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과충성의사람 삼하20:19-22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은 짐승과 달리 자신만을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 먼저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고, 그 다음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이며, 그렇게 할 때 자신이 가장 영광스럽고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만일 그 사명을 망각하고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이기주의자가 될 때 그것이 불신이요 타락이며 그 결과는 다른 사람이 아닌 그 자신이 불행해지기 때문에 예수께서도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우리는 지금 평화라는 말은 있으나 가정이나 직장이나 국가나 교회를 막론하고 어디를 가나 평화를 맛보기 어려운 불화와 갈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왜 평화를 원하면서 그처럼 원치 않는 불화와 갈등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요?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부패한 인간의 이기심 때문일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그와 같은 이기심을 버리지 아니하면 어떤 공동체이든지 그 모인 수가 많을수록 화합보다는 불화와 갈등이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교회 안에서 그와 같은 현상을 자주 목격합니다. 과연 그에 대한 성경적인 대안과 해결책이 무엇인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1. 갈등과 분열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와 너무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러 가지 공통점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중에 하나가 그 영토가 좁고 그 수가 많지 못한데 비해 지정학적으로 주변에는 강대한 세력들과 적대국들이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외침을 받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민족이 겨우 살아남는 정도가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강대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하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에 복종하며 살아가는 민족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셔서 눈동자같이 지키시며 전쟁에 두려움없이 평화롭게 살게 하실 것을 성경 여러 곳에 약속하셨습니다.
(시 27: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잠 1:33)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
2) 또 하나는 내적으로 열두 지파가 분열하지 말고 하나가 되어 외세의 침임에 대항하고 서로 돕고 사랑하고 협력함으로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주변 나라들이 얏보지 못하도록 서로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시 133: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시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전 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자기들을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이스라엘 나라를 세워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이방 사람들을 본받아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을 저버리는 죄악들을 자주 범하여 왔습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약소 민족은 주변에 강대국들이 호시 탐탐 노리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더욱 단합하여 외세를 물리쳐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은 내부적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열과 반목을 거듭하므로 국력은 약화되고 없으며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외세를 의존하다가 보니 결국은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분명히 다 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되어야 마땅하며 그것이 서로가 사는 길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왜 그렇게 멸망을 자취하고 말았는지 그 원인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단초를 제공한 사건이 바로 다윗과 그의 아들 압살롬과의 갈등과 반목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쪽 유다 사람들은 다윗을 지지하고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편이 유리하게 되기만 한다면 신앙이나 도덕성과 상관없이 비록 배은 망덕한 불효자식 압살롬이라도 지지하고 왕으로 기름을 붓는 불법한 일을 마다하지 않은 지역이기주의가 결국 이스라엘을 망하게 만든 근본 원인이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죽었기 때문에 한시 바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왕권을 재건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함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서두르지 않고 지체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이 분열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였으며, 또한 나름대로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우려 다윗을 떠났던 많은 사람들이 다윗에게로 돌이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압살롬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지역이기주의는 죽지 않았으며, 다윗을 지지하고 있는 유다 사람들 역시 그 기회를 통해서 자기들이 기선을 제압하고 실권을 잡으려는 이기주의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다윗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로 화합하는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소수이지만 실세인 유다 사람들은 다윗을 사이에 두고 여전히 반목과 갈등을 일삼는 어리석은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삼하 19:41) 온 이스라엘 사람이 왕께 나아와서 고하되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적하여 왕과 왕의 권속과 왕을 좇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네었나이까 하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큰 문제는 그 같은 분열과 갈등을 최소화하고 화합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보다 그 기회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불만을 터뜨리게 하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채우려는 기회주의자들이 고개를 들고일어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다윗 당대만의 일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정치 사회의 현주소이며, 심지어 사랑과 용서를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는 교단이나 교회의 실상과 너무나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등과 분열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은 사후처리보다는 사전에 이기심을 버리고 서로 남을 생각하며 화합하려는 구체적인 노력을 통해 미연에 방지하는 것만이 최선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 반란과 내분
오늘 성경을 보면 무엇보다 화합이 절실하고 또한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기회가 왔으며 다윗 왕이 나름대로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때에 비그리라는 사람의 아들 세바가 나타나 다윗을 감싸고 있는 소수의 유다 사람들 때문에 불이익과 소외를 당하고 있다고 불평하는 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삼하 20:1) 마침 거기 난류 하나가 있으니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라 저가 나팔을 불며 가로되 우리는 다윗과 함께할 분의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할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여기서 난류라는 단어의 뜻은 무익한 사람, 무가치한 사람, 파괴적인 사람이라는 뜻으로 다른 성경에서는 비류나 불량자라고 번역되기도 한 말입니다.
(삼상 2:12)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삼상 10:27) 어떤 비류는 가로되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드리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그는 잠잠하였더라
세바가 들고 나온 것도 역시 지역 이기주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기는 사울왕의 혈통인 베냐민 지파 사람인데 비해 다윗은 유다 지파로서 사울 왕가의 정통성과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말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이스라엘 나라의 왕이 되게하신 이도 폐하게 하신이도, 또한 목동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신이가 오직 한분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왕은 가나안 족속들처럼 인간의 의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것을 가지고 논할 수 없는 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바는 그것을 인간의 이기심으로 해석하여 다윗에게 불만을 가진 다수의 사람들의 이기심에 휘발유를 끼얹고 거기에 불을 던지는 일을 함으로 또 한번 이스라엘 공동체를 흔들어 놓으려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선동하였습니다.
알고 보면 세바가 그렇게 하는 것이 겉으로는 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 혼란한 기회를 통해서 압살롬처럼 자기가 나라를 세워보려는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난데없이 나타난 세바가 어느 면으로 보나 도저히 다윗과 경쟁자가 될 수 없는 사람으로 성경은 그를 가리켜 난류라고 한 것처럼 오늘날로 말하면 조직폭력배의 두목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바가 지역주의를 가지고 선동을 하자 곧 마음의 다윗을 떠나 세바에게로 향하였다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심이라고 하는 민심의 현주소입니다.
(삼하 20:2)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좇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좇으나 유다 사람들은 왕에게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좇으니라
그동안 다윗이 화합하려던 노력은 수포로 돌아 가버리고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다윗을 지지하는 유다 세력과 세바를 중심으로 아벨성에 모인 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다시 대립과 반목을 거듭하는 악순환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다윗은 더 이상 이를 묵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을 하고 지금까지 그가 펼쳤던 온건책을 거두고 강경책으로 급선회를 하였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배반하고 압살롬의 오른 팔 노릇을 하였던 아마사를 요압 대신 총사령관으로 임명을 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총책임을 맡기고 삼일내에 군대를 동원하여 세바를 추격하도록 명령하고 요압의 동생 아비새도 세바를 쫓아 갈 것을 명하였습니다.
(삼하 20:6) 다윗이 이에 아비새에게 이르되 이제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압살롬보다 우리를 더 해하리니 너는 네 주의 신복들을 거느리고 쫓아가라 저가 견고한 성에 들어가서 우리들을 피할까 염려하노라 하매
이제 다윗의 일행은 공동체의 승리를 위해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총 단합을 해야만 하는 때가 온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다윗 공동체 속에 내분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다윗을 충성스럽게 받들던 요압이 일방적으로 아마사에게 자리를 빼앗긴 것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복수의 기회를 노리다가 마침 아마사가 세바를 쫓기 위해 다윗의 시야에서 벗어난 것을 기회로 아마사를 방심하게 한 후 무참히 살해 하였습니다.
(삼하 20:10)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치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 배를 찌르매 그 창자가 땅에 흐르니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 요압과 그 동생 아비새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쫓을새
요압이 아무리 아마사의 인사에 대해서 불만이 있다고 할지라도 지금은 힘을 합쳐서 세바를 무찔러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사로운 이기심에 사로잡혀 다윗의 허락도 없이 아마사를 죽인 것은 공동체의 화합을 깨는 이적 행위였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반란을 주도한 세바도, 아마사를 죽인 요압도 물론 나름대로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은 개인의 유익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서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공동체의 화합을 깨뜨리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으며 후일에 세바도 아마사도 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자아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겠습니다.
3. 한 여인의 충성
아마사의 죽음을 다윗 군대의 지휘권은 자연이 요압에게 넘어갔습니다. 요압이 이끄는 다윗의 군대는 세바의 일행이 피신해있는 아벨 성을 에워싸고 세바가 항복하지 않자 성을 공격하기 위해 아벨성과 맛대응할 토성을 앞에 쌓기 시작하였습니다.
(삼하 20:15) 이에 저희가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를 에우고 그 성읍을 향하여 해자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요압과 함께한 모든 백성이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하더니
이제 아벨성은 마치 피를 맛본 이리처럼 흥분하기 시작한 요압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되고 죄 없는 수많은 양민들이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윗과 압살롬 부자지간에 불화와 반목, 지역감정을 부추기면서 선동하는 지도자들과 집단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그에 동조하는 군중들의 편가르기와 사사로운 복수심이 이와 같은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는 계속 극단으로 치달을 뿐이지 어느 누구도 이를 화합하려는 중재자로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다윗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의 시대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과연 오늘 우리 민족이 안고 있는 남북 분단이나 동서간의 갈등이나 계층간의 대립과 폭로 전들이 과연 어디서부터 오는 것입니까? 알고 보면 어느 한 두 사람의 이기심에서 발로되어 선동되어지는 경우가 허다함을 보게 됩니다.
오늘 성경은 바로 그러한 부정적인 상황에서 지혜로운 한 여인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피바다가 될 아벨성을 위기에서 건져낸 한 여인의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하 20:16) 그 성에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가 외쳐 가로되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청컨대 너희는 요압에게 이르기를 이리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네게 말하려 하노라 한다 하라
세바의 일행이 은신해 있는 아벨성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유명한 성으로 무엇이든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아벨성에 가서 물어 보면 그 문제가 해결할 수 있다고 소문이 난 지혜로운 사람들이 사는 성이었습니다.
(삼하 20:18) 여인이 말하여 가로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이제 요압에 의해 유서 깊은 아벨성은 일순간에 파괴되고 피바다를 이루게 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을 때 장군이나 남자가 아닌 나약한 한 여자가 아벨성을 구하겠다고 자리를 떨고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그 여인의 개인을 위해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모르는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정말 그 여인이 세상 사람들이 지혜라고 생각하는 자기 몫을 챙기는데 머리가 잘 돌아가는 여인이었다면 그러한 일은 시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비록 겉보기에는 나약한 한 여인에 불과하였으나 그 여인의 마음 속에는 세상에 어느 누구보다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심과 충성심이 가득하였기 때문에 그 같은 위기를 가만히 앉아서 구경하고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여인은 요압과 무력으로 맞설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 때문에 수수 방관하지 않고 그의 말 잘하는 은사를 가지고 요압을 설득하였습니다.
(삼하 20:19)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어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미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지혜로운 여인은 지금 요압이 아벨성을 멸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벨성 사람들에게 주신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려고 하는 불신앙적인 행위라고 당당하게 요압의 과오를 지적하였습니다.
요압은 비록 인정사정없는 무자비한 장군이었지만 여인의 지혜로운 말에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하면서 대화의 주도권이 지혜로운 여인에게 넘어갔습니다.
지혜로운 여인은 요압이 요구하는 것이 아벨성이 아니라 세바 한 사람의 머리라는 것을 알고 아벨성 사람들을 설득하여 세바의 머리를 요압에게 내어 줌으로 아벨성을 위기에서 건져낼 수 있었습니다.
(삼하 20:22) 이에 여인이 그 지혜로 모든 백성에게 말하매 저희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진지라 이에 요압이 나팔을 불매 무리가 흩어져 성읍에서 물러나서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고 요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왕에게 나아가니라
만일 지혜로운 여인의 그 같은 헌신은 아벨성 사람들만 구원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분열을 막는 위대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는 장군도 남자도 아닌 한 평범한 여인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이기심을 버리고 남다른 신앙심과 공동체를 위한 애국심과 충성심이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자랑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참으로 강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다윗이나 요압이 가지고 있던 부귀권세가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를 밖은 공동체의 평화를 위한 사랑과 충성인 것입니다.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 여인이 보여 준 지혜로움의 바른 자세가 바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자세입니다. 즉 지혜로운 자는 언제나 말과 혀로 만이 지혜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하나님을 향한 자기 희생을 사랑과 진실함을 따라 행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못한 자들의 사사로운 지혜는 오히려 버릴 것을 명하셨습니다 (참조, 잠 14:1).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슨 일이라도 다하는 현대인에게 지혜로운 여인과 같은 자세는 참으로 필요하다. 목적이 선할 때는 그 수단도 아울러 선해야 함을 우리는 여기서 더 잘 알 수 있다
과거 어느 때보다 갈등과 분열과 분쟁이 극심한 우리의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교회 공동체가 바라는 화합과 평화는 바로 오늘 성경에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충성을 바친 지혜로운 한 여인의 헌신을 오늘 우리도 본받아 민족과 교회의 화평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성도들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본받아야 할 지혜와 충성이 과연 어떤 것일까요?
(약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약 3: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약 3: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약 3: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약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약 3: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