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농부들

하나님 나라의 농부들/ 갈5:16-26/ 맥추감사절설교/ 2002-07-03

하나님 나라의 농부들
갈5:16-26





오늘은 맥추감사절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맥추절은 7월 첫 주일이 아닙니다. 성경의 맥추절은 초실절(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는 절기) 혹은 오순절(유월절 후 50일째 되는 날)이라고 부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이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강림절로 신약교회는 지킵니다.
올해 성령강림절은 지난 5월 셋째 주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지키는 맥추감사절은 성경의 맥추절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맥추감사절은 한국교회가 독자적으로 만든 감사절입니다. 말 그대로 보리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로서 전통적으로 7월 첫 주일에 지킵니다. 보리 추수를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도시 교회들은 상반기 6개월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로 삼고 있습니다.

보리를 추수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므로 크리스찬 농부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6개월 동안 살아온 것 주님의 은혜이므로 성도가 주께 감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가족들이 건강한 것, 직장과 학업에서 만족한 성취를 얻은 것, 일상의 형통함, 이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에게 이미 주셨고 또 주시기를 원하시는 가장 큰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 주님의 뜻은 자기의 자녀들이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때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행복하게 됩니다. 이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9가지입니다. 22-23절을 보세요.

9가지 성령의 열매는 우리의 내면에 맺히는 아름답고 균형 잡힌 성품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을 닮은 인격을 말합니다. 23절 하반절의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는 뜻은 성령의 열매로 표현된 이 같은 성품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장려해야 할 아름다운 덕성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속 사람보다는 겉 사람을 보고 감탄합니다. 육체적인 건강, 미모, 학위, 지위, 경력, 출신 따위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내면의 덕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의 매력은 영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때가 지나가면 시들어버립니다. 그래서 26절에는 그것을 헛된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겉 사람의 매력에 몰두하고 헛된 영광을 추구하면 우리의 내면은 황폐하게 됩니다. 사라질 것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여유가 없습니다. 결국 매사에 격동하고 투기하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자신도 행복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남까지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를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 뿐 아니라 남까지도 행복하게 만듭니다. 이런 사람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가 세상에 희망을 주는 공동체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속성 때문에 더더욱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성령의 열매는 오히려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맺히는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l 사랑: 무조건적으로 베푸는 아가페 사랑, 원수까지도 품는 사랑
l 희락: 어떠한 환경에도 빼앗기지 않는 항구적인 기쁨
l 화평: 폭풍 속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평정, 원수를 친구로 만드는 능력
l 오래 참음: 약속된 소망의 날에 아름답게 변할 형제의 모습을 미리 보는 여유로움
l 자비(친절): 대적자들을 감동시키는 관대함의 행동들
l 양선: 선으로 악을 이기는 도덕적 탁월함
l 충성: 한결 같은 신의
l 온유: 거친 사람들까지도 부드럽게 품는 온화함
l 절제: 거센 유혹 앞에서도 정도를 택하는 능력

이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은 세상을 훈훈하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볼 때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갈 6:7-8을 보세요. 어떠한 열매를 맺는가 하는 것은 무엇을 심는가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합니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고 말씀합니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다는 것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육체의 욕심이라는 것은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 즉 죄에 기울어지는 본성을 말합니다. 이를 옛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면 육체의 열매를 거둡니다.

육체의 열매 중에 대표적으로 15가지를 5:19-21에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크게 네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성적 범죄: 음행, 더러운 것, 호색
2) 거짓 신을 숭배하는 죄: 우상숭배와 술수
3) 인간관계의 불화: 원수를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기, 분리, 이단, 투기
4) 주벽과 관련된 죄(절제하지 못하는 죄): 술 취함과 방탕

그런데 문제는 이 같은 육체의 열매를 성도들도 맺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엄히 경계했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21절 하반절).” 여기서 이런 일을 하는 자란 계속 상습적으로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한 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써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16절의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말은 성령으로 살아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17절에서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삶을 말합니다. 18절에서는 ‘성령의 인도를 따른다’, 25절에서는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한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마지막에 말한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성령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서 걸어간다는 뜻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 성령으로 사는 것, 성령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 걸어가는 것,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것은 모두 같은 말로서 성령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순복한다는 뜻입니다. 즉 성령의 뜻대로 사는 것, 성령의 도우심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성령으로부터 성령의 열매를 거두고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아 영생을 누리게 된다고 성경은 약속합니다.

전적으로 성령께 의존하는 상태를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성령의 충만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의 속 사람에 자연적으로 맺히는 인격의 열매가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는 성령 충만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자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인가, 성령 충만한 자인가 하는 것은 성령의 열매를 보고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로 성령 충만의 정도와 신앙의 성숙도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결론 부분에서 나무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가장 확실한 근거가 열매에 있듯이 하나님 나라의 거짓 일꾼과 참 일꾼의 구별도 그들의 열매를 보아서 판단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소위 말해서 능력 있다고 하는 지도자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합니다. 귀신을 좇아냅니다. 많은 권능을 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능력이 참된 것인지를 알아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열매보다는 성령의 은사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설교 잘 하는 사람,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사람, 일을 능력 있게 처리하는 사람을 선호합니다. 그러한 사람을 하나님의 큰 일꾼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것에 감동 받지 말고 그들에게서 성령의 열매가 있는지를 더 주의하여 찾아 보라고 하셨습니다. 만약에 그들에게서 성령의 열매가 보이지 않으면 속히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며 성도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은사를 유감 없이 발휘한다고 해서 그가 당연히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맡은 일은 척척 해냅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교회가 알차게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체로 보면 교회의 문제는 은사나 재능이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할 때 발생합니다.

훌륭한 설교자라고해서 반드시 그가 성숙한 성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유명한 복음성가 가수라고 해서 그가 반드시 하나님을 잘 예배하는 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서적을 저술하여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그를 성령 충만한 자라고 판단할 수 있는 증거는 못 되는 것입니다. 사실 제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제가 설교하고 있지만 설교한대로 사는 것은 다릅니다. 설교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중요한 것은 설교한대로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은사를 잘 사용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때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됩니까?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알고 그 성령님의 소원에 전적으로 순복할 때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에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의 소원에 전적으로 순복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의지하고 순복해야 할 성령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성령님은 우리의 심령에 내주하시는 새 주인이십니다.

어떠한 자의 심령에 성령님이 내주하십니까? 한 가지 조건밖에 없습니다. 믿음입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자의 심령에 성령님은 거주하셔서 영원토록 떠나지 않으십니다. 예수 믿는 자들의 심령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영원토록 새 생명 가운데 살게 하시는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내주하시게 된 사람을 새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새 사람은 새로운 주인을 모시고 사는 사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는 성령 외에는 다른 주인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내면에는 아직까지도 옛 주인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육체 혹은 옛 사람이라고 합니다. 물론 옛 사람의 힘은 아주 제한적입니다. 24절이 그것을 표현합니다.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입니다. 대신에 성령이 내주하시는 새 사람은 자유케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옛 사람은 제한적이긴 하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옛 사람과 새 사람 사이에서 영적 갈등이 생깁니다. 17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옛 사람은 옛 주인인 육체의 욕심을 따르고자 합니다. 그러나 새 사람은 새 주인인 성령을 따르고자 합니다. 그래서 내적 갈등이 일어납니다. 바울은 내적 갈등 자체를 부정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내적 갈등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성령을 새 주인으로 모신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새 주인인 성령의 욕구에 순복해야 한다는 것을 바울이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우리의 새 주인이 성령님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거주하시는 성령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 분의 뜻을 따라 살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2) 거룩하신 성령입니다.

이러한 성령님의 거룩하신 속성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목적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신 목적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만약에 우리 안에 불결한 요소가 있을 때 성령님은 근심하시고 탄식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견딜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본문 19-21절까지에 열거된 죄악을 습관적으로 반복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한두 번 이런 죄를 범하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죄임을 깨닫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탄식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즉시 진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고 죄가 우리 속에 그냥 남아 있는 한 성령의 충만은 불가능합니다. 마치 수도관에 오물이 막혀서 수도물이 배출이 제대로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왜 우리가 죄를 회개해야 합니까? 구원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 입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 입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고는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3) 간절히 찾는 자에게 충만히 임재하시는 성령입니다.

개혁교회들이 신앙의 표준으로 삼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오순절 때 한 번 오시고 만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늘도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으로부터 성령님은 계속 우리에게로 나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계속적으로 솟아나는 생수로 표현합니다.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시대시대마다 꼭 필요한 능력과 생명과 변화와 치료의 생수로 이 세상과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고 충만케 하시는 영이십니다.

그런데 어떤 자들에게 이러한 생수가 충만하게 공급됩니까? 목 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구하듯이 간절하게 사모하는 자들에게 성령은 충만히 부어집니다.

4)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나누는 자들에게 더욱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성령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자기가 먹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마치 샘솟는 생수를 퍼주면 줄수록 더욱 맑고 풍성한 샘물이 솟아나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 남에게 나누어주어야 할 것들입니다. 6:9-10을 보세요.

말씀을 맺겠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회사의 경영자라고 하면 이런 자를 직원으로 채용하시겠습니까?
l 다른 이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는 사람
l 항상 우울한 사람
l 많은 스트레스로 불안과 긴장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
l 조급한 사람
l 무례한 사람
l 뒤에서 남을 험담하는 사람
l 거친 성격의 사람
l 일시적인 감정에 지배 받는 사람

하나님께서도 일꾼을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당신의 밭에서 농부로 일하게 하십니까? 어떠한 자에게 하나님은 성령의 열매를 추수하게 하십니까? 오늘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성령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람입니다. 성령님의 소원에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자입니다. 이러한 자와 함께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그에게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십니다.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남은 날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끝) 찬송 427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