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함을 감사하는 은혜

약함을 감사하는 은혜/ 고후12:1-10/ 2001-11-22

약함을 감사하는 은혜
고후12:1-10





장로회신학대학 총장으로 있는 고용수 박사님이 교회와 신학이라는 학술지에 시론으로 쓰신 말씀에 \"목회자 이전에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았습니다. 우리 사회는 경제 모라토리움을 겪을 뻔하였습니다. 그래서 IMF라는 구제 금융을 받아 국가 부도를 면한 것입니다. 이제는 사회 지도층의 인사들의 부패가 극에 달하여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인간 모라토리움\'을 선언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오늘에 와서 인간 성숙이 정지되었습니다. 인간다운 맛이 없어졌습니다.

10여 년 전에 있었던 아주 커다란 사건 중에 범양 해운 회장이 투신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가 죽으면서 자신과 반목하였던 사장에서 \"인간이 되시오\"라는 유서를 남겼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인간이 되시오\" 이 말은 듣기에 대단히 불쾌하게 들을 수도 있는 말이어서 사용하기에 조심스럽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은 인생의 깊은 의미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루 하루를 살아가면서 행복을 누리고, 만족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 짜증스럽고, 살고 싶지 않은 하루라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울 것입니까? 여러분, 진정한 행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임마누엘 칸트]라는 사람은 \"인생을 말한다\"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라고 말합니다. 외부적인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문제라고 봅니다. 그래서 인생을 논하고 있는 지혜자는 잠언에서 마음의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잠4:23에 \"무릇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잠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칼 메닝거라는 정신분석학자는 행복을 정의하며 영어의 행복이라는 말은 \"Happiness\"라고 하는데 본래는 \'옳은 일이 자신 속에서 일어난다\'는 \"Happen\"이라는 말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바른 일, 옳은 일이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을 때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한 사람의 마음 속에서 옳은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 그 사람의 올바른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결코 외부에서 우연히 찾아온 운명의 힘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칼 메닝거라는 정신 분석학자는 \"태도- Attitude는 사실보다 중요하다\"라고 합니다. 삶의 자세가 사실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경이 달라지기를 바라고, 대우가 달라지기를 바라고 이 세상이 변화되기를 바라고 높은 지위에 오르기를 바라고 있으나 그렇게 세상이 수백 번 달라져도 내가 달라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행복의 근원은 우리들 자신에게 있지, 결코 사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행복이란 여러분 자신 밖에 있는 것이 아니며, 안에 있는 것이며, 다른 사람이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찾아야 합니다.

행복이란 \"인간으로서의 보람과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삶\"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행복이란 \"즐겁고 안온하며 근심 걱정 없는 삶\"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풍운의 생애를 선택한 혁명가들이나 사회운동가들은 그런 소극적인 의미에서 행복이 아니라, 보다더 큰 행복, 보람과 만족에서 행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란 \"정신의 유덕한 활동\"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정신 문제인데, 유덕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유덕(有德)이란 덕을 갖추고 있다는 것으로 그의 하는 모든 일들이 덕스럽고, 덕을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들이 하루에 추구하는 모든 일들은 행복하기 위하여 하는 일들입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을 누리기 위하여 살아가고, 행복을 가까이에 두고, 행복을 차지하기 위하여 살아간다면, 행복이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행복은 외부적인 조건이나 환경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지금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고,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속적인 행복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사람들은 많은 재물을 소유하는 것과 안락을 누리는 것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으로 행복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많은 재물을 소유하였다고 행복할 것입니까? 세상에 있는 재미는 다 즐기고 다닌다고 하여 행복할 것입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다닌다고 하여 행복할 것입니까? 사람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세상 다 가지지 못하고, 하고 싶은 일 다하고 살지 못합니다.

우리가 가지지 못하여 불행한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깨닫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여 불행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는 것이 없어 불행이 아니라, 아는 대로 살아가지 못하여 불행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외적인 환경에서 얻어진 행복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가면 다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참된 자유와 행복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그런 사람만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참된 평안과 행복이 넘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은혜, 엄청난 은사를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한 것은 일찍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특권과 그 믿음을 선물로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혹 건강을 잃은 경우도 있었고, 물질을 잃은 경우도 있고, 친구들의 몰이해로 곤욕을 겪은 적도 있지만, 지금까지 지켜주신 은혜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바라보거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긍정적인 수용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우리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긍정적인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요, 우리는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자녀이며, 천국 시민이요, 백성입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아니면 그 무엇으로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늘 행복론을 말씀드리자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 행복에 대하여는 수없이 사람들이 이미 체험한 것을 고백한 것부터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아간 사람을 들어보라고 하면 사도 바울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세상적인 조건에서 보면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정말 감사하면서 일생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간 사람입니다.

1. 사도 바울은 영적으로 자랑할만한 사람이었습니다. (1-6)

바울은 그가 셋째 하늘에 들어갔던 체험을 무익한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앞에서 자랑하는 것이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씀한 바 있습니다(고후11:1, 16-18). 그러나 바울은 불가피하게 자랑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거짓 사도들에 의해서 잘못된 길을 가고있는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을 일깨울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주의 환상과 계시를 수없이 받았고 참여한 사람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전혀 다른 사람을 말하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고린도후서를 기록할 당시는 이미 14년이란 세월이 지나갔지만, 그는 14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갔습니다. 그 때에 그는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자기는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아실 것이었습니다. 아마 깨어 있는 상태에서 그의 영이 이끌려갔다고 봅니다. 그는 셋째 하늘 곧 낙원에 들어가서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 정말 영적인 깊은 세계를 체험한 것이었습니다.

\"셋째 하늘\"이란? 낙원과 같은 곳으로서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거하시는 곳, 하늘 중의 하늘입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천국에서만 들을 수 있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큰 비밀을 말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겸손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은 한번 연구해보면 그는 기독교를 바울교로 만들어도 될 만큼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최후의 선지자라고 하면서 말한 모하메드처럼 하나의 다른 종교를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바울을 따르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와 차별화를 통하여 그의 교회를 만들려고 했다면 성공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우리 주님에게 사로잡혔고, 붙잡힌 바 되어 일생 헌신하였습니다. 하늘에 들어가서 하늘의 신비한 것을 다 구경하시고 왔으니 그의 인격과 신앙을 우러러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우리 주님이 그를 구하여 주신 것을 잘 알고 행동하였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시나이까?\", \"나는 네게 박해하는 예수라\" 이 한 마디의 대화로 사울은 변하였습니다. 사울의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자기가 행한 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었고, 우리 주님을 핍박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주님 앞에서 그대로 죽었어도 변명할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살려주셨다는 것 이 하나만으로 일생 헌신할 수 있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하고, 바르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그의 영적인 체험을 말하고 다녀도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다녀야 어리석은 사람이지, 참 말을 하는데 왜 어리석다 할 것입니까? 그러나 그러한 영적인 체험을 말하고 다니면 교만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간증하고 다니는 사람들 중에 교만한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만이 최고라고 말합니다. 영적인 교만이 가장 무서운 교만입니다. 사람이 한번 교만에 빠지면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교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다스리는 일에서 실패하기 때문에 불행합니다.

2. 사도바울은 그의 약함을 자랑하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7-8)

사도 바울에서는 육체적으로 약함도 있었고, 가시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위하여는 이런 약함을 자랑하고, 가시를 주셨음을 인하여 감사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가시라는 말은 원어로는 \"스콜로프스\"라고 하여 십자가를 의미하기도 하고, 가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뾰족한 말뚝이라는 말도 됩니다. 끝이 날카로운 창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시가 박혔다는 말은 참으로 실감나는 표현입니다. 사람에게 아주 적은 가시라고 해도 그것을 몸 속에 지니고 다닐 수가 없습니다. 목구멍에 가시라는 표현은 참으로 절박한 아픔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 이 육체의 가시가 무엇이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바울의 가시는 대개 여덟 가지 정도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① 영적인 유혹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말씀에 대한 의심이 드는 것, 사도로서의 의무를 회피하게 되는 것들, 어떤 세상적인 유혹에 빠졌을 때에 양심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이런 주장은 칼빈의 주장입니다.

② 바울이 직면하는 반대와 박해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의 이신칭의의 교리를 반대하면서 그를 좋아하지 않는 무리들이 기독교회 내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르틴 루터가 주장하는 견해입니다.

③ 그의 육적인 유혹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원욕이 끊어질 때까지 성적인 본능만은 억제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말하는 견해입니다.

④ 가시란 바울의 육체적인 외모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의 육체의 외모가 별로였습니다. 사울을 아는 사람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라고 합니다.

⑤ 널리 알려진 견해로는 그가 간질병자였다는 설입니다. 그것은 맹렬한 고통을 동반하면서도 간헐적으로 이따금 거품을 품고 넘어지는데 이것을 고대는 악령의 장난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고대에 이런 간질병자가 곁에 오면 악령이 자기에게도 달라붙을 것 같아서 그 사람을 향하여 침을 뱉었습니다. 이러한 견해가 아주 유력한 것은 갈4:14에서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라고 했는데 그 뜻은 \"너희가 나에게 침을 뱉지 아니하였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누가라는 의원을 데리고 다닌 것을 보면 그의 병과 무관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간질병에 걸렸다고 하면 문제는 그의 환상이나 말로 할 수 없는 계시가 다 간질병자의 환상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기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⑥ 가장 오래된 학설로는 두통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견해는 터튤리안이나 제롬 같은 교부들이 주장하였습니다.

⑦ 가장 진실한 설에 가까운 것이 있습니다. 바울이 안질을 앓고 있었다는 견해입니다. 그런 시력이 좋지 않은 것으로 두통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메석 도상에서 쓰러진 후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강한 빛이 그의 눈에 내리비치므로 시력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 후 아나니아의 기도로 눈이 회복되었지만, 그렇게 좋지 못하였습니다. 갈4:15에 보면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다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부분에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눈이 좋지 않아 대필을 시키고 마지막에 이 편지가 바울의 편지인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큰 글자로 썼다고 봅니다.

⑧ 마지막으로 가장 유력한 견해가 있는데 일종의 무서운 풍토병인 만성적인 말라리아에 걸려 있었다고 봅니다. 이 말라리아 열병은 가시와 같이 뾰족한 말뚝으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을 준다고 합니다. 이 견해는 라이프트, 호프만 같은 유명한 주석학자들의 견해입니다.

자, 우리는 바울의 육체를 찌르는 가시가 무엇이었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간질이나 안질이나 말라리아 풍토병 중의 하나라고 봅니다.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사탄의 사자\"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복음 전도에 방해를 주었으면 사탄의 사자라고 까지 표현했습니다.

바울이 셋째 하늘에 들어가는 엄청난 환상을 보았으면서 이런 가시, 사탄의 사자를 주신 것은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로 보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가시가 제거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세 번이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대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골고루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덤의 공평함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때로 실패도 주십니다. 그래서 그에게 있었던 성공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게 하십니다. 육체의 가시가 있기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요. 너무나 차고 넘치면 기도하게 됩니까?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더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살라고 하십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스펄전(Spurgeon)목사님이나 미국의 무디(Moody)같은 분들이 그렇게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은 비결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무능과 부족함을 깊이 절감하고 죽도록 하나님께 의지하고 매달린 데 있었던 것입니다.

3. 바울은 약함을 통하여 주시는 은혜를 감사하였습니다. (9-10)

바울이 육체의 가시를 생각할 때마다, 그 육체의 가시를 자기 몸을 찌를 때마다 겸손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깨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육신이 건강한데 자신은 형편없었습니다.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신세였습니다. 그 때마다 신앙이 아니라면 좌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공부를 많이 하신 분입니다. 학문의 도시 다소에서 태어났으며, 예루살렘으로 유학 가서는 가말리엘 문하생이 되었습니다. 그는 율법으로 바리새인이었고, 학자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셋째 하늘 삼층천에 올라가서 세상에서 가히 이를 수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교만하기 쉽습니까? 이쯤 되었으면 기독교회 안에서 바울을 따라갈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육신을 보면 형편없습니다. 가시가 있습니다. 찌르는 가시의 고통으로 세상에서 가장 빈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보여집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먼저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 진실한 사람,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는 신앙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를 원하시면 겸손과 감사와 인내를 가져야 합니다.

어떤 중요한 모임이 있어 부부가 함께 외출하였습니다. 남편이 우쭐거리며 잘난 척 하며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아내가 옆에 앉아 옆구리를 지긋이 찌릅니다. 말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자꾸 나서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 때 못 이기는 척 하고 순종하십시오. 아내가 들어도 듣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들으면 어떨 것입니까? 사도 바울이 자만하고 교만하여 자기 자랑을 늘어놓고 자기만이 교회의 최고라는 식으로 나오려고 하면 가시가 옆구리를 찌릅니다. 육체의 가시가 그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고도 모든 영광은 오직 우리 주님께 돌리고 전제와 같이 모두 부어드리고 의의 면류관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하지 말라는 신호가 그 몸에 없는 사람은 사실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해야 할 사람이라고 봅니다. 야곱이라는 사람이 얍복강 나루에서 기도할 때 그의 환도뼈가 위골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아픔이 있었기에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고통을 고통으로만 이해하고 절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통 뒤에 따라오는 영광을 바라보고 인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찌르는 가시가 있는데 오히려 그것 때문에 감사하면서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은 가시 때문에 오히려 성숙한 신앙으로 그를 추스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겸손하십시다. 성경에 의하면 세계는 1일, 2일, 3일... 하는 순서에 따라 만들어져, 6일째에 완성되었습니다. 사람은 그 마지막 6일에 만들어졌습니다. 왜 인간은 마지막에 만들어졌습니까? 그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유대인의 지혜 탈무드에 의하면, 파리 한 마리도 인간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을 알게 되면 인간은 그다지 교만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약함을 감사할 수 있는 은혜는 주님 안에서 살아갈 때 가능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가능합니다. 무엇이 은혜로 다가오는 것은 깨닫는 순간에 따라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역사 하셔야 합니다.

20 세기의 위대한 성녀라고 하면 \'마더 테레사\'라는 수녀를 들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는 그의 일생을 고백하면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계신 천국을 고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지금 그 분과 함께 천국에 있는 그 능력 안에서 천국을 발견합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그 분과 함께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분과 함께 행복해진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그 분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랑하고, 그 분이 도우시는 것처럼 돕고, 그 분이 주시는 것처럼 주고, 그분이 섬기는 것처럼 섬기고, 그분이 구하는 것처럼 구하고, 24시간 그 분과 함께 있으며, 빈궁한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그 분을 어루만지면서 사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심히 약하지만 우리 주님은 심히 강하십니다. 약할 때에 강함 주시는 은혜가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