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 하나가 감사하니라/눅17:1-17 2002-11-05 14:58:47 read : 75
(눅 17: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눅 17: 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눅 17: 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눅 17: 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눅 17: 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눅 17: 16)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눅 17: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 17: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눅 17: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사무엘 스마일즈 박사는 말하기를 \"생각을 심으면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으면 습관을 거두고, 습관을 심으면 그의 운명을 거둔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힘들고 지겨운 하루라고 생각하면 하루 종일 지겹고 힘든 열매를 거두고 \"오늘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참 살아 볼만한 하루야\" 하고 생각하면 살맛나는 열매를 거둡니다. 죄수들은 타에 의해 감옥이라는 곳에서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합니다. 수도사들은 스스로 세상과 단절된 수도원에서 생활을 합니다. 둘 다 사람을 만나지 않고 고독하고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죄수는 내내 환경을 불평하거나 타인을 저주하기 때문에 감옥이 그야말로 감옥입니다. 그러나 수도사는 깊은 진리를 찾아 스스로 나선 사람들이기 때문에 며칠씩 굶어도 기쁨과 감사로 하루를 보냅니다. 아무리 환경이 나빠도 그 속에 감사함을 찾고 깊은 진리를 찾습니다.
감옥의 죄수가 수도사와 같은 마음을 먹는다면 감옥은 수도원이 될 것이고 수도사가 불평을 하며 죄수와 같은 마음을 품으면 수도원은 감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행복과 삶의 가치는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가치에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느냐에 따라 그의 삶과 운명이 달라집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 사마리아 부근에서 있었던 은혜로운 일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열 사람의 문둥병자를 고쳐주셨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돌아와 감사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언하십니다.
우리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는 구원입니다. 이 땅의 축복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 1:9). 이 사람의 어떤 믿음이 이와같은 구원의 선언을 받게하였습니까? 오늘은 이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1) 구원받는 믿음은 감사부터 먼저 하였습니다.
문둥병은 전염성이 강합니다. 그래서 문둥병자는 가족과 함께 살 수 없습니다. 반드시 가족과 사회로부터 떨어져서 살아야 합니다. 사회로부터 격리되기 때문에 생계수단이 없었습니다. 문둥병자는 병으로 죽든지 아니면 가난으로 죽을 수 밖 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늘이 내린 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병자들은 혼자서 있지 아니하고 같은 병자들끼리 집단으로 살았습니다.
사마리아 부근에 살고 있었던 문둥병자들은 어느날 예수님이 이곳으로 지나가신 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목 가까운 곳에서 기다리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소리쳤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은 저들의 호소를 들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구약 레위기13장에는 문둥병의 발생과 치료에 대하여 제사장이 확인 하도록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에게 갔다는 것은 주님이 말씀하실 때에 저들의 그 더러운 몸이 깨끗해 졌다는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 사람이 모두 제사장들에게 갔습니다. 이때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웠겠습니까? 아마도 날아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한 시라도 빨리 자신들의 깨끗해진 몸을 확인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깨끗해진 몸을 가족들에게 달려가 보여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제 정상적인 사람이 되었다고 소리라도 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한 순간이라도 더 빨리 천벌을 받았다는 그 무거운 꼬리표를 짤라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제사장의 확인이 있음 다음에 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들은 제사장에게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문둥병자가 제사장에게 가던 발걸음을 돌려서 예수님에게 왔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례하였습니다. 사례라는 말은 감사의 예를 올렸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몸을 깨끗하게 고쳐주신 이는 예수님이지 제사장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에게 자기 몸을 보이는 것보다 자기 몸을 치료해주신 예수님에게 감사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자신의 자유와 기쁨을 외치는 것보다 그것을 부여해주신 주님께 감사함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일의 시작이 있으므로 끝이 있습니다. 아홉은 시작을 확인하지 않고 결과만 즐겼습니다. 그러나 이 한 사람은 이 결과가 있기에는 시작이 어디에 있었던가를 확인하였습니다. 그것이 이 사람의 감사입니다. 오늘 우리의 시작을 확인해 봅시다. 잠간 뒤돌아보며 내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확인해 봅시다. 거기에는 반드시 주님의 은혜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의 그 은혜를 확인하고 감사하자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은혜를 받고 돌아가는 사람보다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한 사람입니다.
3) 구원하는 믿음은 혼자서라도 주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문둥병자 열 사람은 지금까지 불쌍한 처지를 서로 보듬어 앉고 살았습니다. 모든 설움을 함께 위로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치유도 함께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에게 자기들의 몸을 보이려고 함께 갔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이방인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율법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장들에게 자기 몸을 보이러 가는 것이 지금 율법대로 한 것이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에 가는 것이 옳은 일 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그들은 다수입니다. 이 한 사람의 이방인이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얼마나 무시했습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이 율법도 없고 일찍기 다른 민족과 잡혼을 하므로 피도 순수하지 못하고 아예 이방인이라고 취급했으며 그래서 제사도 따로 드리고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라고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이 이방인 문둥병자는 감사부터 하였습니다. 그동안 자기와 동고동락을 같이 했었던 다수의 친구들을 따라가지 아니하였습니다. 율법을 많이 알고 율법대로 한다던 사람들을 따라가지 아니했습니다. 그리고 혼자 돌아와 감사했습니다. 그 혼자 돌아오던 길이 아주 짧은 시간일망정 매우 어리석고 외로운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 감사하는 것만은 해야만 했습니다. 주님께 감사함은 자신이 지금 받은 은혜가 주님이 주신 것임을 인정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구원을 얻을만한 믿음이 없어도 병을 낫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믿음이 없으므로 자신의 소기의 목적을 이룬 다음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축복을 받은 다음 세상으로 돌아가버립니다. 구원을 얻기까지의 믿음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열 문둥병자가 주님께 처음 불쌍히 여겨달라고 호소했었던 것은 그것은 구원을 얻을만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병이나 고치고자 하는 단순한 호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은 저들이 처음 불쌍히 여겨달라고 호소했을 때는 그것을 믿음이라 하시지 않았습니다. 구원을 얻었으니 가라고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도 단순히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 사람이 돌아와 엎드려 감사할 때 주님은 그때서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까지의 동고동락했던 동료를 떠나서 혼자 돌아왔으나 충분한 보상을 받았습니다. 이전에 병을 고친 것보다 더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영생의 구원이었습니다. 이 이방인은 주님께 감사하므로 육신의 은혜를 입은 것보다 더 귀한 영혼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께 감사하는 그 마음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주님께 감사하는 우리의 마음, 얼마나 아름다운지 주님께 감사하는 모든 순간 내 마음 천국일세\"
그래서 주님은 그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찾으십니다. 주님은 은혜를 많이 받았으나 아직도 감사할 줄 모르는 그 사람은 어디 있느냐고 찾으십니다. 주님은 남달리 축복을 받았으나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지금 어디 있느냐고 찾으십니다. 믿음이 있고 말씀을 잘 아노라하면서도 주님께 감사하지 않는 사람 어디에 있느냐고 찾으십니다. 그들은 아직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골 2: 7)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권하였습니다.
믿음에 있는 성도들은 감사가 더욱 충만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믿음 안에 있는 증거입니다. 주님의 칭찬받는 믿음도 은혜를 받고자 하는 믿음보다 감사하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사는 사람에게는 감사거리만 생기고 불평만을 일삼는 투덜이에게는 불평거리만 생깁니다. 괴테는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곳곳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행복하고 소중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우리는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조건이 충분합니다. 우리가 살아온 과거를 살펴보십시다. 수 없는 전쟁, 혹독한 가난, 계속되는 질병, 그때 몇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지금 살아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수도꼭지를 틀면 맑은 물이 언제나 시원하게 쏟아집니다. 언제나 따뜻한 물로 샤워할 수 있습니다. 배불리 먹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자유로운 세상이 있습니다. 이런 세상이 불과 몇 십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감사함을 그토록 빨리 잊어버리고 불평불만 가운데 살면 되겠습니까? 2) 요즘 같으면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국민이요 이 땅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너무 강해서 미국처럼 미움을 받는 것도 아니요 너무 못살아서 멸시받는 나라도 아닙니다. 이제는 남북이 평화로서 조금씩 가까와졌습니다. 그래서 지금 세계가 긴장하고 미국 국민의 70%가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받아야 할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데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지대에서 살고 있지안습니까 이전 처럼 간첩이 있는 것도 아니요 병원이 없는 것도 아니요, 먹을 것이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나는 이전에 한국민이라는 것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땅덩어리는 좁고 일 한 곳은 없고 서로 미워하고 남북은 갈라졌고 왜 하필이면 이런 나의 국민이 되었는고. 나도 미국이나 카나다 호주 같이 환경이 좋고 좀 넓은 곳에서 살았더라면 큰 자리 하나 차지하였을턴데! 하고 말입니다. 나만 그렇습니까? 좀 젊은 사람들이라면, 좀 생각할 줄 사람이면, 좀 꿈이 있다는 사람이라면 뭐 다 그런 생각아닌 원망이나 불평을 한 번쯤은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미국이 테러를 당하고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이 피난을 가는 것을 보니까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3)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이 있고섭리하심이 있습니다. 아무리 주위에 믿는 사람이 많고 전도를 많이 받았아도 끝내 예수 믿지 못하고 숨은 거두는 불쌍한 영혼들이 너무 많습니다. 많을 뿐만 아니라 절반 이상이 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쉽게 믿음을 가졌쟎습니까? 그게 다 나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지극한 섭리와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불평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감사의 눈으로 보변 세상에는 온통 감사한 것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삶이란 얼마나 황량한 삶입니까? 앗시스의 성 프랜시스가 무신론자와 토론을 하며 길을 걷고 있다가 마침 맹인 거지를 만났습니다. 프랜시스는 맹인에게 말을 건냈습니다. \"만일 내가 다신의 눈을 뜨게 해준다고 하면 당신은 아마도 나를 존경하겠지요? 맹인이 대답했습니다. \"존경뿐이겠습니까? 나는 선생님의 노예가 되겠습니다요\". 프랜시스는 무신론자에게 말했습니다. \"어떻소. 이 맹인은 눈을 뜨게 해준 사람의 노예가 되겠다는데 당신은 눈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다는 거요\"?
세계 최고의 극작가 섹스피어는 말합니다. \"겨울 바람이 아무리 차다해도 배은망덕자보다는 나으리라\"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 주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그 사람은 아직도 구원에서 멀리 있을까 염려되지 않습니까? 구원도 여러 사람이 받은 것이라면 감사도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이 더 아름다울 것입니다. 성도들 여러분! 이 추수의 계절에 주님의 은혜를 감사합시다. 그리고 아직도 감사할 줄 모르는 나머지 아홉을 찾으로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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