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일 구국 새벽 기도회 2

\"40일 구국새벽기도회 2\"|새벽설교
새생명축복

제21일

주제 :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축복

제목 : 행복을 창조하는 가정

본문 : 시편 1:1-6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오늘부터 10일 동안은「축복의 가정을 위한 호렙산」이라는 목표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새로운 새 시대의 축복된 가정에 대한 내용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이 잘못 해석하고 있는 너무 중요한 용어 중의 하나인 축복이라는 말에 대해서 먼저 생각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이든 사랑이든 이런 모든 하나님의 역사를 가장 완전하게 표현한 용어가 축복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축복을 사용하고 목사가 축복에 대해서 말씀을 전한다든지 기도를 하면 의례적으로 기복적이다 아니면 물질주의에 빠졌다 더 이상한 말을 하는 경우는 미신적이다라고 몰아붙입니다. 그러나 축복이라는 말은 가장 많이 소개되고 사용되어야할 교회의 용어이며 회복되어야 할 성도의 언어를 우리가 잃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전체가 하나님의 인간 축복에 대한 내용들로 가득 차있고 하나님은 축복을 허락하시는 분이십니다. 무조건 축복이라는 단어를 거부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누리고 전하는 올바른 축복에 대한 개념이 오늘의 교회에서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의식을 생각하며 서로 옆에 분들과 인사를 해보시지요.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세요. 어떻습니까?

이제는 우리의 가정으로 눈을 돌려 진정한 축복의 가정은 어떤 가정이며 건강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적용되어야할 성경적인 원리를 분석해 보겠습니다. 목사는 누구나 교회에 속한 우리의 가정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고 싶어 하고 행복해 지기를 기대하며 삽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가정이 행복해 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먼저 당신이 복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이란 다른 곳에서 내게로 다가와 주기를 바라며 기다립니다. 이것이 행복에 대한 가장 큰 함정입니다. 행복이란 다른 곳으로부터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부터 만들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때문에 성경은 언제나 강조하는 것이 행복해지는 환경이 별도로 있다든지, 행복해지는 여건이 다른 곳에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에덴동산처럼 좋은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에덴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복된 파라다이스 즉 낙원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라는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 복되지 못할 때 그들은 실낙원 하게 된 것입니다. 복이란 어디에 살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사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행복한 환경을 요구하고, 행복해지는 조건을 내세우기 전에 먼저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복이 무엇입니까? 물질입니까? 땅을 주시는 것입니까? 자식을 주시는 것입니까? 창세기 12:2-3을 보십시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은 ‘복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행복에 대한 하나님의 원리와 법칙은 복된 사람이 먼저 되어야 복된 생활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복된 사람은 어디에 살아도 복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러나 복이 되지 못한 사람은 어떤 좋은 환경을 주어도 복을 잃고 맙니다. 아브라함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메마른 사막과 같은 가나안을 택했지만 복된 사람이기 때문에 복을 만들어 살기 좋은 곳으로 변화를 시켰지만 조카 롯이 택한 소돔과 고모라는 여호와의 동산 같고 물도 넉넉한 비옥한 땅이었지만 결국 타락하고 아내를 잃는 아픔을 겪는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운명과 가정도 이 원리는 같습니다. 복된 사람은 환경과 조건에 관계없이 항상 행복합니다. 일이 생기면 기회가 주어졌다고 좋아합니다. 고독하면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고 좋아하고, 건강하면 일할 수 있다고, 병들면 조용히 기도할 수 있다고 좋아합니다. 하는 일이 순탄하면 만사를 형통케 해주심에 감사하고 역경에 처하면 자신을 단련시키고 정화시켜 주심에 대해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행복을 만들 수 있는 복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질문하겠습니다. 복된 자리를 찾아다니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복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사람이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도 복 받는 길이 있다고 시작하지 않고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이 시편1편을 묵상하며 읽게 되면 내가 복 있는 사람인가 복 없는 사람인가를 평가할 수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죄를 좇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시편1)

시편119:97,98,103,105에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토록 묵상하나이다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자혜롭게 하나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시편1). 죄 짓는 사람들이란 하나님 없이 사랑가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믿지 않는 사람의 사상과 철학과 행동하는 길에 서지 않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성도의 삶은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은 내일이 없다는 절망적 의식에서 삽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때문에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고, 시잡가고 장가가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삶은 다릅니다. 성도에겐 모두 목적이 있고 부름 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때문에 성도는 내일의 소망을 갖고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시편2). 여러분은 어떤 자리에 자주 가십니까? 어떤 의자에 앉기를 바라십니까?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리를 피하십시오. 높아지고 박수 받는 자리를 거절하십시오. 받는 자리는 거절하십시오. 감사하는 자리를 찾아가고, 사랑을 나눠주고,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자리, 용기를 주고, 위로를 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가는 가정에서의 당신 위치라면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문 3절에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의 가정이 모두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항상 푸르게 살아가는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시길 바랍니다. 복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복이 없다고 불평하지도 마십시오. 당신이 복 있는 사람이 되면 하늘의 신령한 복이든 땅에 기름진 복이든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말씀을 붙들고 사십시오. 불의한 길을 피하십시오. 겸손하게 살기로 하십시오. 여기에 행복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행복을 쫓기보다 복된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2.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지게 하소서.

 

제22일 

주제 :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축복

제목 : 하나님 잘 섬기는 가정

본문 : 사도행전 19:1-8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사랑과 열정이 담겨있는 곳입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작은 나라이며 지상의 작은 천구과 같은 곳입니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출발을 가정으로 시작했음을 창세기 1:27-28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남자나 여자 한 쪽만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남과 여라는 서로 결합하는 인간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이루는 결혼은 성서적으로 바른 길이며 가정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확인케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남녀의 만남은 곧 축복된 길임을 말씀했고 가정을 이루는 사람들의 책임은 생육과 번성과 충만과 정복과 다스림이라는 질서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가정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질서를 무시한 채 인간적인 욕심과 비이성적인 사고와 세상적인 흐름으로 인하여 파괴되고 계속적인 이혼율의 증가와 가정파괴 현상들이 쉽게 일어나고 있는 가정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하나님이 아름답게 만드신 가정으로 회복될 수 있는가? 그것을 우리는 고넬료라는 한 가정을 모델로 찾아보고자 합니다.

로마 군대의 백주장이라고 소개되는 고넬료의 가정을 설명하는 본문 2절의말씀은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정의 기초가 무엇이며 가정을 지키는 자가 누구인지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로 세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그 가정의주체입니다. 하나님의주권이 그대로 인정되는 가정입니다. 온 가족이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두려워하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가정을 비교해 보십시오. 우리 가족의 몇%가 하나님을 섬깁니까? 우리 가족들의 모여진 믿음의 힘은 어느 정도입니까? 온 가족이 하나 되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긴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건강한 가정, 행복한 가정의 출발은 신앙으로 하나가 되어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고넬료의 가족들은 하나님을 경외할 뿐 아니라 그 자신이 경건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경건하게 사는 가족들입니다. 늘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는 가정이며 하나님의 뜻을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모든 삶의 중심이 모여진 가정입니다.

어느 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백성들 앞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여호수아와 고넬료의 같은 점은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을 축복된 가정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경제적인 부요함이나 풍성함이 행복한 가정을 만들지 못합니다. 때로 돈이 가정의 기본적 생활을 위해서 필요는 하겠지만 아주 중요한 위치는 아닙니다. 우리는 돈 때문에 박살나는 가정들을 너무 쉽게 보며 잠시 화려한 결혼이나 만남이 갑자기 허무하게 끝나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키시는 가정만이 안전합니다. 하나님의 보호 속에 있는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녀들이 진실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현대인의 가정 이론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이 세상의 비결은 없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또한 이 세상의 행복의 기준은 소유에 있고 자기 만족과 자기 이익에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손해가 오고 자신에게 만족이 없으면 얼마든지 헤어질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며 경건한 가정은 다릅니다. 그 가정의 공동 목표가 뚜렷하고 가족들의 삶의 목적이 확실합니다. 바로 고넬료 가정의 생활이 그러합니다. 본문2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고넬료 가정의 가족들의 목표는 백성을 많이 구제하는 삶을 살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의 비밀입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나의 이익보다 다른 이들을 위하여 희생하며 살아가는 그곳은 주님의 나라이며 작은 천구과 같은 곳입니다. 한번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인 가족, 서로 자기만을 알아주고 인정해 달라고 아우성치는 식구들만 모여 있는 가정과는 다릅니다. 그리고 항상 기도합니다. 자신의 부족을 위해 기도하고 자신의 교만을 깨뜨리기 위해 기도하고 자신이 드러나지 않기를 위해 기도하고 정욕적인 것이 지배하지 않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이런 가정이 불행할 수 있습니까? 만일 불행하다면 그것이 기적입니다.

여러분의 가족들의 의식이나 생각들은 어떠하며 생활하는 모습이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에 합당하다고 보십니까? 이제 바꿔보십시오. 내가 손해 보는 쪽을 가보시지요. 나를 중심으로 살던 의식을 당신의 남편을 위하여 산다는 의식으로 바꾸어보십시오. 어떤 분은 속썩이는 아들을 생각하면서 내 십자가라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주님이 자기의 십자가라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져야할 십자가는 당신의 자신입니다.

그리고 항상 기도하십시오. 하루 이틀을 기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40일을 기도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항상 그리고 매일같이 당신의 가족들을 하나님께 올리십시오. 그리고 당신 자신의 고쳐야 될 것을 위해 매일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당신의 가정을 세우는 능력이 됩니다.

이제 고넬료의 가정에 대해10:22에 다시 이렇게 소개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어쩌면 이런 가정으로 쓰임 받을 수 있겠는가? 거룩한 욕심이 납니다. 그 나라의 온 백성들에게까지 칭찬들을 만한 위대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바로 우리의 가정이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경외하는 가족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 늘 기도를 쉬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우리 가족 우리 가정을 만듭시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가족들이 되게 하소서.

2. 나의 유익보다 다른 이들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제23일

Message 23

주제 :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축복

제목 : 사랑을 표현하는 가정

본문 : 요한복음 13:34-35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말씀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의 대명사가 되었고 기독교를 말할 때 사랑을 제1로 여겼습니다. 영국교회의 어셔 감독은 이러한 새 계명을 가리켜서 제11계명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기독교의 뿌리이며 인간에게 하나님이 주신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람의 사람다움이란 사랑할 때입니다. 가정을 이루는 기초도 사랑입니다. 행복의 시작도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것의 열쇠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랑은 상대방에게 따뜻한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평안을 주고 기쁨을 주고 염려하고 돌아보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생애 중에서 우리들이 읽을 수 있는 첫 번째 사랑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죄인들에게 가졌던 그 관심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의 반대 개념은 미움이 아닙니다. 롤로 메이가 쓴 ‘사랑과 의지’라는 책을 보면 사랑의 반대 개념은 미움이 아니고 ‘무관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무관심하다면 당신은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오늘의 가정이 파괴되는 가장 큰 원인은 무관심입니다. 자녀의 탈선도 무관심 때문입니다. 남자들이 밖으로 도는 이유가 무관심 때문입니다. 부부싸움의 원인이 무관심 때문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사랑이란 관심입니다. 주님이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과 같이 당신도 관심을 보이십시오.

또한 사랑은 마음을 열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일반적인 사랑에 대한 기준은 얼마나 받았는가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단순히 주고 받는 단계가 아니라 무조건 받아들이는 마음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어려운 것입니다. 만일 사랑이 골라 선택하는 것이라면 누구나 고민하지 않고 할 수 있습니다. 짐승도 먹이를 주는 사람을 사랑하지만 며칠을 굶기면 사람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그런 유치한 차원이 아닙니다.

도저히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이 삶을 사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있는 모습 이대로 받아주셨습니다. 그런 후에 말씀하시길 “내가 너희를 이렇게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고통과 희생이 없이는 안 됩니다. 왜 나는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과거 잘못을 왜 용서 모하는가? 예전의 자꾸 못된 생각들만이 나를 괴롭히는가? 여기에 대한 결론은 오직 하나 내가 희생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골라서 택한 것이 아니며 과거의 당신 모습을 묻거나 보시지 않고 먼저 일방적인 용서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아낌없이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데는 희생이 따르고 수고가 따릅니다. 그러나 희생한다는 것은 체험 있는 신앙인이 아니고는 못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2:20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에 대한 사랑을 아는 바울이기 때문에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그 사랑을 전하며 자신을 바친 것입니다. 혹 왜 나는 사랑하지 못하는가 라고 안타까워하십니까? 깊은 사랑의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모든 것을 버리고 갈리리 바다로 도망을 갔던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나타나 물위로 걸으시면서 물으셨던 예수님의 3번의 질문이 무엇입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랑의 경험이 있으면 어떤 사람도 사랑하게 되고 상대방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용기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받으본 사람이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은 어떤 이론도 아니며 공부해서 배우는 시험과목이 아닙니다. 사랑은 체험이며 삶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잘합니다. 그런데 서로 불만이 쌓입니다. 서로 용납되지 않습니다. 서로 용서하지 못합니다. 원인은 언어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사랑한다는 말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생하는 사랑을 해보지는 못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무슨 말씀이니 아시겠습니까? 주께서 나를 사랑하심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이며 실천적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하는 것으며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이란 더불어 기뻐하는 것입니다. 만일 다른 사람을 울리고 나는 사랑한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슬픔과 고통을 주면서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역설적으로 사랑이란 서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가 기뻐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고 그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서로 일치를 이루는 속에서 피어나는 열매입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나누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의 가정을 돌아보십시오. 가족들 모두가 함께 사랑하며 삽니까 아니면 나 혼자만 사랑하는 일방적 사랑입니까? 더불어 나누고 고통이든 슬픔이든 함께라는 의식으로 사랑한다면 어떤 어려움도 쉽게 극복하고 서로 격려와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가족 공동체이며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유명한 여성 가정학자인 버지니아 사타이어(Virginia Satir)가 행복한 가정공동체와 사랑 공동체의 특징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는 자기의 가치를 인정하고 자기를 존중히 여기는 가정(Self Worth), 둘째는 서로간의 뜻이 통하는 가정(Communication), 셋째는 규칙이 있고 질서가 있는 가정(Rule), 넷째는 사회와 잘 조화되어 연결된 가정(Link to Society)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13:4-7).

얼마나 사랑에 대한 분명한 표현입니까?

자꾸만 사랑이 메말라 가는 이 시대와 가정들이 사랑을 회복하고 사랑을 표현하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함으로 서로가 가정을 통해서 용기와 힘을 얻는 삶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풍부한 \'Love Tank\' (러브탱크, 사랑의 창고)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가족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2. 입술로 하는 사랑이 아닌 마음의 사랑을 하게 하소서.

3. 희생하는 사랑으로 용기를 주는 자가 되게 하소서.

제24일째 주제 :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축복

Message 24 제목 : 질서로 세워지는 가정

본문 : 에베소서 6:1-4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영어로 표현할 때 집은 ‘House(하우스)’ 이고 가정은 ‘Home(홈)’이라고 합니다. 이런 영어의 단어를 좀더 깊이 생각하면 House는 돈으로 살 수 있으나 Home은 돈으로 살수 없는 무형의 존재라고 합니다. 집은 얼마든지 살 수 있지만 홈 즉 가정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정이란 home의 개념으로 팔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와 인격의 문제, 가치관의 문제와 삶의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곳입니다. 때문에 어떤 한가지만 완벽하다고 가정이 건강하거나 행복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분명한 질서가 있어야 하고 그 가정을 이끌고 나아가는 기둥이 있어야 건강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먼저 가정의 질서에서 우선되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가정 질서를 위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제1의 법은 자녀들은 부모님께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본이 되는 가정의 특징은 시대에 관계없이 부모님께 효도하는 가정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길의 기초도 눈에 보이는 아버지를 잘 섬길 때 가능합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잊은 백성은 복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부모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에 대해 유대인의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들려주는 전설을 소개합니다.

한 번은 하나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세상에 보내셔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세가지를 가져오라고 명하셨습니다. 천사는 세상에 두루 다니다가 가장 아름답다고 느낀 세 가지를 택했는데 첫째는 아름답게 핀 꽃이고, 두 번째는 어린 아기의 웃음이고, 세 번째는 어머니 사랑이었습니다. 이 3가지를 가지고 가브리엘은 하늘로 돌아갔는데 가는 길에 너무나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마침내 그가 하나님앞에 섰을 때는 꽃은 이미 시들어 추하게 되었고, 어린 아기는 자라서 아름답지 않은 노인이 되었지만 어머니의 사랑만은 여전히 아름답게 남아있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까지 우리가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도 크지만 부모님의 사랑도 컸습니다. 그러므로 받은 것 이상으로 부모님을 잘 섬기고 모셔야 축복이 됩니다.

구약의 출애굽기 20;12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하셨습니다.

신명기5:16에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자식들이나 후손들이 잘 되는 길도 부모님을 잘 모시는 것임을 놓치지 마십시오.

다시 본문 4절을 보겠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이제는 부모의 역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질서 있는 가정을 하나님은 촉구하십니다. 왜냐하면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조직적이고 질서 있는 우주입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을 양육하는 부모의 역할은 무엇인가? 자녀들에게 주의 말씀으로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올바르게 기르려면은 부모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나의 이성과 경험으로는 바른 양육이 불가능합니다. 많은 부모님의 자녀 양육법은 무조건 잘해주고 필요한 것을 해결해주는 정도로 의무를 다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들의 생활을 풍족하게 해주는 것이 잘 기르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을 가르치고, 참과 거짓을 가르치고, 바른 길과 잘못된 길을 가르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부모가 훌륭한 부모입니다.

왜 오늘날 자녀들의 가치관이 파괴되고 이기주의 빠져 자기 외에는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고 버릇도 없고 쉽게 포기하는 이유가 바로 부모의 생각과 의식이 바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자식들이 공부도 잘해야 예쁩니다. 그러나 인간성이 더 좋아지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모습을 보여줄 때 더 예뻐하고 칭찬해 주는 것이 그들의 인생을 가치 있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헬렌 켈러는 ‘인생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눈을 가지고 있지만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혹시 우리의 자녀들을 그렇게 키운 것은 아닙니까? 눈은 뜨고 살지만 바른 것과 소중한 것을 볼 수 없는 소경과 같은 아이들이 아닌지 모릅니다.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자녀를 기르십시오. 하나님의 방법대로 자녀를 키우십시오. 자신의 욕심대로 아이들을 제2의 나를 닮은 복제 로봇을 만드는 일을 그만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지키셔야 안전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셔야 바르게 자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누가복음 23:28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왜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는 것입니까? 그 만큼 어머니의 책임이 크고 어머니의 기도에 의해서 자녀들이 바르게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어머니의 대표적인 모델이라는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어거스틴이 젊었을 때의 일입니다. 사상적으로 마니교라는 이단과 플라톤 철학에 빠져 심취하였고 도덕적으로는 방종하고 타락하여 술로 인해 탕자와 같이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아들을 위해 모니카는 기도했습니다. 매질을 하기보다 눈물로 하나님께 몸부림 쳤습니다. 결국 20년의 기도 후에 그 아들을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고 위대한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책을 쓰고 하나님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성 어거스틴이 되었던 것입니다.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눈물이 자랑스런 아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단순히 입시나 잘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그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놓고 하나님이 그를 지배셔서 다스리시도록 맡기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를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도 사랑하십니다.

이제는 주의 말씀으로 양육하며 매주 한번이라도 아니면 한 달에 한번이라도 가정 예배를 드리고 주일이면 온 가족이 예배하는 생활을 통해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정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부모가 계시고 자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에서 질서 있게 자신의 역할을 지키고 그리스도인의 가정으로 본이 되는 모습을 보이길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가정의 질서를 회복하게 하소서.

2. 가정에서의 나의 역할을 잘 감당하게 하소서.

3.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소서.

  

제25일째 주제 :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축복

Message 25 제목 : 안식의 보금자리 가정

본문 : 룻기3:1-6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 받기를 바라며 또한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일평생을 살면서 사랑한 경험이 없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그런 사람들이 자꾸 늘어가는 것이 마음 아픈 일입니다.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를 전문가들은 잠재의식의 잘못과 부정적 의식 때문이라고 진단을 합니다. 사랑은 저저로 되지 않습니다. 계속적인 훈련으로 사랑다운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은 사랑을 배우는 훈련센터이며 사랑의 실습 현장이라고 합니다. 만일 부모에게 사랑을 받고 자라난 사람은 사랑을 베푸는 일에 익숙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절대로 사랑을 베풀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사랑의 온실이며 사랑의 터입니다.

우리는 호렙산 40일 기도회를 통해 가정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듣고 보는 것으로 끝낸다든지, 그렇게 살면 좋겠구나 라는 동의 정도로만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가정은 여전히 사랑의 결핍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지키는 것이 복입니다. 배우고 깨닫는 것을 그날의 생활에서 실천하는 그 때가 행복한 시간인 것입니다. 오늘은 진정한 가정의 행복은 안식할 수 있는 가정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본문에 등장하는 3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먼저1절을 보겠습니다. “룻의 시모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룻에게 안식할 곳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안식이란 ‘메누카’란 말로 ‘이것이 삶의 근거’라는 뜻입니다. 즉 가정은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어야 행복의 근거가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나오미나 룻은 부서진 가정과 깨어진 가정의 상처를 안고 있는 여인들입니다. 이런 위기에서 새로운 가정을 세우는 과정이 본문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나오미의 성격은 자기의 필요보다 남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는 여인입니다. 재혼을 생각하면 룻 못지 않게 필요한 고독한 여인입니다. 눈 앞에 나타난 보아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그는 나이가 많았던 인물입니다. 어떤 의미로는 나오미가 선택을 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며느리 룻을 먼저 생각합니다. 더구나 룻을 부를 때마다 ‘내 딸아’라고 자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사랑이 지극한 여인임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 모습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요즘 가정에서 일어나는 많은 비극과 상처와 불행의 원인은 이기심입니다. 나를 앞세우는 생각이 먼저 있고서는 안식을 누리는 평안한 가정을 만들 수 없습니다.

이런 나오미와 함께 등장하는 룻을 보겠습니다.

4-5을 보십시오. “그가 누을 때에 너는 그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너의 할 일을 네게 고하리라 룻이 시모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고대 중동 지방인 팔레스틴의 관습을 이해하지 못하면 무슨 연애소설 같은 인상을 받게 됩니다. 당시의 풍습은 여자에게 마음이 드는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먼저 프로포즈를 해야만 결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룻은 이방 모압 여인으로 그런 내용을 모릅니다.

11절에 보시면 그가 어떤 여인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내 딸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리라.” 정숙하고 현명한 여인인 것을 모든 백성이 아는 여인 그러나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에 그대로 순종하는 모습을 봅니다. 룻은 시키는 대로 순종을 합니다. 여기에 진정한 아름다움이 있고 안식이 있습니다. 순종의 꽃이 피는 가정이 낙원입니다.

신뢰와 믿음의 바탕으로 6절에 의하면 명대로 다 행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비교해 보십시오. 과연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말에 예, 예 하면서 순종을 할까요? 아니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신뢰하고 믿고 있습니까? 서로의 신뢰관계가 없는 가정은 안식할 수 없는 늘 뭔가 터질 것 같은 불행한 가정입니다. 이제부터라도 믿어 보십시오. 여기에 안식이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인물인 보아스가 등장을 합니다. 룻이 타작 마당의 보아스 발치 밑에 누웠습니다. 당신이 보아스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다가 발에 무엇이 걸려서 보니 젊은 여자가 누워있습니다. 보아스의 행동을 보십시오. 그는 룻의 행동이 자기에 대한 사랑 표현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그의 행동은 이렇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보아스가 가로되 네 겉옷을 가져다가 펴서 잡으라 펴서 잡으니보리를 어섯 번 되어 룻에게 이워주고 성으로 들어가니라.” 보통 남자와 듧니다. 사랑하낟고 프로포즈를 하는 여인을 보면서 오히려 더 깊은 그의 애정과 관심과 사랑은 무엇이 그에게 필요한가를 먼저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많이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들이 파괴되는 70%이상이 잘못된 불륜의 이성 교제 때문입니다. 애인이 없으면 바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보아스를 보십시오. 얼마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여인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며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책임을 집니다.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들어야 할 중요한 메지지입니다.

환경이 어렵다고 서로 갈라섭니다.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헤어집니다. 아이들도 마구 버립니다. 자신의 정욕을 위해서 딴 짓을 합니다. 책임을 질 줄 모릅니다. 신약성경에 보아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인격과 믿음을 소유한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오미를 통해서 자기의 이익이나 이기심을 버리고 살아가는 여인의 모습을 보았고 신뢰와 말 없는 순종으로 행동하는 룻이라는 여인을 보았고, 책임감을 앞세우며 상대방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는 보아스라는 남자를 만났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새로운 그들의 가정은 어떻게 되리라고 예상하십니까? 룻기 마지막4장에 보면 이 두사람의 혈통으로 다윗을 낳는 가문이 되고 그 가정을 유명케 하시고(룻4:11) 기업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닮아야될 안식의 가정이며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은 안식하기에 불편함이 없는 가정입니까? 가족들이 집에 돌아오면 모든 밖의 문제들을 내려놓고 편하게 쉴 수 있는 안식처입니까? 우리의 가정은 회복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을 진정한 편히 쉴 수 있는 안식의 보금자리가 되도록 합시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우리 가족간의 관계를 새롭게 하옵소서.

2. 그리스도인의 가정으로 안식을 주게 하소서.

3. 먼저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주소서.

제26일째 주제 :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축복

Message 26 제목 : 믿음의 뿌리내린 가정

본문 : 요한일서 5:1-5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리라 믿습니다.

성도들의 삶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영혼의 문제입니다.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부요와 가난을 추적할 때 긍정적인 쪽이든 부정적인 쪽이든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영혼에 관한 것에 의해서 평가를 받습니다. 때문에 가정의 실패나 불행, 슬픔이나 고통에 대한 원인을 찾아보면 영혼의 실패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영혼상태를 늘 점검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참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거듭났는가? 나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인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을 해야하고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대답이냐에 따라서 영혼의 상태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게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그리고 계속해서 4절에 “대저 하나님께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리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고 구별되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게로서 났다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내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셋째는 삶의 변화가 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은 빛에 거합니다. 성결 되게 삽니다. 온전하게 살아갑니다. 죄를 미워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난자의 영적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속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입니까? 지금 묻고 있는 물음은 어떤 외적이고 눈에 보이는 표시가 아니라 영혼의 변화가 시도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축복을 받았느냐? 성공했느냐? 좋은 차를 샀느냐?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여러분의 내면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는 어떤 표시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 가정을 지키는 원칙이 되고 여러분의 가정을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길이 되기에 너무 중요한 질문인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그렇습니다. 누가 최종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로 난 자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사람들의 생각이 타락하고믿음이 부패한 시대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속에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온갖 영적인 유혹과 핍박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처럼 바로의 핍박이나 19세기 초의 공산주의의 핍박과 같은 감옥에 갇히고 메를 맞고, 고문을 당하고, 굶고 하는 고통은 없지만 그보다 더 강력한 세상이라는 세력들이 가정을 파괴하기 위해 접근해 오고 있습니다. 사치와 유혹, 투기와 섹스, 물질만능과 인간경시 사상이 범람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넘어지게 하고 믿음의 가정들을 넘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우리 가정에 세상적인 물이 들어오면 혼돈과 무기력함으로 넘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대표적인 3가지 말씀의 경고를 보십시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약4:4)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살고 있을지라도 그 세상에 속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는 방법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요 손에 잡히는 것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을 그대화시키며 그분만으로 만족하고 그분이 공급하시는 힘에 의해서 사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께로 난 자들인 성도입니다.

성도는 돈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육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영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떡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 앞에는 어떤 원수들이 갑옷을 입고 싸움을 간다 할지라도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23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가정은 물결이 거세게 흔들거리는 세상이라는 바다를 항해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승리라는 안전한 항구를 목적지로 삼고 도달해야 합니다.

그러나 항해에서 거친 파도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장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것을 가리켜 ‘가정을 지키는 나침반’이라고 합니다.

그 나침반을 본문2,3절에 잃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지키는 나침반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의 계시자이시며 선포자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가정과 삶의 키를 잡고 계시면 어떤 파도라도 능히 헤쳐나가며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주체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이기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6:33의 믿음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한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우리의 가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것도 그 말씀을 근거로 한 믿음입니다. 우리의 가족들이 말씀에 굳게 서도록 말씀을 듣고 깨닫는 일에 열심을 내십시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사는 가정을 만드십시오. 다른 것이 부족해도 믿음으로 충만한 가정이 되면 얼마든지 여러분의 가정은 승리와 감격과 축복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가정의 나침반을 바로 세우게 하소서.

2. 돈이나 세상 것들의 유혹으로부터 승리하게 하소서.

3. 믿음으로 뿌리를 내리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제27일째 주제 :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축복

Message 27 제목 : 행복을 추구하는 가정

본문 : 베드로 전서 3:1-12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최근 유럽과 미국에서 ‘가정치료(family therapy)라는 새로운 학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아내는 남편을 치료해 주어야 하며, 남편은 아내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자식은 부모를 위로하며 격려하고 소망을 주고 사랑함으로 서로 치료해 주는 치료법입니다. 이렇게해서라고 건강한 가정을 만들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보자는 학문적 접근입니다.

가정이란 참으로 안식하는 곳이어야 하고 위로 받는 곳이며 상처를 싸매 주는 곳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 용서하고 위해주고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직장에서 혹은 학교에서 사회에서 찢기고 상한 마음, 지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가정으로 돌와왔을 때에 포근히 감싸주고 위로해 주어야 하는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그러나 만일 가정이 그러한 치료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리어 상처를 입혀 준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잠언 17:1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잠언 15:16-17에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정을 돌보지 아니하고 직장에 매여 살다가 주일에도 등산이나 하고, 낚시나 하러 다니고, 골프나 즐긴다고 하면 그런 가정에서 마음의 안식과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까? 요즘 우리의 나쁜 사회적 유행 가운데 너무 주부들이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직장 생활을 하고 자기의 일을 한다는 의미에서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대부분의 부인들은 효과적인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은 어머니와 아내가 지켜야 될 고귀한 자리입니다. 오늘까지도 유대인들이 세계적으로 위대한 민족으로 남는 것은 아직도 유대인의 어머니들은 가정을 자기의 몸처럼 지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교회의 부인들은 먼저 가정을 지키는 자기 자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까?

본문1절에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5절에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엑 순복하므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라고 했습니다. 지금도이렇게 해야 하는가? 아내라는 위치는 언제나 남편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하는가? 평등사회이고 새로운 새 시대인데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항상 50/50이지 순종하라면 남자 쪽은 100이고 여자 쪽은 0이 아닌가? 꼭 지고 사는 느낌이며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순종의 의미, 복종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르렇다면 순종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도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의 지도자로 남편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다운 행동을 해야지, 아버지로써 책임을 다해야지 라고 항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또한 복종이란 지도자의 말에 구리를 기울인다는 의미입니다. 복종이라는 헬라어 ‘아쿠오’의 뜻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노예적인 복종이나 맹목적인 복종이 아니라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기 때문에 내 마음과 귀를 기울여 듣는 태도를 말합니다. 당신은 이렇게해 보셨습니까? 당신의 남편이 말을 할 때 ‘아쿠오’를 해보셨습니까? 또한 복종이라는 것은 주님을 섬긴다고 고백하는 태도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것을 “주께 하듯 하라”고 표현했습니다. 영어로 똑같이 주님도 Lord(로드)이고 남편을 부르는 호칭도 lord(로드)입니다. 대문자와 소문자의 차이입니다. 오늘부터 당신의 남편에게 주님하고 불러 보십시오. 남편이 좀 이상한 짓을 할 때 주님이 그러시면 되나요? 한다면 다시는 그런 짓 안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복종이란 말은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단순히 종의 개념으로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왜 이렇게 길게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행복한 가정의 제1원리가 아내와 남편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행복을 만드는 조건을 3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말고”라 말씀하였습니다. 외모를 단장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속사람을 단장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속사람을 어떻게 단장하겠습니까? 2절에 정결함으로 단장하라고 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으로 단장하라고 하였습니다. 4절과 5절에 온유함과 안정된 심령으로 단장하라고 하였습니다. 안정된 심령(peaceful spirit),평화로운 정신(peaceful mind)으로 단장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단장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라 하였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가족 모두는 올바른 가치관을 가져야 하며, 참된 가치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물질이 최고가 아니라 영적인 가치가 최고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속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온유한 성품으로, 안정된 심령으로 단장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남편이 해야할 의무에 대해 본문7절에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다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한 것첢 부부는 항상 같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고린도 전서7:5에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만 분방을 허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가 별거한다거나 따로 떨어져 사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바로 행복에 금이 가는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적은 일로 다투다가 집을 나가고 이리저리 방황을 하는 남편들이 종종 있습니다. 빨리 집에 들어가십시오. 기도할 때 말고는 집에 있는 것이 법입니다.

본문7절에 “아내는 연약한 그릇이므로 귀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육체적으로도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를 귀히 여긴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마음을 평안하게 해준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내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아니하고 마음을 기쁘게 해 주는 것이 아내를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남편들은 아내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무자비한 말이나 과격한 행동을 삼가 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합니까?

“아내를 귀히 여겨야 너의 기도가 막히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의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되는 몇 가지 사실들을 보았습니다. 가정의 중심이 되는 남편과 아내의 자리를 잘 지키십시오. 그리고 상처받는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행복한 가정은 서로가 함께 만드는 일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어머니와 아내의 자리를 지키게 하소서.

2. 서로 상처를 싸매 주느 가족들로 세우소서.

   

제28일째 주제 :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축복

Message 28 제목 : 하나님 우선하는 가정

본문 : 창세기 22:15-19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어느 한 슬픈 사건을 소개하겠습니다. 자정이 지난 시간에 싸우는 소리가 나서 밖에 나가보니 고등학교2학년쯤 되 보이는 여학생과 그 어머니가 땅바닥에 뒹굴며 싸우고 있었습니다. 많은 동네 사람들이 구경을 하면서 한 사람도 모녀간의 싸움을 말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알마쯤 되었을 때 모녀는 일섰고 어머니는 황급히 도망을 가려고 합니다. 그때 여학생은 어머니의 옷자락을 잡아채며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둘이 좋아서 낳아 놓고는 왜 책임을지지 않는거야! 왜 이렇게 내 인생을 망쳐!’하면서 울부짖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싸움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혀를 차며 그 어머니를 욕하고는 하난, 둘 집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슬픈 일들이 때때로 벌어져 충격을 줍니다. 건강하지 못한 가정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누구의 책임인가하고 묻기 전에 분명한 한가지 사실은 우리의 아들, 딸들이 행복하게 자라야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기쁘고, 건강하고, 자유롭게 자라야 합니다. 그러나 행복이란 노력없이 거저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들의 공통점은 부모로부터 자신에 대한 사랑을 확인 받고 싶어합니다. 만일 부모가 자식을 낳아 놓고도 반갑지 않게 생각한다든지, 괜히 태어나서 말썽이다. 실수로 태어났다고 생각하게하면 아이들은 금방 눈치를 채고 자신을 귀찮은 존재로 판단하고 탈선한다든지, 자살까지 쉽게 해버립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탈선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부모에게 있으며 자녀들이 사랑 결핍증에 걸리지 않도록 부모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왕 주시려면 결혼하자마자 주셨으면 좋을 텐데 75세에 주시겠다고 약속했던 것이 100세가지 기다리게 하십니다. 그것도 아내인 사라가 단산한 다음 기다리다가 지쳤을 때에 주십니다. 왜 이렇게 오랜 시간 뒤에 가서 자식을 주십니까? 여기에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결혼 생활이란 인간이 하는 것이지만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자녀란 결혼생활의 결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상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소중하게 얻은 아들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버넺로 드리라”(창22:2). 번제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불태워 드리는 제사입니다. 물론 아브라함 입장에서 생각하면 100세에 얻은 아들이기에 이삭을 키우면서 너무도 기쁜 나머지 하나님 섬기는 것을 등한이 했느지도 모릅니다. 내 자식, 내 아들 하면서 자식 사랑에 푹 빠졌을 수 있습니다. 그러하도 불태워 바치라니 아브라함은 깊은 고민과 시험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3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어떤 신앙의 사람인가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는 곳으로 가더니.”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며 따르는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바치라고 한 두말 할 것도 없이 바치러 떠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셨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히 생명은 하나님이 주셨다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내가 낳은 자식이라고 하여 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다면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도 하나님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내 놓으라고 하시면 내놔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키워서 내 마음대로 무엇이 될 줄로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농사를 짓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가 씨를 쁘릴 수 있고 물을 줄 수 있고 가꿀 수 있습니다마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는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바쳐라’입니다. 오직 믿음, 오직 순종, 오직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서 바쳐라 압니다. 불합리하다고 생가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자식이 부모의 수단이 될 수 없고 더더욱 내 소유가 될 수 없는 것임을 확인 시켜주고 있는 사건입니다.

자녀들의 믿음은 부모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 된 분들이 믿음생활을 잘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그대로 배우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삭은 육체의 아들에서 신령한 아들로 번제 후에 약속된 축복의 이삭을 돌려 받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돌려 받은 아들을 얼싸안고 얼마나 울었겠습니까?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손을 잡고 모리아 산을 내려오는 모습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여기서 우리의 현실을 보고자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를 보면서 왜 우리의 말이 자녀들에게 먹혀들지 않는가 고민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저 신앙적인 관계, 순종과 헌신의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된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본문12절에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으로 사십시오.

아이를 번제로 드릴 수는 없지만 주일성수는 시킬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키워야 올바른 자식이 됩니다. 모리아 산에서 약속의 자녀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를 하나님 것으로 드릴 때에 하나님의 귀한 은혜와 축복이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자녀들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갈보리를 향해 십자가를 지고 가지면서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 딸들아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23:28).

우리의 가정이 건강하거나 행복하게 만들어지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을 잘 섬기고 그 섬기는 모습이 자녀들에게 어떻게 전달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것은 흔히 아이를 신학교에 보냈다 아니면 교회 봉사를 하게 했다는 수준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신뢰이며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가정에 필요한 가장 시급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전폭적인 의지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하나님을 우선하는 가정으로 만드소서.

2. 우리의 자녀들이 믿음 안에서 자라게 하소서.

제29일째 주제 :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축복

Message 29 제목 : 시험을 극복하는 가정

본문 : 욥기 42:1-5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기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오는 말로 인해 낭패를 볼 때가 있습니다. 조금만 참든지 아니면 가슴앓이가 생기더라도 가슴에 묻어두면 되는데 거르지 않은 상태로 말을 내뱉어 상대방을 당황하게 하고 겉잡을 수 없이 일을 망치고 후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후에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고 한다든지, 내 말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어합니다. 말은 그 사람의 됨됨이와 인격을 대변해주는 잣대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말하길 사람의 언어생활이나 행동은 나를 주도하고 끌고 가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영향을 받게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작은 배 한 척을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는 장면이 있습니다. 갑자기 심한 풍랑이 일어나 배가 침몰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배에 타고있던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등의 제자들은 평생을 갈릴리 바다에서 산 바다사람입니다. 그러나 풍랑을 만나자 배에서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께 찾아가 개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왜 우리들이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않습니까? 왜 죽게 내버려둡니까’하며 한마디 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주님이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믿음이 어디 있기에 그런 절망적인 말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나를 주도하는 것이 무엇이며, 나를 끌고 온 것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환경을 보는 시각이 다르고 상황의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몰론 풍랑이 거세게 불어옵니다. 배가 난파되기 직전이고 침몰하기 직전입니다. 이런 상황은 위기입니다. 절망입니다. 그러나 배 안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풍랑을 잠잠케 할 수 있는 주님이 계십니다. 갈릴리 바다를 갈라놓을 수 있고 바닷물을 수증기로 날려보낼 수 있는 주님이십니다. 제자들은 주님에 대한 그 믿음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절망하고 탄식하며 죽게 되었다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그분이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알게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가난도 문제 될 리 없고 질병도 겁나지 않습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믿음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하나님을 등지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외쳤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게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6:1-3).

왜 간곡하게 하나님을 알자고 부탁하는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믿음 생활을 바르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세상을 사랑할 수없게됩니다. 사람을 미워할 수도 없습니다. 불평할 수 없습니다. 이상한 짓을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면 하찮은 일에도 실망합니다. 낙심합니다. 괴로워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성도를 시험하십니다. 고난을 주고, 문제 앞에 부딪치게 하고, 어려움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지 아십니까? 더 하나님을 깊이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배우게 하기 위한 교육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됩니다. 막연하게 알던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믿어지고, 어렴풋이 알았던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욥이 모든 것을 dfg는 고통 중에서 고백했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2-5을 보십시오. “주께서 무소불능 하시오며 무슨 경여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이니이까 내가 스스로 개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이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은 이런 경지까지 가도록 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사요하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사야45:6-7에 더욱 확실하게 보충해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해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질병에 걸리면 귀신이 붙었다고 사업이 잘 안되면 사탄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신다고 했습니까? 나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는 고백을 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말을 하도록 성도를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엎드려 하나님게 물어 보십시오. 왜 이런 어려움을 주는지, 왜 풀 수 없는 고난이도 문제를 주시는지, 왜 근심거리를 주시는 지 하나님께 물어 보십시오. 혹시 사업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자녀들 때문에 고민에 쌓여 있습니까? 하나님께 욥과 같이 고난 중에서도 찾아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문제는 하나님만이 풀어주실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기도 부탁할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일대일로 하나님께 물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누구신지 가르쳐 달라고 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말씀해 달라고 하십시오. 만일 하나님이 깨닫게 하셨다면 그대로 믿고 가면 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붙자고 사시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침묵하시며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끈질기게 매달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일주일 작정했는데 아무 소리가 없습니까? 한번 더 일주일 해보십시오. 그래도 안 들립니까? 7곱하기 3을 해보십시오. 어렴풋이 들립니까? 확실하게 들릴 때까지 매달리십시오. 다른 것에 고집부리며 악착같이 한다는 것을 여기에 실천해 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하나님을 좀더 확실하게 알 때까지 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망합니다.

호세아 4:6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엊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라.” 그러므로 어려움이 있으면 더욱 하나님을 찾을 때임을 놓치지 말고 시험에서 승리하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어떤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2. 문제를 통해 더욱 하나님을 깊이 알게 하소서.

   

제30일째 주제 :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축복

Message 30 제목 : 서로가 하나되는 가정

본문 : 전도서 4:7-12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오늘은 가정에 대한 말씀의 미지막 시간입니다. 그 동안 행복한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을 회복하고 집중적인 가정 살리기 새벽기도회를 했습니다. 오늘은 가정에 대한 마지막 말씀으로 서로가 하나되는 가정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가정은 사랑과 만남으로 이루어지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 공동체입니다. 가정의 건강은 연합하는 마음과 서로의 짐을 나누는데 있으며 건강한 가정은 가족의 구성원인 모든 식구들이 행복한 가정에 대한 공동 책임을 느끼고 서로 노력함으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9절에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는 두 사람이 한사람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가정의 건강 원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 한사람의 힘 보다 남편과 아내가 하나가 되어서 영적, 정신적, 경제적, 육체적인 필요들을 채워주면 훨씬 가볍고 사는 재미가 납니다. 혼자 하는 것보다 둘이 하면 힘이 생깁니다. 혼자 고생하는 것보다 둘이 함께 고생을 하면 덜 힘이 듭니다. 서로 버팀목이 되고 서로 기댈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되면 외롭지 않습니다.

현대인의 가정에서 가장 많이 호소하는 말이 외롭다, 고독하다는 말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고독이라는 것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했습니다. 왜 사람이 나 혼자라는 생각과 외로움을 탑니까? 기댈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습니다. 그냥 곁에 앉아줄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11절에 “두사람이 함게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고 합니다. 서로가 필요한 그 순간 함께 있어줄 사람이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좋은 사람입니다. 사랑이나 가정의 행복이 거창한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민감한 응답을 하는 사람,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이 나를 필요로 할 때 그 자리에 있어주는 사람이 행복한 가정을 창조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서로가 함께 하는 나눔과 사랑의 장소이며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형제와 형제가 서로 기대여 사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한사람보다 더 나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본문에 “함께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게 된다”(9)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연합하여 수고함은 혼자 수고하는 것보다 훨신 더 많은 결과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함께 수고한다는 말처럼 힘있는 언어가 있을까요? 우리가족은 모두 열심히 수고합니다. 최선을 다합니다. 참으로 건강한 가정입니다. 만일 고생하는 사람이 정해져 있고 다른 이들은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힘을 잃게 될 것입니다. 함께 수고하도록 하십시오.

다시 10절을 보면 한사람이 넘어질 때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소중합니다. 마치 인생이란 위험한 길을 가다가 넘어지는 것처럼 인생 행로는 모두가 순례자입니다. 가정도 늘 행복하고 웃음만 있을 수 없습니다. 넘어지는 경우도 있고 쓰러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일 그럴 때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면 불행한 자며 가장 서글픈 사람입니다.

그러나 누군가 옆에서 ‘당신이 쓰러져도 내가 일으켜줄 테니 마음껏 해보세요’라고 한다면 신바람이 나서 뛰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격려는 용기의 어머니라는 말이 맞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의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이렇게 해보십시오. 당신은 할 수 있어요. 너는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어. 서로가 일으켜 세워주는 가정을 만들어야 합니다. 말 한마디를 해도 꼭 넘어지는 말, 쓰러지게 만드는 말, 상처 주는 말, 가슴에 멍드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다시 본문11절을 보시면 함께 누으면 따뜻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팔레스틴 지방의 겨울 밤을 말합니다. 그 추위란 우리가 상상 할 수 없는 사막의 강추위입니다. 그들은 여행을 하다가 그곳에서 잠을 잡니다. 혼자서 자게되면 거의 얼어죽습니다. 그러나 둘이자게되면 서로의 체온이 추위을 얼마든지 이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여행입니다. 아마 겨울밤의 여행이며 우리의 가정 생활이란 기나긴 여행입니다. 그러나 그 여행을 혼자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며칠은 자유다 홀가분하다 하겠지만 그것처럼 처량한 것은 또 없습니다. 여행도 둘 이상해야 재미도 있고 피곤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만일 당신의 여행에 긴급사태가 일어났을 때 당신을 도울 사람이 없다면 어찌하겠습니까? 홀로 있다는 것은 춥고 기쁨도 없고 활기도 없이 생명을 잃어 가는 것이지만 둘이라는 것은 따뜻함과 온기를 느끼며 생명을 나누는 살아있는 모습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서로 싸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 가까이 다가가 온기를 느끼게 해 주고 사랑을 주고 마음을 주며 얼어붙은 그 사람을 녹여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이 나타나기만 하면 찬바람을 일으키며 따뜻한 온기를 써늘하게 바꾸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제 12절을 보겠습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두 사람이 힘을 합치는 것은 마치 삼겹줄과 같다는 표현은 혼자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도 둘이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가정이든 서로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서로 끈끈한 격려와 힘을 모아 생활하는 책임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은 때때로 싸워야될 일들이 있습니다. 부부싸움이 아니라 악한 세상과 나쁜 정욕적인 유혹과 사탄과 영적인 전투를 해야됩니다. 그럴 때 승리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힘을 모으고 혼자 보다 가족 모두가 전투병이 될 때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혼자의 기도보다 가족 모두의 기도가 더 응답이 빠른 것이고, 혼자의 힘보다 서로 연합된 힘이 더욱 강한 것입니다.

당신의 가정이 어떤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원한다면 먼저 서로의 마음을 합하고 서로 결속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가정을 든든히 세우는 요새이며 난공불락의 성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가정에 대한 말씀을 끝으로 10일간의 가정 회복과 축복된 가정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 보여주신 삶의 지침들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실천입니다. 오늘부터 당신의 가정에서 적은것부터라도 시작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많이 아는 자(knowers)를 원하시지 않고 한가지라도 말씀을 실천하는 자(doers)를 보고싶어하십니다. 새로운 새 시대에 성도 여러분의 가정이 건강한 가정, 행복한 가정, 축복된 가정으로 더욱 아름답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서로를 위하여 한가지의 실천할 수 있는 생활을 주소서.

2.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3. 날마다 우리 가족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응답의 고백문

당신은 왜 왔습니까?

무엇 때문에 여기 왔습니까?

매주일 마다 오는 버릇 때문입니까?

당신은 노래를 듣고 또 노래를 합니다.

단지 노래를 따라 하는 것이 당신은 즐겁습니다.

하지만 노래를 배우고 나면

당신은 가버립니다.

당신은 어째서 여기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여기 왔습니까?

이것이 당산의 사교모임입니까?

당신은 종교적인 분위기를 사랑하고

사람들은 감동하여 울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눈물을 배우고나면

당신은 가버립니다.

주여, 저희들을 예배자로 세우소서.

그 가운데서 주님의 보좌에 오르는 참 예배자로 세우소서.

제31일째 주제 :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축복

Message 31 제목 : 주님이 보고싶은 사람

본문 : 빌립보서 1:20-21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호렙산 축복의 40일 새벽기도회 기간중의 30일을 보내면서 새로운 새 시대인 21세기에는 우리 민족과 교회와 가정이 어떻게 살아야 바르게 한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남은 10일동안은 나 자신의 신앙적인 역할과 사명 그리고 비전에 대해서 살펴 볼 것입니다. 「축복의 미래를 위한 호렙산」을 향하여 마지막까지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그의 말년에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에 보낸 서한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두가지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에 대해 말을 하였습니다. 그 하나는 소극적인 것으로서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고 다른 하나는 좀더 적극적인 표현으로서 살든지 죽든지 내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여김 받는 사람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울만의 거룩한 꿈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할 목표입니다. 주님이 보고싶어하는 이 시대의 성도는 누구일까? 어떤 목사, 어떤 장로, 어떤 집사, 어떤 성도를 주님은 그리워하고 보고싶어하는가?

사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꼭 보고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살면 좋겠다고 하는 사람말입니다. 늘 같이 사라아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람은 꼭 있어야 할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꼭 보고 싶다라는 욕심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만일 성경에서 그런 사람의 대표적인 예를 찾으라면 우리는 바울을 서슴없이 추천할 것입니다. 그의 생각과 가치관이 다르고 그의 사는 방식이 다르고 그의 삶의 목표가 다른 모든이들에게 존경받을 만한 인물입니다. 만일 우리교회에 주님이 오셔서 괜찮은 사람을 추천하라면 어느 분의 이름을 자신 있게 권하시겠습니까?

사람을 나눌 때 이런 말을 들어보셨지요.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한 사람으로 가롯 유다와 같은 사람이 여기에 속합니다. 또 하나는 이 땅에 있으나마나한 사람입니다. 무해 무덕한 사람이 여기에 속하겠지요.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꼭 있어야 할 사람입니다.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이 말하길 거미와 같은 인생이 있고, 개미와 같은 인생이 있으며, 벌과 같은 인생이 있다는 것도 같은 이유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꼭 있어야 할 사람과 벌처럼 공동체를 위하여 꼭 필요한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가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아닙니다. 우리의 욕심은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는 사람과 주님의 보고싶어하는 사람으로 이 세상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도 꼭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우리는 바울의 기대와 소망을 따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의 소원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부끄럽지 않게 산다는 것을 마치 시인 윤동주의 시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노래한 것’처럼 우리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부끄럽다는 감정은 두 가지 경우에 생긴다고 합니다. 무엇인가 잘 못을 저질러서 양심에 거리낌이 있을 때 사람 앞에서 부끄러운 감정이 생깁니다. 또 하나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을 때 부끄러운 감정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정리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부끄럽지 않은 삶이란 깨끗하고 거룩한 생활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5:23에서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이 보존되기를 원하노라”는 주께서 이 땅에 다시오실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자신을 깨끗하게 보존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단순히 거룩하고 흠이 없게 살면 됩니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사명을 깨닫는 것입니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을 때 부끄러움이 생깁니다. 부모가 부모 노릇을 못하면 자식들 앞에서도 부끄러운 법입니다. 더욱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성도로서 1년이 가도 단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했다고 하면 이것은 정말 부끄럽고 창피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당부하시고 당신에게 맡긴 일을 다 하십시오.

또 한 가지 바울의 소원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으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 것이 그의 목표였습니다.

적어도 바울에게 예수 안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곧 그 몸으로 산제물이 되어 주님께 봉사하는 기회를 의미하는 것이며 tfj사 죽는다고 하더라도 죽음으로 제물이 되어 순교로서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주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가치관과 내세관이 뚜렷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스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의식으로 살기 때문에 자신 있게 믿음 생활을 할 뿐 아니라 주의 종으로 위대한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요즘 주의 종이 된다는 신학생들을 보면 이런 모습이 엇다는 것이 안타까움을 갖습니다. 주를 위해 살려는 각오가 없습니다. 무엇을 위하여 주의 길을 가는지 생각 없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요한복음 8:14에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안다”고 하시며 분명한 자기 사명과 자기 의식을 말씀하셨습니다.

목적은 결과입니다. 목적이 바르지 못하면 결과도 바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들풀도 목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목적은 사명을 깨다게 만드는 뿌리입니다. 바울은 분명한 삶의 목적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왜 부르셨는지를 알았습니다. 왜 나를 이런 일을 하게 하시는지 사명을 알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뭐 그렇게 유별나고 드러나게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있느가 아니면 조용하게 내 자리나 지키면서 있으면 되지. 아닙니다. 만일 당신에게 하나님이 주신 목적과 사명이 있는데 그대로 앉아만 있다면 당신은 부끄러움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필요 없는 존재라 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책을 쓴 칼 힐티는 말하길 ‘사명을 깨닫는 날이 인생 최고의 날’ 이라고 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는 날,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사명을 확인하는 날은 축복의 날 중의 가장 복된 날이며 영광의 날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효과적으로 하는 일은 더욱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이 목적하는 대로 살아가는 생활을 해야 은혜가 되고 축복이 됩니다.

북미 인디안의 선교사로 파송 된 데이비드 부라이너드 목사는 이러한 목적과 사명을 깨달았기에 ‘주여, 당신에게 이 몸을 바칩니다. 받아주소서. 영원히 당신의 것이 되게 하옵소서.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원하는 게 없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심정과 같습니다. 이제 주님이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겠지요. 부끄러움 없이 사는 사람과 그리스도가 존귀히 여김을 받기 위해 목적이 분명한 사명자를 주님은 보고싶어하십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하나님의 나에 대한 분명한 목적을 알게 하소서.

2. 하나님이 보고싶어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소서.

 

제32일째 주제 :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축복

Message32 제목 :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

본문 : 사무엘하 9:1-8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귀한 선물을 준다해도 늘 불만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빞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다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된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9-10)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철저하게 은혜를 입은 자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해서 한때의 핍박자가 사도가 될 수 있었는가? 이 변화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오늘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어떤 일도 감당치 못하겠다는 자세로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들을 감당했습니다.

심지어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했던 기도 중에서도 바울이 결국 깨달은 것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후12:9)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사는 자임을 더욱 확인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주의 은혜였으며 은혜사상이 철저한 바울의 신앙이었습니다. 성도도 같습니다. 성도란 은혜로 사는 장빈다. 은혜를 머고,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죄의 사망으로부터 구원받음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매일 매일의 삶에 대한 축복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없어도 기쁘고, 매를 맞으면서도 웃고, 욕을 먹으면서도 감사하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성도의 삶 배후에는 모든 것에 하나님의 주도권이 있다는 것입니다.하나님에 의해 시작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진행되며, 하나님의 은혜로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닌 은혜로 사는 자가 성도임을 잊지마십시오.

오늘 본문에 보면 은총, 은혜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은혜란 말의 뜻은 ‘낮은 자에 대한 높은 자의 대가없는 혜택과 특별한 사랑’입니다.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합니다. 이 사랑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의 사랑이 아닙니다. 특별한 사랑입니다. 되풀이 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좀더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의 호세아서 3:1-3을 소개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wmf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부정하고 음란한 여인인 고멜, 세상 남자와 입맞추고 버림받은 여인인 고멜을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때 사용되었던 단어가 헤세드입니다. 비록 범죄하여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여인이지만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헤세드 즉 은혜입니다. 바로 성도들이 받은 사랑이 이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사울 왕의 신하였습니다. 다윗은 왕의 인정을 받아서 딸인 미갈과 혼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울 왕의 사위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윗이 백성들로부터 점차 인기를 얻고 높임을 받게되자 사울 왕이 질투를 하며 악을 품습니다. 사위며 신하인 아들과 같은 다윗을 죽이려합니다. 그것도 간접적으로 죽이겠다는 것이 아니고 다윗이 조용히 수금을 타고 있을 때 정면으에서 창을 던집니다. 공교롭게도 두 번이나 창을 던졌지만 빗나갔습니다. 하는 수 없이 다윗은 도망하여 광야를 헤매는 방랑자가 되 버립니다. 이제 다윗에게 사울은 왕도 아니며 장인도 아니고 원수입니다. 천하에 용서할 수 없는 패륜의 원수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생각하면 원수이지만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는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요나단을 사랑했습니다. 성경에서 아름다운 우정을 들라면 단연코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말할 만큼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요나단도 다윗을 사랑했는데 사무엘상 18:3에 보면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관계에 또 등장하는 인물이 있는데 므비보셋입니다. 사울 가문의 마지막 핏줄인 요나단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역시 악의 씨앗이며 원수인 사울왕의 핏줄입니다. 제거해 버려야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다윗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을 사랑했기에 그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사랑합니다. 사울의 손자로 보지 않고 요나단의 아들로 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 신앙적으로 보느냐, 불 신앙적으로 보느냐에서 다윗은 언제나 긍정쪽이었고 신앙쪽에 섰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다니는 중에 얼마든지 대항해서 싸울 기회가 많았습니다.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도히도 있었고 충분히 저주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다윗은 신앙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주신 종으로 하나님께서 손을 쓰일지언정 내가 손 댈 수 없고, 미워할 수도 없다는 믿음 때문에 오히려 싸우는 것이 아니라 피해 다니면서 끝까지 대항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신앙적인 관계로 모든 것을 해석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본문에 등장하는 므비보셋을 다윗은 사랑하고 왕자같이 대접을 합니다. 이것이 은총이며 은혜입니다. 1절, 3절, 7절에 의하면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은총을 경험한 사람만이 은총을 베풀 수 있다는 말입니다. 므비보셋은 원수의 혈통이며, 악의 씨앗이고, 절뚝발이입니다. 전혀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은혜를 베풉니다. 다윗이 은혜로 대하니 므비보셋도 8절에 보면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라고 눈물어린 은혜 받음에 감사를 합니다. 은혜를 베풀어야 은혜가 은혜된다는 것입니다.

성도인 여러분은 모든 것을 은혜로 해석하십니까? 받은 은혜가 부족하다고 느끼십니까? 나만이 은혜에서 제외되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입니까? 그 누구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은혜로 보시고 은혜로 믿으십시소. 그리고 은혜에 의해 살고 오늘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고 믿으십시오. 여기에 감격이 있고 성도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아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계속 베푸실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은혜를 넘치도록 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소서.

2. 은혜를 베풀 자리에 늘 서게 하소서.

   

제33일째 주제 :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축복

Message 33 제목 : 교회를 세워가는 사람

본문 : 여호수아 14:6-12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기도회 4일째 축복된 민족에 대한 공부에서 같은 본문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내용으로 다시 이 사건을 해석하며 비교 설교를 하고자 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평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행복하다 불행하다. 유능하다 무능하다. 성공했다 실패했다. 희망이 있다 절망이 있다라며 자신의 현 위치에 대해 판단을 나름대로 내립니다. 그러나 때때로 평가를 잘못 내려서 시간도 정력도 허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행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스스로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깊게 생각하면 충분한 행복의 조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건강을 생각하면 행복할 수 있고, 젊음을 생각하면 행복의 간으성도 있으며 그런 대로 살만하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자신을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잔시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지혜에 대해서 과소평가하며 능력 없는 존재라고 한숨 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 경우보다는 그 일이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고 길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못하는 쪽만을 극대화시키고 반대로 지혜로운 사람은 할 수 없는 것도 나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총력을 다해 극대화하여 얼마든지 그 일을 해냅니다.

오늘 본문에 갈렙이 등장합니다. 그의 나이 여든 다서임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정복을 마치는 시점에서 끝으로 남은 헤브론 산지를 달라고 요구합니다. 헤브론은 아브라함이 살던 곳입니다. 아브라함은 평생 자기 땅을 소유한 적은 없지만은 아내 사라를 장사하기 위하여 막벨라 굴을 샀습니다. 바로 막벨라 굴이 있는 곳이 헤브론 산지입니다. 여기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믿음의 조상들이 묻혔고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랄, 이삭의아내인 리브가, 야곱의 아내인 레아가 묻힌 곳입니다. 그러므로 헤브론 산지란 믿음의 조상들이 묻혀있는 곳입니다.

또한 헤브론은 산지였습니다. 전재아힉에 아주 불리하고 요새가 많은 곳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낙 자손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가나안 정복을 위하여 여호수오와 갈렙이 정탐꾼으로 갔다와서 보고할 때 10명의 정탐꾼들이 엃게 말합니다. 거기에는 아낙 자손들이 많이 사는데 가서 그들과 마주서보니 우리는 그들 앞에 메뚜기 같다는 아낮자손들이 성을 지키고 있는 곳입니다(민13:33).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렙은 당당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헤브론 산지를 내게 주소서”(v12). 어쩌면 이렇게 용기가 있을 수 있으며 배짱을 부릴 수 있습니까? 갈렙의 나이85세! 이제는 은퇴할 나이요 가능하면 쉬운 일을 처리하고 싶을 때에 헤브론을 점령하겠으니 내게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 남은 곳 그 어려운 일을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너무 쉽게 쉬운 일만 하려는게 문제입니다. 쉽게 돈을 벌려고 하며, 쉽게 행복을 살려고 하고, 쉽게 믿음생활도 하려고 합니다. 만사를 쉽게 쉽게입니다. 교회생활도 편하게 쉽게 부담 없이 즐기며 해야되기 땜누에 적은 교회는 찾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꾸 쉽게만 부르짖다보면 어느새 신앙도 인본주의로 흐르고 맙니다. 때로 어려운 일을 감당하면서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거이며 의미 있는 삶을 사는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링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존경받게된 비결이 무엇입니까? 링컨은 껄걸 웃으면서 대답하길 ‘제가 다른 사람에 비하여 더 많은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실패는 수치가 아닙니다. 실패는 불행이 아닙니다. 오히려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쉽게 살려는 것이 수치며 불행인 것입니다. 열심히 하다가 생긴 실패는 영광이며 자랑입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갈렙을 보십시오. 85세의 나이에 만일 헤브론 산지를 공격하다가 실패하면 어떻게 합니까? 왜 그렇게 힘든 일을 자원해서 하려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갈렙을 이렇게 만들 수 있었던 믿음을 살펴봐야 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파 중에 족장 한사람씩을 뽑아 가나안 정복을 위하여 탐지하도록 보냅니다. 그 후 열두명의 정탐꾼들의 보고가 시작됩니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러나 그 땅의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도 있고 여부스인, 아모리인, 햇인, 가나안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10명의 사람들은 도저히 그 땅은 이스라엘의 점령할 수 없는 땅이라고 악평을 했습니다. 이 보를 듣고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황했고 그렇게 엄청난 군대들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는가에 대해 겁을 냈습니다. 이때 갈렙의 희망적인 믿음, 용기 있는 믿음을 보게 됩니다.

민수기 13:30에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 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다시 14;8-9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또한 본문12절에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라고 어청난 믿음의 선언을 합니다.

갈렙이 85년 동안 체험으로 얻었던 확고한 믿음은 자기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능히 무너뜨릴 수 있다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인8절, 9절, 14절에 거듭 강조되는 단어를 보십시오. 온전히 좇았으므로, 온전히 좇았은 즉, 온전히 좇았음이며.... 하나님을 좇아간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오직 하나님만을 찾는 믿음입니다.

9절에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라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약속을 신뢰했습니다. 그러므로 헤브론 정복이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된다고 믿었습니다.

헬렌 켈러는 말히길 ‘현대인들은 이론을 위한 용기는 풍부하나 실천을 위한 용기는 미흡하다’고 했습니다. 말함에는 용기가 있으나 행동함에는 용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갈렙의 마음을 타오르게 했던 용기는 이론도 아니고 배움도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체험한 믿음의 용기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우리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일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순간 그분이 나의 강함이 되십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나의 힘으로 못합니다. 믿음으로 합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도 믿읍니다. 당신이 겉에 보이는 것들이 약할 지라도 믿음 하나만 강하다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고 믿음으로 교회 사역에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내가 정복해 야될 헤브론 산지를 보여주소서.

2. 교회를 세우는 일을 믿음오 하게 하소서.

   

제34일째 주제 :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축복

Message 34 제목 : 예수께 잡혀있는 사람

본문 : 빌립보서 3:7-16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르 세우신 일차적인 목표는 무엇을 하라가 아니요 무엇이 되어라 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교회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위해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르 이루고 있는 성도들에게 성경이 요구하는 목표도 존재론에 있음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라 누구입니까?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12절에 자기의 존재의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예수님께 포로 된 존재라고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 성도는 누구인가에 대한 뚜렷한 정의가 있습니다. 성도란 ‘예수님께 포로 된 자’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독서의 바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노예이지 않으면 안된다. 다만 선택된 바에 의해서 노예가 되어야 한다. 이제는 누구의 노예인가 하는 사실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노예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누구의 지배아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무엇에 끌려가고 있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바울을 조명해보면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종이며 노예의 신분으로 끌려 다닌 사람입니다. 갈라디아서1;11-15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언갑자 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있었으나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께 포로 된 자가 아니라 자신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미 주님의 포로로 사도로 거룩히 구별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고백은 현재만이 아니라 인생 출발에서부터 자신에게는 자유가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다만 주님의 부르심과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는 고린도전서7:22-23에서 자신이 주님의 포로임을 거듭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 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인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예수님의 피 값으로 자신은 주님께 팔린 존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어떤 서신에서든지 나는 예수님의 노예라고 선언하면서 내게는 어떤 자유도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몸과 생활만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까지도 완전히 그리스도께 바칩니다. 이제까지 자신을 기쁘게 하던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을 택합니다. 자신의 영광을 버리고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합니다. 자기의 뜻은 아랑 곳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뜻만을 좇습니다. 그뿐 아니라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생의 중심이었습니다.

빌립보서3;5-8을 보십시오.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좃곡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이렇게 사는 것이 성도의 일치적인 목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의 중심에 놓고 그분의 기뻐하시고, 영광 받으시는 것을 가장 가치 있게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 바른 성도입니다. 철저하게 나를 버린 사람이 그리스도께 붙잡힌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수단을 예수께로 바꾼다는 것이 아니고 목적을 예수께로 바꾸는 것입니다.

독일 신학자 본 회퍼가 옥중에서 쓴 시 한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어떤 자일까?/이 고독한 물음이 나를 비웃는다/ 내가 어떤 자이건/ 아! 하나님이여 당신은 아십니다/ 내가 누구이든/ 선하든 악하든/ 성공했든 실패했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나는 분명히 당신의 것입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나 자신도 나를 모릅니다/하지만 당신은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우리들의 고백도 이래야 합니다. 오늘까지 나의 운명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습니까? 누구에게 끌려 왔습니까? 약간의 믿음이 있는 성도라면 하나님께서 강권으로 나를 붙드셔서 이 자리까지 오게 하셨음을 인정할 것입나다. 우리가 선택하고 우리가 결단한대로 내버려두셨다면 우리는 벌써 조각난 상태로 깨져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하나님은 나의 배후에서 나를 조정하고 계셨으며, 나의 운명을 이끌고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신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언어가 있다면 “잡혔다”라는 말입니다(12절). 예수 그리스도께 잡혀있는 사람. 예수께로 붙들린 사람이 성도입니다.

잡혔다 신앙이 바울의 믿음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앙 고백이 있는 사람은 인생의 목적이 바뀝니다.

마치 사도 바우링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즉시 포로가 될 때, 예수님을 핍박하며 제멋대로 살던 삶이 180도 변해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으로 바뀌듯 다른 운명의 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용하는 것이 육체의 가시며, 사단의 사자이고, 뼈아픈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을 써서라도 성도됨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께 잡혀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 13-14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깆 아니하고 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이런 뚜렷한 목표를 향하여 최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푯대란 완성이라든지 달성해야될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다만 푯대란 잡힌바 된 것을 더 확실하게 이루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깊이 알고, 그와의 완전한 교제에 이르고, 죄의 권세와 오염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과 모든 것 가운데 그분을 닮으며, 자신의 삶 가운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삶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소원이며, 꿈이며, 이상이며, 비전입니다. 여러분은 소원과 꿈까지도 예수께 잡혀 있습니까? 미래까지도 포로 되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습니까? 잘살고, 출세하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미 성도된 여러분이 추구해야 될 목표는 예수께 잡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잡혀있다는 사실을 늘 확인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적인 욕망이나 소원은 뒤로하고 주님께서 내게 주신것, 내게 향하신 뜻을 내 이상으로 삼고, 내 행복으로 삼고, 내 삶의 지표로 삼고 살아가는 주님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예수께 잡혀사는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2. 내가 세운 푯대보다 주님의 푯대에 맞추어 살게 하소서.

   

제35일째 주제 :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축복

Message 35 제목 : 예배를 성공하는 사람

본문 : 요한복음 4:23-24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신앙의 비밀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보이지 않는 진실을 믿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까이서 느끼고 만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알게되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과 은혜들을 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성도를 성도되게 하는 길이며 힘있는 사람으로 살게 만드는 능력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바쁜 생활은 점점 예배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교회를 향하는 횟수가 줄어들고 예배에 대한 관심과 참여도가 낮아지고 있습니다. 또한 예배 중심이 하나님 쪽보다는 사람 쪽에 치우칩니다. 언제부터인가 예배의 중심이 하나님이 되기보다는 인간의 만족을 위한 어떤 감정과 분위기가 중신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예배는 우리의 감정을 만족시켜야만 되는 것처럼 예배의 참된 의미가 하나님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전락되어 버린 것입니다.

성도가 영적인 공급과 풍성함 삶을 지탱하는 힘을 얻게 만드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 세상의 생활에서 지치고 피곤한 영혼에 살아있는 양식을 제공받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성도의 생명과도 같은 예배 생활을 우리는 잃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 회복은 교회를 건강하게 할 뿐 아니라 성도를 살리는 생명이기에 우리의 예배생활은 다시 점검되어야 하고 잘못된 예배 생활은 고쳐야 합니다.

본문은 간단하지만 정확하게 예배에 대해 정의를 해줍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이라고 못 박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예배가 참된 예배인가?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이 제1절대 신앙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이 믿음의 사람들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고 드러나는 행위의 시간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자리이고 하나님과 나와의 위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시간입니다. 왜 자주 예배하라고 성경은 가르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밀접하게 하고 하나님과 거리감을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예배에 대한 실제적인 면을 보겠습니다. 성경에는 산 예배와 죽은 예배, 참예배와 거짓 예배, 받으시는 예배와 받으실 수 없는 예배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하고 살아있는 참된 예배라고 확신있게 대답할 수 있나요? 아니면 여전히 습관적이고 수동적으로 주일이라도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꺼림직 해서 어쩔 수 없이 참여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예배 생활에 실패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배만이 당신을 지탱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누구를 찾고 계신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자’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기대하고 예배를 즐거워하며 예배드리기를 열심 내는 성도는 하나님의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예배 생활에 게으르고 예배를 소홀히 취급하는 성도는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예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것은 목표있는 예배를 드리라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위한 예배인지, 누구를 위한 예배인지, 만일 맹목적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거절하십니다. 예배의 궁극적인 목적인란 그 동안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주체는 하나님이며 우리가 예배드리면서 생각하는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고 능력을 체험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내게 은혜가 되지 않으면 오늘 예배를 실패했다는 개념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제 달라지십시오. 내가 은혜 받기 위해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는 것이 제1입니다. 자꾸 나를 내세우면 인본주의 예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싫어 하십니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한 예배의 기초는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그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있게 느낄 때 잔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되고 이미 잣니이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자인가를 확인받게 됩니다. 때문에 더 이상의 은혜를 받는 예배보다는 감사의 예배와 영광을 돌리는 예배로 예배의 목표가 달라지는 것입나다. 또한 본문의 신령한 예배란 감정적이고 인위적인 예배가 아닌 신령한 산제사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헌신을 뜻하는 말입니다. 고마서12:2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령한 예배란 항상 희생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전인적인 예배를 드리는 행위입니다. 단순히 입술로 사랑을 표현하거나 하나님을 부르는 정도 그 이상입니다.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는 예배이며 나의 영혼이 전적으로 성령께 의지가 된 예배입니다.

또한 진실하 예배란 진리를 근거로 한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에 럼기면서 실천된 삶으로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배 속에서 ‘진실하게 살게 해 주십시오’의 수준이 아닙니다. 나의 삶에서 예배자로서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경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5:23-24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능력이 없고 빈약한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원망하는 마음이나 미움을 그대로 가슴에 품고 예배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지 못하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예배드리기에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이렇게 예배 생활을 실천해 보십시오. 먼저 철저하게 회개하십시오. 잘못된 인간 관계나 나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나 없나를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진실하십시오. 하나님께 진실하고 사람 앞에 진실하십시오. 바로 이런 예배를 상한 하음으로 드리는 예배라 하며 하나님께 열납되는 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생활에 성공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가 살아있고 하나님이 임재하며 성도들이 응답하는 서로가 교통함이 있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또한 영적으로 풍성한 예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준비에 있습니다. 일주일 내내 주일예배를 위하여 기도합시오. 목사님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순서를 맡은 분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예배하는 그 날도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주일을 빠지지 마십시오. 이렇게 주일을 구별하여 주님의 날로 삼고 철저하게 2년 3년 5년 10년 20년 ....성실하게 예배를 드리는 생활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새벽기도의 작정보다 한국교회에 새롭게 회복될 것은 주일을 작정하고 주일 출석교인이 등록교인보다 더 많은 교회를 만들고 주일을 회복하는 교회가 많아져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이렇게 되어야 하고 나부터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으며 신령과 진정함의 예배를 드리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성공적인 예배 생활을 위해 깨어있게 하소서.

2. 우리교회의 예배를 회복시키소서.

  제36일째 주제 :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축복

Message 36 제목 : 기도로 살아가는 사람

본문 : 에베소서 1:15-23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 당연히 애써야 될 3가지 생활이 있습니다. 첫째는 말씀생활을 성실하게 해야 됩니다. 말씀은 문자를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나에게 의도하는 뜻을 발견하기 위해 말씀을 생활화 해야합니다. 영적 건강의 비결은 말씀을 먹는 길 뿐입니다. 둘째는 찬양생활에 성실해야 합니다. 찬양은 소리를 통해 하나님을 고백하는 간증입니다. 성도의 마음에서나 입에서 찬양이 흘러 넘칠 때 영의 건강함을 말해줍니다. 셋째는 기도생활에 성실해야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으이 직접 말씀하시는 영적 세계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있게 교제하는 대화의 통로입니다. 이렇게 말씀생활, 찬양생활, 기도생활의 균형을 유지할 때 건강한 성도가 됩니다.

그 중에서 오늘은 기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본문15절과 16절 말씀에 “ 이를인하여 주 예수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평가합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성도를 위한 사랑에는 장점을 가졌습니다. 감사하기를 마다 아니할 정도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칭찬 들을 만한 믿음과 사랑이있었습니다. 그러나 약한 부분을 바울 사도는 발견했습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다시 본문17-19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아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 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무슨 말씀입니까? 바우리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주고자하는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느냐? 는것입니다. 기도는 먼저 하나님을 아는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기도란 단순히 내가 필요한 물품 청구서를 내는 행위가 압니다. 기도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과 깊은 영적 사귐을 갖는 시간입니다. 영적 교통의 시간이며 영적인 대화의 시간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점점 선명하게 보는 것입니다.그러므로 기도란 먼저 하나님을 알기 위해 엎드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분이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구약의 성도들의 기도의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가 ‘종이 듣겠사오니 말씀하옵소서’입니다(삼상3:9,10사무엘사건)

기도는 아뢰는 것 이전에 듣는 것이 먼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기도할 때 이렇게 해보십시오. ‘하나님! 제가 듣기를 원합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이런 간절함이 있을 때 더욱 분명하게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다시 본문17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의 정신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꽃을 연구하는 식물학자이기 때문에 꽃을 만드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별을 연구하는 천문학자이기 때문에 별들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자가 아니어도 박사가 아니어도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계시의 정신은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고, 성령 하나님이 일하시면 하나님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1절에 “너희 마음의 눈이 밝혀져야....”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볼수 없습니다. 내면의 눈으로 성령의 조명하심으로만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다시 본문을 보면 바울은 기도란 먼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면 그 다음은 나를 아는 것이 절대적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기도입니다. 18-19절을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 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나는 누구입니까? 부름 받은 성도이며, 영광의 기업을 받을 자이며,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자이다.

바울 사도는 에수 믿는 작 누구인가에 대해 3가지로 말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자’입니다.

거룩한 부르심이기에 성도라는 이름이며 특별한 부르심이기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기업을 받을 자’입니다.

베드로전서1:3-4절에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히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이며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어느 날 그 기업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하늘의 기업을 받을 자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능력을 소유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아십니까? 20절에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능력과 최종 승리케 하셔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시는 능력”입니다. 인간이 통제 할 수 없는 두 가지 세력이 있다면 ‘죽음과 악’입니다. 그러나 이 두가지를 정복하도록 하셨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내용과 어쩌면 너무나 다르지 않습니까? 기도하면 능력 받는 다 은혜 받는다가 아니라 더 높은 곳이 있고 더 소중한 것이 있음을 깨닫게 해 줍니다.

기도할 때 우리의 영안이 밝아져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게 됩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의 권세를 알게 됩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될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체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는 이론도 아니며 학문도 아닙니다. 기도는 체험만 있을 뿐입니다.

기도하십시오. 나의 나됨을 알게됩니다. 쉽게 자신의 처지를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환경으로 인해 아픔을 겪는 분이 계십니까? 실망하지 마십시오. 오늘 말씀대로 하나님은 여러분이 필요하시기 때문에 부르셨습니다. 당신의 기업이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통해 능력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은 모든 것에서 당신을 이기도록 역사할 것입니다. 악을 정복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에서 당신이 정복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하나님! 종이 듣겠사오니 말씀하옵소서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2.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게되는 기도를 하게 하소서.

제37일째 주제 :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축복

Message 37 제목 : 하나님을 열망하는 사람

본문 : 시편73:12-26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성도의 신앙고백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성도의 언어생활 중에서 최상의 언어는 무엇입니까? 성도의 영적 체험에서 정상에 도달된 체험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본25절의 말씀일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이것이 성도의 최고 목표이고 목적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 사람이 고백했던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하고 있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분명한 목표를 하나님과 나와 관계에서 자신 있게 믿고 살아갈 수 있다면 훨씬 지금이 모습보다 다르게 믿음 생활을 하게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더 읽겠습니다. 마음에 깊이 새기시며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에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에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시라”(v25-26)

그렇다면 이렇게 고백하는 시편기자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입니까? 이 사람은 지금 자기인생 체험에서 자기를 도울 수 있는 자는 주님 외에 그 어느 누구도 없는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도울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다른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일이 잘못되어 궁지에 몰릴 때,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때, 위안과 위로와 확신과 힘이 필요할 때, 갑자가 붙잡을 것을 필요로 할 때 하나님을 떠나서는 그 어느누구도 없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어떠한 만족도, 어떠한 축복도, 어떠한 힘도 하나님께 등을 돌릴 때 모든 것은 그릇되고 텅 빈 상태가 된다는 사상을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만족을 얻어 보겠다고 세상으로 나가 세상이 제공하는 것으로 무엇을 얻엇습니까? 어버지의 품을 떠난 탕자를 아시지요. 그가 세상에서 얻은 것이 비참함과 후회와 눈물 뿐 아니었습니까? 세상 물은 마시면 마실수롤 갈증만 올뿐 어떤 만족도 위안도 없습니다. 위대한 오슬러는 말하길 ‘나는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 혼돈이 다시 왔다’고 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세상이란 한때 매력 있고 가치 있게 보이지만 결국은 그렇게 보이지 않을 때가 옵니다. 돈, 돈하지만 그것이 별것 아니라고 느낄 때가 옵니다. 하나님 없이 만족을 얻기 위해서 세계 일주도 할 수 있고, 외도를 할 수 있고, 가출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허무함만 더할 뿐입니다. 때문에 시편기자는 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은 하나님께서 주시거나 행하시는 일에 관심 있었지만 지금은 하나님 자신을 원합니다. 2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복 오만한자를 길시하였음이로다‘(v2-3). 무슨 말씀입니까? 왜 믿지 앟는 사람들이 나보다 더 잘 살고, 오래 살며, 재앙도 없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악인들에 비하면 자기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고, 주의일을 한다고 뛰어 다니는데 왜 그들보다 행복하고 형통하기는 커년 종일토록 재앙을 만나야 하는가?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시하고 불평하며 영적인 침체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v17-19). 하나님의 성소에 악인들의 초후를 보게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빨리 미끄러지는지 오늘 왕자가 내일이면 거지가 되 버리고, 오늘 부와 명예와 권력이 졸지에 황폐 되 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나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22절에 “내가 이같이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스이오나...”그런 줄도 모르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평하니 ‘나는 짐승입니다’.라는 것입니다. 그 동안 이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자기가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주시거나 행하시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을 소원할 뿐입니다.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입니까? 죄사함입니까? 용서하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것입니까? 물론 이런 것들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죄사함보다, 사랑하는 것보다, 봉사하는 것보다, 제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신앙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ㅇ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을 성도들이 더 소원하고 바랍니다. 하나님에게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메뉴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복중에 가장 큰복이란 하나님을 알고 그의 면전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시편42:1-2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보올꼬,....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 영혼아 내가 어찌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이 사람은 지금 하나님을 아는 직접적인 지식,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을 구하며 울부짖고 있습니다. 이런 갈급함, 이런 갈망, 이런 울부짖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는 것 말입니다. 왜 여러분의 신앙 생활이 만족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 자신을 요구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소원을 가지십시오. 성도란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누리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만이 독점적인 위치를 차지해야 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늘에서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다는 가장 높은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서도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땅에서도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그를 조정할 수 있는 것은 하늘에서든, 땅에서든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부여되는 가장 큰 복인 완벽한 만족입니다.

본문26절을 보십시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한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시라.”

물론 연약한 인간이기에 육체와 마음이 쇠잔할 때가 있습니다. 육신의 기능이 마비가 될 때도 있고 팔다리가 쑤시고 허리가 아플 때도 있습니다. 현기증이 나고 음식을 때때로 소화시키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침대에 힘없이 누워있게 될 때도 있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플 때도 있습니다. 마음에 고통이 옵니다. 정신적으로 피곤도 옵니다. 상처도 생깁니다. 뜻대로 되지 않아 실망도 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요, 나의 분깃이요, 내마음의 힘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붙잡고 계시니 나는 요동 할 수 없고 흔들릴 수 없다. 그는 만세 반석이시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내 육체의 상태가 어떻게 되든지땅에 속한 일들이 언제 사라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지탱해 주실 것이고 나의 힘이 되신다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사업도, 육체도, 체험도, 욕심도 의지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믿으십시오. 그는 만세반석이시고 힘이 십니다.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믿고, 그분을 알고, 그분이 성도들을 지탱케 하시는 반석과 힘이 되심을 신뢰하는 관계에서 만족을 누리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하나님 자신을 원하는 사람이 되에 하소서,

2.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지 않게 하소서.

제38일째 주제 :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축복

Message 38 제목 :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

본문 : 고린도전서4:14-21·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한국교회를 사랑하며 걱정하는 분들의 한결같은 생각은 교회가 바른 것을 가르치고, 바른 신앙을 강조했으면 이렇게까지 잘못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기성교회들이 아직도 사이비 종교나 잘못된 신앙을 따르는 사람들을 향해 침묵하고 있는 동안 얼마가지 않아서 한국교회는 더 큰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도 각성하며 바른 교회관을 다시 정립해야되고, 성도들도 바른 신앙을 갖도록 힘써야 합니다.

저나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별명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약 일년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후 복을 믿고 삶이 변화된 사람들에게 처음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성경대로 정의한다면 예수를 믿고 변화된 영적인 사람이란 말입니다.

성도들의 삶을 육적인 삶, 혼적인 삶, 영적인 삶으로 나눕니다. 육적인 삶이란 먹고, 마시고, 자고, 활동하는 것입니다. 혼적인 삶이란 생각하고 , 느기고, 결단하는 지.정.의의 활동입니다. 보통사람들은 대개 이 두가지의 삶을 삽니다. 보통 종교인들은 육과 혼의 삶을 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보통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또하나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것을 영적인 삶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뭇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2-14). 바로 하나님의 영에 지배를 받으며 사는 것이 영적인 삶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하면서 강조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잏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 충만을 받으라‘(엡5:15-18). 누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올바르게 알 수 있습니까?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누가 성숙한 믿음 생활과 감격적인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영적으로 충만한 사랍입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충만해지고, 영적으로 생활하고,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영성 신학’ ‘영성 생활’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약한 부분이 영성 신학입니다. 마치 영, 성령하면 오순절 계통 사람들만 독점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또 잘못 오해된 것이 영성 하면 뜨겁고, 뒤집어지고, 거품 흘리는 발광적이고 영광적인 것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또 영성하면 신앙의 경력이 있고, 도사들만 하는 것으로 평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영성 생활, 영성 신앙이란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영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질적인 삶의 변화를 영성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질적인 삶을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도리고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완전하게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해 드린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 없습니다. 때문에 오늘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닮는 길뿐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게 될 때부터 성령께서 내 마음에 활동하시면서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도록 일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형성하도록 성령은 일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성도들로부터 어떤 향기가 나도록 끌고 갑니까?

갈라디아서 5:22-24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예수 냄새가 나도록 성령은 자꾸 재촉하십니다. 성령은 자꾸 사랑하라고 합니다. 기뻐하라고 합니다. 화평하라고 합니다. 인내하라고 합니다. 충성하라고 합니다. 절제하라고 합니다. 결국 성령은 내 욕심과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요구하십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따르도록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내 속에서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가? 얼마나 내 삶속에서 예수님을 드러내고 있는가? 그것이 잘되면 영성이 강한 사람이요, 잘되지 않으면 영성이 약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숨기고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이 영성 운동입니다.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가장 큰 실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보다 자기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익보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예수의 능력보다 자신의 능력을 내세우고, 예수의 실력보다 자신의 실력을 앞세우면 무너지는 것입니다. 잊지 마세요. 유별나게 특별한 교리를 내세우는게 이단이 아니라 예수보다 그 무엇이든 내세우면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이비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 제1의 기초가 예수 중심 신앙입니다. 그러나 예수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영성 운동을 을으켜야 합니다. 나를 철저하게 죽이고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마음의 집을 통째로 맏아서 운영하도록 해야 합니다. 내 마음의 손님으로 와 계시는 것이 아니라 주인으로 오시게 해야합니다. 내 감정에 따라 모셨다가 내쫓는 것이 아니요, 내 환경에 의해서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니요, 언제나 내 중심에 좌정 하시도록 예수를 붙들어 놓는 것이 영성 생활인 것입니다. 참된 영성이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의 중심에 두었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닮았습니까? 우리의 옛말에 ‘며느니는 시어미를 닮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시어머니가 시집살이를 시키면 며느리도 결구 시집살이를 시키는 며느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며느리의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시어머니가 워낙 힘들게 합니다. 한시도 쉴 틈을 안주고 온갖 일을 시키고 잔소리를 하십니다. 그러나 이 며느니를 대꾸도 못하고, 꾹 참으면서 속으로 요갛고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짐을 하기를 나는 절대로 저런 시어머니가 안도리라. 그런데 30년을 살다보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시어머니를 닮게 되었고 시어머니가 한 그대로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개인적으로 예수님과 친숙해야 닮습니다. 부부생활을 생각해 보십시오. 전혀 모르는 사람이 만났습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고, 마음을 나누고, 정을 느끼고, 가까이하는 동안 마침내 얼굴과 식성과 성격까지 닮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믿고, 예수 얼굴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 믿은 지2년 되는데도 말이 거칠다고요? 그게 정상입니다. 하루아침에 성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몇 년 사이에 예수를 복사하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5년, 10년, 20년, 30년 계속해서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와 친밀하고,정을 주고 사귀고 하다보면 닮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속 닮는 연습을 하십시오. 예수님을 닮게 만드는 것이 영성운동입니다. 본문 19-2-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이 능력이 바로 영성입니다.

영성을 회복하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말보다 영성을 충만하게 하소서.

2. 한국 교회가 영성 회복을 이루게 하소서.

  

제39일째 주제 :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축복

Message 39 제목 : 약함을 이겨내는 사람

본문 : 고린도 후서 4:7-11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역사가 시작되는 날부터 계속되는 물음입니다. 때문에 사회학, 철학, 심리학, 과학, 종교학까지 인간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었습니다. 철학자들은 이렇게 인간을 정의했습니다. 쇼팬하우어는 인간을 ‘맹목적 의지인’으로, 니이체는 인간을 ‘힘의 의지인’으로, 마르크스는 인간을 ‘소유의 의지인’으로, 프로이드는 인간을 라비도라는 ‘성적동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인간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내놓지는 못했습니다. 최근에는 인간학까지 등장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을 풀어 보자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일반적인 인간개념에서 기독교에서 보는 인간개념을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분명한 정의를 내립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놓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4-7).

성경은 인간이란 피조물이며,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말합니다. 인간을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창조된 인간이란 어떤 인간입니까? 본문은 말하길 창조된 인간을 ‘질그릇’이라고 했습니다. 질그릇이란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흙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식 인간론은 인간은 흙에서 나서, 흙에서 나는 것을 먹고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자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인간은 흙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첫 사람 아담을 통해 이 사실이 확인됩니다. 아담이라는 뜻이 흙이고, 형용사인 에돔이라는 말이 붉은 흑색을 말합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히브리인들은 황색인종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습니다. 사람 칼라인 흙색이 본래 성서적 색깔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기독교의 정의는 하나님이 흙으로 만들어 놓은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이란 말은 깨어지기 쉬운 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약합니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강한 것 같지만 동물성으로만 따진다면 힘도 없고 강한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육체는 동물 중에서 가장 약합니다. 가죽을 입힌 것도 아니고, 무엇이든 소화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날수 있는 것도 아니고, 빨리 달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발톱이나 이빨이 강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동물보다도 인간은 가치 있고 존엄합니다. 인간은 영혼이 있기 때문에 동물과 다릅니다. 인간 속에 담겨있는 그것을 보화라고 부르겠습니다. 인간만이 유일한 보화의 혜택을 받았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질그릇 자체는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질그릇 속에 담겨있는 보화가 있습니다. 그 보화로 인하여 질그릇이 가치가 있습니다. 그릇의 생명은 그 속에 담겨진 것인 무엇이냐에 따라서 평가를 받습니다. 아무리 좋은 그릇이라도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되고, 형편없는 그릇이라도 귀한 것이 담겨있으면 소중한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흙이며 깨어지기 쉬운 약한 존재인 질그릇입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질그릇이 가치 있고 고귀한 것은 바로 그 안에 보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보화가 무엇입니까?

청세기 5:1-2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인간의 질긄에 담긴 보화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인간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므로 인간은 값진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 있기 때문에 존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왜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십니까? 당신의모습이 그 속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을 질그릇이라고 계속 강도하는 것입니까? 본문 7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아게 하려 하심이라.” 이왕에 사람을 만드실 때 금이든 사파이어로 만들어 빛도 나고 화려하게 만드셨으면 좋을 텐데 질그릇으로 만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예 녹도 슬지 않고 금도 가지 않고 깨지지도 않는 스텐이나 플라스틱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왜 하필이면 질그릇입니까?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서 있음을 믿게 하려는 하나님의 의도”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의 도움에 의해서 살도록 만들어 졌다는 것입니다. 질그릇으로 만들어 졌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능력이 없습니다. 키 한자도 늘릴 수 없고 흰머리 한 가닥도 검게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약합니다. 깨집니다. 병들고, 시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붙들면 그는 강합니다. 인간은 질그릇이기 때문에 약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강합니다. 나는 약하고 하나님은 강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살펴주셔야 삽니다라는 고백 때문에 질그릇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질그릇인 인간은 약하기에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모두 약합니다. 배웠든지 못 배웠든지, 가졌든지 못가졌든지, 건강하던지 병들었든지, 젊었던지 늙었던지 사람은 어떤 고통의 문제이든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질그릇이기 때문에 사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떨어져 금이 가든지 깨어지든지 합니다.

오히려 누군가 자신은 강하다고 말한다면 그는 가장 약한 자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 가장 약한 자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강자입니까? 권력을 쥐고 있다해서 강한 자가 아닙니다. 명예가 있고, 돈이 있다고 그가 강자가 아닙니다. 청와대에 살면 강자이고 달동네에 살면 약자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어디에 살고 있느냐? 무엇을 소유했느냐에 따라서 강자와 약자가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 누가 활동하고 있느냐? 누가 그 인생을 쥐고 있느냐가 평가 기준입니다. 하나님이 강력하고 활동하고 있는 사람은 강자이고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약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사는 자는 강자이고 자신의 힘으로 사는 사람은 약자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내 속에 더떤 보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나만이 아는 보화! 어떤 것과도 바굴수 없는 보화! 나를 웃게 만들고 신나게 만드는 그 보화가 있느냐에 따라서 보는 것, 생각하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이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보화를 소유했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 한분만으로 만족한다고 했습니다. 성도들도 질그릇이기 때문에 깨어지고 금이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치고 흠집 없고 수술자국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질그릇이 깨어지면 보화가 드러나기 때문에 더 찬란한 것이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내가 깨어지지 않고서는 예수님이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찾아오는 문제는 나를 깨뜨리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유명한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이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믿는 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생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약할 때가 가장 강할 때임을 알게 하소서.

2. 어느 환경에서든지 나의가치를 높이게 하소서.

제40일째 주제 :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축복

Message 40 제목 : 새 시대 축복의 헌신

본문 : 출애굽기 35:20-29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오늘 호렙산 축복 40일 새벽기도회를 마치는 날이 되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함께 수고하신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마지막 날의 큰 축복을 기대하며 큰 드림 축복의 날 말씀을 보겠습니다.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렙산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산입니다.

출애굽기 32:15-20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돌이켜 산ㅇ에서 내려오는데 증거의 두 판이 그 손에 있고 그 판이 양면 이편저편에 글자가 있으니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료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 여호수아가 백성이 떠듦을 듣고 모세엑 말하되 진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 모세가 가로되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려 부르짓는 소리도 아니라 나의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 진에 가까이 이르러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을 보고 내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모세사 그들의 만든 송아지를 가져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우니라.”

어떻게 이런 비극적인 장면이 있을 수 있습니까? 모세는 40일간 호렙산에 올라 하나님과 대면하며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베푸실 새로운 약속과 계약을 맺는 일을 하고 있는 데 산아래 서는 아론을 중심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우상숭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축복을 계획하고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한 배신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산 아래로 내려오던 모세는 이 장면을 보고 분로를 느끼며 하나님이 직접 쓰신 증거의 두 돌판을 내던졌습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의 가담자 3천명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 후 모세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사죄의 기도를 드립니다.

출애굽기 32:31-32에 모세의 기도하는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슬프도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하나님의 계획을 모른 채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춤을 추고 있는 백성들의 모습에 모세의 마음은 찢기는 아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지금 모세가 슬퍼하는 이유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들을 가난안까지 인도하시기 위해서 온갖 계획을 갖고 계시며 축복의 프로그램을 세워놓고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셔서 계획의 일부를 공개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하나님의 계획이나 하나님의 뜻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눈앞에 보인 것에 도취해서 춤을 추고 있을 뿐입니다.

다시 모세와 호렙산의 두 번째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다시 호렙산으로 부르시는데 약속의 증거가 될 돌비 둘을 들고 오르도록 명령하십니다. 모세는 호렙산에 올라40주야를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갖습니다.

출애굽기 34:27-28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시니라.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일 사십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으ㅏ 말씀 곧 십계를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시 약속의 말씀이 쓰여지 돌판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이 적힌 판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임재의 뜻이 담겨 있음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돌판은 곧 하나님입니다. 이제 모세가 두 판을 손에 들고 시내산을 내려오는데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광채를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혹 하나님의 광채보다 자신의 광채가 더 드러날까 봐 가리운 것입니다. 요즈음 같으면 없는 광채를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현혹시키는데 모세는 빛나는 광채를 가려 겸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들로 이런 신앙의 모습을 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 돌아가야 될 영광을 가로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까?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십시오. 그 은혜가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누요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흔히 우리들의 주변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별 것 아닌 신앙체험을 하고 나면 떠들어대고, 나팔을 불고 이름 알리기 전재이라도 하듯 명함 내놓기에 열을 올립니다.

이렇게 호렙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요구사항을 하나하나 전합니다. 먼저2-3절을 보십시오.

“엿새동안 일하고 제 칠일은 너희에게 성일이니 여호와께 특별한 안식일이라 무릇 이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찌니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이 말씀이 너무 쉽다고 하실지 모르겠어요. 하나님이 모세를 다시 부르셔서 고작 명령하신 말씀이 안식일을 지켜라인가? 40일 밤낮 동행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주일성수 하라인가? 너무 시시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닙니다. 지금까지 서론을 좀 길게 말씀했던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쳐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질서, 하나님의 법입니다. 계속해서 설명되고 있습니다만 헌신이나, 봉사나, 헌물이나, 충성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 말은 올바른 신앙의 자세가 있고서야 올바른 신앙생활의 헌신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믿음이 없어도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 하는 일은 결국 자기를 위한 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음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유독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를 다른 계명보다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좀더 뒷부분을 보면 알겠습니다만 하나님이 명령하신 최대의 일은 성막을 짓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막을 짓는 핑계로 안식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못박는 것입니다. 물론 성막을 짓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안식일도 성막을 지으며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핑계로 하나님의 법과 질서를 파괴하고 범해서는 하나님이 기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하나님의 일을 핑계로 각종 매매행위가 성전들에서 이뤄졌습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선 제물이 필요한데 성전 뜰에 소, 양, 비둘기를 제물로 파는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은 하나님께 제사를 온전히 드리도록 구별되어 있는 성전은 무시한 채 제물을 팔고 사는 것에만 야단들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으로 소, 양, 비둘기를몰아내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뒤엎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2:13)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막11:17)

하나님의 일보다 질서가 더 소중함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보다 하나님의 일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 알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헌신과 헌물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삶,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사는 삶을 먼저 요구하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법을 모르면 하나님의 일을 바르게 할 수 없습니다. 주를 위해 일하러 나거서 전에 먼저 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가? 내게 고칠 것이 없는가?내게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를 찾고 그 깨달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충격적인 말슴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태복음 7:22-23입니다.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여기서 불법을 행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법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사람이 아닙니까? 때문에 모세는 먼저 하나님의 말쓰대로 하나님의 질서대로 사는 것을 부탁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먼저 하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먼저 하십시오. 하나님의 법을 먼저 찾으십시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일을 하십시오.

다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한 내용을 보십시오. 4절에서 19절가지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 드릴 것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성전을 만들어 가는 일을 위해 드릴 것이 있는데 어떤 방법으로 드릴 것인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취하되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찌니....”여호와께 취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디서 드릴 것은 만듭니까? 소유 중에서 취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있는 것에서 드리시길 원하십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과부의 두렙돈을 주께서 크게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있는 그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없기 때문에 염려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제부터 그런 염려를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은 없는 것을 만들어 오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네 소유 중에서....”주를 위해 드리라고 하십니다.

그 다음은 5절에 “원하는 것을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비록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해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자원하는 마음이란 성령 역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움직여 주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에 소원을 주시지 않으면 억만 장자라도 단돈 백원도 주님께 바치기를 아까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하다고 절대로 주님을 향한 헌신이 적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비록 그의 헌신이 사람 보기에는 보잘것 없는 것 같이 보여도 하나님은 그것을 수천 억의 재산보다도 귀하게 받으시고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믿음입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드릴 물질을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 제게 마음껏 드릴 수 있는 소원을 조옵소서! 즐겁게 드릴 마음을 주옵소서! 자원하는 마음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고린도후서 6:7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여러분엑 요굴하실 때 꼭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십시오.

하나님은 자원해서 하는 자는 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다음에 10절을 보겠습니다.

“무릇 너희 중에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와서 여호와의 명하신 것들을 다 만들찌니...”

물질의 헌신도중요하지만 몸의 헌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부르실 때 각각 재능을 주셨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주를 위해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5달란트, 3달란트, 1달란트 모두엑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왜 이렇게 모두 다르게 주십니까? 혼자서 하나님의 dfl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조화릍 통해서 이뤄집니다.

그러므로 내가 할 일이 없다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셨다면 분명히 당신이 할 일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내게맡긴 것이라고 믿어지면 주를 위한 영광으로 믿고 헌신하십시오. 하나님이 맡기실 일이 없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부르실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각각 재능을 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4:10-11을 소개해 드립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헌신을 요구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악하고, 고집 세고, 곁길로 간 사람들이지만 그 말씀대로 실천을 했습니다. 20절부터 끝가지 보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즐겁게 봉헌을 했습니다. 마지막 본문인 29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마음에 원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남녀마다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빙자하여 명하신 모든 것들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 이러하였더라.”

할렐루야!

더욱더 감격스러운 것 이스라엘 백성들의 봉헌이 너무 많아서 일하는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게 되고 모세는 마침내 이스라엘 배거성들에게 봉헌을 그만 하라고 권면까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교회가 이렇게 되면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그만 하라고 권면할 수 있는 교회말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21절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무릇 마음이 감동 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 와서 성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 여호와께 드렸으니....”

이렇게 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요구하실 때 그 마음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주를 위해 물질과 시간과 몸을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해드리는 성도가 되십시오.

하나님의 일은 돈만 갖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셔야 하고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지체 없이 감동된 사람이 먼저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헌신 할 수 있는 기회란 드리는 자에게 축복의 기회이기 때문에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들엑 호렙산을 내려오는 모세에게 명령했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하나님의 뜻과 질서를 먼저 앞세우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 받을 기회를 헌신을 통해 이뤄야 할 것입낟. 여러분이 받은 은혜와 축복들을 생각하며 믿음으로 남은 여러분의 시간과 재능 그리고 물질과 마음을 주를 위하여 기쁨으로 드리며 새로운 새 시대는 헌신의 사람들로 세우져 가시길 바랍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