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성령 안에서 외 17 편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외 새벽설교 7편\"|새벽설교
새생명축복

1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성경본문 고전05장 09절 ~ 11절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 11)

 

고린도교회는 참으로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것은 고린도라는 특수한 지역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고린도는 기원전에 형성된 항구도시로서, 이미 사도 바울 당시에 5∼60만 인구를 가졌던 대도시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왕래하며 모여들다 보니 각종 범죄와 퇴폐, 음란과 마약 같은 문제가 많았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세계 항구도시에서도 으레 있는 일입니다. 이런 지역에 세워진 고린도교회이다 보니 교회안팎으로 영향을 받아 문제점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즘엔 한국인들이 많이 이민을 가는데, 그 이민사회의 교회들이 많은 문제를 가지는 것은 이민사회라고 하는 특수한 지역적 문제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속한 지역의 특수성과 그 교회는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분열·분쟁하는 교회였습니다. 한 교회 내에서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사분오열하는 교회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또한 음란의 문제가 있는 교회였으며, 각종 은사 문제로 다투는 교회였고, 우상제물에 관한 문제로 진통을 겪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본문에서 알 수 있듯 고린도교회엔 교회 내의 문제를 세상법정에다 고소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고린도교회는 이런저런 문제로 바람 잘 날이 없었던 교회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교회도 당면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교회를 향해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고전 6: 6)”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쟁과 음란, 세상법정에 고소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기 원했을까요? 그 해답이 고린도전서 6장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 11).” 그렇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며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일찍이 스가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 6)”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 17)”고 말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성도들이 새로워지고 한국교회가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나와 내 가정 그리고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거듭나게 하여주소서. 아멘.

 

 

 

2.

몸의 중요성

고린도전서 6: 12∼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 20)

 

 

 

 

 

 

어느 날 독실한 신자가 기독교에 대해 불만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사람을 너무 옭아맵니다. 술도 안 된다, 담배도 안 된다, 다른 이성과의 즐거움도 안 된다면서 좁은 길만 가라고 합니다.”

“당신은 최고급 양복으로 신발을 닦을 수 있습니까? 당신은 값비싼 오르간에 쓰레기를 올려놓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바보나 하는 일이지요.”

“비싼 돈을 주고 산 도자기를 야채 담는 데나 쓴다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형편없는 낭비지요. 그런데 제게 왜 그런 걸 묻지요?”

“들어보세요. 당신은 장차 훌륭한 정치가나 학자가 될지도 모를 사람입니다. 그 존귀한 몸을 술항아리로 만들면 어떻게 합니까? 아마 하나님이 섭섭해하실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도 이러한 무지가 있었습니다. “육체는 무덤이다”는 속담이 성행할 정도로 영혼을 귀중히 여겼지만, 육체는 어떻게 행하든지 상관없다는 식의 생활태도가 만연해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과 행동은 고린도교회의 영적 질서를 위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몸의 소중한 의미를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물으시며 몸과 행동의 중요성을 다시 깨우쳐주셨습니다.

 

첫째,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입니다(15절). 인격적으로 그리스도와 연결된 지체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교제와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몸을 향락과 세속의 문화에 연결시켜서는 안 됩니다. 날마다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고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둘째, 우리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19절). 우리 몸은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의 것입니다. 단지 우리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몸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성령을 근심하지 않게 하고 주님의 영이 거하는 거룩한 성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성령이 인도하는 삶에 복종해야 합니다. 세상의 열매가 아닌 성령의 열매를 맺는 몸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 몸을, 우리를 위하여 사용하지 말고 거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몸을 그리스도께서 피 값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자신의 영광을 따르라는 유혹을 거부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되며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성령의 전이고 영광의 도구가 되어야 할 우리의 몸을 잘 이해하며 오늘도 우리의 몸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 거룩한 뜻을 이루시는 주님! 이제 우리의 몸을 육신의 쾌락이나 헛된 만족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날마다 성령의 전을 이루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아멘.

 

3.

지금 있는 그곳에서

고린도전서 7: 10∼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전 7: 24)

 

많은 사람들은 “현재의 자리가 더 좋은 자리였다면 지금보다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좋은 믿음의 가문이나 좋은 믿음의 동료가 있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결과와 더 복된 길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현재보다 더 좋은 여건이 좋은 신앙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그렇게 수동적인 것이 아닙니다. 좋은 자리에 가면 좋은 신앙의 길이 열리고 좋은 열매가 맺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환경에는 수많은 유혹과 그 나름대로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현재를 떠나서 편한 자리로 도망하는 신앙을 원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거친 파도를 헤치며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많은 믿음의 위인들은 좋은 길을 소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려운 현재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이기기를 원했습니다. 요셉은 노예의 상태에서, 다니엘은 사자 굴에서, 바울은 빌립보 감옥이라는 어려운 현실에서 믿음으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새로운 곳에서 시작하기보다는 현재의 자리에서 옛것을 새롭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지금의 자리가 어렵고 힘들어도 주어진 자리와 직분에서 최선을 다하는 기독교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학생이면 학생으로서, 주부면 주부로서, 직장인이면 직장인으로서, 좋은 기독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푸른 초장보다는 가시밭이 더 많이 나타난다 해도, 평지의 삶보다는 골고다의 언덕이 더 높이 있다 해도, 불평과 원망을 이기고 믿음으로 멋있는 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한 구도자가 랍비에게 찾아왔습니다. “랍비여, 이 세상이 혼탁하여 본받을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참된 길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디에서 본받을 스승과 나의 갈 길을 찾을 수 있습니까?” 랍비가 대답했습니다. “네가 있는 곳에서 본받을 자가 없다면, 네가 본받을 자가 되어라. 네가 가는 길에 길이 없다면 네가 길이 되어라.”

 

서있는 곳이 본받을 자가 없는 어두운 곳입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그곳에서 본받을 만한 기독교인이 되어봅시다. 감동을 주는 기독교인이 되어봅시다. 서있는 곳에 길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곳에서 믿음의 길을, 하나님의 영광을 길을 만들어봅시다. 내일의 사람들이 나침반으로 삼고 따라올 믿음의 길을 개척해봅시다.

오늘도 하나님은 이러한 삶을 원하십니다.

 

지금의 자리를 불평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멋진 기독교인이 되게 하소서. 미움의 자리에서 사랑의 길을, 절망에서 희망의 길을 만드는 참된 기독교인이 되게 하소서. 아멘.

 

 

 

4.

현대판 우상

고린도전서 8: 1∼3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 12)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인간지식의 한계를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 자신이 만물을 통하여 자기를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 때문에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완전하게 아는 것은, 신앙의 눈으로, 성경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또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생명력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우상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상이란 무엇입니까?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오직 한 분이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저 목석에 불과한 우상을 만들어 숭배함을 봅니다. 그러나 우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헛되고 무가치한 것이어서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진 음식 역시 우리가 먹은 음식과 아무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제물을 먹으면 해가 되느냐 유익이 되느냐로 다툴 필요도 없습니다. 만일 그 음식이 두려워서 못 먹는다면 이는 곧 우상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우상을 절대로 섬겨서는 안 됩니다.

 

구약시대에는 금송아지, 바알, 아세라 등 실제로 눈에 보이는 우상들을 섬기다가 하나님께 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우상들이 옷을 바꿔입었습니다. 그러니까 스스로도 잘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우상을 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먼저, 지식을 우상으로 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상 앞에 놓여있는 음식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 안다고 하면서, 엉뚱하게도 교만하여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어떤 때는 그 지식으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남을 판단하기도 합니다. 이는 옳은 일이 아니며 형제나 자신을 망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깊고 부요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식만이 아니라, 명예, 부, 권력, 자존감 등 수많은 우상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 본위로 살아가는 사람을 현대판 우상숭배자라 말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제 사랑의 덕을 쌓으며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사랑이 어떤 무엇보다 귀중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음식이 되었든지, 지식이 되었든지, 사랑을 통하여 이웃에게나 하나님에게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제 이기적인 삶에서 벗어나 사랑으로 이웃에게 덕을 쌓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주여! 우상에서 벗어나 하나님만을 경외하게 하소서. 아멘.

 

 

5.

신앙의 자유인

고린도전서 9: 1∼15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전 9: 12)

 

2006년 1월 2일 오전,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 주 탄광폭발사고로 숨진 광부 마틴 톨러 주니어(51세)의 시신 옆에서 작별편지가 발견되었습니다. 매몰된 갱도에서 숨이 끊어지기 전에, 주머니에 들어있던 보험가입신청서 용지와 연필을 꺼내 가족 앞으로 글을 남긴 것입니다. “Tell all I see them on the other side. It wasn’t bad just went to sleep. I love you(별로 고통스럽지 않단다. 잠에 빠져들고 있을 뿐이다. 사랑한다. 모두에게 하늘나라에서 만나자고 전해주렴).”

 

유독가스가 차오르는 갱도의 처절한 상황을 보여주듯 간신히 휘갈겨 쓴 필체였지만, 그 내용은 오히려 가족을 안심시키는 것이었고, 이 내용이 보도되자 미국의 전 국민들의 눈시울이 젖었습니다. 시신을 확인하러 간 그의 형은 ‘마틴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며 유독가스에 숨져가는 동료들을 보고 잠이 든다고 표현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모습은 진정한 신앙의 자유자를 연상케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은 자기를 가리켜 ‘자유자’라고 합니다. 이것은 성도가 주 안에서 얻고 누릴 수 있는 자유 곧 ‘율법에서의 자유,’ ‘우상과 그 제물 같은 문제에 대한 무지로부터의 자유’ 등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자유를 주시기 위해 주님은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것이고 우리는 그분의 공로로 자유자가 된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도록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그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보다 값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진정한 자유자가 됩니다.

 

바울은 또한 자신을 ‘사도’라 합니다.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는 거짓교사들의 많은 시비가 있었으나, 바울 자신은 주의 부르심을 받은 후, 흔들리지 않는 자의식을 가지고 예수 우리 주를 본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러한 사도의 권위로 우상 제물 문제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한 결과로 고린도교회가 설립되었으니,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복음 사역의 열매요, 그들이 회개하고 주 앞에 돌아온 것은 바울의 사도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서 정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의 권위를 쓰지 않고 범사에 참은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유인이나 사도에게 주어진 정당한 권위도 복음을 전하는 데 장애가 된다면 포기할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혜로우신 주님, 우리로 진정한 자유인이 되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장애가 된다면 정당한 권위까지라도 포기할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하소서. 아멘.

 

 

6.

면류관을 소망하자!

고린도전서 9: 16∼27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 25)

 

1924년 파리 올림픽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영국의 100미터 대표선수는 에릭이었습니다.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가 에릭에게 유럽 최초의 육상 100미터 금메달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기 일정표에 100미터 경기가 주일에 거행되는 것으로 발표되자, 에릭은 조용하면서도 단호하게 출전포기를 알렸습니다. “저는 주일에는 뛰지 않습니다.” 에릭의 결정에 충격을 받은 영국인들은 그를 ‘조국의 명예를 버린 배신자,’ ‘편협하고 옹졸한 신앙인’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에릭은 그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주님의 날을 어겨가면서까지 메달을 따려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과의 타협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에릭에게 또다른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바로 그 올림픽에서 자기의 주종목과는 전혀 거리가 먼 400미터에 선수 부상으로 생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날 에릭은 놀랍게도 47.6초의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땄습니다. 에릭이 선택한 일을 하나님께서 복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에릭을 비난하던 영국 신문들은 그를 가장 훌륭한 영국인이라고 극찬하며 추어올렸습니다. 놀랍게도 올림픽 다음 해인 1925년, 에릭은 모든 명예와 기회를 버려두고 중국선교사로 조용히 영국을 떠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올림픽과 유사한 고대 헬라의 4대 경기의 한 종목인 달리기를 예로 들어, 성도의 삶의 자세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선수들이 상을 받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절제하고 훈련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처럼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기 위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하고 절제와 훈련에 전념했다면,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는 우리는 더 말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영원한 상을 잃게 된다면 이 세상에서의 특권들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이 영원한 가치관에 의지하여 자기의 삶을 조절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상을 얻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절제해야 합니다. 더 높은 목적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의 권리를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승자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사역 자체에 보람을 느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얼마나 영광스러운 특권입니까? 그 자체가 감격이고 보람입니다. 바울은 이 감격과 보람을 알기에 버림이 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조금 힘들어도 마지막에 주 앞에 승자로 설 수 있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본보기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주님, 철저한 신앙생활로 면류관을 소망하는 성도가 되게 하소서. 아멘

 

 

7.

날마다 믿음으로

고린도전서 10: 1∼13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 11)

 

<카게무샤>라는 일본영화가 있습니다. 한국말로는 ‘그림자 장수’라고 번역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 전국시대에 열도의 패권을 다투던 장수 ‘다케다 신겐’이 죽자, 다케다 가문의 무사들은 그의 죽음을 은폐하고자 다케다와 닮은 한 불량배를 등장시킵니다. 가짜 다케다를 중심으로 힘이 결집됩니다. 적군들은 가짜 다케다를 무서워했고, 내부에서도 이 그림자 장수를 정점으로 다양한 권력이 모아졌습니다. 그러나 다케다가, 진짜가 아닌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모든 것이 끝장난다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입니다. 결국 가짜는 드러나게 됩니다. 성도의 삶 역시, 사람은 속일 수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온전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실하고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라고 가르쳐줍니다.

 

유대인들은 애굽에서 구원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신령한 음료를 마시는 복을 누렸지만,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지 못해 멸망당했습니다. 바울은 성도라 하더라도 이와 같이 죄에 빠질 위험이 있으므로 첫째, ‘육욕적인 것들을 피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육욕은 즐길수록 고개를 들기 때문에, 시초에 억제해야 합니다. 이 경고가 맨 앞에 등장한 것은 그것이 많은 죄의 뿌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상숭배를 피해야 하며, 셋째, ‘간음’의 죄를 피해야 하고, 넷째, 주를 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섯째, ‘원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원망은 주의 명령과 처분에 대항하는 불신앙과 배교가 될 수 있는 무서운 죄입니다. 성도가 받은 은혜는, 죄를 지어도 된다는 허용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하고 영광을 돌려야 하는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지나친 자신감을 경계하고, 경건한 자세로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격려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주의해야 합니다. 항상 나도 시험받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는 시험에서의 승리를 믿어야 합니다. 누구나 시험받을 수 있지만, 모두가 승리를 믿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차피 나는 실패할 것이다’라고 패배를 확신하면서 살아갑니다. 믿음으로 이스라엘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습니다. 또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습니다. 홍해에서 여리고까지 40년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처음 홍해를 건넜을 때도 믿음으로 그리고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도 믿음으로 행했지만, 그 중간인 40년 동안에는 ‘믿음으로’라는 말이 없습니다. 40년 동안은 불신앙의 모습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불신앙의 결과는 기나긴 방황의 40년이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날마다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하나님, 성경의 말씀을 영의 거울을 보듯 지금의 시험을 이기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