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은사

믿음의 은사 

 

1) 정의 

 

- 이 은사는 어떤 사람이 어떤 특정한 상황이나 필요에 처했을 때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초자연적인 확신이 파도처럼 밀려와서 

  그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말씀이나 역사를 통해 어떤 일을 하신다는 이성을 초월하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David Pytches). 

-믿음의 은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어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역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특별한 확신으로 분별하는 특별한 능력이다(C. Peter Wagner). 

-믿음의 은사는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어떤 일을 하실 것이며 

  또한 실제로 성취하실 때까지 신뢰하는 것을 말한다. 

  이 은사는, 비록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이 하실 수 있고 또 하실 것이라는 비전에 대한 단순한 믿음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께 대한 기도 (즉 믿음의 기도)를 통해 드러난다(Bobby Clinton) 

 

2) 믿음에도 종류가 있는가 

성경이 말하는 \"믿음, 믿는다\"는 무슨 뜻인가. 

비록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문맥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헬라어 피스튜오(동사), 피스토스(형용사). 피스티스(동사)인 믿음, 믿는, 믿는다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 . .에 대해 확신을 가지다\" \". . .을 신뢰하다\"는 뜻이다. 

 

가. 지식적인 동의로서의 믿음 

어떤 사실이 진실임을 믿지만 그것에 대한 신뢰나 의지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귀신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사실 그 자체는 \"믿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을 구세주로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지는 않는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약 2:19-20). 

이것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알고 누구라는 사실을 입술로 고백은 했지만 

그에 합당한 믿음의 행위 즉 의지하고 신뢰하는 행위가 따르지 않는 명목상의 신앙인들을 책망하는 말이다. 

 

나. 구원을 얻는 믿음(saving fiath)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알뿐만 아니라 그분을 나의 개인적인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믿음을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믿음을 가져야 구원을 받는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9).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 

이 믿음은 정적인 것이 아니고 동적인 것이며 한 순간 가졌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지켜야 한다. 

중간에 믿음을 저버리면 파선한 믿음이 되어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딤전 1:19-20). 

 

다. 신자가 가지는 일반적인 믿음 

구원 받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일반적인 믿음을 말한다.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진 사람 중에서도 신앙의 성숙 여부에 따라 강한 믿음과 연약한 믿음이 있다(롬 14장). 

연약한 믿음을 가진 자는 의심이 많고 강한 믿음을 가진 자는 그렇지 못한 사람을 업신여기기 쉬우므로 

늘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야 한다. 

이 믿음은 정지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자라가야 하고 성숙되어야 한다.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살후 1:3). 

그러므로 어떤 때는 신앙 성숙으로 인한 믿음과 믿음의 은사와의 한계가 분명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래도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어려움이나 역경을 잘 헤쳐나가기 때문이다. 

특히 믿음장인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거기에 기록된 모든 사람들이 믿음의 은사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성숙한 믿음이든 믿음의 은사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라. 열매로서의 믿음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한글 성경에는 충성으로 번역되었지만 원어는 피스티스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 단어는 믿음으로 번역되었지만 때로는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태도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문맥으로 보아 이웃에 대한 신실성을 말한다고도 할 수 있다. 

 

마. 은사로서의 믿음 

은사로서의 믿음은 신자라고 해서 모두 다 가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이나 필요에 처했을 때 

초자연적인 담대한 확신으로 상황이나 필요를 보지 않고 주님이 확실하게 주장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신뢰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믿음장인 히브리서 12장에 기록된 신앙의 선배들이나 조지 뮐러같은 사람은 특별한 믿음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3) 성경의 예 

 

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붙드는 믿음 

-120년 동안 방주를 지은 노아(히 11:7). 

-25년 만에 약속의 아들을 얻은 아브라함. 

 

나. 초자연적인 보호에 대한 믿음 

-사자굴 속에서 살아남은 다니엘(단 6:16-17, 19-23). 

-까마귀를 통해 음식을 공급 받은 엘리야(왕상 17:2-6). 

-엘리사의 말을 듣고 기름 담을 그릇을 많이 준비한 선지자 생도의 아내(왕하 4:3, 4). 

 

다. 핍박과 고통을 이겨내는 믿음(히 11:36-40) 

 

라. 신앙적으로 빗나간 교인들을 담대하게 꾸짖는 믿음 

-고린도 교인들의 무절제와 부도덕을 담대하게 꾸짖은 바울(고전 4;4, 5). 

 

마. 병 낫고 귀신을 쫓아내는 믿음 

-병이 나은 중풍환자(마 9:2). 

-혈루병이 나은 여인(마 9:20-22) 

-흉악한 귀신 들린 딸을 고친 여인(마 15:22-28) 

-하인의 중풍병을 낫게 한 백부장(마 8:5-10) 

 

4) 교회사와 오늘날의 증거 

 

가.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드는 믿음. 

현재 괄목할만한 사역의 열매를 맺은 사람들 중에서는 초창기에는 일이 잘 풀리지 않고 본인도 회의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 비전이라는 확신 아래 상황과 사람에게 구애 받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다. 

피터 와그너 교수는 믿음의 은사야 말로 지도력의 은사와 함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꼭 필요한 은사라고 강조한다.4) 

이런 믿음을 가진 지도자들은 인간적인 능력이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신 비전을 갖고 목적지향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확실하다면, 비록 환경이나 상황은 정반대일지라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사를 보더라도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일을 해낸 사람들은 비전의 사람이자 믿음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홀로 로마교황청을 대적한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 내게 전 스코틀란드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 존 낙스 등은 

진정 믿음의 은사를 가진 지도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은사는 반드시 이름난 주의 사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름도 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든 사람들도 있다. 

오늘날 미국에 부흥이 오기를 바라면서 수십 년 동안 이름도 없이 기도한 평신도 중보기도 사역자들이 많다고 한다. 

즉흥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성향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비록 구체적인 이름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주신 비전과 약속을 끝까지 충성되게 지킨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초자연적인 보호에 대한 믿음 

하나님은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 특별한 믿음을 주시기 때문에 삶에 필요한 물질을 위해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필자가 신학교에 다닐 때 어떤 전도사 부부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줄로 믿고―실제로 그렇게 하셨다―

오직 공부와 사역에만 전념하는 것을 보았다. 

또한 가끔 있는 일이지만, 하나님이 필요한 물질을 이런 방법 저런 방법으로 채워주시는 것을 보았다. 

때로는 이런 사람들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물질을 구하면 하나님이 그 길을 막으시고 초자연적으로 공급해 주신다. 

 

다. 핍박과 고통을 이겨내는 믿음 

순교자들,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나라에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장기간 투옥되고 핍박 받으면서도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불신자 배우자를 둔 신자들에게도 어쩌면 믿음의 은사가 필요할 것이다. 

 

라. 병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믿음 

이것은 믿음의 은사 다음에 나오는 신유의 은사, 능력 행함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진 은사이기도 하다. 

이런 은사군을 구비한 사람들은,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한 것처럼, 집회 중 \"어떤 사람의 ____병이 나았습니다\"라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선포한다. 

그러면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많은 경우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또한 어떤 경우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해 갑자기 자신의 질병이 나을 것이라는 확신 즉 믿음이 강하게 드는 경우도 있다. 

케네스 해긴 목사는 소년 때에 불치의 병에 걸려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을 본 이후부터 이 말씀이 계속 생각났다. 

결국 그는 말씀을 통해 믿음을 가져서 병이 완치되었고, 이후 이 말씀을 바탕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병이 낫고 문제가 해결 받는 믿음 운동을 주도하고 있으며 80세가 넘은 지금까지 장수하면서 사역에 전념하고 있다.

 

5) 말씀과 성령 

 

그렇다고 병든 모든 사람이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라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나간다고 해서 병이 나을까? 

우리는 여기서 중대한 사실을 발견해야 한다. 

일단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그러면 해긴 목사는 그 말씀을 믿고 의지한 결과 병이 나았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치유되지 않는가? (물론 일부 나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해긴 목사가 나은 것은 그 말씀이 성령의 감동에 의해 개별적, 구체적으로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씀을 아무리 붙잡고 믿어도 낫지 않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그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역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의 능력에 의해 그 말씀이 해긴 목사에게는 개별화, 구체화되었지만 

치유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그렇게 역사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조지 뮐러는 고아를 돌보라는 야고보서 1:27의 말씀에 감동되어 평생 고아를 돌보는 사역에 종사했다. 

조지 뮐러 외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구절을 읽었을텐대 왜 굳이 그 사람만 고아 사역에 종사했을까? 

물론 감동이 와도 순종하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 그 구절을 읽을 때 

\"아, 고아를 돌보아야 되겠구나\"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것을 평생 사역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드물 것이다. 

또한 조지 뮐러는 왜 과부는 놓아두고 고아에만 관심을(이) 가졌을까? 

같은 구절에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고\"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말이다. 

이것은 \"고아\"라는 말씀이 조지 뮐러에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6) 믿음의 은사-성령의 감동과 조명 

 

개혁, 보수 신학에서는 정확 무오한 성경 말씀을 기록한 성령의 사역을 성령의 감동(inspiration)5)(딤후 3:16; 벧후 1:21)이라 하고, 기록된 말씀을 깨닫게 해주는 성령의 사역을 성령의 비침 또는 조명(illumination)(고전 2:10, 14)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 말씀이 성령의 감동(전문적인 의미)으로 기록되었다고 해서 

말씀 그 자체가 우리의 마음에 항상 감동―이하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한다―을 주는 것은 아니다. 

성령은 때에 따라 그 사람에게 필요한 말씀을 일캐워주고 깨닫게 해주신다. 

또한 감동을 받고 깨달은 말씀 중에서도 특히 마음에 강하게 와닿는 말씀이 있다. 

필자는 이것은 비록 성령이 동일한 말씀을 조명하지만 정도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 삼천 명이나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다(행 2:4, 41). 

그러나 논리적으로 한 바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사람은 고작 몇 명에 지나지 않는다(행 17:22-34). 

이것은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증명이 된다. 

어떤 사람의 설교를 들으면 이미 알던 내용도 새삼 새로워지고 은혜가 되고 믿음이 팍팍 생기는 것같은데 

또 어떤 사람의 설교를 들으면 도대체 감동이 오지 않고 냉랭한 때가 있다. 

설교 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할 때도 어떤 말씀이 갑자기 감동을 불러일으켜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우가 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첫째 설교자의 경우, 그 사람이 말씀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지고, 기도 많이 하고, 바른 삶을 살면서 

성령 충만을 받아서 설교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신학교 다닐 때 장로교의 어떤 미국 목사가 설교세미나에서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자기는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어로 성경을 해석하면서 일주 내내 준비해도 교인이 50명밖에 되지 않는데 

어느 오순절교회의 목사는 토요일에 잠시 기도하면서 설교를 준비해도 교인이 수천 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그 차이가 뭘까? 

바른 성경 해석과 명쾌한 논리 위에 성령의 불이 타오를 때 능력 있는 설교, 감동 주는 설교가 될 수 있다. 

로이드 존스는 이것을 \"불타는 논리\"(logic in fire)라고 불렀다. 

조지 휫필드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설교가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말씀을 묵상할 때 특별히 감동을 주시는 말씀은, 하나님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 

그때, 그 장소에서, 그 사람 개인에게 필요한 영의 양식을 제공하시는 것이다. 

감동된 그 말씀을 통해 때로는 위로하시고, 때로는 권면하시고, 때로는 책망하시고, 때로는 소망을 주시고, 

때로는 능력을 주시고, 때로는 앞 길을 인도해 주신다. 

성령의 감동으로 하는 설교, 성령의 감동으로 마음에 와닿는 말씀은 당사자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은혜를 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말씀의 주인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들어쓰실 때에만 그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 있는 말씀이 되어(히 4:12), 

듣는 자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필자도 설교에 관한 책을 다소 보았지만 설교를 위한 성경 해석, 구성, 수사학, 서론 본론 및 결론과 예화의 사용 

등과 같은 설교술(homiletics)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하고 있지만 

정작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 있게 하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외에는 보지를 못했다. 

그러면 도대체 말씀과 성령의 관계는 어떠한가? 

전통적으로 루터교 신학자들은 \"성령은 성경을 통하시지 않고는 일을 할 수 없다. 

언제든지 성령은 성경을 통해서만 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성령은 말씀을 가지고 역사한다\"고 주장했다. 

차영배 박사는 [성령론]에서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칼빈주의는 성령께서 이 말씀을 가지고 일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일한다는 것은 수단을 말하는데, 성령이 역사할 때 이 말씀을 칼로 사용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항상 이 칼을 가지고 일을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의 경우를 보면 말씀이 없이도 성령이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없어도 성령이 일을 할 수는 있지만 

대개는 보편적으로, 정상적으로는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통로로 해서만 일한다는 루터교와는 다른 것입니다. 

루터교는 말씀을 읽으면 자동적으로 성령이 우리에게 들려오는 것처럼 가르쳤지만 칼빈주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성령이 자동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권적으로 주인이 되셔서 성경말씀을 가지고 친히 우리에게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전통적인 칼빈주의 교회 안에서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는데 이것이 오해되어서 

성경지상주의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성경지상주의라는 말은 Sola Scriptura에서 나온 말이지만 결코 성령을 제외하고는 성경만으로 일을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 . . 

우리는 중생이나 모든 교리를 그릇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무시해 버림으로써 신비주의로 빠지거나 또는 성경말씀을 지나치게 절대화시켜서 율법주의 혹은 지성주의로 기울어지는 것을 배격해야 합니다. . . . 

라트만이라는 칼빈주의자는 \"외적인 성경은 성령의 사역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더 이상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 . . 

이제 결론적으로 다시 강조한다면 성령이 주인이 되어 성경을 가지고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17절을 보면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제 3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성경과 성령에 관하여 고찰해 본 것은 삼위일체에 관한 것이 아니고 

기록되어서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말씀과 성령과의 관계에 관한 것인데, 

성령이 주인이 되어서 이 성경말씀을 가지고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검입니다. 

우리 목사의 검이 아닙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 목사님들이 주인이 되어서 또는 신학자가 주인이 되어서 이 성경을 난도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입니다. 

성령이 주인이 되어서, 성령께서 이 말씀을 사용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양보해야 됩니다. 

우리가 나의 지성적인 머리로 첫째, 둘째, 셋째하여 조직적으로 설교를 잘 작성하지만, 

그것이 교인들의 마음을 현혹케하고 성령의 사역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면, 

우리는 \"첫째, 둘째, 셋째도 없애주시고 하나님의 성령이여 찾아오셔서 당신의 방법으로 역사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여러 방면의 말씀을 통해 믿음이 자란다. 

성경공부를 통해 성경의 진리를 잘 앎으로써 믿음이 자란다. 

또 설교 말씀을 정기적으로 들으면서 믿음이 자란다. 

콩나물 시루에 물을 부으면 많은 물이 땅에 떨어지지만 콩나물이 자라는 것같이 말씀에 많이 접하면 신앙도 자라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말씀 묵상이나 설교 말씀 모두가 한꺼번에 은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경우에 특별 나게 부딪치는 말씀이 있다. 

그 말씀은 한 단어일 수도 있고, 한 문장일 수도 있고, 하나의 개념일 수도 있다. 

이 말씀이 바로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자 성령의 검 즉 성령의 감동을 받은 말씀이다. 

신앙생활 하면서 이런 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 유독 그 단어, 그 문장, 그 개념만이 마음을 뜨겁게 하고, 믿음을 불러일으킬까? 

그것은 성령께서 특별히 그 말씀을 풀어서 그 사람에게 구체적이고. 개인적으로 적용시키셨기 때문이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해긴 목사는 기록된 그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역사하여 불치의 병이 나았고 

조지 뮐러는 그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임해서 평생 그 사역에 종사했다고 할 수 있다. 

기록된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내 마음에 강렬하게 부딪칠 때 나에게 초자연적인 믿음이 일어난다.

비록 성경에 기록된 약속이라 하더라도 나에게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으면 

그 말씀이 나에게는 실제화, 구체화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우리는 말씀 보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말씀을 많이 접하고 심령에 말씀을 많이 저장해 놓고 있어야 성령이 원하실 때 들어쓰실 수가 있다. 

둘째 우리가 자신을 십자가에 복종시키고 기도를 통해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것에 순종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수록 감동된 말씀이 더 많이 들린다. 

하나님은 이미 받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더 이상 감동 주기를 꺼리신다. 

셋째 늘 성령충만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또한 예언과 같이 직접 듣는 하나님의 음성은 성령께서 이미 개별화, 구체화시키신 말씀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에게 강한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필자가 기독교 문서선교 사역에 종사할 때,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이 많아서, 포기하려고 마음 먹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주님은 그때마다 환상과 말씀으로 \"그 신문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맛있는 꼴을 먹고 있는 줄 아느냐? 

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지금 도처에 뿌려진 씨앗이 얼마나 많은 싹을 내고 있는 줄 아느냐?\"라는 말씀을 주셨다. 

이 말씀을 듣자 갑자기 회의와 의심이 가시고 \"아, 아무리 힘이 들어도 이 사역은 계속 해야 되겠구나\"하는 

강한 믿음이 나에게 생겼다. 

직접 주시는 약속의 말씀은 이처럼 환경을 뛰어넘는 강한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만일 내가 직접적인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면 어디서 이런 비전과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7) 임하는 방법

 

가. 이런 믿음은 주어진 상황에만 적용된다 

어떤 특정한 상황, 필요, 위기를 위해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중병이 나았다고 해서 또 다른 중요한 문제가 생겼을 때 동일한 믿음이 자동적으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상황에는 항상 새로운 믿음이 필요하다. 

 

나. 갑작스럽게 임한다 

어떤 일에 대해 긴가민가하고 의심하던 중 기도 중에 갑자기 큰 확신이 임하는 경우가 있다. 

주로 불쑥 들어오는 생각, 지식의 말씀과 같이 어떤 단어나 문장, 세미한 음성이나 내적 감동 또는 느낌으로 오는 경우가 많다. 

 

다. 오랜 세월에 걸쳐 주시기도 한다 

또한 현재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오랜 세월을 두고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행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하나님이 주신 큰 비전이나 사역은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십여 년 전에 필자에게 \'부흥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필자는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므로 부흥이 당장 오는 줄 알고 기도하면서 부흥에 관한 여러 책을 보고 부흥을 사모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큰 부흥을 주시기 전에 반드시 황량하고 숨막히는 광야를 오랫동안 걷게 하신다는 알게 되었다. 

나에게 말씀하신 부흥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내 심령에는 이미 부흥이 와있다. 

그 동안 하나님은 광야 여정을 거치는 동안 내가 몰랐던 신령한 세계를 알게 해 주셨고 또 여러 가지 기적행하는 은사를 주셨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아브라함의 믿음(롬 4:18-20)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주님은 부흥보다는 \"내 영광이 나타나도록 기도하라!\"고 하셨다.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합 2:14). 

최근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수많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크신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도 선교회의 명칭을 <글로리아 선교회>. 이 카페의 이름을 <글로리 파이어>(영광의 불)라고 했다. 

또한 모세가 기도한 것처럼(출 33:18), \"주님, 영광 보여 주옵소서!\"란 기도 제목을 크게 써서 

거실에 붙여두고 매일매일 기도한다. 

이 제목을 기도할 때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하나님은 \"이제 곧 내 영광이 나타나리라!\"는 확신을 주신다. 

하나님이 이렇게 믿음을 주시는데 십여 년 동안 이 기도제목이 응답되지 않았다고 해서 

어떻게 내가 이 기도를 멈출 수 있겠는가? 

 

8) 건강 축복 복음,\" \"번영복음\"을 전하는 믿음 운동에 대한 소고. 

 

미국에서 믿음 운동이 한창 일 때 일부에서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름을 대고 청구하십시오, 그러면 받습니다\"(You name it, You claim it)라는 구호가 나돌았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믿음만 있으면 병도 고치시고 가난한 자도 부자로 만드셨기 때문에 

믿음으로 청구만 하면 모든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이 당시 인기를 끈 적극적인 사고방식과 교묘하게 결합되어 유행을 타기 시작했고 한국에도 건너왔다. 

물론 이런 주장의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사실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청구하지 않아서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병이 나거나 가난해도 이것은 나의 팔자 문제이지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런데 믿음 운동 주창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는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의 병이 낫고 가난에서 벗어나서 긍정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쳐서 병 낫지 않고 부유하지 않은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간주되는 역효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것은 신앙 성숙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어린 아이가 아프고 배고파서 울면 부모는 당연히 먹을 것을 주고 아픈 곳을 고쳐준다. 

그러나 그 아이가 그 수준에 머물고 더 이상 성장하지 않으면 문제라도 보통 문제가 아니다. 

믿음 운동도 마찬가지다. 

많은 경우 신자들은 믿음으로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이미 주어진 것도 찾아먹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그들도 성숙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도 이제 그런 자녀들이 \"아빠, 돈\" \"아빠, 건강\"한다고 해서 무작정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병 낫고 문제 해결 받는 믿음에서 변화 받는 믿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믿음으로 자라가야 한다. 

또한 비록 환경이 속이고 일이 형통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끝까지 지켜나가는 믿음의 성숙도 중요하다. 

하나님은 오늘날 이런 믿음을 더 원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