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간의 치유 개벽 기도회

\"7일간의 치유 새벽기도회\"|새벽설교
 

1.병들었을 때

약5:14-16

 

누구나 병들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병에 걸려 고생하게 될 때가 있다. 이럴 때마다 어떻게 하여 병을 벗어 날 수 있을까 생각하고, 낫기 위해 힘쓴다. 더욱이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었을 때 어떻게 할까를 골돌히 생각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세 가지 취할 길을 말씀해 주고 있다.

1. 도덕적인 이유를 살펴보라고 한다.

죄를 서로 고하고자 그것이다. 병들었을 때 무엇보다 먼저 하여야 할 일은 도덕적인 이유를 생각해 내는 것이다. 내 병은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몸을 너무 부주의하게 다룸에서 온 것이나 아닌가? …과식했기 때문에 온 것은 아닌가? 어떤 죄로 인해 온 것 아닌가?를 살펴볼 것이다. 만일 과식해서 온 병이라면 굶어 나을 수 있고, 부주의로 온 것이면 주의 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2. 약쓸 일이 있으면 약을 쓰라고 한다.

기름을 바르고가 그것이다. 그런데 신유를 주창하는 이들은 약쓰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약쓰는 교직자나 신자는 믿음 없는 것으로 돌려버리려는 이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성경은 약을 금하지 않을뿐더러 쓰라는 것이다. 본문이 그것이고, 막6:13절에 보면 제자들이 썼음과 마9:12절에 주님의 말씀 하신 바도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3. 기도하라고 하신다.

약이면 다되는 줄 아는 이가 있다. 그러나 약을 내신이와, 효험 있게도 없게도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병든 이가 있는가? 기도할 것이다. 병으로 고생하는 이를 보는가? 위해 기도할 것이다. 이 아침은 병들어 고생하는 교우들을 위해 기도하는 아침이 되자.

- 우찌무라 간조 - <설교>

 

 

2.예수님의 고치심

막1:30

 

-병자와 병자 있는 가정 위한 설교 -

이 성경 구절에 의해, 주의 사도가 된 어부의 모옥을 별견하는 것은 흥미 깊은 일이다. 우리에게 곧 느껴지는 것은 가정의 환희나 근심 걱정이 조금도 전도의 방해가 되지 않고, 아니 오히려 주의 은혜 있는 성업을 제 골육에게 친히 증거하는 기회를 주고, 달리 없는 귀한 훈련을 전도자에게 준다는 것이다. 천주교도나 어떤 불교도는 결혼을 마지막, 참된 기독교와 가정 생활과는 매우 친목한 것이다. 베드로의 집이라면 모름지기 가난한 어부의 모옥이었으리리라. 그러나 영광의 주께서 친히 그 집에 들어가, 유하시고, 이적을 행하셨던 것이다. 모옥이나 초막에 사는 형제여! (만일 이소책자를 오늘 아침 어느 모옥에서 읽고 있는 분이 있다면) 이상의 사실에 힘을 얻어 가족으로 하여금 왕되신에 예수의 임하심을 기도하도록 하기를 바란다. 신은 화려한 궁궐보다도 쓸쓸한 살림집에 더 많이 향하신다. 예수는 지금 여러분의 집안을 둘러 보시며, 여러분의 요구가 어떠한가를 기다리시고 있는 것이다. 시몬의 집에 열병이 찾아와 그의 장모를 중태에 빠지게 했다. 그 곳에 예수가 오셨으므로 사람들은 그에게 참사를 아뢰었다. 예수께서는 곧 환자의 베개머리로 급히 가셨다.

오늘 아침 여러분의 가정에 병자가 있는가? 여러분은 예수에게서 희대의 명의이심을 알 때가 된 것이다. 곧 예수께로 가서 사정의 일체를 아뢰라.

예수의 백성 중 한 사람이 앓고 있다는 것은 예수로 볼 때 결코 사소한 일은 아니다. 주께서 곧 병부를 고쳤다고 하는 것에 주의하라. 그와 같은 명의는 달리 예가 없다. 우리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의 만병일체를 주께서 곧 고쳐 주신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병인을 위한 신앙 깊은 기도는 반드시 세상 모든 것보다 낫게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령 병이 낫지를 않는대도 생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온유하게 복종치 않으면 안된다. 인자하신 예수님의 마음은 우리가 슬퍼함을 아뢰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는 주님의 인내 있는 귀에 일체를 아뢰어보자.

- 스펄전

 

3.주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막1:41

-병자 위한 설교 -

 

태초에 어두움은 전능주께서 빛이 있으라는 명하심을 듣고, 빛은 곧 생겨졌는데, 주 예수님의 말씀도 또한 그 권위에 있어 원시의 힘있는 말씀과 다름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면 곧 되는 것이다. 인력으로 고칠 수 없는 나병도 주께서 내가 하고자 한다 말씀하시매 즉석에서 근치되었다. 전쾌를 바랄 수도 없고 그런 징조 조차도 없던 난치병으로 손 닿는 한 힘 썼으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던 것인데, 주님은 한 마디 말씀으로서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근본부터 고쳐 주신 것이다.

죄인은 나병인 보다도 더 두려운 병독(病毒)을 갖고 있는 자이다. 이제 그의 본을 따라 예수께로 가서 무릎 꿇고 청하라. 신앙이 부족하면 그것도 좋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의 정도의 것도 좋다. 그 기도의 결과에 대해서는 다시 더 말하지 않아도 되리라. 예수는 찾는 자의 모두를 고치시고, 결코 헛걸음 걷게 안 하신다. 이 아침의 성경 구절의 전후를 읽을 때 예수께서 나병자에게 손 대셨다는 말씀을 주의하기 바란다.

이 상한 천형병(天刑病)자는 율법의 금함을 무릅쓰고 인가(人家)중에 달려 온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을 방패막이로 삼아 그를 멀리하려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진해 나가신 것이다. 순결하신 그가 몸소 나병자에게 접촉하심으로서 레위의 법 앞에 나병자로 되신 것이다. 그는 이때의 마음으로서, 스스로 죄를 알지 못하시는 죄를 옷입으시고, 하나님 앞에 우리를 의롭게 하신 것이다. 아! 가련한 죄인들이여! 예수님의 존귀하신 속죄의 능력을 믿고 그를 찾으라. 그렇게 하면 그의 은혜 깊은 접촉의 능력을 곧 알 수 있으리라. 그의 손은 떡을 붓게 하시고, 빠져 죽게된 베드로를 건지시고, 번뇌하는 성도를 도우시고, 이제 또한 신자에게 영광을 주려하신다.

예수님의 사랑은 구원의 근원이시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바라보시며, 성수를 내밀어 주신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는 것이다.

주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문제는 해결이다. 병자와 그 있는 가정이여, 그리고 죄인들이여, 이 아침 주의 도우심을 기도하라.

- 스펄전 -

 

 

4. 신체의 복음

빌3:21

 

하나님은 은혜와 인자하심이 풍성하시어 그의 모든 자녀를 사랑하신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의 전영, 전생, 전신에 관한 온전한 구속을 행하시었다. 그는 영혼에 있어서와 같이 우리의 신체의 적은 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다 그 구속에 들지 않음이 없이 하셨다. 마치 이는 옛날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하여 내실 때, 모세가 바로에게 \'우리의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출10:26)\' 라고 고한 것과 같은 온전한 구속인 것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은 진실로 완전하신 구원을 갖추신 것이다.

할렐루야.

그런데 신체에 관한 복음이란 무엇인가? 이제 이것을 세 방면으로 구별하여 그 은혜를 소개하자.

1. 육체의 성결.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7:1-)\'.

이는 육체에 관한 도덕적 구원이다. 시조 아담이 타락한 이후 우리 인류의 육체에는 하나님이 부여치 않은 자력으로서 절제하기 어려운 일종의 불규칙한 기욕이 있다. 특히 다수의 사람 사람은 술, 담배, 아편, 몰핀 그밖에 모두 몸을 더럽히고, 원기를 꺼버리는 기욕이 있어, 이들의 노예가 되어, 고민하고 있는데 신체의 복음은, 이들 인력으로서 금제하기 어려운 기욕에 종국을 가져오게 하고, 온전히 깨끗케 한다는 호보이다. 즉 주 예수의 피와 성령의 힘에 신뢰하면, 이들의 기욕에 온전히 쳐 이길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신체는 정의의 그릇이 되고, 또한 성령의 전 으로서 적합한 자가 되며, 거룩한 하나님과 금슬 같은 조화를 가지면서, 임마누엘의 생애를 보낼 수가 있는 것이다.

2. 육체의 의유(醫儒).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좇아 내시고 병든자를 다 고치시니\'.(마8:16).

주 예수님은 우리의 신체를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자유스런 가운데 있게 하시려고, 불쌍히도 병마에 괴로움을 당하는 이들에게 의유의 복음을 들려 주신다. 주님의 고치심은 영혼의 구원과 구별할 것이 아니다. 주님은 항상 양방면을 겸해 일하셨다. 그 주님은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변치 않으신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어떠한 순서로써 사람들을 고치시는가하면, 먼저 사람들의 산 신앙을 통하여, 피와 성령에 의해, 내부의 영혼에 은혜를 주시고, 다음 외부 자체에 미치시게 하는 것이다. 의유에 대한 신앙은 결코 미신이 아니다. 이는 구 신약을 일관하여 명시 되어 있는 진리이다.

특히 주님은 자신이 구약의 예언에 응한 메시야인 증거로서 도처에서 병자를 고치실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병자를 고치는 힘을 주신 것이다. 그러한 기사는 사복음서를 보면 거의 매 페이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주님의 병 고치신 내용에는 놀랠 만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들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즉 주님은 얼마나 깊고 두려운 동정을 우리의 몸위에 내리시고 있는 가를 알 수가 있다. 주님은 기력 없이 얼굴이 초최하고, 마음 가운데 고민으로 찬 병인에 대해, 실로 만강의 동정으로써 돌아보시고 계시는 것이다. 병고치심의 복음은 이러한 호소식이다….

3. 신체의 영화.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1)\'.

우리의 육신은 현상을 영원히 보존하여 계속하는 것은 아니다. 주예수님의 재림시 홀연히 영화되어 썩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는 영광의 영체가 되는 것이다. 고전15:54로 될 것이다….

- 사사오데쯔 사브로 -

이 얼마나 좋은 신체에 대한 복음인가? 감사를 드리자.

 

 

5. 기도와 병고침

약5:15-

기도에 있어서 이 중대한 면에 관한 진리는 다음 네 가지로 생각함이 옳은 줄 안다. 하나님께서 병을 고치실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병을 고치신

이 있는가?

언제나 병을 고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하나님께서 병을 고치실 때에 어떠한 방법을 쓰시는가?

1. 먼저 하나님께서 병을 고치실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여기에 대해서는 길게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한 마디로 대답할 수 있다. 우리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만일 병을 고치심이 당신의 뜻이라면, 사람을 지으실 때와 마찬가지로 쉽게 병을 고치실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으니, 신자로서 여기에 대하여 다른 의견이 있을 수가 없다.

2. 하나님께서 병을 고치신 일이 있는가? 없다. 우리는 성경을 보아서,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병자를 고치신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참고; 예수님의 병 고치신 일들 - 마8:2-4 8:5-13; 9:2-8; 9:18-26; 9:27-34; 12:9-14; 12:22-45; 14:34-36; 15:29-31; 20:29-34; 막8:22-26 눅 17:11-19.

그리고 이 능력의 역사는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만 있던 사실이 아니고, 세상을 떠나신 후로 이때까지 그러한 역사를 하시고 계신 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전에나 이제나 다름이 없이, 능력의 역사를 하심은, 이 사실을 부인하려고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로 보고 믿게 하기 위하심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 중요한 문제는 다음에 나오는 것일 것이다.

3. 언제나 병을 고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신자 중에는 이 문제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긍정하려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열렬히 주장하기를 모든 병을 고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병이 난 것을 못 고치는 것은 그 믿음이 부족하여 이를 잘 이용하지 못하는 까닭이며, 누구나 병을 고쳐주실 것을 진실히 믿고 주님께 간구하면 어떠한 병이나 다 고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상은 가장 중요하고, 다소라도 경솔히 취급할 문제가 못되므로 가장 신중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신유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첫째로 병을 고침은 속죄에 관한 일이라 한다. 우리가 영적 구원을 얻는 것은 속죄하심으로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대 뿐 아니라, 장차 임할 천년왕국 시대에도 이루어 진다는 사실이다. 그런즉 하나님의 자녀가 모든 질병에서 고침을 받는 그것만이 구원이고 장차 임할 세상 곧 예루살렘의 거민들이(천년 왕국 시대의 거민들)내가 병들었노라고 다시 말하지 아니할 시대에는 구원이 없다함은 이해하지 못할 말이다. 구속에는 많은 은혜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나 기쁨만 누릴 수 있는 시대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속죄 하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때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세가 아니라, 주님께서 강림하신 후에 이루어질 것이다. 또한 이 신유론자들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위하여 저주함을 받으셨은즉, 우리는 병이나 그 밖의 모든 법의 저주에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법의 모든 저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은, 땅 위의 저주는 주께서 오시기 전에 결코 없어지지 않는 것을 보아서 확실히 증명된다.

또한 우리는 롬8:19-23을 보아 모든 피조물이 이 종노릇을 하는데서 탄식하며, 그 종살이에서 벗어나는 다른 시대를 바라고 있음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속죄에 속하는 모든 기쁨을 이 시대에서 다 얻으려고 할 수 없으며, 동시대에 주님의 속죄에 속하는 질병에 대한 전반적인 면제를 주장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질병은 사단이 하는 장난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많이 하는 말이다. 사단의 하는 장난을 없이 하려는 것이 어찌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질병 뿐 아니라, 세상에는 사단에 속하는 일이 너무 많으나 주님이 오시기까지는 그대로 두시는 일이 많다는 사실이다. 가령 사망이 사단에게 속하는 것이지만, 주님이 오시기까지는, 그대로 두시는 것이다.

또한 슬픔과 고통도 사단에 속한 것이나, 얼마 동안은 하나님께서 그대로 용납하신다. 유혹도 또한 분명히 사단의 것이로되, 아직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이 유혹을 받기를 용납하신다. 이와 같이 질병도 우리의 몸을 해치려는 사단의 장난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용납하실 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진실한 종 욥을 사단이 해친 일을 용납하셨던 것이다. 또한 바둘의 육체의 가시는 사단의 사자였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없이 하지 않으셨다.

또한 병을 고치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보아서도 분명한 것이다. 첫째로 신자인 우리들이 당하는 경험으로 보아서 알 수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살펴 볼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를 연단하시고, 정결케 하시기 위하여 육체적 고통을 이용하시며, 당신의 사랑과 자녀의 연단을 다 이루실 때까지 고통을 그대로 두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장 신실한 성자들의 생활을 살펴볼 때 이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병고침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연고라고만 생각할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은 고통 당하는 생애의 성스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나 가질 수 있는 생각이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이에 대한 교훈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

여기에 보면 믿음으로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한 사람들과, 일반으로 하나님의 능력의 손으로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 대하여 기록되어 있고, 그 반면에 악형을 받았으며,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은 사람들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두 가지의 사람들의 다른 것이 무엇일까? 하나는 믿음이 있고, 한 부류의 사람은 믿음이 없었던 탓일까?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성경에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다고 하셨다. 그들은 다 하나님께 대하여 조금도 다름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뜻이 달랐기 때문이다…. 병자에 있어서도 매한가지다.

우리가 분명히 알기는, 이는 그들에게 믿음이 부족하여, 병을 고쳐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고, 병을 고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인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병을 고치는 것이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 성경에 이에 대한 말씀이 없는 것을 보아서도 알수 있다. 대다수의 사람이 주장하는대로 만일 모든 사람이 병고침을 받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고, 병고침을 받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한 탓이라 하면, 그러한 놀랍고도 중대한 진리가, 성경 특히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특별한 광명과 교훈을 주시는 여러 사도들이 기록한 서신 중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이 이상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어느 서신을 읽어 보더라도 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마태복음 8장 16-17절에 예수께서 \'병든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라는 말씀이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세에 관해서 말씀한것이라 하기보다도 모든 병과 연약함이 다 물러가는 내세에 관한 전조를 말씀한 것인 듯하다.

디모데후서 4장 20절을 보면 드로비모는 병이 들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를 밀레모에 머물러 있게 하였고, 바울 자신도 고린도후서 12장 7-9절까지 보면 분명히 고치지 못하고 연약함으로 고생당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구하는 대로 질병과 연약함을 다 고침을 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어째서 바울과 같은 분이나, 그밖의 다른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이, 질병과 연약함으로 고생 당할 리가 있으랴.

이와 같이 사도들의 서신이 모든 병을 고침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점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기록한 바 없지마는 야고보서 5장 15절을 보면 이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이 어떠하시다는 것이, 분명하고도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즉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 이는 분명히 병은 기도의 힘이 미치는 범위 안에 든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에 일어나는 어떠한 일에 대해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해야 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병이 들었을 때에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기도해야 된다.

그러므로 병이 났을 때에도, 이것을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로 가져가면, 다른 어떠한 사건을 가져갈 때나 꼭 마찬가지의 조건과 법칙으로 하나님께서 이를 처리하신다. 그런데 가장 중요하고 변할 수 없는 기도의 법칙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때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함을 들으시고 허락하여 주시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야고보서에 있는 말씀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깨닫게 된다. 즉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믿음의 기도란 무엇이냐? 이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힘쓰지도 않고, 어렵고 급한 일이니 하나님께서 행하여 줍시사고, 기도하는 것은 큰 믿음이 아니다. 참으로 위대한 믿음이란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힘쓰고, 그 뜻에 내어 맡기는 것이다…. 그런즉 병고치는 문제에 대하여, 가장 중요한 진리는 하나님의 주권, 곧 모든 일을 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사실이다.

4. 하나님께서 병을 고치실 때에 어떠한 수단을 쓰시는가? 이 점에 대하여 잘못을 범하는 신자를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즉 하나는 하나님께만 맡기고, 정당한 수단을 무시하는 신자들이고, 또 한 부류는 수단에만 의지하고, 하나님을 제외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이 두 부류의 신자를 차례로 생각하여 보자.

1) 하나님께만 맡기고, 정당한 수단을 무시하는 신자들. 이 병고치는 일에 대하여 두 가지 원칙을 세울수 있다.

첫째로는 병고치는 형태에 셋이 있다는 것이다. 곧 초자연적, 자연적, 및 치료적인 세 가지이다.

초자연적 형태, 이것은 말 자체가 그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어떠한 수단을 쓰시지 않고, 자기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병든 사람을 직접 고쳐 주시는 것이다.

자연적 형태, 이것은 휴양, 수면, 자양분이 많은 음식물, 좋은 환경으로 전환하는 일, 건강을 해친 범죄로 말미암아 자연법칙을 거스리는 일을 그치는 것, 또한 잃었던 건강을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 좋은 습관을 만드는 일과 같은, 모든 조건을 이용하여 건강을 회복되게 하는 형태이다.

치료적 형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하여 내과이든 외과이든 치료법을 사용하여 병을 고치는 것을 말한다.

둘째의 원칙은 모든 치료는 신유 즉 하나님께서만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이다. 약품이나 치료법 자체가 병을 고치는 것이라고 말할 의사는 없을 것이다. 약품이나 치료법은 사람의 병을 낫게하는 생명력에게 한 수단으로서 제공되어, 병을 고치는 매개물의 구실은 하지만, 이것들이 병 자체를 고치는 것은 아니다. 그런즉 모든 생명의 배후에는 생명의 하나님이 계셔서 홀로 병을 고치시는 것이다. 이는 생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만 그 생명이 해쳐졌을 때에, 이를 회복시키고, 새롭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병이 고쳐지는 형태가, 초자연적이거나, 자연 적이거나, 또는 치료적이거나 간에, 그 모든 것 배후에 계시며, 이 모든 형태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병을 고치시는 모든 형태의 배후에 계셔서 이를 이용하시는 것이니까, 그 중의 어느 형태를 이용하실지,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병을 고치는데 어떤 수단을 쓰고 안 쓰는 것을 결정하는 일은 병자된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 의사되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나는 수단을 쓰지 않겠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곧 나는 순종하지 않겠노라고, 말하는 자가 될가 두렵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의지하기만 하고, 어떠한 수단이든지 다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을 초자연적인 하나님으로만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된다. 하나님은 그러한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러면 우리는 대체 무엇을 해야 될까? 우리가 할 일은 간단하다. 가령 우리가 기도하는 중에, 병을 고치심이 하나님의 뜻이 라는 확신을 얻었다 하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키실 일이 무엇인지, 성령으로 나타내어 주실 때까지 하나님께 기도하며 교통하는 중에 기다릴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이나 어떠한 수단을 개입시킬 수 없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구해 주실 것을 확신시켜 주신다면, 그대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며, 어떠한 인간적인 수단이나 방법을 써서, 구해주시겠다고 확신시켜 주시면, 그대로 받아들여 초자연적 방법을 사용하시겠다는 때와 꼭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방법으로 역사하실 것을 믿고, 그대로 순종할 것이다.

어느 방법을 쓰시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실 것이다. 우리로서는 다만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할 것 뿐이다. 우리가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계시하여 주시는 바에 근거하여 기대를 두고 있다면, 조금도 실망할 까닭이 없다.

2) 수단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 수단만을 의지하는 것이 어째서 잘못인가? 어째서 우리가 병을 났을 때에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는가?

첫째로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이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오. 즐거워 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즐거워하는 자가 찬송을 불러야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병든 자나 고난을 당하고 있는 자는, 기도하여야 한다. 몸은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신다. 그런고로 몸에 관한 모든 일을 기도로써 하나님께 아뢰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요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첫 걸음이며,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 하신 명령을 지키는 것이다.

둘째로는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며,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인 즉 마땅히 조심하여 다루어야 한다. 그런데 신자 중에는 그 몸을 함부로 다루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우리의 몸에 대하여 마땅히 지켜야 할 법을 날마다 범하고 있다. 우리는 살기 위하여 먹는다는 것 보다도 먹기 위하여 살고 있으며, 때로는 과도히 일만하며, 휴식을 할 줄 모르며, 때로는 몸 때문에 너무 초조해 하며, 조바심하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을 놀라웁게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학대한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자와 병든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전 11:30-)\' 우리가 병에 걸리는 대부분의 원인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의 몸을 함부로 다루는데 있으며, 자연법칙을 위반하는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몸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시기 원하는 것인즉, 우리는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순종하는 중에, 거룩되히 행동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병이 났을 때는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로 나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교훈을 깨달아 알고, 배우고, 순종하며, 또한 우리의 육체나 영혼에 있어서, 주님을 경외하는 중에, 거룩함을 완전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셋째로는 병고침을 받기 위해서이다. 병이 났을 때에 수단만에 의하여 병을 고치려 들고, 기도를 하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사람은, 그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을 잃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곧 병고침을 받는 이적을 놓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어디있는지 우리는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수단을 쓰실지, 또는 초자연적 방법을 이용하실지는 우리가 이미 말한대로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병을 낫게 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아는 방법은 기도하는 일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에서 이 점을 매우 등한시 한다. 신유에 관한 잘못된 교훈으로 인하여, 극단으로 흘러서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병고치시는 능력을 전연 거부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예나 이제나 변함 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도 전능하시고, 오늘 날도 전능하신 이상, 하나님의 이적도 예나 이제나 변함없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신자 중에 하나님께서 초자연적 능력으로 병을 고치심을 업신여기는 사람이 많음은, 분명히 믿음이 쇠퇴되어 가는 표시라 아니할 수 없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과거 어느 때나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의 역사가 필요하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 신자들의 믿음이 강하여 지며, 또한 불신자 사회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증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신자들이 병이 낫을 때, 또는 병자를 위하여 언제나 하나님께 간구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역사가 나타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보내게 될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만 의지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전연 무시하는 것이 잘못이라면, 인간적인 방법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무시하는 것도 또한 잘못이다. 이는 전자는 하나님을 초자연적인 방법만 쓰실 수 있는 분이라 생각하는 것이요, 후자는 하나님을 자연적인 방법만 이용하실 수 있는 분으로, 국한시키는 것이다. 이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자연적인 방법으로만 역사하신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주장하기를, 하나님께서 자연적인 방법만에 의하여 역사하신다고 한다. 이 사람은 방법만을 알고, 그 방법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의 교훈이 잘못된 탓으로 신유에 관한 하나님의 교훈을 무시하면, 우리의 생활로부터 무한한 축복을 잃어버리고 말게 되는 것이며, 이는 또한 덫에 걸리는 셈이니, 이 덫은 곧 우리의 심령의 원수인 사단이 놓은 것이다.

- J. 매카나기 -

 

6. 영육 고통의 원인

잠15:17,시64:3-8

 

영과 육을 고통케 하는 근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원한이라는 것이다. 어느 목사의 부인이 시모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 시모는 자기 아들의 결혼에 진정한 동의를 하지 않았다. 그는 그 부처와 함께 살며, 또 밤 열 한시까지 그들의 방에 머물러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두 젊은 사람은 자기들 끼리만 있을 시간이 별로 없었다. 아내 되는 사람은 십년 동안이나 밤마다 울다가 잠이들곤 하였다. 이 여인은 숨은 원한이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범죄 의식이 있었다. 그 원한과 범죄 의식은 저를 쇠약하게 만들어 출혈증과 뇌일혈이 발생케 했다. 후에 그 원인을 알아내어 그 전부를 하나님께 맡긴 후에 그는 자유함을 얻어 유쾌한 생활을 보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있다. 어느 여인이 딸 하나를 데리고 있었는데, 그 딸이 유태인계의 한 남자와 연애를 한 뒤로는 그 효성스럽던 딸이 냉정하고 담배를 몹시 피우는 여자로 변하였다. 그 어머니는 실망, 분노, 원한을 느끼었다. 그 어머니는 고백하기를 \"나는 내 딸의 주위에서 심리적 열등감을 느끼는 동시에 신체적 질병에 걸립니다\"라고 하였다. 그 여인은 원한과 분노와 자기 연민으로 인하여 즐거움과 건강을 유린 당했던 것이다. 이 어머니의 반응이 원한의 심정으로 나갈수록, 그에게 대한 딸의 애정과 관심은 더 줄어졌으니, 곧 자멸이었던 것이다. 원한은 그것이 정당하든지, 부당하든지 간에 원한은 자신을 파괴시킨다. 다른 사람을 해칠 줄 생각하지만 원한은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보다 자신을 훨씬 더 많이 해한다. 곧 원한과 미움은 자신에 대한 일종의 범행이다. 원한은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범행이 된다. 증오로써 다른 사람을 교정할 줄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두 증오는 결단코 한 개의 사랑스러운 일을 만들지 못하며, 사단이 능히 사단을 몰아낼 수 없다. 악마와 같이 행동함으로써 어찌 악마를 사람에게서 좇아 낼 수 있겠는가? 악마는 오히려 더 든든하게 자리를 잡을 것이다.

나는 인도에서 원숭이들이 싸우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일정한 절차를 밟아서 싸운다. 처음에 온 원숭이들이 상당한 간격을 두고 서로 향하여 얼굴을 찌프린다. 가까워질수록 저희들의 얼굴은 더욱 험상스러워지며, 서로 가까워지면 이빨을 드러내고, 서로 향하여 달려 들면서 맹렬하게 으르렁거린다. 이빨을 버리고 험상스러운 얼굴로 아주 가까이 달려들어 싸우다가 한 놈이 상대편을 뛰어 넘어서 물고 핥는다. 내가 이 이야기에 대하여 트루맨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의견을 진술하였다. \"대통령 각하, 우리나라도 지금 이와 같은 형편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소련과 이런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두 나라는 서로 무서워 이빨을 드러내고 우리를 다른 편으로 몰아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가는 결국 전쟁을 일으키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국가나 단체나 개인이고 간에 미움으로 미움을 좇아 내려고 하는 방법은 완전히 잘 못이다. 목적하는 바에 맞지 않는다. 미움을 좇아 내는 오직 한 방도가 있으니, 그것은 사랑이다. 그런즉 우리 마음 속에 이것을 굳게 명심하자.

- 스탠리·존즈- <원한>

7. 생각과 건강

시31:9,사44:7

오늘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얻게 되는 면 곧 건강을 긍정하게 되는데 대하여 생각하여 보기로 하자. 다만 긍정한다고 해서 모든 사악과 질병이 없어진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어떤 질병은 신체 조직에서 난 것이므로 그것에 대하여 마음이 변화된다 하여 그 사실 자체가 변경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신이 신체와 건강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 말이 이에 그친지라 나 다니엘은 중심이 번민하였으며 내 낯빛이 변하였으나 내가 이 일을 마음에 감추었느니라(단7:28-)\'. \'이에 나 다니엘이 혼절하여 수일을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내가 그 이상을 인하여 놀랐고 그 뜻을 깨닫는 사람도 없었느니라(단8:27-)\'.

\'이에 나 다니엘이 혼절하여 수일을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내가 그 이상을 인하여 놀랐고 그 뜻을 깨닫는 사람도 없었느니라(단8:27-)\'. \'내 몸에 힘이 없어졌고 호흡이 남지 아니하였사오니(단10:17-).

이것을 보아 건강한 신체를 가진 다니엘이, 그의 생각으로 인하여, 그 신체에 혼란을 일으킨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으로 자신을 병중으로 끌어넣을 수 있고, 또 우리의 생각으로 자신을 그 병중에서 끌어낼 수도 있다.

우리가 우리의 질병에 대하여 늘 이야기하려면 이야기할 질병이 얼마든지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아프지 않은 여자라도 스스로 앓는 줄로 생각하는 그 때에 몹시 앓게 된다\"고 하였다. 누구든지 자기가 병들거나 기운이 없어진 사람으로 생각하면, 그 질병의 대상이 될 것이요, 건강을 생각하고, 건강한 줄로 확신하는 때에는 건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가끔 이런 경험을 한다. 차에서 내릴 때에 짐 나르는 사람이 없으면, 아주 무거운 짐을 가지고 내리게 되는데, 이런 때는 무거운 짐을 머리 위로 뻔쩍 들어 올리고 늠늠하게 내리리라 생각한다. 그러면 사실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짐을 운반할 수 있다. 그러면 이것이 자기 감응일까? 물론 그렇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에게 암시를 받는다. 이에 의하여 승리 혹은 실패하며, 건강 혹은 병약하게 된다. 어찌 파괴적인 것 대신에 건설적인 것을 암시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가 우리의 신체의 각 기관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면, 그 기관들은 건강함을 보이노라고 얼굴빛이 붉어지고 그 붉어진 것이 혈관을 통하여 건강하게 하는 피를 보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기관들이 약하다 생각하면, 공포로 인하여 얼굴빛이 창백하여져서 피가 없는 기관들은 결국 혈액의 부족으로 인하여 병이 들게 될 것이다.

우리는 건설적인 생각을 갖도록 힘쓸 것이다.

- 스탠리·존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