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된 교사/약3:1-6
좋은 교사는 어떤 교사인가? 충성된 교사입니다. 교회교육이라는 것은 가르치는 선생이 충성되면 교육이 됩니다. 충성된 그 교사 밑에서 배우는 아이가 복을 받습니다.
본문에 보면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선생이 함부로 되지 말라, 마구잡이로 교사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안 하려는 사람을 사정사정해서 교사시키는 일을 하지 말라는 의미도 포함이 됩니다. 아무나 교사하는 교사 바겐세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정적인 말을 강한 긍정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충성된 교사가 되면 더 큰 복을 받는다”는 말로 바꾸어서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충성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에서 말세의 징조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말세에는 난리가 있고 지진이 있고 온갖 재난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세일수록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으로 살라는 것이 예수님의 결론입니다.
충성되다의 의미
충성되다는 이 말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열심을 말합니다. 충성된 교사는 열심있는 교사입니다. 열심에는 장사가 없습니다. 교사 중에는 유능한 교사도 있고, 보통사람도 있고,많이 배운 사람도 있고, 적게 배운 사람도 있고, 재능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고,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고 모든 조건이 다 다릅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말하는 핵심은사는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일은 충성으로 하는 것이지, 인간적인 조건이나 인간적인 자격을 가지고 하지 않습니다. 교사뿐 아니라 우리가 받은 직분의 수행은 충성됨으로 하는 것입니다. 충성되이 하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교회교육도 해답이 나옵니다.
두 번째는 성실이 있어야 됩니다. 열심만 가지고 안됩니다. 열심히 있는 반면에 거기에 성실함이 가미되어야 합니다. 성실함을 가지고 열심을 내어야 그 열심이 결실을 맺습니다. 성실함을 잃어버리면 이 열심이 우리에게 불균형을 가져다 줄 때가 많습니다.
저가 주일학교 학생들 앞에서 설교를 안 한지가 매우 오래되었습니다. 사실상 담임목사의 직무에서 주일학교 학생들 앞에 설교할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전도사할 때 교사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한 기억도 나고, 평소에 제가 가지고 있는 교사들을 향한 하나의 요구입니다만 교사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결석과 지각을 안해야 됩니다.
결석하고 지각하는 것을 예사로 하면 성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지각을 안 하는게 결석안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가정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세 번 결석하는 교사는 성실도에서 불합격입니다. 그러면 두 번까지는 괜찮느냐? 두 번까지는 봐주자는 것입니다. 가족 가운데 초상이 났을 때 주일이 끼면 한번 봐주자, 또 처녀 총각 교사가 결혼해서 토요일에 신혼여행을 갔으면 그것도 봐주자, 그렇게 두 번은 봐주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 번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 번 결석했으면 성실도에서 불합격이라는 것입니다. 교사를 하겠다고 열정을 가진 사람은 교회 안에서 다른 직분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교사의 직무는 굉장히 힘이 드는 것이고 값진 것입니다. 과격한 말 같지만 잘 새겨들으십시오. 불성실한 교사는 주일학교에서 없어야 됩니다. 불성실한 교사가 주일학교에 있으면 교회교육이 오염이 됩니다. 열심과 성실, 이 두 가지가 충성의 요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충성되이 산다는 말은 그 열심과 성실이 내실을 갖추고 있는 충성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보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성실한 직업인이 되라
이제 다른 각도에서 교사들에게 권면하고 부탁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직업을 성직으로 알고 일하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교사들이 사회에 나아가서 직장을 가지고 있고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전한 직업으로 일하면서 교회에서 교사를 해야 됩니다. 성실한 사회인으로 살면서 교회에 와서 교사를 해야 된다, 다시 말하면 이미 교회 밖에서 성실하게 살다가 교회 안에서 교사를 하라는 것입니다. 건전한 직업인으로서 살면서 교사를 해야 됩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성실은 주일날 교회에 와서 증명하는게 아닙니다.
우리의 열심과 성실은 한 주간 동안 이 세상 속에 살면서 성립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것이 성립이 된 삶을 가지고 주일날 와서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우리 성도들은 전부 선교사입니다. 오늘 예배 마치고 내일부터 사회에 나아가서 세상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선교사들입니다. 여러분들은 불신세상 속에 들어가서 일하는 선교사입니다. 교사들은 그런 사회인으로서, 건전한 직업인으로서, 직장생활을 성실히 함으로서 여러분들이 더 좋은 교사로 다듬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교회교육은 모든 학생을 목사로 만들고, 선교사로 만드는 교육이 아닙니다. 학생들을 건전한 사회인으로,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교회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키워서 세상으로 나가서 성실하게 사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이 교회교육의 하나의 목표입니다.
얼마 전에 저가 사는 동네에 불우이웃을 돕는다는 취지로 사랑의 쌀 모금이 있었습니다. 저가 마침 집에 들어가는 그 시간에 통장으로 보이는 30대 후반의 젊은 여성이 쌀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입구에 들어갔는데 1층에 첫 번째 집을 거두는데 다른 라인을 이미 거두고 왔는지 쌀이 제법 많았습니다. 부대가 한두 말 정도로 여자 혼자 들기는 힘들 것 같았는데 아주 열심히 모금을 합니다. 초인종을 누르고는 “사랑의 쌀 모금을 합니다. 협조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이 교인 집입니다. 교회교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도 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팻말이 부끄럽습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이 사는 동네에 통장을 할 기회가 오거든 여성도들은 사양하지 말고 하십시오. 교회에서 권사, 집사만 하지 말고, 통장을 할 기회가 오거든 통장도 한번 하십시오. 좋은 기회입니다. 통장직을 성실하게 하는 사람이 교회에 와서 집사가 되어야 합니다. 여전도회 임원만 하지 말고 동네 부녀회 임원도 하십시오. 적극적으로 뛰어 들어가서 불신자와 만나십시오. 부딪히십시오. 좋은 사회인으로 살다가 주님 앞에 나아와서 충성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사회인, 좋은 직장인, 직장을 성직으로 알고 일하면서 교사직을 수행하기 바랍니다. 교사가 그렇게 살면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그 아이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우리들의 통속적인 전통에는 하나님께 자녀를 드린다 하면 신학교를 보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했다 하면 신학교를 보내겠다는 생각으로 표현을 합니다. 안 그렇습니다. 노래 잘하고 악기 다루는데 소질이 있으면 음대로 보내십시오. 그림 그리는데 소질이 있으면 미대로 보내고, 컴퓨터에 취미가 있거든 공대로 보내고, 체육 잘하거든 체육대학으로 보내십시오. 군인이 되고 싶어 하거든 사관학교로 보내고, 법조인이 되고 싶어하거든 법대를 보내고, 경영인이 되고 싶으면 상대를 보내서 활기치며 살도록 해야 됩니다. 하나님께 드린다 하면서 모두 신학교 보내는게 기도제목입니다. 체육 잘 하는 아이가 체육대학 가는 것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영적 야성미를 지녀야
여러분, 제일 꼴불견이 무엇인지 압니까? TV에서 다 큰 호랑이가 애 하고 놀고 있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관람객과 호랑이가 같이 놀고 있었습니다. 야성미를 잃어버린 맹수입니다. 어떻게 훈련받았는지 모르지만 호랑이답지 못합니다.
나는 애완동물 중에 고양이를 보면 아주 애처롭습니다. 얌전한 고양이는 고양이가 아닙니다. 앙칼진 표정의 모습이 본래의 모습입니다. 인간들이 고양이를 어떻게 길들였는지 그렇게 얌전한 고양이가 없습니다. 얌전한 고양이, 관람객하고 함께 놀고 있는 야성미를 다 잃어버린 맹수의 모습은 아주 비참합니다.
우리 성도들 교회에서 은혜받고 밖에 나가서 믿음으로 전투하는 호랑이가 되기 바랍니다. 영적인 야성미가 풍기는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얌전한 호랑이와 같은 모습은 신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사는 세상은 지금 죄악의 홍수가 범람하고 있습니다. 거센 죄악의 물결이 지금 우리를 도전하고 있습니다. 얌전한 신자가 되어서 어떻게 버팁니까? 내가 받은 은혜가 불신세상을 만날수록 더욱 폭발하고 강해지는 그리스도인의 야성미를 발하는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교사가 그런 폭탄으로 살다가 와서 아이들 앞에 서야 하나님이 역사하는 교사가 될 줄로 믿습니다. 바깥에서 비겁하게 살다가 은혜의 야성미를 다 잃어버리고 허우적거리면서 살다가 교회에 와서 가면쓰고 교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밖에 나가서 강한 신자가 되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한 가닥 하지 말고 세상에 나가서 한 가닥 하십시오. 집안에서 장군되지 말고 집 밖에 나가서 장수가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교육의 최대목적이 될 수 있는 그 요건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으로 키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한동대학이 한국에 선망의 대학으로 우리 앞에 다가왔습니다. 한동대학에 아이가 입학을 하면 그 부모의 위상이 높아집니다. 한동대학은 이런 불경기 상황 속에도 졸업생 전원 취업, 영어와 컴퓨터가 능숙한, 어느 기업체의 까다로운 업무를 맡겨도 조그만 연수를 받으면 다 적응하는 이런 쓸 수 있는 인재를 키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에 기초작업을 놓아주는 역할이 교사들의 역할입니다.
다윗이 물매돌을 가지고 골리앗을 쳐서 죽였습니다. 제가 물매를 제법 잘했습니다. 물매는 돌이 아주 중요합니다. 돌이 어떤 모양이냐에 따라서 그 물매의 정확도가 결정되고 속도가 결정됩니다. 그냥 모가 나고 길죽한 돌은 몰매질이 잘 안됩니다. 탁구공처럼 둥근 것 보다는 오히려 달걀처럼 생긴 돌맹이가 물매로 쓰기에 좋습니다. 그 돌이 크기도 적당하고 그 모양이 적당하면 그 물매가 상당히 위력이 있고 정확도가 있습니다. 골리앗을 맞히는 그 물매, 다윗이 사용했던 그 물매를 저는 가끔씩 생각합니다. 아, 골리앗을 무너뜨리는 그 도구로 쓰여졌던 물매돌, 우리가 그런 돌의 역할을 하고 하나님 앞에 쓰여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아이들을 다윗의 물매돌로 키워내야 합니다.
모래알이라도 되라
그런데 다 골리앗을 맞히는 물매는 될 수 없습니다. 다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모래알이라도 만들어내야 합니다. 모래알도 밟혀서 부셔지는 모래알이 아니라, 밟혀도 안 부서지는 모래가 일을 해냅니다. 모래알이라도 정확한 모래의 성질을 가진 그 한 알이 되면 쓰임을 받습니다. 등산하는 사람과 운동하는 사람이 제일 무서워하는 적은 운동화 안의 모래입니다. 운동화 안에 모래가 들어가면 등산을 못합니다. 운동을 못합니다. 모래알이 큰 일 해냅니다. 사탄의 신발 안에 들어가는 모래알로 키우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모래알은 버림받는 바위보다 위대합니다.
제주도에 가보니까 구멍난 돌이 많았습니다. 아마 화산영향이겠지만 구멍난 돌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들어보니까 무게도 덜 나가고 밟아보니까 깨집니다. 돌은 무게가 나가야 되고 견고해야 합니다. 돌은 무거워야 되고 견고해야 됩니다. 그런데 제주도의 구멍난 돌은 별로 돌답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돌답지 않는 돌인데 그걸 묘하게 활용해 놓았습니다. 집을 짓는데는 필요없는 돌입니다. 육지에 가지고 오면 못쓰는 돌입니다. 그런데 구멍난 돌을 공원에 묘하게 장식해 놓았습니다. 그것이 전문가의 솜씨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는데 전문가이십니다. 모난 돌도 하나님은 가치에 따라서 쓰십니다. 인간이 볼 때는 모난 돌 같은 인간이라도 하나님은 그 사람도 쓰십니다. 그런 기술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교사가 학생들을 재발견해야 됩니다. 교사가 영의 눈을 뜨고 이 아이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좋은 재목인지, 이 아이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귀하게 쓰여질 것인가를 교사의 눈으로 재발견을 하시기 바랍니다.
진리는 논리나 실력이나 권위로 전수되는 게 아닙니다. 교사들이 아이들을 모난 돌이지만 훗날 하나님이 귀하게 쓸 돌로 사랑해주고 인정해주고 격려해주는 거기서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절대로 논리, 권위, 인간적인 힘을 가지고 진리를 전수하지 못합니다. 교사의 사랑과 열정, 격려가 그 아이들을 주님이 쓰시는 아이들로 키워지는 것입니다.
교사가 명심하면 유익한 성구를 제가 세 개만 추천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9장1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천국의 주인은 어린아이입니다. 예수님이 그 아이들을 그렇게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주인은 아이들입니다.
사도행전 20장31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열심과 성실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내가 일깨워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14절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인내심을 가지고 끈기를 가지고 아이들을 가르치라는 것이고, “오래 참으라” 권면해주고 붙잡아주고 안위해주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성구를 붙잡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충성된 교사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역의 팀웍
물위로 걸어가신 예수님은 아이들 시각에서 보면 아주 믿기 어렵습니다. 홍해가 갈라진 기적은 아이들 시각에서 보면 믿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교사들은 맹목적으로 믿는 아이들에게 진리를 바로 가르쳐야 됩니다. “물위로 걸으신 예수” 사람은 물위로 못 걷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물위로 걷는 것입니다. 물위로 걷는다는 그 사실이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은 물위로 걷는다, 하나님을 거기서 강조해 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사람이 어떻게 물위로 걷느냐,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면서도 하나님이기 때문에 물위로 걷는 그 하나님 됨을 이야기합니다. 홍해를 갈라지게 하는 하나님, 하나님이 홍해를 지으신 자인데 지으신 분이 갈랐다가 붙였다가 왜 못합니까? 하나님은 바다를 지으신 자이기 때문에 바다를 가를 수도 있고 합칠 수도 있다, 그러니까 홍해가 갈라지고 합쳐지고 하는 홍해를 강조하지 말고 결론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교사들이 무엇을 가르치든 무슨 이야기를 하든 그 과정은 세상이야기 하고 사람이야기 할 수도 있지만 결론에 가서는 예수님을 드러내야 됩니다. 그 아이들 앞에 예수님을 드러내고 예수님을 새겨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사론의 대원리가 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이 말씀만 가지고도 우리가 충성된 교사로 살 수 있는 원칙이 다 표현되었습니다. 교사 뿐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충성됨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 배웠느냐, 못 배웠느냐가 아닙니다. 직분이 무엇이냐가 아닙니다.
우리 올림픽대표팀이 요즘 게임을 잘합니다. 우리 선수들이 뛰는데 골 넣는 선수 있고 어시스트하는 선수 있고 수비하는 선수 있고 밴치에 앉아서 애를 쓰는 후보선수도 있습니다. 또 감독도 있고 목이 터지도록 응원하는 응원단도 있고 밤잠을 설치고 TV보며 응원하는 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승하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맺는 말
여러분, 우리 교회는 금년에 성전건축이라는 게임을 합니다. 이 위대한 영적 게임, 우리 교인 중에 누군지 몰라도 골을 넣는 선수가 나오기 바랍니다. 어떤 교인은 어시스트 하세요. 어떤 선수는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수비하고 공격하고 골을 넣도록 도와주는 이선, 삼선의 선수처럼 자기 몫을 하는 제직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애를 쓰며 응원하고 밤잠을 설치면서 TV를 보는 그런 역할이라도 우리 모두가 다 해야 됩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가 그 게임에 다 참여해야 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게임은 승리로 끝날 줄 믿습니다. 골을 넣는 사람이 안 나오면 게임은 집니다. 아무리 애써도 안됩니다. 골을 넣어야 됩니다. 넣기 위해 어시스트해야 됩니다. 어시스트 되기 위해서 전부가 자기 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승리의 비법입니다. 교사사역이 사람의 사역으로만 되지 않습니다. 골을 넣는 교사도 있고 어시스트 하는 교사도 있고 응원하는 교사도 있어야 우리의 교사사역이 성공하고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금년에 멋진 결과를 볼 수 있는 신령한 전투에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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