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 및 교리설교
저자 지영근 목사
저희들은 성령님의 지식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① 신약시대가 성령님의 역사담당의 시대이기 때문이요, ② 말세 지말에 사는 모든 성도가 성령의 충만을 힘입어 하나님의 사명을 잘 성취해야 하기 때문이요, ③ 성령님에 관한 연구가 단순하지 않고 또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지식을 바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신앙생활의 성질과 모양을 바로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성경에서 나타내주신 성령님과 그 역사를 배워서 확신하고 그 모범을 따르는 길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뜻에서 평신도를 상대로 성령님에 대한 지식에 관한 설교 몇 편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주밀하게 읽으셔서 성령론에 대한 지식을 바르게 가지시므로 잘못됨이 없기를 바랍니다. 혹 필자가 잘못 이해한 것이 있더라도 관용하시고 잘 지도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목 차
성령님에 대한 설교 3
목 차 4
제1과 성령님의 명칭에 대하여 (창 1:2, 고전 2:10~13)
제2과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가? (요 14:26, 15:16, 26)
제3과 오순절과 성령강림의 의미 (행 2:1~13)
제4과 요엘이 예언한 성령 (욜 2:28~32, 행 2:14~21)
제5과 성령 보내실 것을 약속하심 (요 14:16~17)
제6과 성령과 불로 세례주심 (마 3:11~12)
제7과 불을 땅에 던지러 오심 (눅 12:49~50)
제8과 오순절 때에 있었던 일 (행 2:1~13)
제9과 성령강림절을 지키는 정신 (레 23:14~21, 신 16:9~12)
제10과 성령님의 사역 (고전 12:4~11)
제11과 성령님의 구원사역 (고전 2:10~16)
제12과 성령님의 성경교육 (요 14:26)
제13과 성령님의 사역과 관련된 지식들 (창 1:2, 욥 26:13)
제14과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8)
제15과 성령 충만의 결과 (갈 5:16~26)
제16과 성령을 좇아 행함 (갈 5:16, 18, 25)
제17과 성령의 세례를 체험한 사람들 (행 2:1~13)
제18과 성령이 충만하였던 사람들 (행 7:54~60)
제19과 영의 역사를 분별함에 대하여 (요일 4:1~3)
제20과 성령 충만의 상태 (롬 8:26~27)
제21과 성령을 소멸치 말라 (살전 5:19)
제22과 성령의 열매 (갈 5:22~23)
제23과 성령 충만과 신앙성숙 (벧후 3:18)
제24과 성령님이 주시는 은사들 (고전 12:1~11, 28~31, 13:8)
제25과 은사에 대한 요절 정리 (고전 12:4~11)
제26과 성령님의 불같은 역사 (눅 12:49)
제27과 성령님의 물같은 역사 (요 4:14, 7:37~39)
제28과 성령님의 바람같은 역사 (요 3:8)
제29과 성령님의 기름같은 역사 (고후 1:21~22, 요일 2:27)
제30과 성령님의 비둘기같은 역사 (마 3:16, 눅 3:22)
제31과 한국의 오순절 이야기 (히 13:7)
부록 : 교리설교 14편 첨부
제32과 성령님이 하시는 일 (요 14:16~17,26,16:8~13)
제33과 성화에 대한 지식 (살전 4:3,7)
제34과 영적 실체의 단일성 (마 12:8, 약 2:26)
제35과 천주교의 현대적 의미 (마 10:34~36)
제36과 삼위일체 교리에 대하여 (벧전 1:2)
제37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공부 (마 3:16~17)
제38과 잘못된 말세 지식 (살후 2:1~12, 계 13:16~18)
제39과 안식교에 대하여 (골 2:16, 요일 2:22~23)
제40과 마호멧과 회회교 (히 1:1, 계 22:18~19)
제41과 거듭난 자의 범죄문제 (롬 7:16~25)
제42과 새롭고 산 길 (히 10:19~20)
제43과 모든 영의 아버지 (히 12:9)
제44과 자해, 자살에 대한 구상 (요 15:13~14)
제45과 수건 착용에 대한 말씀 (고전 11:1~16)
2. 제 1 과 “성령님의 명칭에 대하여” (창 1:2, 고전 2:10~13)
1. 성경에서 성령님을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하였읍니다.
1) 구약성경에서 성령님의 명칭은 ①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 1:2)로 시작하여 ② “사람을 흙으로 만드시고(창 1:2),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창 2:7)”는 말씀의 “생기”란 말로 표현하셨는데 이 말씀의 “생기”란 히브리원문으로 “루학크”이며 이 뜻은 바람, 또는 호흡으로 번역되지만 그 생기가 인체에 들어가므로 사람이 생령체가 되었으므로 이 “루학크”는 “영적사람, 또는 영적생명의 요소”로 작용하신 것입니다. ③ 구약에 나타난 신(神)이란 말씀이 거의 다 \"루학크\"로 표기 되었고(창 6:3, 신 34:9, 잠 1:23, 사 37:7, 슥 6:4등), ④ 단 2:35에서는 “바람”으로, ⑤ 욥 17:1에서는 “기운”으로, ⑥ 욥 17:7에서는 “호흡”으로도 번역되었습니다. 따라서 구약에서 표기된 명칭의 의미로 본다면 성령님은 하나님의 신, 바람과 호흡, 영적생명의 뜻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신약성경에서는 성령님을 “프뉴마(πνεύμα)” 라고 하는데 이 뜻을 단순하게 해석하면 “영(눅 8:55 ; 아이의 영)” 또는 “마음(눅 1:46 ; 내 마음이, 마 26:41 ; 마음에는 원이로되)”의 뜻이 있지만 신약에서 93번이 성령님의 명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또 신약에서는 거듭나는 역사를 설명하실때 “바람(요 3:3)”으로 또는 “입의 기운(살후 2:8)”, 그리고 행 2:4에서는 “거룩하다”는 “하기오스(ἁγίος)”를 붙여서 “거룩한 영”(즉 성령)이라고 사용하였습니다.
2. 또 신약성경에서는 이 “프뉴마”란 명칭이 3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1)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와 성자와의 연합관계를 나타내는 명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영(마 3:16,12:28), 여호와의 신(삿 6:34), 나의 신(창 6:3), 주의 영(눅 4:18), 예수의 영(행 16:7)이란 명칭이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성령님을 표기할 때 중성관사를 사용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요 3:16,3:34), 예수님(요 2:13,14:9), 말씀(요 1:1), 천사(마 28:5)란 용어를 쓰실 때는 그 앞에 남성관사를 쓰셨으나, 성령님을 표기하실 때에는 중성관사를 붙여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진리의 영(요 16:14), 예수의 영(행 16:7), 성령이 가라사대(행 8:29,16:6,7)하실 때 그렇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령님이 성(性)을 초월하신 인격임을 나타내 주신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2) 성령님 자신의 신분과 본질을 나타내시는 명칭으로 사용되었으니, 예를들면 거룩한 영(시 5:11), 영원한 영(히 9:14), 모략의 영(사 11:2), 지혜의 신(신 34:9), 선한 영(느 9:20), 은혜의 영(수 12:10), 진리의 영(요 14:17), 생명의 영(롬 8:2), 영광의 영(벧전 4:14)등으로 이 명칭에서 성령님의 본질을 많이 알게 하여 주셨고,
3) 사역을 하시는 명칭으로는 계시의 영(엡 1:17), 일곱 영(계 11:14) ,보혜사(요 14:16), 심판의 영(사 4:4)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제 2 과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가?” (요 14:26, 15:16, 26)
이 시간에는 성령님의 신분 즉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가?” 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1. 성령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거룩하다”는 뜻은 순결하고 완전함을 뜻합니다. 신약성경에는 거룩하신 하나님(고후 1:12)이란 말씀보다 거룩한 성령(행 2:4,사 51:11)이란 말씀이 더 많습니다. 성령이란 말씀 자체가 “거룩한 영”이란 뜻입니다. 무흠, 순결, 완전하신 영이십니다.
2. 인격을 갖고 계십니다. 주로 인격을 성립 시키려면 생각하고 말하며 지, 정, 의의 이성이 있고 예절이 있어야 하는데 성령님도 우리 인간들처럼 그런 인격을 갖고 계신 것입니다.
1) 이 인격의 특성은 제1과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남성과 여성을 초월한 중성적 대명사로 표기된 만큼 그런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요 14:26,15:26, 요일 2:1에서 성령님을 보혜사(대언자)로 명칭한 것도 역시 인격을 나타내신 말씀이요,
3) 지성적 성령님(요 14:16,15:16, 롬 8:16), 의지적 성령님(행 16:7, 고전 12:11), 감정적 성령님(사 63:10, 엡 4:37)으로 나타나셨고 사람처럼 무엇을 참기도 하시며, 증명도 하셨고(고후 1:22, 엡 1:13), 나타내시기도 하시며(계시), 노력도 하시고, 창조도 하시며, 보존도 하시고, 부활시키기도 하시므로 인격적 표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창 1:2,6:3, 눅 12::12, 요 14:26,15:26,16:8, 행 8:29,13:2, 롬 8:11, 고전 2:10~11).
4) 인격자는 인격자와 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격적 표현은 다른 인격자와 교제 하시는 상태로 나타내셔야 하는데 이는 사도들과의 교제와(행 15:28), 예수님과의 교제(마 18:19), 또 성부성자와의 교제에서(고후 13:123, 벧전 1:1~2, 유 1:20,21) 나타내심으로 그 인격성을 증명하셨습니다.
3. 성령님은 완전한 하나님(神)이심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1) 성령님에게 신격 성호가 부여되었습니다. 영으로 존재하여 우리중에 계신이(출 17:7), 속일 수 없는 성령(행 5:3~4), 내주 하시는 성령님(고전 3:16)이라 하셨고, 삼위 일체적 의미에서 모든 환란 가운데서 건지시는 이(딤후 3:11), 곁에서 강건하게 하시는 분(딤후 4:16)이란 말씀이 성령님의 신적 성호를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2) 성령님에게서 신적 완전성이 나타났으니 이는 무소부재(요 3:8) 하시고, 전지 하시며(고전 2:16), 전능하신(고전 12:11)분으로 말씀되었고, 또 같은 의미로 성령님은 창조(창 1:2, 욥 26:1~3), 섭리(히 1:3), 경신(새롭게 ; 시 104:30), 중생(요 3:5,6, 딛 3:5), 부활(롬 8:11)의 역사를 이루신 사실도 있기 때문이며,
3) 성령님에게 신적 존엄이 부여되었습니다. 마 28:19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셨고, 또 “소망의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을 주신다(롬 14:13)” 하시므로 하나님과 꼭 같은 존엄을 함께 표시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곧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는 것입니다.
4. “삼위일체 관계에서의 성령님의 입장”을 말씀드리면
1)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서 제3위로 호칭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시 51:11과 사 63:10에서 “주의 성신” 이란 말씀과, 말 2:15의 “하나님의 영” 이란 말씀을 대조하면 성령님은 주 다음에 또 하나님 다음에 호칭된 것이고 신약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영(롬 8:14), 주의 영(행 8:39), 예수의 영(행 16:7)이라고 표기한데서도 역시 3위 순서로만 호칭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권위도 3번째란 뜻인가? 할 때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본질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영광 면으로 보아도 모든 권위는 동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증거해 드리면 ① 성령을 속임은 곧 하나님을 속임이요(행 5:3~4), 성령을 거역함은 “하나님을 거스림이며(행 7:51), 성령을 훼방함은 곧 하나님을 훼방함이라(마 12:31)” 하시므로 같은 신분에 계신 것을 말씀 하셨고, ②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에도 성부 성자 성령님이 동등한 권위로 출현하셨으며(마 3:16), ③ 주의 영(성령)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게 되는 것과(고후 3:17), 진리 되신 예수님을 앎으로 자유를 누리는 결과도 똑같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요 8:32)사역의 방법과 능력이 예수님과 같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성령님은 삼위 하나님 관계에서 스스로 출현 하신 것이 아니고 성자와 성부로부터 방출되어 나오셨습니다. 여기의 방출이란 뜻은 창조되어 나오셨다는 뜻이 아니고 본래부터 하나님과 존재하신 중에서 출현하신 것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① 이 사실은 성령님을 “그리스도의 영(요 15:26)”, 아들의 영(롬 8:9,갈 4:6)이라고 표기된 말씀과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요 16:27) 오시고 예수님이 성령님을 보내셨다는 말씀으로 알 수 있고(요 14:16,15:7), ② 또 성령님의 계시는 예수님에 근거하고 예수님의 계시는 성부 하나님께 근거한다는 말씀(요16:14~15)을 하시므로 일관성 있게 계시 사역을 하신 것과, ③ 또 성령님이 “성부 성자로부터 출현 하셨다”는 사실은 많은 논쟁을 물리치고 주후589년에 돌트회의(1618.11~1619.5까지 화란의 돌트에서 개최된 기독교 회의로 칼빈주의의 5대교리등을 채택하였음)에서 결정된 것이라고 합니다.
3) 성령님은 3위의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에 계심을 말씀하셨습니다. ① 이것은 위에서 말씀드린 계시 사역에 대한 관계도 그렇거니와(요 16:14~15) ② 성령님만이 하나님의 깊은 뜻을 통찰하시는 것도 그렇고(고전 2:10~11), ③ 창조사역, 구원사역도 그러하며(창 1:26 ; 우리가 우리의 모양대로), ④ 함께 하시는 내주사역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나 예수님이 함께 하심이나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뜻을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창 28:15, 마 28:20, 롬 8:9,10, 갈 2:10, 고전 3:16). 하나님이 함께 하심은 곧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것과 같기 때문에 창조, 구원, 내주사역을 하실 때에 삼위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에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단독 사역을 못하시는 것인가? 할 때, 그렇지 않고 각 위의 하나님이 각각 역사하신 예가 있으니, 일관된 체계에서 삼위 간에 충돌 없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요단강에 오시고, 성령님은 그 머리위에 임하시며, 하나님이 그 위에서 말씀을 주신 것은 각 위의 독자적 사역이 하나님의 공통되는 뜻에 따라 단독으로 역사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4) 삼위 간에 잘못된 견해로서 ① 어떤 이는 성령님의 인격성을 부인하고 성령은 “하나님의 능력의 방출”이라고 하여 인격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잘못된 지식입니다. ② 또 어떤 이는 배우 한사람이 2인역을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성령님의 일을 겸한다는 兩式론을 주장한다고 합니다. ③ 또 어떤 이는 하나님이 제일 크시고, 다음이 예수님이시며, 그 다음이 성령님이라는 군주론을 주장하여 “삼위간의 격차가 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잘못된 이론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다만 성령님은 제 삼위의 성호를 가지셨고,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출현하셨으며, 본질과 권능과 영광이 하나님과 동등, 밀접한 관계에 있으시고 단독으로도 역사하실 수 있는 인격의 신이란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성령님을 대하는 태도가 꼭 같아야 합니다. 특히 구원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통찰하시는 성령님이(고전 2:10), 독생자로 잉태시켜 세상에 오시게 하셨고(마 1:18), 복음의 비밀을 알리셨으며(요14:17), 택한 자의 심령에 내주하여 거듭나는 은혜와 함께 믿음을 갖게 하시고(요 3:3), 성령으로 감동하여 거룩하게 하시며(벧후 1:21), 또 가르치셨으므로(요 14:26) 우리가 그의 역사를 힘입어 구원받게 된 것을 크게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제 3 과 “오순절과 성령강림의 의미” (행 2:1~13)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이기 때문에 “오순절과 성령강림의 의미”란 제목으로 말씀을 살피기로 하겠습니다. 기독교에 4대 경축절기가 있는데 그것이 곧 “성탄, 부활, 맥추, 추수감사절기”이고, 그 상간에 감사헌금을 안하고 지나가는 두 절기가 있는데 그것이 곧 고난절과 성령강림절입니다. 고난절에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 크게 감사하셔야 마땅할 것입니다. 또 성령강림절 역시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1. “오순절”이라고 하는 뜻이 무엇입니까?
1) 오순절이란 절기는 일명 “펜터코스테”라 하는 것으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명으로 주신 절기였습니다(출 19:1,11,12:6,12). ① 레 23:4~8에 보시면 유월절 규례가 있고, 23:15~21에는 오순절 규례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유월절은 예수님의 고난을 예표 하는 절기로서 유대력으로 1월 14일에 고난의 상징으로 누룩 없는 떡, 즉 무교병을 먹고, 1월 15~21일까지 1주간을 지키는데 이 절기에 “천사들이 이스라엘 장자들을 해하지 않고 넘어갔다”하여 유월절이라 하고, 무교병을 먹는다 하여 무교절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교병을 먹는 마지막 안식일 다음날은 그 주간의 첫날(현재주일)인데 그날에는 곡식의 첫 이삭으로 제사를 드려 요제(레 23:15, 흔들어 드림)를 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교병을 먹는 무교절은 신약으로 볼 때 고난절에 해당이 되고, 무교절을 마치는 안식일 다음날에 첫 열매를 요제로 드리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 고전 15:20에서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하시므로서 주님의 부활을 첫 열매로 설명하신 것을 보면 구약에서 고난절이 지난 안식일 다음날에 첫 열매로 요제를 삼은 것이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 하는 상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② 오순절은 그 첫 열매를 드린 날로부터 7주간을 계수한 다음날로(7×7=49) 50일째 되는 날(주일)인데, 그날은 유월절로부터 7일을 7주로 계산하였다 하여 “77절”이라고도 하고(출 34:22, 신 16:10) 또 그때가 첫 곡식인 보리를 수확하는 절기이기 때문에 초실절(첫 열매시기), 또는 맥추절이라고도 하며(출 23:16), 또 유월절로부터 50일을 지났다 하여 오순절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이 오순절 절기에는 떡과 다른 제사(레 23:17~19)를 드리면서 거룩한 날로 칭하며 모여 기뻐하였고(레 23:21, 민 28:26, 신 16:11~12), 또 이 절기를 영원히 지켜야한다(레 23:21)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이 오순절 절기를 자세하게 설명 드리는 이유는 유월절 지난 주일에 첫 열매로 요제를 삼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상징하는 것처럼 5순절에 새 소제를 드리며 기뻐하는 것은 바로 성령강림 하실 것을 예표한 것이어서 성령강림의 약속이 바로 그때부터 계시되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③ 따라서 율법의 예언적 계시가 그대로 성취되려면, 신약의 성령강림은 부활하신 후 첫번 오순절 때에 필히 강림하셔야 하는데 사실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오순절절기의 의미는, 성령강림을 예표 하신 것이고, 또 레23:21에서 “그 절기를 영원히 지켜야 한다” 하신 것도 성도가 성령님과 함께 영원히 동거하면서 성령님의 은혜를 항상 누리며 살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④ 이렇게 구약의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하셨기 때문에 오순절이란 구약적 용어대신 “성령강림절”이란 용어를 쓰게 된 것이고, 행 20:16과 고전 16:8에서 바울사도가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가시기를 원했다는 것은 그때에도 오순절이란 명칭으로 성도들의 모임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1) 성령님을 선물로 주신의미가 있습니다. 저희들은 성탄절 때 예수님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사도는 “은혜위에 은혜라”(요 1:16)고 하셨지요. 롬 5:5에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이란 말씀이 있고, 또 롬 8:32에서는 “독생자를 내어 주신 이가 그 독생자와 함께 모든 것을 은혜로 주시지 않겠느뇨” 하시므로, 모든 것은 물론, 그보다 더한 독생자도 은혜로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행 2:38에서 “성령님도 선물로 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오순절 이전에는 “성령님을 선물로 허락하셨다”는 의미가 아닌 상태에서 성령님이 역사해 주셨으나 오순절 당시부터는 그 성령님을 선물로 주신의미가 있고,
2) 예언(약속)성취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령을 주시겠다고 구약시대부터 약속하신 것을 신약의 초기인 오순절 때에 그대로 이행해 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성령님을 원해서 받은 것이 아니고 약속된 은혜를 그대로 이루어 때가 되매 오시게 된 것입니다. 이 성령님이 강림하실 무렵에 성도들이 기도하며 기다리다가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행 1:14), 그 기다리고 사모한 공로로 성령을 받게 된 것이 아니요, 때가 되매 약속하신대로 주신 것인 만큼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을 기도의 공로로 받은 듯이 아셔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즉 보내신 이는 하나님과 예수님이시고, 기도는 그릇에 불과한 것입니다.
3) 성령님이 역사하실 시기에 상주하러 오셨다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성부하나님이 표면적으로 일하셨고, 예수님 공생애 때는 예수님이 표면적으로 일하셨으나, 오순절 이후부터 마지막 때까지는 성령님이 표면적으로 일하시기 위하여 강림하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승천하여 영광을 받으신 후에(요 16:7) 성령님을 보내 주셨으므로 구원 사역을 교대하는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4) 풍성하게 또 이방인에게까지 보편적으로 역사하시기를 시작하셨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도 성령님은 창조사역, 중생사역, 내주 하시는 일등을 비롯하여 “힘으로도 못하고 능으로도 못하는 것을 하나님의 신으로 이루시니라”하실 정도로(슥4:6)많은 일을 해 오셨습니다. 또 그 성령님과 오순절에 역사하신 성령님이 결코 다르지도 않습니다. 다만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은 구약적인 사역보다 더 크게 일하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더 크게 사역을 하셨습니까? ① 교회 시대는 성부 성자 성령님의 사역 중에서 구원을 적용하는 성령님의 사역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이요, ② 이스라엘에 국한 하여 역사하신 성령님이 이방의 모든 사람에게까지 널리 역사하시기 때문이요(오순절 때에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각처에서 모인 모든 사람들이 다 성령의 충만을 힘입었음), ③ 과거에 체험하지 못했던 굉장히 크고 강한 성령세례의 역사가 일어난 것과, ④ 교회의 기초 수립을 위한 특수은혜를 나타내셨기 때문에 “풍성한 역사를 그때부터 시작하셨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요 7:39에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않았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전인고로 오순절 때 보내주실 성령님을 모시지 못했다”는 뜻이요, 행 8:16의 “아직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세례만 알 따름이라”는 말씀도 그 시대에 성령님의 역사가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성령이 강림하셨지만 그 당시 복음을 받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체험하지 못한 것을 말씀하신 것뿐입니다.
3. 이 오순절 성령의 강림과 역사가 단회적인가? 아니면 계속적인가? 에 대하여 바른 지식을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1) 한번만 있고 다시없는 것을 단회적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어서 ① 성령님을 선물로 주시는 일, ② 한번 오신 일, ③ 오순절 당시처럼 역사하신 일은 단회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번 주신 성령님이나 강림하신 성령님이 다시 회귀하시는 법이 없기 때문이요, 또 오순절 당시의 환경도 한번 있은 일이었고 기독교의 초석을 이루는 사도적 은사도 역시 그때만 주셨기 때문에 단회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계속성 있는 일이란 폭넓게, 또는 크게 역사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교회시대나 말세에 성령님의 역사가 더 크고 충만하게 역사하셔야 하는 이유는 말세의 강한 마귀의 역사 속에서 먼데사람(행 2:39), 땅 끝의 모든 백성(사 45:22), 만민(욜 2:28)에게 까지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고 또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더 있다(롬 5:20)는 말씀을 따라, 충만하게 역사해 주셔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도 오순절 성령의 역사와 비슷한 역사가 그 후에 사마리아에서도 일어났고(행 8:15~17), 고넬료의 집에서도 일어났는데(행 10:49~46), 그때에 그 성령님의 역사와 같다고 행 11:15~17에서 베드로가 증언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엡 25:18의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이나 고전 12:4~11,28~31에서 “은사에 관한 내용을 거론하신 것은 상당분량의 은사로 계속 역사 하실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위 1)항의 역사는 단회적이고, 2)항의 역사는 지속적이라고 믿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3) 이미 완성된 성령님의 계시사역에 대하여 칼빈주의 신학자 Palmer의 말을 빌리면 “성령님은 말씀을 통해 역사하신다. 성령님은 사람에게 어떤 은밀한 계시 곧 새 지식을 주어서 조명하시지는 않는다. 성경이 완성된 후에, 계시는 더 없다”하셨고, 또 Calvin 선생님은 말씀하시기를 “성령님의 직분은 새롭고 들어보지 못한 계시를 만들거나 새로운 형식의 교회를 제작하여 이미 받은 복음의 교회를 이탈하게 하시지 않는다. 오직 우리 마음속에 복음의 가르친 바를 그대로 인치시는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4. 결론적으로 이 성령님이 어디서 어떤 과정으로 오시게 되었는가를 살피면
1) 하나님의 보좌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파송으로 오시게 된 것입니다. 요 14:26과 16:7에 보시면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함께 계십니다(히 12:2, 벧전 3:22). 옛날 사람들은 이 장소와 위치의 개념을 존귀하고 높은 곳이란 뜻으로 하늘이란 말을 썼습니다(마 6:9,10). 그러나 이 하늘이란 뜻은 지상세계의 눞은 곳을 의미하지 않고 영적세계의 높은 곳을 의미하기 때문에 성령님도 “위에서 내려오신다”는 뜻으로 “강림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2) 그러면 이렇게 강림하시는 성령님이 어디로 강림하실까요? 물론 성도와 신앙의 세계로 강림하시겠지요. 우리는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믿고 있습니다. 여기의 내주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을 믿음으로 인도하실 때 ① 성도의 마음에 찾아오시고(계 3:20), ② 말씀과 함께 마음에 계시며(요 14:17, 약 4:5), ③ 믿음의 감동을 주신 후에(벧후 1:21) ④ 성도의 몸(마음)을 성령의 전이라 하시면서(고전 6:19) 성도들 가운데 늘 거주하신다(마 28:20, 행 20:23,28)고 하셨습니다. 고전 3:16에서는 “성령님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셨으니, 이 사실을 “내주하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은 지금도 성도와 함께 하시므로 명실공히 동거하시는 것을 깨달아 주님과 가까이 동행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5. 제 4 과 “요엘이 예언한 성령” (욜 2:28~32, 행 2:14~21)
이시간에는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성령”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요엘 선지자는 주전 840년경의 유다선지자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장래에 관한 일과 먼 훗날에 있을 일들을 예언하였습니다.
1) 이스라엘의 장래에 관한 예언이란 욜 1:4에 나타난 말씀으로 메뚜기와 황충 등의 재앙이 있을 것을 예언하셨으니 이 황충 등의 재앙은 그 당시에 있을 농작물의 재앙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팟종이, 메뚜기, 늣, 황충의 4가지 재앙들이 가까운 장래에 있을 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 네 나라의 침략통치를 예언하는 것으로도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2) 또 먼 훗날에 있을 일을 예언한 것으로는 욜 2:28~32의 말씀인데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인데, 이 예언이 있은지 약 840년 후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오순절 당시에 와서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일어났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 성령의 역사를 이상하고 놀라운 일로 생각하니까 이때에 베드로 사도가 행 2:14~21에서 “그 성령의 역사는 이상한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이미 요엘 선지자가 예언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면서 욜 2:28~32을 인용하여 설명을 하신 것입니다.
2. 베드로가 요엘서를 인용했을 때 히브리 원문 성경을 본 것이 아니고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을 보았기 때문에 이 인용의 문구가 구약 원문에 비할 때 단어상으로 몇 가지 차이를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나 의미상으로 차이를 나타낸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입니까? 이 해석을 잘못하면 잘못된 신앙의 양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1) 요엘 선지자가 “그 후에”라고 하신 말씀을 베드로는 “말세에”로 인용을 하셨고, 요엘 선지자가 “그 후”라고 한 것은 곧 “말세 신약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을 한 것입니다. ① 요엘 선지자가 농작물에 황충의 피해가 있을 것을 예언한 네가지 황충의 재앙은 “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의 통치를 의미한다”고 앞에서 설명드렸습니다. 따라서 로마가 통치하는 마지막 시대는 곧 신약시대가 시작되는 시기에 해당하니까 말세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② 또 요엘서의 “그 후에”라는 히브리 말 “아카리드 하야밈”은 “말세 또는 말일”로 통용되는 용어로 창 49:1에서는 “후일”이라 하였고, 사 2:2에서는 “말일”이라고도 한 것입니다. 따라서 70인역은 이 “아카리드 하야밈”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 “엔 타이스 에스카타이스 헤메라이스(ἐν ταὶs εσκάταιs ἡμεπαιs)”로 번역을 하였으니 이 말은 “날들의 마지막 날들 안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연속되는 모든 날들 중 최후 부분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알기 쉽게 “말세”라고 한 것입니다. 저희들은 흔히 세상 끝날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 시기만을 말세로 알기 쉬우나, 이 “말세”는 예수님의 초림부터 시작하여 재림하시는 때 전부를 가리킨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시리니”하셨는데 ① “내 신”이란 성령님을 뜻하고, ② 이때에 베드로 사도는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만민”이란 말을 “모든 육체”란 말로 바꾸어 인용했으니 이 말씀도 역시 70인 역에 의한 것입니다. “만민”이란 “콜빠사르”를 헬라말 “파산살카(πάσανσάπκα)”로 번역하여 “모든 육체”라고 한 것인데, 이 “육체”란 뜻은 체구를 의미하는 “쏘마(σώμα)”가 아닌(마6:22,10:28,롬1:24) 부패성을 의미하는 “쌀크(마24:22,요8:15)”이기 때문에 부패성을 가진 모든 인간,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세계인류 누구든지 모든 죄인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따라서 “만민에게 주신다”는 것은 “인류개개인이 다 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에게만 허락하셨던 복음적인 은혜가 특별한 민족을 초월하여 모든 이방인에게 이르기까지 편만하게 주어질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본래 유대인이 아니었지만 차별 없이 성령의 충만한 은혜 가운데 거할 수 있는 대상이 된 것입니다. ③ “부었다”는 것은 “충만하게 넘쳤다”는 뜻입니다. ④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어떤 성도님들이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오늘도 예언할 수 있고, 환상을 볼 수 있으며, 꿈도 꿀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혹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의 주장대로 오늘날도 “예언, 환상, 꿈을 꿀 수 있다”고 한다면 너희의 예언은 자녀들만 하고, 환상은 젊은이만 보고, 꿈은 노인들만 꿰야 한다고 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주장은 계시가 끝난 교회 시대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외에 다른 계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말씀을 드렸으므로 다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 “너희의 자녀들이 예언을 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신약시대의 모든 성도들이 성경말씀을 마음대로 연구하여 가르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모세나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선지자 같은 특정인들만 예언(증언)을 하였지만 성령이 충만하여지는 신약시대에는 모든 성도들이 다 성경연구가가 되고 증언자가 될 수 있음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 “젊은이가 환상을 보고 늙은이가 꿈을 꾼다”는 것은 구약시대에 계시를 주시는 방법이 주로 “환상과 꿈”을 통하여 주셨는데 이것을 모세나 선지자 같은 특정인에게만 주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완성된 신약시대에 와서는 특정인을 다 초월하여 늙은이나 젊은이나 비천한자에게까지 다 계시의 말씀을 직접 상대할 수 있도록 개방해 주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노소의 제한이 없음은 물론 “특정인을 보편화 시킨다”는 의미로 “늙은이, 젊은이”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 그다음 18절을 보시면 “남종과 여종들에게도 주신다”고 하셨는데 이 남종과 여종은 비천한 계급에 있는 사람이나 남녀의 차별이 없이 성령 충만의 은혜를 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 환상과 꿈을 꾼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약시대에 계시를 주시던 방법인데 히 1:1에 근거하여 그런 방법으로 계시를 주시는 것이 끝났으나 사도들을 통하여 주신 성경 전체가 젊은이의 손에도 있고, 노인들의 손에도 있으며, 남녀귀천을 가리지 않음은 물론 어린아이의 손에까지도 있어서 누구나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게 될 것이란 의미로 구약 계시의 방법에 빗대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이 혹 “제단을 쌓는다. 제사를 드린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된 제사를 다시 드린다는 뜻이 아니요 “예배드림”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처럼 신약의 모든 성도가 성경계시를 통하여 깨닫게 되는 상태를 표현한 말씀인 것입니다. ⑤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주신다”고 한 말씀이 모든 비천한자들에게까지 성령 충만을 주시는 의미라고 말씀드렸는데 어떤 이들이 “남종과 여종에게 성령 주신다”는 말씀 따라 “자기들도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비성경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를 볼 때가 있습니다. 그 성경적이 아닌 행동이란 자신들이 초대교회 사역자들 같은 능력을 받는 듯이 자처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그들이 성경을 착각하는 것임을 아셔야 할것입니다. 18절의 “남종과 여종들에게”란 말씀이 70인 역에서 “에피 투스 두루스 무, 카이 에피 타스 두라스 무(επὶ τοὺs δούλουs μου, καὶ επὶ ταs δοὐλαs μου)”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특별히 세운 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인류사회에서 천시 받는 모든 종들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은 오순절로 시작되는 신약시대에는 유대인을 초월한 범인류가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고, 구약시대에 특정인을 통하여 꿈이나 환상으로 주셨던 말씀들을 남녀노소가 다 성경으로 받아 유용하게 활용 할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⑥ 말세에는 하나님이 하늘에서는 기사를 베풀며(이 기사는 통치 섭리를 나타내심임) 땅에서는 징조가 나타나는데 그것이 곧 “피와 불과 연기”라 하셨으니 이것은 세상에 크고 작은 전쟁이 있을 것을 예고하신 것이요,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은 예수님의 재림하시는 날로 그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된다” 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적 표현으로 해같이 빛나던 권세자가 권세를 잃어버리고 그 밑에서 달처럼 광명을 누리던 자가 죽으므로써(피가됨) 인간 권세 영역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⑦ 그리고 “누구든지 이런 일이 있기 전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하셨으니 여기에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뜻은 “복음을 믿고 돌아와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이 말세지말을 당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깨닫고 모든 불건전한 유혹들을 피하며, 끝까지 바른 신앙으로 주님의 이름만을 부르고 경성하다가 구원을 받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말세에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시겠다는 성령의 약속은 바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신 예언이요, 약속인줄을 아셔서 누구든지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고 성경 중심으로 충만한 상태의 생활을 잘 하셔야 할 것입니다.
6. 제 5 과 “성령보내실 것을 약속하심” (요14:16~17)
성령님을 보내실 일에 대하여 예수님이 약속하시고 예언하신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 요 14:16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구하여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실 것인데 저는 진리의 영이시고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① “보혜사”란 대언자란 뜻으로 성령님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대언사역을 나타내신다는 말씀이며, ② “다른 보혜사”란 요일 2:1에서 예수님을 대언자라고 하셨기 때문에 성령님을 다른 대언자로 일컫게 된 것입니다. 그 대언자 성령님은 ㉠ 성도와 함께 하시고, ㉡ 진리의 영으로서 진리를 밝히는 일과, ㉢ 대언하는 일을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은 요 15:26에서도 하셨고, 또 요 16:13에서도 “성령님은 성도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신다”고 하시므로 “진리를 밝히 증언하시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이 성령님의 으뜸사역”임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2. 요 16:7~8에서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고 하셨습니다.
1)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로 승천하여 하나님과 자신의 합의로 성령님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며(요 14:16,15:26),
2) 보혜사로 오실 성령님의 사역으로는 세상을 책망하시고, 또 일깨우신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3가지 사역을 하실 터인데 ① 불신앙을 비롯한 모든 범죄에 대하여 책망하시고(9절), ② 십자가의 대속으로 의의 공로를 세우시고 부활 승천하시므로 예수님을 육안으로 볼 수 없게 될 것을 증언하시며, ③ 이 세상 임금인 마귀를 부활로 이미 패배 시키셨은즉 장차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있을 것을 알게 하실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요 16:9~11). 따라서 성령님의 사역은 책망과 증언과 일깨워주심 등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성령님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하셨고, 행 1:4에서도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하셨으며, 세례요한도 예수님이 오시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마 3:11)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1) 예수님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은 성령님을 바람과 호흡과 생기로 표현하시면서 자신이 자신의 영인 성령님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요,
2) 또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은 그 성령님이 성도의 마음에 불처럼 뜨겁고, 감동 있고, 또 힘 있게 역사하실 것을 예언해 주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약 2000년 전에 예루살렘 교회에 강림하신 성령님은 사도들과 함께 기독교의 터를 닦는 특수사역을 끝내시고(고전 3:10) 계속하여 성도들의 심령과 생활 속에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특수 사역이란 계시완성 사역이고, 기독교를 절대종교로 입증하는 초자연적 능력이었습니다. 지금은 터를 닦는 시대가 아니고, 집만 짓는 시대이기 때문에(고전 3:10~11) 성령님은 진리사역 중심으로 크게 열중하시는 것입니다. 저희들 속에 내주하신 성령님으로 크게 역사하시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육체의 소욕을 어거하고(갈 5:17), 성령님의 뜻을 따라 행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의 뜻은 곧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뜻은 오직 성경에서만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7. 제 6 과 “성령과 불로 세례주심” (마 3:11~12)
이 시간에는 “성령과 불로 세례주심”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지금 읽으신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공생애에 들어오시기 전에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하신 말씀이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으로‧‧‧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은 타작 마당을 선별하여 알곡은 곡간에 드리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는 분이라” 하시므로 예수님이 심판 주 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또 이 말씀에서 저희들이 이해해야 될 것은 ① 요한이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요, ② 능력 많은 예수님이 오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1. 세례요한이 물로 세례를 베품에 대하여.
1) 이 세례 주는 근거가 하나님께로부터 명령을 받아 하는 일인가? 할 때 이것은 세례요한이 스스로 만들어 시행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과 인정해 주심을 따라 시행한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① 요 1:33에 보시면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하신 그분이 계시다”고 하심을 보아 요한은 분명히 하나님의 계시로 명령을 받고 세례를 베푼 것이며, ② 마 3:15~16에서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때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 하셨고, ③ 마 21:25~26에서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을 상대로 변론을 했을 때에도 “요한의 세례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임을 그 당시 백성들이 믿고 있었다” 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는 합당하게 베풀어진 것이었습니다.
2) 이 요한의 세례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이름으로 주어졌는가? 할 때에 삼위의 이름으로 주어졌다는 기사는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고 세례의식이 삼위의 이름으로 명령되어진 것은 마 28:19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명령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이전에 베풀어진 세례는 “꼭 삼위의 이름으로 시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때는 예수님이 구속사업을 완성하시기 이전인고로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이 후에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3)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푼 의미가 무엇인가? 할 때 본문 11절에서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준다” 하셨으니 여기에 “회개케 하기 위함”이란 ① 세례를 베푸는 목적으로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고 영접하는 신앙으로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롬 10:13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르겠다”는 사람은 회개한 사람이요, 구원을 받을 자이기 때문에 그런 자들에게 확인하는 표를 주고, 사람들 앞에서도 확실하게 공인되게 하기 위하여 세례를 준 것입니다. ② 세례를 베풀 때 물을 사용하는 의식의 의미는 ㉠ 물은 씨앗으로 하여금 싹을 내게 하므로 생명을 소생시키는 성령님을 상징함과(요 7::38,39) ㉡ 씻음의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로 씻는 표를 나타내는 것은 예수 믿는 자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죄사함 받았음을 상징적으로 표시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때는 물로 씻어야 깨끗해지지만 영적으로 정결케 해야 할 죄악의 때는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씻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을 가졌을 때 용서와 칭의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에 대한 모형적 의식인 구약의 결례식에서도 희생의 피나 관유를 거룩해져야 할 대상(성물, 사람)에게 접촉 시켜서 거룩하게 구별하셨던 것입니다(히 9:13, 레 8:15, 출 40:9). 따라서 속죄의 은혜는 믿음으로 되는 것이고, 믿음은 성령님의 역사로 발생하며, 믿음과 속죄 받은 표시를 더 실감 있게 인치기 위하여 뿌리고 씻는 의식에까지 확대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③ 요한의 세례와 주님이 명한 오순절이후의 세례와의 권위상 차이가 있는가? 할 때에 요한의 세례가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신앙으로 받았으면 권위가 같고 그렇지 못한 상태이면 다시 받아야함을 나타내 주셨습니다(행 19:3~5).
2. 예수님이 오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 고 하신 말씀에 대하여 상고하겠습니다.
1) 이것은 “성령님을 보내주신다”, 또는 “불같이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보내주신다”는 뜻입니다. 세례요한은 성령을 베풀어줄 사람이 못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주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오순절 당시처럼 역사 하시는 성령님을 보내주신다”는 약속과 같은 것입니다.
2) 이 성령님이 어디에 역사하시느냐? 할 때 물이 육체를 씻는데 사용됨처럼 성령님은 마음에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의 내적감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3) 그러면 또 “불로 세례를 주시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것도 성령님이 사람의 마음에 뜨겁게 역사하시는 감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 계신 동안에는 불로 육체를 뜨겁게 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무엇을 원하겠느냐?”(눅 12:49) 하시므로 성령님의 불같은 역사를 예수님도 소원하시다가 결국 오순절 때에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으로 보여주셨을 뿐 육체를 뜨겁게 하신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눅 24:32에서 “그가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하신 뜻으로만 역사해 주신 것입니다.
4) 따라서 성령님의 불같은 역사는 마음을 말씀으로 일깨워 주셔서 뜨겁게 하시고 깨달음으로 심령에 변화 주시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 는 뜻을 다시 정리하면 ① 오순절 때에 약속하신 성령님을 보내 주실 분이란 뜻이요, ② 마음을 뜨겁게 하고 깨달음과 변화를 주는 사역을 의미하며, “요한의 물세례”는 성령님의 내적사역의 증표를 외적으로 표시하는 것입니다.
5) “성령의 세례”란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뜻하는 것입니다. 행 1:5에 보시면 “너희가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는데 마침 몇 날이 못 되어 오순절 때에 성령님이 강한 역사로 강림하셨으므로 “오순절 강림”이 바로 성령의 세례였음을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세례”는 충만하게 역사하신 의미를 뜻함이요, 오순절 때에 강림하셔서 강하게 역사하신 성령님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욜 2:28에서 “부어주실 것이라” 하셨고, 행 2:33에서도 “부어주셨다” 하셨는데, 이 “부어주셨다” 는 뜻이 곧 세례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세례는 성령님의 풍성한 역사를 의미할 뿐 다른 의미는 없는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도가 처음 믿음을 가질 때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님의 내적사역을 감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나 혹 어떤 이는 믿음의 시초부터 성령님의 강한 역사를 체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 그 성도는 성령의 세례를 체험했다고 할 수 있으며, 모든 성도가 신앙생활 하는 중에서 깊이 회개하고 변화의 체험을 했다면 그도 역시 성령의 세례를 체험한 것으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6) 혹 위에서 불이 쏟아져 몸을 뜨겁게 하는 것을 불세례 또는 성령세례로 아는 분들이 있지만 이런 체험은 퍽 드물기도 하려니와 성경에서 입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앙의 부분으로 사모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마음을 뜨겁게 하신 예는 있어도(눅 24:32) 육신을 뜨겁게 하신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용문산에 박만출 장로가 계셨습니다. 그분은 손가락도 없는 나환자였습니다. 그가 용문산에 올라와서 문둥병이 안 고쳐지면 그대로 죽을 각오를 하고 몇 일을 밤낮으로 매달려 기도하다가 그 몸에 뜨거운 불이 떨어져 그 뜨거움 때문에 어떻게 발광을 하였던지 주위의 억새풀들이 전부 넘어지고 자신이 마치 불에 거슬리는 송충이처럼 뒹굴었는데 그 일이 있은 후에 자기의 문둥병이 나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간증을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기의 이름을 “박믿어” 로 고친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간증은 희귀한 간증이면서 성령님이 불의 역사로 심령과 육신을 치료하신 증거로 믿어야 하겠지만 성경에 그런 사례가 없기 때문에 간증으로 끝날 뿐 증언의 가치는 없는 것입니다. 육신을 태우는 불의 역사는 심판할 때 이용하신다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창 19:24, 계 19:20,20:9).
결론적으로 이 시간에 요한의 물세례에 대하여 말씀드렸고, 예수님의 성령과 불세례의 의미에 대하여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세례란 예수님이 약속하신 “오순절 성령강림” 그 자체와 풍성하게 역사하시는 은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8. 제 7 과 “불을 땅에 던지러 오심” (눅 12:49~50)
이 시간에는 “불을 땅에 던지러 오심”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불을 땅에 던지러 오셨다”하셨고,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무엇을 원하겠느냐?‧‧‧, 또 예수님에게는 받으실 세례가 있으니 그것을 이루시기까지‧‧‧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하시므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① 먼저 “받으실 세례”를 받으셔만 하시는데 이 받으실 세례란 곧 “십자가의 죽으심”을 의미하는 것이요, ② 이 “십자가의 돌아가심”과 부활이 있은 다음에 불을 땅에 던져 주실 것인데 예수님이 세상에 계신 동안에는 아직 그 시기가 되지 않아서 불이 붙지 않음으로 인한 답답함이 크셨지만 그 불이 이미 붙은 다음에는 더 원하실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보내주실 불만 임하면 “예수님의 소원을 시원스럽게 성취해 드린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소원대로(요 17:4) 사신 것처럼 저희들은 예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셔야 할 것입니다.
1. “예수님이 땅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세례를 받고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 성령님을 보내 주실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불같은 성령님이 오시면 예수님은 더 이상 소원이 없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 그러면 우선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부터 살펴보겠습니다. ① 막 1:38에서 “예수님은 전도하는 일을 위하여 오셨다” 하셨고, ② 마 8:3에서는 “내가 원하노니 치료를 받으라” 하시므로 매사에 의원으로 오셨음을 나타내셨으며(마 8:12), ③ 마 9:13에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뜻을 알라”고 하시므로 주님은 사랑을 원하신 분이었고, ④ 요 5:30(마 26:39, 막 14:36)등에 보시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림이 곧 예수님의 소원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소원은 전도, 사랑, 치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인데 그중에도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를 통한 구속사역을 끝내시고 부활승천 하셔서 성령님을 보내주시므로 남은 구원사역을 성령님께 인계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2) 그런데 이런 소원이 성취된 것은 예수님 승천하신 후 오순절 때에 성령강림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던져주시고자 하시는 불은 바로 “성령강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어떤 성도님들은 “불”하면 그것이 바로 “성령님”인줄로 착각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하나님이시고 불은 물질에 속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신령한 영이시고 불은 현실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혼돈하시면 안 됩니다.
1) 하나님은 이 세상에 불을 만들어 놓으시고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하시는데 화산 폭발로 인한 유황불이나(창 19:24, 시 11:6) 하늘에서 내리는 벼락이나 물질을 태우는 불로서 악인을 심판하시기도 하시고(계 14:10) 축복받은 성도들에게는 불의 유익한 면을 통하여 생활을 도와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이란 물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성령님”을 “불”로 말씀하신 것은 “상징적 의미”임을 곧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왜 성령님을 불로 상징하셨습니까? 그것은 성령님의 사역이 불의 역할과 상통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① 불은 어두움을 밝히니 이것은 성령님의 진리전파 사역을 뜻하고, ② 불은 뜨거움을 주니 이것은 성령님의 생명사역을 뜻하는 것이며, ③ 불은 힘의 동력이니 이것은 성령님의 능력을 뜻하고, ④ 불은 소멸하는 것이니 이것은 성령님의 정화사역 또는 심판사역을 뜻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운동은 밝히는 불이요, 신앙의 소성함과 구원운동은 생명의 역사이며, 동력전달이고, 또 속죄와 성화를 태우는 불에 비유할 수도 있기 때문에 성령님을 불로 상징하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그 불을 주실 때 “던져주신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충만하게 힘 있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물맷돌을 던졌을 때 그 돌이 골리앗 이마에 박혀서 골리앗이 죽었습니다. 굉장히 힘 있는 던짐이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오셨고(요 14:16), 예수님이 던져(보내) 주셨으니 인간이 이 던져주시는 성령님에게 얻어맞으면 인격적으로 자신이 깨짐은 물론 변화되고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즉 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기고, ② 회개 자복하게 되며, ③ 교만과 욕심이 빠지고, ④ 사랑과 전도와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불타게 되며, ⑤ 성경과 교회를 사랑하게 되고, ⑥ 나중에는 말도 조심하게 되어 자기 뜻대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말하게 되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불같은 역사는 오순절 당시에 힘 있게 주어졌고, 그 성령님이 지금도 역사하며 이 불의 역사는 바로 우리의 신앙인격과 생활의 변화를 일으키는 역사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4. 그래서 마지막으로 저희들이 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소원을 따라 성령님의 불이 우리들 심령과 생활에 붙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불은 영적으로 심령을 일깨우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들에게 성령의 불이 어떻게 붙어야 하겠습니까?
1) 성경연구에 불이 붙어야 하겠습니다. 렘 23:29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불같다”하셨고, 눅 24:32에서 “말씀을 깨달은 자의 마음이 뜨겁다” 하셨으니 저희들도 꼭 마음이 뜨거워지도록 성경연구의 불이 붙어야만 하겠습니다. 성경연구에 불을 붙이면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 되고, 변화로운 새사람이 될 것입니다. 성경에 깊이 빠져본 체험이 없으면 은혜를 더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2) 기도의 불이 붙어야 하겠습니다. 기도의 불만 잘 붙으면 우리의 모든 생활이 금방 천국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은 그런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의 불이 붙으면 앉아도 주여, 서도 주여, 잠을 자도 주여, 주여 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많이 하는 목사님을 만나러 가니까 그 집의 3살 된 아들이 “아빠 저기 있어”하고 안내를 하는데 예배당 기도실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 다음번에 또 한번 갔다면 그때는 그 집 강아지도 그렇게 인도하지 않겠습니까? 기도의 불도 붙여보셔야 은혜 받는 체험을 맛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3) 사랑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원수를 붙잡고 울어야 사랑의 불이 붙은 증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죽이는 예루살렘을 위하여 우신 것이 바로 사랑의 불 붙은 것이 아닙니까? 사랑의 불이 붙으면 원수를 불쌍히 여기게 되고 그를 위해 기도하며 오히려 협조하게 될 것입니다.
4) 전도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렘 20:9에서 “전도하지 않으면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불이 붙으면 예수님인들 무엇을 원하시겠습니까?
5) 봉사의 불이 붙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무엇을 봉사해 볼까? 하루에 한 가지 또는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교회와 이웃에 봉사하시기 위하여 노력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미지근한 음식도 불로 데우면 뜨거워집니다. 그리고 뜨거워진 음식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뜨겁게 열심내라고 하셨습니다(롬 12:11, 계 3:15). 나폴레옹(1804년 불란서왕)이 싸우다 죽기를 원하였고, 링컨(미국 16대 대통령)대통령이 미국이 잘되기를 소원하였는데 그 두 가지가 다 성취되었다고 합니다. 하물며 성도가 성령의 뜨거운 불붙기를 사모하는 일이겠습니까?
9. 제 8 과 “오순절 때에 있었던 일” (행 2:1~13)
이 시간에는 “오순절 때에 있었던 일”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간 세상에 계시면서, 사도들에게 분부하시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또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행 1:3~5)하시고 승천 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받은 제자들은 감람원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열한제자와 몇 여인들과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는데 그 수는 120명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이때에 모여진 사람들은 천하각국으로부터 온 경건한 유대인들과(행 2:5), 외국사람들이었습니다(행 1:12~15,2:
7~11). 여기의 “경건한 유대인들”이란 복음적 신앙으로 개종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2. 이상의 모습에서 오순절 역사의 준비가 있었다면
1)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린 신앙(행 1:5)
2)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쓴 일(행 1:14)
3) 경건한 유대인들과 각국에서 온 사람들을 합하여 120명의 대중으로 기도회가 발전한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모임에 따라 은혜주신 사례가 많습니다. 사무엘시대의 미스바의 모임(삼상 7:5), 느헤미아 시대의 수문광장에 모인일(느 8:1), 사도시대에 고넬료 집의 모임(행 10:24)등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모임을 강조 하셨습니다(히 10:25).
3. 그때에 어떤 형편으로 성령님의 강림이 이루어졌습니까?
1) 홀연히 강림하셨습니다(2절). 예기치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이루어진 것입니다. 갑자기 상상을 초월한 일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2)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으니(2절), 이 소리는 육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상태였을 것입니다. 성령님의 명칭(루학크)에 바람이란 뜻이 있지만 이 바람의 역사는 어디까지나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신비한 바람일 것인데, ① 바람은 호흡으로 생명을 붙들어줍니다. 따라서 영적생명의 호흡을 일으키는 역사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② 바람은 더러운 것을 제하며 깨끗케 하는 역할을 합니다. 맑은 공기의 신선함같이 죄악을 깨끗이 날려버리는 역할을 합니다. ③ 능력의 역사도 나타냅니다. 태풍의 위력이 큰 것처럼 성령님이 능력 있게 역사해 주심을 뜻하는 것입니다(눅 4:6).
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였다고 하셨습니다. 이 혀같이 갈라진 불 모양은 그들의 머리 위에 나타난 것으로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혀를 통하여 뜨겁게(감동되게) 전파될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4) 이때에 또 방언의 역사가 나타났으니 이 방언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으므로 그들은 갈릴리 사람들(7절 : 제자들)이었고 이들의 방언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다 자기 나라의 말로 알아들었다고 하였으니 여기에서의 방언의 의미는 그 당시에 성령의 세례를 받고 증언한 사람들이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말하게 되어 외국인들이 자기나라 말로 듣게 됨은 물론 언어의 장벽을 헐고 의사가 소통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적의 의사소통입니다.
5) 놀라고 의혹하며 독한 새 술에 취한 자 같았다 하였으니, 이는 너무 놀라운 일들이 나타나서 어리둥절해진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6) 이로 인하여 복음이 삽시간에 세계 각국으로 퍼지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11절).
결론적으로 오순절 때에 성령강림과 함께 있었던 일은, ① 약속을 믿는 신앙, ② 기다림과 합심기도, ③ 기도회의 활성화를 통한 준비, ④ 홀연히 나타난 바람 같은 역사, ⑤ 혀같이 갈라진 불꽃의 나타남, ⑥ 의사를 소통시킨 방언, ⑦ 술에 취한 느낌 등이었습니다. 성령님은 은혜 받은 자의 정신을 빼앗아 가지는 않습니다. 은혜는 언제나 똑똑한 자신의 의식 속에서 체험되어야 할 것입니다.
10. 제 9 과 “성령강림절을 지키는 정신” (레 23;14~21, 신 16:9~12)
이 시간에는 “성령강림절을 지키는 정신”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성령강림이 오순절 때 성취되었기 때문에 구약의 오순절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구약 신16:10에 보시면 칠칠절이란 말씀이 나오는데 이날은 유월절 마지막 다음날부터 7주를 계수하여 50일째 되는 날로서 새 소제를 드렸는데 그날을 오순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오순절이란 용어 대신에 “오십일 째 되는 날”이란 용어를 사용했으나 신약성경 행 2:1,20:16, 고전 16:8에서 오순절이란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앞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신약성경에서 주일날은 예수님이 부활 하셨고 오순절에는 성령님이 강림 하셨는데 이 사실이 구약성경에서도 예표적으로 나타나 있음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보시면 “안식일 이틑날(主日)에 곡식 단을 하나님 앞에 갖고 와서 요제를 드렸다” 하셨으니 이것이 첫 열매인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함이고(고전 15:20) 또 그날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에 하나님께 새 소제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성령강림의 은혜가 있을 것과 신령한 예배가 있을 것을 예표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고전 5:7에서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다” 하시므로 유월절의 희생의 제물이 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임을 말씀하셨고, 예수님은 유월절 때에 돌아가셨으며, 안식일 다음날(主日)에 부활하셨고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 하셨으니까 이와 같은 일정이 구약의 절기와 상당하게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것처럼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다만 신앙의 덕과 교훈을 위하여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성탄절이나 부활절, 감사절까지 지키면서 오순절 성령강림의 뜻 깊은 축복을 기념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 21절에서도 오순절에 제사 드리는 일은 “영원한 규례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율법적 제사의식이 폐지되더라도 성령강림의 은총을 영원히 감사하고 사모하라는 뜻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2. 구약의 오순절을 지키는 방법
1) 유월절 안식일후 7주를 계산한 다음날에 새 소제(곡식 제사), 고운 가루 에바 10분의 2(1에바는 23리터, 10분의 2는 4.6리터이므로 12되 3홉쯤 됨)를 요제(흔들어 드림)로 드린 다음 누룩을 넣고 잘 구워서 기름과 포도주 전제(부어 드림)와 같이 드리고 또 거기에 1년 된 흠 없는 어린양 일곱 마리와 젊은 수소 한 마리와 양 두 마리를 함께 번제(구워 드림)로 드려 화제(태워 드림)를 삼고
2) 수염소 한 마리로 속죄제(죄 사함을 목적으로 드림)를 드리고 또 1년 된 수양 두 마리로 화목제(하나님과 화목 하는 뜻, 회개)를 드린 후 제사장은 그것을 다 태우지 않고 요제를 삼은 후에 그 고기를 먹게 됩니다.
3) 이 오순절 절기는 뜻 깊은 신앙행사이기 때문에 온 회중이 휴식하며 제물을 갖고 성전에 올라가지 못한 가족들은 자기 거주지에서라도 그날을 기억하며 성회로 삼되 영원한 규례로 알고 지켜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3. 그러면 이상의 제사의식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1) 제물을 드릴 때 곡식 제사와 피의 제사로 나누어지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생명의 희생을 뜻하며(성찬 예식의 떡과 포도주) 또 곡식 제사는 희생으로 세워진 신약의 교회를 뜻하고 피의 제사는 역시 희생을 통한 예수님의 중보사역을 뜻한다고 박윤선 목사님은 해석을 하셨습니다.
2) 따라서 새 소제와 전제와 화제를 속죄제와 화목제로 받으신 하나님이 예수님의 속죄제를 근거로 하여 그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고 화목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예표적 행사가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배와 헌신을 표방하는 의식으로 바꾸어졌습니다. 구약의 율법제도는 예수님 때에 와서 전환기를 맞이하였고, 성령님이 강림하신 오순절 때부터는 더욱 속죄를 위한 모형적 제도에서 신령한 제도로 변환된 것입니다.
4. 그러면 신약시대의 성령강림절은 어떤 정신과 방법으로 지켜야 할까요?
1) 우선 하나님이 성령님을 보내 주셔서 성도와 함께 거하게 하신 은혜를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과 성경 말씀을 주신 은혜도 아울러 감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선민들이 초실절을 지킨 것이(민 28:26)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한 것이라면 오순절에 새 소제를 드린 것은 성령강림을 예표한 것입니다(신 16:12).
2)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실 때는 성령님으로 하여금 맡으신 일에 두루 역사하시게 함이므로 모든 성도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엡 5:18)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성수주일을 잘 하셔야 합니다. 주일성수는 사도의 모범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전 16:2) 구약의 오순절 절기로도 예표가 된 것입니다. 본문 21절과 신 16:11에 보시면 “그날에 모든 사람이 다 휴식하고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서 즐거워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성수주일을 예표 하는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따라서 저희들은 한층 더 주일을 지키는 생활을 힘써야 할 것입니다.
4) 봉사와 헌신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오순절을 한번 지키려면 곡식가루 두되 반, 포도주와 기름, 소1마리, 암양7마리, 수양4마리, 수염소 1마리 도합 13마리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희생을 예표할지라도 물질적 봉사임이 틀림없습니다. 제사의 정성은 곧 성도의 예배와 헌신입니다. 귀중한 시간, 값있는 봉사를 정성껏 드리는 것이 성령강림절을 지키는 의미가 될 것이요, 마지막으로는
5) 하나님과 나, 나와 이웃간에 화목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때 속죄제를 드리고 또 화목제를 드린 것이나, 남녀노소, 빈부귀천, 문안에 든 객까지도(신 16:11) 하나님의 전 앞에 모여 즐거워하게 한 것은 서로의 담을 헐고 화목, 친교 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6) 오순절을 지키는 성도는 반드시 엡 5:18의 말씀을 따라 성령의 충만을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번 성령강림절은 감사로, 말씀으로, 성수주일로, 봉사와 헌신으로, 사랑과 화목으로, 또 성령 충만으로 큰 은혜 속에 거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11. 제 10 과 “성령님의 사역” (고전 12:4~11)
성령님의 사역을 공부하실 때 우선 그 사역이 방대하다는 것과 사역의 성격에 따라서 초대교회 후시대에는 나타내시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1. 우선 성경에 나타난 성령님의 사역의 중요한 부분들을 발췌해 보겠습니다.
1) 구약성경에서 ① 창조와 섭리의 사역(창 1:2, 욥 26:13,33:4, 사 32:15), ② 지혜와 명철과 지식의 영으로(출 28:3, 신 34:9) 총명을 주시는 역할(욥 32:8, 창 4:38), ③ 도덕적 성품을 주어 생각하게 하시며(시 43:11, 사 30:1), ④ 신앙적 변화의 마음을 주심(겔 36:26~27), ⑤ 사람의 깊은 중심을 살피시며(잠 20:27), ⑥ 죄인을 경고하심(느 9:30), ⑦ 감동주심(호 9:7, 겔 2:2), ⑧ 말씀을 받아 선포하심(슥 7:12, 미 3:8), ⑨ 성도를 말씀으로 깨닫게 하심(시 119:18), ⑩ 사역자들에게 능력을 주어 나라를 붙들게 하심(삿 3:10,6:34,11:29,16:20), ⑪ 사역자를 임명하여 쓰심(사 48:16), ⑫ 사람의 힘으로 못하는 것을 능히 이루심(슥 4:6), ⑬ 좋은 기술을 주어 성전기명을 만들게 하심(출 31:1~6), ⑭ 왕에게 지혜를 주어 재판을 잘하게 하심(왕상 3:9)등을 살필 수 있고,
2) 신양성경에서는 예수님을 동정녀에게서 탄생시키심(눅 1:34), 세례 받으실 때 동참하심(눅 4:18), 연단 받는 곳으로 인도하심(눅 4:1,14), 거듭나게 하심(요 3:2~8), 귀신을 쫓으심(마 12:28), 보혜사로서 대언, 보호, 인도, 유지하심(요 14:16), 진리의 영으로 계시하시고(고전 2:10), 가르치시며(요 14:26) 기록, 보존하심(요 14:16,17,26, 벧후 1:21), 전도할 곳을 지시하심(행 8:29), 전도하지 말 곳을 지시하심(행 16:8), 전도내용을 가르치심(고전 2:13), 책망, 안위하심(요 16:8, 행 9:31), 성령의 세례(강한 임재의 표현)를 나타내심(행 2:1~4),사도들에게 변화와 능력을 주심(행 3:11~15), 성도의 교제와 기도를 힘쓰게 하심(행 2:42), 믿는 무리로 한마음 한뜻이 되게 하심(행 4:32), 핍박 중에 교회를 붙드심(행 4:8), 증거의 힘을 주심(행 4:31), 죄를 들추어내심(행 5:3~9), 지도자를 선별하여 내심(행 6:3), 신령한 직임과 봉사의 직임을 주심(행 6:3,20:28), 선교사를 피택 파송하심(행 13:2,16:9,20:1),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부어주심(롬 5:5), 성도의 연약을 도우심(롬 8:26),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롬 8:26~27), 성도의 마음에 내주하심(고전 3:16), 인도자가 되심(갈 5:16), 9가지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심(갈 5:22,23),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게 하심(신앙고백하게 하심 ; 고전 12:3), 각종 은사를 자기 뜻대로 주심(고전 12:4~11), 증거자에게 능력을 주심(고전 2:4), 선택할 때 동참하심(살전 1:5), 육체의 소욕과 싸우게 하심(롬 8:13, 엡 6:10), 교회를 힘 있게 하심(빌 3:3, 고전 14:15), 말씀을 영감으로 계시하심(벧후 1:21), 진리를 생각나게 하시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심(요 16:13) 등입니다.
2. 이상의 다양한 성령님의 역사를 종류별로 구분하면
1) 성령님의 인격성을 나타내시는 역사로 근심하시는 일이 있고(사 63:10, 엡4:30),
2) 사명적인 일로 사역자임명, 전도지시, 가르침, 책망, 감찰, 안위, 연약을 도우심, 동거하심 등 각종 은사주심이 있으며,
3) 각종 은사를 주심에 있어서는 ① 자기 뜻에 따라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되 ② 지혜,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침, 능력, 예언, 영분별, 각종 방언, 통역의 은사(고전 12:8~11)와 직분의 은사를 주셨고(엡 4:7~12, 고전 12:28), ③ 직분의 은사로는 사도, 선지자, 전도자, 목사, 교사, 장로, 집사 등이 있으며(롬 12:7, 행 20:28), ④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재질로서 예언, 다스림, 봉사, 위로(권위), 구제, 긍휼 베품의 은사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엡 4:7~12). 그리고 이 모든 은사는 유익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고전 12:7).
4) 여기에서 성경에 나타나 있는 은사라 하여 지금은 그대로 다 주시지 않는 것이 있으니, 예를 들면 선지자나 사도나 사도시대에 함께 역사한 전도자(행 21:8) 직분은 현시대에 없음이 확실합니다. 이것은 초대교회당시에 완전한 계시를 주신 다음 그 후시대에는 더 주시지 않는 것처럼 특별계시나 특별능력과 관계된 직분은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의 기초수립이 성경의 계시와 사도의 이적으로 완전하여졌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박윤선 목사님의 출애굽기 주석 660페이지의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이미 선지자들(신약시대에는 사도들)을 통하여 나타내신 이적(異蹟)을 단회적(單回的)인 특수한 것으로 간주하고 믿어야 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도 그런 이적을 행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한다면 그것은 그의 진리와 경륜을 버리고 그를 시험하는 불신앙이다. 하나님께서는 일찌기 그의 종들을 택하여 세우셔서 우리 자신보다 믿을만한 인격을 만드시고 그들을 통하여 하늘의 진리를 전하도록 하셨다. 그들의 생각하는 것이 우리보다 우수했고, 그들의 말하는 것이 우리보다 진실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험하는 것보다 그들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가 더욱 믿을 만한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5) 구원사역을 위한 성령님의 역할은 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의논(議論)사역에 동참하시고(창 1:26), ② 하나님의 독생자를 인간 예수님으로 육체와 함께 세상에 오시게 하였으며(눅 1:35), ③ 그 예수님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 공생애의 시작을 인도하셨고(눅 3:22), ④ 성경을 영감으로 기록하게 하셨으며(고전 2:13, 벧후 1:21), ⑤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로 믿음이 일어나게 하시고(요 3:5~8), ⑥ 교회의 형성과 육성을 위하여 역사하시며(엡 1:22~23, 고전 3:16,12:4), ⑦ 진리를 증거하시여 성도를 보호, 교육,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⑧ 성도와 교회를 유혹과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요 14:26,15:26,16:13, 행 5:32, 히 10:15, 요일 2:17).
6) 이상의 말씀을 다시 정리하면 ① 성경을 영감으로 기록하게 하시고(벧후 2:21), ② 거듭남의 은혜를 주시며(요 3:5), ③ 믿음을 주시고(고전 12:3,9), ④ 가르침의 역사로 확신을 주시며(요 14:26, 딤후 3:15), ⑤ 세례를 베품에 역사하시고(마 28:20), ⑥ 연약을 도와 믿음을 보존케 하시며(롬 8:26), ⑦ 성령 충만으로(엡 5:18) 깨끗케 하여 성화시켜 주시는(고전 6:1,12:13, 딤 3:5) 사역을 하시는 것입니다.
3. 성령님이 이런 사역을 단독으로 다 하시는가? 아니면 삼위의 하나님 간에 유기적으로 하시는가? 할 때
1) 생명창조를 포함한 만물창조나 구속사역을 완성하시는 일에 대하여는 삼위일체적으로 사역하시되 성자가 성부의 뜻을 따르시며 성령님이 성자의 뜻을 따라 시행하시는 것으로 이해하셔야 하고(시 33:6, 욥 26:3, 요 7:29,8:42,16:13, 고전 2:10),
2) 특별한 업무를 위하여 인간에게 재능을 주시는 일은 성령님이 독자적으로 역사하시는데, 예를 들면 브살엘과 오홀리압에게 재능을 주신 것과(출 28:3,31:2), 사울왕을 감동하시고(삼상 11:6), 각종 은사 주시는 일(고전 12:11)등은 한 성령님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이 하시는 사역은 다양하고 분간이 있는 만큼 저희들은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사역범위를 따라 깨달으며 지혜롭게 은혜를 받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12. 제 11 과 “성령님의 구원사역” (고전 2:10~16)
성령님이 구원사역에 어떻게 일하시는지에 대하여 더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주로 삼위의 하나님이 구원사역을 이행하실 때 ① 성부하나님은 계획하시고, ② 성자예수님은 구원의 방편을 세우시며, ③ 성령님은 이를 구원대상에게 적응시키신다고 설명합니다. 비유적으로 다시 설명 드리면 건축주 아버지는 집지을 계획과 설계를 맡고, 아들은 재료를 감당하며, 기술자들은 집을 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재료 제공자로서 구속의 방편이 되어 주시고 성령님은 기술자로서 구원사역을 적용시키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성령님이 구원을 적용시킴에 대하여
1) 성령님은 믿음의 근거인 성경을 계시하셨습니다(벧전 1:20~21, 딤후 3:16). 따라서 성경은 의의 말씀이요(히 5:13), 구원의 기업을 주시는 방편이 됩니다(행 20:32).
2) 육에 속한 사람을 거듭나게 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시킵니다(요 3:8, 엡 2:1). 본래 육에 속한 사람은 그 영적 생명이 죽었음을 인하여(창 2:17) 하나님의 일을 받지 않기 때문에(고전 2:14) 다시 살려야 하는 것입니다.
3) 구세주 예수님을 완전한 인간으로 무흠하게 탄생시키기 위하여 처녀의 몸에서 잉태하게 하시고 출생케 하신 일이며(눅 1:35),
4) 믿음을 갖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같은 성령으로 믿음 주신다”(고전 12:9) 하셨고, “예수님을 주라 시인할 수 있게 하신다”(고전 12:3) 하셨으며, “감화를 주신다”(고후 6:6) 하셨고, 또 “마음에 인을 쳐서 확신케 하신다”(엡 1:13, 롬 8:16)고 하셨습니다.
5) 믿음을 붙드시는 역할을 하십니다. 세례로 인을 치시는 일(고전 12:13, 마 28:19), 기도하게 하시는 일(엡 6:18), 대신 기도해 주시는 일(롬 8:26)로 믿음을 붙들어 주시며,
6) 인간 내심의 완악을 물리쳐 회개시키시는 역사를 해 주십니다(겔 36:26~28). 성령님이 성도의 마음에 거하시면(고전 2:12,6:19) 정화의 역사를 이루어(고전 6:1, 딛 3:5) 성화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2. 위 본문 말씀을 설명 드리면
1)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 하신다”고 하셨습니다(10절).
2) 하나님의 사정을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하셨지요(11절).
3) 그런데 성령님이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다” 하셨으니, 여기의 “이것”이란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모든 계시를 의미합니다.
4) 이 계시는 신령한 것이고 신령한 것으로만 분별할 수 있으므로 성령님의 감화역사가 아니고는 깨닫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5) 하나님께로서 보내신 성령님의 역사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되면(롬 5:5) 사람의 지혜로 가르친 말이 아닌 성령님의 가르치신 대로만 믿고 살아야 하는데, 여기의 “성령의 가르치신 것” 이란 영감 된 성경말씀뿐입니다.
6) 따라서 성경말씀 아닌 것으로 감동받고, 행동한 것은 구원사역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요, 오직 성경만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 자에게만 구원의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마 7:21).
7) 12절에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 하신 것은 중생케 하신 성령님의 임재를 뜻하는 것이고, “우리로 하나님께로부터 주시는 은혜(구원의 은총)를 알게 하신다” 하신 것은 거듭남으로 인하여 믿음을 갖고 구원의 복음을 수납하게 하시는 것인데 이것을 성령님께서 이루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령님은 택한 백성에 대한 구원사역을 위하여 ①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나타내주시고, ② 구원의 성취자이신 예수님을 탄생케 하셨으며, ③ 거듭남의 은혜로 믿음을 갖게 하시고, ④ 진리를 가르치며, 진리 중심으로 인도하시고, ⑤ 믿음을 보존, 성화시켜 주시는 사역을 하시는 것입니다.
13. 제 12 과 “성령님의 성경교육” (요 14:26)
성령님의 많은 사역 중 “성경을 가르치시는 사역”이 가장 비중이 있는 사역임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드립니다.
1.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말씀계시, 말씀영감, 말씀기록에서부터 성경을 가르치시는 일까지 성령님은 성경과 나눌 수 없는 관계에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나실 것입니다(요 14:17).
2. 성령님은 성경말씀을 전파하시고 가르치십니다. 베드로도 성령이 충만하여 진리를 전파하였고(행 4:8), 스데반도 그와 같았으며(행 6:8), 오순절 당시에도 성령의 충만과 함께 방언을 한 것은 역시 복음을 만방에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행 2:4). 그뿐 아니라 성령님은 성경을 가르치시는데 으뜸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그 증거를 말씀드리면
1) 예수님이 성령님의 사역을 직접 예언하신 말씀(요 14:16,26,15:26)에서 보혜사(성령)란 명칭으로 나타내셨을 때 요 14:17에서는 “진리의 영”이라 하셨고, 요 14:26에서는 “그가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신다” 고 하셨으며, 요 15:26에서는 “증거 하신다” 하셨고, 또 16:13에서는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신다” 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성령님의 사역에 대하여 특별히 소개하신 말씀입니다.
2) 성령님은 자기의 뜻으로 은사의 직분을 주실 때에 제일 먼저 사도, 선지자, 교사(목사)를 주셨는데(고전 12:28), 이 직분이 다 성경을 가르치는 직분이며, 또 지식의 말씀, 지혜의 말씀(고전 12:8), 방언, 예언, 통역(고전 12:10)의 은사도 역시 성경교육에 속하는 것입니다.
3) 말씀을 받는 성도에게 역사하시는 것으로 거듭남의 은혜(요 3:5), 지혜와 총명(시 143:11), 계시의 정신(엡 1:17), 감동하심(삿 13:25), 새 마음을 주심(겔 36:26), 생각나게 하심(요 14:26, 마 26:75)으로 성경교육에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4) 성령님이 성경교육에 직접 역사하신다하여 노력 없이 깨달아지는 줄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 이유는 ① 성령님께서 인간교사(은사로 주시는 교사직분)를 세우실 때 성경에 무식한 사람을 세우시지 않으며, 성경에 유력한 사람치고 노력 없이 성경을 잘 알게 된 사람도 없습니다. ② 또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4)는 말씀이나 교사가 “항상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일에 착념하라”(딤전 5:13)는 말씀이나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벧전 3:15)는 말씀은 그만큼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성경을 배우려고 노력하는 자에게 노력하는 분량만큼 역사하여 주신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누가 묻기를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 무엇이냐? 고 하면 다른 중요한 사역들을 많이 하실지라도 성도의 구원문제와 관련한 것, 또 성도가 동참할 수 있는 사역으로 따진다면 성경교육 이상 더 큰 사역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많이 알고 잘 가르칠 수 있는 성도를 성령 충만한 자로 여길 때에 의심하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진실하게 깨달아 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성도이면 그만큼 말씀에 도취되고, 말씀에 도취된 성도이고, 아울러 성령 충만의 인도를 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14. 제 13 과 “성령님의 사역과 관련된 지식들” (창 1:2, 욥 26:13)
1. 성부, 성자, 성령님이 다 같은 하나님이시라는 동질성을 증명할 때 다음 말씀들을 참고 하십시오.
1) 행 5:3,4에서 성령님을 속인 것은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 하여 성령님을 하나님이라 하셨고,
2) 고전 2:10에서 성령님은 하나님속성과 동일하며 성령님만이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아신다 하셨으며,
3) 요 6:63에서 살리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인데 “살리는 것은 영”이라 하시므로 성령님에게 생명의 힘이 있음을 말씀하셨고,
4) 행 12:51에서 “성령님을 거스림은 곧 하나님을 거스림”으로 동일시 되었으며,
5) 마 12:31에서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곧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로 인정되어 사함을 받지 못한다 하셨고,
6) 요 14:28에서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 라는 말씀이 있으나, 이 말씀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빌 2:6) 예수님이 자신을 낮추시는 입장에서 말씀하신 것이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 하신 말씀으로도 동질성을 증명하셨습니다.
7) 마 3:16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부, 성자, 성령님이 동시에 출현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삼위하나님과 동일하시고 연합적이나 독립적으로도 출동하실 수 있으며,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서 방출(요 15:26, 롬 8:9)하신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8) 따라서 삼위의 하나님은 ① 본질상 동일하시고, ② 각위로도 나타나시고, 역사하시며, ③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방출하신 인격의 신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성령님의 신적 지위를 충분히 고려하여 영광스럽게 모셔야 할 것입니다.
2. 성령님에 대한 오해입니다.
1) 능력론으로, 성령님을 하나님의 능력이나 영향력의 방출이라고 주장하나 이는 인격을 무시한 이론이요,
2) 양식론으로, 배우 1인이 2인 역을 겸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성령의 역할을 겸한다고 하는 것인데 역시 잘못된 것이며,
3) 군주론인데, 이는 삼위 중에 성부하나님이 더 크시다고 주장하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이 성부, 성자, 성령님의 삼위일체설을 설명하기 위하여 물은 하나의 본질이지만 온도에 따라 액체, 고체, 기체로 변하고, 또 불은 하나이지만 밝히는 역할, 뜨겁게 하는 역할, 태우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한분이시지만 다른 모양과 다른 역할을 하신다고 설명하는 예가 있으나, 이런 설명은 인격이 없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는데 적합지 않다고 합니다.
3.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
1) 인격적인 일로, 사람처럼 행동하신 것을 의미하는데 몇 가지 예를 든다면, ① 사역자를 임명하심(사 48:16, 행 13:2), ② 전도할 곳을 지시하심(행 8:29), ③ 전도하지 말 곳을 지시하심(행 9:31), ④ 전도내용을 가르치심(고전 2:13), ⑤ 책망하심(요 16:8), ⑥ 안위하심(행 3:31), ⑦ 연약을 도우심(롬 8:26), ⑧ 가르치심(요 14:26), ⑨ 인도하심(요 16:13), ⑩ 근심하심(엡 4:33, 사 63:10), ⑪ 증거 하심(요 15:26), ⑫ 감찰하심(롬 11:33), ⑬ 성도와 함께 동거하심(요 14:17) 등이요,
2) 신적사역(능력의 사역)으로,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것을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 구약성경에 나타난 성령님의 사역으로 ① 천지창조와 섭리의 활동(창 1:2, 욥 26:13, 사 32:15), ② 지혜와 명철과 지식의 영(출 28:3, 신 34:9)으로서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는 역할(욥 32:8, 창 41:38), 여기에 따라 요셉, 모세, 70장로, 브살엘 등이 총명을 받았으며, ③ 사람의 마음속에 도덕적 성품을 창조해 주심(시 143:11, 사 30:1), ④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심(잠 20:27), ⑤ 죄인을 경고하심(느 9:30), ⑥ 감동을 주심(호 9:7, 겔 2:2), ⑦ 말씀을 받아 선포하게 하심(슥 7:12, 미 3:8), ⑧ 성경의 실제적 기자가 되심(출 34:28, 대하 26:22), ⑨ 성경을 보존하심(시 12:6,7), ⑩ 성경의 조명자가 되심(민 27:18, 겔 2:2), ⑪ 깨닫게 하심(욜 2:28), ⑫ 가르치심(출 35:34), ⑬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심(시 119:18), ⑭ 웃니엘, 기드온, 삼손 등에게 능력을 주셔서 나라를 붙드심(삿 3:10,6:34,11:29,16:20) 등이요,
(2) 신약성경에 나타난 성령님의 사역은,
* 복음서에서 ① 예수님을 동정녀에게서 탄생 시킨 일을 하셨음(눅 1:34), ②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동참하시므로 예수님의 공생애를 구별하심(눅 4:18), ③ 예수님의 시험받으심과 이기심을 인도하심(눅 4:1,14), ④ 교육, 전도, 마귀 쫓는 일을 하심(마 7:29,12:28), ⑤ 중생시키는 역사를 하심(요 3:28), ⑥ 보혜사란 이름으로 보호, 인도, 유지하시는 일을 하심(요 14:10), ⑦ 진리의 영이란 이름으로 가르치심( 요14:17), ⑧ 동거하심(요 14:16) 등으로 이 말씀들은 예수님 탄생과 생애의 역사와 부활과 승천과 중보의 역할에 대하여 그 중요성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 사도행전에서 ① 오순절에 성령세례로 나타나심(행 2:5), ② 사도들의 세계에 큰 변화와 담력을 주심(3:11~15), ③ 회개한 자들에게 체험케 하심(2:37~38), ④ 성도가 서로 연합하게 하심(4:32), ⑤ 핍박 중에 교회를 붙드심(4:8), ⑥ 증거의 힘을 주심(4:31), ⑦ 회개하고 정돈시켜 순결하게 하심(5:3~9), ⑧ 지도자를 세우심(6:3), ⑨ 물질적 직임과 신령한 직임을 구별 지워주심(6:3,20:28), ⑩ 선교사들을 인도하심(13:2,16:9,20:1)이고,
* Paul 서신에서는 ① 성령님이 성도에게 내주하심(고전 3:16), 사람이 성령을 받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하심(갈 3:2, 롬 8:9), ② 성도의 인도자로 성령을 따라 행하라 하심(갈 5:10), ③ 성령의 9가지 열매로 인간의 성품조성의 역할을 하심(갈 5:22,23), ④ 성령님의 역사가 예수님을 거스리지 않음(고전 12:3), ⑤ 성령님의 뜻대로 은사를 베푸심(고전 12:4), ⑥ 증거자에게 능력과 복을 주심(행 1:8, 고전 2:4, 살전 1:5), ⑦ 성도로 하여금 육체의 소욕이나 죄와 싸우게 하심(롬 8:13, 엡 6:10), ⑧ 하나님의 교회에 힘을 주심(빌 3:3, 고전14:15), ⑨ 각가지 은사의 역할을 하시는데 이 은사를 필요에 따라 역사 하신다고 하심(구약만나, 사도적 이적) ㉠ 은사의 내용은 고전 12:8~11,28에서 지혜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침, 능력, 예언, 영분별, 각종 방언, 통역으로 나타났고, 롬 12:6~8에서는 예언, 봉사, 권위(위로), 구제, 다스림, 긍휼이 있다고 하심 ㉡ 은사의 직임으로는 엡 4:11~12, 고전 12:28, 행 20:28에서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교사, 목사(목자), 감독자 등이 있음. 그러나 사도, 선지자는 계시사역이 끝남으로 인하여 교회시대에는 하나님이 세우시지 않았습니다.
15. 제 14 과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8)
위 본문 말씀에 따라서 저희들은 성령 충만을 받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1. 성경에 보시면 “성령 받으라” 는 말씀이 몇 차례 나옵니다.
1) 요20:22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을 받으라” 하셨고, 또 행 1:5에서도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하셨으며,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약속대로 주신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하였으므로(행 2:16) 약속에 의한 충만은 이미 받고 성취된 것입니다.
2) 그러나 본문 말씀에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하신 것은 오순절 당시의 성령 충만과 체험을 받은 후이기 때문에 새롭게 주신 명령입니다. 따라서 이 충만의 뜻은 결과와 관련된 것으로 신앙의 성숙과 사명 성취를 위한 은사의 다양함과 넉넉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성도가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아야 할 이유는
1) 본문 말씀에 근거할 때 ①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함이요, ② 지혜롭게 행하기 위함이며, ③ 세월을 아끼고, ④ 기뻐 찬양하기 위함이요, ⑤ 방탕을 멀리하기 위함이요, ⑥ 감사하며 경외하며 복종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엡 5:15~21).
2)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믿음을 보전하는 신앙에서 역사하는 신앙으로 성장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롬 1:17).
3) 사명과 관련한 성령 충만의 필요성을 요약하면 ① 예수님의 명령이니까 그렇고(엡 5:8), ② 더욱 큰 은혜를 사모하려니까 그러하며(고전 12:31), ③ 전도사명을 이해하여야 하고(행 1:8), ④ 핍박을 견뎌야 하며(고전 13:7, 고후 1:6,6:4), ⑤ 환난을 이겨야 하고(요 16:33), ⑥ 말씀지식으로 죄와 이단과 싸워야 하며(딤후 3:13, 엡 6:11), ⑦ 진리를 연구 증언하여야 하고(행 16:14), ⑧ 사랑을 실천해야 하며 핍박자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고(마 5:44), ⑨ 항상 새로워져야 하며(딛 3:5), ⑩ 풍성함을 누려야 하고(딛 3:6), ⑪ 죽도록 충성하여야 하기 때문이며(계 3:10), ⑫ 말세가 가까울수록 관영하는 죄악을 대적하기 위하여 전신갑주를 입으려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엡 6:11에 보시면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전신갑주를 입으라” 고 하셨습니다. ⑬ 또 엡 4:13에 보시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라” 하시므로 성령 충만의 필요를 많이 강조해 주셨습니다.
3. 성령이 충만하여지는 의미와 과정이 어떻게 되는가? 할 때에
1) 이미 내주하신 성령(중생하고 예수 믿을 때에 성령님은 그 성도의 속에 들어와 계심)님이 활동상으로 크게 역사하여 주시는 것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내주하신 성령님과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이 다른 분이 아니고 같은 성령님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기본신앙을 유지해 주시기 위하여 내주하신 성령님이 더 크게 일해주시기를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2) 그 이유는 요 4:10에서 성령님을 생수의 샘물로 비유하신 후 그 생수를 한번 먹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을 말씀하여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 하셨고, 또 요 7:38에서도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내게로 와서 생수를 마시라 그러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충만한 성령을 밖에서 공처럼 던져주거나 자동차에 기름 넣듯이 주입 시키는 것이 아니고 이미 그에게 내주하여 계신 성령님이 샘물 솟구치듯이 폭발적으로 역사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증거의 말씀으로 딤후 1:6에 보시면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안수한다”는 말씀이 그와 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의 성격을 밖에서 다른 영이 주입되는 줄로 알지 마시고 자신에게 내주하시는 그 성령님이 더 크게 역사하시는 은혜라고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내주하심에 대한 말씀은 마 16:17, 요 3:8, 고전 2:10,12,13,3:16,12:9등에 있습니다.
3) 성경에서 큰 은혜 주시는 표현을 소낙비(시 72:6)나 이슬로(사 26:19, 호 6:4,14:5, 시 133:3) 비유하신 말씀이 있는데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비유로 해석하지 않고 하늘 공간에서 이슬처럼 내려 주시는 것으로 착각하여 공중을 향하는 경우가 있으나 성령님은 그런 식으로 강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주하신 성령님은 마치 화로 속에 꺼지지 않는 불씨가 묻혀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불씨는 분명히 불이요, 땔감에 접할 때 큰 불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 불씨 자체로서는 큰 불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내주하신 성령님은 그 분량에 따른 역사(役事)로 볼 때 믿음을 보존하여 구원을 성취하는 데는 족하지만 영적 만족을 체험하거나 신앙적 대사를 이루는 데는 넉넉하게 역사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은 “이미 성도 속에 내주하신 성령님이 불일듯이 크게 역사하시는 것”임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성령 충만을 위한 방법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1) 기본신앙이 필요합니다. 기본신앙이란 중생의 은혜를 뜻합니다. 바다에서 조개를 잡는 사람이 밀물이 들어오기 전에 힘 있게 주워 망태에 담아야 하는 것처럼 성령 충만도 담을 그릇이 있어야 하는데 이 그릇이 곧 중생한 심령입니다. 이 거듭난 심령은 영적은혜의 싹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신령한 은혜에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난 자는 신앙의 진실성만 추구하게 됩니다.
2) 기본신앙에 입각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무슨 일이나 노력 없이 될 수 없으며 “천국도 침노하는 자가 뺏는다” 는 말씀의 취지와 같은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위하여 노력할 때 ① 먼저 받은 은혜의 보존이 필요한 것입니다. ㉠ 살전 5:19에서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말씀도 그 뜻이요, ㉡ 원문상으로 그런 취지를 분석한다면 본문의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이 “프레루스데 엔 푸뉴마티(πλερούσθε ἐν πνεύματι)”인데 “충만하라”는 “프레루스데”가 명령사요, 수동태이며, 현재 분사이기 때문에 성도가 명령을 순종하면 수동적으로 받게 되는 뜻이 있고, 또 받아진 것을 현재분사형에 따라 “유지해 나가라”는 의미까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또 헬라어에는 단순과거형동사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현재분사와는 반대로 “한번 동작”으로 끝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예를 들면 요 2:7에서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셨을 때 “채운다”는 “게미사테(γεμἰσατε)”가 그런 동사이고, 또 엡1:13이나 4:30의 “인을 치라”고 하셨을 때 “인친다”는 “에스프라기스데테(ἐσλΦπαγἰσθντε)”도 역시 그런 뜻이어서 “한번 인을 쳤으면 두 번 칠 필요가 없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도 받는 것은 한번으로 끝나고, 그 받은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방학이 있고, 휴식이 있다면야 잠시 덜 충만하여도 피해 갈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정이기 때문에 성도는 항상 충만한 은혜의 지속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 어떤 상태가 성령을 소멸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성도가 자기 마음속에 상주하시는 예수님과 진리를 망각하거나 불순종하여 근심 시키는 상태를(엡 4:30)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성도가 완고하면 근심하시기 때문에(사 63:10, 엡 4:30) 그런 상태에서는 역사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받은 은혜를 소멸치 않으려면(엡 3:17) 예수님과 진리의 말씀을 꼭 기억하시고 붙잡으셔야 하며(행 20:31, 딤후 1:6) 순종을 잘 하여야 할 것입니다. ② 육체의 욕심(허탄한 것들)을 멀리하셔야만 충만해 질수 있습니다. 성도가 영적은혜를 깊이 추구할 때에 성령의 은혜를 많이 받을 수 있으나, 육체와 세속의 은혜를 추구하는데 어찌 성령의 충만이 있겠습니까? 갈 5:19~23에 보시면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있는데, 이 두 가지가 서로 대립하여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린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육체의 소욕을 좋아하는 사람은 성령 충만이 어려운 사람이요,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기를 애쓰는 사람은 그 결과에 따라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성령 충만을 위하여 육체의 소욕을 제어하려고 노력하시는지요? ③ 성령님의 뜻을 적극 따라야 합니다. 행 5:32에 보시면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성령”이란 말씀이 있고, 또 갈 5:16에서는 “성령의 뜻을 좇아 행하라” 하셨고, 또 18절에서는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라” 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의 뜻은 ㉠ 회개하는 것입니다. 행 2:38에서 “회개하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 고 하셨습니다. ㉡ 기도하는 것입니다. 롬 8:26에서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를 대신하여 기도해 주신다” 고 하셨습니다. 또 눅 11:13에서도 “기도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기도에는 간청이 있고(마 7:7), 합심기도로 은혜 받은 사례가 많으며(행 1:14,2:1,10:2), 또 회개가 따를 수 있고(행 2:38), 새로운 결심을 가지므로 은혜 받는 여건이 됩니다(단9:3,23). 특히 대인 관계의 불화문제를 해결하는 변화는 더욱 은혜 받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웃과의 화해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응답의 요건이 된다 하셨고(마 5:23,6:12), 또 성령님의 사역 가운데 하나 되게 하는 사역이 있기 때문입니다(엡 4:3). ㉢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에 끌리며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여야 합니다. 성경말씀과 친하는 것이 곧 성령님과 친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고(요 16:13), 성경을 영감으로 주신 분이며(벧후 1:21), 그것을 가르치시고, 증거 하시며,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요 15:26,16:13,14:16) 성경과 친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끌리고(행 18:5), 그 말씀의 맛이 꿀 같아져야 합니다(시 119:103). 시 1:2에서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 하셨고, 계 1:3에서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하셨으며, 행10:19에서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할 때 성령님이 또 말씀을 주셨고, 고넬료의 가족들도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을 받았으며(10:44)”, 딤후 1:6에서도 “네게 있는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려면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야 한다” 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연구하고, 배우고, 가르치며, 증거할 때에 성령님이 더 크게 역사하는 것은 더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행 11:15). ㉣ 성경실천입니다. 요 16:13에서 “성령님은 진리 가운데로 행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성경적 실천생활이 선행되지 않고는 성령 충만을 기할 수 없습니다. 성경실천은 곧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할 때는 하나님이 노하시고(시 7:12), 성령님이 근심하신다(엡 4:30)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을 근심 시키는 것은 바로 성령님의 역사를 소멸 시키는 것이 되어져서(살전 5:19) 충만을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 5:16에서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하셨으니 이 말씀이 바로 “성경대로 행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충만의 방법입니다. 행 5:32에서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 더욱 큰 은사인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입니다. 고전 12:31에서 성령님은 더욱 큰 은사 주시기를 원하셨고, 또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전 14:1)고도 하셨습니다. ④ 은혜 받는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두고(롬11:36),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위하여(빌 2:13) 사명을 이행하려는 자에게 주십니다. 제자가 되려하거나(마 28:19), 복음증인이 되려하거나(행 1:8), 성전의 기명등을 만들도록 맡길 필요가 있거나(출 28:3,31:2), 나라를 구출할 필요가 있을 때(삿 6:34), 또는 스데반이 순교할 때(행 6:5,7:55)등 사명수행을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게 하시며(고후 6:1,8:6), 반드시 은혜를 주실만한 자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출 33:19). ⑤ 또 사도시대에는 사도의 안수로 성령세례가 전달된 사실이 있었지만(행 3:6,19:6) 현시대에 받아야 하는 충만은 그런 여건에 있지 않음을 아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사도적 은사를 그 시대에 한하여 역사하신 것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⑥ 몇몇 체험자들의 간증을 소개해 보면 ㉠ “챨스 핫지 피니” 는 회개 자복하는 중에 놀라운 체험을 하였다 하였고, ㉡ “F.B.마이어” 는 걸어가면서 기도하다가 큰 은혜를 체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 이런 체험은 누구라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깊이 회개하면서 기도해 보십시오. 반드시 성령님께서 마음의 평안과 기쁨과 깨달음과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참고로 본인이 집필한 기독교 신앙백과의 “성령을 충만히 받음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요약한 글이 있습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한 가지 드릴 말씀은 구하는 자에게 주실 수 있는 성령 충만을(마 7:7, 눅 11:13) 40일 금식기도를 해도 못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은혜를 갈망하여 40일 금식기도를 하는 성도가 있지만 역시 변화가 없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무슨 이유일까요? 제 생각에는 그 간구자가 자기를 부정하여 못박지 못하는 것과, 결백하게 회개하지 못하는 것과, 또 허탄한 세상정욕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런 문제들을 다 해결하시고 성령 충만에 도달하시기를 바랍니다.
16. 제 15 과 “성령 충만의 결과” (갈 5:16~26)
이 지식은 성령 충만의 여부를 가름하는데 좋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1. 성령이 충만하면 성령 충만한 성도가 출현하겠지요.
1) 우선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 곧 예수님의 인격이 충만 할 것이요,
2) 그렇다고 하여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는 없는 만큼 인간 분수를 잘 지키면서 아무리 성령이 충만하여도 사람의 분수를 초월하려고 하면 안 될 것이며,
3)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니까 성경지식이 많을 것이요,
4)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통달하시니까(고전 2:10) 하나님의 뜻을 잘 살필 것이며,
5) 성령님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니까(요 16:13) 성경대로 많이 행할 것이요,
6) 성령님은 가르치시며(요 14:26), 증거 하시는 사역을 잘하시니까(요15:26) 전도교육을 잘 할 것이며,
7) 성령님은 능력이 많으신 즉 사탄의 역사를 잘 이길 수 있음은 물론(엡 5:17) 하나님의 사역도 지혜롭고 능력 있게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본문에서 주신 말씀을 소개하면
1) 우선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된다고 하셨습니다(16절). “육체의 일은 현저하다”하시고, 19절~2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2) “육체의 소욕을 거스려 대항한다” 고 하셨습니다. 즉 “성령의 소욕이 육체의 소욕을 거스린다” 는 말씀입니다(17절).
3)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게 된다 하셨고(22~23절),
4) “육체와 함께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는다”고 하셨으며(24절),
5) 헛된 영광을 구하거나 서로 격동 투기하지 않는다 하셨고(26절),
6) 성령을 좇아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며(16절) 노력한다고 하였습니다(25절). 따라서 성령이 충만하면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게 될 것입니다.
7) 끝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하신 말씀과 예수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성령의 충만은 최고의 만족 상태를 의미하므로 생활이나 미래문제나 죽음이나 어떤 어려운 일에 대하여도 일체 속박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그런 증거들을 보여 주셨습니다(롬 5:3, 고후 4:8~11, 빌 1:21,3:7~8,4:11~12, 딤전 6:8). 다시 강조 드리거니와 성령으로 행함은 곧 성경대로 사는 것입니다. 자신과 이웃에 이런 성도가 있는가를 찾아봅시다.
17. 제 16 과 “성령을 좇아 행함” (갈 5:16,18,25)
위 본문 16절에 보시면 “성령을 좇아 행하라” 하셨고, 18절에서는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하셨으며, 또 25절에서는 “성령으로 살면” 하셨는데, 이 세 마디의 말씀은 다 성령님의 인도에 이끌려 복종하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 다른 곳에도 보면 예수님이 성령에게 이끌리셨고(마 4:1),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말씀하셨으며(마12:36), 초대교회 당시에는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과(행 2:4) 복음전파와(행 6:10) 예언(행 11:28)등을 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1.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은 ① 우선 하나님의 뜻대로 복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성령님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② 성경 말씀대로 시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이 “진리의 영”(요 14:17)이시고 삼위의 하나님 뜻에 따라 말씀을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요 16:13). ③ 성령님의 감동하시는 힘에 따라 복종하고 이끌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이 주 안에서 항상 지혜와 능력으로 마음에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엡 1:20,3:20).
2. 위의 본문 말씀에서는 성도가 성령을 좇아 행하였을 때 3가지 결과가 나타날 것을 말씀하셨으니
1) 16절에서 “성령을 좇아 행하였을 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 하시므로 현실적인 욕구가 멀어지는 결과를 말씀하셨고,
2) 18절에서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율법아래 있게 됨”은 그 당시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주의 이단 신앙”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단에 유혹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달아 바르게 따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25절에서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하게 된다” 하시므로 그 생활이 성경과 일치됨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면 육체와 현실욕구를 이루지 않게 하시며, 이단이나 불건전한 신앙의 유혹도 받지 않게 하시고 오직 진리의 말씀과 일치 되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3. 갈라디아교회 당시의 성도들이 성령을 좇아 사는 것과 오늘 우리가 성령을 좇아 사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요? 여기에 대하여
1) 갈라디아교회 당시는 표준계시인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이었으나 바울사도처럼 영감이 풍성한 사역자들을 통하여 신앙의 표준과 기독교의 기초를 세워주셨습니다(고전 11:1, 엡 2:20). 또 그 당시에는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받은 성도들도 있어서(요 4:1, 고전 12:10) 누구의 영감이든지 그 진위성을 시험할 수 있었습니다. 즉 사도나 선지자 또는 영을 분별하는 사역자들이 여러 가지 계시의 진위성을 시험하여 오직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계시하신 계시의 터 위에서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도하셨습니다(고전 3:10~11). 따라서 그 당시의 성도들은 사도들의 감독과 인정을 받는 범위에서 생활한 것이 바로 성령을 따라 산 생활이 된 것입니다.
2) 그러나 오늘에는 사도나 선지자나 영을 분별하는 사역자가 없는 대신에 그분들이 완성하여 닦아 놓은 터(표준 계시)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성경 66권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성도들은 완성된 계시의 말씀인 성경말씀에 나타난 뜻대로 행하는 것이 바로 성령을 좇아 사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장로교회 신조 제1조에서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고 못을 박은 것은 성경 66권만이 신앙과 본분(마땅히 행해야 할 책임)의 유일법칙이란 뜻을 강조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 이외의 것으로는 아무것에서도 지도 받을 대상이 없는 것입니다.
4. 이 진리를 모르는 성도들은 자주 신비한 일에 유혹을 받습니다. 어떤 성도는 보이지 않는 성령님이 수시로 성도에게 어떤 뜻을 나타내시고, 계시를 주시는 줄로 착각하는 분들이 계시고, 또 때로는 교역자들 세계에서도 체험적 계시가 너무 두드러질 때는 그것을 무시하지 못하면서 은근히 추종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극히 삼가셔야 합니다.
1) 경북의 어떤 목사님은 기도를 많이 하는 것으로 교인들의 신임을 받았는데 기도 중에 계시를 받는다는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그는 비가 올 것인지 안 올 것인지를 기도하는 중에 아는 법이 있다고 하면서 교인 가정에 지시하기를 “내가 기도해 보니 비가 안 올 것이니까 포도를 따지 말아라. 또는 보리를 베지 말아라” 하였고, 때로는 “비가 올 것이니 그전에 포도를 처분하고 빨리 보리타작을 하라”하였으나 그 예언이 맞지 않으므로 농사에 큰 피해를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영감이 있다는 사람을 보면 오히려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신앙이 잘못된 사람입니다.
2) 이미 고인이 된 어떤 목사님은 무주구천동으로 올라가는 버스에 탄 어떤 여인이 기도하다가 불길한 징조를 계시 받고 그 버스에서 내렸는데 그 버스는 언덕을 넘어 내려가다가 그 여인의 예언대로 사고를 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을 “영감 있는 여인” 이라고 칭찬하는 설교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칭찬은 교리적으로 볼 때 잘못된 것입니다. 차라리 성경을 건전하게 해석하는 사람을 칭찬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현실세계에는 장로교회 신자라도 성경만을 “신앙과 본분의 유일법칙”으로 믿지 못하는 성도가 많은가하면, “하나님이 성경계시를 현재의 66권으로 끝내셨다”는 사실도 모르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이것을 수차 가르쳐도 잘 안 되는 것은 아직도 성경관이 확립되어 있지 못했거나 또는 무속적 신앙의 근성을 없애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 어떤 성도가 제게 와서 묻기를 “너무도 신비한 꿈을 꾸었기 때문에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하여 문의하러 온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저는 대답하기를 “나도 지난밤에 꿈을 꾸었는데 비행기 타는 꿈, 홍수 나는 꿈, 전쟁하는 꿈, 집안에 도적이 들어오는 꿈 등 수없이 꾸었음” 을 말하고, “좋은 꿈을 꾸었으면 일시적이나마 즐거웠으니까 감사하고, 나쁜 꿈을 꾸고 불안한 상태이면 기도를 하라는 뜻입니다. 그 이상의 다른 뜻은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여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4) 그런데 또 답답하고 문제되는 것은 교회 중직자 중에서 어떤 경우는 목사부인이 예언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장로부인(권사)이 예언을 하여 심심치 않을 만큼 교인들을 유혹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집사람이 기도를 해보니까 00로 이사를 가서 00사업을 하면 잘 될 것이라는 것”이 기도 중에 확신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구실로 시무하는 교회를 떠나서 사업을 해 보았지만 별 유익도 없이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① 성경관의 신학이 정립되지 못하고, ② 자기의 일시적 느낌을 신비하게 받아들이는 잘못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5) 대하18:에 보시면 유다왕 여호사밧과 이스라엘왕 아합이 연합하여 아람 영토 “길르앗라못”을 쳐야 하는데 그 전쟁에 승패를 몰라서 그 당시 선지자들에게 물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에 이스라엘의 선지자 “시드기야”와 400명의 선지자가 승리할 것을 예언하였고, 단 “미가야”선지자 한사람만 패배를 예언하면서 그 전쟁을 만류하였습니다. 이때에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는 “미가야”의 뺨을 치며,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언제 네게 가서 그런 말씀을 하시더냐?” 한즉, “네가 골방에 들어가 숨는 날에 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은 다수 선지자의 예언을 따르다가 결국은 그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 어느 사람의 계시도 믿으려하여서는 안됩니다.
결론적으로 성령을 따라 사는 생활은 성경 중심의 생활을 의미하며, 그 결과로서 ①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고, ② 잘못 깨달음에 빠지지 않으며, ③ 오직 성경대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행 18:5에서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산다” 하셨고, 고후 13:5에서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하셨으며, 고전 7:19에서는 “오직 주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라”, 또 고전 4:6에서는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하셨은 즉 필히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이 성령을 따르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18. 제 17 과 “성령의 세례를 체험한 사람들” (행 2:1~13)
이 시간에는 오순절 당시에 “성령의 세례를 체험한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오순절 당시에 성령의 세례를 체험한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1) 행 2:1에 보시면 “저희가 다 한곳에 모였다”하셨고, 그들이 바로 성령의 세례를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2) “저희”란 누구들일까요? ① 우선 11사도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을 들 수 있고(행 1:13~14), ② 모인 무리의 수가 120명이나 되었으므로(행 1:15) 여기에 회집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과, 타국에 가서 살다가 그 당시에 예루살렘에 와서 우거한 경건한 유대인들과(행 2:5) ③ 로마에서 온 나그네와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2:11)이 있었습니다.
3) 이 사람들을 구별하여 나눈다면 ① 11제자 ②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 ③ 예수님의 아우들 ④ 다른 제자들 ⑤ 외국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 ⑥ 외국에서 온 나그네들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 분류는 신앙의 경력에 따른 격차를 나타낼 수도 있으며 특히 외국에서 온 나그네들은 기독신앙에 대하여 생소한 입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천하각국에서 예루살렘에 와서 우거한 사람들은 전혀 기도에 힘쓴 대열에 동참했다고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2. 이때에 약속대로 임하신 성령의 세례는 믿음과 사명이 더하고 덜한 형편을 떠나서 그때 모인 모든 사람들이 다 보편적으로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강한 바람소리, 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 자기 나라 말로 듣게 되는 방언 등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성령체험을 바라는 노력에 따른 것이 아닌, 그곳에 참석한 상태에서 기도하고 노력한 사람들과 함께 받아진 것입니다.
3. 그때 강림하신 성령님은 사명자들에게 권능으로 역사하신 것이 사실입니다.
1) 이는 행 1:8에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증인이 되리라”하신 말씀에 따라서 권능을 받고 사역한 제자들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사도행전에 나타난 전도사역자들이었습니다. 또 사도행전에 기록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오순절 당시에 성령을 체험한 식구들은 각자가 자기의 사명에 따라 충성하였을 것입니다.
2) 권능을 받아 충성한 제자들은 다 믿음과 사명에 노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① 우선 마음을 합하고 모여 기도하는 중에 은혜를 받았으며, ② 가룟유다 대신 “맛디아”를 보선하여 합법적으로 12제자의 조직을 구성하였고, ③ 또 예수님의 약속에 따라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3) 따라서 행 1:의 말씀과 관련할 때 ① 성경적 신앙이 바른 사람들(행 1:1~5) ② 부활과 재림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행 1:9~11) ③ 합심하고 기도하며 은혜를 사모한 사람들(행 1:12~14) ④합리적인 교회행정과 조직에 협력하는 사람들(행 1:15~26)을 중심으로 복음전파의 능력 있는 사역이 시작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 제 18 과 “성령이 충만하였던 사람들” (행 7:54~60)
이 시간에는 “성령이 충만하였던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사람들끼리는 누가 성령 충만한 사람인지, 또 어떤 상태가 성령 충만한 것인지를 잘 알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많이 닮은 사람이면 성령 충만한 사람이겠지요. 그래서 우선 성경에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누구였으며, 또 그가 무엇을 하였으며, 그는 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는가? 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성경에서 성령 충만하였던 분들을 찾기 위하여 사전을 놓고 성경을 거의 더듬은 결과 구약에서는 “브살엘과 오홀리압”을 발견하였고, 신약에서는 “세례요한, 엘리사벳, 사가랴, 예수님, 베드로, 7집사, 스데반, 사울과 바나바, 그리고 여러 제자들, 고넬료의 가족들, 사도 요한”까지 약 10명의 개인과 단체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그 사람들의 형편을 살핌으로서 성령 충만과 그 생활에 대한 것을 살펴보시므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눅 1:5에서 세례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고 하였습니다.
1) 어떻게 받았을까? 태중에 있는 아이가 성령 충만의 방법을 썼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무조건 주셨거나 아니면 그 아버지, 어머니의 경건한 생활 덕분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어서 말씀드리겠지만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와 어머니 “엘리사벳” 도 “성령이 충만하였다”하셨으니, 이렇게 성령이 충만한 부모의 자식은 태중에서도 성령이 충만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태중의 아기에게 성령 충만이 주어지면 어떻게 되는가? 할 때 세례요한은 건강하게 태어나서 독주를 마시지 않았고, 성별되게 크더니, 나종에 성인이 되어서는 유명한 복음 사역자가 되고, 속세에 물들지 않으며,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큰 자”라는 칭찬을 받다가 순교로 세상을 끝낸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세례요한의 그 경건한 생애가 바로 태중에서 부터의 성령 충만한 결과를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의 모범자적 생활을 세례요한에게서 찾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엘리사벳”과 “사가랴”가 함께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는데 이들은 부부요, 세례요한의 부모이며, 또 제사장의 가족이었습니다. 눅 1:41에 보시면 “엘리사벳이 요한을 잉태한지 여섯달 되었을 때에 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고, 나사렛에 사는 마리아(예수님의 모친)의 집에 찾아가서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또 그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일컫게 되며, 그의 나라가 무궁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눅 1:67~80에 보시면 “그의 남편 사가랴도 성령에 충만함을 입어 하나님의 구속 사업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취되는 것”을 찬양 하므로서 이 두 사람은 성령 충만의 결과로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달아 발표하고, 하나님의 구속 사업을 기뻐하는 찬양을 한 것입니다.
1) 이들은 어떻게 성령 충만함을 받았을까요?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성령 충만을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성령 충만의 방법이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이는 그들의 평소의 경건한 생활을 인정 하셨음일 것입니다. 사가랴의 가정은 제사장의 사명자로서 예수님 탄생하시는 시기까지 인내와 성실로 경건한 생활과 사명을 지킨 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부패하고 세속화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큰 책망을 받은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사가랴의 가정은 경건을 지켜왔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령 충만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3. 눅 4:1에서 “예수님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광야로 돌아와 40일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는데 예수님은 그 모든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셨다”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신 것은 인간생활의 모범을 보이시기 위함이었고, 인간이 당하는 시험을 인간이 이기는 방법으로 꼭 같이 대처하여 이기셨는데 이렇게 시험을 이기신 무기는 말씀과 성령 충만에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바로 진리의 말씀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물질의 시험, 명예의 시험, 세상영광의 3대 시험을 받으셨으니 이 3가지 시험은 인간 시험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물질에 유혹되고, 명예에 약해지며, 세상영광을 작게 여기지 않고 살면서 알게 모르게 신앙의 정도를 위반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의 빈약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이 충만하셨으므로 이 모든 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워 이기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충만하면 마귀의 범죄 유혹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셨을까? 에 대하여 예수님은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본래부터 충만한 은혜를 가지셨고, 또 받으셨다고 하셨습니다(요 1:14, 눅 4:18).
3) 그다음에 예수님은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가셨다”는 말씀이 눅 4:14에 기록되었고, 갈릴리 해변 가버나움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권세 있는 자와 같았다” 하신 것을 보면(막 1:22) 성령의 권능이 말씀 증언에 제일 먼저 역사하신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였다고 하셨습니다.
1) 행 4:8에서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①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고치고 “이 사람들이 고침을 받고 일어선 것은 예수님의 능력이라”하셨고, ② 그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성취로 오신 분이라 ③ 천하 인간 중에 예수님 외에는 구원자가 없다 ④ 예수님의 부활은 직접 보고 들은 것이므로 말하지 않을 수 없다하면서 담대하게 예수님과 복음을 전파한 것입니다(4:1~22).
2) 따라서 베드로의 성령 충만은 ①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과 ② 복음의 깨달음과 전파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이 사도적 특수은사라면 복음의 깨달음과 담력있는 전파는 오늘 우리들도 받을 수 있는 은혜요, 성령 충만의 결과인 것입니다.
3) 베드로가 어떻게 이런 은혜를 받았을까요? 여기서는 3가지 특징을 살필 수 있습니다. ① 그는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전폭적으로 따랐으며, ② 통곡하며 회개한 일이 있었고, ③ 다른 사도들과 함께 예수님의 분부에 따라 예루살렘의 어떤 다락방에서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므로 충만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전심을 기울여 주님을 따르고, 항상 자기를 살피며 철저하게 회개하고, 기도를 힘쓰시므로 충만한 은혜를 힘입으셔야 하며, 그 결과로써 진리의 깨달음을 받고 담대한 전도자가 되시며, 나가서는 순교도 감당할 각오를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5. 7집사와 스데반이 성령에 충만하였습니다. 행 6:5에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집사로 세웠습니다. 그중에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열심히 전도하였고, 또 전도 하다가 핍박을 받고, 돌에 맞아 쓰러질 때 역시 성령에 충만하여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 하였으며, 또 “자기를 죽이는 악한 자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 고 기도하면서 순교를 하였습니다.
1) 스데반에게서 나타난 성령의 충만은 ① 충분한 복음적 지식으로 증언하는 자가 되었고, ② 핍박을 감수하였으며, ③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바라 보았고, ④ 원수의 죄를 용서하였으며, ⑤ 순교의 제물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 충만의 결과를 스데반의 입장처럼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2) 스데반이 어떻게 성령의 충만을 받았을까요? 그가 개인적으로 특별한 방법을 썼는지는 알 수 없고 평소생활에 경건하면서 형제들과 함께 기도하여 받은 줄로 짐작됩니다.
6. 사울이 성령에 충만하여 전도의 훼방자를 굴복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가 바로 사울이 바울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행 13: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의 선교사로 발탁되어 처음 “바보”에 갔을 때 그곳의 총독 “서기오”가 바울과 바나바를 청하여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데, 그곳 박수 “엘루마”란 사람이 느닷없이 나타나서 총독으로 하여금 믿지 못하도록 훼방을 하였습니다. 이때에 바울은 성령이 충만하여 악독이 가득한 엘루마를 책망하되 “네가 얼마동안 소경이 될 것이라” 한즉 그가 즉시 소경이 되고 이로 인하여 총독 “서기오”는 “바울의 말을 믿었다”고 하였습니다.
1) 여기에서 바울의 성령충만의 결과는 핍박자를 능력으로 굴복시키고, 복음의 권위를 드러낸 것입니다.
2)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까? 할 때 ① 그가 개종하고 회개한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였고, ② 다음에 성령이 충만하여 선교에 성공하고 핍박을 이긴 것과, 범사에 본이 된 것은 그가 3년 동안 율법지식과 함께 더 연구하고, 연단을 받았으며, 특별기도한 사실이(갈 1:17) 성령 충만의 방법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③ 또 바울은 개종한 즉시 사명 생활을 하였고, 사명으로 헌신 할 때에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롬 14:8)라는 철두철미한 헌신의 자세를 취하였으니 이것이 성령 충만을 받는 원인이요 또 보존한 방법이 되었을 것입니다.
7. 마지막으로 “바나바”도 “성령이 충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행 11:14에서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이 충만하였는데 그때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였고, 그가 1년간 가르쳤을 때 비로소 안디옥 교회에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을 만한 교인이 생겼다”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1) 바나바의 성령 충만의 결과는 성경교육과 무리가 더하여짐과 참신한 교인의 생산이 이루어진 것이요,
2) 바나바의 성령 충만의 원인은 그가 율법학자인 입장에서 교육과 선교에 헌신했을 때 받아진 은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8. 행 10장에 나타난 고넬료 가족의 성령 충만은 성경에 “충만”이란 용어는 나타내지 않으셨으나 행 10:44~48의 내용이 오순절 당시와 거의 비슷하므로 성령의 세례, 즉 충만의 역사를 체험한 것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1) 고넬료 가족이 성령의 충만을 받은 데는 평소의 가족적 믿음의 합심, 경건한 생활, 구제, 규칙적 기도(행 10:1~2)가 그 원인이었고, 천사의 지시에 따라 베드로를 청하여 왔을 때에 ① 일가와 친구들을 모아 기다림(24절), ② 모범적인 겸손(25절), ③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모함(33,44절)이 충만한 은혜를 받게 한 것입니다.
9. 또 출 31:3에 보시면 “브사엘”과 “오홀리압”이 성령에 충만하여 재능을 갖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성전의 기명 만드는 일을 한 일도 있었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령의 충만은 오직 경건과 사명에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의 은사를 함부로 거론하지 마시고 오직 경건함과 사명생활에 예수님을 닮은 자가 되시므로 성령의 충만을 나타내셔야 할 것입니다.
20. 제 19 과 “영의 역사를 분별함에 대하여” (요일 4:1~3)
악령의 역사를 감지하고, 성령님의 역사를 바로 체험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위하여 “영의 역사를 분별함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1. 성령님은 자기의 영이 아닌 다른 영들을 사역자로 부리십니다.
1) 히 1:14에서 “천사들은 부리는 영이라”하셨고, 또 히 12:9에서 “하나님은 모든 영의 아버지라” 하셨으며, 또 계 22:6에서도 “영의 하나님”이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2)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에게도 개별적으로 “영”을 다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육과 영을 갖고 있으며(고후 7:1), 인간 자신이 성화의 은혜를 받았을 때 의인의 영도 되고(히 12:9), 그 의인의 영이 되기 전에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은 상태” 라고도 하셨습니다(롬 8:15).
3) 하나님은 자기가 직접 쓰시는 선한 영을 다스리기도 하시고, 때로는 악한 영을 쓰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계 1:4에서 “7영을 가지신 하나님”이란 말씀이 있고, 계 14:18에서는 “불을 다스리는 천사가 있다” 하셨으며, 그 외에도 “가브리엘”이나 “미가엘”같은 천사들이 다 하나님의 명을 받들고 섬기는 크고 작은 “영”인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악한 영도 쓰십니다. 삼상 16:14,19:9의 “사울에게 붙은 악신”이든지, 왕상 22:21~22의 “거짓말하는 영”, 왕하 19:7에 “풍문을 퍼뜨리는 영”, 삿 9:23의 “악한 영”, 딤전 4:1의 “미혹케 하는 영들”도 있고, 심지어 계 13:13에서 영물인 사탄은 사람 앞에서 불을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게 하는 이적과(고 11:14에서 사탄도 거짓 이적을 자행함) 계 16:14에서는 “이적으로 전쟁을 준비케 하는 귀신의 영”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일단 이렇게 많은 영과 영의 역사가 많으니까 주의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에게 역사하시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1) 성령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바람처럼 보이지 않으므로 다만 사람이 마음을 써서 몸을 움직이듯이 나타나는 사실로 배후의 역사를 알 수 있게 됩니다.
2) 그러니까 무엇이 성령님의 역사였느냐? 를 아는 것이 중요하지요. ① 내가 “신앙하는 사람으로 변화됬다”고 할 때 성령님은 거듭나게 하셨고 믿음도 주셨으며(요 16:13, 고전 12:9), 성화시키는 일을 하시므로(롬 15:16) 성령님이 신앙적, 인격적 변화에 역사하신 것을 알 수 있고, ② 따라서 자신이 성경을 깨닫고, 성경을 배우며, 성경에 이끌림을 받는 것이면 역시 성령님의 체험인 것입니다. 성령님이 진리사역을 하신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요 15:26, 딤후 3:15, 요 14:17,26,16:13). 오래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성경과 나와의 긴밀한 관계를 느끼지 못하는 분들이 계신데 꼭 자신에게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체험으로 성경에 이끌려 성경을 살피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③ 온유, 겸손 및 마음속에 성령의 열매로 호칭된 사랑이나 기쁨, 인내, 화평, 충성과 절제 등 좋은 마음을 가져 보려고 애쓰는 노력이 시도될 때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줄로 믿으셔야 하는 것이요(갈 5:22~23), ④ 은사소질이 많아지거나 교회의 직분이 발전하고, 그 직분에 따라 섬기는 일에 열매가 있으면 성령님이 역사하신 줄로 믿을 것이요(행 13:12,20:28), ⑤ 신앙의 보호를 받으며 역경 중에서도 감사한 마음이 생기면 성령님이 보혜사의 은총으로 역사하심인줄 믿고(요 14:16) 감사하실 일이요, ⑥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또는 사랑의 교제로 성도를 가까이 했을 때에 성령님이 교통하는 역사를 하신 줄 믿으실 것이요(고후 13:13), ⑦ 성령님은 “물같은 역사, 불같은 역사, 바람같은 역사, 기름같은 역사, 인침의 역사, 혀같은 역사를 하신다” 하셨으니 이런 상징적 일들이 진리와 함께 유익하게 실현되면 성령님의 역사인줄 믿을 것이요, ⑧ 회개하고(행 2:37, 고후 7:10), 치료하며, 건설적인 방도에 따라갈 때도 성령님의 인도인줄로 믿을 것입니다(고전 12:3). 지금까지 말씀 드린 것은 다 성경과 직접 부합되는 것이기 때문에 판단하기가 쉽습니다만,
3. 다음 몇 가지에 대하여는 항상 주의하여 판단하셔야 할 것입니다.
1) 성령체험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F.B.myer란 분은 “성령님이 나에게 능력 부어 주시는 체험을 했다. 그런 일이 있을 때 죽을 것 같았다” 하면서 이것을 성령 충만으로 표현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심장에 압박으로 오는 육체적 체험을 말하는 것인데, 이런 것은 성경이 입증하는 것이 아니어서 믿기 어려운 것이요(필자도 그런 느낌을 받은 일 있음),
2) 방언과 예언을 한 것이면 무조건 성령의 역사로 믿는 경향이 있으나(행 19:1~7) 여기에는 두 가지 함정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① 예언은 설교를 의미할 수도 있고, 말씀계시가 완성된 교회시대에는 새로운 계시가 있을 수 없으며, 또 외국어 실력을 의미할 수도 있음과 ② 유익하지 못한 잘못된 설교나 건덕을 방해하는 말로 남발될
경우가 있으며(고전 12:7), ③ 오늘날도 방언으로 말씀을 주시고, 예언으로 새로운 계시를 주신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것이요(고전 13:8), ④ 이 방언이 은사주의를 추구하는 세계인들에게도 호응을 얻는데 그것이 기독교의 종파를 넘어서 모슬렘교, 몰몬교, 에스키모인과 티벳, 중국의 이교도들에게도 같은 방언의 현상이 일어났는가? 하면, 시내산 근방에 있는 유대원주민, 배드윈족들도 종교의식중 하나로 자기들의 입장을 신비지경으로 끌고 올라가서 이상한 말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한길, 83년 11월, 16P). 그러니까 이교도의 방언과 기독교의 방언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기도 어렵고, 우리가 하는 것을 이방종교인도 할 때는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방언하는 분들은 합리성을 찾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성도가 육체의 욕심과 헛된 소욕에 얽매였을 때는 설령 그들의 신앙적 의식이 경건해 보여도 이는 성령님의 지도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갈 5:16에서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는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으며‧‧‧또 헛된 영광을 구하거나 그것으로 격동, 투기하지도 않는다” (갈 5:26)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4) 어떤 이가 계시를 받고 죽음의 위기에서 구출을 받았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 성도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① “현시대에는 계시를 주시지 않는다”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과 ②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의 죽음을 예고 받지 못하는데 왜 특정한 사람만 그런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을 할까? 하는 점과 ③ 하나님은 죽이는 것과 살리는 것을 임의로 주관하시므로(삼상 1:6) 죽고 사는 문제가 크게 이상할 것이 없다는 점과 ④ 행 21:11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시면 결박을 당한다”고 성령님이 빌립의 딸들을 통하여 말씀을 전달하니, 성도들이 바울을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만류하였으나 오히려 바울은 그들의 만류를 거절하고, “결박과 죽음을 각오하고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행 21:13) 한즉, 결국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다” 하였으니, 이런 경우에 바울에게 연민의 정을 보내는 도덕적 감화와 하나님의 섭리적 감화에 차이가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① 성경 말씀은 영의 역사가 많으니까 “영을 다 믿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② 그 영들이 “하나님의 지시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영인가, 아닌가?”를 살피라고 하셨습니다. 그 표준은 성경뿐임을 아셔야 합니다. ③ 어떤 사이비 종교인들이 93년 10월 28일 24시에 1초도 틀림없이 예수님이 공중 재림하신다고 하였는데 그 영의 역사와 주장이 과연 옳은 것인지 여러분들은 판단하셨을 것입니다. ④ 구세주의 육체적 초림을 시인하는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그것을 시인하지 않는 영은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사도요한 당시의 적그리스도가 주로 예수님의 복음을 믿지 않는 “유대주의자”들이 많은 것을 예로 들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은 적그리스도의 요소가 더 많다는 것을 아셔야 하고, ⑤ 적그리스도는 그 당시에 벌써 세상에 와서 미혹을 하고 있었다고 성경은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되 악령의 역사에 유혹되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21. 제 20 과 “성령 충만의 상태” (롬 8:26~27)
이 본문 말씀은 “성령님께서 성도의 연약을 도우시고 성도의 빌 바를 헤아려 대신 기도와 간구를 해 주신다(롬 8:26~27)” 하셨으니 성도가 성령님의 도움을 받으면 ① 연약하지 않게 되고, ② 기도가 부족하지 않으며, ③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음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이렇게 도와주시면 성도는 모든 면에 연약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충만하면 지식과 생활과 사명에 넉넉함이 있을 것이요, 또 행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1. 성령이 충만하면
1) 성경과의 관계가 원만해 집니다. 성도는 성경을 대할 때 믿고, 알고, 기쁨과 희망을 가지며, 지키는 것으로 관계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① “믿는다”는 것은 성경을 진리로 알고, 믿으며 일체 의심하지 않음을 뜻하고, ② “안다”는 것은 잘 풀어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며, ③ “기쁨과 희망을 가짐”은 성경을 즐거워하고, 사모하며, 바라는 것이고, ④ “지킨다”는 것은 성경대로 복종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활이 어느 면으로 성경과 일치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요,
2. 인격의 성숙성을 보이게 됩니다.
1) 그 이유는 성령님이 인격의 신이시니까 당연히 그렇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성도의 인격은 3가지 요소를 보유해야 하는데 ① 진실성과 ②교양성과, ③ 신앙성입니다. 만일 진실성 하나가 원만하지 못하면 다른 것은 다 있다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요, 진실성과 신앙성은 서로 결탁되는 것이기 때문에 진실하지 못한 사람은 신앙도 인정되거나 확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성이 교회적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라면 교양성은 사회적 관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시도하려면 좋은 인격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님이 충만하시면 인격의 성숙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과 이웃에 만족을 주고, 어떤 환경에서나 적응을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모든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순결을 유지해 나갈 것입니다.
1) 성령 충만한 사람이 “어떤 유혹에 넘어가서, 범죄 하였다” 하면 충만한 형편일 수 없겠지요. 위 본문 말씀에서 ① 성령님은 성도의 연약을 도우시니 연약하지 않을 것이요, ②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간구해 주실 것인즉, 기도 또한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2) 순결도 유지하도록 붙들어 주십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인격과 생활에 변화를 받고(행 9:17), 하나님을 더욱 순종하게 되어(행 5:29) 순결을 보존해 주시는 것입니다.
4.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무난하게 결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첫째가 사랑이요, 다음이 기쁨이며(예수님도 성령으로 기뻐하셨음 ; 눅 10:21), 그 다음이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이요, 그 다음이 충성과 온유와 절제인데 이 열매는 모두 인격표현에 나타나야 할 요소들이기 때문에 원만한 인격성(교양성)을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예수님의 마음과 생활을 많이 닮은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5. 은사를 통한 사명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전도, 기도, 봉사, 헌신은 다 충성의 은사입니다. 성도가 보통으로 자기의 신앙을 유지할 때는 성령이 충만하지 않아도 되지만 전도하거나 핍박과 싸우거나 충성, 봉사를 하려면 더 큰 힘을 가져야 합니다. F.B.myer란 선교사는 “자기 가족을 전도하는 것보다 많은 대중을 전도하는 것이 더 어렵고, 칼로 많은 것을 썰 때에는 적은 것을 썰 때보다 더 날카로워야 한다” 하므로 성도가 사명을 이행할 때에는 성령이 더 충만해야 할 것을 증언했다고 합니다. 요 3:34에서도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사람들은 성령을 한량없이 받은자” 라고 하셨습니다(행 13:4). 그래서 증언의 은사와 다양한 은사를 받아 헌신하는 상태가 곧 충만함이 되는 것입니다.
6. 사랑과 일치화합을 잘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 중에 첫째요, 엡 4:3에서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또 성령의 열매 중에 화평이 있고, 요일 4:13에서는 “사랑을 온전히 이룰 때에 성령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면 사랑의 실천은 물론 이웃과의 일치를 이루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7. 개인이 느끼는 행복의 감정이 충만하여 비밀한 만족을 누릴 것입니다. 성도가 믿음생활을 잘하여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가 깊음을 감지할수록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능력으로 그 성도의 심령을 지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당시에 성령 받은 사람들이 퍽 행복하였을 것입니다. 행복과 소망을 못 느끼는 성령 충만은 있을 수 없습니다. 행 2:의 오순절 당시의 사람들이나 행8:12,16의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행 19:1~7의 에베소 사람들은 다 성령의 세례를 받고, 믿음생활을 하던 과정에서 큰 영적행복을 느낀 것이었고, 행 10:44~에서 “고넬료의 가정에 초청 받은 식구들도 성령의 세례와 충만을 동시에 받으므로 행복을 느낀 것입니다.
이상의 7가지 방법으로 성령 충만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2. 제 21 과 “성령을 소멸치 말라” (살전 5:19)
위 본문에서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소멸치 말라”는 말씀은 “자기에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충만한 은혜를 지속하기 위하여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은혜를 주실 때는 그 은혜가 헛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고(고후 6:1), 또 은사를 주실 때는 역시 그 은사역할로 인하여 유익하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고전 12:7). 그런고로 은사를 활용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다시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칼을 받고도 그것을 쓰지 않으면 녹이 슬 것이고, 불이 붙을 때 나무를 계속 넣지 않으면 그 불은 꺼질 것이며, 육신도 활동을 안 하면 허약해지고, 정신도 역시 그렇듯이 성령님의 은혜도 항상 유지되도록 노력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을 소멸치 않는 방법일까요?
1. 성령 충만을 위하여 계속 노력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선 기도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눅 11:13).
2. 범죄를 삼가야 합니다. 죄는 성령님을 근심시키기 때문입니다(사 63:10).
3.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는 세속적 의욕을 멀리해야 합니다(갈 5:17,24, 요일 2:15).
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명에 힘써야 합니다(행 1:8,5:32, 갈 5:16)
5. 겸손을 유지해야 합니다.
1) 겸손할 때 은혜를 주시고(벧전 5:5), 교만할 때 끝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임을 꼭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벧전 5:6)하신 것이 그 말씀입니다. 나발이나(삼상 25:38) 사울왕이 교만하다가 버림 받은 사례가 있고(삼상 15:23), 성령 충만 하였다가 버림 받은 사례는 없습니다. 따라서 고후 13:7에서 바울에게 가시를 주신 이유를 깊이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성도가 교만하지 않으려면 자기의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고(갈 5:16~17), 자신을 날마다 죽이는 일에 성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고전 15:31). 교만은 자기중심이요, 자기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님의 은혜를 앞세워 일한다 하면서 교만하면 그것은 성령을 따름이 아닌 자신의 정욕을 따름임을 아셔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성령을 소멸치 않는 방법에 있어서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유혹을 피하여야 하되 범죄의 유혹과 나태의 유혹과 현실정욕의 유혹을 피해야 하고, 적극적인 방법으로는 경건과 순결보존을 위하여 최대한 힘쓰고, 하나님과의 교통을 활성화하며, 항상 사명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23. 제 22 과 “성령의 열매” (갈 5:22~23)
이 시간에는 “성령의 열매”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갈 5:25절의 말씀에서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할 것이라” 하셨으므로 성도가 그대로 시행하면 당연히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을 두 가지로 강조해 주셨으니 곧 “오직”이란 용어와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1) “오직”이란 말의 뜻은 “꼭”이란 뜻이니까 “다른 열매는 맺지 못해도 성령의 열매 만큼은 꼭 맺어야 된다”는 의미가 있고,
2) 또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는 말씀은 성경말씀 어디에도 성령의 9가지 열매를 금지하는 말씀이 없으니까 더욱 그 열매는 맺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복음의 말씀”을 씨앗으로, 또 “성도의 신앙 성장”을 나무가 자라는 것으로 비유하신 일이 있었습니다(마 13:38, 막 4:28). 그리고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 불에 던진다” 하셨고(마 3:8), “열매가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일”이 있었으니(마 21:19) 열매를 못 맺는 일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마 7:17).
3. 좋은 나무만 되면 좋은 열매는 저절로 맺어질 것입니다(마 12:33). 좋은 나무가 되는 방법이 무엇인가? 할 때, 우선 씨(종자)가 좋아야 되고, 밭이 좋아야 하며, 관리를 잘 해야 하고, 결실기를 맞아야만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의 신앙적 열매도
1) 복음적 신앙의 기초(칼빈주의 신학적 교리)가 든든해야 하며,
2) 밭이 좋아야 하는 것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으니, ① 성도의 진실 된 마음이요, ②교회의 교육과 생활바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옥토에 심으면 좋은 나무로 자랄 수 있듯이 성도의 신앙도 교회생활 바탕이 좋아야 합니다. 성도의 신앙은 그 교회의 방침과 교역자의 신앙사상을 닮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3) 관리가 좋아야 함은 말씀공급과 연단을 뜻하며,
4) 결실기를 맞이해야 한다는 것은 상당한 세월에 걸쳐 연단을 받고 성숙한 다음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곡식이 여물려면 적어도 몇 개월 농장에서 자라야 하고, 인삼을 수확하려면 6,7년의 춘하추동을 지내야 하듯이 성도가 상당 세월을 연단 받으면 하나님이 그 어간에 결실기를 주셔서 좋은 열매를 맺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4. 본문 말씀에서 성령의 열매는 9가지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먼저 본문 19절을 보시면 성령의 열매에 반대되는 “육체의 일들”을 15가지로 거론하셨습니다.
1) 본문에서 육체의 일 15가지를 지적하실 때는 “육체의 일들”이란 복수를 쓰셨고,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말씀하실 때는 9가지 열매인데도, “들”을 뺀 단수를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마 성령의 열매가 한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맺어지기 그렇게 하신 줄 압니다.
2) 육체의 열매는 사탄과 인간의 부패성 등이 합력하여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술수, 원수맺음, 분쟁, 시기, 분냄, 작당, 분립, 이단, 투기, 술수, 방탕 등의 열매를 맺기 때문에 복수를 사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5. 따라서 저희들은 오직 성령님의 은혜로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9가지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1) 사랑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근원자시요(요일 4:17), 예수님의 구속사업으로 사랑을 실천하여 모범을 보여 주신 분입니다(요 3:16). 고전 13:에서는 그 사랑의 가치와 방도를 설명해 주셨고, 성도가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곧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라”(요일 4:16, 요 15:5,10:38)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예수님, 진리) 안에 거하는 자”(요 18:37, 고후 6:7, 딤전 2:7)이나, 만일 사랑 안에 거하지 못하여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할 때는 그가 바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줄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요일 4:16).
2) 희락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희락이란 하나님을 기뻐하며, 신앙생활로 만족을 느끼고, 끝없는 소망으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고전 13:13).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니 그를 항상 기뻐할 수 밖에 없고, 하나님의 은혜는 죄사함과 자녀의 특권과 영생 등이며, 혹 성도에게 일시적인 고난을 주셨다 하여도 그것은 믿음의 연단으로 일시 주시는 것이니까(롬5:3) 오히려 인내로 감수하면서 즐겁게 견뎌야 합니다. 하나님과 같이 살면서 행복과 기쁨을 모른다고 해서야 어디 예수 믿는 보람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생명의 주이시오, 영원한 기업이신 것을 알 때에 그 기쁨은 멎을 날이 없을 것입니다.
3) 화평의 열매입니다. 성도는 결코 싸우고 다투어서는 안 됩니다. 의견을 내세울 일이 있을 때는 정중하게 한 두 마디 해 보다가 대립과 싸움으로 비화될듯하면 속히 중단하고 피해야 되며 위법된 일이 있으면 속히 합법을 따르므로 부조리를 피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마 5:9을 해석해 보면 “화평을 만드는 자라야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음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말로 대립되는 것이나 혈기나 교만이나 인색이나 고집이나 보복이나 원수 맺는 것이나 폭력은 결코 화평을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성도사이를 화평하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화평의 제물이 되시는 데는 수치와 고난과 저주를 감수하시면서 자신을 희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형제간에 불화된 일이 있으면 속히 사과하고 변상한 후 화해하여 화평의 열매를 맺으셔야 할 것입니다.
4) 인내의 열매입니다. 본문에는 “오래 참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인내”란 원문은 “후포모네(ύπομονὴ)”이고, “참는다”는 말은 “마크로두미아(μακροθυμἰα)”입니다. “마크로두미아”는 “확고,불변하게 견딘다”는 뜻입니다. ① 자기의 은혜로운 모습을 어떤 상황에서라도 변하지 않도록 견디는 것입니다. 울릉도에 가면 독도가 있고, 부산 앞바다에 가면 오륙도가 있는데 그것이 태풍이 분다고 하여 변합니까? 반석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예수님을 반석으로 비유한 것입니다(마 16:18,21:42,44). ② 신앙생활을 체험해 보면 가장 큰 소득을 얻는 것이 인내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입에 쓴 약이라도 참고 오래 먹으면 효험을 보듯이 육체의 고통도 잘 참으면 건강에 좋고, 정신적인 고통도 잘 참으면 믿음과 담력이 자라며, 억울한 일을 잘 참으면 나종에 받는 댓가가 더 크고, 말과 혈기를 참으면 금방 덕 있는 사람이 되어 인내 그 자체가 “성령의 은사”라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인내는 오래하고 모든 것을 참으라”(고전 13:4)하셨으며 예수님은 돌아가시기까지 참으셨으니까 저희들도 죽음을 각오하고 인내할 수 있는 노력을 하셔야하겠습니다.
5) 자비란 “크레스토테스(χρεστότηs)”로 “약점 있는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인 것입니다. “사랑”이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면, 자비는 약점 있는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 병든자, 무식한 자, 소외당한 자를 불쌍히 여겨서 동정하며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6) 양선은 “아가도수네(ὰγαθωσὐνη)”란 말로서 “냉정하지 않고 친절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누구는 말 붙이기가 어렵다”, “사람이 문문하지 않다”, “무섭고 무뚝뚝하다”하면 이 사람이 곧 양선미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양선은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해도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지 않을 만큼 이해의 폭이 넓고 친절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7) 충성하는 것입니다. 충성이란 “피스티스(πἰστὶs)”는 진실, 믿음, 봉사라는 뜻도 있습니다. 성도의 충성대상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고, 성실하게 복종하며, 진실하게 경외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충성하고 그의 몸된 교회에 충성하며, 또 하나님이 주신 직분에 충성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요, 또 그것이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8) 온유는 “프라우테스(πραύτεs)”로서 “신경질, 혈기, 포악성이 없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하셨는데, 이것이 즉 “온유하며”하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온유는 마치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양의 성품(사 53:7)이라고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9) 절제하는 것입니다. “에그크라테이아(ἐγκρἁτεια)”로서 영어로는 selfcontrol “자기를 제어하는 것”이며 자기분수에 알맞게 사는 것입니다. 자기분수에 알맞게 말과 행동을 나타내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절제는 진실과도 관계가 있고 균형 있는 생활에도 관계가 있습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신용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모든 것에 낭비도 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절제가 없으면 이상한 사람으로 여김을 받아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결론적으로 성령의 9가지 열매는 모두가 육체적이나 현실적인 것이 아니고, 오로지 정신적이며, 활동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열매는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육체적인 안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요, 오직 “정신적인 바른 자세에 관한 것”과 “선한 행동에 관한 것”임을 유의하셔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도덕적으로 성도의 올바른 인격과 생활을 지도하시는데 우선적인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4. 제 23 과 “성령 충만과 신앙성숙” (벧후 3:18)
성령 충만과 신앙성숙과의 관계를 살피려고 합니다.
1. 우선 본문 말씀의 내용을 설명 드리면
1) 이 말씀은 베드로사도의 축복입니다.
2) 축복의 내용은 신앙의 성숙으로 영광이 하나님께 영원히 돌려지기를 축복한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믿음이 자라서 영광을 많이 돌리는 축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3) 신앙이 성장하고 영광을 많이 돌리는 복은 은혜와 지식으로 주어지는데 은혜는 십자가의 공로를 베푸신 예수님으로부터 오고, 저를 아는 지식은 진리를 가르치고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4)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란다”는 말씀은 성령님의 가르치시는 사역을 통해서 믿음을 성장케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고로 성령님은 성도의 믿음을 성장케 하는 역할을 하시는 것이고, 이 은혜를 충만하게 받으면 역시 신앙이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성령이 충만하다”는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까요? 앞에서 배운 것을 기억하시면서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성령님이 전체적(전인격)으로 충만하게 역사 하시는 것과 부분적으로 강하게 역사하시는 것을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① 성령님이 전체적으로 역사하시면 그것은 명실공히 충만이요, 그는 예수님의 인격을 충만히 닮은 완전에 가까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② 그러나 성령님이 부분적으로 강하게 역사하실 때는 이 은사가 전인격에 충만하여진 것이 아니고, 부분적으로만 역사하셨기 때문에 여기에는 충만이란 용어를 쓰는 것보다 “그 일에 대하여 강하게 역사하셨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넉넉지 못한 상태에서 한 두 가지의 은사적 소질이 있다고 하여 그것을 충만한 것으로 표현하면 안 될 것입니다.
2)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은 충만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할 때, 그 당시로서는 충만하게 역사하신 것으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 당시 그 충만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① 15개국 이상의 사람들이 다 함께 받았고(4절), ② 그들이 다 바람, 불, 혀, 방언까지 가시적인 체험을 하였으며, ③ 그 결과로서 전도, 회개, 말씀교육, 하루에 3,000명씩 결심되는 전도, 합심회집, 친교, 찬미, 물질통용, 재산헌납, 순교까지로 이어졌으니 이런 역사를 충만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충만의 역사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약속하신 성령님이 약속성취로 강림하실 때만 가시적으로 강하게 역사하셨고, 또 그 당시에 충만하였던 역사와 상태가 같은 상태로 100년, 200년 계속 된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과 그 당시의 특별한 역사를 단회적이라 하는 것이고, 그 역사가 같은 분량과 능력으로 지속되지 않기 때문에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계속 권면해 주신 것입니다.
3) 성령이 충만하면 신앙이 성숙되어진 것인가? 할 때에 ① 성령 충만의 방법이 오순절 때처럼 전인격에 역사하신 것이라면 신앙성숙을 이룩한 것이 확실합니다. ② 그러나 그 충만이 전인격에 역사하신 것이 아니고, 어떤 부분 사역을 위하여 강하게 역사하신 것은 성숙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처럼 은혜와 진리 안에서 자라가려면 상당한 시간 안에서 지식과 연단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암산을 잘하고, 산수를 잘 푼다고 하여 어른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릴 때에 신동으로 알려진 아이가 커서 다 과학자가 되고, 발명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 성령 충만과 신앙성숙은 성령님의 역사하시는 성격이 전인격이냐, 부분적이냐? 에 따라 성숙 여부를 설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성령 충만과 은사와의 관계는 어떤가? ① 고전 12:9에서 은사는 여러 가지이나 같은 성령님이 주시는데 ② 은사는 소질로도 주시고, 직분으로도 주십니다. 봉사능력이 있는 분에게 집사를, 교육소질이 있는 분에게 교사를, 다스리는 지혜가 있는 분에게 장로를, 권면 소질이 있는 분에게 권사를, 교육, 통치, 권면을 다 잘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목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목사는 성경지식이 많고 가르치며 권면하는 소질도 있고, 다스리는 법도 많이 알기 때문에 충만성이 있는 것 같으나 그 외에 집사님들이 할 수 있는 봉사력이 없다면 충만하다고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④ 그러니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충만의 뜻은 “은사를 받은 대로 넉넉하게 일하라”는 뜻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십니다. 성도가 은사가 없으면 다시 말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각자에게 일반은혜로 믿음생활에 역사하셨고, 또 특별은혜로 은사주심에 역사 하셨으니까 성도 각자는 그 내용과 분량을 잘 아셔서 거기에 집중하는 노력을 하시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이 은사에 나타난 것과 전인격의 생활에 나타난 것을 구별하여 전자는 부분 충만, 후자는 더 큰 충만으로 보시는 것일 좋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의 기본자세 확보가 더 중요하고, 그 다음에 은사의 활동으로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5) 기적을 나타내야만 충만한 것인가? 할 때 그렇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이나 바울사도는 성령이 충만한 분이었지만 세례요한은 기적을 나타낸 일이 없다(요 10:41)하셨고, 바울사도는 전도초기에 손수건을 흔들어 병자를 고치고도 자신은 질병에 매여 있었으며(고후 12:8, 육체가시), 또 죽은 유두고를 살렸으면서도 “에바브라”의 병은 속히 낫게 못하였고(빌 2:27) 독사에게 물려 해를 당하지 않았으면서도 “드로비모”의 병은 즉시 고쳐주지 못했습니다(딤후 4:20). 실라와 함께 옥에서 나오는 기적을 체험한 때도 있었으나(행 16:) 로마 감옥에서는 나오시지 못하고 순교를 하셨으니 기적은 하나님이 자기 주권으로 역사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성도의 성령 충만과는 관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훌륭한 신앙의 지도자들이 기적을 행하지 못한 채 자기의 육신까지 연약에 속박되다가 세상을 떠난 분들도 많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6) 초대교회 당시의 이적 현상을 성령 충만으로 여기는 것은 그 사역이 사도적 은혜로 특수하였기 때문이요(신학지남 38권 10P), 그 당시 그런 이적이 있었어도 이적은 이적으로 끝났을 뿐 성도의 주관적 상태까지 계속적으로 변화를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 시대에 이적 나타난 것이나, 자신이 이적을 체험한 것을 성령 충만으로 주장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령 충만은 일시적으로 임한 성령의 세례도 아니요, 한 두 가지 은사의 실천도 아니며, 또 기적을 행한 것도 아닌 오직 전인격에 역사하여 그리스도의 인격을 최대한 닮음에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는 은혜를 승화시키되 ① 우선 성도된 은혜를 받았으니까 최대한 성도답게 살아야 할 것이요, ② 각자의 받은 은사가 있으니까 그 은사를 최대한 활용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처럼 성도답게 사느냐? 은사활용을 잘 하느냐?에 따라 성령 충만과 함께 신앙성숙을 이룩할 수 있는 것입니다.
25. 제 24 과 “성령님이 주시는 은사들” (고전 12:1~11,28~31,13:8)
이 시간에는 “성령님이 주시는 은사들”이란 제목으로 본문말씀을 강론하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구분하면 ① 1절에서는 “신령한 것을 알도록 노력하라”하셨고, ② 2,3절에서는 “불신앙적 우상숭배에서 신령한 것을 아는 형편으로 돌아오려면 반드시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야 한다” 하셨으며, ③ 4절~11절까지 말씀에서는 은사의 종류와 은사를 주시는 분과 은사 주시는 목적과 은사 주시는 대상과 방법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신령한 것을 알도록 노력하라”고 하셨습니다. 1절 말씀에서 “신령한 것에 대하여 모르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씀은 “알아야 한다”는 뜻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또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도 알아야 하는데 문제는 “신령한 것”이 무엇이며, 또 어떻게 아느냐? 가 문제인 것입니다.
1) 신령한 것이란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의 은총과 함께 받는 영원한 축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는 은혜를 힘입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통하여 받는 은혜가 많은데 예를 들면 선택의 은혜, 구속의 은혜, 하나님의 자녀 되는 은혜, 영생의 은혜 같은 것들입니다. 따라서 “신령한 것”은 불신자들이 받지 못하는 것이고, 성도들에게는 무한히 누리는 축복이며, 세속에 반대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속”이란 말을 할 때 세속은 무조건 죄란 뜻이 아닙니다. 세속에 치우침 때문에 범죄하거나 신령한 은혜를 이루어나가지 못할 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세속이란 육체와 관련된 현실적이고, 유한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신령한 복은 영원히 누리는 것인 만큼 그 무한한 진가를 아셔서 크게 사모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요 4:23을 보시면 “하나님”을 신령한 분이라 하셨고, 고전 2:15에 보시면 “은혜가 충만한 성도”를 신령한 사람이라 하셨으며, 벧전 2:2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령한 젖”이라 하셨고, 고전2:13에서는 “성령님의 역사”를 신령한 것이라, 또 성령의 역사로 나타내 주시는 일을 신령한 은사(롬 1:11) 또는 신령한 일(고전 2:13)이라고 하셨습니다.
2) 이 신령한 것을 어떻게 알며 경험할 수 있는가? 할 때에 그것은 “오직 성령님의 역사로만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2절을 보시면 “너희가 믿지 않던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끌려가며 거기 절하였는데 그 생활을 돌이켜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고백하게 된 것은 오직 성령님의 역사로만 가능하며 성령님의 역사는 결코 예수님을 저주하는 대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고 하시므로, 신령한 예수님을 알게 하는 그 시작과 전체가 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된다고 하셨습니다. 엡 2:1에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는 말씀도 역시 성령님의 역사로 구원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며, 믿음의 싹이 나는 것이나(막 4:28) 신앙을 고백하는 것도 역시 성령님께서 하신 것이므로(마 16:17, 고전 12:3) 성도는 자신에게 믿음이 있는 것을 깨달을 때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한 줄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생활 자체가 성령님의 간섭하심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성령님이 은사를 주심에 대하여 상고하겠습니다.
1) 먼저 은혜와 은사의 구별을 말씀드리면 ① 은혜는 하나님이 거져 주시는 모든 축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거져 주신 복이 많습니다. 만물, 독생자 예수님, 성령님과 성경말씀도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믿는 성도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은혜는 성도에게만 국한할 때 보편적으로 주시는 전체적 복을 의미하는 것이고, ② 은사도 역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니까 은혜에 속하지만 성도 개개인에게 다 주시지 않고, 사명을 이루게 하기 위하여 특별한 성도에게 주시는 재질과 능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재질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 신령한 재질로 일관되는 말씀, 기도, 전도의 은사 같은 것이 있고, ㉡ 일반적 재질인 지식, 건강, 기술, 물질 등으로 주셔서 신령한 일에 도움을 주는 은사입니다. 예를 들면 브살엘과 오홀리압이 성령의 충만으로 기명 만드는 기술이 있었으니 이런 것은 세속적 지혜와 능력으로 시작하여 신령한 목적의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출 35:35). 또 병고침의 은사같은 것도 초자연적으로 주시는 것이면 신령한 은혜에 속하고, 일반 의료기술로 주신 것이면 일반은총에 속하지만 그 결과는 다 육체의 병을 고침에 있는 것입니다.
2) 이 은사를 성령님이 단독으로 주시는 것인가? 할 때 본문 4~6절을 보시면 “같은 성령, 같은 주님, 같은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은사는 성령님이 주시고, 직임은 예수님이 주셨으며, 역사는 하나님이 하셨다고 표현할지라도 다 삼위의 하나님이 하시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은 은사의 재질과 거기에 따른 직분을 주시고, 또 그 직분을 이행할 때도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 유기적으로 시행하신다고 믿으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삼위의 하나님이 일체이시기 때문입니다.
3) 은사의 종류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① 지혜의 말씀이니 이 지혜의 말씀은 성도가 학문을 하지 않았어도 자기의 사색과 경험을 통하여 인간에게 유익을 주는 방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 지으면 벌을 받는다”, “죄 지은 인간이 죄사함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만물을 보니 하나님의 존재를 넉넉하게 믿겠더라‧‧‧” 이런 것이 지혜로운 말들입니다. 한부선 선교사님은 지혜로운 말에 대하여 설명하시기를 노회나 총회 같은 회의석상에서 다툼이 심해지고, 해결을 보지 못할때 한 회원의 발언으로 문제의 돌파구를 찾았다면 그 말이 곧 “지혜의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부모님이 유산을 남겨놓고 돌아가셨을 때 아들, 딸, 형제들이 모여서 서로 재산을 많이 얻으려고 다툼을 벌일 때 가장 못 배운 동생이 말하기를 “나는 건강해서 일하면 먹고 살수 있으므로 유산을 안받아도 좋으니 형님들끼리 나누어가지세요” 했을 때 그것이야 말로 지혜로운 말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② 지식의 말씀이니 이것은 학문터득을 통하여 아는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혜도 성령님이 주시되 당사자의 사고와 경험에서 산출되는 것이고, 지식은 다른 사람의 학문을 배워 터득한 것으로 그 내용의 깊이가 더 자세하고, 주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③ 믿음의 은사이니 이 은사의 믿음은 고백하는 믿음(구원받는 믿음)을 뜻함이 아니고, 큰 일을 성취할 수 있는 담력과 신뢰성 있는 용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이 큰 믿음으로 소원을 성취한 것이나(마 15:28) “믿으면 능치 못함이 없다”(막 9:23)는 말씀이 그 의미를 가리킨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사역에 큰 쓰임을 받아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롬 1:17). ④ 병 고치는 은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병고치는 처방의 은사로서 의술을 이용하게 하시는 것과 기적에 의한 것으로 나누어 역사하셨습니다. 현재는 의술로 인한 처방이 점차 발전하고 있고, 기적에 의한 병고침의 은사는 초대교회 당시에 역사하신 기적과는 달라서 “성도가 병자를 위하여 기도하면,점차적으로 낫게 하시는 보통 이적으로 역사하신다”고 칼빈주의 신학자는 그 입장을 표명하였습니다. 그러면 기적을 선전하거나 추구하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왜 기적의 차이가 사도시대보다 달라졌으며 어떻게 차이가 난다는 것이냐? 고 질문 할 것입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초대교회 당시에는 사도가 계셨고 그 사도들에게 기독교의 기초를 수립하게 하시기 위하여 특별기적을 주셨지만 오늘날은 이미 닦아진 기초위에서 신앙생활을 할 뿐 아니라 사도직 자체가 없는 시대이니까 사도와 함께 특별기적이 중지된 것이요, 또 그 당시 기적의 특수성을 지적한다면 사도의 기적은 모든 사람의 병, 모든 종류의 병을 고치셨으되 즉각적으로 고치고 아프지 않게 고쳤으며, 재발하지 않았고, 또 죽은 자까지 살린 6가지 특징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나타나는 기적은 이 6가지에 해당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성도가 병자를 위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점차적으로 낫게 하시는 보통이적”이라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꼭 그렇게 믿고 병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약 5:14~15). ⑤ 능력을 행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능력이 무슨 능력입니까? 산을 옮기는 능력입니까?(마 17:20) 바다를 가르는 능력입니까? 그런 능력이 아니고, 죄를 이기고, 핍박을 이기며 어려운 책임을 감당해 나가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큰 예배당 지을 능력이 없어서 못 짓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큰 교회를 다스릴 능력이 없어서 다른 이에게 의존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능력이란 어려운 일을 감당하는 힘입니다. 죄의 유혹, 핍박의 역사는 이기기에 힘든 일이고, 또 큰 교회로 발전시키는 일, 예배당을 짓는 일, 교회의 싸움과 무질서를 해결 하는 일등이 특별한 능력에 의하여 해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능력은 일종의 지도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⑥ 예언의 은사입니다. 이 예언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미래를 예고하는 예언이고(행 21:9~11),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예언입니다(딤전 4:14). 그런데 이 두 가지 예언 중에 미래를 예고하는 예언은 성경이 완성되고(히 1:1, 유 3) 말씀이 충족하게 주어짐으로(요 21:25) 더 이상 필요가 없기 때문에 고전 13:8의 말씀을 따라 폐하여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재의 예언은 성경을 가르치는 일뿐임을 아셔야 합니다. 고전 13:8에서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예언과 방언과 지식이 언제 폐하고 그치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음 9절을 보시면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랑은 현실과 천국에서 영원히 존속되지만 예언과 방언과 지식은 천국에서는 필요 없으니까 그때에 폐하여 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온전한 곳이요, 모든 것을 밝히 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 또 온전한 것이 있으니 그것이 곧 성경입니다. 고린도교회 당시는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않은 때여서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했지만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온전한 것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예언이 폐하여졌다고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언이 그치는 것도 온전한 것, 즉 의사전달이 확보되고 말씀계시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확실해지면 역시 필요하지 않으므로 그칠 수 있는 것입니다. ⑦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 7:22, 계 2:2등에 보시면 거짓자들이 기적과 교훈을 들고 나타납니다. 그래서 요일 4:1에서 “그들의 영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아닌지를 시험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이므로 하나님이 사도들에게 영을 분별하는 특별한 영감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오직 성경의 표준에 비추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영을 받아 역사한다”는 사람의 교훈과 행위가 성경에 맞지 않으면 잘못된 것인 줄 알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님들 중에는 감정이 앞서고, 지식은 뒤서는 분들이 계셔서 성경으로 대조해 보지도 않고, 좋은듯 싶으면 무조건 따라가는 경우가 많지요.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그래서 늘 성경적인가? 를 분별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⑧ 각종 방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방언은 막 16:18에서 “있을 것이라”고 예언까지 하셨는데 행 2:에서부터 외국어 방언의 기적이 나타났고 고전 14:2에서는 하나님과 비밀을 말하는 방언으로도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자는 선교목적이었고, 후자는 개인기도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고전 13:8에서 “방언도 그칠 때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언제 그치는가?”에 대하여는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방언을 주시게 된 목적이 성취되면 그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기적은 필요에 따라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 중 농사를 못 지을 때는 만나를 주셨으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날 만나가 그쳤다고 하신 것입니다(수 5:12). 그러니까 선교목적에 기적의 방언이 필요하지 않으면 그치는 것이고, 또 기도하는 성도가 기도하는 방도에 방언이 필요 없으면 그치는 은사요, 또 이 방언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기도자 사이에 개인적 관계요, 다른 이에게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므로 개인기도의 수단으로 필요할 때 주셨던 것입니다. ⑨ 통역하는 은사인데 우선 외국어 증언을 통역할 수도 있고, 개인기도에서 나타나는 방언은 그 당사자에게만 통역이 필요한 것입니다. 방언기도는 하나님과 자기와의 비밀대화인즉 자신은 그 내용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 사람의 성도가 다 방언 기도를 했을 때 통역의 은사까지 받았으면 다른 이의 통역을 받을 필요가 없지만 각자가 방언기도만 하고 그 내용을 모르면 마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통역 은사를 받은 성도가 있으면, 방언 기도자 3명을 앉혀놓고 한사람, 한사람, 방언기도에 뒤따라서 그 내용을 통역하여 그 기도자에게 알려주는 것이 통역 은사의 목적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방언 통역에는 두 가지 큰 문제점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사도들이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받았으니까 분별이 가능했지만 오늘은 어떤 이가 방언을 하였거나 통역을 했을 때 성경으로 판단하지 않고는 그 진위를 가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영을 분별하는 은사가 교회시대에는 성경이외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방언통역의 내용이 성경의 교훈과 다르다면 그 방언이나 통역은 성경적이 아닌 것입니다. 방언해석은 하나님의 말씀인즉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표준을 위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와 관련한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의 성도들이 방언을 많이 하면서 “목사님은 방언을 못하므로 신령하지 않으니 나가라”는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목사가 “방언의 은사를 받던지, 나가던지 하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몹시 답답하게 여기던차, 임기응변책으로 “나도 방언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교인들이 시험해 보겠다고 하면서 목사 앞에 와서 방언을 지껄이며 통역을 해보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목사는 되는대로 말을 만들어서 “주여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오니 교회에 충성치 못한 죄를 용서해 주소서”라는 뜻이라고 하였더니 “그 통역이 맞았다”고 하면서 나가지 말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는 얼마 후에 그 교회를 떠나서 회개하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한가지 예는 유명한 칼빈주의 신학자가 당시에 방언통역의 은사를 받았다고 자랑하는 사람에게 “나도 방언을 하니 통역을 해보라” 하고 “아우토스 갈 에가페센 호 데오스 톤 코스모, 호스테 톤 후이온 톤 모노게네, 히나 파스 호 피스튜온, 에이스 아우톤 메 아폴레타이 알에케 조엔 아이오니온”이란 방언을 하고 통역을 해 보라 하였더니 그는 요 3:16을 말하지 않고 엉뚱한 다른 내용을 통역하므로 거짓성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대구에서도 어떤 목사를 시험하여 거짓 통역을 드러낸 일이 있다고 하니 방언과 통역의 옳고 그른 분별을 하기가 어려우므로 가급적 삼가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3.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7절 말씀에서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과 성도의 은혜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서만 모든 은사가 시행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은사의 진정한 평가는 상당한 역사가 지난 후에 평가 되어야 할 것도 있을 것입니다.
4. 은사 주시는 대상은 “어떤 이에게 또는 다른 이에게” 주시는 것이므로 전체적일 수 없습니다. 고전 12:30을 보시면 “다 사도이겠느냐, 다 병고치는 은사를 받은 자이겠느냐, 다 방언하는 자이겠느냐” 하시므로 은사는 특정인에게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받은 은사를 너도 받아야 한다”는 원칙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타인의 은사를 모방할 필요도 없고, 자기의 은사만 귀한 듯이 자랑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사를 어떤 이에게만 주시되 받는 이의 뜻대로 주신 것이 아니고, “주시는 자의 뜻대로 주신다”고 1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고로 혹 일치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원하는 자의 소원대로 받는 줄 아시거나 받아진 것처럼 생각하셔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고전 12:11) 하신 말씀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성도는 받은 은사에 만족하며 자신의 은사를 최대한 활용하여 영광과 유익을 돌리는 데만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특별한 목적을 위한 은사는 욕심으로 받으려 해서도 안되며 구하는 대로 받는 것인 줄로 아셔도 안 될 것입니다(약 4:3).
1. 은사란 용어의 뜻
1) “카리마스(Χἀρισμα)”로서 “하나님이 주신 초자연적 기능”을 의미하며, 또 “도시스(δόσιs,약1:17)”, “도레아(δωρεἀ, 고후 9:15, 히 6:4)”로 기록된 곳도 있습니다.
2) 이 말이 사회적 용어로 쓰일 때는 “선천적 재질” 또는 “비합리적 권위”란 뜻으로 지도자의 역량을 점검할 때 쓰인다고 합니다.
2. 은사와 은혜의 차이
1) 은혜는 하나님이 거져 주시는 선물을 총칭하는 뜻이고,
2) 은사란 하나님이 특정인에게 신령한 목적 성취를 위하여 주시는 재질을 의미합니다.
3. 은사에 대한 말씀들을 발췌해 보면
1) 약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들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은사 주시는 하나님)
2) 렘 31:12 “여호와의 은사 곧 곡식과 새포도주와‧‧‧어린양의 떼와 소의 떼에 모일 것이라”(은사가 물질복으로)
3) 고후 9:15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은사를 감사함)
4) 히 6:4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신령한 것으로 맛만 보이심)
(이상의 은사는 “카리스마”가 아닌 다른 용어이며, 이하에 나타난 은사는 모두 “카리스마”로 표시된 것임)
5) 롬 5:15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않으니”(구속의 은혜를 표현하심)
6) 롬 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나니”(선택을 의미함)
7) 롬 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은사는 은혜로 주시고, 각각 다르게 주심)
8) 고전 1:7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그리스도의 나타내심을 기다림이라”(은사에 부족 없기를 원하심)
9) 고전 7:7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은사에 각각 특색이 있음)
10)고전 12: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한 성령님이 여러 가지 은사에 역사하심)
11)고전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은사를 사모하려면 더욱 큰 은사인 사랑에 집착하라는 뜻)
12)고후 1:11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감사하게 하려함이라”(많은 사람의 기도로 전도자들이 신령한 은사를 받음)
13)딤전 4: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회에서‧‧‧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이 은사는 임직시에 설교로 깨달은 지식을 뜻함)
14)딤전 1:6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역시 임직시에 설교로 깨달은 사명지식을 뜻함)
15)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받은 은사를 최대한 활용할 것을 교훈하심)
16)고전 12: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즉 은사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은사 활용은 오직 유익있도록)
17) 고전12:8~11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믿음을, 병고치는 은사를, 능력 행함을, 예언함을, 영들 분별함을, 각종 방언 말함을, 방언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은사 주시는 분과 역사하시는 분은 성령님, 은사의 종류는 9가지, 은사 주는 대상은 그 뜻대로 각각 다르게 주신다는 뜻)
18)고전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고치는 은사와, 그 다음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하는 것이라”(은사에는 직분은사가 있고, 순위가 있으며, 사도, 선지자, 교사는 교육적 은사, 능력은 목적 성취의 은사, 서로 돕는 것은 봉사의 은사, 다스리는 것은 치리의 은사, 각종 방언은 복음전파의 은사임. 가르치는 은사가 앞에 있음)
4. 현시대에 주시는 직분과 은사의 소질들
1) 직분 : 목사(엡 4:11), 교사(엡 4:11), 장로(딤전 5:17), 감독(목사, 장로 ; 딤전 3:1), 집사(딤전 2:8), 전도인(권사 ; 딤후 4:5, 행 4:36)이며,
2) 은사의 소질로는 복음전파에 관한 소질(전도), 교육에 관한 소질(교육), 권위에 관한 소질(심방), 다스림 및 기도, 봉사, 치료에 관한 소질 등이 있음
3) 지혜는 다스리는 장로에게, 지식은 가르치는 교사에게, 믿음은 순종으로 섬기는 자에게, 병고침은 안위자에게, 능력은 통솔자에게, 서로 돕는 것은 집사에게, 예언은 설교자에게, 방언통역은 전도자에게, 적당하게 주심.
5. 하나님은 일곱별(은사 받은 사역자들)을 오른손에 잡으시고 일곱 금촉대(지상의 모든교회) 사이를 두루 왕래하시면서 그 교회 성격에 따라 합당한 사역자를 보내십니다(계 2:1).
결론적으로 성도는 ① 자기 은사에 만족하며 그 은사를 최대한 활용하고 ② 다른 이의 은사를 존경하되 비방하거나 시기하거나 탐하거나 모방하지 말 것이며 ③ 여러 사람이 받은 다양한 은사를 고루 조합하여 건전한 신앙으로 균형이 잡히도록 노력하시고 ④ 최고 지식의 은사는 성경교육의 은사이며 ⑤ 최고 실천의 은사는 사랑의 은사임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의 기술과 재료로 집을 짓는 것처럼 여러 가지 은사를 잘 조합하여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7. 제 26 과 “성령님의 불같은 역사” (눅 12:49)
1. 성경에는 성령님을 불로 상징하여 나타내신 말씀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①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마 3:11, 눅 3:16) ② 불을 땅에 던지러 오셨다(눅 12:49) ③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보였다(행 2:3) ④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라(히 12:29)는 말씀들입니다.
2. “하나님이 소멸하는 불”이시고, 성령님이 불같이 역사하시면 성령님의 본질이 불이란 뜻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다만 성령님이 “불같이 역사 하신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1) 어떤 이는 성령의 은혜로 육체에 뜨거움을 체험했다고도 하고, 심지어는 회개 할 때 “죄 타는 냄새가 난다”고도 선전한 일이 있으며, 찬송가 173장의 가사에는 “불길같은 성신이여‧‧‧지금 강림 하셔서‧‧‧불로 불로 충만하게 합소서”하는 찬송을 부를 때 성령님이 과연 불로 임재하시는 것인가? 하는 의혹을 갖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2) 그러나 성령님은 영으로 존재하시는 신이시고, 또 성도의 마음 속에 내주하여 계신 상태에서 능력 있게 역사하여 주시는 것이 충만에 이르는 과정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을 불로 오해하지 말아야 하며 충만의 은혜를 사모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사람들을 착각하게 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3. 그러면 예수님이 “불로 세례를 주신다”, 또 “불을 던지신다” 하신 의미가 무엇일까요?
1) 이것은 성령님의 불같은 역사로 심령에 변화를 주시되 마음을 뜨겁게 하시고(눅 24:32), 죄를 깨끗케 하여 주시는 은혜를 실감 있게 깨닫도록 표현하신 것이며,
2) “던지신다”는 표현은 폭탄적 강한 역사, 즉 능력을 연상케 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오순절 당시 성령님의 역사는 그런 상태로 나타난 것이 사실입니다(행 2:1~2).
3) “불로 세례를 주신다”는 뜻도 역시 믿음으로 인한 심령의 뜨거운 회개와 변화를 강하게 일으켜 주실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4. “불의 혀같이 갈라짐”과 “소멸하는 불”이란 뜻이 무엇일까요?
1) 행 2:3의 “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은 성령님께서 말씀의 은사 주실 것을 기적의 불꽃으로 보여주신 것인데, 이는 심령을 뜨겁게 하는 불꽃이 바람을 타면 강하게 번져 나가는 것처럼 말씀전파가 그렇게 확산 될 것임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2) 히 12:29의 “소멸하는 불이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본질이 “불”이라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불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셨듯이 세상을 불태워 심판하실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5. 결론적으로 성령님의 불같은 사역이란 어떤 것인가? 할 때
1) 성령님의 감동 주시는 역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심령을 변화 시키는 사역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은 성경 말씀과 함께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셔서 감화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눅 24:32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성경을 배울 때 마음이 뜨거워졌다” 하였으니, “이 마음이 뜨겁다”는 것은 마음에 강한 깨달음을 준다는 것입니다.
2) 불의 역사는 정의를 밝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이란 뜨거움을 전달하기 전에 먼저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움을 밝히지 않습니까? 죄악의 어두움은 진리로만 밝힐 수 있으므로, 진리를 전파 할 때 나타내시는 정의의 사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불은 성령님의 뜨겁게 하시는 사랑과 열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냉냉하게 하면 안 되겠지요. 따뜻하고, 열심 있게 해야 합니다. 롬 12:11에서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하셨고, 계 3:15에서는 “미지근한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은혜로 열심 내는 신앙 생활을 의미하며,
4) 불은 치료하고 깨끗케 하는 역사를 의미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자신의 부정한 입술을 탄식했을 때(사 6:6) “제단의 숯불로 그 입술을 뜨겁게 하고, 그 죄가 사하여졌다”하신 것은 성령님의 불같은 역사로 회개를 이루어 죄사함 받게 하는 사역을 나타내신 것이요,
5) 불은 성도의 신앙을 더 귀하게 만들기 위하여 연단 시키심을 뜻합니다. 벧전 1:7에서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6) 마지막으로 성령님의 불같은 사역은 하나님의 심판의 사역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불로 심판 받은 사례가 여러 번 있습니다. 소돔 고모라의 멸망(창 19:24)이나, 광야에서 원망하는 백성들을 불사르신 일(민 11:1), 엘리야를 대적한 50인을 불사른 일(왕하 1:10)등이요 또 세상 끝 날에는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게 하시고(벧후 3:10,12), 마지막 때에 세상을 불심판으로 끝내실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계 20:14). 성령님의 불같은 역사 6가지를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28. 제 27 과 “성령님의 물같은 역사” (요 4:14,7:37~39)
1. 성경에 나타난 물에 대한 말씀들.
1) 구약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물로 비유하신 말씀. ① 자산에 강을 열고 골짜기에 샘이 나게 하시며 광야를 물이 되게 하심(사 41:17), ②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시며(사 44:3), ③ 성전 문지방에서 흐르는 물이 큰 강을 이루고 물이 닿는 곳마다 샘물이 소성함(겔 47:1~9), ④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먹은 사실(출 17:6)은 그리스도로부터 주시는 신령한 음료라 하심(고전 10:4).
2) 신약에서 물을 성령의 상징으로 말씀하신 내용들. ① 내가 주는 물을 먹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②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같이(사 12:3,47:1)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는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심이라(요 7:37~39).
3) 위 본문 말씀에서 성령님의 임재와 관련된 말씀들은 ① 내가 주는 물은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님이란 뜻이요, ② 성령님은 물처럼 특히 생수처럼 역사하신다는 뜻이며, ③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이란 말씀은 믿음이 성령 받는 방법이 됨을 뜻함이고, ④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남은 내주역사가 연속됨을 뜻합니다.
2. 예수님께서 왜 성령의 역사를 물로 비유하셨을까요?
1) 팔레스틴에 사는 거민들의 생존에 가장 문제 되는 것이 물입니다. 옛날에 우리나라 조상들은 양식 걱정을 제일 먼저 했지만 유대인들은 물 걱정부터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조상들은 우물 파는 지혜가 대단합니다. 물이 해결되면 다른 삶의 문제도 해결됩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문제 해결의 물”로 비유한 것입니다.
2) 물은 다른 자연계와 함께 거저 주시는 은혜의 상징입니다. 바다나 강이나 구름이나 소낙비나 이슬이나 샘물이 다 거저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성령님도 믿는 자들에게 거져 주신 은혜입니다. 사 55:1에서 “목마른 자들아 다 물로 나오라‧‧‧돈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행 2:38에서도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3) 물은 가장 풍성하게 주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겔 47:5에서는 성령을 “창일한 물”로 비유하셨고, 요 3:34과 딛 3:6에서도 “한량없이 주신다”하셨으며, 엡 5:18에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지구의 2/3가 물인 것처럼 풍성한 물을 뜻하는 것입니다.
4) 생수는 갈한 심령에 시원함을 주는 뜻이 있습니다.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이 목마른 자에게 냉수같다”는 말씀이 있듯이(잠 25:25) 심령의 답답함을 시원케 하는 역할을 뜻하고,
5) 물이 씻음의 재료이기 때문에 세례의식의 재료가 되어 죄 씻음을 상징한 것입니다. 구약의 결례식이 물로 씻는 의식인 것처럼(출 29:4, 시 51:7, 요 2:6) 세례의식이나 예수님이 발을 씻겨 주신 일도 역시 죄 씻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요 13:10).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건넌 것을 베드로 사도는 거듭남으로 설명하셨고(벧전 3:21), 거듭나게 하시는 것도 역시 성령께서 깨끗케 하시는 사역이기 때문에(요 3:5,13:10) 성령을 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저희들은 물의 성질에서 특별한 교훈을 또 받을 수 있습니다.
1) 물은 맛도 없고, 모양과 색깔도 없으면서 물의 사명을 다하고 있고,
2) 물은 아래로 내리흐르는 겸손의 성격이 있으며,
3) 물은 그 물이 들어가는 공간에 따라 자기의 형체를 변하므로 적응을 잘하는 성질이 있으며,
4) 물은 좁은 틈 사이까지 스며드는 성질이 있으니 이는 세심한 주의를 요하는 교훈이며,
5) 물은 항상 수평을 유지하므로 공평과 정의를 나타냈고,
6) 물은 차면 줄어들고 더우면 활기를 띠는 역할을 하므로 신앙의 열심이 있어야 할 것을 교훈하셨고,
7) 샘물은 퍼낼수록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은사가 활동할수록 더 크게 역사하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8) 물은 생명과 직결되어 있고 피(생명), 기름(약용), 포도주(양식), 바다나, 강물, 샘물, 빗물, 구름 등으로 모든 면에 유익을 줍니다.
결론적으로 성령님의 물같이 역사하시는 은혜를 받은 성도는 항상 기쁨과 감사와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하며, 죄사함의 은총과 양식주심에 대하여도 감사하시면서 힘 있게 은혜의 역사를 발전시켜 나가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29. 제 28 과 “성령님의 바람같은 역사” (요 3:8)
이 시간에는 “성령님의 바람같은 역사”에 대하여 상고해 보겠습니다. 성경에 성령님의 역사를 바람의 역할로 비유하신 말씀들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곧 하나님이시고, 불이 아니듯이 바람처럼 역사하실 뿐 바람 자체는 아닙니다. 저희들은 성령님의 바람같은 역사를 많이 힘입고 또 그런 역할을 나타내셔야 하겠습니다.
1. 성경에 성령님의 역사를 바람의 역할로 비유한 말씀을 보면
1) 우선 구약에서 인류의 시조 아담을 지으실 때 흙으로 빚은 몸에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생령이 되었다”(창 2:7)고 하신 말씀에서 “루학크(생령)”란 말씀이 “바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육신의 몸에 생명을 품부하시는 역사를 바람의 역사로 나타내신 것은 보이지 않게 또는 신비하게 생명을 전달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이와 꼭 같은 의미로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도 역시 그렇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를 설명하실 때 바람처럼 역사하셨다 하셨으니(요 3:3) 바람은 ① 보이지 않는 것이나 ② 운동력이 있는 것이어서 신비하게 역사하시는 것을 뜻할 뿐 아니라 ③ 바람자체는 호흡의 요소가 되기 때문에 생명의 약동을 비유하기에 알맞은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바람같은 역사는 “생명력”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중생하고, 예수 믿어 영생하는 것이 바로 성령님의 바람같은 역사로 주시는 은혜임을 깨달으셔야 하겠습니다.
3) 또 본문 말씀에서 “바람은 임의로 분다” 하셨고, 또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니 이는 보이지 않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분다”는 말씀은 ①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과 ② 각 사람에게 임의로 은사를 나눠 주시는 독자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고전 12:11).
4) 그리고 또 행 2:2을 보시면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하다” 하셨는데 이 말씀은 성령역사의 신속성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시 18:10과 삼하 22:11에서 “하나님은 그룹을 타고 날으시며 바람 날개로 뜨시고, 바람 날개 위에 나타나신다” 하신 것도 역시 성령님의 신속한 거동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합 1:11에서 “바람은 급히 가는 것이라”하셨고, 행 2:2에서도 “급하고 강한 바람”이라고 하셨습니다.
5) 바람은 능력의 역사를 상징하고, 또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① 바람이 노아 홍수를 멎게 하였고(창 8:1), ② 바람이 홍해를 갈랐으며(출 14:21), ③ 바람이 메추라기를 몰아왔으며(민11:31), ④ 바위도 부순다(왕상 19:11)고 하였습니다. ⑤ 이 바람이 태풍으로 나타날 때는 큰 폭풍을 일으킬 수 있고 더운 열을 몰아올 때는 빙산을 녹이기도 하며 또 땅을 받친다고도 할 수 있으니 그 힘이 대단한 것입니다.
6) 바람은 물의 역사처럼 정결케 하는 일을 행합니다. 바람은 티끌을 날리고 악취를 정화하며(사 17:13) 구름을 걷히게 하여 맑은 하늘을 만들기 때문에 욥 21:18과 37:21에서 “바람이 지나가면 맑아진다” 하셨으니 이것이 곧 성령 안에서 거룩해지는 은혜와도 상통함이 있습니다(롬 15:16, 고전 6:11).
2. 보호의 역사와 징계의 역사를 이루기도 하십니다.
1) 보호의 역사는 시121:6에서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않는다”고 하신 말씀에서 열대지방의 뜨거운 햇살을 막아 주려면 바람이 햇빛의 열을 식혀주어야 하기 때문이고,
2) 징계로 나타나는 바람은 요나의 배를 풍랑으로 치신 것이나(욘 1:11) 뜨거운 바람으로 이스라엘을 징계하신 일(렘 4:11), 또 거짓선지자나 악한 목자들을 바람으로 삼킬 것이라는 말씀(렘 22:22)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로서 성경은 성령님의 역사하시는 방도와 내용들을 바람으로 비유하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바람의 성질은 보이지 않게 역사하고, 신속하게 역사하며, 능력을 나타내고, 깨끗케 하는 역할, 생명의 역사, 보호하는 역사, 징계의 사역에도 비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은 바람같은 일들을 하십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은사를 힘입은 자는 ①우선 시원스런 인격자가 되셔야 하겠고, ② 신속하고 능력 있게 행하며, ③ 자기 정결에 힘쓰고, ④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신앙운동을 잘 하셔야 바람같이 역사하는 성령님의 은혜를 힘입으신 줄로 알게 될 것입니다.
30. 제 29 과 “성령님의 기름같은 역사” (고후 1:21~22, 요일 2:27)
이 시간에는 “성령님의 기름같은 역사”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성경말씀에 보시면 성령님의 역사를 기름의 역할로 상징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1) 우선 고후 1:21~22에서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마음에 주셨느니라” 하시므로 ① 성령님을 기름으로 상징하셨고, ② “하나님이 기름을 붓듯 은혜를 부어주신다” 하셨으며, ③ 성령을 마음속에 주시고, ④ 이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인치듯이 증명해 주시는 보증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성령님이 기름처럼 우리 마음에 역사하시는 줄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2) 요일 2:20,27을 보시면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앞에서도 설명 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이 성령님을 기름 붓듯이 마음속에 임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친다” 하시므로 성령님께서는 친히 진리를 가르치시는 일에 앞장서신 것을 말씀하셨고, 그의 가르치심은 참되시며, 거짓이 없은즉 그대로 배우고 주안에 거하셔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 성령님의 기름같은 사역은 진리를 가르치시는 일과 “가르친 그대로 주안에 거하라”하신 말씀처럼 “주안에 거하도록 붙잡아 주시는 역할”도 하시는 것입니다.
4) 기름의 용도가 여러 가지이지만 우선 기름을 기계에 사용한다고 가상할 때 기계에 기름을 쳐야 기계가 잘 돌고 보존이 잘 되는 것처럼 성령님이 진리를 가르치시고, 진리 안에 거하도록 붙잡아 주시는 역할을 기름의 용도로 비유하신 것이 퍽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5) 본문 외에도 기름을 성령의 역사로 비유하신 말씀이 퍽 많습니다. ① 눅 4:18을 보시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셨다” 하시므로 예수님의 성령 충만하심을 기름부음 받으신 것으로 표현하셨고, ② 또 선지자(왕상 19:16)나 제사장(출 40:3, 시 133:2)이나 왕(삼상 9:16)을 세울 때에 기름을 부었으니 이 기름 역시 성령님의 역사로 주시는 지혜와 직분과 권위를 뜻하는 것입니다. ③ 병 고치는 안수 대신으로 기름을 바른 일이 있으니 약 5:14에서 “교회의 장로들이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 하시므로 기름을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때에 성령으로 상징된 기름은 아무 기름이나 다 사용한 것이 아니고, 감람나무 기름을 사용한 것입니다. 유대나라는 그 기후와 토질이 감람나무 키우는데 알맞습니다. 그래서 감람원도 많고(삼상 8:14, 느 5:11), 예수님도 감람산에서 기도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마 26:30, 행 1:12).이 감람나무는 열매도 많고(파란 대추처럼 열림 ; 렘 11:16), 기름도 많아서(사 9:9) 기름을 짜면(출 27:20, 신 8:8) 이것이 여러 가지 용도에 사용 됩니다. 우선 식용유로 쓰고(왕상 17:12, 겔 16:13), 약용으로도 쓰며(사 1:6, 막 6:13), 향품용으로도 쓰는데(룻 3:3, 아 1:3) 하나님께 구별된 용도는 성전을 밝히는 용도(출 25:6), 제물로 드리는 용도(레 7:10, 민 15:4), 성령을 상징하는 대용품, 즉 임직할 때 붓는 것으로도 사용된 것입니다(선지자 ; 왕상 19:16, 제사장 ; 출 40:13~15, 왕 ; 삼상 9:16).
2. 그러면 성령님의 기름같은 역사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1) 하나님이 기름을 이용하시는 용도에서 ① 이것을 성전의 어두움을 밝히는데 쓰셨은 즉 이는 성령님의 진리운동, 즉 지혜를 주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는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요, ② 기름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니 성도의 헌신을 뜻하고, ③ 또 이 기름을 부어 선지자, 제사장, 왕을 세우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충성하는 직분의 은사를 뜻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이 기름이 사람에게 사용되는 용도로 본다면 ① 우선 먹는데 사용하니까 영혼의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역사요, ② 기름은 부드럽게 하는 역할을 하므로 매사를 형통하게 하시고, 유화 보존, 화목케 하는 역할을 하시며, ③ 또 약용으로 사용되니까 모든 부조리를 치료하는 역사를 의미 합니다(아 4:10, 시 23:5, 시 104:15, 눅 7:38).
3. 결론적으로 기름같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어떠해야 합니까?
1) 우선 마음이 부드럽고 윤기 있는 성도가 되셔야 하지요.
2) 소리 없이 잘 돌아가는 기계처럼 잘 형통하게 하셔야 하며,
3) 진리를 밝히는 자가 되고,
4) 모든 것을 지혜롭게 치료하는 자가 되며,
5) 성직에 충실 하는 성도가 되고,
6) 물과 기름이 구별되듯이 세속에 대하여 꼭 구별되게 생활하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31. 제 30 과 “성령님의 비둘기같은 역사” (마 3:16, 눅 3:22)
이 시간에는 “성령님의 비둘기같은 역사”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성경에 보시면 “성령님의 임재를 비둘기의 나타남으로 표현하신 말씀들이 있습니다. 성령님의 임재를 비둘기로 표현하신 비유는 다른 것, 즉 불이나 물이나 바람, 기름으로 비유하신 것보다 더 특수한 의미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1) 물이나 불이나 바람이나 기름은 생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들의 용도나 역사로만 나타냈지만
2) 비둘기는 일종의 생물이기 때문에 비둘기의 하는 일로만 성령의 역사를 비유하신 것이 아니고, 비둘기란 새의 특성까지 포함해서 비유 하셨다는 점과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라는 것을 지명할 때 비둘기 같은 형체가 예수님의 머리위에 직접 임하여 세례요한으로 하여금 그분이 구세주이심을 직접 알아볼 수 있도록 하셨다는 점으로 볼 때 특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성경에서 성도를 양으로, 또 거짓선지자들을 이리로 비유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양은 아니지만 양처럼 닮아야 하고 이리 같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예수님의 임재를 지목하실 때 비둘기 형체의 나타남으로 지목하신 것은 예수님의 속성과 비둘기 특성에 서로 닮은 사실이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 또 예수님을 비둘기로 비유하심에 적당하면 성령님도 같은 인격의 하나님이시니까 그렇게 상징할 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예수님 닮은 성도들도 “비둘기 같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한 증거로 아 2:14을 보시면 성도를 비둘기로 비유하여 말씀하시기를 “바위틈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하시므로 음성이 부드럽고(말의 덕이 있음), 모양이 아름다우며(이는 행실이 의로움을 의미), 바위틈 은밀한 곳에 숨어 있는(즉 자기를 나타내지 않는 겸손) 비둘기(신부)를 주님이 좋아 하시고 찾으신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충만을 힘입은 성도들은 비둘기처럼 조용하고, 비둘기처럼 은밀한 곳에 있으면서 기도하고, 숨은 봉사를 잘 하며, 또 비둘기처럼 깨끗한 곡식만 먹고(부정, 부패, 죄악에 관여하지 않음), 그 음성이 부드러운 것처럼 항상 유순하고, 온유하며, 행실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찬송가 171장의 가사에서 “비둘기같이 온유한 은혜의 성령이 오셔서”란 가사를 기억하시면서 비둘기처럼 온유한 성품을 닮아야 할 것입니다.
2. 성령님의 임재와 역사를 비둘기로 표현하신 말씀들을 찾아보겠습니다.
1) 예수님이 세레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성령님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 위에 머물렀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마 3:16과 눅 3:22에 기록되었는데 마 3:16에서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그 머리 위에 임하셨다”하셨고, 눅 3:22에서는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셨다” 하시므로 비둘기 형체로 나타나신 것을 확실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천사로 나타나
셨 듯이 성령님이 비둘기 형체로 그의 임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에 그 부모와 사가랴 내외 외에는 아무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을 알리는 최초의 계시로서 예수님을 지명하실 때 비둘기 형태를 나타내신 것은 성령님과 예수님에게 비둘기 특성과 일치되는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생물들이 있는데 왜 하필 비둘기 형체로 보여주셨을까?에 대하여 박윤선 목사님은 해석하시기를 “이는 예수님의 거룩한 사역의 성격을 보여주시는 상징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우리를 대신하여 극도로 낮아지시고, 고난 당하시는 일인 만큼 유순하고, 겸손한 비둘기로 상징하기에 합당하다”하시고 사 53:2~3에 나타난 “그는 주 앞에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다”는 말씀을 대조하여 설명을 하셨습니다.
3. 따라서 저희들은 비둘기의 특성과 관련하여서 성령 충만의 형편이 어떠한 것인가를 살펴보셔야 하겠습니다.
1) 비둘기는 하나님께 드리는 속죄제의 제물이 되는데 가난하여 소나 양으로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비둘기로 드리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레 1:14, 창 15:9, 눅 2:24). 새 중에 제물 되는 새는 비둘기뿐입니다. 짐승 중에는 양이나 소이고, 새 중에는 비둘기이니까 그 새가 다른 모든 동물들보다 특수하다는 것을 우선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비둘기가 하나님께 제물이 되는 이유는 ① 어느 새보다도 순결하고 사랑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1:16)고 하셨습니다. ② 비둘기는 사뿐히 앉고, 소리 없이 날면서 대단히 조용한 동물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나타내지 않는 겸손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면서 “자신을 들레지 않았다”(마 12:19)고 하셨습니다. 조용히 일하고 봉사하는 것을 뜻합니다. 조금씩 떨어지는 물은 소리가 나지만 많이 흐르는 물은 소리가 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큰 일을 소리 없이 자취 없이 조용히 하는 것입니다. 아 2:10에서 “은밀한 곳 낭떠러지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그런 성도를 귀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큰 소리를 질러야만 큰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왕상 19:11~12에서도 하나님의 임재가,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바람 가운데 나타나시지 않고,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고, “세미한 소리와 함께 말씀으로 나타나셨다”고 하셨습니다. 창 1:2의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한 말씀은 “하나님의 신이 수면을 품고 계셨다”로 번역할 수 있기 때문에 성령님이 보금자리에서 알을 품고 있는 새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고 해석한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살전 4:11에서 바울사도도 “조용하여 자기의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구는 빠른 속도로 크게 움직이지만 소리를 내지는 않습니다. 또 과거에는 목소리 큰 사람만 은혜 있고, 애국자인줄 알았으나 이제는 말하지 않고 조용한 사람들 속에도 얼마든지 은혜 있는 성도, 또는 애국자가 있다는 것을 꼭 아셔야 할 것입니다. ③ 비둘기는 온유한 동물입니다. 예수님이 온유하신 것처럼(마 11:28) 비둘기도 온유합니다. 비둘기는 절대로 다른 것을 해치지 않으며, 싸우지 않기 때문에 평화의 상징이 되었고, 또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도 “온유”가 포함되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④ 비둘기는 눈물을 많이 흘리는 새입니다. 비둘기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충성심이 퍽 많고 노력도 많이 하는데 눈물이 없는 성도가 있습니다. 충성, 그 자체는 좋으나 대단히 위험성을 지닌 사람이지요.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악을 쓰고, 싸울 소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눈물이 적은 성도는 자신의 마음이 비둘기 닮기를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사 38:14, 겔 7:6에서 “비둘기는 슬피운다”, 사 63:10에서도 “성령님은 슬퍼하신다”, 롬 8:26에서 “성령님은 탄식 하신다”, “근심 하신다” (엡 4:30) 하셨으니, 이것은 다 자기 백성들의 죄를 인하여서인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기 백성의 죄를 인하여 “눈물을 강같이 흘렸다”고 표현하셨습니다(애 2:18). 따라서 눈물이 많은 성도라야 성령의 은혜를 많이 받은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⑤ 비둘기는 소망의 소식을 전하는 역할로 하나님이 쓰셨습니다. 창 8:8에서 홍수로 150일이나 방주가 물에 떠 있었고, 땅에 머문지 47일이 지난 후에 노아가 날려 보낸 비둘기가 감람 새 입사귀를 물고 와서 “땅에 물이 걷힌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성령님은 복음의 좋은 소식을 전하시는 증언자이십니다(요 15:26). 그런 의미에서 소망의 소식을 전한 비둘기 사역과 상통함이 있는 것입니다.
4. 결론적으로 저희들이 교훈을 받고 꼭 기억하셔야 할 것은
1) 성령님의 은사를 여러 가지 방도와 형편으로 받을 수 있는데 어떤 이는 불처럼 뜨겁게 어떤 이는 물처럼 시원하게 또 어떤 이는 바람처럼 세차게 또 어떤 이는 기름처럼 지혜롭게 또 어떤 이는 비둘기처럼 고요하게 일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2) 뜨겁고 바람처럼 쉬쉬하는 것만 성령님의 역사인줄 아셨던 분이 계시면 이번 기회를 통해서 그 생각의 폭을 넓히시기를 바랍니다. 목소리 큰 사람만 애국자가 아닌 것처럼 비둘기같이 조용하며 자기의 책임을 다하는 성도와 국민도 다 하나님 앞에 충성자일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이요,
3) 아무쪼록 성령님의 비둘기같은 역사를 힘 입으셔서 “여우같다느니, 돼지같다느니, 혹은 구렁이같고 늑대같다”는 말을 일체 들어서는 안 될 것이요, 오직 “비둘기같은 사람”, “양같은 사람”, “소같은 사람”이란 말을 들어야만 성령님의 역사와 상통함이 있는 것입니다. 비둘기같은 순결, 비둘기같은 겸손과 온유, 눈물의 성도가 되셔서 이웃을 해롭게 하지 않고 소망만 주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32. 제 31 과 “한국의 오순절 이야기” (히 13:7)
1907년에 “한국에 오순절 같은 역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의 오순절이란 말은 한국에서 최초에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난 것을 의미할 뿐 초대교회의 오순절이 재연됬다거나 그와 같은 성질로 나타났다는 의미는 아닌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이 역사는 소문만큼 문헌이 전승되지 못하여 자세히 알기 어려우나 직접 간접으로 전달된 소식을 모아 그 실상을 알아보므로 한국 초대교회의 역사와 실제적인 오순절 역사를 대조, 연구하여 참된 의미를 깨달았으면 하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
1. 1907년의 정치적, 기독교적 역사를 살피면
1) 일제에 대한 독립적 반항운동과 함께 일본의 정치적 탄압이 극심하였고,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양위하였으며, 이준 열사의 해아밀사 자결 사건으로 대단히 어려운 상황을 겪던 해였습니다. 계속해서 1908년에도 배일의병이 많이 일어났고, 1909년에는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살해하였으며, 같은 해에 친일파 단체인 일진회에서는 한일합방을 주장하여 결국 1910년에 한일합방이 이루어지므로 나라의 생명을 끊으므로 정치적 불안정이 정점에 이른 때라 할 수 있습니다.
2) 그런데 같은 해에 장로교회에서는 최초의 목사안수를 가지므로 길선주, 서경조, 한석진, 이기풍, 송인서, 양전백, 방기창 7인을 세워 장로교회 독노회를 조직하고 이기풍 목사님을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는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또 이때에 중국에서는 개신교 선교100년 대회를 상해에서 가졌다고 합니다.
3) 이상의 정치와 기독교 운동을 살필 때 정치적으로 가장 어려운 때에 약소민족이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강해진 중에 목사 안수식으로 인한 은혜의 바람이 많은 사람들에게 큰 희망과 감동을 일으켰음이 사실이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2.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한국의 오순절이라 하여 초대교회 오순절 같은 역사가 다시 재현됬다고 믿으면 안 됩니다. 다만 초대교회 오순절을 방불케한 역사가 한국에서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순절 역사는 단회적 사건이기 때문에 한번 성취되므로 끝나는 것이요, 그와 꼭 같은 방법을 재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미 초대교회 오순절 당시에 성령강림의 약속이 성취됨과 동시에 성령님의 특별사명도 끝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있게 해 주십시오”하는 기도를 초대교회적 상태처럼 액면대로 아셔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역사를 구하는 것은 다만 “충만 하여지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알고 사모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한국의 오순절 역사를 상세히 전달한 문헌이 별로 없고, 약간의 상황만을 표시한 책과 정보를 소개하면 ① 외국인 “요나단 고피스”가 쓴 “성령의 불이 한국을 휩쓸었을때”란 단편집과, ② 옛날 부흥강사의 약력을 기록한 박용규 목사님의 저서인 “이 불
을 끄지 말라”는 책에서 길선주, 김익두 목사님의 사역 기사가 약간 있는 것과, ③ 채기은 목사님이 쓴 한국교회사 중에 약간 나타난 기사가 있고, ④ 1907년 당시의 일본에 주재하던 영국 선교사 “위프”의 보고서가 영국에서 발견되어 간접적으로 전래된(홍치모 교수에게) 문헌으로 참고 할 수 있는 실정입니다. 영국의 “위프” 선교사가 그 당시에 일본에서 선교하던 중, 당시 한국에서 선교한 “언더우드”선교사의 초청을 받고 한국에 와서 1개월 반을 거주하며 보고, 들은 내용을 일본의 선교 문제와 관련하여 본국으로 보고한 내용이 있는데(1932년 간행된 “일본 있는 선교사의 기쁨”이란 책, P127~144) 이 사실을 영국의 고령층에서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1) 그 위프선교사의 보고를 통하여 알려진 내용이 무엇인가? ① 한국의 정치적 위기와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도 성령님은 역사하셨다는 점이요, ② 한국 선교는 성공적이요, 일본의 선교는 실패하였는데 한국 선교가 성공한 것은 하나님과 성경을 의지의 대상으로 비판 없이 받아 신종하였기 때문이요, 일본 선교의 실패는 그 백성들이 기독교를 신앙의 대상으로 받기 전에 연구의 대상으로 받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지식은 신앙을 확고하게 할 수 있지만 비판적 연구는 퇴보를 가져오고 “축복은 겸손과 순종으로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③ 영국 사람들이 이해한 한국의 오순절적 부흥은 그 당시에 한국인들의 지식 수준이 유치하였고, 양반들은 동양의 고전적 지식만 내세웠으므로 “성령운동을 성경적 차원에서 이해하지 못하였고, 기능적인면(이적?)에서만 이해할 뿐 이었다”고 하였습니다.
2) 그러면 그 “위프”선교사가 보고한 “성령운동”이 무엇인가? 할 때, ① 회개운동이었다는 것입니다. 망나니, 기생은 물론 길선주 목사의 친구 장로도 100리 밖에서 농번기에 부흥회를 통한 은혜를 받으러 왔고, ②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배우는 열심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어떤 불건전한 집회처럼 감정만 동하고, 마음만 흥분하다가 허황되게 돌려보내는 모임이 아니요,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성경 속으로 파고드는 운동이었으며, ③ 기도운동이 전개 되었으니 그 당시에 길선주 목사님이 처음으로 새벽기도회를 시도했다는 것이며, ④ 전도와 봉사를 많이 하는데 여성의 봉사가 뛰어났기 때문에 여집사 제도가 처음 시행되었고, ⑤ 기도회의 자세도 퍽 윤리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보고서 내용에 보면 “광적, 환상적, 신비적 표현의 기도가 아니고 교리적이며, 철저한 윤리적이었으니 그 부흥집회에 사명자가 많았고, 200명 넘는 군중이 성경을 열심히 배웠으며, 주정하던 자, 도박하던 자와, 유교, 불교 신도 중에서도 수천명이 돌아왔고, 민족적 우월감을 가진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문화적 우월감을 갖는 교만을 없애달라고 기도하며 거적 위에서 잠을 자고, 일치 화합하는 양상을 보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⑥ 고난에 동참하는 교회로서 개인위주보다 공동체 유익을 위하여 연합사역에 노력하였고 민족의 수난에 생사를 같이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2) 채기은 목사님이 쓴 한국교회사에 보면 “1907년 러트박사의 보고에 의하면 평양에서 매주일 교회에 참집하는 인원이 14000명에 이르러 평양시민의 1/3에 해당하였으며, 그해 1월에 장대현교회가 부흥되었고, 평신도 사경회를 김찬성의 인도로 숭덕학교에서 열었들때 300여명의 소학생들이 회개, 통곡하였고, 길선주 목사가 성령의 도리를 교수 할 때도 회개, 통곡이 일어났으며, 이길함 선교사가 매일 밤 예배를 인도할 때 만당한 청중이 급한 바람같은 쳬험을 하면서 죄를 자복, 통곡하였고, 이렇게 1개월을 계속하는 중에 수천명이 중생의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한 것입니다(중생의 성령세례란 최초의 성령체험을 뜻함). 또 그 무렵에 중국인 신학사 호만성과 장석정이 와서 1주간을 유하였는데 언어가 불통되고 통역이 없었으나 예배하는 의표만 보고 은혜를 받아 귀국하여 자기의 교회를 부흥케 하였으며, 그 봄에 길선주 장로가 경성에 와서 부흥회를 할때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자복하며 세례를 받은 자가 많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급한 바람같은 체험을 했다는 기사는 있으나 중국 신학사가 언어의 불통으로 의식만 보고 감동을 받을 때에(외국말을 알게 하는 등의) “방언의 역사가 나타났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사실들에서 한국의 한 신학자(홍치보 교수)는 논평하기를 한국의 오순절이란 “통속적인 명칭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뿐이라” 하므로 그 사건과 성질이 초대교회의 오순절과 같지 않음을 주지 시켰고, 또 긍정적으로 평하기를 진리 중심의 역사요, 영적자유를 누리게 하는 일이며(고후 3:17), 살아 역사하는 말씀의 운동이었으니 성령님은 “말씀과 더불어 말씀 안에서 말씀을 통하여서만 역사 하신다(with bible, in bible, through bible)”고 하였습니다. 어떤 조직이나 정치로 하나 되는 것이 아니고, 신앙과 사랑으로 일치되게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8.15해방과 6.25이후에(1960~1965년) 박태선 전도관운동등 사이비한 운동이 많이 일어나서 자칭 성령운동인 것처럼 미혹한 일이 있었고, 불건전한 집회를 하면서 한국의 오순절을 재연하는 강조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3) 은사주의에 대한 문제는 외국 실례를 기고한 “한길”(1983.11)이란 책에 보면 ① 1901년 1월 1일에 미국 캔사스주 토페카의 벧엘성경학교에서 “아그네스 오스만”이란 학생이 “처음으로 방언을 말했다”하여 미국은 그 날을 “성령 역사 태동의 날”로 여긴 일이 있었고, ② 1960년 4월 3일 주일에 캘리포니아주 밴나이스의 성공회 교회의 “데니스 베네트”신부가 자신이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고 공포하여 전국에 알려져서 그때부터 은사주의 운동이 일어나기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의 경우를 우리나라와 대조해 보면 훨씬 뒤떨어지고 미온적임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한국의 성도들이 지식보다 감정을 앞세우는 일이 더 컸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과거에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바른 교회와 신앙지식 위에서 체험을 했으나 오늘에 와서는 이것이 많이 흐려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지식과 교리지식이 없어도 방언의 체험을 하게 되고, 교리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체험을 하니까 체험을 성경보다 더 앞세우거나 중요시 하는 경향이 있고, 나가서는 체험과 능력만 위주 하여 교리나 교파를 초월해 버리는 경향까지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통신앙에서는 떠나고 회회교, 몰몬교, 이방종교, 이단종파까지도 문제시 하지 않으면서 범종교적으로 나타나는 방언의 역사로 종교를 일치시키려는 잘못된 경향까지 나타나고 있다는 글을 본 일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성령님의 은사와 역할에 대하여 바른 이해를 갖지 못한 채 방언, 예언, 신유의 은사 등을 앞세우며 불건전한 생활에 이끌려 가는 사람들이 있으니 아무쪼록 성령님의 역사와 은사를 더 많이 배워서 건전한 신앙, 건전한 예배, 건전한 생활에 이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국의 오순절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게 된 것입니다. (내용이 넉넉하지 못한 것과 논리의 조직에도 미비한 점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더 잘 정리하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더 잘 정리하지 못하였습니다. 본인이 집필한 “기독교 신앙백과” 내용 속에 “성령님과 그 사역”, “성령을 충만히 받음에 대하여”, “사도적 사역의 특징”등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35. 제 32 과 “성령님이 하시는 일” (요 14:16~17, 26, 16:8, 13)
이 시간에는 “성령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네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① 성도와 함께 하시는 일이고 ② 모든 것을 가르치시는 일이며 ③ 책망하시는 일이고 ④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일입니다. 따라서 이 네 가지 성령님의 사역에 부합하는 일을 잘 하는 성도가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1. 우선 14:17에서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고 성도와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진리의 영”이란 하나님의 영이고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과(요 17:17) 예수님 자신을 진리라” 하셨고(요 14:6), 진리는 성경 말씀으로 나타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① 성경을 떠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가 없고 ② 성령님은 인격의 신이시며 ③ 성도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서 든든함을 느끼셔야 하는 것입니다.
1) 많은 성도들이 성령님의 역사를 체험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말씀 밖에서는 역사하시지를 않습니다. 16:13에서 “성령님은 자의로 말씀하시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씀 하신다” 하셨는데 그 뜻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동일한 역사를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장래 일을 말씀 하신다”하신 것도 성경을 떠나서 아무 때나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요한계시록이나 베드로, 바울을 통하여 성경에 나타난 장래 일을 계시하실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주신 계시를 성경으로 끝내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이 내게 역사하시는 체험은 내가 성경을 깨닫고 그대로 실천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2) 성령님은 인격의 신이십니다. 어떤 교파에서는 성령님을 독립된 인격의 하나님으로 믿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의 방출로만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성령님을 인격의 하나님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성경에 보시면 성령님이 대언자의 역할을 하셨고(요 14:26) 지성적, 의지적, 감정적 역할을 다 하셨으며(요 14:16, 행 16:7, 사 63:10) 성도와 교제도 하셨고(빌 2:1) 어떤 사건에 대하여 증명도 하셨습니다(고후 1:22). 그러면 누구의 인격과 같으실까? 분명히 예수님의 인격과 같을 것입니다. 성령님을 “예수의 영”이라고도 하셨으니까요(행 16:7). 그런 의미에서 성령님을 인격의 신으로 모신 성도는 예수님의 인격을 많이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구원하시는 목적도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롬 8:29). ① 예수님은 진리가 충만하신 분입니다(요 1:14,14:6). ② 또 진실하시고(히 6:18) 온유, 겸손하시며(마 11:29) ③ 규모와 예절을 지킬 줄 아시고(살후 3:6) ④ 말을 헛되이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사 55:11). 따라서 성령님을 모신 성도는 먼저 도덕적인 인격이 성숙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목사를 섬기면서 믿음생활을 하다가 사정이 있어서 교회를 떠나게 되면 전화로라도 “목사님 저는 말씀드리기 어려운 사정이 있어서 교회를 떠납니다. 그 동안 염려해 주신 일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라고 인사말 한 번 정도는 있어야 합니다. 말하기 어려우면 서신으로라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예절도 못 지키는 성도가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겠는가?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인격의 신으로 모시는 성도는 신령하기에 앞서 인격성 확립에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3) 그리고 그 성령님이 성도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생활하셔야 할 것입니다(마 28:20).
2. 14:26에서 “성령님은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성경)을 생각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가르치는 일을 잘 하시는데 모든 지식을 다 가르치실 뿐 아니라 특히 예수님의 말씀, 성경을 생각나게 하여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루디아가 바울의 설교를 들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청종하게 하셨다”하였고(행 16:14), 또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셨다”하셨으며(엡 1:17) 또 지식의 말씀과 교사의 직분을 주셔서(고전 12:8, 28)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과 함께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신다(엡 4:11~12)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경으로 신앙 인격을 지도하는 역사를 성령님께서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3. 16:8에서 세상을 책망하시되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세상을 책망하시는 분입니다. 또 고후 7:11에 보시면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자기의 죄를 근심하고 자기를 벌할 수 있다” 하셨으니 이것도 성령님의 역사에 속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책망과 함께 죄를 들추어 내시고(행 5:3~9) 회개케 하는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눅 5:32, 행 5:31, 롬 2:4, 딤후 2:25, 히 12:17, 계 2:21). 그러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신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성경에 설명이 있지만 이해하기 힘듭니다. 인간이 행하는 죄와 의와 심판이 다 책망받을 대상이란 뜻입니다.
1) 죄는 불신앙을 대표로 하여 모든 불법과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을 망라한 것이고
2) 의는 인간이 내세우는 율법적 의가 책망의 대상이란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의로 구원 받는다” 하는데 예수님은 “그런 의로 구원을 못 받고, 십자가의 의로 구원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정죄하여 죽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곁으로 가신 것입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시니 다시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하신 말씀이 바로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인간의 의”가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많은 인간들이 의에 대한 규정을 잘못하는 것을 책망하신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정죄하여 죽였으면 의롭지 못한 예수님이므로 부활하지 않았어야 하니까요.
3)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신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세상의 권세자(임금)들이 재판을 잘못하는 것을 책망하신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임금들은 의로운 예수님을 죄인으로 규정하였을 뿐 아니라 왕의 현실적 권세로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세상 임금은 죽이는 것 이상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로 세상 임금의 심판이 다 패배로 돌아가고 그들이 오히려 벌받을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이렇게 책망하는 사역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저희들이 성경말씀으로 책망받을 때는 성령님의 역사로 믿고 회개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4. 16:13에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성도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1) “성령님이 오시면”하셨는데 언제 오셨는가? 하시겠지요. 성령님은 사도행전 오순절 때에 오셨습니다(행 2:1). 성령님이 강림하실 것을 요엘 선지자가 예언하였고(욜 2:28~32) 예수님도 여러 차례 예언하셨습니다(요 16:7, 행 1:5). 마 28:20에서는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항상 너희와 함께 계시겠다”하셨고, 행 1:5에서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지요. 그 말씀대로 오순절 때에 강림하셨습니다. 유월절에서 오순절까지는 50일인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몸으로 40일 됐을 때 “몇 날이 못되어”란 말씀을 하셨으니까 50일에서 40일을 빼고 또 무덤에 계신 3일을 빼면 예수님의 승천 7일 쯤 후에 성령님이 강림하여 지금까지 계신 것입니다.
2) 그러면 그 성령님이 성도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 뜻은 ① 성경을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신다는 의미가 있고 ② 성경이 하나님의 뜻이니까(요 4:34, 고전 2:10)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하신다는 뜻이요 ③ 또 진리는 예수님이시니까 예수님과 예수님의 본을 받은 사도들의 모범을 닮고 따르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이요(요 13:15, 고전 11:11, 엡 2:20) ④ 이 시간에 특별히 강조하는 말씀으로 표준적 생활로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성령님의 역사를 체험할 때 다른 느낌에서 체험하면 안되고 반드시 성경을 깨닫는 일과 성경적이 되도록 노력하는 일과 또 표준적 생활이 되도록 노력하는 일에서 체험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표준적 생활을 강조하는 이유는 성령님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길이라 하여 다 갈 수 있는 길이 아니고 갓길은 빨리 갈 수 있으나 불법한 행진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표준적 생활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수 1:7), “공평한 길 가운데로 가라”(잠 8:20), “공의를 일삼으라”(시 15:2), “적당하고 질서있게 하라”(고전 14:40), “덕을 세우라”(롬 15:2),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왜 있을 자리에 있지 않느냐” 그런 말씀들입니다. 일반 생활에서도 표준 생활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먹는 것, 잠자는 것, 일하는 것, 말하는 것이 다 적당해야 하지 않습니까? 신앙생활도 반듯하게 행하는 것이 진리 가운데로 가는 생활입니다. IMF 때문에 낭비, 허례허식, 사치 등 거품이 많이 제거된 것처럼 신앙생활도 거품없이 알차게 표준적으로 행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생일 잔치를 하기 위하여 열흘을 굶었다면 다 정신나간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들레시지도 않고(마 12:19)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할 만큼 조용하게 일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기독교는 선전과 시위로 성취되는 줄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행사가 많아졌습니다. 개신교에서 큰 행사를 하는 바람에 교황이 와서 더 큰 행사를 하였고 불교가 더 큰 행사를 하였으니 결국은 마귀를 부추긴 것입니다. 물론 열매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기독교는 소리없이 나타나지 않는 상태에서 누룩처럼 역사하여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과장과 거품을 제하기 위하여는 “성경 한 가지만 있으면 예수를 잘 믿을 수 있다”는 상태와 환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남겨 준 것은 성경과 사랑의 교제와 복음의 전파 세 가지 뿐이었습니다. 또 성령님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여 “자유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요 8:32). 그러나 오늘날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자유를 느끼지 못하는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교권주의로 억압하는 일도 있고(잘못된 재판과 제도에서) 복음 사역자가 공갈도 치고 강요도 하는 예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노릇을 하는데 쉼은 없고 고역스러운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성령님은 감동케 하셔서 자의와 기쁨과 의욕적으로 일하게 하시는 분이요 결코 짐을 지우시는 분이 아니란 점을 아셔서 개인과 교회의 생활도 그 표준에 맞추어 나가야 할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외식과 과장과 작태와 허영을 용납하지 마시고 항상 건전하게 누가 보아도 떳떳하게 표준적 생활에 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이요 인격입니다. 그 성령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성령님은 진리를 가르치시고 사람의 모든 잘못을 책망하시며 또 진리를 깨닫고 시행하도록 인도하시되 갓길로 인도하시지 않고 반드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여 성도로 하여금 표준적 생활을 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꼭 깨달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36. 제 33 과 “성화에 대한 지식” (살전 4:3, 7)
이 시간에는 “성화에 대한 지식”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먼저 성화의 뜻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1) 이 “성화”(聖化)란 말은 신학적인 용어로서 하나님이 죄인들을 어떤 절차로 구원하시는가? 를 설명할 때 중생, 신앙, 회개, 칭의, 양자, 성화, 영화의 단계로 구원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이 때에 성화는 구원의 단계 중 여섯 번째 해당하는 과정을 의미하며 “거룩하게 하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거룩”이란 의미가 “구별한다”는 뜻도 있지만 그것은 이방인 중에서 선민을 불러내신 것을 의미할 뿐 성화와 관련된 뜻은 아닙니다. 성경에 “거룩”이란 용어와 “완전케 한다 깨끗케 한다”는 말씀이 많이 나오는데 이 말씀들이 다 순결 또는 거룩과 관련된 뜻으로 아시면 됩니다.
2)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더러워진 것을 깨끗이 씻은 다음에 다시 더럽히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는 때묻지 않은 사람이었으나 타락한 이후에는 때묻은 사람이 되었고 그 후손들도 역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 때묻은 상태를 타락 또는 더러워진 것, 또는 부패성을 가진 것이라고 하는데 거룩은 이렇게 타락하고 때묻은 상태를 씻고 타락하기 이전의 순결한 상태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부패성은 곧 범죄의 근성입니다. 따라서 이 범죄의 근성을 없애는 것이 또한 성화에 이르는 것인데 보통 사람들이 죄짓는 이유를 살펴보면 거의가 욕심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약 1:15). 교만, 시기, 이웃에 대한 미움이 그렇고, 악한 생각도 다 욕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근성은 다 거룩 미완성입니다.
4) 또 한 가지 다른 설명을 드린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닮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타락하므로 그 형상을 많이 손상시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목적 중에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함”(롬 8:29)이란 말씀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이르라”(엡 4:13)는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5) 그러니까 성화의 뜻을 다시 정리하면 “깨끗하게 하는 것, 부패성을 없애는 것, 타락전의 인격상태로 돌아가는 것, 예수님의 형상을 충만하게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가장 원하십니다. 세상만물을 그릇으로 비유한다면 성도는 밥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다른 그릇은 더러워도 용납될 수 있지만 밥그릇만큼은 가장 가깝게 접촉하는 것이기 때문에 깨끗하여야 하는 것처럼 성도는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교제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성화를 더욱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2. 이 “성화”의 의미가 속죄와는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1) “속죄”란 말은 “죄를 사한다”는 뜻입니다. 죄를 사하면 의를 인정받게 되고 벌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근거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에 의존하고 성도가 죄사함을 받는 것도 역시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사함 받습니다. 그러니까 죄사함의 뜻은 죄지은 것을 무효되게 하시고 정죄받지 않게 하시며 따라서 심판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그러나 “성화”는 형벌을 안받게 하는 문제와 관련있는 것이 아니고 죄를 짓지 않는 문제 또는 상급을 받는 문제와 관련이 있고 또 천국백성의 자질을 갖추는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깨끗한 몸으로 더러운 곳에 접촉하여 몸을 더럽혔다고 할 때 더러운 곳에 접촉한 것은 죄가 되는 것이고 자기 몸이 더럽혀 진 것은 불결이 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죄는 속죄로 해결하고 더럽힌 것은 성화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3. 성경에 보시면 “속죄의 의미로 깨끗해진다”는 말씀과 “성화의 의미로 깨끗해진다”는 말씀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런 것은 문맥에 의하여 구별을 잘 하셔야 합니다.
1) 속죄의 의미(칭의에 도달하고 심판을 면제받음)로 나타난 말씀들을 보면 시 51:2에 보시면 “나의 죄를 말갛게 씻기시며…깨끗이 제하소서”하셨고, 요 13:10에서 “이미 목욕한 자는 온 몸이 깨끗하니라”(죄사함 받았다는 뜻)하셨으며 요 1:7에서는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 또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다”(히 10:14)하셨고, 그 외에도 행 10:9, 엡 5:26, 벧후 1:9 등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피를 근거로 하여 깨끗함을 받는 것은 전부 죄를 씻는 속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 거룩의 의미(부패성을 제거하고 예수님의 형상을 닮음)로 나타내신 말씀들은 마 23:26의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또 딤후 2:21에서 “자기를 깨끗이 하라”, 행 15:9에서 “믿음으로 마음을 깨끗이 하라”, 딤전 4:5에서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지나니라”, 요 17:17에서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벧전 1:22에서는 “순종으로 저희 영혼을 깨끗이 하라”, 말 3:3에서 “연단으로 깨끗이 하라”는 말씀 등입니다. 여기에서 속죄의 의미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전체의 죄를 씻어 없애는 의미이고 거룩의 의미는 말씀, 기도, 순종, 연단으로 깨끗한 인격을 세우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3) 병고치는 의미로 “깨끗해진다”는 말을 쓰신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깨끗함을 받으라”하여 병을 고치신 예인 것입니다(마 8:3, 10:8, 막 1:42, 눅 11:41).
4. 거룩을 강조하는 말씀이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를 살피면 거룩, 온전, 또는 완전, 깨끗함, 씻음 등의 용어로 많이 나타난 것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 “거룩”이란 용어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다”(엡 1:4),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 1:16),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세우라”(유 20),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라”(레 20:8),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계 22:11)는 말씀 등이요
2) 온전하고 완전하라는 용어로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딤후 3:17),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살전 5:23),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약 4:13),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또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고후 7:1)고 하신 것입니다.
5. 여기에서 저희들은 또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거룩함을 완성할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1) 인간은 율법을 다 지킬 힘이 없기 때문에(갈 3:11)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완성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히 2:11과 10:10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이는 예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을 배제하지 않기 때문에(마 11:12) 이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2)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한계에서 요구하시는 거룩의 정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노아는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창 6:9)하셨고, “욥”도 “순전하고 정직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욥 1:8)하셨으며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도 하나님 앞에 완전함을 나타낸 사실이 있고(창 17:1, 신 18:13, 삼하 22:24), 요셉이나 고넬료도 의로운 사람이라는 칭찬이 있었습니다(마 1:19, 행 10:22).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거룩의 목표는 성경에 나타난 신앙선배들의 수준을 모범하라는 것입니다.
3) 그런 노력과 함께 전인격이 완전케 되는 것은 성령님께서 완성시켜 주시는 것이고(롬 15:16, 고전 6:11) 이런 완전 성화가 있음과 함께 사탄의 세계(현실)를 떠나게 되니까 하나님 앞에서 영원토록 거룩을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6. 그러면 성도가 성령님의 은총과 함께 어떻게 성화의 노력을 할 수 있습니까?
1) 그것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 하는데서부터 시작을 하셔야 합니다(롬 12:2).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은 성경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진리로 거룩하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요 17:17).
2) 그 진리의 실천은 믿음과 기도로 말미암는다고 하셨습니다. 곧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며”(딤전 4:5), “믿음으로 실천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롬 1:5).
3) 딤후 3:17에서는 “성경교육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한다”하셨고, 약 3:2에서는 “말의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하셨으며, 마 19:21에서는 “온전코저 할진대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하셨고, 특히 “청년들도 말씀을 따라 삼갈 때에 깨끗케 할 수 있다”(시 119:9)고 하셨습니다.
4) 또 고전 1:2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지고, 롬 15:16과 고전 6:11에서는 성령 안에서 거룩하여 진다”하시므로 성령님의 거룩케 하시는 사역을 말씀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두 가지만 강조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1) 저희들은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깨끗한 신부처럼 자신들을 깨끗게 하고 단장하여(약 1:4) 천국 백성의 자격을 취하여야 할 것입니다. 즉 거룩이 가장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2) 우리가 무엇을 한다는 것보다 먼저 할 일이 자기의 거룩을 지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릇이 먼저 깨끗해야 하나님의 쓰임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계 3:2에 보시면 “네 행위의 온전함을 찾지 못하셨다”고 하셨고, 또 계 22:11에서는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거룩함과 거룩하지 못함에 대한 심판이 확실하게 있을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저희들의 행위의 온전함을 찾으십니다. 영생의 관심을 갖고 예수님을 찾아 온 청년에게 예수님은 먼저 “계명을 지키라”하셨지요. 또 “그가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하였을 때에 “네가 온전하고저 할진데 먼저 네 소유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그 후에 나를 좇으라”(마 19:21)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먼저 할 일이 자신의 온전함이고 그 온전함이 실천으로 나타나야 하며, 그 다음에 할 일이 예수님을 따르며 충성하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37. 제 34 과 “영적 실체의 단일성” (마 10:28, 약 2:26)
영적 실체의 단일성이란 사람의 정신계통의 본질을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영과 혼을 두 실체, 또는 두 본질로 나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듭난 심령과 거듭나지 않은 심령도 영적 실체의 단일성에는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서는 신앙의 마음과 불신앙의 마음, 또는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의 작용이 있을지라도(롬 7:22,23) 그 한 사람의 영적 실체는 하나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공부하는 이유는 영과 혼을 두 실체로 나누어 육체와 함께 인간의 구성 요소를 3 부분으로(이를 3부분설이라 함) 나누어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요, 또 한 가지는 성경의 의미를 분석하여 이해하는 방법을 알게 하는데 있습니다.
1. 성경에는 영적 실체를 하나로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몸은 죽어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한다”(마 10:28)는 말씀, 또 “영혼없는 몸이 죽었다”는 말씀(약 2:26), “몸은 떠나 있으나 영은 함께 있다”(고전 5:3),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고후 7:1), “혼이 돌아와 죽은 아들이 살았다”는 말씀(왕상 17:22), 또는 “영혼이 돌아와 죽은 아들이 살았다”(눅 8:55)는 말씀 등입니다. 여기에서
1) 영적(정신적) 실체를 하나로 말씀한 사실과
2) 영과 혼을 같은 의미 즉 생명으로 사용한 사실을 보아 알 수 있고,
3) 또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육의 요소를 흙에서 취하시고 생명과 정신적 요소로 생기를 불어넣으시므로 사람 즉 생령체를 만드셨는데 이때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작업이 한 번으로 끝난 것을 알 수 있으니 이는 영적 실체를 하나로 품부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때에 “생기”란 용어는 “루학”으로 바람을 뜻합니다. 따라서 호흡이 있게 되므로 생령체가 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생기”라는 신비적 요소는 보이는 물체가 아니므로 어떻게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사람이 영적 요소와 함께 생령체가 된 후에 타락과 관계없이 영적 실체에 대하여 표현하실 때 성경은 여러 가지 용어를 쓰셨습니다. 예를 들면 생기(창 2:7), 심령(욥 32:8), 신(욥 34:14, 전 12:7), 기운(욥 34:14), 목숨(마 6:25, 막 12:30), 마음(눅 1:46), 영(고전 5:3), 영혼(눅 1:46), 혼(행 5:10)이라 하셨으니 이렇게 용어가 많은 것은 영적 실체가 종류별로 다 있는 뜻이 아니고, 영적 실체의 역할에 따라서 여러 종류의 용어들을 사용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헬라 원문에서 영혼을 “프뉴마”(πνενμα)로, 혼을 “프시케”(φυχικη)로 표기하지만 이것은 대체로 그러할 뿐 얼마든지 혼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러면 3부분설을 주장하는 근거와 내용은 어떤 것일까요? 우선 살전 5:23에 “영과 혼과 몸”이란 말씀이 있고, 또 히 4:12에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1) 여기에 대하여 2부분설 학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섬기라”하실 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라”, 또는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라”(마 22:37)하심 같이 한 영적 실체의 역할을 강조하는 의미로 혼과 영, 또는 관절과 골수로 중복 사용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이 상통하는 일체인 것처럼 영과 혼도 그렇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제임스 스톨커(james stolker)는 말하기를 “영은 고급적 기능을 가진 실체로써 신앙과 인격의 탁월성을 지배하고 혼은 저급적 실체로서 영의 역할을 대항하는데 어느 쪽의 역할이 크냐에 따라 인격의 차이를 이룬다”하였고, 허드(heard)란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의 순서로 밝아질 때 한 분이 역사하시면 다른 분들이 잠재하시는 것처럼 영과 혼도 잠재 상태에서 성령의 역사로 깨어나게 되고, 영과 혼의 깨어남이 곧 중생이라”고 설명하였다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이 설명도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영과 혼을 고급적 저급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성경적 근거가 없으며 또 중생의 의미는 잠재된 영혼이 깨어나는 것이 아니고 죽고 없는 영을 재창조 해주시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엡 2:1). 만일 영과 혼의 역할이 구별된 상태로 고급적 또는 저급적으로 역사한다면 사람이 자기의 의지와 행동을 나타낼 때마다 “이것은 나의 영의 역할이다” 또는 “나는 지금 혼의 역할을 시행하고 있다”는 식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두 마음의 역할(좋은 역할, 나쁜 역할)은 있어도 영과 혼의 역할은 구분할 수 없는 것입니다.
4) 혼과 영의 역할을 구분할 수 있다면 모르되 성경은 그 일에 대하여도 구별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①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탄식과 민망함을 영(프뉴마)으로 하셨고(막 8:12, 요 12:27, 13:21), 십자가에 대한 고민은 혼(프시케)으로 하셨으며(마 26:38) 하나님께 대한 기쁨과 경건의 표현도 혼으로 하신 것입니다(눅 1:41~47, 막 12:30) 눅 1:46에서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다”하셨을 때 “영혼”이란 원문은 “프시케”이고, “마음”이란 원문은 “프뉴마”이기 때문에 원문대로 뜻을 나타낸다면 “혼은 찬양하고 영은 기뻐한 것”입니다. ② 또 막 12:30에서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실 때 “목숨”이란 원문이 “푸스케”(혼)로 되어 있고, 히 6:18~19에서 신앙의 기초를 말씀하는 “영혼의 닻”도 혼(프시케)의 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③ 만일 영을 고상한 성도의 심령으로 혼을 저급적 또는 불신자의 심령으로 생각한다면 성도와 불신자의 죽음에 대한 용어도 구별되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벧전 3:19에서 “옥에 있는 영”을 혼이라 하시지 않고, 영혼(프뉴마)으로 표시하셨으며 행 2:27에서 “구원받은 다윗의 영을 음부에 버리지 마시라”할 때 그 영을 혼(프시케)으로 표기하셨고, 또 막 10:45에서 “자기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신다”할 때도 그 고귀한 목숨을 영(프뉴마)으로 표기하지 않고, “혼”으로 하셨기 때문에 영과 혼의 역할이 구분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주의 신학자 “델리취”는 말하기를 “영과 혼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영적 실체이다. 따라서 인간은 영혼과 육신으로 구성되었다. 영혼에 해당하는 정신적 부분은 성령님의 지도하는 은혜에 따라 다양하게 역할할 수 있으나 나눌 수 없고, 다만 영적 은혜를 강조하는 의미와 역할에 따라 여러 가지 용어로 사용하였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38. 제 35 과 “천주교의 현대적 의미” (마 10:34~36)
1517년 10월 31일은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의 기치를 든 날입니다. 따라서 이 시간은 “천주교의 현대적 의미”란 제목으로 몇 가지 내용들을 말씀드림으로 개혁적 신앙 생활에 참고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보시면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가 될 수 있으며 따라서 불화케 하려고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① 한 가정에서 신, 불신간의 싸움이 될 수도 있고, ② 같은 개신교 안에서도 신앙과 사상의 차이로 서로 갈등하는 대립을 할 수 있으며 ③ 경우에 따라서는 천주교가 한 집안은 아니지만 양 교파 사이에 일어날 대립이나 갈등을 예언하신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혹 천주교와 개신교는 “큰 집 작은 집 사이”라 하여 한 집안처럼 간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마는 결코 한 집안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① 성경이 다르고 ② 정치가 다르며 ③ 교회의 사명이 다를 뿐 아니라 ④ 우리가 천주교를 볼 때 “구원이 있다 없다 이단이다”라는 말을 하기 전에 천주교에서는 개신교를 포함한 모든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고 신앙적 자유를 누릴 특권이 없는 이단으로 보기 때문에 ⑤ 현재까지 서로가 통혼을 금지하는 상태에 있는 만큼 한 집안이나 이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일부 사람들은 “서로의 교리나 정책을 따지지 말고 재결합을 시도하자”, 개신교의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주장과 천주교의 “공덕으로도 구원받는다”는 주장을 다같이 인정해주자 하면서 재결합의 여건을 조성하려는 운동이 있다고 합니다만 이것은 복음적 신앙의 견지에서 볼 때 또 천주교의 확고한 입장이 어떻다는 것을 알 때는 결코 가능하게 여길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에 천주교의 교리가 개신교의 교리와 어떻게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리지 않고 다만 “현시대에 천주교가 팽창하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예견을 역사에 비추어서 증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천주교는 신교를 총칼로 학살한 종교단체란 것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천주교에서 볼 때에 개신교는 이단이고, 이단은 천주교 교황의 명에 의하여 정부가 죽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천주교는 국교를 주장하는 단체입니다).
1) 1208년에 남 블란서와 북 이태리에서 천주교의 잘못을 반대하는 “엘비겐세스파”라는 단체가 일어났다가 177대 교황인 인노센트 3세의 명령으로 전부 학살당하였고, 또 같은 해 같은 지역에서 “왈도파”라는 신교 단체가 일어났다가 역시 도피한 신자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멸절당하였으며
2) 또 11~17세기에 일어나 유그노파란 개신교 단체가 블란서에서 성행하자 당시 블란서의 정권을 잡은 천주교는 많은 성도를 학살, 추방하였는데 1572. 8. 24. 저녁에만 10만명을 학살하므로 파리의 시가를 순교자의 피로 물들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개신교 이단자 죽인 것을 감사의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고 기념 메달까지 만들어 돌렸다는 것입니다.
3) 16세기경 보헤미아에서는 전 인구의 80%인 신교도를 다 죽이므로 현재 순수한 천주교 인구 80만명만을 보유하고 있으며 같은 때에 오스트리아나 헝가리에서도 인구 절반 이상의 개신교인이 학살되었고, 같은 때에 화란에서는 찰스 5세와 필립 2세 밑에서 10만여명이 학살당하였으며, 그 외에도 스코틀랜드나 서반아에서도 교황의 명령으로 종교 재판소를 설치해 놓고, 부지기수의 신교도를 학살한 것입니다.
2. 그렇다면 그것은 옛날에 종교 개혁이 있었던 과도기에나 그랬지 지금도 그렇겠는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천주교는 “칼을 써서라도 이단(개신교)을 멸절해야 된다”는 주장을 버렸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현재는 세계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많이 형성이 되었고, 또 천주교도나 교황의 권세로 다른 정부를 지배할 수 없기 때문에 잠잠한 것 뿐이란 것입니다. 또 잠잠한 상태에서
1) 개신교 핍박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서 이태리, 서반아, 콜롬비아는 천주교 국교국인데 이태리에서는 극소수의 신교도가 산악 지대에 은거하며 교육, 취직, 기업체 운영은 물론 방송 청취가 불가능하며 개신교 선교사 입국을 못하는 실정이고, 서반아에서는 개신교 교회당 간판이나 신학교, 병원, 출판, 서점, 개신교 남녀의 결혼을 거절하며 신부 주례만 인정한다는 것이며 콜롬비아에서는 10년간에 115명의 신교 지도자가 천주교 세력에 의해 암살당했고, 66교회당이 파괴되었으며 개신교인이 경영하는 학교 200교가 폐쇠되었고, 신교도를 재판법으로 죽이지 않고, 세력자들의 기습으로 타살, 총살하는데 이런 것은 일체 언론 기관에 보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치적 권세를 배경으로 암암리에 불순분자 제거하는 방법을 쓰는 모양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국권으로 신교도를 죽일 권세가 있으나 공공연히 학살하지 않는 것은 세계 종교인들의 여론때문일 뿐 그 정책이 완화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2) 그러니까 천주교는 세력을 잡는대로 개신교를 은근히 탄압하는 정치를 하는 단체요, 또 방침이 그런 단체란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미국이 종교 자유국이라도 그 나라에 퍼져가는 천주교 세력이 상당한 신교의 탄압을 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이란 나라는 1620년에 영국에서 천주교의 핍박으로 살 길을 찾아 떠난 청교도에서부터 나라가 시작됐으니 만큼 개신교국이라고 할 수 있지만 400년 간에 상당한 천주교 세력이 등장한 것입니다. 1950년에 케네디 대통령이 국회의원으로 있을 때 2차 대전 때 순직한 4명의 종군 목사를 기념하는 회관에서 만찬석의 연사 초청을 수락하였는데 돌연히 “도우어티”라는 천주교 감독이 그 연사 초청을 거절하라는 바람에 오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그 기념관이 개신교 종군 목사 2명과 관련이 있고, 또 그 곳에 개신교도들이 많이 모이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또 케네디가 대통령이 된 것은 천주교도의 정치적 단결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현재 미국에는 재산권은 유태인이 잡고 있으나 언론권은 천주교인이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문, 방송, 잡지 등으로 비중있게 보도하는 것이 천주교의 확장인 것입니다. 1960년에 매사츄세츠주 도지사가 천주교인인데 취임 선서를 할 때 미국법에 의해 선서를 한 후, 이어 골방에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는 신부 앞에 “천주교법에 의해 선서를 안하고 미국법에 의해 선서한 죄를 자복하고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천주교 신자가 되면 국법보다 교황법을 더 으뜸시하여 그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교리는 한국의 천주교인이라 하여 제외되지 않을 것입니다. 1960년에 262대 요한 23세가 교황으로 취임했을 때 어떻게 매스컴이 떠들썩하는지 미국 대통령이 죽어도 그런 열광적인 보도는 안할 것이란 여론이 있었고, 반대로 천주교의 불리한 것은 보도를 잘 안하고 1959년 종교 개혁 기념일에 장로교회 목사가 특별 집회를 하려고 안내장 1000매를 우체국에 갖고 가니까(미국에는 천주교인 우체국장이 8할을 차지했다 함.) 천주교인 우체국장이 그 엽서에 종교개혁이란 어구가 있다 하여 그것을 종교, 정치 분리 원칙을 내세워 송달을 거절하였고, 어떤 개신교 집회에서 깡패의 습격을 받은 목사가 경찰에 도움을 구했으나 그것을 담당한 천주교 경찰관이 적극 대처해주지 않아서 도움을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그 세계의 보이지 않는 내면적 핍박이 얼마나 적극적인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한국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해방 직후 군목이나 형무소 전도가 개신교 목사 중심이었다가 장면 정권이 들어서면서(장면은 천주교인) 신부가 등장했고, 신교 목사가 일하고 있는 소록도 수용소에 나중에 파송 온 신부가 과장이 되고, 먼저 있던 목사가 계장으로 내려간 일이 있었으며 그때부터 군인 교회의 강단이 천주교 제단으로 바뀌어졌습니다. 군목 대위에서 소령이 되려면 3년을 있어야 하는데 신부가 6개월 만에 소령이 되면서 선배 군목의 상신도 없이 되어진 일이 있고, 1961년의 동아일보는 개신교보다 훨씬 적은 천주교의 성찬 행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해주는 편벽성을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이만큼 천주교인은 음으로 양으로 자기의 실권을 종교 활동에 이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천주교가 보이지 않는 학살과 탄압을 기회있는대로 한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듣고, 읽은대로 말씀드렸는데
3. 또 무슨 문제들이 있는가 하면
1) 우리나라 헌법이 모든 종교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면서 바티칸에서 보낸 천주교 대사를 국가적 차원에서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바티칸은 종교 단체일 뿐 영토있는 국가는 아닌 것입니다. 1948년에 한국이 독립되자 마자 바티칸 대사가 파송왔을 때 고려신학교에서는 정부를 상태로 반대 항의를 했는데도 당시 이대통령은 천주교 종교 사절을 받아 교류하게 한 것이 현재까지 종교, 정치 분리주의의 위반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요,
2) 천주교의 정치교리는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교황이 만국의 왕이기 때문에 “어떤 민주주의 정치라도 그 대표자가 교황 밑에 굴복하지 않으면 이는 민주 국가의 큰 과오라”고 믿기 때문에 국가 정치가 천주교에 굴복 안하는 한 그 정치를 정당하게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천주교 보다 개신교가 퍽 많아도 국가 행사에는 개신교 목사보다 천주교 신부가 먼저 나서는 이유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천주교 교령집에 “지존하신 법왕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전세계를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지배할 완전한 권리가 있다. 따라서 모든 왕들은 법왕의 발에 입맞춤으로 그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 법왕은 세상의 왕들을 재판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3) 천주교는 세계적 조직이 뛰어난 기관입니다. 정치, 경제, 종교 등 모든 생활 영역에서 세포조직을 가지고 체계있는 활동을 펴는데 각종 학교, 각종 단체, 상이군 협회, 변호사 협회, 교육가 협회, 의사 협회, 경찰관 협회 등이 있고, 모든 단체 배후에는 신부가 배치되어 있으며 그 배후에는 총 사령부인 바티칸의 지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티칸은 영토없는 강한 국가요, 세계적으로 강한 영향력이 있는 기관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4) 우리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힌 해방 신학이 천주교 신부로부터 선포되었고, 세계기독교 협의회(W.C.C.)란 기독교 단체에 들어온 공산국가의 신부들은 그들이 W.C.C. 운동을 주장할 뿐 아니라 체고 대표 “로마드카”는 “미군이 한국 전선에서 세균 전술을 썼으나 헝가리의 민주 운동을 제지한 소련군은 헝가리의 구주”라고 외쳤고, “니콜라이”란 사람은 소련의 천주교 신부(주교)인데 스탈린이 10만명 이상의 성직자를 죽일 때 스탈린의 화상에 촛불을 켜고 숭배하자고 주장하여 살아난 사람인데 미국의 W.C.C.(기독교 단체)는 그 사람을 초청하여 소련의 상투적 교회와 관계를 맺는 의논을 하는 등 어지러운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천주교의 잘못된 교리, 교황 독재, 천주교 국가주의 조직과 은밀한 활동, 자기 절대주의는 결코 포기되거나 변동될 수 없는 정책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어느 영역이든지 세계 여론과 자국 내의 정치권을 잡지 못한 상태에서는 평온한 듯하지만 언제라도 이것이 만회되면 천주교는 칼과 창으로 신교를 탄압하고 세계를 정복할 종교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는 것입니다(어떤 교수의 강의 요약임).
39. 제 36 과 “삼위일체 교리에 대하여” (벧전 1:2)
1. 하나님은 유일신이신데 같은 본질의 세 하나님 즉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님으로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위의 하나님은 본질과 권위와 영광과 뜻이 같으시고 사역의 목적도 같기 때문에 일치한 행동을 하시나 독립적 인격과 그 인격에 의한 사역도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은 성자에게 말씀하실 수 있으며 성자 예수님은 성령님을 파송할 수 있고, 삼위의 하나님이 각각 무엇을 하시든지 그 사역은 유기적 일치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다같이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질서상으로 볼 때는 1위가 성부 하나님이시고, 2위가 성자 예수님이며 3위가 성령님이시고, 성자는 성부로부터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으나 보낸 분에게 종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교리는 하나님 본질의 신비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성도들은 성경에 나타난대로 믿고 이해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대하시고 성경은 심오하여 인간이 이성적으로 다 이해할 수 없음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할 때 성자의 신성을 격하시키거나 성자를 피조된 범신의 하나로 전락시킨다면 구원 문제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2. 이 교리의 역사적 논쟁을 살피면
1) 삼위일체란 용어를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은 초대 교회 교부 “테들리안”(AD 160~240)이었고, 이 교리가 확립된 것은 니케야 회의(AD 325)와 “콘스탄티노블” 회의(AD 381)에서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이때에 “아리우스”는 “그리스도는 피조물이라” 하였으나 “아다나시우스”는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질이요 동등하시며 성령님도 성부, 성자와 함께 예배의 대상이며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는 주장을 하였고, 그 주장에 따라 채택되었다고 합니다.
2) 그러나 2,3세기 이후에도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이단자들이 있었으니 예를 들면 “소기노파”(1539~1604), “유니테리안 주의”(소기노파에서 발전된 것)인데 이들은 주장하기를 “그리스도는 사람이며 성령은 사람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힘이라”하여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령님의 인격성을 부인하였고, 근대신학자 슐라이막커(1768~1834)는 “삼위란 하나님의 세 가지 면을 말하는 것이라”하므로 유일신은 강조하였으나 삼위의 독립적 인격성은 부인하였다고 합니다. 그 외에 헤겔(1770~1831)과 돌렐(1809~84)과 말텔센(1808~84) 등은 삼위일체의 의미를 철학적 논법으로 부인하였다고 합니다. 3세기의 신학자 “오리겐”(185~254)도 교리와 신앙에는 공이 많았으나 “성자는 성부에게 종속되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께 종속한다”는 등급설(차위설)을 주장하므로 그릇된 교리의 씨를 뿌렸는데 이것이 4세기의 사람 “어거스틴”(354~430)에 의하여 설복을 당하였고, 그 후 칼빈 시대에 와서 “삼위의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님의 순서로 나타나시고 각 사역의 특징은 있으나 차위는 없다”는 것을 결정하였다고 합니다.
3) 그리고 역사적으로 내려오면서 삼위일체의 성격을 설명할 때에 여러 가지 비유를 드는데 예를 들면 “태양은 하나이나 태양 자체와 빛과 열이 나누어지고 물은 하나이나 기체와 고체로도 변하며 나무도 뿌리, 줄기, 가지로 변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으며 어거스틴은 한 사람에게 지, 정, 의가 있는 것으로, “헤겔”은 정, 반, 합으로, “쉐드”는 주체, 객체, 주객체로 설명하였으며 또 한 정부에 입법, 행정, 사법부가 있는 것으로 설명한 예도 있고, “바르트”는 계시자 하나님과 계시의 본체인 예수님과 계시의 역사자인 성령으로 구별하여 설명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비유적인 설명에 대하여 칼빈 선생은 말하기를 거룩하시고 인격적이며 신비하신 존재를 무인격적이고, 속된 것으로 비유하여 설명함은 부당하며 “신비에 속한 하나님으로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3. 하나님이 삼위로 나타내신 사실을 성경에서 발췌하면
1) 구약에서 ① 하나님이란 “엘로임”이 복수 대명사로 표기되는 점. ② 창 1:26에서도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하시므로 복수를 사용하신 점. ③ 창 16:7,13에서 “여호와의 사자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한 분으로 나타나신 점. ④ 창 18:2,19에서 세 사람으로 나타나신 존재가 곧 하나님이신 사실. ⑤ 창 19:1,21에서 두 사람으로 나타나신 존재가 곧 하나님이신 사실. ⑥ 사 48:12~16에서도 삼위의 하나님을 나타내주셨습니다.
2) 신약에서는 ① 요 1:1~3에서 선재하신 창조자 예수님으로 ② 마 3:16~17에서 예수님이 세례받으실 때 성부와 성령이 나타나심. ③ 마 28:19에서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하심에서 ④ 눅 1:35에서 “성령과 능력의 하나님과 나실자 예수님”으로 나타나셨고, ⑤ 요 15:26에서 “성령님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오셨다” 하셨으며 ⑥ 요한복음 14~16장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인 예수님 자신과 성령 보혜사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⑦ 고전 12:4~6에서 “성령, 주, 하나님”을 말씀하셨으며 ⑧ 고후 3:14에서 “삼위의 이름으로 축복” 하셨고, ⑨ 빌 2:6에서 “예수님을 근본 하나님”으로 ⑩ 골 1:16에서 “예수님을 창조자”로 말씀하셨으며, ⑪ 벧전 1:2에서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자, 예수님은 대속자, 성령님은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자로 구원 사역에 분담된 것”을 나타내신 것 등입니다(기독교신앙백과 34, 36번을 참고하십시오).
40. 제 37 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공부” (마 3:16~17)
기독교의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 대하여 성경이 말씀하신바 대로 공부하겠습니다.
1.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은 한 본질의 하나님이시면서 성부, 성자, 성령님, 삼위로 존재하심을 뜻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님은 한 하나님이시므로 동일한 뜻 안에서 역사하시고, 독립된 인격으로 서로 의논할 수도 있으며 동일한 뜻 안에서 분담, 또는 각위의 단일 행사를 하실 수도 있습니다. 본질, 권위, 영광의 자격이 동등하시고, 각위의 특징을 나타내실 수도 있습니다.
2. 따라서 삼위일체의 특징은 부분이시면서 전체이시고, 각위이면서 완전, 동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뜻합니다.
3. 삼위일체의 의미를 나타내신 성경은 구약에서 1인칭 복수로(창 1:26, 11:7), 예수님을 나타낸 여호와의 사자로(창 16:7, 13, 18:1~21, 19:1~28, 말 3:1) 출현하셨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마 3:16,17) 나타나셨으며 마 28:19에서 “성부, 성자, 성령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4. 삼위하나님이 출현하신 절차는 먼저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고(눅 1:76~79, 요 3:16), 다음에 성부와 성자가 성령님을 세상에 보내시므로(요 14:26, 15:26, 16:7) 성령님이 성도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롬 8:9, 11, 고전 3:16, 갈 4:6, 엡 2:22, 약 4:5).
5. 삼위와의 관계에서 성부 하나님의 특징은 창조 사역에서 주동 역할을 하셨고(고전 8:6, 엡 3:15, 히 12:9, 약 1:17), 선민 통치에 관하여서도 주동하셨으며(신 32:6, 렘 3:4, 말 2:6, 10) 영적 자녀의 아버지가 되셨고(마 5:45, 6:6~15, 롬 8:16, 요일 3:1), 또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되셨으며(마 6:9, 요 16:23) 성자 성령님 중에 1위격이요(마 28:19), 구속 사업을 계획하시고 대표하신 일(시 2:7~9, 40:6~9, 사 53:10, 마 12:32, 요 6:27~38, 엡 3:1~6)로 나타나 있습니다.
6. 성자는 예수님이시며 삼위 중 2위에 속하고, 역시 하나님이시며 또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고후 11:31, 엡 2:3). 하나님의 아들이 어찌 하나님이 되시느냐에 대하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함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는 신령적, 도덕적 관계를 포함합니다. 신령적 관계란 예수님의 성자 되심이 성육신 이전부터 갖고 계셨던 것이요(요 1:14,18, 갈 4:4), 도덕적 관계란 인간 세계에서의 부자 관계를 연상케 하는 것입니다. 또 독생자이시니 이는 하나님과의 고유적 관계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과의 실제적 관계를 차람되히 여겼으나 엄연한 사실이며(마 26:63, 요 5:18, 10:36) 친히 아버지라 부르셨고(마 6:9, 7:21, 요 20:17),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홀로 가지셨으며 홀로 나타내셨고(마 11:27), 예수님 자신이 신인 것과(요 5:18~25, 히 1:5) 하나님의 아들되심이 직능이나 윤리적 사실과 관계없이 구약시대부터 불리워졌으며(삼하 7:14, 욥 2:1, 시 2:7, 눅 3:38, 요 1:12) 성육신전에는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요 1:1).
7. 예수님이 성자의 칭호를 가지신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본래부터 아들이기도 하셨지만 또 한 가지 이유는 성령님에 의하여 성육신으로 출생하신 뜻도 있는 것입니다(눅 1:32~35, 요 1:13).
8. 또 예수님을 인격적 신분으로 나타내신 것은 독생자, 먼저 난 자, 맏아들이란 뜻과(골 1:15, 히 1:6)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말씀(요 1:1~14, 요일 1:1~3), 또 예수님을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신 말씀(고후 4:4, 골 1:15, 히 1:3)이 나타내주셨습니다. 이 사실은 성육신 이전의 상태에서도 그렇게 적용된다는 말씀입니다.
9.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원적 생산이 되십니다.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이 다같이 영원하시나 “아들”이란 용어는 아버지를 근거로 하며 논리적 순위로도 성자가 2위이기 때문입니다. 또 독생자라는 칭호나 예수님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오셨다”는 말씀이(요 1:4~9,14~18, 3:16~18, 히 11:17) 영원적 생산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자칫하면 이 출생관계로 아버지와 아들 간에 동질이 아니라거나 본질적 선후에 우열이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그 이유는 성자의 출생이 중간 시기에 아버지의 뜻만으로 출생하신 것이 아니고, 영원전부터 아버지와 아들 간에 수의적으로 출생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엡 1:4). 이것을 필연적, 영원적 생산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 사이는 중간에 발생하여 변화를 갖는 것이 아니며 무에서 2위가 생산되셨거나 거기에 신인양성을 전달한 것도 아니란 뜻입니다. 생명도 “아버지에게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안에 있게 하셨다”(요 5:26)하셨는데 이 말씀을 아들의 생산 또는 아버지의 생명에서 분할 받으신 것처럼 이해하면 안되고 본래 가지신 생명이 2위의 생명으로 분별된 것으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의 사상과 언어가 있는데 그것을 아들이 자기의 사상과 언어로 분별있게 표현한 것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들에게 갖게 하신 생명이란 하나님의 본질적 생명이 아니고, 인간에게 주시는 영적 생명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요 3:3, 엡 2:1). 하나님과 예수님은 본래부터 영원한 생명의 소유자이십니다.
10. 성자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증거에 대하여
1) 거룩한 성호가 부여된 점(사 9:6, 빌 3:21, 계 1:8)
2) 하나님 고유의 속성이 부여된 점, 즉 영원하신 분(사 9:6, 요 1:2, 계 1:8, 22:13), 전능하신 분(사 9:6, 빌 3:21, 계 1:8), 무소부재하신 분(마 18:20, 요 3:13), 전지하신 분(요 2:24~25, 21:27, 계 2:23), 불변하신 분(히 1:11~12, 13:8)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신적 사역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창조 사역(요 1:3, 골 1:16, 히 1:2,10), 기적과 특별 섭리 사역(눅 10:22, 요 3:35, 5:19~29, 행 10:42, 빌 3:21, 딤후 4:1, 17:2, 엡 1:22)이며,
6) 종말적 파멸과 세계를 변화롭게 하시는 일(히 1:10~12, 빌 3:21, 계 21:5)을 하시고
7) 또 하나님께서 신적 존엄을 아들에게 주신 사실(요 5:22~23, 14:1, 고전 15:19, 고후 13:13, 히 1:6, 마 18:15)등으로 나타내셨습니다.
11. 특별히 성자에게만 있게 하신 사역은
1) 속죄사역과(엡 1:13~14, 마 9:2, 막 2:7~10, 골 2:13)
2) 하나님의 빛을 비취는 사역(마 11:27, 요 1:9)과
3) 만물이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나고 보존되게 하신 것과(요 1:3,10, 히 1:2,3)
4) 중보사역과(히 5:5~10, 요 14:13~14)
5) 부활하시고 심판하시는 일(마 15:31~32, 요 5:19~29, 행 10:42) 등이라고 할 것입니다.
12. 성령님도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성령님에 대한 설교집”으로 대신합니다.
41. 제 38 과 “잘못된 말세 지식” (살후 2:1~12, 계 13:16~18)
잘못된 말세 지식을 유포하는 이장림의 책을 읽어보면 그의 주장이 성경적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이 글은 92년 8월에 증언한 것임). 그 책의 내용에서 하늘의 계시가 성경을 주신 시대로 끝났다고 한다면 “그것은 세대주의 주장이다, 하나님과의 만남 바로 그 자체가 계시다, 계시는 중단 된 것이 아니다 하므로 여러 사람이 받은 계시를 믿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의 받은 계시로 92년이나 93년도에 예수님이 재림할 것으로 이미 알고 있었을 때 신자 가정에서 순수하게 자라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87년 6월 27일부터 계시를 받는다”하여 만나 본 다음 자신은 “책을 써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였고, 그 책이 바로 잘못된 말세 지식을 선전하는 “다가 올 미래를 대비하라”는 책인데 그 책이 87년 6월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편의상 그 계시 받은 여학생의 이름을 진군이라고 호칭한다는 것입니다. 이장림씨가 그에게 말하기를 “나는 92년 93년도에 종말 관계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데 너는 어떠냐?”하니까 그도 자기 말에 깊은 공감을 표시하면서 “자신은 92년 5월 9일에 북한에 가서 8월 26일에 순교할 것이라”고 계시를 받았으므로 그가 5년 후에 순교의 제물될 일에 대하여 숨막히는 전율을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무서운 꿈을 꾸면 잠시 공포가 오듯이 사이비한 계시에 현혹되어 손해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제가 이 말씀을 적당한 때에 드립니다. 92. 7. 26. 낮예배). 그 이유는 요즈음 잘못된 선전도 많은 중에 지난 19일 밤 11시 SBS TV 방송에서 “영의 세계와 무당의 신 내리는 일”에 대하여 상세히 방영한 일이 있었고, 또 화요일 밤 11시에는 바로 이 문제(잘못된 말세주의자들)에 대한 방송이 있어서 적당한 때에 증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92. 5. 9.에 진군이 북한을 갔습니까? 북한에 전도의 문이 열렸습니까? 그러니까 87년도에 거짓말한 책이 92년 5월 9일에 거짓말로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더 이상 비판할 가치는 없으나 성경과 세상의 종말에 대해 참고하시도록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1. 92. 10. 28. 24시에 “계시로 받았다” 하지만 이것을 예측할 만한 성경적 근거가 있는가? 에 대하여 주장할 것이 못되는데 분별없는 자들은 이것을 주장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속담에 방귀 뀌면 똥 쌌다”는 말처럼 “비슷하면 사실이라”고 믿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경북에서 농약을 식용유로 알고 먹었다가 죽은 사례가 있습니다. 잘못 증언한 것을 진리로 알면 큰 손해가 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잘못된 주장을 예로 들면
1) 하나님이 6일간 창조하시고, 7일에 안식하셨기 때문에 “6”은 세상의 수이고, “7”은 천국의 수이므로 세상은 6000년만에 끝난다는 것으로 세대주의 학설을 인용한 것이요,
2) 또 6일 창조 기간을 6000년으로 계산하는 근거는 벧후 3:8의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하신 뜻이 그 뜻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예측일 뿐 밝혀진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예측은 그렇게 생각해볼 뿐 주장할 근거는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3) 세대주의 학설이란 성경을 3시대 또는 7시대로 나누어 구원 계획을 다르게 설명합니다. 3시대란 인류 시조부터 아브라함까지 2000년, 아브라함 이후부터 예수님까지 2000년, 신약시대 2000년으로 구분하는 것이고, 7시대란 천년씩 7시대, 7천년으로 구분하는데 역시 구약 4000년, 신약 2000년을 무죄 시대, 양심 시대, 언약 시대, 율법 시대, 은혜 시대, 천년 왕국 시대로 나누어 시대마다 구원 방법이 달라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은혜로(노아 시대), 언약으로(아브라함 시대), 율법으로(모세시대), 십자가로(은혜 시대) 구원 계획이 변한다고 하지만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고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행 4:13).
4)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된 자들은 구약 시대 4000년과 신약 시대 2000년이 다 되어 오기 때문에 말세가 긴박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도 2000년을 채우는 1999년 종말에 오시려 하였는데 1999년이 1992년으로 7년을 감한 것은 “말세의 날수를 감한다”는 예수님의 예언(마 24:22)에 의한다고 하는 것입니다(막 13:30, 고전 7:29).
5) 그러나 예수님은 “감한다”는 말씀만 하시고 “얼마를 감한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재림 날짜는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 주장하는 사람들은 계시록에 나타난 “7년 대환란”을 감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계 11:2, 11:14, 13:5, 단 7:25, 12:17). 전통적 교회는 7년 대환란 기간(한때 두때 반때, 1260일)을 교회 시대로 해석합니다.
6) 따라서 그때가 92년도란 해석과 10월 28일이란 날짜도 창조 이후 6000년이란 역사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속사를 말씀한 책일 뿐 인류 연대 역사를 말씀한 책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 연도도 역사가의 착오에 의하여 BC. 4년에 예수님이 출생하신 것으로 교정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주후 1년이 BC. 4년으로 교정되면 신약의 연대가 4년 착오가 생기는데 어떻게 1999년에서 7년을 뺀 92년을 계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이유들로써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계산한 것은 거짓이요, 몇사람의 잘못된 선전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주장한 실례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이장림: 미래대비책 20P 전후 인용한 것) 초대 교회 당시의 “히폴리투스”는 그 당시에서 “250년이 남았다” 하였고, “락탄티우스”는 200년, 또 그 당시에 다른 주장은 AD. 195년이라고도 했다는 것이요, “어거스틴”은 한 때 지상의 교회 존속 기간을 1000년으로 잡아서 “AD. 1000년에 종말이 온다”는 견해를 피력한 일이 있었다 하며 17세기 재세례파에 속한 “샤베타이 체비”는 1648년을 “구속의 해”라 하였고, 안식교 창시자 “윌리암 밀러”는 1844년 8월 21일 이라고 주장하였다가 그 날에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니까 10월 22일로 다시 연기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안 오시니까 “하늘 성소를 정결케 하시는 것을 잘못 표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해방 이후에 마산 지방에서도 “예수님의 재림이 산으로 오신다”하여 소, 돼지를 있는대로 잡아 먹고 산에 올라가 기다리다가 헛되이 내려 온 사실이 있었다는 말을 돌아가신 선배 목사님을 통하여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요즈음 예수님의 재림이 10월 28일 24시에 오신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기 때문에 이렇게 일깨워주려고 노력을 하는데 기성 교회 목사들은 일깨우지도 않고 계시도 못 받았으면서 오히려 바른 사명자들을 정죄하고 있으니 될 일입니까?” 하면서 기성 교회를 비난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10월 28일에 오신다면 지금쯤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예수님만 기다려도 괜찮을 것입니다.
3. 과연 그들의 주장이 옳은 것인가?에 대하여 다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장로 교회의 성경관 교리에서 “표준 계시는 성경 66권으로 끝났고, 더 주시지 않으며 오로지 신앙의 표준은 성경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이나 다른 방법을 통하여서도 자기를 계시하실 수 있습니다(요 21:25). 그러나 신앙과 구원을 위한 표준 계시는 성경 66권으로 끝내신 것입니다(유 3). 그런데 또 계시를 받았다니까 그 계시는 다른 영으로부터 받은 것이 틀림 없는 것입니다.
2) 성경에는 많은 거짓 영이 활동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말세에 그런 영의 활동이 많을 것이므로 “미혹을 받지 말라”, “많은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와서 미혹할 것이며 따라서 거짓 선지자도 많이 일어날 것이라”(마 24:4~11), 또 그들은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며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들도 미혹하려고 할 것이라(마 24:23~26) 그 때에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고 참 믿음이 광야에 있다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또 살후 2:1~3에 보시면 “혹 영으로나 말로나 사도로부터 받았다”는 편지를 내보이면서 “주의 날이 이르렀다 하여도 두려워하거나 동심하지 말라 이런 미혹자, 배도자, 불법자, 대적자들이 주 재림 전에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상한 말이나 기적이 떠돌면 더욱 주의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위하여 시험을 친다 하고 아들을 지붕 위에 올라가게 한 후 뛰어내리라고 하였습니다. 아들이 다치면 어떻게 합니까? 한즉 “다리에 힘을 주고 뛰어내리면 괜찮다”하여 아들은 아버지가 받아 줄줄 알고 뛰어내렸는데 받아주지도 않고 다리만 부러졌습니다. 그때 아들이 “아버지도 믿을 수 없다”하니까 “그런 줄 알고 재산을 잘 관리하라”고 당부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경 외에 믿을 것이 없는 줄로 알라는 뜻입니다.
3) 성도들이 거짓자들의 말을 믿지 않으니까 사탄은 수단을 써서 여러 사람에게 계시를 주어 “여러 사람이 같은 말을 하면 유혹을 받을 것이라”하여 여러 사람이 같은 환상, 같은 음성을 들었다고 하여도 동요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장로교회 성도는 히 1:1, 계 22:18~19 등에 근거하여 표준 계시의 완성을 믿고 추가 계시를 믿지 않기 때문에 누가 “계시를 받는다”하면 벌써 잘못 가는 신앙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재림의 날짜를 말하는 것도 역시 그런 것입니다(마 24:36, 행 1:7). 그러나 거짓된 자들은 하나님이 숨기신 것을 연구하여 아는 것이 바른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숨기신 것은 하나님이 밝히셔야 알 수 있습니다.
4. 하나님이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숨기심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재림일을 숨기신 이유는 마치 인간의 죽을 날짜를 모르게 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죽을 날짜를 알아서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10월 28일에 예수님 오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양어장을 하다가 재산을 정리하고 수억의 재산을 10월 28일 전에 모두 소모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는 날까지 자기의 사명을 다하고 죽음을 항상 대비하다가 때가 되면 떠나야 하는 것처럼 성도의 말세 준비도 그렇게 하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살 5:4~5에서 “말세에 예수님이 도적같이 오실지라도 빛의 자녀들은 깨여 근신하므로 도적 맞는 어리석은 자들처럼 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재림 날짜를 숨기신 것은 성도들의 경성과 현실 생활의 성실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2) 만일 재림 날짜가 계시 되었다면 성경의 예언이 다 어긋나는 것입니다. “도적 같이 오신다”(마 24:43, 살 5:4)는 말씀도 맞지 않을 것이고, “노아 때에 된 일 같이 된다”(마 24:38)는 말씀도 그렇고, “매를 갈다가 하나만 들려 올라간다”(마 24:41)는 말씀도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 10월 28일 저녁에만 교회에 나가서 회개하고 주여 주여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3) 성경은 사도들의 말씀만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유 17). “허망한 풍설은 물론(출 23:1)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과 그 이적도 믿지 말고(신 13:1)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며(고전 4:6) 치우치지 말고(수 1:7~8) 사도들의 터 위에 굳게 서라(엡 3: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곁에 있는 사도들에게 숨기신 것을 이 세대의 어린 아이에게 계시하시겠습니까?
5. 유럽 공동체, 화폐 통일에 관한 것을 말세 이슈로 등장시키는 것입니다. 지금 E.C. 국가가 12개국인데 금년 12월 31일에 통합되어 내년부터 시행된다는 것입니다. 유럽의 화폐 가치가 비슷한 나라들끼리 돈을 통일시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유럽의 인접국들 간에 왕래가 빈번한 중에 돈의 단위가 다르니 상품 거래에 얼마나 불편이 많습니까? 이런 것들을 해소하기 위하여 인접국들 간에 경제 공동체를 만들 법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말하는 사람들이 왜 이것을 선전할까요? 물론 이상하고 기발한 증언으로 관심을 끌기 위함이겠지요. 또 계 13:1에서 “바다에서 나온 짐승에게 열 뿔과 일곱 머리가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의 열 뿔이 유럽 공동체의 열 나라와 수가 같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유럽 공동체국은 10개국에서 12개국으로 또 늘어났습니다. 앞으로 더 늘어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합리성 없는 증언이 많은 것을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6. 또 그들은 “어떤 비행사의 고성능 카메라에 천국이 잡혔다”, 또 “예수님의 얼굴을 사진 찍었다”하는데 그것도 잘못된 말입니다. 그 이유는 고전 13:12에서 “그때에(천국에 갈 때)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본다”고 하셨기 때문이요, 또 천국은 카메라의 사진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그때에 가서 보는 것이며 현재는 요한계시록으로 보고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아야 하니까 그 밖에서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기적이든 사실과 비슷하든 믿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7. 또 세대주의를 동조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와 말세 징상에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사실을 마 24:32과 눅 21:29~31에 근거하지만 여기의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국을 의미한다는 근거가 없고, 선민국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아브라함 때부터 선택하여 계시의 기관으로, 축복의 선민으로, 또 메시아 계통으로, 복음 전파의 선구자로 쓰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때 그 나라를 버리셨습니다. 선민적 축복이 떠난 것입니다. 그러나 메시야 약속과 복음의 선구자 역할은 약속대로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된 다음부터는 롬 2:28에서 “표면적 유대인은 유대인이 아니요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하셨으니 이 말씀은 족속을 따지는 유대인은 아무 소용이 없고,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롬 3:29에서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하셨고, 오순절 당시 이후에는 이방인도 꼭같은 성령을 받으므로 하나님은 민족을 차별하시지 않음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어떤 계시의 기관으로 쓰시는 것은 이방인들이 은혜를 받고 성경이 완성된 후부터 끝난 것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세론 또는 주재림의 일자와 관련한 잘못된 주장에 현혹당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 666의 의미를 컴퓨터와 관련하여 말하거나, 유럽 공동체 문제, 이스라엘의 회복 문제, 공중에서 사진을 찍었다는 등, 성경에 없는 말로 잘못된 말세지식을 유포하는 일들에 대하여 유혹당하는 성도가 없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42. 제 39 과 “안식교 이단에 대하여” (골 2:16~17, 요일 2:22~23)
저희들 주변에 “안식교”라는 이단 교파가 있는데 이것은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적인 교파로써 다른 교파만큼 수가 많지는 않으나 그들의 선교 활동이 너무 적극적이기 때문에 크게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20년 전의 통계를 보면 세계의 신도 수가 120만명(미국:31만), 교회 수가 3200개, 인쇄소 44개, 전도 출판물 309종(218개 방언으로 번역), 초등학교 4426개, 중,고,대학교 333개, 병원 106개, 진료소 104개, 사회 사업 기관 26개, 선교사 1400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지금은 몇 갑절 늘어났을 것임). 그 당시에 미국 감리교의 선교사는 1500명인데 감리교 교세의 1/10밖에 안 되는 안식교가 1200명의 선교사를 보냈으니 다른 교파의 10배로 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시조사”라는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이나 유인물, 삼육 중, 고, 대학이 있고, 그들의 끈질긴 선교열은 기독 성도들에게 큰 경각심을 일으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단 교파에서 봉사와 선교 열심은 배울지라도 그들의 교훈과 신앙의 유혹을 받아서는 안 되겠기로 몇 가지 그 이단성을 지적해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안식교는 그 시작이 70년 밖에 안된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점으로 탄생한 기독교를 믿는 성도는 70년 밖에 안된 이상한 종교를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 때부터 시작하여 2000년의 전통을 갖고 있는데 반하여 안식교는 1915년에 세상을 떠난 Ellen G. White란 여인이 교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독교 아닌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 사람으로 그의 종교는 성경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2. 안식교는 성경 해석을 잘못 한데서 파생한 종교입니다. 벧후 3:16에 보시면 “성경을 억지로 잘못 해석하다가 멸망에 이른다” 하셨는데 바로 안식교가 성경 한 절을 잘못 해석한데서 비롯된 이단 종교입니다. 단 8:13~14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매일 드리는 제사와 망하게 하는 죄악에 대한 일과 성소와 백성이 내어준 바 되며 짓밟힐 일이 어느 때까지 이를꼬 하매 내게 이르시되 2300주야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함을 입으리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예언이 있은 시대는 “다니엘”이 바벨론 포로에 들어가 있을 때이니까 그 당시 이미 이스라엘은 정치적, 종교적으로 망한 후였습니다. 그런데 “매일 드리는 제사와 성소와 백성이 내어줌이 되고 망하게 하는 죄악이 어느 때 끝나서 성소가 회복될 것이냐? 하니 2300주야 후라”고 하셨으니까 여기에 2300주야는 6년이 좀 넘는 기간이고 그 기간은 주전 171년~165년까지의 수리아왕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성전 제도를 크게 핍박했던 암흑 시기요, 그 시기를 지나서 마키비왕이 신앙의 자유를 주고, 성전을 재건한 때를 예언한 것이라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849년에 죽은 윌리엄 밀러라는 사람은 이 말씀에서 성소가 정결해지는 것은 예수님 재림 때에 될 일인데 그 때가 2300년 후라는 것이요(2300주야=년으로), 언제부터 인고 하면 단 9:25의 “예루살렘 중건영이 내린 때부터이다” 그런고로 “구약 성전을 주전 475년에 중건했으니까 거기에 2300년을 더하면 주후 1884년이 예수님 재림하는 때라”고 한 것입니다. 또 거기에 10월 22일을 재림 날짜로 꼽았는데 그때는 지금부터 꼭 100년 전이고, 이것을 주장한 밀러가 죽기 5년 전입니다. 그래서 모든 기독교인들이 떠들썩했는데 그만 재림을 안 하시므로 변명을 못했는데 그 제자 Hirran Edson이란 사람이 “옥수수밭을 거닐다가 백마를 타고 공중으로 오시다가 천상 성소로 되올라가시는 예수님을 보았다”고 주장을 하여 “이것은 틀림없는 그의 재림인데 지상에 오시지 않고 되돌아간 것이다 그 이유는 지상의 성도의 죄를 못다 처리했기 때문에 하늘 보좌에서 그것을 도말하시기 위하여 재림을 늦추고 되올라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Hahr. Goiser). 이렇게 해서 거짓말 된 위기를 넘겼는데 그후 1915년에 88세로 죽은 White란 여인이 교주로 숭앙을 받게 되면서 그때에 교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 근거한 종교가 아니고, 인간이 받은 환상에 근거한 종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따라서 이 종교는 성경 해석 잘못에서 발생한 종교요, 또 인간 계시에 의해 생겨진 종교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마 24:36, 행 1:7에는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아무도 알 사람이 없다” 하셨는데 그들은 일자를 알았으니 그것도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4. 또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1) 예수님은 “범죄성을 물려 받은 꼭 같은 인간일 뿐이다”하므로 신성과 성결한 인성을 부인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독생자 되심도 믿지 않기 때문에 성탄절도 무시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요일 2:22에 근거하여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부인” 하니까 적그리스도임이 분명하고,
2) 속죄는 누가 하느냐?할 때 레 16:8~에서 “아사셀 양”이 하는 것이고, 구약의 제물된 짐승이 대신 희생되어 죄값을 지불하였으므로 예수님은 천상 보좌에서 앉아서 회개하는 성도의 죄를 하나 하나 도말하는 심부름 역할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조사 심판” 또는 “예비 심판”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죄값은 구약의 제물인 아사셀 양이 대신 지고 예수님은 속죄 받는 자의 죄를 도말하는 일만 하신다” 함으로 예수님을 대속자로도 믿지를 않는 것입니다.
5. 죽은 자의 영혼은 잠을 잔다고 하지만 이것은 눅 16:9(부자 나사로의 대화), 계 6:11(죽은 자의 영이 호소함)에도 위반이 되고,
6. 영혼의 멸절설을 주장하여 지옥 갈 자는 아주 죽어 없어지기 때문에 고통할 근거도 없다. 그러니까 지옥의 고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 21:1~8, 20:10, 15에서는 영원한 고통을 말씀하셨습니다.
7. 율법주의 사상을 고수하여 토요일 안식일과 고기 음식 가리는 일을 하며 신약적인 것을 무시하는 교파임.
안식교는 이단이라는 것만 아시고 많이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43. 제 40 과 “마호멧과 회회교” (히 1:1, 계 22:18~19)
1. 마호멧은 회회교의 창시자로 주후 570년 아라비아 멕카시에서 “아브다”란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아브다” 제사장이 숭상하는 종교는 출처 불명한 검은 돌로 신전을 짓고, 검은 돌을 숭상하는 자연신론적 종교였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은 그 검은 돌이 아라비아 사막에 가끔 떨어지는 운석(별똥)이었다고 합니다. “마호멧”은 조실부모하여 고아가 되자 숙부 “아브랄리브” 집에서 양육을 받다가 나이가 들면서 유리하는 생활을 하였고, 또 상점의 점원으로 전전하였으며 외국을 상대로 상품을 수출하는 점포에서 하수인 역할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때에 애굽과 팔레스틴과 북페르시아와 인도에까지 수출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그 상점의 주인이 세상을 떠나자 지배인이 되었고, 그 당시 40세 된 상점 주인의 처가 25세 된 “마호멧”에게 청혼하여 부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마호멧”은 수출 상업차로 팔레스틴을 여행한 일이 있었고, 그때마다 유대인들과 상종하면서 유대주의 종교를 배운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에 “알라”신을 믿었는데 이 “알라”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방언에 의하여 와전된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가 높은 산에서 기도하던 중 40세 때에 알라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는데 그 계시의 내용은 가브리엘 천사가 자기에게 나타나서 “너는 그리스도의 보혜사”라 하였으므로, 마호멧 종교의 창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그의 아내가 제일의 제자요, 친족 중에서 추종자가 생겼고, 그 후에도 부유층의 사람들이 따르므로 단체를 조직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후 622년 6월 22일(마호멧 52세때)에 다신교도들의 핍박으로 “멕카”를 떠나 북편 땅인 “메디나”시로 도피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라비아는 광대한 사막만 있고, 인구가 희소하여 도시도 많지 않은 중 “멕카”는 종교와 상업의 제일 도시였는데 거기에 비하여 “마호멧”이 도피한 “메디나” 시는 “멕카” 다음 가는 도시였다고 합니다. 그때 “메디나”의 사람들은 그들의 우상 종교의 의식 때문에 자주 “멕카의 신전”을 순례하여야 할 형편이어서 여비 관계 등으로 늘 부담을 느끼며 생활해 오던 차 새로운 종교의 교주와 단체가 피신을 왔다고 하니까 “메디나”의 시민들이 그를 크게 환영하면서 메디나 시에도 멕카에서 처럼 종교의 중심지를 만들자고 요청을 하여 “마호멧”을 교주로 받들고 비용을 제공하며 협조하기를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호멧”은 어렵지 않게 교주가 되어 자기가 받은 여러 가지 계시대로 종교 교육을 시킬 때에 무사 교육 까지 함께 시켜서 그는 교주와 함께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메디나”에서 종교적, 군사적 힘을 8년간 쌓은 후 주후 630년에 자기의 부하들을 이끌고 “멕카”를 순례하니 옛날의 친지들이 “그곳으로 돌아오라”는 권면이 있음과 함께 “멕카”에는 마호멧의 군사를 대항할 아무런 방비책이 없는 곳이라 무난하게 멕카의 종교적 실권도 잡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마호멧”은 종교적,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그가 “메디나”로 도피하던 622년 6월 22일을 회회교의 기원으로 하여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종교적 실권과 무력을 장악한 “마호멧”은 계속 아라비아 변방의 넓은 땅을 점령하여 “사라센 제국”을 세워 회교 국가를 만들고 다시 멕카에 온지 2년 만에 죽으므로써 그 나이 62세에 9명의 젊은 아내를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마호멧”은 첫 아내인 “카디자”가 죽은 후 15회의 결혼을 하였으며 그 나이 53세 때에는 9세의 소녀와도 결혼을 한 예가 있으므로 명실공히 일부다처 주의의 실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마호멧교”라는 것은 그 교주의 이름을 붙인 명칭이고, “이슬람교”는 복종을 전제하는 교리의 의미를 부각시킨 명칭이며 “회회교”란 것은 이 종교를 동방에 전파한 회흘 민족의 이름을 따서 부르는 명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 교리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코란”이란 경전에 의하여 종교 생활을 하는데 이 “코란경”은 마호멧이 계시를 받은 114장의 단편집입니다. “코란”이란 “읽는다”는 뜻이고, 114장이 각각 제목별로 되어 있으며 연결성이 없고, 각 장마다 제목과(예:달, 별, 아브라함, 세례요한, 예수, 천국, 지옥 등) 내용이 있은 후 말미에는 꼭 계시받은 장소가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교리를 요약하면 “6대 교리”와 “4대 실행”이란 것이 있으니 이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6대 교리는 ① 알라-“알라”는 절대 유일신이요, 창조자요, 심판자라고 믿음. ② 키스메트-신에게는 예정이 있으니 무조건 신의 섭리와 예정에 복종해야 된다함. ③ 천사들-천사도 신의 피조물인데 타락한 천사는 마귀가 되었다고 믿으며 ④ 코란경-가브리엘 천사를 시켜 마호멧에게 준 계시로써 여기에 글자의 착오도 없기 때문에 누구도 가감하지 못한다고 믿으며 ⑤ 예언자-예언자는 많으나 대언자는 6명 뿐으로 그는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마호멧 인데 노아는 아담보다, 아브라함은 노아보다 높아서 예수는 모세보다 높고, 마호멧은 예수보다 높다는 식으로 먼저 나온 대언자보다 늦게 나온 대언자가 가장 권위가 있고 높다고 믿으며 ⑥ 부활과 심판-세상 끝날에 모든 죽은 자는 다 살아나서 심판을 받아 천국이나 지옥이나 그 중간으로 가게 되고, 심판날에 천사는 “알라”를 공경하고 “마호멧”을 믿은 사람만 천국으로 가게 되며, 천국 중앙에 생명나무가 있어 그 가지가 사면으로 퍼졌는데 언제나 꽃이 피고, 무르익은 열매가 열러 있으며 그것을 쳐다보고 먹었으면 할 때에는 손을 들어 따기 전에 그 가지가 입으로 늘어져서 실과를 먹게 하고, 지옥의 한 복판에는 사망나무가 있어 열매가 맺히는데 보기에 먹음직하여 따먹으면 너무 쓰고 고약하며 사람을 괴롭게 하고, 생명나무 밑에는 생명수가 솟아 나와 온 천국으로 흐르는데 그 물가에는 기화 요초가 가득하고 아름다운 여자들이 영접해 준다고 함으로써 천국을 이성 교제의 즐거운 곳이라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는 속죄자, 십자가, 성경 말씀, 성령님의 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2) 4대 실행이란 기도와 시제와 단식과 순례입니다. ① 기도는 알라신에게 구하는 것으로 적어도 하루 5번은 멕카를 향하여 꿇어 엎드려야 하는 것이며 특히 금요일은(유대교의 안식일이나 기독교의 주일처럼) 회당에 모여 예배해야 됨. ② 시제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요, ③ 단식이란 것은 음식을 먹지 않고 절제하는 것으로 특히 “마호멧”이 처음 계시를 받은 9월에 행하고 단식을 안 할 때라도 돼지고기와 술은 먹지 않으며 ④ 순례는 모든 신자가 될 수 있는 한 자주 그리고 어려울 때는 평생에 한 번 만이라도 멕카에 가서 참배를 하라는 것입니다. 또 “멕카”시에 가면 “카바”란 신전이 있으니 그 신전의 검은 돌에 키스를 하고 우물에 가서 물을 마시며, 신전을 7회 돌고, 언덕에 달려가 돌 일곱 개를 던지고, 산간에 내려가 짐승을 잡아 희생을 드림으로써 순례를 마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4대 실행이니 여기에 성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제도적이고, 우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회교의 특징은 계시 종교가 아닌 자율 종교이며 천사, 예수, 부활, 심판 등 유대교의 영향을 첨가하였고, 무력적, 정치적 강압으로 선교한 종교요, 또 국교로 유지하는 종교이며 멕카를 향하여 흙에 입을 맞추는 우상 숭배의 종교요, 여자를 천시하는 일부다처 제도의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오늘에 와서 알려진 내용은 유대교는 구약만 믿고, 기독교는 구약과 신약을 믿으며, 회회교는 구약과 신약과 코란경을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4. 결론적으로 이 종교가 어떻게 전승되어 왔을까요? 주후 623년에 “마호멧”이 죽은 후 그의 장인 중 “베크르”란 사람이 1대 교주가 되었는데(calipk:회회교 교주, 국왕), 그는 국력과 교세를 확장하여 635년에 다메섹을 점령하였고, 636년에는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으며 641년에는 애굽의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였는데 그때 알렉산드리아의 보고인 도서관이 불타므로 많은 종교적 근거가 없어졌으며 650년까지 아프리카의 북해안을 점령하였고, 698년에는 유럽의 이스파니아를 점령하였으며, 732년에는 프랑스 점령을 실패한 대신 페르샤를 점령하였고, 멀리 서구까지 뻗쳐서 대 사라센 제국을 건설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이 종교는 정통 문제로 분규가 일어나서 동 사라센 제국과 서 사라센 제국으로 나뉘어졌고, 동쪽에서는 바그다드를 수도로 하고, 서쪽에서는 코르드바를 수도로 정하였는데 이 두 도시에 회교대학을 세워 신학과 학문을 가르치니 이웃 유럽국에서 국가의 금령을 어기고 여기에 와서 공부한 사람이 많았으며 아리스토텔레스(희랍의 철학가. BC. 384~322)의 철학도 여기에서 연구되었고, 또 이것이 나중에는 기독교 신학에서 출발한 프라톤(헬라의 철학자. BC. 427~347) 철학과 합류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동안은 동양족인 토이기족이 회회교의 주권자가 되어 서남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무대로 제국을 건설한 예도 있었다 하며 이 종교가 정통파인 시아파와 순니파와 수피파로 나뉘어져 있는데 시아파는 정통파로써 페르샤를 근거지로 회회교의 20%를 점하고 있고, 순니파는 코란경 외에 “순니”라는 전설을 믿는 파로써 터키를 근거지로 약 70%를 점하고 있으며, 수피파는 9세기경 페르샤에서 신비적인 철학자가 코란경 외에 계시를 덧붙인 것으로 전체의 10%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코란경 자체를 성경처럼 첨부한 것이니 이는 계 22:18~19을 위반한 큰 과오를 범한 것입니다.
44. 제 41 과 “거듭난 자의 범죄 문제” (롬 7:16~25)
1. 위의 제목으로 말씀드리게 된 이유는 “거듭난 자는 죄사함받고 완전한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 간섭을 받아 죄를 짓지 않으며 실제로 나타나는 범죄는 거듭난 자가 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속에 있는 사탄이 저지른 것이므로 따라서 거듭난 자(성도)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잘못된 교리가 유포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2. 그렇다면 위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성경에 근거한 말을 한 것일까요? 요일 3:9과 5:18을 찾아보십시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니라”(요일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말씀을 본문만으로 해석한다면 위와 같은 잘못된 주장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일방적 표현만으로 해석하면 안되겠지요. 전체적 내용과 실제적 문제와 표현상의 핵심을 파악하여 합리적으로 해석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잘못된 주장의 의미를 다시 설명드리면
1) 거듭난 자란 뜻은 요 3:3에 나타난 말씀으로, 새생명을 받는 중생이라고도 하며(딛 3:5) 하나님께로서 난 자요(요일 3:9), 하나님의 씨인 말씀과 성령님이 내주하심을 뜻합니다(요일 3:9). 어떤 이는 “중생의 체험을 해야 한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중생의 과정은 성령님께서 영적 새생명을 품부(주임, 접촉, 내주)하시는 사역으로 신비한 일이기 때문에 당사자가 감지하기 어렵고, 일단 거듭난 후에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인 성경에 신뢰감이 가는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서 성경을 진리로 믿게 되며 회개하게 되고, 또 사랑 실천이 싹트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체험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중생의 체험이 아닌 중생 결과의 체험이라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으나 바람의 역사는 감지할 수 있는 것처럼(요 3:8) 중생의 체험은 어려우나 중생의 결과는 자기의 변화됨으로 체험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중생)의 뜻을 혹 인격의 변화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성경의 거듭남은 인간 본질의 변화(영적 생명의 재창조)를 의미합니다.
2) “거듭난 자가 죄사함 받았다”는 뜻은 거듭난 것 자체가 변화요, 새출발이기 때문에 근본적 회개와 같은 것이므로 새출발하기 전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거듭난 자의 생애의 모든 죄까지 전부 담당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 13:10에서 “이미 목욕한 자는”이란 말씀이 전체적 범죄의 씻음(용서, 대속)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칭의(의롭다 하심 ; 롬 8:20)라고 합니다. 이 칭의의 성격은 정죄 또는 심판을 받지 않도록 보장하는 용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사함의 뜻이 완전한 의인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의의 공로를 힘입어 영원한 심판을 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단자들은 “죄사함 받았으면 의인이 된 것이 아니냐”하면서, “의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완전한 의인은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성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성화는 예수님의 거룩하심을 닮는 것으로 은혜 받은 분량에 따라 진전하다가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 완성되는 것입니다(소요리 문답 37문). 따라서 거듭나자 마자 완전한 의인(죄를 지을 수 없는)인줄 아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3) 또 “거듭난 자가 죄를 짓지 않는다”함은 실제적으로 보나 성경적으로 볼 때 맞지 않는 말이며 실제로 범하는 죄를 변명하기 위하여 “거듭난 영혼이 짓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짓는 것이라”함은 엄연히 자신이 지은 죄임을 알면서도 회피하는 억측에 불과한 것입니다. 타락 전의 아담을 사탄이 꾀어 죄짓게 한 것도 아담에게 책임이 있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지은 죄를 사탄에게 전가시키는 것은 잘못이요, 이런 잘못된 주장을 내세워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역시 잘못된 주장입니다.
4. 그러면 요일 3:9과 5:18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위에서 말씀 드린대로 거듭남을 뜻하는 것이요,
2) “죄를 짓지 아니한다”하심은 상습적으로 자신을 범행에 방임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연약할 때 범죄하게 되는 것 외에는 죄를 지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라”는 뜻은 거듭난 성도를 죄짓지 않도록 붙드시는 은혜로써 성령님께서 능력있는 말씀을 성도의 마음에 심고(눅 8:11, 벧전 1:23, 약 1:21), 말씀과 함께 역사하여 유혹을 이기게 하시는 힘입니다(행 21:32). 그렇게 될 때에
4)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하셨으니 하나님이 낳아주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간섭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씨”를 하나님의 본질로 해석하여 그 씨를 받은 자가 하나님이 되는 것처럼 이해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씨를 받았음은 성령님과 말씀의 내주사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5)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안다”하심은 3:9의 뜻과 같고,
6)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심”은 예수님이 지키심이요(눅 22:32, 롬 8:34), 예수님이 도성인신하신 것을 “하나님께로서 나신 것”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7) 예수님이 지켜주실 때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함”은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는 분량에 따라 사탄의 역사를 물리치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벧전 5:9~10, 엡 4:13).
5. 거듭난 후에도 범죄하게 된 실예가 뚜렷합니다.
1) 다윗은 어릴적부터 중생하고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지만 그가 성장한 후에도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하였고(시 41:4), 시 42:5에서도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불안하여 하느냐”하였을 뿐 아니라 음행죄까지 범하고 다시 회개한 사실이 있으며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다”고도 하였습니다(시 51:3).
2) 베드로도 신앙 고백을 잘 하고 칭찬받으며 주님을 섬기다가 연약하여져서 주님을 부인한 다음에 다시 회개한 사실이 있었고(마 26:69~75),
3) 바울도 롬 7:19에서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바울사도가 거듭난 후에 범죄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18절에서는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 하셨으니 이는 자기 속에 악이 연속적으로 발동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사도는 거둡난 후에도 범죄의 유혹과 범죄로 인하여 탄식하고, 고민한 것입니다(롬 7:21~24).
6. 거듭난 상태에서 죄를 범한 것이 자기의 책임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요? 이단자들은 성경을 펴보이면서 여러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서 설득하려고 합니다.
1) 벧전 2:11에서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말씀에서 영혼은 자신의 순결한 영혼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영혼”은 생명과 의를 대표하는 용어일 뿐 결코 영혼의 완전 무결성을 염두에 둔 말씀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인간은 육체가 있는 한 부패성이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욥 19:26, 마 5:8).
2) 또 롬 7:19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나는 선행을 뜻(원)한다(will) 그러나 내가 거절하는 악 그것을 내가 행하는도다”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것이 사탄이 아닌 자신임을 입증하셨고,
3) 롬 7:20에는 “만일 내가 원치 않는 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하셨는데 여기의 “내가 아니라”는 말씀은 소원 즉 의지(will)의 역할을 한 자기가 아니란 뜻일 뿐 범행한 자신이 아니란 뜻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난 후의 범죄의 책임이, 그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4) 이단자들은 롬 7:23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법 아래로 나를 사로 잡아 오는도다”란 말씀에서 “마음의 법”은 자신이요,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은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은 죄와 관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도 잘못된 것입니다. 거듭난 자신의 마음의 법이 지체 속의 한 다른 법(이것도 자신의 것임)에 이끌려 죄의 유혹을 받을 만큼 연약한 것은 자신의 믿음 분량이 적고 거룩에 풍성하지 못한 것이므로 역시 자신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5) 롬 8:5~6에서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하신 말씀에서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과 원수되는 만큼 영의 생각은 죄와 원수가 되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롬 8:9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하신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자가 범죄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성도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이란 “육신”의 뜻이 “살크”(σάρξ)로 그 사람의 인격 속에 남아 있는 부패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연약한 성도 자신이 죄를 범하는 것을 뜻하고, 또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다”는 뜻은 성령님의 역사로 변화되어짐을 뜻하며 그 사람의 영이 죄 안 짓는 역할을 한다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듭난 성도라도 부패성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죄를 범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거듭난 영혼이 죄를 짓지 않는다면 왜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자”고(고후 7:1) 하셨겠습니까? 시 51:3에서 “내 죄과”,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하였고, 미 6:7에서도 “내 영혼의 죄”라 한 것은 성도 자신의 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짓는 것인 만큼 “자기 아닌 자기 속의 사탄이 죄를 졌으므로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마치 손으로 도적질을 하고, 자기 아닌 손이 저지른 죄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6) 따라서 거듭난 성도도 연약할 때 범죄할 수 있으며 회개할 책임이 있고, 육신을 벗으므로 성화가 완성된다고 믿으셔야 하며, 대속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과 의로워짐의 성격은 심판을 면하는 것이며, 거듭난 자의 회개는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어드리는 방법이며 성화의 과정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한 인격 속에 정의의 심정과 유혹에 끌리는 심정이 공존하는 것으로 그 인격 안에서 성령님의 역사가 충만할 때 사탄의 역사를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단의 역사는 끊일 날이 없었습니다(요일 4:3, 요이 7). 많은 이단의 종류와 잘못된 교리를 알려 하기 전에 참된 진리만 잘 배우는 것이 유익합니다. 진리도 잘 배우지 못하면서 이단을 연구하는 것은 순서가 아니요, 진리에 어긋나는 것만 배격하여도 충분히 이단을 방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 복음 침례회(구원파)란 단체가 기발한 방법으로 성도를 유혹한 적이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 문제, 죄사함의 희열, 무죄인으로의 착각 등 이상한 말로 성도를 유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가 장로교회 같은 교파 아닌 이상한 교회를 나간다고 하면서 “나는 은혜를 처음 체험했습니다, 과거에 다닐 때는 그것을 못 느꼈습니다,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중생했습니까, 지금 죄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지금 곧 세상을 떠나도 천국에 들어갈 자신이 있습니까?”하면서 자신은 죄가 없고 회개할 필요도 없으며, 이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 없다고 하면서 설득하려 할 때는 유혹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신앙토론 명목으로 대화를 하려 할 때 거절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입니다(딛 3:10). 성경에 능숙한 성도라도 이단자를 설득시켜 돌이기케 한 사례가 거의 없습니다.
45. 제 42 과 “새롭고 산 길” (히 10:19~20)
19절에 보시면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 하셨고, 20절에서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라”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는 뜻에 대하여
1) “예수님의 피를 힘입음”은 택한 백성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힘입어 죄사함 받음을 뜻하고,
2) “성소에 들어간다”는 뜻은 구원받음을 뜻합니다. 여기의 “성소”란 구약 성전의 지성소를 뜻하며 지성소는 하나님의 보좌 또는 천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의 성전 제도를 통하여 신령한 구원 사역에 대하여 계시하셨습니다(히 9:1~10). 구약 성소의 제단은 십자가의 모형이요, 성소는 하나님을 섬기는 세계의 모형이고, 제사장은 중보자(예수님)의 모형으로 이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소에 들어간다”함은 하나님 앞에 나가고 천국에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3)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는 뜻은 인간이 지은 죄의 걸림돌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기 때문에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갈 수 없었는데 그리스도의 속죄와 중보 사역으로 떳떳하게(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로서 담대히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 길이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셨다”는 뜻에 대하여
1) “그 길”은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 방도를 뜻하고
2) “그 길을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셨음”은 구약의 제사 제도 중 인간 제사장의 지성소 출입이(히 9:7) 폐지되고, 예수님의 중보에 의하여 성도가 직접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는 구약 시대의 제사 제도를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보혈을 상징하는 희생의 피를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씩 지성소에 들어가 뿌림으로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중보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은 휘장이 하나님의 기적에 의하여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입니다(마 27:51, 막 15:38).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중보하신즉 주님의 중보 사역에 힘입어 성도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고 또 헌신할 수 있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3.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라”고 하셨습니다.
1) “새롭다”는 뜻의 원문 “프로스파톤”(πρόσφατον)은 “신선미를 준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구원의 방도가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 제도가 신약 시대에 복음적 방법으로 바뀌었다 하여 구원의 방도가 달라진 것이 아니고, 다만 믿음 생활의 방법이 구약 시대의 제도에 비할 때 신선해졌다는 뜻입니다. 신앙의 표현을 모형적 제사로 나타내던 것을 실제 경배와 헌신을 나타내게 되었으므로 신선해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새롭다”는 뜻을 구원 받는 방법이 새로워진 줄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구약의 성도나 신약의 성도가 다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만큼 속죄사역이 끝난 후에는 모형적 제도가 없어지므로 새로워진 것입니다. 따라서 제사 제도도 개혁되어야 하는 것입니다(히 9:10).
2) “산 길”이란 믿음의 방도로서 생명 곧 영생을 주시는 방법이란 뜻이요,
3) “휘장이 곧 저의 육체”란 뜻은 구약 시대의 성소와 지성소를 막은 휘장이 곧 예수님 육체의 모형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돌아가실 때 그 휘장이 찢어졌고, 휘장이 찢어진즉 성소와 지성소가 개통되었으니, 이것은 성도 개인이 하나님 앞에 직접 나갈 수 있게 된 것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3. 구약 시대의 제물이 구속 사업에 주시는 의미에 대하여
1) 구약의 모든 제도는 실제적인 것의 모형과 예법일 뿐이요, 따라서 짐승의 제물 자체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그림자처럼 나타내는 모형일 뿐 그것 자체가 죄를 용서하는 근거는 아닌 것입니다. 히 8:5에 보시면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하셨고, “히 9:9~10에 보시면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이런 제도들은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그러니까 구약의 대제사장은 바로 영원하신 중보자 예수님의 모형이고, 제단은 예수님이 돌아가실 골고다의 모형이며 그 제단에서 희생되는 제물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예표요, 또 대제사장이 그 피의 제물을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제물의 열납을 의미하며 또 성도가 중보자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가는 경로를 나타낸 것입니다 따라서 모형은 실제의 것(예수님의 십자가와 중보)을 믿게 하는 방편일 뿐이요, 구원은 십자가 이전의 성도나 이후의 성도가 다 십자가의 은혜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히 10:12의 “영원한 제사”란 뜻은 십자가 사건 전후를 다 포괄한다는 뜻입니다.
3)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즈음에 그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 내림으로 성소와 지성소가 하나된 것은 성도가 인간 중보나 모형적 제물의 필요 없이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개인 자격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약의 성도를 왕같은 제사장이라(벧전 2:9) 하셨고, 그 길을 새로운 길이요, 생명의 길(산 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4. 신약의 성도들은 이 새롭고 산 길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담대히 나가셔야 할 것입니다.
1) 십자가를 믿는 신앙으로 나가셔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모형적인 제물과 인간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갔으나, 신약 시대는 십자가의 공로와 예수님의 중보에 힘입어 직접 하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물도 필요하였고, 또 제사장의 역할도 필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가는 길이 제사장 제도에 의존하였지만 신약 시대에 와서는 제물을 준비할 필요도 없고, 제사장의 중보를 청할 필요도 없으며 구약의 성전같은 특정한 장소에도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제물은 십자가의 공로를 믿으면 되고, 제사장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신하며 장소는 어느 곳에서나 예배만 드리면 되니까 얼마든지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이렇게 신약 시대에는 구약 시대의 모형적 의식이 십자가의 성취로 폐지되었으므로 십자가의 대속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오면 하나님이 영접하시도록 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저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미안할 일이 없이 하나님께 나갈 수 있으니 더욱 용기 있게 나가셔야 할 것입니다.
3) 구약의 성소가 마당과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마당은 일반 성도가 제물을 드리고 기도하는 곳이요, 성소는 제사장이 들어가 섬기는 곳이며, 지성소는 하나님의 보좌에 나가는 것처럼 신약의 성도는 이 세 가지 의미를 다 종합하여 마당에 머물러 기도하는 신앙에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신앙으로 성장하고, 더 나가서는 하나님의 보좌에 무상출입하는 성도(즉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활이 최고의 은혜이고 최고의 특권입니다.
46. 제 43 과 “모든 영의 아버지” (히 12:9)
사람은 영혼과 육신으로 되어있습니다(고후 7:1). 그런데 살전 5:23과 히 4:12에서는 “영과 혼과 몸”으로 되어 있는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또 영과 혼을 구별하지 않고 말씀하신데도 있습니다(약 2:26, 계 20:4, 눅 1:47). 그래서 이런 사실들을 연구해 본 결과 사람은 “영혼과 육신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영혼을 창조시에 다 만들어 놓으셨다가 한 생명, 한 생명이 출생할 때마다 넣어주시는 것인가? 아니면 육체의 혈육이 계승되는 것처럼 아버지의 영과 어머니의 영에서 분리되어 주어지는 것인가? 또 아니면 하나님이 한 생명, 한 생명의 출생시에 개별적으로 만들어 넣어주시는 것인가?하는 세 가지 문제를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가리켜서 “개인 영혼의 기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대로 “하나님은 모든 영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인생 각자에게 주신 개인 영혼의 기원도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창조 6일 중에 모든 영혼을 만들어 놓으셨다가 출생시에 넣어주신다”고 하는 것을 “선재설”이라 하고, 육신의 출생처럼 영혼도 “부모의 영에서 분리된다”고 하는 것을 “유전설”이라 하며, 인간이 잉태 또는 출생 할 당시 “적당한 때에 만들어서 넣어주신다”고 믿는 것을 “창조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저희들은 이 세 가지 학설 중에 어느 것이 바람직한 학설인지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선재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1) 하나님이 6일 중에만 창조하셨고, 그 이외의 날에는 “창조하신다”는 말씀이 없으며
2) 또 모든 인간의 성품과 생긴 육체의 모양이 다른 것은 하나님이 인생들을 만드실 때 “먼저 창조되어 있던 영혼이 선악을 나타낸데 따라서 좋고 나쁜 성품과 곱고 미운 육체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먼저 있던 영혼이 선을 행하였으면 좋은 성품과 고운 인물로 태어나고, 그 영혼이 나쁜 짓을 했으면 악한 성품과 미운 인물로 태어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이런 논조에는 불합리성이 많습니다. ① 인간의 죄는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다고 하셨으니까(롬 5:12) 죄의 기원이 각자 개인의 영혼으로 비롯되었다는 것은 맞지 않는 말이요, ② 육이 없이 영혼으로만 혼자 있는 것은 인간으로 창조되기 전이기 때문에 천사와 같은 영만의 선악이 인간 탄생시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일관성이 없는 것이요, ③ 또 자신의 영이 전생에 무슨 일을 하였다면 그 영을 받아 탄생한 인간이 자기의 과거사를 의식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모르니까 선재설은 타당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유전설은 루터파에서 주장하였다고 하는데 왜 주장하게 되었는가? 하면
1)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실 때 육체의 요소인 흙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으나 하와를 만드실 때는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신 적이 없으니 하와의 영혼은 (육체의 요소가 아담의 뼈에서 받는 것처럼) 그렇게 받은 것이라 하며
2) 또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는 말씀은 번식의 요소를 아담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명한 것이요,
3) 또 모든 생물체의 생명이 그 조상이나 씨에서 나오기 때문에 히 7:10에서도 “후손의 요소가 조상의 허리에 있다”고 하셨은 즉, 그런 원인에 의하여 후손의 영육이 조상을 많이 닮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4) 그러면 이런 주장이 다 그럴 듯한 것인가?할 때 여기에도 몇 가지 문제가 제기 되는 것입니다. ① 만일 영혼이 부모로부터 유전되었다면 “모든 영의 아버지는 하나님이라”하신 말씀과 거리감이 있게 되고, ② 또 부모의 영혼이 쪼개져 나오는 과정을 부모 자신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점과 ③ 또 그렇다면 꼭같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영도 “마리아를 통하여 받으셨다”고 할 때 부정한 영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래의 영, 영원한 영을 그대로 가지고 탄생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로서 유전설도 타당성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3. 따라서 개혁파에서는 창조설을 내세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때 그때 적당한 시기에 신비한 과정을 주입시켜 주신다고 믿는 학설입니다. 왜 이 주장을 채택하여야 하는가 하면
1) 하나님은 모든 영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요(본문),
2) 아담 창조시에도 육신의 창조와 영혼의 창조를 구별하여 시행하셨기 때문이며,
3) 이 창조설을 내세우면 선재설과 유전설에서 나타나는 모순을 다 해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그런데 창조설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고 합니다. ① 하나님이 6일 외에도 창조하신다고 보느냐?하는 점입니다. 이때에 개혁파에서는 하나님이 거듭난 영혼을 재창조하여 주시듯이 탄생하는 생명체에 주시는 영혼도 그때 그때 창조하여 주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② 그러면 또 질문하기를 출생한 생명이 그 부모의 정신적 특성을 닮는 것에 대하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창조설을 주장하는 개혁파 사람들은 하나님이 영혼을 창조하여 넣어주실 때 “그 부모의 독특한 특성을 첨가하여 만들어 주시기 때문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③ 그러면 또 한 가지 더 중요한 질문으로 하나님이 영혼을 그때 그때 창조해 주셨다면 영혼으로 전가되는 원죄가 없어야 할 것이 아니냐?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개혁파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다 원죄를 전가 받았으되 그 원죄는 영으로 계승된 것이 아니고, 육체의 피로 전가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④ 그러면 영혼이 원죄와 상관이 없으면 항상 영혼의 결백을 보존하는 것이냐?할 때 조상의 피를 통하여 더럽게 태어난 인생은 그 깨끗하게 창조받은 영혼 마저 더럽히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다 불결하게 되는 것이고, 따라서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여야 한다”(고후 7:1)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런 학설들을 통해서 연구하는 사람들의 노력이 대단히 심오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신학이란 이렇게 연구하는 것이라”는 점과,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아버지로서 출생시의 영혼의 아버지도 되시고, 거듭날 당시에도 영혼의 아버지가 되셔서 구원의 새 생명까지 주신 것을 깨달아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언제나 하나님의 것임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47. 제 44 과 “자해와 자살에 대한 구상” (요 15:13~14)
이 시간에는 “자해와 자살에 대한 구상”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1. 성도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성전(고전 6:19, 성령이 거하시는 몸)을 고의로 해하는 것은 죄가 아닐 수 없겠지요. 따라서 술이나 담배, 아편 등으로 몸을 해한다든지 고의로 건강을 지키려하지 않는 것은 죄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상당한 구실에 의하여 더 큰 목적으로 몸을 해롭게 하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피나 장기를 다른 병자를 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주는 경우입니다. 자기의 피나 장기 등을 다른 사람에게 줄 때 자신의 몸을 해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브리스길라가 바울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으려 한 것이나(롬 16:4)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돌보지 않으려 한 것이나(행 20:24)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눈이라도 빼어 바울을 주려 한 것(갈 4:15)은 좋은 일, 좋은 목적을 위한 자해이므로 봉사와 희생이 아닐 수 없고, 또 그리스도의 명예를 위하였을 경우에는 순교정신으로 높이 평가하여야 할 것입니다. “친구(이웃)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하시고 장려하신 것을 볼 때 목숨을 버리는 과정에 자해절차가 있으므로 자해를 무조건 죄로 인식하려 할 것이 아니라 건설적이 못되는 자해나, 영광을 가리우는 자해에 한하여 죄가 되는 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자살에 관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속상하고 절망할 때, 극복을 역행하는 뜻으로 자살을 하기 때문에 자살을 큰 죄로 여기기도 하고, 또 생명이 가장 큰 것이다 보니 생명을 해한 죄를 크게 여기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이 죽게 된 원인을 규명해 달라는 절규로, 또는 자신은 범인이 아닌즉 진실을 규명(누명을 벗는 뜻)해 달라는 뜻으로 자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자살자는 구원얻지 못한다”는 전통적 인식에 대하여 더 연구하여 단서를 붙여야 할 것이 아닌가 하여 구상을 해 보는 것입니다. 자살자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이유로 “자신이 죽으니까 자기 생명을 해한 죄로 회개하지 못한 채 끝나기 때문이라”는 이론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끝까지 회개한 공로로 받는 것이 아닐진대 그 이유는 타당치 않은 것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며 회개의 공로로 받는 것은 아닙니다. 또 성도가 죽을 때 자기의 죄를 다 인지한 상태에서 회개하고 죽은 이도 없을 것입니다. 죄는 예수님이 총괄적으로 맡으시는 것이요, 회개는 자신의 성화와 하나님께 드릴 영광과 참된 삶을 위하여 힘쓰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살 죄에 대한 회개를 못하고 죽는 것이 구원 못 받을 이유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로써 구원 못 받을 자살이란 어떤 경우일까? 또 구원받을 수 있는 자살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를 구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구원받는 신앙을 견지하지 못한 채 낙망하고 비관하며 마귀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소망 없이 자살을 하였다면 누구도 그를 구원받았을 것으로 예측하지 않겠지요.
2) 그런데 자살도 건설적인 자해의 경우와 같이 성취되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물에 빠진 자를 건지러 들어갔다가 원치않는 상태로 죽게 된 것은 자살이 아닐 것이요, 핍박이나 위험이 닥쳐 올 것을 알고 도망할 수도 있으나 순교적 사명으로 피하지 않은 채 피살되었다면 역시 순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태중의 아이를 살리기 위하여 산모가 죽음을 감수하거나 강재구 소령처럼 수류탄이 터질 위기에서 다른 생명들을 살리기 위하여 자폭을 한 것은 자살이라도 이웃을 살리기 위한 큰 사랑으로 인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 어떤 목사님은 40일 금식 기도를 하시다가 세상을 떠난 경우도 있었으니 절차는 자해요, 자살이지만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었은즉 함부로 비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혹 어리석은 죽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별로 영광될 일이 아닐 것이니까요. “어떤 불구자가 살아가기 어려운 환경에서 자신도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이웃사람에게 너무 큰 피해를 주기 때문에 자기는 고사하고 이웃을 편케하기 위하여 자살을 하였는데 교회에서는 그가 자살을 하였다고 하여 장례식에 협조를 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상태를 강재구 소령에 비할 때 소극적인 이유이기는 하나 이웃을 사랑하는 차원에서는 같은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강재구 소령은 생명을 살리기 위한 희생이고, 이 경우는 이웃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한 희생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자살은 무조건 구원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보류하고 자살의 성격을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살을 세 가지 종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으니 ① 생명을 살리기 위한 자살 ② 이웃에 평안을 주기 위한 건설적 목적으로 희생하는 자살 ③ 환란을 비상수단으로 극복 하는 자살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여기의 다른 생명을 살리기 위한 자살은 곧 희생으로 예수님이 장려하신 요 15:13~14에 해당하는 것이고, 둘째로 평안을 주기 위한 자살은 목적은 좋으나 하나님께 속한 생명권을 큰 명분(생명에 관한 것이 아님)없이 해한 것이므로 일반 살인죄와 다름이 없으나 믿음 안에서 자신을 희생시켰다면 그의 신앙고백에 따라 구원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며, 환란을 선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비상수단으로 자기 생명을 해한 자살은 믿음 안에서 연약하여 극복하지 못한 것인지, 믿음을 저버리고 자살한 것인지를 확인하여 평가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몸과 생명은 다 하나님의 것이요, 또 소중한 것인즉 하나님 영광의 명분을 위하여 취급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48. 제 45 과 “수건 착용에 대한 말씀” (고전 11:1~16)
이 말씀의 1절은 “그리스도를 본받음에 관한 말씀”이요, 2절은 “유전을 지킴에 대하여 칭찬하신 말씀”이며, 3~16절은 “수건착용에 대한 교훈”을 하신 것입니다.
1. 그리스도를 본받음에 대하여(1절)
바울사도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행함같이 그의 제자들인 성도들도 바울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가 스승을 닮되 그의 지식을 배우고 그의 생활모범을 본받아 행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이 시대로 말하면 먼저 믿음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닮고, 그 다음에 성도들이 그 지도자의 생활을 본받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유전을 지킴에 대하여 칭찬하신 말씀입니다(2절).
저희들은 유전이란 말을 생각 할 때 예수님이 책망하신 바리새인들과 장로들의 유전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의 유전은 사람이 만들어 실천케 한 것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는데 까지 이르렀습니다. 즉 “부모에게 공경하려던 것을 하나님께 드렸으면 그것이 매 일반이 된다” 하여 결국은 효도의 계명을 폐한 것입니다(마 15:2). 그러나 유전이라고 하여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좋은 목적으로 사용되는 유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믿음의 전통을 계승하는 일이라든지, 선한 사업을 물려준다든지,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기 위하여 어떤 제도를 만들어 쓰는 것과 같은 것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위생을 위하여 식사 전에 손을 씻게 한 것은 좋은 유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손 씻지 않은 사람들을 정죄하였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던 것입니다(마 15:2). 그런데 초대교회 당시에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지켜오던 유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하는 표시로 수건을 쓰고 다닌 것입니다. 이런 유전이 회교권으로도 퍼져서 많은 여인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고, 심지어는 우리나라도 약 70년 전에는 젊은 여성들이 쓰개치마를 입고 다녔습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하는 것은 성경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권장하는 표시로 수건 쓴 것을 폐지할 필요까지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유전은 특수한 지역과 상황에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까지 영향을 줄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3. 수건 착용에 대한 말씀입니다(3~16절).
바울사도께서 이 말씀을 본문에 기록하신 이유는 고린도 교회의 여성도들이 수건 쓰는 일을 생활화 한 중에 기독교로 개종을 하자 수건을 쓰는 번폐함과 여자를 남자에게 복종 시키는 차별을 없애기 위하여 수건을 벗든지, 아니면 남녀가 다 쓰던지 하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때에 바울사도께서는 그 시행을 시기상조로 보셨기 때문에 자제시키기 위하여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왜 시기상조로 생각하셨을까요?
1)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하는 습관을 갖도록 더 교육하실 필요를 느끼셨기 때문이요(엡 5:22, 창 2:18),
2) 여자가 별안간 수건을 벗으므로 인식상의 혼란이 야기될 것을 우려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자가 수건을 벗는 것은 남녀간의 창조적 질서를 인식상으로라도 혼란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은 당연히 시정할 수 있지만 유전을 폐하므로 올바른 인식이 수반되지 않을 때는 시기상조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공예배때에 수건 벗는 문제를 시도하기 전에 먼저 “알 것을 알아야 한다” 하시고, 3~16절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4.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3~16절)
1)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와 같고, 여자의 머리는 남자와 같으며, 또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3절). 여기의 머리는 권세를 뜻합니다(10절). 따라서 남자는 그리스도를 자기의 머리로 알고, 여자는 남자를 그렇게 알며, 또 예수님도 성부 하나님을 그렇게 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머리가 하나님이 되심은 영계의 질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삼위 하나님의 본질과 능력과 영광이 다 같은 것을 알게 합니다. 따라서 성자를 성부 다음에 호칭하는 것은 영계의 순서와 직무상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뿐이요, 권위의 차이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창조의 질서는 남자를 먼저 지으신 것이고, 여자를 지으신 창조의 목적은 남자를 돕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창 1:18, 22).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한 것이나(벧전 3:6), 아내가 남편에게 주께 하듯 하라(엡 5:22)는 말씀은 다 가정의 행복을 위하여 주신 질서요, 여자의 미덕인줄로 아셔야 합니다. 따라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여야 함은 인권의 차이에서가 아닌 창조의 질서와 체질적 직임을 잘 활용하므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여자는 자녀를 낳아 양육하여야 하고, 남자는 건강한 육체로 활동하여 상부상조하여야 하기 때문에 여자를 복종하는 위치에 두신 것입니다. 이런 점은 가정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도 적용된다고 하셨습니다(딤전 2:8~15). 이런 사실이 족장시대에도 시행되었고(벧전 3:6, 창 24:65), 그 후시대까지 전승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에 1:17, 21).
2)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예배)을 하면, 그는 그의 머리인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줄 알아야 한다(4절) 하셨으니, 이 말씀은 남녀의 평등생활을 주장하여 “여자가 수건을 벗든지 아니면 남자, 여자가 다 써야 한다”는 주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번거로운 의식적 유전은 인식 목적이 완성될 때 중지할지언정 새로운 전통과 유전을 필요 이상으로 만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남자가 수건을 쓴다는 것은 머리로 상징된 그리스도 외에 다른 권위를 등장 시키는 것이므로 그리스도를 욕되게 함이 사실이요, 또 여자가 쓴 것을 벗고 예배에 임한다면 그것은 남자에 대한 존경심과 복종심을 파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좋지 않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또 수건을 벗는 것은 본래 머리를 단장함이 쓰는 것을 대신한 것이기 때문에(15절) 머리를 민 것과 같이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5절).
3) 여자가 남자에 대한 복종의 미를 나타내기 싫어서 수건을 쓰지 않는다면 머리를 깎은 것이나 다름이 없고, 또 깎아야 할 것이니(6절), 이는 본래 여자의 긴 머리가 쓰는 것을 대신하였기 때문이요, 또 긴 머리를 보기 좋게 단장하기 위하여(벧전 3:3) 수건 쓰는 것을 첨부하여 전통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여자가 수건을 벗음과 동시에 머리를 깎거나 민다면 다 부끄럽게 여길 것이니(사 47:2), 이런 것은 그들의 본성(천래적 성품 : 롬 2:14)으로 느끼게 될 것이라 하시므로, 그대로 써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6절).
4) 남자와 여자가 각각 자기의 영광의 대상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7절). 즉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신적 거룩과 의와 선이 풍부하심) 창조되어 하나님을 대리한 자로서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릴 특권을 받았기 때문에(창 1:27, 28)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 된 것이고, 아내는 남편을 돕고(창 2:18) 경외하므로(엡 5:33) 기쁘게 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여자가 남자의 영광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5. 남녀 인권문제의 오해를 없애기 위하여 부언하신 말씀입니다(8~16절).
1) 창조의 질서에서 남자를 앞세우신 것과,
2) 여자를 창조하신 목적을 남자에게 두신 것입니다(창 2:18). 물론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창 1:31, 2:18) 여자의 행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엡 5:25).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그 인권상으로 동등한 위치에 두셨습니다. 그 말씀이 곧 “주 안에서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11절).
3) 10절 말씀에서 “여자가 천사를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에 두어야 할 것”은 여자를 창조할 당시에 있었던 천사가 지금도 여인들 곁에 있어서 여자들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순응하는 여부를 지켜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4) 또 12절에서는 남녀의 필요성을 동등하게 말씀하셨으니, 이는 “남녀가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여자(하와)가 남자(아담)에게서 난 것같이 모든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출생한다”는 말씀입니다.
6. 그런고로 성도가 스스로 판단해야 할 것은 “여자가 수건을 쓰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 그 이유는
1) 고린도 교회 여인들의 수건 쓴 것이 창조의 질서와 목적에 부합된 중,
2) 이에 대한 의미상의 교육을 더 계속할 필요가 있으며,
3) 만일 여자가 수건을 쓴 것처럼 남자도 그렇게 한다면 여성 자신들이 더 수치감을 느낄만큼 욕이 되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될 것이므로 자신들의 영광을 위하여 긴 머리를 갖게 하신 줄로 믿고 보존할 것이요(14~15절), 따라서 인식이 부족한 상태에서의 과격한 변화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일 요즈음에 남녀 평등 생활을 주장하는 방법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여성들이 머리를 깎고, 또 남자가 여장을 하고 나왔다고 가상을 해 보십시오. 큰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7.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성경에 나타난 이러한 내용을 왜 오늘의 성도들이 시행하지 않느냐 하실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시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방세계의 전통이라도 좋은 것이면 전승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계명으로 주시지 않은 전통을 이방교회 성도들의 풍속을 따라 지킬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16절에서 이 사실을 확실하게 교훈 하셨습니다. 즉 “우리(사도들)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 이런 규례를 주신 일이 없은즉 변론하려는 태도가 있을지라도 개의(介意)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옛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전통이 우리의 전통이 아닌 것은 마치 유대인의 장례법이 우리와 같지 않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기독교 초창기부터 남녀분별 관계에서 수건 쓰는 일이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런 규례를 주신 일이 없는 이상 다른 민족의 전통까지 답습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중요한 교리가 아니지만 강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