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산 소망의 원천(벧전1:1-12)
베드로는 우리가 알다시피 벳세다출신(요1:44)으로 이름이 시몬이였는데 예수님을 만나서 올바른 신앙을 고백하므로 ‘베드로’란 이름을 얻었다.
그의 부친은 요나(마16:17)또는 요한(1\\요1:42)으로 불리었으며 동생은 안드레였는데 후일 그들 형제는 예수님을 만났고(요1:40-42)
주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의 졔자가 되었다
12사도에 뽑히게 되었고 (마10:2)
예수님의 총애를 받는 세명의 제자중 하나였다.
예수님께 올바른 신앙을 고백하여 칭찬을 받기도 했던 그는 예수님을 세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사람으로서 강하면서도 매우 연약한 면이 있었던 제자였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강림이후 성령의 세례와 충만을 받아 예루살렘 교회를 대부흥 시킨 위대한 사도 였다.
사마리아 욥바,가이사랴 안디옥을 순행하며 복음을 전파했으며 바울이 복음전파의 일선에 나서면서부터 자취를 감추었다가
네로의 대 박해때 (AD54-68)순교했다고 전해지니다.
본서신은 환란중에 있는 신자들이 곧 다가올 박해를 극복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온갖 어려움을 겪을 신자들을 위로 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이 서신을 통해 베드로는 환란중에 있는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오는 산소망을 제시해줌으로써 고난과 시험에 약해 지지 않고 담대히 대처 할 수 있는 믿음과 소망을 촉구하였습니다.
본 서신은 기독교의 교리가 많이 나오는 편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3절에서 12절 까지의 말씀을 갖고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3절에 보면 베드로는 “찬송하리로다” 하고 있습니다.
수신자에 대한 인사의 말에 이어서 베드로는 하나님께 찬미를 하라고 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산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산 소망이 있게 되었고 왜 찬송을 해야만 합니까?
3절 - 찬송하리로다 무엇을 찬송하라는 말인가?
그것은
① 우리 主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그리스도의 죽은 자 다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본문 1장24절에 보십시오,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의 삶은 24절의 고백과 같을 것입니다.
(벧전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 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마르는 풀처럼, 시들어지는 꽃처럼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의 전부였을 것입니다.
‘마르는 풀, 시드는 꽃과 같은 운명을 지향하고 있는 삶,예수 없는 삶이 바로 그러합니다.
그런데 언제 우리가 소망을 갖기 시작했습니까?
거듭나는 순간입니다.
무엇으로 거듭났습니까?(벧전1:23)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우리는 말씀으로 거듭났습니다.
어느날 ,하나님의 거룩하신 구원의 말씀을 접촉하기 시작했을 때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알았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나는 예수 없이 영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 있었던 내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 순간 나는 하나님의 무한한 생명에 연결되었고,하나님 안에 있는 그 영원한 생명을 내 것으로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거듭났습니다. 그 순간부터 내 속에는 산 소망이 임했습니다.
이 사건이 여러분에게 있었습니까?
참으로 거듭나서 이 산 소망이 여러분의 것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에드워드 모트라는 37세 된 목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목수라기보다는 캐비넷 제조공입니다.
이 사람은 젊은 시절, 공장에서 일하면서 열등의식과,반항심,원망 등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겨우 이런 공장에서 망치나 두둘기며 일하다니,,,,우리 부모는 왜 나에게 이런 삶밖에 주지 못하는 걸까?”
이 열등의식,반항,원망,,,,삶은 그에게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고,
그에게 소망이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그가 런던의 거리를 배회하다가 길가에 있던 자그마한 교회에 들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 들어갔습니다.
그 교회 강대상에서 존 하이야트 목사님이 요한복음 3장을 가지고 “거듭나는 도리”에 관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에드워드가 그 말씀을 들었을 때“그렇다,나는 거듭나야 한다”라는 강렬한 소원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 문을 열어 주셔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거듭났습니다.
이렇게 거듭난 에드워드 모트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망치는 이제 노래하기 시작했다. 내 망치는 이제 춤을 춘다.
그리고 내 눈동자는 생기가 돌고 내 마음 속에는 생수가 솟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오셨기 때문이다. 나는 거듭났다!“
이제 그는 행복한 목공이었습니다.
그의 생은 점점 풍요로워졌습니다. 자기가 고용되어 일하던 목공소가 자기의 소유가 되었으며 그 목공소는 점차 확장되었습니다.
곧,그는 성공적인 사업가가 된 것입니다.
그가 55세 되던 해, 자기를 거듭나게 하신 주님의 은헤가 너무나 놀라워서 그 주님께 자신의 전 재산을 바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 주님이 축복하셔서 번창케 하신 목공소입니다.이것을 다 주님 앞에 드리겠습니다. “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목공소를 팔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판 돈으로 런던의 언덕위에 침례교회 하나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목회 공부를 하여 목사 안수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의 전 재산을 드려서 교회를 짓고 자기를 구원하시고 거듭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한 그 첫날,
그는 오래전 자기 나이 37세였을 때 자기를 거듭나게 하셨던 주님의 첫 사람을 기억하면서 그 소망을 주신 주님의 은혜가 감격스러웠던지 주님을 향한 감사의 시를 지었습니다.
그 시는 찬송가(539장)로 널리 불리워지게 되었습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주 예수 뿐일세
우리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국건한 반석 되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묻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희망이 있습니까?
산 소망이 여러분안에 정말 있는지요?아니면 에드워드 모트가 그러했듯이 희망 없이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매주일 어김없이 교회에 출석하지만 아직도 거듭나지 못한 것은 아닌지요?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신뢰함으로 거듭나는 삶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②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심
-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한 것(4절)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즉 산 소망은 미래의 기업을 보증합니다.
그 기업은 어떤 기업입니까?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간직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기업이 있는데 그 기업은 첫째,썩지 아니하는 기업
둘째,더럽히지 않는 기업
세째,쇠하지 않는 기업
이처럼 주님께 우리를 위해서 하늘나라에 간직해 놓으신,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그 영광스러운 기업은 불후의 기업이며,
불변의 기업이며 또한 불멸의 기업입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에 우리를 위해서 간직되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살아 있는 산 소망은 이 기업으로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예비해 놓으신 영광스러운 기업으로 연결됩니다.
이것이 산 소망의 능력이며 혹은 산 소망의 결과입니다.
③ 5절-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미래의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의 조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능력으로 보호하시는 하나님
㉧ 거듭난자 산소망을 가진다가 받는 것은 바로 썩지 않고 더럽지 않 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받는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받았으나 우리들은 영원한 하늘나라를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여러가지 시험은 있을 수 있으나 기뻐하도다라고 말합니다.
6절 -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 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절 -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 귀를 얻게 하려함이라
다이빙
믿음의 시련은 없어질 금보다 귀하다./
영원하신 예수님의 칭찬,영광,존귀를 얻음
시련이라는 말은 당시 두 가지 용도로 쓰여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로,순금과 가짜 금을 구별 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시련이란 당시 순금과 가짜 금을 강정할 때 쓰던 단어입니다.
시련이 왜 옵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시련이 왜 올까요?진짜 성도와 가짜를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시련이 올 때,고난이 찾아올때,고난이 찾아 올 때,우리는 우리가 참 신앙을 가진 사람인지 아닌지를 스스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시련이 올 때 가짜 그리스도인들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도망갑니다.주님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자처합니다.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처음부터 불신앙인이었습니다.
저는 “믿다가 타락했다”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타락하는 원인을 찾아보면 대부분 처음부터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결코 주님 앞에서 완전히 후퇴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잠시의 방황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에는 주님안에서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하게 될 것입니다.
시련이라는 말은 순금과 가짜를 구별할 때 사용되었듯이
시련은 우리의 신앙의 지위를 드러냅니다.
둘째,의사고시를 일컬을 때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의대생이 치르는 시험을 “시련”이라고 했습니다.
6절에 보면“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문자 그대로 시험은 여러 가지입니다.
“여러가지라는 말”은 원래 =“여러가지 색깔의”라는 뜻입니다.
형형색색의 시험이 인생을 살면서 우리에게 부듳쳐 옵니다.
얼마나 많은 시험들이 있습니까?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시험은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도 근심합니다.
“나는 근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오리혀 비정상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근심합니다. .
그 사실을 성경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벧전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그리스도인들도 근심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근심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연약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련은 잠깐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 가지 비밀을 아셔야 합니다. .
이 시련은 결국 나를 유익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벧전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
--------------------------------------------------------
나방이 되어 나오는 과정(예화)
찰스코우만 여사는 곤충을 연구하는 사람이다.
그는 1년 동안 번데기에서 나방이 나오는 그 과정을 관찰했다.
번데기에서 나방이 나오는 그 구멍이 너무 작아서,
나오기가 매우 어려워, 나방은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보고 있자니까 너무 괴로워서, 가위를 가지고 좀 잘라 주었다. 그랬더니 그만 쉽게 쑥 나왔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나오기는 했어도 나방은 방구석에서 뒹굴면서 날지를 못하였다.
여러분 외 나방이 왜 나르지 못했을까요?
이 나방은 이 작은 구멍으로 나오는 고통과 고난의 시간을 통해서 건전한 나비가 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을, 그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쉽게 나와 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나방이 되지못하였던 것입니다.
어러분에게 여러가지 시험이 찾아옵니까?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 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 (벧전1:7)
결론
우리가 시련이 올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1)찬송해야 합니다.
1장3절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찬송해야 합니다. 시련이 올 때 찬송해야 합니다.
(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찬양해야 마땅합니다.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이 산 소망 때문에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시련 속에서도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찬양 대상은 산 소망을 갖게 해 주신 그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2)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벧전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그 예수를 사랑하십시오, 그 예수를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그 예수님을 기뻐하시기 바랍니.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우리는 우리를 구속하시고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와 허물로 죽었던 나를 우리를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영원토록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썩지 않을 영원한 하늘의 것을 우리를 위해 주시며 우리의 기업이 되게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어야 겠습니다.
2.부르심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
( 베드로전서 1장 13 - 25 절 )
베드로는 문안 인사와 찬송의 이유를 설명한뒤 이제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드립니다.
현재의 구원을 인해서 장래의 예언으로 인하여 찬송하라고 하였고 이제는 개인적 생활을 위한 권면을 하는데 1:13-2:10절 까지 입니다.
베드로는 세가지의 권면을 하고 있는데
A.거룩한 생활을 힘쓸것 ( 1:13-21)
B.형제 사랑을 힘쓸것 (1:22-25)
C.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장할 것 (2:1-10) 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첫번째 거룩한 생활을 힘쓸 것을 권면하는 것에 대해서 상고 해보겠습니다.
Ⅰ.서 론 -
우리가 부르심에 합당한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받을 그 은혜를 끝까지 기다리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녀가 되어야 한다(13)
벧전1: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속에 늘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1.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바란다면
(1)그 은혜를 기다리는 자세가 바로 서 있어야만 한다.
그 자세는 두가지입니다.
①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②근신하라라는 말입니다.
●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
여기서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함은 ==
아래로 늘어뜨려진 옷끝단을 허리춤에 끌어올려매고 신속하고 자유롭게 행동할 준비를 갖추듯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는 뜻입니다. (옛날 바지 저고리)
그리고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는 말은 마음을 잘 다스리고 단속하라는 말입니다.
성도의 마음을 단속하지 않으면 속에 있는 부패성이 거침없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부부싸움,혈기,달콤한 음란의 유혹,미움의 감정,비관자살등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한데서 나오는 불행이다. ,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잠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너희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
우리의 삶의 태도가 우리 행동 양식을 결정합니다.
“어떤 태도를 갖고 사느냐“는 것은 그 태도에 따라서 삶의 모습이 상당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컨데 아브라함과 롯의 삶의 태도를 비교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11장에서 아브라함의 소망이 하늘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히11: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그는 하늘에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이 땅의 것을 별로 연연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땅을 택해야 했을 때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창13:9) 녜 앞예 온 당이 잇찌 아니하냐 나를 더나라 녜까 쫘하면 나는 우하꼬 녜까 우하면 나는 쫘하리라
그에게는 이 세상에 대한 욕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소망이 하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의 삶의 태도가 아브라함의 삶의 양식을 얼마나 분명하게 결정했습니까?
반면에 조카 롯은 그의 소망을 하늘이 아니라 이 땅에 두었습니다.
그에게는 이 땅이 전부였습니다. 이 땅의 삶이 전부였습니다.
그리하여 눈에 보기에 좋은 푸르고 물이 많고 숲이 우거진 소돔 땅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다가 무서운 유황불의 심판 앞에 직면한 장면을 우리는 성경에서 봅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삶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의 가치관의 삶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양식이 얼마나 달라집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삶의 태도를 가다듬읍시다.
●.근신하라
이 말은 “술취하지 말라”라는 뜻입니다.
술에 취하면 떠들썩합니다. 술에 취하면 자제력을 잃어버립니다.
술에 취하면 절제력을 잃어버립니다. 술에 취하면 균형을 잃습니다.
그러므로 근신하라는 말을 세가지로 다시 번역하면
조용하라,,절제하라,,균형을 맞추라
사실상 베드로는 그 누구보다도 이 말에 자신이 없었던 자였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시어 당신의 사랑을 재차 확인시켜 주시기 전까지 베드로는 매사에 쉽게 흥분할만큼 격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조용하지 못했습니다,절제하지 목했습니다. 규형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이 너무도 무능하고 죄많은 인생임을 철저히 깨닫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새롭게 하시는 은총을 경험한 이후 자신뿐 아니라 주위의 형제들을 향하여 근신하고 정신을 차리라, 자제하고 분수껏 행동하라고 감히 당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어떠한 영적인 위기의 상황에서도 흥분하거나 흔들리지 말고 굳센 믿음으로써 주님께서 허락하신 삶의 자리를 지켜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부르심에 합당한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2.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녀가 되자!
우리가 순종해야 할 두가지가 있습니다. (14절)
①우리가 과거에 쫓던 사욕을 본삼지 말고(14절)
②거룩한 하나님을 바라보고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 하라(15절)
벧전1: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벧전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전에 알지 못해서 가졌던 그 욕망을 따라서 살지 말아야 한다(14)
(2)우리를 불러주신 그 거룩한 분을 따라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15)
☞왜냐하면? :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하였기
때문이다(16)
- 우리에게 거룩하게 살라 하신 하나님은,
왜 거룩하게 살라고 하십니까?
1.우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17)
본문 17절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결코 불공평하게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시다(17)
(2)우리가 행한 모든 일을 정의와 공평으로 심판하신다(17)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진지해야 합니다.
거룩한 삶에 대하여서도 진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거룩하십니다.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의로우신 어버지입니다.
그분은 죄와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분은 또한 당신의 자녀들이 죄를 즐기도록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엄격하신 성품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에 달리게 한 것은 죄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그분의 성품을 반영해야만 합니다.
베드로가 쓴 심판은 무엇에 대한 심판입니까?
성도들의 행위에 대한 심판입니다.
본문은 우리의 인생을 나그네와 같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이 땅에 사는 세상을 나그네와 같은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잠시 들렸다가는 나그네 같은 짧은 시간의 공간을 방탕하고 죄짖는데 허비하지 말고 때를 분별하여 거룩한 행실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다시 오실 것이고 다시 오신 주님은 행위대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한자는 죽음의 심판을 , 믿는 자는 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 원자탄 히로시마에(예화) 경고,
제 2차 세계 대전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불길 속에 싸여 있을 때,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 난데없이 재빠른 비행기 편대가 나타났습니다.
잠시후 시가 상공을 두어 번 선회하던 비행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하얀 삐라를 하늘에 날리고 수평선 넘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온 시민은 갑자기 뿌려진 한 조각의 종이 쪽지를 들고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실인즉, 조그마한 종이 쪽지는 미국 공군에 의한 것이었으며, 다음과 같은 경고의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히로시마에게 경고한다! 모든 시민은 8월 6일 아침 8시까지 50리 밖으로 대피하라! 투하되는 폭탄은 신형 원자폭탄이다!\"
수십만의 시민들은 이 영문모를 경고장에 대하여 각기 나름대로 가슴을 조여가며 수군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은 공갈이다.\"
\"설마 무슨 일이 있을려고, 우리가 이기고 있는데 .\"
\"그 때, 가봐야 알지.\"
그러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서운 경고를 받고도 꼼짝달싹하지도 않았습니다.
▶ 1945년 8월 6일 아침 8시 15분 1329기 폭격기가 히로시마 상공에 나타나 상공을 두어 번 선회하더니 낙하산에 매달린 시커먼 물체 하나를 떨어뜨리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 수십 만 시민들은 죽음 몇 초 직전의 숨막히는 상황인데도 그 공포 를 거의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구경꾼처럼,
\"낙하산이 내려온다\"하며, 반공호 속에서 근심어린 눈으로 처다 보 았습니다.
▶천천히 내려오던 시커먼 물체가 지상 600미터 지점에 이르렀을 때 섬광과 함께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순간 햇빛보다 수천 배나 밝은 강한 빛이 온 시가지를 휘감았고,
상상도 못할 대 폭음이 지축을 뒤흔들며, 거대한 불기둥과 버섯 구 름이 하늘 높이 치솟았습니다.
▶폭풍과 파편들이 전 시가지로 대포알처럼 날면서 주택, 빌딩은 물론 나무 전신주 등 닥치는 대로 파괴해 버렸습니다.
▶하늘은 암흑으로 뒤덮이고 곳곳에 무서운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온몸을 피로 목욕한 듯 처참한 화상을 입고 곳곳의 건물 밑에 깔려 비명과 신음으로 구원을 요청하는 사람들의 소리!
엄마를 찾아 울부 짖는 아이들의 소리!!,
자녀를 부르는 소리!!,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찾아 제각기 목이 터져라 부르는 그 소리들 .!!
▶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체들과 너무나 갑작스런 큰 충격에 정신 을 잃고 그냥 거리를 뛰는 사람,
냇물로 뛰어들어 머리를 쳐 박는 사람,
물 속에서 다시 뛰쳐나오는 사람,
남자도 여자도 수치를 잊고 벗은 몸으로 몸부림치는 사람들,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모습들!!!
,
◉히로시마 인들은 3일간의 기회와 대피하여 생명을 구하라는 경고를 왜 외면하고 명분도 보람도 없이 감당치 못할 이 끔찍한 죽음을 당 해야만 했는가?
마지막 시간까지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불신의 댓가였습니다.
순식간에 히로시마 시민 30여만 명의 생명과 재산이 잿더미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그중에 원자탄의 위력을 잘 알지 못했으나 한 조각의 종이 쪽지의 경고를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인 소수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사건의 증인으로 살아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습니까?
노아 홍수 시대, 소돔과 고모라 때를 연상케 하는 사건이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경고합니다.
(벧후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계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계16:15)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그분은 오늘 오실지 모릅니다.
만약 그분이 오늘 오신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습니까?
책망이 두려워 담요를 뒤집어 쓰겠습니까?아니면
기쁘고 반갑게 주님을 맞이하시겠습니까?
그분이 오늘 오실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근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4:16-17)
가을의 계절입니다.
농부들은 풍성한 열매를!!!
각 사업장의 업체들은 제품들이 풍성한 생산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가을이 왔다는 것은 겨울이 곧 다가온다는 신호등이기도 합니다.
겨울은 결산의 계절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오셔서 우리의 신앙을 결산을 하게 된다면!!!!!
사람은 -인생, 0인생, +인생이 있습니다.
우리모두 중간결산을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래가지고 어떻게 주님을 맞이할 수 있을까?
인생의 겨울이 오기전에
Ⅲ.결론
1.우리는 새 생명을 갖고 있다(23)
①이 생명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니다(23)
②이 생명은 영원히 썩지 않고 계속된다(23) - 왜냐하면,영원히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것이 기 때문이다(23)
2.모든 인간은 풀포기처럼 허무하고 그 영화와 권세는 들에 핀 꽃 들과 다를 것이 없다(24)
①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②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있다(25)
☞그런고로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함으로 새 생 명의 새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거룩한 삶을 살 수가 있고, 거 룩한 삶을 살아야 참된 구원을 이룰 수가 있다.
3.제목:형제를 사랑하라
본문:벧전 1:22-25
1: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 랑하라
사도 베드로는 22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개인적 생활에 있어서의 두번째 권면을 시작합니다.
내용은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22절에 있는 말씀을 살펴보면,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는 말씀을 통해 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는가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까?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셨을까?
또 하나님이 우리를 왜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셨을까? 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됩니다.
또 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생활 할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왜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영혼을 깨끗하게 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게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 3장에 보면
딤후 3: 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3: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 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3: 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3: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 서 네가 돌아서라
사람들의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타인을 사랑치 않고
자기 자신과 돈만을 사랑하는 이기주의에 빠지게 되어 강도 만난 사람을 돌봐 주지 않고
그냥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줄어들고 있는 현실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깨끗한 성도의 삶을 통해 바로 진리를 순종함으로 영혼이 성결한 성도의 사랑의 실천을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게 됩니다.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케 됩니다.
세상의 사랑은 가식의 사랑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은 너무나 값지고 귀한 것이기 때문에 비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값진 사랑을 받은 성도의 삶이야 말로 이제는 형제를 피차 거짓이 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피차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도와 성도끼리 아내와 남편이 부모와 자식간에 서로 사랑이 없이 산다면 무미 건조하고 삶의 기쁨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는 사랑의 성도가 되어야 겠습니다.
사랑도 일방적 사랑은 짝사랑에 불과 합니다.
피차 사랑해야 합니다. 당신은 내게 사랑만 주시요 나는 받기만 하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피차 뜨거운 사랑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1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100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하였을때 다시 감옥에 들어가는 모습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 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였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조차 없었던 사람들 아니었죠 그런데 아직 우리가 죄인 되었을때에 하나님이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기 까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1: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
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3절은 특별히 우리가 무엇으로 거듭난지를 알려 줍니다.
우리가 거듭날 이유와 거듭날 수 있는 비결에 대하여 알려 줍니다.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셧습니다.
우리의 거듭남은 썩어질 씨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죄인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야할 존재임을 알게 하시고 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거듭날 수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낄러 쪼개지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있음을 우리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또,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것으로 교훈과 바르게 함과 책망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더욱더 사랑하고 마음에 새기게 되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임을 확신하고 흔들리지 않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힘이나 공로로 구원을 얻었다고 한다면 자랑을 하고 교만에 빠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또 은혜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1: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 르고 꽃은떨어지되
< 모든 육체의 연약함과 말씀의 영원함이 비교되고 있다.>
1: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 니라
가을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계절의 엄격함을 실감하는 계절이 왔습니다.
푸른 색깔을 자랑하는 나뭇잎들이 하나둘 떨어지게 됩니다
풀도 풀의 꽃은 언젠가는 그 아름다움을 잃게 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화려함을 자랑하다가도 바람이 불고 온도가 내려가면 그만 시들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육체도 건강함을 자랑하다가도 하루 아침에 쓰러지게 되기도 하고 병원에 입원을 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풀과 같이 연약한 육체를 자랑하는 인간의 영광도 다 시들게 되지만
우리를 구속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십니다. 변치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이 율법의 일점 일획도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유약함과 말씀의 영원함 사이에는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성도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난 것이었다면,
이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형제 사랑의 우애를 행하도록 권명하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에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진 자를 사하여 준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가 있지요
하나님은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형제를 용서하라,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을 들었거니와 나는 너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
요일4:20 “보이는 형제를 사랑치 못하면서 어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리요 이는 거짓말 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깨끗이 되었다면 서로 사랑하는데 뜨거운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구역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서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영원하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원받은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4.제목: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장할 것
본문:벧전 2:1-10
베드로의 첫째 권면(개인적인 생활에 관하여)의 결론적 부분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거기에서 머물지 말고 더욱더 성장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먼저 1절과 2절에서 우리는 “버리라”는 것과 “사모하라”는 것에 촛점을 마추게 됩니다.
베드로는 1:22-25절에서 거듭난 것이 하나님의 살아있고 변함이 없는 말씀으로 되었기에 이제 버릴 것과 사모할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2: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1절에서 베드로는 버릴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데 무엇입니까?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의 악을 말함 악독->(남을 해치려는 심사로 모든 악덕의 총괄)
행동에 나타난 악 궤휼(속임으로서 순전의 반대)외식(위선)시기 (우월감의 소산으로서 타인의 행복을 원치 않는 마음이다.
대인 관계에서 빚어지는 악 비방--> 대인 관계에서 빚어지는 악을 말합니다.
2:2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
로 구원에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2: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구속을 받은 사람은 바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로써 구원에 이르도록 성장하는 힘이되고 영양분이 되기 때문입니다.
‘순전하고’했는데 이는 속임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신령한 젖은 바로 성도가 취하고 먹어야 할 음식, 바로 말씀의 젖인줄 믿습니다.
나무가 과실을 많이 맺기 위해서는 바로 영양분을 계속적으로 섭취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계1:3절에도 “예언의 말씀을 읽는자와 듣는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만나는 바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었지만 그들은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는 자들은 죽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 얻어지는 새생명입니다.
저와 성도 여러분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생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모든 악독과 궤휼(속임)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의 말을 모두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제 순전한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거짓이 없고 참만이 있는 하늘의 만나를 매일 섭취해야 할 것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생명을 소유한 성도로서 이제는 모든 악과 속임과 위선과 시기와 비방을 버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삶이 이제 말씀의 젖을 사모해서 우리속에 잔재하는 죄성을 십자가에 못박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시험하는 자가 와서 시험을 할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으로 이기셨나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을 이기셨음을 보여주신다.
우리들도 이세상에서 사탄의 시험권세 몰려와도 우리는 바로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길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얼마 만큼의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하여서 늘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둘재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2: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 로운 산 돌
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2: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
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에게 버린 바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분이십니다.
이 산돌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면 바로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때 사람들은 예수를 비웃으며
자기도 구원 못하는 주제에 세상을 어찌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조롱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분으로서 하나님이 다시 살리심으로 말미암아 바로 부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맡기면 우리도 신령한 집 즉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성전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3:16) 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예수 믿을때에 순간적으로 거듭나게 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는 날마다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 먹고 하나님의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이 되게 됩니다.
구약에서는 생축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즉,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바로 성도의 거룩한 생활입니다.
성도들의 헌신적이고 아름다운 생활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입니다. (로마서 12:1,2)
그러므로 성도의 거룩한 생활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예배이며 성도를 이것을 드려야 할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2:6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
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2: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
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중적 기능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믿는자에게 주어지는 기능이고 하나는 불신자에게 주어지는 기능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에 하나님이 택하시고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돌을 유대인들은 거부하였고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버린 시온의 돌을 모퉁이 돌이 되게 하셨고 믿는자에게 부끄러움을 당치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앞에 섰을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예수께서 변호를 해주셔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게 되며 부끄러움을 당치 않습니다.
그러나 불신자에게는 이 시온의 돌이 버린바 되었고 또 부딪히는 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거치는 반석이 되게 함으로 넘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으로 그들은 넘어지게 되는 자가 되었고 멸망으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구원과 축복을 불신자에게는 멸망의 거치는 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가 받게 되는 엄청난 축복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도의 신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
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
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 려 하심이라
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 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우리의 신분이 어떤 형편으로 바뀌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라는 것입니다.
-사43:20의 인용/진정한 족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하 나님의 가족의 족속 형태이다.
왕같은 제사장-출19:6의 인용/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더불어 왕노릇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의 직분과 제사장적 직분을 갖고 계신다.
거룩한 나라-출19:6절 인용,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로 성별 되었다.
마찬가지로 이제 그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나라가 된 것이다.
그의 소유된 백성--> 출19:5의 인용 신자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며,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택하신 족속으로,
왕같은 제사장으로,거룩한 나라로,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 가게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 려 하심이라
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 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그러므로 옛날에는 하나님의 긍휼을 얻지 못한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되었다.
도 4가지 특권을 성도에게 주신 것은 한 가지 목적을 갖고 있음을 결론적 말씀으로 보여준다.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하나님의 덕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크신 위엄과 영광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요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보답하는 일인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거듭났기에 이제는 버릴 것은 버리고 사모할 것을 분명히 사모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에 두신 돌은 믿는자에게는 하나님의 긍휼과 부끄러움을 받지 않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바로 거치는 돌이 되고 멸망케 하는 넘어지게 하는 돌이 됩니다.
이제 긍휼을 입은 성도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 불쌍히 여기심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함이다.
변화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역사가 일어나야 겠다.
5.제목: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라
본문: 벧전 2:11-12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12」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
지금까지 (1:13-2:10)는 대체적으로 개인생활에 관한 권면을 준 저자는 곧이어 이제 성도들이 사회인으로서 처신할 바에 대하여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수신.제가.평천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11-12절은 서론적으로 성도의 기본적인 자세와 사회적인 위치를 말하고
13-17절은 성도는 사회인으로서 국가의 권세에 대한 태도를 밝힙니다.
18-25절은 종의 윤리에 대해서
3:1-7절은 부부간의 윤리,즉 가정생활을 위한 권면을 주고 있습니다.
그럼 오늘은 11절과 12절을 통해 그리스도인인 제어해야 할 것과 하나님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성도의 사회적인 생활을 위해 권면함에 있어서 신자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성도들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 도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즉 성도는 세상에 살고 있으나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들이기 때문에 성도의 한가지 행동이 불신자에게 비방거리를 제공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나그네의 신분임을 기억한다면 언제나 영원한 본향에 돌아갈 것을 염두에 두며 세상을 살아야 하며 책무를 다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에서는 그 생활을 선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1절 초반에 “사랑하는 자들아”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늘 애용하는 말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사랑하는 대상이 될수 있으며 넓은 의미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대상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위치를 가만히 살피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신 것을 보면 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 이렇게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기 까지 사랑 받을 조건이 없는데 이런 놀라운 사랑을 받을 것을 생각할때마다 감사가 넘칩니다.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 이말은 정말 우리의 위치를 알려줍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같음을 알지 못하게 될때 땅에서,
세상에서 소망을 두고 세상에서 영원히 살것으로 착각을 하고 살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세상이 목적지가 아닙니다.
우리의 영원한 목적지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영원한 천국입니다.
레 25:23에 보면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 참고 히 11:13-16 믿음의 사람들의 삶의 방식
히 1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14」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15」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16」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성도의 삶의 방식은 영원한 천국, 우리의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는 삶의 태도가 무엇보다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인생의 나그네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에 땅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세상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무엇인가?
이것이 매우 중요하며 이를 알고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정말 아름답고 귀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베드로 사도는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육체의 정욕대로 산다면 이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는 세상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성도가 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만 합니까?
그것은 바로 영혼을 거스리기 때문입니다.
약 4:1에 보면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육체의 정욕은 육체적 욕망을 채우려는 것으로 악성적 욕심을 말합니다.
성도는 이런 육체의 정욕을 잘 제어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특별히 로마 교회의 교인들에게 보내는 로마서에서 자기 속에서 싸우는 두가지 자아에 개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하는 마음과 육신의 법을 좇아 살려고 하는 두가지 마음이 싸우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7:24-2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고 탄식하고 있고
「25」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세상의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는 일정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요,그 다음 방법은 육신의 정욕을 제어해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어서 5:24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렇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사람으로서 피조물로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기에 영원한 하늘나라에 본향을 둔 성도로서의 삶은 이제 이렇게 죄와 육신의 정욕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죽은 사람은 반응이 없습니다.
깨어도 흔들어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반응을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와 육신의 정욕에 죽은 사람이 되었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다면 죄와 정욕이 우리를 유혹해도 전혀 반응이 없어야 합니다.
거기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삶이야 말로 영원한 하늘에 본향을 둔 성도의 마땅한 삶인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롬 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사망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고전 15:50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이 정욕을 제어해야 할 마땅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삶속에 아직도 육신의 정욕이 남아 있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혈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고 나그네된 삶을 산다면,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두고 있다면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십니다.
성도의 삶은 바로 이와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어야 하고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벧전 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고 했는데 그리스도인이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는 삶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편지를 쓸 당시에 그리스도인에 대한 평판이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곧 악행을 하는 새로운 미신으로 오해를 받았습니다.
즉 악행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서 바로 선한 행실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으로서 선한 행실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방인중에 선한 행실을 가지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은 유대인을 제외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참 유대인라면 그리스도밖에 있는 불신자를 의미합니다.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비난합니다.
선한 행실이 없다고 외칩니다.
그러나 간혹 성도의 잘못된 행실이 전체 그리스도인의 것인양 싸잡아 비난을 할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예수를 믿는 사람을 욕하게 되는 악한 행실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벧전 3: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 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빌 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딛 2:7-8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8」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 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마 5:16에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선한 행실로 말미암아 불신자들이 마음에 권고함을 받는 날 즉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일이 생기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결국,
그것은 바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남편이 아내가 자녀들이 친척이나 친구가 우리의 선한행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돌아올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중 가장 중요한 것중 하나가 바로 나의 올바른 행실 선한 행실로 말미암아 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주께 인도하는 것입니다.
날마다의 삶속에 하나님의 은혜속에 사시는 성도 여러분께서는 영원한 하늘 본향에 소망을 두시고 나그네와 행인같은 마음으로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고 선한 행실을 하게 되므로 말미암아 이제 불신자들을 하나님께 인도하시는 거룩한 성도가 다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6.제목: 국가에 대한 의무
본문: 벧전 2:13-17
벧전 2:13-17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14」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15」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16」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같이 하라「17」뭇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이제 사도 베드로는 개인적 생활을 위한 권면에 있어서 성결한 생활을 힘쓸것 과 형제 사랑을 힘쓸것,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장할 것에 대해 권면하고
이제 사회적 생활을 위한 권면에 있어서 국가와 종에 대해서 부부에 대하여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금욕적인 종교가 아니며 세상과 등진 종교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이세상에 있으면서 종국적으로는 이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늘 나라에 속한 백성으로서 이 세상의 어두움과 부패됨에 있어서 빛과 소금된 역할을 하는 종교입니다.
그렇기에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이 있는 것이며,기독교의 올바로 서있느냐가 그 사회의 척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국가에 대한 베드로의 권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국가에 대한 태도는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3절에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를 위해 순복할 것에 대해 13절에서 17절까지에서 우리가 순복할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데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에 주를 위해 순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순종하고 복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거기에는 ① 위에 있는 왕 ②악행자를 징벌하는 방백(법집행자) ③ 선행을 하는 자를 포장하는 방백 -그들은 바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사람들에게 순복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리스도인은 자유한데 그 자유로 죄를 숨기는데 쓰지 말고 섬기는데 써야 되며 모든 사람을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왕을 공경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 세상에 제도가 들어오게 되는 것을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변의 왕국들처럼 왕을 구했습니다.
결국 사무엘에게 간청하자 하나님은 처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울왕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직접 통치하시는 방법에서 간접 통치하시는 방법을 사용하는 모습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로마서 13:1에 보면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왜 위에 있는 권세에 순복하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기에 영원하지 않고 때가 되면 바뀌게 됩니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그러하고 한국의 12월 대통령 선거가 그러합니다.
때가 되면 권좌에서 물러나야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정부에 항의하며 돌을 던지는 것이 만사가 아닌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국가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 알려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3:3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또 13:4절에서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인간에 세워진 제도를 통하여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징벌케 하시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인간 제도를 통해서 포장하시기 때문입니다.
남의 물건을 도절질하고 나쁜짓을 일삼는 사람을 그냥 사회에 방치한다면 시민이 어찌 불안해서 살겠습니까?
그렇기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경찰이 나서서 또 법원에서 재판을 하여 더이상 나쁜짓을 하지 못하도록 징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위에있는 왕,다시 말해서 권세에 순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위에 있는 왕,방백들 즉 관리 또는 관원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들의 자격이 있습니다.
근면해야 하고 (창41:37-57),
충성해야 하고(느2:3),
존경받아야 하고(에10:3),
슬기로와야 하고(잠14:34,35),
뇌물을 구하지 아니하고(믹7:1-4), 진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관리의 권위는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바벨론 왕국을 보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한고로 7년동안 미친 사람처럼 이슬을 맞으며 짐승처럼 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5 공화국에 있어서 대통령으로 있었던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 초기에는 대 국민 성명을 TV에 나와 발표할때 마지막에 “여러분의 가정과 하시는 일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길 빕니다. ”라는 말을 했었는데
집권 말기에는 그런 말들이 사라졌고 결국은 백담사에 원치 않는 귀향(?)을 가게 되는 불행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권력을 맡기셨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기 보다는 자기에게 영광을 돌렸기에 그런 쓸쓸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권력은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고 못박고 있습니다.
통치의 영원함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인간의 통치는 하나님의 통치의 대리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권좌에서 존경보다는 비난의 화살을 맞으며 내려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을 위에 세운 왕이나 제도,
방백의 정치에 순복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왜 인간이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면 안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받은 피조물이기에 그들을 비난하고 증오하는 것은 그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비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① 출 22:28 “너는 재판장을 욕하지 말며 백성의 유사를 저주하지 말 찌니라”
② 딤전 2:1-2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③ 벧전 2:13-14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 은 위에 있는 왕이나「14」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 라”
16절에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같이 하라”
그리스도인은 자유합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가지고 악을 숨기는데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의 종같이 섬기는데 그 자유를 활용하라는 말씀입니다.
죄은 왜 생깁니까?
인간이 자유를 남용하기 때문입니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데 그만 책임을 망각하고 행동하기에 방종에 빠진다고 이야기 합니다.
성경에 표현되고 있는 자유는 죄에서의 자유(렘25:10,렘34:8,9),
포로에서의 자유(행 24:23),
양심의 자유(고전10:29),
율법에서의 자유(롬7:1-4),
그리스도안에서의 자유 (요8:36,갈 2:4)등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유가 하나님의 말씀의 태두리라는 책임하에 활용이 되어진다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대한 무지(요한복음 8:32-33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33」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와
죄가(요한복음 8:34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또 사단이 (요8:41,44) 율법이(롬7:1), 사망이(엡2:1)우리의 영적인 자유를 제한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에 대한 태도는 바로 육체의 기회로 삼으면 안됩니다.*갈 5:13)
율법의 멍에를 다시 메면 안됩니다.(갈 5:1)
자유로 죄를 숨기는데 사용하면 안됩니다.(벧전 2:16)
남의 자유를 평가해서는 안됩니다.(고전10:29)
자유의 행사로 약자가 거스림이 되어서는 안된다.(고전 8:9)
오직 그리스도인은 바로 위에 있는 권세에 순복하되 분명하게 비방하지 말고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미국 목사님은 부시가 당선이 되면 좋겠다는 의향을 밝히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 데
클린턴도 침례교 교인이고 부시는 장로교 교인인데
클린턴은 낙태 찬성론자이고,
부시는 반대론자 이기에 만약 클린턴이 당선되면
낙태가 합법적으로 이루어 지게 되어 미국이 더더욱 낙태의 나라로 되어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게 되기에 부시가 당선되기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정말 의미 있는 이야기 였습니다.
우리나라도 하나님의 뜻을 잘 펼칠 수 있고 하나님이 권세를 주신 것이라는 청지기적 자세를 갖는 대통령이 나와서 국정을 펼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기도도 물론 중요하지만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제도에 순복하여 평안하고 늘 기도하며 국정을 잘 펼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베드로의 권면의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는 겸손과 섬김의 자세로 봉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그리스도인은 뭇사람을 공경해야 합니다.
롬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바로 형제를 사랑하고 뭇 사람을 공경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왕을 공경하는 마음 자세가 있어야 겠습니다.
오늘도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특히 위정자를 위하여 대통령과 정치인들 그리고 공무원,경찰,법을 집행하는 사람들 모두를 위하여 늘 기도하는 자세를 가져야 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타락을 막기 위하여 악행하면 징벌하는 방백을 두시고 내가 선행을 하면 상을 주는 방백을 세우심을 늘 기억하고 하나님앞에 있다는 생각을 사시는 진실된 성도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7. 제목: 종에 대한 권면
본문: 벧전 2: 18-25
벧전 2:18-25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19」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20」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21」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2」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23」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25」너희가 전에는 양과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성도의 사회적 의무중 국가에 대한 의무를 말한뒤 사회적인 가정문제를 권면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본문은 종의 의무에 대해 말씀하고 3:1-7절에서는 부부의 윤리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종-다시말해서 자기자신의 자유를 상실한채 노예처럼 사는 사람이 자유인의 4배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당시에는 노예문제는 큰 사회적인 문제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종처럼 부려지는 사람들이 지구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생기고 노동자의 권익이 대변되고 이권을 주장하여 한국에서는 노동 현황이 많이 나아진 편입니다.
옛날에는 양반이니 상놈이니 하는 구분이나 것들이 철폐되고 양반집에 종살이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현대판 노예제도가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논밭의 주인이 다른 사람이고 대토해서 농사짓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또 사람을 사고 파는 매춘도 세상에 만연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억지로 종살이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쩔수 없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 오늘날 우리의 삶의 현장에 적용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인과 종에 대한 문제를 여러번 언급하지만 (엡6:5-9.골3:22-4:1,딛2:9) 베드로는 종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 베드로전서의 수신자중에 종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당시의 종들이 기독교에 대해 듣고 기독교에 많이 헌신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다 형제요 자매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종들이 기독교를 믿고 난후에 잘못 생각하여 주인에게 불손하게 대하고 주인의 명령에 거역하고 해서 교회 박해의 기회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인에게 대해서 순복할 것을 가르치고 그 본으로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순종을 들고 있습니다.
* 벧전 2: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 여기서 우리는 종들이 주인에게 순복하라는 권면의 말씀을 봅 니다.
8.제목: 부부에 대한 권면
본문: 벧전 3: 1-7
사도 베드로는 이제 개인적 생활을 위한 권면(성결,형제사랑,성장)하고 사회적 생활을 위한 권면으로서 국가에 대한 의무,종에 대한 권면,부부에 대한 권면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나오지만 박해에 대한 권면이 나오고 결론적 권면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지난달에 있었던 10월 28일 예수님 공중 재림 소동을 통하여 어떤 것이 과연 진리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아주 잘 확인 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재림 날짜를 믿지 않는 남편이나 가족을 자녀를 팽개치고 설쳤던 여인들도 많았고 남편도 있었습니다.
학교도 그만 두고 직장도 그만 두고 그렇게 설쳤던 사람들이 이제 재림의 정확한 시간을 이야기 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 하는 불신 행위임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가정을 깨뜨리면서까지 신앙 우선을 했던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가정을 행복하게 회복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런 계기를 통하여 우리는 가정과 신앙의 조화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서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매우 많이 있습니다.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인 부부의 윤리에 대해 권면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는 처음부터 여신도들이 있었고(행 1:1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 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또 바울의 전도여행에 있어서도 부인들이 믿게 된 기사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남편이 같이 믿는 경우도 있었고 믿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특별히 남편이 불신자일 경우에는 신앙과 가정 생활의 조화 문제가 늘 따랐고,
또 그 당시 여성의 위치를 천시한 당시의 사회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남녀 동등을 가르치는 교회에(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들어온 부인들중 어떤 사람들은 이 교리의 진리를 잘 못 이해하여 탈선하는 행위도 있었습니다.
이러므로 바울도 부부의 일반적 윤리에 대하여 (엡5:21-24,골3:18,딛2:4)
또는 불신 남편을 가진 아내들이나 (고전 7:13-14)
부인들의 행위(고전 14:34-36)같은 특수 문제에 대하여 교훈을 주고 있다.
본문은 먼저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아내에 대해 권면하고 있습니다.
첫째,아내는 가정의 질서를 위해 남편에게 순복해야 합니다.
1절에 “아내 된 자들아 이와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
이와같이 순복하라고 했는데 이는 앞장에서 말한 것처럼 종들이 주인에게 순종하듯(2:8)
남편에게 순종해야 함을 가르킵니다.
그때 당시의 유대의 율법이나 헬라법에 의하면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로 집안에 살면서 남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의무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실이 전파되었습니다.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 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기독교로 개종한 많은 여인들이 현실적으로 많은 문제점들이 있었을 터인데 이런 어려움을 달래기 위해서 베드로는 순종의 미덕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내의 일방적인 순종만을 강조하지 않고 남편에게도 아내에 못지 않는 권면을 7절에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도로서 아내의 순종은 일방적인 굴종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사랑으로 순종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존경하는 것입니다.
골 3:18-19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19」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엡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엡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런 성경 구절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사랑으로 순종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에 순종하는 미덕이 있어야 합니다.
엡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두번째, 남편을 구원의 길로 이끌 수 있어야 합니다.
1절에 “이는 혹 도를 손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불신 남편이 있을때 아내의 올바른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10년 믿었는데 남편을 아직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못하신 분이 계십니까?
실망하지 마십시요.
절망하지 마십시요.
내 남편은 안돼 라고 말씀하지 마십시요.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남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 오지 않았습니까?
계속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가서 귀찮게 해서 응답을 받은 것처럼 하나님께 계속 응답이 올때까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꼭 기도 응답을 해 주실 것입니다.
아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남편을 의의 길로 인도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부부의 일반적 윤리에 대하여 (엡 5:21-24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22」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23」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찌니라”,골3:18,딛2:4) 또는 불신 남편을 가진 아내들이나 (고전 7:13-14) 부인들의 행위(고전 14:34-36)같은 특수 문제에 대하여 교훈을 주고 있다.
즉 불신 남편이 있다하더라도 의로운 아내가 남편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으며 의로운 남편이 불신 아내를 그리스도께 인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이기에 더욱 사랑하고 아끼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성도는 바로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를 그리스도께 인도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그것을 함께한 남편에게 주어 하나님의 명령에 거역하게 하였습니다.
아담의 불평은 “하나님이 주어 나와 함께한 저 여자가 주어 내가 선 악과를 먹었나이다.
”하므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내가 남편을 하나님앞에 불순종의 죄인으로 인도할 수 있고 의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부부가 같이 믿으면 서로 세워주고 이끌어 주고 한 쪽이 믿지 않으면 거룩하고 온유한 성품으로 주님께 인도를 하여야 하겠습니다.
2절에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아내나 남편의 정결한 행위를 봄으로써 마음이 녹아져서 하나님께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남편이나 아내 더 나아가서는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서 늘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째로, 아내는 겉 치장보다는 온유하고 정숙한 내적 아름다움을 지녀야 합니다.
(3절-5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사람들은 외모에 신경을 무척이나 씁니다.
주름살이 하나라도 늘으면 놀라워 하면서 괜한 걱정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자된 아내는 겉을 꾸미는 것도 중요합니다.
남편이 퇴근해오는데 아내가 자다가 일어나서 부시시한 모습으로 맞이하는 것보다 곱게 그리고 단정한 모습으로 화장도 살짝한 모습으로 환하게 맞이하는 것이 더욱 좋습니다.
그러나 남편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단장을 하고,머리꾸미고 파마를 멋있게 한다던가 ,금으로 가락지와 목걸이를 한다해도, 아름다운 옷을 입는다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
4절에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성도의 진정한 단장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복음의 신발을 신고 의의 흉배와 진리의 허리띠를 띤 모습,
그리고 믿음의 방패와 말씀과 성령의 검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속사람이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않는것으로 할때에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디모데 전서 2:9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어서 5절에서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 들도....” 라고 하면서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주라 칭하였다는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 종들이 주인에게 순종해야 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순종을 예를 든것처럼 사도 베드로도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예를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순종하였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내된 성도는 이와같이 남편에게 순종하는 미덕이 있어야 하고 남편을 거룩과 정결함으로 주께 인도하는 아내가 되어야 하고 겉 치장이 아닌 마음의 온유와 정결로 치장하는 의롭고 거룩한 옷을 입는 아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편은 권면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남편 된 자들아 이와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남편들은 아내를 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엡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골 3: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살전 4:4“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3엡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 로 용납하고”
왜 입니까?
그것은 바로 아내는 깨어지기 쉬운 연약한 그릇과 존재입니다.
이는 남편의 보호가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에 대해 함부로 대하는 것은 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연약하면 쉽게 상처를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아내를 귀하게 여겨야 할 이유는 바로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익 때문입니다.
나만 혼자 천국에 가는 것보다 남편과 같이 하나님 앞에 가서 같이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나눌 수 있는 모습이 더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남편이 아내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마음이 상하게 되면 기도가 막힙니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Relationship)가 깨어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내된 성도들은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모습으로 정결한 모습을 갖게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남편을 주께 인도를 하지 못하신분은 실망치 마시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자신의 올바르고 온유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반사기켜서 주께 인도하시기 바랍니다.
남편되시는 분들은 더욱 더 아내를 귀히 여기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하여서 가정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천국으로 만드시기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9.제목: 부르심을 입은 성도의 삶
본문: 벧전 3:8-12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9」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10」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11」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12」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벧전 3:9절에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는 말씀속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읽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성도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과정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의 부르심은 결코 외적인 부르심이 아닌 하나님의 내적인 부르심 즉 효과적인 부르심, 소명인 것입니다.
효과적인 소명이란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보좌앞으로 나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여기에 응답하여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온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백성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레위기 11:45절 말씀과 벧전 1:6절 말씀처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니라”하나님의 거룩을 따라 거룩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에 하나님의 뜻대로 다 살지 못해서 실망하고 나는 안돼 ! 내가 어찌 감히....하면서 신앙의 정지 상태에 머물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힘이 없고 연약해서 자꾸 쓰러지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의 은혜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께 아뢰고 주의 힘을 덧입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실망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삶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리가 신앙 생활 하면서 구체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는 본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8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사회적인 책임에 대한 권면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권면을 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체휼한다는 것,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 불쌍히 여기는 것,겸손한 것등은 그리스도인의 미덕입니다.
체휼(體恤)하며 --했는데 이는 불쌍히 여김,동정한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남을 불쌍히 여기는 것등은 겸손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밖에 있었을때에는 바로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지만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자가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1-2에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2」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바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체휼을 입었고 불쌍히 여김을 받았으며 사랑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의로움을 내놓을 것이 없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이 엄청난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의 삶도 남을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계명이 무엇입니까?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 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아직도 사랑할 수 없다고 고집할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바로 백 데나리온의 빚을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치 못한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비극이었습니다.
성도의 비극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은 것처럼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는 바로 남을 체휼하며 즉 동정하며 ,
형제를 사랑하며 남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가문에서 이웃에서 구역에서 교회에서 용서하지 못한 얼굴을 떠올리시고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동정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예수님을 아직도 모르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지 못하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넓은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심장을 갖고 복음 전파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진정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지만 바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길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스런 보좌를 버리시고 이땅에 낮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겸손의 극치입니다.
하나님이 이땅에 오셔서 세상의 백성들을 위해서 구원을 베푸신 사건은 겸손의 극치입니다.
겸손은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는 “낮은 마음씨”입니다.
그리스도교의 덕목(잠 29:23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또 누가복음 14:11절에 예수님은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요한복음 13:14 절엔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고 몸소 겸손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의 삶속에 이와같은 동정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과 불쌍히여기는 것 또 겸손한 모습을 늘 가지시기 바랍니다.
다같이 9절을 읽겠습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세상에 복을 싫어할 사람은 없습니다.
복중에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복이야말로 가장 고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유업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남을 축복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세상 사람과 다른 점은 바로 악으로 보복을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악을 악으로 보복합니다.
그러나 그리스챤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열두영이나 더되는 천사를 보내어 저들을 진멸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스스로 고난의 관을 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악으로 보복하지 말라는 교훈을
마태복음 5:39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누가복음 6:28에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로마서 12:14절에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고 하였는데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철저히 실천한 바울의 고백이요 예수님의 말씀의 대언입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대적하고 흔드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 악으로 갚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의 삶속에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수고하고 애를 썼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핍박에 참고 우리의 믿는 도리의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본은 우리가 그대로 완전하게 따라 할 수 없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과 성령을 주시어서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특히 인생 경륜이 짧은 젊은 세대에서 문제점을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고 자기가 모든 것을 해 볼려고 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요청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성령을 의지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로마서 12:17절에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5절에 살전 5:15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의 삶이 모습이 이렇게 아름다워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과연 어떠한 것이가를 보일 수 있는 방법은 본문에 나오는 대로 삶으로 보여줄 수 있습니다.
시편 34:12-16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13」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찌어다「14」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찌어다「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16」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10절 - 악한말로 악을 갚지 말라고 했는데
야고보서 3:2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했습니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는 성도야 말로 “회개한 성도의 아름다운 행동”입니다.
성도는 늘 화평을 구하는 삶이어야 하는데 이는 불의와 타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12절은 하나님의 얼굴은 진노와 사랑의 양면성을 봅니다.
얼굴은 죄인에 대한 진노의 모습으로 눈과 귀는 의인에 대한 사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는 질문을 던지는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의 아름다운 모습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그리고 부르심을 입은 성도는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고 겸손함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받는 성도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또 남을 축복해주는 성도의 삶이 아름다운 것임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의 삶속에 그대로 적용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10.제목:고난의 복음
본문: 벧전 3:13-17
「13」“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 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15」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 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 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 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제 사도 베드로는 고난의 복음에 대하여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서의 중심 사상입니다.
이부분은 고난에 대한 조직적인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①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의 태도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권면하고 있으며,(13-17)
②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3:18-22)
③그리스도의 본을 따를 것( 4:1-6)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 다.
오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고난에 대한 태도에 대해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인의 공통적인 십자가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도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고난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는 굉장히 무거운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가실때에 쓰러지셨는데
“아니! 예수가 그렇게도 힘이 없었나?”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는 굉장히 무겁고 돌덩이 같은 십자가였습니다.
튼튼하셨던 예수님도 쓰러지셨던 것입니다.
원래 십자가는 등에 지는 것인데 요즈음 젊은 사람들은 목에 걸고 다닙니다.
결코 십자가는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장식이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고난의 상징이요 실제입니다.
성도라 함은 누구든지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고난은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 당시에는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목숨 각오하고 믿어야 할 때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그 때 당시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함을 의미했습니다.
인정을 하지 않고 추방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왜 니고데모가 밤중에 온 줄 아십니까?
그의 체면도 있었지만 발각되면 랍비 사회에서 유대인 사회에서의 추방 즉 매장을 당함을 의미했기 때문에 밤에 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고 고난을 각오해야 하는 사회적 배경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같이 13절과 14절을 읽읍시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 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예수님의 산상 보훈중에서 8복을 연상시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는 말씀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산상 수훈의 그 교훈의 말씀들이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무엇보다고 고난에 대한 올바른 권면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난이 왜 옵니까?
그것은 어떤 영향을 성도에게 미칩니까?
고난에 대한 성도의 올바른 태도는 무었입니까?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더 좋은 것이라고 17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고난은 정말 값지고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20년간의 고난의 세월은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두려움과 비겁한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요셉의 고난은 의를 이루었지만 야곱의 고난은 자신의 자아가 깨어지는 아픔이 있기도 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의 고난도 바로 선을 행함으로 오는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악이나 실수로 인해서 오는 고난은 결코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는 한가지 이유때문에 우리가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예수 믿음으로 인해,
선을 행함으로 인해 오는 여러가지 핍박,
즉 고난을 기쁨으로 여기며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은 로마서
8:18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 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가져다 주는 유익이 얼마나 큰지 고난을 인내함으로 천국에서 주어지는 영광이 고난과 상극이 되어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보상이 있다는 소망을 알려줍니다
또 야고보 선생은 약 5: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라고 위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성도의 삶은 이와같이 뭔가가 달라야 합니다.
그러나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정말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이 고난이요 핍박입니다.
그러면 고난이 다가 올때의 성도의 마음은 어떠해야 합니까?
벧전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성도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주로 삼아 거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서 할려면 되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힘이 없고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쓰러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의지해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또 그 분이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연약한 성도를 도우십니다.
영원토록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세상의 불의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거룩한 성도는 마귀가 흔들지 못합니다.
고난을 통해 흔들어 보기도 하지만 결국 쓰러뜨리지 못하고 물러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의 풀무불이 여러분을 후라이팬의 콩처럼 달달 볶는다 하더라도 성도의 거룩함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성도는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소망적인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쌀통에 쌀이 떨어져도 자녀들에게 학자금을 당장 주기 어렵다 해도 소망에 찬 말들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채워 주실꺼야 !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야!
주님은 나에게 은혜로 채워 주실 꺼야 하는 소망의 말을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처럼 똑같이 슬퍼하고 절망하고 넘어진다면 세상 사람들이 무엇을 보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뭔가가 다르다는 평을 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영광을 얻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또 성도의 고난을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하시는 분들은 마음속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거룩한 삶을 사시므로 고난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또 고난을 당해도 괜찮으냐고 하는 정말 의아해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 평안과 기쁨을 또 소망을 이야기 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고난당하는 성도의 삶은 바로 선한 양심을 가지는 것입니다.선한 양심은 마음의 중심입니다.
양심이 살아 있을때에는 소망이 있으나 양심이 죽어 있을때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양심이 화인 맞은자는 악한 양심을 소유한 것이 되고 맙니다.
양심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선악의 판단을 내리는 지적의식과 도덕적 의무감의 양면성을 갖고 있습니다.
선한 양심은 자기의 행위나 마음을 선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악한 양심은 선한 마음을 무시하고 정욕적인 죄악적인 판단을 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의 삶속에 선한 양심은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의 양심은 거룩하게 됩니다.
고난을 당하는 성도의 태도는 바로 선을 행하다 의를 행하다가 받는 고난이 되어야지 악을 행하다 얻는 고난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오면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주로 모시고 주님의 판단에 나의 모든 것을 맡기고 거룩함의 옷을 입고 선한 양심을 유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고난을 이긴 댓가로 주어지는 영광을 다 얻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11. 제목:그리스도의 고난
벧전 3:18-22
①그리스도의 고난 ② 옥에 있는 영에 전파? ③ 세례 ④ 예수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음.
고난의 복음을 설명하면서 사도 베드로 선생님은 먼저 고난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태도를 일반적으로 말한 후 이 부분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본을 보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내가 가장 큰 고난을 당한다고 이야기 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성도에게 본을 보이고 있음을 상기 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면 자신의 고난의 어려움을 이겨 나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본문에는 신약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이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바로 옥에 전파하였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는 세례와 예수님의 승천의 위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시는 성도님 !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고난의 어려움으로 힘이 드십니까?
오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시면서 고난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고 하겠습니다.
18절에 “그리스도께서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로
①한번 죽으심입니다.②죄를 위해 죽으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입니다.
③의인으로서 죽으셨습니다.
④불의한 자를 대신해서 죽으심입니다.
이는 죄지은 인간에 대한 자기 희생적 사랑을 의미합니다.
⑤하나님 앞으로 사람을 인도해가심을 위함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서 하나님과의 사이를 화목케하 시는 죽으심입니다.
⑥육체적 죽음입니다.
⑦죽음을 이기신 죽으심입니다.
이는 부활하심으로 죽음도 정복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했습니다.
인생은 한번죽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께서는 성도는 한번 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육체적인 죽음을 한번 당하지만 불신자는 육체적인 죽음을 한번 당하고 영원한 불 지옥에 떨어지는 두번째 죽음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한번의 죽음이면 족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단 한번의 죽음을 위해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불의 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앞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죽으셨습니다.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 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 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죄도 없으신분이 의로우신 분께서 우릴 대신해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만족시켜 우릴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두려움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단번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심을 입었습니다.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 7: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롬 6: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 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 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영원 지옥불에서 하나님앞으로 인도해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고난의 당하신 것입니다.
이 고난은 이사야 53장에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바로 대속적 죽으심,희생적 사랑의 실천적 죽으심,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예를 회복시키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혹시 겪는 고난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시면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우릴 정말 아름답게 만드십니다.
두번째로 상고할 내용은 바로 19절과 20절의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신약 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로 인해서 카토릭과 그리스 정교회 그리고 개신교가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했다는 말씀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 는가?
①렌델 해리스(Rendel Harris),모팻트(Moffatt),굳 스피드(Goddspeed)등의 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이는 에녹의 영이 음부에 갇혀 있는 범죄한 천사(창6:1-4;벧후2:4,5;유1:6)들의 영에게 설교했다(위경 에녹서 6:4이하 12:1)고 주장합니다.
② 빅(Bigg),헌터(Hunter),등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부활하기까지의 기간 동안 그의 영이 노아의 홍수 때에 멸망하여 (창7:21-23) 음부에 갇혀 있는 영들을 구원하기 위해 말씀을 전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③제롬(Jerome),어거스틴(Auguestine),아퀴나스(Aquinas),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전에 성령으로 노아를 통해 그 당시의 패역한 사람들(창6:12)을 전도 하였으나 노아의 가족 8명이외에 (20절)벧후2:5) 나머지 사람들은 멸망하였다고 합니다.
이상의 세가지 학설을 통해서 첫번째 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카토릭의 연옥설이 나오게 되었고
그리스 정교회에서도 이 교리를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에선 세번째 학설을 받아들입니다.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첫번째 학설을 취해야 하지만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과 문맥등을 살필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기 전에 노아를 통해 전도하였다고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은 우리들은 2000년전의 과거를 보면서 구원을 얻지만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오실 메시야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아를 통해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죽음이후에는 영벌과 영생 이 두가지외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세번째로 생각해 볼 것은 바로 세례에 관한 것입니다.
21절에 세례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표식이라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이 받는 표식이라는 것입니다.
세례는 더러움을 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엡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고전 10: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 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 시게 하셨느니라”
세례를 받은 사람이 악한 행동을 할때에도
아! 난 세례받은 사람이 아닌가? 이러면 안되지 하고 셰례받은 사람의 양심을 세워서 곁길로 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례 받은 사람은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죄가 아무리 유혹을 하여도 넘어가지 않는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는 살아 있어서 반응을 보이며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세례를 받은 성도는 하나님을 향해 선한 양심을 따라 살아야 할것입니다.
선한 양심으로 말미암아 아무리 큰 고난이 온다 하더라도 유지를 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승천입니다.
22절에 그리스께서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천사들과 능력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우편은 아버지의 권세를 받아 대신 행할 위치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이 아무리 고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를 고난케 하고 고통을 주는 모든 권세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굴복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베드로는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의 본을 보이며 성도들의 고난은 결국 끝이 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상하신다는 소망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보좌앞에 서는 날을 기대하며 모든 무릎이 예수 그리스도께 꿇게 되는 날이 있기에 오늘의 고난을 이기고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시는 성도 여러분 !
고난을 무서워 하거나 겁내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시면서 참아 이기시고 결국 하나님이 고난을 다 없이 하는 날을 소망하셔서 날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예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12. 제목:선한 청지기의 삶
본문:벧전 4:7-11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8」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9」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10」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11」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이제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말씀하고 이제 선한 청지기의 삶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가정이나 물질 그외의 모든 것을 오직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 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것은 자신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게 되었고 이런 생각으로 사회적 도덕이나 윤리등을 잃어 버린채 사람으로서 도리를 잃어 버린채 인생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찌해야 합니까?
오늘 베드로 사도의 권면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한 청지기의 삶을 살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떠한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삶일까요?
베드로 사도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삶을 살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줍니까?
본문 7절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후 이땅에 다시 오실때까지가 바로 말세입니다.
그런데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라는 말씀속에서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게 됩니까?
사람들이 사람을 사랑하기 보다는 돈을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하고 효도하기 보다는 불효하고 교만하고 죄를 물 마시듯 사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정말로 지금이 말세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때가 한두번이 아닐 것입니다.
성경에 말세가 되면 어떠한다고 했습니까?
사도 바울 선생님은
딤후 3:1-5에서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2」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이기주의) 돈을 사랑하며(물질만능) 자긍하며(명예욕)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불효) 감사치 아니하며(원망) 거룩하지 아니하며「3」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인정머리가 없음) 참소하며(남을 미워함)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5」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야고보 선생은 야고보서 5: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기주의와 물질만능의 세태속에서 그리스도인의 빛과 소금된 삶이 더욱 요청이 되고 있습니다.
어두움과 부패속에서 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인생의 참된 진리의 길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예수님처럼 살려고 애쓰는 모습을 통해 세상을 비출수가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말세를 당한 성도의 삶은 먼저 개인의 성결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성결생활에 있어서 소극적인 면이 먼저 개인의 성결,즉 거룩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신은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정신은 그사람의 어떠함을 잘 표현하는 잣대입니다.
그 사람의 정신이 올바르게 되어있으면 그 사람의 인생도 올바른 삶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종말이 온다고 해서 광신적으로 직장도 그만두고 학업도 포기하고 가정도 내 팽개치는 삶은 결코 올바른 삶이 아니면 이는 광신적인 것입니다.
이런 자세에서 정신을 차리라는 말씀입니다.
정신을 차린다는 것은 자제력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정신을 절제하지 못하면 정상적인 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사는 사람도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또 근신한다는 것은 건전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욕구대로 산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에 사는 성도의 삶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바르게 분별하여 깨어 기도하는 생활입니다.
기도하는 삶은 바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부모자식간에도 대화가 없으면 부모는 자녀들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무슨 고민을 하는지 알수가 없습니다.
또 자녀들은 부모님이 나에게 어떤 기대를 갖고 계신지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알수가 없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부모와 자녀간의 인격적인 교제가 끊어지면서 단순히 계약적인 관계가 될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인 성도간의 기도가 끊어지게 된다면 결코 바람직한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이때에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고 깨어 기도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럼 성도의 좀더 적극적인 삶은 어떤 삶입니까?
첫째로, 서로 사랑하는 삶입니다.
‘무엇보다도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태도가 기도라면 성도간의 관계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세상에 오셔서 새로운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계명만 지키면 율법을 다 지키는 것이 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잠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와
약 5:20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 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와 일맥상통합니다.
이는 우리가 남의 죄를 사하는 의미가 아니라 이웃의 잘못을 정죄하지 아니하고 용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은 것처럼 우리도 남에게 사랑을 실천하여 남의 허물을 들추어 내지 않고 용서하고 관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10년이나 지난 일들을 기억해내면서 남편을 또는 아내를 또는 이웃을 정죄하고 욕을 하는 것은 올바른 성도의 삶이 아닌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3:5-6에서 사랑은“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빨리 남의 허물을 잘 봅니다.
그러나 남의 선한 일은 잘 보지 못하는 색명일 때가 많습니다.
약 5:20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눈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를 보는 사람들에 대해 교훈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남의 허물과 잘못을 전혀 못보고 잘 한 일만 보는 성도가 되어야 겠습니다.
두번째로,서로 대접하는 삶입니다.
오늘 아침에 읽은 본문가운데 서로라는 말이 세번 나옵니다.
서로 사랑하라,서로 대접하라,서로 봉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서로 대접하는 삶은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음식으로 대접하는 것이 있습니다.
또 나 자신을 낮추어서 상대방을 나보다 높이는 대접이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람대접을 하고
부모와 자식간에도 자녀 대접,
부모님 대접,직장에서 상사와 부하간의 서로간의 대접 또 부부간에 남편 대접,아내 대접등등 이런 것들을 잘 한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요
서로 대접하는 삶은 나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삶입니다.
성도는 모름지기 겸손의 허리띠를 띠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먼저 대접하면 내가 대접하겠는 소극적인 자세는 버려야 합니다.
내가 먼저 사랑의 말을 건네고 관심의 말을 건네는 자세가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속에 대접을 잘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하러 가는 천사를 음식뿐아니라 하나님의 천사로 잘 대접했기에 그가 조카 롯을 구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의 삶속에 아브라함과 같은 자손의 축복,믿음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히 13: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 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세째로,서로 봉사하는 삶입니다.
본문 10절에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선물로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또 자녀인 동시에 주님의 종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로 영접하고 삽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인정하고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를 사셧기에 우리는 이제 마귀와 죄의 종이 아니라 예수님의 나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섬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됨과 주의 종됨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종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위임받아 관리합니다.
슬하의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관리합니다.
우리의 건강과 지식,능력들을 관리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관리합니다.
이것이 바로 서로 봉사하는 삶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은사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고전 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롬 12:6-7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7」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등등 많은 은사를 각자에게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각자가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봉사함에 있어서 서로 하는 것입니다.
남이 먼저하기를 기다리거나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올바른 삶의 모습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활용하여서 교회에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구역이면 구역에서 성가대면 성가대에서 교사면 교사로서 여선교회에서 서로 봉사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못해 하는 고백은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나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나는 아무것도 못하지만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느니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말을 할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해야 합니다.
봉사 할때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신자가 시비를 걸고 비방을 합니다.
힘이 들어도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아 힘차게 봉사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의 삶이 이와 같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일의 결국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의 영광으로 가로채거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과 어긋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고기 먹는 것이 믿음이 약한 사람을 실족케 한다면 결코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 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는 것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 서로 대접하는 것,서로 봉사하는 것의 결국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세세 무궁토록 권능과 영광을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고 찬양받도록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우리 자신의 성결을 먼저 찾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여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항상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을 서로하고 서로 인격을 존중하며 나 자신을 낮추는 겸손으로 남을 대접하고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으로 서로 봉사하는 삶을 사시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세세무궁토록 돌리는 선한 청지기가 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13.제목:고난의 축복
본문:벧전 4:12-19
이제 사도 베드로는 고난의 축복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면서 고난의 축복에 대해 말씀하면서 고난을 기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고난에 열외로 되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숨을 쉬고 있는 동안에는 고난이라는 짐을 지고 삽니다. 고난이 사람을 아름답게 할 수 있는가 하면 또 그 사람을 철저히 파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아침 저는 고난이 갖다주는 유익과 고난에 대한 태도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자 그럼 그리스도께선 왜 고난을 받으셨나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어찌 고난을 당하고만 있어야 하셨는가?
거기에 대한 답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입니까?
하나님께선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계획을 세우셨는데 이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어 인간의 죄에 대한 댓가로 대신 형벌을 받으시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충족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이제 하나님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바로 의로운 고난이었습니다.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시련이 왔을때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1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라고 했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많은 고난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겪는 고난으로 인해 우리는 종종 갈등을 겪게 되는데
왜 하나님의 자녀인 내게 왜 이런 고난이 오는가?
왜 이런 시련이 오는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왜 나에게, 왜 우리 가정에, 왜 저 가정에 어려움이 올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갈등이 옵니다.
마치 마리아가 4일만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하고 예수님 그곳에 없었음을 원망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늦게 오셨다고 나사로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나사로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렸을때 사람들은 비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사로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난의 현장에서 겪는 많은 갈등들이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끊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연단합니다.
마치 금이나 은처럼 정련하여 순금이나 순은으로 정련을 할때 불이라고 하는 뜨거운 연단을 거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고난이라는 하는 방법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 시험이 올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고난이 왔을때 이상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태도가 아님을 알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련이 왔을때에 이상한일 당하는 것으로 생각지 말고 「13」절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고난을 당할때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해야 합니다.
저는 종종 어려운일 겪을때마다 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나 아프셨을까?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할때마다 나의 고난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이기에 감사하며 참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올때마다 즐거워 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과 세상사람과 다른 점입니다.
그런데 고난을 즐거워 하라고 해서 슬픈 일을 당했는데 잘 당했다고 즐거워 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바로 고난을 통해 얻어지는 유익과 미래의 영광을 소망하면서 즐거워 하라는 것입니다.
벧전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앞에 섰을때에 예수님으로부터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은 어떤 경우입니까?
「14」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겪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15절에 나온 것처럼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 하는 자로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서 고난을 겪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5:11 예수께서도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라고하셨습니다.
사실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함께 있었기에 순수한 진리가 전파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되었을때 많은 성도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은 것입니다.
행 5:41에 보면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리스도의 이름때문에 받는 능욕을 합당하게 여겼습니다.
바로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이름때문에 받는 고난을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합당하게 여겨야 합니다.
불의와 부정을 봤을때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을때 오는 여러가지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것이 고난을 겪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사도 베드로 자신도 고난의 증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는 고난을 즐거워하고 부끄러워 말아야 합니다.
복음으로 인해서 망한 것 같으나 하나님은 다시 일으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16」절에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고난이 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자신의 육체적 죄로 인해서 고난이 오면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다가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지키려다가 겪는 고난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벧전 2:19-20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20」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그렇습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서 겪는 시련은 인과 응보로서 자신에게 전혀 유익이 없을뿐더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자신에게나 교회에 막대한 손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만
오직 선을 행하다가 복음을 전하다가 기독교적 양심을 지키다가 고난을 겪고 불이익을 당하는 것등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한가지 더 중요한 사실은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벧전 4:17‘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있는 교회에서 심판이 시작이 되어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는다면 경건치 않은 사람,복음에 불순종하는 사람,죄인의 결국은 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고난은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고난이어야 하고 생명을 각오하면서까지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되는 심판은 구약 사상입니다.
겔 9:6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찌 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 더라’
예수님은 요한복음 14:2절에 천국을 하나님의 집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동자가 우릴 지켜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고난을 참아 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합니다.
또 사도들의 고난을 기억합니다.
초대 교회에 겹쳤던 고난을 우리는 압니다.
기독교는 고난과 함께 성장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삶에 오는 고난은 성도의 믿음을 갈고 닦아 빛나게 해줍니다. 결국 하나님앞에 영광의 면류관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고난이 가져다 주는 축복을 받아야 될 줄 압니다.
19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연상케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가운데 계실때에도 무지한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중보기도 하셨고 또 마지막 숨을거두시면서 자기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시면서 운명하셨습니다.
눅 23:46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 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왜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에게 부탁하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은 바로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끝까지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고난의 범위라고 말씀드릴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 고난과 함께 세상을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의로운 고난이어야 하며 그리스도인이라는 것때문에 받는 고난이어야 합니다.
나 자신의 잘 못으로 인해 받는 고난은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 같이 고난이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14.제목:계속적 권면(장로와 젊은이)
본문:벧전 5:1-7
이제 사도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5장에서 특별한 권면을 하고 있는데 장로에 대한 권면과 젊은이에 대한 권면을 하고 있으며,
깨어 근신하라는 권면과 인사와 축복으로 5장을 맺고 있습니다.
그럼 먼저 1절에 보면 너희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라고 했는데 여기서 나오는 장로나는 말은 ‘연장자’란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장로라는 위치는 한 가문의 어른에게도 (창10:21)한 지파의 장에게도(레4:15)적용된 명칭이었습니다.
신약시대 당시에도 각 지방에 있는 연장자들이 회당의 관리와 재판(마 5:21)을 주관했고
예루살렘에서는 전국적인 대표인 71명의 연장자로 (민11:16)
구성된 공회가 있어서 최고의 법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신약성서의 장로직이 구약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그 성격에 있어서 차이점이 있습니다.
교회의 장로직이란 교회의 관리나 행정이외에 목회 설교등을 하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해서 장로교회에서는 치리 장로와 강도 장로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자신에 대하여 세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나는 함께 장로 된자요’했는데 이는 사도로서의 고자세가 아니라 같은 입장에서의 친철하고 자신과 동등한 위치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둘째로,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자신은 그 누구보다고 예수님의 고난의 동참자가 되기 위해서 끌려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쫓아 갔습니다
비록 그가 세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는 연약함을 보여 주었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었던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목격한 자로소 그 목격한 바를 입증하는 자이기에 자신을 고난의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세번째로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라는 확신에 찬 모습입니다.
비록 그가 예수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했지만 영원한 약속에 대한 보장을 받은 자로 자처했고 확신했습니다.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일꾼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말씀은 장로님에게 적용된 말씀이라는 오해를 할 런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을 가지면서 가정에 있어서 구역에 있어서 교회에 있어서 신앙의 연장자가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은 장로에 대한 권면의 말씀이 되지만 목양을 하는 장로에게 해당이 되지만 우리 자신도 신앙의 연장자가 되기 때문에 바로 이와 같은 원리로 살아야 될 것으로 교훈삼으면 됩니다.
2절에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라고 했는데
사도 베드로는 세번 주님을 부인하고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는 질문뒤에 ‘내 양을 치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 된 것은 ‘하나님의 양’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시23편),
그리스도(2:25)는 친히 성도의목자시며 또한 그 소유자시다.(요21:15)
장로는 하나님의 양을 맡은 자에 지나지 않는 다는 (3절) 사실을 말씀한다.
사도 바울도 행 20:28에서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목회에 관한 세가지 주의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부득이 함으로 하는 선는 값어치가 떨어집니다.
그러나 자원함으로 하되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즐거운 뜻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우러나오는 즐거움이란 하나님의 소명감을 확신한데서만 있을 수 있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세째로,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는 것입니다.
주장하는 자세는 전체적으로 주권행사를 하는 것으로 강압적 태도를 취하지 말고 실천 생활에 있어 모본을 보여 그리스도인으로서 교우들로 하여금 마음으로 신뢰하고 순종하도록 하라는 의미입니다.
4절에 보면,‘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권면의 결론적인 부분으로서 그리스도인에게 보장되는 상급에 대해 확신시켜 주고 있습니다.
이 상급은 시들지 아니하는 상급입니다.
계 4:4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계 4:10-11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11」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요10:10)
그러므로 예수께서 수고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귀한 상급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교회의 장로님들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귀한 본을 보여 주시고 계심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목사님이나 장로님들께서는 성도들의 본이 되는 삶을 사시고 우리들에게 귀한 신앙의 힘과 용기를 부어 주십니다.
신앙의 연장자로서 교회의 장로로서의 손색이 없는 삶을 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귀한 면류관을 잊지 않으실줄 믿습니다.
그리고 가정에 있어서 구역에 있어서 신앙의 연장자되신 분들도 귀한 삶을 사시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귀한 면류관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신앙의 본된 삶을 사실 줄 확신합니다.
다음에 사도 베드로는 젊은 사람들에 대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젊은이들로 인해서 소망을 품기도 하지만 때로는 골치거리가 되어 걱정하게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녀들을 맡겨주시고 믿음으로 잘 양육하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젊은이들은 나이드신 분들의 경륜과 경험을 무시할 때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사고가 낡고 구시대적인 것이라고 꼬집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오늘 말씀속에서 사도 베드로의 권면을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장로들에게 순복하고’했습니다. 젊은 층에 대한 권면은 ‘순종’입니다.
순종은 부모에 대한 자녀(엡6:1)의 순종,
상전께 대한 종의 순종(2:18,엡6:5),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3:1,엡5:22),
집권자에 대한 백성의 순종(2:14,롬13:5)등 하나의 미덕으로 권면되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의 통일 왕국이 솔로몬 왕의 영화의 시대가 가고 이제 솔로몬의 아들 르로보암의 시대가 되었을때 백성들은 노역을 감해 줄 것을 새왕에게 요청을 했습니다.
그때 나라의 장로들은 노역을 감해주면 백성들이 솔로몬 왕을 받든 것처럼 르호보암 왕도 받들 것이라는 조언을 했습니다.
그때 로호보암은 부왕의 장로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자기 또래의 젊은이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백성에게 말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너희를 채찍으로 다스렸으나 나는 전갈로 징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의 마음이 왕을 떠나 결굴 베냐민 지파와 유다지파만이 남 유다왕국을 이루고 북쪽 열 지파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이루어 나라가 분열되는 비극이 도래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르호보암의 어리석음을 봅니다.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충고나 조언을 받아들여 순종해야 합니다.
둘째로,겸손의 허리띠를 동이는 것입니다.
약 4:6에도 인용이 되어 있는데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고 했습니다.
물은 낮은 곳에 고이고 흐릅니다.
교만의 봉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유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에게 겸손이 요구된다고 베드로는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높인다는 것입니다.
이말은 젊은이들이 신앙의 연장자의 말을 장 청종하여 잘 배우면 나중에 연장자가 되었을때 젊은이를 가르치고 인도할 수 있는 존경의 높은 자리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또 한가지 어려운 점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불안하여 정신적인 치료를 받아야 할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요즈음의 아이들은 온상에서 자란 아이처럼 연약한 모습으로 성장하여 혼자 씩씩하게 자신의 앞날을 창조해 나가지 못하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것이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나타나고 그 불안한 모습을 감추려고 무척이나 세상적인 것으로 채워 보려고 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 갖는 미래에 대한 불안등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등등의 말씀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제 신앙의 연장자로서 세가지 주의 할 것과 젊은이들에 대한 권면을 하였습니다.
젊은이를 옆에 두신 분들은 바로 올바른 인생관을 심어주시 위해서 신앙적 상담을 통하여 젊은이들을 권면하여 그들이 불안하거나 걱정하지 않도록 믿음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무엇보다고 어른들의 큰 책임임을 기억하시고 그들의 사랑과 믿음으로 소망으로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15.제목:젊은이에 대한 권면
본문:벧전 5:4-7
벧전 5:5-11 “젊은 자들아 이와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6」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7」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9」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10」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11」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사도 베드로는 젊은 사람들에 대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젊은이들로 인해서 소망을 품기도 하지만 때로는 골치거리가 되어 걱정하게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녀들을 맡겨주시고 믿음으로 잘 양육하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젊은이들은 나이드신 분들의 경륜과 경험을 무시할 때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사고가 낡고 구시대적인 것이라고 꼬집고 반항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오늘 말씀속에서 사도 베드로의 권면을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장로들에게 순복하고’했습니다.
젊은 층에 대한 권면은 ‘순종’입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해주고 자신의 약점을 보완해주는 사람의 조언이나 충고를 들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순종할 분에 대해 알려 주고 있는데
① 순종은 부모에 대한 자녀(엡6:1)의 순종,
②상전께 대한 종의 순종(2:18,엡6:5),
②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3:1,엡5:22),
③ 집권자에 대한 백성의 순종(2:14,롬13:5)등 하나의 미덕으로 권면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만한 예화가 있는데,
다윗의 통일 왕국이 솔로몬 왕의 영화의 시대가 가고 이제 솔로몬의 아들, 르로보암의 시대가 되었을때 백성들은 노역을 감해 줄 것을 새왕에게 요청을 했습니다.
그때 나라의 장로들은 노역을 감해주면 백성들이 솔로몬 왕을 받든 것처럼 르호보암 왕도 받들 것이라는 조언을 했습니다.
그때 로호보암은 부왕의 장로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자기 또래의 젊은이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백성에게 말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너희를 채찍으로 다스렸으나 나는 전갈로 징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잘 못하면 아버지 왕은 채찍이라는 매를 들었지만 나 르호보암 왕은 전갈로 징치하겠다.
다시 말하자면 잘 못하면 전갈의 독이 몸에 퍼져 죽게 되는 것처럼 죽음으로 다스리겠다는 말입니다.
즉, 강경한 정치를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의 마음이 왕을 떠나 왕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베냐민 지파와 유다지파만이 남 유다 왕국을 이루고 북쪽 열 지파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이루어 나라가 분열되는 비극이 도래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르호보암의 어리석음을 봅니다.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충고나 조언을 받아들여 순종해야 합니다.
만약에 르호보암이 장로들의 조언을 받아들였다면 그가 나라를 두개로 쪼개지는 비극을 초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은 어른들의 조언이나 가르침을 콧웃음을 치지 말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의 경험과 경륜이 많으신 분의 조언으로 말미암아 잘 못을 저지르는 시행착오를 겪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로,겸손의 허리띠를 동이는 것입니다.
겸손의 허리띠를 띠는 것은 그때 당시의 사람들은 통옷을 입고 다녔는데 허리띠를 띠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을 뿐더러 불편합니다.
이말은 남을 나보다 높게 여기고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약 4:6에도 인용이 되어 있는데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더욱 더 큰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물은 낮은 곳에 흐르고 물이 고입니다.
교만의 봉우리는 단비를 포용하지 못하고 흘려 보냅니다.
사람이 교만의 봉우리를 내세울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는 커녕 유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에게 겸손이 요구된다고 베드로는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애굽의 내 백성을 구하라는 말씀에 저는 말도 잘 못하고 능력이 없다고 했습니다.
40년전에 모세는 자신의 힘으로 애굽의 동족을 구해 볼려고 했지만 이제 ‘하나님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겸손한 모세를 위대한 지도자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겸손한 마음을 갖게 될때 높여지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벼 이삭이 고개를 숙일때가 언제 입니까?
볃알이 가득찰때가 아닙니까?
사랑하는 형제들도 이제 겸손하고 남을 존중하는 겸손한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때가 되면 하나님이 높인다는 것입니다.
이말은 젊은이들이 어른들의 조언이나 인생의 겨험을 들어 교훈삼으면 또, 신앙의 연장자의 말을 장 청종하여 잘 배우면 나중에 연장자가 되었을때 젊은이를 가르치고 인도할 수 있는 존경의 높은 자리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또 한가지 어려운 점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불안하여 정신적인 치료를 받아야 할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요즈음의 아이들은 온상에서 자란 아이처럼 연약한 모습으로 성장하여 혼자 씩씩하게 자신의 앞날을 창조해 나가지 못하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것이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나타나고 그 불안한 모습을 감추려고 무척이나 세상적인 것으로 채워 보려고 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 갖는 미래에 대한 불안등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등등의 말씀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8절에 보니까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자를 두루 찾는 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마귀의 올무에서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① 9절에서 처럼 ‘대적하라’는 것입니다.
② 10절에서 처럼 잠간 고난을 받는 여러분을 온전케 한다고 했습니 다.
③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어른들의 조언을 늘 받아들여 겸손히 교훈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귀를 대적하고 믿음을 굳게하여 영원한 영광의자리에 들어가기에 부족함이 없는 형제들 되시기 바랍니다.
16.제목:마귀를 대적하는 성도
본문: 벧전 5:8-14
세상에 살다보면 정말 어려운 일을 겪을 때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그렇게 되어 질수가 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고 분별을 해보면 거기에는 어떤 원인이 있게 됨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마귀의 시험과 유혹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에게 어려움이 다가오고 시험이 들어서 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포기하게 되는 것도 바로 영적인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속에 늘 살수가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이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삶의 진리를 밝히 보여 줍니다.
먼저,이 세상에서 마귀를 대적하고 승리하는 길은 바로 성도 자신이 근신하고 깨어 있는 삶의 태도인 것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는 말씀속에 우리는 7절의 말씀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염려를 다 주께 맡기는 것도 무척이나 중요하지만,
염려 근심을 다 주께 맡긴다고 해서 바로 안심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성도 자신이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베드로 사도는 곧이어 근신하고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근신한다는 것은 마음에 관한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과 욕망과 염려에 대해 자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눈을 뜨고 경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오는 여러가지 마귀의 위협을 항상 근신하고 깨어 있으면 승리하게 됩니다.
마귀는 타락한 천사로서 영적인 존재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귀는 끊임없이 인간의 멸망을 위해서 유혹을 합니다.
우리는 에덴의 유혹을 압니다.
거기서 사탄은 뱀을 통해서 하와를 시험합니다.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분명하게 ‘동산 가운데 있는 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을 먹으면 진짜로 죽는다!’ 하고 외쳤다면,
그래서 ‘나는 결코 먹을 수 없어!’ 하고 뱀의 유혹을 물리쳤다면,
인류의 운명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첫 사람 아담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죽음이 오게 된 것입니다.
또, 마귀는 욥에게 갖가지 고난을 안겨다 줍니다.
욥기를 읽어보면,사단이 세상을 두루 다니다가 왔습니다.
사단은 이와같이 삼킬자를 찾는 것입니다.
마귀라는 말이 디아볼로스인데 이는 고소자,중상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단이 욥을 고소해서 욥에게 마귀의 시험이 옵니다.
그래서 욥은 재산을 하루 아침에 몽땅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10 자녀도 잃습니다.
설상 가상으로 자신은 욕창이 나서 고름이 나고 구더기가 생기는 지독한 병에 걸렸습니다.
아내는 위로는 커녕 ‘당신이 믿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리라!’고 하면서 떠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찌 이런 일이 당신에게 일어 날수 있단 말인가 하는 것이죠.
그래도 하나님을 그가 저버리지 않았을때 하나님은 갑절의 축복을 안겨다 줍니다.
결국 마귀의 시험에 이겼습니다.
또 마귀는 예수님 조차도 시험을 합니다.
그래서 마4:4절 이하에서도 돌이 떡이 되게 하라고, 성전 꼭대기서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온 천하 만국을 보이면서 내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그때 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런 예를 생각하면서 늘 근신하고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10절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귀의 궁극적인 목적은 처음에 사람들의 건강이나 믿음등을 뺏아갑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가라지를 뿌려서 알곡이 되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길과 같은 밭에 떨어진 씨를 먹는 새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의심을 주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사단은 우리의 건강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나 사람들간의 사랑을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결국은 영적으로 죽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결국 지옥에 같이 데리고 가는 것이 마귀의 목적입니다.
이런 마귀의 위협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는 길은
둘째로,믿음을 굳게하는 것입니다.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우리가 어찌 세상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태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면 던져지는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만일 겨자씨와 같은 믿음이 우리속에 있다면 우리의 앞에 펼쳐질 역사는 대단한 것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집니다.
세상 가운데서 사시면서 세상을 이기고 사시고 싶으십니까?
믿음을 소유하십시요.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길로 나를 인도해 주시리라는 소망을 갖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참고 인내하는 자세도 매우 중요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연단하고 연단은 우리를 훌륭한 신앙의 인격의 소유자로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결국은 선을 이루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여러 방편으로 우릴 시험하는 마귀의 궤계를 잘 알아 물리쳐야 할 줄 믿습니다.
변화산상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을때에 산 아래에서는 제자들이 한 귀신들린 소년을 고치려 애를 썼지만 되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산하셔서 고쳐 주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십시요’
그때 예수님은 말씀 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자들에겐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막9:23) 믿음을 갖고 전진하고 마귀를 대적하시길 바랍니다.
이러한 고난은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동일하게 겪는 일이므로 ,또 마귀를 대적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으므로 대적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마귀가 와서 참소하거나 고소하거나 중상할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사도 베드로 선생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시는 하나님을 소개해 주고 계십니다.
첫째로,은혜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는 카리스란 말로 값없이 주었다는 것입니다.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값없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그리스도안에서 우릴 불러주시고 구원해주신 분입니다.
죄악가운데서 살면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고 자기 뜻대로 살던 우리들이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불러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셨습니다.
셋째로,영원한 영광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이십니다.(영생을 주심) ]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 가운데 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제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엡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넷째로,온전,굳게,강하게,터를 견고하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흩으러저 있던 삶의 모양과 형태들을 이제 아름답게 정리해주시고 바르게 해주십니다.
또 아무리 큰 풍파가 와도 무너지지 않는 신앙의 사람으로 굳게 해주십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 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는 세세 무궁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실루아노 같은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겠습니다.
실루아노는 실라와 동일 인물인데 바울이 실라와 함께 감옥에도 들어간 것을 아실 것입니다.
아마 바울과 실라 그리고 베드로와 마가 등은 서로 좋은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또 실라와 마가등은 바울과 베드로 사이의 훌륭한 연락을 해주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실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성실로 다져진 사람이 되어야 겠습니다.
교회에서나 집에서나 사회,직장에서 언제 어디서나 꼭 필요한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런 삶의 모습이 믿음이 연약한 사람에게나 불신자에게나 가족에게나 덕이 됩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하나님의 기쁘게 하는 모습이요 마귀가 고소할 기회를 주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세상 가운데 사시면서 마귀를 대적하여 승리하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근신하고 깨어 있으며,믿음을 굳게하여 고난을 참고 인내하여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은혜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죄 용서 해주신 하나님께서 고난을 잠깐 겪은 후에 우리를 온전케 해주시고 굳게 해주시고,강하게 해 주시고,견고케 해주시는 하나님을 늘 바라보시면서 신실한 성도로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17.제목 :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본문 : 벧전 3:8-17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들을 손꼽으라 하면 여러가지 단어들을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
사랑, 복, 평안, 명예 등등 우리는 흔히 듣기 좋아하는 몇몇단어들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중 특히 모든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을 저에게 하나만 뽑으라 한다면 아마 성공이라는 단어를 꼽을 것이며 이에 대해 이견이 있는 분은 아마도 거의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성공」이라는 단어는 언제, 어디서, 또한 누구에게 들어도 항상 기분 좋은 말입니다.
또한 우리모두 그 성공을 위하여 항상 그 많은 땀과 수고를 기울여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살고있는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세운 목표를 가지고 그 목표를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해 갑니다.
또한 그 목표가 성공하는 그 시간까지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또한 열심히 실행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역시 나름대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여러 모범적인 삶의 목표를 가지고 성공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얼마나 성공된 삶을 살았는가 하는 평가는 그 보는 관점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혹 어떤이들은 그정도면 성공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말하는가 하면 다른이들은 그 정도를 어디 성고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그 성공의 정도는 엄청나게 차이가나는 평가의 차이를 나타내게 마련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하여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특히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대단한 성공으로 비쳐질 수 있는 일이 하나님 앞에서는 완전한 실패로 평가되기도 하며,
또한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완전히 실패한 것으로 보여질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보면 100%성공으로 인정해주시는 그런일이 또한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삶이 바로 그런 삶이 아니었습니까?
갈보리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그 처참한 죽음을 당하신 그 예수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의 평가는 바로 완전한 실패자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완전한 실패의 죽음을 통하셔서 당신의 구원계획을 100% 이루셨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그 죽음을 완전한 성공으로 돌려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타인의 혹은 자신의 삶의 성공도를 평가한다는 것은 메우 힘든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평가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쉬운 평가방법중의 하나입니다.
목회자들의 목회생활이 성공적인가 실패한 것인가하는 것은 다음의 한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면 알 수있다고들 합니다.
「내 자녀는 과연 나의 삶을 보고 나도 아버지와 똑같은 목회의 길을 가겠다고 생각하는가?」,
또한 「내 부인은 나의 설교를 들으면서 진정 눈물을흘리며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아멘을 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즉 내 자녀가 나를 본받을 가치가 없는 목회자로 본다면 또한 내 부인이 설교를 들으며 당신이나 먼저그렇게 하슈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게 한다면 나는 결단코 성공한 목회자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수천 수만의 교우들을 교인으로 가지고 목회를 한다고 해서 성공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내 자녀가 나는 반드시 아버지를 본받는 목사가 되겠어 하고 결단할 수 있는 삶을,
내 부인이 내 설교를 들으면서 그렇지요,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나의 목회 생활은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의 삶역시 똑같은 평가 방법에의 해서 그 성공의 정도를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나의 자녀가 가장 존경하고 본받고 싶은 사람들의 서열 속에 내가 앞자리에 서지 못한다면 이미 나의 삶의 많은 부분은 실패로 돌아갔다고 보아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교우들이 가장 본받고 싶은 신앙인의 서열 속에 내가 앞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그 이름조차 기억되지 못한다면 바로 나의 믿음생활이 성공적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모진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모든 물과 피를 다 쏟으며 죽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삶을 성공된 삶으로 담대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분은 삶의 모범을 보이셨고 당신의 말씀에 항상 실천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오늘날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그분의 사랑과 은혜와 그 삶을 본받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그것 자체가 이미 그분의 성공적인 삶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무엇으로 성공된 삶을 사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까요?
그것은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것을 옳게 구분하고 올바로 실천함으로 내 자녀들에게 우리교회 아니 모든 교우들에게 본받고 싶은 분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것을 구분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악으로 악을, 욕으로 욕을 갚지 말 것이며 오히려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줄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근본적인 성품은 평안하거나 일이 잘 되어져 나아갈 때에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일이 잘 안되고 어려움이 닥치고 나에게 악하게 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나를 비방하고 욕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비로서 나의 속에 숨어있던 근본적인 성품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진가는 어려움에 닥쳤을 때 나타나게 된다고들 합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악하게 대해주는 사람에게 같이 악하게 대해주고, 나를 욕하는 사람을 향해 같이 욕하는 일은 보통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나게 되는 성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사람들과는 다른 가치와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욕하고 침뱉고, 저주하는 그 사람들을 향하여 용서를 베푸시고 복을 빌어주셨던것 처럼
▶우리도 우리를 욕하고 악하게 대하는 그들을 향해 악으로, 욕으로 갚지말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복을 빌어 줌으로 말미암아 당사자에게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회개의 기회를 제공해주자라는 것입니다.
▶주위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을 보여주고 그들로 하여금 본받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게 함으로 말미암아 참된 성공자 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셨드시
우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복을 빌어주면 그로인해 만은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혹 그들중 몇명이 복음 받을 처지가 되지 못한다면 내가 빌어준 그 복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내개 갚아주리라 약속하신 믿음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자신의 목자들과 조카 롯의 목자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고는 롯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원하는 곳을 택하라 나는 그 반대편으로 가리라.
비옥한 소돔과 고모라지역을 택한 롯을 뒤로하고 아브라함은 척박한 광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롯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으며, 또한 비옥한 땅을 선택하여 삼촌인 자신을 광야로 가게만든 그 처사에 대하여 서운한마음도 갖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기 위해 가고있는 천사들을 향해 자신의 것을 극진히 대접하여 롯의 안전을 간구하는 오히려 복을 빌어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로인해 아브라함은 영원한 믿음의 조상이되었고 엄청난 부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로 백사장의 모래알과 같은 크고 위대한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그 가계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다윗 역시 자신을 끝없이 죽이려하는 장인 사울을 향해 끝없은 용서와 충성을 이어나가며 오히려 복을 빌어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한없이 쫒기고 수많은 죽음의 위협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자신을 죽이려 대드는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절대절명의 기회역시 여러번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끝까지 신하의 도리를 지키고 위해 복빌어 주었습니다.
사울왕의 비참한 죽음을 옷을 찢고 눈물로써 슬퍼하고 그 손자 므비보셋을 거두어 정성을 다해 살핀 모습을 찾아보게 됩니다.
이로인해 다윗은 아직까지도 이스라엘 백성의 정신속에 살아있는 영원한 왕으로 간직되어 있습니다.
또한 스데반 역시 자신에게 돌을 던져 죽이고 있는 그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복을 빌어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러므로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우리는 그들을 믿음의 성공자로 인정하고 그 삶의 모습을 본받으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습니까?
두번째로 악한 말과 입술의 궤휼을 금하고 선을 행하며 화명의 말만을 전할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말입니다.
「우리속담에도 발없는 말이 천리간다」라든가 「우리 몸에서 가장 무거운 부분이 세치 혀」라는 말도 있고 「말 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이란 우리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한번 내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잠언18장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말씀하시며,
또한 야고보서1장26절에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는 말에 따라서 우리는 많은 덕을 세울 수 있는가 하면 또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돌이킬 수 없는 갈등과 반목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듭니다.
우리는 과연 어떠한 말들을 하고 있습니까?
덕을 세우는 말들을 많이 합니까? 혹 상처를 주는 말들을 많이 합니까?
애석하게도 덕을세우고 남에게 기쁨을 주는 말 보다는 속이는 말, 거짓된 말, 상스러운 말, 남을 비판하는 말, 깎아내리는 말이 아름다운 말보다 더욱 많음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의 주위를 돌아보아도 한마디 말의 실수로 인하여 서로 갈등하고 반목하고 원수처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먼저 내가 잘못했어 하는 한마디를 하지 못해 아직까지도 서먹서먹하고 불편한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나 우리의 한마디 말이 듣는이의 마음을 찌르는 비수로 둔갑하곤 합니까?
시편 140편3절에 있는대로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여 그 입술 아 래는 독사의 독을 얼마나 내뿜으며 살고 있습니까?
그들의 혀는 죽이는 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중심에는 해를 도모하는도다고 예레미야9장8절은 말해주고 있으며,
야고보서3장8절에는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오늘 우리의 혀와 입술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나의 입술로 나의 혀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상하게하고 그들의 심령을 죽이는 일을 아무 거리낌없이 행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이제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의 입술과 혀를 재갈먹여 항상 평화를 심고 영혼을 살리며 덕을 세우는 말을 하도록 노력하여야만 합니다.
시편 120편2절을 보면 성전으로 올라가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궤사한 혀에서 내 생명을 건지소서」하고 찬양하고 있으며, 오늘 본문 10절말씀에서도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라고 우리를 권면합니다.
부드러운 말은 뼈를 꺾습니다.(잠15:4)
온량한 혀는 생명나무입니다.(잠25:15)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지만 거짓 된 혀는 눈 깜짝일 동안만 있을 뿐입니다.(잠12:19)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시139 :4)
그러므로 항상 의를세우고 덕을세우는 말, 칭찬하느 말, 화평을 이루는 말, 진실되고 부드러운 말만을 하도록 노력합시다.
셋째로 악한 생각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믿음의 삶이 되기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악한길 편한길을 가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올바른길 선한 길을 가기는 매우 힘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좁은길로 들어가라 생명에 이르는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사람이 적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일의 대부분이 선함 보다는 악한일과 악한 생각에 더 앞장서고 의롭고 선하게 살려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바보취급하고 이용하여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한일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연한 일을 하면 오히려 선한일을 했다고 시끄럽게 떠들어 대고 오히려 악한일은 아무렇지도 않게생각하던 시대입니다.
어디서 살인 사건이 나기만 하면 머릿기사에 싯던 신문들이 이제는 오히려 왠만한 살인 사건들은 기사의 가치도 잃어버린 채 한구석 서너줄 채우기도 아까와 하고 오히려 지극히 당연한 일 아무개가 길거리에서 돈 얼마를 줏어 주인을 찾아주었다는, 아무개가 도망가는 뺑소니차를 따라가 붙잡았다는등의 기사들이 오히려 대서특필되고 마치 사회의 영웅인양 미화되어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는 신문지상이나 T.V뉴스시간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준법투쟁이라는 단어가 왠지 저의 마음을 허전하게 만들곤 합니다.
지금까지 불법이 당연한 것이었고 오히려 준법행동을 하는 것이 투쟁이 되어버리고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속에서 진정 우리가 성공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로 삼고 본받기로 결단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스스로를 거룩하게 가꾸는 성도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제 악한 생각과 생활에서 벗어나서 선한일을 행하는 성도들이 되도록 노력합니다. 그길은 오히려 악한세상에 휩쓸려 사는 것 보다 힘들고, 무시당하고, 핍박받는 생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참 소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힘입어 사는 우리들은 그 소망을 힘입어 이 땅에 그리스도의 시절을 꽃피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결 론
마지막으로 이 모든 역사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이루어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공된 삶을 살아가려는 목적 역시 어떤 복을 받아 누리겠다는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혹 우리가 악으로 악을 욕으로 욕을갚지 않고 오히려 복을 빌어 줄 때, 악한 입술을 제어하고 선하고 덕스러운말만이 우리의 삶을 온통 장식할 때,
악한 생각에서 떠나 항상 선한일을 도모할 때 누군가 그 이유에대해서 묻는다면 그 때 「나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영원하 소망을 주신 하나님과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해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욕하고 비방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참된 성공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지금 이시간 나에게 참 소망을 주신 분은 누구입니까? 또 나를 참된 성공의 삶으로 이끌어 주고 계신 분은 누구십니까?
나를 해하려는 자들을 위해 복을 비는 성공자가 됩시다.
덕을 세우고 화평을 심는 말로 우리의 삶을 채워가는 성공자가 됩시다. 악한 생각을 떠나 항상 선을 도모하는 성공자가 됩시다.
그리고 누군가 그 이유를 물어 보면 내게 참 생명과 참소망을 주신 예수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성공자가 됩시다.
내 자녀에게 너는 누구를 가장 존경하며 어떤사람이 될테냐고 물어 볼 때 그들의 입에서 나는 평생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성공된 삶을 살아가신 아버지,어머니를 존경하고 또 아버지, 어머니와 같은 사람이 될래요. 하는 고백을 받을 수 있는 참된 성공자가 됩시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나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하려 하심이라.
18. 고난을 극복하는 삶
하늘에서 내린 같은 빗물이라도 길가 웅덩이에 고여 있으면 무익한 오물이 됩니다.
그러나 험산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은 유익한 청수가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편안한 곳에 안주하면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남지만, 고난이라고 하는 용광로 속을 지나가면 참된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인물들은 대부분 고난을 겪지 않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예컨데 유방을 도와 막강한 항우를 무너뜨리고 한나라를 건국하는데 오른팔 역할을 한 한신은 한 때 표모에게 밥을 빌어 먹었습니다.
저 유명한 천로 역정의 저자 존 번연도 눈물겨운 고난을 통과하였습니다.
성경에서도 고난의 대명사인 욥을 필두로하여 아브라함,모세,야곱,다윗,다니엘,바울등 모두가 한결같이 고난의 눈물골짜기를 통과하였던 사람들입니다.
앞서 간 하나님의 사람들 뿐만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성도는 세상에서 많은 환난과 핍박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고난을 극복해야만 하겠습니까?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고난 중에 성도가 취해야 할 기본적인 자세에 대해서 권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을 중심으로 “성도의 곤난 극복”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담대해야 합니다.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키게로(Cicero)는 말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첫째도,둘째도,세째도 모두가 담대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고난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마음을 담대하게 가지는 것 만큼 처방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마음이 허약하고 흔들리면 아무 일도 이룩할 수 없으며,
고난은 더욱더 극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가나안 정복의 대권을 주시면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기를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게 하라”고(수1:6)니다.
여호수아 또한, 출정을 앞둔 그의 군대장들에게 “두려워 말로 놀라지 말며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할”고 말하였습니다. (수10:25)
본문 사도 베드로는 “저희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라”고 말하였습니다. (14절)
이는 곧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고난을 당할 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여야 합니다.
기독교의 첫 순교자인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었던 것고, ,,,
폴리갑이나 영국의 종교 개혁자 존 후스가 화형을 당하면서 약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이 기쁜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다 마음이 담대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담대한 자들을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하늘의 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마음을 담대하게하여 고난을 극복하여 하늘의 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2.그리스도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과거 우리 선민들과 애국 지사들은 오직 조국의 광복만을 바라보며,
그 숱한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였습니다.
이처럼 오늘의 성도들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의를 위한 고난을 극복하여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 최고의 주인으로 모셔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나약한 인간이기에 위기에 처하게 되면 두려움으로 인하여 포기의 유혹을 받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고난이 있을지라도 소망을 잃치말고 우리가 구원을 얻었기에 예수를 바라보라고
(롬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고난이 찾아왔습니까?
우리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면서 굳게 바라보고 찹읍시다.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럼으로 성도는 고난을 당할 때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그 고난을 극복하여야 하겠습니다.
3.선한 양심을 유지해야 합니다.
중국 전국 시대의 사상가인 장자는 말하기를
“나에게 착하게 하는 자에게 착하게 대하고, 나에게 악하게 하는 자에게도 또한 착하게 대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1:18)“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딤전2:10)
오늘 본문속에서도 사도 베드로는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하였습니다.(1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