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충성하라/딤후1:13-18
바울의 가르침 속에 전제하고 있는 생명은 두 가지로 변화를 하는데 하나는 썩는 잘못된 변화가 있고 다음에는 성장해 가는 변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은 썩어 가는 변화가 아니라 성장하는 변화를 해야 합니다. 그 생명이 성장하는 변화의 요체가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생명 속에 말씀이 들어가야 성장하는 생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는 생명은 썩어 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썩어 가는 것을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식품이 썩어 가는 것, 하천이 썩어 가는 것, 짐승이 죽어서 썩어 가는 모습을 잘 알고 있습니다. 생명이 썩으면 고정상태에 있지 않고 악취가 납니다. 인간의 인격에는 썩어 가는 인격과 성장하는 인격이 있습니다. 내가 산 사람이지만 정신세계에서 썩은 냄새가 많이 날 수 있습니다. 정신세계에서 영적 세계에서 지식세계에서 썩어 가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어서 시신이 썩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도 어떤 면에서는 차라리 죽은 시신보다도 더 못한 악취를 풍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썩어 가기 때문입니다.
순전한 말씀
사도 바울이 이런 전제 하에서 우리 앞에 복음에 대한 많은 변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신서를 보면 바울이 항상 우리 앞에 다짐하는 말은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순전하게 말씀을 전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사람들, 그것은 말씀의 적입니다. 이 말씀에 대항하는 적을 바울이 서신서에서 계속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말씀을 혼잡하게 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순전함으로 너희들에게 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씀에 대해서 바울이 목숨을 걸고 우리 앞에 변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구성하고 있는 교회를 개신교회라 합니다. 이것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 하는데 프로테스트(Protest)는 대항한다는 뜻으로 말씀의 장애물에 대한 대항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프로테스트라 할 때 말씀을 방해하는 것들에 대해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그릇되게 적용하기 쉽습니다. 교황권은 말씀을 그릇되게 합니다. 의식, 전통, 성자교리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지 않은 것이 자꾸 교회 안에 들어오니까 이것을 대항했던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목사를 볼 때 제일 먼저 말씀의 원리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말씀에 비추어서 얼마나 겸손하냐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사람들 앞에서 형식상으로 혹은 인간관계에서 \'저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다\'라는 평을 듣더라도 그 분이 가르치는 말씀이 교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 앞에서 겸손한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겸손하지 못하면 목사의 겸손은 다른데서는 보충이 안됩니다. 이단사이비 목사들도 인간성이 풍부하고 정이 많고 사랑도 있습니다.
다 갖추고 있는데 말씀을 가르칠 때 보면 교만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지 않는 소리를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 앞에서 겸손해야 그 사람이 진정 목사로서 겸손한 것입니다. 이것을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바울처럼 순전하게 전하는 사람이라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순전하게 전하는 그 사람이 겸손한 지도자입니다. 그런 면에서 목회자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바로 파악하고 바로 전할 것인가 여기에 승부를 거는 것입니다. 이 몫은 교인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의 몫입니다.
믿음, 사랑, 성령
그러면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서 어떻게 하면 바로 우리가 충성할 수 있는가? 그 전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되는데 이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말씀을 붙잡고 충성을 하는데 있어서 그 말씀대로 충성이 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본문 13-14절에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서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면 믿음과 사랑으로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의 설교를 듣고 이 말씀을 지키려면 믿음이 동반되어야 되고 사랑이 동반되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14절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 가지가 나오는데 믿음과 사랑과 성령으로 내가 너희들에게 부탁한 말씀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성도들이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고 말을 하는데 이 세 가지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말씀대로 살게 되고 사랑이 있어야 말씀대로 살게 되고 성령 충만이 있어야 말씀대로 살게 되는데 그것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 한 마디를 잘 듣고 마음에 어떤 감동을 가지면 말씀대로 살아질 줄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믿음과 사랑과 성령으로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지키고 사랑으로 지키고 말씀으로 지키라고 하는데 지금 그것이 잘 안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서신은 잘 되고 있는 측면만이 아니라 잘 안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그 방해물이 무엇인가를 바울이 함께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사람들
15절에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부겔로와 허모게네는 여기에서 좋은 사람입니까? 나쁜 사람입니까? 바울을 배반하고 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너희들이 아는데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동자라는 것입니다. 내 가르침을 거부하고 나를 대항했던 그 불순한 무리들 가운데 허모게네와 부겔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겔로와 허모게네 같은 사람들이 왜 교회 안에서 일어납니까? 왜 교회를 대항하고 지도자를 대항하고 가르침을 대항하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무리들이 일어나느냐는 것입니다.
첫째는 믿음과 연관해서 보면 믿음의 방해꾼은 교회 안에 침투한 율법주의를 말합니다. 이 율법주의가 항상 믿음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를 벗어나야만 믿음을 가지는데 믿음이 자꾸 침해를 당하는 것은 율법주의 의식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옛날에 유대주의자들이 율법주의자로 자처하던 그런 시대와 형식은 다르지만 율법주의의 행동양식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늘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의 근본 특징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사상과 행동입니다. 율법주의는 내가 안 들어가면 안됩니다. 내가 행하므로 나의 행위가 항상 율법주의의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주관주의를 말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종교의식이 있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우상이라도 섬겨야 됩니다. 왜냐하면 종교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이라도 섬기지 않고는 안 되는 무언가를 붙잡고 살아야 되는 게 인간의 종교의식입니다. 그런데 이 종교의식이 전부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기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세상종교입니다. 우리 주변에 가장 많은 샤머니즘을 보면 샤머니즘은 전부 율법적 행동양식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성을 드려야 되고 내가 지성을 다하면 감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샤머니즘을 다른 말로 하면 지성교입니다. 내가 지성을 드리면 다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신종교이고 샤머니즘입니다. 모든 우상종교를 분석하면 전부 나로부터 시작합니다. .
또 선행을 앞세우는 종교도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선한 일을 하느냐? 율법주의라는 것은 그 출발점이 자기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내세우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으면서 더러운 누더기 같은 자기를 함부로 내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것은 누더기입니다. 나의 의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습니까? 못 갑니다. 이 율법적 사고가 믿음을 망치는 것입니다. 믿음은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주되십니다\' 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는 자기 의를 붙잡고 신을 찾아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경계하는 이 율법주의를 항상 우리 안에서 말살해야 합니다.
지식과 믿음
칼빈이 쓴 「기독교강요」라는 유명한 책이 있는데 이 책이 제일 먼저 다루는 것은 지식(Knowledge)에 대한 문제입니다. 칼빈이 말하는 지식의 본체는 성경말씀을 말합니다. 이 성경말씀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이 말씀을 알지 못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칼빈이 거기서 지식이라고 말을 했던 것은 성경에서는 말씀이지만 신학적으로 이 말씀을 칼빈은 지식이라는 말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지식은 모든 주의, 철학, 증명(신학), 인간의 이론, 사상 등 이 모든 것과 대항하는 기준으로서 지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주의는 기준이 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행하느냐에 있지 기준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은 기준이 있습니다. 말씀이라는 기준이 있습니다. 지식이 있습니다. 이것을 바로 붙잡고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18절에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라고 했습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지키라고 했는데 그 사랑이 \'지식에 넘치는 사랑으로\'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랑에 무슨 지식이 필요할까요? 믿음에 무슨 지식이 필요할까요?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기준을 말합니다. 말씀입니다. 성도들은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됩니다. 그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한국인 은행장이 요트를 타고 여행을 하다가 요트가 풍랑을 만나 침몰직전에 이르렀습니다. 구제신호를 보냈는데 그 구제본부에서 \'당신의 위치가 어디요?\'(What is your position?)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을 이 사람은 자신의 신분을 묻는 것으로 오해를 했던 것입니다. 나는 은행장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위치가 어디냐고 묻는데 자기의 지위가 무엇이냐로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지금 네 모습이 어떠하냐? 네 위치가 무엇이냐? 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 대답해야 됩니까? \'저는 어느 교회 집사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집사냐 아니냐를 확인하려고 그것을 묻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묻는 것입니까? 너 서울 사느냐? 너 뭐 하는 사람이냐? 내세울 만한 것이 있느냐? 라고 물을 때 \'네, 라스포스사의 단골입니다, 나 적어도 페라가모의 단골 고객입니다\' 라는 대답이 하나님 앞에 통하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페라 하우스의 수위가 10년 동안 수위를 해도 오페라를 모릅니다. 오페라를 아는 사람은 한번만 봐도 알지만 오페라 하우스의 수위노릇을 10년 했다고 오페라에 대해서 저절로 알아집니까? 우리가 교회를 얼마나 다녔느냐? 네가 지금 뭐 하는 사람이냐? 교회에서 너의 포지션이 무엇이냐? 추천서를 쓸 때 추천서 쓰는 사람의 포지션을 반드시 묻습니다. 추천하는 당신의 포지션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명기하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습니다. 외국에 가 있는 사람이 자주 저에게 추천서를 의뢰하는 것은 담임목사의 추천서를 받아오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섬겼던 교회의 담임목사 추천서를 받아오라고 하니까 나한테 오는 것입니다. 거기에 담임목사(Senior Pastor)라는 말을 안 붙이면 안됩니다. 담임목사라는 지위를 묻는 것인데 이것은 세상의 법적인 문서에서 그런 것이고 하나님은 그렇게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의 순수성을 묻습니다. 네가 율법주의식 신앙생활을 하느냐? 믿음으로 나를 섬기느냐?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준을 잃은 사랑
다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랑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사랑을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 무엇인지 바울이 지적하기를 신비주의로 말하고 있습니다. 허탄한 이야기를 좇아가고 이상한 것에 미혹되고 하는 사람들, 기복주의, 이기적인 욕구에 빠지는 사람들은 신비주의자들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은 남을 변화시키는데는 책임이 없습니다. 자기만 무아경에 빠지고 제 혼자 신선이 되는 기분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은 말씀의 기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비주의자들이 사랑을 제일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감정입니다. 감정은 지식의 기준이 있어야 되는데 신비주의자들은 지식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모 목사를 TV에서 보았지 않습니까? 지식이 필요 없습니다. 신비주의자들은 말씀의 기준이 없습니다. 사랑은 감정적인 요건이 강합니다만 감정은 기준이 있는 감정이라야 됩니다. 기준이 무너져 있는 감정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신비주의 사랑이라는 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 두드러지게 \'저 성도는 신비주의자다\' 라고 구분은 할 수 없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신앙생활의 행태 속에 신비주의적 행동양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복주의적 신앙생활입니다. 무엇인가 주고받는 것이 없으면 안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한 마디 기도했는데 응답이 왔다는 형태로 자꾸 신앙을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복주의가 바로 신비주의의 한 형태입니다.
그리고 이기주의도 신비주의의 한 형태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은 자기가 경험한 그 체험 하나만 붙잡고 다른 것은 전부 불필요하게 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이비는 자기 교회에 와야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난다니 말이 됩니까? 하나님이 자기 교회의 하나님만 되십니까? 신비주의자들은 어떤 한 가지 감정에 사로잡혀서 그것밖에 모릅니다. 다른 것을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잘못 믿으면 무슨 환상을 보지 않고도 신비주의적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도저히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신비주의적 형태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극복해야 됩니다. 극단주의적 이기주의자는 신비주의자들입니다. 자기들이 보았던 그것만 붙잡고 다른 진리를 모두 부정합니다. 오직 내가 겪었던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으로 조화를
다음에 성령 충만과 반대되는 개념이 금욕주의입니다. 금욕주의는 무엇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도피자가 되고 방관자가 되고 결국은 비판자가 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일종의 금욕주의입니다. 공산주의만큼 많은 것을 금하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 북한을 여행하려면 이것저것 하지 말라는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것이 금욕주의입니다. 공산주의는 종교사회학적 개념으로 보면 금욕주의입니다. 공산주의 이론이라는 것 하나를 위해서는 이것도 하지 말아야 되고 저것도 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10절에 보면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헬라어로 보면 \'포이에마\'라는 것인데 포이엠(Poem) 즉 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은 인간 하나 하나가 시의 한 구절 한 구절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시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었다는 말의 어근이 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것은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조화와 균형과 아름다움입니다.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그런 금욕적 사상과 정 반대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이것이 아니다 라고 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필요하고, 안 된다고 했는데 그것이 되고, 하지 말라고 한 것이 하나님 앞에 유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조화요 균형입니다.
한두 달 전에 제게 개인적으로 세 분의 손님이 왔습니다. 아주 지체 높은 분들로 우리 교단의 지도급에 속하는 어른들입니다. 마침 식사 때가 되어 제가 오늘 서대문에서 제일 맛있는 것을 대접해 드리겠다고 하니까 이 어른들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서울에서 제일 잘하는 음식이 있다고 해서 도가니탕 집에 모시고 갔습니다. 그런데 들어가면서 무슨 이런 집이 있느냐고 그러십니다. 아마 식당 중에 제일 열악한 환경이 그곳 도가니탕 집일 것입니다. 방으로 들어가려 하면 도가니 국물과 김치, 음식이 다 보이는 곳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음식이 있는 사이로 지나는 통로가 음식점에 어디 있습니까? 들어와서 환경이 하도 기가 막히니까 그것도 신기한 구경거리여서 귀빈이 오시면 많이 모시고 갑니다. 가면 우선 환경부터 볼만하거든요. 다른데 없는 식당환경이라는 것입니다. 이 어른들이 도가니탕을 잡숫고는 정말 맛있게 잘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동네의 긍지이자 자존심입니다. 사람이란 별미를 먹을 수도 있고 고급식사도 할 수 있고 도가니를 드려도 잘 잡숫고 음식도 이것저것 다 먹으면서 즐길 줄 알고 소화할 줄 알아야지 음식도 한 가지 밖에 못 먹는 사람과 어떻게 살겠습니까?
성령 충만의 세계는 조화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 때 시로 만들었습니다. 만들었다는 그 단어가 시라는 뜻입니다. 시는 조화와 균형과 아름다움 아닙니까? 시에 나오는 글자 하나는 별 것 아니지만 전체가 엮어져서 아름다운 말이 되고 사상을 전합니다.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이 시로 지었답니다. 나를 시로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아름답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성령 춤만은 하나님 세계에 가장 조화롭고 아름답고 균형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금욕주의, 신비주의, 율법주의가 자꾸 교회 안에 들어와서 믿음과 사랑과 성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이것을 자꾸 방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경계하고 가르쳐 주는 것이 사도 바울의 서신입니다.
맺는 말
\'이렇게 충성하라\'는 것은 말씀이 기준이 된 믿음, 말씀이 기준이 된 사랑, 말씀이 기준이 된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충성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기준이 없으면 후유증이 자꾸 일어납니다. 율법주의가 들어가 내가 튀어나옵니다. 일을 잘 해놓고 내가 나오는 그 사람이 바로 율법주의자입니다. 율법주의자나 신비주의자나 금욕주의자는 한 집에 사는 삼 형제입니다. 낯선 친구들이 아닙니다. 이 세 친구들은 근본적인 사상이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구원은 나의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행하도록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너의 그 누더기 같은 자신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 의지하라 그리하면 내가 구원을 주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믿음과 사랑과 성령으로 주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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