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된 사역자/빌2:25-30
에바브로디도,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이름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를 기쁨으로 영접하고 존귀히 여겨야 할 자로 소개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함께 예배의 자리에 나아온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우리는 그동안 충성된 사역자들을 살피고 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의 헌신에 자신을 마지막 드리는 술과 같이 쏟아 붙겠다는 충성된 사역자 바울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서 지난 주일 우리는 충성된 젊은 사역자 디모데를 만나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젊은 목사 디모데에 이어서 그 충성에 있어서 탁월한 평신도 사역자 에바브라디도를 만나볼 차례입니다.
빌립보 4장 18절은 그를 빌립보 교회에서 옥중에 있는 바울에게 연보를 전달하기 위해 보낸 사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에바브라디도는 이 연보를 가지고 로마의 옥중에 있는 바울에게로 갔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온라인 송금을 할 수 있는 금융제도가 없었을 때입니다. 아무리 길이 멀어도 돈을 보내려면 사람들이 직접 가지고 가는 길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 때입니다.
뿐만 아니라 에바브라디도는 감옥에 있는 바울의 시중을 들기 위해서 파송된 사람이기도 합니다. 당시 세상에서 가장 탁월한 법 제도를 자랑했던 로마 정부도 죄수에게 기본적인 생활 여건을 충족시켜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먹고 입고 씻고 하는 일에 대해서 아무런 대책도 없었던 시절이기 때문입니다. 옥중 수발은 가족들이나 친구들의 몫이었습니다.
마치 지금도 후진성을 벗지 못하는 우리의 입원제도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사람이 입원을 하면 가족이나 친지가 왼 종일 시중을 들어야 하지만 선진 의료제도가 실시되는 나라들은 환자가 전적으로 간호원의 시중을 받고 가족 친지는 다만 면회를 할 따름입니다. 환자 하나 하나를 돌볼만큼 간호원의 손이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옥중에 있는 사도 바울을 무척 염려하던 빌립보 교회는 그를 돌봐줄 사람으로 에바브로디도를 파송했던 것입니다. 그의 의식주 문제부터 외로움을 달랠 친구 역으로, 그리고 병에 걸릴 때는 간호하는 사람으로 여러 가지 도움과 우정이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에바브라디도는 로마에 남아서 바울을 돕고 시중들기 위해서 교회가 보낸 사람입니다.
30절은 그의 일을 한 마디로 요약합니다.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그런데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을 섬기는 동안 심한 병에 걸렸습니다. 사실 거의 죽기에 이르도록 심하게 앓았습니다. 바울은 27절에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라고, 한때 그의 병세가 얼마나 위중했는지를 기록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빌립보 교회가 전해 듣고 전에 바울에 대해서 걱정했던 것처럼 에바브라디도의 건강과 오히려 바울에게 짐이 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염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에바브라디도를 긍휼히 여기시고, 에바브라디도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에바브라디도가 자기를 위해서 고향 교회가 걱정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능하면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가서 그들을 안심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바울도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에바브라디도 자신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이 편지를 가져간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충성스런 동역자 에바브라디도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의 모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가운데 이 이상의 것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이나 바울처럼 역사에서 그 이름이 찬란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베드로나 디모데나 스데반처럼 잘 알려진 유명한 성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한 평범한 성도, 에바브라디도를 본이 될 만한 성도로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군대라면 에바브라디도는 어쩌면 하사관에 해당하는 병사입니다. 하나님의 군대 모두가 장군일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나 베드로 같은 장군도 필요하고 디모데 같은 젊은 초급 장교도 필요하며 에바브라디도와 같은 병사도 필요합니다. 모두다 바울처럼 선교할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처럼 한번 설교에 30명씩 회개시키는 설교를 할 수는 없습니다. 스데반 같은 순교를 할 수는 없습니다. 솔로몬 같은 영감있는 기도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이 에바브라디도와 같습니다. 하지만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군사들입니다. 세상의 눈에는 그렇게 영광스런 것이 되지를 못합니다. 신문 제 1면에 이름이 나는 성도들은 우리 가운데 별로 없어 보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평범한 기독교인들입니다. 서리 집사 아니면 평 교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책을 쓴다거나 설교를 한다거나 교회를 위해 엄청난 연보를 드리는 처지에 있는 자들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통 기독교인들이며, 단순한 평 교인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유혹이나 죽음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들은 기도하고 증거하고 예배하고 봉사합니다. 성경은 위대한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자주 말합니다. 그런데 평범한 신자들은 하나님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요? 평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할 수 있는 충성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에바브라디도를 봅시다. 그에 대해서 바울은 어떻게 말합니까?
먼저 바울은 에바브라디도를 \"나의 형제\"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말로서 에바브라디도가 믿음에 하나된 자임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권속 중 하나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에바브라디도에 대한 깊은 형제의 사랑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은 동시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당면한 문제 때문에 모였으나 문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서로로부터 분리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형제인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악한 세상에서 성도들은 모두 형제입니다.
그런면에서 예배 참석하는 것은 음식점에 가서 음식을 먹는다든지 영화관에 가서 재미있는 영화를 보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것은 다릅니다. 여러분 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피치 못할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함께 예배하는 자들과 더불어서 형제 자매란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예배 마치고 나면은 \"반갑습니다.\" 라고 인사를 합니다.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토록, 지상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사람들이 우리 육신의 관계에 대해서 말들 하지만 그 관계들은 모두 이 세상과 함께 끝이 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함께 예배하는 이 관계는 세상과 함께 끝나지 않습니다. 세상이 모두 사라져버린 이후에도 우리는 서로 형제 자매로서 하나님의 보좌를 옹위하고서 함께 찬양할 한 운명공동체라는 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러기에 이 가족과 형제관계는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서로에 대한 관심을 보십시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이 감옥에 있는 동안 필요한 것을 돕기 위해서 바울에게 에바브라디도를 보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사람이 아닙니다. 동향인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들과 혈연관계에 있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허나 그들은 그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준 바울을 돕기 위해서 에바브라디도를 보냈습니다. 그것은 형제 사랑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형제로서의 관심 때문에 사도 바울을 돕기 위해 그를 보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 역시 자기를 자식이 아비를 섬기는 것처럼 섬겼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 대해 품었던 관심을 살펴보았습니다. 에바브라디도는 로마에서 바울에게 절실한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해서 그를 돌려보냅니다. 바울의 우선적 관심사는 그들의 필요였습니다. 이것이 형제관계가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울산교회가 형제의식을 회복하는 건강한 교회로 나아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교회가 커질수록 우리가 노력하지 아니하면은 관계가 소홀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합니다. 그 중에 좋은 것이 교회에 오면은 서로 모르는 사람하고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믿음 안에서 한 형제 자매라는 의식을 회복해서 형제의 사랑을 나누고 형제 사랑을 계속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배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은 필연적으로 친교공동체의 일원입니다. 달리 말해서 함께 예배드린 사람들은 모두 형제 자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예배드린다면 동일한 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무심한 대상이 될 수가 있습니까? 서로가 소중한 형제 자매라는 것을 확인해 보십시오.
동시에 저는 같은 신앙을 가진 우리 모두가 형제의식을 회복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울산 광역시에 거하는 모든 성도들이 소속된 교회의 이름이 무엇이든지 간에 서로 형제 자매라는 사실에 대해서 새삼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번 4월 부활주일에는 모든 교회들이 오후에 동천체육관에 모여 연합예배를 드리려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꼭 성사되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또한 그를 나와 \"함께 수고하는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나의 동역자\"라고 번역할 수 있는 그 말은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관계를 잘 설명합니다. 신약에 나오는 13번 가운데 12번 바울이 사용한 이 말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직 전해지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 사역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 동역자들입니다. 형제관계에서 더 나아가 함께 수고하는 동역자입니다. 하나님의 권속의 생활은 같이 쉬고 같이 기도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활동하고 함께 봉사하는 생활이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생활입니다. 우리 모두는 동일한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언제나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것처럼 우리도 함께 일하는 자들입니다. 일꾼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평범한 생활 속에서의 일꾼이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고통에서 제외되지도 않습니다. 아니 거의 죽음의 문턱에까지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맡은 사명에서 물러설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 부름 받았습니까?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일\", 즉 사람들에게 그들의 위험을 밝히 말하여 생명의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일을 함께 수종 드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이 114운동에, 한 사람이 한 영혼 구원하기 위해 네 명의 이름을 적어내는 일은 \"그 분의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한번 기억을 해 보십시오. 내가 아니면 누가 그들을 건져내겠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영혼 구원의 일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동역해야 할 영역들이 있습니다. 첫 째로 지적인 영역에서 열심히 일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를 부정하고 빈정되는 달변가들의 헛된 이론을 폭로하는 이론가들, 작가들, 대중적인 설득력을 지닌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둘 째로 여러 가지 사회 봉사 영역에도 열심히 사역할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영연방 곳곳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하도록 힘을 결집한 배후에는 기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어린이 노동을 폐지하고 좀 더 좋은 노동 환경을 위해서 노력한 배후에 동참한 기독교인들의 활동이 이 시대에도 필요합니다. 현대 사회 사업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구세군처럼 우리 시대에도 훌륭한 사역을 시도해야 합니다. 근대적인 학교, 병원, 고아원 등 모두가 주님 사랑하는 백성들의 헌신의 결과입니다.
셋 째로 복음 전도 분야에서도 새로운 힘을 모아야 합니다. 전도나 선교는 언제나 동역하던 종목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특히 백만 광역시 울산에서는 기독교 이미지 제고를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일은 혼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일은 \"함께\"라야만 가능합니다. 세상 나라를 우리 주 그리스도의 나라로 삼는 일은 반드시 동역 해야할 큰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바울은 세 번째로 에바브라디도를 나와 \"함께 군사된 자\"라고 부릅니다. 말하자면 \"나의 전우\"라는 말입니다. 에바브라디도는 바울과 함께 수고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나란히 싸우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하면서 평화시에 시민들이 하는 일상적인 수고가 아닌 전투를 함께 하고 있다는 의식을 표현합니다. 바울과 에바브라디도는 함께 싸움에 동참한 군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이 싸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앞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 사역을 함께 하는 자일뿐만 아니라 결과적인 고난까지도 동참하는 자입니다. 복음의 대적을 대항하는 싸움에도 함께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로마 군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기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 이전에는 대부분 개인들로써 전투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흔히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무장을 하였지만 싸울 때는 서로 나란히 하여 싸우지 아니했습니다. 그런데 로마는 달랐습니다. 소위 큰 방패를 서로 밀착시켜서 전투에 임했기에, 그 밀집대형의 군대는 고대세계에서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우리는 여기서 함께 군사된 바울과 디모데, 그리고 에바브라디도의 모습으로 배울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언제라도 죽을 준비를 갖추고 있으며, 디모데는 자신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바울이 믿을 만한 유일한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에바브라디도 역시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는 군사다운 군사들입니다. 전쟁에 임해서 모든 것을 조국을 위해서 기꺼이 내어놓는 것이 군인 정신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의 군사된 성도 여러분, 동일한 정신을 가지고 우리 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깁시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목숨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는 군사를 주께서는 원하십니다. 계속되고 치열한 전투 가운데서 군기를 유지하고 사기가 꺽이지 아니하는 군사를 필요로 하십니다. 영광스러운 왕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기까지 일어나 싸울 준비를 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바울이 에바브라디도에게 돌리는 마지막 최고의 찬사는 그가 빌립보 교회 \"너희의 사자요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는 말입니다. 여기 \"사자\"라고 번역된 말은 바울이 자신에게 사용한 \"사도\"라는 말과 꼭 같습니다. 말하자면 교회 내의 엘리트 그룹인 열두 제자에게 사용된 말이기도 합니다. 다시 한번 사도 바울의 의도적인 단어선택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소위 우열이 있지 않고 동등함이 있다는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에바브라디도는 바울과 동등하게 \"사도\"였습니다. 둘 다 사명을 위탁받은 자들입니다. 둘 다 특별한 봉사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전권을 가지고 파송 받은 사람들입니다. 에바브라디도는 보냄을 받은 자, \'사도\'로서 봉사했습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로부터 보냄을 받아 감옥에 있는 바울을 돌보도록 사명을 띠고 온 사람입니다.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이란 그들을 대신한 제사장적인 일을 수행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당시 문화 속에서는 죄수의 삶이 국가에 의해서 보장되지 않던 시절입니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하는 일, 특히 먹을 것을 주는 일은 정부의 일로 여겨지지 아니하던 시절입니다. 말하자면 죄수에게 콩밥이라도 주던 것은 근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감옥에서 필요한 것을 공급하도록 연보를 해서 보낸 것입니다.
에바브라디도의 사명은 바울이 필요한 것을 현장에서 공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일을 일컬어 \"섬긴다\"는 제사장들의 사역에 사용하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30절 뿐만 아니라 4장 18절에도 빌립보 성도들의 연보를 \"향기로운 제물\"이란 제사 용어로 표현합니다. 에바브라디도가 감옥에 있는 바울을 위해서 하는 사역은 제사장의 구별된 직무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애쓰는 자에게 하는 실제적인 도움의 일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요 제사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는 허드레 일조차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의 사역처럼 귀히 여기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추운 날 바깥에서 차량 봉사를 하는 일이나 더운 날 주방에서 땀흘리는 봉사가 모두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제사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를 수종들도록 교회가 보내준 에바브라디도를 이 편지와 함께 다시금 돌려보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첫째 이유는 자신의 병든 소식을 듣고 염려하는 교회 때문에 심히 걱정하는 에바브라디도 때문입니다. 간절히 사모하고 근심하는 에바브라디도를 도울 수 있는 구체적이고 유일한 방안이기 때문입니다. 고향을 다녀오는 것만이 마음 깊이 자리한 염려를 해결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27절에서 빌립보 성도들이 소문으로 들은 것이 사실이라고 확인해 줍니다. 병들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거의 죽기까지 이르렀다고 밝힙니다. 바울은 에바브라디도가 언제 무엇 때문에 아팠는지 자세히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관대하게 그가 이렇게 심하게 아픈 것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한 것이라고 밝히면서 존경과 찬사를 받아 마땅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치유보다 그 의의를 강조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긍휼의 결과로서 치유를 바라봅니다.
하여간 여기서 흥미로운 관찰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이란 그리스도인에게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며 질병은 죄의 결과 내지 믿음의 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욥의 친구들처럼 질병을 하나님의 징벌로 언제나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잘못인 것이 밝혀집니다. 에바브라디도처럼 최고의 존경을 받아야 할 사람도 병에 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비이기적인 헌신을 한 성숙한 성도입니다만 사역 가운데 병들기도 합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기조차 했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바울의 태도입니다. 바울은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능력의 종들처럼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질병아, 물러가라\"고 명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나은 것은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이라고 말하여 그의 회복이 하나님의 특별한 \"치유의 은사\"라는 것을 짐작하게 만듭니다. 병이 낫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건강을 당연히 요구할 권리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질병은 건강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하나님께로부터 올 수도 있습니다. 건강은 당연히 누리는 것이고 질병의 치유를 당연히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은 바울 자신이나, 드로비모, 디모데, 에바브로디도를 보아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질병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됩니다. 에바브라디도에게 질병은 그의 헌신을 보여주는 증표였습니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자녀들을 영예롭게 해주는 표시가 되는 때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에바브라디도의 탁월함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데에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도박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 성도들을 대신한 그의 사역을 소훌히 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해 명합니다 \"내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주위를 둘러 보십시오. 남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고 존귀히 여기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도 그런 분들의 삶을 본받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요 바울과 디모데, 에바브라디도를 칭찬만 하지 않고 그들의 삶에 동참하는 정직한 반응을 보이는 길입니다. 그들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았듯이 우리 모두 남을 위해 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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