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혼을 살리는 설교 50편 모음

 


# 영혼을 사랑하는 설교 50 편 모음

(ubs 유나이티드 신대) 

제목: 영혼을 사랑 하는 열정                                  


본문 : 마태복음9:35-38                                      



몽테뉴는 “재물이 부족한 것은 채울 수 있지만 영혼의 빈곤은 회복할 수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영혼 없는 몸은 죽은 것이다”(약 2:26)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순절에 보다 거룩하고 절제된 삶을 통하여 내 영혼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고,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주셨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모습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 구원하려함이라”(마 18:14)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죄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 공생애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사순절에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을 품기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한고 생각하십니까?


1.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라.


우리사회는 지금 영혼이 파괴되고 황폐해진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이 옳은지도 모른 체 쾌락과 방탕에 의존해사 살아가는 패역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영혼이 망가진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느껴야합니다. 그러자면 우리가 영적으로 살지 않으면 도무지 영혼의 중요성을 느낄 수 없습니다. 영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있으면 예수님처럼 사람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길 수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사람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않으니> 내 눈에서 눈물이 시냇물처럼 흘러내립니다.”(시 119:136)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리는 내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조지 휫필드 목사님은 설교할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왜 저렇게 잘 우느냐”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조지 휫필드 목사님은 “여러분은 내가 눈물을 흘린다고 책망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자신을 위하여 울지 아니하니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애통해 하는 것이 경제가 아닙니까? 그 눈물은 이제 거두고 예수님처럼 영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망가진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아무리 많은 재물과 지식이 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영혼을 위해 예수님의 눈물을 배웁시다. 눈물이 있어야, 불쌍히 여김이 있어야 비로소 구원이 완성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이 있을 때 기도하고 섬기게 됩니다.


영혼을 사랑한다는 것은 기도의 동기가 됩니다. 훌륭한 지식과 지위가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 영혼을 생각하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영혼이 죽은 사람에게는 화려함과 명성 뒤에 숨어 있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마귀의 일에 깊이 빠져 부끄러움을 당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아름답고 하려하지만 영혼을 들여다보면 곤고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영혼이 파괴된 죽음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며 죽는 모습을 지켜본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혼이 이미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진 물질 소유욕망을 가진 자들, 잔인한 살육의 현장을 바라보는 백성들, 죽어가는 예수님을 비웃으며 말하는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이 보여 주는 행동은 한마디로 영혼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죽으니까 죄와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이들은 영혼이 파괴된 체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형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에 대한 열정이 있으면 진심으로 기도하고 섬기게 됩니다. 기도해주고 섬겨주어야 영혼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이 사순절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살리기를 원한다면 그를 위해 기도하고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3. 영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있으면 전도합니다.


영혼이라는 것은 우리의 인격과 육체의 바탕이 되는 실체입니다. 영적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의 완전한 모습을 말합니다. 영과 혼과 육이 있어야 완전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들은 육으로만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고통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화평의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책망할 것이 없게 보존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노라.”(살전 5:23)고 말씀했습니다. 영혼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은 한 생명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와 무슨 관계를 맺더라도 목표는 영혼 구원입니다. 전도는 시간이 남거나, 할 일이 없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 때문에 전도합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10)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과 혼과 육이 있어야 완전한 인간입니다. 육체에 영과 혼을 심어주기 위한 인간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있어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포기하고는 어느 누구도 친구와 이웃 내 가족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영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있으면 전도하기를 바랍니다.




제목 :균형 잡힌 삶을 위해 4대 원리                                      


본문 : 마-06-33-34                                      



< 염려가 많은 시대 >



오늘날은 염려가 많은 시대입니다. \'염려\'의 헬라어 의미는 \'마음을 나누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염려는 마음을 나누게 합니다. 정신을 분열시킵니다. 삶의 균형을 잃게 합니다. 영혼의 건강을 훼손합니다. 영어의 \'worry\'라는 단어는 원래 \'질식시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염려는 우리의 믿음을 질식시키고,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질식시킵니다.



촬스 메이요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염려는 순환기, 심장, 호르몬 체계, 그리고 신경체계 등에 큰 악영향을 미친다. 나는 이제까지 일을 많이 하다 죽은 사람은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염려 때문에 죽은 사람은 많이 알고 있다.\" 염려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반증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말했습니다. \"모든 염려는 하나님이 없이 머리를 굴리는 것에서 생긴다.\" 염려는 믿음이 결핍을 나타내는 심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부족한 모습이 많아도 채워주실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좋은 자녀이든지 나쁜 자녀이든지 상관없이 자녀들의 모든 필요를 공급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의 모든 필요를 끊임없이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신실하게 행동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실하게 행동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필요에 대해 지나치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염려하는 분들을 보십시오. 대개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염려합니다. 내일의 짐까지 오늘 지려고 하니까 염려가 나옵니다. 고든 맥도널드 목사님은 \"황금보다 좋은 것(Better Than Gold)\"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하루의 짐을 지고 쓰러지는 사람은 없다. 내일의 짐이 오늘의 짐에 더해질 때 그 삶의 무게가 우리가 질 수 있는 것 이상이 된다.\"



내일은 빈 종이와 같습니다. 그곳에 우리의 계획을 적고, 우리의 꿈을 그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 내일이라는 종이에 검은 색으로 미리 시커멓게 칠해놓고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염려를 이기며 살려면 한번에 하루의 삶을 살면 됩니다. 결코 내일로부터 염려를 빌려오지 마십시오. 주님은 오늘 본문 34절에서 \"한 날 괴로움을 그 날에 족하다\"고 했습니다.



< 건강하고 균형 잡힌 삶을 위한 4가지 원리 >



우리가 염려를 버리고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지난주에 인터넷을 통해 로드니 부캐넌 목사님의 글을 읽었는데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3P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Purpose(목적)이 분명해야 하고, Priority(우선순위)가 정립되어야 하고, Plan(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거기에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기도(Pray)입니다. 우리가 염려를 버리고 건강하고 균형 잡힌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4가지가 필요합니다.



1. 첫째, 삶의 목적(Purpose)이 분명해야 합니다.



건강하고 균형 잡힌 삶을 살려면 삶의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내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이 질문은 우리들의 삶에서 어떤 질문보다 소중한 것입니다. 만약 이 질문을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자신의 삶을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상 많은 인생의 문제들이 삶의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옵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주님의 산상수훈의 일부분인데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마태복음 6장 19절에서 주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24절에서 \"하나님과 재물은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합니다. 왜 사람들이 보물을 땅에 쌓아둡니까? 지나친 염려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25-32절에서 주님은 \"너무 염려하지 말라! 염려는 믿음이 없는 사람의 모습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 33절에서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우리 자신이 잘 살고 즐겁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차원 높은 모습으로 우리가 잘 살고, 즐겁게 사는 것을 원하실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에게 있지만,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깊은 관계가 형성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내 재물, 내 성공, 내 경력, 내 행복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보다 차원 높은 삶을 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내 이상의 실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상의 실현\'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삶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잘못된 기초 위에 세워지게 됩니다. 그처럼 잘못된 기초 위에 우리의 삶이 세워진다면 아무리 화려한 건축물과 같은 삶을 살아도 그 삶은 삼풍백화점처럼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삶의 목적을 잃지 않기 위해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하기를 원합니까?\" 그런 질문을 항상 염두에 두면서 진지하게 사는 사람에게 주님은 본문 33절 말씀대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지금 사단이 하는 가장 큰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의 목적을 빼앗고 꿈을 빼앗는 것입니다.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것은 가장 치명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삶의 목적을 지키고, 거룩한 꿈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꿈을 지키면 그 거룩한 꿈도 우리를 지켜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룩한 꿈을 버릴 때 우리는 버려진 인생이 될 것입니다. 거룩한 꿈이 살아 있으면 우리의 영혼과 인생도 살지만 거룩한 꿈이 죽으면 우리의 영혼과 인생도 죽을 것입니다.



오늘날 왜 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꿈을 잃고 방황합니까? 영혼과 물질을 바꾸면 거룩한 꿈을 잃게 됩니다. 아무 문제가 없이 너무 편해도 거룩한 꿈을 잃게 됩니다. 때로는 배신과 상처를 마음에 품고, 실패와 부정적인 환경에 집착하기 때문에 거룩한 꿈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어난 모든 일이 계획과 목적이 있어서 일어났다고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삶의 목적을 더욱 뚜렷하게 해야 합니다. 삶의 목적이 분명하다면 죽음조차 승리하는 것입니다. 죽으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 마음의 상처도 필요합니다. 그 상처 때문에 우리가 지금만큼 성숙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유익이 있는 것도 모르고 어떤 분은 상처 때문에 갈등이 두려워서 어디에 가서 정착하기를 두려워해서 끊임없이 방황합니다. 그러나 몸둘 곳을 몰라 방황할 바에야 차라리 어느 한 곳에 몸을 두고 갈등하는 것이 낫습니다. 갈등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 방황입니다. 왜냐하면 갈등은 정신의 힘을 강화시키지만, 방황은 정신의 힘을 극도로 약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어?\" 하는 말입니다. 그 말은 목표가 없고, 인생을 흐릿하게 산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모습은 \'왕따 당하는 것\'보다 비참한 것입니다. 왕따는 남이 나를 따돌리는 것이지만 목표 없이 살아서 \"무슨 일이 있어났어?\" 하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을 따돌리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목표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비극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삶의 목적을 잃지 말고 꿈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삶의 목적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하십시오. 재물을 구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지위를 구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자녀의 성공을 구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그런 거룩한 꿈이 없는 인생은 허무하게 됩니다. 그러나 거룩한 꿈이 있는 인생은 진정 보람있는 건강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2. 둘째, 우선순위(Priority)를 확고히 해야 합니다.



건강하고 균형 잡힌 삶을 살려면 우선순위를 확고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겠다는 목적이 뚜렷해도 여러 가지 일을 다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뜻을 이해하고,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에 특별히 집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좋은 일을 많이 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려는 일은 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순위의 삶을 산다는 것은 좋은 일과 나쁜 일 사이에 어떤 일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나쁜 일은 무조건 버려야 합니다. 우선순위의 삶을 산다는 것은 이것도 좋은 일 같고, 저것도 좋은 일 같은데 그 중에 어느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선택하느냐 하는 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즉 좋은 일 중에서 최상의 일을 선택해서 하는 것이 바로 우선순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을 선택할 때 \"내가 어떤 유익한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하는가?\" 하는 살피고 그 길로 집중해서 가야 합니다. 결국 우선순위의 삶을 산다는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하심\'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한 관심, 재능,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 관심과 은사와 재능에 합한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가장 최상의 작품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일의 우선순위를 잡지 못하면 일은 많이 하지만 성취와 보람은 적고 자기 영혼만 소진됩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사람들의 3분의 2 이상이 \"자기가 하는 일이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주 5일 근무를 한다고 하지만 실질적인 여가 시간은 10년 전보다 더 줄었다고 합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지나치게 일하다가 악몽 속에 사는 것이 많은 현대인의 삶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선순위의 삶이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쁜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너무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행복의 비결은 어디에 있습니까? 기다릴 줄 아는 것에 있습니다. 요새는 느리게 사는 것이 행복이 비결이라고 합니다.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기도한 것을 기다리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을 넉넉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삶의 수준이 높아집니다. 진짜 가치 있는 것을 얻으려면 기다려야 하고, 기다리면 진짜 가치 있는 것을 얻게 됩니다.



이제 바쁘게 많은 일을 하려고 하지 말고 바른 일을 하려고 해야 합니다. 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을 해야 합니다. 중요한 일에 집중하며 단순하게 살아야 합니다. 단순하게 살지 않으면 허둥대며 살다가 끝나기 쉽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중요한 포인트를 잃어버리면 허무한 신앙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욕구가 많아서 이 일 저 일 하다 보면 정신이 약해집니다. 정신의 힘은 벌려놓은 일을 정리하고 중요한 일에 집중할 때 주어집니다.



말세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엄청난 정보와 엄청난 속도가 말세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삶이 말세의 삶입니다. 왜 주일을 지키는 삶이 중요합니까? 주일은 중요한 것에 집중하는 삶을 훈련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서도 중요한 것이 빠진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 건물은 있는데 그 안에 예수님이 없고, 예배 형식은 있는데 그 예배 안에 예수님이 없는 모습이 바로 말세의 증거입니다.



미국 보스톤의 한 부잣집에서 유아세례를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잔치를 벌입니다. 잔치가 무르익을 무렵 유아세례를 거행하려고 하는데 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세례 받을 아이가 침대에서 질식사한 것입니다. 알고 보니 한 사람이 코트를 벗어놓을 곳을 찾다가 아이가 있는 줄 모르고 그 위에 코트를 벗어놓았습니다. 그 코트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도 코트를 놓는 곳인 줄 알고 그곳에 코트를 산더미 같이 벗어놓는 바람에 질식사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없이 우리들만 잔치를 벌이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보아야 합니다. 내 가정에 정말 예수님이 주인으로 계시고, 내 삶에 진정 예수님이 주인으로 계신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왜 그렇게 낙심이 많습니까? 예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없기 때문에 원망과 불평이 많고, 자기 인정 욕구에 사로잡히고, 근심과 염려에 빠지고, 쾌락에 사로잡혀 사는 것입니다.



요새 교회를 정하지 못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합니다. 진짜 예수님이 있는 교회를 찾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어디에 내 영혼을 맡길 수 있을까? 생명수가 넘치는 말씀은 어디에 있는가? 예배를 통해서 하늘의 평강과 위로를 얻을 곳은 어디인가?\"하고 고민하며 많은 애를 씁니다. 그만큼 예수님이 없는 교회, 예수님이 없는 예배, 예수님이 없는 교인이 많은 시대에서 힘들게 산다는 반증입니다.



이제 신앙생활 오래 한 것을 훈장으로 여기지 말고, 그런 경력을 뱃지 삼아 지내는 \'명예성도\'가 되지 마시고 진정 내 안에 예수님이 있는지를 반성하고, 다시 한번 우선순위의 삶을 확고히 정립해야 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곰곰이 생각하고, 내가 가장 관심을 두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일에 집중해서, 그 일을 통해 작품을 이루어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꿈을 현실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3. 셋째, 계획(Plan)을 세워야 합니다.



목적이 분명하고, 내가 무엇을 우선적으로 할 것인지를 정했으면 이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목적이 뚜렷하고,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알고 있어도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그 좋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세밀한 계획을 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큰 틀 안에서의 계획은 꼭 세워야 합니다. 치밀함은 없어도 사려 깊음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려 깊은 계획이 없이 삶이 그저 일어나도록 방치하면 훌륭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자질구레한 일들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부유물처럼 우리 주변을 떠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 계획이 있어야 합니다. 40세에는 이런 모습이 되고, 50세에는 이런 모습이 되겠다는 청사진이 있어야 합니다.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내 삶에서 잘라야 할 일\'을 자르고, \"노!\"라고 해야 할 일을 \"노!\" 하며, 보다 중요한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배정하려는 구체적인 계획과 다짐이 있어야 합니다.



4. 넷째, 기도(Pray)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계획을 잘해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계획을 세워도 그 계획대로 실천하며 사는 것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매년 1월이 되면 담배 소비량이 가장 줄어들면서 약 4억 갑 이하가 팔리다가 2월이 되면 다시 6억 갑 가까이 팔린다고 합니다. 연초에 \"금년에는 담배를 끊어야지!\"라고 결심하다가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담배 하나 끊는 것도 사람의 힘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아무리 선한 계획을 세워도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서 주셔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여호와께서 성을 지켜주시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 127:1).\"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문제도 풀리고, 상처도 씻기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서울 강남에 교회를 열심히 다니며 행복하게 사는 두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가정에 엄청난 불행이 닥쳤습니다. 딸이 불의의 사고로 죽은 것입니다. 딸을 장례 지내고 오던 길에 부부는 다투었습니다. 엄청난 마음의 상처를 토해낼 때 그것을 받아줄 마음의 여유가 서로에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싸움이 점점 커졌습니다. 결국 합의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혼한 후에 그 부부는 서로 이혼한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서로에 대한 애틋한 정도 있었고, 사랑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감정이 가라앉으니까 \"내가 지나쳤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둘 다 똑같이 이런 기도가 나왔습니다. \"하나님! 제가 그에게 준 상처를 씻어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니까 자신의 상처가 아물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마음으로는 이미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딸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때 저 앞을 보니까 옛 아내가 딸의 무덤 앞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옛 아내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용기를 주셨습니다. 둘이 나란히 무덤 앞에 서서 실컷 울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말을 꺼낼 수 있는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같이 살자. 그것이 죽은 딸을 위하는 길이다. 주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했는데 우리가 원수는 아니잖느냐?\"고 말했습니다. 결국 두 부부는 다시 합쳐서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 해결의 원천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의 모든 문제가 풀리고, 모든 상처가 씻기고, 모든 부서진 것이 회복되는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 진정 예수님의 손에 붙잡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인간관계에서 너무 서로를 붙잡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실망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손에 붙잡혀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 해결의 길이고, 우리가 가장 행복하게 사는 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건강하고 균형 잡힌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4가지를 배웠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살고,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서 살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사려 깊은 계획을 세워 최선을 다하고, 겸손하게 기도함으로 건강하고 균형 잡히고 성공적인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제목 : 안전지대                                      


본문 : 시-12-05-                                       시12:5, 시46:1-3


I. 이 땅에 안전지대는 없다.



  유명인사 남편과 이혼한 맥은 딸 사라와 함께 뉴욕 맨하튼의 한 고급 주택으로 이사를 옵니다. 그 집에는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자신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안전공간 - 패닉룸(Panic Room)이 있습니다. 그 방은 어떤 충격에도 견딜 수 있을만큼 견고한 벽으로 둘러 쌓여있고 방안에는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없을만큼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심지어 집안 구석구석을 한눈에 살펴 볼 수 있는 모니터, 그리고 경찰과 연결할 수 있는 특수 전화 등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모녀가 이사온 그날밤 세 명의 괴한이 침입합니다. 그 집 전 주인이었던 할아버지가 남긴 막대한 유산을 독차지하기 위해 손자녀석이 그 패닉룸의 설계사와 특수 절도범을 데리고 침입한 것이었습니다. 맥과 사라는 그들을 피해 가까스로 안전공간 패닉룸안으로 들어가지만 괴한들이 찾는 유산이 바로 그 패닉룸안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방안의 모녀는 외부로 연락할 수단을 잃게되고 딸의 당뇨병 때문에 모녀는 그 방안에 마냥 머물 수만은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모녀와 세명의 괴한이 벌이는 공포스럽고 스릴넘치는 한판 승부가 펄쳐집니다.



  조디 포스터 주연으로 얼마전 개봉 상영된 패닉룸이라는 영화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패닉이란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 상황\"을 말합니다. 이 영화는 가장 안전하다는 방이 오히려 공포와 두려움의 방으로 변하는 역설을 통해 이 땅에는 네가 꿈꾸는 안전지대란 없다는 사실을 세상에 선언하고 있습니다.



  국어 사전에 보면 \"안전지대\"란 「도로를 횡단하는 보행자의 안전을 위해 정해 놓은 곳」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보십시요. 아이러니컬하게도 보행자들의 안전을 위해 정해 놓은 그 안전지대 안에서 가장 빈번하게 가장 큰 사고들이 발생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게 세상의 모순입니다. 이 모순된 세상에서 인간들은 자신의 안전지대를 오늘도 찾고 있습니다.



  근간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열망이 가히 광적이라 할만 합니다. 최근 한국사회가 병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 - 둘이 있습니다. 자살과 해외이민 신청자의 급증입니다. 최근 자살로 죽은 사람이 고통사고로 죽은 사람보다 많아졌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메달권에 들어선 모양입니다. 우리주변에 이민을 가고 이민을 원하는 사람들이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민 상품이 T.V. 쇼핑의 대박상품이 되었고 이민 박람회가 열리면 수천 수만의 사람이 관심을 보이는 모양입니다. 이민 열풍, 이민 광풍이라고들 합니다. 왜 사회가 이렇게 되었는가? 전문가들의 진단은 사회가 마냥 불안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서 있는 땅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북한의 핵무기를 포기시키기 위해 별의별 노력과 회담을 해보지만 여전히 불안하기만 합니다. 음식도 농산물도 마음놓고 사 먹을 수가 없습니다. 가축들은 무슨 놈의 병이 그렇게도 많은지 언제 어떤 보도가 나올지 모릅니다. 직장도 사업도 안전하지 못합니다. 중동에서는 또 어떤 소식이 전해질지 초조해 집니다. 내일 아침 신문엔 우리를 짜증나게할 어떤 부정과 부패 소식이 전해질지 모릅니다.



  이는 우리나라 우리사회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는 미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9.11 이후 미국의 자존심은 무너졌고 미국이란 나라는 이제 안전의 나라가 아니라 아주 위험한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매일같이 병기 난사 사고가 일어납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테러가 발발할지 모릅니다. 생화학 무기 테러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방독면이 미국에서는 불티난 듯 팔린다고 합니다.



  기억하십시다. 「세상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다!」



  제가 아는 어떤 집사님 가정은 대한민국에서는 전쟁공포증 때문에 살 수 없다고 가산을 정리하여 오래전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슈퍼마켓을 하다가 남편이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한국이 불안하다고 한국을 떠났는데 이제는 미국이 불안하다고 돌아오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성경은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합니까?



  성경은 환란과 재난을 피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장소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특별한 장소 즉 지명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상 많은 요새들이 더 많은 침략을 받았습니다. 그곳으로 피했던 사람들이 더 많이 죽어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안전이란 지리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 최고의 등반가하면 이탈리아의 라인홀드 메스너를 꼽습니다. 그는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산을 무산소 등정했던 사람이요 세계 8,000m 이상되는 모든 산을 정복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가 자기집 담장 3m를 오르다 낙상하여 발목골절상으로 병원 신세를 졌습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II. 안전지대를 찾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지대는 우리인류의 소망이요 꿈입니다.



  이 땅에서 풍파를 겪어본 사람은 풍파없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좋은 것인가를 알지요. 중병을 앓아본 사람은 건강의 소중함을 압니다. 사업이 무너지고 가정에 큰 아픔을 겪어본 사람은 안정된 생활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압니다. 교회생활의 갈등을 겪어본 사람은 행복한 교회생활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지요. 사람들은 저마다 안전지대를 원합니다. 가정이 교회가 사업이 경제가 국가가 안정되기를 얼마나 바라며 살아왔습니까? 그러나 시시때때로 슬픔과 실망의 광풍이, 실패와 환란의 모진 바람이 우리를 무자비하게 내려치는 곳이 이 세상입니다.



  산넘어 남촌에는 행복이 있고 안전지대가 있을 것 같습니까? No! 이 땅은 마치 바다와 같아서 풍랑 그칠 날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고해라 하지 않았습니까? 갈수록 태산이란 말도 있습니다. 걱정 그칠 날이 없고 숨이 다하는 날까지 바람 잘 날 없는 곳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풍랑을 어떻게 직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수선하고 어지러울 때마다 사람들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 - 그것이 곧 신앙의 태도입니다.



  믿음 좋은 며느리가 믿지 않는 시어머니의 핍박속에서도 늘 눈물로 시어머니의 영혼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늘 즐겨 부르던 찬송이 395장 \"너 시험을 당해 범죄치 말고 너 시험을 이겨 새 힘을 얻고\"하는 노래였습니다. 목사님이 때가 되었다 싶어 그 시어머니에게 전도를 나갔습니다. \"어머니 예수 믿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시지요. 자부가 시어머니를 대단히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눈물로 기도를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그랬더니 시어머니가 화를 버럭내며 그렇게 말합니다. \"내숭이여, 매일 제방에서 노래하는 것 다 들었어. 내가 다 적어 놓았다구. 목사님 들어 보실래요. 「너 시어밀 당해 범죄치 말고 너 용기를 다해 늘 물리쳐라. 너 시어밀 당해 새힘을 얻고 주 예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시어밀 물리치는게 그 사람 소원이여.\"



  그래요. 시험을 당해도 새힘을 얻고 우리는 살아갑니다. 어떤 문제에 부딪혔다 할지라도 우리는 파괴주의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습니다. 타협주의자도 아닙니다. 도피주의자도 아닙니다. 크리스챤은 문제앞에 창조적인 태도를 가집니다. 이들은 우선 허물된 역사현실을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낙담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의 뜻을 찾아 희망을 선포합니다. 새로운 돌출구를 찾아냅니다. 잿더미 위에서도 새로운 세계를 건설해 냅니다. 어두운 현실속에서도 역사를 밝은 눈으로 바라봅니다. 이게 바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경건한 사람의 삶은 달걀을 삶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음식물은 삶을수록 허물허물 액체가 됩니다. 그러나 달걀은 삶을수록 단단해 집니다. 문제속에 집어넣었을 때 범인들은 대게 허물허물 풀어져버립니다. 편안할 때는 강한 듯 온유한 듯 겸손한 듯 하던 사람도 어려운 일을 만나보면 쉽게 무너져 버리곤 합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은 마치 달걀을 삶는 것처럼 고난의 가마솥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그 삶이, 신앙이 단단해집니다. 그래서 지금도 유대인들은 고난의 날을 기념하는 절기가 되면 삶은 달걀을 나눠 먹는다고 합니다.



III. 안전지대가 있습니까? 하나님



  성도 여러분, 세상이 불안할 때에, 온통 무너지고 썩어갈 때에 여러분은 현실을 어떻게 직면하십니까? 선진국이나 중립국가를 찾아 이민이라도 가시겠습니까? 세상 다 썩었다. 함께 썩어 버리자. 먹고 마시고 즐기다 너도 죽고 나도 죽자 포기하시겠습니까? 몽땅 부수고 공산주의 국가라도 건설해 보시겠습니까?



  이럴때 일수록 성경을 보십시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시편 12편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안전지대에 두시겠다\"고 약속했고,



시편 46편에서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란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고 했습니다.



  왜요? 7절 11절,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고 했습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요. 낙심하지 마십시요. 도피하지 마십시요. 분명 인생의 안전지대가 있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안전지대가 어디입니까?



  오늘의 본문을 보십시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안전지대에 두신다! 할렐루야!



  특히 시편 46편은 교회사적으로 대단히 유명한 시입니다.



  칼빈은 성경 원문을 불어로 번역하면서 첫 번역으로 시편 46편을 번역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이 위기에 부딪히고 어려워졌을 때 시편 46편을 읽다가 큰 은혜를 받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때 받은 은혜를 노래로 만들어 부른 곡이 찬송가 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란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하는 곡입니다.



  독일 사람들은 이 찬송을 국가보다 더 애창한다고 합니다. 많은 신학교에서는 교가로 이 노래를 부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라. 하나님은 우리의 안전지대이시라. 하나님은 우리의 도피성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과실로 살인을 했습니다. 피해자 가족들이 그를 죽이겠다고 추적을 하면 이 사람은 일단 도망을 쳐서 도피성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도피성에 있는 제사장은 과실 여부를 판단해서 고의로 지은 죄가 아니라면 용서를 받도록 제도적 장치가 되어 있었습니다. 도피성 - 피난처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영원한 피난처이신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였습니다.



  우리가 정신적 긴장과 고민에 쫓길 때 그리고 불안과 공포에 시달릴 때 어디로 피할 수 있겠습니까?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오라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치되 두렵잖네!



  \"나는 하나님께 피하였다!\" 이 선언은 나는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자신의 무력을 발견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국제관례상 망명자는 보호를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로 피한 자를 하나님께서 버리시겠습니까? 특히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피난처라는 말의 뜻 가운데는 \"높은 곳\"이란 뜻이 있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땅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안전지대는 낮은 곳에 -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높은 곳에 있다. 하늘에 있다. 하나님이 안전지대이다. 이 말입니다.



  성경상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의 모진 환란과 혼란속에서도 높은 곳에 안전지대를 두고 살았습니다.



  십자가 그늘 밑에 나 쉬기 원하네



저 햇빛 심히 쬐이고 또 짐이 무거워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주 십자가의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



  십자가 그늘 밑, 주님의 품 그곳이 안전지대입니다. 우리의 안전지대가 어디뇨? 하나님의 품 안입니다. 십자가 그늘 밑입니다.



IV. 내가 있는 곳 거기가 안전지대



  또 다른 안전지대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땅 어디에서 안전지대를 찾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구요. 오히려 진정한 안전지대는 바로 내가 있는 그 곳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내가 어디엘 가나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내가 어디에 있든지 안전지대 되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한 내가 서 있는 그곳이 안전지대가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복을 받아 가정에 가면 가정이 안전지대가 되고 내가 직장에 가면 그곳이 안전지대가 됩니다.



  시편 46편 7절과 14절을 잘 살펴보십시다. \"야곱의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시로다\" 그 이유를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한번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풍랑을 만났습니다. 당황해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중대한 사실 하나를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배 안에 함께 계시다는 사실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풍랑을 만납니다. 환란은 피해가는 것이 아닙니다. 면제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그 풍랑을 만나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배 안에 계십니다. 공동운명체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곳 - 그 곳이 안전지대입니다. 예수와 동행하는 당신이 있는 그 곳 그 자리 - 거기가 안전지대입니다.



  본문 시편 46편 5절에서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성소가 어디입니까? 제 마음속에 하나님이 살아 계십니다. 여러분 모두의 마음에도 부활하신 주님이 살아 계십니다. 우리 모두 가운데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그곳이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함께 하시는 안전지대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안전지대가 어디뇨? 두번째 안전지대는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이 있는 바로 그 자리입니다. 안전지대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늘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십시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당신이 있는 그 곳 - 거기가 안전지대입니다.



V. 안전지대 : 경건한 삶



  이제 결론이 분명해졌습니다. 내가 사는 지금 이 자리를 안전지대로 삼는 비결이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건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올 때마다 해결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죄가 없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 과거의 모든 죄, 현재 지금 짓는 모든 죄, 미래의 모든 죄를 깨끗이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옮겨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기억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 보혈의 피로 이 시간 깨끗이 씻김 받기를 축복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며 살아가려고 하지 마십시요.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하지 마십시요.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입니다. 지금 이 시간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쓴뿌리 견고한 진들이 모두 물러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십시요. 기도하는 자리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찬양마다 찬양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시간마다 여러분 모두가 이 예배의 영광을 체험하는 예배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 곳이 경건의 자리요 그 곳이 우리의 안전지대입니다.



  당신은 안전지대를 어디서 찾았습니까? 오직 경건한 삶을 사는 것 뿐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방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방패로 우리를 지키시고 날개로 우리를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함께 사는 한 언제나 그곳은 안전지대입니다.



  그렇습니다. 최고의 안전지대는 경건한 삶입니다.



  초대교회시절 크리소스 톰이란 감독이 황후 유독시아의 간교로 귀양 살이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설교 가운데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 예수의 이름으로 고난의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가는 길 - 제게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죽음입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내 생명인 걸요. 이 땅 어디에서 쫓거나는 것이 두렵습니까? 아닙니다. 땅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이 땅에서 쫓겨나면 하늘 땅이 나를 기다립니다. 나의 소유를 빼앗기는 것이 두렵습니까? 내가 가져본 것 무엇이었습니까? 모두 빼앗겨도 하늘에 쌓일 뿐입니다. 저들이 나를 산으로 몰아내면 나는 엘리야가 될 것입니다. 저들이 나를 구덩이에 던지면 나는 예레미야가 될 것입니다. 저들이 나를 바다에 던지면 나는 요나가 될 것입니다. 저들이 나를 돌로 치면 스데반이 될 것입니다. 저들이 나를 매로 치면 나는 사도 바울의 영광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땅 모든 곳을 안전지대로 알고 살았던 담대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까? 안전지대가 어디뇨? 진정한 안전지대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 그 곳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바로 그 곳입니다.



VI. 궁극적 안전지대: 하늘나라



  나아가 우리에겐 영원한 안전지대가 있습니다. 궁극적인 안전지대가 있습니다.



  하늘나라입니다. 중립국가에도 질병이 있고 태풍이 있습니다. 미국에도 죽음이 있고 재해가 있습니다. 나폴리에도 시드니에도 사고가 있습니다. 그곳은 안전지대가 아닙니다. 계시록에 보면 오직 하나님 나라에 만이 사망이 애통이 질병이 없다고 했습니다. 슬픔이 절망이 흑암이 없다고 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안전지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을 바라봅니다. 사모하며 소유하기를 힘씁니다. 하늘나라의 시민이 된 것을 감사합니다.



  왜 예수를 믿습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천국 가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고상한 윤리 도덕을 가르치는 설교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건전한 시민 정신이나 사회정의를 외치는 것도 내 몫의 일부라고 분명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게 맡겨진 성도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저는 실패한 목회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크고 튼튼한 아파트도 가지십시요. 건강한 사회도 함께 만들어 가십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일은 천국 안전지대를 확보하고 사는 일입니다.



  오래전 미국에서 유학생 셋이 70층 빌딩 엘리베이터 청소를 하는 일을 하며 옥상 수위실에서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시가지 전체에 정전사고가 있었습니다. 마냥 기다리기만 할 수가 없었던 세 학생은 함께 얘기를 나누며 계단을 올라갑니다. 한 20층까지는 철학도가 인생 철학을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50층까지는 경영학도가 성공 비결을 얘기했습니다. 나머지 70층까지는 신학도가 성경 얘기를 했습니다. 막상 문 앞에 다달았을 때 수위실에 맡겼던 열쇠를 그냥 두고 올라왔습니다. 배도 고프고 지칠대로 지친 세 학생은 문도 열지 못하고 문 앞에서 다리를 뻗고 잠을 자야 했습니다.



  우리가 천국 문에 섰을 때에 당신의 고상한 인생철학이 그토록 빛나던 성공비결이 당신의 인격에 도움을 주던 성경의 이야기들이 천국문을 열 수 없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안전지대는 어디뇨? 마지막 안전지대, 영원한 안전지대는 하늘나라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의 안전지대가 어디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안전지대입니다.



  묻습니다. 당신이 있는 그 자리, 안전지대입니까?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신다면 당신이 어딜 가든지 그 곳이 안전지대입니다.



  오늘 이 시간이 당신 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당신의 영원한 안전지대 천국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습니까?



                                


제목 : 끝까지 책임을 다한 사람                                      


본문 : 수-10-06-14                                      


지난주 웹서치를 하다가 어느 사이트에서 ‘곰팅’이라는 닉네임으로 올린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기 전에 그 글을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30대 초반 동갑내기입니다. 친구도 연인도 아닌 사이로 어정쩡하니 오래 지내다가(2년쯤...) 지난달 관계를 확실히 해자는 메일을 보내고 제가 잠수를 타버리자 진지하게 남자대 여자로 만나자는 대답을 듣고 즐겁게 주말데이트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장거리 연애입니다.) 한데 두 번의 주말약속을 바람을 맞았습니다. 그 전날의 친구들과의 과음으로 인한 숙취가 그 이유였습니다. 서로 그냥 친구처럼 편안한 관계이긴 하지만 어렵게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정말로 진지하게 만남을 갖기로 한 것이었다면 그렇게 약속을 깨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울먹이며 그만 연락하자며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곧 날아온 문자 \"뭐라고 할말이 없다. 미안하다...\" 할말이 없다는 그 말에 더 화가 나서 \"진심이 없는 이에게 진심을 쏟은 댓가가 참 가혹하다. 그런데 그건 내가 둔한 탓이지 너의 잘못은 아니야. 작은 약속도 소중히 할 좋은 사람만나...\" 라고 마지막 문자를 보내버렸습니다..... 이성적으로는 상황이 파악이 되면서도 자꾸만 그 사람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도 이성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이었던 응수에 대한 후회인지 자꾸 돌아봐집니다. 답답한 마음에 글 남겨봅니다. 좋은 조언 부탁드릴께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수한 말들을 쏟아 냅니다. 앞뒤 생각도 하지 않고 너무 쉽게 약속을 합니다. 그러다보니 자기가 약속한 말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희 집에 놀러 오세요!’는 말을 듣고 그 댁에 놀러 가면 오히려 ‘왜 왔느냐’고 핀잔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언제 어느 때 식사하자, 내가 전화하겠다’고 해서 눈이 빠지게 기다려도 전화 한통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차 한 잔 같이 합시다’는 말이 기억이 나서, ‘차 한 잔 주세요.’라고 하면 오히려 발뺌을 하며 ’왜 내가 당신과 차를 같이 마셔?‘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믿는 우리 크리스챤들은 빈말을 해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약속했으면 그 약속을 꼭 지켜야 할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말에는 항상 책임이 뒤 따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약속을 쉽게 해서도 안 되지만, 이미 한 약속이라면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만약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면,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고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해야 합니다. 이 시간 옆에 계신 분들과 인사하겠습니다. ”빈말 하지 맙시다!“ 다시 한 번 인사하겠습니다. ”약속을 잘 지킵시다!“ 



  저는 오늘 ‘끝까지 책임을 다한 사람’ 여호수아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는 그가 행한 약속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전인 여호수아 9장을 보면 기브온 거민들의 속임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 거민들이 먼 곳에서 온 줄 알고 그들을 진멸하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자고 덜컥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약속을 한 지 3일이 지나서 여호수아는 기브온 거민들에게 속은 것을 알았습니다. 기브온 거민들은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들과 이웃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백성들은 지도자인 여호수아를 원망했습니다. 이쯤 되면 3일 전에 행한 약속이라 할지라도 그 약속을 취소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약속을 취소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기를 속인 기브온 거민들에게 화를 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속아서 기브온 거민들과 약속을 했지만, 자기가 한 약속을 취소하지 않았습니다. 속은 것이 분하고 억울한 일일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끝까지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끝까지 약속을 지키는 여호수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모리 족속 중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은 기브온 거민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화친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주위에 있는 같은 아모리 족속의 4명의 왕들의 마음을 움직여 동맹을 맺은 후, 기브온 거민을 공격했습니다. 기브온 거민들은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 때 여호수아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다같이 7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수아는 모든 군사와 용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올라가니라.”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도와 달라는 기브온 사람들의 요청을 거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들과 약속한 것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모든 군사뿐 아니라, 특수부대라고 할 수 있는 용사들까지 동원하여 직접 길갈을 떠나 전쟁터로 갔습니다. 그 결과 그는 세 가지 놀라운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1) 우박을 통해 승리하는 역사



  첫째로 여호수아는 끝까지 책임을 다함으로 말미암아 우박을 통해 승리하는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다같이 11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하여 벧 호론의 비탈에서 내려갈 때에 야훼께서 하늘에서 큰 우박 덩이를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내리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 많았더라.“ 재미난 광경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늘에서 내리셨습니까? 우박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박을 통해서 일하실 때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9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10가지 재앙 중 7번째 재앙으로 애굽 전역에 우박을 내리신 적이 있습니다.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지팡이를 들자, 하나님께서 우렛소리와 함께 우박을 내리셨는데, 얼마나 많은 우박이 내렸는지 불덩이가 내리는 것과 같은 소리가 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우박으로 인해 사람과 짐승 뿐 아니라 밭에 있는 채소와 들의 모든 나무 가지들이 꺾여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큰 우박덩이를 내려 아모리 족속의 연합군을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우박이 내렸는지 이스라엘 군대의 칼에 맞아 죽은 숫자보다 우박에 맞아 죽은 숫자가 더 많았습니다.



  2)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하는 기적



  둘째로 여호수아는 끝까지 책임을 다함으로 말미암아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하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아모리 연합군은 이스라엘 군대의 공격 뿐 아니라 하늘에서 내리는 우박세례를 받고 수많은 병사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병사들은 삼십육계 출행랑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쯤에서 멈출 수도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서로 도와가며 살자고 화친을 맺은 기브온 족속과의 약속을 이미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도망치는 아모리 병사들을 추격합니다. 해가 점점 서쪽으로 기울어갑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아모리 병사들을 더 이상 추격할 수가 없고, 설령 추격한다할지라도 산속으로 숨어버리면 그들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기브온 족속을 돕는데 끝까지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12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야훼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넘겨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야훼께 아뢰어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이르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하매“ 여러분, 여호수아의 이 기도가 이해가 되십니까? 지금 여호수아가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신 나간 기도를 하고 있다고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기도를 했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할렐루야!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해가 중천에 그대로 머물렀고, 달이 아얄론 골짜기에 그대로 멈추게 되는 기적이 나타난 줄로 믿습니다. 도망치는 아모리 군사들을 진멸할 때까지 태양과 달이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게 된 줄로 믿습니다. 여호수아는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하는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어느 날 나폴레옹이 전투를 하루 앞두고 서산에 지는 노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게 여호수아처럼 저 태양을 두 시간만 멈추게 할 힘이 있다면......” 그의 군대가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맑은 날씨가 필요했습니다. 그가 자랑하는 포병은 맑고 밝은 대낮에 막강한 힘을 발휘하지만, 흐린 날씨에는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러나 해는 어김없이 서산으로 기울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드디어 다음 날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길은 온통 수렁으로 변했고, 나폴레옹이 자랑하던 대포는 진흙탕에 박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하를 호령하던 나폴레옹이 무참하게 패배했던 그 유명한 워털루 전투입니다.  



  나폴레옹은 태양을 멈추게 하지 못했지만, 여호수아는 태양을 멈추게 하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아무나 체험할 수 없는 엄청난 역사를 체험한 것입니다.



  3) 기대하지 않았던 풍성한 축복



  셋째로 여호수아는 끝까지 책임을 다함으로 말미암아 기대하지 않았던 풍성한 축복을 체험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도망치는 아모리 병사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진멸하였고, 전쟁에서 패한 후 막게다 굴에 숨어 있던 아모리 족속의 다섯 왕을 찾아낸 후 그들까지도 다 진멸해버렸습니다. 그리고 남은 가나안 성읍들을 차례로 공략했습니다. 그 결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복을 받았습니다. 40절 이하를 보면 여호수아가 전쟁을 마치고 길갈로 돌아왔을 때는 아모리 족속과 전쟁을 치르기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은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데스 바네아에서부터 가사까지, 또 고센 땅에서 기브온까지의 산지와 평지와 경사지를 포함한 가나안 남부지역을 정복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기브온을 돕기 위해 아모리 연합군과의 전쟁을 시작했지만, 나중에 보니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유익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결국은 나 자신을 돕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전에 한 번 소개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떤 사업가가 여유가 생겨 산골에 별장을 짓기로 했습니다. 우물을 파야할 텐데 어디에 파야 할지 몰라 땅을 잘 보는 어떤 노인에게 부탁을 해서 땅을 파자, 그곳에서 물이 솟아나왔습니다. 그는 거기에 펌프를 설치했습니다. 노인은 그에게 “매일 조금씩이라도 펌프질을 해야 합니다.”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런데 사나흘 펌프질을 하다보니 물이 너무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만하면 충분하겠지’라고 생각하고 펌프질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재정적인 이유로 공사를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6개월 후 건축 공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그 우물을 펌프질했지만, 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노인에게 가서 왜 물이 나오지 않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노인은 “내가 매일 조금씩이라도 펌프질을 하라고 했는데, 왜 그대로 안 했습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사업가는 “사나흘 펌프질을 했더니 물이 너무 많이 나와서 그만 두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 노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물이 안 나오지요. 지하의 수맥은 고무 튜브 같아서 펌프질을 계속하면 그 수맥이 넓어집니다. 그러나 펌프질을 안 하면 다시 줄어들고 맙니다.“



  우리의 사랑과 섬김이 바로 이 수맥과 같습니다. 잠언 11장 25절 하반절에서 ”....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 지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윤택하게 하면 할수록 우리의 삶이 윤택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가 더 큰 사랑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기면 섬길수록 더 큰 섬김을 받을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을 심으면 사랑을 거두게 되고, 미움을 심으면 미움을 거두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전쟁에 나섰다가, 오히려 더 큰 복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여호수아는 끝까지 책임을 다함으로 말미암아 우박을 통해 승리하는 역사를 체험했고,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하는 기적을 체험했고, 기대하지 않았던 풍성한 축복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여호수아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끝까지 도우라



  첫째로 도우려면 끝까지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공한, 성공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FOR THE SUCCESS LIFE)”에 보면, 직장생활 18계명이 나옵니다. 그 중에 몇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제1계명, 꺼진 불도 다시보자. 곤란과 곤경에 처한 사람이 후에 성공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잘하자. 제2계명, 평소에 잘하라. 잘되고 난 뒤에 잘하는 것은 의미 없음. 제3계명, 네 밥값은 네가 내라. 상사나 동료로부터 얻어먹지 마라. 제4계명, 고마우면 고맙다고,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큰소리로 표현하라. 제5계명, 남을 도울 때는 끝까지 도우라. 여기 직장생활 제5계명에 나오는 ‘남을 도울 때는 끝까지 도우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호수아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다같이 9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길갈에서 밤새도록 올라가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니“ 그가 어떻게 했습니까? 기브온 사람들을 돕기 위해 밤새도록 올라갔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을 돕되, 최선을 다해서 도왔던 것입니다. 잠도 자지 않고 밤새도록 올라가서 도왔던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여호수아의 이 모습을 배울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일단 도와주기로 작정했으면 여호수아처럼 최선을 다하여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도와주다가 중간에 멈추기보다 여호수아처럼 끝까지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명령기도를 하라



  둘째로 명령기도를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도망치는 아모리 병사들을 추격하기 위해 하나님께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의 기도가 좀 특이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태양과 달을 향해 명령하기 시작합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이것을 ‘명령기도’라고 합니다. 많은 크리스챤들이 이 명령기도를 모르고 있는데, 우리는 명령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명령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군대귀신들인 청년을 향해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시고,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향해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명령하시고, 죽은 나사로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앉은뱅이를 향해 “일어나라!”, 중풍병자를 향해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나병환자를 향해 “깨끗함을 받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님으로부터 배운 이 명령기도를 활용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향해 “내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령하여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또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명령하여, 죽은 다비다를 다시 살아나게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향해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명령하여 앉은뱅이로 하여금 걷게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제자들처럼 명령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주신 명령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처럼, 제자들처럼 명령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타이밍을 놓치지 마라



  셋째로 타이밍을 놓치지 마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 거민들을 도와줄 때,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기브온 거민들로부터 ”.... 더디게 하지 마시고 속히 우리에게 올라와 우리를 구하소서....“(6절)라고 도움을 요청받았을 때, 고민하거나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도움을 요청 받고나서 곧바로 모든 군사와 용사들과 더불어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또 하늘에서 내리는 우박세례를 받고 수많은 아모리 병사들이 죽고, 남은 병사들이 삼십육계 출행랑을 치기 시작했을 때도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도망치는 아모리 병사들을 추격했습니다. 또 태양이 넘어가면 추격하던 적들을 놓칠 것 같으니까, 태양까지도 멈추게 해달라고 기도할 만큼 타이밍을 놓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야훼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넘겨주시던 날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적들들 자기들 손에 붙여주셨다는 사실을 안 여호수아는 멈추지 않고 적들을 추격했습니다. 12절 이하에 보면 여호수아의 계속 이어지는 행동을 묘사해주는 단어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으신 분들은 제가 말하는 구절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22절에 보면, ‘때에’ 27절에 보면, ‘해질 때에’ 28절에 보면, ‘그날에’ 31절에 보면, ‘또’ 32절에 보면, ‘이튿날에’ 33절에 보면, ‘그때에’ 35절에 보면, ‘그날에’ 36절에 보면, ‘또’ 40절에 보면,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특별히 42절 하반절을 보면,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 여호수아가 이 모든 왕들과 그들의 땅을 단번에 빼앗으니라.” 여호수아가 그들의 땅을 어떻게 빼앗았다고 합니까? 단번에 빼앗아버렸습니다.



  이처럼 여호수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회를 잡았습니다. 주어진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기회를 붙잡았습니다. 우리도 여호수아처럼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기회를 붙잡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무엇이든지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흔히 부동산 투자에 성공하기 위한 비결은 첫째도 위치, 둘째도 위치, 셋째도 위치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성공은 타이밍에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첫째도 타이밍, 둘째도 타이밍, 셋째도 타이밍입니다. 쇠는 달구어졌을 때 두들겨야하듯, 한 번 타이밍을 놓치면 다시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하나님의 귀한 일들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한 청년의 간증을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1963년 10월19일 새벽 2시, 강원도 인제군 남면 어론리 마을 어귀 군부대 사택에 한 청년이 손에 도끼를 들고 뛰어 들어갔습니다. 잠시 후 비명소리가 이어졌습니다. 이 살인마는 당시 27세의 청년 ‘고재봉’이었습니다. 그는 이득중(36) 중령집에 침입하여 이 중령과 부인 그리고 세 자녀와 가정부 등 6명을 도끼로 무참히 살해한 후, 귀금속을 훔쳐 달아났다가 범행 24일 만에 한 상인의 신고로 서울에서 검거되었습니다. 검거된 고재봉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가 얼마나 포악했던지 아무도 그가 갇혀있는 감옥 근처에 가기를 꺼려했습니다. 한번은 교도소장이 그가 어떻게 있는지 보려고 창살사이로 얼굴을 들여 밀었다가, 그가 손살같이 일어나서 손가락으로 눈을 찌르는 바람에 큰 고통을 당한 적이 있을 만큼 고재봉은 흉악범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독방에 혼자 있으니까 심심하던 차에, 어떤 한 사람이 전해준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 체험을 한 후 가장 포악했던 사형수 고재봉이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자나 깨나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전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같은 감옥에 있던 재소자 2,000명 중에 무려 1,800명을 예수 믿고 구원받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식사를 끝내고 모두들 앉아서 성경책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고재봉, 전방!” 전방이라는 말은 방을 옮긴다는 뜻인데, 모두들 이미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고형!”하면서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는 철장 앞에 손을 내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미소 지으며 격려해주었습니다. “예수 잘 믿어! 나가면 교회 꼭 다니고.” “고형, 잘 가요.” 유치장 안은 삽시간에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사형 당하기 전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는 검찰관에게 “검찰관님, 제가 웃을 때 방아쇠를 당겨주세요.”라고 말하고는 소리를 높여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그러나 아직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렴을 부를 때 그는 웃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웃음을 지을 때, 방아쇠는 당겨졌습니다. 사형 당할 때의 기쁨에 가득 찬 듯한 그의 웃는 모습은 사형집행관과 군의관과 차남진목사와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까지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이 땅을 떠나 천국에 갔지만, 그가 살아생전에 면회 오던 사람들에게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진작 이 책을 보았더라면 아마 제 인생도 변했을 것입니다.... 어렸을 적 우리 동네에도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가 나에게 예수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사람을 죽이게 된 것이 아닙니까? 교회가, 교회가.......” 그래서 그가 쓴 간증수기 제목이 ‘아! 내가 예수를 일찍 알았더라면’입니다.



  여러분, 여호수아처럼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끝까지 책임을 다하되 영혼 구원의 책임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책임을 다할 때,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와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수아처럼 타이밍을 놓치지 말고 끝까지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도와주시되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위에 고재봉 청년과 같이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가 고재봉일 수 있습니다. 같은 직장을 다니는 직장동료가 고재봉일 수 있습니다. 바로 이웃에 살고 있는 이웃집 사람이 고재봉일 수 있습니다. 슈퍼마켓에서 스치는 사람이 고재봉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스치는 사람들 중에 고재봉처럼 주님이 필요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타이밍을 놓치지 말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주님께로 인도하시기 바랍니다. 주위에 있는 제2의 고재봉, 제3의 고재봉, 제4의 고재봉들을 8월에 있는 홈커밍데이에 초청하고 복음 듣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목 : 영적인 삶                                      


본문 : 마-06-33-                                      


가장 최근인, 지난 주간 번역 발행된 책 중에 \"균형 잡힌 삶을 살아라\"라는 책이 있습니다.


(Life Matters : Creating a Dynamic Balance of Work, Family, Time & Money, by


A. Roger Merrill,  Rebecca R. Merrill)



제목이 시사하듯 그 책은 인생을 치우치게 살지 말고 균형 있게 살라고 강조한 책으로서


인생을 균형 있게 살려면 누구나 4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를 찾아야 하는데


그 4가지 문제란... 일, 가족, 시간, 돈.. 이렇게 4가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4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란.. \"균형\"이라고 말하면서


이 균형도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런 균형이 아닌.. 역동적인 균형(Creating a Dynamic


Balance)으로서 이런 역동적인 균형이 있는 가운데.. 일과 가족과 시간과 돈의 문제를


적절하게 잘 풀면서 살아가는 삶이 균형잡힌 삶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균형\"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삶..뿐만 아니라


신앙적 삶에도 적용되어야 할 아주 중요한 주제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말로는 \"믿습니다!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말하면서도


현실에서는 믿음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불안 속에 살며...


믿음을 가진 사람답게 영적인 모습으로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고


세상 사람이나 다름없이.. 어떤 때는 더 못한 육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기에!!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설교 제목은 \"영적인 삶\"으로 정했습니다.



지난 두 주간 동안 우리는 \"사도신경대로 믿고 십계명대로 살자\".. 라는 주제 아래


추계작정특별새벽기도회를 은혜 가운데 마쳤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새벽 공기를 가르고 예배당에 나아와 말씀을 듣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기도한 기도제목들을 응답 받았다고 하는 분들도 있고.. 또


대부분은 앞으로 응답을 받게 되리라 믿으면서.. 제가 깊이 생각한 주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성도들이 지난 두 주간 동안.. 그렇게 간절히 간구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난 두 주 동안... 무엇을 열심히 구하셨습니까?



아마 각자가 구한 것은 모두가 다.. 다르시겠지만 제가 믿기는


우리 대구평강교회 교인들은 오늘 말씀처럼... 먼저는 영적인 것을 구했으리라 믿고


그 다음에 육적인 것을 구했으리라... 믿습니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A.Schaeffer)는 그의 책 \"진정한 영적 생활(True Spirituality)\"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한 영적 삶이란 무엇이며... 진정한 영적 삶이란 어떻게 시작되는 것인가?


    진정한 영적 삶이란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오늘 내일 아니 일평생 지속되는 삶으로서


    그래서 그 일평생 교제를 통해 열매를 맺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의 시작은.. 인간 내면의 진정한 변화로..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매주 중요한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삶이란 인간 스스로 결심하고 노력하면 잘 될 것으로 생각하지만


영적 삶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자기 자신이 주인임을 완전히 포기하고


그 자리를 주님께 내어드려야만 가능하게 되는 것이고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가 자기의 주인됨을 완전히 포기하는 바로 그 시점부터가!!


영적 삶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적 삶이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주인이신 예수님이 하는 것이기에


내가 나의 주인임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 사실 영적 삶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어떻게 보면 이것이 불가능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닥쳐있는 현실은.. 뭐라도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는 절박한 현실 속에 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며 살아가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럴 것입니다. 현실의 삶은 항상 문제가 있습니다.


먹는 문제가 해결되면 입는 문제가 대두되고,


입는 문제가 해결되면 공부하는 문제가 대두되며


공부하는 문제가 해결되면 취직이나 결혼문제가 대두되고


취직이나 결혼문제가 해결되면 건강문제가 대두되고...


이렇게 우리의 인생살이는 끊임없는 문제의 연속이기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아가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제가 자주 쓰는 용어로.. 맨 정신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저 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내 정신으로 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대신 나를 주장하실 때!


그때 가능하게 되는 것인데!! 그렇게 되어 생활하는 것을 \"영적인 삶\"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자, 오늘의 본문 조금 앞부분을 함께 보십시다. 25-32절입니다.


다함께 한목소리로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지금 이 말씀을 듣는 대상은 부자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빈민지역에 사는 갈릴릴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눈 앞에 놓여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인데..


이들보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예수님 말씀이 너무하시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들에게 먼저.. 먹을 문제나 해결해 주시고 나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렇게 말씀하시지.. 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렇게 말씀하셨는지


사실 그들은... 처음에 몰랐습니다. 아니 알 길이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것이 진정 영적인 삶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생각하기를 영적인 삶과 육적인 삶을 구분하는 것에는


오늘 본문이 기록된 마태복음 5장에서 말하는..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이런 것은 영적 삶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고


오직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증거.. 이런 것을 하며 살면 육적인 삶이고


예배 기도 찬양 전도 봉사 이런 것을 하며 살면 영적인 삶이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영적 삶은 그것만이 아니고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것을 훌쩍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물론 영적인 삶이 예배 기도 찬양 전도 봉사 이런 것이고


또 그래야 하지만.. 영적 삶이란 것이 그것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 심지어 공부하고 직장가며 결혼하고 놀러다니는 모든 영역에


이것이 다 미쳐야만!!... 그것이 진정 영적인 삶이라는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네이께르끄에서 태어나 예수회 사제로 활동하다가 신학과 심리학을 공부하고


예일대학에서 강의하다가 교수직을 사임하고 장애인 공동체인 라르쉬(L\'Arche)를 창설한


헨리 나웬(Henri J. M. Nouwen)은 그의 저서 \"영적 발돋움(Reaching Out)\"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일상적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외로움과 적개심은 쉽게 깨달을 수 있는 반면


    우리가 가지려고 애쓰는 것은 결국.. 환상이라는 점을 깨닫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존재에 대한 우리의 환상을 벗겨 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가운데서만


    진정한 영적 삶은 가능한 것입니다.



이 헨리 나웬은..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이 세상에서 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인가...를 깊이 있게 성찰하며 산


훌륭한 영적 지도자입니다.



그는 직장과 직분, 삶의 터전을 과감하게 변경해 가면서 진지하게 질문한 끝에 내린 결론은


이것이 뭐냐?.. 이것이야 말로 영적인 삶이며.. 영적인 삶에로 나아가는 과정이라 이해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바르게 살려는 몸부림을 가리켜... \"영적 발돋움\"이라 정의한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진지한 영적 탐구를 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지만


영적 거장(巨匠) 중의 거장은 사도 바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영적 삶에 대하여 말합니다(로마서 8:5-10).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무슨 말인가 하면.. 영적인 삶이란 전적으로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의 영과 관련되어 있는데.. 내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도 아니고


그리스도적 삶도 살 수 없으며.. 그래서 그런 삶은 영적 삶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마태복음 5장에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어도.. 믿으라!! 기도하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너희 천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 다 아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부터 구하라!!..


그러면 너희가 구하는 그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실 것이다...는 말씀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완전히 새롭게 사는 삶!!


근심 걱정 모든 염려 다 버리고 행복하게 사는 삶!!


참으로 자유하며 사는 삶!!..


이름하여 영적으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파격적으로 제시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자면 먼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염려라는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염려가 영적인 삶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염려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염려란 보통 우리가 말하는 염려하는 차원을 넘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염려!!


미래를 향하여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염려를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 길을 가다가 웅덩이에 빠진다면..


혹시 밤에 잠자다가 숨을 못 쉬어 죽게라도 된다면..


혹시 앞으로 결혼한 다음 내가 낳게 될 아기가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된다면..


혹시 10년 후에 이 땅에 전쟁이라도 터진다면.. 혹시.. 혹시.. 혹시..


이런 염려가 우리를 어떠한 삶으로 인도하는가 하면 영적인 삶으로 인도하기는커녕!!


완전히 육적인 삶으로 인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탄 마귀만 좋아하는 삶으로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염려하고 있다고 개선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염려하고 있으면 개선되기는커녕 각종 질병에 걸릴 확률만 높아질 것입니다.


정신병, 위장병, 온갖 질병...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삶에 문제가 있다고 걱정 근심 염려 가운데 있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도하라!!.. 기도를 하라!!



무슨 말씀인가 하면 인생살이에서 문제가 생길 때는.. 기도가.. 그 열쇠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도 우선 순위가 있는데.. 먼저 구할 것을 먼저 구하고


나중 구할 것은 나중에 구할 줄 아는 지혜와 인내심만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자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의 삶은 어떤 삶이 되겠습니까?



바로 영적인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삶의 현실은 힘들고 어려워도!!.. 광야와 같은 현실 속이라 할찌라도!!..


자신의 그 삶을 육적인 삶으로 치닫게 하지 않고.. 한 차원 승화시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인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로마서 14:17-18).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이 부분을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당장 먹고 마시는데 문제가 있어서 염려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주님께서 염려라는 것은 하지도 말고.. 오히려 기도하라 하시니.. 기도를 합니다.



기도도 내가 급한 것부터 먼저 구하지 말고.. 먼저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시니


급한 것부터 구하지 않고 억지로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다 보니..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너무나 기뻐하시고는.. 기도에 응답을 해 주셔서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천국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누리게 하셔서


그동안 염려하던 그 모든 것들이 눈녹듯 다 해결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이 영적인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염려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며 거기에 집착할 때.. 그것이 문제가 되고.. 염려가 되는 것이지!!..


내가 만일 그것에 집착만 하지 않고... 계속 그것을 문제만 삼지 않게만 된다면


결국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비록 현실에서는 어려운 문제가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며 한숨만 짓고 있지 않고!!... 염려하고 앉아 있지도 않고!!...


새벽같이 교회 나아와 엎드려 기도하며...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기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고


이어서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하며 살아가다 보면!!...


먼저는 천국이 나에게 임하는 축복을 얻게 되고...


이어서 필요한 것을 응답 받게 되는..


일거양득의 축복의 삶, 영적인 삶으로 승화된다는.. 이런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갈라디아서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무슨 말씀인가 하면..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면 육적인 삶을 살게될 것이나


성령이 원하시는대로 살면 반드시... 영적인 삶을 살게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제가 오늘 이런 설교 제목을 잡고 설교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기도를 하면서도 염려하며 살아가는 것이 안타깝고


또 기도할 때... 먼저 구할 것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임에도 불구하고


먹는 문제.. 입는 문제.. 마시는 문제.. 건강 문제.. 집 문제.. 땅 문제.. 이것에만 집착해서


여기에서 한발짝도 떠나지 못하고...


그것만 집착해서 먼저 구하고.. 또 그것만 간구하고 있는.. 이런 모습들이 안타깝기 때문에


이제 그만큼 믿었고 그만한 세월을 보냈으면.. 이젠 영적인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나 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철학자 니콜라이 베르자예프(Nikolai Aleksandrovich Berdyaev)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빵이라고 하는 문제가.. 나의 문제일 때... 나의 빵 문제는 물질적인 문제이지만


    빵이라고 하는 문제가.. 이웃의 문제일 때.. 이웃을 위한 빵 문제는 영적인 문제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먹고 사는 문제가 내 문제일 때는... 그 문제가 물질적 문제요... 육적인 문제이지만


먹고 사는 문제가 이웃의 문제일 때는.. 그를 도와 주어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영적인 문제라는 것인데.. 이처럼!!


내 문제를 그냥 물질적 문제... 육적인 문제로... 그냥 그대로 놔두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 문제가 물질적인 문제이고 육적인 문제이기는 하지만 기도로 한차원 승화시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나아갈 줄 아는 삶... 바로 이것이.. 영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이 좀 어려워진 것 같습니다 마는.. 제가 드리는 말의 중심을 잘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을 누가 사셨는가 하면.. 우리 주님이 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빵의 문제.. 마실 물의 문제.. 이런 물질적인 문제, 육적인 삶에 연연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한차원 승화시켜.. 영적인 삶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면 다 영적인 삶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그렇게.. 영적인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육적인 문제는 비록 있지만 그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자유하면서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천국을 누리며 살 수는 없는 것입니까?...



있습니다!! 길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 길은... 예수님처럼!!.. 예수 그리스도처럼!!.. 따라 살게만 된다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람들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생활하다가...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을 수만 있다면!!..


근심과 걱정과 염려로 가득찬 이 땅 한가운데서 영적인 삶을 충분히..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제목 :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본문 : 마-06-33-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특별히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창세 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모든 죄를 사함 받았으며, 성령으로 거듭남을 체험하고, 성령이 함께 해주시는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천국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리는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예수 믿는 사람들보다 더 큰 복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얼굴만 보아도 이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행복이 흘러넘치는 은혜로운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유감스럽게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자신이 받은 복이 무엇인지, 또 얼마나 큰 복을 받은 행복한 사람인지 잘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매주 교회를 나오면서도 도무지 구원받은 자의 기쁨이 없고, 예수를 믿어도 즐거움이 없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매여 있습니다.


이런 성도들은 장차 들어가서 살게 될 하늘나라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오로지 이 세상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건강한 몸으로 장수할까?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어 잘 살아 볼까? 어떻게 하면 출세하여 남들이 부러워하는 부귀영화를 누려볼까?” 자나깨나 이 생각이 그를 떠나지 않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서도 이런 분이 계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40:6-8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나가서 외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라고 묻는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풀이나 들꽃과 같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한때 아름답고 탐스럽게 피어났다가도 저녁이 되면 시들어 떨어지는 들의 꽃들과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은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아서는 안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잠시 잠깐 머물다 가는 여관과 같은 곳으로 즐거움도 잠깐이요 괴로움도 잠깐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애착을 가지고 살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서 영원히 살 곳인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그 나라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항상 마음의 천국을 이루고, 천국과 같은 곳에서 천국을 맛보며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천국에 가는 것이 가장 큰 복이요 가장 행복한 사람인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면서 제일 먼저 외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문은 매우 좁은 문이기 때문에 죄 짐을 지고서는 결코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죄의 짐을 다 벗어버려야 천국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죄 짐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의 첫 단계입니다. 회개하는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죄사함을 받고 죄 짐을 벗어버린 후에야 비로소 천국문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에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구원의 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사도행전 2:36을 보면, 베드로가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설교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애통해하며 가슴을 치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이들에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와같이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 마음속에 천국이 이루어지며, 성령충만함을 받으면 받을수록 천국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이 “왜 은혜를 받아야 하는가?” “왜 지속적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가?”하는 물음 앞에 서있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은혜를 받지 않으면 늘 마음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선포했습니다(롬 14:17).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가 잘 먹고 잘산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20~21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같이 천국은 먼저 성령충만한 자의 마음에서부터 이루어지고, 온 가족들이 은혜를 받아 성령이 충만해지면 천국과 같은 가정이 되며, 은혜받은 성도들이 모인 교회는 천국과 같은 교회가 됩니다.


성령의 은혜가 충만한 곳이면 어디든지 천국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천국과 같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성도들이 열심히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부산 400만 시민들이 성령충만한 은혜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 면 그야말로 천국과 같은 도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하심으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영원토록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계 11:15).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이전에 해야 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사명이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어도 자신의 사명을 모르기 때문에 교회만 잘 다니면 다 되는 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명을 모르기 때문에 신자답게 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첫째 사명은 먼저 자신의 마음속에 천국을 이루고 사는 것입니다. 내 안에 천국이 이루어지면 기쁨이 충만하여 얼굴이 빛납니다. 아름답습니다. 그 모습 자체가 확실한 전도가 됩니다.


마음 천국을 이룬 사람이 가정을 천국과 같은 가정으로 만들고, 교회를 천국과 같은 교회로 만들며, 더 나아가 이 세상을 복음화하여 천국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나만 예수 믿어 천국을 이루며 살 것이 아니라, 안 믿는 이웃들에게도 열심히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만이 이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1:4~5,8).


성령이 임하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하면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을 살려고 하면 많은 고난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고난을 많이 받았지만 그는 이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롬 8:18).


그러므로 고난을 당할 때 괴로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장차 받을 영광이 크다는 것을 알고 기쁨으로 이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20:4을 보면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환난과 핍박을 당해도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고난을 당하면서도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장차 받을 영광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장차 가서 살게 될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좋은 곳인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아름답게 잘 꾸민 새 집에 들어갈 때 기분이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신부가 신랑을 위해 단장한 것 같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4절을 보면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천국에는 눈물이 없습니다.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또 5절 이하를 보면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정이라 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고 했습니다.


아마 위에 열거한 각종 보석들을 다 보신 분들이 드물 것입니다. 천국에는 열두 문이 있는데 그 문이 모두 한결같이 하나의 진주로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그 규모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매우 화려하고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뉴욕의 박물관에서 매우 큰 보석들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다이아몬드이며 각종 보석들을 구경하며 크기가 너무 커서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천국에 가면 이 보석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천국의 길은 모두 금으로 되어 있는데 얼마나 좋은 금인지 맑은 정금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금으로 된 길을 걷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상상이 되십니까? 바로 이곳이 저와 여러분이 장차 가서 살 천국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을 보면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나라를 믿습니까?


여러분은 이 나라에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나라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마음천국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심하게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배고픔과 헐벗음과 많은 위험과 고난 중에 있었지만, 어떤 형편에 있든지 항상 찬양하며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천국을 맛보며 산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얼마나 기쁨이 넘쳤길래 성도들에게도 “항상 기뻐하라.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외쳤을까요. 그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 어디를 가든지 열심히 천국복음을 전했습니다. 환난과 핍박을 당하면서도 이를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항상 담대히 천국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순교할 날이 가까이 왔을 때 디모데후서 4장에서 디모데에게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기의 사명을 다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일평생 하나님의 나라에만 관심을 두고 사셨습니다. 어디를 가시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머지 않은 장래에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때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을 두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달게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하나님 나라에서 면류관 쓰고 예수님과 함께 왕노릇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제목 : 초심으로의 회복                                      


본문 : 왕상-10-14-                                      


최근 들어 매스컴을 통해 우리가 자주 접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자살”이라고 하는 단어일 것입니다. 최근에 신문 지상에 오르내린 자살을 살펴보면, 생활고를 비관하던 30대 주부가 세 자녀와 함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온 나라를 충격을 주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대하는 아버지 곁으로 가는 것이 싫었던 초등학생이 역시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습니다. 군 내부 반에서 인격적인 모욕과 성적 희롱을 당한 사병이 그 모욕감을 견디지 못하고 집에서 목을 메달아 자살했습니다. 그런가하면 공부를 못해서 비관하던 고교생이 목을 매어 자살했고, 어떤 주부는 쌍꺼풀 수술이 잘 못 되었다고 비관하다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산에 사는 40대 부부는 아들의 카드 빚을 고민하다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습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많은 문제들로 몸살을 앓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참으로 암울한 사건들의 나열입니다. 아마 내용과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우리들 가운데도 감당하기 힘든 극심한 무력감과 고통을 느끼며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계시리라 여겨집니다.



그 같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도 같은 곳에 있는 여러분들과 저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무엇을 하나님께 소원하시겠습니까?



이와 동일한 질문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솔로몬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솔로몬은 성군으로 소문난 그의 아비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세 번째 왕이 된 사람입니다. 처음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의 빼신 백성들 가운데 있나이다.” 그의 고백이었습니다.



그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깨달은 그는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성경은 그가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제를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렸다고 하는 것은 그가 그 자신의 무능함을 얼마나 철저하게 깨닫고 있었는지, 그가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증거입니다.



그가 이 같은 일천번제를 드린 후에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이 때 솔로몬이 구한 것은 “지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가 구한 지혜뿐만 아니라 그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 처음 약속을 지키셨고, 솔로몬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부귀와 영화를 누렸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지혜”만 구한 솔로몬에게 하나님은 그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화를 허락하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가 구한 “지혜”라고 하는 단어를 묵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솔로몬의 지혜는 공부 잘하고, 똑똑하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지성적인 것이거나 분별력이 뛰어난 어떤 지적 능력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구한 지혜는 그런 성격의 지혜가 아닙니다. 몰론 이러한 의미를 지니는 지혜도 성경에 나옵니다. 그것은 히브리어로 “비나”라고 하는 데, 우리 말 성경에 주로 명철, 지식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이 구한 지혜는 히브리어로 “호크마“라고 합니다. 이 말을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듣는 마음, 혹은 순종하고 복종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 나오는 단어 중에 가장 중요한 단어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은 생각하고 느끼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근원 혹은 샘을 의미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마음을 대장간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농사에 필요한 농기구들을 이곳에서 만들 듯이 우리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결정 짓는 곳이 바로 마음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에서 마음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사람이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 얼굴 표정, 눈 빛, 심지 걸음걸이까지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15:13)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6:45)



그렇습니다. 마음에 소망으로 가득 차 있으면 절망 가운데서도 웃고 기뻐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마음에 사람이 넘치면 말투, 표정, 행동에 사랑이 넘치게 됩니다. 마음에 용서가 있으면 어떤 사람이라도 이해하고 용서하고 관용하고 품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시기가 있으면 질투하고 배신하게 됩니다. 마음속에 미움이 넘치면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악한 것이 있으면 악한 말을 하고, 악한 행동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 부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부부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들의 재산과 소유를 팔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얼마를 감추고 얼마를 사도들의 발 앞에 둡니다. 이를 보고 베드로가 이렇게 꾸짖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네 마음에 사단이 가득하여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로다.” 결국 부부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문제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사단이 가득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그들이 그들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다스리도록 영적 관리를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사단이 그들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었고, 그 사단에 영에 지배를 받은 그들은 결국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여 그 같은 불행을 당한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한 것이 그들이 그처럼 불행하게 된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권면하고 계십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그렇습니다. 마음은 곧 생명입니다. 마음을 지키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죽습니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불행하게 됩니다, 비참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마음을 지킬 수도 없고 다스릴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어렵고 힘든 일이 많지만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지키는 것 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하나님과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 부부처럼, 자신들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처럼 우리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실수하고, 화내고, 시기하고, 미워하고, 교만하고, 잘난 체 하고, 절망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흔히 부모들이 범하는 실수 중의 하나가 자녀들의 마음을 부모인 내가 얼마든지 다스리고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큰 착각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큰 교만인지 모릅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도 다스리지 못해 이리 쓰러지고 저리 실패하는 우리 자신이 누구의 마음을 다스린단 마입니까? 누구의 마음을 내가 지키고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은 오만이요 착각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명의 길이 되고, 우리가 행복해지는 길인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을 우리 마음에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119:11)



앞서 살핀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근원지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채워 넣습니다. 새겨 넣습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오겠습니까? 그렇습ㄴ다. 우리의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보는 것, 느끼는 것, 행동하는 것이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에 지배받고, 통치되고,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이 때 우리의 삶과 행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삶, 거룩한 행실이 되는 것입니다. 사단이 원하는 죄에서 떠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별 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주 명확합니다.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 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구약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이 이 두가지 내용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사실ㅇ 기초하여 우리는 솔로몬의 간구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제게 지혜를 주옵소서.


= 하나님, 제게 듣는 마음을 주옵소서.


= 제 마음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주시옵소서,


= 제 마음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백성들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채워 주시옵소서.



이것이 바로 “지혜”를 구한 솔로몬의 기도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입니까? 이 같은 기도가 너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으리란 판단은 조금만 생각하면 쉽게 결론 지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솔로몬의 기도가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처음 왕이 되었을 때, 솔로몬의 마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깨끗하고, 순전하고 겸손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소리와 백성들의 소리에 민감했습니다. 그의 심장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지나면서 솔로몬의 이 첫 마음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처음 사랑과 열정이 식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처음 하나님께 보여주었던 결심들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맑고 깨끗하고 순전했던 그의 처음 마음이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삶이 부유해지고, 그의 이름이 알려 지면서, 어두워지고, 흐려지고, 더럽혀지고, 거짓된 영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그의 첫 열심과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그의 사랑이 식어지기 시작했음을 암시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선, 그의 왕궁에는 금으로 만든 장식품들이 넘쳐 난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금으로 만든 방패가 500개, 정금으로 입힌 상아보좌, 정금으로 만든 컵과 식기 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묘사는 그의 부귀를 나타내지만 동시에 그이 타락상을 엿보게 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신 17장에 보면 “왕은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세운 왕은 “자기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 자신을 위하여, 그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고 과시하고 폼 재기 위하여 이 같은 금제품을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금 방패를 500개나 만들어 그의 왕궁에 두었다고 하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그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는 것에 깊은 관심과 욕심을 두고 있었는지를 엿보게 합니다.



더군다나 그 같은 제품을 만드는데 들어간 대부분의 정금들은 백성들로부터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것입니다. 백성들을 위해 사용해야 할 금을 자신을 위하여 사용한 것도 문제이지만, 이처럼 백성들의 노역과 세금으로 그의 배를 채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들의 소리에 민감하지 않았으며, 그들을 사랑하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반증입니다. 그리고 그는 많은 말과 병거들을 구입했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입니다.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순종했지만, 하나님보다 다른 힘에 더 의존하는 것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많은 이방여인들과 결혼함으로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라”는 말씀도 어겼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같은 그의 상황을 가르켜 “마음이 온전하지 못했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그의 통치 말년은 그의 통치 초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쁘게 바뀌어 있었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바뀌었습니다. 삶의 척도가 바뀌었습니다. 관심사가 달라졌습니다. 처음 왕이 되었을 때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리에 민감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잘 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말년의 그의 마음은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세상의 가치와 척도를 중요시 여겼습니다. 자신의 평안과 번영에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솔로몬의 마음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완전히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마음 상태를 본문 11:9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이처럼 그가 하나님을 떠나자 하나님 역시 그를 떠났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버리자 하나님 역시 그를 버렸습니다. 이것을 아주 무서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고 버리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솔로몬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소리를 세 가지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들의 마음을 지키시고 다스리시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는 물질의 문제가 아니요, 환경의 문제도 아니요, 정치적인 문제도 아닙니다.바로 마음의 문제요,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이 물질이 세상의 소리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도록 방치해두어서는 아니 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소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의 마음을 지배하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평강의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바로 빌 4:4-7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지키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걱정이 변하여 찬양이 되고, 염려가 바뀌어 기쁨이 되고, 한숨이 변하여 감사가 될 줄 믿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소리에 민감해야 합니다. 솔로몬이 처음 왕이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소리에 민감하기를 소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소리가 하나님의 소리요, 백성들의 고통이 하나님의 고통이요, 백성들의 기쁨이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백성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백성들을 섬기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같은 그의 마음이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나만 힘든게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다 힘듭니다. 이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내가 힘들다고 나만 생각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내가 힘겨워도 다른 사람의 아픔, 다른 사람의 한숨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손을 펴서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의 저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일전에 30대 여인이 세 자녀와 함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습니다. 목격자들에 의하면 그 때 아이들이 이렇게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엄마 살려줘. 안 죽을래, 살래” 이건 아이들의 소리가 아닙니다. 내 백성들을 살려달라는 하나님의 부르짖음입니다. 이 땅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르는 절망의 소리, 한숨의 소리에 민감해야 합니다.



마지막은 하나님 앞에서 고백했던 처음 약속이 변하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처음 왕이 되었을 때 솔로몬의 다짐과 결심은 대단했습니다. 수도, 부도, 영화도 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소리, 백성들의 소리를 잘 들을 수 있는 지혜로운 마음을 구할 정도로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이후 그는 한 동안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며 빚진 마음으로 통치 사역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변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초심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 같은 변심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처음 사랑, 처음 열정, 처음 감격,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다짐하고 약속했던 초심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우리는 언제나 깨어 기도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을 넘어뜨리고 패배시킨 사탄이 오늘은 저와 여러분들의 초심을 빼앗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높은 뜻을 생각하며 이제는 정말 제대로 예수 한 번 믿어보겠다고, 올바른 신앙 생활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굳게 다짐하고 결심하고 약속하고 우리 높은뜻 숭의교회 교인이 된 저와 여러분들은 그 처음 다짐이 변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처음 마음, 처음 다짐, 처음 사랑, 처음 열정이 변하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던 단단해 진보할 수 있도록 깨어서 더 간절하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많은 댓가를 지부라고 모인 만큼 하나님 앞과 한국교회 앞에 빚진 마음, 선한 부담을 안고 신앙생활 해야 할 줄 믿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같은 빚진 마음을 놓치고, 초심을 잃어버린다면 우리 교회는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은 솔로몬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잔뜩 만들어 그의 왕궁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금방패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교회와 저와 여러분들을 떠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의 신앙의 자리는 어떠합니까? 첨 사랑과 열정, 그 다짐이 변하지 않고 오히려 진보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진보하기는커녕 오히려 퇴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봉사는 어떻습니까? 기도 생활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다시 한번 저와 여러분들에게 질문하십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여러분들은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제목 : 은혜의 공동체                                      


본문 : 딛-02-11-14                                      


필립 얀씨의 저서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영국에서 비교 종교학 회의가 열렸을 때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이 무엇인가라는 토론이 진행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성육신의 교리’가 아니겠느냐고 했을 때 어떤 학자가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다른 종교에도 있다는 근거들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아무래도 ‘부활의 교리’에서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하자 또 다른 학자들은 죽은자의 환생의 교리는 기독교의 전유물만은 아니라고 말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때 유명한 영국의 C.S. Lewis교수가 일어나 그 대답은 어렵지 않다고 전제하면서 다른 종교에서 찾을수 없는 기독교만이 제공하는 일관성있는 메시지는 ‘은혜’라고 지적하자 결국 모든 이들이 동의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그의 믿음의 아들이요 제자인 디도가 그레데 섬이라는 곳에서 목회를 감당할 때 무엇을 제일 중요하게 설교하고 어떻게 교회를 치리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 편지를 통해서 한마디로 그는 기독교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은혜에 대한 응답이라는 관점에서 가르침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은혜란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지는 일방적인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미 로마교회를 향한 편지에서도 강조했고, 에베소 교회를 향한 편지에서도 역설한바가 있었습니다. 잘 아시는 유명한 엡2:8-9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같은 강조를 바울은 딛3:5에서도 반복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치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긍휼은 은혜의 다른 표현입니다. 저주받아 마땅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저주가 아닌 사랑을 베푸심이 바로 긍휼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을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하여 살아가도록 만세 전부터 준비하셨다고 가르칩니다. 사도는 동일한 관점에서 목회서신인 디도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진실로 이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의 은혜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왜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을 주님은 각각의 혼자로 남겨 두지 아니하시고 공동체안에서 살도록 하셨을까요? 그것은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격려하며 살아야 할 삶들이 남아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은혜받은 성도들이 은혜 공동체를 통하여 추구해야 할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할 것입니까?



1. 과거의 불법들을 버리고 떠나야 합니다.



본문 14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이유를 설명하며 그가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은 우리를 불법에서 구속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구속이란 대가를 지불하고 다시 회복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회복되어 살아가는 삶을 위하여 그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못박아 피흘리시는 희생하는 대가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불법의 대가였던 것입니다. 여기 사용된 불법이란 단어는 죄에 대한 법률적인 용어입니다. 죄는 곧 불법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을 안하고 하라고 하지 말라고 하신 법을 어기고 행한 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곧 그의 은혜로 우리는 이런 불법에서 사함받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구원받은 우리가 다시 불법을 행하던 과거로 돌아가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서신들을 통하여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경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과거로 돌아가고픈 과거 회귀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땅의 종살이에서 구원을 받아 애급을 떠나서도 자꾸 기회만 있으면 애급을 그리워하고 애급으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돌아가면 끝입니다. 그것은 그들을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인 사람들중에 창조적인 미래를 만들어간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자기 아내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아내는 너무 히스토리칼해서 괴롭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히스테리칼을 잘못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히스테리칼이 아니라 히스토리칼이래요. 무슨 뜻이냐고 했더니 옛날 결혼전의 자기 과거를 기회만 있으면 이야기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히스토리칼(historical)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의 아내에게 하나님은 히스토리칼하지 않으시다고 그분을 본 받으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도 않으시는 분”이라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그러나 이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처음 은혜를 받고 구원받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과거로 후퇴하지 않고 성장하려면 제일 중요한 것이 적절하게 양육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양육의 첫 스탭은 과거의 죄나 불법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버릴 것을 버리고 떠날 것을 떠나도록 도와야 합니다. 12절의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이것은 성경의 일관성 있는 가르침이 아닙니까? 베드로 전서2:1-2에도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들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오늘의 은혜 받은 교회 공동체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변화의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이유가 오늘의 성도들이 버릴 것을 버리도록 양육하지 못한 때문이 아닌가를 최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 초대교회만 해도 교회가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칠수 있었던 것이 성도들이 일단 예수를 믿으면 버릴 것을 분명하게 버렸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바람피우지 않고, 술 끊고, 도박을 포기하고, 이런 분명한 변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버릴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신 주의 은혜가 다시한번 우리에게 버릴 것을 버리게 하시는 은혜로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2. 현재의 선한 일에 열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은혜에 대한 응답은 무엇인가를 버리는 것으로 부족합니다.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성경은 그것이 선한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결코 선행으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선행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이미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강조한 바가 있었습니다. 엡2:8-9에서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엡2:10에서 바울사도는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선한 일-선행)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했습니다. 그는 다시 오늘의 본문 14절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깨끗하게 하심이 우리로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했습니다. 선행가운데 살아감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친백성이 된 증거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은 결코 우리가 마땅히 이런 선한 일을 해야 하겠다는 도덕적인 당위의식으로 말미암아서는 안됩니다. 그런 선행은 믿지 않는자도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선행은 오래가지 못하며 자신의 이름 석자 선전하는 수준의 선행으로 끝날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지지하지 않는 율법주의적 선행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주님의 놀라운 은혜 그 사랑을 체험한 가슴에서 솟아나는 자발적인 감격의 충동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필립 얀씨는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을 명화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의 여인 제니의 사랑에 대한 반응같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아이큐 75의 우직한 저능아 검프-아무것도 의미있는 일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받은-그가 어느 날 한 여인의 사랑을 받고 앞을 향해 달리기 시작합니다. 길에서도 운동장에서도 전쟁터에서도 그는 달립니다. 그에게 영웅이 되고 싶은 충동도 메달을 받고 싶은 충동도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제니 때문에 사랑 때문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모일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고 간증하고 찬양하고 경배하는 이유-그 은혜, 그 사랑의 감동이 우리를 지배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다시 선한 일을 위해 달려가는 자가 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저앉을 때마다 우리는 조건없는 첫 사랑을 알게 해준 그분의 음성-그리고 그의 사랑을 겅험한 동료들의 소리를 듣고 일어납니다. “포레스트-런, 런, 런(달려, 달려, 달려야 해)”



3. 미래의 소망으로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다.



선한 일을 시도하는 모든 사람들이나 공동체가 반드시 부딪치는 장애가 있다면 세상이 우리의 선의를 몰라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한 일을 하다가 상처받고 좌절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선행을 보상받고 싶어할수록 더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행의 목표를 남들이 알아주기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선행의 유일한 동기는 은혜이며 차선의 동기가 있어야 한다면 자신의 경건의 유익을 위해서 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12절에서 우리가 버려야 할것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버리고 포기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는 것도 말씀드렸습니다. 12절 하반부에는 우리가 버리면서 동시에 붙잡아야 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서 살고”라고 가르칩니다. 이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한 인격의 표상이 누구이겠습니까? 예수님 이시지요. 이렇게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런 삶의 결과가 선행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경건을 단순히 죄를 피하고 안 짓는 등의 소극적인 모습으로만 그리지 않습니다. 약1:27을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서 돌아보는”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바로 이런 적극적인 선행을 함께 수행하도록 이 선행의 미숀을 주께서는 교회 공동체에게 위임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선행을 하다가도 지칠 것입니다. 그리고 선행을 추구하면서도 여전히 욕심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괴로워 할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13절의 교훈이 그것입니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남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우리의 못다 한 선행의 마지막 과제를 완성시켜 주시기 위하여, 우리의 못다 자란 인격의 마지막 부분을 채워 그분을 온전히 닮은자로 그분앞에 우리를 세우기 위하여 그분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것이 그가 마지막에 우리에게 주실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의 경건이십니다. 우리의 행복이십니다.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그분이 우리 공동체의 비전이십니다.



제가 “비전의 신을 신고 걷는다”에서 인용한 마더 테레사의 “어쨋거나”(Anyway)라는 시를 다시 한번 인용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때로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느껴진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용서하십시오/당신의 친절에 사람들이 오히려 당신의 동기를 의심하고 당신을 이기적이라고 한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친절하십시오/당신의 성공을 보고 주변에서 거짓된 친구들과 참된 친구들이 함께 모여온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성공하십시오./당신의 솔직함과 단순함을 이용하여 사람들이 당신을 속인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정직하십시오/당신이 여러 해에 걸쳐 성취해온 모든 것을 사람들이 하룻밤에 다 무너뜨리려 할지라도 어쨋거나 성취 하십시오/당신이 찾아 낸 행복과 평화를 누군가가 질투한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행복하십시오/당신이 오늘 베푼 선함을 사람들이 내일은 다 잊는다고 할지라도 어쨋거나 선을 베푸십시오/당신이 가진 최선을 이 세상에 다 내어 주어도 세상은 여전히 부족함 투성이라 해도 어쨋거나 당신의 최선을 내어 주십시오.--”



<설교 적용 질문>



1. 본문을 에베소서 2:8-10과 비교했을 때 공통적인 강조점들이 무엇입니까?



2. 본문 12절, 13절, 14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 속에서 각각 어떻게 나타나야


합니까?



·12절:


·13절:


·14절:



3. 본문 14절에 의하면 성도의 선한 일의 동기는 무엇이어야 합니까?



4. 금번 여름 우리가 각자가 헌신하고 싶어하는 선한 일에 대하여 나누어 보십시오.


                                  


제목 : 다시 새로워지는 믿음                                      


본문 : 딛-03-04-8                                      


  며칠 전  이사심방을 했습니다. 15년 정도 된 기존의 아파트를 사서 이사를 하셨습니다. 지어진지 어느덧 15년 정도 되다보니 이곳저곳 낡기 시작했습니다. 주변 환경도 아파트 건물 자체도 깔끔한 새 아파트와는 달랐습니다.



  그런데 집 안에 들어 가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막 새로 분양한 새집이었습니다. 집을 사셔서 소위 리모델링(Remodeling)을 하신 것입니다. 오래된 집이 새 집처럼 변한 것입니다. 너무 보기가 좋았습니다.






   리모델링이라는 말은 “낡은 주택이나 상업공간을 최신 유행의 구조와 마감으로 바꾸는 개보수 작업”을 통칭합니다. 그러니까 지은 지 오래된 건축물에 재투자함으로써 부동산의 가치를 개선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리모델링을 제 2의 건축이라고 부른답니다.



   전문 서적을 찾아보니까 리모델링은 건물의 유지(maintenance), 보수(repair), 개수(renovation)를 모두 포함한 광범위한 말로 쓰인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리모델링은 우선 기존 건물을 파괴하거나 철거하지 않고 유지하는 작업입니다. 다음으로 낡고 문제가 생긴 부분을 보수하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더 필요한 기능과 모양으로 바꾸거나 첨가하는 작업니다.



   저는 이 심방을 하면서 우리 신앙도 이렇게 리모델링을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우리 신앙도 새롭게 리모델링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 신앙 리모델링이 필요할까?



   저는 사사기를 읽으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고 그것을 제 신앙의 교훈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사사기 1장을 보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의 상황이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모세 뒤를 이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파죽지세로 가나안 땅을 점령해 들어갔습니다. 이제 여호수아가 죽고 얼마 남지 않은 가나안 땅의 정복은 각 지파에게 위임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남지 않은 가나안 땅 정복이 제대로 마무리가 되지 않습니다. 1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쫓아내지 못하였다는 표현입니다.(19, 27, 28, 29, 30, 31, 32, 33 등) 여기저기 가나안 족속이 남아있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신 땅을 완전하고 확고하게 정복하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을까요? 그 답을 삿 2:2-3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한 마디로 가나안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저들의 우상을 철저하게 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저들을 이스라엘 백성의 가시가 되도록 가나안 땅에 남아두셨다는 것입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하나님의 백성의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그 좋은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그 놀라운 축복을 받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이기도 하고 오늘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의 자리로 인도하셨고 믿음의 풍성한 삶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한 채 옆구리에 가시를 둔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한 애착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집착하고 있는 것들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실수를 반복한다는 점입니다. 사사기를 전체 큰 틀에서 살펴보면 하나의 반복되는 신앙 패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납니다.(배신) 삿 2:11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사람과 교류하면서 하나님을 등지고 저들을 따라 나섰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저들을 징계하십니다.(징계) 삿 2:14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변 나라를 세우셔서 저들을 징계하셨다는 것입니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간구) 삿 3:9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고통이 너무 심해서 정신 차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께서 저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사사를 세우셔서 저들을 구원해 내십니다.(구원) 삿 2:16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게 하셨으나...”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사들을 세우셔서 적들을 물리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이 패턴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사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역시 반복되는 의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또”입니다.



   삿 3:12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옷니엘 선지자를 세우셔서 메소포다미아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40년 태평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이 패턴의 사이클 즉 배신 - 징계 - 간구 - 구원의 사이클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삿 4:1을 보면 “에훗의 죽음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라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사 에훗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는데 시간이 흐르자 저들이 다시 배신을 했다는 것입니다.



   삿 6:1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라고 했습니다. 삿 10:6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라고 했습니다. 삿 13:1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연약한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입니다. 정신 차리고 하나님 앞에 섰다가도 세상살이에 쫓기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신앙은 흔들리고 퇴색되어갑니다. 그래서 “또” 죄짓습니다. 그래서 “다시” 여호와를 등지고 맙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단히 우리의 신앙을 리모델링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어떻게 신앙 리모델링을 할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신앙을 리모델링할 수 있을까요?






  우리 교회도 이번에 부분적으로 리모델링을 했습니다. 본당 1층 소예배실을 확충했고, 자모실과 화장실을 개수했습니다. 제가 기도하며 머리로 구상했고 장로님들과 협의하면서 기대했던 모습보다 훨씬 멋진 작품이 만들어졌습니다. 전문가의 손이 닿았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의 손길이 닿으니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신앙 리모델링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문가가 따로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 3:5을 보면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신앙을 새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존재 안에 임하시면 우리 존재 구석구석 손을 보십니다. 새롭게 하십니다. 리모델링하십니다.






우선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하십니다.



  엡 4:23을 보면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을 새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령이란 ‘하나님 앞에 선 나’를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이루는 나를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이 심령을 새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심령을 리모델링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번 국제 선교학술대회에 강사로 오신 고봉 목사님은 이제 45세인데 중국 전국양회의 부주석 자리에 올랐습니다. 젊은 나이에 중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인물이 된 것입니다. 학술대회 도중 어떤 분이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목사가 됐고, 어떻게 젊은 나이에 지도자가 될 수 있었는가를 물었습니다.



  이분은 4대째 예수를 믿는 사람인데 자기 증조부가 100여 년 전 의화단 사건 때 순교를 하신 집안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할머니께서 태어날 때 자기를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자기를 바쳤답니다. 그래서 그 모진 박해 속에서도 자기는 목사가 되어야 할 사람이라 생각하고 자랐다는 것입니다.



  개혁개방 후 신학교가 문을 열 초창기에 신학교에 입학을 해서 공부를 했고, 젊은 나이에 남달리 주목을 받게 되어 정부가 보내서 미국에 가 유학까지 할 수 있었답니다. 돌아와서 성실하게 일하다 보니 여기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분이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자기는 나실인으로 바쳐졌다고 해서 할머니 말씀 따라 신학교에 왔는데 당시 자기 마음에는 소명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교 입학할 때 자발적으로 오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도중에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께서 자기를 변화시키셔서 소명감을 갖게 되었고 주를 위해 헌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그 심령을 새롭게 하신 것입니다. 신학생이 신학 공부할 때 억지로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 심령을 새롭게 하시면 나 같은 것이 이 귀한 신학을 공부할 수 있게 됐다고 감격하며 공부할 수 있게 됩니다. 목사가 목회할 때 억지로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 심령을 새롭게 하시면 마른 막대와 만도 못한 나를 주의 종으로 쓰신다고 감격하며 목회할 수 있게 됩니다. 주의 일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지로 주의 일을 감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 심령을 새롭게 하시면 감히 내가 주를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감격하며 일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을 리모델링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세상 속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롬 12:2을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리모델링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이란 “세상을 향해 선 나”를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할 나를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세상을 살며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은 점점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닮아가게 됩니다. 바로 그 마음은 자기중심적인 마음입니다. 모든 것의 중심에 자기를 두고 생각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이런 마음이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유명한 조각가 로댕의 작품 가운데 “칼레의 시민”이 있습니다. 칼레시가 1347년 영국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 시민들을 위해 밧줄에 목을 매어 처형받기로 자원한 6명의 시민들을 조각한 작품입니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 때, 1년 가까이 영국의 공격을 막던 프랑스의 북부도시 칼레는 원병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백기를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칼레시는 영국 왕에게 항복사절을 보내 자비를 구했습니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항복조건으로 그동안 반항한 책임을 지고 시민대표 6명을 골라 교수형을 처형하고 나머지는 살려주기로 했습니다. 시민들은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었습니다. 몰살은 면했지만 누군가 6명이 대표로 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칼레에서 가장 부자인 위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자원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를 따라 시장이 나섰고 그의 아들을 포함해서 7명 자원자가 나섰습니다. 한 사람은 빠져도 되는 상황입니다. 이 때 생 피에르가 내일 아침 제일 늦게 나오는 사람을 빼자고 제안했습니다.



  긴 밤이 지났습니다. 여섯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생 피에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의아해 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죽음을 자원한 사람들의 용기가 약해지지 않도록 칼레의 명예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처형되려던 마지막 순간 영국왕은 왕비의 간청을 듣고 이 용감한 시민 6명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로부터 550년이 지난 1895년 칼레시는 생 피에르의 용기와 헌신을 기리기 위해 조각가 로댕에게 생 피에르의 조각상을 의뢰해서 기념상을 제막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이 바로 “칼레의 시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자기중심적인 마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너를 위한 마음, 우리를 위한 마음, 모두를 위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요 십자가의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따르라 말씀하신 마음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마음을 리모델링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구교의 낡고 부패한 신앙을 다시 새롭게 하려고 분연히 일어나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든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교회는 개신교 특히 개혁교회의 전통 가운데 서 있습니다. 계속해서 개혁해 가겠다는 뜻을 세우고 있는 전통입니다. 늘 새로워지고자 힘쓰는 전통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손에 붙잡혀 우리의 신앙이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특히 우리의 심령이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뜨거운 마음으로 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저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종교개혁의 의미는 오늘 여기에서 되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제목 : 작은 자가 천을 이루는 교회                                      


본문 : 사-60-19-22                                      


만일 여러분들이 다시 교회를 선택한다면, 어떤 교회를 선택하고 싶습니까?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주는 교회를 선택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교회를 선택하고 싶습니까? 각자 한번 자신에게 던져볼 수 있는 가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과 평안을 주는 교회가 있다면 그런 교회를 택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습니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봅니다. 병을 안고 씨름 하는 사람에게 병이 나을 수 있는 교회를 소개해준다면 얼마나 반가워 하겠습니까? 가난을 이기지 못해서 하루하루 피곤하게 사는 사람에게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 예수님에게 오세요.  하고 말하면 그 말 때문에 교회를 찾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정상적인 성향입니다. 실패하여 주저앉아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당신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낙망하지 마세요.  하면서 소망과 희망을 주는 교회로 인도한다면 무척 기뻐할 것입니다.


이런 인간적인 심리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이사야 61장을 통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병든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쳐주기 위해서, 갇힌 자와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 마음이 슬픈 자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기 위해서 라고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마음의 평안을 요구합니다.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의 심리를 나무라지는 않으십니다.


그래서 그런지 미국 TV에서 선교하시는 목사님들의 메시지를 들으면, 지금도 이런 메시지가 자주 나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완전한 평화와 희열과 행복과 번영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어떤 고통도 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구하면 무엇이든지 풍성하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으십시오.  그런 분들은 365일 이렇게 전합니다. 그리고 그런 메시지에 마음이 끌려 예수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동안 미국 덴버 시에 유명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순복음교회인데 성령운동이 활발하고 매우 복음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수년 전 교회 이름을 행복한교회라고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왜 교회 이름을 갑자기 바꾸었는지 담임 목사님께 묻자, 그래야 교회를 찾아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진 몰라도 그 후 많이 부흥하여 그 도시에 몰(mall)을 살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행복을 주는 교회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교회를 나오는 목적이 단순히 우리 자신의 행복과 마음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것으로 머문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C.S. 루이스가 한 다음의 말에 매우 공감합니다.  나는 행복해지려고 종교를 찾지 않는다. 그런 행복이면 와인 한 병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다. 만일 당신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종교를 찾는 사람이라면, 나는 굳이 당신에게 기독교를 믿으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수준에서 머물지 않고, 그 이상의 수준을 가진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데도 중요한 목적이 있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강자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펴는 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며칠 전 공적인 석상에서 조용기 목사님의 이야기를 짤막하게 들었습니다. 그분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친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정작 남은 고치면서 자신의 병은 못 고친다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 저도요.  하고 기도하지만 도무지 하나님께서 안 고쳐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몇 가지 병으로 씨름 하는데, 그분의 표현대로 한다면 서바이벌 게임(survival game)을 한다고 합니다. 곧 살아 남기 위해서 몸부림을 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금년에 3가지 기도제목을 정해 놓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하나님, 금년에는 내 몸의 모든 병이 다 물러가고, 정말 가볍고 깨끗한 몸으로 살 수 있게 해주세요.  


만일 기독교가 병을 고쳐주고, 가난한 자를 부자로 만들고, 마음에 소원하는 행복을 부어 주는 것으로 끝나는 종교라면, 조 목사님이야말로 자기 모순에 빠진 사람일 것입니다. 남에게는 그런 복음을 전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것을 얻지 못한다면 이상한 것 아닙니까?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오늘날 한국 교회를 위해 조 목사님을 하나의 메신저로 사용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병 고치는 것만이 기독교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조 목사님을 통해서 모든 교회, 모든 세상 앞에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배후에 더 큰 목적, 더 높은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교회를 세우시기 600여 년 전, 이사야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이 선포하신 예언의 말씀입니다. 장차 이 땅에 그 모습을 드러낼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이에 대해 이사야는 아름답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표현을 가지고 우리에게 그림을 그려주는지 모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예수 믿고 이 세상에 등장할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교회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바로 의롭게 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영원히 의인된 사람들이 바로 교회라고 말씀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은 영영히 땅을 차지할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땅을 소유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가지고 전 세계를 정복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는 거룩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심은 가지요, 하나님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서 다시 빚어진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걸작품들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존재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데 있습니다. 주기도문에서처럼 주의 나라가 임하며, 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영원토록 돌아가도록 하는 것, 이것만이 우리의 영원한 목적이요, 꿈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교회의 이미지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도 이런 존재임을 다시 한번 말씀을 통해서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22절을 보십시오. 작은 자라도 천을 이루고 약한 자라도 강국을 이룰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원문에 좀더 가깝게 번역한다면, 가장 작은 자라도 천을 이루고 가장 약한 자라도 강국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작아 보일지라도 그들을 통해서 천을 이루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세상 사람이 보기에는 몹시 약해 보일지라도 그들을 통해서 강한 나라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이런 기적을 이루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교회가 가져야 될 진정한 이미지는 어떠해야 합니까? 날마다 자기 소원을 성취하기 원하는 어린애 같은 모습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뛰는 강자의 이미지입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는 거룩한 강자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면서 이사야의 예언에 근거하여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제자란 거룩한 강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적당히 교회 다니는 사람을 만들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을 만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은 거룩한 강자들입니다. 이들은 천을 이루고, 강국을 이루는 존재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이런 자격을 갖추어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합니다. 이것이 제자의 조건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강자는 바로 자기 부인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할 수만 있다면 이 사람은 강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거룩한 목적을 향해서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만큼 강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썩는 밀알로 던지면서 예수님의 뒤를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만큼 강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이 그런 사람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천을 이루고 강국을 이루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는 바로 이런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22절) 하나님께서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쉬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지난 200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약한 자들을 통해 이 일을 이루셔서 세계 곳곳에 교회가 생기고, 세계 곳곳마다 하나님의 거룩한 종들이 복음을 위해서 뛰는 모습을 봅니다. 그 결과 사랑의교회가 이 자리에 생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25년 전 사랑의교회를 시작하면서 이런 꿈을 가졌습니다. 곧 작은 자가 천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벌떼와 같이 일어나는 강한 교회를 만들어보겠다는 꿈과 소원입니다. 제가 보기에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손에서 아름답게 다듬어진 거룩한 백성들이 너무나 나약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을 가지고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 없고, 오히려 있으나마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룩한 강자들이 활개치는 교회, 예수의 제자들이 하나님나라의 꿈을 안고 힘차게 뛰는 교회, 바로 이런 교회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확신을 가지고 교회를 시작하다 보니 자연히 강성을 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메시지도 톤이 높았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 부담과 스트레스를 주었습니다.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구원의 확신도 없으면서 무슨 예수 믿는다고 합니까?   선데이 크리스천이어선 천국도 못 들어갑니다.   당신이 예수의 제자로 훈련 받지 않으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훈련 받으세요.   떡이나 얻어 먹고, 병이나 고치려고 따라다니는 무리들처럼 예수 믿지 마세요. 예수님은 무리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좋아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몰아 부치기도 하고 소리를 높여 부담을 주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다음과 같이 호되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강남 지역에 살면서 날마다 세상 복을 바라보며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이정도 살면 됐지, 더 이상 무얼 달라고 야단입니까? 사도행전을 보면 거기에 나오는 제자들은 이것 달라, 저것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가진 것을 주님을 위해서 내놓는 사람이 되었고, 나중에는 자기 생명도 바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세상을 향해 나갔기 때문에 세상이 그들을 이기지 못한 것 아닙니까? 결국 예루살렘이 정복당하고, 로마 제국이 그들 앞에 정복 당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강한 자들을 요구하십니다. 여러분도 강한 사람이 되세요. 


그러자 사랑의교회를 은근히 비판하는 주변 사람들이 \"저 교회에 가면 뼈도 못 추린다. 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습니다. 목회자로서 이런 강성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일종의 모험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피곤하고 골치 아픈 문제로 행여나 위로 받을까 싶어서 교회에 왔는데, 오히려 숨도 못 쉬게 만들 정도로 부담과 긴장을 주는 강성어린 메시지를 준다면 사람들이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일종의 모험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한번 교회 안에 들어오면 나가지 않고, 오히려 그 메시지를 다 소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순종하고 열심히 배우고 믿어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그들의 믿음이 몰라보게 자랐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인생을 사는 것만이 가장 가치 있고, 보람된 일이고, 영원한 삶의 모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얼굴에 행복과 기쁨, 힘이 생겨났습니다. 옛날 같으면 조그만 문제를 가지고도 쩔쩔 매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을 텐데, 이제는 웬만한 문제들은 담대하게 척척 발로 밟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교인들이 자꾸 늘어났습니다. 정말로 천을 이루고 강국을 이루는 놀라운 이적들이 개인과 교회 안에도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점점 교회는 부흥되어 갔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을 제가 지난 25년 동안 경험하고 온 것입니다.


                                  


제목 : 당신의 아말렉과 싸우라                                      


본문 : 출-17-08-16                                      


우리 성도는 신앙생활하면서 영적인 눈을 뜨면, 우리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어둠의 세력이 우리 개인이나, 가정, 사회, 국가 속에 역사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세력은 우리 때만 역사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조상, 아니 우리의 자손까지도 역사하는 세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를 대대로 실패케 하고, 병들게 하고, 불행하게 하고,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오늘 본문에 아말렉 세력이라고 합니다.



[출17:9]"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출17:16]"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보고도 아말렉과 싸우라고 명령하셨고 하나님께서도 대대로 싸우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아말렉 족속은 어떤 족속입니까? 그는 에서의 후손입니다.


[창36:12]"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아다의 자손이며" 그 아말렉 족속은 이스라엘(하나님의 백성)이 출애굽 시에서부터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까지도 괴롭힌 가장 악하고 간교한 이방족속입니다.


성경에서 이 아말렉 족속을 우리 인간의 배후에 역사하는 흑암세력의 상징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아말렉 족속이 어떤 족속인가를 살펴봄으로 우리의 어둠의 세력을 알 수 가 있게 됩니다.



첫째, 아말렉은 "계곡에 사는 족속"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숨어 역사함으로 겉으로 알 수 없게됩니다.



둘째, 아말렉은 잘될 때 쉴 때 역사하는가 하면 힘이 없어 뒤쳐질 때도 역사합니다.


[신25:18]"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나의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대열에 있어야 합니다.


내가 알아서 한다는 사람은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인간은 알아서 할 만큼 위대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대열에 끼어있는 것이 축복입니다.



셋째, 아말렉은 대대로 역사하여 인간을 어렵게 하고 실패케 합니다.



넷째, 아말렉의 세력은 육신의 정욕 속에 거하게 됩니다.



싸워서 이기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아말렉은 화해의 대상이 아니고 싸움의 대상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회개하면 용서할 수 있으나 죄를 짓게 한 세력은 물리쳐야 합니다. 즉, 죄를 짓는 것과 죄를 짓게 하는 세력을 구별해야 합니다. 사람은 용서하지만 그 사람 속에 역사하는 죄의 세력은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사탄은 싸움의 대상입니다.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출17:14)- 아말렉의 씨를 말리기까지, 기억함이 없게 하게 싸워야 합니다.



(2) 아말렉은 영적 싸움이지 육신의 싸움이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출17:10~11)- 인내한다고, 실력있다고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인내하고 실력있는 것이 좋지만 승리요건은 아닙니다. 싸움에서 이긴 것은 하나님이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3) 아말렉은 인간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싸워 주셔야 합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출17:9)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출17:16) 모세가 손을 들었을 때 하나님이 싸워주셨습니다.



손을 든 것은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손을 들었을 때 하나님이 싸워주십니다.


주님께 손을 들고 기도할 때 승리를 주십니다. 여호와 닛시, 승리의 깃발을 꽂게 하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아말렉과 싸워서 모두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제목 : 나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랑                                      


본문 : 딛-03-01-8                                      


얼마전 ‘노자와 21세기’라는 제목으로 김모 교수의 강의가 교육방송을 통해서 방영되었습니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표현력이 돋보인 강의였다는 일반인들의평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강의는 뭇 그리스도인에게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첫째는 신앙적인면에서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신앙인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어머니의 신앙을 곡해한다면 그가 아무리 외형적인 효를 강조한다 하더라도 본질적인 면에서는 불효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의 강의의 마지막 결론이 인본주의라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의 필연적 귀결은 허무주의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라도 그 결국이 허무주의라면 그것은 우리를 기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현세의 문제 뿐만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영적인 내세의 문제까지 다룹니다. A.P.깁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철학을 전파했더니 사람들은 내게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전파했더니 사람들은 회개하고 주께 돌아왔다.” 세상의 지식과 하나님의 진리의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회심(回心)의 여부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라는 패스워드(Password)가 없이는 결코 천국(영생)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나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인간의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5절).



본문은 사도바울이 그레데 섬에서 사역하던 디도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진리가운데 생활할 수 있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구원은 우리의 의로운 행위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5절). 즉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진리입니다. 어떤 이는 이 부분에 대해서 “법을 준수하고 윤리적인 기준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까?”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죄의 문제를 여러 가지 문화적인 차이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인간의 기준은 상대적입니다. 지역과 시대에 따라서 사람과 사물에 대한 평가 기준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를 바라보시는 기준이 변하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우리의 내적인 동기와 마음중심을 보십니다. 우리의 양심에 주님의 현미경을 들이댄다면 주님앞에 선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바울은 율법을 지키는 공력과 행위를 가지고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단정적으로 선언합니다(갈2:16). 따라서 자기의 의를 강조하는 것은 주님의 공로를 무시하는 것이며 십자가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갈2:21).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이 절대절망의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키십니다(4절).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닮은 사랑은 부모의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사랑이라 할 수 있는 부모의 사랑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자녀들 중에 부모님의 편애로 인해 평생동안 가슴아파하는 자녀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죄인된 모습, 연약한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은 우리의 지식과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랑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종의 형상인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으며 절대절망의 죄 가운데 있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여러분, 이 사랑을 놓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은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며 우리의 생명과 새로운 소망입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를 투자할 수 있는 튼튼한 영적인 기초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사랑을 찬송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와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6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의 구주가 되시고(4절) 또한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가 되게 하셨습니다(6절).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셨습니다(6절). 성령님을 풍성히 부어주심으로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치유의 영이시며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요14:17).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어떤이도 주지 못하는 영적진리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성령은 또한 거룩한 영이십니다. 거룩한 영이신 성령에 의해 다스림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악령과 옛사람의 생각으로 다스림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를 주장하시고 붙드신다면 어떤 악령도 우리에게 손을 댈 수 없습니다(사41:10).



우리 주님께서는 예수님과 성령님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의롭다하심을 얻었습니다(7절a). 우리는 의로운 존재가 아니지만 주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프리즘으로 우리를 보시기 때문에 우리를 의로운 존재로 선언해 주시는 것입니다.



4. 천국을 상속받는 후사가 되게 하셨습니다(7절b).



후사(後嗣/heir)란 상속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 칭함을 받게 하시고 하나님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마25:34).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받은 복음은 이처럼 위력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로 구원을 얻게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천국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이와 같은 우리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유지할 수 있는 방편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지만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벧전5:5). 악인은 교만하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은혜를 거절합니다(시10:4). 그러나 겸손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담고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겸손은 \"주님밖에 없어요, 주님의 은혜가 떠나면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겸손은 우리가 평생 이루어야 할 영적인 기쁨이면서 거룩한 의무가 되는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이 겸손이 우리에게 부어지기를 바랍니다.



둘째, 선한 일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8절).



선한 일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과 화합하며 남을 격려하는 일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함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가 아니라 이미 구원을 얻은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선한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동안에 형제와 막힌 담들이 허물어지고 선한 역사가 우리의 삶에 아름답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불확실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은 미쁘신(신뢰할 수 있는/faithful, trust-worthy) 주님의 복음입니다(8절). 구원의 복음을 굳세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힘차게 주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는자에서 확신하는 자로, 확신하는 자에서 굳세게 전하는 자로서 아름다운 삶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랑의 복음의 소중함을 다시금 우리 마음속에 새기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 사랑의 주님!



무미 건조한 삶에 사랑의 복음으로 가까이 오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깊이 체험하는 은혜를 날마다 더해 주십시오.



사랑의 복음을 간직한 자임을 감격하여, 선한 일에 매진케 하옵소서!




                                


제목 : 당신의 가슴에 불을 붙이라                                      


본문 : 눅-12-49-53                                       .


Kindle a fire in your heart.


누가복음12:49-53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교회를 섬기는 사람치고 교회의 부흥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렇듯이 교회의 부흥은 저에게도 지대한 관심사입니다. 그리고 특히 최근에 와서 부흥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젊은 청년들은「부흥」노래를 즐겨 부릅니다.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하소서 이 땅 고쳐주소서


이제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이 땅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을 때


우리의 우상을 태우실 성령의 불 임하소서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오 주의 영광 가득한 새 날 주소서


오 주님 나라 이땅에 임하소서    -고형원 작사/작곡-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부흥을 원하지만 어떻게 부흥이 가능한지를 모릅니다. 제가 읽은 책 중에 레오날도 레이븐힐(Leonald Ravenhill)이라는 사람이 쓴「하나님의 방법에 의한 참된 부흥입니까?」라는 책이 있습니다. 영어로는「Revival, God’s Way」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책에서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지난 50년 간 부흥에 대한 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우리는 아직 진정한 부흥이 무엇인지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방법에 의한 참된 부흥을 알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계속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 우리는 부흥을 위해서 울지 않는가? 참된 부흥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우리는 부흥을 위해서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부흥은 힘으로 되지 않으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되는 것이다(Not by might nor by power, but by God’s Spirit. 스가랴 4:6).”



 부흥을 위한 대책을 세운다면 여러 사람에게서 여러가지 아이디어가 나올 것입니다. 새로 온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하고, 전도할 때는 어떻게 하고, 교회에서는 어떤 행사를 준비해야 하고 이런 저런 교회 부흥에 대한 아이디어들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방법에 의한 교회 부흥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교회가 부흥하려면, 참으로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 사람들의 심령이 변화되려면,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운행(運行)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의 말에 동의하십니까?



 사도행전 말씀에 보면 교회의 부흥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Then the church throughout Judea, Galilee and Samaria enjoyed a time of peace. It was strengthened; and encouraged by the Holy Spirit, it grew in numbers, living in the fear of the Lord. 사도행전 9:31).” 여러분, 이 초대교회의 부흥의 중심에 누가 있습니까? 성령의 위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제자들이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에서부터 시작해서 성령충만한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초대교회는 이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성령 충만한 7집사를 세웁니다. 그리고 나서 스데반의 순교가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제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땅에 들아가 복음을 전파합니다. 사마리아 도시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러다가 극적인 사건 하나가 발생하는데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이라는 사람이 회심(回心)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사울이 성령을 충만히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합니다.



 이런 와중에 교회가 크게 부흥합니다. 단순히 교인 수만 불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말들을 조심해서 보십시오. “교회들이 평안하여” 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이 말씀을 “The church throughout Judea, Galilee and Samaria enjoyed a time of peace.”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교회들이 평화의 때를 즐긴 것입니다. 교회에 박해가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핍박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땅에 복음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들이 든든해졌습니다. 교회가 말씀을 배워서 신앙심이 자란 것입니다. 교회가 든든해지는 것은 다른 것 아닙니다. 교인들의 신앙이 자라야 교회가 든든해집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나야 교회가 든든해 집니다. 사도들이 나가서 말씀을 전하고 가르친 덕분에 교회가 이렇게 든든해졌습니다. 이런 교회라야 핍박을 견딥니다. 이렇게 든든히 선 교회라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을 놓고 봐도 그렇습니다. 말씀을 잘 배워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야 든든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여도, 아무리 리더쉽이 있게 보여도 말씀 위에 든든히 서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오래 못갑니다. 금방 바닥이 훤하게 드러납니다.



 자, 그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옵니까?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주를 경외함으로 진행하여” 그랬습니다. NIV 성경에는 “living in the fear of the Lord”라고 했습니다. KJV 성경에는 “walking in the fear of the Lord” 라고 했습니다. 이 경우에는 NIV 성경보다 KJV 성경이 훨씬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walking” 이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걸어다닌다”는 뜻 아닙니까? 저는 이 말씀을 「예수원(Jesus Abbey」의 토리 신부(R.A. Torrey III)에게서 배웠습니다. 보스톤에도 얼마 전에 한번 오셨지요. “walking in the fear of the Lord” 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여기 저기 돌아 다니면서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배 중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가 돌아 다니는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라고 했습니다. “Walking in the comfort of the Holy Spirit”라는 말입니다. 똑 같은 뜻으로 그들의 전 삶의 영역에서 성령의 위로하심이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부흥의 중심에 성령께서 계십니다. 바로 성령님이 교회 부흥의 주체(主體)였습니다. 그 교회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나게 하심도, 말씀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심도,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삶을 살게 하심도, 그리고 위로하심이 모두 성령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참다운 부흥에서는 성령께서 하시는 이번 변화의 현장들이 목격이 됩니다. 교인의 수가 불어나는 것은 참 부흥의 결과이지 부흥 자체는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에 의한 참된 부흥입니다. 부흥은 일시적인 감정(感情)이 아닙니다. 일시적인 흥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에 의한 참된 부흥은 이렇게 교회를 변화 시킵니다. 개인을 변화 시킵니다. 그리고 세상을 변화 시킵니다.



 하나님은 이 부흥이 우리에게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교회가 참으로 부흥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가 바뀌고, 이 교회가 바뀌고, 그리고 이 세상이 바뀌어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명목상의 크리스찬(nominal Christians)이나 그저 현상 유지나 하는 그런 크리스찬이 아니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자라나서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인정할 줄 아는 사람들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Christians walking in the Holy Spirit” 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동시에 여러분을 향한 예수님의 소원입니다. 보세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도대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불이 무슨 불이냐?” 고 질문합니다. 여러분, 이 불이 무슨 불이겠습니까? 아니 그보다 먼저 여러분께 물을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볼 때 잘 모르는 말씀이 나오면 그 말씀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주석책(commentary)을 봅니까? 좋은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주석책에서 찾아 보면 다양한 해석들이 나옵니다. 그 중에 어느 해석을 따라야 합니까? 또 하나 말씀을 해석하는 방법은 말씀의 문맥(文脈, context)을 살펴 보는 것입니다. 말씀을 해석하는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많은 주석가들도 이 불을 심판이라고 해석합니다. 심판이라고 해셕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앞에 나오는 진실한 청지기와 게으른 청지기의 비유 말씀과 연관을 시킵니다. 생각지도 않은 날에 주인이 와서 진실한 청지기에게 주인의 모든 것을 맡기고, 주인이 더디 온다고 생각하고 게을렀던 종은 주인의 책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불을 던지러 왔다는 것은 곧 심판의 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잘 읽어 보면 49절부터 말씀은 그 이전의 말씀과 주제가 다른 말씀입니다. 앞의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기 보다는 말씀의 주제가 49절부터 바뀌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우리에게 붙기를 원했던 그 불이 무슨 불이겠습니까? 심판의 불입니까? 예수님께서 심판의 불이 붙기를 그렇게 간절히 원하셨습니까? 그리고 그 밑에 나오는 말씀은 또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받을 세례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세례를 받을 때까지 내 마음이 답답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이어지는 말씀이 내가 세상에 온 것은 화평을 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분쟁(分爭, division)을 일으키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한 집 안에 다섯 식구가 있으면 3:2로 혹은 2:3으로 나뉘어져서 서로 싸울 것이라고 합니다. 아버지와 자식이 싸우게 되고, 어머니와 딸이 싸우게 되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싸우게 된다고 합니다. 다른 말은 잘 이해가 안가지만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싸운다는 말은 쉽게 이해가 되네요.



 이상의 말씀들을 잘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붙기를 원하셨던 그 불은 예수님의 죽음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불은 분쟁과도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 불이 붙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죽음은 불이 붙기 위해 우선되어야 하는 prerequisite입니다. 그 불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에 붙은 불타는 열심(the burning zeal)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이 불은 성령의 불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하나님의 일꾼들은 이 불타는 열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열심”을 한자로 어떻게 씁니까? “더울 열(熱)자” “마음 심(心)자” 아닙니까? 마음이 뜨거운 것이 열심입니다. 예레미야가 그랬습니다. 자기 가슴에 불이 붙어 있다고 했습니다(예레미야 20:9). 이 가슴에 붙은 불 때문에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가슴이 뜨거워서 견딜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에게도 이 불이 붙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셨습니다. 돈바꾸는 상을 둘어 엎고, 소나 양, 비둘이 파는 사람들을 성전에서 내쫓았습니다. “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소굴로 만들지 말라(마가복음 11:17, 요한복음2:16).” 고 하셨습니다. 신기한 것은 아무도 예수님께 대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당신이 뭔데 그러느냐고 항의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가슴에 불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런 모습에서 “성경 말씀에 ‘주의 전(殿)을 사모하는 열심(zeal)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이사야 69:9, 요한복음2:17)?



 구세군(The Salvation Army) 창시자 윌리암 부드(William Booth, 1829-1912)의 가슴에도 이 불이 붙어 있었습니다. 한번은 영국의 왕 에드워드 7세가 그를 왕궁으로 초청했습니다. 왕이 윌리암 부드의 손을 잡으면서 \"당신은 참으로 귀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 덕분에 영국 사회가 밝아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칭찬을 했다고 합니다. 부드가 왕궁을 떠날 때 에드워드 7세가 방문록에 싸인을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부드가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폐하, 어떤 사람의 야심은 뛰어난 예술가가 되는 것이고, 어떤 사람의 야심은 더 높은 명성을 얻는 것이며, 어떤 사람의 야심은 더 많은 황금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유일한 야망은 더 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의 가슴에는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더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불타는 구령(救靈)의 열정(熱情)이 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성령의 뜨거운 불이 붙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소원하십니다. 이 불이 붙기를 기다릴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어제 그저께 최바울 선교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세상을 지배하고 싶으면 중심으로 가라. 그러나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변방(邊方)으로 가라.” 누가 중심으로 갑니까? 똑똑한 사람들이 갑니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을 조금도 변화 시키지 못합니다. 누가 변방으로 갑니까? 미련한 사람들이요? 아닙니다. 미련한 사람들은 아무데도 안갑니다. 가슴에 성령의 불이 붙은 사람들이 변방으로 갑니다. 이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 시킵니다. 이 사람들이 복음으로 한 국가를 움직입니다. 더 나아가서 세계를 경영(經營)합니다.



 가슴에 성령의 불이 붙은 사람들이 가는 곳에는 싸움이 시작됩니다. 대립이 있습니다. 분쟁이 있습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가정이 편이 갈립니다.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으로 편이 갈립니다. 이 분쟁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영은 영이고, 육은 육입니다. 어차피 싸움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싸움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평화를 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칼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부부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이 같이 사는데 갈등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가슴에 성령의 불이 붙은 사람과 정욕의 불이 붙은 사람이 같이 사는데 싸움이 안일어 날 수가 없습니다. 싸움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그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가정의 평화가 옵니다.



 먼저 여러분의 가슴에 성령의 불을 붙이십시오. 이 불이 안붙으면 싸움도 없고 분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겉으로 봐서는 평안합니다.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행복합니다.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그것은 참 평안이 아닙니다. 참 행복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깨질 것입니다. 지금 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 이 싸움이 내 안에서도 일어나야 하고, 이 싸움이 내 밖에서도 일어나야 합니다. 먼저 여러분의 가슴에 성령의 불을 붙이십시오. 예수님의 소원대로 성령의 불을 붙이십시오.



 방법은 간단합니다. 기도하십시오. 무엇보다 시급한 기도 제목은 내 가슴에 성령의 불이 붙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 집중적(集中的)으로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성령의 불만 붙으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서 내 안에 있는 죄성(罪性)을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이것들을 제거해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끝으로 연변 총각 시리즈 하나 하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제목은「리더편」입니다.  “저희 련변에서는 리더 1년차? 고건 리더축에 끼지도 못함다. 리더 1년차 정도믄 혼자 큐티나 조금 할 수 있갔구나 함다. 리더 5년 정도는 해야 고저 저게 혼자 성경공부 교재를 고를 수 있갔구나 함다. 한 10년 정도 하면 이제 연륜이 묻어남다. 기도하다가 실수해서 말 바꾸는 일 절대 업씀다. 눈 감고 팍팍 질러대도 시편 서너편 정돈 나옴다. 이제 15년 쯤 하면 이거 장난 아님다. 예배드릴 때 대충 앉아 들어도 설교 내용 다 알고 십일조는 남아돔다. 어쩌다 기도한답시고 어줍짢게 눈감고 있으면 다른 15년 차 리더들이 \"고저 무슨 걱정거리 있네? 기도제목 말하라우~\" 하고 위로해줌다. 20년 정도 하믄 이단인지 아닌지는 초월한 상태임다. 성경 외경도 살펴보고, 가끔 여호와의 증인에게 전도도 함다. 년말에는 노회에서 성경고사 문제 낼 때 자문 요청 해옴다. 25년 정도하믄 총신대에서 강의 부탁함다. 총신대 셤볼 때 셤감독 나감다. 수험생들 하나 풀기도 바쁜 시간에 기도하고 두 개 다 품다. 시간 남아서 낼 큐티까지 함다……유년부 다닐 적이었슴다. 갑자기 밖에서 \"불이야!\" 하는 소리가 들렸슴다! 나가보니 교회에 엄청나게 큰 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성도들이 우글우글 모이기 시작했슴다!!! 전 처음에 국제시장에 불이난 줄 알았습다!!! 아니었슴다!!! 그것은 30년 묵은 리더가 본당에서 기도할 때 내려오는 성령의 불길이었슴다.”



 그렇습니다. 우리교회의 모든 섬기는 사역자들 가슴에, 리더들의 가슴에, 그리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에 성령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어 나가십니다. 출세하기를 원하십니까?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하는대로 하십시오. 열심히 공부하십시오. 그러면 성공도 하고 출세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변화 시키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가슴에 성령의 불을 붙이십시오. 여기서부터 참다운 부흥이 시작되고, 여기서부터 세상은 변화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제목 : 점점 식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본문 : 계-02-01-7                                      


저는 약 10일 동안 한국에 방문해서 두 곳의 결혼식에 참여하고 돌아왔습니다. 22일 금요일 저녁에는 우리 교회 출신의 김모자매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다음 날인 23일 토요일에는 저의 남동생 결혼식에 참석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김계성 장로님의 처제이자, 김광순권사님의 여동생이신 김광자자매님의 결혼 주례를 섰습니다. 8일 사이에 세 곳의 결혼식을 지켜보면서 한 가지 특징을 발견했습니다. 옛날 신랑, 신부들은 전통적인 유교 관습 때문인지, 아니면 폐쇄적인 문화에서 자라서인지는 몰라도 신랑과 신부가 좋아하는 표현을 그렇게 심하게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요즘은 달라져졌습니다. 결혼식을 올리는 신랑과 신부가 얼마나 기쁘고 좋아하는지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동생도 사실은 아버님의 성격을 닮아서인지 표현을 그렇게 잘하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그런데 결혼식 날에는 달랐습니다. 34살이 되어 느즈막하게 노총각 딱지를 떼어서인지 몰라도 저희 부모님과 친척들이 “신랑이 너무 웃는다”고 핀잔을 줄 정도로,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어떤 신랑은 주례가 주례사를 하고 있는데도 주례를 보지 않고 옆에 있는 신부를 흘낌흘낌 보면서 미소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또 신부도 자기를 바라보는 신랑의 눈길을 느꼈는지, 역시 신랑을 보면서 이쁜 미소를 짓는 것도 보았습니다. 결혼을 하는 신랑과 신부는 한결같이 행복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좋아하고 기뻐하고 행복해 합니다. 그리고 가정 안에서 서로 용납하고 서로 감싸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랑이 식어간다는 것입니다. 결혼할 때, 품었던 처음 사랑을 두 사람이 잊어버리기 때문에 부부싸움을 하고, 심하면 이혼까지 합니다. 전에는 말 수가 적기 때문에 남자가 무게가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말이 안 통하는 답답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전에는 귀엽게만 들리던 아내의 수다가 이제는 지긋지긋한 잔소리로 들립니다. 결혼 전에는 상대방의 매력 포인트가 결혼 후엔 결점으로 변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사랑이 식어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결혼할 때 품었던 사랑이 식지 않는다면 가정 안에서 얼굴 붉힐 일도 없고, 언성을 높일 일도 없고, 이혼 서류에 도장 찍을 일도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부부간의 성격 차이 때문에 부부생활이 원만하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성격 차이 때문에 문제가 된다면 아예 처음부터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결혼하기 전부터 두 사람 사이에 성격 차이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성격 차이가 있어도,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도, 생활습관이 달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어졌기 때문에 성격 차이가 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부간의 문제는 성격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이 식어지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첫 사랑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부부간의 갈등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우리 또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할 때는 문제가 없습니다. 아니 설령 우리의 삶 속에서 문제가 생긴다 할지라도 쉽게 극복합니다. 비록 직장을 잃었다 할지라도, 대학입시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사업에 실패했다 할지라도 쉽게 좌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그리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데, 뭐 이런 것까지고’라고 생각하며 어려움을 쉽게 극복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졌을 때는 조그마한 어려움에도 쉽게 좌절합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나를 버린 것은 아닐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나봐’라고 생각하며 조그마한 일에도 좌절하고 고민합니다. 가정생활에서 부부 간의 사랑이 중요한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중요합니다. 특별히 처음 하나님을 사랑을 느꼈던 첫 사랑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 어떻습니까? 아직도 하나님에 대한 첫 사랑이 뜨겁습니까? 아니면 언제 하나님을 만났는지, 언제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는지 별 기억조차 없을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첫 사랑이 식어졌습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에베소교회는 첫 사랑이 식어진 교회였습니다. 사실 2절과 3절에 의하면 에베소교회는 칭찬거리가 많았습니다. 이단의 유혹이 꽤 많은 상황 속에서도 에베소교회는 거짓된 것을 가려낼 수 있을 정도로 말씀을 많이 알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또한 외부의 악한 세력에 잘 대처할 정도로 단합도 잘 되는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잘 견디고 참으며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한 교회였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에게는 자칭 사도라 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드러내는 분별력과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오래 참는 인내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언뜻 보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열심을 내고 끝까지 안내하는 그들을 향해서 주님께서 책망을 하셨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4절에 보면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다같이 4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들에게는 열심이 있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열심이 아닌 인간의 열심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하여 빚진 자의 심정을 품고 나아가는 하나님의 열심이 아니라, 자기들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인간적인 열심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많이 알고는 있었지만, 처음 사랑을 잃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전도사님들이 목사님들보다 더 나은 것 같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신학교를 갓 졸업하여 목회 경험이 전혀 없는 전도사님들이 이미 수련 전도사를 거쳐 목사고시에 합격하고, 정한 기간이 지나 목사 안수를 받았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많은 연단과 훈련을 받은 목사님들보다 더 낫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에 비추어 볼 때, 맞지 않는 말입니다. 처음 그 글을 접했을 때는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처음에 그 글을 접하고 ‘도대체 누가 이런 글을 쓴 거야‘라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글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글이 맞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저는 전도사 시절이 지금보다 훨씬 순수했습니다. 전도사 시절이 지금보다 훨씬 더 열정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는 믿지 않는 가족이 이민을 와서 어느 모텔에 묶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밥을 먹다가도 수저 놓고, 모텔에 먼저 달려갔습니다. 금요철야기도 때에는 새벽 2시 전에 일어나 본 적이 없었고, 문제가 생기면 금식 기도도 자주 했습니다. 담임목사님이 어쩌다 새벽기도에서 설교하라고 하면, 너무나 좋아서 밤새도록 말씀을 묵상하며 1분도 자지 않고 새벽기도회에 나갔던 그러한 열정과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된 지금은 저 스스로도 많이 변한 것을 느낍니다. 전도사 시절과 달리, 타성이 붙어 버렸습니다. 과거에 비해 복음증거에 대한 열정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설교 준비에 대한 열심히 많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솔직한 저의 진단입니다. 어제 저녁 책상에 앉아 저를 돌아보니 8년 3개월 전 제가 우리 교회에 처음 부임해 올 때, 품었던 그 마음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좋게 변한 것이 적지 않지만, 나쁘게 변한 것도 또한 적지 않게 많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에베소교회처럼, 어쩌면 하나님에 대한 첫사랑이 서서히 식어가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지금 어떻습니까? 혹시 에베소교회 성도들처럼 하나님에 대한 첫사랑을 서서히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열정적인 것 같은데, 실제로는 많이 식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겉으로는 믿음이 많이 발전한 것 같은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오히려 퇴보한 것은 아닙니까?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느 목사님은 신앙 상태를 음악과 비교한 적이 있는데, 악보를 보면 다양한 기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Crescendo’와 ‘Decrescendo’라는 기호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음악기호는 음의 강약을 조절해줌으로써 악상을 살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벌어졌던 두 개의 선이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점 모아지면, 음악적인 용어로 ‘Decrescendo’라고 합니다. 점점 소리가 줄어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모아졌던 두 개의 선이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점 벌어지면, 음악적인 용어로 ‘Crescendo’라고 합니다. 점점 소리가 커진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음악 기호를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점점 올라가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점점 내려가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점점 올라가는 ‘Crescendo’의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점점 내려가는 ‘Decrescendo’의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저는 우리가 점점 내려가는 믿음이 아니라, 점점 올라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Decrescendo’와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Crescendo’와 같은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처음에는 미약했다 할지라도, 점점 나아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에베소 교회는 ‘Decrescendo’와 같은 교회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첫사랑을 잃었습니다.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던 그들의 사랑이 식어졌습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에베소 교회가 다시 살 수 있는 비결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5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세 단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Remember’,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입니까?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문제가 되었는지 가만히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생각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Repent’,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문제가 되었는지 돌아본 후, 잘못된 것이 발견되면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회개의 유무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회개가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단순히 눈물, 콧물을 흘리는 것을 회개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참회이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란 하나님을 떠났던 사람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란 잘못된 자리에서 올바른 길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가룟 유다는 은 30냥에 스승이신 예수님을 바리새인들에게 팔아먹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두 번씩이나 부인하고 세 번째는 저주까지 했습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 이 두 사람은 똑같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잘못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다른 점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스스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다’라고 후회하며 은 30냥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었지만,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잘못한 것을 깨닫기는 했지만, 회개하지 않고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새벽에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심히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바닷가에서 다시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것을 발견했다면, 회개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잘못된 자리를 털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자리로 돌아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셋째로, ‘Restore’,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회개했다 할지라도,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으면 그 회개는 거짓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생활 속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잘못한 것을 깨닫고 회개했다면 즉시 잘못된 자리에서 돌아와야 합니다. 가룟 유다처럼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공부 잘 하는 학생이나 장사를 잘 하는 사람은 기회를 잘 잡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베테랑 대장장이도 마찬가지로 기회를 놓치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쇠가 빨갛게 달구어졌을 때, 망치를 내려칩니다. 그러나 아마추어 대장장이들은 망치를 내려쳐야 할 기회를 놓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미 쇠가 식어버렸는데도 죽자 살자 망치질을 합니다. 그러나 쇠가 일단 식으면 다음에는 망치질을 수십 번 해도 쇠는 원하는 모양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러지고 맙니다. 때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잘못된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다면, 즉시로 잘못된 자리에서 돌아와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첫 사랑을 회복하지 않을 때, 어떻게 됩니까? 다시 한 번 5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여기 주님이 옮기시겠다고 하신 ‘촛대’란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 임재하시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도, 구원의 역사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어도 회개치 아니한 성도에게서 주님의 촛대가 옮겨지는, 다시 말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성령께서 임재하지 않는 성도 역시, 다시는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첫 사랑을 회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열정이 이미 식어버렸다면, 즉시로 처음 품었던 열정을 다시 회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제 저는 1984년 뉴욕 마라톤 대회 때 있었던 한 일화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 마라톤 대회에서는 일반인들도 전체 코스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경주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기자들은 한 젊은 여자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심체 장애인으로서 클러치를 옆에 끼고 이 대회에 참여한 그녀는 뉴욕대학에 재학 중인 ‘린다 다운’이라는 여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경주가 시작되자 사람들의 관심은 선두 그룹의 사람들에게로 자연스럽게 옮겨 갔습니다. 10시에 시작된 경주에서 이제 1, 2, 3등이 다 결정되었습니다. 오후 1시쯤 되자 이 대회는 파장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열띤 취재 경쟁을 벌이던 TV기자들도 철수했고 보도하던 아나운서들도 철수했습니다. 그런데 저녁 8시 직전 CBS 방송국에 한 시민이 전화를 걸었다고 합니다. 지금 허드슨 강변 경주로 위를 한 장애 여인이 클러치를 의지하고 뛰고 있는데, 이런 장면을 보도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방송국에서는 긴급회의가 열렸습니다. 소위 저녁 8시면 골든아워, 즉 시청률이 최고가 되는 아주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열띤 토론 끝에 방송국에서는 모든 프로그램을 취소하고 이 감동적인 장면을 생방송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린다 다운은 출발선을 떠난 지 11시간54초 만에 결승선에 골인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시도를 했느냐는 질문 앞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 목표는 처음부터 입상하는 것이 아니라 완주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목표를 성취했을 뿐입니다. 나 같은 장애인도 인생의 목표에 도전할 수 있다는 용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인생을 마라톤 경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완주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힘차게 열정적으로 출발했지만, 열정을 상실한 채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처음 예수님을 믿고 결심한 것을 가슴에 품고 달리고 있습니까? 처음 뉴질랜드에 도착했을 때, 세웠던 비전을 품고 달리고 있습니까? 처음 우리 교회에 출석했을 때, 처음 주님께서 은혜를 주셨을 때, 결심했던 그 결심이 지금도 여러분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습니까? 저는 지난 21일 우리 교회홈페이지 청년 게시판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할렐루야! 지난 월요일 저녁에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여러 가지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수요예배를 드리고 잠시 머무르고 있는 아버님 댁에 돌아왔는데, 전기공사관계로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아버님 댁은 18층인데.... 2시간 30분 후에야 엘리베이터가 작동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께서 운동이 부족한 저에게 운동을 시키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18층을 한 계단, 한 계단 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올라가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셨습니다. 힘이 들어도,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아프고, 그리고 솔직히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1층에서부터 이미 출발했기 때문에 중도에서 포기할 수 없기에 끝까지 완주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을 결심했습니다. 나는 완주자가 되고 싶습니다. 중도에 멈추거나 포기하지 않는 완주자가 되고 싶습니다....“



제가 한국을 방문한 10여 일 동안,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이러한 결심을 다시 한번 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완주자가 되고 싶습니다. 식었던 열정이 다시 한 번 회복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도, 우리 교회 안에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점점 내려가는 ‘Decrescendo’와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점점 올라가는 ‘Crescendo’와 같은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심령 가운데 사라져가던 하나님에 대한 첫사랑이 다시 한번 활활 타오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문제가 되었는지 가만히 돌아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이 문제가 되었는지 돌아본 후, 잘못된 것이 발견되면 회개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다면, 즉시로 잘못된 자리에서 돌아와 하나님에 대한 첫 사랑을 회복하여 주님 만나는 그 날까지 완주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목 : 시험을 축복으로 바꾸는 믿음                                      


본문 : 약-01-02-11                                      


서구 사회의 결혼풍습 가운데 어머니가 시집가는 딸에게 진주를 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이 진주를 “얼어붙은 눈물”(Frozen tears)이라 부릅니다. 그 이유는 딸이 시집가서 많이 흘려야하는 눈물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진주는 땅에서 캐지 않는 유일한 보석입니다. 진주는 ‘아비쿨리데’(Aviculidae)라는 굴속에서 생깁니다. 이 굴속에 모래알이 들어오면 굴은 ‘나카’(Nacar)라는 물질을 만들어서 모래알을 싸 바르기 시작합니다. 이 나카가 많이 덮일수록 진주는 커지고 값도 비싸집니다. 이 나카는 적은 양이 천천히 생기기 때문에 작은 것은 수개월, 큰 것은 몇 년도 걸립니다. 굴속에 들어온 모래알이 모두 진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래알이 들어오면 굴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나카를 생산해서 모래알을 싸 발라 진주가 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모래알을 무시하여 죽는 것입니다. 이 경우 나카를 생산하는 수개월, 수년의 수고는 안 해도 되지만 굴속에 들어온 모래 때문에 굴은 병들어 죽고 맙니다. 모래알을 싸 바르며 진주를 만드느냐! 아니면 가만히 있다가 죽느냐! 하는 선택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은 시험을 만나게 됩니다. 내 인생에도 침입해 오는 여러 가지 모래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인생의 모래를 쌀 수 있는 하나님의 영적에너지 \'나카‘는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1. 시험을 만나면 기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당하는 시험은 다양하고 연속적입니다. 똑같은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한 번의 시험으로 끝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시험을 피하고 싶지만 늘 우리 삶 주변에 가까이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 시험을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라고 했습니다. 내 인생에 침입해 들어오는 모래알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말고 나카를 열심히 뿜어서 모래알을 싸 바르는 싸움을 열심히 하라는 뜻입니다. 어떤 교육학자가 자신의 세 아이의 서로 다른 태도를 관찰해서 얻은 결과입니다. 아이가 기어 다닐 때 장애물을 어떻게 대했는지 보았다고 합니다. 첫째 아이는 장애물 앞에서 멈추었습니다. 둘째 아이는 피해갔습니다. 셋째 아이는 장애물을 밀쳐내고 앞으로 나아갔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에 흥미를 느낀 이 교육학자는 다른 아이들도 이런 방법으로 관찰했고 자신의 아이들과 같은 세 가지 반응을 보인 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누가 문제를 해결하겠습니까? 시험을 정복하는 지혜는 장해물을 밀어제치고 넘어가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다가오는 인생의 모래가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인생의 시련을 가져다주는 모래를 감싸는 나카를 뿜어내는 노력과 정열로 삶을 진주로 만들어야 됩니다. 굴이 모래알을 받아들여 값진 진주를 만들듯이 성도들은 인생의 시련을 기쁘게 받아들여 내 인생을 멋진 진주로 만들어야 합니다.


  2. 시험을 만나면 인내해야 합니다(3-4절).


굴속에 아름다운 진주로 남아있기까지 인내와 기다림이 있어야 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라는 말을 표준새번역 성경에 보니까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내력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견디어낼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것, 문제가 된 것을 인내력으로 다시 시작하거나 고쳐서 일을 완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어진 환경, 벌어진 일을 원망하고 불평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시간에 더 인내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애굽 땅에 버려진 요셉,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다니엘, 이유 없는 고난으로 가족과 재물을 빼앗긴 욥, 그들은 모두 인내를 온전히 이룬 자들입니다.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며 인내하셨습니다(빌 2:7-8). 현대인들의 가장 큰 약점은 인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너무 쉽게 포기하고 분노합니다. 속에 있는 자신의 생각을 담아두지 않습니다. 자신을 너무 쉽게 노출시킴으로 상처와 실망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내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 같고 실패하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문화 전통에서는 여성들이 시집가면 ‘출가외인’으로 규정했습니다. 시집간 딸이 갈등이 있어도 다시 친정에서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가혹한 것 같으나 인내하라는 뜻입니다. 인내해야 좋은 가정, 훌륭한 부부관계가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과학자 뉴톤은 “내가 발견한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은 인내였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가망이 없어 더 기다릴 수도 없고 인내할 힘도 없다고 생각될 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인내는 인생을 멋진 진주로 만드는 나카입니다. 여러분! 인내해서 인생의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지 않겠습니까?


   3. 시험을 만나면 거룩한 지혜,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구하라.


  시험 앞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확실한 문제해결방법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후하게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계획과 방법이 완벽해 보여도 빗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잠언 저자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지혜는 문제를 헤쳐 나갈 근원적인 힘, 능력입니다. 시험을 만나면 근심, 원망할 것이 아니라 히스기야처럼 하나님 앞에 나가야합니다. 히스기야는 두 가지 시험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며 통곡했습니다. 이 시대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자랑하고 과시하기 쉬운 시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겸손히 하나님 앞에 마음을 열고 하나님이 지혜와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 갖추고 있는 것으로 무엇이든 다 이룩할 것 같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헛된 욕망입니다. 하나님 앞에 묵상하는 내 자리를 거룩한 성소가 되게 하면 하나님이 지혜와 방법을 주십니다. 문제해결 한다고 사람을 찾아다니지 말고 내가 해결할 수 있다고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문제가운데 있는 사람이 문제 때문에 힘든 내가 무엇으로 문제를 해결하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합니다. 문제 가운데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있는 시간이 해결책입니다. 그것이 인생을 승리로 이끄는 영적 나카입니다.


                                 


제목 : 교회 직분자의 3가지 자세                                      


본문 : 딤전-01-12-17                                      


<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



서울의 한 가정에서 고등학교 2학년 딸이 부모 말을 듣지 않고 말썽을 부렸습니다.


학교도 제대로 가지 않고, 친구들하고 놀러 다니며, 밤늦게 집에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야단을 쳐도 아무 소용이 없어서 고민하다가 두 부부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나요? 우리 딸이 다시 좋은 아이로 돌아오는 길이 없을까요?\"



간절히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속에 들렸습니다.


\"딸 때문에 안타깝지? 그런데 네가 말을 듣지 않았을 때 내 심정은 어떠했겠느냐?\"


딸을 위해 기도하는데 이상하게 자기가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고,


자기도 딸에게 그렇게 인내하면 언젠가 무사히 딸이 돌아온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날 밤도 딸이 늦었습니다. 갑자기 전화 벨소리가 울리는데 불길한 느낌이었습니다.


받아보니 병원 응급실에서 온 전화였습니다. 딸이 병원에 있으니 오라는 전화였습니다.


딸이 친구 셋과 함께 택시를 타고 가다가 택시가 전신주와 충돌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병원 응급실로 갔습니다. 모두 피투성이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운전석 옆에 앉았던 딸만 약간의 찰과상만 입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습니다.



두 부부는 하나님께 깊이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가장 위험한 곳에 앉았던 딸을 지켜주신 그 깊은 사랑을 잊지 않겠습니다.\"


2주일간 딸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이들은 깊은 가족간의 사랑을 회복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우리의 행복을 막는 그 무엇도 반드시 뚫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들어도 낙심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에 주력하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거든 조금 더 기다려보십시오.


자녀가 허물이 많아도 조금 더 기다려보시고, 일이 안 풀려도 조금 더 기다려보십시오.


하나님은 믿음을 가지고 바르게 살려는 자녀에게 반드시 축복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가끔 우리 자녀의 행동을 보면 속이 답답할 때가 있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정말로 걱정해야 할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답답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면 자녀도 반드시 돌아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한번 헤아려 보라고 자녀를 통해 기도제목을 주시는 것은 아닐까요?



때로 말을 안 듣는 자식을 심하게 때리고 싶지만 너무 사랑하니까 계속 참습니다.


그처럼 자식을 키우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우리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있었는데 중학생 딸이 사춘기를 맞아 자꾸 탈선을 했습니다.


밤늦게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고, 거짓말하고, 나중에 반항하며 말대꾸까지 했습니다.


성경의 돌아온 탕자는 용서해도 자기 딸만은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딸이 그분을 역겨워하는 듯한 모습을 하면 그분도 그런 딸이 모습이 역겨웠습니다.



어느 날,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 걸어왔습니다.


곧 밤을 지새우고 터벅터벅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토록 미웠지만 막상 딸을 보니까 분노가 어디로 가버렸습니다.


사랑하는 딸 앞에서 아버지는 너무 무력했습니다.


목사님은 골목길에서 숨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소중한 딸을 지켜주세요!\"


딸이 집에 돌아오는 것 외에 더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 나를 능하게 하시는 예수님 >



우리는 그런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상상 이상입니다.


이제까지 은혜를 받았지만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그런 놀라운 은혜가 주어질 것입니다.



지난 화요일, 미국의 코너스톤 침례교회 웹사이트를 방문했는데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한 아마추어 미술가가 한 전시회에 나이아가라 폭포의 그림을 제출했습니다.


그 그림에는 엄청난 양의 물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장관이 잘 묘사되어 있었는데


그림 아래에는 \"더 많은 물이 밀려오고 있음(more to follow)\"이라는 제목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나이아가라 폭포가 끊임없이 엄청난 양의 물을 아래로 흘려보내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도 우리에게 폭포수처럼 주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더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이처럼 놀랍습니다. 그 은혜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넘치도록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은혜를 깨닫고 사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깨닫고 살면 우리의 삶은 항상 생동감이 넘치고, 행복은 가까이에 있습니다.


바울이 일생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 은혜를 깨닫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예수님을 \'나를 능하게 하신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바울은 주님의 은혜가 넘치도록 풍성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사명을 주시고,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은혜도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 주실 때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여러분! 남편이나 친구에게 전도하고 싶을 때 너무 주저하지 말고 전도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일로 우리를 부르셨다면 반드시 그 일을 할 수 있는 힘도 주실 것입니다.


만약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주었다면 너무 주저하지 말고 기쁘게 맡아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떤 직분을 주셨다면 반드시 그 직분을 감당할만한 힘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도록 부르시는 일은 없습니다.


조그만 다윗이 거대한 골리앗 앞에 서도록 부르신 것처럼,


엘리야를 아합 왕 앞에 서도록 부르시고, 다니엘을 사자 앞에 서도록 부르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의 팔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결코 실패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생활 잘 하는 방법을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최소한 직분 하나를 맡고 그 직분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일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여건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한 가지 일은 맡을 수 있습니다.


못한다고 속단하지 마십시오. 누구든지 한가지 일은 할 수 있는 정도의 힘이 있습니다.


한 가지라도 직분을 맡아서 같이 참여하다 보면 신앙도 금방 자라게 될 것입니다.



< 교회 일꾼에게 있어야 하는 기본 자세 >



그런데 교회 일에 참여하다보면 가끔 안타까운 일도 보고 어려운 순간도 당합니다.


그 순간을 잘 극복하고 승리하려면 직분을 맡은 자에게 꼭 필요한 자세가 있습니다.


그 자세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3가지만 같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충성스런 자세



직분자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충성스런 자세입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직분을 맡기신 이유는 그를 충성스럽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일할 때 유능함이 도움이 되긴 하지만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충성하는 자세입니다. 그 자세만 있으면 조금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사실 주님은 능력이 많은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능력을 보시지 않을 것은 당연합니다.


부족한 그대로 나와도 충성 한 가지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생활을 하면서 힘들어도 끝까지 충성하시고 봉사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열심히 봉사해도 오히려 봉사를 받는 사람으로부터 원망을 듣기도 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망을 들어도 봉사를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이깁니다.


사실 힘들 때 포기하는 것보다 쉬운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직장 생활을 할 때에도 힘들면 사표를 쓰는 것보다 더 쉬운 해결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좋은 해결방법은 아닙니다. 좋은 해결방법은 십자가를 앞세우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문제 해결을 바라지 말고, 계속 봉사하며 문제를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이유이든 포기는 항상 이른 것입니다.


이론이 필요 없고 계산해볼 필요도 없습니다. 어떻든지 간에 포기는 없을수록 축복입니다.


기도도 쉽게 포기하지 마십시오. 조금 내 뜻대로 안 된다고 기도를 포기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욕심 없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기도한 만큼 축복하실 것입니다.



대개 재능이 있고, 환경이 좋은 분이 실패하는 이유는 항상 쉽게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실패는 진짜 실패한 것이 아니라 도중에 포기하니까 실패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기가 실패이고,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실패는 기도와 봉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어려워도 직분을 포기하지 말고, 주님 붙들 듯이 더 붙들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요새는 조금만 힘들어도 직분을 포기합니다. 충성스런 종이 참 적은 시대입니다.


조금만 힘들면 나가떨어지고, 조금만 맘에 안 들면 나가떨어지고 배반의 길로 갑니다.


꾸준함이 없습니다. 문명은 점차 발달하지만 사람의 품격은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처럼 배반을 잘 하는 존재가 있을까요? 이 문제는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어느 해 여름 복날이었습니다. 한 주인이 키우던 개를 묶어 들판으로 끌고 갔습니다.


개는 두들겨 패야 고기 질이 좋다는 말을 듣고 주인을 개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습니다.


놀란 개가 날뛰다가 묶었던 끈이 풀어져 주인한테 맞아죽지 않으려고 도망을 쳤습니다.


주인은 \"이 개놈이 어디로 도망쳤을까?\"하고 궁금해하며 집으로 돌아와 보니까


개가 조금 전에 자기를 때린 일은 다 잊고 집에서 꼬리를 흔들면서 그를 맞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주인은 개를 꼭 껴안고 다시는 개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내가 앞으로 이렇게 충성스런 개고기를 다시 먹으면 개자식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조금 힘들다고 달아나지 말고 좋은 말과 좋은 행동으로 충성을 보여주십시오.


어떤 분은 생각으로만 충성합니다. 그러나 진짜 충성은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어떤 분은 행동도 없이 \"충만! 충만!\"만을 구하다가 아까운 세월을 다 날려보냅니다.


나가서 복음 전하고, 뜨겁게 사랑하고, 죽도록 충성하면 반드시 충만해질 것입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사람은 협력하는 사람입니다. 충성을 다해 협력해보십시오.


아무리 유능한 사람도 좋은 협력자를 만나지 못하면 무능한 사람이 되지만


아무리 무능한 사람도 좋은 협력자는 만나면 100% 이상의 힘을 발휘해 유능해집니다.


우리가 각각 맡은 직분에 충성하면 우리 교회는 진정 능력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더욱 주님께 충성하고, 교회에 충성하고, 충성하는 분은 힘껏 격려해주십시오.


충성이란 원래 사람의 칭찬을 너무 기대하지 않을 때 진짜 충성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칭찬을 바라지 말되 다른 사람이 잘하면 힘껏 칭찬해주어야 합니다.


그처럼 충성하고, 서로 충성을 격려할 때 우리 교회는 칭찬 받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2. 겸손한 자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엄청난 죄인이지만 은혜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본문 15절 후반부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 고백에서 바울은 \"내가 괴수였다\"라고 하지 않고 \"괴수이다\"라고 현재형으로 말합니다.


즉, 자기의 죄인 됨의 문제가 믿기 전의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능력 있는 사도라도 죄의 문제는 계속되는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들을 보면 한 가지 느끼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가까운 겸손한 사람일수록 더 자신의 죄를 많이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더 가까워지고, 말씀을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죄를 더 인식하게 됩니다.


진실한 신자는 자신의 죄의 깊이를 알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에 놀라움을 표합니다.


그래서 정말 훌륭한 신자는 매일 바울처럼 \"내가 죄인 중의 죄인이구나!\"라고 느낍니다.



사실 우리가 얼마나 부족합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부족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부족하다!\"고 하면서 지나치게 낙심하는 것은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모습은 사실상 아직도 겸손하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부족하다!\"고 인정한 후에 주님을 의지하고 희망을 가지는 것이 진정 겸손한 것입니다.



좌절하는 것, 낙심하는 것, 자살하려는 것은 \"나는 절대 부족하지 않다\"는 반증입니다.


\"본인이 부족하지 않은데 왜 이런 일을 내게 당하지?\"하고 생각하니 속상한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태도를 취하고 낮은 데서 시작하면 마음이 얼마나 편해지는지 모릅니다.


마음이 편한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면 못할 것도 없고, 못 이룰 것도 없습니다.



어느 날, 부산에 사는 한 교인이 사업에 실패하고 태종대로 자살하러 갔습니다.


가보니까 그곳에서 뛰어내리면 하나님께도 죄송하고 몸이 너무 아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자살바위에서 밑만 쳐다보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돈이냐! 돈이 그렇게 좋으냐!\"


스스로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명색이 교인인데 어떻게 돈 때문에 살겠습니까?\"


스스로 그 말을 하고 나서 생각해보니까 돈보다 인생이 더 중요함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는 새롭게 각오했습니다.


\"어차피 빈손으로 태어났는데 사글세방에서 살면 어떤가?


그래도 몸은 건강하니까 아파트 처분하고 사글세방에 살면서 다시 열심히 살아보자!\"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편한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하니까 금방 재기할 수 있었습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지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없어도 넉넉해집니다. 성격이 부드러워집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14절 말씀처럼 겸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더 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더욱 겸손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더욱 크신 은혜를 내려주실 것입니다.



3, 본이 되는 자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바울이 은혜 받은 이유는 다른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본이 되게 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남에게 본이 되어달라!\"고 요구하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본이 되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본이 될 수 있습니까? 그 사람 위치로 가서 그를 이해하고 받아주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상대방을 받아주면 모든 오해는 풀리고, 모든 사랑은 회복될 것입니다.



서울에 있는 일류 대학을 다니던 한 남녀가 있었습니다.


이 둘은 서로 좋아하게 되어 캠퍼스 커플로 지내다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결혼 10년쯤 되자 남편이 자꾸 바깥으로 돌며 다른 여자와 놀아났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사정도 하고, 위협도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몰래 뒤를 밟아서 여자를 한번 보았는데 자기보다 훨씬 못한 여자였습니다.



더 자존심이 상해서 목사님을 찾아가 어떻게 해야 될지 하소연을 했습니다.


목사님이 \"남편을 아직도 사랑하느냐?\"고 물으니까 \"사랑하는 마음은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밤에 같이 잠을 잡니까?\"


그러자 그분이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더러워진 사람하고 어떻게 같이 잠을 자나요?\"



그 말을 듣고 목사님이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관해 깨우쳐 주었습니다.


\"더러운 사람을 사랑하려면 나도 더러워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더러운 남편이 싫어도 주님의 사랑으로 남편을 한번 따뜻하게 맞이해 보세요.\"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마음을 잡고 가정으로 돌아왔습니다.


목사님이 \"어떻게 남편의 마음을 돌렸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남편을 이해하면서 \"남편이 밖으로 도는 것은 내 책임이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해지고, 말이 곱게 나오니까 남편도 아내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다고 합니다.



\"본이 된다\"는 것은 남의 변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변화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나의 변화를 인식하면서 내가 죄인의 위치에 내려갈 때 진정한 사랑이 나오게 됩니다.


의인의 자리에 서서 죄인에게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제 국민일보에 두 번째로 수재후원금을 힘써 헌금해서 보냈습니다.


졸지에 집을 잃은 사람들을 보며 생각으로만 \"안타깝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죄인을 사랑하면 주님이 그렇게 하신 것처럼 죄인의 위치에 같이 설 줄 알아야 합니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어려운 사람의 위치에 서서 실제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펴야 합니다.


그처럼 우리가 서로 남의 위치에 서 줄 때 우리들은 더 아름다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그냥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명 주어서 보낸 존재입니다.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좋은 세상을 찾아다니기보다는 좋은 세상으로 변화시키려고 하고


좋은 사람만 찾아다니기보다는 만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변화시키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요셉처럼 가는 곳마다 그곳을 변화시키고, 축복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 되고.


결국 \'천만 만민\'이 우리를 통해서 복을 받게 하리라는 원대한 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꿈을 가지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큰 복을 예비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제목 : 기도의 축복                                      


본문 : 렘-33-01-3                                      


< 일생 3만 번 기도 응답을 받은 조지 뮬러 >



기도 얘기가 나오면 종종 등장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영국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입니다. 그는 일생 동안 3만 번 이상 혹은 5만 번 이상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어떤 분들은 그분의 진실성을 의심하며 \"자기 PR의 대가이시구나! 기도 응답에 대한 자기 과시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어느 날 조지 뮬러가 영국의 브리스톨 거리를 걷다가 수많은 고아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되어 고아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호주머니에는 2펜스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2펜스를 가지고 고아원을 시작해서 결국 그는 60년 동안 만 명의 고아들을 돌본 영국 고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가 그 많은 고아들을 돌볼 수 있었을까요? 60년 동안에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후원금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저기 강연을 다니며 \"제가 고아 돌보는 사역을 합니다!\"고 알리지도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는 기도에 헌신했습니다. 수많은 고아들을 돌보며 절박한 기도제목이 너무 많았기에 기도제목을 잊어먹지 않도록 기도 노트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기도 제목이 생길 때마다 기도 노트에 기도 제목을 기록한 후 끈질기게 기도했고, 기도 제목이 응답되면 응답된 표시를 하거나 감사의 글을 적었습니다.



그 기도 노트에 수많은 기도 제목들이 3000 페이지 이상 빽빽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그의 기도 노트를 후세 사람들이 면밀하게 검토한 후에 약 3만 번 이상의 기도가 응답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자기 스스로 \"내가 3만 번 이상 기도가 응답 받았소!\"라고 자기를 PR 하고 다닌 것이 아니라 후세 사람들이 그의 기도 노트를 보고 그를 일생 3만 번 이상 응답 받은 위대한 기도자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 기도 노트에는 수많은 사연이 적혀 있었는데 한 곳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고아들에게 아침을 줄 음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날 밤부터 새벽까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새벽 3시에 갑자기 빵 공장 주인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오늘은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습니다. 잠을 자려고 하면 자꾸 누가 저를 깨우는 것 같습니다.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지금 공장에 나가 빵이나 구우려고 합니다. 제가 오늘 아침 목사님에게 빵 좀 갔다 드려도 되겠습니까?\" 결국 그날 아침 고아들은 아침 식사를 거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고아원에 우유가 떨어졌습니다. 목사님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몇 시간 기도하는데 누군가 목사님 사무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나가 보니 한 트럭 운전사가 서 있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 트럭이 고아원 앞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고장나서 꼼짝 못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 우유를 싣고 가던 중이었는데 이러다가 우유가 다 상할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 우유를 좀 가져갈 수 있습니까?\" 그래서 부족한 우유를 채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기도 노트에는 그런 일들이 무수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60년 동안 하나님은 사심 없는 조지 뮬러의 기도를 한번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도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도 조지 뮬러와 같은 기도 노트를 가지고 기록한다면 우리의 기도도 무수히 응답되고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기도하고 나서 우리 자신은 그 기도한 것을 잊어버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잊어버리시지 않고 신비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다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능력과 기도가 주는 축복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 기도한 것 이상으로 주시는 하나님 >



오늘 본문 예레미야 33장 3절을 보십시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야가 이 음성을 들었을 때 그는 시위대 뜻에 갇혀 있을 때였습니다(1절). 국가적으로도 그의 나라는 바벨론의 힘에서 벗어날 능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모든 상황이 암담하여 인간의 힘으로는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어려울 때 다른 분을 찾지 말고, 다른 길을 찾지 마십시오. 먼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응답해 주시고,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진실한 기도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새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한 분의 간증입니다. 얼마 전 그분은 지방에 갔다가 차 열쇠를 잃어버렸습니다. 핸드백을 세 번이나 뒤지고, 여관도 샅샅이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면 이 상황도 보시고 계실 거야!\"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예수님은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지요. 제가 열쇠를 찾게 도와주세요.\" 그리고 나서 그분은 다시 핸드백을 속의 내용물들을 다 쏟아 붓고 쑥 훑어보았습니다. 그때 그분은 휴지 밖으로 삐쭉이 튀어나온 무엇인가를 보았는데 바로 차 열쇠였습니다.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그런 사소한 기도라도 다 듣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아마 지금 어떤 분이 처한 상황은 차 열쇠를 잃어버린 상황보다 더 심각한 상황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중요한 선택과 결단의 문제로 고민하고, 어떤 분은 잘못된 습관으로부터 벗어나는 문제로 고민하고, 또한 어떤 분은 직장 문제나 경제적인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만약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의 상황을 하나님께서 다 보시고 있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 이상의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예비하신 것들은 언제나 우리의 소원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3장 20절에서 하나님을 \'우리의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넘치도록 주시는 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다양한 방법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 >



그런데 왜 많은 믿는 사람들이 기도를 안 합니까? 또 기도를 해도 왜 중간에 포기합니까?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믿지 못합니까?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도한 대로 척척 이루어진다면 누구나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해도 별 수 없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를 안하고 결국 기도의 축복을 놓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도가 무엇인지를 오해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분명히 응답하시지만 그 응답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도한 그대로 주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예스!(Yes)\" 이상의 어떤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심은 우리의 구함보다 훨씬 지혜롭고 다양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까?



1.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노!(No)\" 하고 응답하실 때도 있습니다.



언제 \"노!\" 하고 응답하십니까? 우리가 잘못 구할 때 \"노!\" 하고 응답하십니다. \"하나님! 복권에 당첨되게 해주세요! 이번 노름판에서 따게 해주세요!\"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고난이 전혀 없게 해주세요!\" 하는 기도도 잘못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고난이 있어도 이길 힘을 주세요!\"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더 \'출세\'하도록 능력을 구하지만 하나님은 더 \'순종\'하도록 약함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더 \'큰 일\'을 하도록 건강을 구하지만 하나님은 더 \'좋은 일\'을 하도록 병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더 \'즐겁게\' 살도록 부를 구하지만 하나님은 더 \'현명하게\' 살도록 가난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더 떵떵거리며 살도록 많은 것을 구하지만 하나님은 더 기도하며 살도록 우리에게 아주 적게 주실 때도 있습니다. 나중에 따져보면 우리가 구한 것을 얻지 못해도 우리는 더 큰 것을 얻은 셈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기도한 대로 응답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크신 뜻을 생각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기다려라!\" 하고 응답하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스피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30초 이상 기다리면 참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모든 것이 빨리 처리되고 빨리 결과가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기도도 빨리 응답되기를 원합니다. 그처럼 결과를 중시하지만 사실 과정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결과보다 과정에서 더 많은 교훈을 얻습니다. 기도가 바로 응답되면 배우는 것이 별로 없지만 기다린 후에 응답되면 그 기다리는 과정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때로 하나님은 기도 응답뿐만 아니라 그 기도 응답을 주시는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너스로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기도 응답을 지체하시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 타이밍에 대한 열린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들은 기도응답이 지체되는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완전한 지혜와 능력으로 어느 시간이 가장 좋은 시간인지를 잘 아십니다. 그 하나님의 조치를 신뢰하고 여유를 가지고 가장 적절한 시간을 기다리십시오. 모든 것에는 제 철이 있습니다.



3. 셋째,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좀더 성숙해라!\" 하고 응답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 응답을 막는 가장 큰 장벽은 대개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해 달라고 강하게 요구하면서 죄는 그대로 두고, 다른 사람들은 변화시켜 달라고 하면서 자신은 변화되려고 하지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 응답을 주시기 전에 우리가 좀더 성숙하기를 원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 응답은 종종 우리의 믿음의 성장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기를 원하면 먼저 우리 안에 있는 불신과 죄를 떠나야 합니다.



기도에는 바른 기도가 있고 잘못된 기도가 있습니다. 누가 바른 기도를 드리고, 누가 잘못된 기도를 드리는지 사람이 그 차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른 기도를 드릴 때 꼭 한 가지 나타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삶의 변화\'입니다. \'기도\'라는 말의 헬라어 \'프로쉬케\'는 내 소원을 이뤄달라고 떼를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를 조율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자연히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많이 기도해도 삶의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대개 일방적으로 내 욕심만 이루어달라고 주문(注文)했기 때문입니다. 기도에 주문(注文)만 있으면 자칫하면 무속 신앙에서 그들의 방식대로 중얼중얼 대는 주문(呪文)이 될 수 있습니다.



< 소원보다 사명을 앞세우는 기도를 드리십시오 >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환경을 변화시키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먼저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당신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제가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이 기도가 응답 받기 위해서 제게 성숙해져야 할 부분이 무엇입니까? 응답을 예비하기 위해서 제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처럼 하나님께서 먼저 여러분들을 변화시키고,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려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결재하기 전에 우리가 더 성숙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진정 기도 응답을 원하면 이제보다 조금 더 성숙해지십시오. 항상 고민하는 그 죄를 멀리 하십시오. 여러분들의 태도를 바꾸시고, 삶의 패턴을 바꾸시고, 영을 부드럽게 하고, 회개에 재빠르고, 누군가를 용서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축복을 부어주시고(말 3:10), 점차 내 소원보다 내 사명을 더 크게 보는 시야를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기도의 종들이 한결같이 체험한 것들이었습니다.



이사야 6장을 보면 웃시야 왕이 죽고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이사야는 기도를 작정하고 성전에 가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만나자 그는 자기의 소원을 아뢰기도 전에 자기 모습부터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어려움이 남 때문이고, 정치가를 때문이고, 외적 때문이고 자기는 떳떳한 줄 알았는데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자기의 부족한 모습을 보게 되면서 그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그의 입술을 지지고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깨끗한 영혼을 가지고 소원을 아뢸까 하는데 소원을 아뢰기도 전에 다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사야는 자기 소원을 아뢸 것은 잊어먹고 \"하나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내 소원보다 내 사명과 내 할 일을 더 크게 보고 순종의 발걸음을 다짐하는 기도가 진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일 것입니다.



사실 기도 응답은 종종 우리의 능동적인 순종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움직이지 않는 사람보다 움직이는 사람에게 기도 응답을 허락하시고, 참여하지 않는 사람보다 참여하는 사람에게 더 기도 응답을 허락하십시오. 대개 기도 응답은 우리의 참여에의 부르심에 대해 우리가 응답하는 것과 더불어 주어집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한다면 더 전도해야 합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한다면 말씀 중심적인 삶을 힘써 권하고 먼저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 기도한다면 더욱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치유를 위해 기도한다면 더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선교사님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실질적으로 내 호주머니를 비울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 응답은 우리의 순종의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항상 내 소원보다 내 사명을 먼저 생각하십시오. 그처럼 사명에 몰입되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기도하다가 내 소원을 아뢰지 못했다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의 소원을 외면하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 깊은 소원을 나보다 더 잘 알아주시고 그 소원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주는 축복 >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나열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내 소원만 아뢰지 말고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많이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을 높이며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렇게 하나님을 높이고, 감사로 기도를 채워야 합니다.



여러분! 감사가 없는 기도는 절대 하지 마십시오. 사실상 우리들은 우리가 받을만한 것 이상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많은 축복을 받고도 감사는 없고 계속 요구만 한다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예배와 감사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의 차원을 깊게 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기도를 \'하나님의 깊은 부분과 우리의 깊은 부분이 만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시편 42편 7절을 보면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른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요구를 주장하고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 계신 것을 알게 되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깊은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도 나누어주시고, 희망도 나누어주시고,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도록 긍정적인 시야도 나누어주시고, 죄와 욕망을 이기는 힘도 주십니다. 그러면 죄는 더 이상 우리에게 매력적인 것이 아니고 그 능력을 상실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욕망까지 하나님께 바쳐졌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의 방식에 매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오래도록 기억해주시고 축복으로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



미국에 조지 맥러스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결혼하면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좋아 매일 일정 시간을 기도에 투자했습니다. 그는 기도할 때 항상 그의 두 딸이 예수님을 잘 섬기는 딸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그러다가 점차 아직 태어나지 않은 손자와 증손자를 위해서도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의 두 딸은 자라서 모두 예수님께 헌신하고, 역시 예수님께 헌신한 두 청년들과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두 딸 부부는 네 명의 손녀와 한 명의 손자를 낳았는데, 네 명의 손녀도 모두 예수님께 헌신했고, 손자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가장 먼저 두 명의 증손자가 생겼는데, 공교롭게도 그 둘은 똑같은 대학에 진학해서 룸메이트가 되었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 한 증손자는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반면에 다른 증손자는 심리학 공부를 선택했습니다. 심리학을 선택한 증손자는 자신이 신학이 아닌 심리학을 선택한 것에 대해 약간의 죄책감도 들었지만 그는 심리학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그 심리학을 선택한 학생이 미국 최대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우리 나라 극동 방송에도 매일 나오는 유명한 가정 상담 전문가 제임스 돕슨입니다.



만약 조지 맥러스키가 없었다면 제임스 돕슨도 없었을 것입니다. 맥러스키의 기도는 그의 가정에 수십 년 동안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수많은 가정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잊어도 하나님은 잊지 않고 반드시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자녀를 위해, 손자와 증손자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맥러스키의 진실한 기도에 응답하신 것처럼 여러분들의 기도에도 응답하실 것입니다.



기도는 엄청난 영향력이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기도는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무엇보다도 기도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기도는 축복의 원천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축복을 얻게 하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도구입니다. 그 놀라운 축복의 도구를 소홀히 하고 어찌 복된 존재가 되기를 바라겠습니까? 이제 더욱 기도를 가까이 하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예비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제목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본문 : 행-13-01-3                                      


< 선교 한국을 꿈꾸십시오 >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하는 민족이 있습니다. 어떤 민족을 사용합니까?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고, 교회의 성장이 비약적으로 이루어지고, 젊은이들이 신학교로 몰려들고, 기도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고, 기독교가 사회의 주도적 종교가 되고, 교육수준과 경제수준이 높은 민족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셨습니다.



그런 점을 볼 때 1990년까지 우리 민족이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쓰시는 민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 이후에 교회성장이 정체되면서 점차 그런 기대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왜 교회 성장이 정체되었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축복을 받고도 그 축복을 나누는데 인색했기 때문입니다.



1945년, 우리 한국기독교인은 80% 이상이 평안남북도에 몰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이 공산화되면서 그곳의 교회가 초토화되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북한 땅의 교회를 깨뜨리셨습니까? 결과적으로 보면 선교적인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북한이 부흥할 때 양반을 따지는 남한에서는 기독교가 고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6.25때 수많은 북한 사람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첫 번째로 했던 일이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중심으로 성실하고 억척같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대략 2-3년 만에 그 지역의 상권을 장악하고 주변에 커다란 돌집들, 즉 교회를 쌓아 올렸습니다.



그러자 그 지역 토박이들이 놀라며 이유를 찾다가 북한 사람들의 성공 뒤에는 옛날 표현으로 ‘예수 귀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복음이 남쪽에도 깊숙이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북한을 깨뜨려 남한을 복음화 시켰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선교의 사명을 외면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을 통해 흩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유랑하는 민족이 되기보다 기쁘게 선교하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받은 축복을 선교를 위해 사용하지 않으면 그 축복 받은 만큼 고난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교가 없는 축복은 미완성의 축복일 뿐입니다.



한국 개화기 때 선교사들은 우리나라의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이름 조선은 영어로 chosen, 즉 ‘선택받은 사람(선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처럼 선민이 된다는 것은 축복이지만 그만큼 선교의 의무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선택받은 민족은 선교하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선교의 중심적 국가가 될 가능성은 어느 민족보다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한국 사람은 황인이니까 흑인과 백인 사이에서 인종적인 거부감이 적고, 세계 인구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동양인을 전도하기 좋습니다.



둘째, 한국 사람은 먹성이 좋습니다. 원체 가난하게 살아서 웬만하면 다 먹습니다. 뿌리부터 칡뿌리, 연근뿌리, 도라지 뿌리, 인삼 뿌리, 마 뿌리까지 먹고, 잎사귀로 올라가서 고추이파리, 고구마 순, 호박이파리, 깻잎파리까지 먹습니다. 게다가 보신탕에서 번데기까지 먹으니까 어느 나라 가든지 먹는 문화에 비교적 잘 적응합니다. 잘 먹어야 친구가 되기 쉽습니다.



셋째, 우리나라는 더울 때는 무척 덥고 추울 때는 무척 추우니까 어떤 기후 조건에도 다 적응할 수 있는 강인한 체력이 있어서 어디든지 못갈 데가 없습니다.



넷째, 한국 사람은 평화애호민족입니다. 역사상 수많은 침략을 받았어도 한번도 침략을 한 적이 없으니까 그 역사적 사실만 대면 금방 선교지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섯째, 한국 사람은 영력이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꾸준히 새벽기도 하는 민족은 우리 민족밖에 없고, 고난을 많이 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말씀의 감동도 있습니다.



여섯째, 한국 사람은 다른 나라에 비해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이 신학교에 갑니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나라를 선교의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할 만한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세계 250여 나라에 24,000 종족이 있는데 그중 복음을 듣지 못한 종족은 10,000종족이 넘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복음으로 이끌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선교 때문입니다.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모델이 나옵니다. 바로 안디옥 교회인데, 안디옥 교회는 어떤 교회였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었을까요?



1.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교회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핍박으로 흩어진 성도들이 로마의 제 3도시인 안디옥에 세운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6절 말씀을 보면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이 붙었는데, 그 말은 사람들이 그들의 믿음을 인정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그처럼 인정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청일전쟁 후, 일본은 일본의 뜻을 거역하는 수구세력의 핵심을 민비로 보고, 국모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난자해서 불로 태워 죽이는 을미사변을 일으킵니다. 그 후 고종 황제는 불안하여 잠을 못 이룰 때마다 종종 언더우드 선교사를 불러서 편히 주무셨는데 고종은 주님을 영접하지는 않았어도 가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신하도 믿을 사람이 없고, 오직 야소인(예수 믿는 사람) 밖에는 믿을 사람이 없다.”



믿는 사람은 믿음직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기 전에 먼저 사람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왜 이단이 생깁니까? 사람이 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서는 학생들이 교만하지 않도록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사가 되기 전에 학자가 되고, 학자가 되기 전에 성도가 되고, 성도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인은 ‘사람이 된 교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아니! 저런 사람이 교회에 다녀?”라는 말을 듣는 주인공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가 명백히 잘못한 행동을 하고 욕을 먹으면서 그 욕먹는 것을 십자가라고 생각하고 욕먹는 행동을 더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항상 칭찬 받는 교인이 되기에 힘써야 합니다.



2. 벽이 없는 사랑이 넘치는 교회



본문 1절에 나오는 안디옥 교회의 리더들의 명단을 보면 안디옥 교회는 벽이 없는 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이란 인물이 나옵니다. 여기서 니게르란 니그로(Negro)란 말로 ‘흑인 시므온’이란 말입니다. 이 ‘흑인 시므온’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구레네 시몬’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리고 ‘구레네 사람 루기오’란 인물이 나오는데 구레네가 아프리카 북부도시이기 때문에 역시 흑인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 명단을 보면 안디옥 교회는 인종적인 벽이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1절을 보면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이란 이름이 나오는데 그는 헤롯 왕과 같은 젖을 먹고 자란 동생으로 당시 최고의 상류층 인물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상류층과 하류층의 계층간의 벽도 없었습니다.



출신지역도 다양합니다. 바나나는 구브로 출신이고, 시므온과 루기오는 아프리카 출신이고, 마나엔은 팔레스타인 출신이고, 바울은 터키 다소 출신인 것을 볼 때 안디옥 교회는 지역적인 벽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지도자들은 나이가 많은 순서대로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나바가 나이가 제일 많고 사울이 제일 젊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세대간의 벽도 없었습니다.



나이순서가 아니라면 바나바가 담임목사이기 때문에 제일 앞에 나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왕실 귀족인 마나엔보다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인 시므온과 루기오가 앞서 언급된 것은 시므온과 루기오가 얼마나 탁월한 사람들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똑똑한 사람들이 모이면 배가 산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안디옥 교회는 그런 불화가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안디옥 교회는 ‘큰 가슴과 큰마음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지금 급격히 국경이 없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가 세계적인 인물을 키우고 내일을 준비하려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월드 비전과 큰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교단의 벽도 낮춰야 합니다. 자기 교단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교단의 벽을 높게 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요즘은 벽이 높은 것을 자부심의 표시로 보지 않고 두려움의 표시로 봅니다. 자꾸 벽을 높게 쌓는 것은 개방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오염될까봐 그렇게 한다는데 그 말은 내가 가진 것이 별것 아니라는 왜소한 태도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의 비웃음을 받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옛날에는 타 교단 목사님을 자기 강단에 세우지 않았고, 다른 목사님 말씀도 못 듣게 하고 담임목사님 말씀만 들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방송과 정보통신이 발달해서 아무리 다른 목사님 말씀을 못 듣게 해도 소용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태도를 이상하게 봅니다. 차라리 마음껏 더 들으라고 개방해야 부작용도 적습니다. 모든 교회는 이단만 아니라면 서로 기쁘게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외형이 큰 교회가 아니라 마음이 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3. 은혜가 넘치는 교회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 구절을 보면 안디옥 교회는 섬김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섬김이 없으면 신앙도 자라지 않고 축복도 받지 못합니다. 교회생활을 가장 잘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많이 섬겨주려고 하고, 적게 칭찬받으려고 하면 교회생활을 최고로 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안디옥 교회는 금식과 기도가 넘치는 성령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2절 말씀에서 그들이 금식하고 기도할 때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우라!”는 성령의 음성을 듣자 3절 말씀에서 그들은 또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금식의 보다 큰 의미가 있습니다. 금식은 나의 입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것만이 금식이 아니라 나의 눈과 귀와 마음과 생각에 나쁜 것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것도 금식입니다.



가끔 눈으로 이상한 장면이 보입니다. 그 보는 금식을 잘해야 합니다. 가끔 귀로 이상한 소리가 들립니다. 이단의 소리도 들리고, 점쟁이의 소리도 들리고, 상처 주는 소리도 들립니다. 그런 소리를 절제해서 듣는 금식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쁜 일에 손을 대는 손 금식과 엉뚱한 곳으로 가는 발 금식도 잘해야 하고, 무엇보다 잘못된 마음을 가지는 마음 금식을 잘해야 합니다.



금식한 후에 옛날처럼 여전히 싸우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갈등을 좋아하고, 자랑을 좋아하면 그것은 금식을 한 것이 아니라 굶식을 한 것입니다. 먹는 것을 금하는 것은 하나의 예표입니다. 먹는 것을 금하는 훈련을 통해서 나쁜 것을 금하는 진정한 금식으로 연결될 때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가 있게 되고, 급속히 치유와 회복과 문제해결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4.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교회



본문 2절에서 왜 안디옥 교인들을 금식하며 기도했을까요? 혹시 이런 기도를 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 교회가 자꾸 부흥되고 있습니다. 이제 본당도 넓혀야 하고, 교육관도 필요하고, 여러 가지 필요한 것이 많습니다. 채워주세요.” 그러나 성령님은 예배당 크게 짓는 그런 응답이 아니라,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선교사로 파송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제일 이루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선교\'임을 깨닫게 됩니다. 선교는 예수님의 최후의 명령이었고, 지상명령이었습니다. 교회가 세워진 목적은 선교 때문이고, 성도가 구원받은 목적도 선교 때문입니다.



그처럼 선교가 중요해도 교회의 핵심 기둥인 바나바와 바울이 떠나면 교회가 크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3절 말씀을 보면 안디옥 교회는 한 마디도 불평하지 않고 다시 금식하고 기도한 후에 결국 성령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도 안정된 교회의 목사로 지내다가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성령님의 뜻에 순종했기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름을 떨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너의 소중한 것을 선교를 위해 떠나보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인간적으로는 여러 가지 변명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하나님! 조금 더 안정이 된 후에 하겠습니다. 우리도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교회 수리도 하고, 사야 할 것도 많습니다. 그런 일은 좀더 여유 있는 교회와 여유 있는 사람에게 시키세요. 저희들의 형편을 이해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그런 변명을 포기하고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큰 축복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축복과 기적은 순종의 역사입니다. 사람들은 실력이 있고, 재력이 있고, 인맥이 있어야 성공하는 줄 알지만 진짜 성공 요인은 바로 순종입니다. 특히 순종하기 어려울수록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순종한 만큼 반드시 큰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5. 소중한 것을 드릴 줄 아는 교회



당시 안디옥 교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성령님의 뜻을 따라 그들이 가진 최상의 두 사람을 선교에 내어드렸습니다. 오늘날 목회에 경험이 없는 사람, 목회에 희망이 없는 사람, 목회에 실패한 사람이 선교를 나가는 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목회에 경험이 많고, 목회에 성공한 사람이 선교를 나가는 것이 진짜 성경적인 선교입니다. 선교는 가장 유능한 사람, 가장 훈련된 사람, 우리 중에 없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사람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선교를 위해서는 최상의 것을 내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쓰고 남은 시간과 물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선교에 시간과 물질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은퇴한 후에 열심히 헌신하겠다고 하지 말고 지금 건강하고 다른 할 일도 많을 때에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큰 손해를 감수한 헌신을 기뻐하시고 그 헌신을 축복의 재료로 삼으실 것입니다.



행복의 제일 요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헌신입니다. 불행한 가정을 보십시오. 무엇이 없습니까? 틀림없이 헌신이 없습니다. 결혼은 헌신입니다. 받으려고 결혼하면 받지도 못하고 상처만 남습니다. 그러나 헌신하려고 결혼하면 오히려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사람에게 헌신이 없으면 행복도 없습니다. 왜 자녀들에게 많은 것을 줄 때 손해 본다고 생각하지 않고 더 행복합니까? 그 말은 행복은 헌신에 있다는 말입니다. 헌신의 대상, 사랑의 대상이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선교를 외면하면 결코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선교의 가장 큰 장애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나친 우리 의식’입니다. “우리 교회도 필요한 것이 많은데 남까지 돕느냐? 우리 주변에도 전도 대상자가 많은데 꼭 외국에 나가 선교해야 하느냐?” 만약 안디옥 교회가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사도 바울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나라에 복음 전파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까운 이웃도 살펴야 하지만 동시에 선교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마음이 커야 하나님의 축복도 커집니다. 선교하지 않으면 핍박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를 흩으신 것처럼, 우리가 선교하지 않으면 환난과 핍박이 닥쳐서 우리의 소중한 것을 다 앗아가 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내 것을 빼앗기는 자가 되지 말고 미리 선용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빼앗기는 삶의 고통에서 면제될 것입니다.



< 열심히 선교해서 축복 받으십시오 >



전도서 11장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계산적인 생각이 없이 상류에서 식물을 던지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계산을 초월해서 반드시 축복의 열매가 돌아오게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선교하면 겉으로 계산하면 교회에는 유익이 전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계산을 초월해 선교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축복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어떤 장로님 말에 의하면 선교에 헌신하니까 끊임없이 드려도 하나님이 더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예쁜 짓을 하면 더 사랑 받고, 더 축복 받게 될 것입니다.



지난번 황수 선교사님 교회에 방문했을 때 우리 여선교회에서 회비를 내고, 김을 팔고, 떡을 팔아 모아두었던 재정을 몇 천 원만 남기고 몽땅 선교사님에게 드렸습니다. 김재호 선교사님이 오셨을 때도 여선교회에서 모든 재정을 톡톡 다 털어서 선교사님에게 드렸습니다. 그처럼 선교사님을 위해서는 다 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때 여선교회 회원들도 기뻐했고, 저도 기뻐했고, 하나님도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선교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시입니다. 진짜 은혜를 받으면 당연히 그 은혜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또한 선교는 축복의 기준입니다. 선교하는 교회가 복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절대로 없고, 선교하는 성도가 복을 받지 못한 경우도 절대로 없습니다.



이제는 성장하면 선교하겠다고 하지 말고, 선교하면 성장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안정되면 선교하겠다고 하지 말고 선교하면 안정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항상 안디옥 교회 성도들처럼 열심히 선교에 동참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복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목 : 깨어 있는 기쁨                                      


본문 : 왕상-11-01-13                                      


오늘은 『깨어 있는 』에 대해 생각하면서 같이 은혜를 받겠습니다.


여러분 깨어 있는 기쁨이 무엇입니까?



탈무드에서 나온 얘기인데요. 조크입니다. 웃자는 얘기죠. 신앙을 가르치는 유대 랍비가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천국 문 앞에서 우리 동네에서 유명한 난폭운전자를 만났습니다. 얼마나 버스를 난폭하게 운전하는지 신호도 안 지키고 속도도 안 지키구요. 이리저리로 다니는데요. 타는 사람들마다 겁을 먹습니다.


\"야!! 운전을 해도 어떻게 이렇게 하나?\"


그런 사람인데 천국에 온 거에요. 랍비가 좀 이상하잖아요? 그래서 천사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데요.


\"아니 저런 사람이 어떻게 천국에 옵니까?\" 그랬더니 천사가 하는 말이


\"누구든지 회개를 하면 천국에 오는 겁니다..\" \"어, 그러냐구\"


천국에 가면 살집들을 정하게 되는데 천국가보니까 큰집도 있고 작은집도 있고 그렇더래요. 그런데 먼저 난폭운전자가 살 집을 정하는데 천사가 아주 으리으리한 대궐수준의 집을 주면서


\"여기 사시오.\" 그러더래요. 랍비가 속으로 생각하기를


\'난폭운전자가 저렇게 대궐 같은 집에서 사니까 아마 난 왕궁 같은 으리으리한 집에서 내가 살 꺼다.\'


이렇게 기대를 하고 있는데 이 천사가 랍비를 데리고 가서


\"당신은 여기서 사시오.\"


그래서 보니까 아주 허름한 창고 수준의 집이란 말이에요. 랍비가 화가 났어요. 여러분 같아도 화가 안나겠습니까? 난폭운전자가 회개를 해서 천국에 온 것 까지는 이해를 하겠는데


\"아니 저런 난폭운전자에게는 대궐 같은 집을 주고 나같은 랍비에게는 창고같은 집을 주냐?\"


그랬단 말이에요. 그랬더니 천사가 하는 말이


\"랍비님 잘 들으세요. 랍비님은 세상 있을 때 게으르고 최선 다하지 않았어요.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데 그냥 사람들이 졸기만하고 주여!! 주여!! 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았어요. 그런데 저 난폭운전자는 버스를 타는 사람마다 너무나 무서워 가지고 주여!! 주여!! 그냥 하나님 많이 찾아가지고 그냥 결사적으로 기도를 많이 하게 해 가지고 하나님 찾는 그 공로가 커서 그렇게 좋은 집에 사는 겁니다.\"


그랬다고 그래요. 깨워서 정신 차리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찾게 한다는 거라는 겁니다.



오늘 솔로몬 임금이 나오는데 이 솔로몬은 본래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을 사랑했고 그래서 왕이 된 다음에 제일먼저 하나님을 찾아가서 일천번제를 드렸는데 이 일천번제가 일천 번의 제사를 드린건지 일천 마리의 제물을 드렸는지 아직도 논란은 있지만 분명한 것은 솔로몬은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을 존중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성전건축도 그렇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 집보다는 성전건축을 더 잘지어요. 하나님의 집을 지어야지 그래가지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한거에요. 그 결과 하나님은 깨어있는 솔로몬,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솔로몬에게 복을 주셨어요.


열왕기상4장 21절에 보면



\" 솔로몬이 이 강에서부터 블레셋 사람의 땅에 이르기까지와 애굽 지경에 비치기까지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므로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그 나라들이 조공을 바쳐 섬겼더라.\"



고 했습니다. 스밧왕이 금 120달란드틑 선물로 바쳤어요. 오늘로 말하면 금 360㎏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가치가 있는 거에요. 그런데 오늘 성경에 나타난 솔로몬이 변했어요. 하나님을 찾지 않았어요. 깨어 있지 않단 말이에요. 영적으로 잠자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았어요. 대신 이방 여인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명령도 어기고 하나님을 멸시했어요. 하나님을 멸시하면 경멸당한다고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그 결과가 11절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



여러분 깨어있지 못하면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단 말이에요. 아니 있는 것까지도 빼앗긴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있어야 되요. 오늘 솔로몬의 교훈을 보면서 깨어있는 기쁨을 갖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깨어있으면 속임을 당하지 않는 기쁨이 있습니다.


속임을 당하지 않는 기쁨이 있어요. 깨어 있으면 속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솔로몬은 깨어있지 않으니까 속임을 당해요. 마귀에게 속임을 당한거란 말이에요. 안탑깝지 않아요? 많은 재물이 소유의 욕심을 지켜주지 않더라구요. 1절에서부터 5절까지 있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백성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기시를 너희는 그들과 서로 통혼하지 말며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름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름이라\"



여러분 솔로몬임금에게 부인이 자그마치 칠백명이라는 거에요. 별로 놀라지도 않으시네요. 천명씩 부인을 두는 이유가 뭡니까? 성서학자들은 이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구요. 단순히 탐욕, 정욕때문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철저히 하나님에 향한 불신입니다. 불신앙입니다. 여인들을 통해서 각나라 임금들과 과적관계를 맺는 겁니다. 그래서 전쟁을 방지하고 어려울 때는 서로 돕는 동맹을 맺고 서로 무역을 하면서 부를 축적하려는 마음입니다. 솔로몬이 깨어 있을 때 에는 \"하나님만이 나에게 복을 주신다\"고 \"하나님만이 내 능력이다\" \"하나님을 찾아야 된다\"라고 했는데 지금은 그가 잠자고 있어요. 마귀에게 속임을 당해가지고 말입니다. 깨어있지 않으니까 인간적인 부, 경제적인 부, 나라의 안녕, 더 높은 지도자의 자리에 앉기를 원했던 거에요.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마귀는 속이는 자입니다. 예수님도 속이잖아요. 예수님이 하늘나라에서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합니다. 엄청나게 큰일을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마귀가 찾아오는 거에요.


\"예수님! 예수님은 하늘나라에만 사셔가지고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는지 방법을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 제가 이 땅을 지배하고 있는 내가 조언을 한마디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속이는 일을 하는 거에요. 그때 제안한게 뭡니까?



\"이 세상에서 일 잘 하려면 첫째는 돈이 있어야 합니다. 이 돌덩이를 가지고 떡덩이를 만들어 보세요. 돌을 떡으로 만들 정도의 능력이 필요한 거에요. 돈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적어도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이름이 알려지는게 좋지 않습니까? 브랜드가치가 있어야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냥 저 산 꼭대기에서 밑으로 떨어져 보세요. 떨어지면 밑에서 천사가 그냥 야~~~ 하늘에서 떨어져도 받아가지고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하나님의 천사가 받은 사람이라고 소문이 나면 예수님 일 잘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권력이 있어야 합니다. 백이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이 세상은 백이 한 몫 하는 세상이니까 이 권력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의 권력을 예수님에게 주겠습니다. 그렇게 이 세상일 해보세요. 그러면 꼭 성공할 겁니다.\"



이렇게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하고 있는 거에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유혹에 대해서 어떻게 얘기를 했습니까? 단호하게 물리치면서 하는 말이



\"무슨 말이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세상에 백은 무슨 백이냐 하나님만 섬기면 된다고 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만 있으면 된다고 단호히 거절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으시는 고통과 어려움과 억울함 속에서도 모든 일은 하나님 손에 달려 있는 줄로 믿습니다.


아무리 로마군인들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나를 잡아 죽인다 하더라도 최후의 승리자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면서 순종하시잖아요. 고통을 감당하시잖아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도 잘 보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왜? 남을 용서해야 하구요, 왜? 일용한 양식만 구해요. 여러분 먹는 것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남하고 싸워서 이기는 것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늘의 권세를 가진 하나님을 이 땅의 권세도 가지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제단이 어렵잖아요. 힘들잖아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깨어 있으면 하나님을 찾아요. 마귀의 속임당하지 말고 여기저기 이러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주시고 소망주시고 살게 하시는 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다니엘을 보세요.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소년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에서 출세를 해요. 그런데 바벨론 나라가 망합니다. 메대 바사의 제국 새로운 나라가 건설이 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바벨론과 메대 바사는 전혀 다른 나라에요. 새로운 나라가 권력을 가졌습니다. 같은 왕족 속에서도 그 왕만 바뀌어도 숙청이 이루어지는데 신하로 일하던 다니엘을 새로운 나라에서 숙청당하지 않아요. 아니 오히려 높임을 받아서 총리가 됐단 말이에요. 여러분 그이유가 어디 있다고 생각하세요. 단하나에요. 깨어 있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다니엘이 어느 권력에 붙어 가지고 살았더라면, 어느 부자에게 붙어가지고 살았더라면 그는 당장 죽임을 당했을 거에요. 하나님께 소망을 가졌어요. 깨어 있었던 거에요. 요셉도 마찬가지 에요. 남의 집에 종으로 들어갔지만 늘 깨어 있었어요. 주인의 여자가 유혹을 하지만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득죄하리오. 과감하게 거절하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둡니다. 당신이 내게 백이 된다하더라도 내가 당신에게 하나님만이 내 백이란 말이에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깨어있으면, 하나님을 찾으면, 아니 세상과 손을 잡지 않으면 손해를 보게 되어있어요. 감옥에도 가고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깨어있는 성도는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믿어야 되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모자를 파는 회사가 우리나라에 있더라구요. 몇 년 전의 기록이지만은 연간1억 개의 모자를 만든다고 하네요. 세계의 35%의 점유율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까 대단한 거 아니에요? 야!!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도대체 백이 뭐가 있을까? 바로 이분을 찾아가서 물어봤어요. 백성학장로님 이라고 덕수교회 장로님이시더라구요. 백이 있는가 하고 보니까, 10살에 이북에서 피난 내려 와가지고 홀홀단신 무슨 백이 있어요. 가족도 없어요. 단지 하나 하나님께만 의지 했어요.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었어요.


하나님이 오늘날과 같은 복은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더 귀한 것이 있어요. 하나님이 주신 재물이 나로 하여금 영적으로 잠자게 할까 두려웠던 거에요. 그래서 오늘도 이 재물을 가지고 어디다 쓸까??우리교회 산 건너를 보면 숭의학교가 있어요. 미션스쿨이잖아요. 하나님 선교위해서 건립된 학교인데 경영이 잘못 되가지고 이단에 넘어가게 생겼어요. 그때 이 백장로님께서


\"그렇지 하나님 선교위해 세워진 학교인데 미션스쿨인데 내가 맡아야지\"


그래가지고 맡아가지고 잘 감당하시고 계시잖아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오늘도 발 벗고 나서고 있잖아요. 하나님이 이런 분을 그냥 내버려두시겠어요? 항상 깨어서 마귀에게 속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속에서 살려고 하는데 예수님의 말씀처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깨어있는 사람은 속지 않아서 기쁘구요,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어서 또한 기쁘다는 사실을 믿고 여러분에게 은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깨어있으면 하나님 은혜 안에서 사는 기쁨이 있습니다.


따라하실까요? \"깨어 있으면 하나님 은혜 안에서 사는 기쁨이 있다\" 깨어 있으면 하나님 은혜 안에서 사는 기쁨이 있습니다.


교회학교 어린이가 목사님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더래요.


\"목사님!!목사님!! 양파를 벗기면 뭐가 나오게요?\"


여러분 양파를 벗기면 뭐가 나옵니까? 목사님이 아무리 봐도 안나오거든요. 없거든요


\"아무것도 없다.\" 그랬더니 이아이가 하는 말이


\"목사님!! 양파를 벗기면 눈물이 나와요.\"


양파를 벗기면 눈물이 나온다네요. 그래서 목사님이 그랬데요.


\"그런 성경을 벗기면 뭐가 나오는지 아니?\"


\"글자가 나오죠!\"


\"아니야 성경을 벗기면 예수님이 나온단다\"


그래서 이글을 읽으면서 생각을 해봤어요.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나!! 목사인 나!! 모태신앙인 나!! 나를 벗기면 뭐가 나올까? 여러분을 벗기면 뭐가 나올 것 같으세요?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어요. 하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이 나타난다는 거에요. 우리는 다 죄인이에요.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는 이 마귀의 유혹에 그저 빠지기도 하고 나오기도 하고 깨기도 하고 잠자기도 하고 이렇게 반복을 하잖아요.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사는 줄로 믿습니다. 제가 죄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남을 용서할 수가 있어요. 겸손해져요. 내 눈의 들보를 보게 되니까 남의 눈의 티를 비판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어떻게 정죄를 합니까? 내가 더 큰 죄인인데 사도바울은 은혜의 깊숙이 들어가니까 깨닫게 되는 것이 \"난 죄인 중에 죄수다. 나보다 더한 죄인은 없다.\" 라고 고백을 하잖아요.


우리는 다 죄인이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구세주라는 겁니다. 주님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회의를 진행을 하시는데 잘 안되요. 그랬더니 한 분이 하는 말이


\"법대로 합시다.\"


숙연해지는 거에요. 목사님도 아무소리고 안하고 한참을 침묵하시더니 이렇게 말씀을 하셨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죄인이지만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우리 아닙니까? 세상은 법대로 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러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법대로 우리를 다루었다면 구원 받을 만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직도 우리는 지옥에 있을 겁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깨어 있으면 사신이 죄인됨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발견해서 감사할 줄로 믿습니다. 11절로 13절에 있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 그러나 네 아버지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내 종 다윗과 내가 택한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하셨더라. \" 아-멘



여러분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심판을 당대에 하지 않고 네 후손에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이에요. 하나님이 심판을 유보하시겠다는 거에요. 죽을 때까지 회개만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솔로몬의 아버지인 다윗도 죄인이었습니다. 간음죄도 범하고 살인죄도 지었습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의 책망에 죄인 됨을 고백하고 회개를 하고 밤새도록 침상이 젖도록 하나님!! 나를 용서하시고 하나님 나에게 새로운 기회를 달라고 안타깝게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이 그들 다시 일으키시잖아요. 우리가 깨어 있다는 말은 죄인됨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는 눈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세우신 것처럼 우리를 다시 세우시고 축복 하실 줄로 믿습니다. 깨어 있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실 줄을 믿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다 부족해요. 한국교회가, 한국교회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최근 지난주간에 한 일가운데 뭐냐면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회개운동입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충현교회를 담임하시던 김창일목사님, 그리고 강원영목사님,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 조용기목사님이 각자 자기의 잘못을 낫낫이 고하면서 회개를 했습니다. 여러분 회개하면 하나님께 소망을 두겠다는 거죠.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줄로 믿습니다. 교만을 회개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처럼



\"보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찌르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우리를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과 같이 어김이 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같이 우리에게 임하리라 \" 아-멘



깨어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찾는 기쁨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나이롱 집사님이 있었어요. 스스로 미안해서 붙인 이름이에요. 예배당도 주일에 겨우 오고, 오는 것도 꼭 5-10분 늦여요. 봉사도 잘 안하고 그래서 자기 스스로 나이롱집사라고 그랬답니다. 어느날 친구들하고 관광을 갔답니다. 이 이야기는 어느 목사님의 설교집에서 읽은 얘기입니다. 친구들이 점 보러 가자고 점 잘 보는 점쟁이가 있으니까 같이 가자고 해가지고 호기심이 생기니까 장난삼아 점을 보러 따라 갔다고 합니다. 점쟁이가 예수쟁이 때문에 점괴가 안 나온다고 호통을 치더랍니다.


\"예수쟁이 빨리 나가라구\"


그러더랍니다. 아무도 안 나가더랍니다. 옆에 있던 친구가


\"야! 나이롱집사!! 너 교회 나가잖아. 예수쟁이잖아. 예수님 믿잖아 빨리 나가\"


나이롱집사가 하는 말이


\"난 나이롱 집사인데 뭐. 믿음도 없어. 그냥 난 나이롱이야 \"


그러더랍니다. 그랬더니 점쟁이가 하는 말이


\"나이롱 집사인지 뭔지 모르겠는데 믿음이 없어도 예수쟁이는 예수쟁이다.\"


그러면서 호통을 쳤답니다.



우리는 다 부족해요. 허물이 많아요.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우리를 살리셨다는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깨어 있어 하나님을 찾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깨어있음은 마귀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깨어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사는 기쁨이 있습니다.



깨어있어 하나님을 찾게 하시고 속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이 한주간도 이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시옵소서.


                                  



제목 : 부귀를 누리는 것                                      


본문 : 왕상-10-16-22                                      


왕상10:16-22, 11:1-9



 오늘 아침 죄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16번째 설교를 합니다. 오늘 아침 설교의 제목은 “부귀를 누리는 것” 입니다. “부귀를 누리는 것”이 죄란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귀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부귀를 소유하고 누리는 것이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부귀를 소유하고 누리게 될 때 대부분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문제를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부귀라고 말할 때 사람에 따라서 그 기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금과 은과 상아와 잔나비와 공작 등을 소유한 솔로몬 왕을 가리켜 부귀를 소유했다고 말 할 수도 있지만, 큰 집과 부동산과 은행에 상당 액수의 돈을 소유하고 있는 우리 교회의 여러 성도들을 가리켜 부귀를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키스탄에서 사역하고 있는 어느 선교사 사모가 말한 대로 부귀는 상대적 개념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 있다가 타지키스탄에 가면 타직이 천국 같고, 타직에서 우즈벡으로 가면 우즈벡이 천국 같고, 우즈벡에서 한국으로 가면 한국이 천국 같아요.\" 한국에 살면서 먹을 것 입을 것 잠 잘 것 걱정하지 않고 이곳 저곳으로 여행까지 다니며 즐길 수 있는 한국 사람들을 가리켜 아프칸이나 캄보디아나 베트남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부귀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 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의 설교는 솔로몬이나 이건희씨나 정몽구씨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돈과 집과 재산을 소유하고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한다는 말입니다. 이 설교는 목사님들에게도 해당하고 장로님들에게도 해당하고 권사님들과 집사님들에게도 해당하고 모든 성도들에게도 해당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재물과 돈을 사랑하거나 소유하려고 하지 말라고 설교했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설교를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사도 요한도 여러 번 했습니다. 돈과 재물을 사랑하지 말뿐 아니라 소유하려는 것도 위태롭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이성봉 목사님은 이명직 목사님이 작사한 허사가를 즐겨 부르시곤 했습니다. 부귀를 좋아하고 소유하고 누리려는 우리들을 경고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제 허사가를 박치원 장로님이 한번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 이제 설교를 시작합니다.



 첫째 솔로몬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세상에서 가장 큰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열왕기상 10장에 기록된 솔로몬이 누린 부귀영화는 불의한 방법으로 획득한 부귀영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으로 주어진 부귀영화였습니다. 열왕기상 3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하나님은 솔로몬이 드린 일천 번제의 제사를 너무 기쁘게 받으시고 솔로몬이 부귀영화대신 지혜를 주시기를 간구한 기도를 너무 기쁘게 보시고 그만 솔로몬이 구하지도 않은 부귀영화를 그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옛날 이삭도 부귀를 구하지 않았지만 그의 몸의 제사와 순종과 헌신을 기쁘게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그를 백배나 축복해서 거부가 되게 하신 일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에 드는 자들, 그가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원하시는 너무나 마음이 좋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너무나 큰 부귀영화의 축복을 주신 것은, 죄송한 표현이지만, 하나님의 실수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세상에서 가장 큰 부귀영화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둘째 솔로몬은 부귀영화를 누리므로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부귀영화를 선하게 사용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부귀영화 때문에 죄를 짓게 됩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주신 많은 재물을 이웃을 위해 우물을 파는 선한 일에 썼습니다. 최창근 장로님이나 이의숙 권사님은 하나님이 주신 많은 재물을 하나님 나라와 교회와 선한 일을 위해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그렇게 선하게 사용하지 못합니다. 권력은 본질상 타락할 수 밖에 없고 재력도 본질상 타락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부귀영화의 축복 때문에 세 가지 죄를 지었습니다. 첫째 육체의 정욕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솔로몬이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왕은 후비가 칠백인이요 빈장이 삼백인이라.” 부귀영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육체의 정욕을 추구하게 만들고 육체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사랑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육체의 정욕을 너무 많이 사랑했고 이방의 여인들을 너무 많이 사랑했습니다.


 둘째 그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왕이 그 마음을 돌이켰더라.”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났으므로.” 성도들에게서 있어서 가장 큰 은혜와 행복은 그 마음을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것이고 그 마음이 하나님에게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시119:36). “내 영혼[마음]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시143:6). 솔로몬이 전에는 주님을 사모하고 그의 마음이 전적으로 주님에게로 향했지만 부귀를 누리게 될 때 어느덧 그 마음이 하나님에게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밭을 사고 소를 사고 집을 살 때 사람들의 마음이 교회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큰 비극입니다.


 셋째 솔로몬은 우상을 좇게 되었고 악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그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돌이킨 다음 그 마음을 우상에게로 향하게 했습니다.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니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온전히 좇음 같이 좇지 아니하고.” 솔로몬은 그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돌이킨 다음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상과 자기를 좇는 악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을 갖다 놓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 자신을 갖다 놓았습니다. 사람이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때 자만해지고 건방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세상과 우상과 자기 자신을 따르고 높이게 됩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목회자로 성공하게 될 때 그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돌이켜 권력자들과 재력자들에게로 향하게 합니다. 권력자들을 의지하고 재력자들을 의지하게 되고 부귀를 누리는 자기 자신을 의지하게 됩니다. 결국 솔로몬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진노하시니라.”



 셋째 솔로몬은 부귀영화의 헛됨을 고백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후 부귀영화의 헛됨은 고백하고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솔로몬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후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되었고 부귀영화의 헛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깨달음이 전도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결국 솔로몬은 허사가를 지어서 불렀습니다.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것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1:14). 전도서 2장에서 솔로몬은 자기가 이룬 부귀가 모두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부귀영화의 헛됨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인생을 바로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허사가를 지어서 불렀습니다. 돈에 얽매어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솔로몬의 허사가를 잘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내 마음에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전2:1-11).


 이제 말씀을 맺으며 다시 한번 정돈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들을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 때 우리들에게 부귀의 축복을 주십니다. 공부를 잘 하게도 하시고 사업을 잘하게도 하십니다. 재물을 넉넉하게 부어 주시기도 하십니다. 물론 모든 부귀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부귀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 성도들은 부귀를 탐하거나 부귀를 쌓아두거나 부귀를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서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눅12장과 16장에 나오는 부자의 경우 부귀는 자신을 망하게 하는 위태로운 것이 됩니다. 반대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신 부귀를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행복을 위해 흩어 써야 할 것입니다. 이삭과 도르가와 고넬료와 루디아의 경우 부귀는 자신들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는 귀한 것들이 되었습니다. “네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는 천사의 말을 들었을 때 고넬료는 너무 황송하고 기뻤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성도들은 사회의 빈부의 격차를 줄이고 평준화하는 복지사회를 이루는 일에도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신앙공동체가 그런 삶을 지향했고 중세의 수도원공동체가 그런 삶을 지향했습니다.


 셋째 우리도 솔로몬처럼 이성봉 목사님처럼 성 프랜시스처럼 부귀의 헛됨을 고백하는 허사가를 부르며 가볍고 여유있고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알라고 권면했습니다. 자기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배고픔과 궁핍에 처할 줄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브라질 사람들은 그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부자나라 미국을 우습게 여기면서 풍부한 자연의 혜택을 누리면서 여유롭게 자유롭게 멋지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뉴질랜드 사람들도 카나다 사람들도 그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한국 사람들처럼 돈을 좋아하고 돈을 사람하면서 돈에 얽매어 각박하고 여유가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부귀를 우습게 여기는 허사가를 한번 불러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죄입니까? 부귀를 좋아하고 부귀를 탐하고 부귀를 누리며 사는 것이 죄입니다. 우주에서 가장 부요하신 자로서 우주에서 가장 가난한 자가 뒤신 우리 주님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반드시 잘못된 삶은 아닐 것입니다. 부귀영화보다 주님을 사모하고 사랑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찬송을 김혜은 양이 불러 주시기 바랍니다. 




                                


제목 : 사람을 키우는 교회                                      


본문 : 시-87-01-7                                      


지 지난 주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하는 교회’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고 베트남을 다녀 온 후 큰 아들로부터 메일 하나를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께’라는 제목의 편지는 제가 한 설교에 대한 아들의 극찬이 담겨 있는 편지였습니다. 그 편지를 보낸 사람이 제 아이가 아니라면 시험에 들 만한 수준의 칭찬이었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듯이 아들로부터 그런 칭찬을 받으니 참 기뻤습니다.



그 편지의 지나친 부분을 생략하고 한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생략) 지난 주 설교는 제가 들어 온 아버지 설교 중 최고의 설교로 기억될 듯 싶습니다. (중략) 저는 아버지가 이러한 설교를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중략) 제가 평생의 사명으로 생각하는 빈곤퇴치와 통일한국 건설은 아버지의 삶과 설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산물입니다. 아버지의 설교를 가장 뛰어나게, 가장 완벽하게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이 저와 지열이, 정열이를 포함한 저희 가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믿음의 명가를 세우는 것이 제 꿈 중에 하나입니다. (생략)>



제가 아이의 편지를 받고 가장 좋아하고 감사했던 표현은 ‘제가 평생의 사명으로 생각하는 빈곤퇴치와 통일한국 건설은’이라는 대목입니다. 저는 제 아이의 나이 때 ‘평생의 사명’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확고한 무엇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평생의 사명’이 제 아이에게 있다는 것이 저는 너무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우리 한국 교회를 유행처럼 휩쓸고 있는 운동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릭 워렌 목사님이 쓰신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을 교제로 한 ‘목적이 이끄는 삶 운동’이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그 책을 교재로 40일 동안 특별새벽기도회를 하였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말은 우리의 삶과 신앙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장 짧은 말로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의 삶은 목적에 이끌릴 때 가장 아름답고 훌륭해 집니다. 우리의 삶은 개인적인 야망과 욕심에 이끌리게 될 때 추하고 보잘것없어 집니다.



목적은 존재목적을 의미합니다. 존재의 목적대로 존재할 때 모든 존재는 존재가치를 갖게 됩니다. 존재의 목적을 상실하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그냥 ‘고장 났다’라고 말합니다, 그 존재는 당장 존재가치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가치를 존재에서 찾지 않고 소유에서 찾습니다. 소유가치가 높은 사람은 부자라고 부르는 것이 옳지만 사람들은 그냥 저들을 ‘잘사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 말은 틀린 말입니다. 잘 사는 사람이란 소유가치가 높은 사람이 아니라 존재가치가 높은 사람입니다.



존재목적은 존재로부터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의 존재목적은 존재로부터 말미암지 않고 존재케 하신 분으로부터 말미암습니다. 시계의 목적은 시계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대상의 목적은 강대상 스스로가 결정할 수 없습니다. 시계와 강대상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목적은 하나도 예외 없이 다 그것을 존재케 한 사람이 결정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존재목적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존재케 하신 하나님이 정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수준이 낮으면 낮을수록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끌리려 하지 않고 욕심에 따라 하나님을 끌려고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끌어도 끌려오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하는 것을 들어 주시고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나 신앙의 최고 수준은 하나님께 이끌리는 것입니다. 때때로 보면 예수를 열심히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알라딘 램프의 무슨 소원이든 다 들어주는 울퉁불퉁한 아라비아의 하인 같아 보입니다.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목적이 이끄는 삶’을 어떤 교회는 유행처럼, 어떤 교회는 전쟁하듯 하였습니다. 교인은 제가 개인적으로 잘 모르겠으나 교회는 그것을 하기 전과 한 후가 크게 달라진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을 한 후에도 교회는 여전히 교회가 교회를 이끌고 있는 것 같아 보이고, 교인들은 여전히 교인 자신이 자신을 이끌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제 아들은 제게 ‘평생의 사명’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제 아이를 이끌고 있는 것은 사명입니다. 그것을 소명이라고 합니다. 소명을 우리는 흔히 Calling이라고 부릅니다. 부르심과 그 부르심에 끌려 사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교회에도 소명이 있습니다. 교회의 소명은 교회 자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를 위하여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소명을 위하여 존재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교회가 추구하고 있는 한국은행과 같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소명은 말씀을 통하여 받는 것입니다. 교회의 소명도 말씀을 통하여 받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교회와 교인들을 날마다 부르고 계십니다. 요즘 우리 교회 강단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 교회와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 부르심을 우리는 calling 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그것을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 부르심으로 평생의 사명을 삼고 살아가는 교회와 교인들이 되시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우리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레위기 25:8-12 말씀과 에스겔 37:5 말씀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인 시편 87편의 말씀입니다. 레위기 25장의 말씀은 희년에 대한 말씀으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과 자유를 선포하라는 말씀이고, 에스겔 37장의 말씀은 통일에 대한 말씀으로 네 손 즉 우리 손에서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고,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 교회에서 ‘이 사람, 저 사람’ 즉 나라와 민족을 이끌어 갈만한 인재들이 나와야 한다는 말씀으로 인재를 양성하는 교회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그 말씀들이 이 시대에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제 아이는 평생의 사명이라고 하는 빈민퇴치와 통일한국 건설을 이루기 위하여 유학을 준비하고 있고, 좋은 곳으로 유학을 가서 실력 있는 교수님에게서 수학을 하려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아이에게 토플과 GRE는 과정일 뿐 목적이 아닙니다. 유학과 학위를 받는 것 역시 과정일 뿐 목적이 아닙니다. 목적은 단 하나 사명입니다. 우리 아이에게 그것은 빈민퇴치와 통일한국 건설입니다.



사명을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듯, 우리도 사명을 위하여 열심히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은혜 충만한 예배를 드리고, 단합된 힘을 키우기 위하여 순모임과 사역모임을 통하여 성도의 교제도 잘 하여야만 합니다. 물론 그 하나, 하나도 다 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들을 수단으로 삼아 하나님이 우리 교회와 자신에게 주시는 평생의 소명이라고 하는 보다 더 큰 목적을 이루어 내는 것이 건강한 교회와 건강한 교인들이 하여야 할 일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제가 영락교회 교육담당 목사로 있었을 때, 영락교회는 50주년 기념사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50주년 기념사업으로 무엇을 할까를 고민할 때 100억 정도의 예산으로 교육관을 건축하는 안들이 아주 설득력 있게 논의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목사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때 담임목사님이 마침 안식년이셨기 때문에 제가 주로 주일예배 설교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한 날 오늘 본문의 말씀인 시편 87편의 말씀을 가지고 ‘인재를 양성하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만일 나에게 100억원을 준다면 그 돈으로 교육관을 짓지 않고 사람을 키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100억원이면 대략 일년에 10억 원 정도의 이자를 받을 수 있는 때였습니다.



그 10억 원 중 5억 원은 예수 잘 믿고 공부 잘 하는 대학생과 대학원생에게 일년에 200만원씩 주는 장학금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대학의 한 학기 등록금이 100만 원이 되지 않는 때였기 때문에 200만 원 장학금은 아주 좋은 장학금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5억 원은 예수 잘 믿고 공부 잘 하는 유학생들을 뽑아 일년에 천만 원씩 장학금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제 생각에는 100억 원으로 교육관을 짓는 것 보다 100억 원으로 사람을 키우는 것이 훨씬 효율이 높을 것 같았습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65년도에 처음으로 집을 샀습니다. 이사 간 첫날 저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었습니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65년도 우리 집에서 처음으로 집을 산 날은 제 평생에 잊을 수 없는 날 중에 하나입니다. 그 집은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와 비교하면 정말 집도 아니었지만 저는 그 집을 사서 이사했던 날을 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집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서 집보다 더 좋은 것이 내게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무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 집을 팔아먹을 만한 일을 달라고 늘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그래도 예수를 믿고 사는 사람인데 제일 좋은 것이 집이 아니라 일이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영락교회에서 100억 원을 들여 교육관을 지어 준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 마음이었습니다. 교육관을 건축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50주년을 기념하며 할 일이 겨우 집을 짓는 일이라는 것이 저는 마음에 차지 않았습니다. 100억 짜리 집을 팔아먹을 만한 일이 교회에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안교회에서 건축을 하였습니다. 그것도 100억 원이었습니다. 나중에 아시게 되겠습니다만 저에게 100억 원이라고 하는 단위는 매우 의미 있는 단위입니다. 98년 7월 예배당 건축을 마치고 입당하던 날 정말 기뻤습니다. 65년도에 처음 집을 사서 이사 한 것처럼 기뻤습니다.



물론 교회를 팔아먹을 수는 없지만 그때도 저는 이 예배당 팔아먹을 만한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저에게 100억 원은 당시 교회로서 할 수 있는 최선처럼 보였습니다. 100억 원은 예배당을 건축한다고 할 때에만 헌금이 가능한 액수였습니다. 그러한 헌금을 예배당 건축이 아닌 보다 뜻있는 하나님의 일에 드릴 수 있는 그런 교회를 목회하고 싶었습니다.



2년 전 청어람을 구입하였을 때 저는 전에 외교통상부 장관을 하셨던 윤영관 교수님을 찾아가서 만났습니다. 윤영관 교수를 일본 코스타 집회에서 만났는데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저런 분이 크리스천이라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다짜고짜로 청어람에서 강좌를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제2의 윤영관, 제 3의 윤영관을 키워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최근 청어람 아카데미에서 나온 뉴스레터에 보면 윤영관 교수께서 우리 청어람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하고 계시는 사진이 나와 있는데 그것이 그와 같은 의도 때문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청어람에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예술과 같은 사회 각 방면의 실력 있는 사람들이 와서 강의하게 되기를 꿈꿉니다. 그와 같은 강의 때문에 꿈이 있고 실력이 있는 젊은이들이 모여와 그 강의를 듣고 자신의 꿈을 키워가게 되기를 꿈꿉니다. 그런 꿈을 가지고 청어람 아카데미를 만들었습니다.



청어람 아카데미를 세우면서 양희송 실장을 스카우트 하였습니다. 양 실장에게 청어람 아카데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그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아마 양 실장은 그 말을 기억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일 잘하면 집을 팔아서라도 뒤 대 줄게” 저는 지금도 이 일이 집을 팔아서라도 뒤를 댈만한 가치가 있는 몇 안 되는 일 중에 하나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지난 일년 동안 청어람 아카데미를 지켜보니 정말 집을 팔아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지만 시작이 괜찮습니다. 싹수가 보입니다.



청어람을 처음 구입하였을 때 제가 윤 교수님 같은 분을 찾아가 부탁을 드렸었습니다. 2년이 채 안 된 지금 윤 교수님과 같은 분들이 저희 교회를 찾아와 함께 일을 하자고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제가 찾아가서 무릎이라고 꿇고 함께 일하자고 할만한 분들이 먼저 제게 전화하여 함께 일하자고 합니다. 바로 내일 점심을 그 분들과 함께 하려고 합니다. 저는 그 일이 얼마나 흥분이 되는지 모릅니다.



저와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내세우지 않고 충심으로 저들을 섬기며 저들과 함께 하나님이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시는 소명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연구소도 만들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실력 있는 인재들을 키워내는 대학원도 세우고 싶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교회 중에 하나인 윌로우크릭 교회가 운영하는 리더쉽 포럼과 아카데미는 교계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의 엘리트들에게도 인정을 받는 코스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우리 한국 교회에도 그와 같은 수준의 리더쉽 아카데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와 같은 일이 이루어지는데 우리 교회가 쓰임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시편 87편을 좋아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중에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나니’라는 말씀이 제일 좋습니다. 저는 이 사람, 저 사람이 나는 거기가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였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온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교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온 출신의 사람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과 복이 온 땅으로 퍼져 나가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뜻이 바로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나니’라는 짧은 말씀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오늘 본문의 시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 교회 즉 시온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사람을 키우는 요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세상을 축복할만한 인재를 키우는 요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 교회가 건축해야만할 보이지 않는 성전 중에 하나라고 확신합니다.



우리 모두가 높은 뜻 숭의교회 안에서 그런 사람으로 훈련을 받아야 하고, 또 우리들이 있는 힘을 다하여 우리 보다 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키워내야만 합니다. 저는 그 일이 65년에 산 집을 팔아먹을 만한 일 중에 하나라고 확신하고, 내 교회는 아니지만 98년도 지은 교회를 팔아먹어도 좋을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예배당 지을만한 돈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을만한 일이라고 확신합니다. 시대마다 하나님이 쓰시려고 부르시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특별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욕심을 이루시려고 이곳에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세우셨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교회들은 다 복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복을 받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교인들이 복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쓰시려고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 감당할 수 없는 복을 지금 쏟고 계십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복을 여러분들이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함으로 쌓을 곳이 없도록 쏟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복의 증인들이 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힘들고 부담이 되겠지만 함께 이 귀한 성전을 건축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제목 : 흥왕하는 길                                      


본문 : 왕상-11-09-13                                      


   이스라엘의 세 번째 왕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이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7년 동안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난 솔로몬은 이어서 13년 동안 자신의 왕궁을 지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전 역사에서 그 누구도 그에게 비교될 수 없게 큰 일들을 행했습니다. 솔로몬은 그가 원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대로(왕상3:5-12) 하나님으로부터 크나큰 지혜를 받았습니다. 솔로몬의 뛰어난 지혜는 온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과연 솔로몬의 지혜가 그렇게 대단한지를 확인하려고 스바의 여왕이 수많은 신하를 거느리고 찾아온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스바는 아라비아 반도 서남쪽 지역으로서 오늘날의 예멘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당시 스바는 인도와 북아프리카 사이에 위치한 교역의 중심지로서 해상교역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왕상10:1-10에 보면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그를 시험했으며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했지만 솔로몬은 그가 묻는 말에 다 대답했고 알지 못하여 대답하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에게 말하기를 “내가 내 나라에서 당신의 행위와 당신의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이 사실이로다.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친히 본즉 내게 말한 것은 절반도 못되니 당신의 지혜와 복이 내가 들은 소문보다 더하도다.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하들이여, 항상 당신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 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는 금 일백이십 달란트와 심히 많은 향품과 보석을 예물로 솔로몬에게 드렸는데 그렇게 많은 향품이 다시 온 적이 없다고 합니다.



   솔로몬이 다른 어떤 것을 구하지 않고 백성을 잘 다스리기 위한 지혜를 구한 것을 흡족하게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가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광도 주셔서 그의 평생에 왕들 중에 그와 같은 자가 없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왕상3:13).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도 지키셔서 솔로몬으로 하여금 당대 최고의 부자가 되게도 하셨습니다. 예물을 가지고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온 사람은 스바의 여왕만이 아니었습니다. 열왕기상 10장에 보면 “솔로몬의 세입금의 무게가 금 육백육십육 달란트요 그 외에 또 상인들과 무역하는 객상과 아라비아의 모든 왕들과 나라의 고관들에게서도 가져왔다”(14-15절) 하고,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세상의 그 어느 왕보다 큰지라.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의 얼굴을 보기 원하여 그들이 각기 예물을 가지고 왔으니 곧 은 그릇과 금 그릇과 의복과 갑옷과 향품과 말과 노새라. 해마다 그리하였더라”(23-25절) 합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말 하나로 온 세상의 군왕과 고관대작들과 무역상들이 앞을 다투어 찾아오게 했으며 나라가 경제적으로 부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왕상10:21에 보면 “솔로몬 왕이 마시는 그릇은 다 금이요 레바논 나무 궁의 그릇들도 다 정금이라. 은 기물이 없으니 솔로몬의 시대에 은을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다”(21절) 합니다. 이 사실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말을 지혜롭게 할 줄 안다는 것이 그 나라가 흥왕하게 되는 데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거꾸로 지혜롭지 않은 말을 쉬지 않고 쏟아내는 사람을 지도자로 세운다는 것은 얼마나 나라를 고립시키고 경제를 피폐하게 하며 국민을 허탈하게 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일일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아무튼 솔로몬은 하나님으로부터 참으로 큰 은혜를 받아 누렸습니다. 특히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두 번씩이나 친히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특별한 영광을 누렸습니다. 왕상9:1-3에 보면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가 이루기를 원하던 모든 것을 마친 때에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 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 했습니다. 다른 왕들은 늘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받았던 사실을 고려할 때 솔로몬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각별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첫 절은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변심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마음을 돌렸으며 어떻게 하나님 여호와를 떠났는지를 뒤따르는 구절이 보충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그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령하사 다른 신을 따르지 말라 하셨으나 그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떠나게 된 자초지종은 오늘 본문의 바로 앞 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백성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들과 서로 통혼하지 말며 그들도 너희와 서로 통혼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름이라.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름 같이 따르지 아니하고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그가 또 그의 이방 여인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그들이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



   솔로몬의 변심의 원인과 내용은 이방여인과의 혼인과 우상숭배의 허용으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일국의 왕에게 있어서는 외국의 왕족의 여인과 혼인하는 것은 외교적인 조치 가운데 하나로서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왕의 위신을 드높이고 외국과의 평화친선동맹관계를 공고히 하여 전쟁을 예방하며 국가와 민생의 안정을 유지하는 일은 일반적으로 전혀 비난받을 일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한창 흥왕하고 있는 나라의 왕인 솔로몬이 많은 이방여인과 혼인한 사실은 이해하려면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라 생각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냥 한 나라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솔로몬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두 가지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것을 삼가 지키라. 보라, 내가 네 앞에서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리니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것이 너희에게 올무가 될까 하노라. 너희는 도리어 그들의 제단들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을지어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너는 삼가 그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하게 섬기며 그들의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제물을 먹을까 함이며 또 네가 그들의 딸들을 네 아들들의 아내로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며 네 아들에게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 너는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지니라”(출34:11-17). 하나님께서는 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 모세를 통하여 다시 명령하시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신7:1-5)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주변 족속들처럼 왕을 갖게 될 경우를 특별히 언급하시며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신17:17) 명하신 바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런 엄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그가 사랑한 모든 이방여인들에게 우상숭배를 허용했으며 그 우상들을 위한 산당을 지어줌으로써 그들이 그들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가 성전을 정성껏 지어 하나님께 드린 일이 헛된 일이 되고만 것입니다.



   솔로몬이 이방여인들과 혼인한 일에 있어서 다른 하나의 문제점은 나라를 안전하게 지키고 흥왕하게 만드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세상적인 정략혼사라는 외교술에 의지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은 그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백성이고, 그 백성이 지킬 책임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 어떤 위험에서도 지켜주시고 그 어떤 싸움에서도 이기게 하시는 백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지 않고 스스로 정략혼사라는 방법을 통해 나라의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꾀하려 했다면 그 자체가 이미 그 자신 우상숭배에 해당하는 죄를 범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하나님을 떠난 사실에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셨습니다(본문 9절). 그리고 솔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본문 11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솔로몬의 죄의 값으로 징벌을 내리시면서도 다윗을 생각해서 두 가지 배려를 하셨습니다. 본문 12-13절을 봅니다: “그러나 네 아버지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내 종 다윗과 내가 택한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이것은 이스라엘 나라의 분열을 말하는 것입니다.



   비록 다윗과 솔로몬의 흥왕하며 영화로웠던 이스라엘 왕국이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나뉜 것은 솔로몬이 죽고 난 다음이었지만 이미 솔로몬이 아직 살아있을 때 평안은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닷이라 하는 에돔 사람을 일으키셔서 애굽을 등에 업고 솔로몬을 대적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또 다메섹에서 수리아의 왕이 된 르손이란 자를 일으키셔서 솔로몬을 대적하게 하셨습니다. 르손에 의해 재건된 아람 왕국 즉 수리아는 이스라엘과 바로 이웃한 나라들 가운데 가장 강한 나라가 되어 이스라엘을 괴롭혔음을 그 후의 역사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상11:25에 보면 “솔로몬의 일평생에 하닷이 끼친 환난 외에 르손이 수리아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미워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에게 닥친 가장 큰 불행은 두 나라로의 분열이었습니다. 하닷과 르손은 이방사람이었지만 여로보암은 에브라임 지파의 사람이고 솔로몬의 신하의 아들로서 손을 들어 자기의 왕을 대적한 것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은 아히야라는 선지자를 만나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열 지파의 왕이 되리라는 예언을 들었지만(왕상11:26-39) 솔로몬이 죽이려 했기 때문에 애굽으로 도망하여 있다가(왕상11:40) 그가 죽은 후 돌아와 북왕국 이스라엘의 첫 왕이 됩니다. 그의 에브라임 지파는 북쪽 지파 중 가장 강력했고 그래서 어떤 선지자들은 에브라임을 북쪽 왕국 전체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한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 열 지파로 북왕국 이스라엘을 이루게 하셨고, 다윗과 솔로몬의 유다 지파에게는 유다 지파와 경계선을 같이하는 제일 작은 지파 베냐민 지파를 붙이셔서 남왕국 유다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종종 유다와 베냐민은 한 지파처럼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두 왕국으로 분열된 이스라엘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먼저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남왕국 유다는 그 뒤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는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솔로몬의 후반기 역사이야기는 우리에게 한 개인뿐 아니라 한 나라가 흥왕하게 되는 길과 쇠퇴하게 되는 길이 무엇임을 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솔로몬 때 이스라엘이 흥왕하고 부강해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 은혜를 잊지 않고 마음이 하나님과 함께하며 그의 명령을 잘 지켜 행했다면 그의 영광스런 왕좌는 영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돌려 하나님을 떠나고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했던 것입니다. 40년간 왕좌에 있었던 솔로몬은 전반기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나라가 흥왕하게 하는 자리에 서 있었으나 후반기에는 나라를 쇠퇴하게 하는 불순종의 자리에 서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흥왕하게 하는 길과 쇠퇴하게 하고 망하게 하는 길도 꼭 같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에게서 떠나지 않고,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만 하면 우리나라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 흥왕하며 부강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쇠하고 망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이 다 같이 흥왕하게 하는 길에 바로 서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여전도회주일에 드리는 말씀



   오늘은 우리 총회가 정하여 전국적으로 일제히 여전도회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여성 신자의 수가 남성 신자의 수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마다 여성 신자의 지위와 역할은 그 수적 우위에 상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성특유의 섬세함과 겸손함과 희생정신과 모성애 또한 목회발전과 교회성장에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당회에서의 여성 장로의 수가 그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폭넓고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쌓을 기회나 지도적 책임을 맡을 기회가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한국사회에서의 대부분의 남성들뿐 아니라 상당수의 여성들 자신에게서조차 아직 사라지지 않은 인습적 남존여비사상이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교회 안에서 여성에게 자기계발과 지도력개발의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 필요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장이 바로 여전도회입니다.



   여전도회는 남성들과 함께 어울려서는 자칫 여성의 역량이 발휘되기 힘든 한국교회의 풍토 속에서 스스로 단체를 조직하고 기구를 운영하며 자치적으로 사업과 봉사의 계획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훈련을 쌓음으로써 여성의 활동능력을 발휘하며 지도력을 축적할 수 있는 장입니다. 또한 여성봉사인력을 동원하고 여성의 힘을 결집하며 조직화하고 봉사의 훈련을 제도화하여 여성의 활동영역과 지도력발휘의 분야를 확보하고 확장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것이 여전도회입니다. 그리고 여성특유의 능력발휘를 극대화하여 목회에 힘을 보태고 교회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만드는 매개체가 여전도회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일찍이 눈을 뜬 여성들은 여전도회에서의 훈련과 봉사를 통해 교회의 공적 임무뿐 아니라 교회의 공식적 역량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들까지도 조용히 메우는 일들을 잘 수행하며 그 위치를 굳혀왔습니다. 본 교단 여전도회전국연합회는 총회와 교단의 발전을 위해 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감당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각 노회와 개 교회 차원에서도 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로서의 역할을 할 여전도회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일찍이 우리 총회는 1월 셋째 주일을 여전도회주일로 정하여 여전도회를 알리고 여성들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를 권장하며 교회의 봉사활동과 성장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했습니다. 우리 교회도 여전도회가 더욱 활성화되어 교회성장의 동력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일에 여성들 자신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랍니다. 여성들이 여성들을 힘껏 밀어주셔서 당회에도 더 많이 진출하시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제목 : 산을 옮기는 믿음                                      


본문 : 마-17-14-20                                      


14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15 `주여 !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19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


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믿음도 마찬 가지입니다.


뭐 천지를 진동할 것 같은 믿음이더니


실제 상황에서는 나무 가지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맥없는 믿음이더라구요.


말하자면 ‘울리는 괭가리‘입니다.


요란만하지 실제 상황에서는 무기력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 했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태산을 들어 황해 바다에, 빠트릴 수도 있다고요. 이것이 믿음의 원칙이요, 믿음의 위력인 것입니다.


기적의 조건은 믿음


먼저 수로보니게 여인을 한 번 보세요.(마15:28)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고백 후에 예수님은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했습니다.


흉악한 귀신들린 딸을 고침 받았습니다.


다음은 열두 해 혈루병 여인에게도, 그러했습니다.(마9:22)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을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함이라‘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열두 해를 알던 혈루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백부장의 하인을 고칠 때는, 그의 믿음을 극찬하셨습니다.


백부장은 하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를 찾았는데, 멀리서 명령만 하여도


나을 것이라고 하면서, 강한 믿음을 보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하면서, 너무 기뻐하셨습니다.


물론 하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심지어 두 소경에게는, 믿음대로 되라고 까지 했습니다.(마9:29)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 믿느냐” 예수님이 소경에게 물었습니다.


소경은 확고한 음성으로 ‘그렇습니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너희 믿음대로 대라”고 하시면서, 두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모두 믿음입니다. 주제는 기적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태풍의 눈, 세포의 핵 믿음은 태풍의 눈입니다.


태풍은 그 눈만 소멸되지 않고 있으면,


반경 수백 킬로미터를, 엄청난 세력의 영향권 안에,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위력의 태풍도, 눈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비만 내리는 저기압이 되고 맙니다.


마찬 가지입니다.


몇 킬로도 안 되는 태풍의 눈이, 수백 킬로의 엄청난 영향권을, 좌우하는 핵이 되는 것처럼,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겨자씨만큼 작은 믿음이지만, 이 믿음의 핵만 있으면, 태풍처럼 엄청난 세력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 존재 중심에는, 항상 믿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제자들의 삶을 보면서, 이 사실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패역한 시대에 속해 있던 제자들은, 무기력하고 배반하고,


이기심에 들떠있고 대접받으려 하고 그리고 주님을 부인하는, 오합지졸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확고한 부활 믿음의 제자들은,


어디를 가도 회개의 파워를 일으킵니다.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담대해 집니다.


앉은뱅이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옥문을 터지게 합니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모든 능력의 파장 중심에는, 부활 신앙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핵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는, 산 같은 믿음이 있는가? 아니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는가?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은 매일 태산을 옮기는, 믿음의 능력을 누리면서, 살 때입니다. 매일의 기적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는 태산이 안 움직인다고, 불평만 하고 삽니다.그러나 이제 부터는, 먼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일으킬 것입니다. 문제 해결의 열쇠는,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챤믿음을 얼마나 사용하느냐,믿음을 얼마나 끝까지 밀고 나가느냐의 차이입니다. 어려운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더욱 믿음의 능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산 같은 믿음 산을 옮길 만한 믿음, 변화된 제자들이 사용한 믿음, 그 믿음의 능력으로 살아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문)


주여, 매일의 기적이 필요한 때입니다.


주여, 이제 부터는, 먼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일으키게 하옵소서.


산 같은 믿음, 산을 옮길 만한 믿음, 변화된 제자들이 사용한 믿음,


그 믿음의 능력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제목 :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                                      


본문 : 왕상-11-02-13                                      


<솔로몬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여호와께서 일찌기 이 여러 국민에게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와 서로 통하지 말며 저희도 너희와 서로 통하게 말라 저희가 정녕코 너희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의 신들을 좇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저희를 연애하였더라


왕은 후비가 칠백인이요 빈장이 삼백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음 같이 좇지 아니하고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저가 또 이족 후비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저희가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저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찌기 두번이나 저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하사 다른 신을 좇지 말라 하셨으나 저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나의 언약과 내가 네게 명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에게 주리라


그러나 네 아비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치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나의 종 다윗과 나의 뺀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하셨더라>



사람에게서 선택의 고민 중에 두 가지 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젊어서 고생고생 하다가 나중에 잘 되는 경우가 있고,


다른 하나는, 젊어서는 호의호식하며 잘 지내다가 늙어서 고생 고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경우를 택하겠는가? 하면 대부분 전자를 택한다고 합니다.


즉 젊어서 고생을 했지만, 나중에 잘 되는 경우라면 그것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습니다.


젊어서도 고생이 늙어서까지 계속되는 일입니다.


반대로 젊어서도 잘되고 나중에도 잘 되어 일평생 잘 지내는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느 것을 택하겠습니까?


물론 젊어서도 잘 되고, 늙어서도 잘 되는 것을 택하겠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젊어서도 잘 되고, 나중에도 잘 되는


길이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입니다.



1.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은 일을 하는데서 멀어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삶을 분석해 보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 있고(무신앙),


다음은 하나님을 등한히 여기며 사는 삶이 있고(불신앙),


셋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신앙)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는 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즉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다가 점점 죄에 대한 가책이 둔감해지면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 좋은 예가 솔로몬 왕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처음에 왕위에 오를 때, 하나님의 눈에 들었습니다.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려 그를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전무후무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는 은과 금을 돌처럼 흔하게 썼고, 화려한 궁궐에 후비가 700명이요, 빈장이 300명인 아름다운 여인들과 사랑을 나누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쯤 되면 역사상 솔로몬처럼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죄를 짓기 전 단계에는 그것이 죄이냐? 아니냐? 보다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냐? 아니냐? 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가끔 죄는 멀리하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에는 인색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바리새인들의 행위였습니다.


저들은 항상 이것도 죄, 저것도 죄, 하면서 죄만 지적했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는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으로 행하는 일입니다.


히브리서 11:6 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일이라야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세상적인 지식이나, 자신의 이성적 생각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교회 봉사하는 일에서도 그렇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어떻게 교회를 봉사했습니까?


이성적인 자기 생각이 아니었습니까?


만일 요즘 같았으면 어떻게 사도들에게 논과 밭을 팔아 몽땅 가져왔겠습니까?


그러나 저들은 믿음으로 행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렇게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교회는 부흥하고 유지됩니다.


순수한 믿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저런 믿음이 생겼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평생 믿음으로 행하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관례적으로, 자신의 생각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적과 같은 역사는 없습니다.


다음으로 왜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까?



2. 하나님이 금한 것을 하는 일을 하는데서 멀어집니다. 


솔로몬에게 하나님이 금한 것은 이방 사람들과 혼인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했지만, 나중에는 그가 금한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많이 맞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다른 나라의 공주들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애굽왕 바로의 딸과 결혼하였고,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 헷 여인들을 사랑하고 결혼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방여인들과 결혼하지 말라고 하였느냐? 하면, 그들이 이방의 신을 섬기게 할 것이기 때문이라


고 하였습니다.


그 말대로 솔로몬은 여인들의 말대로 이방의 신인 ① 시돈의 여신 <아스다롯>과 ② 암몬의 신<밀곰>과<몰록>과, ③ 모압의 신<그모스>를 섬기고 그들의 신당을 예루살렘에 지어 이방 신들에게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하나님과 멀어진 일이었습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일은 우상을 섬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첫째 계명에 명령하였습니다.


이것은 자기에게서 마음을 돌이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까지 보내어 대신 죽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였는데,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뺏기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구약의 하나님은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질투란 그만큼 사랑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애증의 관계에서 질투는 아직도 상대를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우상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 보다 우리의 소유물 일수도 있습니다.


재물 일수도 있고, 명예 일수도 있고, 권력 일수도 있고, 자식 일수도 있습니다.


많은 오늘의 신학자들이 21세기 세계교회가 당면한 최대의 우상은 바로 맘몬의 우상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나라들이 경제, 경제, 하면서 경제 제일주의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돈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 실감하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돈 없으면 모든 의욕이 사라집니다.


돈만 있으면 못난 사람도 잘나게 보입니다.


돈은 하나님 보다 현실적으로 더 큰 힘으로 군림합니다.


요즘 정치계에서 보십시오.


모두 돈의 위력 앞에 고개들을 숙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노동자들도 같은 힘없는 노동자들을 위한다는 대표자들도 돈 앞에 고개를 숙이고 말았습니다.



어느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로또에 대하여 왜들 그것을 부정적으로만 보느냐?


가장 밑바닥 서민에게 일주일동안 희망 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보다 더 크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멀어질 수 있는 것은 우상숭배에 있습니다.


그리고 왜 하나님과 멀어지느냐? 하면,



3. 하나님이 경고할 때 듣지 아니하는데서 멀어집니다.


솔로몬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자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나타나서 두 번이나 경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반복된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아니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나와 맺은 언약을 어기고 내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므로 내가 반드시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겠다. 그러나 너의 아버지 다윗은 끝까지 나를 순종하였음으로 네 아버지를 생각해서 네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와 같은 일을 하지 않고 네 아들에게서 이를 이루리라”고 하였습니다.



처음 잘 믿던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을 보면 처음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경고할 때 돌이켜 회개하면 하나님은 그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회개하는 마음이 제일 중요합니다.


우리는 다 약한 존재들입니다.


죄를 짓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다 약점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그 죄에 대한 경고를 하나님은 몇 차례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끝까지 뉘우치지 않으면 형벌이 임합니다.



하나님은 니느웨성에 내릴 심판을 돌이키신 하나님입니다.


니느웨성 사람들은 첫 번째 경고를 듣고 왕을 위시하여 모든 백성들이 다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차 경고를 바로 듣고 회개하면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과 멀어지지 않도록 오늘의 말씀의 교훈을 되새겨 이 한해를 살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들의 삶 속에서 더 크게 나타날 것입니다. ♣






                                  


제목 :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살린다!                                      


본문 : 딛-02-11-14                                      


지난주간 포항의 어느 중학교 3학년인 이모군이 그의 사랑하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18층 아파트에서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다. 경찰이 조사한바에 의하면 이군은 아버지가 원하는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없는 것을 비관한 나머지 이와같은 최악의 상황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이군은 좋은 고등학교에 못가면 쓸모없는 존재라고 자신을 스스로 평가했습니다. 우리나라 교육계의 아픔을 보여주는 기막힌 사건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가치는 무엇이 결정합니까? 사람의 가치는 성적, 소유, 직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치관\'이란 자신의 근본적인 가치를 결정짓는 안목입니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부요해도 가치관이 혼란하면 그 사회는 살만한 사회가 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치관을 갖지 못한다면 그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견해와는 관계없이 자기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결정짓고 제한합니다.



여러분의 궁극적인 가치는 누가 결정합니까? 창조주 하나님께서 결정하십니다. 복음진리가 결정합니다. 세상의 제도나 견해가 우리의 궁극적인 가치를 결정짓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인간의 가치를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눈이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는 자만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인격적으로 체험해야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은혜입니다(11절). 하나님의 은혜의 구성요소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입니다(3:4). 하나님의 은혜는 곧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람사랑은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표현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 잘믿는 사람은 은혜받은 사람이요,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은혜받는 것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은혜받으면 자신의 가치에 대하여 눈이 열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세가지 복을 제시합니다.



1. 하나님의 은혜는 과거의 모든 죄와 아픔을 깨끗하게 씻어주십니다(14a절).



하나님의 은혜의 절정인 예수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 스스로 고칠 수 없는 영혼의 질병과 삶의 상처를 치료하시고 십자가의 제물이 되어주셔서 모든 죄와 불법에서 구원해주시기 위함입니다(14절).



우리의 과거는 허물과 죄로 얼룩진 과거였습니다(엡2:1).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던 진노와 심판의 명패를 달고 살아야했던 자들이었습니다(엡2:3).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한계 속에서 절망하던 구제불능의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에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감싸안았습니다. 우리는 절망의 자식에서 소망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지옥의 자식이 아니라 천국의 영광스러운 아들과 딸이 되었습니다. 진노의 자식이 아니라 은총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구제불능의 자식이 아니라 무한가능한 은총의 자녀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에 눈을 여십시오. 우리의 딱딱하고 찬 마음을 열고 주께서 원하시는 길을 달려가십시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옥으로 달려가는 발걸음을 돌이켜 천국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3:7). 천국의 자녀됨이 복음입니다. 은혜의 본체는 성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광된 선물입니다. 곧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모신자는 자신의 가치에 대하여 재발견합니다.




2.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명을 따라 선한 일에 힘쓰게 합니다(14b절).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으셨습니가. 그결과 죄에 빠져 들어가는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친백성\'으로 삼고 깨끗한 마음과 남을 돕는 일에 열성을 다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14b절). 이제 우리의 삶의 존재의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엡2:10).



\'친백성\'(His own special people)이란 주님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독특하고 특별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과거 진노의 자녀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특별한 사랑과 관심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반드시 사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명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연탄 한장\'이라는 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장이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을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 연탄한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놓고 걸어갈 길, 그 길을 만들지도 몰랐었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자발적인 헌신과 충성의 사람이 됩니다. 은혜받은 지수는 삶의 열정지수와 비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방황하는 인생에 종지부를 찍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보람있는 삶, 섬기는 삶을 시작하게 합니다.



여러분, 은혜받았다는 것은 현재 나의 삶에 사명을 가지고 주를 위해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친백성이 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타인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연탄한장의 마음을 소유하십시오. 하찮은 연탄한장도 존재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각자의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발견하여 그 길로 달려가게 합니다.



3. 하나님의 은혜는 미래에 다시 오실 주님을 대망(待望)하게 합니다(13절).



사람은 무엇을 기다리느냐에 따라 그의 삶과 인격이 결정됩니다. 사랑하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는 자기의 마음과 몸을 단장합니다. 주 예수그리스도를 대망(對望)하는 성도는 그의 영혼과 삶을 정돈하며 삽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삽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소망의 세계로 이끕니다. 어두운 영혼에 은혜의 빛이 비추면 희망의 꽃이 핍니다. 낙심한 영혼에 은혜의 빛이 비취면 용기의 종소리가 울려퍼집니다. 은혜받으면 천국문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삶의 희망과 용기를 얻습니다.



우리는 우리 영혼의 등불을 밝게 켜고 주님앞에 설 것입니다. 우리는 이날을 대망하며 삽니다.




(그 날을 늘 기다리고 내 등불 밝게 켰다가


주께서 문을 여실때 이 영혼 들어가겠네


내 주 예수 뵈올때에 그 은혜 찬송하겠네


내 주 예수 뵈올때에 그 은혜 찬송하겠네 아멘/ 찬송295장 4절)




은혜의 눈을 열어 날 영접하시기 위해 천국문에 서 계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오직 은혜 받은 자만이 주님을 기다립니다. 인간의 가치는 소유나 지위가 결정하지 않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이나 자본주의의 경제지표가 결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가치는 오직 하나님만이 결정하십니다. 복음진리가 결정짓습니다. 세상의 가치로 여러분 자신과 자녀들과 이웃을 평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의 눈으로 여러분자신과 자녀와 이웃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이 일어나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눈이 열려 자신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합시다. 은혜 받은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 선행에 힘쓰며 살아갑시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을 대망하며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은혜와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선포하는 교회가 되게 합시다. 은총의 계절인 성탄에 하나님의 은혜의 당사자로 섭시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살립니다.




은혜 받으면!



은혜받으면 눈이 열리네


과거의 허물진 모습 부끄러워라



은혜받으면 눈이 열리네


숨기고 싶은 나날들 용서와 치유의 현장이 되네



은혜받으면 눈이 열리네


나도 알지 못했던 내 모습, 소망의 등불 켜지네



은혜받으면 눈이 열리네


존재마다 사람마다 소중한 것을 보네. 하나님의 형상!



은혜받으면 눈이 열리네


나를 영접하실 주님을 보네. 사랑의 주님!



은혜받은 눈으로


한생애 살게 하소서.



은혜받은 눈으로


나를 이끄시는 주님의 손 보게 하소서.



                                


제목 : 불을 던지러 왔노라                                      


본문 : 눅-12-49-53                                     


 불을 던지러 왔노라


눅 12:49-53



주님은 공생애 이전부터 이미 자신이 하실 사역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다. 자신이 십자가를 져야 할 것과 또한 그 죽음을 통해 생겨날 수많은 갈등과 분쟁을 그리고 그러한 고통의 과정을 겪어야 이 땅에 참된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될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자신과 3년 동안이나 함께 했던 제자들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러한 주님의 답답함을 직접 고백한 글이 바로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한마디로 “불을 던지러 왔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불에 대한 의미에 대해 아직도 정확하게 단정지을 수 없어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불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이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후에 되어질 ‘심판’을 의미한다고 하기도 하고,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신자와 불신자 간에 생길 분쟁’을 의미한다고 하기도 합니다. 물론 세가지 견해가 다 나름대로 타당성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본문에 ‘불’에 대한 의미가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가져다 주는 복음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1. 복음의 불


우리 속에는 어느 누구나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 죄의 문제입니다. 우리 마음은 원하지 않지만 죄가 우리 마음 속에 있어서 우리가 원치 않는 일들을 자꾸만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죄가 나를 자꾸만 잘못된 길로 이끌고, 마치 주인이 그 종을 마음대로 다루듯이 나를 자꾸만 죄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 죄가 나를 멸망의 길로 이끌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해 더럽혀진 내 몸과 영혼을 아무리 비누로 깨끗하게 씻으려고 해도 지워지질 않습니다. 아무리 수양을 하고 고행을 해도 여전히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 속에 거하는 모든 죄를 소멸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불과 같이 우리의 죄악을 완전히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다보면 그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놀라운 진리를 대할 때마다 우리의 영혼이 마치 불타오른 것같은 경험을 해보시지 않았습니까? 어느날 말씀을 듣다가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해보신 적이 없습니까?


감리교를 창설한 존 웨슬리도 어릴 적부터 목회자의 집안에서 자라나 어릴적부터 성경을 공부해왔고, 미주 선교사로까지 나갔었지만 뜨거운 불의 체험을 하질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으로 돌아와 방황하던 중에 어느날 올더스케이트 거리에 조그마한 교회에서 로마서 서문을 읽는 중에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이 웨슬리의 회심의 사건이 바로 감리교의 첫 역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히 4:12 이하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 사명의 불


하지만 복음의 참다운 위력은 성경 속에 감추어진 비밀을 밖으로 나가 담대하게 외칠 때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복음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만 뜨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수많은 곳에서 불을 지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 일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 사명의 불을 주십니다. 눅 24:32에 낙심하여 엠마오 마을로 걸어가던 두 제자가 고백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이처럼 주님은 만나는 사람들 말씀으로 사명으로 뜨겁게 만드는 역할을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는 자들은 사명자가 되는 것입니다. 불의 속성 중에 하나가 불은 태울 것이 남아있는 한 절대로 꺼지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번져갑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불을 그의 제자들에게 지펴 주셨습니다. 마가 다락방에 120문도가 뜨겁게 기도할 때 오순절 거룩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행 2:1에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래서 그 불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퍼져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땅에 “불을 던지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그 사명을 물려 받은 제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들도 이 땅에 불을 던지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큰 불을 일으키어 곧 주위 사람들을 이 불길 속에 끌어들인다면 주님께서 그보다 더 기뻐하실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3. 분쟁의 불


본문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사실 이 말씀을 읽을 때 믿음이 약한 자들은 이 말씀이 과연 주님이 주신 말씀일까 하는 의심이 일던 적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주님의 말씀처럼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가족 간에 불화가 없던 사람이 있습니까? 처음 예수를 믿을 때 믿지 않는 가족들과의 갈등을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도 직접 몸으로 겪으신 분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얼마나 많은 갈등들이 있었습니까? 그 많은 박해와 순교의 역사를 우리는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납니까? 그 대답이 이미 말씀에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오신 목적이 “불을 던지기 위해서 오신 까닭”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그 복음이 내 속에서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또한 믿지 않는 이들과 갈등을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단지 자신의 결점이나 감추어 주고 울화를 달래주거나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나약한 것에 불과하다면 굳이 분쟁이 일어날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불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변화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면 먼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죄부터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죄를 그저 눈감아버리는 것이 평화라고 해서 그냥 내버려둔다면 아무런 분쟁이 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이 우리 마음 속에 들어가기 시작하면 그동안 우리가 지니고 살던 모든 안이한 삶에 혁명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님을 영접하는 자들은 인격이 변화고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남의 재물을 수탈하여 자신의 금고를 채우던 세리장이 변화되어서 타인을 위해 자신의 재물을 아낌없이 나누어주기도 하고, 예수믿는 자들을 잡아 가두던 그 포악한 사울이 변하여 위대한 전도자 바울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선과 악에 대한 영적싸움이 가정에서도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형제들조차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자가 눈을 뜨게 되자 부모와도 멀리해야만 했습니다. 사울이 회심했을 때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기 위하여 공모하여 밤낮으로 성문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지역마다 그에 따르는 반대자들의 훼방이 있었던 것을 성경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그런 과정에서도 계속해서 거부하는 강퍅한 자들을 변화시킵니다. 만약 복음이 처음부터 끝까지 듣기 좋은 말만 하고 끝낸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환영할 것입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다 형통할 것이다”라고 선언한다면 누가 복음을 마다하겠습니까? 하지만 복음은 비타협적일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교회마다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지 않습니까?


하지만 복음의 불이 어떤 때는 우리들에게 뜨거운 사명을 안겨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세상의 온갖 불의에 대해 이겨낼 수 있는 능력도 가져다 주기 때문에 우리는 늘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는 온갖 계획들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 뜨거운 불로 인하여 온갖 우상이 넘어지고, 인간을 괴롭히던 죄악된 것들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이 불은 제자들에게 힘을 주고, 순교자들에게 참된 용기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아직도 불이 붙지 않아 여전히 죄악이 난무하고 거짓된 평화가 지배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우리 마음의 타성 때문에 무기력함 때문에 여전히 죄의 지배를 받는 삶이 아니라 불붙어 타오르는 열심을 갖고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우리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4. 답답함


본문에 보면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주님은 자신이 받을 세례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그 세례가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자신이 당해야 할 고난과 시련을 세례로 표현한 것은 참 특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자신들을 예수님이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에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할 때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겠느냐”고 하실 때도 똑같의 의미로 쓰여 졌습니다. 이 잔은 주님이 당하는 고난의 잔이요 주님이 받으실 세례는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자신이 당하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세례는 지난 번에 한번 말씀드린 것처럼 ‘잠근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물에 잠기면 죽음을 경험하는 것처럼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당할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위해 주님이 대신하여 죽음의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답답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이 두려워서 그 기다림이 답답함이 아닙니다. 진정 예수님의 답답함은 십자가 고난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하루 속히 이루기 위한 열정입니다. 그러한 열정을 갖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안타까움에 대한 답답함입니다.


                                  



                                



제목 : 광야길의 레슨                                      


본문 : 출-13-17-20                                      


출13:17-20



예수 믿는것이 제일 재미있는 때는 처음 은혜를 받았을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소위 첫사랑의 계절이라 할까요? 말씀배우는 것이 꿀맛같고 기도의 응답이 척척오고 예배의 시간 시간이 감격이었던 때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런 때가 그리 오래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갑자기 예배시간이 지루해지고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신앙에 회의가 찾아오고 영혼이 사막처럼 메마르게 됩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이런 때를 가르쳐 광야길의 체험이라고 불렀습니다. 십자가의 성요한(John of the Cross,1542-1591)이라 불리우던 사람은 이런 경험을 일컬어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했고, 그리스도인 모두는 조만간 이 밤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광야길의 체험은 다양합니다. 당장 이루어 질것 같은 꿈이 이제는 실현 불가능한 꿈처럼 멀어지고 현실의 차가운 벽앞에서 절망을 느껴야 하는 때-이것도 일종의 광야 체험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그 사이에 끼어들수 없었던 하나됨으로 시작되었던 우리의 애정관계 혹은 우정관계가 어느날 삐꺽거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그의 얼굴을 대하는 것조차 부담으로 변해 버릴 때-그때 우리는 광야길을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애굽을 떠나던 날-그것은 얼마나 대단한 민족적인 감격의 체험이었을까요? 노예의 사슬을 벗어던지고 그들은 이제 자유의 새로운 세상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앞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언약의 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애굽땅을 벗어나자 마자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광야였습니다. 물론 처음에 광야를 대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크게 두려워 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직선으로 광야를 가로질러 가면 불과 200마일에 불과한 길이었고 직선으로 쉼 없이 걸어가면 40일이면 갈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40일이 무려 40년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17,18절에 보면 가까운 길을 놓아두고 홍해쪽 먼길로 하나님이 그 백성을 돌려서 인도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좀 원색적인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뺑뺑이 쳐 돌리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광야길의 체험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셔야 했을까요? 광야길의 의미와 레슨-무엇인지요?



1. 광야길은 사랑으로 예비된 길입니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사고한다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고생시키는 하나님이 잔인하신 분으로 이해 될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 때문임을 분명히 합니다. 다시 17절을 보십시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북동쪽으로 인도하신다면 거의 직선으로 쉽고 가깝게 갈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그 길을 피하여 먼길을 돌아가게 하신 이유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장에 직면할수 있는 전쟁을 피하고 애굽으로 돌아갈 유혹의 마음을 차단하기 위해서 였던 것입니다. 물론 남쪽으로 돌아가는 홍해길에도 후에 전쟁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출17장에 보면 첫번째 전쟁인 아말렉과의 전쟁기사가 기록됩니다. 그러나 처음 애굽을 떠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은 전쟁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을 아셨습니다. 만일 처음부터 전쟁을 치르고 어려운 일을 경험한다면 틀림없이 애굽을 떠난 것을 후회하고 아직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애굽으로 돌아갈 유혹을 받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감당할 시험밖에는 주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준비될때를 기다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그의 사랑의 배려이셨던 것입니다.



여기 우리가 배워야 할 레슨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생의 길을 걸어가며 때로 그 길이 지름길이 아닌 멀고 험난한 돌아가는 길로 느껴질 때 왜 내가 이길을 걸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우리가 믿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길로 들어서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이 길이 먼 길로, 험한 길로 느껴져도 이 길은 사랑으로 예비된 길임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이 길을 지나감이 너무 고통스럽거든 자신에게 말하십시오.-이 길은 그분이 예비하신 사랑의 길이라고.이 길을 지나감이 너무 아프거든 자신에게 말하십시오.-이 아픔은 사랑을 위한 것이라고. 마치 새생명을 출산하는 어미처럼 말하십시오. 이 고통은 사랑의 특권이라고, 사랑의 의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잊지 마십시오.어떤 광야의 외롭고 힘든 길도 사랑으로 예비된 길인 것을!



2. 광야길은 훈련위해 준비된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아가는 광야길을 걷게 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가 본문에는 17절에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뉘우친다’는 말은 ‘마음이 변할까 하여’(CHANGE MIND)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애굽을 떠난 이상 하나님이 의도하신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라 가나안으로 가게 하기 위해서 였던 것입니다. 이 계획이 확실하게 실현되도록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요셉의 유골을 메고 가나안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요셉의 유골을 볼때마다 자신을 가나안땅에 묻어 달라는 마지막 유언을 기억하게 하신 것입니다.(19절)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확고하게 받아드리는 광야의 훈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경험은 직접 간접으로 하나님의 뜻과 연관되어 있습니다.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궁극적으로 수용할줄 아는 훈련인 것입니다. 이 훈련을 위해 40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한 성경학자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빠져 나오는데는 하루가 필요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안에서 애굽을 빼내는데는 40년이 필요했다”고 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주로 광야의 훈련과 관련되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도 40일간 집중적으로 계속되었고, 모세가 애굽에서 살인하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보낸 세월이 40년이었고, 나중에 시내산에서 보낸 시간도 40일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아합왕과 이세벨을 피하여 호렙산으로 가는데 걸린 시간이 40일이었고, 물론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시간도 40일간 이었고, 그의 부활이후 승천까지 의심으로 연약해진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심어 주시기 위한 시간도 40일 이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광야를 지납니다. 어떤 사람은 40일의 짧은 광야 체험을, 어떤 사람은 40년의 보다 긴 광야체험을 통과하기도 하지만 광야를 지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광야를 지내는 동안 우리에게는 구체적으로 어떤 훈련이 필요할까요? 광야를 지날 때 우리는 무엇보다 예배의 훈련을 받고 예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출3장에 보면 모세가 바로왕에게 나아가 애굽땅에서 떠나갈 허락을 구할 때 “사흘길을 지나 광야에 나아가 희생의 제사를 드리려 한다”고 말하라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시하십니다.(출3:18)희생의 제사를 오늘날의 개념으로 바꾼다면 예배라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예배할수 있지만 광야는 예배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입니다.고독한 광야를 지날 때 인적의 방해없이 다만 하나님의 임재의 달빛 속에 사랑을 내리시는 그분을 만나는 예배를 배우십시오. 오해의 광야를 지날 때 당신을 완벽하게 이해하시는 하나님앞에 홀로 나아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광야의 바람소리에 기도를 띄워 예배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고통의 광야를 지날 때 저녁의 서늘함속에 내 모든 피곤을 씻겨 주시는 산들바람의 치유를 맛보며 치유의 주님을 예배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광야길은 예배의 훈련을 위해 예비된 길입니다.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마침내 그의 뜻을 위해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십시오.



3. 광야길은 성령으로 인도된 길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많은 경우 어떤 고난을 경험할 때 우리가 왜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할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그럴때에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확신할수 있는 한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이 고난의 이유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 고난속에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인도하실 것이라는 약속만은 분명하게 신뢰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애급땅을 떠나던 이스라엘 백성이 왜 쉽고 빠른 지름길을 제쳐놓고 홍해로 향하는 먼길을 가야 하는지를 이해할수 있었겠습니까? 아마 하나님이 설명하셨어도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납득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백성을 그가 친히 광야길에 인도하신다는 분명한 싸인만은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름기둥, 불기둥 이었던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인도하시고”했고, 22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 구름기둥 불기둥은 백성앞에서 떠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 구름기둥 불기둥이 백성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중에 지리에 밝은 이들은 아마도 이 기둥이 북동쪽으로 움직여 갈 것을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기둥은 남쪽으로 움직여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가 분명했기에 그들은 싫어도 그길을 따라 갈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자녀들의 길을 반드시 인도하십니다. 롬8:14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루 하루 날마다 걸음마다 성령의 인도를 순종하며 끝까지 걸어가시겠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함이 있어도 이스라엘 백성은 먼 앞의 여정은 볼수 없었습니다. 그냥 조금 앞쪽만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걸음 한걸음 순종의 걸음을 걸었을 때 어느날 그들은 약속의 땅앞에 설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의 아이들이 여름방학이 되어 한국에 나와 있는데 함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특히 저의 둘째 아이 범이는 차만 타면 불과 30분이 지나지 않아 묻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얼마 남았어요? 몇분 더 가요?” 그런데 성장하자 이제 더 이상 이 질문을 하지 않게 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장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의 여정이 어떤 길을 통과 하는냐, 얼마나 빨리 목적지에 도달 하는냐 보다도 어떤 모습으로 성숙되어 주님앞에 마지막에 설 것인가에 더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광야에서의 40년-생각보다 훨씬 더 길었던 광야길은 실상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다운 백성으로 성숙하기 위한 위한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광야길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유-아직 우리에게 성숙의 과제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개척교회 목사님의 글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어느날 5살된 어린 아들이 이런 질문을 하더래요. 아빠, 아빠는 커서 뭐가 될래? 눈감고 대답해봐? 순간 아들이 상상의 게임속으로 자신을 초대하는 것을 느꼈지만 얼결에 대답하기를 “나 아빠가 될거야”하니까. “아니야, 아빠는 이미 아빠이니까 다른 것이 되어야 해”하더랍니다. 잠시 다시 생각하다가 “아빠는 목사님이 좋은데 목사가 될거야”하니까 “아이 아니라니까, 아빠는 벌써 목사님이잖아. 생각해봐, 아빠는 뭐든지 될수있어. 아직도 아빠는 될수있어”하더랍니다. 그 순간 “아직도 아빠는 될수 있어”라는 아들의 말이 이분의 마음 깊은 곳에 와 닿았다고 합니다. 개척교회가 실패하고 있다는 절망감으로 좌절하고 있던 이 목사님은 그때 비로소 자신의 사역과 인생이 끝나지 않았고 아직도 자신의 인생의 길에 성숙의 과제가 남아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광야길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성숙의 과제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될수 있습니다 그 성숙을 향해서 우리는 때로 아프고 힘들더라도 이 광야길을 다시 걸어야 합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을 좇아 밤에는 불기둥을 좇아 이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하시는 교우 여러분,이제 우리 다시 일어나 용기있게 광야 길로 나아가십시다.



 



                                


제목 : 믿음의 사람을 키우는 교회(시편 87:1-7) 


본문 : 시-87-01-7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1994년에 목사 안수를 받으면서 목회가 무엇인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목회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역을 말하지요.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겨서 신앙이 자라도록 기도하고 심방하고 말씀을 증거하는 사역을 목회라고 말합니다.



   제가 고민했던 것은 이런 것 외에 한 마디로 \'목회는 이거다\' 해답처럼 말할 수 있는 것을 찾으려고 했던 겁니다. 그것을 분명히 알고 기도하고 심방하고 설교를 하면 좋을 것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4년 넘게 전도사로 목회를 하고 감리교단에서 제정한 모든 과정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아야 하는데, 목회가 무엇인지 모르고 목사 안수를 받으려고 하니까 제 나름대로는 고민이 되었던 겁니다.



   어느 날인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회는 사람을 키우는 것이다. 목회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을 키우기 위하여 기도하고 심방하고 설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을 보니까 예수님도 12명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일을 하셨어요. 우리는 제자라고 부르지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12명을 온전한 제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공생애 3년 동안 그들과 함께 먹고 함께 자며 그들을 키우셨습니다.



   개념 정리가 되니까 목회의 가닥이 잡혀졌습니다. 시골교회에 10년간 있으면서 교인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키우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 잘 믿는 사람으로 키울까? 고민하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마음껏 목회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남선교회 여선교회 학생회 나름대로 열심히 사역했습니다. 교인들은 열심히 순종하며 따라주었습니다. 저의 첫 목회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누렸고 얻었습니다. 지금도 그 때의 신앙추억을 잊지 못합니다. 아니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어느 해 10월이 되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다음 세대에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을 키우면 좋겠다. 자라나는 학생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키워서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일하시도록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시겠다는 생각을 한 겁니다. 그래 장로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장로님, 중·고등부 학생들을 믿음으로 키우려고 하는데 교회에서 뒷바라지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그 장로님 별명이 예스맨입니다. 무엇이든지 아멘하는 분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학생들에게 해외연수를 시켜주어 시야를 넓혀주면서 믿음의 사람으로 키우면 어떨까요?\" 장로님은 예스맨 별명처럼 그렇게 하자고 말씀 하셨습니다. 다음달 임원회의를 열어서 장로님께 드렸던 말씀을 그대로 안건으로 내 놓았습니다. \"교회는 믿음의 사람을 키워야 하는데, 1년 52주 주일과 토요일에 개근하는 학생들에게 해외 연수를 시킵시다.\" 모든 임원들이 동의해 주었습니다.



   12월 한달 동안 홍보 기간을 갖고 다음해 1월 첫 주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학생들이 너무 열심히 하였습니다. 2월말에 수련회를 갔는데, 둘째날 임원들이 제방으로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저희들이 비행기 타보려고 열심히 했는데, 이제는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좋습니다. 목사님께서 저희를 위하여 하시는 일이니까 한번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기특했습니다. 제 마음을 벌써 알아차린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 얼마나 뜨겁게 신앙의 훈련을 받는지 생각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믿음이 빠르게 성장하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서류를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필리핀 정도로 생각했는데, 학생들이 너무 열심히 해서 제 마음이 감동되었어요. 저도 모르게 미국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저는 그 때까지만 해도 우물 안의 생각을 하고 있어서 대사관에 서류만 넣으면 미국비자가 저절로 나오는 줄로 알았습니다. 미련한 건지 순수한 건지 그만큼 뭘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미진한 서류가 너무나 많았는데, 인터뷰도 없이 그냥 비자가 나왔습니다. 기적이었습니다. 여행사 직원이 놀랐습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행사 직원이 한동안 그 교회의 홍보를 톡톡히 해주었습니다.



   모든 일이 잘 진행되어서 이제 한 달만 있으면 미국에 가게 됩니다. 저도 그렇고 학생들도 얼마나 설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12월초가 되니까 IMF가 터지는 겁니다. 온 나라가 난리 났습니다. 해외 연수라는 말을 꺼냈다가는 매국도 취급을 받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연기했습니다. IMF로 인해서 마음이 상한 학생들을 보니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평생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보고 말로만 듣던 미국이라는 나라를 가려고 하는데, IMF로 인해 모든 꿈을 접어야 하니 그 슬픔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도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미국에 가고 안 가고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사람을 키우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반드시 미국을 가야만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학생들과의 약속이었기 때문에 편치 않았습니다. 제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던 생각이 있었습니다. \"교육은 때를 놓치면 안 된다\" 이런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교육은 기회를 놓치면 안 되는 겁니다. 지금 공부하지 않고 지금 배우지 않고 지금 훈련받지 않으면 나중에는 기회가 없습니다. 혹 기회가 온다고 해도 지금보다도 몇 배 더 노력해야만 가능합니다. 여러분도 기회가 되었을 때에 열심히 배우시고 기회가 되었을 때에 열심히 훈련하시기 바랍니다.



   결국 2월 봄방학 때에 가기로 결정하고 부모님들을 만나서 설득 작업을 벌였습니다. 힘든 결정이었지만 부모님들이 동의해 주셨고 조금씩 보태주셔서 미국 연수를 했습니다. 지금이야 지난 일이니까 부담 없이 말씀드리지만 당시에는 앞이 안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전액 지원해 주어야 하는데, 환률이 1700원할 때였거든요. 당시에 5천 만원 들어갔습니다. 꼭 10년 전 이 맘 때의 일입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목회하면서 단순한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이곳은 독특한 지역입니다. 우리 좋은교회가 세워진 이후에 10년 동안 개척된 교회가 두 교회이고 문닫은 교회가 세 교회입니다. 그만큼 교회가 쉽지 않은 지역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한인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음의 사람을 키우는 일에 전념하여 왔습니다. 샌프란시스코는 한인이 많지 않지만 세상 기준으로 보면 유능하고 실력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들을 전도하여 믿음의 사람으로 양성하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기드온의 용사와 같은 교인, 장군과 같은 교인을 만드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들을 세상에 내보내서 한 생명 한 생명을 구원시키는 일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이제까지 믿음으로 순종하고 잘 따라오셔서 우리 좋은교회가 이러한 사역을 잘 감당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사람을 키우는 것은 교회가 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믿음의 사람을 키워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요즘은 여러 교회가 이것을 알고는 믿음의 사람을 키우자고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믿음의 사람을 키우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계획이 근사하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돈이 있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말로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을 세우고 믿음의 사람을 키우는 것은 그만큼 힘든 일입니다.


 


   좋은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믿음의 사람을 키우려고 많은 고민을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말 그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실력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저는 믿음의 사람은 훈련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신앙생활은 훈련입니다. 가끔 보면 교회 다니는 것이 신앙생활인 줄로 아는 분들이 있는데, 물론 교회에 다니는 것이 신앙생활의 첫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 다니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는 아닙니다. 교회 다니는 것은 그냥 교회 다니는 거예요. 학교 다닌다고 다 공부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직장에 다닌다고 다 일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왜 학교에 가방만 들고 다니는 학생이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교회 다니는 것이 신앙 생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착각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할까요?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에는 언제나 순종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처럼 떠나라고 하시면 떠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믿는 사람, 예수님을 믿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믿음의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지난 1월에 한국에 부흥회 갔다가 어느 목사님의 소개로 극동방송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토요일에 방영되는 \'토요특집 좋은 아침입니다\'이라는 프로였습니다. 이미 지난주에 방송이 되어서 여러분이 들으신 분이 있을 겁니다. 담당 PD가 녹음하기 전에 우리 교회를 10자 내외로 간단하게 소개하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주저하지 않고 믿음의 사람을 키우는 교회라고 대답했습니다. 녹음이 끝나고 PD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을 키우는 교회라는 말속에 좋은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색깔을 알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믿음의 사람을 키우기 위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가 몇 가지 원칙을 생각하였습니다. 말로만 떠들지 말고 무성한 나뭇가지가 되지 말고 구체적인 원칙을 정해서 가르치고 훈련시키자는 생각에서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좋은교회에서 강조하는 신앙 훈련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시간훈련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큰복입니다. 누구에게나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을 주시면서 지혜롭게 구별하여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일곱째 날을 복 주셔서 안식하시므로 우리에게 안식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마음껏 사용하되 하나님의 시간을 구별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일은 하나님의 날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중에 자신이 하나님께 드리기로 한 시간은 철저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둘째는 물질 훈련입니다. 물질은 바르게 벌기도 해야하지만 올바로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물질에는 몫이 있습니다. 내가 일해서 벌었다고 내 마음대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십일조라고 말합니다. 이 십일조는 모든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고백의 표시로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것을 강조합니다.



   십일조를 구별한 후에는 어려운 사람의 몫을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마음으로 이삭줍기 헌금을 드리고 있습니다. 레위기 23장 22절에서 하나님은 곡식을 거둘 때에 네 귀퉁이는 거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를 먹이시기 위함입니다. 신명기 24장 19절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한 묶음을 잊고 왔거든 되돌아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고아와 과부에게 돌아갈 몫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야고보서 1장에서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이 경건이라고 까지 말씀하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것을 먼저 구별하고 이웃의 것을 구별하고 나머지의 것으로 자신이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성경에서 약속하셨습니다. 



   셋째는 섬김 훈련입니다. 예수를 믿고 고백하는 것은 입으로 나타나지만, 예수 믿는 것은 자세를 통하여 나타납니다. 섬김은 예수 믿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자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철저하게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는 교인을 섬겨야 합니다. 더 나아가 믿지 않는 이웃도 섬겨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만나는 모든 사람을 주님의 사랑으로 귀하게 섬겨야 합니다.



   이 세 가지 훈련을 하면서 동시에 믿음의 지도자로 세우기 위하여 병행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입니다. 하나는 일할 자리를 주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사역이라는 자리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여러분이 경험하셨지만 주의 사역을 할 때와 예배만 드릴 때와의 신앙은 천지차이입니다. 믿음의 열정이나 성장, 신앙의 폭이나 깊이가 말할 수 없이 다릅니다. 저는 신앙을 더욱 빠르게 성장시키기 위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사역하라고 권면합니다. 새가족반에서 농담으로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제 세컨잡이 일자리 만들어주는 겁니다. 사역할 자리가 없으면 없는 것을 만들어 주는 것이 저의 임무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일한 만큼 일할 수가 있습니다. 일해보지 않은 사람은 일할 수가 없는 겁니다. 예수를 믿고 믿음이 성장하려면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게 되면 자신의 신앙의 폭이 넓어지고 사람과의 관계가 새로워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믿음의 지도자로 세우기 위하여 병행하는 다른 하나는 격려해 주는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격려는 보약이요 양약입니다. 열심히 사역하는 이들에게 잘했다고, 수고했다고, 근사했다고, 은혜로웠다고 격려하고 칭찬하면 더욱 힘을 얻어서 신앙 성장의 속력이 붙게 되어 있습니다.



   혹 주님의 사역하는 사람들이 맘에 들지 않을 때도 있고 실망할 수도 있지만 그럴 때에도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고한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실수한 것만 눈에 들어와서 고쳐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쳐주려고 한 마디를 했다면 그것은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에 새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사역한 사람이 실수하거나 부족한 것은 다른 사람이 지적해 주지 않아도 본인이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들추어서 지적하면 본인은 너무 민망합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예전에 찬양축제 할 때에 사역이 끝나면 평가회를 했습니다. 잘한 것은 칭찬하고 미진한 것은 보완한다는 취지였습니다. 그런데 평가회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칭찬하는 일에는 너무나 인색하고 잘못한 것을 지적하는데는 너무나 풍성한 거예요. 물론 지적하는 것은 다음 번에 잘하자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열심히 한다고 한 이들이 실망하여 다음에는 열정적으로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 뒤로부터 평가회 자체를 아예 없애버렸습니다.



   그 동안 우리 좋은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세 가지의 훈련을 받으며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일일이 이름을 거론하지 않아도, 어디에 사는 누구라고 말하지 않아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제가 가끔 한국이나 LA에 흩어져 있는 우리교회 출신들을 만나보면 좋은교회에서 신앙 생활한 것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모릅니다. 좋은교회에서의 신앙생활로 인해서 자신의 삶이 복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배드리고 있는 여러분 중에도 많은 교인들이 이 세 가지 훈련을 잘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감격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장학금을 주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백향목장학회는 믿음의 지도자를 키우기 위하여 설립된 좋은교회의 장학재단입니다. 백향목장학회는 이 제단에서 믿음의 훈련받고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에 의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열심히 헌금해 주시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3천불을 지급하였는데, 금년에는 6천불을 지급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백향목이라는 이름은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때에 사용했던 나무입니다. 백향목은 당대 최고의 나무로 곧게 자라고 단단하고 향기가 아주 좋습니다. 좋은교회의 백향목장학회는 백향목처럼 반듯하게 자라고, 백향목처럼 세상의 흐름에 흔들리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굳게 서고, 백향목처럼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사람을 키우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백향목장학금을 하나님이 주시는 장학금이라고 부릅니다. 비록 천불 정도의 금액이지만 하나님이 좋은교회를 통하여 주시는 장학금이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느 장학금보다도 값지고, 세상의 어느 장학금 액수보다 귀합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기는 이 장학금이 나중에는 만불 십만불 백만불 이상의 값을 할 것입니다. 장학금을 받은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아주 소중한 부분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장학금을 탄 청년들은 백향목장학금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믿음의 거목으로 자라시기를 바랍니다. 미처 장학금을 타지 못한 분들은 열심히 신앙생활해서 다음에는 수혜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 교우들은 여러분의 자녀들도 열심히 신앙 생활하게 해서 백향목장학금을 탈 수 있도록 가르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온인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면서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오늘날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예루살렘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내가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근원이 거기에 있다. 내가 거기서 났다\"고 고백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서 여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5절에 있는 것 같이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합니다.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그 수를 세시면서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거기가 어디입니까? 시온입니다. 예루살렘입니다.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좋은교회는 믿음의 사람을 먼저 키워서 선교하도록 할 것입니다. 백향목과 같은 믿음의 지도자, 장군과 같은 믿음의 지도자를 키워서 세상에 선교적인 영향력을 끼치도록 할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많은 영혼이 구원되고, 그들을 통해서 세상이 치유되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이민사회가 새로워지고 미국과 세계가 변화되도록 노력할 겁니다.



   그들이 장차 자신들이 지나온 여정을 돌아보면서 나의 근원이 좋은교회에서 났다고 고백하도록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세상 사람들이 믿음으로 훈련받은 여러분을 보고서 이 사람도 좋은교회에서 났다. 저 사람도 좋은교회서 났다고 말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시고 이 사람도 좋은교회에서 났다. 저 사람도 좋은교회서 났다고 하시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히게 좋은 일입니까? 저와 여러분이 열심히 신앙 훈련을 받으셔서 장차 이러한 복을 다 받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으신 하나님, 믿음의 사람을 키우도록 좋은교회를 세워주시고, 그 동안 헤아릴   없는 은혜와 말할 수 없이 귀한 만남의 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또한 백향목장학금을 수여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제단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단이 되게 하시고, 믿음의 사람을 키우는 일에 앞장서게 하시고, 그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확장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제목 : 은혜에 잠겨사는 사람들                                      


본문 : 겔-47-01-12                                     



I. 에스겔



어떤 사람이 환상중에 천국에 가 보았더랍니다. 천국에 갔더니 촌스러운 마을도 있고, 중소도시처럼 잘 단장되지 못한 마을도 있고, 일산신도시처럼 깨끗한 주택가도 있더랍니다. 이 세상하고 비할 바는 되지 못하지만은 천국은 천국 나름대로의 등급이 있더랍니다. 촌스러운 마을에는 누가 사나 가 보았더니, 이 땅에서 은혜로 잘 살고 자기 신앙을 나름대로 잘 지킨 사람들이 살더랍니다. 그리고 다듬어지지 못한 중소도시 같은 마을에는 누가 사는가 가 보았더니, 고난 가운데 굴하지 아니하고 감사하며 승리한 사람들이 살고 있더랍니다. 일산신도시처럼 깨끗하게 단장된 천국의 일등도시에는 누가 사나 가 보았지요. 고난과 시험과 실패 가운데도 굴하거나 좌절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며 격려하며 더욱 아름답게 헌신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그 마을에 살더랍니다.



「상처받은 치유자」라는 말도 있고 또 그런 책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상처받은 치유자” 한 사람이 나옵니다.



지금으로부터 2600년전 일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침략해 왔습니다. 많은 문물을 약탈해 갔고 1만명의 젊은이들은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 포로 가운데 25세의 젊은이 에스겔이 함께 갔습니다. 그의 나이 30이 되던 해, 그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노예생활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용기와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눈물의 선지자였다면, 아모스가 정의의 선지자였다면, 에스겔은 소망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비극적인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또 다시 예루살렘을 침공해 성을 초토화 시켰습니다. 예루살렘의 임금 시드기야를 잡아 두 눈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손발을 묶고 말에 매달아 끌고 다녔습니다. 비참하게 끌고 다니다 처참히 죽도록 내버려 둡니다. 이제 조국도 없어졌습니다. 돌아갈 땅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울고 또 울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무렵 에스겔의 아내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니 소망을 선포하던 에스겔의 꼴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에스겔은 이런 아픔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위로했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용기를 가지고 희망을 버리지 말고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이럴 때 일수록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됩니다.”



그동안 귀를 막고 있던 백성들이 상처받은 치유자 에스겔의 설교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에스겔의 위로와 격려 희망의 메시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의 환상입니다.



이 환상의 내용을 보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주는 소중한 교훈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실패를 겪고서도 좌절하지 않고 용기와 희망을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의 권능이 임했습니다. 에스겔은 조국이 망했습니다. 포로로 끌려가 고생합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었습니다. 이런 비극속에서도 백성들을 위로했습니다.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가 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이러한 에스겔을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붙들어 쓰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그 상처받은 치유자 에스겔이 백성들의 상처를 어루만질 때에 강력한 능력이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고통을 겪어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고, 더 효과적으로 아픔을 어루만질 수 있었습니다. 고통을 겪고 있었던 에스겔은 고통받은 동족을 위해 더 진실하게 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의의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자른 사람에게 찾아가서 손을 붙들고 “그만하면 다행이라고.” 위로했더니 “너도 다리 한번 짤라 볼래.” 그러더랍니다. 그러나 두 다리 없는 사람이 찾아와서 위로했더니 함께 손 붙들어 울며 위로를 받더라지요.





II. 환  상



오늘 본문 위로의 메시지를 들어 보시겠습니까?



하루는 에스겔이 하나님의 사자에게 이끌려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성전에서 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성전에 물이 그득히 고이며 한번 걸어보라고. 그래서 걸어갔더니 발목까지 물이 찰랑 찰랑 흘러 넘쳤습니다. 사방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 한번 걸어보라고. 물이 무릎까지 차 올랐습니다. 다시 물은 점점 차 올라 허리까지. 오늘 본문에 생략되어 있습니다만 가슴까지. 급기야 물은 성전에 가득하여 헤엄하지 않고서는 능히 건널 수 없는 강물이 되었습니다.



성전을 한바퀴 휘감아 돌더니 사막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사해 바다에 도착하자 죽었던 사해 바다가 살아나 고기들이 펄떡거리며 뛰어 노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사막을 지나 다시 돌아오는데 보니까 사방에 숲이 우거졌습니다. 진귀한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우리는 반드시 다시 일어나고야 말 것입니다. 지금 어두운 터널을 걸어가고 있지만 반드시 찬란한 아침 태양은 우리를 향하여 찾아오게 될 것이다. 비춰지게 될 것이다. 우리민족은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다. 지금은 실패했지만 반드시 성공하고 승리하고야 말 것이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민족은 전능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것이다. 믿음을 버리지 아니하고 기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민족을 치료해 주시고 새롭게 일으켜 주실 것이다. 에스겔의 환상을 통하여 백성들은 희망을 가지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본문은 대단히 상징적인 뜻을 가지고 있었지요. 예루살렘 성전에서 물이 흘러 강이 되었다고 했는데 실상 예루살렘은 강이 없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고원지대이기 때문에 강이 흐를 수 없지요. 더구나 성전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그 물이 사막을 통과하고 사해 바다까지 이르러 마침내 죽은 사해 바다를 살렸다고 하니 이 말씀은 상징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물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지구 조차도 71%가 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류 최초 문명의 발생지는 모두 강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나일강의 애굽문명, 유브라데스 강의 바벨론 문명, 인더스강의 인도문명, 황하강의 중국문명이 그것들입니다.



우리 사람의 몸도 물로 이루어졌습니다. 물을 마시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영적인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물과 성령으로 너희들이 거듭나야 하리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리라.”





III. 제  단



오늘 본문에서 성전문지방에서 부터 흘러나온 물이 제단을 한바퀴 돈 다음 그 제단을 통과하여 다시 남쪽으로 흘러갔다고 했는데 여기 제단이 무엇입니까? 신음하는 민족을 살릴 수 있고 쓰러져 죽어가는 인류를 살려낼 수 있는 강물이 도대체 무엇인가? 영원히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지옥의 백성들을 건져내 영원한 하나님 나라 백성 삼을 수 있는 능력의 강물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① 우리 예수님 골고다 언덕에서 흘려주신 피의 은총, 보혈의 능력, 그것만이 인류를 살려내는 생수의 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사람은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보혈의 은총에 적셔진 영혼들은 죄사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보혈은 이 역사 한가운데를 힘 있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를 바라본 모든 사람들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② 역사를 살릴 수 있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려낼 수 있는 생수가 무엇입니까? 성령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세례, 물을 마시지 아니하고서는 성령의 물에 감동되지 아니하고서는 하나님의 자녀란 권세를 얻을 수 없는 것이지요. 성령의 생수가 아니고서는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③ 그런데 이 십자가의 보혈의 은총이, 성령의 생수가 제단에서부터 흘러온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사람은 교회를 어머니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수가 흐르기 때문에, 구원의 보혈이 흘러 넘치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고 칼빈은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죠. 거기가 화려한 교회라도 괜찮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이는 농촌교회라도 괜찮습니다. 예배당이 없어서 길거리에서 두 사람이 손을 붙들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괜찮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제단입니다. 구원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때로 신앙생활하다 보면 교회가 못나 보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허물이 우리 눈에 보이기도 합니다. 또 예수 믿는 사람을 보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악하게 보여지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기가 힘에 겹습니다. 어지럼증이 있습니다. 멀미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태평양 한가운데로 여행하다가 거기서 멀미가 난다고 뛰어내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기는 구원방주입니다. 흠이 있어 보여도 때로는 어지럼증이 있어도 여기서 뛰어내리고 구원받을 수 있는 어떤 길도 없습니다.



문제는 네 신앙의 깊이가 어느 정도이냐 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IV. 물의 깊이



본문 : 네 신앙의 깊이를 측량해 보자!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강력하게 묻는 한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네 신앙의 깊이가 어느정도냐? 너의 신앙을 측량해 보려무나.



1. 발목을 잠근 사람들



사람들은 발목에 물을 잠그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발목에 물을 잠근다는 것은 신앙의 초보상태를 의미하지요. 즉 아무 것도 모르고 교회에 왔다 갔다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아직 체험도 없고 감격도 모자라고 그냥 주일이 되면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출석교인이 있습니다.



지금은 제법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잘 드립니다만은 한 2-3년 어간을 우리교회에 마당까지만 오는 남자 성도가 있었습니다. 주일날 아침이 되면 일찌감치 밥을 손을 지어서 아내를 차에 태우고 아이들을 차에 태워서 교회 마당까지 옵니다. 그리고는 차 문까지 열어 주면서 가서 예배 잘 드리고 오라고. 예배끝나는 시간이 되면 정확하게 찾아와서 가족들을 태워 갑니다. 또 성찬주일이 있는 날은 정확하게 30분 늦게 옵니다. 그런데 한번은 아이들 손에 이끌려서 예배당에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한번 오기가 어려웠지 두번 오기는 그렇게 어려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1년동안 다니는데 그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그렇게 훌륭한 신앙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예배를 잘 드리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발목 신앙인이 된 것이지요. 그도 여전히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도 여전히 구원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성가는 구원의 길을 걷고도 여전히 걷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안에는 발목신앙도 되지 못하는 오늘 본문 11절에 말하는 진펄과 개펄 신앙이 있기는 합니다. 이들은 교회 냄새만 맡았을 뿐 은혜의 강물에 뛰어들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구원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사람들 말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직까지 영접하지 못한 사람 말입니다. 천국을 향하여 진리를 향하여 성경의 복음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사람 말입니다.



은혜의 강가에서 구경만 했지 발을 들여놓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한 잔인한 한 선언이 여기에 있습니다.



11절 입니다.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보혈에 그 영혼이 적셔지지 못한 사람, 구원의 강물에 뛰어들지 못한 사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사람은 버림받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 무릎까지



그래서 물은 차 올라야 합니다. 이제 물이 점점 차 오르게 되면 무릎까지 오르게 되지요. 무릎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교회를 다니다 보면 어느날 갑자기 교회를 위해 바지를 걷어 부칩니다. 팔을 걷고 일할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입만 벌리면 교회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번 두번 교회 오다가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친구들이 교회를 비판하면 그게 그렇게도 싫더랍니다. 그래서 이제는 교회를 변호하기 시작합니다. 그런게 아니라고. 자네가 잘 몰라서 그렇다고 방어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제 무릎까지 차 오른 신앙인이 되어가는 거지요. 이전에는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으면 혼자서 헐떡거리고 뛰어다녔습니다. 자기의 재주를 가지고 친구들을 만나 보려고 했습니다. 선배들을 만나서 해결해 보려고 몸부림했습니다. 그러다가 문제가 더 얽히고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 한번 해보자. 엎드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신통하기 짝이 없습니다. 내가 해결하려고 할 때는 문제가 더 꼬이더니 하나님이 도와주기 시작하자 그렇게 쉽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그의 무릎이 기도에 적셔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의 무릎이 은혜의 강물에 적셔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신앙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 신앙가지고는 안정감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전에 물통을 져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어릴 때 마을 우물에 가서 물통을 져 나른 적이 있습니다. 하도 어릴 적 일이니까 물통에다 물을 가득히 담고서는 일어 설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물을 반통쯤 담아서 일어섭니다. 겨우 일어서서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면 물이 출렁하면서 두걸음 나를 밀어 제킵니다. 그래서 한걸음 갔다 또 한걸음 갔다 출렁 출렁 몇번하고 집에 도착해 보면 양철통에는 빈통입니다. 물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물이 차 올라야 합니다. 반통 신앙가지고는 안정감이 없습니다. 익은 곡식은 고개를 숙이고 열매는 소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빈 수레는 요란하고 가랑잎은 바시락 거리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3. 허리까지



그래서 물은 또 다시 불어나야 하는 겁니다. 다음 단계는 물이 허리에 차는 단계입니다. 허리는 중심부분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중심이 잡히는 시기가 오는 것입니다. 그냥 성경이 옛날 얘기인 줄 알았는데 언젠가부터 성경이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연애편지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옛날 역사책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달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재미있으라고 하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저 양반하는 얘기가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갑자기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눈물이 핑돌며 감격이 찾아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의 허리까지 물이 차 오르고 있는 단계입니다.



우리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나가면서 하도 울면서 눈이 벌개서 일어서니까 미안하던지 자기 아내에게 그러더랍니다. “이놈의 교회에 체류탄 뿌렸냐.”



벌써 물이 허리에 차 오르고 있는 거지요. 에베소서 6장에 보면 안전무장이 나옵니다. 구원의 투구를 쓰고, 의의 흉배를 붙이라고, 믿음의 방패를 들라구. 성령의 칼을 들라구. 그리고 구원의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신으라구. 그러나 진리의 허리띠를 띠지 못하면 달려갈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한걸음도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창피당하기 쉽상입니다. 넘어지기 쉽상입니다. 진리의 허리띠를 둘러야 앞으로 달려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진하는 신앙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향상하는 신앙이 가능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와 비진리를 구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중심이 잡혀있는 신앙 말입니다.



어느날 전도훈련 받고 이제 초신자인 줄 알았는데 가서 복음을 제법 잘 전합니다.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자기 자신을 다듬어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허리에 힘이 있으면 웬만한 유혹이나 시험에는 넘어지지가 않습니다.



4. 가슴까지



물은 여기에 머물지 아니하고 또 불어납니다. 본문에 문자적으로는 생략이 되었지만 당연히 거쳐야 될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슴까지 물이 차는 단계입니다.



가슴이 은혜의 물에 잠기지 아니하고 신앙생활의 연조만 깊어지다 보면 기쁨이 없고 감격이 없습니다. 자칫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하기가 쉽상이지요. 습관에는 원래 감격이 없는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 이빨을 닦으면서 아~ 이빨이 닦여진다. 은혜가 된다. 그리고 아침에 세수하면서 아~ 세수하는구나. 눈물이 핑돌면서 감격스럽다. 그러면서 세수하시는 분 계십니까? 빨리 헤치우는 겁니다. 예배 한시간을 드려도 하나님 앞에 기도 한번을 하더래도 찬송 한번을 하더래도 찬송 한번을 불러도 습관적으로 부르는 사람은 감격이 없는 겁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모태신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격이 없어요. 아무런 능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원래 모태신앙이란 이것도 못해, 저것도 못해, 못해 신앙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가슴이 물에 잠기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기도하면서도 기쁨이 없고 말씀을 들으면서도 감격이 없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나 감사가 없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어떤 훈련의 자리에서 그렇게 고백하는 우리교회 성도의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40년동안 예수를 믿었는데 예수님이 머리속에만 머물러 있더랍니다. 그래서 누구하고 논쟁을 하더래도 진적이 없더랍니다. 성령에 대해서 수없이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머리속에만 머물러 있더랍니다. 성경지식, 초등학교 때부터 퀴즈대회하면 1등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의 진리가 머리속에만 터질 듯이 고여있지 가슴속에는 아무런 기쁨도 은혜도 감격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성훈련을 받고 나니 이 모가지를 타고 진리가 흘러 내려오기 시작하는데 10cm를 내려오는데 40년이 흘렀다고 합니다. 모가지가 뚫어졌더니 가슴에 벅찬감격이 용솟음 쳐 오릅니다. 그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라고 생각할 때 울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머리속에만 머물러 있던 성령이 얼마나 섬세하게 나를 지키고 동행하고 돌보셨는가 깨닫고 땅을 치며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무당신앙엔 기원만 있고 감사가 없습니다. 축복은 바라나 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므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말씀속에서 진리에 바로 서는 신앙, 소중하지요. 헌신하는 신앙, 찬송하는 신앙,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러나 감사가 없는 기도는 자기 독백에 그치고 맙니다. 감격이 없는 찬송은 진실하지 못합니다. 감격과 감사가 없는 헌금은 뇌물에 물과한 것입니다.



요즘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제 e-mail에 자주 편지를 올려줍니다. 그리고 가끔은 편지를 붙여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목사님 병이 났습니다. 목사님이 고쳐주셔야 되겠습니다. 교회 와서 찬송만 부르면 눈물이 그치지 않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차를 몰고 가다가 이 테잎을 들었는데 주처없이 눈물이 쏟아져 주먹으로 흘러내리는 눈물방울을 닦으며 차를 제대로 운전할 수가 없습니다. 이 테잎을 목사님에게도 나누고 싶습니다. 어떤 분은 목사님 행복합니다. 이런 신앙생활은 예전에 내가 기대하지도 않았던 신앙생활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영혼들인지 모릅니다.



저도 한때는 교역자가 되어서도 감격이 없는 신앙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전에 섬기던 한 교회에서 청년들을 지도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부르는 찬송은 600장, 이 찬송이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찬송가를 펼쳐서 찬송을 부르면 은혜가 되는데 요즘 젊은이들이 부르는 엇박자 찬송, 빠른 찬송을 부르면 도무지 은혜가 안되는 겁니다. 이 귀한 찬송 나두고 왜 저런 찬송 부르노. 마음이 닫혀지고 시험이 들어서 예배당에 갈 수가 없더라구요. 목사님의 설교는 좋은데 도무지 찬송이 은혜가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찬송시간만 되면 기도했습니다. ‘주여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옵소서.’ 그게 제 찬송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성경을 보는데 “새 노래로 여호와로 찬송하라”는 말이 있더라구요. 하나님 나는 낡은 찬송은 은혜가 되는데 왜 새노래는 은혜가 안됩니까? 또 성경을 보니까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찬송하도다” 다른 사람은 기뻐 손뼉을 치는데 나는 손뼉 한번 치려고 하면 어깨가 천근 만근이 되는 겁니다. 우리 젊은이들은 손을 들고 일어서 찬송하는데 이 손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저들은 무슨 은혜를 받았길래 찬송시간에 저렇게 눈물을 흘리노. 그냥 찬송 부르면 좋지. 무슨 찬송에 눈물이 다 있노. 그 교회 다니길 1년쯤 되었을까요. 어느날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돌기 시작했습니다. 죽어서 꼼짝달싹하지 않던 찬송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거기 기록된 가사 하나 하나가 내 심정을 심령을 뒤틀고 지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토씨 하나까지도 나를 위하여 준비된 메시지로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춤을 추며 손뼉쳤던 믿음의 선진들의 감격이 용솟음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저는 찬송만 부르면 눈물이 납니다. 살아서 움직이는 찬송을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5. 깊은 물에서 헤엄치는 사람들



이제는 우리의 가슴이 은혜에 적셔져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감동을 느끼며 감동하며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에 감격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뻐서 감사하며 기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이 말하는 신앙과 은혜의 단계는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더 깊어져 가고 있습니다.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5절)



여기에 큰 은혜의 강물이 흐른다 할지라도 억지로 끌려서 다닐 수는 없습니다. 강물에 사람들이 지금 놀고 있습니다. 헤엄치며 노는 사람이 있고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교회에 은혜의 강물이 은혜의 생수가 흘러 넘쳐도 여기서 허우적 거리며 퍼득거리고 물 마시고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여기서 헤엄하며 노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거지요.



어떤 나라에 임금이 공주를 시집보내야 되겠는데 어떤 사람에게 보낼까? 생각하다가 이 나라에서 가장 용기가 있는 젊은이에게 시집을 보내야 되겠다 생각을 하고 용맹하다는 젊은이들을 다 불러 모아서 연못가에 둘러서게 했습니다. 거기에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하품하듯이 입을 벌렸다 오무렸다 하는 악어떼가 우굴 우굴 있었어요. “누구든지 악어떼가 있는 이 연못을 가로질러서 헤엄쳐 달려오면 공주와 결혼을 시켜 주겠다.” 그런데 공주와 결혼하겠다는 욕심 때문에 뛰어들어 갔다간 악어의 밥이 될텐데 누가 들어가겠습니까? 용감한 한 젊은이가 뛰어가더니 그냥 잽싸게 수영해서 뛰쳐나왔습니다. 모든 사람이 깜짝 놀라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당신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나왔느냐?” 그랬더니 그 젊은이가 뒤를 두리번 거리더니 “어떤 놈이 밀었어!”



우리가 은혜의 강물에서 헤엄치는 사람이 있고 허우적 거리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얕은 물가에서 땅을 깊고 헤엄치는 단계를 지나서 몸을 담그고 물을 끼얹는 단계를 지나 깊은 물에서 헤엄치는 신앙의 차원이 있습니다. 깊은 물에 몸을 맡기고 나면 저절로 뜨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의 생활이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올시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신비의 세계가 있습니다. 믿음이란, 억지로 믿어야지.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절로 믿어지는 은혜의 단계가 있습니다. 축복이란, 내가 노력한대로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에 은혜의 단계가 있습니다. 넘치는 강물에 가서 내 다리를 띄고 나면 죽을 것 같지만 땅에서부터 다리를 띄고 나면 내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헤엄치며 살 수 있는 은혜의 세계가 우리 가운데 준비되어 있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시간의 우선순위, 내가 철저하게 계획해서 살아가면 그것이 반듯한 삶이겠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세계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쫓기듯 인생을 살아왔습니까? 주님 앞에 우리 인생을 맡기고 살아가십시오.



물질도 하나님의 것, 하나님 앞에 깨끗이 드리고 한번 살아보십시오. 정직하게 예물을 드리며 하나님 앞에 헌신하며 살아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맡겨놓고 살아보십시오. 하나님의 것 도적질하여 조금 더 잘 살면 뭘 하겠습니까? 맡길 것 맡기고 살아보면 내 발이 세상에서 떨어지면 죽을 것 같지만 거기에 신비의 세계가 있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이런 한 구절이 나옵니다. “십자가를 지되 억지로 지지 말아라. 이왕 십자가를 지려면 기꺼이 지거라. 그러면 십자가가 너희를 짊어져 줄 것이니라.”



내 재주로 내 노력으로 내 힘으로 십자가를 끌고 가려면 무거워서 질 수가 없어. 십자가를 지려면 기쁨으로 감당해 보려무나. 그 십자가가 너희를 짊어져 줄 것이니라. 네가 짊어진 인생, 네 혼자 감당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그 인생에 짐을 감당해 주시기만 하면 주님의 품에 안겨서 살아가는 신비의 세계가 있느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의 단계를 척량해 보십시오.



우리교회 김 집사님은 남다른 인생길을 달려왔습니다. 고난에 부딪힐 때마다 문제에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이 사람도 만나보고 저 사람도 찾아가 보고 여기 가서 울어도 보고 저기 가서 매달려도 보고 법에 호소도 해 보았습니다. 그때마다 인생의 상처는 깊어져만 갔습니다. 문제는 꼬여져만 갔습니다. 인간관계는 허물어져만 갔습니다. 도무지 내 힘으로 내 발목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인생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려 보자! 무릎 끓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신비하게도 내가 그렇게 애를 쓸 때마다 꼬이던 문제들이 하나님이 간섭하기 시작하자 그렇게 쉽게 해결되어지는 것을. 무릎까지 물이 차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성경을 펼칠 때마다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주일마다 잠시 잠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인 줄 알았는데 주일마다 예배당에 찾아올 때마다 내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가슴까지 허리까지 지금 물이 차오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찬송을 부를 때마다 모두 다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요. 내 찬송이요 내 고백이요. 내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려야지 나의 찬송으로 찬송을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도 예수를 위하여, 죽어도 예수를 위하여 은혜의 강물에 몸담고 살아야지. 헤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V. 은혜에 잠겨서 사는 사람?



한 원양어선이 먼 항해길에 들어섰습니다. 며칠 여행을 하는데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고 큰 폭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며칠 간 죽을 고비를 넘겨야만 했습니다. 바람이 그쳤을 때는 이미 물도 양식도 다 떨어졌습니다. 선원들은 갑판 위에 다 쓰러져 누워있었습니다. 때마침 배 한척이 옆으로 지나 가길래 큰소리로 옷깃을 흔들며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여보시오. 물 한컵만 우리에게 주고 가시오. 우리가 지금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을 지경이 되었소.” 그때 저만치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옆에 있는 물을 퍼서 마시시오.” “아니 목마른 사람에게 바닷물을 퍼서 마시라니. 너무 잔인하지 않소.” “아니요. 당신들은 이미 강 하구에 도착되어 있습니다.”



은혜의 강물이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이 은혜의 강물에 여러분 몸담고 살지 못하고 목말라서 죽어가고 있는 영혼들 없습니까? 주님에 은혜의 강물에 여러분의 문제를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사회가 살아나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은혜의 강물에 맡겨놓고 살아가십시오. 세상에서 발이 떨어지면 그 문제를 내가 놓으면 내가 망할 것 같지만 내가 놓으면 주님이 대신 잡아 주십니다. 할렐루야!



사막에 강이 흘러가게 될 것이고 많은 나무들이 숲을 이루게 될 것이고 이 한해동안 풍성한 열매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어디에 가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나도 살고 너도 살고 가정도 살고 목장도 살고 사업도 살고 이웃도 살고 자식도 살아나는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은혜에 잠겨 사는 신앙의 신비를 배우십시다. 은혜에 잠겨 사는 신앙의 신비를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은혜에 잠겨 사는 신앙의 신비로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주님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 자리에서 다 일어서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 신앙의 단계를 이 시간에 점검해 보십시오. 아직까지도 내 영혼이 주님을 향하여 문을 열지 못하여 진펄과 개펄 소금땅이 되어서 생명이 자라지 못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계십니까? 이 시간 마음의 문을 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발목이 교회에 적셔졌습니까? 은혜에 적셔졌습니까? 자고 나면 교회에 오고 싶어지십니까? 여러분은 구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차 올라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무릎이 주님 앞에 적셔졌습니까? 기도의 강물에 적셔졌습니까? 더 깊이 담그십시오. 전능한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문제를 주님 앞에 맡기십시오. 가정의 문제를 주님 앞에 내어 놓으십시오. 내가 해결하려고 할 때마다 주님이 붙들어 주시면 그렇게 쉽게 해결되어지는 것을.



문제가 커서 여러분이 막고 있습니까? 너무 작아서 시시해서 여러분이 붙들고 있습니까? 주님 앞에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나는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러분한테 살아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이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살기를 주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에 인생의 중심을 말씀 중심으로 바꾸십시오. 예수 중심으로 바꾸십시오.



그리고 감격이 없습니까? 기쁨을 잃어버렸습니까? 행복을 잃어버렸습니까? 주여 제게 감격을 주십시오. 성령이여 찾아오셔서 내게 기쁨을 주십시오. 나도 은혜의 강물에 내 가슴이 적셔지기를 원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마다 기뻐서 찬송할 수 있고 기도할 때마다 은혜가 되고 말씀을 들을 때마다 가슴에 꽉 차오르는 기쁨과 행복에 누리며 살기를 원합니다. 내 인생 내가 달려 오다가 내 문제 내가 해결하려다 상처만 받았습니다. 문제가 얼히고 설혔습니다. 이제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겠습니다. 세상에서 발을 띕니다. 세상 붙들고 있던 손을 놓습니다. 주님을 붙들기를 원합니다. 주여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제목 :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본문 : 딛-02-11-14                                      


(고전1:4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


(고후6: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


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요3: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대상29:14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


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


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롬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10월은 하나님이 우리에 베푸신 그 은혜에 감사하는 귀한 계절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만가지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


감사할 때 행복이 찾아오며,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와서 불평의 문으로 나간다.


이 은혜의 추수감사절에 무엇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까?



1. 구원의 은혜에 감사합시다Give thanks to the grace of salvation



(디도서 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시116:12-13,17)..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


님의 뜻이니라



(행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딤전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


하시느니라



(고전11: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


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시51: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


를 붙드소서





하나님은 모든 이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고,


구원의 감격 속에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구원과 죄 사함과 영생의 잔을 높이 들고 그 감격으로 감사가 넘쳐야 한


다.


믿음으로 얻은 이 구원에 진정으로 감사해야 한다.


감사하는 심령에 마귀는 오지 못한다..




2. 양육의 은혜에 감사합시다Give thanks to the grace of nursing



(디도서 2:12-13)..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


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


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살후1: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고전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


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


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우리의 믿음이 날마다 자라나고 사랑함이 넘쳐나야 한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마치 아이가 새로 태어난 것과 같은 것이다.


갓 태어난 아기가 잘 양육되어야 하는 것 같이, 하나님이 아기같이 연약하고 부


족한 우리를 성숙하고 자라나게 해 주심을 감사해야 한다.


삶의 전 영역에서 우리를 키워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한다.


내 삶의 오늘을 바라보며 이제껏 자라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은 은혜 가운데 양육되어 잘 자란 우리의 모습을 보고 기뻐하고 계시다.


구원 받게 하신 후, 우리를 하나하나 조금씩 다듬고 깎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도록 가르치고 양육시키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


히 만들어주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목자가 양을 정성껏 기르듯이 우리를 잘 인도하며 자라게 하시는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양육시킴으로 우리에게 사랑의 성숙이 있게 된다.


지난 21년 동안 우리 교회를 이렇게 많이 자라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진실로


감사해야 한다.


초대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 가운데 지속적으로 자라나는 교회였다.


이러한 믿음의 성숙이 우리 교회에도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양육 받은 은혜에 감사하면서 더욱 자라나야 한다.



3. 선행의 은혜에 감사합시다Give thanks to the grace of good work



(디도서 2:14)..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9:10-12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


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고후9:10-12).. 심는 사람에게 심을 씨와 먹을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께


서, 여러분에게도 씨를 마련해 주시고, 그것을 여러 갑절로 늘려 주시고,


여러분의 의의 열매를 증가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모든 일에서 부요하게 하시므로,


여러분이 후하게 헌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의 헌금을 전달하면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수행하는 이 봉사의 일은 성도들의 궁핍을 채워 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를 넘치게 드리게 할 것입니다. ..



(딤전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막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


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이 감사의 계절에 감사가 넘쳐 선한 일을 많이 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를 죄와 사탄과 멸망에서 구원하시고 양육시킴으로 영육간에 채우고 성장시


키시는 하나님의 뜻은 우리로 선한 일을 하게 하려 함이고, 주는 자의 복을 누


리게 하려 함이다.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양육시켜 주심에 감사하며,


그 뜻 가운데 좋은 일, 유익하고 가치 있는 일 많이 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 사랑의 빚을 갚는 일은 감사함으로 선한 일을 많이 하며 살아야 하는 것


이다.


새 성전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사는 복된 교회, 복된 성도의 삶을 살자.


구원받은 것에 감사하며, 양육 받아 자라난 것에 감사하여 좋은 일을 하며 살아


야 할 때이다.


이제는 복음을 전하고, 남을 유익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 성전에 오는 자마다 모두가 구원받아 장성한 믿음의 분량을 키우며,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세상을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사랑의 공동체 되게 해야 한


다.


구원과 양육과 선행이 활발이 이루어지는 우리 교회되어야 한다.


                                



제목 : 일을 마치려 하는 자                                      


본문 : 행-20-17-25                                      


 사도행전 20 : 17 ∼ 25 




 여러분, \'참새 시리즈\' 라고 하는 유머를 들어 본 일이 있습니까? 전기줄에 참새 한 쌍이 앉아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냥꾼이 총을 쏘았습니다. 사냥꾼의 총에 맞아 마누라 참새가 전기줄에서 떨어지면서 남편참새에게 유언을 합니다. 그게 시대마다 다르답니다. 그게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1950년대에는 죽으면서 뭐라고 말했는가 하니 \"부디 몸조심하시오\" 그랬답니다. 60년대에는 \"먼저 가서 미안하오\", 70년대에는 \"내 몫까지 살아주\", 80년대에는 \"날 두고 가지마오\", 90년대에는 \"아무리 급해도 내 장사는 치뤄주고 장가드시오\" 그랬답니다. IMF 이후에는 \"혼자서 욕 좀 봐요. 나 먼저가요.\" 여러분 생각해 봅시다. 살아남은 사람이 복이 있습니까? 이미 죽은 사람이 복이 있습니까? 살아남은 사람, 욕보게 생겼어요. 이미 가는 사람 \"나 먼저 가오\" 그런 세상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산다는 것이 그리 자랑스럽지도 않고 요행히 살아있다는 것이 그 복도 아니고, 이제 남은 생을 산다는 것이 난감하거든요. 그래서 먼저 가면서 하는 말이 욕 좀 보라고 \'나 먼저 갑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어차피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시작하는 시간이 있는가 하면 끝내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것을 몰라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 보면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일을 마치려 함에는.\" 일을 1단계로 마치는 것이요. 소아시아 근방에 복음을 열심히 전하고 그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모릅니다. 그 마음속에 로마로 가고저 하는 소원은 간절합니다만은 하나님이 허락하실는지 모르겠고요 또 언제 어떤 모양으로 가게 될는지, 그것이 가능할는지 불가능할는지 모르겠어요. 다만 \'큰 핍박과 환난이 기다린다\' 하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그러나 나는 내 사명을 위한 달려갈 길을 마치려 함에 한 단계 여기서 매듭을 짓고 다음 단계로 시작하노라\"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프렌시스 자비에르 라고 하는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는 본래 스페인 사람입니다만은 포르투칼의 요한 3세 왕의 요청으로 그는 왕의 파송을 받아서 인도, 중국, 일본까지 그 당시에 선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동양선교의 선구자라고 불리워집니다. 그가 선교지 현장에서 임종을 맞이합니다. 세상을 떠날 때에 자기를 보내준 왕에게 유언 겸 중요한 편지를 씁니다. 그 편지내용 중간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어느 날엔가 하나님 앞에 서야할 시간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 끝 날의 결산을 위하여 겸손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주님 앞에 설 때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도록 준비하며 오늘을 살기 바랍니다.\" 이런 심각한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왕, 권세자라고 자기가 만능이 아니에요. 자기 위에 권세가 있고요. 내가 나의 생을 내가 사는 것 같아도 나를 지켜보시는 자가 있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되요. 언젠가 그 앞에 반드시 서야 되요. \'그 시간을 생각하며 오늘을 사십시오\' 라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 이 현시점에서 지난날 과거를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하고 또 현재를 생각합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때가 왔습니다. 마치 운동경기자인 것처럼 \'달려갈 길을 마친다\' 그랬습니다. 지금 출발점에서 이 골인장소를 향해서 결승점을 향해서 열심히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이제 결승점이 눈앞에 보입니다. 달려갈 길을 마치려 합니다. 그러면 내가 이제 할 일이 뭐냐고요. 그는 여기서 각오를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고백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있을 때 겸손과 눈물과 인내와 섬김과 그리고 거리낌없이 복음을 회개와 믿음의 복음을 열심히 열심히 전했노라. 그리고 오늘 내가 이 일을 마감하려고 하는 시간이다.\" 이렇게 심각하게 현 시점에서 그는 새로운 미래를 전망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교육자이면서 유명한 \'파커 팔머\' 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의 \'That Your Life Speak\' 라고 하는 책에서 아주 중요한 인간의 소명에 대한 말씀을 합니다. 또 한 구절이 너무도 충격적인 중요한 말씀이기에 소개해 봅니다. \"소명이란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의지에서 나오지 않는다. 듣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소명이란 성취해야할 목표가 아니라 이미 주어져 있는 선물이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소명이란 내 욕망을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게 아니에요. 그가 이미 내게 주신 바가 있어요. 주신 바 생애가 있고 주신 바 지혜가 있고 주신 바 물질이 있고 주신 바 건강이 있어요. 그 속에 이미 소명이 있다는 말씀이죠. 그 소명을 들을 줄 알아야 된다. \'듣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하고 말씀합니다. 좀더 나아가서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인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 에 대한 문제는 \'내가 누구인가?\' 라는 본연적인 질문에서부터 출발하며, \'나는 누구인가?\' 라고 하는 문제는 \'나는 누구의 것인가?\' 라고 하는 질문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여러분,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보다 먼저 생각할 것은 내가 누구입니까? \'내가 누구냐?\' 하는 문제는 내 스스로 선택할 문제가 아니에요. 내가 누구의 것이냐 하는 것이죠. 여러분 지난날을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내 마음대로 살았습니까? 내 마음대로 태어났습니까?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었습니까? 어찌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보이지 않는 그의 손길이 있고 그의 능력이 있고 그가 내게 향하신 경륜과 시나리오가 따로 있었어요. 내 주인 되신 분께서 나를 자기 마음대로 이렇게 저렇게 인도해서 오늘에 이르게 하심을 여러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라도 깨달아야 합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내가 누구의 것이냐? 누구의 손에 붙들리어 내가 여기에 왔느냐?\' 깨달아야 합니다.


 러셀의 \"행복론\" 이라고 하는 책이 있지요. 그 속에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해 줍니다. 자신의 힘을 겸허하게 평가하는 것이 행복의 원천이다. 쉽게 말해서 겸손이 행복의 비결이다 그 말이요. 여러분 혹 불만이 있습니까? 교만하기 때문이죠. 고민이 있습니까? 그것도 교만하기 때문이요. 걱정거리가 있습니까? 그것도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 더 겸손하게 생각해 보세요. 아무 걱정거리도 없습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자기가 경험하고 있는 성공에 대해서 놀란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 못 되는데 어떻게 이렇게……. 나는 이럴 수가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가 있나?\' 이건 기적이에요. 이름을 댈 수 없습니다만은 교역자는 교인들의 고백을 통해서 많은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처음 어린애를 낳았습니다. 흔히 말하는 아들도 아니고 딸입니다. 그러나 이 어린애를 낳아놓고 너무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사무실까지 찾아와서 좋아하는 거예요. 얼마나 감격하는지 아십니까? \"요것이 얼마나 예쁜지 손가락 다섯 개가 분명하고요, 눈망울이 똑똑 하고요, 이런 기적이 없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나는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왜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어요. 그것은 \"목사님, 저는 결혼 전 처녀 때 방종하게 살았거든요. 방탕하게 살면서 두 번이나 Abortion, 중절 수술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결혼도 못할 것이고, 물론 어린애를 못 낳을 것이고, 만일에 낳는다면 병신을 낳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암울한, 암담한 생을 저주스럽게 살아갔어요.\" 그가 이렇게 겸손해서 그랬는지, 그를 사랑한 남자가 있어요. 그 과거를 다 알고 결혼을 했어요. 놀랍게도 이런 아이가 태어났다는 거예요. \"이건 기적입니다. 내 모든 죄를 사했다는 증거요, 하나님이 아직도 나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바랄게 없어요.\" 너무 너무 행복해 하는 그 천사같은 얼굴을 보고 감격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우리는 축복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만큼 살 수 있는 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민족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어디 복받을 것이 있습니까? 무엇으로 불평을 할 것이요? 죽어 마땅한 사람들인데.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인데. 우리는 불평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은혜요 은혜만이 아니고 기적이요. 기적이에요. 여러분, 모르시죠. 저는 두 번 유학을 하면서 소위 유학을 해서 공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60년대 초에 유학을 떠날 때 저는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요, 저는 북한에서 나와서 영어를 공부한 일이 없거든요. 흔히 말하는 중학교, 고등학교 정규과정을 거친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여기서 검정고시를 보고 시험을 보고 들어가는데, 내가 어떻게 어떻게 토플 시험 600점을 맞고 프린스턴을 간단 말입니까? 저 대학에 들어서는, 프린스턴 대학에 들어서는 순간에 제 감격은 이루 말도 못합니다. \'어떻게 내가 여기 왔단 말인가? 어떻게 내게 이런 기적이 있단 말인가?\' 여러분, 하루하루 사는 것이 오늘 내게 주어진 작은 성공이라도 이 자체가 기적이요. 그대로가 기적이라 이거요.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감사와 찬송뿐이죠. 무슨 할말이 있습니까?


 그런데 반대로 교만한 사람은 말이에요 \'실패에 놀란다\' 그랬어요. 뭐 잘못되면 \'어찌 내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어찌 내가 이렇게 망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습니까? 그건 교만이에요. 주인의식을 버리세요. 애당초 내가 주인이 아니거든요. \'운명의 주인이 나 자신이 아니다\' 라는 것을 알아야 되요.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바울이 빌립보서 3장 12절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나는 그리스도께 잡혔다, 그리스도께 포로가 되었다, 그것이 자기 정체의식이에요. 그리고 한평생을 살았어요. 이제 그 일을 마치려 합니다. 내게 일을 시작하게 하신 이가 이제는 그만 하라는 거예요. 그러시다면 그러시죠. 여기에 아무 원망이 없어요. 바울은 생각합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노라. 그 누군가는 거두겠지.\" 나는 심는 것으로 족해요. 그는 파이오니아 식으로 족해요. 그는 심는 것으로 족해요. 그는 시작하는 것으로 족해요. 다음은 다음대로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신 것처럼 다음 단계는 또 다른 사람을 통해 그 다음 단계를 이루겠지요. 그것을 믿기에 그는 심는 자로서 심고 돌아서면서 유감이 없어요.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죠? 십자가 상에서 말씀하십니다. \"다 이루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에요. 뭘 다 이루었어요? 많지도 않은 열두제자 가운데 하나는 가룟 유다예요. 수제자라는 사람은 예수 모른다 그러고 도망갔고. 도대체 이 시원치 않은 업적을 놓고 어떻게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거예요? 뭘 했다고 다 이루었다는 겁니까? 그러나 그 다 이루었다 하는 말씀은 그 깊은 속에 엄청난 신비로운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만백성을 위하여 오셨고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예수님으로 하여야 할 일, 예수님에게 맡겨진 일, 다 이루었어요.


 오늘 여러분, 어디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까? 무엇까지 보면 되겠습니까? 내게 맡겨진 일만 내가 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각오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명에 충실하고 또 미련이 없습니다. 그는 배우는 단계가 있었고 전도하는 단계가 있었고 그리고 오늘은 마감하는 단계에 옵니다. 이 last stage, 마지막 단계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 또 한번 겸손합니다. \'주께서 나를 이제는 마지막으로 순교의 길로 인도하시는가 보다.\' 전에도 몇 번 죽을 뻔했지만은 이제는 가는가 보다. \'예, 그러시면 그러시지요\' 하는 그런 자세올시다. \'그런고로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마치 경기장에 서있는 사람처럼 경주자처럼 일생을 달려왔지만은 이제 저 앞에 결승점이 보입니다. \'그런고로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노라. 이대로 마지막 단계를 마치려 한다\' 하는 고백입니다. 요한 웨슬레 선생님에게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해서 유명한 얘기로 전해집니다. \"오늘밤 열두시에 죽는 것이 확실하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는 대답합니다. \"다른 날과 다름없이 설교준비하고, 다른 날과 다름없이 심방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날보다 먼저, 다른 날보다 30분 일찍 잠에 들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전에 하던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리고 억지로 끌려가는 것처럼 하지 않고 30분 먼저 잠들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지막 단계를 생각하는 사람입니까?


 한해가 갑니다. 그만큼 우리는 죽음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한 해가 갔다는 것은 그만큼 주님 만날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일생에 살아오던 길을 마치려 함에 이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겠습니까? 아무 미련 없이 새로운 결단을 가지고 생을 마감해야 되겠습니다. 마감을 해야되요. 근사하게 마쳐야 되겠어요. 마지막 작품을 그려야 되겠어요. 사도바울은 그래서 말합니다. \"내가 예루살렘으로 가노라. 무슨 일을 만날는지 모르겠다. 환난과 핍박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는데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침에 있어서 나는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생사간에 모든 문제를 모든 욕망을 모든 인간의 생각을 다 포기하고 오늘까지 나를 쓰신 주인께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당신이 원하는 시간에 당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부르시옵소서. 마지막까지 나는 내가 할 일을 할 것입니다.\" 그러한 귀한 고백입니다. 기도하십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은혜이건만 우리는 원망도 많았고, 모든 것이 기적이지만은 우리는 또 다른 소원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주여, 철저하게 겸손하게 하시고 철저하게 회개하고 철저하게 믿음으로 한 해를 결산하게 하옵소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오직 은혜와 기적이었습니다. 남은 길도 주께 맡기오니 주만이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제목 : 그 땅을 고치리라                                      


본문 : 대하-07-11-16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필역하고 무릇 그 심중에 여호와의 전과 자기의 궁궐에 어떻게 만들고자 한 것을 다 형통하게 이루니라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이르시되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전을 삼았으니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로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염병으로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역대하 7:11-16)



역대하 3:1을 보면 솔로몬 왕이 하나님의 성전을 모리아 산에 건축했다고 했습니다. 모리아 산은 창세기 22장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친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독자를 하나님께 번제로 바쳤던 모리아 산 위에 성전을 건축했다는 것은 오묘한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역대하 6장은 솔로몬이 성전건축을 마친 후 하나님께 드린 기도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고, 7장은 성전봉헌과 하나님의 응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 신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12절을 보면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셨다\"고 했고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라고 했습니다.


\"나타나셨다\", \"듣고\"는 동사입니다. 성경은 도처에서 하나님은 \"듣고, 보고, 말씀하시고, 오시고, 가시고l, 일어나시고, 기뻐하시고, 슬퍼하시고, 동행하시고 일하신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0:4을 보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은 살아서 움직이고 역사하시는 분이신데 손으로 깍고 다듬고 부어서 만든 것들을 신이라고 섬기는 것은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는 십계명 가운데서 이 계명을 빼버렸습니다. 이유는 그들은 성자와 성물들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직접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기 때문에 성자들이나 마리아에게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대통령 어머니만 되어도 대단한 찬사와 존경을 받는데 예수님을 낳고 기른 어머니야 말로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 되고도 남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대상은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의 기도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은 못됩니다. 되면 안됩니다. 큰일납니다.


교회 나온지 얼마 안되는 주부가 있었습니다. \"자기 가족을 위해 기도하라. 목사님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족을 위해, 목사님을 위해 기도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기도하느냐였습니다. \"주여, 제 남편 잘되게 해주시고, 제 아들도 잘되게 해주시고, 목사님도 잘 되게 해주옵소서.\"라고 기도를 하다보니 막연한 느낌이 들었습니다.누구 잘된 사람 없나, 그 사람처럼 되게 해달라고 할 사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언젠가 설교시간에 들은 사람인데 키도 엄청나게 크고, 덩치도 크고, 어느 나라의 군 총사령관이라는 사람 얘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녀는 옳다 싶어 \"그 사람처럼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주여 제 남편 골리앗처럼 되게 해주시고, 제아들도 골리앗이 되게 해주시고, 저희 목사님은 더 큰 골리앗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마터면 한국판 골리앗이 세 명이나 나올 뻔했습니다. 얼마 지난 후 골리앗이 나쁜 사람이라는걸 알고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녀의 본심을 아시는 주님이시기에 그 기도를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나타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를 힘씁시다. 반드시 들으십니다. 15절을 보면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라고 했습니다. 듣고 귀 기울이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2. 고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4절을 보면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치리라\"고 했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실체, 인격, 존재를 상징합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란 하나님의 명예를 걸고 선택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 백성이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 백성과 그들이 사는 땅을 고쳐 주신다는 것이 본절의 의미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기도하느냐, 즉 기도의 태도입니다.


첫째,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합니다. 악한 길에서 떠난다는 것은 회개를 의미합니다. 회개란 죄와 불의와 불법의 현장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 하나님깨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도둑질하는 죄를 회개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나 도둑질은 안하지만 그는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그의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도둑질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더 큰 죄에게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떠날 것은 떠나고, 버릴 것은 버리고,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악한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둘째, 자신을 스스로 낮추어야 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과대 평가하거나 스스로 높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할 일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은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교만은 기도를 막고, 은혜를 막고, 축복을 가로막아 버립니다.


셋째,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본래 얼굴이란 목 윗부분, 머리 앞부분, 이마, 턱, 두 귀의 둘레 안쪽을 말합니다. 몸은 옷으로 감싸서 잘 안보이지만 얼굴은 그대로 드러나 잘 보입니다.


사람은 각각 타고난 얼굴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성형술의 발달로 얼마든지 다른 얼굴이나 예쁜 얼굴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관상쟁이는 헷갈릴 때가 많다고 합니다. 본래 타고난 얼굴이 진짜 관상인데 다 뜯어고쳤기 때문에 관상이 잘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은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의 얼굴은 나이를 따라 변합니다. 기후 따라 변합니다. 감정 따라 변합니다. 분위기 따라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은 영원히 변치 않는 그 얼굴이십니다.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는 파리 르불박불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신비한듯한 모나리자의 미소는 지금까지 변치않고 그대로입니다. 단 그 미소는 움직이지 못하는 죽은 미소인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은 나를 바라보시는 얼굴, 나를 사랑하시는 얼굴, 나에게 말씀하시는 얼굴입니다. 그 얼굴을 구하면 고침을 받는 것입니다. 그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사모하고, 사랑하고,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싸우고 증오하는 사람들의 눈빛은 독기가 서리고 무섭습니다. 강아지도 잘못을 저지르면 주인얼굴을 피합니다. 사랑과 사모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자, 회개하고 깨끗한 심령으로 주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들이 복받고 고침받는 것입니다.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고 했습니다. 땅이란 흙, 경작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는 땅은 거기 사는 사람들과 경작지에서 생산되는 토산물들 채소, 곡식, 과일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 15:26을 보면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땅도 사람도 창조하셨고, 그들을 고치십니다.


특히 그 땅을 고치신다는 것은 그 땅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동들, 예컨대 경제활동, 정치활동, 사회활동 등을 다 고치신다는 것입니다.


최근 이어령씨가 쓴 칼럼을 읽었습니다. 배고픈 것을 풀어주는 것이 경제, 귀고픈 것을 풀어주는 것이 음악, 눈고픈 것을 풀어주는 것이 미술, 마음고픈 것을 정치나 경제가 풀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적 존재인데 누가 무엇으로 영혼고픈 것을 해결할수 있습니까? 영혼의 고독이나 아픔을 음악으로, 미술로, 밥으로 돈으로 풀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들로는 고픈 영혼을 채울수도 달랠수도 없습니다. 주의 얼굴을 바라보고,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께 기도할 때 영혼고픔은 해결되는 것입니다.


김영진 시인의 시 가운데 \"음악이 없어도 춤춘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시 하반부에 \"거친 물줄기를 거슬러 / 모천으로 돌아가는 / 연어의 처절한 투혼 / 죽음으로 큰 삶을 이루는 / 찬란한 개선이다 / 오 오 희망이 있으면 / 음악이 없어도 춤춘다 / 나뭇잎처럼 / 꽃잎처럼.\"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희망이 있다면 음악이 없고, 문화가 없고, 문명이 없어도 춤 출 수 있는 것입니다.


하박국 3:17을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라고 했습니다.


한 구절 속에 \"못하며, 없으며\"라는 말이 여섯 번이나 반복됩니다. 그것은 다 없어지고, 다 실패하고, 다 사라져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3:18을 보면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영혼이 고프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 허전하고 의미가 없고 죽고싶고 바라볼것이 없는 사람들은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힘이 없고 네 마음 연약할 때 능력의 주님 바라보아라


주의 이름 부르는 모든 자는 힘주시며 늘 지켜주시리


눈을 들어 하늘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 예수 얼굴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주리라\"



3.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6절을 보면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11:12을 보면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43:5을 보면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하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8:20에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위의 네 구절만으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인하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항상 함께!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대통령 경호원도 항상 함께 있진 못합니다. 부모도 형제도 그렇습니다. 한 몸이라는 부부도 항상 함께가 아닙니다. 때로 함께 때론 따로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영원히,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십니다.


시편 121:8 말씀으로 결론을 삼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아멘.




                                


제목 : 자원하는 자들이 성막을 세웠다                                      


본문 : 출-36-02-7                                     


 I. 성막을 지어라



어느 교회 주일낮예배 목사님의 설교 제목이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이었습니다. 낮예배를 마치고 주일밤예배 목사님의 설교 제목은 「예수님을 찾아라」입니다. 그러자 교인들이 설교 제목 두 개를 비교해 보더니 \"낮에 물 위로 걸어오시다 예수님, 물 위로 빠지셨나?\" 그러더랍니다.



지금 물에 빠진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전 세계가 물에 빠진 것처럼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한국사회 정치사회가 물에 빠진 것처럼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물에 빠진 것처럼 갈 길을 알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습니다. \"큰일났다\"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고 어쩌다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가? 염려하는 사람들도 많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만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들, 눈물 흘려 기도하는 사람들, 대안이 되어보고자 나서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부흥하기만 하던 한국교회가 위기를 만나기 시작하던 1990년대 초 한소망교회는 창립되었습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우리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아직도 몸부림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한민족을 살리는 한소망교회


한국교회를 살리는 한소망교회


영혼을 살리는 한소망교회가 되고자 몸부림을 해 왔습니다.



주님의 심장속에 있는 교회는 도대체 어떤 교회일까? 신약성경에 있는 교회는 도대체 어떤 교회일까? 초대교회를 변화시켰던 사도행전적인 교회는 도대체 어떤 교회일까? 마지막 시대 성령께서 우리 시대에 세우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우리가 함께 기도하고 몸부림하는 교회론 가운데 셀교회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셀교회가 온전한 교회는 아닙니다만 신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가장 근접한 교회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가정에서 모이는 작은 교회 즉 셀들이 진정한 교회가 되는 비전입니다. 셀리더들이 주님의 성품을 닮은 진정한 지도자로 살아가는 비전입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완성이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교리의 개혁, 우리가 성직자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예배의 개혁, 그리고 모든 성도님들이 사역자가 되는 만인제사장, 사역의 개혁이었습니다.



혹자들은 이 셀 교회운동을 일컬어 두 번째 종교개혁이라고도 합니다.


첫 번째 종교개혁이 성직자들의 손안에서만 머물던 성경책을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었듯이 두 번째 종교개혁은 성직자들의 손에만 머물던 사역을 온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는 운동이라고 합니다.



불신자가 주님 앞에 돌아와서 구원받는, 그리고 비신자를 전도하여 부흥되는 교회 모델을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을 것인가? 죽은 예배를 살려내고 예배시간마다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경험하며 예배의 영광이 회복되기를 열망하는 교회를 우리는 보고 싶었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감히 이기지 못하는 권세있는 능력있는 교회를 맛보기 원했던 것입니다.



다음 주일은 한소망교회 창립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1년 이상 진행되어온 비전채플이 땅위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출애굽기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공동체를 세우시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 공동체는 누가 세우는가? 어떻게 세우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출애굽기는 단순히 \"애굽에서 나온 얘기\"만은 아닙니다. 출애굽기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책제목으로 \"출애굽기\"란 말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출애굽기는 예배의 영광을 준비하는 책입니다. 출애굽의 목적은 예배를 회복하는데 있었습니다. 출애굽기는 1장부터 40장까지입니다.



1-18장까지 애굽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19-24장 중간은 시내산 언약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의 특권이 무엇인가? 구원받은 백성은 이 특권을 어떻게 누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25장-40장 성막을 지어 가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고 영광스런 교재를 누리는가? 하는 것은 보여줍니다.



그중 오늘 본문 출애굽기 35장 - 36장 성막 건축을 위해 지도자 모세가 백성들에게 헌신을 요구하고 백성들이 기쁨으로 헌신하여 성막을 세우는 얘기입니다.



본문을 무대 위에 올려보십시다.


시내산 위가 펼쳐집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 성전을 어떻게 지어라. 성전에 들어갈 기구는 이러이러한 것들이다.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모세가 친구처럼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행복한 교통! 교제가 이루어지는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편 장면이 바뀌어 시내산 아래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금은보화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 절합니다. 그 앞에서 술 취하고 방탕한 짓을 합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애굽세대를 버리시기로 작정하지요. 그 순간 모세가 생명을 걸고 하나님 앞에 중보합니다. 한 팔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다른 한 팔로는 백성들을 붙들고 생명을 걸고 생명책에서 나를 지워버린다 할지라도 이 백성들을 건져달라고 애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 공동체 예배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는 기회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부여해 줍니다. 성전을 지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지요. 모세가 백성들에게 성막을 함께 짓자고 요청하게 되고 백성들이 기쁨으로 응답합니다. 조금도 아까와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자원하여 금은보석을 제물을 바치는 얘기로 막이 내려집니다.



자칫했더라면 광야 한복판에서 이스라엘은 출애굽기의 목적이었던 예배공동체를 건설하는 이 사명, 이 소명, 이 직분을 빼앗길 뻔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가 가장 큰 비극이 있다면 게으름과 불충성으로 우리의 사명, 소명, 직분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다윗에게 소명을 빼앗겼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절대 실패하지 않습니다. 구원 공동체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설계도는 절대 실패한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를 그치고 찬양하기를 멈출 때에 저 돌들이 소리를 지르고 파도가 춤을 춰서라도 하나님께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광야에서 유기될 뻔 했던 이스라엘에게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모세의 중보기도, 모세의 요청, 백성들의 자원하는 헌신으로 자칫 송두리째 빼앗길 뻔 했던 직분과 사명을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내 목숨이 온 천하보다 귀중하지만 이 목숨 역시 사명을 감당할 때, 직분을 감당할 때만이 소명을 감당할 때만이 존재가치와 삶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II.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백성들의 헌신을 필요로 하는가?



구원공동체, 예배공동체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구약의 성전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계시리이까 보소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역대하 6:18)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당당히 헌신을 요구했습니다. 그 엄청난 복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신약교회 성도들도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고후8:3) 헌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헌신의 복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 앞에 헌신의 문제에 부딪히면 늘 부담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농부의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송아지 두 마리를 낳았습니다. 너무 감사해서 두 부부가 의논하기를 한 마리는 키워서 하나님께 바치기로 작정했더랍니다. 어느날 송아지가 언덕에서 굴러 떨어져 죽었습니다. 남편이 울면서 \"여보 큰일났어. 하나님 송아지가 죽었어\" 그러더랍니다.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힘에 지나도록 헌신하는 사람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자원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구원 공동체는 세워져 간다. 자원하는 백성들을 통하여 즐거이 헌신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성전 공동체는 세워져 간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온 땅과 하늘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주의 무엇이든지 사용하여 당신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별을 이용하여 동방박사들을 인도하셨습니다. 풍랑을 이용하여 요나를 부르셨는가 하면, 파리 떼와 메뚜기 떼를 동원해서 바로를 굴복시키셨고, 나귀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선지자를 가르치셨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달과 바람과 우박을 이용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공동체, 특히 성전을 짓는 일만은 유독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죄인들을 불러 구원하는 복음전도의 사역만큼은 하늘의 천사를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용하여 복음을 전하고 죄인들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왜요? 그 상급은 너무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공동체를 건설하고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이 엄청난 일들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너무 소중한 상급이겠기에 그 상급을 당신의 자녀들, 백성들 외에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수고하지 않아도 되게 좀 신비한 방법으로 성전을 짓지 않는 것일까요?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듯이 예배당 건축도 하나님이 신비하게 하시면 안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꿈땅\'을 사서 준비만 해 놓으면 어느 날 하나님께서 천군천사들을 보내서 하룻밤사이에 뚝딱뚝딱 예배당을 지어놓습니다. 그러면 저는 광고만 하면 되지 않을까요? 다음 주일이 우리교회 입당일 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인류 역사상 한 번도 하나님은 그렇게 성전을 지었거나 그런 방법으로 인간을 구원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기독교는 참으로 신비한 종교입니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원공동체를 건설하는 이 일은 신비한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도와 헌신을 통해서 세워지길 원하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상급이 되기를 원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헌신을 요구하신 것은 충성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헌신과 충성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자신들의 왕이심을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보여주었습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 내 마음이 이 땅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내 심령이 이 땅에 있지 아니하지 하나님 나라에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성전건축에 필요한 물건을 신비하게 준비하지 아니하시고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준비토록 하신 것일까요? 하나님이 주신 물질로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가르치려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때 몸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입술로 섬길 수 있습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성품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물질로 건설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모든 물질은 애굽을 떠날 때 하나님이 직접 주신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 400년 노예 생활의 퇴직금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전리품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백성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나온 모든 물건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헌신을 통하여 재물은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게 한 것입니다. 이 헌신을 통해 금송아지를 만들고 죄짓는데 쓰던 물질을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물질이 거룩하게 구별되는 순간 내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거룩하게 구별되는 것이었고, 물질이 거룩하게 구별되어져서 드려지는 순간 이스라엘 공동체가 거룩하게 구별되어져서 하나님께 드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질 헌신은 회개의 가장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이는 출애굽 공동체뿐만 아니라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몽골에서 온 한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선교헌금을 받아다가 몽골에 교회를 세우고 무조건 섬겼습니다. 무조건 도와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섬겼더니 1년 2년이 지나 사람들은 많이 모였는데 그들의 믿음이 전혀 성장하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가르쳐야 되겠다. 은사도 바치고 몸도 바치고 물질도 바치라고 십일조도 바치라고 가르쳤습니다. \"뭘 바칠까요?\"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농삿물을 바치고 양을 키우는 사람들은 양에서 나오는 소득을 바치고 월급을 받는 사람은 그것의 십일조를 드리면 됩니다.\" 그랬더니 어느 주일날 큰 보따리 두 개가 강단 위에 올라왔더랍니다. 그런데 예배당 안에 고약한 냄새가 진동을 하더래요. 보따리 두 개를 열어보았더니 소똥 보따리입니다. 몽골에서 소 똥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합니다. 농사를 짓는데 소똥이 중요하고 풀밭을 가꿔 양을 키우는데도 소똥이 중요하고 추운 겨울날 바람을 막는데 흙으로 지은 집에 소똥을 발라 놓아서 바람이 통하지 않도록 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소똥을 말려서 군불을 때면 방이 뜨뜻하게 난방의 효과를 가져온다고 합니다. 소똥 십일조를 갖다 바친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감사함으로 받고 축복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창고 곳간에 흘러 넘치게 해 달라고...\" 마음껏 축복을 했습니다. 이 주일 소똥 십일조를 바친 이후에 신비한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 마을에 있는 이웃 마을에 있는 소들이 산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자기 집으로 들어갈 때 이 집 앞을 지나갈 때 반드시 이 집 앞에서 똥을 싸고 지나가는 겁니다. 양들이 수천마리 지나가다가 전부 이 집 앞에서 똥을 싸는 겁니다. 갑자기 이 집 앞에 소똥 더미가 가득히 차게 된 것입니다. 소똥 곳간이 차고 넘쳤다 하는 얘기입니다.



III. 자원하는 자들과 함께



구원공동체 즉 장막을 건설하는 하나님의 큰 원칙은 자원하는 자들을 통하여 장막공동체를 건설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심령들을 통하여 구원공동체를 건설한다. 나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방관자 구경꾼들이 아니라 자원하는 심령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간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이 원칙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아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하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이란 마음에 이미 하나님이 자리 잡고 계셔서 자신의 심령이 하나님의 처소, 장막이 된 사람들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은 즐거이 드리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금이나 은, 목재나 쇠붙이에 거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원하며 헌신하는 마음에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자원하여 드릴 때 헌물이 차고 넘쳐습니다.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출36:5)



이 얼마나 즐거운 비명입니까? 자원하는 마음이 있는 공동체엔 언제나 즐거운 비명이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행복한 비명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가정마다, 여러분의 하는 일터마다 여러분의 모든 심령 자손대대에 행복하고 즐거운 비명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장막을 짓는데 백성들이 모세의 명을 따르지 않고 비협조적이고 방관적이었더라면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러나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버림받을 자신들에게 이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가져왔습니다. 출애굽 장막 공동체는 지도자 모세의 비전과 백성들의 자원하는 마음과 헌신으로 지어졌습니다.



35장부터 자원의 예물을 드리고 성막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출애굽기 저자는 여인들의 헌신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슬기로운 여인들이 앞장 서 예물을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팔찌, 귀고리, 가락지, 목걸이, 청색 자색 홍색실, 가는 베실, 염소털, 숫양의 가죽, 모두 여인들의 헌신 목록입니다.



특히 성막뜰에 물두멍이란 게 있습니다. 물두멍은 놋으로 그릇처럼 둥글게 만들어 물을 담아 두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제사장들이 제사하기 전에 손발을 씻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성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이 쓰던 거울을 녹여서 물두멍을 만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당시 거울은 놋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여인들의 얼굴을 비춰주는 것이 거울입니다. 화장 거울을 녹여 물두멍을 만들었습니다. 자기를 가꾸던 물품을 녹여 하나님을 보여주는 제물로 삼았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애굽 여인들의 풍속을 따라 멋을 내고 자기를 가꾸는데 사용하던 물건을 바쳐서 성막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멋을 내던 놋거울을 녹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헌신했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나만을 위해 쓰임받던 것이 하나님을 위해 쓰임받았습니다. 공동체를 위해서 쓰임받았습니다. 예배를 위해서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지혜로운 여인들은 범죄한 백성들이 양을 끌고 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죄 용서 받는 모습을 바라보며 저 영광스런 사역을 위해서 자신들도 쓰임받고 싶은 거룩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예배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쓰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의 영광이다. 구원 공동체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쓰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의 절대적인 영광이다. 이것이 출애굽 여인들의 고백 신앙이었습니다.



마침 이 설교를 준비하는 주말에 이름 밝히기를 꺼려하는 한 부인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목사님 지금 막 건축헌금으로 5천만원을 온라인 송금했습니다. 사연인즉 얼마전 남편이 별세를 하게 되었는데 남편이 조그만 보험 하나를 든 모양입니다. 보험금이 5천만원쯤 나왔다고 합니다. 이 돈이 너무 소중해서 그냥 자신을 위해 쓸 수 없는 것입니다. 봉투를 들고 기도하는데 교회 비전채플 한켠에 사랑하는 남편의 마음, 흔적을 남기고 싶더랍니다. 자녀교육을 위해서도 쓸 일이 많지만, 아버지가 없는 그 자식의 장래마저 하나님께 맡기고 돈이 아니라 기도로 양육할 때 어떻게 하나님께서 양육하시는가 보고 싶으셨다고 합니다.


남편의 생명 값으로 얻는 이 돈이 교인들이 예배하고 영혼을 구원하고 민족을 살리는 작은 일의 씨앗 한 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말로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 돈을 제게 준 것이라면 다시 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린 천상의 헌신이라 돌려드릴 수도 없었습니다. 마리아처럼 향유옥합을 송두리째 깨서 드리는 예물인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하나님 앞에 바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 이런 마음들이 비전채플을 지어 가는 것이겠지.


그래 이런 마음들이 구원공동체를 건설하는 거야.


그래 이런 자원하는 심령들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이겠지.


하나님께서 구원공동체, 예배공동체, 이 땅에 쓰임받는 비전공동체를 만들어 가시는 큰 원리가 있습니다. 나는 자원하는 심령들을 불러서 그들을 통하여 내 나라를 만들어 갈 것이고 그들에게 내 나라의 영광을 줄 것이다.


                                  



제목 : 심령이 가난한 자의 행복                                      


본문 : 마-05-01-12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행복한 삶을 원합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행복해 지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행복하게 살려고 공부도 하고 결혼도 하고 사업도 합니다. 행복한 인생을 살아보려고 신앙생활도 합니다. 대한민국 헌법에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모든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음’을 규정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행복한 삶을 원하지만 모두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행복한 것 같은데 불행한 사람도 있고, 겉으로 보기에는 불행해 보이는데  행복한 사람도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신경정신과 병원을 찾았습니다. 마음이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젊은이의 말을 다 듣고 난 뒤에 의사가 말합니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사람을 잘 웃기는 희극 배우가 와서 공연을 하는데 그 공연을 보고 나면 마음이 기뻐지고, 잠이 잘 올 걸세’ 그러자 그 젊은이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말했습니다. ‘그 유명한 희극 배우가 바로 접니다.’


남에게는 웃음을 주고, 기쁨을 주어도 정작 자신은 불행한 모습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행복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행복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행복은 영원히 그림의 떡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참 행복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산상수훈(마태복음5~7장)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산상수훈은 성경의 말씀 가운데 기독교의 진수를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처음 등장하는 8가지 복에 관한 말씀은 예수님의 행복론의 요약입니다. 이 팔복은 마치 음악의 8음계처럼 한 옥타브를 이루어서 행복의 멜로디를 연주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마치 행복이라는 산의 정상을 정복하기 위하여 올라가기 위한 8개의 베이스 캠프와 같습니다.


 앞으로 ‘복 있는 사람’ 이란 주제로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진정한 복을 받은 자로, 진정 행복한 자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의 비밀을 깨닫고자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의 행복’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다같이 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행복한 삶을 위한 첫 번째 베이스 캠프는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6장 20절에서는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상식에 어울리지 않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가난한 자가 행복한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특별히 이 민족은 불과 50-60년 전만 해도 가난에 찌들어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 민족의 구호는 “잘 살아보세” 였습니다. 오직 잘 살기 위해서 몸이 부서지라고 일했습니다.


부자로 사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꿈입니다. 그래서 서점에 가보면 부자 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책이 제일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은 헬라어로 ‘프토코스(ptokos)’인데 일반적인 궁핍 상태가 아니라, 철저한 파산 상태를 의미합니다. 누군가의 도우심이 없이는 도저히 홀로 설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모습’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물질의 가난을 예찬한 것은 아닙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축복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백성들이 물질적으로도 복을 받아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는 물질의 복에 대한 가이드 라인이 없다는 점입니다. 어느 정도까지 물질을 가지면 사람이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느냐입니다.


 어떤 사람은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기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질이 가난하면서도 마음은 부유한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밑 빠진 항아리처럼 물질에 대한 욕심이 한이 없는 분도 있습니다.


신문사 기자가 옥탑 방 한 칸에 셋방을 사는 부인을 취재했습니다. 남편은 5년째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있습니다. 하루 종일 식당일을 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와 남편 수발을 하고, 살림을 합니다. “이곳에 살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입니까?” 그런 열악한 환경에 사는 사람에게는 합당치 않은 질문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눈을 반짝이며 대답합니다. “밤 하늘의 별을 보면서 식구들의 빨래를 널 때지요. 그때는 행복감을 느껴요.”


남이 보기에는 행복할 것이 없어 보이는 환경이지만 그 부인은 밤 하늘의 별을 보며 사랑하는 가족들의 빨래를 널면서 행복을 느끼고 삽니다.


그런데 남들이 부러워하는 초호화 빌라에 살지만 항상 불만과 불평에 찌든 삶을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삶에 의미를 찾지 못하고, 우울증에 시달리고, 결국은 자살하는 경우도 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과 미련함을 철저하게 깨닫는 마음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의를 자랑하고자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자기 의에 도취된 자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9절 이하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나옵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였던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1절)


그는 먼저 자기 의를 드러냅니다. 세리를 정죄하면서 자신은 세리처럼 토색하거나 불의를 행하거나 간음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자기 의를 자랑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2절) 바리새인의 마음은 이미 자기 의와 자기 자랑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건함과 두려움보다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교만함이 넘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전 가까이 나가지도 못합니다. 감히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못합니다. 다만 애통하는 마음으로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은 자기의 의에 빠져 있는 교만한 바리새인이 아닌 가슴을 치며 애통한 마음으로 죄인임을 고백한 세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바로 세리처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엎드리는 자입니다.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철저하게 깨닫는 자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과 죄인됨을 철저히 깨닫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반대로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고,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상한 마음의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자에게 복을 베푸십니다.


성 어거스틴에게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그리스도인들의 최고의 덕목은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은 “첫째는 겸손이니라.” 대답했습니다. “그럼 둘째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겸손이니라.” “셋째는 무엇입니까?” “역시 겸손이니라.” 그러자 제자가 다시 묻습니다. “선생님, 그러면 겸손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교만이니라.” 그러자 제자가 또 묻습니다. “선생님, 교만은 무엇입니까?” “나는 지극히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스스로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이미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은 이미 겸손을 잃어버린 것이다.” 말합니다.


가난한 마음은 철저하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을 만나러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생생하게 영광스런 모습으로 성전에 나타나십니다. 그때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스런 광채 앞에서 거꾸러졌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하다”고 합니다.


이사야는 지존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는 순간 자신은 망할 수밖에 없는 비천한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죽을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깨달은 가난한 마음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빈 손이었습니다. 그 때 주님이 다가오셔서 “베드로야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목수출신입니다. 베드로는 고기잡는데 있어서는 전문가입니다. 그러나 밤새 헛 그물질을 한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물고기 한 마리 없던 그 곳에 온 바다의 고기를 몰아서 잡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임을 베드로는 깨달았습니다.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 앞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무능함을 철저하게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며 나를 떠나소서 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의 출발입니다. 아직도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베드로처럼 아무리 밤이 늦도록 수고하고 애를 써도 결과는 빈 그물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철저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이 고백을 드리는 자에게 우리 주님은 만선의 축복을 주십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을 주십니다.


오늘 주님은 상한 심령의 예배를 기뻐 받으십니다. 아직 내 안에 교만함의 모습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바리새인처럼 내 의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지는 않았습니까? 다시 한번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이 고백을 드리는 순간 주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고, 더 큰 은혜의 강물 속으로 인도하실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물질의 욕망에서 벗어난 마음입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심령’이란 단어를 뺐다면 당시 군중들은 매우 기뻐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가난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당시 로마 정부의 압제 밑에서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착취를 당하고 압박을 당하는 서글픈 식민지 백성이었습니다. 저희들은 가난했고, 삶에 의욕도 없고, 보잘 것 없는 처지였기에 행복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당시의 통념을 깨뜨렸습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부한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요, 가난한 사람은 저주받은 표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자유한 자가 진정한 행복할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어느 날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질문을 합니다. “내가 어떤 선한 일을 행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 명하십니다. 그러자 이 청년은 계명을 다 지켰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19:21)


 이 말씀을 들은 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 청년은 계명을 지킨다고 대답했지만 여전히 물질의 노예로 살고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나누지 못하고, 재물을 붙잡고 살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복음서 어디에도 다시 이 청년의 모습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재물의 노예로 살아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초대교회 가운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계3:17)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 책망하십니다. 물질의 부요함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적인 가난함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명하십니다.


아무리 우리들이 물질에 부요함을 누려도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오히려 그 재물이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재물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받은 축복을 가지고 의미 있는 일에 쓰면 그것은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칭찬 받을 일입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처럼 재물의 노예가 되어 산다면 그것은 더 이상 축복이 아닙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가 됩니다. 돈을 탐하면 세상의 유혹을 받습니다. 결국은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품게 되고, 결국은 그 덫에 걸려 넘어집니다. 자기를 찌르는 창이 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물질의 노예로 살지 않습니다. 그 물질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자신 만을 위해 쌓아두지 않고, 선한 일에 힘씁니다. 베풀고 나누는 일에 앞장섭니다. 그 속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립니다.


전에 여수 애양원에서 평생을 바친 오스트리아에서 온 두 수녀에 관한 글을 읽었습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트 수녀는 젊은 나이에 애양원에 들어와 40여년을 젊음을 불사르며 고름이 나고, 살이 썩어가는 나환자들의 곁을 지키며 돌보았습니다. 그들이 쓰고 있는 방에는 흔한 TV도 없고, 사과궤짝 만한 장롱하나가 전부였습니다.    정부에서 지급하는 월 10만원의 보조금을 받고 있지만 이마저 환자들을 위해 썼습니다. 이들과 함께 20년간을 일한 간호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분들은 새벽 5시쯤 일어난 뒤로 가만히 노는 시간이 없어요. 이분들은 \'내 것은 내 것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항상 남을 위해 살고 가진 걸 남에게 줘요. 없는데도 줘요. 없어도 주면 무엇인가 들어온다는 걸 이분들을 통해 배웠어요. 내 손에서 나가 내 손이 비워야만 다시 들어올 수 있어요. 내 손에서 나가서 내 손이 비어 있지 않으면 들어오지 않아요.”


그런데 두 수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희가 환자 분들에게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렇지 않아요. 저희가 오히려 이분들로부터 받아요. 이분들로부터 보이지 않게 받는 힘으로 저희가 건강하게 봉사할 수 있어요. 제가 타고난 복(福)으로는 이만큼 살 수 없었어요.” 두 수녀가 쓰던 방안에는 한지 위에 쓰여진 글씨가 하나 붙어 있는데 \'하심(下心)\'입니다. \'아래로 향하는 마음\', \'낮아지는 마음\'입니다. 그들은 한 평생을 이국땅에 와서 낮은 마음으로 가장 낮은 곳에서 일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활동이 어렵게 되자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가 싫어서 편지 한 통 남기고 훌쩍 떠났습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트 두 수녀야 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가장 행복한 삶을 산 분들이 아닐까요?


행복은 재물의 넉넉함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재물이 있으면 푹신한 침대는 살 수 있지만 편안한 잠을 살 수는 없습니다. 재물을 가지고 좋은 보약을 지어 먹을 수 있지만 건강 자체를 살 수는 없습니다. 재물을 가지고 넒은 저택을 살 수 있지만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나누는 기쁨, 베푸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시는 행복은 무엇일까요? 천국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영역을 말합니다. 천국은 예수님의 초림과 더불어 이미 이 땅에 임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의 재림과 더불어 완성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천국 안에 살고 있지만 때로는 갈등이 있고, 긴장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합니까?”묻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천국은 공간의 개념이 아닌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영역을 말합니다. 이미 우리 안에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주님의 통치 아래 있으면 우리 안에 이미 하나님 나라, 천국이 임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천국은 얼마나 잘 먹느냐, 마시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님 안에서 의와 평강과 기쁨을 누리는 삶입니다.


 결국 천국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베풀어 주시는 평강과 기쁨임을 강조하십니다. 누가 천국을 소유하고 살 수 있을까요?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철저하게 깨닫고, 주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 물질의 노예로 살지 않고, 베풀고 나누는 삶입니다. 그 속에 진정한 천국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BR><BR> 우리 심령 가운데 천국이 임하면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시는 천국의 행복입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송가 438장)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위로 올라가려는 교만한 마음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신 것처럼 낮은 곳으로 내려가라고 명하십니다. 그 낮아진 마음-하심(下心)이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모습입니다. 주님과 함께 낮아지는 하심(下心)이 바로 천국의 행복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우리 모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주 예수님 모시고 사는 곳이 그 어디나 천국이 되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제목 :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본문 : 사-40-27-31                                      


유다 백성들은 시드기야 왕 때 바벨론으로 잡혀간 70년 동안의 포로생활은 유다의 희망을 빼앗아갔습니다. 이때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앙망하라’라고 권면했습니다.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믿음을 심어주고 지혜와 능력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너는 두려워 말고 근심하지 말며 하나님을 앙망하라’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합니다. 유다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앙망하라!”라고 외쳤던 이사야 선지자를 생각해보면 오늘 우리들이 들어야 할 우리시대의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소망을 선포하는 선지자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1. 구원을 얻습니다.


 앙망은 ‘우러러 바라본다’라는 뜻입니다. 구원 얻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 앞에 놓인 첫 번째 장벽은 홍해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고 원망과 항의가 터져 나왔습니다. 목적이 선하면 그 일을 하다가 당하는 어려움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절박한 순간에 하나님을 앙망한 모세는 백성들에게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모세 앞에는 결코 두려움이나 절망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민수기 21장에 보면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에서 너무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고 힘이 들어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벌로 불 뱀이 백성들을 물어 죽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불 뱀의 독으로 죽어가는 백성들에게 놋 뱀을 만들어 높은 장대위에 달아놓고 뱀에 물린 자마다 그것을 바라보도록 하셨습니다(민 21:9).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그 말씀을 믿고 찬송하는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얻을 줄 믿습니다.


 2. 소망을 갖습니다.


 현대인들은 의외로 절망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질의 풍요로움 가운데서 살지만 인생의 공허함, 삶의 무의미 때문에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현대인들은 가난, 질병, 사랑의 상실, 노쇠, 실패, 자유 상실, 죽음 등 7가지 불안과 공포가 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피하고 싶은 것들이지만 피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우리들을 절망가운데 몰아넣어 사망에 이르도록 합니다. 우리는 가끔씩 내 자신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과 싸우는 사람입니다. 시편 42:5에 포로생활 속의 온갖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시는 것 같은 상황을 만납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눈을 들어 여호와를 바라보고 약속하신 말씀을 믿고 새겨서 믿음을 끝까지 지키기 바랍니다. 이렇게 지킨 믿음이 소망이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자는 소망을 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격려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물 가운데서도 함께 하시고 강을 건널 때에도 불 가운데에 서로 도우시는 하나님 여호와를 찾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앙망하는 자가 소망을 잃지 않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3. 새 힘을 얻습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중세의 고전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섰습니다. 그 책에서 ‘나의 아들이여 나는 나의 주로서 고난 중에 힘을 주는 자이니 고민이 있을 때에 내게로 오라’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힘을 어디서 얻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정체성이 들어납니다. 가령 땅에 있는 것만으로 새 힘을 얻는다면 그는 땅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늘로부터 새 힘을 얻어 살면 그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위로와 새 힘을 얻고 사는 하늘의 백성들이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죽기를 구하였을 지라도 하나님 앞에 엎드렸기에 그에게 단잠을 주시고 먹을 것도 주시고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셨다. 불안과 좌절이 많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독수리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 날개 크기는 2m나 된다고 합니다. 독수리는 150년 사는데 일생동안 4번 거듭난다고 합니다. 30, 40년 살다보면 날개에 힘이 없어지고 부리가 약해지면 활동하기가 어려워진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독수리는 먹이를 잔뜩 잡아먹고 높은 산에 올라가 부리로 몸의 깃털을 모두 뽑아버린 후에 새 깃털이 나기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원기왕성 한 새 독수리가 되어 힘차게 날아오른다고 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약해지고 은혜가 떨어지고 영적인 힘이 쇠해지면 우리도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하나님을 앙망하며 새 힘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앙망하여 지칠 줄 모르는 능력을 공급받아 힘 있게 주님의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볼 때는 어떤 환경도 극복하여 나갈 수 있으나 문제만 바라보면 실패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새 힘을 얻어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제목 :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                                      


본문 : 마-09-35-38                                     


 몽테뉴는 “재물이 부족한 것은 채울 수 있지만 영혼의 빈곤은 회복할 수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영혼 없는 몸은 죽은 것이다”(약 2:26)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순절에 보다 거룩하고 절제된 삶을 통하여 내 영혼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고,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주셨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모습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 구원하려함이라”(마 18:14)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죄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 공생애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사순절에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을 품기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한고 생각하십니까?


1.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라.


우리사회는 지금 영혼이 파괴되고 황폐해진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이 옳은지도 모른 체 쾌락과 방탕에 의존해사 살아가는 패역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영혼이 망가진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느껴야합니다. 그러자면 우리가 영적으로 살지 않으면 도무지 영혼의 중요성을 느낄 수 없습니다. 영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있으면 예수님처럼 사람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길 수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사람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않으니> 내 눈에서 눈물이 시냇물처럼 흘러내립니다.”(시 119:136)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리는 내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조지 휫필드 목사님은 설교할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왜 저렇게 잘 우느냐”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조지 휫필드 목사님은 “여러분은 내가 눈물을 흘린다고 책망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자신을 위하여 울지 아니하니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애통해 하는 것이 경제가 아닙니까? 그 눈물은 이제 거두고 예수님처럼 영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망가진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아무리 많은 재물과 지식이 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영혼을 위해 예수님의 눈물을 배웁시다. 눈물이 있어야, 불쌍히 여김이 있어야 비로소 구원이 완성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이 있을 때 기도하고 섬기게 됩니다.


영혼을 사랑한다는 것은 기도의 동기가 됩니다. 훌륭한 지식과 지위가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 영혼을 생각하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영혼이 죽은 사람에게는 화려함과 명성 뒤에 숨어 있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마귀의 일에 깊이 빠져 부끄러움을 당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아름답고 하려하지만 영혼을 들여다보면 곤고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영혼이 파괴된 죽음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며 죽는 모습을 지켜본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혼이 이미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진 물질 소유욕망을 가진 자들, 잔인한 살육의 현장을 바라보는 백성들, 죽어가는 예수님을 비웃으며 말하는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이 보여 주는 행동은 한마디로 영혼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죽으니까 죄와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이들은 영혼이 파괴된 체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형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에 대한 열정이 있으면 진심으로 기도하고 섬기게 됩니다. 기도해주고 섬겨주어야 영혼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이 사순절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살리기를 원한다면 그를 위해 기도하고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3. 영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있으면 전도합니다.


 영혼이라는 것은 우리의 인격과 육체의 바탕이 되는 실체입니다. 영적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의 완전한 모습을 말합니다. 영과 혼과 육이 있어야 완전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들은 육으로만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고통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화평의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책망할 것이 없게 보존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노라.”(살전 5:23)고 말씀했습니다. 영혼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은 한 생명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와 무슨 관계를 맺더라도 목표는 영혼 구원입니다. 전도는 시간이 남거나, 할 일이 없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 때문에 전도합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10)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과 혼과 육이 있어야 완전한 인간입니다. 육체에 영과 혼을 심어주기 위한 인간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있어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포기하고는 어느 누구도 친구와 이웃 내 가족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영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있으면 전도하기를 바랍니다.


                                



제목 : 믿음을 더하소서                                      


본문 : 눅-17-05-7                                      


  우리 신앙생활의 주변에서 믿음 좋은 사람을 봅니까? 어떤 사람을 믿음 좋은 사람이라고 합니까? 주님께서도 그 믿음을 인정해주시리라 생각합니까? 우리의 믿음은 이만하면 괜찮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좀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스스로의 신앙에 점수를 매겨본다면 얼마나 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낙제 점수 정도입니까? 아니면 그런 대로 꽤 괜찮은 점수일 것 같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할 것 같습니까? 주님께서는 과연 괜찮다고 하실 것 같습니까?



  때로 우리는 믿음이 좀 더 있으면 무슨 역사가 나타날텐데, 믿음이 없어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때가 없습니까? 그런데 이 믿음을 강하게 하는 일이란 쉽지 않고, 내 뜻대로 잘 되지 않는 일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능력을 행하셨고, 그런 것들을 제자들은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제자들은 그런 능력을 행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들의 믿음이 탓이라고 믿었습니다. 믿음이 있긴 있는데 그것이 너무 약하고 적다는 것이었습니다.



  1.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그래서 예수님께 사도들이 요청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라고 말입니다. \'믿음을 더해 달라\'는 제자들의 요구가 오늘의 본문을 여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기도가 아닙니까? 좀 더 나은 믿음, 좀 더 굳센 믿음, 좀 더 많은 믿음이 있다면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고, 세상에서 두려울 것도 없을 터인데 그 믿음이 부족하다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도 그런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찬송가 340장처럼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하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믿음을 더하소서\' 라고 원하는 제자들은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믿음의 대단한 결단을 한 사람들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 자들입니다. 배도, 그물도, 부모와 가족 이 모든 것을 다 버린 사람들입니다. 이만한 결단을 한 사람들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런 제자들인데도 주님을 향하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 하소서\"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도 믿음을 더 해 달라고 하는데, 오늘의 우리는 얼마나 큰 믿음을 요구해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믿음을 더욱 더욱 더하소서\'하고 기도하고 있는 지 모릅니다.



  이렇게 믿음을 더해 달라는 기도는 좋은 것이 아닙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믿음을 더 해 달라고 하니 얼마나 기특한 일입니까? 주님께서도 기뻐하실 내용이 아닙니까? \'믿음을 더 해달라\'는 제자들의 기도는 조금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2. 겨자씨 한 알만한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6절)\"고 대답하셨습니다. \'믿음을 더 해 달라\'고 하는데,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하십니다.



  그렇다면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없었다는 말이 아닙니까? 믿음을 더해 달라니 아니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언제 있었느냐는 것이 아닙니까? 있었다고 하여도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겨자씨 한 알보다도 더 작은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엄청난 결단을 하고 따른 제자들의 믿음을 그렇게 작은 것으로 표현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상하기만 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믿음은 얼마나 보잘 것 없겠습니까?



  그렇지만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하는 오늘 말씀을 자세히 생각해 보면, 다른 차원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곧 믿음이란 크고 작고,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고, 오직 믿음은 오직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오직 신앙과 불신앙 둘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아무리 무력하고 작게 보인다 할지라도, 그런 믿음은 있기만 하면 불가능한 일들이 가능하게 됩니다.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16:15-16)\"고 하셨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의 믿음에는 많고 적음이 없습니다. 큰 믿음이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믿느냐 안 믿느냐 양자택일의 문제입니다.



  우리들이 매일 먹고, 입고, 사는 걱정을 하는 것은 들의 꽃보다 공중에 나는 새보다 더 귀하게 여기신다는 그 믿음이 없기 때문인 것이지, 믿음이 많고 적음이 아닙니다.



  3. 믿음이 있었더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눅8:24)\"고 외칩니다. 잠에서 깨신 주님은 풍랑 이는 파도를 꾸짖어 잔잔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눅8:25)\"고 하셨습니다.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자기의 딸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의 요청을 들으신 예수님이 그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이었습니다. 그런데 12년을 혈루증으로 앓던 한 여인이 다가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렇게만 하여도 나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8:48)\"고 하셨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그리고 계속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는데, 이미 딸이 죽었다고 기별이 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눅8:50)\"고 하셨습니다.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큰 믿음이 아닙니다. 구태여 말하자면 적은 믿음입니다. 그게 있으면 됩니다. 큰 믿음이 기적을 이룬다는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냥 믿음입니다. 아니 예수님의 말씀대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면 되는 것입니다. 곧 아주 보잘 것 없는 작은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미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리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여기에서도 산을 옮길만한 큰 믿음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겨자씨만큼이라도 있는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기적은 큰 것과 큰 믿음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큰 것만 생각하다보면 적은 것은 아예 처음부터 손도 못 대는 것입니다. 영원한 형벌과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최후의 심판 비유가 마태복음25장에 나옵니다. 거기는 한결같이 지극히 작은 것 하나를 한 사람들이 영생으로 들어갑니다. 기적을 만드는 믿음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입니다.



  큰 믿음을 가지고 무언가 업적을 이루어 놓았다거나, 또 그렇게 하겠다는 사람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아주 작은 일에도 힘을 다하여 마땅히 자기의 할 일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겨자씨 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익한 종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4.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기의 작은 것으로 열심히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믿음을 크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있는 작은 믿음을 소중하게 여겨 성실하게 일하며 삽니다.



  밭을 갈고 양을 치거나 하는 어떤 종이 있었습니다. 일을 많이 하고 밭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렇다고 \"수고했다. 얼마나 피곤하냐? 어서 와서 밥을 먹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인의 먹을 것을 준비해야 되고, 식사하는 동안에도 시중을 들고 있다가 그 후에야 주인이 먹고 마시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것을 다 한 것 뿐이라 할찌니라(10절)\"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권리가 없습니다. 이미 받은 은혜가 커서 의무만이 남습니다. 섬김은 특별한 상급을 바라서가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기득권을 주장한다면 제자들보다 더 한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다 버리고 좇은 주님의 첫 제자들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엄청난 것이 아니라, 겨자씨 한 알 같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작은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것만 있으면 산도 옮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더 하소서\'하는 기도에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으로 최선을 다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우리의 하여야 할 것을 한 것뿐입니다\' 하는 고백을 하여야 합니다.




                                


제목 : 현명한 투자가                                      


본문 : 마-13-44-46                                      


\"(44)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


사람은 선택하면서 삽니다.


TV에서 보면 광고나 CF는 전부 사라는 겁니다.


하루 종일 사라고 합니다.


바꿔서 말하면,  선택하라는 겁니다.


이 물건 선택해 주세요. 이 물건 선택해 주세요.


갖은 수단과 방법, 갖은 자극과 아이디어를 동원해서 쇠뇌를 하는 겁니다.


어떤 TV에서는 종일 조릅니다.


이 제품을 선택하라고. 케이블 텔레비젼의 어떤 채널에서는


아예 24시간 제품을 선택하라는 방송만 합니다.


오죽하면 ‘순간의 선택이 십 년을 좌우한다’ 이렇게 말합니다.


뭐 철학이나 인생에 관한 슬로건이 아닙니다.


냉장고 사라는 광고 문구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평생을 선택하면서 삽니다.


결혼, 직업, 취미, 거주, 소비, 전부 선택입니다.


하기야 요즈음 복제 인간이 나오는 판이니 조금 있으면 자식도 선택하는 것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있는 반면, 분명히 내가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내가 결정해서, 내가 책임 져야 할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그러면 어떤 선택이 가장 최선의 선택일까요. 오늘 성경말씀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해답입니다.오늘 본문의 비유는 하늘 나라에 관한 비유입니다. >천국비유이지요. 그런데 천국 비유를 하면서 두 가지로 비유했습니다.


첫 번째 비유는 천국을 보물에 비유했습니다. 


먼저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44절)라고 합니다. <천국은 보물과 같습니다. 그냥 보물이 아닙니다. 감추인 보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무나 막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길가에 너부러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식탁 위의 소금처럼 언제나 손길이 닿는 곳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꼭 꼭 숨어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했습니다. 랍비의 율법에 보면, 남의 밭에 보물을 캐면 그 소유는 땅 주인의 것이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남의 밭에 있는 보물은 캐보았자 헛일입니다. 그래서 남의 땅에서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 땅을 사려고 과감한 투자를 하는 겁니다.


요한 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15:16)  맞는 말입니다. 교리적으로도 맞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받아들이고 반응하는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내가 할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강제 주사를 맞혀서 다 믿게 하지, 왜 안 믿는 인간 그냥 두겠어요?믿음의 선택은,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비가 내리는 데 뒤집어진 컵에 어떻게 빗물을 채울 수 있나요?컵을 바로 놓으면 됩니다. 그런데 컵을 뒤집어 놓은 채로 그냥 두면 홍수가 나도 컵에 물은 차지 않습니다. 컵을 뒤집어 놓는 것, 이건은 인간의 몫입니다. 은총을 홍수처럼 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러나 반응하는 것은, 전혀 나의 몫입니다.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선택입니다.선택이 없으면, 천국은 없습니다. 선택이 없으면, 행복한 삶도 없습니다.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근본적으로 선택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현명한 자는 과감한 선택을 합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천국비유는 장사꾼에 비유했습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45절) 오늘 성경의 진주장사는, 전문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가짜이고 무엇이 진짜인지, 구별해 낼 수 있는 눈이 있었습니다. 무엇이 고가품이고 무엇이 저가품인지도, 구별해 내는 눈이 있습니다. 이것을 전문적인 안목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이 전문적인 눈을 가진 진주장사가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한 것입니다. 최상품 중에서도, 최상품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니 진짜입니다.몸이 떨리고 흥분이 됩니다. 전 재산을 팔아서 이 진주를 삽니다. 이것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안목을 가진 사람이 가는 곳, 천국입니다. 최상품의 진리를 발견한 사람이 가는 곳, 천국입니다.전 재산을 건 투자를 하는 곳, 천국입니다. 사람들은 천국의 실체에 대해, 몹시 궁금해합니다. 천국의 성격, 천국의 모습, 천국의 속성 등이 어떤지 궁금해합니다. 그러나 오늘 비유에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인생의 성공은 선택입니다. 영원의 성공도 선택입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환불도 안되고, 리콜도 안됩니다. <살고 나면 그 뿐입니다. 되 물릴 수가 없습니다. 다시 살수 없습니다. 시간은 언제나 앞으로만 나아가지 뒤로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 살다가 보니 참 잘못 되었어요. 다시 합시다. N.G 냅시다. 이거 안됩니다. 자식 교육, 자식 교육 하지만, 이거 N.G가 없습니다. 어릴적 부터 다시 시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선택을 잘 해야 하고, 할 때 잘 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심각한 것은 우리 인생은 한번의 선택이 영원을 간다는 사실입니다. 한번의 선택은 영원까지 갑니다. 그 때에는 진짜 환불이 없습니다. 리콜도 안됩니다. 심판대 앞에서 명명백백 밝혀지는 날에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고칠 수도 무를 수도 없습니다.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선택입니까? 생명의 선택 믿음의 선택, 영원의 선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입니다. 이 선택은 기본적으로 기쁨의 선택입니다. 후회하지 않는 선택, 하나님 나라의 보물을 다 캐내고 사시는 기쁨의 나날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문)


주님,‘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함을 믿고 나아가게 하소서.


주님,남의 땅에서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 땅을 사려고 과감한 투자를 해 옴을 믿고,나아가게 하소서.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제목 : 예수가 해결하십니다                                      


본문 : 마-17-14-20                                      


마17:14-20




 이 세상에 사는 사람 치고 문제없는 사람 있을까요?


모양만 다를 뿐이지 모든 사람들에게는 다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는 것이고,


뭔가 하기를 원하지만 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꼬이고, 막히고, 눌리고, 없고, 아픈 것을 두고 하는 말이 문제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문제없습니까?


어려움 없습니까?


속상하고 답답한 일 없습니까?


무엇이든 하고자 해서 나갈 때 일사천리, 만사 오케이 입니까?


아닙니다.


문제없는 곳 없고, 문제없는 사람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묻더랍니다.


`목사님, 문제없는 곳 없습니까?`


그러자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있죠, 저 너머 공동묘지에 가면 문제가 없습니다`라고 했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한 문제없는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답이 있습니다.


해답이 있다는 것은 문제가 풀릴, 해결 될 방법이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있던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있는 문제들을 푸는 해답을 얻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문제 만난 인생


오늘 본문에도 보면 문제 만난 세 종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간질로 고생하는 한 아들이 나오고,


간질로 고생하는 아들을 둔 부모가 나오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 아이의 부모가 고쳐주기를 구하려고 데려온 것


즉 무슨 말입니까?


문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닥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고,


나의 문제는 아니지만 나와 연관된 사람에게 있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나에게 있는 여러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이 있습니다.


하기를 원하지만 하지 못하고, 되기를 원하지만 되지 못하고, 있기를 원하지만 있지 못하는 그런 힘든 문제들이 있습니다.


물질의 어려움, 삶의 곤고함, 여러 일들이 꼬이는 것, 육체의 질병과 아픔, 장래에 대한 불안과 답답함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자식문제, 남편과 아내, 부모와 형제간에 문제들도 있습니다.


저가 아는 어떤 분은 자식 때문에 얼마나 속상해하고 힘들어하는지...


살기는 꽤 괜찮은 편인데 자식 때문에 속상해하고,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비단 남의 문제, 남의 이야기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여기 앉자 있지만 여러분 자신이든, 여러분의 식구든 문제없는 사람 있습니까?


그냥 두 다리 쭉 펴고 살만큼 문제없이 그저 평안합니까?


우리는 그렇게 살고 싶은데 이 세상이 그렇게 놓아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신앙생활하고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함에도, 잘 해보려고 함에도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사실 문제는 끊일 날이 없습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이것을 얼마나 뼈저리게 체험하며 사는지 모릅니다.


사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목사가, 교회가 뭐 다른 것 하자는 것입니까?


어떻게 하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들을 다 잘되게 해보고자 하는 것이 목사요, 교회의 일인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런 일들이 다 잘되게 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목사가 하고자 하면 하나님께서 문제없이 무엇이든 잘 이루어 나가도록 팍팍 밀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사업해서 돈벌고자 하는 것 아닌데, 어떻게 하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믿음으로 잘 세워 세상에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 자신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케 하는 자 되어지게 하고자 하는 것이 교회의 일 아닙니까?


그렇다면 교회가 어려움 없이, 문제없이 일이 잘되게 해 주셔야죠?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목사인 저에게, 교회를 보면 문제는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아니 이 문제 끝나면 괜찮겠지 하고 나면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나고, 이 일 하고 나면 저 일은 괜찮겠지만 하면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나더라구요.


하나님 안 믿습니까? 믿습니다.


기도 안 합니까? 합니다.


믿음으로 안 삽니까? 삽니다.


그런데도 문제가 일어나고, 어려움을 당한다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아서 그럴까요?


믿음이 잘못 되어서 그렇겠습니까?


아닙니다. 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곳에는 어디든, 어떤 모양이든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 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칠십년, 팔십년의 삶의 모습을 수고와 슬픔의 세상이라고 했습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러분과 저에게는 우리를 무겁게 하는 짐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문제가 있기에 어떻습니까?


힘든 것 당연합니다.


어려운 것 당연합니다.


답답한 것 당연합니다.


괴로운 것 당연합니다.



2.그런데 문제를 만난 사람들이 그 문제 앞에서 어떻게 합니까?


①문제 앞에 원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하고 좌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광야 40년을 지나면서 참 많은 어려움과 문제를 만납니다.


물질의 문제를 만나죠.


먹고사는 문제를 만나죠.


사람 사이에 문제를 만나죠.


그런데 이들이 문제를 만날 때마다 어떻게 합니까?


(민 21:4) 백성이 호르 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 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민 21: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원망하고 불평이 되어지면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물론 마실 물이 없는 문제 심각합니다.


먹을 음식이 없다는 것 결코 편한 것만 아님은 분명합니다.


사실 오늘날 여러분과 저가 살아 가다가 만나는 문제 앞에 원망, 불평 안 할 그런 일 있습니까?


그러다 보니 낙심이 안 되고, 좌절이 안 될 그런 일 있습니까?


사실 그래서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만난 문제와 사건 앞에서 원망하고 불평한다고 더 나아지느냐 말입니다.


나아지기는커녕 도리어 더 낙심이 되고 좌절이 됩니다.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고, 먹을 음식이 없는 문제로 원망하고 불평 할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민 21: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그렇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죽게 됩니다.


도리어 망하게 되고 손해보게 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지금 내게 당한 여러 문제들로 인해 내가 한숨이나 푹푹 내 쉬고 있고, 속을 끓이면서 답답해하고, 속상해 한다고 이득이 되느냐 말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면 할수록 내 육체만 더 망가질 뿐입니다.


(잠 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내게 닥친 문제로 인해 원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하고 좌절부터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에게 있는 여러 문제로 원망하고 계십니까?


불평하고 계십니까?


안되니, 없으니, 못하니 힘이 빠지기에 낙심하고 좌절하고 계십니까?


그것이 문제 해결의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뿐입니다.



②나름대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덤벼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나서 1장을 보십시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니느웨로 가지 않고 욥바로 가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을 갑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요나가 더 이상 도망을 가지 못하도록 바다에 큰 광풍을 동원하십니다.


이 때 배가 뒤집혀 지려고 할 때에 그 배에 타고 가던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배를 뒤집어 질 것 같고, 가만히 있으면 안될 것 같고 해서 나름대로 광풍에 배가 침몰 당하지 않게 하려고 얼마나 안간힘을 쓰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뭔가 해결될 줄 알았지만 도리어 어떻게 되어집니까?


(욘 1:13)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무슨 말입니까?


문제를 만났을 때에 딴에는 뭔가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방법을 찾아서 해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딴에는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뭔가 하기는 하는데, 해보려고 덤벼 더는데 문제가 해결이 되기는커녕 자꾸만 더 꼬여가고 힘들어 갑니다.


이것은 비단 요나서에만 나오는 사건만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이 그 병을 좀 고쳐보고자 얼마나 안간힘을 썼겠습니까? 나름대로 해결해 보려고 덤벼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되어집니까?


(막 5: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막 5: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 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그렇습니다.


물론 우리가 문제를 만났을 때 그 문제 앞에 가만히 당하고 있는 사람 없을 것입니다.


나름대로 그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이리 뛰어 보고 저리 뛰어 봅니다.


괴로우니까 술도 마셔보고,


가슴이 답답하니까 춤도 춰보고, 그림 공부도해보고, 담배도 피워봅니다.


아니면 말이 좀 통한다 싶은 사람을 찾아가서 자기의 속내를 다 털어내 놓으며 수다를 떱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답답하니까? 속상하니까? 힘이 드니까? 괴로우니까?


그러나 그렇게 했더니 여러분에게 있던 문제가 해결이 됩디까?


그렇게 괴로운 문제가 싹없어지고 뭔가 시원하게 뻥 뚤립디까?


아닙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있기에, 문제가 있기에, 속상함이 있기에 그 문제 앞에서 밤새도록 술을 마셔보세요. 문제가 해결이 되는가?


하루 종일, 밤새도록 그림공부를 해 보세요. 그 문제들이 해결이 되는가?


하루 종일 피워대 보세요. 문제가 해결되는가?


하루 종일 흔들어 대보세요. 문제가 흔들거리는가?


하루 종일 앉아서 수다를 떨고 내 마음을 털어내 보세요. 문제가 해결이 되는가 말입니다.


해결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더 문제만 쌓입니다.


더 힘만 듭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그렇게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한다고 문제가 해결이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문제만 더 꼬이게 만듭니다.


여러분과 저의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우리에게 있는 문제가 해결되어졌다면 여러분과 저가 지금 이렇게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3.그렇다면 누가, 그 무엇이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자입니까?


분명한 것은 우리 앞에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산더미 같이 쌓여 있고, 다가옵니다.


그렇다고 내가 그 문제와 사건 앞에 원망하고 불평한다고 될 일도 아니요,


내가 나름대로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뭔가 해보기는 해봐도 문제가 해결이 되기는커녕 더 꼬여만 가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방법이 없을까요?


우리 앞에 있는 문제는 해결이 안될까요?


아닙니다.


방법이 있습니다.


해결이 됩니다.


문제는 그 방법이, 해결이 인간의 힘과 수단과 방법이 아닙니다.


(슥 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 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 느니라


그렇습니다.


여러분과 저로는 안되지만 하나님으로서는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었던 본문을 보십시오.


간질로 고생하는 아이를 고쳐 달라고 아이의 부모가 데려왔기에 제자들이 나름대로 고쳐 보려고 힘쓰고 애를 썼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힘쓰고 애썼겠습니까?


그래도 맹세기 예수님의 제자들인데....


그런데 16절에 무엇이라 말합니까?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려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제자들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1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은 하지 못했지만 주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하시니 그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이 되어졌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있는 문제, 그 문제가 어떤 문제든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힘도 없지만 주님께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능력과 힘을 가지고 계신 해결자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에 돈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해결하십니다.


세상에 있는 힘있고, 빽 있는 사람이 해결자가 아니라 예수님이 해결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있는 죄 문제를 해결하겠습니까?


누가 우리 인생의 수많은 고민과 아픔을 해결하시겠습니까?


보세요. 누가 해결하는지.


누가 소경 바디매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까?


누가 앉은뱅이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까?


누가 세리장 삭개오의 답답한 마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까?


누가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까?


누가 앞에는 홍해 바다요, 뒤에는 애굽 군대의 잡아죽이려는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까?


누가 갈멜산 제단 위에 하늘로서 불을 내려 주사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누가 꿈을 해석하지 못하면 죽을 위기 가운데서 건져 주십니까?


누가 절하지 않음으로 뜨거운 풀무 불 속에 집어 던저져 죽을 문제 가운데 건지십니까?


예수님이 해결하십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있는 수고와 슬픔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과 자에게 있는 무거운 짐을 풀어 해결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지금 내게 닥친 문제를 능히 해결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지금 여러분과 저를 힘들게 하는 답답하고 속상한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해결자십니다.


여러분과 저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이는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4.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①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십시오.


간질로 고생하고 있는 아이의 부모가 자신의 문제, 자식의 문제를 끌어 앉고 어디를 갑니까? 누구를 찾습니까?


14절에 보면, `예수께 와서 끓어 엎드리어`


그렇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 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열어 주셔야 하고, 닫아 주셔야 합니다.


아무리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덤벼들지라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문제가 해결이 안됩니다.


그러니 제발 지금 여러분에게 있는 문제들을 끌어안고 끙끙대지 말고 주님 앞에 나갑시다.


제발 여러분에게 있는 문제들을 끌어안고 엉뚱한데 가지 맙시다.


예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자신의 문제를 끌어안고 주님 앞에 나갑시다.


가정의 문제, 식구들의 문제를 끌어안고 주님께 나갑시다.


주님께서도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오라 하십니다.


나가면 주님께서 쉼을 주실 줄 믿습니다.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②문제를 주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본문 14절에 간질로 고생하는 아이를 둔 부모가 예수님께 나아와 어떻게 합니까?


`예수께 와서 엎드리어 가로되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 아이의 부모는 자신의 속내를 주님께 다 털어 내 놓습니다.


눌려 있는 자신의 모습, 아픈 모습, 답답한 모습, 힘든 모습을 주님께 다 내려놓습니다.


자신의 모습 그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못하면 못한대로, 안되면 안되는 대로 다 아룁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역사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여러분과 저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와 사건들을 주님께서는 능히 해결하십니다.


그렇기에 그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약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 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다른데 구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구하지 말고 주님께 구하십시오.


왜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주님이 계신데, 주님께서 구하면 주시겠다는데 왜 말 안 듣습니까?


왜 고집 피웁니까?


왜 지름길을 놓아두고 돌아서 가렵니까?


왜 해결이 안 되는 길만 찾아가십니까?


주님께 아룁시다.


주님은 반드시 해결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아뢸 때 주님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힘을 주실 것이고,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막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문제든 상관없습니다.


어떤 형편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그 문제를 끓어 안고 있다고 해서 해결 안 될 것은 분명한 사실 아닙니까?


그것 내가 끓어 안고 있어봐야 나만 더 힘들어 집니다.


나름대로 해결해보려고 하지만 그것이 해결이 되느냐 말입니다.


그러나 길이 있습니다. 해결될 길이 있습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오직 예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이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자십니다.


예수님께 나갑시다.


그리고 그 주님께 문제를 아뢰시고 해결해 주시기를 구합시다.


좋으신 예수님은 반드시 여러분과 저에게 있는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주실줄 믿습니다



                                



제목 : 전도자의 자세                                      


본문 : 고전-02-01-16                                      


고린도전서 2:1-16



  매일 낮12시가 되기 직전에 전화국으로 시간을 물어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 정확한 시간이 몇 시입니까?\" 매일 거의 정확한 시간에 시간을 물어 오므로 교환수는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매일매일 꼭 이 시간만 되면 전화를 걸어 시간을 묻습니까?\" \"별 이유는 없습니다. 저는 12시에 종을 쳐서 마을 사람들에게 정오를 알려주는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말을 들은 교환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고 합니다. \"참 재미있군요. 우리는 당신의 종소리에 시계를 맞추고 있는데요.\"



  우리는 가끔 삶의 기준을 이렇게 엉뚱한 것에 맞추고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의 가문, 학식, 명예, 재물 등르 가장 고상하고 고귀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삶의 기준이 변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주님의 진정한 제자는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기준과는 사뭇 달라야 합니다. 주님을 중심하며 살고, 주님을 따라 살며, 주님을 배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제자들에게 내리신 가장 큰 명령은 \'전도명령\'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한 사람이라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요6:39)이며, 예수님은 이 일에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아름다운 삶을 사시다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이 일에 증인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입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아침에는 성공적인 전도를 하기 위한 전도자의 자세를 살펴보겠습니다.



  1. 어리석은 전도자의 자세 세 가지


  첫째, 전도를 두려워함.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전도를 잘 하는 바울 사도도 이렇게 두려워 할 때가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왜 전도를 두려워할까요?


   실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 나보다 많이 배운 사람을 만나거나 지위 높은 사람을 만날 때 두려워합니다.


  ƒ 전도에 자신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하였습니다.


  둘째, 아름다운 말로만 하려함.


  전도자는 설교자가 아닙니다. 전도는 유창한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말만 그럴 듯 하게 하고 행치 않는 것은 전도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웅변을 잘 한다고 설교를 잘합니까? 말을 잘 한다고 전도를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셋째, 인간적인 지혜를 총동원함.


  바울은 고린도에 오기 직전에 아덴에 들렸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인간의 지혜를 의지하고 전도를 하다가 철학을 숭상하는 이방인들에게 엄청난 실패의 경험을 겪었습니다. 이렇게 쓴 실패를 경험하고 난 후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한 것입니다. 진실한 신자의 모습을 보여줄 때 그 신앙적 인격에 감화되어 전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지혜로운 전도자의 자세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해야함.


  바울 사도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 왜나하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전하려면 먼저 십자가를 체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전하려면 십자가를 실천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희생입니다. 십자가는 용서입니다. 십자가 목걸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활에서 십자가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둘째, 성령의 능력으로 전해야함.


  바울 사도가 자기 말, 자기의 지혜를 의지하고 나섰을 때는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전하기 앞서


  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릴 것과


  ‚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으리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예수님이 죽으신 후 사람들이 두려워 문을 꼭 닫고 숨어 있었지만(요 20:19)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니 담대히 전도할 수 있었습니다.(행 2:1-4) 베드로가 인간적인 지혜로 주님을 따라가려 하다가 오히려 조그마한 계집아이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하였습니다.(마 26:69-75) 그러나 성령이 충만하니 담대히 예수님을 전하고, 유대인들이 잡아 때리며 전도하지 못하게 하니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9-20)고 하였습니다.



  전도하기가 두렵습니까? 기도하여 성령의 능력을 받으십시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십니까? 성령께서 말씀을 주시도록 기도하고 맡깁시다. 그리고 인간적인 얕은 꾀를 쓰려고 하지말고 성령의 능력으로 전도합시다. 주님만 바라보고 십자가만 증거합시다. 주님은 주님을 따르며 복음을 전파하는 이들에게 함께 하시고 언제나 능력으로 채워 주십니다. 



                                  


제목 : 솔로몬이 실패한 원인은 무엇인가                                     


 본문 : 왕상-11-09-13                                     


 ▲부와 권력의 맛을 본 솔로몬은 스스로 겸비하


고 내핍한 생활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뉴스앤조이 김승범


전 세계적으로 신·불신을 떠나서 솔로몬은 이른바 성공한 사람의 전형적인 인물로, 지혜로운 사람의 표상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그를 흠모한 나머지 솔로몬이라는 이름으로 된 브랜드나 상호들이 많다. \'솔로몬 영재학원\'이 있고 \'솔로몬 신용정보회사\'도 있고 \'솔로몬 공예\' \'솔로몬 온돌침대\' 등 솔로몬의 이름과 관련된 사이트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과연 솔로몬은 성공한 사람인가? 그렇다. 다윗이 그렇게도 짓고 싶었지만 허락되지 않았던 성전을 완공함으로써 신정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했다. 화려하고 웅장한 왕궁을 건축하므로 강력한 중앙집권의 공을 세웠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혜로운 판단과 판결로 국가의 기본 질서를 확립하며 도덕 정책의 기조를 완성했다. 강력한 리더십과 외교적 수완으로 국제 사회의 질서를 회복해 평화를 정착시켰다. 탁월한 경영 마인드로 막대한 부를 벌어들여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전국을 요새화해서 외침의 공포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했다.



그러나 솔로몬에 대한 400년 이후의 평가는 완전한 실패자였다. 본문은 바벨론 포로 말기인 BC 561∼538년 사이에 기록된 말씀으로 솔로몬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본문을 정리해 보면 9절에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났다\'는 말씀이 있다. 그리고 다음 구절을 보면 하나님 여호와를 떠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데 다른 신을 좇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 숭배를 한 것이다. 10절을 보라. \'이 일에 대하여 명하사 다른 신을 좇지 말라 하셨으나 저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 11절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나의 언약과 내가 네게 명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에게 주리라\'라는 말씀으로 이어진다. 이 말씀에 비추어볼 때 이스라엘 분열의 원인인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솔로몬이다. 솔로몬이 재임 기간 동안 아무리 화려한 업적을 쌓았다고 하더라도 나라를 두 쪽으로 갈라놓게 하였으니 솔로몬은 실패자임에 틀림이 없다.



우상 숭배로 스스로 무너져



솔로몬의 실패는 역사의 아이러니다. 솔로몬은 실력이나 지식이 없어서 실패한 것이 아니다. 군사력이 없어서 실패한 것이 아니다. 외화가 없어서 망한 것도 아니다. 그는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으며 엄청난 경제적 부와 지식과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실패할 이유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솔로몬의 실패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클 수밖에 없다. 개인이나 국가에 있어서 진정한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역사의 주체가 누구이며 원동력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이제 솔로몬의 실패 원인을 짚어 보자. 솔로몬이 실패한 직접적인 원인은 우상 숭배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본문에서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10절). 그리고 또 하나를 찾는다면 언약과 법도를 지키지 않은 것이다(11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우상 숭배는 간단하게 이해된다.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상 숭배를 하나님이 가장 싫어한 것이라면 무엇이 우상인지 간단히 정리가 된다. 그러나 언약과 법도는 뭔가 복잡해 보이고 넓어 보인다. 그런데 이것도 복잡하지 않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선포(렘 9:24)에 의하면 하나님의 법도란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행하는 것이다. 신약의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으로 해석하는데, 하나님의 나라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정리했다(롬 14:17). 그러므로 솔로몬이 하나님의 언약과 법도를 행하지 못했다는 것은 인애와 공평과 정직이라는 가치를 그의 정책에서 구현하지 못했다는 뜻이 되며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가치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한 단계 더 나아가 다음 질문을 해보자. 왜 솔로몬이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었으며 그리고 왜 인애와 공평과 정직이라는 가치를 저버릴 수밖에 없었던가?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그의 어마어마한 성공이 그로 하여금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도록 했으며, 인애와 공평과 정직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게 했다.



솔로몬은 7년 여에 걸쳐 어마어마한 규모의 성전을 완공하였다. 그리고 13년이라는 세월 동안 자신과 그의 사랑하는 아내 애굽 공주를 위한 왕궁을 건축하였다. 집권 40년 동안 절반은 대 건축 공사로 시간을 보낸 셈이다. 성전과 왕궁 공사를 위해 동원된 노동자 수가 벌목꾼이 3만 명, 채석장에서 일한 노동자만도 15만 명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노예 신분이었다. 도합 18만 명이 동원된 이 공사에서 이들을 관리 감독하기 위해 임명된 지휘관만 해도 3천3백 명에 달했다.



그리고 솔로몬은 전국을 요새화했다. 하닷과 르손의 반란을 제외하고는 40년 동안 평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전국을 요새로 만들었다. 밀로와 게셀과 므깃도와 하솔과 같은 지역에 전략적인 도시를 건설했다. 이 공사에 동원된 인력들은 대부분 그 땅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으로 강제 동원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병사 1만2천 명과 전차 1천4백대로 특전사를 만들어서 전국의 요새에 배치하고 이 특수 부대에 필요한 군사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보급 창고를 각지에 건설했다. 그리고 그 지역 주민들로 하여금 그 창고를 채우도록 했다. 특히 솔로몬을 위한 의전 호위병을 두고 그들의 무기를 모두 금으로 장식했다.



솔로몬은 이런 국가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서 막대한 인력과 자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에시온게벨이라는 곳에 제련소와 조선소를 설치하고 구리를 생산함과 동시에 무역선을 건조했으며, 두로의 히람의 지원한 선원들을 고용해서 아라비아 남단 오빌에까지 무역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전차와 군마를 주변 국가들에게 되팔기도 했다. 일종의 무기 무역을 한 것이다. 이 거래를 통해 엄청난 부를 획득했다.



하나님의 언약과 명령은 외면



이와 같은 국가 시스템을 운용하는 가운데 하나님 중심 사상이라는 것은 시대에 뒤지는 낡은 사상으로 인식되었고, 새 시대에 새로운 이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은 나라와 화친을 맺고 수교해서 교역량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여인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었는데 많은 나라와 교역을 확대하고 외교적으로 안정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정략적으로 많은 이방 여인들을 정실과 소실로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방 여인 가운데 정실이 700명, 소실이 300명이나 되었다.



이 여인들의 입장에서는 솔로몬에게 인정을 받는다면 곧 팔자를 고치는 일이기에 기를 쓰고 유혹했을 것도 뻔한 일이다. 그리고 솔로몬이 마음을 빼앗긴 여인들을 통해서 그들의 사상과 철학이 농축된 우상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상이 무엇인가? 시돈의 아스다롯(아세라)은 사랑과 성의 신이다. 그리스 아프로디테, 로마 비너스와 같은 신이다. 밀곰, 그모스는 전쟁의 신이다. 풍요와 다산과 전쟁을 상징하는 신들로 부국강병을 지향하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사상인 셈이다. 솔로몬에게는 국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시급하게 요청되었던 사상의 근거가 된 것이다. 이렇게 우상 숭배가 이루어졌다.



한편 솔로몬의 성공은 계급을 발생하게 했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라는 인간 차별을 낳게 만들었다. 특히 군벌이라는 계급을 낳게 했다. 그리고 외국인들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마저도 빼앗기고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인 공평과 평화가 허물어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솔로몬의 성공은 과다한 조세와 부역의 부담을 낳았으며, 결국 지파간 갈등 원인이 되어 분열로 가는 기초가 되었다. 열왕기상 12장 1∼11절의 내용을 살펴보자. 여로보암이 북쪽의 열 지파 사람들과 와서 솔로몬이 부과한 과중한 세금을 감면해줄 것을 왕위 계승자인 르호보암에게 요청한다. 그러나 르호보암이 원로들의 조언을 거부하고 젊은 측근들의 이야기만 듣고 묵살해 버린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결국 여로보암이 북쪽 열 지파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됨으로써 분열하게 된다.



솔로몬의 실패 원인은 외적 화려함, 자신을 드러냄, 우주의 중심에 서고 싶은 욕구 충족과 같은 성공을 지향했던 야심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언약과 명령을 좇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인 욕망을 좇은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성도가 성공을 지향할 때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 크다. 일등을 지향하고, 거대함을 지향하고, 화려함을 지향하고, 드러냄을 지향할 때, 즉 안정과 권력을 지향할 때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치러야 할 값은 너무 크다. 지금 미국과 같은 나라가 패권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한 자국은 물론이고 인류 역사에 고통을 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하나님과 이웃 사랑이라는 정신에서 태동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그들의 조상의 건국 이념을 지탱하지 못할 것이다. 실패를 눈앞에 둔 솔로몬이 할 수 있었던 일은 무엇이었나?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권력에 사라진 \'또 한 번의 기회\'



우선 솔로몬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12∼13절을 보라. \'그러나 네 아비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치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빼앗지 아니하고 나의 종 다윗과 나의 뺀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하셨더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살아 생전에는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다시 한번 기회를 준 것이다. 초심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따라서 그 아버지 다윗과 같이 순수한 믿음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세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마 다윗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면 그 날로 침상이 썩도록 통회하면서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이 종이 죄인입니다. 하나님이 빼신 백성을 쪼개시다니요. 차라리 종을 쪼개시고 이 백성을 용서해주십시오\'라고 회개했을 것이며 결국 하나님의 마음을 돌려놓았을 것이다.



그런데 솔로몬은 회개하고 과거로 돌아가지 못했다. 왜 그렇게 하지 못했는가? 이미 쌓아 놓은 국가 시스템을 허문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부인 1천명을 쫓아내는 것이 이미 불가능한 상태였다. 더군다나 군벌과 행정 관리들 그리고 재벌들과 같은 권력을 해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솔로몬 개인이야 회개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전도서에 나타난 솔로몬의 고백을 보면 모든 것이 헛된 것이었으며 실패자라고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굳어버린 거대한 권력 계급을 해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부와 권력의 맛을 본 사람들이 스스로 겸비하고 내핍한 생활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권력이란 무서운 것이다. 부나 지위나 지식이 타자를 위하지 못하고 자신을 위하는 권력화가 되면 역사는 반드시 고통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권력화의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가 설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개인이나 교회가 권력화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하며 막아야 한다.



다윗의 국가 시스템은 철저하게 비권력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다윗은 상비군을 갖지 않았다. 전쟁이 벌어지면 하나님께 기도해서 전쟁의 참여 여부를 묻고 그때마다 모병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병사들은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한 번은 빈번한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고자 인구 조사를 했다가 혼이 났다(삼하 24장). 그 이후로 다윗은 상비군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버렸다. 전쟁이 끝나면 군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으며 조직화된 군대 시스템의 이권을 독점하는 군벌도 있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어느 때보다 풍요롭고 평등하고 행복했다. 결코 화려하고 거대하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경제적 부와 문화적 풍성함을 후대에 남길 수 있었다.



의·평강·희락 추구하는 성도 되어야


성도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솔로몬처럼 화려함과 거대함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다윗처럼 하나님의 언약과 명령 즉 인애와 공평과 정직이라는 거룩함을 추구할 것인가? 세상은 철저하게 안정과 권력을 위해 달려가도록 유혹하고 억압한다. 그러나 성도는 끝까지 의와 평강과 희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13절을 보자.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나의 종 다윗과 나의 뺀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하셨더라.\' 비록 솔로몬이 철저하게 하나님을 배신하고 돌아섰지만 하나님은 그의 빼신 백성을 절대로 버리지 않으신다. 다시 회복하신다. 부친 다윗과 그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생각하셔서 결코 저버리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열왕기서의 저자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긍휼하심이었다.



                                


제목 : 새 역사를 창조하는 믿음을 소유하라                                      


본문 : 수-02-01-14                                     


 새 역사를 창조한 영적 거인 중에 기생 라합이 있습니다. 라합은 비천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생 라합을 택하셔서 위대한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누구든지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라합은 죽음을 무릅쓰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주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라합은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새 역사를 창조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믿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믿음이 그토록 중요할까요? 그리고 믿음은 어떻게 성장시킬 수 있을까요?



1. 믿음은 비천한 여인을 영적 거인으로 만드는 능력입니다.


기생 라합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믿음입니다. 신앙의 힘은 무섭습니다. 신앙은 신분을 초월하고, 과거를 초월하며 환경을 초월하는 능력입니다.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에서는 기생 라합을 믿음의 조상들의 명단에 포함시킬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과 함께 라합의 믿음을 나란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에서 라합을 소개할 때마다 그 앞에 기생이라는 말을 넣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신분을 초월해서 믿음의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게 보는 것이 믿음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산 라합에게 그녀와 그녀의 온 가족이 구원받는 상을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기생 라합의 가장 큰 영광은 그녀의 이름이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마1:5). 신앙의 힘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믿음의 능력은 크고 위대한 것입니다.



2. 새 역사를 창조하는 믿음을 소유하는 지혜를 배우십시오.


어떻게 라합과 같은 믿음을 소유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강하게, 작은 믿음을 큰 믿음으로 성장시킬 수 있을까요?


가장 먼저 우리는 믿음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로서 난 믿음입니다(엡2:8-9).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장합니다(롬10:17). 라합은 하나님에 대한 소식을 들으면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수2:10).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또한 믿음은 입술로 고백하고 증거할 때 성장합니다. 라합의 믿음은 입술로 고백하는 믿음이었습니다(수2:11).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입술로 신앙을 고백할 때 성장합니다(롬10:9-11). 믿음은 말씀을 실천할 때 성장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입니다. 믿음을 따라 산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입니다. 라합은 그가 믿는 하나님을 위해 대가를 치르기로 결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은 다른 사람의 믿음이 성장하도록 도와 줄 때 성장합니다. 라합의 믿음은 다른 사람의 약한 믿음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믿음이었습니다. 라합의 믿음과 확신이 여호수아와 전 이스라엘에게 놀라운 용기와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수2:9).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기생도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사용하기 원하는 사람은 거룩하게 만들어 사용하십니다. 기생 라합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믿음입니다(행15:9).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말씀을 들으십시오. 입술로 고백하십시오. 말씀을 실천하십시오. 다른 사람의 믿음이 성장하도록 도와주십시오. 당신의 믿음은 놀랍게 성장할 것입니다. 라합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크게 쓰임 받는 축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제목 : 불을 던지러 오신 예수님                                      


본문 : 눅-12-49-56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모두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해가야 합니다. 제자들에게 해주신 말씀은 베드로의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밝혀 주신 말씀이고, 무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일기를 예상하고 분별하는 것처럼 시대의 상황을 보고 시대를 알아야 한다고 일러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많은 사람이 목적 없이 살고 있고, 급변하는 상황이 예측할 수 없는 기상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알고 따르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시대의 징조를 보고 준비하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불을 땅에 던지러



성경에서 우리가 불이란 말을 접하게 될 때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심판입니다. 아브라함 시대에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불을 내리셨을 때 그것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여 하늘에서 땅에 불을 내리셨을 때 그것은 악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심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땅에 불을 던지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불”에 대한 해석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성령”이라는 견해도 있고, “영적인 활동”이라는 의견도 있고 “심판”, “로마의 침략”, “신자에 대한 불신자의 적대감”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은 딱 한가지라고 꼬집어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심판을 의미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말씀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 하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불을 땅에 던지러 왔는데 불이 아직 붙지 않아서 마음이 답답함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그분은 진정 불이 붙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불이 붙기를 원하셨는데 그 불은 어떤 불일까요?



1>말씀의 불입니다.


예수님은 불같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시는 반면 잘못된 것들과 죄악 된 행동들에 대해서 날카롭게 책망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감동을 받기도 하고 찔림을 받기도 했습니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24: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23:29)



2>사랑과 희생의 불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세례란 십자가 고난을 가리킵니다. 마치 어린양이 제단 위에서 불에 태워지듯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인류에 대한 사랑과 인류를 위한 희생의 불로 자신의 몸을 사르셨습니다. 사실상 그분이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때부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생애는 사랑과 희생의 불로 계속해서 살라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3>성령의 불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역을 소개하면서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마3:11). 일부 성경학자들은 이 말씀을 구분하여 예수님이 초림 시에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고 재림 시에는 불로 세례를 주신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성경에서 불이 심판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고 재림 시 예수님은 심판주로 임하신다는 사실이 그들의 해석 근거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성령과 불로주는 세례\"를 굳이 하나가 아니라 둘로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할 정당한 근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순절에 제자들이 성령 세례를 받는 것과 관련해서 불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제자들 위에 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행2:1-4). 심판에 대한 명백한 언급은 이어지는 다음 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12절)



예수님은 말씀의 불을 던지셨습니다. 사랑과 희생의 불을 던지셨습니다. 성령의 불은 아직 던져지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이미 던지신 말씀의 불과 사랑과 희생의 불만으로도 사람들에게 불이 붙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불이 잘 붙지 않아 답답해하신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앞서 신실치 못한 청지기 비유를 하셨는데 주인의 말을 들어 그의 뜻을 알면서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하는 사람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이 불이 붙지 않은 사람입니다. 어쩌면 아직까지도 그분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열두 제자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주님이 던지신 불로 인해 불이 붙었습니까? 불이 붙었는지 그 증상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 불로 인해 우리 안의 미움, 질투, 시기, 다툼, 욕심 등이 타버렸습니까? 그 불로 인해 우리가 주님을 위한 열정으로 뜨거워지고 있습니까? 그 불로 인해 주님처럼 우리 자신을 희생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가진 등잔에 불이 타오르고 있어 주위를 환하게 비취고 있습니까?



주님의 답답함



50절에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받으실 세례는 다가오는 십자가의 고난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은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세상에 생명을 주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길을 가는 것인데 그 고난을 몰라주는 제자들을 보실 때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과 제자들이나 사람들의 기대가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의 답답하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다가 동문서답하는 경우를 만나면 얼마나 답답해합니까. 예수님의 마음은 바로 그런 상태였을 것입니다. 삼년동안 가르치고 보여주시고 했어도 큰소리만 쳤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 버릴 뿐 아니라 저주하며 부인하는 자리까지 간 제자들의 모습에 예수님의 답답함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다 이루시기까지는 그 답답한 마음을 계속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마음에 답답함을 주는 삶을 살지는 않는지요? 여전히 높은 자리 찾고, 많은 것 구하고, 대접받기 좋아하고, 예수님을 팔아서 자기를 들어내고 배불리는 짓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은 구름을 보고 기상 상태를 예상합니다. 요즘은 과거와는 달리 거의 정확하게 일기예보를 해줍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한다던지 계획을 세울 때 기상 예보를 참고해서 정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 아는데 주님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니 얼마나 주님은 답답하시겠습니까?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56절)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의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십니까? 주님께서 무엇 때문에 십자가 고난을 당하셔야 하셨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그토록 무서운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는데 아직도 그 고난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답답한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릴 수 있을 까요? 주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희생하셨는가를 깨닫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성도가 될 때 주님의 답답함이 풀어지지 않을까요?



화평이냐? 분쟁이냐?



51절 말씀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 로라\"


그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태어나던 날 밤하늘에 울려 퍼진 천사들의 합창이 있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천사가 베들레헴 지경에서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예수 탄생의 소식을 전할 때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말했습니다(눅2:10).


그분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이 화목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하시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탄은 분명 평화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집안 식구들로 서로 분쟁케 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평화의 왕이시고(사9:6) 화평케 하는 자를 복 주십니다(마5:9).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주님께서는 결코 가정이 분열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자유로운 이혼이 성행하던 그 당시에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정의 중요성과 이혼 불가를 외치셨습니다(마19:6).



가정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은 주님을 믿는 사람이기보다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꼬투리를 잡고 분란을 일으키며 믿는 사람을 핍박합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이 본의 아니게 분쟁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한 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은 분쟁케 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에는 어설픈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타협하려는 유혹에 대해서 제자들을 경계하시려는 뜻도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던지신 불에 불이 붙은 사람은 핍박 중에서도 당당하게 견딜 수 있을 것이며 종국에 가서 주님은 그 가정을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옥호열 목사님이라는 분은 6.25 때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군목으로 계시면서 북한의 인민군 포로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저녁 식사 후 막사를 한 바퀴 돌다가 화장실에서 어떤 포로 청년이“내가 죽일 놈이지. 내가 죽일 놈이지”하며 울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청년, 나는 아시다시피 여기서 여러분을 돕기 위해 있는 군목인데 무슨 사정이 있으면 이야기하시오. 내가 도울 테니”라고 말하자 이 청년은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북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저와 결혼한 아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진실 되게 잘 믿던지 나는 마음이 상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은 아내를 찾으러 교회에 갔는데 예배 중이었습니다. 그래도 보란 듯이 신발을 신고 뚜벅뚜벅 들어가 제 아내의 머리칼을 휘어잡고서 예배당 뜰에서 한참 때려주었습니다. 그래도 한 번도 반항하지 않더군요. 이상한 것이 다른 말은 제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내는 아내인데, 교회 나가지 말라는 말은 전혀 듣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인민군에 징집이 되어 전쟁을 하다가 유엔군에게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미군 장교가 나오더니 우리 포로들을 한 줄로 세우고 뭐라고 말을 하면서 손짓을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을 골라내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살고 싶은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제 차례가 되었는데 가슴에 십자가를 그렸더니 노래하라고 손짓을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제가 찬송가를 압니까. 갑자기 머릿속에 제 아내가 저한테 매 맞고 부르던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저 살기 위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O. K 하면서 저를 따로 세워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지금은 예수님을 내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구원받게 된 것은 제 아내의 찬미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성남에서 잠깐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 집사람 친구가 자기네 집에 와서 살아도 좋다고 해서 조그마한 방에 살았는데 그 친구 아버지가 과거에는 얼마나 강퍅한 사람인지 자기 부인과 자녀들이 예수 믿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여 심하게 핍박하였습니다. 부인은 집사님이었는데 한번은 예배 시간에 예배당에 찾아가서 부인의 머리채를 질질 끌고 나와서 연탄재를 입에다 쳐 넣으면서 그래도 예수 믿겠느냐? 라고 다그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부인 집사님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가정에 평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처럼 분쟁이 끊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부인이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부인이 죽고 나서 그 남편이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고 교회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분쟁이 왜 일어납니까?


그것은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귀에게 속한 자와 하나님께 속한 자가 결코 하나 될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가인이 왜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까?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자였던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였을 때는 절대로 마귀가 핍박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같은 소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영적인 전쟁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영적인 전쟁은 심지어 혈연관계까지 끊어 놓을 수도 있을 정도로 심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불을 던지셔서 사람들의 맘에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가 생길 때 일어나는 현상일 것입니다. 반드시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가 반드시 나뉘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적게는 가정에서부터 나뉘게 됩니다. 참 믿음으로 사는 사람,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나뉘게 됩니다. 가족 관계가 깨어지는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때로 믿음의 삶이 가족관계를 넘을 때가 있고 때로 그런 결단이 필요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다가 집에서 쫓겨난 아들이 있습니다. 시댁에서 쫓겨난 며느리도 있습니다. 결혼도 믿지 않는 사람과 하지 않겠다고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신앙과 불신은 나뉘어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말로는 알곡과 쭉정이가 나뉘고 의인과 악인이 나뉘고 양과 염소가 나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가정에서부터 신앙의 결단을 위한 분쟁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임을 알고 바른 신앙을 위해 바른 결단을 해 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오셨습니다. 이 불이 붙으면 소속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물과 기름이 결코 하나 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이렇게 구별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구별된 백성이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에게는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전쟁은 때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전쟁으로 나타나고, 때로는 우리가 눈으로 확연하게 볼 수 있는 육적인 전쟁으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면 우리는 각오해야 합니다. 어떤 희생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어야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 가도다. 이제부터 예수로만 나의 보배 삼겠네!”






                                


제목 :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본문 : 눅-17-05-10                                      


오늘 말씀의 시작은 사도들이 예수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말씀드리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두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을 더해 달라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왜 하필이면 가장 작은 겨자씨에다 믿음을 비유하셨을까요. 우리들도 흔히 그런 말을 쓰듯이 보통 \'큰 믿음\' \'놀라운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만 있어도 뽕나무에게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져라 하여도 순종하여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작아도 그 속에 생명이 들어있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그 겉모양의 크기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있는 참 생명에 달려 있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경력이나, 직분이나, 믿어 온 세월이나, 심지어 성경지식이나, 그러한 겉모양이 생명은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을 담는 그릇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생명 그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비록 겉모양이 겨자씨 같이 작아도 그 속에 생명이 들어있으면 뽕나무를 뽑아 바다에 심기우게 하는 능력이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종들이 밭에 가서 하루 종일 일한 후에 돌아와서 오히려 주인의 식사를 만들어 차려 드리는 충성스런 종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믿음 안에는 신비도 있고, 능력도 있고, 기적도 있지만 충성스런 헌신이 믿음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단순히 헌신하는 것만이 아니라 겸손한 헌신을 말씀하셨습니다. 종들이 그렇게 하루 종일 밖에서 일했음에도 들어와서 주인의 저녁상을 차리고,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것을 한 것뿐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를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17:9-10


믿음의 근본은 하나님의 내려주신 은혜를 깨달아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된 믿음의 사람은 항상 충성스러운 헌신자의 모습이 되고, 더더구나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본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나라의 장면-- 하나님께서 앉으신 의자 둘레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앉아있는 장면을 보았습니다(요한계시록4:4-11). 그들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하며 찬송하는 하늘 찬송에 화답하여 \'주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마땅하십니다\'고 찬송합니다. 찬송하는 중에 그 이십사 장로들은 상급으로 받은 머리의 금관을 벗어서 주님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왜 이십사 장로들은 자신들에게 주신 상급인 면류관을 벗어서 주님께 드리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비하면 저희들이 한 일이라곤 티끌만도 못합니다\'는 고백 때문입니다.


     우리 찬송가에도 수없이 나옵니다.


   거룩 거룩 거룩 주의 보좌 앞에 모든 성도 면류관을 벗어 드리네.... 8장


   면류관 벗어서 주 앞에 드리세 저 천사 기쁜 노래가 온 땅에 퍼지네 .....25장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 면류관을 주 앞에 드리세... 31장


   주 예수 이름 높이어 다 찬송하여라. 금면류관을 드려서 만유의 주 찬양...36장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이것이 참 믿음의 사람의 고백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이십사 장로들이 자신의 면류관을 벗어서 주님께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라고 구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 진실된 종의 헌신, 그것이 믿음이요, 그것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귀신들려 물불 가리지 않고 뛰는 자기의 아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고쳐주기를 구합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께 와서 엎드리어 아뢰었습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그 때에 주님께서 이 사람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9:23


깜짝 놀라서 그 아버지가 고백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마가복음 9:24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의 고백과 닮았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저려옵니다. 마치 저의 기도처럼 들려옵니다. 하나님을 향한 제 가슴에 울림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가슴이 저려옵니다. 주여, 이것이 저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저의 기도입니다. 제자들의 고백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믿음의 고백은 항상 분명해야 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이것입니다. 알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지식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향하여 \'내가 믿습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주님, 제가 믿습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없던 믿음도 생겨 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1:17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하면서도 항상 두 마음을 품고 이럴까 저럴까,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식으로 망설이고, 의심하고, 오락가락 하는 것은 어리석은 삶의 모습입니다.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요, 능력의 사람이요,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내가 믿나이다!\'고 분명하게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의 아버지의 두 개의 고백을 눈여겨보게 됩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믿습니다!\'라고 했으면서, 믿음 없는 것을 도와달라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앞뒤가 안 맞아보입니다. 그러나 이 고백이야말로 진실한 자신의 고백입니다. \'믿습니다!\' 하였지만 스스로를 돌아보면 내 믿음이 시원치 않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 아이의 아버지가 이렇게 다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믿음도 그러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 확신에 찬 사람도 삶의 현장에서 항상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받은 은혜만큼 세상을 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결심만큼 행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밀려오는 세파에 힘겨워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고백--그것이 바로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입니다.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백건우\'라는 피아니스트가 TV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좋은 연주자는 두 가지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첫째는 자신감이고, 둘째는 겸손함이다\'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그 연주를 잘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또 아직도 부족하다는 겸손함으로 연주에 임할 때 좋은 연주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야말로 이 두 고백이 동시에 있어야 합니다. 은혜의 자리에서 우리는 \'주여 내가 믿습니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동시에 삶의 자리에서 우리가 부족을 느낄 때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고 구했던 제자들에게 \'작아도 생명을 담은 겨자씨 한 알의 믿음, 충성스럽고 겸손한 종의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믿습니다!\'의 고백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으로 나아가 생활의 복잡한 현실과 맞부딛칠 때마다 \'주여, 저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저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고백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이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하는 능력이 될 줄 믿습니다.


                                



제목 : 전도의 아름다움                                     


 본문 : 롬-10-15-                                      


 전도는(유앙게리온<헬>이반젤리즘<영>) 기쁜 소식, 좋은 소식, 선한소식을 의미합니다.



 거친 바람이 일고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적은 배 한 척이 파선당하여 선원들이 표류 중에 침몰 직전에 구조선이 온다고 한다면 그 소식은 참으로 좋은 기쁨의 소식이 되는 줄 믿습니다. 광산 갱내에서 일하다가 매몰된 광부들에게 구조반의 연장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는 그 이상의 좋은 소식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남기는 가장 의미 있는 말은 유언입니다. 평소에 부모님의 말씀을 거스르던 불량아도 부모의 마지막 유언만큼은 지키려고 노력을 합니다. 왜냐하면 유언은 그만큼 의미가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인물 가운데 역대 이스라엘 나라 다윗 왕은 그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했습니다(왕상2:1-3). 솔로몬 왕은 그의 자녀들에게 역시 유언했습니다(잠3:1-10). 이 유언대로 자녀들이 아름답게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사역을 마치고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 즉 유언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5:16),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마28:19)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냥 말씀이 아니고 유언이요 명령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지상 명령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받은 베드로는 전도하다가 핍박 속에 십자가 거꾸러 매달려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유럽으로 갔습니다. 마가는 애굽으로 가서 전도하다가 순교했습니다. 도마와 윌리암 케리는 인도로 갔습니다. 저드슨은 버마로 갔습니다. 모리슨과 테일러는 중국으로 갔습니다. 리빙스톤이나 슈바이쳐는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토마스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한국에 와서 전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전도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유언을 지키지 않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을 누군가 전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저희가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이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복음을 전하는 이의 발이 아름답다\"고 말씀하십니다.



  전도는 기도도해야 하지만 기도하고는 나가서 전해야 합니다. 기름진 옥토도 있어야 하지만 누군가가 밭에 씨를 뿌려 주어야 합니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맛을 내듯이 전도는 누군가 전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아름답도다 복음을 전하는 발이여는 대환영이라는 뜻입니다.



  육상경기의 꽃이라고 하는 마라톤의 거리가 42.195키로미터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유래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주전 490년경 그리스해안에 있는 마라톤이라는 도시에서 페르시아군은 전함 600, 보병 10만, 기병 1만명과 그리스군은 겨우 1만명의 군사 간에 치열한 대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수적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그리스의 명장 밀티아테스가 전략을 잘 써서 적군을 격퇴시키고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한 병사가 그 멀고 먼 거리를 단숨에 달려와서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시민들에게 \"우리는 이겼습니다\"라는 단 한마디의 소식을 전하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 거리가 42.195키로 미터였습니다.  이를 기념하여 매년 마라톤 대회를 열었던 것이 올림픽의 꽃이 되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에게 이 병사의 발이야 말로 아름다운 발이요 전한 소식이야 말로 아름다운 소식 복된 소식인 줄 믿습니다.



 전도는 이처럼 복되고 기쁘고 참된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 전도자의 아름다운 발걸음을 기다리는 이들을 찾아 가야 합니다. 이렇게 찾아가는 발걸음을 복된 발걸음이라 칭찬하며 환영을 아끼지 않을 줄 믿습니다. 그래서 전도의 아름다움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 하며 은혜를 사모 하고자 합니다.






   전도는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니 아름답습니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6-38) 하신 말씀에서 복음을 화평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평화의 복음이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의 말씀입니다.  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것이요 평화를 전하는 것이며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온갖 설교자는 전도자입니다. 그는 소식을 전달하는 사자일 뿐 아니라 대사입니다. 맨 처음 복음 설교자들은 천사들이었습니다.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눅2:13)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 2:14)라고 합니다.



 복음의 내용은 정말 좋은 것이며 최선의 것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소식이야말로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즐거운 소식이니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온 최고 수준의뉴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세상을 떠나 장례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관식을 하려고 친지들이 장지를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버스 스피커에서 돌아가신 분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악했습니다.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싶어 깜짝 놀라 귀를 기울여 그 내용을 들었습니다. 그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내용은 이렇습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나의 장례식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한 번씩은 다 죽게 되어 있지요? 나도 죽음을 맞이하면서 후회되는 일 그리고 아쉬운 일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든 일들을 되새겨보니까 다 헛된 것이었습니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나는 지금 예수님을 믿어 천국으로 갑니다. 여러분들도 부디 예수를 잘 믿으셔서 천국에서 모두 만나게 되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고 난 다음에 심지어 농담까지도 한 마디 건네는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장지에서 주는 밥, 공짜라고 너무 많이 먹어 배탈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내 죽마고우인 이 집사 나하고 장지에 갈 때마다 음식을 꼬불쳤는데 오늘은 제발 그런 짓 하지 마시오 그럼 나중에 천국에 봅시다. 그러면서 껄껄껄 웃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사실은 이분이 돌아가기 직전에 장지에 가는 사람들에게 틀어 주라고 녹음했던 내용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전도가 평화의 전하는 아름다움임을 바로 알고 인생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누려야 합니다.






  전도는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니 아름답습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딤후 1:10)라고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고 합니다.



 사람들은 생명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어느 대학 학생처장의 이야기라 합니다. 여름에 학생 두 명이 죽었습니다. 한 목사님이 신문을 읽고 측은한 마음이 생겨서 그 학생처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학생처장님, 얼마나 마음이 아프십니까? 그랬더니 이 학생처장의 대답이 무엇이 안타깝습니까? 퍼센트로 따지면 큰 숫자는 아니죠 라고 하더랍니다. 자기 학교 학생이 2,3만 명이나 되는데 그 중에서 두 명 죽은 것이 0.005퍼센트밖에 더 되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전체 숫자로 보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두 명중에 자기 아들이 포함되었다면 어떻게 말했겠습니까? 퍼센트 이야기가 나오겠습니까? 아마도 억장이 무너져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사람과 같지 않습니까? 사람을 통계로 보면 안 됩니다. 통계는 우리를 비인간적으로 만들고, 통계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메마르게 만들어버립니다. 통계는 우리를 죽이는 겁니다. 통계로 볼 때는 0.005퍼센트지만 생명으로 보면 우리 인생을 결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내가 생을 드려서 건져야 할 자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 사명 감당하는 자신이 살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다복한 가정의 중년 부인이 어느 날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저는 요즈음 몸에 기운이 없습니다. 매사에 의욕도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는 재미도 없습니다. 결혼해서 이제껏 남편 뒷바라지 하느라, 아이들 키우느라 정신없이 살아왔는데, 이제 남편 직장도 안정되고 아이들 대학 다니고, 꿈꾸던 일들이 웬만큼 이루어졌는데, 오히려 마음이 이렇게 허전하고 공허할 수 없습니다. 식구들이 직장으로 학교로 나가고 난 후 텅 빈 집에 혼자 있으려면 얼마나 서글픈지 모릅니다. 내가 이제껏 희생하면서 사랑하면서 정신없이 살아온 것은 후회 안합니다. 그러나 텅 빈 내 자신을 드려다 보면 참 서글프기만 합니다. 자, 이때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사십시오. 이제는 즐겁게 인생을 사십시오. 아주머니는 그렇게 살 자격이 있습니다.\"



 바른 진단이요, 치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삶에 의미가 있는 일, 보람 있는 일, 기쁨이 있고, 가치가 있는 일을 함으로 고독과 허무와 삶의 의미 상실을 이겨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참으로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은 사람들에게 영원의 세계를 전하는 일입니다. 생명의 복음을 나누는 일입니다. 영원까지 이어지는 길을 전하는 일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이를 부를 수가 없고 들은 적이 없는 자가 믿을 수가 없고 전파하는 자가 없이 들을 수가 없습니다. 보냄을 받지 아니하면 전파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 복음을 전하려고 보냄 받은 사람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할 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됩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살리고 수많은 영혼을 살리는 길입니다.



  어느 기독교 조사 기관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는데 한 사람이 예수를 믿기까지 평균 네 명 이상에게서 복음을 전해 들었다고 합니다. 평균적으로 네 명 이상으로부터 복음을 들었고 주변에 열 네 명 이상이 기도해주었기 때문에 열매가 맺힐 수 있었던 사실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뜨거운 관심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전도는 지옥 백성을 천국 백성 만드는 일이니 아름답습니다.






지옥간 부자는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눅 16:27)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눅 16:28)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눅 16:29)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눅 16:30)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 (눅 16:31)니 전도는 지옥 갈 자를 천구으로 인도하는 일이 됩니다.






 미국의 부흥사요 청년 지도자인 토리 존슨 목사님이 시카고에서 오클라호마주에 있는 털사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누구 전도할 사람이 없나 열심히 살피다가 조금 한가해 보이지만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스튜어디스를 보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 스튜어디스를 불러서 옆자리에 앉으라고 권하고 사영리를 증거 했다고 합니다.  말씀을 증거 하면서 그리스도를 영접해야만 살 수 있습니다. 라는 짧은 말 한 마디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니까 이 스튜어디스가 그 즉시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어두운 얼굴이 사라지고 밝은 얼굴이 되어서 기쁨을 가지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영접 기도 할 때는 눈물까지 흘렸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스튜어디스가 비행기에서 내리는 존슨 목사님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비행기에서 다시 목사님을 만나 뵙지 못한다면 앞으로 저 천국에서 만나 뵙게 되겠지요? 그런데 이튿날 존슨 목사님이 호텔에서 조간신문을 폈는데 전면에 큰 기사가 났습니다. 털사에서 포트워즈로 가는 비행기 한 대가 추락했다는 기사였습니다. 알고 봤더니만 자기가 탔던 그 비행기였습니다. 승무원과 승객 전원이 다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망자 명단을 죽 읽어 가다가 보니까 어제 비행기 안에서 주님을 영접했던, 그 스튜어디스의 이름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옥 백성이 될 뻔한 한 스튜어디스를 마지막 순간에 천국 백성으로 만드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 복음은 이렇게 한 사람을 지옥 백성에서 천국 백성으로 옮기는 역사가 일어나게 합니다.






 무디의 전기를 읽어 보면 그는 일생에서 씻을 수 없는 큰 과오를 저질렀던 때가 있었다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가 시카코에서 대전도 집회를 했습니다. 수많은 청중이 모인 운동장에서 설교를 하는데 자꾸만 성령이 감동해 오기를 이 시간을 심판에 대해서 종말에 대해서 영혼 구원에 대해서 설교하라고 자꾸만 감동이 옵니다. 그 설교는 내일 저녁에 하려고 하는데 자꾸만 오늘 밤에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감동하기를 \"내일은 네 날이 아니다\"고 그러십니다. 그런 것을 억누르고 \"내일 저녁에 하면 되겠지\"하고 하던 설교를 마치고 그날은 집회를 끝냈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역사에 기록될 시카코 대화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 밤에 시카코 전 시내가 불바다가 되었고 수많은 시민들이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무디는 전날 밤에 인생의 종말에 대해서 설교를 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면서 죄인 된 심정으로 살았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전도의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위암으로 병원에 입원 중이었습니다. 병실 문밖에는 \'면회사절\'이란 글귀와 함께 이런 글귀가 붙어 있었습니다. \'다만 불신 친구나 친지는 가함\' 마침 불신 친구가 있어 면회가 허락되어 목사를 만났습니다. 친구는 측은한 생각으로 목사를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어떤가?\" \"죽을병에 걸렸지. 누구나 한번은 죽을병에 걸리는 법인데 내가 조금 먼저 걸린 셈이지.\" \"어째서 기독신자에게 사절된 면회가 불신자인 나에게는 허락되었는가?\" 목사는 친구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신자는 다 천국에 가서 다시 만나지만 자네 같은 불신자는 만날 수 없기 때문일세.\" \"정말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보는가?\" \"있다고 보는게 아니라 있다고 믿네. 자네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예수 믿지 않겠나?\" \"지옥에 안 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겠네.\" \"그럼 되었어. 빨리 나가게.\" \"왜 그리 서두르는가?\" \"자넨 다시 만날 수 있으니 그때 만나서 나머지 이야기를 하기로 하고 다시 못 만날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 봐야지.\" \"...............\"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후4:18)(천국 가는 목사)






 기쁜 소식은 반드시 전해져야 합니다.  좋은 소식일수록 신속하게 전해야 합니다. 전쟁에서 이겼다고 전하는 한 병사의 기쁜 소식보다 더 기쁜 소식은 복음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많지만 잃은 영혼을 찾아나서는 것, 곧 전도하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유대를 비롯하여 소아시아 지방과 헬라를 몇 번씩 전도 여행하고, 장차는 당시의 세계 모든 문물의 중심지인 로마에 가서 전도하려는 대망을 품고 유대 총독인 베스도와 변론 할 때에 얼마나 열정을 다하여 예수님을 전했던지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행 26:24)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행 26:25)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행 26:26)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행 26:27)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행 26:28)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행 26:29)라고 합니다.



 스탠리 존스는 \"육체적으로는 생산 못할 이가 많지만 영적으로는 생산 못할 이가 없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 말의 뜻은 산아제한이니 산아조절이니 하는 말이 유행하거니와 영적으로는 믿음의 자녀(전도한 사람)를 많이 둘수록 좋으며 제한도 조절도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때가 전도의 기회다 아니다 따질 것이 아니라 힘닿는 대로 복음 증거 해야 합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합니다. 전도는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니 아름답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니 아름답습니다. 지옥 백성을 천국 백성 만드는 일이니 아름답습니다. 기쁘고 복되고 즐거운 복음을 전하며 전도의 아름다음을 드러내는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목 : 평생에 항상 기억할 것                                      


본문 : 신-16-01-8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3대 명절 중 하나인 유월절을 왜 지켜야 하며 어떻게 지켜 행할 것인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아빕월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을 행하라. 이는 아빕월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밤에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라\" 했습니다. \"아빕\"이란 이삭을 말합니다. 아빕월은 보리이삭을 수확하는 달로서 오늘날 우리의 3월 중순부터 4월중순 사이에 해당하는 달입니다. 그런데 이 때에 유월절을 행하라는 것은 그 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해내신 때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6절에서는 \"네가 애굽에서 나오던 시각 곧 초저녁 해 질 때에 유월절 제물을 드리라\"고 그 정확한 시각까지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명절인 것입니다.



2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유월절 제사를 드리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5-6절에서도 \"유월절 제사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각 성에서 드리지 말고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가 애굽에서 나오던 시각 곧 초저녁 해 질 때에 유월절 제물을 드리라\"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에는 각 가정에서 어린양을 잡아 그 피로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고기를 먹었지만 이제부터는 오직 한 곳,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성소에 모여 유월절 제사를 드리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애굽 땅에서 죽음의 사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나간 사건은 개개인의 구원사건이 아니라 한 민족의 구원사건이고 출애굽은 개개인이 자유를 얻은 사건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한 자유독립국가가 형성되는 사건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인도하심을 받는 백성이며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라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선포하신 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3절에서는 \"유교병을 그것과 함께 먹지 말고 이레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함께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네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이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이 무교병을 먹었음을 기념하는 무교절과 연결됨을 볼 수 있습니다. 무교병 즉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떡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급히 나왔음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떡반죽에 누룩을 넣으면 그 반죽이 부풀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반죽이 부풀기를 기다리느라고 출발이 지체될 수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나가라는 출발명령에 즉각적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지체됨을 막기 위해 아예 집안에서 모든 누룩을 없애고 무교병을 먹게 한 것입니다. 노예상태로부터의 즉각적인 출발의 시급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무교병에 대해 오늘 본문에서만 발견하는 의미 있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무교병을 \"고난의 떡\"이라 한 것입니다. \"고난의 떡\"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겪은 가난과 고통의 역사를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의 빈궁하고 고된 삶, 출애굽이 이루어지기까지의 험난한 과정, 떡을 부드럽게 부풀려 먹을 여유도 없이 애굽을 빠져나와야했던 긴박한 상황, 출애굽 후 수십 년간의 광야에서의 거친 삶의 여정 등을 상기시키는 말입니다. 무교병은 결코 좋아서 일부러 먹을 맛있는 떡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고난의 떡\"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매년 아빕월에 무교병을 먹게 한 것은 아빕월에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의 큰 사건 즉 출애굽을 전후한 고난의 역사를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고난의 역사는 대대로 기억해야 할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에 항상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하라\" 하신 것입니다.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출애굽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의 놀라운 은혜와 권능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자유와 독립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나라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나온 애굽에서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함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평생에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왜 고난의 떡 무교병을 먹으면서 기억하라 했겠습니까? 부유해지고 편안해지면 그 옛날을 잊어버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풍요와 행복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를 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하게 누린 하나님의 은혜를 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백성임을 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 받은 백성의 도리를 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의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것이 복된 땅 가나안에서의 삶을 누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4절에서는 \"그 이레 동안에는 네 모든 지경 가운데에 누룩이 보이지 않게 할 것이요 또 네가 첫날 해 질 때에 제사 드린 고기를 밤을 지내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라\" 했습니다. 누룩뿐 아니라 고기를 먹다 남기면 그 다음날 아침식사 준비로 시간을 소모할 수 있고 그래서 출발의 지체시킬 수 있으므로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출발은 지체 없이 실행해야 한다는 뜻을 기억시키고 전하기 위하여 유월절 규례 속에 아예 \"그 이레 동안에는 네 모든 지경 가운데에 누룩이 보이지 않게 할 것이라\"는 지침을 박아 넣은 것입니다. 이 지시는 오늘날까지도 유대인 가정에서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명절기간 동안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며 미량의 누룩이라도 남기지 않고 찾아내 던지는 행사에 아이들을 참여시킨다고 합니다. 유대인 어머니들은 아이들이 숨겨진 누룩을 찾아내 던지도록 일부러 소량의 누룩을 감추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누룩이 악한 것의 상징이 되고, 보이지 않으면서 강력하게 활동하는 어떤 것, 그것이 어디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 전체를 변질시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된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는 뜻으로 말씀하실 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셨습니다(마16:6, 11-12). 사도 바울도 고전5:6-8에서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했습니다. 출애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단지 가난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만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그들의 신앙을 오염시키고 그들의 정체성을 망각시킬 수 있는 이방민족의 불신앙의 삶과 결별시키신 사건입니다. 묵은 애굽의 누룩을 내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너는 엿새 동안은 무교병을 먹고 일곱째 날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성회로 모이고 일하지 말지니라\" 했습니다. 유월절의 첫날에는 출애굽 때 한 것처럼 어린양을 잡아 먹고 이어지는 엿새 동안도 출애굽 때 한 것처럼 무교병을 먹고 그리고 일곱째 날은 성회로 모이라 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하는 공동체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백성이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 백성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일하지 말지니라\" 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그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백성이고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백성임을 분명히 밝히는 말씀입니다.



유월절은 단지 유대인에게만 의미 있는 명절이 아닙니다. 유월절의 규례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치시고 요구하신 모든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출애굽사건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가득 찬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바로 유월절을 즈음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크게 의미 있는 것으로 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름으로써 죽음의 사자가 그들을 지나가게 한 그 때를 맞춰 십자가에 달려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흐리신 것은 바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유월절 대속의 어린 양이심을 확증하시고, 그의 몸을 상징하는 떡과 그의 피를 의미하는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고백하는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을 것임을 가르치신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또 출애굽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단지 가난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만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그들의 신앙을 오염시키고 그들의 정체성을 망각시킬 수 있는 이방민족의 불신앙의 삶과 결별시키신 사건이었듯이,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정치적 예속과 경제적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의 노예상태로부터의 해방과 영적 자유와 온전한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의 유월절 규례를 통하여 오늘날 우리의 처지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유월절이 출애굽을 기념하고 그 출애굽사건을 절대로 잊지 않게 하기 위한 명절이라면 우리 또한 우리의 출애굽사건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죄의 사하심을 받고 죄적 삶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국가적으로는 35년간의 일제의 압제와 6.25전쟁과 이로 인한 공산화의 위기와 그 이후 반세기 동안 지속된 적화통일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애굽 땅에서 죽음의 사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나간 사건이 개개인의 구원사건이 아니라 한 민족의 구원사건이었고, 출애굽이 개개인이 자유를 얻은 사건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한 자유독립국가가 형성되는 사건이었듯이, 이 땅에 복음 전파되고 교회들이 늘어나며 주를 믿는 백성들이 많아진 것은 단지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과 나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지도록 택하심을 받은 역사임을 자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그 짧은 세월에 세계 제2의 기독교선교대국으로 성장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심과 인도하심을 받는 백성이며 대한민국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라임을 증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애굽을 나가라고 명하실 때 즉시 출발할 수 있도록 무교병을 먹게 하시고 누룩을 집안에서 다 없애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하나님께서 죄의 노예상태에서 떠나라 하실 때에는 즉시 전적으로 떠날 것을 원하심을 말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무교병을 \"고난의 떡\"이라 한 것은 애굽에서의 빈궁하고 고된 삶, 출애굽이 이루어지기까지의 험난한 과정, 떡을 부드럽게 부풀려 먹을 여유도 없이 애굽을 빠져나와야했던 긴박한 상황, 출애굽 후 수십 년간의 광야에서의 거친 삶의 여정 등 이스라엘이 겪은 가난과 고통의 역사를 상기시키는 것이었듯이 우리도 우리 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해방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권능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자유와 독립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나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배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이 세상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평생에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부유해지고 편안해질 때 그 옛날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풍요와 행복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를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특별하게 누린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 받은 백성의 도리를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출애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단지 가난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만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그들의 신앙을 오염시키고 그들의 정체성을 망각시킬 수 있는 이방민족의 불신앙의 삶과 결별시키신 사건입니다. 묵은 애굽의 누룩을 내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의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것이 이 한반도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이 되게 하며 우리의 삶을 복된 삶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을 평생에 항상 기억하며 자녀손들에게 가르쳐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됩니다.







                                


제목 : 청어람, 높은 뜻 숭의교회                                      


본문 : 시-87-01-7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무실과 교육관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을 마련하여 지난 주 입주 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 교회는 그 건물의 이름을 높은 뜻 숭의교회 교육관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청어람’(靑於藍)이라고 지었습니다. ‘청어람’이란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을 줄여 쓴 말입니다.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순자의 사상을 집대성한 ‘순자권학편’에 나오는 말로 ‘쪽 풀에서 취한 푸른색이 쪽빛 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 ‘선배보다 후배가 더 낫다’ ‘선배보다 나은 후배를 키워낸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람’(藍: 쪽풀)에 불과합니다. 개척 3년 만에 출석교인이 3천명에 이르게 되었고, 어느 정도 열심히 교회생활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름께나 알려진 교회가 되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저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람’(藍)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더 성장하고 더 유명하게 된다고 하여도 평생 그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고 싶습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람’(藍)입니다. 그러나 그냥 ‘람’(藍)이 아니라 ‘靑於藍’입니다. 세상을 푸른 물로 물들이는 그것을 목표로 하는 그런 교회입니다.



‘靑於藍’의 ‘靑’은 ‘하나님의 말씀’(Word of God)과 ‘하나님의 정신’(Spirit of God)과 ‘하나님의 뜻’ (Will of God)를 의미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그것을 ‘높은 뜻’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높은 뜻 숭의교회’는 ‘靑’입니다. 쪽 빛을 지니고 있는 ‘藍’입니다.



지난 3년 동안 참으로 부족했지만 교회를 푸른색을 품고 있는 ‘쪽(藍)과 같은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노력은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할 우리교회의 아이덴티티입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을 선포하는 교회가 되는 것도 중요하고 영적인 감성을 채워주는 교회가 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보다 ‘쪽(藍)과 같은 교회’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푸른 정신을 품고 있는 교회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靑於藍’의 ‘어’(於)는 ‘~에서 부터’를 의미하는 어조사입니다. 저는 그것을 ‘우러남’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어’(於)이어야 합니다. ‘於’가 없는 藍은 그냥 쪽 풀 하나에 불과 합니다. 교회는 ‘우러남’이어야 합니다. 쪽 빛의 영성이 충만함으로 누구든지 그 곳에 발 디디면 그 물, 곧 靑이 들 수밖에 없는 그런 교회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靑於藍이어야만 합니다.



교회는 藍이고 교인은 靑입니다. 靑於藍의 바른 의미는 藍에서 나온 靑이 더 푸르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은 높은 뜻 숭의교회보다 더 푸르러야만 합니다. 저는 사랑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 여러분들이 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주 저는 우리 교회 교인 두 분으로부터 참으로 귀한 메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두 분은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藍인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로 부터 靑의 물이 든 교인이었습니다.



한 분은 모태교인이었지만 10년 이상을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10년 만에 다시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서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한 여자 청년입니다. 작년 2월 미술학원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전세로 하고 있는 피아노 학원의 한 부분을 다시 전세로 얻어 시작하였답니다.



그와 같은 학원을 운영하려면 교육청에 등록을 하여야만 하는데, 전세를 얻은 건물이 이미 피아노 학원으로 등록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다시 미술학원 등록을 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었답니다. 등록을 하지 않으니 자연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답니다.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청년은 그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저의 설교 중 그 청년의 마음에 새겨진 설교가 하나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가 교육관, 다시 말해서 청어람을 매입하려고 은행 융자를 얻으려고 했을 때, 융자가 쉽지 않아 어려웠지만, 편법을 쓰지 않고 정직한 방법으로 결국은 융자를 얻어 청어람을 매입했다는 설교였습니다. 작은 일 하나라도 하나님의 뜻과 식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는 설교가 청년의 마음에 깊이 닿았던 모양입니다.



청년은 그것을 놓고 기도하였답니다. 미술교습소를 등록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래서 정당하게 세금을 내면서 학원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답니다. 결국은 기도대로 응답이 되어 학원 전체를 인수하게 되었고 지금은 학원생들도 많아져서 제법 안정적으로 학원을 운영하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작년 9월부터는 십일조생활도 시작하게 되었다고 적어 주었습니다.



또 한 교인은 작년에 제가 주례하여 결혼을 한 청년이었습니다. 결혼하던 해 교통사고를 내었답니다. 자전거를 타고 오시던 할아버지와 충돌하게 되었는데 건강하게 잘 치료를 받으시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합병증으로 돌아가시게 되었답니다.


아직 합의도 보지 못했던 차에 그런 일을 당하고 보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때 제 설교 중 ‘이리 같은 세상에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살라’는 말씀이 마음에 깊이 새겨지더랍니다. 그 청년은 그 설교를 ‘정직하게 해결하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라는 메시지로 이해했다고 하였습니다.



주위 분들 중에는 걱정스런 마음에 ‘경찰에게 뇌물도 좀 주고, 아는 사람을 통하여 검찰이나 법원에 손을 써보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 해 주는 분도 있었다고 합니다. 아는 경찰도 있었고, 법원 쪽에도 대법원장까지 지냈던 분까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순종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답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자신의 잘못한 부분을 인정하고 정면 돌파하기로 결심했답니다. 때문에 몇 천 만 원의 보상금을 지불했지만 피해자 가족들이 감동하여 합의서 뿐만 아니라 탄원서까지 써주어서 일이 아주 원만하고 아름답게 해결이 되었답니다.



또 작년 연말 아파트를 하나 계약하였는데 중개인의 잘못으로 매입을 할 수 없게 되었답니다. 중개업자는 12년 동안 이런 일은 처음이라며 마음대로 하라 하였답니다. 억울한 마음에 고소를 할까 생각했지만 예수 믿는 사람으로 그렇게까지 하는 것이 옳지 않겠다 싶어 집을 포기하였답니다.



그리고 자기 집을 사기 전에 먼저 교회 교육관 건축헌금부터 하자 결심하고 사려고 하였던 집 가격의 십일조인 1천 4백 만 원을 헌금하기로 하였답니다. 그런데 앞의 중개업자가 다른 집을 소개해 주었는데 집도 전에 계약이 되지 않았던 집보다 더 좋은 집이었는데 가격도 1,500만 원이나 낮은 가격이었답니다. 중개업자는 미안하다면 중개료도 받지 않았답니다.



그 청년은 요즘 너무 행복하고 기쁘답니다. 작은 일 하나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힘들고 어렵지만 그 뜻과 식대로 살다보니 하나님께서 너무 좋은 결과들을 축복을 주시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답니다.



그 외에도 그와 같은 정신으로 살아가는 많은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들이 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높은 뜻은 하나님의 뜻(God\'s will)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정신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靑입니다. 쪽(藍)인 높은 뜻 숭의교회에서 물이 들어 쪽 보다 더 푸른빛을 세상에서 발하며 살아가는 교인들이 있다는 것이 저는 얼마나 자랑스럽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저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 발을 디디는 모든 사람들이 다 이와 같이 푸른 靑의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지난 주 서울대학교 교수로 계시고 전직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내셨던 윤영관 교수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작년 일본 코스타(KOSTA) 집회에서 뵙게 되었는데 그 분의 특강을 들으면서 하나님께 참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 중에 저렇게 훌륭한 나와 국가에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저는 너무 감사했습니다.



윤교수님과 말씀을 나누면서 저희 교회 ‘청어람 관’에 대하여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바쁘시고 힘드시겠지만 저희 청어람 관에서 강좌를 열어 주시고 그 강좌를 통하여 윤영관 교수보다 나은 제 2, 제 3의 윤영관을 키워 주실 수 없으시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저의 꿈은 청어람에 윤교수님과 같은 좋은 스승을 초빙하여 의숙(義塾)을 만들고 도제(徒弟)처럼 제자를 키우고, 각 방면의 뛰어난 스승들과 그 스승들에게서 배우는 학생들이 청어람에서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고 좋은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게 하여 나라와 민족을 섬기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윤영관 교수님은 김진홍 목사님이 하시는 두레연구원의 장학생 출신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 교회도 그와 같은 좋은 장학회를 만들어 청어람의 좋은 멘토들이 길러내는 인재들을 후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스승들과 제자들이 연구한 것들을 모아 저널을 만들어 발행하게 된다면 세상을 하나님의 뜻과 식대로 이끌어 가는 오피니언 리더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지 않겠느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윤교수님에게 말씀을 드렸던 것이 청어람을 운영하려고 하는 제 뜻입니다. 청어람은 그리 큰 건물은 아니지만, 높은 뜻 숭의교회만을 위한 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청어람을 우리 교회가 사용하는 요일과 교회 밖에 개방하는 요일을 구별하여 운영하려고 합니다. 7일 중 4.5일은 교회가 사용하고 최소한 2.5일은 교회 밖에 개방하려고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 청어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이 시대의 스승과 제자들이 모여왔으면 좋겠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교육, 사회 전 분야의 인재들이 모여들고 길러지는 요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청어람을 그렇게 운영하기 위하여 우리 교회는 올해 예산도 잡아 놓았습니다. 이와 같은 일만 전담할 아주 유능하고 적합한 사람도 생각하였습니다.



제가 마음으로 생각한 그 분과 이와 같은 일을 맡아 줄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 분에게 우리 청어람을 그렇게만 이끌어 줄 수 있다면 교회 예산은 물론이고 내 집을 팔아서라도 그 뒤를 대 주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말만이 아니라 저는 정말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집을 팔아서라도 할 만한 일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는 청어람 사역이 집을 팔아서라도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정말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저 혼자만의 생각과 헌신으로 이와 같은 일을 이루어 나가기는 벅차고 힘듭니다. 같은 뜻을 가진 분들의 동참과 협력이 있었으면 합니다. 작은 힘들이지만 우리들이 이와 같은 일을 놓고 헌신하고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우리의 헌신을 오병이어로 받아 주셔서 온 세상이 다 먹고도 12 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다시 연출해 주실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과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靑인 동시에 藍이어야 합니다. 여러분들과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에서(於) 푸른 물이 나와 세상을 온통 쪽 빛 물(靑)로 물들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과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藍이 되고 세상은 여러분들과 우리 높은 뜻 우의교회 때문에 靑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하나님의 푸르름으로 물들이는 교회와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 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는 것과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진 것이라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일 4부 청년예배를 끝낼 때마다 우리들은 모두 일어서서 ‘보리라’라는 복음송을 부릅니다.



우리 오늘 눈물로 한 알의 씨앗을 심는다.


꿈꿀 수 없어 무너진 가슴에 저들의 푸른 꿈 다시 돋아나도록


우리 함께 땀 흘려 소망의 길을 만든다.


내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던 저들 노래하며 달려갈 그길


그 날에 우리 보리라 새벽이슬 같은 저들 일어나


뜨거운 가슴 사랑의 손으로 이 땅 치유하며 행진할 때


오래 황폐하였던 이 땅 어디서나 순결한 꽃들 피어나고


푸른 의의 나무가 가득한 세상 우리 함께 보리라.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인 시편 87편을 좋아합니다. 특히 말씀 중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낳나니’라는 말씀이 좋습니다. 저는 시편 87편의 ‘거기’가 높은 뜻 숭의교회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새로 마련한 청어람에서 이 사람도 나오고 저 사람도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말 그대로 靑出於藍 靑於藍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새로 마련한 교육관에 청어람(靑於藍)이라는 간판을 세우면서 그 앞에 <푸른 의의 나무가 가득한 세상 우리 함께 보리라>는 글을 써 넣었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청어람(靑於藍) 높은 뜻 숭의교회가 되기를 바라고, 청어람(靑於藍)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하는 한해 아니 평생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제목 : 고향이 다른 사람들                                     


 본문 : 히-11-13-16                                      


이번 명절에 고향에 다녀오셨습니까? 그렇게 길이 막히고 힘든 데도 왜 그렇게 꾸역꾸역 고향을 찾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에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그 어떤 것보다 큰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향에 대한 생각이 사람마다 좀 다릅니다. 저하고 집사람하고는 많은 차이가 납니다. 집 사람은 고향, 땅에 대한 생각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집사람은 ‘돈이 없으면 땅을 팔면 되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옛날 어른들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을 그냥 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농부들에게 있어서 땅은 단순한 재산 그 이상의 뭐가 있습니다. 또 집사람은 바쁘고 힘드는데 왜 그렇게 고향에 가야 되는가?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고향은 바쁘고 안바쁘고의 문제 이전의 것입니다. 그래서 기어이 고향에 나녀 옵니다. 꼭 명절은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이상하게 고향을 다녀오면 마음이 좋습니다.



1. 여러분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고향을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소속의 문제입니다. 주로 시골이 고향인 사람들은 고향에 대한 생각이 분명하지요. 그러나 서울 사람들이나, 부모를 따라 이사를 많이 한 사람들은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참 난처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집 아이들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서울, 강원도 양구? 인제? 원주? 왜냐하면 한곳에 뿌리내려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고향과 관련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의 정체성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고향이 다른 사람들”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본문 15절과 16절을 한번 같이 읽어보십시다.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 여기에 보면 참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입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지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고향으로 생각하고 가기를 갈망했던 곳은 그 갈대아 우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15절의 말씀입니다. 15절을 다시 보십시다.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라고 말합니다. 떠나 나온 고향이 있습니다. 바로 갈대아 우르입니다. 그런데 만약 아브라함이 그곳으로 가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갈 기회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이 가고자하는 고향은 그곳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디입니까? 또 16절을 다시 보십시다. “저희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여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사모했던 고향이 나옵니다. 그곳은 바로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천국이지요.


지금 아브라함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랐던 이 땅의 한 지점을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그 곳으로 가고 싶다, 아 그리운 내 고향,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겐 이 땅의 어느 한 곳이 아니라 저 천국을 자기의 본향, 자기의 고향으로 고백하고 그곳으로 가고자하는 열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차가 막혀도,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가고 싶은 고향이 바로 천국이라는 것이지요.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지나온 과거의 한 시점이나 과거의 한 장소를 고향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래에 갈 곳을 고향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살 그 곳, 천국을 고향이라고 말하고 그곳에 가기를 열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사람, 아브라함이 지나온 과거의 한 시점이 아니라 앞으로 갈 미래를 본향이라고, 고향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믿음의 고백입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바로 천국을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고향을 열망하듯이 천국을 열망할 수 있는 사람, 이들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고백을 한 사람들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바울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주님이 부르신 그 부르심의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 이 땅의 한 시점, 한 지역이 아니라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들, 즉 고향이 바뀐 사람들이 바로 믿음의 사람입니다.



2. 그런데 중요한 것은 고향이 다르다는 것은 가치관도 다르다는 말입니다. 고향이 어딘가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도 다릅니다. 말도 다릅니다. 사투리라는 것이 고향과 연관이 있습니다. 어떤 말을 하느냐를 보면 고향이 어딘지 알 수 있습니다. 충청도? 경상도? 마찬가지로 세상이야기를 하는지, 천국이야기를 하는지를 보면 세상에 속했는지 하늘에 속했는지를 안다는 말입니다.


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고향이 다르면 가치관도 다르지요. 혹시 말은 흉내 낼 수 있어도 가치관이나 생각은 흉내 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경상도를 고향으로 한 사람들과 전라도를 고향으로 둔 사람, 충청도를 고향으로 둔 사람들의 가치관이 다릅니다. 생각이 달라요. 그래서 고향이 서로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은 참 어렵지요. 부부싸움도 바로 이 가치관의 싸움입니다. 가치관의 충돌?, 문화충돌?, 종교충돌? 거기에다 주도권싸움까지... 사랑이 없는 결혼 생활은 정말 전쟁터입니다. ‘아내 죽이기’라는 영화를 알고 계시지요!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인 생텍쥐베리가 쓴 “어린왕자”라는 소설을 다 알고 계시지요. 어린 왕자는 지구가 아닌 다른 별에서 왔습니다. 다른 별에서 왔다는 이 구상이 사실 참 중요합니다. 어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자기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한 어린이의 정신세계를 그린 것입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물들어 버린 어른들에게는 어쩌면 어린아이는 그렇게 다른 별에서 온 존재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사실 생택쥐베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그 정신적 고향이 전혀다른 두 계층 사이의 철저한 사고의 단절, 뿌리 깊은 대화의 단절이 어느 정도인지를 시니컬하게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특별히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고향을 가진 사람들, 그래서 세상적인 가치관을 따라가지 않고 하늘나라의 가치관을 따라가는 믿음의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 고향이 이 땅인 사람들이 히브리서 11장을 읽는다면 아마 비웃을 것입니다. 바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향이 다른 사람들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13-14절을 함께 읽어보십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을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여기에 보면 두 가지 삶의 형태가 나옵니다. 첫째는 자기가 떠나온 곳을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의 삶을 나그네, 외국인이라고 스스로 말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같은 고백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는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지 않고 천국의 가치를 따라 살았습니다. 그는 거부였지만 집한 채 짓지 않고, 자신을 위해 땅 한 평 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갈대아 우르의 풍요로움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물질문명,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이런 것은 아브라함의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학문, 자신의 가문, 자신의 능력을 자기를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아마 바울이 정치를 하려고 했다면? 그의 학문과 그의 배경으로 아마 고위직에 올라갈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학문, 능력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위해, 오직 복음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고향이 다른 사람들의 두 번째 가치관은 천국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 그것이 푯대가 되고, 하늘에서 얻을 면류관 그것이 삶의 목표가 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랑하는 예수님이 나를 인정해 주고 ‘의의 면류관을 씌워준다면 그렇다면 세상의 고난도 이길 수 있습니다.



이제 저는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하늘이 고향인 사람처럼 이 땅을 살아갑니까? 하늘의 가치관, 하나님 나라의 기준으로 세상을 살아갑니까?



3. 그렇다면 이 땅을 고향으로 하며 살던 우리들이 어떻게 해서 고향이 천국으로 바뀌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예수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바로 고향이 바뀐 것입니다. 요5:24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구원은 옮긴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또 빌3:20에 보면 우리에게 “천국 시민권”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엡2:6에 의하면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합니다.


이 옮기는 것에 대해 성경은 얼마나 분명한지 에녹,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바로 고향, 천국으로 옮긴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이 결혼하면 본적이 바뀝니다. 저는 처음에 이 사실을 잘 몰랐습니다. 여자 분들은 주민등록증을 새로 만들지요. 결혼은 여자로 하여금 남편에게 속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결혼하면 고향이 바뀝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입니다. 외국 사람들은 성도 바뀝니다. 본적이 바뀐다? 참 의미심장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의 고향을 바꾸었습니다. 천국에 속한 사람,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마지막으로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고향이 다르다고 고백하며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축복하는가? 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다시 보십시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입니다.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하늘나라에 준비된 것이지요. 고향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이제부터 고향이 다른 사람으로, 천국의 가치기준으로 이 땅을 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