 주님, 나 같은 것에게 이러한 일을 허락하시다니...나 같은 것이 주님의 그 치욕에 감히 참여하게 하시다니”

이렇게 고백하며, 그 분은 쇠사슬과 쇳덩어리에 짓눌려 뼈를 으스러뜨려 가면서 밥 덩어리를 입으로 물어다가, 한입 한 입 베어 물어 눈물과 함께 그것을 씹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의 생애를 더듬어 자신에게도 이 길을 갈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그분의 사랑에 감격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고문을 당하다가 한번은 일제가 회유작전으로 3일간 가석방을 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할머님께서 목사님에게 하신 첫 마디는 이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승리하셨겠지요?” “사흘 말미 뿐이오”

“그러시면 다시 그곳으로 가셔야 합니다. 어머님, 아이들 걱정은 마시고 다시 가셔서 신앙을 지키시고 순교하십시오. 목사님은 조선 교회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목사님이 맡으신 일은 그 뿐입니다. 조선교회가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실 의무를 주님께서 목사님에게 주신 것을 잊지 마십시오. 목사님이 순교하셔야 조선교회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목사님이 순교하셔야 조선교회가 꿋꿋하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목사님은 결코 살아서 이 붉은 벽돌을 나오시면 안 됩니다”

언젠가 할머님께서 그 때를 회상하시면서 저희 선친께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아들아, 그것은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분명 내가 말하고 있었으나 내 귀에 들리는 것은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준비된 말도 아니었다. 마치 누가 시켜서, 써 준 문장을 읽듯이 술술 흘러나오던 그 말은 내 의사요, 내 뜻이 아니었다”

성령님께서 그 순간 할머니를 통해서 목사님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었지요. 그리고 그 때 할머니께서는 울면서 목사님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목사님, 용서하세요. 용서하세요. 다만 몇 일이라도 제가 대신 할 수만 있다면, 이 곤욕을 대신 치르고 싶어요, 목사님, 그러나 어찌하겠습니까? 내일 모레 다시 들어가셔야 한다면 다시 가셔야지요. 목사님이 일본 앞에 두 손을 드시는 것은 산정현 교회의 패배요, 조선교회의 항복입니다. 아니지요. 조선 그리스도인 전부의 항복입니다. 이제는 누가 무어라 하여도 목사님은 일본 천황과 영적 전투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사탄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당당하게 나아 싸우십시오”

그리고 목사님도 염려하지 말라고, 주님의 십자가가 자신을 이끌어가고 있으니,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고백하시고, “내 결코 살아서 이 빨간 벽돌을 나가지 않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시며 다시 감옥으로 들어가셨고, 마침내 그는 7년 동안의 모든 고문과 고난을 견디고 순교하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그 분의 시신을 모시고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울고 있었는데, 그 때 저의 할머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울 때가 아닙니다. 이제부터 기도해야만 하는 때가 온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나약하고 힘이 모자라서, 그리고 무식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당연하게 말해야 할 때 벙어리가 될 수 없어서.

당연히 가야만 할 길을 도망치거나 피해 가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당연히 죽어야만 할 시간에 살아남아 있을 수가 없어서 죽음을 택한 것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목사님의 승리를 우리가 당당히 누리려면 이제부터 정작 기도해야 합니다.

조선교회의 앞날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일만 남았습니다.

소리내어 울지 마십시오. 지금은 울 때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기철 목사님과 오정모 사모님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현장에 있었으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그곳에 남겨두신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너져가는 조선교회를 끝까지 떠받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곳에서 힘들다고, 무섭다고, 괴롭다고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나를, 우리를 여기에 두신 이유가 있다고 고백하고, 그 길을 따라 감으로 승리하였습니다. 나를 여기에 남겨두신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새문안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문제 많은 곳에서 도피하는 자들이 되지 말고, 디도처럼, 그리고 우리 신앙의 선배이신 주기철 목사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부족함을 채우는 자들이 됩시다.

5. 나가는 말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도 문제 많은 우리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우리 조국 한반도에 살면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과 은혜들을 바르게 간직하고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고,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에 두신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나를 통해서 부족함을 채우시기 위함이다”라는 사명의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사명자의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 사명자가 되어 부족함을 채우는 자들이 됩시다. 그 결과 모두가 다 힘들다고 아우성치고 있는 이 때에 우리 새문안교회 성도들이 가는 곳마다 부족함이 채워지고, 남은 일이 정리되고,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되는 역사가 있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들로 말미암아 할일 많고 문제 많은 우리 조국과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고, 다시 회복되어지는 역사가 있어 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사명자의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 너희는 나의 동료요, 나의 동역자요, 교회의 사자요, 나(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고후 8:23)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