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욕망

주님의시선] 일일예화말씀묵상 2010년 11월 4일 (목) - 인간의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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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사에 이런 얘기가 있다.

어느 날 왕과 왕후 그리고 재상 세 사람이 앉아서 평소에 다른 사람에게 말하거나 알리지 않은 자기만의 비밀스런 얘기를 툭 터놓고 한가지씩 얘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만일 세 사람이 각각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병풍 속에 그려져 있는 금계가 소리치고 울 것이라고 했다.

왕이 입을 열었다.

\"나는 이 나라의 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이고 이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내 아래 있는 것들이지만. 때로 관민들이 나한테 좋은 선물을 가져다주면 내 마음이 심히 기쁘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병풍 속의 금계가 울었다.

재상이 입을 얼었다.

\"나는 이 나라의 통치자로 내 위에 한 사람만 제외하고는 다 내 아래 있지만 매일 저 왕좌를 바라볼 때마다 나도 한 번 저 자리에 앉아보았으면 하는 생각이든다\"고 말하자 역시 병풍 속의 금계가 울었다.

왕비도 입을 열었다.

\"나는 한 지아비를 섬기는 사람이지만 어전 회의에서 가끔 문무백관들 틈에 젊고 건장한 신하가 있으면 저 사람과 깊은 교제를 나눠봤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자 역시 병풍 속의 금계가 울더라는 고화이다.

인간에겐 다 각각 인간이 본능적으로 지니는 욕망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본능과 본심을 숨기는 데 있다.

자기는 제일 거룩하고 청렴결백하고 가장 애국 애족적인 인사인 것으로 자신을 위장하는 데 있다.

밝고 건강한 개인 생활과 사회가 되려면 두가지 방법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위선의 탈을 벗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진실을 찾는 것이다.

거울을 보아야 얼굴을 고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진실. 앞에 서야 자신의 왜곡된 인생과 생활을 교정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진리를 따르는 자라야 바른 가치관을 남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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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경험한다, 내 속에 나 아닌 내가 존재하는 것을 ....

포장을 벗은  나, 드러나지 않은 내가 다른 이들앞에 모두 보여진다면 나는 진정 낮아진 사람으로 거듭나지 않을까....

 

[마 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마 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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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당할 사람들

(마 23:13-36)

 

신약성경은 보면 축복에서 시작해서 축복으로 끝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신약의 첫번째 책인 마태복음의 5장에 팔복이 나와 있습니다. 그 축복이 나오고 또 신약성경의 제일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옴이라” 하는 말씀에서 시작해서 일곱 가지의 축복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전체적인 면으로 볼 때에 축복으로 시작해서 축복으로 끝난 책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을 좀더 구분해서 보면 마태복음 5장에 나와 있는 팔복과 비교되는 곳이 있는데 바로 오늘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 23장에는 여덟 번에 걸친 ‘화있을진저’ 즉 저주가 나옵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축복과 저주의 양면성이 다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율법에는 ‘하라’는 형태와 ‘하지 말라’는 형태가 있습니다. 하라는 형태는 바로 그것이 축복받는 비결이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지말라는 것은 그것을 하게되면 우리에게 저주가 임하고 화가 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지말라고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하는 이 말씀은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정말 축복을 주시기 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간곡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본문과 평행구절인 누가복음 11장 37-54절에 보면 여섯 번에 걸쳐 ‘화 있을진저’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본문 마태복음 23절에는 ‘화 있을진저’라는 말이 여덟 번 나옵니다. 제일 먼저 13절에 화 있을진저 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15절, 16절, 23절, 25절, 27절, 29절에 화 있을진저 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일곱 번 나오는데 왜 여덟 번이라고 하는지 이상하지요? 사실은 14절에 화 있을진저 라는 말이 또 한번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14절에 생략되어져 있습니다만 영어 성경에 보면 14절이 나와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말 성경에는 일곱 번에 걸친 ‘화 있을진저’ 하는 말이 나오고 KJV 등의 영어성경에 보면 여덟 번에 걸친 ‘화 있을진저’ 하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이 마태복음 5장과 서로 대조가 됩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팔복이 나오는데 이것이 마태복음 23장에 나오는 말씀과 서로 짝을 이룬다는 말씀입니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성경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어느 한 말씀도 짝이 없는 말씀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태복음 5장에 기록된 축복을 받기를 원하시고, 마태복음 23장에 기록된 화(저주)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 두가지 말씀을 주신 것인데 특별히 23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주간에 바로 몇일 전에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 마태복음 5장과 23장의 비교

 

첫째로 마태복음 5장 3절과 23장 13절입니다.

5장 3절에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축복의 내용은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본문 23장 13절에는 “화 있을진저...... 천국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자가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말입니까?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여기저기에 울타리를 많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소위 율법적인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체계적으로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방해를 했습니다. 교파의 울타리를 만들어 놓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은 너무너무 교만했습니다. 그들은 아무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613개의 율법을 만들고 거기다가 울타리 율법을 더 만들어 놓고는 자기들도 다 지키지 못하면서 교인들에게 지키도록 강요를 했다 그 말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천국문을 닫았습니다. 마태복음 5장 3절에 보면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 다시 말하면 겸손한 사람이 유업으로 받는다고 했고, 그 다음에 23장 13절에는 바로 교만한 사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교만한 사람들이 천국문을 닫고 천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두 개가 아주 짝을 잘 이루고 있습니다.

 

둘째로 마태복음 5장 4절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무슨 애통입니까? ‘아, 나는 죄인이다. 나는 죄를 저질렀다. 하나님, 나는 정말 죄인입니다’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본문 14절과 짝을 이룹니다. 본문 14절이 우리말 성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 있는 것을 제가 번역해 보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여 너희는 경건한척 하고 길게 기도하면서 과부의 집을 삼키는 도다 너희들에게 더 큰 심판이 있을 것이라” 이렇게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화를, 저주를 받을 것이냐 하면 탐심을 가진, 과부들의 집을 삼키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얼마나 위선자인고 하면 사람들이 보는 길거리에서 오래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보고 ‘야 저분은 정말 경건해. 얼마나 기도를 길게 하는지. 우리는 1분만 하고 나면 기도할 것이 없는데 저분들은 몇 십분씩, 몇 시간씩 기도한다’라고 칭찬을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길거리에 서서 그렇게 오랫동안 기도를 했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지금도 그렇게 의식적으로 길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 짧게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마세요. 기도를 짧게 한다는 말은 기도를 짧게 해도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확신이 있을 때 짧게 하는 것입니다. 밑천이 없어서 짧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로 마태복음 5장 5절에 보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 다음 말은 궁극적으로 천국에 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 뿐만 아니라 그 가문이 번성해서 땅을 차지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15절에 보면 이것과 대조가 되는 말씀이 나옵니다. 15절을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아주 적극적으로 교인을 얻기 위해서 바다와 육지를 돌아다니며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선교활동을 한 다음에 그 사람들을 얻은 다음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배나 더 지옥 자식으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부끄러운 얘기입니다만 우리나라에 168개나 되는 많은 교파가 있습니다. 밤에 서울에서 좀 높은 곳에 올라가서 밑을 보면 벌겋습니다. 한군데 서서 100개 200개의 십자가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벌겋습니다. 어떤 때는 그것이 굉장히 자랑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건물에 보면 교회가 여섯 개가 있습니다. 한 건물 안에 1층에는 장로교, 2층에는 감리교, 3층에는 성결교, 4층에는 침례교...... 이렇게 여섯 개가 있습니다. 거기에 사시는 분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매주 여섯 개의 주보를 받는답니다. 종교백화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도대체가 목회자의 윤리도, 기독교의 윤리도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장사가 아닙니다. 우리가 선교를 해야하지만 그러나 남이 세워놓은 탑을 헐면서까지 선교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장사꾼입니다. 이것은 온유한자의 모습이 아니라 자기의 이름과 배를 위한 것입니다. 바로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넷째로 마태복음 5장 6절에 보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라고 만족함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16절에서 22절을 보면 이것과 대조가 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당시 그들은 맹세하는 일을 자주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맹세하면 그것은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맹세하지 않고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과, 성전의 금과, 제단의 것을 가지고 맹세를 했습니다. 바로 물질을 얻기 위해서 이들은 맹세라고 하는 것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을 속여 물질을 얻기 위해서 맹세를 하였다 그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배부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만족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도 빼앗김을 당한다고 그랬습니다.

 

다섯째로 마태복음 5장 7절에 보면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그랬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그것과는 대조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 23절과 2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 말씀은 굉장히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십일조 생활을 보이기 위해서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향료들인데 보통 이런 것은 밭에 심지를 않습니다. 밭에는 곡식을 심고, 밭으로 사용할 수 없는 땅이 한두 평이 있을 때, 혹은 울타리가 있을 때 음식의 향료로 사용하기 위해 거기에 박하와 회향과 근채를 심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십일조 내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렇게 조그마한 것, 세부적인 것에까지 십일조를 내면서 철저히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을 보입니다. 그런데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 즉 의와 인과 신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의(義)=공의(公義), 인(仁)=자비(慈悲), 신(信)=(信仰) 이것이 바로 종교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 버렸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버리고 조그마한 것, 별 가치 없는 것까지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십일조를 내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보면 “이것도 행하여야 하고 저것도 행하여야 할지니라” 했습니다. 보다 더 중요한,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사랑을 버리고 이런 것들을 행하는 것은 그것이 모두 외식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이 됩니다. 우리가 이런저런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가장 중요한 사랑의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외식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저들을 책망했습니까? ‘너희들은 가치관의 전도를 가져온 자들이라’ 하면서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라고 책망했습니다. 약대와 하루살이는 그야말로 비교가 안되죠. 그런데 이들은 약대는 삼켜버렸고 하루살이는 걸러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조그만 한 것, 행해도 되고 행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은 지키고 정말 큰 것은 하나도 안 지켰습니다. 예를 들어서 농사를 짓는데 수십만 평의 큰 땅에 농사를 짓습니다. 또 울타리에도 농사를 짓습니다. 그런데 울타리에 농사짓는 것은 철저하게 일전까지 십일조를 내면서 수십만 평에서 나오는 것에서는 십일조를 꿀꺽 삼킵니다. 한 마디로 위선자라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마태복음 5장 8절에 보면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라고 했습니다. 본문 23장 25절에서 28절의 내용을 보면 외적으로는 순전하지만 내적으로는 부패하고 썩은 것을 아주 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5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는도다” 그러면서 이들에게 주님은 아주 크게 “너희들은 회칠한 무덤과 같다”라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사람들은 우리처럼 땅에다가 시체를 묻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위에 자연적으로 생겨진 동굴이나 혹은 굴을 파서 묘지로 씁니다. 그런데 그들의 묘지는 가족묘지입니다. 할아버지 시체를 놓고 몇년이 있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또 거기에 묻습니다. 굴 하나를 가지고 그들은 가족묘지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1년에 한 번씩, 유월절 직전에 거기에 회를 바릅니다. 마치 헐고 오래된 아파트에 페인트를 칠하면 새집처럼 보이듯이 묘지에 회를 하얗게 칠하면 깨끗해 보입니다. 그러나 속에는 썩은 시체, 썩은 뼈 뭐 이런 것들이 가득한, 냄새가 가득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심령을 바로 이 회칠한 무덤에다가 비유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깨끗하고 경건한데 속에는 냄새가 났다 그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화 있을진저’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5장 9절에서 12절에 보면 두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이고 또 하나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천국을 차지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그 내용을 보면 천국을 차지한다는 말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은 사실은 같은 뜻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나, 핍박을 받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26절에서 36절의 내용을 보면 선지자를 핍박하고 죽인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 그들은 바로 화 있을진저 마귀의 자녀들이 된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말씀하고 있고, 23장에서는 마귀의 자녀가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다 기억하고 지나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여덟 번에 걸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이여’라고 했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외식한다고 하는 말의 헬라어는 ‘히포크리타이’라는 말인데 여기서 히포크라이트, 즉 위선자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히포크리타이’라는 말은 ‘꾸민다’, 혹은 ‘배우노릇을 한다’라는 뜻입니다. 각본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배우처럼 속과 겉이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저주가 있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킨다고 조그마한 것은 지키면서 큰 것은 지키지 않는 사람들, 보다 더 중요한 본질적인 것은 아무렇게나 하면서 비본질적인 것에는 이렇다 저렇다 하면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33절에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저들을 뱀들,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여기에 나온 말씀이 2000년 전에 살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을 향해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오늘날 보수적이고 정통이라고 하는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서 주님은 이 경고를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94년도를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경건하고 잘 믿음으로 살려고 한다면 바로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회개하는 그런 기회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결 론

세상에는 위조지폐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돈이 다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위선이 있다고 해서, 기독교 안에 위선이 있다고 해서 기독교 전체가 잘못됐다고 이렇게 말을 해서는 물론 안됩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을 순간순간 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을 아무리 깨끗하게 청소하고 소제해도 그 다음날 보면 또 더럽습니다. 그래서 가정주부들을 보면 매일매일 소제합니다.

저희 집사람도 보니까 12시까지 오전 내내 소제만 합니다. 그러면 하루만 소제하고 마느냐? 아닙니다. 그 다음날 또 소제합니다. 자꾸 더러워지기 때문입니다. 방만 그렇게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방, 심령의 방도 자꾸만 더러워집니다. 그래서 계속 청소를 해야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아무리 우리가 목욕을 해도 손발이 더러워지듯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순간순간 우리는 회개하고 우리 자신을 살펴서 호리라도 ‘화 있을진저’라는 저주의 말씀에 해당되는 자들이 아니라 모두가 다 축복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