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 명 기 6 :20- 2 5, 로 마 서 8 : 1- 11
오늘은 광복 기념주일입니다. 광복절은 국경일이지만 그 뜻을 생각할 때
오히려 교회가 그 절기를 의미 있게 기념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모든 역사는 하느님이 주관하시지만 특별히 해방의 절기인 광복절은 하
느님의 역사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광복절의 의미를 바로만 파악한다면 하느님께서 이 민족을 향하여 품으신
뜻이 무엇이며, 이 민족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역사의 의미를 찾으며 그 뜻을 밝히는 작업을 계
속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므로 이 역사 속에 하느님께서 어떻게 일하
고 계시며 우리가 어떻게 동참할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역사의 의미를 알지 못할 때 그 민족은 방향을 바로 잡지 못하며 비전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비전이 없는 민족은 결국 망하기 마련입니다. 교회는
역사의 의미를 찾아내므로 이 민족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하며 비전을 갖게
하여 이 민족을 살리며, 하느님의 역사에 공헌하게 하여야 하여야 할 것입니
다. 오늘 우리는 광복 주년을 맞이하면서 이스라엘 출애급 역사에 비추어
광복의 의미를 밝혀 이 민족을 향한 뜻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하느님이 이룩하신 역사
첫째로, 우리가 출애급의 역사에서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이 직접 이룩하
신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독립 운동을 통하여 얻은 해방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친히 바로의 세력을 꺾고 그 백성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
으로 나가게 하셨습니다. 오늘 신명기 본문에도 주께서 강한 손으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민족이 홍해에 가로 막혀 궁
지에 몰렸을 때 모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가만히 서서 주께서 오늘 너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
지 지켜보기만 하여라. 너희가 오늘 보는 이 이집트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주께서 너희를 구하여 주시려고 싸우실 것이니, 너희는 진정하여라. 출
< 2 >
14:13-14
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이 말은 반복되어 나옵니다. 이것은 출애급 역사
만이 아니라 모든 역사는 우연이나 숙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느님
이 이룩해 가신다는 이스라엘 역사가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나라 8·15 해방도 이런 점에서 출애급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이 친히 이룩하신 역사라는 말입니다. 독립 운동을 한 사람은
많이 있었지만 우리에게 온 해방은 그 분들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아
닙니다. 8·15 광복은 전혀 예기치 못하였던 하늘의 선물입니다. 누구 하나
예측도 못했던 바요, 그렇게 간악한 일제가 그렇게 쉽게 손들고 물러가리라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은 이 해방은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말하면서 아무
도 모른 것은 아무도 꾸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꾸미지 않고 온 것
은 하늘의 선물이다. 이것은 하늘에서 직접 민중에게 준 해방이다. 아무도
여기 공로를 주장할 중간적인 자가 없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계속
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을까? 그 까닭의 하나
는 진정한 민중의 해방이 되기 위하여서다. 그담 또 하나는 민중의 마음이
하느님께로 향하기 위하여서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온 해방은 하느님의
선물이요, 그것은 우리로 하느님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한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민족이 이런 역사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 알았
다면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이스라엘 민족처럼 하느님의 하시는 일로 보지 못하고 단
순히 운명 혹은 숙명으로 돌려온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역사의식
이 없다는 말입니다. 역사의식이란 하느님을 역사의 주권자로 인식하면서 그
가 정하신 목표를 향하여 이 역사를 이끌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역사의식
이 없는 민족은 도덕 의식도 약할 뿐 아니라 역사에 대한 책임 의식이 없으
며, 또한 역사의 미래에 대한 비전도 없게 마련입니다. 역사를 신앙의 눈으
로 볼 때 거기에 우리가 취하여야 할 도덕적인 교훈과 역사의 방향이 제시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방을 맞은 지도 이미 57년이나 되었고, 그 간에 우리는 전
쟁과 여러 차례의 혁명을 거듭하면서 고난의 여정을 걸어왔습니다. 그 모든
역사의 교훈은 우리로 이 역사를 새롭게 보도록 촉구하는 역사의식을 일깨
워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돌이켜 해방의 의미를 되새겨 거기에 나타나신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을 깨달아 안다면 앞으로 새로운 역사를 이룩해 갈 수
있는 민족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역사
둘째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해방하신 일이나 우리
민족을 일제의 압제 밑에서 해방하셨다고 믿는 것은, 하느님 자신이 억압과
착취를 불의로 여기시고 해방과 자유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습니
다. 이것은 곧 하느님께서 이루실 역사의 방향이 바로 해방과 자유가 있는
하느님의 나라임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해방을 단순하게 일제의 압제 밑에서 자유함을 얻은 정치적 사건
혹은 민족적 사건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차원에서만 본다면 해방
후의 우리 역사는 진정한 해방의 역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일제의 압제에
서는 해방되었으나 미국과 소련이란 강대국에 의해 분단되어 오늘까지 대립
하고 있어서 우리는 아직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맛보지 못하였습니다. 강대
국에 의한 주권 간섭과 영향뿐만 아니라 남북 정권을 이룬 독재자들의 억압
적 통치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아직도 정치적으
로 해방과 자유를 가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역사적 상황임에도 여전히 8·15 해방의 역사적 중요성은 조금도
감소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하느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해방
후 우리의 역사적 현실이 어떻게 진행되었느냐와 상관없이 해방은 우리에게
중요한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과 자유를 중요한 역사의 과제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민족으로 일제의 35년간의 억압과 거기서 해방된 경험을 갖게 하심으로 모
든 억압이 불의라는 것과 자유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하느님의 강력한 교훈을 제대로 알아듣기도 전에 강
대국의 힘에 밀려 민족이 분단되었고, 한 차례 큰 전쟁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자유의 소중함을 깨우쳤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유는 군사정권의 독재정
치에 의해 억압되었고, 30여 년의 민주화 투쟁을 통하여 자유의 중요성을 조
금씩 배우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1992년 문민 정부 이후 조금씩 정치적 자유
를 확보하여 왔으나 다른 한 편 부정과 부패의 연결고리에 의해 크게 잠식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김대중 정권에 이르러서는 남북 정상의 만남
과 더불어 남북교류의 물꼬가 터지면서 조금씩 이념과 증오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정권 역시 부패의 연결고리에 얽혀 그
빛이 바래기 시작하였고, 또 다시 증오와 이념의 포로로 돌아갈 위기에 처하
여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8·15 해방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
습니다. 이 해방은 단순하게 정치적 해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억
압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해방에는 과거 역사적으
로 있어왔던 모든 해방의 의미가 함축되어야 합니다. 구약의 부정의와 억압
으로부터의 해방, 신약의 악한 세대를 독점하고 있는 악마적 권세로부터의
해방, 초기 기독교의 무지와 죽을 운명에서의 해방, 종교개혁자들의 교권에
서의 해방,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 실존철학자들의 불안과 고독과 인간소외
의 극복, 그리고 잘못된 물질문명과 과학기술이 가져오는 비인간화에서 해방
되는 것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로마서에 기록된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8·15 해방은 정치적 해방이었지만, 거기에는 우리를 죄와 죽음
에서 해방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그대로 함축되어 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역사에서 출애급을 대단히 중요한 역사
의 기점(起點)으로 생각하며 그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거기에 이스라
엘과 온 인류와 만물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이 새겨져 있기 때문
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8·15 해방이라는 귀중한 역사적 사건을 길이 기
억하고 기념하여야 할 것은, 거기에 우리를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케 하시
려는 하느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뜻을 새기며 항
상 억압하는 모든 세력과 맞서 싸워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죄와 죽음에서
자유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오는 모든 억압과 착취를
거부하고 진정한 자유를 확보해 가야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정권이 부정과 부패에 연루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지향하
는 해방과 자유의 역사를 되돌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3김 시대가 지나가고
있지만, 그간의 역사의 흐름은 그들이 주도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따라 깨어있는 민중들이 투쟁하면서 이룬 것입니다. 지나간
정권들이 독재와 부정을 함께 저지르면서 그 시대를 지배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해방과 자유를 향한 역사의 물길을 막지 못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오
늘 부정과 부패가 또한 이 역사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수구
적인 언론들과 정치인들이 득세하여도 하느님이 정하신 이 자유를 향한 역
사의 흐름을 막지는 못할 것입니다. 죄와 죽음에서 자유함을 받은 깨어있는
민중들이 있는 한 역사는 되돌아가지 않고 반드시 하느님이 정하신 목표를
향하여 발전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
끝으로,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급시
킨 목적이 그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삼아 사명을 주시고자 함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그 백성을 시내산으로 이끌어내어 그들과 계약을 맺으
시고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으로 만드신 이유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선교적 사명이란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선포하
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을 애급의 노예 생활에서 자유케 하신 하느님을 만민
에게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과 계획을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정의와
평등, 사랑과 자유를 그들이 실현하면서 공의와 사랑의 하느님을 만민에게
선포할 책임을 맡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때로 이런 선교적인 사명을 망각한 채 선민 의식에 사
로 잡혀 하느님의 뜻을 바로 전하지 못한 때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 민족은
성경이란 놀라운 하느님의 계시를 기록하여 우리에게 남겨주므로 그 사명을
다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민족은 메시아인 예수를 탄생시키므로 하느님
의 구원의 계획을 성취시켰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선물로 해방을 주신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뜻이 있습니다. 이 해방에는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이 있다는 신앙을 우리가 지나쳐서
는 안 되겠습니다. 출애급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그 백성으로 삼으신 것처럼,
하느님은 8·15 광복을 통해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선교적 사명
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바로 이스라엘이 감당했던 놀라운 사명들을
우리에게 위탁하시고 기대하고 계신 하느님을 기억하는 일---이것이 광복의
중요한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땅에서 자유를 실현시키며, 정의를 이룩
하고, 사랑과 신뢰의 사회를 이룩해 가도록 하느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온 아세아 민족에게 나누어 줄 영적인 자산을 마련
해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결국 이와 같은 모든 일을 감당해야 할 주체가 바
로 교회입니다. 교회가 바로 이와 같은 선교적인 사명을 자각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곳에 바로 이 광복절을 뜻 있게 맞이하는 길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스라엘이 출애급을 항상 기억하고 기념하면서 하느님
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듯이, 우리 민족도 이 광복절을 항상 기억하고
그 뜻을 새기면서 해방과 자유의 역사, 사랑과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야
하겠습니다. 이 땅에 진정한 해방과 자유가 이루어질 때까지 쉬지 않고 깨어
있어 기도하며 정신을 차리고 억압과 불의의 세력을 대적해 가야 하겠습니
다.
이제 참 자유를 주신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발벗고 나서서 자유와 평등,
사랑과 평화를 위해 헌신하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의와 전쟁”
광복절 감사 주일
성서일과 | 시35:1-9, 출15:1-18, 딤후4:1-8, 요16:25-33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8절)는 홍해를 가르시고 땅을 마르게 하셨던 동풍을
가리키며“파도가 언덕같이 일어서고 큰물이 바다 가운데 엉김”(8절)은 좌우에
형성된 벽을 수식한 시구이다.
그러나“주의 성결한 처소”(13절)라든지“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17절)라는
개념은 아직 성소가 세워지기 이전이었으므로 후대의 저작이라는 논의가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율법을 기록한 모세가 장래의 영감으로 예견했을 가능
성은 충분하다. 모세는 수없는 전쟁 속에서도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처소
를 잊은 적이 없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기록한 편지의 마지막 장은 매우 엄숙하게 시작된다. 하
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특히 심판주로 재림하실 주님과 그 때 이루어질 하나님
의 나라를 배경으로 삼은 명령이다. 바울 개인적으로는 죽음에 직면한 마지막
명령이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2절) 그가 가장 사랑했던 제자 디모데에
게 자신처럼 복음 전파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꼭 좋은 때를 얻어야 하는 것
이 아니다. 오히려 어려운 지경에서 기회라고 여길 수 없는 경우에도 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사람들은 바른 교훈을 받아들이기보다 세속적 욕심을 좇아
거짓된 스승을 따르고 허탄한 이야기 같은 이단 사설을 좋아했다. 감각적으로
귀를 즐겁게 해 주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버리
는 결과를 얻게 되는 인생은 불쌍한 존재이다.
엄한 명령을 마친 바울은 자신의 삶에 다가온 마지막 순간을 예측하며 비장
한 간증을 한다. 자신이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었다고 한다. 관제란 구약의 제
사법으로서 제물이 될 어린 양을 제단 위에 올려놓고 불사르기 직전에 포도주
를 붓는 의식으로서 전제라고도 불린다. 어린 양의 죽음처럼 사도의 생명도 하
나님께 바쳐지기 직전에 처해 있다. 떠날 기약은 죽음, 곧 사도의 순교를 말한
다. 바울은 자신의 피땀과 눈물이 모두 부어져 주님께 드려지기를 원하고 있
다. 그의 일생은 싸움이었지만 선한 싸움이었고, 계속되는 경주였지만 푯대가
있는 믿음의 경주였다. 이 싸움과 경주에서 이긴 사람은 면류관을 받는다. 면
류관은 원래 임금이 정복을 입을 때 갖추어 쓰던 관이며, 경기의 승자에게는
월계관을 씌워 주던 전통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단순한 월계관이 아니라, 의
롭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의의 재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상급은
최고의 관, 곧 의의 면류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적 중보 기도를 드리시기에 앞서 하신 선포의 마
지막 말씀이“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였다.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싸
움으로 규정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놓으신 말씀이다. 전쟁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사단의 궤계에 맞서서 승리하셨고, 죽음
이라는 권세를 폐하셨다는 점에 주목한다. 곧 닥쳐올 십자가의 고통도 부활이
라는 궁극적 승리를 위한 전초전에 불과했다.
예수께서는 이 승리를 위하여 세상의 환난을 이겨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아
버지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확신하셨다. 이기기 위하여 꼭 필요한 요소는 하나
님 아버지께 구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아버지께로 가야 하는 것임을 알려
주신다.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예고하는 말씀이었
고, 제자들에게 영적 전투의 각오를 다지게 하는 격려의 교훈이었다.
설교를 위한 조명
구약의 말씀(출 15:1-18)으로 설교 작성 | 대지 설교
서론
하나님께서 이 땅에 광복을 주신 62주년 감사 주일을 맞이하였다. 제2차세계
대전의 종전과 함께 찾아온 해방과 함께 우리 민족은 손에 들었던 무기를 버리
고 다시는 무력에 의해 자유가 유린되는 일이 없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안타깝
게도 남북으로 갈린 민족끼리 서로의 가슴에 총칼을 겨누는 전쟁이 발발하였고,
무력을 앞세운 군사 쿠데타로 인해 전쟁의 그늘은 다시 우리 곁에 드리워졌다.
다시 광복의 날을 맞은 지금 성경을 가슴에 품고 생각해 본다.“ 무슨 전쟁이
그토록 많았을까?”“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전쟁을 용인하셨을까?”“전쟁이라
는 수단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을까?”
본론
1. 여호와는 전쟁터의 용사라고 말씀하신다.
오늘의 본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홍해
의 기적을 보고 소리 높이 부른 승리의 노래이다. 구약성경은 여호와를 이스라
엘 군대의 최고 지휘자로 여기고 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의를 받들기 위해서
는 전쟁이 사용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전쟁은 의로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
단이라고 본다.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고 난 뒤“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
의 이름이시로다”(출 15:3) 하여 하나님을 전쟁 용사로 불렀다. 그러나 뒤에 오
실 메시야가 평화의 왕이라는 점을 알게 되자 그 날이 오면“무리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
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사 2:4)는 예언
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2. 여호와는 권능으로 원수를 물리치신다.
홍해의 싸움은 그야말로 치열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만히 서 있었지만
권능의 하나님이 대신 싸우심으로 인해 애굽의 군대가 전멸하였다. 이런 전쟁이
세상에서 계속되고 있을 때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화해로써 평화 왕
국을예비하도록가르치시며몸소행하셨다. 이가르침을따르는그리스도인들이
원수를 사랑하고 전쟁을 억제하며 거부한 결과 역사적 평화주의가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이 평화주의는 싸움터 세상 속에서 늘 문제가 되어 왔다. 전쟁도 사랑의
행위라고 주장하며 악한 세력 앞에 당당히 맞서야 한다는 입장이 있는 반면, 절대
적 무조건적 평화를 위해 전쟁을 배격해야 한다는 태도가 맞서 있다. 여러분은 어
떤가? 싸움을일으킬여지가있는폭력집단과의전쟁은필요한것인가, 아닌가?
개혁자루터는이렇게대답했다.“ 의사가중태에빠진 환자를구출하기위해그
수족을 절단하는 것은 선한 행위다. 마찬가지로 전쟁도 사랑의 행위요 신에 속하
는 행위다.”그러나 퀘이커, 재세례파, 메노나이트 등은 그에 맞서 무조건 평화를
강조한다. 이 태도는 인류를 말살하려는 거대한 악에 대하여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게 되는 것을 약점으로 갖고 있다. 이 세상에 죄악이 만연하고 불의가 성행
함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싸우며 나아가는 우리를 지키시며 권능으로 도
와주고계신다.
3. 여호와는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신다.
우리 인생의 현장은 싸움터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중보
기도를 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
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통
을 받으셨으나 결국 부활 승리하심으로 세상을 이기셨으니 우리도 승리의 확신
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아가야 하리라.
출애굽 길에서 하나님은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셔서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셨다. 큰 전쟁을 치르고 난 그들을 위로하시고 성소에서 위로를 베
푸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이끌어 내신 여호와께서, 우
리 한국 백성을 역사의 질곡에서 건져 내셨다. 오늘도 성소에서 민족의 갈 길을
은혜로 인도하고 계신다.
결론
광복의 날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무슨 전쟁이
그토록 많았을까?”그것은 이 세상이 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며 악한 세력들
이 무고하게 그물을 치고 함정을 팠기 때문이었다(시 3편). 그 많은 전쟁 속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좋은 민족으로 살아남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의롭게
보셨기 때문이다. 이제 광복 이후 하나님의 교회가 무너져 버린 북한 땅에 복음
의 싹이 다시 트고, 전쟁의 기운이 사라져 온 겨레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기
뻐하는 찬송을 높이 부를 날이 어서 오기를 소망한다.
“8.15, 하나님이 하셨다.”
성경: 시편 126:1-6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같이 돌리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성도와 불신자는 역사를 보는 눈이 다릅니다. 불신자의 눈으로 볼 때 역사는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성도의 눈으로 볼 때 역사의 주관자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강한 나라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작정하시면 역사에서 사라지지만, 아무리 약한 나라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시면 역사의 주도국이 됩니다. 우리나라의 지난 5천년 역사를 되돌아보면, 주님께서 이 민족을 지키시고 보호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올해로 55주년을 맞는 광복과 이산가족 상봉 역시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해야 할지,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우리 모두 감격하고 감사하자
올해로 광복 55주년을 맞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나라의 \'빛을 되찾게 됨\'(光復)을 감사하며, 그 날의 감격을 되새겨야 합니다. 일제 35년의 지배는 빛을 잃고 어두움 가운데 살던 암흑의 시대였습니다. 가족들이 징용으로, 학도병으로, 정신대로 끌려가고, 재산을 공출 당했을 뿐만 아니라, 창씨개명과 신사참배까지 강요당했습니다. 저주와 죽음이 이 땅을 뒤덮었습니다. 그러나 이 민족을 사랑하시고 들어 쓰시려는 주님은 때가 차매 저주와 죽음을 빛과 생명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이 민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생명의 빛, 구원의 빛을 비춰주셔서, 선교하는 나라로, 성경적 효를 세계 만방에 전하는 나라로 세워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신 것입니다.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시 44:3).
그런데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처럼, 우리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한 이들의 희생을 잊고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배우지 못하는 국민은 다시 고난의 역사를 되풀이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고, 그 속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빛되신 예수님을 자유롭게 믿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가족의 핍박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 본 성도는 자유롭게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잘 압니다. 광복은 \'나라의 자유\' 뿐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은 어렵게 찾은 신앙의 자유에 감사하고 책임을 다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유를 넘어서 방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빛되신 예수 안에서 감사하면 더 큰 자유를 누릴 수 있지만, 아담과 하와처럼 감사하지 않고 교만하면 죄와 저주의 속박 아래 놓이게 됩니다.
둘째, 우리 모두 눈물을 흘리자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입니다. 성경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시 126:5)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광복은 미완의 광복입니다. 아직도 북쪽에는 공산주의라는 저주와 죽음에 눌린 영혼들이 있고, 남쪽에는 복음을 거부하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의 시편 기자처럼 어둠의 세력에 포로로 사로잡혀 있는 동족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느헤미야와 에스더가 되어 민족의 아픔과 죄악을 내 것처럼 여기고 금식하며 기도의 눈물을 흘리면 이 나라와 민족은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의 눈물은 우리의 영혼을 살립니다. 모든 것이 풍요로워지고 있는 현실과는 반대로 사랑은 점점 빈곤해지고 있습니다. 가정, 교회, 학교, 사회에서 영혼을 향한 안타까움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따뜻한 마음과 정이 메말라 가고 있으며,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영혼이 강팍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향한 사랑의 눈물이 있는 곳에는 생명과 평안과 감사와 감격이 있습니다.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양자로 받아들인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은 죽을 수밖에 없는 한 영혼을 살렸습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눈물입니다.
셋째, 우리 모두 땀을 흘리자
이 나라의 진정한 광복과 해방은 남과 북이 복음으로 하나될 때입니다. 복음으로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수고와 헌신의 땀을 흘려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출애굽 당시 육체의 만족을 위해 애굽으로 돌아가려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출 16:3), 평화통일보다는 현재의 배부름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기 위해 한 손으로는 일을 하고, 다른 한 손에는 무기를 잡았습니다(느 4:17). 우리 역시 북한의 공산주의는 단호히 거부해야 하지만, 고통 당하는 북한 동포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과 물질은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를 세우기 위해서 땀 흘려야 합니다. 이 시대의 특징 중 하나는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것이 죄악시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조차 진리를 주장하지 않으며, 바른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말에 꼭 버려야 할 중의 하나가 \"좋은 게 좋은 거야.\"라는 말입니다. 이 경우 하나님께서는 잘못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 잘못을 보고도 침묵한 사람에게까지도 책임을 물으십니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겔 3:18).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다윗 앞에 선 나단처럼, 아합 왕 앞에 선 엘리야처럼, 아그립바 왕 앞에 선 바울처럼, 하나님의 진리를 세상에 보여주는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넷째, 우리 조국 희망이 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사랑하시는 우리 조국,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복음을 듣고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밖으로는 공산주의와 힌두교, 이슬람과 불교, 그리고 온갖 잡신을 숭배하는 나라들에 둘러싸여 있을 뿐만 아니라, 안으로는 뿌리 깊은 샤머니즘과 불교 전통, 그리고 철저한 유교적 사고가 사람들의 의식과 사회구조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작고 약한 이 민족을 택하시고, 고난의 풀무를 지나게 하시면서 세계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추수꾼으로 부르셨습니다(사 48:10). 성경적 효를 세계에 전하는 민족적 사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회와 성도가 있는 우리 조국, 희망이 있습니다. 칼라일은 \"믿음을 가진 민족은 위대한 국가를 건설한다\"고 했습니다. 역사의 비극은 하나님의 성전이 \"강도의 굴혈\"(마 21:13)이 될 때였습니다. 주님은 성도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빛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빛과 생명을 지체된 우리를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세상에 비추기를 원하십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 60:1).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기도하면, 이 나라와 민족을 해방시키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평화를 주시고, 장차 복음으로 평화통일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 민족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잃어버린 감사와 기쁨과 눈물과 땀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그리하여 평화통일을 이루고, 세계 만방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민족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역사를 반전시키시는 하나님”
에스더서 9:20-28
사도행전 2:22-24
우리나라가 일본의 압제 밑에서 해방된 지 55년이 되었습니다. 숱한 고난과 수탈(收奪)을 당한 35년 간의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된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리 민족은 남북으로 나뉘어 지금까지 대립하여 왔습니다. 따라서 광복절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해방의 진정한 기쁨을 되새기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압제와는 또 다른 억압과 고난의 역사를 남북이 같이 경험하고 있기에 우리의 광복절은 언제나 우울합니다. 그래서 10여년 전부터는 이 광복절에 평화 통일을 기원하는 남북교회 공동기도문을 마련하고 남북한 교회가 함께 드리는 행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평화 통일이 이루어지는 날 우리는 진정한 광복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해마다 광복절 기념주일에 공동기도문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유다 민족의 구원을 기념하는 부림절
우리가 55년 전 맞이한 해방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보통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해방이라고 말하여 왔습니다. 광활한 중국 대륙과 동남아까지 점령한 막강한 일본의 군대가 미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도 없이 전쟁을 일으켜 승승장구하고 있는 때이기에 해방은 꿈도 꾸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일본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져 기고만장(氣高萬丈)하던 일본이 손을 들고 항복을 하면서 해방은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일본의 콧대를 완전히 반전(反轉)시켜 납작하게 만드신 역사였습니다. 참으로 통쾌한 반전의 역사였습니다.
이렇게 상황을 반전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오늘 읽어 드린 에스더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페르시아와 메대의 아하수에로 왕 때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왕의 신하 가운데 하만이란 사람이 신임을 얻어 모든 대신들보다 위에 있는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모든 신하들이 하만이 지날 때면 다 머리 숙여 절을 하였는데, 유독 유다 사람인 대궐문지기 모르드개만은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사람이 절을 하라고 권유하였지만, 그는 유다인임을 내세우며 절하지 않았습니다.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기를 고집한 것은 그가 유다의 원수 나라인 아각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하만은 모르드개 한 사람만 처형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이참에 아예 포로로 잡혀온 유다인 모두를 없애버리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하만은 교묘한 말로 왕의 허락을 받아내고, 전국의 각 도에다 조서를 내려보냈는데, 열 두째달인 아달월 십삼일 하루동안 모든 유다인들을 공격하여 죽이고 그 재산을 탈취해도 좋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포로로 잡혀온 유다인들에게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뾰족한 대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르드개는 얼마 전 왕후가 된 사촌누이 에스더에게 전갈하여 왕에게 들어가 자기 민족을 구원해 줄 것을 요청하라고 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지만, 에스더는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기로 결단을 하면서, 모르드개에게 당부를 하였습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스더는 잔치를 베풀어 왕과 하만을 초청하였고, 두 번째 잔치에서 하만의 계략으로 자기 민족이 모두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고 왕에게 호소를 하자, 왕이 진노하여 하만을 처형하게 하였습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준비한 장대에 자신이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왕의 인장이 찍힌 조서가 전국에 전달되어 유다인들은 스스로의 생명을 보존하고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유다인들은 오히려 안정적인 삶을 얻을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아달월 십사일과 십오일을 부림절로 정하고 이날을 해마다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에 유다 사람이 원수들의 손에서 벗어났으며, 그 날에 유다 사람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고, 초상날이 잔칫날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 이틀 동안 잔치를 벌이면서 기뻐하는 명절로 정하고,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는 날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부림절은 민족 멸망의 위기가 하루아침에 반전되어 민족 구원의 날로 바뀌어진 것을 기념하는 특별한 절기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극적인 구원
이런 비슷한 이야기가 열왕기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의 히스기야 왕이 통치할 때 앗시리아의 대군이 침략하여 수도 예루살렘을 완전히 포위하고 항복하라는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항복하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절망적인 순간에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하게 기도를 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우리를 그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는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왕하 19:19)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응답을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가리켜 이르시기를 저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시라.\"(왕하 19:32-33)
그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성밖을 보니 앗시리아 군대가 모두 시체로 변하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 군대를 치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갑자기 흑사병 같은 전염병이 돌아서 모두 죽은 것이 아닐까 추측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사자가 저들을 치셨기 때문에 모두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산헤립 왕은 니느웨로 돌아갔다가 암살을 당하여 죽었습니다.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위기에 처하였던 유다 왕국이 하루밤 사이에 그 위기가 물러가고 은총의 아침이 그들 위에 밝아왔습니다. 히스기야 왕과 모든 백성이 위기 앞에서 간절하게 기도하므로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그 상황을 반전시키셔서 저들을 구원하시고 기세 등등하던 앗시리아 군대의 기를 꺾으셨고, 교만하였던 산헤립 왕은 암살 당하여 죽게 하셨습니다.
교만한 자를 꺾으시고 울부짖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성경의 역사와 우리의 역사 속에서 경험하는 상황을 반전시켜 고난 당하던 백성을 구원하시고 압제를 하던 자들을 납작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 두 가지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강하여지면서 교만하여 지는 사람이나 나라를 그대로 두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에스더서에 나타난 아각 사람 하만이 임금의 신임을 얻고 한껏 그의 권세를 과시하고, 그의 안하무인격의 방자함과 오만이 유다 민족 전체를 다 없애버리려고까지 했을 만큼 극에 달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내리치심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앗시리아 왕 산헤립이 어떤 나라의 신도 그들의 막강한 군대의 공격에서 구원한 자 없었다고 큰소리치면서,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결코 그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다고 호언장담을 하였다가 그 군대가 거의 몰살당하고 왕 자신은 암살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의 힘을 과시하면서 자기의 권력을 절대화하거나 마치 신이나 된 것처럼 오만 방자(傲慢 放恣)한 왕이나 통치자나 나라들을 그대로 두시지 않고 그 코를 납작하게 만드시며, 그 기세를 꺾어 땅에 떨어지게 하십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는 액튼경의 유명한 경고가 진리인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 절대 권력을 그대로 두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은총에 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런 오만한 자들을 그대로 두시고 억압당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에 무관심하신 분이었다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이 원통하고 억울한 사실 때문에 분통이 터져 죽는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김없이 교만한 자들을 내리치시고 그들에게 억압받는 자들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반전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믿음 때문에 고난의 역사를 견디며, 새 날에 대한 희망을 갖고 그 날을 준비하며, 용기를 가지고 불의와 맞서게 됩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일도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막강한 경제력과 거기에서 나오는 무소불위한 힘을 휘두르며 우리 위에 군림하였던 대기업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거나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저들의 교만한 코를 납작하게 하시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미국의 거대 기업들 위에 임하시지 않을까 기대를 해봅니다. 그야말로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 다국적 거대 기업이나 큰손들이 가난한 나라들을 착취하거나 전쟁 상태를 유발하면서 무기를 팔아먹거나 식량 조절을 통하여 위협하는 일들이 점점 더 그 도를 더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거대 기업들의 막강한 경제력과 거기서 나오는 힘을 무력화시키고 그들의 높은 콧대를 납작하게 만드실 때가 반드시 오리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광복절은 우리에게 이런 믿음을 재삼 확인시켜주는 기념일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반전의 역사에서 약자들의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강한 자들에게 빼앗기고 억압당하고 혹은 사면초가(四面楚歌)로 어디에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약자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바로 하나님을 향하여 울부짖는 일 즉 기도하는 일밖에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여기서 약자들이란 무기력한 자들로 스스로는 자기 구원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돈도 없고, 권력에서는 철저하게 소외되었으며, 누구 하나 도와줄 사람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약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기도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중간한 상태에 있는 우리를 철저하게 절망으로 몰아넣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고난을 가하시는지도 모릅니다. 아직도 무엇인가 가진 것이 있고, 누구에겐가 호소할 데가 있으며, 언론의 관심을 끌어 볼만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울부짖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철저하게 절망의 구덩이에 밀어 넣으셔서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을 바라고 기도밖에는 할 것이 없도록 하십니다.
배부른 가운데 기도를 드릴 수 있지만 그 기도가 울부짖음의 탄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권력의 자리에 앉아서 기도를 드릴 수 있지만, 그 기도가 원통함과 억울함과 고난에 찌들린 사람의 기도와 같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로지 기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믿고 매어 달려 애통하며 울부짖는 자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가장 절망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사람만이 구원의 참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에스더서에서 하만이 모르드개를 비롯한 유다 민족 가운데 몇 사람만 죽였다면 그들이 사흘씩 굶어가며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았을 터이고 에스더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임금 앞에 나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일본이 만약 우리를 식민지로 지배하되 대단히 부드럽게 하였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렇게 열정적으로 독립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만이 독종이었기 때문에 유다 민족이 마음을 합하여 하나님께 울부짖을 수 있었고, 일본이 악랄한 식민 통치를 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더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를 믿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더 교만하게 하시는 까닭은, 억울하게 당하는 자를 더 억울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억울한 자로 하여금 울부짖게 하시고, 그 울부짖음을 들으신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꺾으시고 울부짖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반전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가장 큰 반전의 역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악하고 교만한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그러나 바로 그 십자가의 죽음이 모든 피조물의 죄를 대속하는 놀라운 은총이 되었으며, 죽음의 권세를 깨고 다시 사는 부활의 역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대역전의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의 고난을 볼 때 낙심하는 대신에 이것을 반전시키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며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오늘 평화 통일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계속 울부짖을 때 하나님께서 마침내 이 상황을 반전시켜 너무도 빨리 평화 통일의 아침이 오게 하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하나님의 살아 역사 하심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이며, 이 확신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하여 계속 기도하는 일입니다.
광복절을 맞이하면서 이 역사에 담긴 교훈을 여러분 마음에 새겨 새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해방”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장 16절)
<목회기도>
생명 주신 하나님,
복된 주일 기둥교회에 나와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풍파 많고, 사고 많고, 어려운 일 많은 세상에서
지친 몸과 마음으로 왔습니다.
죄와 더불어 살다 왔습니다.
허물과 죄는 용서하시고,
살면서 받은 상처는 어루만지시고 싸매 주시옵소서.
특별히 가족 때문에 눈물 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들을 위로하여 주시옵시고
할 수 있다면 눈물 짓는 짐을 벗겨 주시옵소서.
그러나 지고 가야 하는 짐이라면
무거운 짐을 지고 갈 능력을 주옵소서.
흩어진 가족들 만나는 것이 소원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날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이별,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는 이별을 더 두려워하게 하옵소서.
언제 하나님 앞에 갈 지, 언제 주님이 오실 지 모르는 우리지만
그날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 귀한 시간에도 군대에, 객지에, 외국에 나가 있으면서
교회를 그리워하고 예배를 귀중히 여기며
이 자리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이들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특별히 형편과 사정이 있어
예배의 자리에 가지 못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인터넷으로 기둥교회 예배에 동참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는 복을 주시옵소서.
이 귀한 시간 악한 마귀 틈타지 않도록
성령께서 주장하실 줄로 믿사옵고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하나님은 사람을 같게 만들지 않으시고 각기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왜냐하면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외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보고 느낀 이상한 점이 \'우리나라 여자들이 한결같이 다 똑같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개성을 살릴 줄 모르고 유명배우와 같아지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흰사람, 검은 사람, 노란 사람, 긴 사람, 짧은 사람, 넉넉한 사람 등 모두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작품에 대해 혹평을 하면 하나님이 서운해 하십니다. 우리 한번 옆의 분들과 \"잘 생기셨습니다. 멋있으십니다. 미인이십니다.\"하고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Amsterdam 2000]이라는 집회에 참석하고 동생집에 잠간 들렀다가 어제밤 늦게 왔습니다. 건강하게 만나 반갑습니다.
저는, 지금 지구상에 독립국가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번 빌리 그래함 목사님(Dr. Billy Graham)의 선교단이 주최하는 [Amsterdam 2000]집회에 209개국의 12,000여명이 모였습니다. 제가 꼭 만나고 싶어했던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파킨슨씨병(Parkinson\'s disease)이라는 병에 걸려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파킨슨씨병은 가장 흔한 운동질환 중의 하나이며 \"퇴행성 뇌질환\"입니다. 수족이 떨리고 동작이 느려지는 현상을 보이는 질환입니다. 세계적인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도 이 병에 걸려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이 병에 갑자기 걸려서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이미 83세가 된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선교활동은 거의 마감단계입니다. 그 뒤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가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참석하지 못해서 아들 프랭클린 그래함(Franklin Graham), 딸 앤 그래함(Anne GrahamLots)이 설교하고 말씀을 증거했는데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사람들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하신 설교보다 훨씬 낫다고 더 좋아했습니다. 그 선교단은 앞으로 계속 이어지리라 믿습니다. 이번 집회를 통해서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하신 일은 분명히 이어가시는 분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가장 많이 했고 들은 말은 \"할렐루야\"라는 말입니다. 이북에서도 두 명의 대표자가 참석했는데, 그 사람들도 \"할렐루야\"라고 인사했습니다. 그 다음에 많이 들은 말이 \"당신은 어느 나라에서 왔습니까?\"(Where are you from?)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한국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하면 10명이면 9명은 \"북쪽이냐, 남쪽이냐?\"라고 되물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Korea라고 할 때 우리 한국만을 생각하는데,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은 South Korea, North Korea 로 구별해서 확인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209개국에서 모여서인지 처음 들어본 나라 이름도 많이 있었습니다. \'몰도바(Moldova)\'라는 나라도 있었는데, 둘째날인지 셋째날인지 몰도바에서 온 목사님과 인사를 하고 사진까지 찍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또 만났는데 제가 그분을 몰라봤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분께 어디서 오셨냐고 또 물었고, 그분은 지도를 펴 놓고는 몰도바를 가리키며 \"나는 몰도바에서 왔는데 어제 사진까지 찍지 않았느냐\"고 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뭘 더보냐 이제 그만 보자\'라고 todrkrgkau 이름을 기억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많이 말하고 들은 말 가운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We are one in Jesus Christ.)라는 말입니다.
저는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나라 209개국의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인 곳에 처음 가보았습니다. 신문에서도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나라의 대표들이 모인 최초의 국제집회였다는 보도를 했습니다. 8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활동했고, 12000여명의 참석자가 모였던 집회였습니다.
그곳에 참석하고 느낀 것은
- \'정말 대단하다, 굉장하다. 규모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제 생각했던 것, 제 마음에 담고 있던 규모들을 다 뛰어 넘었습니다.
- 많이 보고 많이 배웠는데, \'앞으로도 더 많이 보고 배워야겠다\'는 것입니다.
아쉬운 것은 \'우리 교회 부목사님이나 그밖에 교회에서 중심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과 함께 참석했다면 더 좋았겠구나\'하는 것입니다.
- \'더 겸손해져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엔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 많구나\'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 그리고 \'이 세상에 참으로 어려운 나라가 많구나\' 하는 것도 느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온 어떤 흑인 목사님 한 분이 자기가 그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그 교회 교인들 전체가 3개월 정도되는 생활비의 빚을 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 목사님을 사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제게 명함을 건네 주고 또 제게 명함을 달라고 하고, 한국에 가면 연락해도 되느냐고, 좀 도와줄 수 없느냐고 이런 저런 요구사항이 많아 나중에는 명함 주는 것이 좀 겁도 났습니다.
우리 나라는 힘들고 어려운 시절도 있었으나… 물론 아직도 어려운 사람들이 많지만, 그래도 지금은 잘 사는 나라로, 똑똑한 사람이 많은 나라로, 예수 믿는 사람이 많은 나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한 때는 나라를 뺏겨 일본의 속국이 되어 말도 제대로 못하고, 글도 일본말을 써야 했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고 모든 것에 묶여진 서글픈 삶을 살아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진 일본에 대한 나쁜 감정은 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묶어 두었던 서글픔과 우리를 괴롭게 했던 서러움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 사람이 자유롭고 싶어하는, 해방되고 싶어하는 대표적인 억압은 사회적이요 \'정치적인 억압\'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가 나이 많은 분들에게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겪은 고통이 있었습니다. 6.25전쟁으로 남북이 갈려 가족이 흩어져 만날 수 없게 되었고, 고향을 잃어 가볼 수 없고, 재산을 잃어 찾을 수 없는 기막힘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만족스럽지 못하나 과거 군사 정권, 독재치하에서는 정말 말도 표현도 행동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충분히 어느 정도 자유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때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살지만 우리는 여전히 정치적인 압박, 정치적인 어려움을 두려워 하고 있습니다.
■ 이런 정치적인 억압 외에도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뽑아내는 고통은 \'경제적인 어려움, 돈없는 서러움\'입니다. 잠을 설쳐가며 이를 악무는 이유도, 남의 눈치를 봐가며 복권을 사는 이유도 돈 없는 설움에서 해방되기 바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 정치적 억압, 경제적 어려움 외에도 질병의 고통도 대단한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아픈 사람의 고통을 다 모릅니다. 그리고 아플 때 가졌던 마음을 건강해지면 그 마음을 모릅니다. 그리고 정상적인 사람들은 장애인이 가진 고통을 모릅니다. 일례로 눈이 좋은 사람은 눈이나쁜 사람의 안타까움을 모릅니다. 어떤 눈이 나쁜 사람이 \"나도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세상이 좀 환해 보였으면 좋겠다, 안경을 쓰기 전에 세상이 환해 보였으면 좋겠다\"고 말을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전신마취를 하고 큰 수술을 받은 후에 \"전신마취를 해 보지않은 사람은 인생을 말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이유는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어 보지 않고는 인생을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아픈 것이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 이렇게 정치적인 억압, 경제적인 어려움, 질병의 고통 외에도 사람이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은 많습니다. 불안에서 해방되고 싶고,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고 싶고, 죄와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밖에 묶여 있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아마 중고등학교 학생들 가운데 하루 속히 부모의 억압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학생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학생들 가운데 \'이 원수같은 학교 언제 끝나나\'하고 졸업을 기다릴 것입니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도 \'정말 더럽고 치사해서 못다니겠다\'하고 직장에서 나올 궁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참으로 모순된 속성을 가졌습니다. 자유롭기를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엇인가에 묶여 있기를 원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직장에서 퇴직하고 나면 자유롭다고 느끼겠지만 곧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자유를 느끼겠지만 그러나 곧 불안해 집니다. 보호막이 걷힌 자유는 고통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속박을 속성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제한의 자유는 한편 공포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모두는 다 자유를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유를 말하지만 묶여 있습니다.
■ 여러분 모두는 예수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특별한 신분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부모 형제를 둔 가족에 얽혀 있습니다. 그 가족이라는 틀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 예수 믿는 우리는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 것을 믿고 삽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믿습니까?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신앙생활하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예수 믿음으로 천국백성이 되었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고, 대한민국 의 법을 지켜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늘 나라의 백성이지만 이 나라의 신분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그런 제한된 사람입니다.
■ 예수 믿는 우리는 영생을 얻은 사람입니다. 영생을 확신하는 특별한 생명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세상에 살면서 얻는 질병과 죽음을 두려워하며 때로는 공포에 떨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살이에서, 마음 편한 느긋함과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함은 우리의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욕망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요한복음 3장 16절에 약속된 대로 예수 믿음으로 얻은 영생의 복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멸망이 없고, 예수 믿으면 영원히 산다고 하는 것이면 된 것 아닙니까? 그러나 저부터 시작해서 여러분 모두 멸망이 없고 영원히 산다는 말씀보다는 당장 어렵고 힘들고 아프고 죽을 것에 대한 두려움에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이 세상적인 모든 조건, 세상적인 것들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이기도 합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팝송을 처음으로 듣고 좋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참 잘생기고 목소리도 좋은 영국인 \'클리프 리챠드\'(Cliff Ricahrd)라는 가수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나이는 지금 60입니다. 지금의 40~50대 여성들에게 아주 인기 있었던 가수였고 대표곡으로는 \"Congratulation\"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번 Amsterdam 2000에 찬양을 하러 왔습니다. 저는 사진과 필름으로만 보았던 사람이 나온다고 해서 얼마나 반갑던지 팝송을 부르나 하고 기대했으나, 찬양만 부르며 간증을 하는데 자기는 1966년에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예수 믿고 지금까지 변함없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는데, 그 삶에 대해서 후회도 없고 너무나도 자랑스럽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나니까 두 가지 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는 것인데 하나는 \"give up(포기)\"하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주일날 예배 드리러 가야 하는 시간에 다른 곳에서 공연을 하라고 요청하면 그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한번 노래 부르면 수백만불을 벌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런것은 다 돈과 자신의 유익과 연결되어 있었던 일인데, 그런것을 포기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우선권(priority), 우선순위에 있어서 모든 것을 하나님 편에서 앞세운 다는 것이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는 분들이라 주일에 예배의 자리에 나오셨지만, 우리 기둥교회 성도들 가운데 오늘 우선순위를 잘못 정해서 교회에 오는 것보다 친척집에 가는 것이 더 좋다고, 해변에 가는 것이 좋다고 우선순위를 바꾼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클리프 리챠드라는 가수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위해서 순서를 정하는 일,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하며 어떤 것을 나중에 할 것인지, 어떤 것이 더 중요한 일인지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Cliff Richard
저는 이번 암스테르담에 가서 수많은 유명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동안 책으로만 보고 \'어떻게 이렇게 훌륭할 수 있을까? 정말 대단하다\'라고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의 얘기 가운데, 제가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이 가수의 간증입니다. 예수 믿고 나니 포기할 것이 많고, 예수 믿고 나니 우선순위를 정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었다는 순수하고 감동적인 믿음을 우리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예수 믿음으로 천국 백성 되었고, 예수 믿음으로 영생을 보장 받았으니 여러분도 기쁨으로 포기할 것을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예수 믿는 사람답게 모든 일에 하나님 마음에 합한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진정으로 자유로와지고 편안합니다. 클리프 리챠드라는 가수의 간증이 여러분의 간증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에서도 자동차를 새로 구입한 사람들을 저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차를 닦고, 털고, 신발을 털고 차에 오르는 사람은 틀림없이 차를 새로 구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래되고 먼지 묻고, 흙물 튀어서 세차도 안한 사람은 누가 지나가다 툭 걷어차도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걷어차기도 합니다. 그것은 차에 대해 자유로운 것입니다. 새 차를 구입한 사람들은 차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새 옷을 입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뭐가 묻을까, 구김이 생길까 앉고 일어서는 것도 조심스럽게 합니다. 그런데 예비군복을 입은 사람들은 얼마나 자유로운지 아무데나 앉고 눕고 편안합니다. 이것은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왕 신앙생활 할 바에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들을 기쁨으로 포기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우선 순위를 정할 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을 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우리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천년만년 살것 처럼 말하지만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언제가 하나님이 정하신 때인지 모르는 우리, 다시 오실 예수님 맞을 준비와 천국에 갈 준비를 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믿고 있는 그 영생의 길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이산가족이 되는 것만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이산가족이 될 것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초기 한국교회 성도들은 복음 전파를 위해 남편과 자식, 구원을 위해 전도대상자를 정해 놓고 그를 위해 금식하며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어떻습니까?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 자식의 구원을 위해서, 친구의 구원을 위해서 금식하며 눈물로 기도합니까? 살빼기 위해, 다이어트를 위해 금식해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금식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천국의 소망을 가진 사람이 맞습니까? 그렇다면 그 천국의 길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께 직접 들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번 암스테르담에 가서 들은 이야기 하나를 소개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어느 지역에 부흥집회를 인도하러 갔는데, 갑자기 우체국에 가야될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우체국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어린 아이가 지나가기에 물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어린이가 우체국을 자세히 가르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한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아이에게 \"너 내일 부흥회에 참석하렴. 부모님과 함께 오너라. 너는 내게 우체국 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으니 나는 네게 천국 가는 길을 가르쳐 줄께\"라고 하면서 모이는 장소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생각도 안해보고 거절했습니다. 그아이는 말하기를 \"싫어요. 저는 거기 안가겠어요. 우체국도 못찾는 사람이 천국 가는 길을 어떻게 알겠어요.\"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우리가 우체국을 못찾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는 길을 모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배운 것 만큼 못 배웠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 만큼 못 가졌고, 다른 사람이 해본 것 만큼 못 해봤을 수 있습니다. 다른 좋다는 길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가는 길만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천국가는 길을 믿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오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도 다른 사람에게 그 길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해방을 누리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해방은 예수 이름으로 포기할 것을 포기하고, 우선순위를 바르게 정하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야 할 천국의 길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그 사람이 진정한 자유인 것입니다. 갈보리 언덕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고통을 당하셨지만, 우리는 그 예수 이름만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의 모든 결박을 풀어 주셨습니다. 모든 억압을 풀어 놓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결박을 푸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예수 결박 푸셨도다. 모든 결박 푸셨도다. 나의 결박 푸셨도다. 나는 자유해\"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결박을 푸신 주여, 진정한 해방을 누리며 사는
성도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믿음으로 천국의 소망을 갖고
멸망이 없음을 믿는 성도들,
예수 믿음으로 포기할 것을 포기하며
우선순위를 정하며 천국의 길을 전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오늘 교회에 찾아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만 그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민족을 구한 느헤미야”
(느5:14-19)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합당한 지도자들을 세우셔서 민족을 위기에서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지도자 모세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셨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여호수아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셨습니다.
옷니엘, 기드온 등의 사사들이 그러하고, 선지자 느헤미야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 하가랴의 아들로서(느1:1,2:5,7:2), 그는 바사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성장했으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으면서 자라났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크게 성공하여 왕의 술 맡은 관원으로서 왕의 신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그의 형제 하나로부터 고국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성은 훼파 되고 성문들은 소실되었다 하는지라(느1:3).
느헤미야는 고국에 대한 슬픈 소식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느1:4). 고국의 형편이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고레스왕 원년에 스룹바벨이 천신만고 끝에 허물어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였으나 예루살렘 성의 모습은 비참했습니다. 그는 견딜 수 없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느헤미야는 왕의 윤허를 얻어 고국에 돌아와서 무너진 성을 재건하고 백성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12년 동안 유다 지방의 총독으로 있었는데 그는 그 동안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였으며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이끌었고 경제정책을 잘 수행하여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출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일제 36년간의 일제 통치로부터 조국광복을 맞은지 어느새 47주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누란의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북통일은 아직도 요원합니다. 경제여건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이웃 일본은 전쟁의 패전국이었으면서도 그들은 지금 세계경제 대국이 되어 있고, 우리는 그들의 경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있습니다.
중소기업은 도산하는 회사가 많고, 실업자는 늘어만 가고 있으며 무역 역조현상은 개선의 가망이 없습니다. 정치적인 상황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진정으로 느헤미야 같은 민족의 지도자가 기다려집니다.
조국을 위기에서 구한 그는 어떤 지도자였습니까?
(1) 느헤미야는 백성의 부르짖음에 유념했습니다.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중심에 계획하고 귀인과 민장을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취리를 하는도다 하고 대회를 열고 저희를”책망했습니다(5:6,7).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격려하여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려 했을 때, 두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원수들의 방해 공작입니다(4:7,8).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함께 일어나서 성 건축을 방해했습니다. 이들은 다 이스라엘의 숙적들입니다.
둘째는, 동족들의 원망과 불평입니다.
“때에 백성이 그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 형제 유다사람을 원망하는데”(느5:1).
느헤미야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황폐해지는 것을 원치 않아 난관을 무릅쓰고 성 재건에 발 벗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안팎에서 느헤미야를 괴롭혔습니다.
성도여러분, 보람된 일치고 수월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중요한 일일수록 그 대가는 큽니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기 위해서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수고가 요구됩니다. 3월의 바람과 4월의 소나기가 5월에 꽃을 피웁니다.
느헤미야는 구국의 큰 일 때문에 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야말로 내우외환입니다. 안팎의 어려움은 감당키 힘듭니다. 느헤미야는 산발랏과 도비야의 도전은 물리쳤으나, 이제는 또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주로 경제적인 문제였습니다.
첫째는, 가뭄으로 인한 흉년 때문에 야기된 문제요
둘째는, 가진 자의 횡포 때문에 일어난 문제였습니다.
흉년이 들어 먹고 살 수가 없으니 집과 포도원을 전당 잡히게 되었고, 자녀들을 노예로 팔아서 연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위기에 처한 백성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들의 원망이 이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크게 노하여” 귀인과 민장을 책망했습니다(5:7)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취리를 하는도다”(7).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8).
“너희의 소위가 좋지 못하도다 우리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할 것이 아니냐”(9).
“우리가 그 이식받기를 그치자”(10).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벼히 들어서는 안됩니다. 민심은 물과 같아서 막으면 막을수록 터진다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이것을 알고 잘 대처했습니다.
여론이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만, 들어야할 여론은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나라에는 여론이 통하지 않습니다. 지자제 문제도 그중의 하나이고, 제2 이동통신 업자선정문제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부르짖음이 이유 있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부자와 가진 자들의 착취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부자들에게 “우리가 이식 받기를 그치자” 고 함으로 국난의 위기를 잘 넘긴 것입니다. 위대한 지도자의 선한 모습입니다.
(2) 느혜미야는 청렴결백한 총독이었습니다.
“내가 유다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20년부터 32년까지 12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가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14).
느헤미야는 14절에서 18절 말씀까지 자신의 청백한 생활에 대하여 자증합니다. 이것은 교만이 아니라 특별한 지도자가 하나님 앞에서 공중에게 모범을 보인 것입니다. 사무엘이 그러했고(삼상 12:3-5), 바울이 그랬습니다(고전 11:1).
우리는 그의 모범됨을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① 그는 총독의 녹을 받지 않고 거저 봉사했다 합니다(14-15).
② 예루살렘 성 중건에 친히 백성과 함께 일했다 합니다(16).
③ 사유 재산을 모은 적이 없다합니다(16).
④ 많은 사람을 대접했다 합니다(17).
느헤미야는 정말로 깨끗한 정치가였습니다. 이전 총독들은 백성에게 토색했습니다. 백성을 압제했습니다. 그들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사리사욕에 급급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같이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이 성 역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15, 16).
사도 바울은 이와 비슷한 간증을 합니다(행 20:33).
“내가 아무리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성도여러분, 검은 돈이 없는 나라가 되기 위해 기도합시다.
청렴결백한 정치가들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3)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도움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19).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기도한 기도를 응답해 주실 줄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려울 때마다 자신의 힘이 모자랄 때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자기 자신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1:5-11). 그는 왕 앞에서도 기도했습니다(2,4). 그는 낙심을 이기도록 기도했습니다(4:4-5). 그는 하나님의 보호를 기도했습니다(4:9). 그는 행한 일에 상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5:19). 그는 힘을 더 얻기 위해 기도했습니다(6:9). 그는 불의한 자들을 막아주시기를 빌었습니다(6:14). 그는 하나님의 긍휼이 자기에게 임하기를 기도했습니다(13:22). 그는 자기를 기억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13:14). 그는 자기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했습니다(13:31).
느헤미야가 이렇게 기도한 것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을 믿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2).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127:1).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오 너희 방패시로다”(시115:9).
성도여러분,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제목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의 위정자들이 이 민족의 소망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국민성이 바로 서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945. 8. 15일 종전당시 일본은 전쟁도발 국이자 패전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방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분단의 아픔과 함께 경제적으로 일본의 예속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여기에는 필연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출근 시간에 있어서 우리와 일본은 9시로 비슷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9시가 출근시간이라면 9시까지 회사에 도착함을 의미하고, 일본의 경우는 9시부터 근무에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보는 것은 9시 이전에 이루어집니다.
일본 봉급생활자의 하루 평균 용돈은 1000-2000엔 사이라 합니다. 어쩌다 친구라도 만나 점심을 사게 되면 다음날 점심은 굶어 버린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요즘 같은 휴가철에도 “휴가를 가겠다”는 말이 적어도 남자들 사이에서는 금기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또 일본 회사들의 점심시간은 1시간이 아니라 45분입니다. 더럽고 어렵고 위험한 일 즉 3D기피현상은 일본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그런 일도 자기 자신이 하게 되면 최선을 다합니다. 막 노동을 하는 부두 노무자들 역시 깨지거나 상할 위험이 있는 물건은 바닥에 내린 뒤에 손을 뗍니다.
그러나 우리 노무자들은 그냥 집어던지는 경우가 흔합니다. 일본의 마쓰시다 엔진을 수입하여 조립하는 자동차 회사가 있는데 똑같은 부품들이지만, 국내기술자가 조립한 제품이 수입품보다 소음이 더 크다고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일에 대한 정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프로근성을 배워야 한다.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영원히 일본의 예속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그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그들을 깨우쳤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들에게 예속되어 버린 듯 합니다. 우리는 이 불행한 현실 앞에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의 도움을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제 어떤 신문은 제일 면에 “여기가 동경인가 서울인가”고 묻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일본풍의 젊은이들의 사진을 싣고 있습니다.
오늘 신문에는 “우리 아이들 일인으로 커간다”고 한탄합니다.
어려서는 일제 유아용품으로 자라납니다. 10대가 되면 “세가” “닌텐도”가 만든 전라오락기 두드립니다. 20대가 되면 일본식 옷을 입고 가라오케를 즐깁니다.
1910년 8월 22일 이 땅을 송두리째 삼킨 일본은 황국신민화에 혈안이 되었으나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해방된 조국에서 원격조종 당하고 있으니 기가 막힌 일입니다.
“나라를 위하여 우신 그리스도”
(눅 19:41-44)
어려운 무더위에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을 기원합니다.
특별히 건강에 유의하고 더위에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 그리스도의 우국의 눈물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무척 아끼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예루살렘성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죄악으로 가득 차게 되었을 때에 너무나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눅 13:34.35).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는 한때 공평과 의가 충만하였으나 이제는 죄의 소굴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었도다”(사1:21).
예수님은 창기와 같이 범죄한 도성이었으나 예루살렘을 사랑하여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음같이 그들을 품어 안으려고 몇 번이고 시도하였으나 그들은 거절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죄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죄 값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13:35).
이 예언은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시 성취되었습니다. 이 비극적인 사실을 예견하신 예수님은 너무나 슬펐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시면서 우셨던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신 기록이 세 번 나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요11:35).
예수님은 또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면서 우셨고(눅 19:41), 또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셨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신 것은 인정적인 눈물이요, 예루살렘 성을 내려보시면서 우신 것은 민족의 앞날을 위한 애국적인 눈물입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신 것은 자기를 위한 종교적인 울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본문은 그 두 번째 울음입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41).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멀리 성이 보였습니다. 아름다운 성입니다. 평화의 성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한때 신실하던 성읍입니다. 이 같은 성읍이 죄 때문에 망할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예루살렘은 유대교인들에게는 물론 기독교와 이슬람교도들에게도 다 같이 “거룩한 도시”입니다. 특히 유대교와 기독교도들에게는 “위대한 왕의 수도”로서 거룩한 도성입니다.
예루살렘은 구약에 나오는 도시 중에서 제일의 도시인데 성경에는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었습니다. 살렘(시76:2), 모리아(창22:2), 여부스(수18:28), 시온(왕하19:21), 다윗의 성(삼하5:7), 아리엘(사29:1), 거룩한 도시(마4:5)등으로 호칭되었습니다. 이 땅은 오래 동안 가나안 사람의 성이었는데 BC 1,000년경 다윗에게 점령되고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분열된 후에는 남왕국 유다의 수도였습니다.
솔로몬 왕은 여기에 성전을 세웠고 선지자 이사야 등도 이 예루살렘성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BC587년 이성은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게 망했으나, 바사왕 고레스에 의하여 재건되었고, 헬라와 로마를 통하여 통치되었으나 유대인에게는 가장 신성시 되는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은 또 예수님의 생애와 관계가 깊고 특히 그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의 무대입니다. 이렇게 하여 예루살렘은 기독교에 있어서 거룩한 도시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41).
누가에 의하면 이 때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37).
예수님은 감람산 모퉁이를 돌아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고 있었는데 예루살렘성이 다 보였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멈추시고 성을 한참 바라보시더니 눈물을 흘리시며 우셨습니다. 평소에 눈물을 별로 보이신 적이 없으신 예수님의 이 울음은 예사로운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면서 우셨을까?
오늘 우리 본문은 어렴풋이 그 이유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이 우신 것은 예루살렘성이 참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는 숨기웠도다”(41.42).
예루살렘의 옛 이름은 살렘입니다(시 76:2, 창14:18). 이 살렘은 옛날부터 평화의 성으로 알려졌습니다(히7:2). 멜기세덱은 본래 살렘 왕인데 그를 평강의 왕이라고 말한 이유도 바로 이점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인사말에 샬롬(shalom)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안을 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를 어떤 가정에 들어갈 때에 먼저 “평안을 빌라”고 하였고(마10:12), 제자들에게도 친히 평안을 비셨습니다(눅 24:36). 이 살롬과 살렘은 같은 어근에서 나온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의 눈에 비친 저 예루살렘성은 평화의 성인데도 진정한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가슴 아팠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평화롭게 보이는 성이었으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 너무나 답답하고 안타까워 우셨는지도 모릅니다.
그 이름은 평화의 도시였으나 그 안에서는 오만가지 죄악이 판을 치고 있었으며, 의인을 돌로 치는 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사야선지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이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셨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를 병들었고 온 마음을 피곤하였으며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매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1:2-6).
그런데도 유다나 예루살렘 성민들은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그들은 짐승만도 못한 배은망덕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범죄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같이 범죄한 성에 대하여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k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마23:37-38)
이 모습을 보신 주님께서 울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 평안의 길은 없는 것이 아니라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22:21).
우리 모두가 살길은 이길 밖에 없습니다.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의 현실이 어려운 것만은 사실입니다. IMF 때문에 실직자가 많고, 경제적인 여건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북한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안보가 위태로운 것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말 위태롭고 두려운 일을 하나님을 등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 배반하고 잘 된 나라 없고, 범죄하고 흥왕한 나라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우상 때문이요, 로마가 망한 것은 죄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2) 예수님이 우신 것은 예루살렘 성민들이 그들에게 임할 자신들의 운명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들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은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43.44).
예수님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유대인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메시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영접하지 안했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1:11).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오히려 예수를 붙잡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무서운 죄요 엄청나게 큰 죄입니다. 이 죄 값이 얼마나 크고 무서운 가에 대하여 본문은 밝힙니다.
“날이 이를 찌라”고 하였습니다. 이날은 종말의 날 곧 심판의 날을 말합니다. 이 예언은 훗날 AD 70년에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망할 것을 예언한 말입니다.
그때에 “원수들이 토성을”쌓았다 했습니다.
AD 70년 로마의 디도장군은 예루살렘 성 밖에 토성을 쌓아 유대인을 그 성에 가두었습니다. 때마침 유월절 절기에 모여든 사람이 100만 명이 넘었는데 그들은 성안에 갇혔습니다. 얼마 후 그들은 먹을 양식이 없어서 다 굶어 죽었고 로마군의 칼에 찔려 죽어야 했습니다.
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예루살렘성의 완전 파괴를 묘사한 말입니다.
이 예언들은 사실로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AD 70년 로마의 디도장군이 예루살렘을 침략하였을 때, 아이들을 메어쳐서 학살하였고 성전과 성곽뿐 아니라 전 도시를 쑥대밭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 파괴가 얼마나 심했던지 그 곳을 찾은 유대인들이 그 옛성 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합니다.
지금은 평화롭게 보이는 저 성이 얼마 후에는 쑥대밭이 될 것이라고 상상해 보세요. 하나님께 거룩한 제사가 드려지는 저 성전에 돼지고기의 제물이 놓일 것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저 무지한 100만의 영혼이 디도의 칼에 피를 뿌릴 것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아무도 울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불쌍한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안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하니하였도다. 보라 네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마23:37.38).
예수님은 이렇게 망한 성을 바라보시며 우신 것입니다. 나라의 장래가 너무나 암담하여 걱정하다가 우신 것입니다.
일본은 노일 전쟁에 승리한 후 만주에 일본인을 이주시켜 그 곳을 지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인의 심한 반발에 부딛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대륙침략의 한 방편으로 우리나라를 이용하여 그 뜻을 이루려고 정책을 바꾸었습니다.
그들은 1910. 8. 22일 한일합방을 이룩한 후 토지 수탈 정책을 썼습니다. 그들은 전국토를 측량하여 땅을 빼앗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아침에 문전옥답을 잃어버린 동포들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괴나리봇짐을 싸 짊어지고 무작정 만주로 떠났습니다. 더러는 살길을 찾아, 더러는 탄압에 못 이겨, 더러는 독립운동을 꿈꾸며 찾아야 했던 곳이 바로 만주 땅 간도입니다.
간도는 1905년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땅입니다. 그러나 일제는 1909년에 한일합방을 위한 하나의 흥정으로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통해 이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었습니다. 정말 원통한 일입니다. 일본은 철천지원수의 나라입니다. 만일 이 일만 없었다면 그 땅은 중국 땅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연변 조선족 자치주 주민들(60:40)은 옛날 일제의 압박을 피해 두만강을 건넜던 자들의 후손들입니다. 그러나 일제는 그 곳에 사는 동족들이라 하여 편안히 살게 버려두지는 안했습니다.
처음에는 중국인과 조선인들을 이간시키려 하였고 나중에는 1920. 9월 드디어 흔춘사건을 조작하여 간도 땅의 우리동족 20,000명을 학살 했습니다. 흔춘사건이란 일제가 마적단을 매수하여 그들로 하여금 흔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게 한 후 그것을 우리 한국인의 소행으로 뒤집어 씌워 군대를 출동시킨 조작극을 말합니다.
악명 높은 관동군은 무차별 학살하고 집집마다 불태우고 닥치는 대로 약탈했습니다. 이른바 삼광 정책인데 살광, 요광, 창광입니다.
이 간도 땅에서 부른 동족들의 “고난의 노래”가 있습니다.
“피에 주린 왜놈들은 뒤를 따르고,
괘씸할사 마적떼는 앞길 막누나
황야에는 해가 지고 날이 저문데,
아픈 다리 주린 창자 쉴 곳을 찾고
저녁이슬 흩어져 앞길 적시니,
쫓기는 우리 신세 처량하구나”
저는 中國訪問時 백두산을 오르면서 조국 통일을 기도했습니다. 백두산 온천에서 목욕을 하면서 이 민족의 죄악을 사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두만강 물에 손을 씻으면서 실지회복을 기도했고 그곳 두만강 조약돌을 손에 들고 이 땅은 우리 땅이라고 속삭였습니다.
저는 용정을 방문하면서 선구자의 노래를 기억했습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 깊었나”
저는 백두산을 거쳐 두만강 가를 거닐 때 남이장군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세조3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이시애가 함경도 길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우대장으로 출전 개선했습니다. 그는 27세에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유자광의 무고로 능지처사 당했습니다.
그가 서북변경의 적들을 토벌할 때 지은시가 있습니다.
白頭山石 磨刀盡 頭滿江水 飮馬無
男兒二十 未平國 後世誰稱 大丈夫
오늘 우리 중에는 이 같은 청운을 품은 젊은이가 많지 않은 것 같아서 안타깝고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유자광은 이시애 난 때 자원종군 하였습니다. 그는 남이장군과 영의정 강순 등이 모반한다고 무고하여 숙청하였습니다. 그는 자기보다 뛰어난 자는 반드시 모함했습니다. 나중에는 한명회를 모함했다가 파직당해 유배지에서 눈이 먼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참으로 불안합니다.
6.24동란 49년이 되었으나 아직도 우리조국은 통일되지 못한 채 세계유일의 분단국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산가족 일천만은 그리운 고향땅도 밟지 못한 채 한 사람 두 사람 죽어가고 있습니다. 서해에서는 일촉즉발의 위기가 오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여야는 정치 싸움만 계속하고 있습니다.
IMF의 후유증은 국민들의 가슴속에 불만불평을 배가시켰습니다.
정신 나간 사람들은 사치와 낭비로 가난한 동포들을 울리고 있습니다.
빈익빈 부익부의 격차의 골은 날로 더 깊어만 가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지 걱정이 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국의 눈물을 흘려야 할 때입니다.
우리 자신의 무력한 모습 때문에도 울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