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동산교회 전도전략
김인중목사(안산 동산교회)
제 1 강 효과적인 전도 사역법(상)
서론
목회가 부흥만 되면 강한 힘이 생깁니다. 목사의 힘, 보람, 기쁨, 희망은 5명으로 시작해서 30명이 되고, 30명으로 시작해서 100명이 되는 이런 부흥에 있다고 봅니다. 저는 안산에서 목회를 하는데, 안산에는 인구는 3만이고, 교회가 850개 교회가 있습니다. 850개라는 숫자는 집에서 개척하는 교회 숫자를 제외한 숫자인데, 이렇게 개척을 하고 있는 교회도 상당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23년 전에 신학교 졸업을 하고 안산에서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강도사 고시10일 전에 이사를 가서 가족 3명이 개척을 시작하였습니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아파트 그림자도 볼 수 없는 동네였습니다. 그곳은 공단조성계획이 발표된 곳으로, 반월 공사무소 옆에 원곡동 성광교회 주변을 정리하여 최초의 이주단지 250가정을 강제 이주시킨 원곡동이었습니다. 거기에 이주단지로 27평 국민주택을 지어서 이주시킨 안산의 유일한 최초의 마을이었습니다. 나머지는 원주민들이 드문드문 20호, 30호씩 떨어져 있었습니다.이 최초의 동네에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속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개척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김인중 목사의 어린 시절
제가 서울대학교 나왔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부자여서 공부를 잘 시켰는가보다라고 오해를 하는데, 저는 안 해 본 고생이 없습니다. 효과적인 전도를 하려면 고생을 많이 해 본 사람이 그 가능성도 많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11남매 중에 10번째의 불신가정 중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는 48년생이인데, 몸은 참 가볍습니다. 50년 초 제가 3살 때 어머니는 누이동생을 나은지 3개월만에 다리가 아파서 우리형이 업고 40리 길을 걸어 영등포 병원에 갔는데, 멀쩡했던 어머니가 벙원에서 나올 때는 오른쪽 허벅지를 절단했도, 3개월 뒤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6.25가 일어났지만 우리 식구는 모두 무사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부인이 없으니까 마음을 못 잡고 투전판과 술로 방황을 하였습니다. 남편, 사모의 자리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누나는 시집을 가고 저희 형제 9명이서 살았는데 아버지의 무관심으로 영양실조로 형제 6남매가 죽고 3명만 남았고, 제일 위에 형은 중학교 2학년 중퇴, 그 밑에 형은 초등학교 중퇴… 어느 날 보니 형제들이 다 없어지고 저만 남게 되었습니다. 동네 어른이 \'너희 아버지가 소사에 살고 있다\'고 하여 찾아갔는데 어느 분과 동거를 하고 있었고, 생전 처음 보는 분을 엄마라 부르며 살게 되었습니다. 재산은 노름으로 다 날려버리고 셋방을 얻어서 사는데 연탄 살 돈이 없어서 나무하러 다니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가정의 책임감과 살 의욕이 잃어버리셔서 새엄마가 생활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아주 원망스러웠지요. 이렇게 어려운 가정에서 살다가 제 인생의 가장 큰 변화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찾아왔습니다. 4학년 여름성경학교 때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가게 되었는데, 150명이 마루바닥에 모여 율동하고 노래하고 했으나 처음 듣는 노래 내용이 재미가 없었습니다. 설교는 구원과 부활에 관한 것이었는데, 속으로 \"뻥치네\"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여러분 개척교회를 하시면서 설교를 할 때 분명 나와 같이 말씀에 의심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혀 믿기지 않는 데다가 분반공부는 더 지루했습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다시는 오지 않으려고 결심을 했는데, 교회 문을 나가는데 복숭아를 줘서 내일 또 와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나가게 되니까 우등상, 암송상.... 등 가난한 나에게 공짜로 생기는 것이 많았습니다. 중학교 때는 여학생 때문에 열심히 다녔으나 여전히 믿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집안이 밑바닥으로 내려가 고등학교를 못 갔습니다. 그때 \'내가 우리 부모님이 믿어서는 살 수 없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고 그때부터 신문을 돌리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석간 신문을 돌려도 월급을 안주고... 600원씩의 월급도 못 받게 되었습니다. 신문 값 때문에 세상이 악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인생을 많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신문 값을 다 수금해서 월급을 다 받고 인수인계 안하고 그만 두었는데, 목사안수 받을 때 이 일에 대해 제일 먼저 회개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월급 몇 만원만 더 준다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핑계되고 섬기던 개척교회를 버리고 과감하게 버리고 떠나는 분이 있습니다. 교인들은 가지 말라고 애원을 하는데도 과감히 떠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파트 앞에서 개척한다고 다 부흥됩니까? 그러나 아파트 중앙에서 개척해도 실패하고 나가는 사람들 수없이 봤습니다. 여러분 아파트가 많고 집이 많다고 다 부흥되고, 반대로 단독주택이고 사람이 없다고 실패합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믿고 개척하고 목양을 하면 평생 20명 목회했다고 할찌라도 마지막 날에 잘하였다고 칭찬과 면류관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5천명을 목회할찌라도 재주 피워 가고, 학군 따라 가서 목회를 하고 무사히 목회를 마쳤다면 나중에 책망 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원하시는 곳에 가서 5명이든 30명든 300명이든 상관하지 말고 죽도록 그 양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고 성숙한 일꾼으로 기른다는 뜻으로 목회를 해야 합니다.
제2의 전환기
저는 집에서 신학교 간다고 했을 때 쫓겨났습니다.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라 돈이 없어서 돈이 제일 싼 국립대학인 서울대를 갔습니다. 하여간 신문돌리고, 복숭아 장사하고, 노동하고, 아르바이트 등 살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습니다. 처음 서울대학교 시험 쳤다가 떨어졌습니다. 1년 재수하는 동안 양계장에 취직을 해서 양계장 도둑 보초 서면서 밤에 공부를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옆의 친구 상호가 교회를 잘 인도해줬고,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양계장 취직해서 난지도의 성암 개척교회 황종호 목사님을 만난 것이 나의 인생의 두 번째 전환기였습니다. 그 목사님이 내가 재수한 것을 알고 \"김 선생 정말 대학에 가고 싶으면 내일부터 새벽기도 나오게\"처음에는 \'이러니까 교회가 부흥이 안되지\' 했는데, \'설마 목사님이 거짓말하랴?\'하는 생각에 새벽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목회는 개척할 때 3년이 중요합니다. 3년 안에 100명이 넘어야 하는데, 3년이 났는데도 100명이 넘지 않았다면 오늘 효과적인 전도법을 잘 배워서 처음 개척는 마음으로 잘 개척한 사람 흉내내면 됩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 절망할 때마다 교회는 거의 빠지지 않고 나갔지만 믿어지지 안았습니다. 25살 때 새벽기도 꾸준히 나가고 보초서고... 서울대학교에 간 것은 내가 갈 수 있는 능력은 1%도 없었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했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두 달 뒤에 군대에 갔는데, 군대에 가서 또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군대에서 술 마시면서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술을 마셨습니다.
개척교회를 하는 것도 동일합니다. 개척 목사로서 이러면 안되는 줄을,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 줄을 압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는 줄을 아는데 그렇게 사는 것은 어렵고, 이러면 안되는 줄 알면서 그 길로 가고 큰 교회만 보면 화나고… 교회가 없어져도 그 교인은 우리 교회로 안 옵니다. 전도하고 잘 양육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으면 하나님께서 보내주십니다. 한 달란트 쓰지 않으면 있는 것도 뺏기게 됩니다.
개척시작
1979년에 총신을 졸업하고 강도사 시험 10일 전에 내려가서 350만원 전세를 얻었습니다. 안산으로 오게 된 것은 동아일보를 보는 가운데 \'반월공단을 세울 예정이다\'하는 기사를 신학교 1학년 때 보았는데 왠지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 공단은 배운 사람도 없고 가난한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기사를 오려놓고 3년 기도를 했는데 결국은 그 공단으로 가게 해주셨습니다. 신학교 2학년 때 결혼을 했는데, 장인이 처남을 맡기면서 준 60만원과 형이 50만원 준 것이 저의 전 재산이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싶어 기도를 열심히 했고, 우여곡절 끝에 전도사 시절 교사들이 보태준 돈, 아르바이트 한 돈... 이렇게 해서 350만원을 마련해 지하 방을 얻게 된 것입니다. 5월 30일 이사를 갔고, 6월 10일에는 대전에서 강사고시가 있을 예정이었습니다.
첫 전도 열매
제가 처음 개척한 장소는 300호 정도 되는 동네로 80년 된 감리교회 하나가 있는 반월 원곡리3 블록이었습니다. 350만원의 평수30평, 실제평수 27평인 지하에서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와 보니 지하라 바닥에 물기가 흥건해 있어서 스티로폴과 비닐장판을 깔아야 될 것 같아 일단 짐을 정리하지 않은 채 스티로폴 가게를 찾아갔습니다. 마침 개척교회 건물 옆에 보니까 \'일우 철물\'이라는 철물점이 눈에 들어와 들어가서 스티로폴 30장만 달라고 했더니 철물점 사장이 \"뭐에 쓰시려고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정중하게 옆 건물 지하실의 반월동산 교회를 개척하러 온 김인중 전도사라고 인사를 했더니 사장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담배를 급하게 떨구기에 \"혹시 교회에 다닌 적 있으세요?\"하고 물었습니다. 사장이 고개를 숙이더니 \"제가 고등학교 3학년까지 장로교회에 다녔는데,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다니면서 4년 동안 불경을 듣고 배우다 불교 신자가 되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나는 그를 전도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사장님, 이 스티로폴 얼마입니까?\"하고 물었더니 2만 5천원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때는 스티로폴 값이 꽤 비쌌는데 지갑에서 돈 3만원을 꺼냈습니다. 전도할 수 있는 기회로 삼기 위해서였지요. 저는 일부러 손에 돈을 꾸부려 쥐었고, 돈을 살며시 들고 있으면 뺏아갈 수도 있으니까 힘을 주고 지폐의 반을 꽉 잡았습니다. 사람이란 돈을 보면 누구나 흥분하게 되어있고, 만약에 돈을 안 꺼내고 이야기를 하면 외상을 하려는 수작인 줄 알고 의심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에 돈을 꺼내서 그냥 줘 버리면 자기 일을 다 봤으니까 복음을 듣기 전에 가 버리고, 돈을 잡고 있으면서 안 주고 있으면 돈을 받기 위해서라도 복음을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바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불자인 사장님에게 13분만에 예수님을 전했고, 이사 짐을 풀기 전에 1명의 양을 저에게 하나님은 주셨습니다. \"사장님, \'사영리\'에 대해서 들어 보셨습니까?\" 이렇게 시작한 전도로 그 분은 예수님을 믿고 지금 우리 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첫 개척의 첫 열매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영리로 시작된 전도는 칠백 명이 될 때까지 저는 직접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