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삶을 회복 하는 비결

*하나님 회복(3-하나님의 인자하심): 감사의 삶을 회복하는 비결 (11.20.2005 오전)

시편 136편 1-9절, 23-26절

1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2 모든 신들 가운데 가장 크신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3 모든 주 가운데 가장 크신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4 홀로 큰 기적을 일으키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5 지혜로 하늘을 만드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6 물 위에 땅을 펴 놓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7 큰 빛들을 지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8 낮을 다스릴 해를 지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9 밤을 다스릴 달과 별을 지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 23 우리가 낮아졌을 때에, 우리를 기억하여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24 우리를 우리의 원수들에게서 건져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25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먹거리를 주시는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26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시 136.1-9,23-26/ 표준새번역 개정판).

<도입부>

2004년 말 현재 한국인의 53.5%가 종교를 가진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 20년새 9.7% 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종교를 믿는 이유도 \"복을 많이 받기 위해서\"(15.6%)나 \"죽은 다음 영원한 삶을 얻으려고\"(7.8%)등을 제치고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는\"(67.9%) 심리가 압도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갤럽이 31일 발표한 \'2004년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에 따르면 84년에는 43.8%이던 신자수는 이후 89년 49.0%, 97년 46.9%로 나타났으며 이번에 처음으로 비신자(46.5%) 수를 앞질렀다. 여성(9.8%)보다 남자(10.4%)의 증가율이 높다는 점도 눈에 띈다.
\"왜 종교를 믿는가\"라는 물음에 응답자들의 67.9%가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고\"라고 대답했으며 나머지는 \"복을 많이 받기 위해\"(15.6%) \"죽은 다음 영원한 삶을 위해\"(7.8%)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7.0%) 등을 이유로 들었다.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고\"라고 대답한 응답자의 비율은 84년 57.8%에서 2004년에는 10.1% 포인트 증가했다. 반면 \"죽은 다음 영원한 삶을 위해\"라고 대답한 응답자는 지난 20년새 3.6% 포인트 줄어들었다.
종교를 믿는 이유는 종교별로 크게 차이가 났다. 개신교 신자의 경우 \"죽은 다음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해\"라고 응답한 사람이 22.7%인데 비해, 불교신자는 1.8%로 낮게 나타나 대조를 이뤘다.
한편 종교 별 신자수는 불교(24.4%), 개신교(21.4%), 천주교(6.7%)의 순이며, 지난 20년 새 증가율은 불교 5.6%, 개신교 4.2%, 천주교 1.0% 였다. 민족종교.이슬람교 등 기타 종교를 믿는 사람의 수는 0.9%에 불과해 한국인들은 \'빅3 종교\'를 크게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종교의식 조사는 한국갤럽이 지난 1984년 첫 조사를 실시한 뒤 5~7년 단위로 진행하는 것으로, 이번에는 전국(제주도 제외)의 성인남녀 1500명을 집으로 방문해 면접 조사하는 방식을 택했다. 조우석 문화전문기자 [email protected] - ⓒ 중앙일보 & Joins.com


우리가 <마음의 평안을 느끼는 것>은 매우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마음의 평안이 늘 일시적인 정서로 머문다는 것이 우리에게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마음의 평안을 느낄 수 있으려면 <영구적인 감사의 삶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함께 읽으신 시편 136편은 감사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26절까지 각절마다 감사하라고 명합니다. 그 감사의 대상에는 다른 그 누구가 아닌 바로 주님, 하나님께 향하여 있음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감사의 대상이 일관되지 못할 때, 지속적으로 그 자리를 지켜주지 못할 때, 우리는 그 감사를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의 감사가 영원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바로 영원 불변하신 당신께 감사하라고 명하십니다. 이 비밀을 발견한 자들은 이 세상에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감사를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십시오. 여러분이 이 세상 권력자나 가진자나 그 어떠한 대상에게 감사를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만 감사를 돌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지 시편은 말씀합니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서 영원한 감사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 감사에서 우리의 삶이 시작될 때, 우리 자신에게 감사할 수 있고, 자연에 감사할 수 있고, 우리의 가족에게 감사할 수 있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두에게 감사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자하심1-나를 위한 주님>

어머니가 옆에서 손을 꼬옥 잡아주시고 그 인자한 눈동자 속에 자장가를 들어야만 잠이 오는 어린이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손수 만든 옷을 입고 손수 지은 밥을 먹고 손목을 잡고 유치원에 갑니다. 내가 살길은 엄마 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 어린이 같이 어떤 의미에서 크리스천은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마18:3) 단순히 주님 품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은 성난 바다 같고 사나운 정글, 때로는 황량한 사막과도 같다고 합니다.

실직, 파산, 질병, 빈곤, 배신, 모략, 중상, 온갖 불운과 죽음 등 불안과 공포와 고독을 느끼지 않고, 사는 날이 며칠이나 될까? 그런데 주님을 안 날부터 \"두려워 말라, 내게 모두 맡겨라, 내가 항상 같이 하겠다\" 이런 말씀이 성서에 365회, 365일의 수만큼 기록되었습니다. 엄마의 손길보다 누구의 눈동자보다 더 사랑하시고, 절대적인 분이, 우리를 그 피와 말씀과 성령으로 낳으신 분이 내가 병들 때, 약보다 의사보다 먼저 거기 계시고, 시험 당할 때, 욕먹을 때, 슬프고 고달프고 망하고 외롭고,아프고 무섭고 그리고 죽을 때, 언제 어디서나 내 호흡보다, 심장보다 먼저 거기 계신 나를 위한 주님!

<인자하심2-새벽 하늘의 주님>

오늘 새벽의 별빛은 더욱 아름다워 주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보여지는 것은 주님의 인자하신 얼굴뿐입니다. 그것은 다시 새벽 하늘의 별이 되어, 내 가슴에 빛으로 뿌려지는 주님의 사랑이 되어 텅 빈 내 영혼을 채워갑니다. 주님! 나의 힘이 되신 주님! 주님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곁에 없어도 당신은 언제나 당신의 생명의 밀어를 제게 들려 주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매일 들으면서 하루를 살아갑니다. 때로는 주님! 당신의 고난과 아픔까지도 제게 밀어 보내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매일 내 눈물로 섞어서 새벽 하늘에 날렸습니다. 당신이 곁에 없어도 당신은 언제나 당신의 은총을 제게 안겨 주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매일 한아름 가슴으로 안으면서 기쁨을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주님! 오늘따라 주님은 왜 그렇게 저에게 아픔을 주십니까? 왜 그처럼 눈물을 주십니까? 왜 그렇게 어두움을 주십니까? 그러지 않으셔도 항상 제 가슴이 주님에게만 열려 있는데 행여 내가 곁길로 걸을까하는 걱정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럴 수 없음을 주님이 아십니다. 결코 제가 그렇게 걸어가지 않을 것을 주님이 먼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당신이 제 곁에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이렇게 몸부림합니다. 그래서 새벽 하늘의 별들이 모두 당신의 눈동자이고, 그것은 사랑 되어 저를 감싸줍니다. 오늘이 제게 소중함은 그 소중한 날 속에 당신이 항상 계시기 때문입니다. – 서임중, <더 좋은 삶을 위하여>

<유머-할머니의 신앙>

한 시골에 사는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신앙이 깊었고 매일 문 밖에 나와서 큰소리로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를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옆집에 사는 한 할아버지도 문 밖으로 나와서 맞대답을 했다.

\"이봐, 할망구! 신은 없다고!\"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먹을 것도 없을 정도로 가난에 고생을 하고 있을 때, 옆집 할아버지가 먹을 것을 잔뜩 담은 큰 보따리를 문 앞에 놓아두었다. 할머니가 문을 열고 보따리를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기다렸다는 듯 나와서 대답했다.
\"이것 보라고, 그건 내가 사다 놓은 거야! 신은 없다니까?\"
그러자 할머니가 말했다.
\"하나님, 제게 음식만 주신 것이 아니라 악마로 하여금 돈을 지불하게 하셨군요.\"


이와 같이 세상에는 다양한 감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구적인 감사입니다. 바로 그 영구적인 감사를 회복할 수 있는 비결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감사의 삶을 회복하는 비결 - 하나님만을 의식하는 찬양의 삶을 회복하십시오

먼저 우리가 영구적인 감사의 삶을 위해서는, 하나님께 개별적으로나 공동으로나 어떤 형식으로든, 개별적인 찬양하는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항상 찬양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각자만의 찬양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찬양의 형태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러분이 온전히 하나님을 찬양하며 나아갈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야 합니다.

<하나님만 들으신 찬양>

성탄절을 앞둔 한 ‘찬양의 밤’ 에 있었던 일입니다. 강단쪽에는 20여명의 찬양대원들이 늘어섰고 협연을 약속한 이웃 고등학교의 밴드부원 10여명도 금관악기를 번쩍이며 늘어서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되었는데도 회중석이 텅 비어 있는 것입니다. 이불가게를 하는 한 사람만 구석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대원들의 표정에는 난처함이 역력했고 지휘자는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입니다. 반주자가 “해야 되나요?”하며 지휘자에게 물었습니다. 그 순간 지휘자는 손을 번쩍 치켜들었고 연주는 시작되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지휘자의 고백입니다. 그 역시 ‘해야 하나’하며 망설이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반주자의 말을 듣는 순간 ‘아니, 우리가 왜 여기 모였는가? 누구를 위한 찬양인가? 주님께서는 여기 계실 터인데’라는 생각이 등을 모질게 두드리더라는 것입니다. 지휘자가 그 망설임을 정리하는 데는 1초도 필요 없었다고 했습니다. 감동적인 연주였습니다. 그리고 그 감동은 사람을 의식하기 전에 주님을 찬양한 데서 온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찬양의 밤은 분명히 모두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찬양이었으며, 동시에 하나님께 더 깊은 감동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감동시키며 동시에 내가 감동할 수 있는 찬양을 드리는 삶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면서 사람을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물론 이러한 의식은 우리의 삶에 필요한 부분입니다.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의식에 사로잡혀 진정으로 우리가 의식해야 할 하나님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어떤 선한 일을 할 때에 우리가 사람을 의식하며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하며 진행될 때, 그 일은 크건 작건 그 결과가 어떠하든 가장 위대한 일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지난 수 천년 동안 신앙의 역사 속에서 위대한 행보는 바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하며 행한 것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교회의 예배실에서 혼자 있을 때, 차 안에서 혼자 있을 때 주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나아갑니다. 그 때 위로부터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감동으로 나의 입가에 감사의 삶의 출발이 시작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리게 되고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에서 감사가 넘치게 되는 것을 느낍니다. 찬양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찬양의 학교에서 우리는, 찬양이 아닌 다른 목표에 접근하는 것이 왜 우리의 영혼을 쉼 없이 만들고 말았는가를 배운다.”-Douglas Steere.

스티어가 지적한 바와 같이, 찬양이 아닌 다른 목표에 접근하려고 할 때 우리는 영혼의 쉼을 잃어버립니다. 참된 평안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됩니다. 여러분, 하루를 시작할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 하루와 그렇지 않은 하루는 매우 큰 차이가 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들으면서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시작하는 하루와 그렇지 않는 하루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대답이 가장 직접적일 때 그것을 가리켜 찬양이라고 합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존귀히 여기며, 찬송하고 칭송하고자 하는 마음의 자발적인 열망입니다. 찬양을 통해 우리는 이기심이 없는 순수한 헌신의 공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오후 이 시대의 영성가인 리처드 포스터도 독서시간이 되어 돌아가던 중에 가까운 곳에 폭포가 있다는 희미한 표지판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표지판이 지시하던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구부러진 길을 타고 올라갔습니다.

그 길은 울창한 숲속으로 나 있었으며 폭포가 있는 곳에서 끝이 났습니다. 그 지역을 탐사하는 동안 햇빛이 간간이 술래잡기 놀이를 하듯이 나무들을 헤치며 드나들었습니다.

약 한 시간 남짓 강물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모든 길이 보이지 않았고 여행자들과 관광객들도 전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자갈길을 지나고 쓰러진 나무들을 넘어가 보니 마침내 강 속에 돌출된 거대한 바위가 나타났습니다. 그 바위로 인해 강물은 구부러진 말굽형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많은 노력 끝에 나는 이 길다란 화강암 바위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동안 나는 위쪽에 펼쳐져 있는 협곡의 장관과 아래쪽에 흐르고 있는 세찬 물살에 그저 입을 벌리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이루 말로 형언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금방 집어삼킬 듯한 세찬 강물 소리에 나는 마음껏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외치고 싶었습니다. 찬양과 찬미의 정신이 내 속에서 용솟음쳤습니다. 나는 하늘의 북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고 내가 알지 못하는 말로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즉흥적으로 빛나는 광채 속에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영혼의 노래만이 아니라 희미한 추억 속에 아련히 솟아나는 시와 찬미로, 내 마음으로도 노래하였습니다. 크건 작건 모든 일에 대해 감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즐거이 주님을 높이는 찬양이 강물 소리와 어우러졌습니다. 마치 나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올라가는 끊임없는 찬미 속에 참여하도록 초청받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처음에 그 경험은 나를 완전히 열광시켰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 환희는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라는 속삭임으로 바뀌었습니다. 경배가 더 깊어지고 더 풍성해졌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마침내 하나님의 이름으로 숨쉬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찬양이 되었습니다.

그분을 높이는 말을 얼마 동안 조용히 중얼거렸습니다. 그러자 말없이 하나님께서 들이신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앞날에 필요한 교훈을 주었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경외와 찬양으로 고개 숙이며 오던 길을 돌이켜 강물 위쪽으로 올라갔습니다. 마음 속의 폭포수는 그 뒤에도 며칠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날 오후 나는 고전적인 의미의 황홀경은 맛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슬픔을 치료해 주고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인도하는 사랑의 찬양 속에는 분명히 들어갔습니다(Richard Foster, Prayer).

찬양의 기도에는 감사와 찬송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대개 이렇게 구분합니다. 감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에 대해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찬송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 구분은 타당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중시해서는 안됩니다. 경험으로 봤을 때 그 두 가지는 서로 얽히고 설켜서 유기적인 전체를 이룹니다. 구약성경의 세계는 감사의 언어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특히 시편 중에는 감사라는 말을 담고 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예수께서도 궁극적으로 감사의 사람이셨습니다.

2. 감사의 삶을 회복하는 비결 -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십시오  

우리의 인생에서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삶에서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하고 느끼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의 23절에서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낮아졌을 때에, 우리를 기억하여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서는 우리가 낮아지게 될 때, 우리를 잊어버립니다. 기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낮아졌을 때에도 오히려 더 우리를 기억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낮아질 때로 낮아져서 더 이상 낮아질 수도 어려워질 수도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를 찾아오시는 그 주님,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 앞에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여기에 위대한 하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요 종이라면, 바로 낮아질 때로 낮아진 자들을 찾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알고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은혜는 영광의 씨앗이요, 마음 속의 영광스러운 여명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앞으로 받을 기업의 보증입니다. 영혼 속에 있는 영적 생명말고 영원한 생명의 시작과 보증이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은혜가 아니고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Jonathan Edwards, The Religious Affections>

어떤 사람들은 여러 사람의 무리와 함께 있을 때 크게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는 그것과 부합되는 어떠한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혼자 은밀히 묵상하거나 혼자 기도하거나 하나님과 교제할 때, 혼자 떨어져서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을 때는 그와 같은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도 의심할 여지 없이 신앙적인 교제와 그리스도인의 대화를 기뻐하며, 그 속에서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을 많이 발견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로부터 물러나 고독한 장소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 역시 마음을 고정시키고 자기 마음의 정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특별한 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3. 감사의 삶을 회복하는 비결 -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참된 만족감과 기쁨을 받으십시오

또한 감사의 삶을 위해서는 <참된 만족감과 기쁨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 상황과 형편이 어떠하든지간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 비결은 영적인 것을 누림으로 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서 올 수 없습니다. 세상 그 무엇으로부터 올 수 없습니다. 그 누구로부터 올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 성령으로부터, 바로 위로부터 올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을 누림으로 오는 그 만족감과 기쁨은 영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것을 누리는 데는 그러한 일이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세상적인 것들도 특별한 소욕을 만족시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만족함을 받은 소욕은 신물을 느끼게 되고 결국 나중에는 그 즐거움이 끝나 버리고 맙니다.

그 즐거움이 끝나자마자,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의 보편적인 소욕이 다시 돌아옵니다. 그러나 텅 빈 상태로 말입니다. 결국 그 소욕을 만족시키는 어떠한 것이 없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어떤 특별한 소욕이 채워져 싫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 본성의 보편적인 갈증으로부터 벗어나서 나중에는 텅 빈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감사는 절대적인 것 – 김석년>

발명왕 에디슨은 젊은 시절 청각장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말년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내가 젊은 날에 귀머거리가 됨으로써 연구에 몰두할 때 잡음이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청각장애는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에디슨은 상황에 따라 감사한 것이 아니라 고통 중에도 감사의 내용을 찾아 절대적으로 감사했던 것입니다. 누구나 은혜를 받을 수는 있지만 아무나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허락된 그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은혜의 통로가 여러분이 만나고 접촉하는 사람이거나 그 무엇일 수 있습니다. 그 은혜를 인식하고 감사하기 시작할 때, 여러분의 인생에 위대한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근거하여 우리에게 감사는 상황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