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위과 함께 새벽을 (2 주간 영속 새벽 집회)

1.온전하게 살려는 노력

시 26 : 1 -  12절

 

  바르게 살려고 하면 할수록 왜 그렇게 걸리는 것이 많은지 모릅니다.  생각 없이 살 때는 아무렇지도 않던 것들이 바르게 살려고 하면, 유혹이 되고, 친하던 사람도 안 좋은 눈으로 보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런 일들 때문에 바르게 사는 삶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레위기 11장 44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몸을 구별해서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면 베드로전서 5장 10절 말씀대로 고난 받은 우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해 주실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온전하고 바르게 사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바르게 사는 것처럼 보이려는 사람들이 있고 또 힘들지만 바르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  첫째, 바르게 사는 것을 보여주려는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 어느 카톨릭 국가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한 택시 운전사가 한밤중에 여자 손님을 살해하고 값비싼 보석을 빼앗은 후에 시체를 강에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음날 체포되었습니다.  경찰은 살해된 여자의 햄버거가 든 가방을 그 증거로 삼았습니다.  누군가가 ‘왜 그것을 먹어 치우지 않았느냐’고 그에게 질문을 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은 사순절이지 않습니까?  카톨릭 신자인 제가 어떻게 고기가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그 빵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보석이 탐이 나 사람의 생명까지 살해하면서도 종교적 의식에만 철저했던 외식주의자였던 것입니다.

 

  10절에, “저희 손에 악특함이 있고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라고 했습니다.  사랑과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고 행복을 파괴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입으로는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형제를 미워하거나 자비를 베풀기를 거절한다면 우리 신앙 역시 바르게 사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 뿐 아무 것도 아닙니다.

 

■  둘째, 온전히 살기 위해 노력하는 다윗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은 정말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고, 그 노력대로 바르게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변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고 질투와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질투와 비난을 하나님께 아뢰고 그 어려운 상황을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었던 다윗입니다.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1절)라는 다윗의 고백은 범상치 않은 고백입니다.

  일반적으로 내가 나의 완전함을 말하면 교만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 고백은 좀 다른 차원에서 이해를 해야 되는 내용입니다.  1절도 그렇지만 3-4절 말씀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

 

  이 내용이 누가복음 18장 11절에 있는 바리새인의 기도의 내용과 비슷한 면이 없지 않지만 「다윗」의 이 고백은 전혀 다른 차원의 기도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바리새인들에게 말 한마디도 못하는 연약한 자들을 깎아 내리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기도이고, 본시에서 다윗의 기도는 오히려 다윗을 대적하는 악한 자들의 비난에서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하나님께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5-6절 말씀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바리새인들은 뒤로는 뇌물을 받아 챙기고 악한 짓을 하면서 겉으로는 연약한 자들과 비교를 해서 자기 의로움을 나타내고 사람이 볼 때만 거룩한 척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식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바리새인과는 반대로 악을 행하는 자들의 모임을 미워하였고, 악한 자들의 모임에 함께 앉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손으로 죄도 짓지 않았던 것입습니다.  다윗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최선의 삶을 살았음에도 자기들처럼 똑같이 뇌물을 받고 악한 짓을 한 것으로 생각하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비난을 원수들에게 돌리지 않고 하나님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질투성의 비난이나 모함을 당할 경우 대부분 맞대응을 합니다.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맞불 작전을 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적을 내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하고 양쪽 모두 큰 상처만 갖게 될 뿐입니다.  다윗처럼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야 합니다.  그러면 적을 내편으로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를 받음으로 자기 인격에 상처를 남기지 않는 더 훌륭한 인격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행동을 통해서 그 바른 신앙이 나타나게 되어 있는 법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거짓된 믿음일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런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바르게 사는 것을 세상이 질투하고 비난할 때 우리도 맞대응 하지 말고, ‘이것이 내가 바르게 산 것에 대한 증거구나’라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다윗처럼 하나님께 여러분의 심정을 하소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멘 -

 

2. 완전함으로 행한 다윗

시 26 : 1 -  12절

 

  비행기, 우주선, 컴퓨터 등등의 제품들을 보면 인간의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개발하는 몇몇 사람들은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탁월한 능력이 있어도 그 능력과 관계없이 전혀 무능한 분야가 있습니다.  그것은 완전함입니다.  탁월함과 완전함은 비슷한 것도 같지만 전혀 다릅니다.  「아이슈타인」처럼 몇몇 사람은 탁월한 사람임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인류는 그 어떤 사람도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에서 「다윗」은,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라고 합니다.  또 11절에서는 “완전함에 행하오리니”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  여호와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요동치 않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라고 했습니다.(1절)  적들의 계속된 질투와 비난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만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결과 온전하게 살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본문에는 온전하게 산 구체적인 내용들이 나옵니다.

∙ 첫째, 진리 중에 행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람은 위대한 일도 하지만 전혀 불가항력적인 것도 있습니다.  완전함으로 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진리 중에 행하고, 말씀대로 사는 문제를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풀어나갔습니다.  3절에,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라고 고백한대로 다윗은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르게 사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내 의지로 바르게 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은 내 의지를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진리 중에 행하려 할 때 말씀이 능력이 되고 길이 되어서 인도하기 때문에 바르게 살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도여러분, 말씀대로 사십니까?  쉽게 대답 못할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문제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비밀을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풀었습니다.  성도님들도 말씀대로 사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더욱 주님을 의지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 둘째, 악행을 의도적으로 피했습니다.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4절)라는 말씀대로, 다윗은 악한 자들을 의도적으로 멀리하며 피했습니다.  허망한 자들과 간사한 자들은 세상사람 모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세상사람과 함께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들은 세상 사람 중에서 적극적으로 악을 행하며, 악을 업으로 삼아 행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다윗」은 세상 사람과 더불어 살 수 밖에 없었지만 저들이 악을 행할 때는 악을 행하는 그들과 함께 하지 않고 빠져 나왔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과 함께 죄를 짓고, 악한 짓을 할 때 눈감아주고 같이 거들면, 친해질 것 같지만 결단코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되 죄는 짓지 말하야 합니다.  시편 1편 1절이 말씀하는 대로, 여러분도 「다윗」처럼,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않지 않는 구별된 모습을 갖추어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 셋째, 주의 성전을 가까이했습니다.  죄악 된 주변 환경을 멀리할 수 있는 힘을 얻는 방법으로 다윗이 취한 행동은 하나님의 집을 가까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8-9절)

 

  여러분, 사람이 이 땅에 사는 동안 죄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고 악을 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소에 엎드려 정결한 삶을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제사장이 제사에 앞서 물두멍에서 손을 씻음으로 부정한 것을 씻었듯이 여러분도 늘 성전을 사랑하고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므로 온전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넷째, 하나님의 구속과 긍휼함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완전히 행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던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함을 의지했습니다.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구속하시고 긍휼히 여기소서.”(11절)  이렇게 다윗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자녀이기에 온전함으로 살기 위해 발버둥쳤습니다.

 

  다윗은 여전히 어려움과 환난이 계속되는 상황속에서도 결국은 자기 발이 평탄한데 섰음을 확신합니다.  지금의 상황이 극히 어렵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넓고 평탄한 곳에서 있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애굽이라는 강대한 나라와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능력과 자비의 손길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당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서 평탄한 삶을 주실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도답게,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이 완전함에 행하려고 노력했던 모습이, 여러분들의 삶에서도 보여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보여지는 모습을 통해서 어떤 어려운 중에서도 평탄한 축복이 임하시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멘 -

 

3.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

시 27 : 1 -  6절

 

  종교는 신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말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지만 의미 있는 말입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숨었던 것도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범죄한 인간은 기쁘고 즐거운 일 속에서도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하며 사는 존재들입니다.  타락한 이후 두려움은 그림자처럼 사람을 따라다니기 때문에 아무리 두려움을 모르는 것처럼 행동을 해도 인간의 내면 속에는 항상 엄습해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두 가지입니다.  일상적인 일과 사건 때문에 갖는 두려움이 있고, 또 하나 영적인 두려움이 있습니다.  회사에서, 또는 사업을 하면서 꼭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 앞에서 갖는 두려움이 있고 죽음과 영적인 세력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전자를 통해서 갖게 되는 두려움은 그리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지만 후자를 통해서 갖게 되는 두려움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주님 품안에서 참된 평안함과 기쁨을 누려야 만이 그 두려움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109 D-9

.............................................................................................................................................................................................................................................................................

  그리고 일반적인 사건을 통해서 갖는 두려움은 영적인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영적인 두려움이 해결되면 세상의 문제를 통해서 갖게 되는 두려움은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오늘 본문에서 두려움을 해결하면서 하나님에 소망이 더 한층 커졌음을 고백했습니다.

 

■  먼저, 다윗은 하나님이 생명을 붙잡고 계시다는            확신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환난 중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는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빛이요 구원주이시며 생명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생명을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다윗은 어떤 두려움과 공포도 이길 수 있었습니다.  물론 어려움이 있고, 그에 따른 고통도 있었지만 모든 생명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확신이 이 모든 것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있는 두려움은 하나님을 떠나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생명의 주인 되신 주님 안에 있으면 두려움도 공포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다윗이 고백하는 생명의 능력이시라는 ‘능력’은 ‘피난하다’, ‘피난처’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의 능력이라는 말을 생명의 피난처라고 바꿔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여호와를 자신의 생명의 피난처로 삼았기 때문에 강한 대적의 공격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경험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2절에, “나의 대적, 나의 원수 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라고 했습니다.  원수가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 때 다윗이 원수를 물리친 것이 아니라 원수 자신이 잘못해서 넘어졌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이 일을 생명의 주관자시인 하나님의 관여하심 때문에 되어진 일임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보호하심으로 원수가 실족해 넘어졌던 경험을 통해서 이제는 어떤 대적들의 군사들이 온다해도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지난날의 보호하심은 다윗에게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도 두려움이 없는 확신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다윗은 5절에서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라고 찬양했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곧 고난을 자처하는 것임을 다윗은 체험을 통해서 잘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난이 닥친다고 해도 이제까지 지켜주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승리를 확신하는 것입니다.

 

■  둘째,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거하며 하나님을              앙망하고자 하는 강한 소망이 생겼습니다.

 

  4절에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많은 환난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험이 다윗으로 하여금 한가지의 소원, 즉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를 앙망하며 사모하는 소원을 갖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셔서 안 계시는 곳이 없지만, 그럼에도 다윗이 이 성전에 거하기를 갈망하는 이 고백은  하나님의 품안에 거하고자 하는 신앙적 열정이 담겨져 있는 메시지입니다.

 

  성도여러분,  다윗은 하나님의 전에 거하며 그곳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절대적인 안전과 은혜로 환난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거하여 하나님을 앙망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에서 살기를 앙망한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어려움과 고난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윗처럼 생명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 여호와의 집에 거하며 여호와를 앙망하고 사모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멘 -

 

4. 하나님의 긍휼을 사모하는 다윗

시 27 : 7 -  14절

 

  「다윗」은 숱한 어려움과 고난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아무 탈없이 지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의 신앙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긍휼 하심이 있었기 때문에 범죄 하였을 때에도 다윗을 외면치 않셨고, 다윗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9절에서,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만이 죄 많고 연약한 인간이 유혹 많고 타락하기 쉬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을 어떻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긍휼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과거 다윗이 은혜 받았던 방식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  그것은 바로 주의 얼굴을 찾을 때 긍휼히 여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긍휼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하면서 기본적인 방법이 무엇입니까?  만남입니다.  만나지 않으면 잘못된 문제를 하소연할 방법이 없습니다.  

 

  사람도 쌍방간에 문제가 생기면 제일먼저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합니다.  그래서 만나면 대부분의 문제들이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상대방에서 만나지 않겠다, 만날 필요조차 없다라고 하면 문제해결 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나지 않았다면 노여움이 풀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님의 얼굴을 뵙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 본문은 여호와의 얼굴을 찾아야만 하는 몇 가지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 첫째, 주님만이 도움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9절 중반에,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라는 고백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께서 과거에도 다윗이 의지했던 유일한 대상이시요, 현재에도 그가 의지하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여호와께서 과거에 다윗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따라서 여호와는 불변하시는 분이시기에 과거의 구원의 하나님은 현재에도 구원의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 둘째, 여호와는 절대로 우리를 외면치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0절에,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다윗」의 부모가 다윗을 버렸다는 말이 아니라 여호와의 사랑을 부모의 사랑에 비교하여 그 탁월함을 표현한 말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아무리 깊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부모는 자식의 아픔과 고통을 들어주고 싶어도 들어줄 능력이 없어서 외면하거나 버립니다.  요즘에 탁아소에는 불구자라고 해서 버리는 아이들로 넘쳐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불구자이고 병신일지라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모습이 악하고 추해도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를 구하시려고 주님은 당신의 독생자까지 이 땅에 보내주셔서 우리를 구해주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의 얼굴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 셋째, 평탄한 길로 인도하실 분은 여호와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지금 「압살롬」의 반란에 직면하여 극한 위기상황가운데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셔서 다윗을 인도해 주시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의 인도를 받고자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11절)

 

  인생의 최고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까지도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라고 했습니다.(계22:3)

 

  「다윗」은 자신의 미래에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미래에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은혜를 볼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13절에,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산 자의 땅에서 여호와의 은혜를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보다 더 좋은 은혜란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같은 확신에서 우리들에게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라고 강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겪는 인간적인 연약성과 세상의 환난과 악인의 강포함이 얼마나 극심한 힘의 대조를 보이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만을 바라는 확신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고 소망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그렇게도 다윗이 거하고 싶었던 참 성전이십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으로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에 계시지만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려고 지금도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처럼 우리들도 세상에서 여러 가지 고난과 역경을 겪을 수 있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당면한 문제들을 풀어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멘 -

 

5. 여호와의 행하신 일을 생각하는 사람

시 28 : 1 -  5절

 

  목사가 설교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 뭡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의지하는 사람이 있고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의지하고 누가 의지하지 않습니까?  뻔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서 재미를 본 사람은 의지하고 재미를 본적이 없는 사람은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해서 재미를 보지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세상만 의지해봤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재미를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고는 성경 속에서 되어진 일 이외에 자기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본적이라고는 한번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본적도 없고 경험한 적도 없는 사람이 태반인데, 어떻게 불신자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막연히 신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뿐이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의 죄를 대속하셔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자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본문 5절에서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파괴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으로 자기 길을 계획하고 추진하는 그 일이 하나님의 일과 반대가 되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잠언 16장 9절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자기의 길을 열심히 계획해서 추진한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과 반대가 되면 인간의 계획을 무산시킨다는 말입니다.  그 대표적인 일이 본문에서의 다윗의 왕권에 대한 반역입니다.

 

  본 시편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 사건으로 쫓길 때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이 시에서 다윗은 이미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여유를 즐겨야 할 때이지만 압살롬의 반역으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은 단순히 다윗의 왕권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다윗을 통해서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반역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다윗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행하신 일을 생각지 않고 육신적인 일로만 생각해서 저지른 반역이기 때문에 육신의 일만을 도모하는 저들의 반역을 하나님께서 파괴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런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이 문제      앞에서 제일먼저 기도했습니다.

 

  「다윗」의 기도의 특징은 위기를 만나면 만날수록 하나님에 대한 신뢰함이 더욱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그의 표현들을 보면 다른 어떤 사람에게서 사용되지 않았던 단어들, 그러면서도 아주 귀하고 가장 고급스럽고 성경적인 표현들이 많습니다.  그런 표현이 바로 하나님을 ‘반석’ 또는 ‘방패’라고 표현한다거나, 기도할 때에 ‘주의 성소를 행해서 부르짖는다’는 고백들입니다.  이런 표현들은 다윗이 하나님만을 바라며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향한 신앙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용어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다윗은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라고 했습니다.(2절)  예루살렘에서 쫓겨 떠나게 된 다윗은 자신의 궁궐을 쳐다보며 기도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소를 향해서 손을 들었습니다.  이처럼, 그의 생각과 삶은 오직 하나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소를 행해서 손을 들고 기도한 것입니다.

 

  3절에서 다윗이 말하는 ‘악인과 행악하는 자’란 하나님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오직 세상의 향락과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였고 심지어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핍박하며 성도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심지어는 공영방송이라는 공적인 자리에서 기독교를 탄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 한때 한창 인기가 있었던 「김용옥」이라는 사람이 ������논어이야기������라는 프로에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얼마나 욕했는지 모릅니다.  물론 교회와 성도들이 잘못해서 욕 먹인 부분도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 기독교인들만 유독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라 타종교인들이 더 사회에 악한 짓을 함에도 유독 기독교만 타깃을 정해놓고 교회와 성도들만 비난했습니다.

 

  「다윗」은 4절에서 이런 자들을 향하여 뭐라고 합니까?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 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 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그랬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응답하실 것을 알고 5절에서, 여호와께서 저희를 그냥 두지 않고 파괴할 것이라고 확신 있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이 세상은 우리를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우는 사자처럼 집어삼키려고 합니다.  조금만 잘못하거나 틈을 보이면 무섭게 달려들어 뜯어먹으려고 합니다.  이럴 때 무엇보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께 기도함으로 위로 받고 문제를 해결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멘 -

 

6. 찬양의 내용

시 28 : 6 -  9절

 

  우리는 가끔 ‘감사의 조건’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또 자주 듣기도 합니다.  감사의 조건이라는 말은 사용자의 의도에 따라서 좋은 표현이기도 하고 좋지 않은 말이 되기도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지 조건 따져서 감사하라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범사에 감사할 때에도 조건을 따지게 됩니다.  따라서 조건을 따질 때 긍정적으로 따지느냐 부정적으로 따지느냐가 관건이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해서 조건 없이, 아무런 제목 없이 ‘범사에 감사합니다’라고 써서 감사하는 것보다는 조건을 하나하나 조목조목 적어서 감사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맹목적인 감사가 되지 않고 한 주간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관여하시고 인도하시며 지켜주셨는지를 돌아보게 함으로 살아 있는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다윗」이 이제까지 자기를 위해 역사 하신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감사의 조건들을 들어서 찬송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  다윗은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렸습니다.

 

  6절에서 「다윗」은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라고 하면서 기도할 때마다 외면치 않고 하나님께서 들어주셨기 때문에 찬양을 드린다는 전제조건을 달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중요한 감사의 조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 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기도할 때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보다 더 큰 감사의 조건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한가지의 조건이 다른 모든 조건들이 있게 했고, 다른 많은 조건들이 감사의 조건이 되게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기도할 때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조목조목 감사의 조건을 들어 찬양한 것처럼 여러분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 먼저, 다윗은 힘과 방패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힘은 보통 군대나 용사들의 힘, 군사적인 힘을 말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백성들을 원수에게서 건지실 때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힘을 가리키는데 자주 사용했습니다.

 

  다윗이 가장 자주 사용한 표현 중에 또 하나가 방패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방패는 다 부서지고 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옛 말에 어떤 창도 뚫을 수 없다는 방패가 있었다지만, 그 어떤 방패도 다 뜷는다는 창이 있어서 ‘모순’이라는 말이 생겼듯이 어떤 것으로도 이 세상의 문제와 죽음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주시면 그 어떤 사탄의 공격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주님을 여러분의 방패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 둘째,  다윗은 하나님을 저희의 힘이시요 기름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산성이시라고 찬양했습니다.  여기서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분명히 「다윗」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저희\'는 `다윗의 군사들\'을 의미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다윗의 승리는 곧 그의 군사들의 승리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그의 군사들에게 힘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9절의 `주의 백성\'이라는 말에 비추어 볼 때 `저희\'는 `백성\'을 의미합니다.  8절에서 `저희\'와 `기름 부음 받은 자\'가 함께 이어져 표현된 것도 역시 ‘저희’가 백성을 뜻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왕의 승리는 백성의 승리가 되고, 왕의 패배는 곧 백성의 패배가 되는 연합 관계에 있기에 백성에게 힘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 셋째,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렸습니다.  다윗의 감사조건 중에 마지막은 자기 자신보다는 백성들에게 있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항상 자신의 영화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모든 관심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왕위에 앉히신 목적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서 백성들을 지키시고 백성들을 악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시고 다윗 왕조가 영원히 지속되도록 하는 것이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백성들의 구원과 복을 기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업’이라는 표현을 보면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산업은 ‘백성’과 같은 뜻입니다.  ‘산업’이 ‘주의 백성’과 나란히 이어져서 강조하는 의미로 쓰여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의 기업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데 구약에서 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와 같은 감사의 조건들을 찾아 찬송한 후에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영원토록 인도해주실 것을 간곡히 소망했습니다.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드십소서”라는 이 기도는 바로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는 자신이 아니라 여호와이심을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이스라엘을 진실로 안전하게 인도하실 분은 자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참된 왕이신 여호와께서 목자와 같이 저들을 인도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드십소서’라는 말은 본래 `들어올리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목자의 인도하심을 의미합니다.  즉, 연약한 자를 들어 품에 안아서 위기에서 구원해 내심을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 다윗의 감사의 조건, 찬양의 조건들이 어떠합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달았고, 또 깨달은 것들을 감사하며 찬송했습니다.  여러분도 다윗처럼 여러분 자신을 구원하시고 주님 나라의 기업으로 축복하시고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함께하신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돌리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7. 여호와의 소리

시 29 : 1 -  11절

 

  성도들은 대부분 성경을 볼 때나 예배드릴 때만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살아가면서 부닥치는 일속에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고 말씀하시는가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하는 것 같습니다.  기도는 곧 잘 하는데 내가 한 기도에 대해서 자상하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 「H. G. 웰스」라는 사람이 풍자적으로 짤막하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대주교가 습관적으로 기도를 해 왔었는데 한번은 갑자기 어려운 문제가 생겨서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평상시 기도하던 대로 무릎을 꿇고 ‘오! 하나님’하고는 할말조차도 생각이 안 나서 그만 가만히 있었는데 그때 은밀한 중에 ‘오냐! 네 문제가 무엇이냐?’는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되자 대주교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리고 말았답니다.

 

  이 대주교는 기도하는 것을 그냥 신앙적인 형식으로 생각하고 했을 뿐인데 하나님이 응답하시자 깜짝 놀라서 기절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저희 집 큰애가 어렸을 때 제 휴대폰을 갖고 놀면서 무심결에 메모리 버튼을 누르자, “여보세요”라는 사람 소리가 나니까 그만 놀래서 휴대폰을 집어던진 일이 생각났습니다.

  여러분 늘 하나님과의 대화 속에서 사는 사람이 바른 신앙인입니다.  신자라고 하면서 한번도 하나님의 음성이나 응답을 받아본 경험이 없다면, 이 사람은 신앙생활에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신이 아니라 살아계신 분이기 때문에 성도가 하나님을 찾으면 반드시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대자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본문 3-9절까지의 말씀 가운데 “여호와의 소리”라는 말씀이 무려 일곱 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 이렇게 본문 말씀에서 강조하고 있는 여호와의 소리가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합니까?

 

■  첫째,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권세가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는 교만한 자들에 대한 경고의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인간의 권세자들이 갖고 있는 그런 권세가 아니라 우주를 호령하는 권세이며 번개와 바다와 백향목을 꺽으시는 능하신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지진을 일으키시고 거대한 산들을 울리게 하시는 경고를 통해 세상 권세자들의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아래 있음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권세자 뿐 아니라 우리도 여호와의 소리를 통해서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여호와의 소리는 천재지변과 자연 속에서의 하나님의 음성을 강조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속에서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다 동원하셔서 당신의 권위와 위엄을 드러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  둘째, 성경의 역사와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역사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역사가 인간의 생각대로 꾸려져 나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역사와 사건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만 미련한 사람은 사람의 능력과 권모술수 밖에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역사와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오늘 본문은 성경의 두 가지 사건을 기억나게 합니다.

∙ 먼저, 노아의 홍수사건입니다.(10절)  노아의 홍수사건 속에서 어떤 음성을 들어야 합니까?  말세를 사는 우리는 세상의 갖가지 유혹들, 물질과 성과 쾌락의 유혹들을 멀리하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 둘째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건입니다.(8절)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과 불순종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항상 감사하고 순종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길트」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강단에서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귀가 열려서 무엇이든지 그 속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셋째,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힘과 평안을 주시는              분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세상을 주관하시고 천지만물을 명령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곧 우리들에게 힘과 격려가 되는 것입니다.  천재지변과 권세자들 앞에 두려워 떠는 사람도 있지만 성도들은 하나님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11절에,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라고 했습니다.  능력이 많은 아버지를 둔 자녀들은 이 세상에서도 잘먹고 잘살고 편하게 지내는 것처럼, 능력이 많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성도들 역시 이 땅에 사는 동안 평강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라고 찬송을 드린 것입니다.(11절)

 

  우리의 능력과 평안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도 평안함이 없고 불안하고 초조하다면 그것은 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시고 평강의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늘 의지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멘 -

 

8. 주의 영광을 위해 사는 이유

시 30 : 1 -  3절

 

  장로교의 교리문답 중에 ������소요리 문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소요리 문답 중 첫 번째 문답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사람이 일평생 살아가는 데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공부하는 것도 목적이 있고, 돈을 버는 것도 목적이 있고, 여행을 해도 목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소한 것에도 다 목적이 있는데 그 중에 인생에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첫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요, 둘째가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소요리 문답의 제1 문답대로 우리의 삶의 목적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도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그랬습니다.  이 말은 곧 ‘내가 주의 영광을 위해 사는 이유는’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잘해서 나에게 돌아오는 칭찬이 있고 영광이 있을 때 그것을 내가 받아서 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영광이 전부 하나님께 돌려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광 받는 그 일들이 다 하나님의 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시인데 다윗은 자신에게 돌아오는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겠다는 고백을 하면 ‘주를 높이는 이유’에 대해서 조목조목 노래하고 있습니다.

■  첫째, 구속하심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 영화를 만들만한 인물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 「다윗」은 영화를 만들어도 충분합니다.  그만큼 숱한 고난과 역경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정말 곤경에 빠져서 내 힘으로는 도저히 헤어날 길이 없고 이제는 끝났다 싶을 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끌어내 주시고 감쪽같이 빼내어 주시는 경험들을 수도 없이 했습니다.  이런 이유들이 바로 오늘 본시에서 다윗이 주를 높이고 영광을 돌리는 이유입니다.

 

  다윗이 주를 높이는 까닭은 원수에게 붙잡힐 상황에서 목숨이 원수의 손에 달려 있었는데 주께서 다윗을 끌어내어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적들이 다윗으로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고 오히려 낙담하고 오히려 실망했습니다.  그들의 환호와 즐거움을 하나님께서 낙담과 비명으로 돌려놓으셨던 것입니다.

 

  한번은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피하여 엔게디 요새에 숨어 있었는데 그것을 누가 보고 사울에게 일러바쳤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군사 삼천을 거느리고 그 굴로 갔습니다.(삼상24:1)  처음에 굴은 숨기 좋은 것 같았지만 막상 위치가 탄로 나니까 이건 도망할 수도 없는 독 안에 든 쥐 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위기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은 사울 혼자 굴속에 용변보러 들어오게 하시는 기가 막힌 역전을 이끌어내셨습니다.  이런 경험 때문에 다윗은 주님을 높이노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혹 ‘나는 그런 일이 없는 데’라고 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시면 얼마나 많은 일들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셨는지 모릅니다.  혹 앞으로 또 어려운 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문제에 개입하셔서 감쪽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끌어 내어 평생을 하나님 찬양할 수 있도록 해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  둘째, 고쳐주시고 살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굵고 짧게 살고 싶으신 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50까지 살고 싶으신 분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아니면 환갑 잔치를 하고 죽고 싶은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모두들 오래 살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물론 저도 그렇습니다.  신앙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제가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는 일들이 좋은 결실을 맺고 그 일들이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오래 건강하게 살아야 합니다.

 

  정확히 병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다윗은 죽을 뻔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다윗이 병들었다는 기록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3절을 보면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다윗의 아픔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먼저, 「다윗」은 “부르짖으매”라고 했니다.  부르짖었다는 것은 자신의 질병이 체력으로 버티거나 의술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감기정도라면 약 먹거나 몇 일 지나면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병은 기도해야 될 문제라고 생각했다면 이것은 죽음 직전까지 갔던 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고쳐주셨습니다.

 

∙ 또 하나는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라는 표현입니다.  다윗을 음부에서 끌어내었다고 하여 음부 즉 무덤까지 들어갔다는 말은 아닙니다.  영락없이 이제는 관 뚜껑을 열고 그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를 고쳐 주시어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를 높이고 영광을 돌릴 이유를 갖고 있습니까?  우리도 다윗과 같은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구원해주신 은혜 때문에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들은 영원한 형벌을 당할 수밖에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끄집어 내 주셨기 때문에 영원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다윗처럼 건강하게 하시고 고쳐주신 은혜로 인하여 주님을 높이시기 바랍니다.  내가 죽을병에 걸렸다가 은혜로 나으면 감사할 줄 알면서 평생에 감기 한번 안 걸리는 사람은 왜 그렇게 감사를 못합니까?  그것이 더 감사할 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하루라도 더 살면서 한가지라도 더 많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은총을 생각하면서 충성하고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멘 -

 

9. 노염은 잠깐, 은총은 영원

시 30 : 4 -  12절

 

  오늘 본문 시편 30편을 통해서 본 「다윗」은 이제까지 아주 건강하여 한 번도 아파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6-7절에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했고,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라고 한 것을 보면, 이제까지의 그의 생애는 순탄하였고 하는 일마다 형통하였으며 부러울 것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반석같이 흔들림이 없고 형통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들을 잊어버리고 마치 그것이 자기 힘으로 된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었던 어느 날 그는 쓰러졌습니다.  표준 새번역에는 7절 말씀을 “아, 태산보다 더 든든하게 은총으로 나를 지켜 주시던 주께서 나를 외면 하시자마자 나는 그만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로 향하셨던 얼굴을 잠깐 돌리시는 순간 그의 건강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간의 공통된 약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즉 형통할 때, 편안할 때 더욱 조심하고 경건하게 살지 못하고 교만하거나 방심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런 인물을 몇 사람 꼽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국의 첫 번째 왕으로 선택되었던 「사울」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처음에 아주 겸손하여서 왕으로 선택되었고, 왕으로서의 책임도 잘 수행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점차 교만해졌고 그래서 스스로 높아져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던 것입니다.

 

  「솔로몬」 왕도 처음에는 참으로 지혜로운 왕으로 칭송을 받았지만, 점차 교만하여져서 타락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그가 죽은 후에 그의 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뛰어난 지혜를 가졌음에도 형통할 때 겸손하지 못함으로 헛되고 헛된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일이 잘 될 때에 겸손해질 수 없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앞의 두 사람처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잠16:18절)  절대로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교만을 낮추시고 겸손하게 만드는 방법을 갖고 계십니다.  자기 힘과 지식으로 살려는 자를 하나님의 은총아래 살도록 붙잡아 매두시는 방법을 갖고 계십니다.  무엇입니까?

 

■  첫째, 고난입니다.

 

  죽을 환자를 수술하여 살리듯이 하나님은 고난이라는 칼을 통하여 우리의 교만을 수술하시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 주님만을 의지하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시119:67절)

  고난 당할 때에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난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성품과 인격을 만드시기 위한 과정일 뿐 아니라 육신을 눈을 떠서 천국을 보게 하기 위한 처방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노염은 잠깐이고, 은총은 평생인 것입니다.  채찍을 매일 때리는 아버지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채찍도 불가피한 경우 잠깐 고난을 당하게 하실 뿐입니다.  그런 뒤에 곧 구원하여 하나님의 은총 안에 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난을 당하니까 「다윗」이 어떻게 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죽음 직전까지 몰려갈 정도로 심각한 병에 걸렸습니다.  다윗은 이 고난이 무엇 때문인지를 깨닫고 즉시 기도했습니다.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9절)

 

  「다윗」은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전에는 주의 진리를 선포하는데 게을렀지만, 살려주시면 생명을 다해서 주의 일에 힘쓰겠다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9절)  이렇게 고난은 다윗을 다시 바로 세우는 역할을 했습니다.

 

■  둘째, 은총입니다.

 

  다윗은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11-12절이 그 내용입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다윗」의 감사는 죽을병에서 살려주신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은총의 하나님을 만난 것이 그 무엇보다도 기뻤던 것입니다.  육체적 고통에서 구원받는 것을 통해서 은총의 하나님을 깨닫게 된 것이 다윗은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만 기뻐하고 감사하는데 머물지 않고 주의 백성들을 향하여 함께 주님을 찬송하고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고 감사하자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런 기쁨 때문에 다윗은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라고 노래했던 것입니다.(5절)

 

  사람은 고난을 겪으면 간증거리가 생깁니다.  간증거리가 있다는 것은 고난을 당했지만 결국은 고난이 은혜가 되고, 복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간증거리가 없어도 좋으니 고난은 필요 없다는 생각으로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난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고난이 안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윗처럼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더 큰 은혜와 은총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예기치 않은 고난이 다가올 때 그 무거운 고난 앞에서 낙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시고 다윗처럼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피할 길을 주시고, 은혜로 인도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고난은 잠깐이요, 은총은 영원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여러분의 잘못된 모습들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헛된 욕망을 따라 형식적으로 신앙생활 했던 모습에서 돌이켜서 이제는 진지하게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고 순종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은혜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멘 -

 

10. 그러하여도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시 31 : 1 -  14절

 

※ 전쟁터를 묘사한 인상적인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지금도 기억에서 기워지지 않습니다.  그 그름은 포탄이 떨어지고 많은 병사들이 쓰러져 가는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죽어 가는 사람들의 고통스런 표정 하나하나는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전쟁터 한 가운데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 한 편에는 전쟁의 참상 속에 나타난 하나의 거대한 손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전쟁 가운데 포탄이 떨어지는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신앙의 사람들을 크신 손으로 붙잡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눈앞에 나타난 것들만 의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문에 보도된 수치나 관계자의 말에 우왕좌왕합니다.  눈앞에 벌어진 일 때문에 안절부절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주님의 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믿는 자들을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며 이 세상을 이끌어가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모든 운명과 미래가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절대적인 믿음이 있을 때 다윗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다윗은 극적인 고통과 어려움을 당함에도 신앙에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러하여도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놀라운 고백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신선한 고백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본 시를 보면 다윗은 극심한 고통 중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대적들의 올무와 핍박 속에서 엄청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보니까 주변의 친구들이 놀라고 이웃 사람들이 피하여 숨을 정도라고 했습니다.  12절은 사람들이 다윗을 죽은 사람처럼 더 이상 기억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지금 이런 악조건들을 주님께 아뢰고 주님께 구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보장이 되소서”(1-2절)

 

  보통 사람들은 상황이 이 정도 되면 기도하면서 원망도 하고, 기도가 속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동원하지만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라는 아주 귀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여도…”  ‘대적이 생명을 노리고 사람들의 존경이 무너지고 멸시를 당하여도…’  ‘지금 죽음이 내 앞에 다가왔다 하더라도…’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겠다는 신앙입니다.

 

  「다윗」이 이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알고 있는 인자하신 하나님은 다윗을 고난 중에 방치하실 분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 다윗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 첫째, 곤난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감찰하사’라는 말은 ‘바라보다’, ‘조사하다’는 뜻으로 눈으로 직접 확인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이 악인에게 사용되면 악인들의 행위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위해 살펴보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의인의 고난을 자세히 살펴보시는 것은 그 고난에서 그를 건지시기 위함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알고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 둘째,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아셨고’라는 말은 단순히 피상적인 지식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포괄적인 지식, 완전한 지식, 또는 어떤 일을 전문적으로 완전히 습득하고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완전한 지식으로 하나님은 다윗의 영혼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걸어온 다윗의 여정, 그에게 닥친 모든 역경들, 그리고 이로 인한 그의 영적인 상태를 빠짐없이 살펴보시고 그를 아셨던 것입니다.

 

∙ 셋째, 나를 대적의 수중에 금고치 않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금고치‘ 않게 했다는 말은 다윗이 원수의 손에 의해 굴복 당하지 않게 했다는 말입니다.

 

∙ 넷째,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넓은 곳’은 안전과 구원을 상징하는 말입니다.(18:19)  다윗이 원수들에게 완전히 굴복 당할 즈음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다윗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과거의 은혜로운 사건들을 기억하면서 현재의 고통도 그때와 같이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비교해 보게 됩니다.  우리는 잠시동안의 어려움이라 할지라도 참지 못하고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기도해도 속히 응답이 되지 않을 때는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하여도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치 밤이 어두워질수록 빛이 더욱 밝은 빛을 발하듯, 바른 신앙은 어려움이 닥칠수록 더욱 더 하나님 앞에 가까이 다가가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바른 신앙은 환경이 좋을 때만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좋든지 나쁘든지,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변함없는 믿음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찬송하며 감사가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빌2:12)  하나님이 나를 보시지 않는 것 같아도, 예수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주를 의지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변함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생활이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주님과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는 마음이 변함없으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멘 -

 

11.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나이다

시 30 : 15 -  24절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마치 내가 주인인 것처럼 기도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마치 하나님이 나에게 빚을 진 것처럼 하나님께 강압적으로 기도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를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써달라는 기도보다는 내 뜻과 내 목적에 따라 하나님께서 힘 좀 써달라고 기도할 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기도할 때 나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런 기도는 위급할 때 하는 기도이고, 평상시 늘 상 하는 기도로서는 합당한 기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1장 20-21절에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통해서 덕 좀 봐야겠다는 식으로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는 「다윗」의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본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다윗은 15절에서,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라는 아주 귀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려운 일이 많고 국제 정세가 복잡해도, 우리 사회와 세계가 다 주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이것이 다윗의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이 있어야 어떤 어려움이 와도 믿음으로 승리하게 됩니다.  집안 일이 안되면 무당 불러 굿하고, 내일의 운세가 어떤지 점이나 치는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의 주관자요 우주의 통치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승리는 지금 조금 어려워도 결과적인 승리는 항상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아무리 어려움이 파도같이 밀려와도 다윗의 생명과 삶은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에 그 어려움이 자신을 무너트리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기도할 때도 불안한 마음으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기에 확신과 자신감을 갖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 그리고 같은 고난과 어려움에 봉착하고 힘들어하는     이 땅의 모든 성도들에게 두 가지를 당부했습니다.

 

■  첫째,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23절에,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다윗」도 우리와 같은 이 세상을 살면서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다윗은 우리가 얻고 싶어하는 세상의 권력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지만, 그 권력이 자신을 보호해준 것이 아니라, 그 권력 때문에 수도 없이 죽을 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런 권력이나 돈을 사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라고 한 것입니다.

 

  「다윗」은 19절에서,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라고 했습니다.  쌓아두신 은혜는 다윗을 위해 은밀히 준비해 놓으신 좋은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준비하시고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컸던지 쌓아 두신 은혜, 베푸신 은혜라고 표현하면서 그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다윗처럼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크다고 느껴지십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 쌓여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은혜 베푸셨다는 사실로 인하여 주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사랑합니까?  물질을 사랑하고, 세상의 명예와 쾌락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들은 고난이 오면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의지할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 없습니다.  항상 좋은 것을 준비해 놓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  둘째,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마지막으로 24절에서 “강하고 담대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위로의 메시지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전쟁보다 더 험하고 어려운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강하고 담대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관한 싸움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 싸움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 싸움에서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오직 하나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자만이 승리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말뿐이 아니라 무섭도록 쫓아다니며 죽이려고 했던 「사울」과의 경험, 「압살롬」과의 경험 속에서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무엇보다도 강하고 담대하라는 충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강하고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은 배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말합니다.  강한 믿음 담대한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일이 있을지라도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갖고 변함없이 하나님만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과 권세자와 모든 사건과 결정들이 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만을 찬양하며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2. 복 있는 사람

시 32 : 1 -  2절

 

   복 있는 자의 대표적인 모습을 우리는 시편 1편에서 알아봤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도 복 있는 자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32편은 1편과 달리 복 있는 자의 또 다른 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적극적인 복입니다.

 

  그러나 32편에서의 복은 1차적으로 죄를 멀리하지 못해서 죄인의 자리에 있었다 할지라도, 오만한 자였을지라도, 말씀을 즐거워하지 못하고 세상을 즐거워했어도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 말씀은 너무도 우리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 인간 세상에는 수많은 문제와 불행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불행은 근본적으로 죄의 문제에서 기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문제의 근본원인이 죄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이 죄의 문제에 대해서 완전히 해결 받은 사람이야말로 진정 복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 본문에서 「다윗」은 행복한 자, 복 있는 자를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  첫째, 허물의 사함을 얻고 죄의 가리움을 받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입니다.

 

  본시를 통해서 다윗이 기원하는 복은 사죄함의 복입니다.  다윗이 ‘사죄의 복’을 말하는 것은 처음부터 죄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즉, 죄 없는 자가 복 있는 자이지만 결단코 이 세상에 죄 없는 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다윗은 ‘죄 없는 자’의 복을 기원하지 않고 ‘사죄함을 받은 자’가 복이 있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복 있는 자를 노래함에 있어서 죄 용서받은 모습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 첫째, 허물의 사함을 얻는 자입니다.  허물이란 ‘반역하다’, ‘거역하다라는 ’말로 ‘하나님에 대한 반역’,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함을 얻고\'라는 말은 ‘짐을 들어올리다’, ‘나르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허물의 사함을 얻는 다는 말은 죄를 하나의 무거운 짐으로 보고 하나님께서 이 죄의 짐을 치워버리거나 옮겨주셨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구원받은 자는 더 이상 죄의 무거운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둘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입니다.  ‘죄’는 표적을 빗 맞추거나 길을 잃는다는 의미로 참된 길, 진리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가리움을 받은’이라는 말은 ‘덮다’는 의미입니다(85:2,잠10:12).  따라서 죄인의 죄가 가리워 져서 더 이상 하나님께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죄가 가리워 짐으로 그 죄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복을 받았습니다.

 

∙ 셋째,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입니다.  ‘정죄’에서 ‘죄’는 ‘왜곡된 것’을 의미하는 말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태도’ 또는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정죄를 당치 않은\'이라는 말은 ‘…의 탓으로 돌리다’, ‘전가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책임을 일체 전가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 세 가지 용어는 반복강조하는 동의어로서 각각의 의미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죄사함을 통한 복을 강조하기 위해서 세가지 용어를 반복해서 사용했습니다.  이 용어들은 적어도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죄의 양상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같은 모든 죄의 양상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만이 진정으로 복된 사람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윗이 강조하는 것처럼 진정한 복은 하나님께 죄 용서받은 자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  둘째, 마음에 간사가 없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다윗」은 죄인이 사죄의 은총인 죄 용서의 복을 받기 위한 필수적인 한가지 조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 간사가 없고\'라는 말입니다.  `간사\'라는 말은 ‘속임’을 의미합니다.  완전한 사죄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 인간이 자신의 죄를 하나라도 속임 없이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요일1:8)

 

  신뢰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속이는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가족의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건 중에 하나가 서로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신뢰하는 가정은 물질의 많고 적음을 떠나 행복합니다.  그러나 서로 진실하지 못하고 속이는 것이 있는 가정이 있다면 불행합니다.  겉으로 아무리 행복한 것 같아도 건강한 가정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속임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속인다고 속거나 만홀히 여김을 받는 분이 아니십니다.  단지 속이고 감추고 있는 본인만 불행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사함이 없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께 사함을 얻고, 가리움을 받고 정죄를 당치 않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복 중의 복은 죄 사함의 복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죄 용서받은 성도로서, 주님의 자녀 된 것이 일생의 최고의 복임을 기억하시고 이로 인하여 항상 감사하며 기뻐하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멘 -

 

13. 회개한 후의 자유함

시 32 : 3 -  7절

 

  죄 짓고는 못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죄를 지으면 양심이 발동을 하기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하고 답답해서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죄를 지으면 이미 마음은 양심에 의해서 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양심의 포승줄에 매여져 있기 때문에 자백을 하지 않으면 더욱더 조여 들어와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말까지 나온 것 아닙니까?  유사한 일이 벌어지면 지레 겁을 먹고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죄자가 범행을 하고 현장에서 도망을 쳤다고 해도 반드시 그 범행현장에 다시 돌아온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불안하니까 와보는 것입니다.  현장에 혹시 물증이 될 만한 것이 없나, 아니면 현장의 환경을 봐 두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행위를 해도 범죄한 이후에 발생하는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범죄하고 죄를 숨기고 있는 자가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본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본시의 저자 「다윗」은 한때 범죄하고 나서 그 죄를 하나님께 숨기며 지내는 동안에는 그 숨긴 죄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그때의 고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시편 51편과 같습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우리야를 간접적으로 죽게 한 후에 그 사실을 은폐하고 지냅니다만, 그는 그처럼 자기의 범죄사실을 숨기고 지내는 동안에 너무나 괴로웠고 고통스러웠다고 이 시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3-4절에 보면 다윗은 자기 마음속에 죄를 숨겨놓고 지내는 동안에는 밤잠도 자지 못하고 종일 신음했다고 고백합니다.  그 결과 뼈마디가 다 약해지고 몸에서 진액이 다 빠져나간 듯한 탈진상태에 이르렀었다고 회상합니다.

 

  그러나 그후에 다윗이 자기의 모든 죄를 하나님께 자복하리라고 마음먹고 모든 죄를 낱낱이 아뢰고 회개했을 때 주님께서 용서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죄를 숨기고 있는 동안에 잃어버렸던 마음의 평화와 육체의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우리는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 분명하게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  죄는 자복해야만 걱정과 두려움과 고통에서        자유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 한 아이가 학교에 갔다가 집에 와서 노는데 새총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한번 두번 쏴보니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밖에 닭이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닭을 겨냥해서 쏘아보니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힘차게 겨냥해서 쏜 총알이 새 머리에 정통으로 맞고 닭이 그만 죽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아무도 보지 않게 뒷마당에 묻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파출부 아주머니가 보았습니다.  아주머니가 부릅니다.  “얘, 수퍼에 가서 설탕 좀 사다 주겠니?”  “아니 아주머니 그걸 제가 왜 해요.  아주머니가 하세요”.

 

  “그래? 너 닭 죽였지 내가 다 봤다”.  아이는 아무 말 없이 수퍼에 가서 설탕을 사왔습니다.  이후로 아주머니는 모든 심부름을 다 시켜먹었습니다.  아이는 도저히 불안하고 걱정이 돼서 그만 아버지께 말씀드리기로 하고 아버지께 갔습니다.

 

  “아빠, 아빠가 기르시던 닭을 제가 그만 새총놀이를 하다가 죽였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러자 아빠는 “그래 아빠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네가 잘못을 시인하니 아빠도 기분이 좋구나, 용서하마”.  아이는 날아갈듯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또 불렀습니다.  “애야, 시장에 가서 파 좀 한단 사오너라. 싫어요 내가 아주머니 종이에요”.  아주머니가 말합니다.  “그래! 아빠에게 이른다”.  “이르려면 일러요”.  아이는 자신 있게 대했습니다.

 

  아빠에게 잘못을 고하기 전에는 주인의 아들이면서 파출부의 종이 되어 시키는 대로했지만 이제는 당당하게 아들의 위치를 찾고 당당해진 것입니다.  이 모습이 죄를 자백하고 회개한 자가 맛보는 기쁨이며 자유함입니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죄의 종이 되어서 불안하고 초조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살게 됩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다윗」은 한때 범죄하고 나서 그 죄를 하나님께 숨기며 지내는 동안에는 그 숨긴 죄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죄를 얼마나 철저하게 낱낱이 회개했는지 회개를 여러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자복하리라’, ‘죄를 아뢰고’,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다’라는 표현입니다.  다 같은 말입니다만 죄를 토설치 아니했을 때의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그렇게 철저하게 자복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참된 자유와 해방은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떠나야 됩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광고 카피도 있던데 일에서 떠나면 자유합니까?  그 자유는 공허함을 주는 자유입니다.  영원한 자유와 평안함과 해방은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에서 자유 할 수 없습니다.  죄를 회개하고서 또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자신의 연약함을 주님께 아뢰고 지은 죄를 그 즉시 기회를 타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6절에서 다윗은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고 했습니다.  이 기회는 주님을 만날 기회이고 회개할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잘 살려서 회개하면 복이 됩니다.  다윗은 「나단」이 와서 지적할 때 그 기회를 잘 받아들여서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즉시 회개함으로 주님을 만나고 참된 기쁨과 자유함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멘 -

 

14. 정직을 회복한 다윗

시 32 : 8 -  11절

 

  「프랜시스 후꾸야마」(Francis Fukuyama) 라고 하는 사람이 쓴 ������트러스트������(TRUST)\"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국력이나 경제력은 자본과 기술 그리고 지식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문화적 요인, 사회적 요인에 근거한다고 말합니다.  충격적인 베스트셀러입니다.

 

  문화적 요인이나 사회적 요인이라고 하는 게 뭡니까?  바로 신뢰성입니다.  얼마나 서로 믿는 사회인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인가?  믿을 수 있는 관계인가에 따라서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가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자본으로 나라가 서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 많이 하고 지식이 있다고 능숙한 기술이 있다고 해서 경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신뢰성이 그 근본이라는 것을 이 책에서 시종일관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가 바로 얼마 전에 이런 사실을 혹독하게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IMF가 온 것은 물론 외환에 문제가 있던 것이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신뢰성, 투명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외국사람들이 투자를 줄이고 돈을 빼내가면서 시작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신뢰성은 한 국가의 국력과 경제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국가만이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에 자주 쓰는 말 중에 경쟁력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과거 5-6년 전만 하더라도 개인의 경쟁력은 지식이었습니다.  그래서 회사의 동료들과의 경쟁에서 앞서가려고 새벽과 밤을 가리지 않고 학원에 다니며 자신만의 지식을 쌓아갔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경쟁력을 건강이나 체력을 부쩍 강조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공부도 잘하고, 건강한 사람이 회사 일도 잘한다는 식의 자료들을 만들어서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보다 우선하는 것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신뢰성입니다.  개인이나 국가의 경쟁력은 신뢰성, 투명성, 정직이라는 요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투명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하면 국제사회에서, 신용사회에서 아무런 활동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문제를 분명히 알 수 있게 합니다.  「다윗」은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소년시절에도 정직하고 성실했고, 왕이 된 이후에도 정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에게 붙여준 별명이 ‘정직한 다윗’입니다.

 

  그런데 정직한 다윗, 투명한 다윗, 그래서 신뢰할만했던 다윗에게 치명타를 안겨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사건입니다.  죄도 죄이거니와 더욱 그를 괴롭히고 정직하다는 다윗의 이름을 추하게 만든 것은 그 죄를 감추고 덮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밧세바」를 범한 죄를 덮기 위해서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게 하는 명령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감췄지만 하나님께는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깨닫게 하심과 회개의 촉구 때문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죄악을 감추고 덮고 있는 동안 얼마나 괴로웠는지 3-4절에서 「다윗」은 말합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뼈는 원어적으로 척추를 말합니다.  여러분, 피가 어디서 말들어집니까?  저는 심장에서 만들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전문가의 말을 들어보니까 척추가 만든다고 합니다.  척추가 피를 생산하고 피를 맑게 하고, 척추가 호르몬을 만들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호르몬을 척추가 만든답니다.  그러니 뼈가 쇠한다면 이건 끝난 겁니다.  몸도 병들고 얼굴이 죽어 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는가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죄가 저토록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가?  좀 과장되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왜 그런 생각을 갖습니까?  정직하지 않고 진실하지 못한 사람은 죄가 저토록 고통을 주고 괴롭게 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회개도 않고 죄를 밥먹듯이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9절에서,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죄지 말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무지한 말이나 노새는 깨달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꺠닫지 못하고 강팍한 인간을 시편 49편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9절에,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미련하고 둔한 인간은 죄를 짓고도 깨닫지 못합니다.  괴로워하지도 않고 고통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말이나 노쇠나 멸망하는 짐승처럼 맞고 고난 당하고 돌아오지 마시고 몽둥이로 맞기 전에, 고난이 오기 전에 깨닫고 주님께 회개해서 신뢰와 정직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11절에 ‘의인들아’ 그랬는데, 그 의인은 어떤 의인입니까?  다윗은 전쟁에서 많은 피를 흘리고 성적인 범죄와 살인까지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어찌 의인이 될 수 있습니까?  본문에서의 의인은 회개한 자를 의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10절에서의 악인은 자신의 죄를 감추고 의인인체, 정직한 체 하는 자를 말합니다.

 

  열왕기상 15장 5절에 보면,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그후에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정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후왕들을 평가할 때에도 다윗의 정직함과 비교했습니다.(왕상15:11, 왕하11:3)

 

  여러분, 하나님께 정직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자신이 감추려고 했던 죄를 주님께 고백한 것은 주님은 다 보시고 있기 때문이라는 살아있는 신앙 때문입니다.  다 아시는 주님께 허물과 잘못을 이실직고하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죄 짓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셔서 하나님의 신뢰를 회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