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성령의 본격적인 사역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복음서에 나타난 성령의 이해, 즉 예수 자신의 성령에 대한 언급이 이러한 이해를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특히 요한복음서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은 이런 성격이 매우 짙게 나타내고 있다(요14,16-17; 26; 15,26; 16,13). 우리는 먼저 구약성서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을 먼저 살펴보고, 그 사역이 신약에서,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의 사역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를 논해 보고자 한다.
1-1. 구약에서 성령의 사역
구약에서는 성령을 חור로 표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원래 숨, 입김, 바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능력으로서 야훼 종교의 구성적인 요소이며, 그 활동은 매우 다양하다.1) 주로 하나님의 영, 성령은 이스라엘이 위기를 처했을 때, 그 위기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그의 활동은 전개된다.2) 그의 활동은 위기상황으로부터 백성들을 구원해 주는 구원자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이 역할은 이스라엘 역사 초기, 사사시대(삿3,7; 삼상11f)때부터 이루어진 활동이다.3) 이러한 활동과 전승은 예언자에게 이어지고, 특히 이사야가 예언하는 메시아, 고난의 종에게 결합되어 나타나고 있다. 누가는 예수 사역 활동의 시작의 서론을 이사야 예언(사61,2)4)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약의 성령의 활동에 대해 김균진 교수는 다소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구약성서에 있어서 성령의 활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활동에 비하여 볼 때 “유지하고 인도하는” 활동이요, 그러한 점에서 “제한된 활동”이라 말할 수 있다. 성령의 궁극적인 오심과 활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다.5)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성령의 사역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에서 성령의 독자적 구원의 활동이 전제되지 않거나, 하나의 제한된 활동으로 그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사역과의 연속성이 문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1-2. 신약에서의 성령의 사역
신약에 나타난 성령에 대한 이해는 매우 다양하다. 공관복음서에서 이해하는 성령의 활동은 주로 예수가 메시아로 활동하고, 또한 그 권위를 보장해 주는 사역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예수의 탄생(마1,18), 예수의 세례 받으심(마3,16; 막1,10), 예수의 시험 받으심(마4,1; 막1,12)에 집중되어 있다. 예수의 메시아적 활동은 성령세례로부터 시작된다. 즉 예수의 메시아되심의 표징으로서 성령세례가 기술되고 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근거로 하여 예수는 성령의 담지자(Geistträger)로서의 활동한다.6)
요한복음과 바울서신에서는 성령을 예수를 위한 변호인이나 중재자로 병립시킨다(요14,16; 롬8,27). 성령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위하여 증거하고, 세상에서는 또한 하나님과 제자들을 위하여 증거한다. 바울(롬8,27,34)과 요한(14,16; 요일2,1)에게 있어서 예수와 성령은 같은 종류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7) 또한 바울은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롬8,9; 빌1,19; 비교, 벧전1,11)” 혹은 “아들의 영(갈4,6)”, “주님과 합하는 자는 주님과 한 영이다(고전6,17)”라고 서술하며,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와 ‘성령 안에’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8) 요한과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의 사역은 특히 교회 공동체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공동체 안에 계시며 공동체와 함께, 공동체를 통하여 그의 구원의 사역을 수행하신다.9)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성령의 전(고전3,16; 6,19; 고후6,16)이 되며, 그리스도의 몸(고전12,27)이 된다. 그러므로 요한과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분리되어 설명할 수 없다.
1-3. 오늘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현실성
앞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성령의 사역은 구약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 초기부터 그의 활동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예수의 사역을 도와주는 역할로 나타난다. 예수의 부활과 승천 이후의 성령사역은 성령의 단독적인 사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 사역이다.10)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누구이며, 그가 하는 사역이 무엇인가를 논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관성 속에서 그 출발점을 삼아야 한다.11) 그러므로 신약에서 성령의 사역은 기독론적 전거를 가지고 출발해야 한다. 또한 신약에서 성령의 사역은 어떤 사변적인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체험한 기자들의 증언에서 출발하고 있다.12) 성령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의 사건을 현재화시킨다. 요한에 의하면 성령은 가르치고(요14,26), 기억나게 하고(요14,26), 예수를 증거(요15,26)하는 보혜사이다. 그리고 바울 서신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을 보면, 어떤 신비체험이 주목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체험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의 활동을 통해서 그의 마음속에서 현재화 시키는 것이다.13) 오늘 이 시대를 성령의 시대라 지칭하는 것도 성령의 활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현재화 된다고 하는데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14) 현재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계를 구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체험되지며, 곧 이것은 지금도 하나님의 삼위일체론적 사역이 현재화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15)는 표징으로서 성령사역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2. 하나님의 영원한 본질로서의 “예수: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다”
-하나님의 영원한 결의로서의 일방적인 계약: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어 주겠다”
2-1. 구약에서의 계약형식
구약에서의 계약은 네가지 양상으로 정리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일방적 자기의무로서의 계약(Foedus μονόπλευρον); 2. 상호성의 형태로서의 계약(Foedus δίπλευρον); 3. 예증적이고 잠정적인 계약으로서의 계약; 4. 보편적인 계약의 조망에 있는 옛 계약으로 구분할 수 있다.16) 구약에 나타나 있는 계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 근동의 계약형식과는 달리, 상호 조약의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와 의지에 의해 맺어지는 일방적 자기 의무로서의 계약이다.17) 하나님은 주도적으로 이스라엘을 그의 계약의 파트너로 선택하여 부르셨다.18) 하나님의 일방적 자기 의무로서의 계약의 형식(창8,22; 9,1-17)을 바르트(K. Barth)는 새로운 계약에 대한 예레미야의 예언의 전통을 수용하고, 이 예언을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렘 31:31, 참고. 렘 7:23; 11:4; 30:22; 32:38)라는 형식(Bundesformel)으로 해석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언급에 대한 해석이다.19) 바르트는 이러한 형식의 계약은 나사렛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낮아지심(Herablassung, Kondeszendenz)으로 분명하게 구체화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낮아지심은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계약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20)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으신 이러한 계약의 전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21) 바르트에게 있어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주도적이고 일방적인 사랑, 곧 자기 자신을 계약사의 과정속에서 전개하시는 사랑 이외에 다른 것은 아니다.22)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계약은 그들에 하나님 사랑의 표징이며, 끝까지 글의 하나님이 되어주고 함께 하겠다는 선언이며 동시에 약속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히브리어 단어 תירב(계약)을 LXX(70인역)으로 번역할 때 일반적인 단어인 σπονδη로 번역하지 않고 διαδηθηκη(letztwillige Verfügung, Testament)로 번역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23)
2-2. 계약형식과 동행형식
이 계약의 형식(Bundesformel)은 “함께(מע)”라는 전치사가 결합되어 예언자들의 파송형식(Sendungsformel, 또는 동행형식(Beistandsformel)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으로 나타나는데, 프로이스(Horst D. Preuss)는 이 형식을 세가지 형태로 분류한다; 1.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와 같이 하나님에 의한 약속 내지는 확언으로 나타나고, 2. “약속, 확원, 기원(바램) 혹은 인간의 질문”으로 나타나며, 3. “인간에 의한 확증” 곧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다’, ‘하나님이 위와 함께 하신다’ 라는 형식으로 나타난다.24) 이런 면에서 볼 때, 계약형식과 동행 형식의 내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25) 이러한 형식은 곧 “임마누엘”의 메시아 형식과 결합되어 있고, 다시 “임마누엘” 표징으로 구체화되고 있다.26)
2-3. 예수안에서의 계약의 실현
임마누엘의 표징은 이스라엘 역사의 구체적인 인간 실존적 상황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며, 하나님의 계약 실현의 현재화이다.27) 그리고 신약에 와서는 예수가 곧 임마누엘이다(마1,21-23). 마태가, 예수와 임마누엘을 연결시킨 이유는 “죄로부터의 구원은 인간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존재와 동일하게 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28)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약이 실현되고, 현재화 됨으로써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체험되어진다(참조, 마16,13-20, 막15, 39).29) 또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사역은 이미 그의 이름에서 계시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Gott mit uns)은 곧 하나님의 구원을 표시라는 형식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와 계약을 맺어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계약을 성취해 나가는 과정을 곧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구원사(Heilsgeschichte)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가 제자들을 파송하는 형식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약 형식의 모범(Vorbild)을 볼 수 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우리는 이 구절을 “선교명령”에 중점을 두고 보아서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처음부터 마태는 ‘임마누엘’의 표상으로서 예수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30) 오히려 이 구절은 하나님 계약의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ich bin bei euch alle Tage bis an das Ende der Welt)”라는 예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일방적 자기의무의 계약의 형식과 동일하다. 예수는 이 약속을 통해 자기 자신을 제한시키고 있으며, 그의 제자된 모두에게 끝까지 그 약속을 성취시키겠다는 예수의 자기의지의 표현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은 예수를 통해 실현되고 현재화 되었고, 이제 성령을 통해 현재화 되고 실현된다.
3.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성령을 받아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는 일
인간이 성령을 받고 또 모시게 되는 곳에는 한 인간의 체험과 행위가 문제가 된다.31) 성령의 사역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이 오늘 이곳에서 나를 위한 사건이 체험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은총이다. 이 은총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선교적 사명을 가지게 된다. 이 사명은 곧 “오늘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된다. 왜냐하면 이 은총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살아 있는 능력이 되고, 삶을 미리 정당화하는 전제와 원리가 아니라 삶을 충실하게 살아낸 후에 결과적으로 고백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32) 그러므로 은총은 “나를 따라 오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에 따라 나서게 함으로서 그의 제자로서의 삶을 요구한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결합을 가지게 한다. 본회퍼는 이 은총을 “값비싼 은혜”라 부른다.33)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값비싸다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가 직접 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를 짐으로, 생명의 대가로 주신 은혜임을 의미하고 있다. 이 은혜는 인간이 그의 삶을 따름으로서 실현된다. 그러므로 그의 제자됨은 그가 이 세상을 위해 고난을 짊어지셨듯이, 이 세상을 위한 고난의 삶으로의 방향전환이다. 세상을 위한 제자의 고난은 바로 세속화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에 관해서 본회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수를 좇는 일을 세속 중심에 세워 놓은 것이다. 특수한 환경 속에서 특수행위로 알고 아무런 불평도 없이 행할 수 있는 생활 훈련이 이제는 성속(聖俗)의 차별 없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피할 수 없는 명령이다. 예수의 계명을 순종한다는 일은 일상적 직업 생활 사이의 갈등이 예측할 수 없을 만큼 깊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맞대게 되었다.34) 그를 따라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을 떠나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세속화의 의미를 다시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3-1.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복음을 세속화 하는 것이다.
세속화란 원래 의미는 제식의 목적을 위해 쓰여졌던 것이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쓰여지도록 넘어가는 과정35)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육체를 입으신 성육신의 사건(요1,14)과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요3,16) 그 자체가 세속화의 사건이라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또한 긍정하시고 계셨기 때문에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이다.36) 그러므로 이 세상과 관계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허구이고, 이념에 불과하다.37)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등돌림이 아니라, 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 세상과 함께 하는 그리스도인이 세상 안에 있는 이웃을 위한 고난에 동참할 수 있다. 이것이 제자의 길이다. 또한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을 “타자(他者)를 위한 존재”38)로 규정하고 있다.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의 그리스도의 현실은 생의 한가운데서 타자를 위해 고난받는 현실이며, 이것은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행위로서 인식되어야 한다.39) 예수는 최후의 심판에 있어서 의인과 죄인의 심판(참조, 마25,31-46)을 특정한 범위를 기준으로 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당하는 이웃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에 그 기준을 두고 있다.
4. 선포되어야 할 예수
선포(Kerygma)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신앙은 제자들로부터 전승된 것이다. 제자들에 의해서 선포된 것은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없이 선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계속 유지될 수 없었다. 신약성서 전체에 흐르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를 증언하는 것이고,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체험한 고백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포는 이 범위를 넘어 설 수 없다.40)
오트(H. Ott)는 선포를 세가지 의미로 분류하고 있는데, 1. 선포는 단순히 그리스도교의 근본적 진리를 가르치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2. 선포는 본질적으로 권면이요, 계속적인 권고이다. 3. 선포 그 자체가 하나의 “성례전적 행위”이다.41) 그러므로 이것은 교회를 유지해 나가는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선포해야 하는가? 이다. 선포의 담지자로서 교회는 이것에 대하여 고민해야 한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선포한다는 것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분을 알리는 언어사건이다. 또한 예수는 이 선포 속에서만 인간과 만난다. 선포 가운데서 예수와의 만남이 곧 사건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고 있는 언어사건이란 단순히 언어적인 사건, 즉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사건 속에는 행위가 포함되어 있다.42) 그래서 바르트(K. Barth)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행위로 이해하고 있다.43) 말씀을 행위로서 정의할 때,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하나는 선포하는 자의 삶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선포하는 자와 선포하는 말씀의 내용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44) 다른 또 하나는 예수의 말씀 자체가 곧 사건이고 행위이다는 의미이다. 즉 선포는 오로지 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포자인 교회의 삶을 통해서, 말씀자체의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것은 또 하나의 예수의 부활을 현재화시키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행위로서 말씀을 듣는자에게 결단을 요구하게 하고, 부활을 체험하게 하기 때문이다.45) 그리고 선포를 통해서 하나님은 나(Ich)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적인 그리스도는 선포된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여기서 רבד(dabar)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dabar에서 야훼는 그 본질을 알리며, 야훼의 dabar를 가진 자는 야훼를 안다. dabar는 신의 부분, 유출 혹은 그의 실체 이상이며, 또 그것은 야훼의 표현양식, 말하자면 최고의 현현양식이다. dabar는 야훼가 죽을 인간들에게 인식될 수 있는 한에서 야훼이다(비교, 롬1,20)46)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를 통해서 현재화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표현양식이 된다. 우리가 말씀 속에 거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표현 양식이 정확하다면, 선포는 곧 “성례전적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례전은 곧 하나님의 임재하심(현존)을 나타내는 표현 양식이기 때문이고, 말씀의 “한 특수한 형식”이요 “공동체의 삶과 고백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