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된 사역자(1) 빌2:14-18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함께 예배의 자리에 나아온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그 동안 우리는 ”건강한 교회” 그리고 ”자랑스런 성도”라는 제목으로 본문을 두 차례 살폈습니다. 먼저 우리는 ”건강한 교회”라는 제목으로 건강한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가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새롭게 했습니다. 우리 안에 계셔서 새로운 소원을 창조하시며 새로운 사역을 창출하시는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지난 주일 우리는 ”자랑스런 성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자랑스런 성도는 ”무슨 일을 하든지, 불평이나 시비를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모든 일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또한 자랑스런 성도는 ”흠이 없고 순전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외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일이 없어야 하는 동시에 내적으로 무흠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랑스런 성도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는 사람입니다.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는 하나님이 바라는 ”건강한 교회”와 ”자랑스런 성도”의 모습이 담겨있는 동시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충성된 사역자”에 대한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자랑스런 성도들로 구성된 교회입니다. 그러나 자랑스런 성도들은 충성된 사역자들을 통해서 배출됩니다. 그러면 본문 속에 새겨진 충성된 사역자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첫째로 충성된 사역자는 그 사역의 목표가 분명한 사람입니다. 15절은 한 마디로 그 사역의 목표를 성도들을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 삼는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충성된 사역자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만들려는 뚜렷한 목표를 가진 사람입니다. ”밤하늘에 별들처럼” 빛나는 성도가 되도록 하겠다는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바울은 사역했습니다. 지난 주일 우리가 집중적으로 살핀 14, 15절은 그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즐겁게 순종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기쁠 때와 슬플 때도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삶입니다. 특히 본문은 성도 상호간에 불평과 시비를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로를 향해서 불편한 안팍의 감정을 품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뒤에서 비난하거나 숙덕거리거나 하는 행동은 나쁜 감정을 유발시키지 좋은 느낌을 증진시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경건하지 못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한 가운데서 원망과 시비가 없이 살아갈 때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시며 우리를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을 준비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을 신뢰하기에 서로 간에 관대하게 처신할 수 있습니다. 혹 앞으로 손해보아도 뒤에서 갚아주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하게 순종해야 합니까? 그것은 흠이 없고 순결해 질 때에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기독교인들은 온실 같은 유리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적의로 가득 찬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비뚤어진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깊은 숲 속이나 계곡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기독교인으로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닙니다만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 가운데 남아 있어야만 합니다. 거기서 세상을 향해서 증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곳은 바로 이 세상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기 위해 우리는 세상 가운데 남아 있어야 합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 비추는 것입니다. 부패한 세상 가운데서 우리는 순결하게 사는 것입니다. 뒤틀려지고 악한 세상 가운데서 흠이 없이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증거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뚜렷한 목표를 가진 충성된 사역자입니다. 빌립보 성도들 을 흠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삼는 사역을 그 목표로 정한 것입니다. 어두운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도록 만드는 것이 빌립보 성도를 향한 목표입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부족하지만 저도 여러분을 향한 꿈이 있습니다. 한날 흠도 티도 주름 잡힌 것이 없는 성도로 여러분을 만들고자 하는 꿈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이 예배실로 올라오면서 달라진 교회당을 살펴보셨습니까? 오늘도 ’노란 주보’를 받은 분은 그럴 겨를이 없었겠습니다만 혹 어제 청소하려 오셨거나 오늘 일찍 오셔서 지하실과 1층 각 방을 살펴보신 분은 완전히 옛날과 달라진 모습으로 인해 놀라셨을 것입니다. 비록 아직 마지막 손질이 남아있습니다만 어두컴컴하고 음산한 공간들이 밝고 생기 있는 공간으로 변모한 것을 확인하셨을 것입니다.
옛 공간이 달라질 수 있듯이 여러분의 삶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 걸 맞는 밝고 생기 있는 모습으로 변모할 수 있습니다. 교회내의 공간을 교육과 교제의 장으로 바꾸고 싶은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여러분 각 사람을 향한 소원이 있습니다. 공간이 몰라보게 달라진 것처럼 여러분의 마음 상태와 삶의 모습이 감동적으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모닝 필”이라고 하는 회사에 믿고 맡겼던 것처럼 이제 3월 새학기를 앞두고 교회가 준비한 훈련과정에 여러분 자신을 내어 맡겨보십시오. 새가족공부, 새생명훈련, 제자훈련에 자신을 드려보십시오. 공사 중인 과정에서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없다할지라도 공사가 끝나서 제 모습을 들어낼 때는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건물도 손대지 않았더라면 변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개보수를 하기로 결정하고 맡겼기에 오늘의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올 한 해도 여러분은 자신에 대한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고 싶은 분들은 성경대학, 제자훈련에 자신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밤하늘의 별과 같이” 어두운 세상에서 아름답게 비취기를 바라는 분들은 이제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을 지금 모습 그대로 천국에 보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을 아름답게 신부단장을 해서 주님을 만나 뵙게 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로 충성된 사역자는 그 자랑하는 것이 구별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자랑하며 살아갑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하여 날뛸 때가 언제입니까? 아주 사소한 것으로 기뻐하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첫 발을 뗀다든지, 처음으로 학교에 간다든지, 윗사람에게서 치하를 들을 때라든지, 또 어떤 일을 잘 하게 된다든지 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때는 그 보다 더 큰 일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뭐 자녀가 대학을 졸업한다든지 아니면 결혼을 시킨다든지 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혹은 대통령으로부터 감사장을 받는 것이라든지,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든지 하는 경우도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들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자랑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우리의 생애에는 이와 같이 크고도 감격스러운 일이 많이 있습니다.
충성된 사역자 바울 역시 이와 같은 자랑의 순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랑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가끔 자랑하던 것들은 보통 사람들의 것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종종 기독교인이 된 행복을 자랑했습니다. 여기 오늘 본문에서 자기의 마음을 열고 자랑스런 순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6절부터 읽어드리겠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충성된 사역자는 무엇을 자랑하는지 주목해 보십시오. 그 자랑은 바로 ”그리스도의 날”에 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충성된 사역자 바울은 그 자랑을 그가 땅 위에서 사는 날 동안에 자랑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구하고 있습니다. 그 날은 무슨 날입니까?
앞서 바울은 이 날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 날은 예수께서 세상을 심판하려 오시는 날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합니다. 그날은 만물이 새로워지는 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심판 주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날 모든 사람들이 왕 중의 왕의 보좌 앞에 설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온 모든 것을 직접 고할 것입니다.
그 날 바울은 자랑으로 가득할 것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 무서운 심판의 날에도 아무런 두려움을 갖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심판자께서 그의 생애를 모두 점검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 바울은 두려움이 아니라 자랑으로 가득할 것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언젠가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사실 바울이 자랑스러움으로 서게 될 그 같은 날에 여러분은 어떻게 그 자리에 설 것입니까? 그 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생각과 모든 말들과 행동을 검열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사역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봉사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사용하고 있습니까?
심판 날 자랑하는 대신 어쩔 줄 모르는 자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미 생애와 의지를 그리스도께 드렸습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연보궤에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주일을 잘 지켰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끄러워할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면서도 거짓말하고 속이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주일을 지키면서도 신자답게 엿새를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사랑을 말하면서도 형제들과 싸우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같이 자랑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우리 역시 바울처럼 심판 날 하나님 앞에 설 것입니다. 사실 바울도 심판 날에 대한 실제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0-11절을 보십시오. 10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그리고 11절에서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앎으로 사람을 권하노니”라고 말합니다. 이 주의 두려우심은 바로 심판 날에 관해서 언급한 말입니다.
바울은 그 날에 대한 개인적인 두려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그 날의 두려움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빌립보서 2장 16절은 두려움 대신에 오히려 자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자랑하게 할 것입니까? 고린도 후서에는 그 날의 무서움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왜 빌립보서에는 그 날의 자랑을 내다봅니까?
그것은 바로 그가 사역한 빌립보 교회 때문입니다. 심판날 빌립보 교회는 그의 자랑이 될 것입니다. 빌립보 4장 1절을 보십시오.”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 자매인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이라고 빌립보 성도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 작은 개척교회는 바울이 수고한 열매입니다. 그들의 신실하고 순결한 믿음은 심판 날 바울의 자랑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자랑하는 사역자들입니까? 여러분의 사역의 결과가 땅위에서 자랑하는 것으로 결정됩니까? 숫자로 자랑할 수 있는 등록교인이나 출석교인입니까? 아니면 평수로 자랑할 수 있는 대지나 건물의 크기입니까? 아니면 충성된 여러분의 사역을 보상하시는 땅에서 받는 축복입니까? 자녀들이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장래가 보장되고 연봉이 괜찮은 회사에 취직입니까?
아니면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날에 판정될 것들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날은 영원한 운명이 판정되는 날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날은 그가 세상을 살면서 행한 대로 보상받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지금 빌립보 성도들로 하여금 그가 전한 복음 메시지를 굳게 잡도록 권고합니다. 그 메시지는 그들의 미래에 생명을 줄 뿐 아니라 현재의 삶을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그가 전한 복음을 붙잡고 계속적으로 그 요구에 복종하면 그는 그들로 인해 그리스도께 자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때문에 주님이 나타나시는 날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게될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뒤틀어지고 사악한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면 바울은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즐거워할 것입니다. 만일 빌립보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한다면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 할 것”을 확신합니다.
여기 달음질이라는 단어와 수고라는 표현을 살펴볼 가치가 있습니다. 만약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의 소원을 들어준다면 그가 헛되게 달리지 아니했고 헛되게 노력하지 아니했다는 것을 알게 될 날을 지금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는 여기서 달음질이라는 말과 수고라는 표현을 통해서 자신의 사역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달음질이라는 표현을 가끔 사용합니다. 운동 경기장에서 달리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표현을 통해서 바울은 자신이 어떤 사역자인지를 밝힙니다. 달음질에 승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자신을 철저하게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경기에 임하면 최선을 다해 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규칙을 따라서 경기하며 있는 힘을 다해서 달려야 상급을 얻습니다. 그는 금메달을 얻으려고 달리는 선수처럼 최선을 다한 사역자입니다.
또 하나의 표현은 수고하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천막을 만드는 천을 짜는 자신의 직업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 어떤 일꾼보다 열심히 자기 일에 매달린 사람입니다. 한순간 천을 잘못 짜면 천막을 만드는 원단으로서 가치가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한 눈 팔지 아니하고 천을 짜던 사람입니다. 천을 다 짰을 때 잘못 짠것으로 판정을 받고 값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여기서 헛되이 천을 짠 사람이 아니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사역자 여러분, 전임 사역자들 뿐 아니라 말씀을 가르치며 구역을 맡아서 봉사하는 사역자 여러분, 그리고 찬양대를 봉사하며 혹은 중보 기도사역을 감당하는 사역자 여러분, 혹은 주님의 이름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현장에서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는 지역봉사자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심정으로 어떤 자세로 사역에 임하고 있습니까? 충성된 사역자는 그 자랑하는 것이 다르기에 그 사역하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충성된 사역자는 사역의 위한 분명한 결단이 있는 사람입니다. 17, 18절을 다시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믿음의 제사와 예배에 나의 피를 붓는 일이 있을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이와 같이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지금 생명의 말씀을 밝히기 위해서 경주자처럼, 숙련된 일꾼처럼 열심히 사역을 했습니다. 그의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빌립보 성도들이 자신들에 대해서 너무 비관적으로 여기지 않도록 분위기를 바꾸어 말합니다. 오히려 그들의 믿음의 제사와 봉사야말로 생명의 말씀을 굳게 잡고 있는 증거요 그의 사역이 헛되지 않은 증표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 자신은 계속해서 고난을 받더라도 기뻐하리라고 분명한 결단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고난은 마치 그들의 희생제사 위에 부어지는, 그리하여 제사를 완성시키는 관제와 같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관제로 드리다”는 동사는 실제로는 ”쏟아 붓다”는 뜻입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 드린 고대 제사를 연상해봅시다. 사람들은 제물을 가지고 제단으로 나아갑니다. 그 제물은 살아있는 동물이며 흠이 없는 정결한 동물입니다. 그 동물은 죽임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 후에는 제단 위에서 불에 태워질 것이고 그 동안 향기로운 향내가 퍼져갈 것입니다. 이때 관제(헌주)라고 부르는 제물을 한번 더 바칩니다. 포도주 잔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 그것을 붓습니다. 그러면 뜨거운 제단에 부어진 술은 증기와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
하긴 한국의 제사와도 유사합니다. 죽은 이의 영전에 제물로 음식을 차려 놓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린 후에 그 제물을 먹습니다. 제사를 드릴 때 그 순서가 마지막에 이르면 한 사람이 일어나서 잔을 따릅니다. 묘소에서 제사를 들릴 때는 잔을 땅에 붓습니다. 바울은 지금 그와 같은 순서를 떠올리며 말합니다.
물론 그는 지금 경기장의 달리기를 말하며 작업장의 억척스런 수고를 말하다가 갑자기 제사를 지내는 장면으로 넘어가서 말합니다. 하지만 표현 방식만 바꾼 것이지 표현하려고 한 주제인 수고와 애씀에 대해서는 바뀌지 아니했습니다. 사도된 증표는 남보다 더 큰 수고와 고난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제사는 그리스도의 제사로 말미암아 끝장을 보았지만 바울은 가끔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제사로 드려야 한다는 상징적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구절이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빌립보서에도 그들의 가난 가운데 드린 연보를 가리켜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제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본문에서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가리켜서 제사에 쓰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라고 말합니다.
물론 관제가 무엇을 의미했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대체로 자기의 임박한 죽음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드린 제사의 극치로서 자신의 순교의 피를 뿌리려는 결단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뜻일 것입니다. ”나는 내가 로마의 감옥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내 목숨이 곧 이방인의 제단에 제물로 바쳐지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여러분은 나에게 대하여 염려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생명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 생명이 쏟아 부어질 때 그것은 다만 여러분의 믿음이라는 제물 위에 부어지는 헌주와 같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문맥상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무엇보다 기쁨의 감정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빌립보서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기쁨이지만 이 부분은 특히 그것이 두드러져 있습니다.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라는 앞 뒤 문맥과 순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