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바람직한 목회자상
바람직한 목회자상
노회 목사안수 설교
오늘 목사 안수와 강도사 인허를 받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평생토록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면서 \"바람직한 목회자상”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우선 여러분들은 앞으로 목회사역을 최선을 다해서 하되 여유롭게 그리고 즐겁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목회와 설교를 너무 잘 하려고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너무 잘 하려고 하면 스트레스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너무 잘 하려고 하다가 잘 못 하면 낙심하게 되고 너무 잘 하게 되면 우쭐해지고 교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저 최선을 다하면서 여유롭고 즐겁게 그리고 대강대강 하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대강대강 사시오” 라는 제목의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사실 목회와 설교를 너무 잘하는 것보다는 좀 잘 못하는 것이 오히려 여러분들에게 유익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좀 잘 못할 때 겸손해 질 수도 있고 진실해 질 수도 있고 무릎을 꿇게도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연구를 많이 하고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아도 길선주, 이기풍, 주기철, 이성봉, 손양원, 한경직, 박윤선 목사님들과 같은 훌륭한 목회자가 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시대는 너무 편안하고 너무 세속화되어서 그런 훌륭한 목회자를 배출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고난과 핍박의 시대가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앞으로 목회사역을 최선을 다하면서 하되 여유롭고 즐겁게 그리고 대강대강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직한 목회자상”을 정해놓고 바람직한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아주 바람직하고 아주 귀중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고의 “바람직한 목회자상”을 우리는 선한 목자 되시는 우리 주님에게서 발견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4,1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이보다 더 높고 더 귀하고 더 아름다운 “바람직한 목회자상”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존 스토트 박사는 막10:45이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는 성경말씀이라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목회자가 평생 양 무리들을 섬길 수 있다면 그리고 목회자가 양 무리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릴 수 있다면 그런 목회자는 예수님 닮은 최고의 바람직한 목회자일 것입니다.
목회를 그저 최선을 다하면서 여유롭고 즐겁게 그리고 대강대강 하면 될 것이라고 말을 해 놓고는 평생 양 무리들을 섬기고 양 무리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 목회하라는 말을 하며 여러분에게 부담을 드리게 되어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목회자상이 그렇다는 것이지 반드시 여러분들이 모두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저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예수님을 닮도록 노력하라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바람직한 목회자상”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겠습니다. 바람직한 목회자의 최고 모델이신 예수님의 목회자상 다섯 가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목회자상은 통곡하고 울면서 회개와 중보의 기도를 드리시는 목회자상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님은 통곡하고 울면서 회개의 기도와 중보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물론 자기 죄와 자기 불행 때문에 통곡하며 우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죄와 불행 때문에, 이스라엘의 죄와 불행 때문에, 길선주 도사와 이기풍 깡패의 죄와 불행 때문에,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의 죄와 불행 때문에, 통곡하고 울면서 회개의 기도와 중보의 기도를 드리셨고 지금도 그 기도를 드리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7:25). 세상에 계실 때는 통곡하며 우셨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5:7). “예수께서 심령에 통분이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3-35).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눅19:41). 우리들의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죄와 불행 때문에 통곡하며 우셨습니다.
한국교회의 아버지 길선주 목사님은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입니다” 라고 울면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평생 집회 때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애통하고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합소서” 라는 찬송을 부르며 통곡하고 울면서 회개의 기도와 중보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제주도 복음화의 선구자 이기풍 목사님은 평생 새벽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외다” 라고 부르짖으면서 회개의 기도를 눈물로 드리셨습니다. 이성봉 목사님도 김치선 목사님도 평생 스스로 울면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셨고 그리고 회개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공 사석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평생 회개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라고 공석에서 회개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필요한 목회자는 유창한 설교자보다는 심오한 신학자보다는 능력이 있는 목회자보다는 유능한 행정가보다는 자기의 죄와 불행을 바라보고 그리고 한국 사람들의 죄와 불행을 바라보고 통곡하고 울면서 회개의 기도와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목회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가 바로 상하고 통회하는 눈물의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51:17). 저와 여러분들이 무엇보다 먼저 통곡하며 울 수 있는 눈물의 목회자들이 될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바랄 것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자기 때문에 그리고 양무리들 때문에 평생 울 수 있는 목회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목회자상은 온유와 겸손을 몸에 지니고 모두를 섬기시는 목회자상이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7). 이 보다 더 귀하고 더 아름다운 목회자상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나중에 온유와 겸손과 섬김을 귀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 3:12).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롬15:25).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은 그 당시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며 멸시하던 나환자들의 피 고름 나는 상처를 입으로 빨면서 지극한 온유와 겸손으로 저들을 섬겼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를 헐뜯고 비난하는 애양원의 환자 한 사람을 조금도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당회의 요구를 따라서 치리하지도 않고 지극한 온유와 겸손으로 섬기면서 그를 사랑으로 녹였습니다. 서울 남대문교회에 집회하러 가셨다가 “세계적인 성자 손양원 목사”라는 현수막을 보시고 그 현수막을 뜯어 내리지 않으면 집회 인도를 하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다고 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온유와 겸손을 몸과 마음과 습관과 기질에 지니고 사셨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사셨습니다. 테레사 수녀도 온유와 겸손을 몸에 지니고 불쌍한 사람들을 섬기는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소위 개혁주의 신학의 이론을 내 새우면서 성 프랜시스와 테레사 수녀가 카톨릭이고 한경직 목사님이 에큐메니칼 노선에 선 통합측 목사라고 무시한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고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는 은이고 신학은 동이고 이적은 철이고 프로그램은 흙이고 주님 닮으려는 온유 겸손 사랑의 삶만이 금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카리스마가 있는 능력의 목회자보다는 온유와 겸손을 몸에 지니고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사랑과 봉사의 목회자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같은 목회자들이 많아질 때 한국교회는 사회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주린 자와 벗은 자들을 돌아보면서 섬기는 사람들을 귀하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눠주며”(사58:6,7).저와 여러분들이 온유와 겸손을 몸에 지니고 모두를 섬기는 사랑과 섬김의 목회자들이 될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평생 누군가의 발을 씻으면서 모두를 섬기는 사랑과 섬김의 목회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목회자상은 기도와 말씀에 사로잡히신 목회자상이었습니다. “광야로 가서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 주리신지라”(마4:1,2).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눅11:1,2).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막14:32).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기도를 쉬지 않으셨고 그리고 제자들에게 기도하기를 쉬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마21:13).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눅18:1).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느리라”(막9:29).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 기도하며 기다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와 함께 말씀을 전하시는데 총력을 다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말씀 자체셨는데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시며 가르치셨습니다.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요12:50).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니라”(마4:4). “예수께서 두루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마9:35).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마13:23).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눅11:28).
예수님의 제자들은 결국 스승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서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행6:4). 사도 바울도 평생 기도하며 말씀 전하는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빌1:4).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엡3:14,15).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행18:5).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권면하면서 기도와 말씀에 전력을 다 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딤전2:1,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
한국교회의 아버지 길선주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새벽기도를 시작한 기도의 사람이었지만 평생 말씀을 전한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만독을 했고 요한계시록을 모두 암송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할 때는 입술로만 전한 것이 아니고 온 몸으로 오관으로 전했다고 방지일 목사님께서 지난 주 금요일 아침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그저 말씀 선포하시는데 그 억양이나 그 모습을 몸 전체 그 이목구비 촉감 오감을 다 통하여 그 말씀의 맛 보신 것을 그대로 토로하시는 그 말씀 그 어느 설교에 비기진 못합니다. 길 목사님은 그렇게 감명 깊게 말씀을 외우시면서 그 모든 몸의 동작이 그 말씀에 맞게 하시는데 성경 그대로 외우심에 한자도 틀리지 아니하시고 그 몸 전체가 말씀에 사로 잡혀 하심이라 그야말로 엄숙하게 또 경건하게 내 몸도 길목사님의 그 몸에 동화가 되어 몸 전체로 말씀을 받게 됨이라. 이는 제 구설로는 감당 할 수 없음이라. 혀가 입천장에 차라리 붙어 말을 할 수 없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는 완전하게 계시록에 빠져 거기 사시면서의 말씀이시라 만독이 문제라기보다 말씀을 외우시면서 기도로 외우셨다 할 수 있을지요? 길 목사님은 말씀의 맛을 바로 맛보신 분입니다. 그 말씀의 맛을 그대로 전하셨다 할 것입니다.” 방지일 목사님께서 길선주 목사님의 말씀 선포의 모습을 아주 생생하게 아주 감동적으로 묘사하셨습니다. 그 후 주기철 목사님도 손양원 목사님도 박윤선 목사님도 모두 기도와 말씀에 사로잡혀서 사셨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기도와 말씀에만 사로잡히는 것을 좀 무식하고 좀 모자라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유행에 너무 사로잡히게 되었고 프로그램에 너무 사로잡히게 되었고 시끄러운 음악과 요란한 행사에 너무 신경을 쓰게 된 것 같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기도와 말씀에 사로잡히는 좀 무식하고 좀 모자라는 목회 방식을 택할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바랄 것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과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바로 그 좀 무식하고 좀 모자라는 것 같은 길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너무 지혜로운 유행의 방식을 택하는 대신 좀 무식하고 좀 모자라는 기도와 말씀에 사로잡히는 목회 방식을 택한다면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실 것이고 우리 사회도 그렇게 무시하거나 비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평생 좀 무식하고 좀 모자라는 목회 방식인 기도와 말씀에 사로잡히는 목회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넷째로, 예수님의 목회자상은 긍휼과 용서와 사랑에 사로잡히신 목회자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종류의 죄인들을 바라보실 때 멸시와 분노와 증오의 마음을 품으시기 보다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품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마14:14).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눅7:13). 예수님께서는 저주 받은 문둥병자를 보시든지, 이방인 백부장을 보시든지,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더러운 창녀를 보시든지, 일곱 귀신들린 인간 쓰레기 같은 막달라 마리아를 보시든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을 보시든지,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강도를 보시든지, 멸시와 분노와 증오의 마음을 품으시기 보다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품으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마8:3).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8:10).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요8:11).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23:34).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위로와 격려와 칭찬과 축복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람직한 목회자 예수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에는 불가해성과 모순성과 혁명성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증오와 분노와 정죄의 사람이었던 사도 바울도 나중에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사람으로 바꾸어졌습니다. 모두를 증오하고 정죄하던 사울이 어느 날 긍휼을 입게 되었고 긍휼의 사람으로 바뀌어졌습니다(딤전1:13). 긍휼을 입은 사도 바울은 이제 모두를 불쌍히 여기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자기의 몸을 이방을 위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제물로 드렸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2:17). 그리고 교회와 성도들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습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골3:13,14).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롬12:20). 사도 바울은 결국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사도가 되었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이야말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목회자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은 나환자와 원수에 대한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사랑의 노래를 만들어 불렀는데 그 노래 안에 손 목사님의 너무도 순수한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주여 애양원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께서 이들을 사랑하심 같은 사랑을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는 이들을 사랑하되 나의 부모와 형제와 처자보다도 더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라리 내 몸이 저들과 같이 추한 지경에 빠질지라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만약 저들이 나를 싫어하여 나를 배반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저들을 참으로 사랑하여 종말까지 싫어 버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내가 이들을 사랑한다 하오나 인위적 사랑, 인간적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을 위하여 사랑하는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주를 위하여 이들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보다는 더 사랑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내가 또한 세상의 무슨 명예심으로 사랑하거나 말세의 무슨 상급을 위하여 사랑하는 욕망적 사랑도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의 내용에서 되는 사랑으로서 이 불쌍한 영육들만을 위한 단순한 사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손양원 목사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극치는 1948년 10월 19일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나타나 보였습니다. 사랑하던 믿음의 두 아들 동인군과 동신군이 공산 폭도들에게 붙잡혀 10월 21일 순천 경찰서 뒷 마당에서 총살을 당했습니다. 반란 사건이 진압되고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손양원 목사님은 밤을 새워 통곡하고 기도하고 교회를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내 아들들은 죽어서 천국에 갔지만, 안재선은 죽으면 지옥 갈텐데,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손양원 목사의 마음에는 커다란 사랑의 폭풍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를 살려야 한다. 그를 용서해야 한다. 그를 사랑해야 한다.” 결국 손양원 목사님은 안재선을 살렸습니다. 그를 양 아들로 삼았습니다. 안재선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안재선의 아들은 후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도 모두를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고 사랑하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목회자였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진리의 깃발을 휘두르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두를 품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삶과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에 가장 필요한 목회자는 좀 바보 같은 목회자 좀 진리와 신학적 기준에 어긋나는듯한 목회자 즉 모두를 품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목회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모든 종류의 죄인들을 바라볼 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품는 대신 멸시와 분노와 증오와 저주의 마음을 품습니다. 분노를 행동화하여야 한다는 주장까지 합니다. 요나와 같이 니느웨 성이 망하기를 바라고 북한과 모슬렘 나라들이 망하기를 바라고 그렇게 되기를 기도까지 합니다. 일본이 망하기를 바라는 부흥사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긍휼도 용서도 사랑도 싫어합니다. 소위 진리의 깃발만 휘날립니다. 사실 하나님의 진리만 이 세상에 작용했다면 우리들은 이미 모두 저주를 받아 망했을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내려다 보시면서 받으시기를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제사는 모두를 불쌍히 여기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제사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좀 진리에 어긋나는듯한 좀 바보 같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목회 방식을 택할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바랄 것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과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좀 바보 같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길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평생 울면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베푸는 바보 같은 목회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섯째로 예수님의 목회자상은 수고와 고난과 희생의 삶을 사신 목회자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수고한 것을 보시고 만족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기실 것이라”(사53:11).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대신 찔리고 상하고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말을 자주 썼습니다(고후1:5,빌3:10,골1:24). 예수님께서는 수고와 고난의 과정을 거쳐서 결국 희생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대속의 희생 제물이 되였습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5:7).
스데반이 수고와 고난과 희생의 길을 걸어가므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너무너무 기쁘시게 했고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중보 기도로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도 바울은 수고와 고난과 희생의 길을 걸어가는 목회자가 되였습니다. 저는 사도 바울의 트레이드마크는 수고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반드시 수고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고후11:23).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9). 사도 바울의 목회적 삶과 사역은 수고에 그치지 않았고 고난과 궁핍과 핍박과 희생으로 이어졌습니다. 아마 자기가 돌로 쳐 죽인 스데반을 생각하면서 고난과 핍박과 매맞음의 길로 달려갔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핍박하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을 언급하며 자기도 그 고난에 참여한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고후12:15). 결국 사도 바울은 자기 몸을 로마를 위한 희생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인 이기풍 목사님도 최봉석 목사님도 주기철 목사님도 손양원 목사님도 수고와 고난과 희생과 순교의 길을 기쁨으로 걸어가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이 세상의 재물이나 평안이나 명예에는 티끌만큼의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는 가난을 애처로 고난을 선생으로 삼으며 천국을 바라보면서 하루하루를 살다가 한국교회와 한국민족을 위한 희생의 제물로 그의 삶을 마감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고난을 옷으로 입고 고난을 밥으로 먹고 고난을 친구로 삼으면서 고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수고도 고난도 희생도 싫어하는 극단적인 세속화 시대에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편안을 좋아하고 안일을 좋아하고 부를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하고 쾌락을 좋아하는 극단적인 세속화 시대에 살게 되었습니다. 순수한 사랑이 식어졌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세속화의 유행을 거슬러 수고와 고난과 희생을 추구하는 바보 같은 방식의 목회를 택한다면 모두 놀라면서 우리들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존경과 사랑을 보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놀라시고 기뻐하시면서 우리들을 당신의 도구들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기독교는 수고와 고난과 희생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수고와 고난과 희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수고와 고난과 희생을 기뻐하는 수고와 고난과 희생의 목회자들이 될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바랄 것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평생 수고와 고난을 몸에 지니고 살다가 희생의 죽음을 죽을 수 있는 주님 닮은 목회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바람직한 목회자상에 대해서 너무 길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무리 줄이려고 해도 줄일 수가 없었습니다. 바람직한 목회자상은 첫째로 통곡하고 울면서 회개와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목회자상이고 둘째로 온유와 겸손을 몸에 지니고 모두를 섬기는 목회자상이고 셋째로 기도와 말씀에 사로잡힌 목회자상이고 넷째로 긍휼과 용서와 사랑에 사로잡힌 목회자상이고 다섯째로 수고와 고난과 희생의 삶을 사는 목회자상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목회자상을 지닌 목회자가 다 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목회자상을 우리의 이상으로 삼고 최선을 다하면서 여유롭고 즐겁게 그리고 대강대강 목회하시기를 바랍니다. 2010년 새해의 저의 기도 제목을 소개하면서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금년 1월 1일 분당 어느 교회에서 방지일 목사님을 모시고 신년 감사예배를 드린다는 말을 듣고 그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방지일 목사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저는 그 설교를 듣고 나서 새해의 기도 제목을 다음과 같이 정했습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눈물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옵소서. 온유와 겸손과 섬김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옵소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옵소서. 수고와 고난과 희생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옵소서.” 한 가지 더 보태면 “기도와 말씀에 사로잡히게 하시옵소서” 입니다. 사실 오늘 설교는 저의 새해의 기도 제목들을 풀이한 설교입니다. 오늘 목사 안수와 강도사 인허를 받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평생토록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면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의 사랑 받는 귀한 목회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을 모두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