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
추수감사주일은 구약성경에서 기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년에 큰 3대 절기를 지키고 있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추수감사절은 미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370년 전 영국에서 신앙의 박해를 피하여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 플라워 호를 타고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이 그 모진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이 땅에 정착하게 되면서 부터였습니다. 추수감사절 뿐 아니라 범사에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고, 감사하는 말을 하게 될 때 우리의 자녀들과 이웃들이 우리의 감사하는 말을 듣고 좋은 영향력을 받아 함께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축복된 절기가 될 줄로 믿습니다.
1.추수감사절을 지켜라
신명기 16:13-17
충신(북가좌)교회 안재은 목사
본문 신명기 16장은 구약의 3대 절기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1-8절은 유월절에 관한 규례이며, 9-12절은 칠칠절에 관한 규례입니다. 그리고 13-17절에서는 초막절에 관한 규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미 출애굽기나 레위기에서 3대 절기에 대해 언급한 바 있는데, 모세는 본 장에서 이에 관해 다시 한 번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신명기서 자체의 목적이 그러하듯이, 백성들로 하여금 그 절기를 지킬 때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깊은 의미와 교훈을 보다 분명히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추수감사절의 뜻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1. 3대 절기
(신 16:12)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지켜야 될 3대 절기를 명하셨는데(출 23:14-17; 34:18-24; 레 23:4-8, 15-21, 34-43), 유월절(무교절), 칠칠절(오순절, 맥추절), 초막절(장막절, 수장절)이 그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 중 20세 이상의 모든 어른은 1년에 세 차례씩 반드시 중앙 성소에 올라가 절기를 지켜야 할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민(選民)으로서 지녀야 할 참된 신앙과 행위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신 16:16)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무교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날을 기념하는 것이며, 칠칠절(七七節)은 맥추절로서 봄 농사를 통해서 얻은 수확과 풍작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초막절(草幕節)은 모든 가을 농작물의 수확과 과일의 수확을 끝마치고 드리는 절기입니다.
사람들도 일반적으로 각종 일들을 기념하기 위해 공휴일을 정하거나 날을 정하여 축하하고 축제를 베품으로 그 의미를 가슴속에 되새기도록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절기를 하나님께서 강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며, 또한 이스라엘이라는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과 결속을 다지고, 영적 각성의 계기를 삼고자 함입니다.
특별히 본문은 절기를 지킴에 있어서 명심해야 할 사항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절기에 연락하라\'(14절)고 했습니다.
(신 16:14)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宴樂)하되 이것은 절기에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도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해야 한다면, 우리 신약의 성도들은 이 절기를 보내면서 기뻐할 뿐 아니라 \'영원히 주안에서 언제나 즐거워하는 것\'을 의무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한 집에 잔치가 있을 때, 온 동네 사람들이 와서 식사를 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곳에는 어떤 사람이나, 심지어는 초청 받지 않은 거지라도 와서 식사를 하게 하고 함께 즐거워하며 기쁨을 나눕니다.
우리 자신이 즐거워 할 때 우리는 자녀와 노비와 객과 고아와 과부들 즉 애통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궁핍한 자들에게 쓸 것을 공급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분의 귀천이나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또한 빈부의 차이도 물론하고 이 절기를 지키고 즐거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기쁜 절기로 지키라고 명하십니다.
둘째로, \'온전히 즐거워하라\'(15절)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음껏 즐거워하라\', \'충분히 즐거워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무엇을 받았기 때문에 감사해야 하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실 것\'을 인하여 감사하라는 것이고, 그 때에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이 됩니다.
(신 16: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모든 일에 더 많은 복을 주실 것을 인하여 온전히 즐거워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감사는 믿음으로 주실 복을 바라보고 확신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믿음의 태도인 것입니다. 감사는 즐거워하는 마음이고 서로를 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상대적 빈곤감을 가질 뿐더러, 끊임없는 탐심을 갖고 만족치 못하고 불평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어느 TV 프로그램에서는 일평생을 병마와 싸워가면서 근근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소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들을 위해 ARS(자동응답시스템)로 모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의 삶 가운데 하는 불평이 얼마나 사치스런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복 주실 것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화란의 아덴에서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플리머스란 곳에 도착한 청교도 105명은 한 해의 추수를 마치고 하나님 앞에 감사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감사는 참으로 악조건 속에서였습니다. 그들 중의 거의 반이 험한 환경과 질병으로 인해 희생되었고, 추수물도 그리 풍족치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추수감사주일의 기원이 된 것입니다.
2. 구약 절기의 의미
그러면 오늘날의 성도들이 구약의 절기를 같은 방법으로 철저히 준수할 필요가 있는가 아니면 모든 것이 폐지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이렇게 구약에 나타난 규례들은 모두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까지도 폐지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의미와 정신은 신약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하는 시대 상황에 맞춰서 이것을 새롭게 조명하고 그 의미를 확인, 발전시킬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그 성격에 따라 크게 도덕법(Moral law), 시민법(Civil law), 의식법(Ceremonial law)으로 구분됩니다.
도덕법은 신․구약시대를 막론하고 영구히 지켜야 하는 법인데 십계명이 이에 속합니다. 그리고 시민법은 대부분 그 시대와 상황에 국한하여 주어진 것으로 결혼 제도나 이혼, 금기된 음식 및 생활 습관 그리고 종에 관한 규례 등이 이에 속합니다.
마지막으로 의식법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표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들로 각종 제사 제도나 절기에 관한 규례가 이에 속합니다. 그런데 구약의 의식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부활, 승천 사건으로 말미암아 대부분 성취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그 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들에게는 더 이상 정결법(레 11:1-15:33)이나 이스라엘의 3대 절기와 같은 의식법을 여자적(如字的)으로 지킬 필요는 없으나, 그 안에 있는 속뜻은 신약에 예수님의 정신과 의미로 이어지고 있으며, 그것을 사도 바울은 보다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골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月朔)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貶論)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그와 같은 의식법을 통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성결된 삶\'의 원리와 정신을 오늘날의 성도들도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이나 십일조 절기 등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날과 절기에 관한 규례는 주의 영광을 위해서 지켜야 함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롬 14:5)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은 의문(儀文)의 율법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는 의식법(Ceremonial law)으로서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를 깊이 깨달으며 그 근본 정신을 준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
\'폐한다\'는 것은 없애 버리는 것으로 \'완전케 하는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완전케 하다\'는 말은 원래 \'가득 채우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깊은 뜻을 드러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희미한 그림자적 내용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할 때 그 깊은 뜻이 무엇인지 바로 깨닫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목적은 율법이 목적하는 그 온전한 뜻과 속 깊은 내용을 완전히 드러내 보이시기 위해서 입니다.
3. 추수 감사절
초막절은 40년 광야 생활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새롭게 하며 가을에 농작물과 과일의 수확을 끝마치고 이를 창고에 저장한 후 7일 동안 지킵니다(출23:16; 34:22). 이 때는 히브리 민간력으로 1월인데, 오늘날의 태양력으로는 9,10월경에 해당됩니다.
\'초막절\'이라는 단어는 소출을 위하여 포도밭에 초막을 지은 것에서 유래되었고, 또 이 절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였던 사실을 되새기기 위하여 가나안 땅에 새로운 장막을 짓고 그 곳에서 7일 동안 거처하며 지키므로 \'장막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또 이 때 모든 곡식이 창고에 수장되어 있으므로, 일명 \'수장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출 23:16; 34:22).
이 때에는 본래 3가지 일을 했습니다. 첫째, 곡식을 거두어들인 다음에 제일 좋은 곡식으로 추수(소득)의 1/10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1/10은 \'온전한 십일조\'라고 하였습니다(말 3:10). 이것은 자신의 원천적인 소득 중 1/10을 모두 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과된 의무(신 14:22)로서, 충성과 순종의 표시로 신약에서도 폐지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주일과 절기 및 헌물은 우리의 삶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청지기적인 사고와 함께 구원의 감격과 감사와 기쁨을 동반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부채가 있는 사람은 추수감사절이 오기 전에 모든 것을 갚고 깨끗한 마음으로 절기를 지켰습니다.
셋째, 가난한 사람과 더불어 곡식을 나누면서 추수 감사절을 보냈습니다.
(신 16:16,17)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라\"고 한 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 올 때 하나님을 형식적으로만 섬기지 말고, 진정한 마음으로 섬기라는 뜻입니다. 또 이 말의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 년에 3번 절기를 지키는 것에 그치지 말고, 하나님께 진정 감사하는 증거를 보이라는 뜻입니다.
고대 팔레스틴의 풍습에 백성이 왕 앞에 나아갈 때 예물 없이는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뿐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것입니다(딤전 6:15). 그러므로 우리가 그 분 앞에 나아갈 때 빈손으로 나아가지 말라는 권면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예물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중심한 신본주의적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출 23:14; 34:23).
(골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결론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지키면서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해야 할 지를 상고해 보았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정해진 장소와 시간에 기쁨과 감사로 나아와야 합니다. 또한 주신 복과 은혜를 인하여, 또 앞으로 주실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을 바라보며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배에 참석할 때에는 신령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나올 뿐만 아니라, 정성스런 예물을 준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절기를 통해 성도들은 자신이 과거 죄의 장막에 거하며 죄의 종노릇하던 자였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전 가운데 온전히 거하게 된 자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적으로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신 16: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2.감사하는 생활
데살로니가전서 5:16-18
나성영락교회 박희민 목사
오늘은 1년에 한 번씩 지키는 추수감사주일이다. 우리의 삶에서 잃어버린 감사를 다시 찾는 기회이기도 하다. 현대인은 일상생활에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많이 잊어버렸다. 감사하다는 말보다는 서로 원망하고 불편하며 비판하고 상처 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고 살아간다. 그러기에 문명은 더 발달되고 살기는 더 편리해지고 물질적으로는 더 풍요해졌지만 그 내면적인 삶은 더 깡마르고 행복하지는 못하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우리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드는 심금을 울려주는 말씀인가?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항상 삶을 즐겁게 살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감사하며 사는데 있다.
이 세 가지, 항상 기뻐하는 것과 쉬지 않고 기도하는 생활,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은 서로 분리된 별개의 것 같지만 사실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것은 셋이 아니고 하나이다. 항상 기뻐하는 삶은 항상 감사하는 삶과 일맥상통한다. 우리의 삶에서 기쁨이 사라질 때 감사도 메마르게 된다. 우리의 삶 속에 참된 감사가 없으면 기쁨도 있을 수 없다. 이처럼 기쁨과 감사는 행복한 삶의 양면이요 안과 밖이다. 우리 마음 깊숙이 에서 억제할 수 없는 기쁨이 용솟음 칠 때 우리는 자연히 우리의 삶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과 감사는 결국 기도하는 삶에서 싹튼다. 우리의 기도만이 폭풍 속에서도 고요하고 평화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 기쁨의 유일한 샘터요 감사의 물줄기이다. 우리가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가? 아니 역경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살아가며, 모든 사건을 기도하는 정성으로 처리하는 사람에게는 손실과 실패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삶의 지혜와 용기가 솟아나는 것이다.
유명한 성경주석가 메튜 헨리는 그가 도적을 만났을 때 이런 간증을 하였다.
첫째, 전에는 도적을 만난 일이 없는데 처음으로 도적을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하고, 둘째는, 그들이 내 지갑만 훔쳐가고 내 생명을 빼앗아 가지 않은 것을 감사하며, 셋째, 그들이 비록 내 물건을 가지고 갔지만 별로 많은 것을 잃지 않은 것을 감사하고, 넷째, 내가 도적질을 하지 아니하고 도적을 만난 것을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그는 도적을 만난 손실에서도 감사할 수 있었다. 우리도 좀더 깊이 생각해 보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실패와 손실 속에서도 여러 가지로 감사할 수 있게 된다.
스위스의 격언에는 \'항상 노래하기를 원하는 사람만이 노래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감사의 노래를 부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보다 더 풍성한 감사의 삶이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8세 때 소경이 되었지만 유명한 찬송가 작사자가 된 Fanny Crosby는 이렇게 자신의 신앙을 노래로 읊었다.
\'비록 내가 보지 못하지만 아, 나는 얼마나 행복한 영혼인가! 이 세상에서 나는 만족하기를 배웠노니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하는 얼마나 많은 축복을 내가 누리는가! 소경이기에 나는 많은 사람들이 눈물 흘리고 탄식하는 일을 나는 하지 않노라\'고 감사했다.
이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감사의 삶을 터득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고백할 수 없는 삶의 간증이다. 사실 그렇다. 눈으로 보기 때문에 갖고 싶어하고 욕심을 부리고 시기질투 하며 범죄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어떠한 환경과 삶의 조건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감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는 물질적인 감사이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축복이라든가 이익을 얻었을 때 기뻐하고 감사한다. 어린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사 주면 온 세상을 얻은 듯 기뻐하고 고마워한다. 그러나 그 장난감을 빼앗길 때 온 세상을 잃은 듯이 슬퍼한다. 이것은 어른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종류의 감사를 우리는 물질적 감사 또는 경제적 감사라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감사를 항상 물질적인 측면에서 측정해 보는 감사이다.
둘째는 철학적 감사이다.
철학적 감사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넘어져 다리를 다쳤다. 그러나 일어나 목이 부러지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하고 감사했다. 이런 종류의 감사를 철학적 감사 또는 사변적 감사라고 말할 수 있다. 더 큰 손실을 생각하므로 적은 손실에 대해 위로 받으려는 소극적인 감사이다.
셋째는 크리스천의 감사이다.
물론 크리스천의 감사에도 위에서 말한 물질적인 감사와 철학적 감사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감사도 포함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보다 더 깊은 곳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통한 사죄의 은총과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삶 그 자체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삶이기에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바울은 옥중에서도 찬송할 수 있었고 굶주림과 매맞음과 역경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는 자기의 연약함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었다. 그는 풍부에서뿐만 아니라 가난과 궁핍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 어떻게 그러한 삶이 가능하였는가? 그것은 그가 삶 자체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물질적인 것에 감사의 근거를 두면 범사에 감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감사의 근거를 영원한 생명이시오 진리이신 그리스도에게 둘 때 우리는 역경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고 실패와 손실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3.감사지수는 높을수록 좋다
에베소서 5:20-21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
오늘은 일년에 한번씩 지키는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추수감사 주일은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감사하고 사는 사람인가를 한번 점검해 본다는 의미에서 굉장히 뜻이 있는 절기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감사지수가 얼마나 높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한번 살펴보는 것입니다. 감사지수는 높을수록 좋습니다. 감사지수가 낮은 사람일수록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고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매우 강한 어조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여러분이나 저나 이 말씀을 읽으면 제일 먼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범사에\'라는 말과 \'항상\'이라는 말입니다. 감사하라고 하는 말에 \'범사\'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으면 우리는 왠지 모르게 부담을 느낍니다. 감사하라는 말 앞에 \'항상\'이라는 수식어가 있으면 기가 죽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범사\'라는 말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어떤 일을 당하든지 무조건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항상\'이라는 말은 시종일관, 어떤 상황을 만나도 변함 없이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강도 높은 의미를 가진 말씀을 읽으면서 가책 받지 아니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마 그 가운데는 목사인 저 자신이 가장 많은 가책을 받을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를 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항상 감사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때가 자주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려고 무척 노력을 하고 또 감사도 많이 하지만 이 본문 말씀이 요구하는 선에는 아직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저 자신이 숨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담을 느낍니다. 저같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잘못하면 이런 말씀도 그저 쉽게 이야기하고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남의 말 할 때는 쉬운 겁니다. 자신이 지키지 못해도 가르칠 때는 쉬운 겁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1988년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한창 전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을 때 중요한 이슈가 사형 폐지론이었다고 합니다. 민주당 후보였던 마이클 듀카키스라는 후보는 사형 폐지론을 주장했습니다. 사형제도는 없애야 된다며 전국을 누비면서 유세를 했습니다. 어느 날 CNN의 토크쇼에 그가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쇼에는 유명한 버나드 쇼라는 앵커가 담당을 하고 있었습니다. 듀카키스를 앞에 놓고 이 버나드 쇼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사형제도를 폐지하라고 주장 하신다죠?\" \"네, 그렇습니다.\" \"참 훌륭한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 묻겠습니다. 선생님, 만약에 선생님의 아름다운 그 부인이 괴한에게 끌려가서 강간을 당한 후 살해당했다고 합시다. 나중에 그 범인이 잡혔을 때 선생님은 여전히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고서 이 사람은 당황했습니다. 머뭇머뭇하고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수천 만 명의 시청자들이 보고 있었는데 이 장면에서 그들이 받은 인상이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자기와 상관이 없으니까 사형 제도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지 진짜 자기 일이 되면 그런 소리를 할 사람 아니라는 인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토크쇼 때문에 그가 대선에서 패배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는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내 이야기를 할 때에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하고 설교하기는 쉽습니다. \"항상 감사하십시오.\" 하고 얼마든지 큰 소리로 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좀더 진지하게 이 말씀을 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어 가는 아내를 쳐다보는 남편이 과연 감사할 수 있을까요? 오랜 지병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아무리 기도하고 부르짖어도 고쳐주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병은 점점 더 깊어 가는 자신을 보면서 과연 그 입에서 감사가 나올까요? 평생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야 될 어린 장애아인 자녀를 갖고 씨름하는 부모가 그 입에서 정말 감사가 나올까요?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력서를 수십 통 써 가지고 다니면서 취직을 해보려고 하지만 회사에서 면접 한 번 하지 못하고 연거푸 퇴짜를 맞는 젊은이의 입에서 과연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말이 나올까요? 내가 그런 경우를 당했다면 정말 감사할 수 있을까요? 저나 여러분이나 이런 입장에서 이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이 말씀은 현실성이 없습니다. 비현실적인 말씀입니다. 이상론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은 적당히 보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태도로 이 말씀을 넘겨도 괜찮을까요?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자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을 놓고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꼭 깨달아야 됩니다.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지, 왜 항상 감사하라고 하시는지 이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첫째로,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이름으로\'라는 말을 \'때문에\'로 바꾸어도 전혀 잘못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지금 말씀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범사에 항상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것은 너무 비현실적인 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변명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한번 여러분 마음에 되새겨 보십시오. 그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나의 죄를 짊어지고 저 무지하고 잔인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흘만에 그를 죽음에서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그의 옷자락을 믿음으로 붙드는 사람은 어떤 죄를 범했든지 어떤 과거를 가졌든지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세례 받으시는 형제 자매 여러분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공로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어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이 말은 \"내가 너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노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영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기가 막힌 신분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이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그 예수님을 우리는 마음에 모시고 삽니다. 예수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예수님 한 분 때문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이 가지고 즐기는 것이 나에게 없다 할 지라도 나에게 예수님이 계신다는 그 이유 하나 만으로도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설혹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고 할 지라도 예수님 한 분만 소유하고 그분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진정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행복을 찾았다면 그 사람은 언제든지 감사할 수 있고 어떤 조건에서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찬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런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이 말씀이 나와 별로 관계가 없다고 밀치면 안됩니다. 만약 지금까지 예수님 때문에 범사에 항상 감사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면 옥 목사가 가슴에 가책을 받고 여러분에게 고백하듯이 여러분들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이것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시고 고쳐야 됩니다.
우리나라에 영감 있는 시인이 있습니다. 송명희 여사를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뇌성마비로 한번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로 온 몸이 비비 꼬여서, 말 한마디를 하려고 하면 죽다 살아나는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 해야 할 정도로 일급 장애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얼마나 많은 시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 시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가슴에 저미어 오는 감동이 있지 않습니까? 그가 쓴 시 가운데 \'나\'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못하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보는 것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가만히 음미를 해 보십시오.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까? 뇌성마비로서 남이 가진 것의 90%를 못 가진 자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마음을 가득히 채웠습니다. 그러자 무엇이라고 감사합니까? 남이 갖지 못한 것 내게 있고 내가 가진 것 남이 없는 것을 비교하면서 오히려 \'주님, 나는 세상 사람이 가지고 즐기는 것 없어도 예수님 한 분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을 눈으로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항상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아름다운 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수준에 저 자신이 도달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저만이 아닙니다. 제가 사랑하는 여러분들 모두가 이런 수준에까지 올라가기를 원합니다.
많이 가졌다고 감사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건강한 사람 중에 감사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자기 뜻대로 다 소원성취 하는 사람 입에서 감사가 나오는 것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저는 수만 명을 상대하고 삽니다. 없습니다. 진정한 감사를 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진짜 감사는 누구에게서 나오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아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면 진정한 감사가 나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감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명령하시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명령하실 때에는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뒤따라 보내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하나님 저는 못합니다.\" \"잔소리하지 말고 범사에 감사해. 내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도록 은혜를 줄게.\" 순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라.\" \"어떻게 항상 감사합니까?\" \"할 수 있어. 내가 네게 능력을 준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변명을 하면 안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결론을 하나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것만큼 믿습니다. 누구를 믿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앞길이 막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옵니까? \"하나님, 제 앞길 캄캄하지만 주님이 제 앞에 있는 구름을 걷어내고 어둠을 쫓아 주실 날이 올 줄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시니 이런 고난을 주시는 줄로 압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감사하는 사람의 믿음은 알아줘야 합니다. 감사하는 것만큼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어느 정도 믿고 계십니까? 감사하는 것만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하는 것만큼 행복할 수 있습니다. 100평 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감사가 없으면 절대로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스무평 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눈만 뜨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그 입에서 찬송이 나올 정도로 주님 앞에 감사하는 심령을 가지면 그 사람은 행복한 것입니다. 그 사람의 행복을 누가 빼앗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감사하는 것만큼 다릅니다. 누구하고 다릅니까? 세상 사람하고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입만 열면 불평이 심합니다. 불평은 하지 않을 지 모르지만 감사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입에서 계속 감사가 나옴으로써 내가 그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감사가 없습니까? 그러면 그들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감사하는 것만큼 강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 천성적인 장애를 안고 나온 자녀를 가진 부모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어떤 자매의 말을 들으면서 저 자신이 자주 도전을 받습니다.
\"목사님 우리 애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복을 받고 있는지 아십니까?\" 사실 말이 아닐 것입니다. \'복은 무슨 복인가?\' 우리는 당장 그렇게 느낍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 애 때문에 가정이 얼마나 화목한지 모릅니다. 우리 애 때문에 우리 아빠가 예수 믿고 돌아왔습니다. 아마 애가 저러지 않았으면 아빠는 예수 안 믿었을 것입니다. 우리 애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잘 살아도 교만하지 않을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리 애 때문에 세상에서 천대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 고통 당하는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이 애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주신 복이 보통 많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 이 사람만큼 강한 사람이 천하에 어디 있습니까? 누가 이 사람을 꺾을 수 있습니까? 아무도 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감사지수는 높을수록 좋습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 좋아집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더 행복해 집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세상 사람 앞에 매력적인 존재가 됩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더 강해집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오늘부터 돌아가셔서 의도적으로 감사하십시오. \'나는 예수님 믿는 사람이다. 예수님 때문에 나는 무조건 감사할 수 있어.\' 하면서 감사하면, 지금까지 불평하던 것을 감사하면, 지금까지 남을 원망하던 것을 거꾸로 뒤집어서 감사하면, 지금까지 만족하지 못하던 것을 감사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날보고 범사에 항상 감사하라고 하셨어. 그러니까 나는 감사해야 돼. 아버지에게 순종해야 돼.\' 하면서 어떤 형편에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감사할 것들을 찾아 하나님 앞에 감사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이 좋아집니다. 우리가 행복해집니다. 우리가 강해집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에게 매력을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이런 멋있는 자녀가 되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아멘.
4.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시편 136:1-4
인천순복음교회 최성규 목사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이러한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한 번 따라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다시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자.\"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잔치 날입니다. 더 많이 감사하는 날입니다. 잃어버린 감사를 회복하는 날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20세기 마지막 추수감사절입니다. 또 2천년대의 첫 번째 추수감사절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바쁜 일상으로 인해서 감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감사할 일이 수없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바쁜 일에 좇기다 보면 감사를 잊어먹고 있습니다. 성도가 감사를 잊어먹는 것은 하나님을 잊어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가 감사를 잊어먹은 것은 하나님을 잊어먹은 것이요, 예수님을 놓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해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잃어버린 감사가 회복되고, 잃어버린 신앙을 다시 회복하는 아주 좋은 기회를 우리가 만들어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우리가 누구에게, 무엇을, 왜 감사해야 하는지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이 \"감사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두 번 나옵니다. 첫 번째 감사는 고라신과 벳새다 고을에서였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0절로 26절 말씀에 그 말씀의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가장 많은 권능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실패한 것입니다. 속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었기에 감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장 25절, 2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환경이 어려워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감사할 일이다, 그 말씀인 것입니다.
또 두 번째 감사는 나사로가 죽어서 무덤에 있을 때입니다(요 11:41). 깊은 슬픔과 절망이 사람들을 감싸고 있을 때 예수님은 감사했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장 40절로 41절에서 이렇게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요, 구원받은 성도는 구원받지 않은 세상 사람들과 감사하는 조건이 달라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좋을 때, 감사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 언제 감사했느냐고 하면서 불평해버리고 맙니다. 원망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는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좋을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뜻이 이루어질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니까, 나는 하나님 아들이 되었으니까,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나에게 있으니까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 다윗은 시편 37편 4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 우리가 생각할 때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성령과 말씀으로 우리를 돌보심에 우리는 또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순종할 말씀을 주신 것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을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또 받을 말씀이 있습니다.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 우리가 들을 수 있다는 것, 우리가 손으로 잡을 수 있다는 것, 이것만 가지고도 얼마나 얼마나 감사한 지 모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일까,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산 예배, 산 제물 되는 것
첫째로, 산 예배드리고, 산 제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한다는 것은 산 예배, 역동적인 예배, 성령 충만한 예배, 말씀 충만한 예배. 예배를 산 예배로 드릴 때,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한다, 그 말인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면,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산 제사로 드려져야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라\"(요 4:24) 그랬습니다. 그렇게 드릴 때, 주님이 찾아오신다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려 \"예배의 제사\"를 드리고,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드려 \"봉사의 제사\"를 드려야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몸과 마음을 드려 \"산 제사, 산 예배\"로 드리고, 시간과 물질을 드려서 \"봉사의 산제사\"를 드려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로 드려지는 예배와 봉사의 산 제사는 기적을 산출할 수 있습니다. 사복음서에 보면, 오병이어의 사건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4복음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의 감사 기도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한 소년의 정성어린 \"감사의 헌신\"이 그 기적을 낳게 했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 중 남자만 오천명입니다. 부녀자까지 수만 명이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빌립에게 \"저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가 주라\"고 했습니다. 그 때, 빌립은 계산했습니다. \"예수님,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합니다.\" 그랬습니다. \"장정 하루 품삯을 1데나리온으로 본다면, 이백 명이 일한 것을 가져야 떡을 먹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광야에서, 또 황혼 저녁에 그런 돈도 없고,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요 6:7).
그러나 그 제자 안드레는 먹을 것을 찾으러 갔습니다. 어린 소년이 가져온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를 발견했습니다. 어린 소년에게 말을 합니다. \"소년아, 우리 예수님이 이 많은 사람들을 다 먹이라고 말씀하신다. 너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를 나에게 주어서 이것을 예수님께 갖다드리면,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먹을 수 있단다.\" 그 소년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 고민했을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나 점심 먹으라고 싸 주신 도시락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인데, 예수님 말씀을 듣다가 먹을 시간이 없어서 먹지 못했는데, 그런데 이것을 먹어야 허기를 면하고 배를 채울 수 있고 힘을 찾을 수 있고, 그래서 우리 집까지, 먼 집까지 갈 수가 있는데...\"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컸어요.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컸어요. 예수님의 기적을 그는 똑똑하게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때 그 소년이 헌신하는 겁니다. \"그래요. 내가 이것을 먹어야 허기를 채울 수 있어요. 이것을 먹어야 내가 기운을 차릴 수 있어요. 이것을 먹어야 내가 집에 갈 수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께 드리는 일이라면,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서 드리는 일이라면, 내가 내놓을게요. 아저씨 가져가세요. 가져가세요.\" 어린 소년은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를 내놓는 헌신의 제사, 헌신의 감사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받으신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먹여야 하는 사람들이 남자만 오천명, 부녀자까지 수만명. 어떻게 생각하면 \"야! 제자 안드레야, 가져오려면 많이 가져오고 적게 가져오려면 가져오지 말지, 나만 왜 괴롭게 하느냐?\"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먹여야 할 사람이 수만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보리떡 다섯 덩어리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우러러, \"하늘을 우러러 축사했다\" 그랬습니다. 그 축사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감사\"의 의미가 있습니다(요 6:11의 \'축사\'란 헬라어 \'유카리스테오\'로 \'감사하다\'는 말). 먹어야 할 사람은 남자만 오천명, 부녀자까지 수만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작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가지고 불평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책망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감사하셨습니다. 떼어 주었더니 남자만 오천명, 부녀자까지 수만명이 배불리, 원대로 먹게 하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고 했습니다. 이 기적을 믿으시면 \"아멘\"하겠습니다. 이 기적이 여러분의 삶 속에도 그대로 일어나기를 원하시면 \"아멘\"하겠습니다.
둘째,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
두 번째,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 구원받은 성도가, 은혜
받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됩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자녀들은 그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현대인의 성경).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20절입니다. {자녀들은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또 그 뿐이 아닙니다. 구약성경 레위기 19장 32절에 보면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부모와 어른들을 통해 생명을 탄생하게 합니다. 출생하게 합니다. 또 그 뿐이 아닙니다. 태어난 생명을 유지하고, 자라게 하고, 보존합니다. 하나님이 아담 한 사람만은 직접 흙을 가지고 빚으셨습니다. 그 코에 생기를 \'후~\' 불어넣어서 사람되게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하와를 만들 때는 그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고,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인인 하와를 만들어 아담에게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하나님은 단 한사람도 직접 사람을 만들지 아니하셨습니다. 자기 아버지와 자기 어머니를 통해서 사람을 이 땅에 태어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자 그러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를 낳게 하셨습니다. 그럼 우리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을 낳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 혼자 일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하나님이 함께 일하셔서 우리를 태어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럼으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저나 여러분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실 때, 여러분의 아버지가 없었다면 여러분의 어머니가 없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이 땅에 낳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일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지 않는 것은 생명창조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가인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분명 가인과 아벨에게 예배에 대해서 가르쳤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 아벨은 그 아버지, 어머니가 가르쳐 준 그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아버지 아담, 어머니 하와의 말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불순종과 불공경은 하나님 앞에 잘못된 예배를 드리고, 형제를 살인하는 살인자의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며 사는 길이기도 한 것입니다.
한국은 오천년 역사를 이어온 나라입니다. 작은 나라입니다. 지하자원도 없는 나라입니다. 외침도 많았던 나라입니다. 내란도 많았던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오천년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이 땅에 종교가 들어오기 전에, 유교가 들어오기 전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기독교도 들어오기 전에 한국, 우리 민족은 효 정신이 있었습니다. 가족제도가 있었습니다. 이 효 정신과 가족제도가 이 작은 나라, 힘없는 나라, 이 선한 나라, 외침도 많이 받은 나라, 오천년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그런데 서구문화가 들어오면서 안타깝게도 효 정신이 죽었습니다. 가족제도가 파괴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기독교 신앙으로 착각했습니다. 서구문화가 몽땅 다 성경문화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효 정신도 버리고, 가족제도도 버렸습니다. 그것이 \"현대인\"인 것처럼 알았습니다. 그것이 \"지식인\"인 것처럼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다시 보고, 다시 보니까 성경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우리가 할 일이 뭐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우리가 추수감사 주일을 맞아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한다면, 그 감사하는 것 중에 우리가 감사할 것이 뭐냐? 그 감사의 조건이 무엇이냐? 감사하는 행위가 무엇이냐?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하나님 주신 은혜, 하나님 주신 사랑, 하나님 주신 복을 빼앗기지 말고, 누리고 살아가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며 사는 것
그 다음에 세 번째입니다.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며 사는 것,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며 사는 것.
그렇습니다. 이웃을 향한 감사는 그 이웃을 통해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주셔서 영혼구원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불신 이웃이 있다면, 아직 예수 믿지 않는 이웃이 있다면, 이는 전도의 상급을 위해 하나님이 붙이신 것이다. 그렇게 알아야 됩니다. 만약 주위에 나를 괴롭히는 이웃이 있다면, 그는 나의 인격과 삶을 연단 시키는 \"가시\"(고후 12:7)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시편을 많이 기록한 다윗, 목동이 이스라엘 왕이 된 다윗,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다윗, 많은 시편을 기록한 다윗, 그 많은 시편은 그가 왕이 되어서 호위호식 하면서 왕궁에 있을 때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광야에서 연단 받을 때, 고통 당할 때, 아픔을 당할 때, 시험을 당할 때, 괴로움을 당할 때 지은 시편이 다 그 은혜로운 시편들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웃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이웃을 향한 원망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웃이 나에게 아픔을 준다면, 고통을 준다면, 모난 나의 삶을 부드러운 삶으로, 둥근 삶으로, 원만한 사람으로, 은혜로운 사람으로, 성령의 사람으로, 말씀의 사람으로, 예수 사람으로 바꾸어주는 것으로 아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출애굽기 16장 8절입니다. {모세가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니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우리가 사람에게 원망하는 것은, 그것은 곧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다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다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사람을 사랑해야 됩니다. 그럼으로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마 22:39) 그랬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은 무엇이냐?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며 살아가는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이다, 그 말인 것입니다.
넷째, 어려움 당하는 이들을 돕는 것
그 다음 네 번째입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돕는 겁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돕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축제의 특징은 모든 이들이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랬습니다. 특히 추수감사 절기에, 특히 감사절기 때는 어려움 당하는 이들과 함께 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너만 먹지말고, 네 가정만 먹지말고,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과 함께 먹어라. 함께 즐겨라. 함께 잔치를 하라\"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16장 11절입니다.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약한 자들을 위로하고 돕도록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 건강을 주셨습니까? 건강하지 못한 사람을 도와주라고. 왜 나에게 물질을 주셨습니까? 물질이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라고. 왜 나에게 은사와 영적인 능력을 주셨습니까? 전도하고, 그들을 신앙인으로 잘 돌보아주고, 보살펴 주라고. 지금 이 땅에 수많은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업하다가 부도나서 어려움을 당하는, 직장에서 일하다가 직장을 잃어버린 실업자. 그 뿐이 아닙니다. 아버지, 어머니 없이 가족을 이끌고 나가는 소년 소녀 가장이 있습니다. 고아가 있습니다. 과부가 있습니다. 그리고 생활보호 대상자, 자녀 없는 독거 노인. 자녀가 있어도 부모를 돌보지 못해 생긴 독거 노인이 있습니다. 또 그 뿐이 아닙니다. 외국에서 한국에 가면, 돈 좀 벌어보겠다고 왔다가 직장을 잃어버렸거나 직장에서 노동을 착취당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외국 근로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다 우리의 도움을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의 도움의 손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움은 내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필요할 때 주는 것이 도움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는 것이 도움입니다. 외로운 사람을 위로해 주는 것이 도움입니다. 배부른 사람에게 내 밥이 남으니까 좀 먹을래? 아닙니다. 돈이 많은 사람에게 돈 자랑하기 위해서 내가 좀 사줄게 먹을래? 그것이 아닙니다. 도와준다는 것은 뭐냐? 내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상대가 필요해서 주는 것. 이것이 도와주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처럼 어려운 중에서도 자원하여 돕는 것이 참된 사랑이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 2절로 3절입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힘들어 할 뿐만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또 구약에서 잠언서 11장 24절로 25절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것이 뭐냐구요?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돕는 겁니다.
다섯째, 자연을 잘 돌보는 것
다섯 번째입니다. 자연을 잘 돌보는 것, 자연을 잘 돌보는 것. 그렇습니다. 자연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또 그 은혜의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뭐냐구요? 에덴동산을 지어서 아담에게 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뭐냐구요? 이 삼라만상을 다 지으셔서 인간이 생활할 수 있도록, 마음대로 공기를 마시며, 햇빛을 받으며, 물을 먹으면서, 꺼지지 않는 땅에서, 땅에서 나오는 생물로 말미암아 먹고살게 만들어 주신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대한 사랑의 증거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우리 예수님으로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신 것만이 아닙니다. 이 자연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은 수도 없이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난 일년간도 자연을 통해서 우리를 먹이셨습니다. 또 입히셨습니다. 또 돌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연을 파괴한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거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는 자연을 보존합니다. 자연을 아낍니다. 자연을 돌봅니다. 또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도록 돌보아 주는 이런 삶. 이것이 뭐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연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 자연의 주인은 하나님. 자연을 섭리하시는 분도 하나님. 자연을 통해서 우리에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분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서 12장 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의인이 누구냐구요?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이 있는 것. 나무나 풀이나 새들이나 짐승이나 어족이나, 이런 것들을 돌아보는 것이 의인이다, 그랬습니다. 악인은 누구냐구요? 그런 것에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잔인하게 사는 삶, 이것이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자연을 보호해야 의인답게 살아가는 겁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하더라도 자연을 보호하지 아니하고, 자연을 훼손하고, 그것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잔인하게 죽여버린다면, 꺾어버린다면, 못살게 만든다면, 그것에 대해 성경은 말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악인이다.
오늘은 20세기 마지막 추수감사주일입니다. 21세기를 맞이하는 문턱에서 맞는 2000년에 첫 번째로 맞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감사는 은혜를 받는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감사는 은혜를 받는 그릇.\"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려면, 우리는 감사로 그릇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감사가 없으면, 받은 은혜가 다 쏟아집니다. 엎어집니다. 빼앗깁니다. 잃어버립니다. 우리 모두 선하시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시편기자가 말을 합니다. 시편 136편 1절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 모두 다 20세기 마지막 추수감사 주일을 맞이해서 마음껏, 힘껏, 재능껏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합시다. 사람들에게도 감사합시다. 자연에게도 감사합시다.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마음껏 누리면서 행복하고, 즐겁게, 복되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날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은혜 베풀어주시는 주님, 고맙습니다. 진실로 오늘 20세기 마지막 추수감사 주일, 2000년대 맞아서 첫 번째 맞는 추수감사 주일,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이 귀한 음성을 듣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감사함으로 은혜를 담는 그릇들을 다 준비하게 하여 주옵소서. 받은 은혜를 누리며, 베풀며, 주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어지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5.이 사람의 감사
누가복음 19:1-10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
이번 달의 가이드 포스트에 보면 Pay a Pilgrim\'s Thank 라고 하는 제목으로 간단한 Article이 실려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첫 해에 미국의 청교도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라고 제목을 걸고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그토록 감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가. 평안해서가 아닙니다. 성공해서도 아닙니다.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감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가? 여러분, 감사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진정한 감사, 감격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런 감격은 사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번영과 자유와 무슨 형통함과 성공과 영광, 거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병든 곳에 오히려 가난한 곳에 아주 절박한 곳에 그 고통 중에 진정한 감사가 있습니다.
저는 종종 식탁에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음식을 먹을 때마다 내 일생 제일 음식으로 감사했던 때, 제일 큰 감사를 드렸을 때가 언제인가, 그 때 생각을 늘 합니다. 그래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밥투정은 안 합니다. 왜요? 그때의 사정이 있기 때문이에요. 제가 혼자서 피난을 나왔을 때, 1951년 정월입니다. 너무 어렵고 춥고 배고프고 괴로운데 혼자서 지나가다가 거기에 고구마 굽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고구마 냄새가 코에 싹 들어오니까요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더라구요. 도저히. 그래서 가지고 있던 시계, 이 팔목시계를 풀어서 주었습니다. 그래 돈은 뭐 통하지 않는 때니까. 이거를 주고 고구마를 달라고 했더니 고구마 네 개를 주었어요. 요새 팔목 시계는 흔하지만 그 때는요 온 동리에 나밖에 없었어요. 팔목시계 가진 사람이. 그런데 이 귀중한 시계를 풀어주고 고구마 네 개를 손에 들었는데 서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릴 때 눈물이 똑똑똑똑 떨어지는데요 그 때에 감사했던 그 마음은 일생동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아무리 좋은 음식 아무리 좋은 여건에 있어도 그 때의 그 감사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이 뜻을 알 것 같습니다. 저들은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그토록 감사하지 않고 견디지 못했던가. 그들은 먼저 건강을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1620년 12월, 추운 때입니다. 긴 긴 항해 중에 백열명으로 출발한 사람이 배 안에서 다 죽었습니다. 괴혈병과 각종 바이러스 병으로 죽고 48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절반이 살아남았습니다. 살아남은 데 대한 감사. 그리고 이만큼 건강을 지킨 데 대한 감사. 이것이 첫째 감사였습니다. 또한 의복과 거처가 문제입니다. 낯선 곳에 도착했는데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여기서 그들은 나무를 찍어서 오두막, 통나무집 오두막을 일곱 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통나무집에 들어가서 저들은 불을 피워 놓고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감사절입니다. 또한 음식으로 말하면 Plymouth 라고 하는 곳에 도착은 했지만 낯선 땅에 아무 것도 없는데 저들이 가지고 온 종자 몇 가지, 그 중에 보리와 밀을 심어보았지만은 토양이 달라서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들의 덕으로, 덕분으로 옥수수를 얼마 추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옥수수를 갖다 놓고 그리고 들에 뛰어 다니는 칠면조를 잡아서 그걸 구워놓고 감사절을 드렸습니다. 이 음식을 놓고, 그래서 지금도 미국에 가서 지내면 Thanksgiving 이 때쯤 되면은요 어느 식당 어느 가정이든지 온통 칠면조입니다. 아무리 먹어봐도 칠면조는 별 맛 없더라구요. 그래 나도 나만 그런가 해서 물어봤어요. 미국 학생들한테 \"너희들 칠면조 맛있냐?\" 그러니까 맛없데요. \"닭하고 칠면조, 어느 쪽이 맛있냐?\" 내가 여러 사람한테 물어 봤어요. \"아 거 닭이 맛있지.\" 그럼 왜 칠면조를 먹느냐. 우리조상들이 이것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했기 때문이다. 그 전통을 따라서 그렇게 먹는 거라 그래요. 여러분, 참된 감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가장 어렵고 절박한 바로 거기에서 눈물로 고난 중에 진실한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Courage to Be 라고 하는 그 유명한 책에서 이렇게 역사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고대인의 불행은 숙명과 죽음의 문제에서 왔다.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어떤 고난도 팔자요, 숙명이요, 운명이라고 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운명에 저항할 생각을 못했어요. 그대로 그 많은 고생을 치르며 수 천년을 살아오게 됩니다. 중세기 사람들의 불행은 죄와 벌에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은 저주다. 죄에 내리시는 신의 저주다. 죄와 벌! 그 무서운 심판 앞에서 벌벌 떨면서 흑사병이 돌아도 저주다. 전염병이 돌아도 저주다. 홍수가 나도 저주다. 이렇게 몰아치는 무서운 저주 속에서 저들은 헤어나지 못하고 고생을 했습니다. 현대인은 그 불행의 원인이 생이 무의미에서 비롯된다고 신학자는 말합니다. 무의미함.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배고픈 것도 아니에요. 집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왜 그렇게 걱정이 많습니까? 왜 그렇게 고독해 하는 것입니까? 왜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겁니까? 왜 감사가 없고 왜 감격이 없습니까? 그만하면 감사 감격할 만도 한데. 뭐 때문이냐구요? 끝없는 욕심 때문이요. 더 가지려는 마음이 저 앞에 가 있기 때문에 요것 가지고는 못 살아요. 또 교만하기 때문이요 하나님을 부인하는 불신앙 때문입니다. 어느 사이에 인간의 생각과 철학이 세속화되면서 사람은 불행으로 치닫기 시작을 했습니다.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그런고로 고마운 마음도 감사한 마음도 그 고마움에 따르는 행복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 나타난 이 사람 삭개오는 특별한 감사를 드렸다고 생각됩니다. 그는 현대인의 이미지를 가진 독특한 성격의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삭개오라는 사람. 우리가 잘 아는 얘기입니다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 그 당시로 돌아가 생각해 보십시다. 그는 세리장입니다. 로마 사람이 유대나라만 아니라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을 때입니다. 로마를 떠나서 살 수 없구요. 로마를 피해서 살수가 없어요. 로마 권력이 온 세계를 지배하는 때에 유대나라 역시 로마 권력 하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때에 정치적 상황에서 대세를 잘 이용한 사람이요. 세상을 잘 요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세속적으로는 그는 세리의 장이요 권력자요 요새 말로 실세입니다. 실세올시다. 그리고 부자입니다. 로마를 대표한 총독 이하 군인들은 이 세리장 같은 사람을 가장 귀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얻지 못하면 정치도 못합니다. 로마 세력도 소용없습니다. 이 세리장이라는 이 사람은 부자요. 누구든지 어느 군인이든지 마을에 들어서면 세리장 앞에 무릎을 꿇게 되어있어요. 왜요? 그는 실세요 그는 부자이기 때문이에요. 그는 자기보다 더 높은 권력자하고 친하기 때문이에요. 이게 세리입니다. 세상적으로는 성공한 사람이에요. 권력 있죠. 부귀하죠. 돈 있지요. 자 그런데 이 사람들의 고민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 고민입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등진 것 같은, 죄를 짓고 사는 것 같은 그런 고민이 있구요. 또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반 민족주의자라고 저를 부르고 있습니다. 로마 사람을 위해 일하고 있으니까. 또 그리고 로마 사람의 힘을 빌어서 자기 권력과 자기 부를 취하고 있으니까 그 마음속에 갈등이 있습니다. 민족을 배반한 고통이 있습니다. 적어도 이만한 고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나름의 독특한 의식입니다.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왜요? 이대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현실대로는 안 된다는 거야. 이대로 세상이 오래갈 수는 없다. 어서 속히 메시아가 와서 새로운 질서, 새로운 평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그런 Messianic Expectation, 메시아 대망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그는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더 큰 부자가 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더 큰 세력을 얻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더 잘 살기 위해서 예수를 만나러 갔나겠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 누구처럼 병 고치려고 예수를 만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예수를 만나려하는 생각은 독특합니다. 왜요? 그는 소문에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좋지 못한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별명을 가진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열둘밖에 없는데 그 중에 하나가 마태입니다. 세관에 앉은 현장에서 불러서 제자를 삼았어요. 도대체 어떻게 어떤 분이면 저렇게 온 세계 사람들이 다 천대하고 온 이스라엘이 미워하는 죄인의 대명사로 부르고 있는 세리를 불러서 제자를 삼았단 말인가? 세리를 제자 삼은 그 사람이 누구냐? 세리의 친구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세리를 사랑한 그분이 누구냐고. 그런 분이 누구냐고 그 분을 보고 싶었던 겁니다. 자기도 세리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는 키가 작았어요. 많은 사람이 옹위해 가지고 밀어닥치는데 도저히 예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 그는 뭐 체면이고 뭐고 불구하고 뽕나무로 기어올라갔어요. 그리고 지나가는 일행 속에 있는 예수님을 내려다보게 됩니다. 그는 이 은총적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요. 이 한 번 있는 일생에 딱 한 번 있는 이 중요한 시간을 놓칠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가 기대한 것이 무엇입니까? 뽕나무에서 예수님을 멀리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상황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를 어떻게 대하셨나 보세요. \"우러러보시고\" 그랬어요. 쳐다보았어요. 오히려 이상하게 됐지요. 삭개오가 예수님을 우러러 본 게 아니라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게 됐지요. 보셨다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Personally, 개별적으로 개인적으로 보아주신 거예요. 얼굴과 얼굴, 눈과 눈이 마주치는 시간입니다. 이게 아주 소중한 시간입니다. 많은 사람을 보듯이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에요. 지명하여 한 사람을 집중적으로 보신거예요. 삭개오를 보신 거예요. 즉 나를 보셨단 말입니다.
또 하나는 삭개오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여기에 주고받는 말이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충분히 알았습니다. 왜 저 사람이 뽕나무에 올라갔는지, 왜 나를 보려고 하는지, 왜 저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지 그 마음을 예수님은 읽으셨습니다. 그의 고민, 그의 깊은 관심, 그의 궁극적 관심을 예수님은 읽으셨습니다. 다 아셨어요. 무슨 긴말이 필요합니까? 이만하면 알지. 충분히 알았죠. 예수님은 삭개오의 마음을 다 알아주셨습니다. 그의 말을 통하지 않고 그의 행동을 통해서 그의 깊은 고민을 다 알아주셨습니다. 여기에 감격하고 있는 거예요.
또 한 가지는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예수님께서 하신 첫 번째 말씀입니다. 여기에 긴긴 설명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할 것이라. 세리의 집입니다. 온 유대 사람이 상종하지도 않고 인사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거지도 세리의 돈은 받지 않았답니다. 받았다가도 도로 던져 버렸답니다. 이렇게 더럽게 취급하는 세리의 집에 예수님은 오늘 밤 너희 집에서 자겠다. 원 세상에 이런 고마움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가장 큰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게 물질을 주시는 분입니까? 내게 지식을 주는 분입니까? 가장 소중한 것은 내 의를 주시는 것입니다. 의. 의인이 죄인의 집에 오시고 메시아가 죄인의 집에 오심으로써 그의 신분을 바꾸어 놓는 시간입니다. 이것이 너무 감사한 것이요.
이조 시대에 있었던 이런 일화가 전해집니다. 난리가 나서 왕이 피난을 가게 됩니다. 변장을 하고 신하들과 같이 몰래 도망을 해서 어느 시골로 숨어들었습니다. 그 촌부의 집에서 누군지는 모르지만 점잖은 어른들이 몇일 유하시겠다고 해서 그대로 묻지도 않고 정성껏 참 잘 대접을 했더랍니다. 대접을 받고 왕은 상황이 바뀌어서 환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환궁한 다음에 생각하니 그 촌부가 너무 고마워요. 이 난리를 피하게 해 주었느니 말이요. 그래서 그를 불러들였습니다. 아 불러들이고 보니까 아이고, 이서방이라고 알았는데 이제 보니 지체 높은 왕이에요. 그 왕은 그에게 말하기를 \"자네가 나를 이렇게 도와주었으니 무슨 소원이든지 말하게. 딱 하나의 소원을 들어주마.\" 뭐 땅이든 벼슬이든 뭐든지. 그럴 때 이 천부는 \"아니에요. 저는 바랄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며칠 후에 제 환갑날이 되는데 애들과 함께 환갑 잔치를 하게 되는데 환갑잔치에 한 번 저희 집에 와 주시지요.\" 이제 왕이 거절하게 됐습니까? \"그러지.\" 왕이 천부의 환갑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 요새나 옛날이나 마찬가지요, 얼마나 많은 뇌물이 들어왔는지 그냥 그냥 부자가 됐답니다. 왕이 우리 집에 한 번 오신다. 한 번 모신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 것이냐? 내 신분이 달라지는 것이에요. 내 의가 달라지는 것, 사람이 달라지는 시간이에요 이 시간은.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셨다, 굉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하였느니라.\" 임마누엘입니다.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완전한 의롭다함을 얻는 엄청난 복을 내리십니다.
이제 보십시다. 이 사람의 감사가 무엇입니까? 삭개오는 바로 이 시간, 이 은혜 가운데서 첫째가 \"즐거워했다\" 그랬어요. 기뻐해야 됩니다. 감사는 기뻐하는데 있는 거예요. 기쁨이 없는 감사란 감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기쁜 얼굴로 고맙다고 해야지요. 고맙다는 말도 억지로 하는 건 고맙다는 말이 아니겠죠. 감사, 기쁨. 그 기쁨 자체가 은혜에 대한 가장 정확한 응답이거든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물질을 얻었다는 것도 아니고 권세를 얻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집에 오신다는 것 때문에 그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 때문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만족한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를 영접했습니다. 정성을 다하여 영접하고.
또 하나는 마음이 열렸습니다. 당장 입이 터졌어요. 마음이 열리면서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삭게오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삭개오는 지금 예수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돕는 분이다.\'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내 재산 절반을 내서 가난한 사람을 돕겠습니다, 라고 마음이 열립니다. \"토색한 것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습니다.\" 이 말은 율법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그렇게 명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율법을 지키는 자로 살겠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참된 감사가 어디 있습니까? 원래 참된 감사는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Think, Thank 라는 말은 어원이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 생각이 없으면 감사하지 못합니다. 어느 방향으로 생각하느냐,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감사하게 됩니다.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감사 못합니다. 얻은 것을 생각하고 내가 받은 것을 생각하고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고 은혜를 생각할 때 감사할 수 있는 것이에요.
어떤 식물인간 된 남편을 위해서 수고하는 부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십년 동안을 시중을 해도 아무 보답이 없습니다. 말 한마디가 없어요. 너무 답답하고 괴로워서 이렇게 말하더만요. 눈을 한 번 뜨고 \"여보 고맙소\" 딱 한마디만 하는 것을 들어도 한이 없겠다 그래요. 아무리 수고해도 소용이 없어요. 반응이 없어요. 말이 없어요. 느낌이 없어요. 깨달음이 없어요. 이게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지요. 감사하는 마음, 이 얼마나 귀중한 것입니까? 그 깨달음 속에 있어요.
인간이 무상하다, 하는 것을 알면 불교인입니다. 인간의 삶에 도리를 알면 유교인입니다. 은혜를 알면 기독교인입니다. 오직 은혜를, 모든 것이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면 그가 바로 그리스도 인이요, 신앙인 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입에 감사가 없으면 그리스도 인이 아닙니다. 범사에 감사할 것입니다. 특별히 감격하는 것입니다. 감격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고 또한 감격이 간증으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습니다, 하는 실천상황이 여기서 나오고 있습니다. 베푸는 마음, 이것이 감사입니다. 기뻐하는 마음이 감사입니다.
여러분, 깊이깊이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깨닫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감격하고 이 감격한 마음을 행동에 옮겨 보세요. 이제부터 새로운 삭개오의 생이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405장에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고마워.\' 이것은 죤 뉴우톤(John Newton)이라고 하는 분이 본래 노예상인이었습니다. 극악한 사람이었는데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은혜! 감격 감격합니다. 그 감격으로 주를 찬양하며 피곤 없이 한 평생 복음을 전하면서 살았습니다. 여러분 성공이 뭐겠습니까? 감사하는 것이 성공이요 기뻐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종은 울려 소리가 나야 종입니다. 그 마음에 벅찬 감격이 있고 감사가 있으면 바로 그가 행복한 자요 성공한 사람인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넉넉히 감사할 만큼 주께서는 은혜를 베풀어주었건만 우리는 이루지 못한 것, 못다 한 것, 얻지 못한 것만 생각하며 원망과 불평에서 헤어나지 못함을 주여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는 것은 주의 은혜를 깊이깊이 깨닫고 저 삭개오와 같이 즐거워하며 감격하며 주를 영접하며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베푸는 마음으로 바꿀 수 있는 그러한 주님의 사람들 되고 감사로 원망을 이기고 기쁨으로 모든 어두움을 물리칠 수 있는 주님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6.제목 : 감사의 은혜적 차원
본문 : 고전-01-04-9
아주 특별한 상이 있습니다. Master of Influence라고 하는 상입니다. 그것이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귀한 영향을 끼친 그분에게 드리는 그런 특별한 상입니다. 전 미국 강연가 협회가 유명한 대중연설가로 인정해서 주는 상입니다. 그 내용은 최고의 동기부여가, 또 자기개발과 성공학의 대가에게 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성공적으로 살았고,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생의 의미를 부여해주고 삶의 동기를 격려해준 그런 사람에게 주는 특별한 상입니다. Master of Influence. 여기 상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매우 알려진 인물입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정상에서 만납시다\'라고 하는 책을 쓴 저자입니다. 이름이 좀 특별합니다. 지그 지글러(Zig Zigler)입니다. 그가 75세에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면서 자서전을 썼습니다. 그 자서전의 마지막 결론 부분만 말씀드립니다. 그 결론에서 그는 딱 한마디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은 감사뿐이었다. 감사 외에 다른 할 말이 없는 그러한 일생이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자신은 혼자서 살아가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천사가 나를 늘 지켜주셨다\' 하는 것을 거듭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한 가족들에게 특별히 감사했습니다. 그 딸과 그 부인과 자녀들에 대해서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었다. 나를 참으로 행복하게 해준 귀한 동반자였다\'고 그렇게 기도하고 있고 그 다음에는 그 이웃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은 참으로 좋은 사람들이었다. 참으로 내게 고마운 분들이다. 감사하고, 감사외에 다른 말이 없다\' 그렇게 그의 인생을 결론짓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성공이 어디에 있습니까? 많이 가졌다고 많이 배웠다고? 권세를 누렸다고? 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문제는 얼마나 감사할 수 있느냐, 어디까지 감사할 수 있느냐, 얼마나 충만한 감사 속에 살고 있느냐, 또 감사로 생을 마감할 수 있느냐,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성공을 가늠할 수 있는 바로메타라고 생각합니다. John J. English라고 하는 분이 Spiritual Freedom 이라고 하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사랑의 경험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공부를 많이한다고 사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이 좋아진다고 사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좀 잘살게 되었다고 사람이 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까? 사람으로 사람되게 하는 것은 오직 사랑의 경험입니다. 아주 뜨거운 사랑, 아주 확실한 사랑, 아주 절대적인 사랑을 경험하게 될 때에 \'이대로 죽어도 좋다. 이런 사랑을 한 번 해보고 한 번 받아보았으면 이대로 죽어도 좋다.\' 그만큼 화끈한 경험을 해야 사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것, 그것은 사랑의 경험 뿐입니다. 그 속에 감사가 있습니다. 그 속에 행복이 있고 삶의 의미와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문화, 우리의 사회생활 속에서 우리 민족들이 좀 무언가 잘못된 문화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감사하다고 하든지 고맙다고 하면 내가 낮아지는 줄로 생각하는 잘못된 생활 철학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것에 인색합니다. 안하려고 듭니다. 더욱이 자기 식구들에게 자신의 부인에게 고맙다고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말 안해도 안다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애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내가 다 벌어서 먹여 살리는데 고마울게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럴까요? 문제는 이것입니다. 상대방에게 고맙다고 하는 순간, 그는 높아지고 나는 낮아진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아무래도 DNA가 문제입니다. 이것은 유전적입니다. 공자로부터 온 것입니다. 유교사상에서 온 것입니다. 문화적으로 말하면 이것이 바로 식민지 문화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체질이 감사를 모르는 체질이 되었습니다. 아주 문제입니다. 그 고맙다는 말을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합니다. 생전 해봤어야 알죠. 어느 순간이라도 고맙다고 하는 순간, 내가 없어지는 것처럼 내가 비하되는 것처럼 내가 망가지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자그마한 일에도 고맙다고 하면 그 순간 자신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나의 인격이 높이 높이 올라가는데 그것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감사를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아주 뿌리깊은 병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랑의 경험이 감사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인간이 성숙되면서 그 순간 감사 앞에 내가 겸손하게 됩니다. 감사로 인해서 내가 자유해집니다. 감사로 인해서 미래가 보입니다. 감사해 보십시오. 행복할 뿐더러 앞이 환하게 보입니다.
어떤 유대 어머니가 별로 배운 바가 없는 무식한 어머니었습니다만은 자식은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그 비결이 어디 있었느냐 하면 어머니는 늘 딱 세가지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하나는 모든 일에서 감사하라.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라. 그저 감사하라. 항상 감사하라. 두 번째는 원망하는 사람하고 놀지 말아라. 여러분, 주변에 친구든 누구든 딱 만났을 때에 뭐 어쩌고 어쩌고 원망하거든 다시는 만나지 마십시오. 그것은 전이됩니다. 원망하는 사람과 사귀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가 감사하는 사람과 친하라. 그리고 감사하는 사람과 함께하라. 이 세마디로 훌륭한 유명한 자녀들을 양육했다는 이야기이 있습니다. 일본에 우찌무라 간죠라고 하는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글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저주가 있다면 그것은 질병도 실패도 배신당하는 것도 아니다. 만일에 저주가 있다면 세가지이다. 하나는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것, 아무리 믿어보려해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버림받은 심령입니다. 두 번째는 성경을 읽어도 요절을 외워도 성경은 많이 안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 지식적인 책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와야 됩니다. 설교말씀을 듣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내 귀에 들려와야 합니다. 이것이 안들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생각하면 원망과 불평뿐입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 1장 4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도할때마다 기쁨으로 간구한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로마 감옥에 있습니다. 감옥 밖에 있는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합니다. 저는 이 구절을 반대로 뒤집어 봅니다. 우리는 어떠냐? 생각할 때마다 분하고 기도할 때마다 눈물이고, 이것이 망조입니다. 이것이 예수믿는 사람입니다. 자, 보십시오. 생각할 때마다. 이런 일을 생각하고 저런 일을 생각하고 이 분을 생각하고 저 분을 생각하고 다 고맙습니다. 다 고마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심령이고 생각하면 원망하고 분하고 한이 맺히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우찌무라 간죠는 말하고 있습니다. \"감사는 은혜에 대한 마땅한 응답입니다.\" Right Response, 마땅한 응답이 감사입니다.
감사는 차원적인 문제입니다. 첫째 차원이 무엇인가 하면 받은 바를 아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받았다. \'모든 것은 받은 것이다\' 할 때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신 은혜를 안다고 하였습니다. 받았다. 여러분, 내가 준 것과 받은 것, 어느 쪽이 많습니다. 감사라는 것은 받을 때 감사합니다. 받은 바에 대한 감사입니다. 냉수 한 그릇이라도 받았을 때에 감사한 것입니다. 받은 바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감사로 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쟁취한 것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가끔 파업도 하고 대모도 하면서 빨간 띠를 두르고 \'결사반대! 쟁취!\' 이런다는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할 때마다 저렇게 해서 얼마를 얻어내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마음이 서글픕니다. 그로 인해서 마음이 황폐해집니다. 그 심정이 망가집니다. 이렇게 소리지르다보니까 그 다음에 얻은 데 대해서 고마움이 없습니다. 쟁취한 것에 대해서는 감사가 없습니다. 공산주의가 망한 이유가 어디있습니까? 자본이 없는 것도 아니고 기술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왜? 쟁취한 것이니까. 혁명, 쟁취. 그래서 북쪽에 가서 다니며 보면 모내기 할 때에 다니면서 보면 \'모내기 혁명\'이라고 했습니다. 모내기가 왜 혁명입니까? 그것도 싸움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싸워서 이기고 이렇게 살다보면 감사가 없습니다. 여러분, 빼앗은 것에 대해서 어떻게 감사가 있겠습니까? 쟁취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행복이 없습니다. 그것은 미래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 뿐입니까. 자기 의를 내세울 때에도 감사가 없습니다. 자신이 잘났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율법적 관계로 사는 사람에게도 감사가 없습니다. 소유란 소유하는 순간 약간의 기쁨이 있는 것 같아도 소유하자마자 또 다른 욕심에 사로잡힙니다. 걱정이 많습니다. 성취감이라는 기쁨이 있습니다만은 성취되는 순간 불안합니다. 지속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로지 감사만이 그 사람의 마음을 자유하게 합니다. 참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운명으로 생각하는 자에게도 감사가 없습니다. 팔자요 운명인데 누구에게 감사를 하겠습니까? 이래서 감사가 없는 생활이 그 민족이든 그 문화든 그 나라든 다 망가지고 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차원은 깨달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많이 은혜 받았다고 많이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깨닫는 부분 만큼만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의식이요 의식과 감성이 합쳐지는, 그래서 지성과 감성이 통합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있습니다. 얼마나 깨닫느냐 하는 것입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지만 아주 옛날 젊었을 때 보니까 헬라사람들 가운데 감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 비를 맞으면서 가다가 손을 들고 \"오 신이여\" 그러며 감사를 하더랍니다. 왜 감사하냐고 물어보니까 이 눈썹이 있어서 비가 이렇게 밑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또 감사합니다.\" 무엇이 감사하냐 하니 콧구멍이 밑으로 뚫린 것을 감사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위로 뚫렸으면 내가 어떻게 되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생각을 하지 못했지요? 생각해보면 감사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엄청난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의 깊이에서 감사하는 것은 사실인데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 때에 깊이 생각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 남이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까지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지각을 가질 수 있느냐? 그것이 바로 역경입니다. 사람은 평안하게 되면 둔해집니다. 배부른 사람은 코가 둔해집니다. 배고픈 사람이 코가 예민합니다. 환난과 핍박과 고난, 남다른 어려움을 치를 때에 그는 은혜에 대해서 민감해집니다.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 옛날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빌립보 1장 12절에서 말합니다.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그는 로마 감옥에 있습니다. 또한 그는 감옥에서 2년동안 재판도 없이 처박혀서 고생을 했습니다. 로마로 가는 동안 배가 파손이 되었습니다. 죽을 고생을 3년 동안 했지만 이 로마 감옥에 갇혀서 생각해보니 이 모든 과정이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통해 큰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알고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바란다.\' 알았습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남다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고난과 핍박과 환난과 어려움과 같은 것은 웃음으로 감사하기보다 눈물로 감사할 때에, 다른 사람이 미처 상상도 못하는 세계를 생각하게 될 때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1년동안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은혜를 오늘 이시간에 생각하면서 감사할 수 있는 그런 감사절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 너희에게 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은사에게 부족함이 없는 것을 감사하고 우리의 신앙을 지켜갈수 있도록 은사를 공급해 주었어요. 계속적으로 은사에 부족함이 없는 이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믿음으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좋은 여건에서도 미래가 없는 일에는 감사할 수가 없어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있으면 감사할 수가 없어요. 미래에 대한 불확실, 그 속에는 감사가 없어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감사하는 순간, 미래가 열립니다. 믿음이 생깁니다. 현재로부터 미래로 향하는 그것이 바로 감사에서 열린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우리의 믿음을, 우리의 이 감사 생활을, 우리의 신앙생활을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주님이 견고케 해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그런 고로 감사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으로 향할때에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 많은 능력 가운데 살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마침내 저주를 받아 광야에 엎드러져 죽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왜 원망했겠습니까? 아니 성경대로 보세요. 물이 없습니까? 농사를 지으랍니까? 하늘에서 주는 떡가루를 가지고 밥 먹고 편안히 지내는데 왜 원망하는거요. 왜 원망하다 죽었습니까?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확실한 소망이 없었기 때문에 오늘 조그마한 어려움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미래를 향한 믿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야 감사하게 되고 놀라운 것은 감사하는 순간 믿음을 가지게 되고 믿음을 가지게 되면 소망이 보입니다. 그런 고로 또 다시 감사하게 되는 것이요 또 나아가서는 사랑하게 되는 것이 올시다. 여러분 감사하면 사랑을 알게 되고 사랑 받는 자가 됩니다. 여러분 언제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해보세요. 모든 주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깊이 깨닫게 됩니다.
또 감사하면 고독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혹 여러분 고독한 사람 있습니까? 그 사람은 감사할 줄 몰라서 그럽니다. 내가 \"감사합니다\" 하는 순간에 마음이 열리면서 고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하게 됩니다. 감사하게 될 때에 약속의 땅 미래가 환하게 보입니다. 감사하게 될 때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고 나아가서는 창의력을 가지게 됩니다. 밝은 지혜가 생깁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하게 되면 생각이 둔해집니다. 점점 고집에 빠집니다. 아주 영영 절망에 빠지고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이제 감사로 모든 원망을 물리치는 순간 가슴이 열리게 됩니다. 교만해서 받은 바를 모르는 사람은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오로지 겸손한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감사는 베푸는 자의 것입니다. 감사를 행동으로 옮기십시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베풀게 될 때에 내가 받는 은혜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을 가지게 되고 더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감사하게 될 때에 믿음이 새로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막막하고 답답하고 절망적인 것 같으나 미래가 환하게 보입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허물없이 견고케 하시리라. 이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모든 환란 어려움을 다 넘어설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감사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입니다. 이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많은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은혜를 모르고 당연히 한평생 감사를 해도 끝이 없을 것이건만 원망과 불평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참으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믿음도 주시고 또한 그 거룩한 사랑에 감격할 수 있는 그런 확실한 겸손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감사로 원망을 물리치고 빛으로 어두움을 몰아내고 사랑으로 미움을 이기면서 감사로 충만한 그런 승리의 생활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7.제목 : 하나님, 감사합니다
본문 : 고후-9-6-15
우리가 언제 하나님 아버지 앞에 감사를 드리지 아니하겠습니까만 이 처럼 1년에 한번 한 주일을 정해서 일년동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퍽 의미가 깊다고 생각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 개인에게 주신 은 혜가 얼마나 큽니까? 우리 가정에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더구나 우리 교회에 베푸신 은혜는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 기 관과 단체가 평안한 가운데 각자의 책임을 잘 감당하게 된 것을 감사드 립니다. 본 교회에서 후원하는 여러 나라 선교사들과 농어촌 교회에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주신 것을 감 사드립니다. 더구나 우리 교회의 새 성전건축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잘 진행되고 있는 것을 감사드립니 다. 지금 공정이 약 80퍼센트 진전 이 되었고 이제 내부공사와 조경공 사만 되면 정말 아름다운 예배당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내년 2000년 봄에 입당하게 될 것인데 생각만 해 도 감격스럽습니다. 그 동안 10여 년 동안 불편한 장소에서 고생 많이 하셨는데 이제 서너 달만 더 고생하 면 되겠습니다.
사실 우리 나라가 한국동란 이래 처음으로 IMF라는 국난을 겪게 되 어 우리 국민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 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이제 IMF 2년의 터널을 지나면서 고생도 많았지만 배우고 깨달은 바도 많습 니다. 아직도 여러 가지 문제가 많 이 남아있지만 그래도 어려운 경제 가 다소 회복되는 단계에 이르게 된 데 대하여 감사드릴 수밖에 없습니 다. 또한 일년동안 하나님께서 온 세계교회와 온 세계 나라 위에 축복 을 더하여 주신 것에 대해서도 감사 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 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 야 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그리스 도인은 평소의 생활이 감사의 생활 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생활과 일생이 하나님의 은 혜를 감사하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 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어보면 그 는 언제든지 제일 먼저 성도들을 향 해 문안을 한 다음에는 하나님께 감 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편지 를 읽어보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권 면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범사에 감사하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 라.\"
이와 같은 글을 쓴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만 감사하라고 한 것 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생활을 보면 그의 생활 자체가 감사의 생활 이었습니다. 바울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감격이 사무쳐 있었 고 따라서 그의 하루 하루의 생활, 한 달 한 달의 생활, 아니 일생의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사도 바울은 감사 의 생활을 할 수가 있었습니까? 그 의 감사 생활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 습니까? 우리는 보통 \'모든 것이 다 평안하고, 환경이 좋아야 감사한 생 활을 할 수 있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경우는 좋은 환 경이나 평안한 생활 때문에 감사한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1장 하반부를 보세 요. 거기에 보면 사도 바울의 일생 을 기록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매를 몇 번 맞고, 감옥에 몇 번 들어 갔 고, 몇 번 파선을 당하고, 길의 위험 과 산의 위험과 도적의 위험과 도시 의 위험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도 핍박을 받았고, 이방 사람에게도 핍박을 받았습니다. 다 메섹에서도, 에베소에서도, 고린도에 서도 예루살렘에서도 핍박을 받았습 니다. 로마에 가서도 대부분 감옥에 있었습니다. 바울의 일생은 거의 핍 박과 환난과 곤고의 생활로 점철되 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가운데서도 감 사의 생활을 했습니다. 어떻게 그가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의 생활 을 할 수가 있었습니까? 그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우리의 몸이 건강하 면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지 않 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병들고 몸이 괴로운데 무슨 감사를 할 수 있습니 까?\"라고 말합니다.
\"사업이 잘 되 어서 많은 이익을 남기게 되었으면 하나님 앞에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업이 어려워 많은 손해를 보았는데 무슨 감사를 할 수 있습니 까?\"
일반적으로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몸이 건강해 서 혹은 사업이 잘 되어서 감사한 생활을 한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후 서 12장에 보면 자세히는 알 수 없 지만 그의 육체 가운데 찌르는 가시 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가 분명히 심한 고통을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육신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 히 기도했지만 그냥 두었다고 했습 니다. 그러니까 찌르는 가시를 그냥 가슴에 안고 지냈습니다.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 한 내용 중에도 그가 병이 나서 다 른 곳에 가지 못하고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전도했다는 말이 있습니 다. 사도 바울은 몸이 건강한 사람 은 아니었습니다. 건강하기 때문에 그가 감사와 기쁨의 생활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우리 몸이 건강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러나 사도 바울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 니다.
또한 우리 가정이 다 평안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 이 가정에 베푸신 축복입니다. 우리 가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 나님의 은혜가 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의 경우 는 이 가정에서 오는 기쁨도 없었습 니다. 바울은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 습니다. 종일 일하고도 평안히 들어 와 쉴만한 집 일정한 가정이 없이 평생을 살았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 리 둘 곳이 없다\"
고 주님께서 말씀 하신 대로 바울은 일생동안 나그네 로서 이곳 저곳을 방랑하며 육신적 으로도 평안히 쉴 곳이 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제가 가끔 전도집회 때문 에 지방이나 외국에 가면 평안한 숙 소를 마련해 주고 좋은 것으로 대접 을 해 줍니다. 그러나 내 집, 내 가 정만큼 평안하지는 못합니다. 여행 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그렇게 평 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일평생을 가정이 없이 살았으니 그 불편함을 무엇으로 다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 사도 바울의 감사한 생각과 생활이 어디서 생겼습니까? 그것은 밖이 아니라 그 속에 있었습 니다. 그의 처한 환경이나, 그의 건 강이나, 그의 가정이나, 그의 재산이 나, 그의 명예나, 그의 지위나, 그의 성공이나 그런 데 있었던 것이 아닙 니다. 그의 감사생활은 그 속 깊은 심령 속에서 우러나왔습니다. 여기 서 말씀하는 대로 말할 수 없는 그 의 은사로 인하여
\"하나님, 감사합 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말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사를 받았습 니다.
아까 우리가 부른 찬송대로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합니다. 이구난설(以口難說)입니 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이필난기 (以筆難記)입니다. 얼마나 크고 귀한 지 말로다 할 수 없는 큰 은사를 마 음속에 받았습니다.
그 은사가 무슨 은사였을까요?
그 은사는 아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되고 믿게 되었습니 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신앙은 말하자면 그의 삶의 뿌리요, 그의 감사는 거기서 자란 나무에 맺는 열 매였습니다.
로마서 7장을 읽어보면 사도 바 울의 그야말로 세기적인 고민이 기 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 다. 그는 심각한 도덕적인 고민을 느꼈습니다. 그는 양심적인 인물이 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구약 을 배운 사람입니다. 그는 옳은 사 람이 되기를 힘썼습니다. 사람 앞에 서뿐만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도 부 끄러울 것이 없이 살아 꼭 옳은 사 람 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 의를 얻기 위해서 힘썼습니다. 구약은 우리에게
\"네가 하나님 앞에 서 의인이 되려고 하면 계명을 지켜 라. 율법 따라 살아라\"고 가르칩니 다. 그래서 그는 양심대로 계명을 지키려고 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사 도 바울이 이와 같이 양심적으로 계 명을 지키기를 힘써도 자기 육체 속 에 다른 힘이 있어서 그대로 살 수 없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는 또한 죄의 세력이 있 었습니다. 육신을 기초로 하는 죄의 세력이 있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습니 다.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 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 에서 나를 구원하랴\"고 긴 탄식을 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고 그리스도 의 십자가를 보게 된 것입니다. 십 자가의 뜻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 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새 생명의 복을 깨닫게 되고, 성령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망극하신 은혜를 받은 다음에 바울은 외쳤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다시 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를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했 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죄에서 해방을 받았기 때문입 니다. 죄에서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 습니다. 이 구속과 해방의 기쁨은 언제든지 그로 하여금 이 은혜를 감 사하여 보답하려는 감사의 생활로 변하게 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 은 그리스도를 만난 때부터 예수 그 리스도는 옛날 승천하신 그리스도만 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언제 나 자기 자신과 함께 계신 것을 깨 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사는 것이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육에 속한 자기는 죽었습니다. 그 대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속에 살 아 계신 것을 항상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나를 위해 서 변명할 때 내 친구들은 다 나를 떠났습니다. 한 사람도 나를 도와주 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께 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강한 힘을 주고 주께서 언제든지 나와 같이 계 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전도하러 갔습니다. 그곳에 죄가 너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전도할 기회가 너무 컸습니다. 그러나 반대하는 유 대 사람들은 벌떼와 같이 일어납니 다. 그때 주님께서 특별히 사도 바 울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다고 했습 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이 도시에 내 백성이 많으니 입을 닫지 말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하라.\"
살아 계신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사도 바 울과 함께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중해에서 큰 풍랑 을 만났었습니다. 사실 그 배에는 바울뿐만이 아니라 로마 군인들과 뱃사람 그리고 로마로 호송되어 가 는 많은 죄수들이 있었습니다. 이 배에 타고 있었던 사람은 276명이나 되었었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은 그 대로 있어서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 진 절망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이 풍랑의 와 중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절망 중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 했습니다.
\"여러분,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 밤에 내 곁에 서서 말씀하셨습니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말 씀하고 있는 한, 내 삶에 대한 하나 님의 인도가 계속되고 있는 한 풍랑 은 두려워 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 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 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 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 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풍랑 속에서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 지 발견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 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삶 의 이유와 자기들에게 주어진 사명 이 무엇임을 각성하고 있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사 명을 알고 있습니까? 왜 우리가 이 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 입니까? 우리의 존재 이유를 아는 한 절망은 없습니다. 풍랑 속에서도 노래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풍랑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 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풍랑 에도 불구하고 함께하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 을 듣자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풍랑 만나 절망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 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여러분, 안 심하십시오. 우리는 마침내 이 풍랑 을 극복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의 사명도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 다. IMF의 거센 풍랑 때문에 절망 에 빠진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부통계에 의하면 IMF체제 2년 동 안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극심해 졌다고 합니다. 20퍼센트는 전보다 오히려 나아졌는데 나머지 80퍼센트 는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고 합니다. 국민 한 사람의 최 저 수입이 월 23만원인데 이것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 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고난의 상황에서 하나 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편에 서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하셨 기 때문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 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 리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풍랑 만나 어쩔 줄 몰라하며 두려워하는 제자 들에게 주님이 다가오십니다. 그리 고 겁에 질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 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 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심하지 못하고 당황하며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서 주님은 이렇 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
그들이 조금 만 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면, 그 리고 조금만 더 주님을 신뢰할 수 있었다면, 풍랑 속에서도 찬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풍랑 속에서 배의 갑판에 사람을 모으고 축사를 했습니다.
\"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 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 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먹기를 시작하매\"(행 27:34∼35).
상상해 보세요. 지금 큰 풍랑이 일고 있습니다. 배는 미친 듯이 흔 들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절망의 벼랑 끝에서, 생사의 갈림길에서 아 우성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 들을 잠잠하게 한 자리에 모아놓고 떡을 떼며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 를 올리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생각 해 보세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풍랑 속에서 어떻게 살고 있 습니까? 하늘을 바라보시겠습니까? 찬양을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바울 처럼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고 백할 수 있습니까?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 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 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 라.\"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 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주님께 감사 하는 사람들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4장 13절 에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 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 씀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적 그리스도만이 아 니었습니다. 현재에 자기와 같이 계 셔서 간단없이 능력을 주시는 그리 스도였습니다. 그러므로 풍랑을 만 날 때도, 핍박을 받을 때도, 돌에 맞 을 때도, 파선을 당할 때도, 조금도 두려워 할 것이 없었습니다. 언제든 지 주님의 능력이 함께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을 당할 때 사 도 바울은,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 는 말밖에는 할 것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다 이와 같 은 믿음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십 자가로 죄에서 구속을 받으셨습니 까? 우리가 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 께서 우리와 같이 하시는 것을 아는 이 새로운 믿음, 참 믿음, 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도 순 경이나, 역경이나, 괴로울 때나 평안 할 때나, 초막이나 궁궐이나, 밤이나 낮이나, 언제나 감사로 충만한 생활 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생활을 하게 되니까 자연히 그의 생활에는 많은 열매가 맺혔습니다. 우선 마음 속에 성령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사 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 성, 온유, 절제의 열매가 맺혔습니 다. 가는 곳마다 죽은 심령을 구원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었습 니다. 가는 곳마다 주님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렇게 열매를 맺게 되 니 자연히 마음속에서부터 감사함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주를 위해서 무슨 열매를 맺든지 열매를 맺는 사람일수록 감사한 마음이 더 많이 있습니다. 주를 위해서 한 사 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 다면 그 사람은 감사한 마음이 더 많습니다. 주를 위해서 다른 사람에 게 옷 한 벌이라도 줄 수 있고, 목 마른 사람에게 냉수 한 잔이라도 줄 수 있었다면 그 사람에게는 감사한 마음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주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많 지는 않지만 선교비를 매달 꼭 내 고, 착한 사마리아인 주일에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돕는 일에 손을 펼 수 있었다면 그 사람에게는 더 기쁨이 있을 것이고 감사한 마음이 있을 것 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사도바울은 항상 빛나는 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우리를 위하여 지극히 크고 영 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는 것을 분명히 알고 살았습니다. 이 세상에 서 내가 조금 환난을 당하지만, 이 세상에서 내가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지만, 이 모든 것은 하늘나라의 큰 영광을 더하게 하는 것이니 얼마 나 감사합니까?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 갈 길을 다 달리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나를 위해서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는 것을 언제나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그 러니 감사한 마음이 자연히 북받쳐 올랐습니다.
사실 감사는 믿음의 척도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 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마는 하나님의 은혜인 줄을 모 릅니다. 그러므로 하박국의 말처럼 고기가 많이 잡히면 그물에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다가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점점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평안하면 감사합니 다. 그러나 괴로우면 감사를 드리지 못합니다. 건강할 때는 감사해도 병 이 나면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이 나 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점점 자 라나면 평안할 때도 괴로울 때도, 건강할 때도 병들었을 때도, 성공해 도 실패해도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는 우리
\"믿음의 척도\"입니 다.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의 신앙 에 들어가게 될 때는 문자 그대로 성경말씀처럼 모든 일에, 범사에 감 사하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의 나라 는 믿음으로 구원 얻은 사람만 모였 기 때문에 불평이라고는 없습니다. 불만도 없습니다. 하늘나라에는 기 도도 없습니다. 하늘 나라에는 목사 의 설교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도 찬송과 감사만 있습니다.
이 세상 교회에서는 기도가 필요 합니다. 왜요? 기도를 통해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 상 교회에서는 예배 드릴 때 목사의 설교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늘 나 라에서는 예배할 때 찬송과 감사밖 에는 없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령이 오직 찬송과 감사로 충만하다면 이 자리가 곧 하 늘나라의 그림자가 될 것입니다. 하 늘 나라의 축복을 미리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은혜를 받아서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떤 환경 과 처지에서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8.제목 : 어떻게 감사드릴 수 있습니까?
본문 : 골-3-5-
골로새서3장 5 절부터 17 절까지 말씀
이미 봉독하신 말씀 가운데서 15절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 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 라.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믿음의 자녀들을 향하여 간절하게 권면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여러 가 지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감사해야 할 일이 있을 때 감사하 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닌가? 라고 말씀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한 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실 때 갈릴리와 사마 리아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어떤 한 촌에 들어 가셨습니다. 거기서 문둥병자 열 명을 만나게 되었 습니다. 유대인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가운데는 사마리아 사람도 한 사람 끼어 있었습니다. 여러 분이 잘 아시는 대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감정이 좋지 않아서 서로 접촉하기를 꺼려했 습니다. 그러나 문둥병 환자들은 다같이 불행한 병에 걸려있기 때문에 불행한 가운데 서로 동정 하면서 한 집안이 되어서 여기저기 쫓겨다니며 유대 사람이나 사마리아이나 사람 할 것 없이 같 이 지냈던 모양입니다. 그 당시 문둥병은 죽음과 같은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사실 이 사람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 병은 전염성이 있어서 이 병에 걸리면 격리시켰습니다. 사회에서 추방되 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병에 걸린 사람들끼리 모여 지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친구를 가질 수가 없었고 단순히 같은 병에 걸린 것 때문에 함께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이 사람들이 있는 곳 가까이로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 사람들은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을 직접 뵙게 되니 너무 감격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주님을 향하여 절실하게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님은 열 명의 문둥병 환자를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이 사람들은 서로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저희는 예수님이 말씀을 들으 면서 아무런 느낌도 변화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병에서 깨끗해져라 고 하시면 온몸이 불덩어리 같이 뜨거워지든지, 감당할 수 없는 경련을 일으키든지,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짜릿하든지, 어떤 체험이 있기를 기대했는데 그런 체험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의 말씀을 들은 이 사람들은 기대하는 바와는 달랐지만 실망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했 습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순종이 따릅니다.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저희가 제사 장에게로 가다가 다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많은 문제와 요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는 하는데 응답받지 못하는 일이 많 아 실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다음 단계를 위하여 충분한 힘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리 고 주님은 언제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열 사람의 문둥병 환자는 함께 고통을 받았습니다. 함께 울었습니다. 함께 한숨쉬었습니다. 함 께 절망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말씀 듣고, 함께 순종했더니, 함께 병이 나았습니다. 그들은 함께 기쁨이 충만하여 제사장들에게 가서 그들의 몸이 깨끗이 나은 것 을 보이고 다 나았다는 증명서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일반 사회 사람들과 같이 지낼 수 있었고 그립던 가족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뻐 뛰며 세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오직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깨닫 고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 돌리는 감사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열 사 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디있느냐? 이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밖에는 하나 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없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열 사람의 문둥병자들이 병고침을 위하여 다 함께 예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다함께 완전히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이 돌아와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열 사람이 간구했는데 한 사람만이 돌아와서 주님께 찬양했습니다. 그러면 다른 아홉 사람은 왜 주님께 감사드리지 못했습니까?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 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성의 일면입니다. 이 사람들처럼 우리도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했 을 때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간구합니다. 그 후에 우리가 그 어려움에서 건짐을 받았습 니다.그런데 그 어려움에서 건짐 받고 나서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지키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영국의 트렌치 감독은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에 대해서 주석을 써 내려가다가 자기가 믿는 바로 는 모든 은혜 가운데 감사할 줄 아는 은혜는 제일 드문 은혜라 고 말했습니다. 우리 동양에 내려 오는 말 중에도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 라고 한 것이 의미있는 말이라고 생각합 니다. 은혜를 구하는 이는 많지만 은혜를 받은 다음에 그것을 기억하는 이는 적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특별히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도 그 아홉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옛 날 다윗도 스스로 자기 영혼을 깨우면서 하는 말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송하여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이 열 사람 가운데 아홉 사람이 은혜를 잊어 버렸는데 이상하게도 전부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을 비교해 보면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유대인이요, 또 은혜 를 깨달아 알 만한 사람이 어떤 면으로 보든지 유대인이 아닙니까? 이 유대인들은 말하자면 아브 라함의 자손입니다.모세의 율법을 배운 사람들입니다. 여러 선지자의 교훈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매 안식일이면 회당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 아홉은 전 부가 은혜를 잊어 버렸습니다. 은혜는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은혜를 받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으례히 받을 것으로 생각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은혜가 너무 크면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작은 은혜는 기억하지만 큰 은혜일수록 오히려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열심히 간절히 하는 사람도 은혜를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더구나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의 결과로 은혜를 받았는데도 그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믿음있는 사람도 은혜를 잊어버리 기 쉽습니다. 왜 우리가 감사하지 못합니까? 축복 대신에 고민거리에 정신을 쏟고 있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 합니다. 아홉 사람의 문둥병 환자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친구도 잃고 재 정적으로도 궁핍했습니다. 지난날의 고통이 오늘의 기쁨을 소멸시키는 일이 많습니다. 벤허 라는 작품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현재의 축복에 감사하는 것만이 지난 날의 고통을 잊을 수 있다 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 혼자 돌아와 감사하는 것을 보시고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고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의 문둥병자가 다 나음을 받았지 만 그 은혜를 깨닫고 돌아와서 감사드린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머지 아 홉 사람은 예수님의 은혜를 잊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감사드릴 수 있습니까?
첫째로,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은혜 가운데 감사할 줄 아는 은혜는 보기 드문 은혜 입니다. 세계적인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r)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큰 덕을 가르친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 이라고 했 는데 자기로서는 꼭하나 더 넣을 것이 있다고 하면서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은혜를 구하는 이는 많지만 받은바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사 람은 심히 적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문자 그대로 조금 전에 말씀드린 문둥병자와 같이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 이었는데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함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십자가의 은혜를 늘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드립니까? 우리가 깊이 생각지 아니하고 늘 힘 쓰지 아니하면 이 큰 은혜를 잊어 버려서 감사생활을 하지 못하기가 쉽습니다. 여러분,우리가 세상에 처음 올 때 무엇을 가지고 왔습니까? 벗은 몸으로 왔습니다. 빈 손으로, 그저 핏덩이로 왔습니다. 이 세상에 난 다음에 그냥 내버려두었다면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목욕시키고, 젖먹이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눕히고, 말도 하나하나 가르쳐주고, 학교에 보내주고 다 커서 한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키움을 받았는데 어머니의 은혜, 아버지의 은혜도 모르고, 모든 축복의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지 못하고 혼자 된 것 처럼 생각하는 분은 없습니까? 성경에 보면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짐승은 오히려 그 주인을 아는데 사람은 부모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그 임자가 되는 하나님을 모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 까?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그 당시 불신세계에 대해서 말할 때 두 가지로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한다 고 했습니다. 믿지 않은 세상 사람들의 생활을 보면 하나님이 계신 것을 어느 정도 압니다. 그러면 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줄 모릅니다. 세계의 어느 문헌을 보아도 우리 성경처럼 감사하라 는 말과 찬양하라 는 말이 많이 나온 책은 없습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는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면 성경에는 왜 이렇게 감사하라 는 말이 많이 나옵니까? 본래 성경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 님을 믿는 경건한 사람들의 손을 통해서 쓰여진 까닭입니다.우리가 오늘을 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첫 번째 감사주일은 1620년 102명의 청교도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영국을 떠 나 늦가을 이맘 때 미대륙에 도착했던 때입니다. 오늘의 미국은 부강한 나라이지만 그때는 그렇 지 못했었습니다. 그저 황막한 광야와 산과 들뿐이었습니다. 그 해 겨울 먹을 것이라고는 배에 싣고 오며 먹다 남은 거 얼마밖에 없었습니다. 그 해 겨울은 대단히 추웠습니다. 날씨는 찬데 먹을 것은 없고, 입을 것도 변변치 않고, 시설 도 엉망이어서 그 해 겨울을 지내는 동안에 반 이상이 굶어 죽고, 병나서 죽고, 얼어죽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먹을 것이 점점 없어져서 옥수수 몇 알씩을 배급 준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첫해 농사를 짓고,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한 것을 깨닫고, 특별히 하루 를 정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풍속이 생긴 것입니다. 그들이 만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고 하면 그런 감사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평안할 때에만 감 사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운 때에도 감사 드립니다. 순경에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역경에도 감 사드립니다. 셋째로, 은혜를 보답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 116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고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성도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후 대해 주신 것을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와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사무엘에 의해서 베들 레헴 목동의 지팡이를 이스라엘 나라의 왕의 홀로 변하게 하여 주신 그 확증을 믿었습니다. 그에 게는 이와 같은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견뎌 냈습니다. 비록 사울왕이 자기에게 진노하고 그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다윗은 그의 희망 이 무엇인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고 그의 희망의 근거를 밝혔습니다. 시편 116편을 쓴 시인도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라고 말했습니 다. 성도의 생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감사 감격하여 내가 어떻게 하면 이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할까 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인을 환난 가운데서 건져 주셨습니다. 넘어짐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이 놀 라운 은혜를 깊이 생각합시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서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감사와 감 격이 없는 신앙생활은 옳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이 시인은 여기서 그의 결의를 표현합니다. 내가 구원의 잔을 들겠나이다, 내게 주시는 어떤 잔이라도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과 열의입니다. 그리고 내가 감사의 희생을 주께 드리겠나이다 했습니다. 마음속에 진정으로 감사한 심정을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려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 다음부터 어떻게 평생 동안 늘 감사와 감격의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까? 디모데전서 1장 12절 이하의 말씀을 보세요. 여기 그의 간증이 있습니다. 나를 능하 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 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 도록 풍성하였도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 그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자기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해 보겠다고 하는 보답의 심정을 가 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주님 때문에 그렇게 심한 어려움을 당해도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 하고 그렇게 수고를 많이 하면서도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역사하는 주님의 은혜 라고 했습니다.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 러므로 바울은 그처럼 많은 주의 일을 하면서도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이런 선언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 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아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벅찬 심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깊은 감격의 믿음은 그로 하여금 주님의 교회를 위해 봉사하며, 만민을 위해 봉사하는 봉사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끌림을 받아서 안할래야 안할 수 없는 감격이 늘 그에게 넘쳤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감격스러운 믿음은 바울로 하여금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승리의 생활을 하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격스러운 마음 가운데서 그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려고 하는 노력에 불과 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고. 우리 믿는 사람에게 근심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하면 보 답할 수 있을까? 하는 근심밖에는 없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신앙이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감 사의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겐 감사할 일이 점점 많아집니다. 감사하지 아니 하는 사람에겐 감사할 일이 점점 적어집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 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고 말씀했습니다. 여기 모든 것 이란 말은 역경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역경까지도 선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떻 게 역경이 선으로 바꿔집니까? 그 하나는 역경을 순경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다른 하 나는 역경 속에서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그 역경을 변화시키는 이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옥중에 있으면서도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고 말씀했습니다. 이것 은 현재 당하는 처지에 만족해서 환경이 좋아서 감사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은 고통이요, 어 려움은 어려움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와 사랑을 믿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 다. 지금은 쓰라린 사정이나 감당하기 어려운 여건 속에 있더라도 하나님이 보다 나은 데로 이끌 어 주실 것을 믿을 때 그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감사는 역경 속에서 의 감사요,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감사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처지는 어렵습니다. 이런 형편 에서 어떻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구약 성경 하박국 3장 16절 이하의 말씀을 읽을 때 알 수 있습 니다. 하박국 선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 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 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 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 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되었을 때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러나 환난의 자리, 역경의 처지, 실패의 형편에서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왜 이 땅에서 착하 고 바르게 살려고 힘쓰는 사람들이 고생을 해야 합니까? 지금은 이해할 수 없어도 감사하는 생활 을 하면 이해할 수 있고 대답을 얻을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시간적으로는 항상 감사하고, 내용적으로는 범사에 감사하고, 방 법으로는 주의 이름으로 감사하고, 대상으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 으로 축원합니다.
9.제목 : 은혜와 감사
본문 : 눅-17-11-
누가복음17:11-19
추수감사절
미국 뉴욕 맨하탄에 있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몇 층인지 아시나요?
그러면 그 빌딩이 왜 102층으로 지어졌는지도 아십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1620년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배를 타고 가는 도중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최종적으로 미국 땅에 도착한 사람의 수는
남자가 78명, 여자가 24명 합계 102명이었습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102층으로 지어진 것은,
이렇게 처음 미국 땅에 도착한 사람들을 기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들 102명은 대부분 도시 출신들이었습니다.
농사짓는 방법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미국에 도착한 첫 해에 농사를 지었으나
수확은 시원치 못했습니다.
장차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앞이 막막했습니다.
다시금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모두가 절망하고 좌절해 있을 때, 한 사람이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힘들 때마다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 번쯤 우리의 생각을 고쳐볼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물론 우리가 영국에서 살 때보다도 형편이 어려워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할 조건들을 찾을 수 있는 줄 압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신앙의 자유가 있습니다. 정치의 자유도 있습니다.
또 우리의 눈앞에는 광활한 대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금식을 선포하지 말고 차라리 감사를 선포하십시다.
우리가 감사의 주간을 정하고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더 많은, 더 큰, 더 깊은 감사를 하나님께 드려보면 어떻겠습니까?”
그의 말에 그곳에 있는 모두가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주간을 선포하지 않고 대신 감사주간을 선포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모든 것이 풍성하기에 드린 감사가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믿음으로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주일을 지키게 된 계기가 되었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어느 해보다 더 경제적인 어려움이 심한 이때에
추수감사주일이 우리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청교도들의 신앙을 본받아,
어려움 속에서도 진정한 감사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은혜로 알지 못하고 감사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힘들이지 않고 숨을 쉴 수 있다면 이것도 은혜입니다.
산소마스크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숨을 쉬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 입으로 물을 마실 수 있고,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호스를 통해서만 물과 음식을 공급받을 수 있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자신의 발로 걸어서 예배당을 들어왔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휠체어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이동을 할 수 없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휠체어를 타고라도 교회에 왔다면 감사하기 바랍니다.
휠체어마저 탈 수 없는 형편에 있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소중한 인생인데,
이왕이면 멋지게, 의미 있게, 가치 있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평범하게 살다가, 이름도 없이 죽어 가는 인생이기보다는,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고 교훈을 주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공부를 많이 하고, 좋은 직업을 가지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돈을 많이 벌어야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바로 은혜를 깨닫고 늘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께 고침 받은 기적의 역사를 보도하고 있습니다.
나병 환자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눈썹이 빠지고, 코가 문드러져도 감각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가족들과도 함께 살지 못합니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주받은 병으로 취급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가난했고, 외로웠습니다.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12절-13절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그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도 못했습니다. 멀리 서서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고쳐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불쌍히 여겨달라고 구할 뿐입니다.
자기들의 병이 고침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쉽게 고쳐지는 병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14절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말씀은 곧
‘네 병이 나았느니라.’하는 선언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레위기13장에 보면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제사장에게 가서 보여야 합니다.
정하다, 부정하다는 진단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란 말씀은 ‘나았으니 확인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아직 병이 낫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고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순종이 기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나아만 장군도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여 나병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믿고 순종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하면서도 안 믿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인터넷 사이트에 “목사님과 술집 주인”이란 제목의 글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상가 3층에 세 들어 있었는데, 그 건물 지하에는 술집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교인들은
날마다 ‘술집이 망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그 술집에 불이 나서 망하게 되었답니다.
그러자 술집 주인이 교회를 상대로 고소를 했습니다.
교회가 기도해서 망하게 되었으니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판정에서 목사님은 ‘우리가 기도해서 불이 난 게 아닙니다.’ 변명했대요.
도대체 누구의 믿음이 더 좋은 것입니까?
어쨌든 나병 환자 열 명은 모두 고침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불치의 병이 치료를 받았는데 감사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본문이 꼬집고 있는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15절-16절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그 중에 한 사람만이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17절-18절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모두가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불치의 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감사할 거리가 없어서 감사를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할 거리가 넘치지만, 감사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감사한 사람은 유독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같은 은혜를 받았어도 이방인은 감사할 줄 아는데
오히려 유대인이 감사하지 못한다고 꼬집고 계시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조금이라도 더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더 감사할 조건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오히려 교회에 안 다니는 세상 사람들은 감사하는데
오히려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이 감사를 하고 있지 않고 있다는 말도 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이야기는 아닙니까?
받은 은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았으나 감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은혜를 헤아려 봅시다. 그리고 감사하는 자가 되기 바랍니다.
감사하는 자에게는 어떤 축복이 임합니까?
19절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주님께 와서 감사한 이 사람은 육신의 질병만 아니라
영적인 질병까지 치료받는 구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주시는 더 큰 은혜가 있습니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한국유리의 사장이었던 최태섭 장로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쓰신 자서전적인 책 [사랑에 빚진 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그분이 겪은 감동스런 사건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 하나.
6.25 전쟁이 나서 모두 피난을 가는 때, 대출금을 갚으러 은행에 갔습니다.
은행직원도 다 떠나고 한 사람만이 남아서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빚 갚으러 왔다고 하니까, 귀찮아하면서 나중에 갚으라고 하더랍니다.
남들은 돈 떼어 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할 텐데
돈을 갚겠다고 하니까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요.
은행직원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영수증을 써 주었습니다.
그러나 최 장로님은 그동안 빌려주어서 잘썼다고 고맙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얼마 지나서 생선을 군에 납품하는 사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생선을 공급해야 하기 때문에
근해에서는 그 많은 양을 잡을 수 없고, 원해에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려면 원양어선을 구입해야 하는데 그런 돈이 없었습니다.
고민하던 끝에 그 동안 거래했던 그 은행에 가서 사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담보 없이는 대출을 해 줄 수 없다는 원칙적인 말만 듣게 됐습니다.
그가 통 사정을 하면서 옥신각신 하는데 은행장이 보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 때문이냐?’ 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니
최 회장은 옛날에 써 주었던 영수증을 내 놓으면서 ‘반드시 갚겠다.’고 하니
은행장은 그 영수증을 보고 반가워하면서
“바로 당신이었군요.
그렇지 않아도 보고를 받고, 당신을 꼭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당신같이 신용 있는 사람에게 우리가 대출을 해 드려야죠.”
그래서 수억의 돈을 대출받아 큰 돈을 벌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행동할 때,
정직하고 신용 있게 살 수 있으며 이런 사람에게는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은혜를 헤아려 감사하는 자가 되기 바랍니다.
잃은 것도 많지만 얻은 것도 많음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돈을 잃었으나 겸손을 배웠다면 감사하기 바랍니다.
건강을 잃었으나 믿음을 얻었다면 이도 감사한 일입니다.
풍성한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길 바랍니다.
10.제목 :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본문 : 눅-17-11-
몇 년전에 브라질에 있는 유명한 아마존 숲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40m나 되는 아주 큰 나무, 꼭대기 나뭇가지 사이에다가 꼭 까치집처럼 지은 방이 있습니다. 그 호텔에서 그 방이 제일 비싼 방입니다. 어쨌든 사다리를 타고 한참 올라가야 되는 그런 방에 또 역사적인 일이었기에 그 방에 들어가서 며칠을 유숙한 일이 있었습니다. 밤에 자는 동안에 지붕 위에 원숭이들이 모여가지고 얼마나 시끄럽게 하는지 정신이 없고요, 아침에 문을 열고 나오면 문 앞에 원숭이들이 있다가 막 달려듭니다, 뭐, 먹을 것을 좀 달라고. 뭐, 그런 아주 짐승들 속에서 며칠을 지내는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호텔에 사장님 되시는 분하고 제가 좀 사귀었는데 이 분하고 같이 숲을 지나갈 때 그 사장님이 누군가를 다 아니까, 이 짐승들이, 그래서 바나나를 한바구니 이렇게 들고 가면서 특별히 어린 원숭이들이 올 때 하나씩 주는 거예요, 이렇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것을 받아갈 때 탁 잡아가지고 가로채가지고 도망을 가요. 빼앗듯이. 매일같이 그렇게 준다는데도 그렇게 좀 공손하게 받지를 않고 받고 탁 잡아채고는 막 도망을 가요. \'저것이 왜 저럴까?\' 그래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했더니 그 사장님은 전문가거든요. \"이것이 동물과 사람이 다른 겁니다.\" 아주 인생 철학을 말씀하시더라고요. 동물은 내가 한평생 바나나를 이렇게 주어도 고마운 줄 모릅니다. 이게 특징입니다. 저 \'왜 저렇게 도망가느냐?\' 그것은 불신 때문입니다. 내가 이것을 주고 자기를 붙잡을까봐 그저 이것만 받아가지고는 도망을 가요. 참 귀중한 진리를 들었습니다.
공산권을 방문해 보면, 하나같이 못삽니다. 그 못사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간단합니다. 공산세계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공산세계에서 많이 듣는 말이 혁명입니다. 혁명, 투쟁, 쟁취. 지금 북한에 식량이 모자라서 요새 남새 채취 작전을 합니다. 혁명입니다. 그것도 혁명이라고 불러요. 그래서 들판이고, 산이고 먹을만한 풀은 다 뜯어오라 이거야. 온 시민이 다 나서서 지금 풀뜯기 작전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비참한 얘기지요. 여러분, 혁명, 파업, 쟁취 이런 말을 듣는데 쟁취를 통해 얻은 것은 감사가 없습니다. 그건 빼앗은 거니까요. 그래서 이 붉은 띠를 두르고 뭐 \'결사투쟁\' 이런 것을 볼 때마다 참 마음이 서글픕니다. 저렇게 얻는 것도 없지만은 얻어도 불행합니다. 왜요? 감사가 없잖아요. 이건 빼앗은 것이지 얻은 게 아니거든요. 그 세계에는 감사가 없어요. 감사하지 않는다고 벌하는 형법은 이 세상 어디도 없습니다. 그러나 탈무드에 아주 명언이 있습니다. \'감사를 모르는 자를 벌하는 법을 하나님께서 만들지 아니한 것은 감사할 줄 모르는 자를 이미 불행으로 벌하셨기 때문이다.\' 감사할 줄 모를 때 벌써 그는 불행이라는 벌을 받고 있는 거예요. 다시 벌할 것도 없어요. 감사하지 않는다고 감옥에 보내는 법은 없어요. 그러나 그는 벌써 불행이라고 하는 심판을 받고 있더라 그 말이에요.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 문둥병자를 만났다\'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문둥병이라는 것이 언제 걸리는 지도 모르게 걸려가지고 서서히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 아닙니까? 참 비참한 병입니다. 손발이 떨어지고, 코가 떨어지고, 눈알이 빠지고 이러면서 마지막에 비참하게 죽어가는 문둥병인데, 이 당시 이것은 난치병이요, 전염병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이 병에 걸렸다 하면 가정에서 격리됩니다. 사회에서도 버림받습니다. 심지어는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어느 동굴같은데서 모여 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얼마의 식량을 보내주면 그걸 먹고 살고요, 만일에 식량이 부족해지면 때를 지어 동리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질렀지요. 그래서 얻어먹는 그런 집단입니다. 여기 오늘 열명이라는 말이 그런 뜻이에요. 이렇게 불쌍한 사람들이 떼를 지어다니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단 말이지요. 그런데 이 저주받은 인간들을, 저주받았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불쌍한 사람을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주 중요한 말씀이 나와요. \"제사장에게 가서 보여라\" 그랬습니다. 제사장은 당시에 의사입니다. 그런고로 문둥병이 나았는지 문둥병이 아직 있는지는 제사장이 판단을 합니다. 그리고 \"너는 나았다\" 라고 인정을 하면 그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아직 낫지도 않았는데, 뭐 안수한 것도 아니고 안찰한 것도 아니고 깨끗케한 것도 아니에요. 그저 \"제사장에게 보여라.\" 이 말을 듣고 가야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그러나 이 사람들이 이 만큼의 믿음이 있었고 이 만큼의 순종이 있었어요. 그 제사장에게 보이려고 가는 길에 보니 나았어요. 얼마나 희한합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바로 그 순간 사마리아 사람 하나는 길을 돌려서 예수님께로 와서 발 앞에 꿇어 엎드리고 사례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아홉은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감사가 조건은 아닙니다. 감사가 그들의 준 강한 의무가 아니더란 말이에요.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면 이렇게 와서 감사하는 자를 기쁘게 여기고 예수님 돌아오라고 말씀한 바 없어요. 돌아와서 감사해야 된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 아홉은 어디있느냐?\" 무슨 말입니까? 섭섭해하시는 겁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감사는 의무가 아니더라고요. 감사가 조건도 아니에요. 그러나 자발적으로 자원적으로 와서 감사하는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래야 마땅하지 않느냐? 그것이 오늘 성경에 나타난 핵심적인 진리입니다. 뭐 그 사람들 감사 안했다고 해서 병이 다시 재발했다고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너 감사하지 않았으니 영원히 너는 문둥병에서 벗어나지 못하리\" 라고 그렇게 말씀하실 예수님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 이렇게 슬픈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아홉에 대한 이야기가 늘 궁금해요. \'그 아홉의 변명\' 이라고 하는 작자 미상의 글이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볼만합니다. 한 사람은 \'의사와 제사장에게 가서 정밀검사를 해야겠다\' 해서 갔다는 겁니다. \'이게 나은 것 같은데 정말 나았는지.\' 아주 의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가서 정밀검사를 해야지\' 그래서 가버렸어요. 두 번째 사람은 혹, \'재발 가능성이 있는지도 몰라. 그런고로 며칠 두고 봐야겠다.\' 이거, 신중론이요. 이거 나았다고 하는데 꿈같은 얘기라서 정말 나았는지 좀 기다려 봐야겠다는 거예요. 세 번째 사람은 \'내 병은 본래 문둥병이 아닌 좀 특이한 피부병 정도였던가보다.\' 이건 회의론자올시다. 또 그 다음 사람은 \'내 병은 나을 때가 돼서 나았을 거야.\' 이건 자연현상으로 보려고 합니다. 가만히 보면 그런 일들이 많잖아요. 어떤 병 걸렸다가 나았을 때, \"어떻게 나았어?\" \"그저 뭐, 약도 좀 쓰고 병원에도 가긴 했지만 나을 때가 되어서 나았나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또 하나는 병 걸리기 전에 가졌던 밭과 재산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이게 궁금해요, 이제 먹고 살아야겠으니까. 그래서 그걸 빨리 알아보기 위해서 가버렸어요. 또 한사람은 병 걸리기 전에 같이 있었던 가정과 식구들, 특별히 아내가 수절하고 있는지 그게 궁금해요. 그래서 가버렸다. 또 한사람은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해준 것이 없잖아.\' 안수를 해준 것도 아니고, 어루만져준 것도 아니고, 안찰을 한 것도 아니고, 약을 준 것도 아니고 말이에요. \'아, 그저 \"가서 보여라\" 한 말씀 밖에 안했는데 아, 뭐 예수님이 별로 해준것도 없는데\'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었을 거란 말이죠. 또 다른 사람은 \'다른 유명한 랍비들도 이런 것은 아마 가능할는지 몰라.\' 예수님의 능력을 상대화 해버렸단 말이죠. 또 한사람은 \'이 모습대로 갈 수는 없잖아. 가서 목욕을 하고 새 옷을 입고 예물을 가지고 그리고 예수님께 가야지.\' 그래서 가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 한사람은 이 모습 이대로. 이게 중요한 거예요. 문둥병자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어요. 그 더러워진 거, 그 붕대감고 있는 거, 이 모습 이대로, 그거라면 어떠냐? \'예수님이 벌써 우리를 환영해주시고 사랑해 주셨는데 이 모습 이 추한 모습이면 어떠냐?\' 이거예요. 이 모습 이대로 예수님 앞에 나왔어요. 그래서 예수님께 사례하게 되었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 그 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 한사람은 우선 감사했어요. 최우선적으로 감사했어요. 예수님이 감사를 조건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아요. 그러나 이것이 조건이 될 때는 율법이요. 오직 은혜로 쓰시고, 은혜로 받고, 은혜로 말씀하시고, 은혜로 순종하고, 오직 은혜로 받아들이면서 감사하고 있어요. 의무적인 것은 감사가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자원적으로 이렇게 참 그 추한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나와서 감사의 사례를 해서 주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R. A. Toray 라고 하는 목사님께서 쓰신 책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미시간 주에 풍랑이 일어나서 배 한 척이 파손이 되었어요. 그때 한 수영선수가 목숨을 걸고 뛰어들어가서 무려 스물세명이나 구조를 했어요. 그것이 신문에 나고 그런 일이 있었어요. 몇 년 후에, 아주 오랜 후에 토레이 목사님이 설교하시면서 \'미시간호에 오래 전에 있었던 이야기, 청년 하나가 23명의 목숨을 건진 일이 있었습니다\' 하는 그런 설교를 했더니 설교가 끝났을 때쯤 해서 한 노인이 하는 말이 \"제가 바로 그 청년입니다\" 그랬어요. 예배 후에 내 사무실에 들어오라고, 그래서 들어와서 차를 나누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중에 \"당신이 그때 겪었던 일 중에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했더니 이 노인이 하는 말이 \"한사람도 고맙다는 말을 한 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도 온 일이 없습니다.\" 그것이 인상받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왜 이렇게 어려워지는 것입니까? 직선적이고 바로 그 시간 감사하지 않으면 감사 못하게 됩니다. 하루만 지나도 몇시간만 지나도 생각이 바뀝니다. 오늘 이 아홉사람의 변명처럼 말이에요. 감사 못할 이야기들이 자꾸만 생각이 나요. 못하게 되어버리고 말아요. 바로 이 시간 감사하지 않으면 영영 못합니다.
여러분, 슬픈 얘기입니다만은 1980년 아웅산 묘역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한국의 유명한 정치인들, 무려 방문단 17명이 살해되는 테러사건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참가했던 분이 마침 그쪽으로 가는 중이었지만은 길이 막혀서 조금 늦게 간 것 때문에 그 끔찍한 사건에서 면하고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부랴부랴 대통령과 같이 비상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너무나도 어려운 시간이라서 비행장에 새벽 4시에 내렸는데 다 그냥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뭐 서로 인사도 안하고 흩어졌는데, 이 분도 내리긴 했는데 깜깜한 밤에 이거 어떡하나? 그래서 우선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기사가 물어봅니다. \"어디로 갈까요?\" 그때 그는 생각을 했답니다. \'내가 어디로 가야하나? 꼭 죽어야 할 사람이 지금 살았는데 내가 어디로 가야하나?\' \"소망교회로 갑시다.\" 도저히 집으로 먼저 갈 수가 없었더라는 거예요. 그는 새벽기도회에 한번도 안나온 사람입니다. \"우선 교회로 갑시다.\" 교회 마당에 왔는데 글쎄 대통령 따라간 분이라서 돈을 한푼도 안가지고 갔어요. 택시비를 줄 돈이 없어요. 그래서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이제 새벽기도 나오는 분이 있을테니까 아무나 붙들고 부탁을 해서 돈을 꾸어가지고 택시비를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잠깐 기다리니까 아니나 다를까 교인이 오더래요. 그래서 부탁해서 돈을 꾸어서 택시비를 주었대요. 그리고 들어와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노라고. 여러분, 가끔 제가 길에 나가면 대낮에, weekday에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을 만나요. 서로 인사하면서 \"어떻게 이시간에 교회에 나오십니까?\" 여러 번 같은 얘기를 듣습니다. \"제가 지금 중한 수술을 받고 병원에서 퇴원하는 시간입니다. 내가 생명을 다시 찾았는데 내가 집으로 바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교회에 나왔습니다. 기도하고 가려고 오는 길입니다.\" 그런 분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잘한 일이올시다. 바로 이 시간, 바로 직설적으로 즉각적으로 감사하지 않으면 감사할 수 없게 되고 맙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런 전화 받아보셨어요? \"가스가 나왔습니다\" 그러대요. 저도 한번 맹장 수술을 급히 받아본 적이 있는데 이런 수술을 받은 다음에 의사와 환자가 같이 기다리는 것이 가스가 나오는 겁니다. 이게 만일 안나오면은 재수술을 받아야 됩니다. 그래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가스가 나오면 아, 살았다고, 서로 고맙다고 전화를 겁니다. 가스가 뭡니까? 방귀예요, 방귀. 여러분 허구헛날 방귀뀌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지 몰랐죠? 이 시간에는 이게 기쁜 소식입니다, 이게요. 여러분 환난과 고통, 역경, 그것이 사람의 생각을 깊게 만들고 깨달음을 만듭니다. 깨달음이 있을 때 비로소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가 있을 때, 행복이 따라오는 것이올시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형통할 때, 평안할 때 감사할 줄 모릅니다. 오히려 원망하고요 가장 절박한 어려움에 있을 때 감사할 뿐 아니라 미처 감사하지 못한 것까지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도 한번 방문에서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준 세계가 갈채를 보내는 감동적인 인간승리의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라고 하는 책입니다. 이것은 천상의 목소리로 가스펠 송을 부르시고 있는 그런 가스펠 싱어의 수기입니다. 레나 마리아 라고 하는 분의 수기입니다. 그는 날 때부터 장애자로 두 발이 없습니다. 다리도 한 다리가 짧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천사의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장애를 오늘이 있게 한 본질적 요소였지 이것은 장애가 아닙니다\' 라고 말합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신앙적으로 받을 때 우리는 언제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자체가 레나 마리아의 삶을 태양보다도 더 밝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여러분, 잘되고 평안한데서 감사가 우러나오는 줄 알지만은 실제적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어려운 형편에서 우리는 감사하게 됩니다. 깨달음이 없이는 감사가 없습니다. 고통이 없이는 깨달음이 없습니다. 깨달음의 깊은 세계에서 감사하고 감사할 때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여러분, 절대적인 관계에 감사가 있고요 직선적 이해에 감사가 있고요 절대적 관계, 하나님과 나와의 신앙적 이해 속에서만이 진정한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사건의 결과가 아닙니다. 감사는 생의 동기입니다. 행복이 어디 있느냐고요? 행복해서 감사하는 게 아닙니다. 감사함으로 행복이 되는 것이올시다. 감사함으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종은 울려서 소리가 나야 종입니다. 감사가 없는 곳은 행복이 없는 것입니다.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네 믿는 대로 되리라. 너를 내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평안히 가라.\' 이 축복이 이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감사하는 은혜, 그리하여 은혜로 은혜되게 하는 은혜, 그리고 범사에 형통한 은혜, 그것은 바로 감사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올시다. 기도하십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당연히 감사할 일이 있건만, 우리는 감사할 줄 모르고 사는 것을 용서하옵소서. 이제서 뉘우치며 감사드립니다. 주여 깊은 세계에서 감사하게 하시고 감사로 우리의 생의 의미를 바꾸어 행복하게 하시고, 감사함으로 기도응답을 받게 하시고, 감사함으로 늘 승리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1.제목 : 추수감사절의 마음가짐
본문 : 눅-17-12-
추수감사절의 마음가짐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눅 17:12-16)
일년 중 가장 축복되고 즐겁고 고마워야 할 추수감사절입니다만 감사절이 오는 때는 겨울 준비에 우리들의 고민이 하나 더 늘어가는 시기와 맞물려 감사와 감격이 없이 맞아질 뿐 아니라 오히려 부담스러운 연례 행사가 되어 버리는 서글픈 감이 듭니다.
금년은 더더욱 제 2의 IMF가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 속에서 맞이하는 감사절을 과연 어떻게 지키는 것이 좋을까 생각해 봅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이 행하신 역사와 그 은혜를 감사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가르치는 감사는 하나님을 알고 기념하며 기뻐하며 찬양하며 고백하는 감사입니다.
이제 추수감사절의 정신과 감사하는 생활의 비결을 성경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그리고 교회의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구원의 은혜 가운데 베푸신 하나님의 축복
추수감사절에 관한 것으로 구약 성경에 나타난 가장 오래된 기록을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기를 그 토지 소산의 만물을 거두어들인 후 처음 익은 열매를 광주리에 담아 그것을 여호와의 성소로 가지고 가서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렇게 아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여 필경은 거기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더니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중역을 시킴으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신 26:5-9).
이 고백적인 감사 노래의 도식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는 조상이 겪은
역경과 여호와께 부르짖음, 그리고 구원과 가나안 땅으로 정착하도록 인도하심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기업으로 주신 땅에 들어가서 그 땅에서 얻은 열매로 추수감사절을 노래하면서도 추수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고 여호와의 구원의 행동을 기념하는 고백을 하였을까요. 이는 시편 136편 10-25절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추수감사절에 추수한 기쁨에 도취되어 감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구원 역사를 기념하고 자신의 비천함을 고백하는 감사절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였을 때 추수 시기를 따라 지킨 추수감사절의 이름은 추수와 관계가 없는 유월절, 무교절, 장막절, 혹은 초막절로 불려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며 보호해 주신 행사를 기념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추수감사절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추수 감사 축제를 즐기고 기뻐하는 것과 전혀 다른 성격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을 기념하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 전체의 표현이었습니다.
최근의 감사절은 영국에서 1621년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 신대륙에 상륙하여 많은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농사를 지어 처음 익은 열매들을 제단에 놓고 눈물의 감사를 드린 것이 그 효시가 된 것입니다.
2. 고난과 죽음을 넘어선 마음의 감사
추운 초겨울 12월에 플리머스 항구에 102명이 상륙하였으나 추위와 굶주림과 병으로 인하여 절반 이상이 생명을 잃어 버리고, 그 이듬해 봄에 원주민 추장에게 감자와 옥수수 종자를 얻어 희망의 씨앗을 뿌렸으나 그들은 또다시 절망에 빠지게 되었답니다. 그것은 물이 가장 필요한 때에 3개월 동안 가뭄이 들어 수확할 수 없는 폐농 직전에 놓이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으로 성별한 기도의 날을 정하고 금식 기도를 선포하고 열심히 기도했답니다.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사 갈멜산에서 엘리야에게 나타나던 기적이 그들에게서도 나타나서 가물었던 땅에 10일간 비가 내려 위기에서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답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있어서 감사하는 마음은 고난과 죽음을 넘어선 [생명적인 감사]였습니다.
청교도는 본래 영국 국교인 성공회의 형식적이고도 관료적인 신앙에 항거하여 보다더 생명적이고 내면적인 경건한 신앙생활을 살기 위한 무리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12년 동안 본국에서 박해에 견디다 못해 암흑의 대륙이라고 불리던 아메리카 신대륙에 생명을 걸고 죽기를 각오하며 대서양을 건넜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신앙을 지키기 위한 신앙 제일주의가 그들의 생활 모습이었습니다.
1621년 11월 11일에 체결된 메이플라워 계약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멘할지어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신앙의 증진을 위하여 항해를 계속하였노라] 고 선언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정든 고향과 친척들을 버리고 신대륙에 와서 죽음과 투쟁하며 결실을 얻었으므로 실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냉정히 따지고 보면 그들에게는 감사해야 할 일들보다는 슬퍼해야 할 일이 많고 고마워하기보다는 원망해야 할 일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슬픔보다는 기쁨을, 원망보다는 고마움을 신앙의 정신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던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감사하는 신앙의 정신인 것이며 이러한 정신이 우리들에게 되살아나야 할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감사절은 진정 기쁘고 감사하여 지키는 정신적이고 신앙적인 절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사 헌금은 우리 신앙의 내면적인 은혜를 물질로써 바치는 것이기에 몸과 마음과 정성을 함께 바쳐야 하며, 과부의 엽전 두 개와 같은 헌금이어야 할 것입니다.
더 나가서는 함께 깨끗해진 열 명의 나환자 중 한 명처럼 예수님에게 돌아와서 감사한 것을 본받아 진정한 감사를 드려야겠습니다.
우리에게 감사할 조건이 없음이 아니라 감사할 마음이 없음이 곧 타락이요, 병입니다.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이주한 것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하러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잘 섬기려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제일 먼저 교회당 건축하고, 다음에 학교 건축하고 물질 이전에 정신적인 내면적인 감사절을 지켰습니다.
특별히 일년에 한번씩 한 주일을 정해 감사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은 우리 교회에 주신 은혜, 하나님께서 내 개인과 가정에 주신 은혜를 감사 드립시다.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부족합니다. 우리는 평소의 생활이 감사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 서신을 읽어보면 문안 후에 감사하라 권면이 어떻게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뤼라], [범사에 감사하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의 생활을 보면 그 생활 자체가 감사의 생활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감격으로 사무쳤고 그의 하루 생활은,
아니 일생의 생활은 은혜를 감사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어떻게 바울이
이러한 감사를 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모든 것이 다 평안하고 환경이 좋으면 누가 감사하지 않겠는가?]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좋은 환경이나 평안한 생활로 인해서 감사하는 생활을 한 것이 아닙니다.
3. 가난했던 지난날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하반부를 읽어보면 바울의 일생을 간단히 기록한 몇 마디 내용이 있습니다.
몇 번이나 매를 맞고 몇 번이나 감옥에 갔고 몇 번이나 파선을 당하고, 에베소, 고린도, 로마에 가서도 대부분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의 생활은 핍박과 환난과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 언뜻 생각할 때 몸이 건강하거나 가정이 화평하면 감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경우는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몸의 건강이나 가정의 평안에서 온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는 독신생활을 하였으며 쉴 만한 집도 없이 살아온 사람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을 하셨는데 바울 사도는 일생토록 나그네로서 복음을 전파하고 사는 삶 속에서 평안이 없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감사하는 생각과 생활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것은 그 깊은 심령 속에서 우러나왔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써 죄에서 구속함을 받은 것을 심령속 깊이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마귀와 사탄에게서 해방을 받은 것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항상 같이하신다는 것을 믿을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는 신앙이 있으면 우리도 순경이나 역경이나 초막이나 궁궐이나 언제든지 감사로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닌 줄 압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생활을 하게 되니 자연히 그의 생활은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선 마음속에 성령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6:22). 바울이 가는 곳마다 죽은 생명을 구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도 주를 위해서 무슨 열매든지 맺는 사람일수록 감사하는 마음이 더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한 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파할 수 있으면 열매 맺는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이 더 많습니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9:15). 우리 매일 매일의 생활과 일생의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과 역경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을 기념하며 기뻐하고 감사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같이 우리도 과거 가난하던 때를 기억하며 가진 것이 많은 것을 감사합시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에 더욱 감사가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2.제목 :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본문 : 단-06-01-10
다니엘 6 : 1 - 10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은 바벨론에 끌려간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총명했고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느브갓네살 왕의 꿈과 벨사살 왕 앞에 나타난 글자를 풀어 당시 바벨론의 셋째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시기한 이들로 인해 결국 사자굴에 던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그런 일이 생긴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합니다.(10절) 그는 환난과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어떻게 다니엘은 이런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을까요?
Ⅰ.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30일동안 누구든지 왕 외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넣겠다는 왕의 조서가 내려진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집에 돌아와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했습니다. 게다가 어떤 조건이 이루어져서 감사한 것이 아닌 절대적으로 감사하였습니다. 우리는, 현재 나의 처지가 얼마나 감사한 자리인지 깨닫고 그에 대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빈손으로 세상에 왔으며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의 대상으로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이러한 은혜를 알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감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기도를 통해 과거에 받은 은혜를 깨닫고 현재를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미래를 완전히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의로운 고통을 영광으로 바꾼 사람입니다. 그는 환난이 왔을 때 죄와 타협하지 않았고,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출세는 못해도 정직하게 살고, 가진 것은 적으나 진실하게 살며, 성결을 장수보다 큰복으로 여기고 부귀영화보다 의로운 고난과 죽음을 더 복된 것으로 여길 때 감사가 올 것입니다.
Ⅱ.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감사했다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지고 밤잠을 설친 다리오 왕이 그를 찾아 굴에 왔을 때, 다니엘은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음으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하지 못하였다(22절)\'고 했습니다. 다리오 왕이 그를 음해하던 이들과 그들의 처자들을 함께 굴에 던졌을 때는 그들이 굴바닥에 닿기도 전에 사자들이 그들을 움켜서 뼈까지 부셨습니다. 그 후 다리오 왕은 다른 조서를 내려 다니엘의 하나님을 믿고 섬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은 다니엘은 사자의 입도 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두려워하는 대신 감사했던 것입니다.
Ⅲ. 그는 감사 생활이 체질화 되었다
다니엘은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는 기도를 하루에 시번씩 하며 항상 감사하는 버릇을 갖고 있었습니다. 단지 기도만 한 것이 아닌 항상 감사하는 삶이 체질화되어 있던 사람인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비록 무화가 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는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하박국3 : 17) 아무것도 없음에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겠다는 이 놀라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항상 기도하고 감사하며 그것을 체질화할 수 있는 모두가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13.제목 : 감사의 차원
본문 : 대상-16-34-36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금년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일년의 삶을 지켜 주셨고 한 해의 농사를 축복해 주셔서 올해도 풍년을 맞이했습니다. 한 해 동안 사건과 사고도 많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이 시간까 지 우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추수에 대한 감사뿐이 아니고 일 년의 삶을 생각해 보면서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감사\"라는 말을 참 많이 사용합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언어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감사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 마음은 하늘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결코 쉬운 마음이 아닙니다.
일본의 내촌감삼은 \"하나님께서 만일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실패 그리고 배신이나 죽음으로 저주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못 하는 불신앙으로, 그리고 성경을 읽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막힌 귀로, 또한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도록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분명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셔야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 감사하는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몇 가지 교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감사하는 마음은 \"믿음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화되면 불만과 원망과 불평의 마음부터 우러나옵니다. 이것들은 감사의 싹을 자르는 요소들입니다. 오늘 신앙인들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이 원망과 불만과 불평을 안고 살아갑니다. 기뻐하고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아는 신앙인들보다는 매사에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이 약화되어서 그렇습니다.
믿음과 신앙과 영적 풍성함을 유지하고 살아갈 때 그 마음에 소망이 있고 넉 넉함이 있고 감사함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한 시인은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 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라고 노래했습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그 풍성한 축복을 경험해 본 사 람만이 할 수 있는 감사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거친 들도 초막도 천국이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들만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믿음의 열매로 그의 신앙을 증거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또 하나는, 감사하는 마음은 \"축복 받은 마음\"입니다.
감사는 분명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아무나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그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그런 마음을 가질 수가 있고 그것을 표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에 원망과 불평과 불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입만 열면 불평 불만이 튀어나옵니다.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감사나 만족함을 표현하는 사람 이 적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축복 받은 마음입니다.
미국의 어느 청년이 청년답지 않게 늘 감사하면서 살아갔습니다. 대개의 청년들은 꿈도 크고 야망도 누구 못지 않게 대단하기 때문에 현재의 삶이 늘 미흡 하다고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젊은이가 그렇게 감사하면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이 청년이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 하나를 절단해야 했습니 다. 그리고 절망의 삶을 살았습니다. 할 일도 많고 결혼도 해야 할 나이인데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늘상 없는 다리 한 쪽만 생각하며 살자니 앞날이 캄캄 했을 것입니다. 이 지점이 인간의 한계점입니다. 사람은 없어진 다리에 집착합 니다. 그러는 사이에 또 다른 다리는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인가 눈이 뜨이면서 다리 하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이 없어진 다리 대신 남아 있는 그 다리를 발견하게 된 것입 니다. 그래서 그 젊은이는 다리가 하나 남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고무다리를 했습니다. 그때부터 이 청년은 이 남은 다리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이 청년은 마침내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 훈련 을 마치고 마침내 그 다리를 가지고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식인종들이 덤벼들 었습니다. 그는 고무다리를 던져 주었습니다. 식인종들은 그 다리를 씹어보았지 만 씹히지 않자 마침내 그 선교사를 신적 존재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그는 비로소 하나님이 자신의 다리를 절단하게 하신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그 때 그가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오늘 현대인들은 한편 참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전에 없 던 풍요를 누리고 문화를 누리며 편리함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또 한편 으로 생각해 보면 오늘 현대인들은 참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대개는 만족함과 행복함이 없이 살아갑니다. 늘 부족을 느끼고 불만하며 갈증 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인간의 행복이나 만족함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님에도 말입니다.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래서 하늘이 주 시는 축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은 \"더 큰 감사를 불러들이는 마음\"입니다.
확실히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일이 더 많이 생깁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은 더 큰 감사를 불러들입니다. 감사하는 곳에는 또 기적이 일어납니다. 불 평하는 사람들에게는 늘 불평의 조건만 늘어납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들에 게는 언제나 감사의 조건들이 더 많이 만들어지는 것을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스펄전은 \"별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 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해와 달이 필요 없는 영원한 빛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월등 한 감사의 조건을 점점 더 부여하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감사하지 않는 죄\"라고 했습니다. 마땅히 감사해야 함에도 불구 하고 감사하지 않는 것은 무지해서 감사를 깨닫지 못하거나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무지하거나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 는 불신앙이므로 근본적인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다윗이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해서 드린 감사의 기도문입니다. 이스라 엘에는 언약궤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법궤라고도 불렀습니다. 그 속에는 아론의 지팡이와 십계명 돌비와 만나가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적 권위 가 거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왕 때에는 이 언약궤가 70여년 동안 변방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왕이 되면서 가장 먼저 한 작업이 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놓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감격했고 안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너무나 감격해서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는 모습입니다.
그때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 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 원하여 만국 가운데서 건져내시고 모으시사 우리로 주의 성호를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할지어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 까지 송축할지로다\".
다윗은 참 기막힌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목동으로 초라하게 살았습 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골리앗과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사울로부터도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습 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참 기적과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되었을 것입 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안치시켜 놓고 나서 이 감격 의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은 아무나 갖는 것이 아 닙니다. 진정한 감사는 다음과 같은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첫째는 \"과거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과거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초라했든지 화려했든지 누구나 과거를 가지고 있 습니다. 그리고 과거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지난날 가운데 뼈아팠던 일, 억울했던 일, 서운했던 일, 그리고 배은 망덕했던 사람을 생각합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지적했듯이 사람은 지난날 속에서 행복했던 일, 기뻤던 일들이 더 많이 있었음에도 사람들은 각자 뼈아픈 일들만 생각하고 원망과 불행했 던 일들만 기억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런 습성 때문에 과거를 잊지 못하고 매여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16:9-17에서 하나님은 \"맥추절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당부가 아니고 명령입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애굽에서 430년을 종살이를 하 면서 압박과 고난의 삶을 살다가 우여곡절 끝에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광야에 서 40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평화의 땅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첫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결실입니까. 과거를 생각하면 꿈같은 생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첫 수확을 거두고 감사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과거를 잊지 말라\"는 말입니다. 즉 \"과거의 쓰라림을 잊지말고 그 고난 가운데서 인도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미국인들의 가장 큰 명절은 추수감사절입니다. 그것은 미국인들 의 조상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난 당했던 지난 세월의 그 아픔을 잊을 수 없 기 때문입니다. 그 조상들이 지켰던 추수감사절의 그 기막힌 의미를 어떻게 잊 을 수가 있겠습니까. 다윗은 과거를 생각하면 뼈가 저렸을 것입니다. 지나온 생애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과거를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똑같은 감회에 젖을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지난날을 생각하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축복의 마음입니다.
둘째는 \"현재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현재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입 니다. 즉 \"구원의 삶\"입니다. 오늘 내가 \"주 안에서 살고 있다\"는 이것이 축복 입니다. 생각하면 감격할 일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밀턴은 말년에 소경으로 살았습니다. 에디슨은 귀머거리가 되어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한결같이 감사하면서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고 보니 귀머거리, 소경인 것이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에디슨에게 하나님은 발명왕으로, 밀턴에게는『실낙원』으로 보상해 주셨습니 다. 이것이 감사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이고 상급입니다.
빌리 그래함이라고 하는 분이 전도집회를 하면 언제나 따라다니며 찬양도 하 고 간증도 하는 한국출신 맹인 성악가가 있습니다. 그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 다. \"사람들은 맹인인 나를 인도해 줄 때 100m 앞 전방에 뭐가 있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눈앞에 물이 있으니 건너 뛰라든가, 층계가 있으니 올라가 라고만 말합니다. 나는 그 인도자의 말만 듣고 따라가면 안전하게 목적지에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나를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10년 앞을 모릅니다. 20년 앞도 모릅니다. 또 알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만을 믿고 순종하며 살아가면 우리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옛날 태어났던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 감사의 기 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지금은 한 나라의 임금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적같 은 일입니다.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말하기를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현재를 생 각할 수 있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시골에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태어났을 때 그 환 경, 그 삶이 어떠했습니까. 가난, 무지, 초라함이 그 때의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오늘의 삶을 상상이나 했습니까. 그때는 모두 무작정 상경한 분들 많았을 것입니다. 대책 없이 고향을 떠난 분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까지 내 뜻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생각하면 기적 같은 일입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지난날이 이렇게 왔듯이 장 차 우리의 미래도 하나님은 그렇게 인도하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분명히 우리 의 앞날도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길로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 실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소망이 있고 기쁨이 있고 만족함이 있 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내일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장차 주어질 하 나님의 영광과 은총과 그 나라를 생각하는 생활입니다. 그것도 없이 살면 그것 은 신앙도 아닙니다.
그래서 칼빈은 임종시 고통 속에서도 \"오늘의 고난은 장차 주어질 영광과 족 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는 구절을 암송하며 죽어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신앙의 세계는 위대한 것입니다. 사람은 미래가 중요합니다. 미래가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래는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어느 추장이 임종을 맞았습니다. 한겨울이었습니다. 후계자감 세 명을 불러서 말하기를, \"산너머에 가서 선물을 한 가지씩 가져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젊은이들은 눈 덮인 산을 넘어가서 한 사람은 양지바른 곳에 핀 꽃 한 송이를, 또 한 사람은 청초 한 포기를 가져 왔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한 사람은 그냥 빈 손으로 내려 왔습니다. 저마다 가져온 선물을 드렸지만 빈손으로 온 청년은 선물대신 의미있는 보고 를 했습니다. \"저는 산너머에서 꽃도 보았고 풀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 보 다 더 좋은 것을 보았습니다. 산 너머에서는 넓은 들을 보았고 넓은 강을 보고 왔습니다, 그 곳이 장차 우리 부족이 살아갈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서 속히 쾌유하셔서 우리를 이끌고 그 넓은 곳으로 가서 살게 해 주십시요\" 하고 말했 습니다. 그 때 그 추장은 이 세 번째 젊은이에게서 소망에 찬 부족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추장은 마침내 그 젊은이에게 추장 자리를 물려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저 앞에 놓인 즐거움, 꿈, 소망, 그것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 는 사람들입니다. 감사는 믿음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같은 축복이 함께 하 시기를 기원합니다.
14.제목 : 빈 들에 날은 저물었으나
본문 : 마-14-13- (마 14:13-21)
설교를 해보면 절기 설교가 가장 어렵습니다.
다른 목사님들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저의 경우에는
부활절이나 성탄절, 추수감사절 설교가 제일 어렵습니다.
각각의 절기 정신에 꼭 맞는 설교를 해야되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오늘은 추수 감사주일인데 한 주간 내내 고민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본문을 선택해서 감사에 알맞은 말씀을 전할 것인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감사의 절기에 꼭 맞는 본문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결국 저는 추수감사절의 설교본문으로 마 14: 13-21절 말씀을 선택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시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에 대한 말씀이지요.
주일학교 때부터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은 예수님께서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 천명을 먹이시고 12광주리를 남게 하셨다는 말씀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도대체 추수감사절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아마 조금이라도 성경을 아시는 분들은 의아해하실 것입니다.
저 역시 일단 이 본문을 선택한 다음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과연 감사에 대한 메시지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제가 이 말씀을 추수감사 설교의 본문으로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는 중에 15절 말씀이 눈에 크게 들어왔습니다.
특히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라는 말씀에 주목했습니다.
왠지 우리 교인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바로 이런 상황 속에 있지 않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적지 않은 분들이 빈 들, 즉 광야에 있는데 날은 저물고 허기지고 지쳐 있습니다.
여러분, 빈 들은 어떤 곳입니까?
광야입니다.
사막의 버려진 땅을 말하지요.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추워서 사람 살기에 아주 힘든 곳입니다.
먹을 것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곳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무리들은 집을 멀리 떠나 빈 들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날이 어둑어둑해져서 저물기 시작했습니다.
저녁을 먹어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빈 들에서 날은 저물어가고 있는데 지치고 배가 고팠습니다.
빈 들에서 날은 저물어가고 있는데 고달픈 인생에 지쳐 허기진 모습,
저는 이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으로 읽었습니다!
오늘 추수 감사절이라고 해서 주님 앞에 나와서 감사하기는 해야하는데
무엇을 어떻게 감사해야할지 확신이 안 가는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본문 말씀을 통하여 위로 받으시고 새 힘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복음서에 다 나오는 유일한 기적입니다(막 6: 30-44; 눅 9: 10-17; 요 6: 1-15 참조).
대개 공관복음서에 다 나오는 기적이라고 할지라도
요한복음에는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오병이어 이야기는 사복음서에 공히 다 출현합니다.
이것은 이 기적설화가 그만큼 유명했고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이야기를 실제로 일어난 기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인간 심리의 전환으로 해석할 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직접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 천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셨다고 보는 대신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로 요 6: 1-15절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표적설화를 근거로 한 것인데,
수많은 군중들이 실제로는 먹을 것을 다 준비해왔는데
자기 혼자만 먹으려고 몰래 감추었다는 것입니다.
인색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자기만 먹으려고 했지
이웃과 나누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어린 소년 하나가 자기가 싸온 도시락, 즉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선뜻 공개해서 이웃과 나누려 하자 이기심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소년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축복하시고 사람들에게 알렸을 때
굳게 닫힌 마음의 빗장, 곧 탐욕과 이기심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몰래 자기만 먹으려고 싸온 음식을 슬금슬금 꺼내놓고 함께 나누려고 해서
오 천명이 다함께 배불리 먹고서도 12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할 때 사람들의 마음이 변화된 기적이지
어떤 물리적 기적이 아니라 심리적 변화에 불과하다는 해석을 합니다.
이와 같은 심리적이고 인간학적 해석 방법이 그럴 듯 해 보이지만
결코 성서적인 해석 방법은 아닙니다.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다 안 일어났다, 하는 역사성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사복음서 기자들이 이 말씀을 소중하게 여겼는지
그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찾는데 주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추수감사절에 던져주는 영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①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헤아려야합니다.
여러분, 14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 마음 속에는 늘 긍휼과 자비의 마음이 넘쳐났습니다.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런 긍휼과 자비의 주님이 날 저문 빈 들에서 지치고 허기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들의 허기를 해결해주시려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병이어의 기적은 가난하고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로부터 비롯된 이야기입니다!
더욱이 본문에 나오는 오병이어 이야기 바로 전에는
분봉왕 헤롯이 세례 요한을 무참히 살해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헤롯은 자신의 생일 잔치 때 공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람인 세례 요한의 목을 벴습니다.
사치하기 이를 데 없는 헤롯왕의 궁전에서 먹을 것이 차고도 넘쳐나는 잔칫상 앞에서
한 의로운 사람이 무참하게 죽임을 당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바로 이 이야기의 뒤에 오병이어의 이야기가 나온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마태는 폭군중의 폭군이요, 탐욕과 복수심으로 일그러진 헤롯왕과
평강의 왕이요, 무리를 한없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살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극명하게 대조하고 있습니다!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헤롯왕의 궁전과 외롭고 척박한 빈 들, 광야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먹을 것 마실 것이 넘쳐나는 헤롯왕의 잔칫상과
먹을 것이 없어 겨우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 달랑 남은
날 저문 빈들의 쓸쓸하고 외로운 풍경을 날카롭게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쪽에는 산해진미(山海珍味)로 넘쳐나는, 화려한 식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식탁은 증오와 탐욕과 복수심으로 얼룩진 식탁입니다.
그런가 하면 주님이 예비하신 조촐하고 소박한 식탁이 있습니다.
그 당시 가난한 이스라엘 농부들의 일용할 양식, 보리떡 다섯 개와
정어리 정도 크기의 작은 물고기 두 마리만 달랑 올라가 있는 가난한 식탁입니다.
그러나 이 식탁은 사랑과 자비와 긍휼로 풍성하신 주님이 예비하신 식탁입니다!
오늘 이 추수감사절에 여러분의 식탁이 혹시 풍성하지 못합니까?
겨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올라가 있지 않습니까?
빈 들에 날은 저물어가는데 여러분의 식탁이 너무 보잘 것 없습니까?
그래도 염려하지 마시고 오히려 감사하십시오!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우리 주님께서 더욱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오 천명이 먹고도 12 광주리가 남는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려한 헤롯왕의 궁전에서 넘쳐나는 잔칫상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헤롯왕의 잔칫상에서 최고의 요리를 먹는 것보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주님이 예비하신 식탁이 더 좋습니다!
사랑과 자비와 긍휼과 평화의 주님이 함께 하시는 식탁이기 때문이지요!
② 현재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를 보고 감사해야 합니다.
빈 들에서 꾸물꾸물 땅거미가 밀려오자 제자들이 무리들을 걱정했습니다.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이 제자들 마음에까지 전염이 되었던 것이지요.
15절을 보세요.
\"선생님,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그러니 무리를 헤쳐 보내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게,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자들이 무리들의 저녁 식사를 걱정했던 것이지요.
이 때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16절을 보세요.
\"그들이[무리들이] 갈 필요가 없다. 너희가[제자들이]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무리들이 동네로 흩어져 먹을 것을 구하러 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무리들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순간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의 수중에는 겨우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것들을 주님께로 가져오라고 명하셨을 때 기꺼이 순종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제자들의 위대한 믿음을 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그 어떠한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평을 토로하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말씀에 묵묵히 순종하는 제자들의 모습, 우리는 이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리하게 세상에 나가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모습 그대로, 현재 가지고 있는 그대로를 가지고 나와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이 가진 것이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릴 때 크게 됩니다.
적은 것이 풍성해진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어떤 분이 여행을 하다가 구두를 잃어버리고 불평했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발목이 없는 사람이 감사하는 것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이제부터는 다 낡은 신발이라도 신을 수 있는 발목이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가진 것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고 할지라도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이 감사할 때 하나님은 그것으로 더욱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③ 주님의 손에 사로잡히면 적은 것도 풍성해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가져왔던 것이지요.
이것을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19절 말씀이 중요합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세요.
첫째로, 주님은 무리를 풀밭에 앉게 하셨습니다.
오 천명이 넘는 무리들을 일사불란하게 정돈시켰던 것입니다.
풍성한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미리 준비시켰던 것이지요.
둘째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높이 들었습니다(TOOK).
하나님께 감사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성만찬 때 떡과 포도잔을 높이 드는 것과 마찬가지의 모습입니다.
셋째로, 축사(祝謝)하셨습니다(BLESSED).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셨던 것이지요.
저는 이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지극히 적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풍성해집니다.
유대인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무 감사도 없이 어떤 일을 즐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과 같다.\"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물로 주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 분께 감사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내가 잘나고 내가 능력이 많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감사하는 마음이 없을 때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아도 절대로 풍성하지 않습니다.
늘 부족하고 늘 쪼들리고 늘 불평과 원망 속에 삽니다.
그러나 우리가 적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때 우리의 삶은 풍성해집니다.
왕상 17장에 보면 사르밧 과부는 기근이 들어서 겨우 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 밖에 없었지만 엘리야 선지자의 말에 순종해서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지극히 적은 것을 수중에 가졌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먼저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랬더니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않고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실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은 그 작은 것이 변하여 큰 것이 되게 하십니다!
적은 것이 변하여 풍성하게 만들어주십니다!
루터는 \"마귀의 세계에는 감사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감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 수 있습니다!
넷째로,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니 제자들이 다시 무리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GAVE).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겨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는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났더니
끝없이 끝없이 늘어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 천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는 풍성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을 제외하고 어른 남자들만 오 천명이 먹고도 남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배불리
먹이셨던 것처럼 저문 날 빈 들에서 허기진 군중들을 먹이셨던 것이지요!(출 16장; 민 11장)
오늘 추수 감사절을 맞아 현재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빈 들에 날은 저물었는데 가진 것이라곤 겨우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 나와 감사하십시오.
주님은 그 작은 것을 크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그 적은 것을 더욱 더 풍성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경우에 있어서 배우는 사람이고,
참으로 강한 사람은 자신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며,
정말로 부유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옳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궁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비록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 가졌다고 할지라도
감사하는 사람이 진실로 부유한 사람이며 행복한 사람입니다.
\"인생은 느끼는 사람에게는 비극이지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희극이다.\" 라는 말도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기분 내키는 대로 사는 사람이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깊이 냉철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 \'감사한다\'는 말은 \'THANK\'인데 \'생각한다\'는 \'THINK\'와 어근이 같다고 합니다.
찬찬히 생각하는 사람이 감사할 줄 안다는 것이지요!
오늘 이 추수감사주일에 지난 한 해를 곰곰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빈 들에 날은 저물었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남아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 감사하십시다!
그리하면 이 작은 감사가 오천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는 풍요함으로 바뀌어질 것입니다!
15.제목 : 너희 때문에 감사하다
본문 : 빌-01-03-
추수감사] 너희 때문에 감사하다 (빌 1:3-11)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감사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감사는 이성적인 면 보다 감성적인 면이 강합니다.
감사는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젖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감사를 느끼고, 감사에 젖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감사를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 교회는 대성전에서 첫 추수감사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어제 오후에 저 뒷자리에 앉아서 호산나 찬양대가 이 강단 앞에서 감사절 칸타타 마지막 연습을 하는 것을 지켜보는데 중간에 내레이션이 있습니다.
강단의 아름다움, 찬양의 감동, 그 위에 내레이션의 내용,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나왔습니다. 찔끔 나오는 것이 아니고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강단을 장식하는 분들이 어제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제단 꽃꽂이를 하고, 성도들이 가져온 곡식과 채소와 과일을 잘 배치하는데 그 얼굴에도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2005년 추수감사주일은 목양교회 성도들에게는 특별하게 감사한 날입니다.
신약에는 감사라는 말이 쉰다섯 번 나옵니다.
그 가운데 마흔여섯 번이 바울 서신에 들어 있습니다. 전체의 84%입니다.
이상하게 공동서신인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 1, 2 ,3서, 유다서에는 감사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번에 이것을 조사하고서 ‘아, 바울은 감사의 사람이었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에 대한 대표적인 성경말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말씀도 바울 서신 가운데 하나인 데살로니가전서에 나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빌립보서는 옥중서신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울은 감옥 안에서도 ‘나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같은 옥중서신인 골로새서에는 감사라는 말이 일곱 번이나 들어 있습니다.
바울서신 가운데 감사라는 말이 골로새서에 제일 많이 나옵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두 군데에서 감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순서가 바뀝니다만 하나는 4장 6절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우리는 기도할 때 감사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이 이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미리 감사해야 합니다.
맥추감사예배를 드릴 때 ‘맥추감사는 올해 상반기의 일들을 감사하며, 하반기의 일들에 대해 미리 감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말씀드린 일이 있습니다.
추수감사예배는 올해의 모든 일들을 감사하는 예배입니다.
추수감사예배는 동시에 내년도에 베풀어주실 은혜를 생각하며 미리 감사하는 예배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는 기도할 수 있는 것을 감사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인가, 들어주시지 않을 것인가, 언제 들어주실 것인가, 어떤 모습으로 들어주실 것인가, 이것을 생각하기에 앞서서 기도할 수 있는 것을 감사해야합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할 수 없다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특권이요, 복입니다.
감사해야 할 일 가운데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감사하면서 기도하면 어떻게 됩니까?
4장 7절의 말씀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의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상황은 바뀌지 않았는데 그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바뀌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담대해집니다. 그 어려운 것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무슨 일을 겪더라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흔들리지 않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감사하면서 기도하여 이와 같은 평강과 자신감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 가운데 3절 말씀,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말씀을 통해서 은혜와 교훈을 구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자기에게 좋은 일이 있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 교인들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 때문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타적인 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드리는 감사, 열린 감사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 나에게 이러이러한 좋은 일들을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감사를 드려왔습니다.
감사의 제목을 나에게서 찾았습니다. 안에서 찾았습니다.
2005년은 좀 색다른 감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 때문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의 제목을 밖에서 찾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저 사람에게 저렇게 좋은 일, 기쁜 일들이 있는 것을 감사합니다.’ 하시기 바랍니다.
우선 나의 자녀, 나의 가족의 좋은 일들 때문에 감사하고 다음에, 나의 이웃, 같은 속회, 같은 선교회 회원들의 좋은 일들 때문에 감사하기 바랍니다.
감사의 제목을 찾는 대상의 범위를 점점 확대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감사가 그런 감사였습니다.
감사의 제목을 자기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찾는 감사였습니다.
에베소서 1장 15절과 16절을 봅니다. 에베소서는 역시 옥중서신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 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바울 사도는 에베소교회 교인들 때문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 교인들의 믿음과 사랑이 넘치기 때문에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2절과 3절에서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기억하며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3절에서는 디모데가 거짓 없는 신앙생활 잘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빌레몬서 1장 4절,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의 교인들 때문에도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로마서 1장 8절의 말씀입니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로마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자기가 세운 교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널리 알려지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가 잘 되기 위해서, 부흥하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교회가 부흥된다는 소식을 들을 때 함께 기뻐하며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감사는 나 때문에 감사, 내게 좋은 일이 있어서 감사가 아니라 너희 때문에 감사, 너희가 잘 되어서 감사, 너희가 변화되어서 감사, 너희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기 때문에 감사, 이와 같은 감사였습니다.
아까 ‘바울은 감사의 사람입니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걸음 더 나가서 ‘바울은 남 때문에 감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해는 이웃이 잘 되는 것, 이웃에게 좋은 일이 있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남이 나 때문에 감사할 수 있는 존재들이 되어야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 서신 열세 권 가운데 감사란 말이 들어 있지 않은 성경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디도서입니다.
또 하나는 갈라디아서입니다.
디도서에 감사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은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갈라디아서에 감사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갈라디아서에서는 감사란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이 바른 믿음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믿음이 앞으로 나가지 않고 오히려 후퇴했습니다.
옛날, 율법중심의 믿음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감내하기 위해 힘쓰는 바울도 그런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 때문에 감사한다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과 같은 교인들이 되지 말고, 빌립보 교회 교인들과 같은 교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남이 나 때문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내가 믿음 위에 서야 됩니다.
나의 믿음이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믿음이 자라야합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어떤 점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까?
바울 사도가 감옥에 있는데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 에바브로디도 편에 선물을 보내왔습니다.
바울이 필요한 물품, 돈, 그리고 바울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편지를 보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님, 옥중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우리는 사도님께서 전해주신 믿음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아십시오. 우리 교회는 날로 부흥하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이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그 일에 대해 감사하는 편지가 바로 바울 서신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5절을 보세요. 바울이 감사하는 이유가 밝혀져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인 첫날부터 이제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교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일은 사도행전 1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을 떠나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이 빌립보입니다.
빌립보교회는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의 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히고, 밤중에 기도하고 찬미하고,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겨지고 간수가 놀라서 자결하려고 한 일이 있었던 곳이 바로 빌립보입니다.
빌립보에서 유명한 질문과 대답이 있었지요.
질문하는 사람은 간수, 대답하는 사람은 바울과 실라입니다.
질문,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대답,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누구나 가지고 있는 질문, 꼭 필요한 질문이고 거기에 대해 꼭 맞는 대답입니다.
흔한 일이 아니지만 수능고사에서 복수정답이 나오는 수가 있습니다.
정답이 하나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고 둘이어서 혼란이 빚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올해는 그런 일이 없어야하겠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는 복수정답이 없습니다.
‘주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 받습니다!’ 유일정답, 오직 하나뿐인 정답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에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그 다음은 고린도에서 일 년 육 개월, 그 다음은 에베소에서 삼 년, 그 다음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체포당하고, 가이사랴에서 여러 해 감옥생활을 하고, 그리고 로마로 호송되어 왔습니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그 다음에는 스스로 믿음을 지켜 나갔습니다.
빌립보서는 바울 생애의 거의 종반부, 바울이 옥에 갇혀 있을 때에 기록되었습니다.
빌립보교회가 세워진 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에 데마와 같이 바울을 떠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갈라디아교회와 같이 바울을 배반한 교회도 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교인들은 변함없이, 흔들림 없이 복음을 위한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변함없이 복음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출발은 좋았으나, 뜨거웠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고, 식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2005년 출발할 때 그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계십니까?
혹시 아니라면 오늘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하면서 그 마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변함없이 복음을 위한 일에 동참할 때, 그래서 사람들이 나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될 때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6절을 보세요.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주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재림하실 때까지, 심판 때까지 우리를 붙들어주십니다.
우리의 믿음을 지켜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이루게 하십니다.
내가 변함없이 복음을 위한 일에 동참할 때, 그래서 사람들이 나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될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나를 위해서 더 기도해 줍니다.
4절을 보세요.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바울은 기도할 때마다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위한 기도를 빼놓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는데 기쁨으로 기도했습니다.
기쁨으로 기도하면 그 기도가 길어집니다. 많은 것을 기도하게 됩니다.
그를 위해 좋은 것을 구하게 됩니다.
9절을 보세요. 다시 한 번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내용이 나옵니다.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얼마나 좋은 기도입니까?
이웃이 나를 위해 이와 같은 기도를 해 주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나를 더 생각해 주고, 나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7절을 보세요.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말합니다.
8절을 보세요.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사모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 일에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남이 나 때문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 특히 내 믿음이 변함이 없고 복음을 위한 일에 한결같이 참여하여서 남들이 나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하고 나를 늘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 바랍니다.
자, 우리가 남 때문에 감사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타적인 감사, 열린 감사를 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 마음속에 한없는 기쁨, 강물 같은 기쁨이 찾아옵니다.
감사와 기쁨은 표리의 관계입니다. 안에 감사가 있으면 밖에는 기쁨이 있어야합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인데 기쁜 얼굴을 하지 않고 있는 분들은 추수감사주일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3절과 4절을 보세요.
3절에 감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어지는 4절에 기쁨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나는 너희를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한다. 너희의 믿음이 변함 없는 것을 감사한다.’ 이렇게 시작된 빌립보서에 제일 많이 나오는 말이 기쁨입니다.
1장 18절 뒷부분을 보세요.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2장 17절과 18절을 보세요.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느니라
3장 1절 앞부분을 보세요.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4장 1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4장 4절을 보세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마지막으로 4장 10절입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빌립보서는 기쁨이라는 말이 중간중간에 보석과 같이 박혀서 반짝이고 있는 성경입니다.
감사의 폭을 넓히시기 바랍니다. 이타적인 감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열린 감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2005년의 남은 시간들을 기쁘게 할 것입니다.
2006년도 기쁜 일들이 많게 할 것입니다.
그 기쁨이 주변으로 퍼져 나가도록 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요약하며 마칩니다.
올해의 추수감사주일은 교회적으로 특별한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우리는 감사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할 때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나에게 좋은 일이 있어서도 감사해야 하지만 남 때문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남이 나 때문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서 남들이 나를 위해 더 기도하고 더 사랑하도록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좋은 일로 감사, 특히 다른 사람의 믿음 때문에 감사, 폭이 넓은 감사, 이타적인 감사, 열린 감사를 하여서 넘치는 기쁨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6.제목 : 감사와 찬양의 위력
본문 : 시-100-04-
감사와 찬양의 위력
( 시 100 : 4 ~ 5 )
\'감사와 찬양의 위력\'이라는 제목으로 오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 가도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말을 배울 때 쯤 되면은 어머니가 꼭 가르치는 말이 있어요. \'엄마, 아빠\'라는 말을 먼저 가르치고 그 다음에는 \'고마워요. 감사해요.\' 꼭 뭐를 주면서 \'고마워요. 감사해요.\' 그러면 애도 따라서 \'고마워요. 감사해요.\'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민족에 가도 똑같이 엄마가 어린아이에게 가르치는 처음 언어가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고통 많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언어가 어릴 때는 엄마 아빠입니다. 고통을 당할 때 엄마, 아빠 밖에는 부를 데가 없지 않습니까? 사회생활에 나와서 인간관계와 자기 개인의 마음에 평화를 얻기 위해서도 항상 고맙습니다. 감사하는 말이 있어야 되기 때문에 그 근원적인 언어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1. 감사와 찬양과 나의 삶의 관계
감사와 찬양과 나의 삶의 무슨 관계가 있냐고 사람들은 묻습니다.
왜냐하면 감사와 찬양을 할려고 하니까 힘이 들어요. 설교를 들을 때는 \'야 오늘부터 감사하고 찬양하고 살아야지지.\' 그러다가 버스타면 다 잊어버립니다. \'왜 나는 이 모양이냐.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안 되는 것이 왜 이러느냐.\'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로 우리에게 부패한 습성을 전해 주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부패한 심성을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1절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하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영화롭게 생각하거나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부패한 심정이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부패한 심정은 미움, 분노, 시기, 비판, 원망, 부정적인 태도는 쉽게 취해요. 이것은 어린 아이에게도 안 가르쳐 줘도 미움은 갖고 분노를 하고 시기하고 비판하고 원망하고 부정적인 태도는 다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패한 성품의 자연적인 발로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마음의 바탕에 불안, 행복, 평안, 기쁨 등은 거리가 멉니다. 나는 평안을 갖고 행복을 얻고 기쁨을 갖겠다고 하면서도 마음엔 미움과 분노와 시기와 비판, 원망,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으면 행복과 기쁨이란 날개를 치고 도망치고 마는 것입니다. 물질이나 좋은 환경이나 지위나 명예 등 외부적인 조건이 행복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저는 요사이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젊은 형제들을 만나면 하나님이 주신 한 시간 동안 행복하게 살라고 늘 부탁을 합니다. 징징 짜고 울고 살지 말고 미워하고 물고 찢고 싸우지 말고 주어진 시간을 될 수 있으면 귀하고 행복하고 즐겁게 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이 그냥 가만히 있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서울대학을 나오고 하버드를 나오고 뭐, CEO가 되고 돈을 많이 벌고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부귀, 영화를 가지면 행복하겠지 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조건은 될지 몰라도 그 속에서 행복은 결코 없는 것입니다. 저는 세상에서 수백만 명을 만났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굉장히 큰 부자들도 만나고 평범한 사람들도 많이 만났는데 부자라고 해서 반드시 행복하고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기쁜 것은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남미 같은데 대통령은 거의 저의 친구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쿠데타를 당하고 또 쫓겨 나가고 또 선거를 통해서 돌아오기도 하고 피투성이가 되고 가정이 엉망이 되는 것을 제가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습니다.
세계적인 긍정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 박사는 물질이 주는 만족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비유한다고 말했었습니다. 물질적인 기쁨이란, 처음에는 아주 맛있지만 점점 녹아서 별 맛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같다는 것입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 참 맛있어요. 저도 요번에 하와이에서 집회하면서 나가서 아이스크림 사먹었습니다. 그것도 우리 집사람 몰래 사먹었어요. 절대로 아이스크림 못 먹게 하기 때문에 몰래 아이스크림을 사서 몰래 먹으니까 더 맛이 있더라구요. 그런데 그 문제가 몇 번을 핥아 먹을 때는 맛이 있는데 조금 지나가면 혀가 그만 거기에 마비가 되어서 맛있는 것을 알 수가 없어요. 그냥 덤덤하고 마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세계의 행복도 그런 것입니다. 좋은 집을 짓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 처음에는 굉장히 좋지요. 그러나 얼마 안 지나가면 그것이 보통이 되버리고 시시하게 보이고 별로 감격이 없이 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큰 인기를 얻고 성공을 거둔 연예인이나 수백만 달러의 연봉을 받는 운동선수나 권력을 한손에 쥐고 있는 정재계 인사들 가운데 불행한 종말을 맞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화려하고 풍성한 생활 속에서 감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으로 인생을 파멸 시키는 사람들이 종종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호주 시드니에서 조금 떨어진 남태평양에 외딴 섬나라가 있습니다. \'바누아투\' 공화국입니다. 이 나라 인구는 19만 명에 문맹률이 85%나 됩니다. 1인당 국민소득은 3천 불도 되지 못합니다. 아주 가난한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의 신경제학 재단(NEF)이 2006년에 발표한 행복지수 순위를 보면 세계 178개국 가운데 가장 행복하다고 국민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나라가 바로 이 \'바누아투\' 공화국으로써 행복지수 1등을 얻은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인 것입니다. 스위스, 노르웨이, 덴마크나 미국이나 블란서나 독일이나 호주나 이런 나라들이 물질적으로 부요하고 환경이 좋으니까 행복지수가 높을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가장 비난하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바누아투 공화국이 행복지수 1위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물질이나 좋은 환경, 지위나 명예 등 외부적인 조건이 행복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을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게 가만히 보면은 제가 50년 동안 목회를 했기 때문에요 심방을 다니면서 보면 부자들 집에 가면 별로 웃지 않는데 가난한 집에 가면 잘 웃습니다. 부자들은 근엄한 얼굴을 많이 가지고 젊잖은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명쾌하게 웃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집에 가면 대문에서부터 \"하하하..하하하... 목사님 오세요.. 하하하하.\" 무엇 때문에 그래 웃는지도 모르게 웃습니다. 아무런 삶의 부담을 느끼지 않고 웃는 것은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런 부담 없이 웃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요, 좋은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거듭나되 마음의 바탕이 변화되면 우리가 행복을 수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환경이 변화된 것이 아니라 마음에 바탕이 변화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서 마음의 바탕이 변화되면 비로소 환경도 감사히 받아들일 수가 있지 마음이 변화되지 않는데 환경을 아무리 변화 시켜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돼지소굴을 아무리 청소를 하고 이부자리를 깔아 놓아도 얼마 있지 아니하면 돼지소굴로 변화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음이 변화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요번에 기독교 교도소를 만드는 이유가 교도소에 한번 갔다가 들어가면 또 들어가고 또 들어가고 교도소가 전문 범죄인 만드는 교육 제작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예 교도소에서 내에서 마음에 변화를 받기 위해서는 기독교 교도소를 세울 수밖에 없다고 작정을 하고 우리 교회에서도 거금을 내어서 기독교 교도소를 곧 착공을 하는 것입니다. 교도소에 들어가서 회개하고 말씀 듣고 찬송하고 변화 받아서 마음 바탕이 달라져야 교도소에 들어간 보람이 있지 들어갔다가 더 악한 일곱 귀신이 들어가서 나오면 효과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것 사람 힘으로 안 됩니다. 옛사람은 지나가고 새사람이 된다. 말은 쉽지 실제 그것이 잘됩니까? 안되지요. 하나님의 성령이 와서 우리 속에 이 역사를 일으켜 주셔야지요. 자력으로는 안 됩니다. 타력으로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이 넘치는 마음의 샘은 마음이 변화될 때 일어나는 것이지요. 마음이 변화되지 않는데 그 샘물이 마음속에 솟아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믿음, 소망, 사랑, 의, 평안의 샘물이 솟아나기 위해서는 이 샘물을 여는 것이 바로 감사와 찬양인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이 우리 마음에 감추인 샘물을 열어서 우리가 행복을 맛보고 그 샘물을 마실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은 마음의 미움을 제하여 주고, 분노를 가라앉히고 우울증을 치료합니다.
잠언서 17장 22절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입니다. 보통 좋은 약이 아닌 것입니다. 마음에 즐거워하면 몸속에 약 공장이 막 돌아가는 것입니다. 온갖 좋은 약 공장이 다 돌아가서 온 병을 치료하거니와 마음이 상하면 근심을 하면 뼈조차 마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도의 요가 중에서 웃는 요가가 있어요. 모여 가지고서 다른 것 아니하고 그저 배를 안고 웃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병자가 나았다는 기록을 제가 본 것입니다. 여러분 웃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하루에 150번을 웃는다고 하는데 어른들은 하루에 다섯 번 밖에 안 웃는다고 그럽니다. 기왕 교회 모였으니 한번 웃어 볼까요? 원, 투, 쓰리...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하하하 하하하
좋은 일은 억지로 해도 괜찮다고.. 웃는 것은 좋은 것이기 때문에 억지로 웃어도 우리속의 신경은 진짜 웃는지 가짜가 웃는지 모른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할 수 있으면 많이 웃으세요. 저도 웃으려고 애를 많이 쓰지만 이것도 힘이 들더란 것입니다.
캘리포니아 데이비스대학교 심리학과 로버트 에먼스 교수와 마이애미대학교 심리학과 마이클 매컬로프 교수는 공동과제로써 연구를 해서 감사와 심리적 변화의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사람들이 감사하고 찬송하며 웃고 지내면 삶에 대하여 더 행복하다고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냥 있는게 아니라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찬양합니다.\" 그러면 내가 사는 것이 참 행복하다고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낙천적인 성격으로 변화됩니다. 늘 마음이 우울하던 사람이 즐거워하게 되고 낙천적인 성격으로 변하게 되고 활력이 넘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열정적으로 일하게 되었으며 결단력이 강해졌고, 유머 감각이 생겨났고, 힘든 일을 처리하는데 자신감이 생겨났다고 말한 것입니다.
감사를 하고 즐거운 마음을 갖게 되면 운동을 더 열심히 하게 되고, 숙면을 취하게 되었으며, 눈에 띄게 건강이 좋아지고, 인생의 목표가 뚜렷해졌으며 그것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되었고, 타인을 돕는데 적극적이 되었으며, 관대하고 친절한 사람이 되었고, 부자에 대해서 시기, 원망이 사라졌다고 말했습니다. 이것 참 희안한 기적이지요. 우리가 대게 부자 보면 \'지가 뭐 잘났다고 건방지게 아이 더러워서 못살겠네.\'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부자가 여러분, 공짜로 부자가 되면 그런 욕을 먹어도 좋지만 실제로 부자 되려면 애를 많이 써야 됩니다. 왜 내가 그 말을 하냐면 50년 목회를 하고 뒤를 돌아보는데 많은 사람이 절 보고 욕을 많이 해요. 큰 교회 세웠다고.. 교회당을 크게 세우고, 수많은 교인들을 불러 모으고 지가 잘난 체하고.. 잘난 체도 안 합니다 나는... 교회를 내가 키웠나요? 하나님이 키워 주셨는데 게으르게 놀고 교회가 키워지지는 않는 것입니다. 진실로 여러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말씀 드리거니와 50년 목회 동안에 한번도 휴가를 가본 적이 없습니다. 교회 목숨을 내걸고 일을 해야 교회가 성장하지요. 일안하고 교회가 성장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부자도 참된 부자는 죽도록 뼈가 부러지게 일을 해야 부자가 되지 가만히 앉아 있는데 누가 돈 갖다 줍니까? 돈 갖다 주는 것이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공정경쟁을 통해서 정부가 공정경쟁만 하게 해주고 전부 열심하고 근검하고 절약하고 애쓰며 노력해야 부자가 될 수 있지요. 그런데 비아냥 거리다가다도 우리가 감사하는 생활을 하고 마음이 긍정적이 되면은 부자도 \'부자 될 만하니까 부자 되었지. 감사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자가 자기만 먹고 산다면은 고생할 것 없어요. 부자 한사람 밑에 수십만 명, 수백만 명이 밥을 먹고 사는 것이니까 그것을 생각해야 돼요. 여러분 우리나라도 부자들이 많이 생겨나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다 부자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 여러분만 먹고 살지 말고 여러분 밑에 20명, 30명, 100명, 200명, 1,000명씩 먹여 살려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자의 효과가 있지요. 이래서 우리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축복해 주시면 많은 부자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다 부자는 될 수 없지요. 다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돈 버는 능은 선택된 사람들이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돈을 벌어서 나눌 수 있게만 만들어 주면 되는 것입니다. 정부에서는 이런 도움을 베풀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일을 체계적으로 하게 되었고, 보다 창조적이고 열린 시각으로 상황을 보게 되며, 어려운 상황에 더욱 탄력적으로 대처하게 되었고, 스트레스에 강해지고, 가족관계가 돈독해지고, 신앙심이 깊어졌다고 말한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이 이런 큰 인격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쓴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에프스키의 삶은 어릴 때부터 고통의 연속이었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고아로 자랐습니다. 청년 시절에 혁명당 활동을 하다가 소련 황제에게 잡혀서 사형 선고를 받고 시베리아로 유배 가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의 시절을 보냈었습니다. 그리고 난 시베리아에서 해방되고 나오고 난 다음 결혼했는데 얼마 있지 아니하여 아내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래서 천신만고를 겪어서 다시 재혼을 했는데 첫애를 낳았는데 첫애가 또 병들어서 죽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설상가상으로 간질병에 걸려 평생을 고통당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질병을 \'거룩한 병\'이라고 불렀었습니다. 원망하지 않았었습니다. 도스토에프스키는 모든 일에 감사했었습니다. 감사를 안 하고는 정신적으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감사를 통해서 그 신앙이 더 굳어지고 깊어졌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그 고통 속에서 적은 책들이 오늘 역사에 남아 있는 불후의 명작들이 되어서 「죄와 벌」이라든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든지 이런 책들은 오늘날도 온 세계 사람들에게 찬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이 그를 파멸시킨 것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미한 것이 오히려 고통을 좋은 기회로 삼아서 승리의 발판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여러분 잘 아는 솔제니친은 시베리아 정치 수용소에서 11년의 고통 가운데 암이 걸려서 죽음에 이르자 예수님을 믿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출옥한 후에 수용소의 참상을 폭로하는 소설인 \'수용소 군도\'를 써서 1970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이 책속에서 솔제니친은 \"감방이여 고맙소.\"라고 고백하면서 하는 말이 내가 시베리아 감방에서 11년 동안 갇혀 있지 않았었으면 결코 수용소 군도라는 책을 짓지 않았을 것이요. 그 다음 노벨 문학상을 타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역경이 오히려 축복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 예수를 믿고 감사할 줄 아는 삶을 가졌기 때문에 역경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경을 당하여 원망, 불평, 탄식하면 뼈가 마르게 되고 죽게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2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우리 삶 가운데 감사할 것은 얼마든지 있는데 그렇지 않는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그릇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의, 평안, 기쁨의 샘을 여는 문이 바로 감사와 찬양인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빌헬름 웰러는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이 감사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2. 감사와 찬양과 이웃과의 관계
여러분, 감사와 찬양은 우리 이웃과의 관계를 참으로 좋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웃에 감사하면 이웃의 자존심을 높여 주며 기쁨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이웃을 보고 비난하고 욕하면 이웃을 짓밟고,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어 주고 원수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에게 감사하고 이웃이 한일을 찬양하면 이웃이 자존심이 생기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조금 높은 위치 위에 있으면 욕을 많이 얻어 먹습니다. 저도 욕을 많이 얻어먹어요. 인터넷을 열기면 하면 조용기 욕을 하는 것이 언제나 나오는데 그것 별로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끔가다가 잘한다는 칭찬도 나오면 기분이 굉장히 좋습니다. 사람이니까 어찌할 도리가 없지요. 우리가 서로 만나면 \"참 감사합니다. 참 훌륭 하십니다. 잘하십니다.\"하면 말로써 천냥 빚을 갚는다고 기분 좋지요. 여러분 단순히 집에서 부부간에라도 남편이 아내보고 \"여보 참 고맙소. 전에 몰랐는데 요사이 가만히 살펴보니까 꽤 이쁘게 되었는데... 당신은 언제나 이뻐.\" \"또 날개 없는 비행기 태운다.\" 그러면서도 기분이 좋다고.. \"아이 왜 이렇게 많이 늙었노 쭈굴쭈굴하고 이제 볼모양 없구나\" 그러면 \"나이 늙었는데 뭐 더 좋아지라고?\" 그러면서도 \"지는 안 그렇나 지는 더 못났는데...\" 그렇게 반항하는 마음이 안생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서로 고마워하고 감사하고 칭찬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남편은 아내를 진실로 인정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남편도 아내를, 아내도 남편을 서로 감사하고 칭찬하고 살면은 이웃관계가 좋아지지 않습니까?
골로새서 3장 16절로 17절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에 감사하는 것은 우리 삶에 기름을 치는 것입니다. 이웃과 선한관계를 맺어주기 위해서는 감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소문이 들리기를 \"야, 그 사람이 자녀를 칭찬을 하더라.\" 벌써 마음속에 선한 감정을 가지고 좋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들으니까 그 사람 뒤에 돌아다니면서 자네에게 나쁜 욕을 하고 손가락질 하더라.\" 감정이 악화되고 미운 생각이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2절에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행복하고 감동을 받게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대학에서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숙제를 내줬었습니다. 부모님에게 감사편지를 쓰라고.. 지금까지 부모에게 기름을 받고 도움을 받았으나 감사편지를 안 썼으니까 이제 부모에게 감사편지를 한번 적으라고 절절히 길러 주시고 먹여 주시고 돌보아 주시고 대학까지 들어오게 해주시니 감사하다는 편지를 쓰라고 했습니다. 학생들이 다 열심으로 편지를 써서 우편으로 자기 부모에게 붙였습니다. 혹은 객지에 나와 있는 학생들은 고향으로 집에 같이 있는 학생들도 편지로써 부모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부모들이 이 편지를 받고 난 다음에 얼마나 마음에 감격하고 학교 당국에 감사하다고 편지를 쓰고 전화 연락을 했는지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식들이 부모에게 감사하다는 편지를 하고 난 다음 그를 읽어본 부모님들이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모는 자녀들과 관계가 좋아지고 학교와의 관계도 좋아졌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조그마한 사랑을 받아도 꼭 감사편지를 해야 되는데 제일 이 감사편지를 네는 것을 등한이 하는 것이 우리 한국 사람인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외국 사람들은 제가 외국에 가서 집회하고 돌아 오면은 꼭 고맙다는 편지가 날라 오는데 나는 우리 교회 와서 집회하고 가도 고맙다는 편지 않습니다. 귀찮으니까. 그러나 내가 외국에 가서 집회하고 오면 꼭 감사하다고 은혜 받았다고 편지를 해오는 그 분은 내 마음속에 기억에 꼭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집회를 해주고도 고맙다는 편지도 않고 감사하다는 내용의 무슨 인터넷 이메일이라도 오지 아니하면 그 사람 잊어버리는 마는 것입니다. 감사는 더 감사를 가져올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마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18절에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고 사람을 칭찬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하면 서로 도와줄 마음이 생기고 경계심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감사하는데 갚아 주고 도와주고 돌보아주고 싶은 생각이 나지요. 저는 50년 목회하면서 가끔 가다가 배신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지극히 사랑하고 돌봐주고 뒤를 물어준 사람이 나중에 나를 배신하고 그리고 험담하고 고발하고 온갖 고통을 줄 때 그때는 그냥 눈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피눈물이 나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욕은 못하고 같이 저주는 못하니까 피눈물이나 흘려야지 뭐 별도리 있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배신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서로 도와줄 마음이 생기고 경계심이 사라지게 되는 것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0절에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친구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서로 감사하고 칭찬하면 좋은 친구가 되고, 헐뜯고 흉보면 친구가 되지 않습니다.
잠언 16장 7절에 \"사람의 행위가 야훼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느니라\"
원수와 더불어 화목하게 되려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칭찬하고 이웃에 감사해야 화목하게 되고 좋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하라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감사와 찬송의 생활을 하면 내게 유익이 되는 것은 당연하고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당연한데 하나님께 감사를 하고 살면 어떻게 될까요? 하늘나라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궁전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청와대에 들어가기가 쉬운 줄 압니까? 아직 이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고 난 다음 나보고 한번도 오라고 말도 안 해요. 내 이웃 친구 같으면 내가 찾아 갔지만은 청와대 들어가기도 쉽지 않은데 하늘나라 궁전에 어떻게 들어갑니까? 하나님 궁전에 감히 우리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까? 그런데 감사와 찬양은 하늘나라의 문이 열리고 하늘나라 궁전으로 들어가는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시편 100편 4절로 5절 우리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야훼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아멘
여러분 감사하면 하나님 문에 들어가고 찬송하면 하나님의 궁전에 들어간다. 와~ 이것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만나기 위해서 특별히 기도원에 가거나 특별한 교회에 찾아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내 사무실에서 내 부엌에서 내 안방에서 하나님께 꿇어 엎드려서 감사하고 찬미하면 하늘문이 열리고 하나님 궁전 앞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간구하면 그 간구가 응답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감사와 찬양 중에 거하십니다.
시편 22편 3절에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찬송이 바로 하나님이 임재하게 하는 향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송은 하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합니다. 여러분 이 우주에서 하나님 보다 높으신 이가 있습니까? 안계시지요. 하나님보다 영화로우신 분이 어디 있습니까? 영화의 극치를 가지고 계시며 지극히 거룩하고 높으신 분이 더 높아질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더 높일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양하면 하나님이 존귀를 받고 영화로움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최고로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더 높이고 더 영화롭게 하는 길이 감사와 찬양의 길인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더 이상 높일 수가 없고 더 영화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할 수 있습니다. 감사와 찬양을 하면 하나님이 정말로 더 높아진 마음에 고요함을 가지고 더 영화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50편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감사와 찬송을 하면 하나님이 영화로움을 느끼지요. 여러분 자녀들이 부모에게 와서 감사를 하면 여러분 마음이 화끈해지고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참 자식 잘 길렀다. 더 잘 돌봐줘야 되겠다. 영화로운 마음이 생기고 도와줄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까?
시편 104편 33절에 \"내가 평생토록 야훼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그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낌없이 도와줄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닙니까? 여러분 아무리 내 뼈 속살에서 나온 자식이라도 늘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면 여러분 도와 줄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하나님의 구원과 도우심의 팔을 뻗으시는 것은 찬송을 통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 25절로 26절에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빌립보 감옥에 갇혀서 한밤중에 차고에 차인 체 온몸은 맞아 상처가 입어 아프고, 빈대, 벼룩이 들끓는 곳에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부르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감동을 하시고 영화로움을 느끼든지 빌립보 옥토를 잡고 흔들어 버렸습니다. 거대한 진동이 일어나고 지진이 일어나서 옥문이 다 열려 버리고 차고가 다 끌려져 버리고 그들은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이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불행과 우울증과 고통으로 묶어 놓지만은 감사와 찬양은 자유와 해방을 가져오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와 찬양은 굉장히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원망하고 불평하면 입에서 연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 어릴 때 여우 잡으러 가면 여우 굴에다 생나무를 꺾어다가 내리 불을 때 찌르면 여우가 코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서 튀어 나오면 몽둥이로 때려잡았어요. 그래서 옛날에 다 여우 목도리 하고 다니는 사람은 그렇게 여우 때려잡아서 여우 목도리 하고 다녔었습니다. 요사이 그러다가 환경주의자들에게 큰일날 소리하겠지만... 그런데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면 연기가 나는 것이 아니라 향기가 나게 하는 것입니다. 아주 달콤한 향기가 나게 하시므로 하나님께서 향기를 흠향하시고 기뻐하시고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69편 30절로 31절에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야훼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하나님께 황소를 잡아서 재물로 드리는 것보다도 감사와 찬양을 하는 것을 하나님이 더 영화롭게 생각한다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희생을 가치 있게 하지요. 주님께서 십자가 짊어지고 고생을 당했는데 감사한 말을 안 하면 헛고생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몸 찢고 피 흘려 얼마나 고통을 당했습니까? 얼마나 아프셨나. 못 박힌 그 손과 발 죄 없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그 예수님에 대해서 감사와 찬양을 하면 주님의 고통이 가치가 있습니다. 내가 고난당한 것이 가치가 있다. 부모가 애를 써서 자식을 낳고 난 다음에 자식이 응아하고 울고 나오면 구로한 어머니의 고통을 잊어버리고 구로한 것은 보람 있고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우주를 지으시고 인생을 만드시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고난당한 것을 가치 있고 보람되게 만들기 위해서는 감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에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말했었으며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로 18절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M. J. 라이언은 「감사」라는 책에서 인생을 변화시키는 감사의 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감사하면 기쁨이 넘치며, 언제나 생기가 있고, 우울증이 치유된다. 감사하면 건강해지고, 걱정 근심이 없어지며,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고통과 분노가 사라지며, 부족함을 받아들일 수 있다. 감사하면 공허하지 않으며,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하게 되고, 상처받더라도 사랑하며, 무엇이든지 나누어 주고 싶어진다. 감사하면 모든 생명체와 교감이 있으며, 평범한 일상도 은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초대 교회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감사하지 않는 죄\"라고 말했습니다. 영국의 격언에는 \"지옥이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 찬 곳이고 천국이란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로 가득 찬 곳\"이라고 말했었습니다. 템플턴상으로 유명한 존 템플턴은 그의 책 「열정」에서 감사의 생활을 실천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첫째, 감사할 대상을 찾아 칭찬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라. 둘째, 우리가 열망하는 좋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에 미리 감사부터 먼저하라. 셋째, 우리에게 닥친 문제와 도전 과제에 감사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은 내 자신의 삶을 행복하고 발전적으로 변화시키고 성공적인 삶으로 이끌며 이웃과 함께 협력하며 잘 살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 감사와 찬양을 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와 찬양의 삶은 손해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 개인에게도 플러스가 되고 이웃과의 관계에도 플러스가 되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께는 더욱 큰 플러스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힘써 해야 되겠는데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마귀인 것입니다. 성령은 감사와 찬양을 하라고 말합니다. 마귀는 원망과 불평과 탄식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환경에 처해 보십시오. 내 위치에 처해 보십시오. 내가 어떻게 감사 찬양할 처지가 됩니까?\" 여러분, 처지가 안 되니까 더욱 감사하고 찬양해서 그런 처지가 되도록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은 여러분에게 좋은 선물을 가져오지만 원망과 불평은 여러분에게 수렁을 만들어 놓고 마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 합니다. 우리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17.제목 : 주님,감사합니다.
본문 : 시-103-1-
본 문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시편 103:1-3)\"
신구약 성경 가운데 「감사」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구절이 약 178개가 됩니다. 그것은 성경은 우리에게 감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강조점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왜 해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도처에서 밝혀 주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은 28세에 스승의 죽음을 목격한 후 절망과 실의에 빠져 12년 동안 이집트, 시실리, 이탈리아를 돌며 방황했습니다. 그의 나이 40이 되어서야 아테네로 돌아와 철학강의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입버릇처럼 네 가지를 감사했다고 합니다. 첫째는 헬라인으로 태어난 것, 둘째는 자유인으로 태어난 것, 셋째는 남자로 태어난 것, 넷째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것.
감사와 불평은 똑같이 땅속에 묻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감사를 캐내고, 어떤 사람들은 불평을 캐냅니다. 그것은 마치 금광에서 하루 종일 금을 캐는 사람이 있고, 쓸모없는 돌멩이를 캐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감사」라는 보화를 캐어 담읍시다. 그리하여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부자가 됩시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헬렌켈러는 말했습니다. \"나는 앞을 못 보는 사람이다. 눈이 멀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고픈 말이 있다. 내일 갑자기 장님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당신의 눈을 사랑하라. 귀가 먹고 벙어리가 된다고 생각하고 듣고 보고 접촉할 수 있음을 감사하라\"고.
시편 103편은 다윗이 읊었던 시중에 한편입니다. 그의 시는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 은혜를 잊지 말라\"로 시작됩니다. 송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며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감사하며 찬양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사하시며 고치신 은혜
3절을 보면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가장 큰 은혜는 죄를 용서하시는 은혜입니다. 죄 값은 사망이라고 했기 때문에 죄를 사함 받지 못하면 멸망하게 됩니다.
「사한다」는 말을 「사라흐」라고 합니다. 그 뜻은 능동분사형으로 끊임없이 계속하여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시편을 86:5을 보면 \"주는 선하사 사유하기를 즐기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하심이 후하심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죄가 있고 잘못이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잘못을 쉽게 용서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하시고 용서하시기를 즐기십니다.
워털루 전쟁이 치열해지자 겁을 먹은 한 병사가 탈영하려다가 붙잡혔습니다. 전쟁 중 탈영병은 사형에 처했습니다. 당시 사령관이었던 웰링턴 장군이 사형을 선고하려고 하자 부관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습니다. \"각하, 마지막으로 이 병사를 용서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용서는 사형보다 위대한 힘을 발휘하리라 믿습니다.\" 이 말에 감동한 웰링턴 장군이 그 병사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 병사는 변했습니다. 그는 군인으로서 최선을 다했고, 한 평생 장군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죄사함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이 본문의 교훈인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네 모든 병을 고치신 은혜를 잊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병은 육체의 질병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고통을 포함합니다. 육체의 질병, 상한 마음, 실패, 절망, 포기, 고독 등을 통틀어 모든 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친다는 말은 `라파`라는 단어인데 그 뜻 역시 단순한 육체의 병만을 고치는 의료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완전한 상태로 고쳐서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 15:26을 보면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즉 `야웨 라파`라는 것입니다. 싸매시고 꿰매어 완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 출애굽기 15:26의 뜻입니다.
누가 사함 받고 누가 고침 받습니까? 하나님이 사하시고 고치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사함 받고 고침 받습니다.
1998년 한해동안 미국 듀크 대학 병원의 해롤드 쾨니히와 데이비드 라슨 두 의사가 실험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매 주일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은 병원에 입원 할 확률이 적고 입원하더라도 빨리 치료되어 입원기간이 짧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 주일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평균 7년을 더 오래 산다는 사실을 밝혀 냈습니다.
1999년 듀크 대학에서 약 4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한바 의하면 예배에 참석하여 찬송과 기도를 드리고 말씀을 듣는 것이 우울증을 줄이는데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규칙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의 경우 고혈압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도 밝혀 냈습니다.
암과 싸워 이긴 미국 하워드대학의 존스교수는 사람에겐 네 단계의 계층구조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육체적인 단계, 정신적인 단계, 지적인 단계, 그리고 영적인 단계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 네 단계를 다 치유하는 것이 전인치료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고 계십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체질을 아시는 것입니다. 흙으로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진토임을 아시는 것입니다.
원인을 몰라서 고치지 못하는 병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체질, 나의 생각, 나의 마음, 나의 과거 현재, 그리고 내일일을 아시기 때문에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2. 소원을 만족케 하신 은혜
5절을 보면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욕구불만을 표출하는 태도가 여러 가지입니다. 손가락을 빨거나 깨무는 것, 손톱을 물어뜯어 망가지게 하는 것, 다방이나 음식점에 앉으면 죄도 없는 성냥개비를 다 부러뜨리는 것, 종이만 보면 찢고 찢어 꽃가루처럼 만드는 것, 강아지만 보면 발길로 걷어차는 것 등 다양합니다. 그 누구도 원하는 사람에게 만족한 대답이나 소원을 들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각각 다른 욕구 불만을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 다윗이 믿는 하나님은 소원을 만족케 해주실 뿐만 아리나 청춘이 되게 하셔서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고 비상하는 힘을 주신다는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전라남도 해남에서 한 소년이 태어났습니다. 본래 집이 가난해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하며 가난한 살림을 도와야 했습니다. 동네에 교회가 있어서 주일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년의 꿈은 중학교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집은 가난해 갈 수는 없고 꿈은 차 오르고, 견디다 못해 고민하던 소년은 어떤 날 방바닥에 엎드려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전상서 하나님, 저는 중학교에 가고 싶습니다. 저는 집이 가난해 갈 수가 없습니다. 저를 중학교에 보내주십시요\"라는 내용의 편지를 쓰고 흰 봉투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봉투 위에 `하나님 전상서`라고 쓰고, 뒷면에 자기 이름을 썼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길가에 있는 우체통에 넣었습니다. 배달부 아저씨가 편지를 꺼내다가 주소도 없는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난감해 하다가 하나님하고 제일 가까운 사람한테 배달하는게 좋겠다 싶어 그 당시 해남읍 교회 이준묵 목사님께 갖다 드렸습니다.
그 편지를 읽고 난 목사님은 무한감동을 받았습니다. 다음주일 그 소년을 불러 교회가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먹고 자게 하고, 중학교를 보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한신 대학에 진학하고, 외국 유학까지 다녀와 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가 현재 한신 대학교 총장이신 오명석 박사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만족케 해주십니다.
불임증으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아이도 없고 할 일도 없다는 핑계로 하루 7시간씩 텔레비전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KBS, MBC, SBS 세 개 채널만 있을 때는 방송시간이 제한돼 있었습니다만 케이블 방송이 시작되면서 다채널 시대에다 24시간방송이 계속되기 때문에 24시간 TV앞에 앉아 있어도 볼거리가 많아졌습니다.
어느 날 그 부인이 기도생활을 많이 하는 평범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이 그 부인에게 앞으로 3개월만 텔레비전이 없는 나라에 갔다고 생각하고 TV를 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변화와 은혜가 임할 것이라고. 그의 말대로 TV를 커버로 덮었습니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참고 견뎠습니다. 시간이 남아돕니다. 그 시간에 성경 읽고 기도하고 성경공부하고 영성이 되살아나고 정신이 맑아졌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7개월만에 임신을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녀가 임신하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님 텔레비전에서 발사되는 인체에 유해한 전자파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기한 방법으로 우리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며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감사하는 태도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일상성 속에서 감사합시다. 큰일 큰 은혜 큰 축복만을 감사의 조건으로 삼지 말고 지극히 작고 평범한 사건들 속에서 감사의 조건을 찾읍시다. 듣고 보고 말하고 먹고 마시고 걷고 앉고 일어서는 것, 눈감고 잠드는 것 깨어나는 것을 감사합시다.
둘째, 감사하다고 말합시다. 하나님께 이웃에게 가족에게 서로에게 감사하다고 말합시다. 말 한마디로 천냥빚 갚는다는 옛말은 의미 있는 말입니다.
셋째, 감사를 키웁시다. 감사하다보면 감사는 자랍니다. 소리도 커지고 분량도 커지고 조건도 많아집니다.
넷째, 넉넉하게 감사합니다. 마음도, 말도, 물질도 넉넉하게 감사합시다. 그릇이 커야 물이 많이 고이듯 감사가 넉넉해야 축복도 넉넉해집니다.
다섯째, 쉬지 말고 감사합시다. 하다말다 하면 맥이 끊어집니다. 운동도 계속하면 운동이 되고 안 하다 하면 중노동이 되는 것처럼 감사도 계속해야 합니다.
여섯째, 하나님께 감사 드립시다. 하나님은 영원히 감사와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 분입니다. 모든 영광과 감사를 하나님께 드립시다.
주님, 감사합니다. 아멘
18.제목 : 이번 추수감사절은
본문 : 시-111-01-
예은교회
김학현 목사
[성경본문] 시 111:1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시편 111:1)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우리교회로써는 그 어느 때보다 춥고 어려운 시기에 추수 감사절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시111편)은 저작연대와 저자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진실과 공의로 행하셨음을 기억하며 찬양하고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이 시는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후에 유월절과 장막절 등 특별한 절기 때 불려진 찬양입니다. ‘할렐루야’로 시작하거나 끝나는 이런 시들을 할렐 시라 하여 절기 때 즐겨 불렀습니다.
머리글자가 알파벳의 순서를 따라 시작하는 답관체(踏冠體) 형식의 시이기도 한데, 오늘 시편의 첫 절엔 특히 감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잘 가르쳐 줍니다. 이 시편 모두를 알려고 하는 게 아니라 감사의 원리를 알려고 하는 것이기에 첫 절만 본문으로 삼았습니다. 공회 중에서 찬송하고, 전심으로 감사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겠다는 시인의 고백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감사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오늘 성경을 통하여 다음 주 감사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공회 중에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어디서 감사해야 할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가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라고 합니다. ‘정직한 자의 회(會)’나 ‘공회(公會)’는 모두 사람이 모인 모임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장소를 말합니다. 아니 장소보다는 모인 사람에게 무게를 두는 말씀입니다. 앞의 ‘회’는 작은 무리의 모임이라면 뒤의 ‘공회’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모임을 말합니다.
어쨌든 시인은 여러 사람이 모인 모임 안에서 감사하겠다고 합니다. 물론 은밀한 중에 깊이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그렇게 하듯 하나님께 감사할 때는 여러 사람들 중에서 하는 것이 감사의 원리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감사를 드릴 때 이런저런 이유로 익명으로 감사헌금을 드릴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안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감사는 공개적으로 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상16:8]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회중 가운데서 공적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할 것을 명령하심입니다. 그러는 이유가 있습니다. 감사와 찬양을 공개적으로 함으로 감사와 찬양꺼리를 소멸시키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감사와 찬양을 은밀히 했을 때 그 원인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또 자신이 없어질 때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방지하기 위해 감사의 조건을 온 천하에 드러냄으로 다른 이들과 함께 공유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61:9] “그 자손을 열방 중에, 그 후손을 만민 중에 알리리니 무릇 이를 보는 자가 그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여기서 공회는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교회에서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감사한 마음으로 사회나 직장, 가정에서 그 감사의 표현을 할 수 있습니다. 또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하는 감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대상이 가족이나 직장 동료일 때는 그 장소에 따라 감사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 하는 감사는 꼭 공회인 하나님의 교회에서 해야 합니다. 이번 추수감사절의 감사가 하나님께서 공적으로 인정하고 받으시는 감사가 되게 하십시오.
전심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친구 목사에게 도움을 얻은 일이 있어 고맙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말만??” 하더군요. 그래서 그 친구를 음식점으로 이끌어 푸짐하게 한 번 샀습니다. 물론 친구는 농담으로 그런 거지만 저는 그 말을 들으며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그렇게 하는 경향이 많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면서 정작 전심으로 감사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오늘 성경은 “전심으로” 감사한다고 합니다.
“전심으로, 베칼 레바브”는 말 그대로 “온 마음으로”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지(知), 정(情), 의(意)를 포함하는 전 인격을 다하여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영(靈), 혼(魂), 육(肉)을 다하여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감사하는 것은 대강하는 게 아닙니다. 전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말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 전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시9:1]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우리는 이번 추수감사절을 바로 이렇게 지켜야 합니다. 일년에 한 번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의식적 태도가 아니라 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감사절이 되어야 합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절기를 명령하실 때는 바로 기념이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출12: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려고 애굽의 모든 장자를 쓸어버렸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해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로 그 날을 기념하여 유월절을 지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추수감사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년 동안 비를 내려주시고 햇볕을 비춰주심으로 곡식이 열매 맺어 먹을 양식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감사하는 기념의 날이 바로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전심으로 해야 합니다.
부족한 종이 간절히 여러분께 청합니다. 이번 추수감사절은 기념에 남을 감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때도 깜냥을 다하여 감사주일을 지킨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번 추수감사절은 간절히 호소합니다. 분에 넘치도록 감사하여 기념을 삼으시길 바랍니다. 마음 깊숙이로부터 우러나온 감사를 드리며, 구체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십일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추수감사절의 초대교회 전통은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더 드려 한 달 월급을 드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권합니다. 교회 재정이 어려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그게 성경적 가르침입니다.
[신14:22,23]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매년 드리는 십일조는 절기 때 드리는 것입니다. 유월절이 없는 우리로선 추수감사절이 바로 십일조를 드리는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추수감사절은 전심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는 정직한 자가 하는 것이고 그 대상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여기서 정직한 자는 거짓말을 안 하는 자입니다. 거짓말을 안 하는 자는 바로 신앙인입니다. [계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거짓말하는 자가 지옥백성이 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거짓말쟁이가 아닙니다. 오늘 말씀과 아울러 해석을 하면 정직하지 않은 자인데 불신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감사를 해도 진정한 감사가 아닙니다. 불교에서 개종한 한 성도에게 설교를 하면서 불교인들은 배포가 커 절을 하나씩 짓는 이들이 많다고 했더니 정말 그렇다고 수긍을 했습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감사한 마음이 있어서 그렇게 하겠지요. 그러나 진정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감사는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불교나 미신 종교의 헌금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행위일 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의 감사는 다릅니다. 이미 받은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합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그러므로 대상이 항상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목사에게 은혜를 입었어도 목사에게 감사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교회나 기도원에서 은혜를 받았어도 그 교회나 기도원이 감사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감사의 대상입니다. 이번 추수감사절은 하나님께만 감사와 찬양을 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보다 우리교회에 어려운 때에 이번 추수감사절이 한 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번 추수감사절은 오늘 성경의 원리를 따라 기념이 될만한 감사절이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일년에 한 번씩 의식적으로 치르는 감사절이 아니라 공회 앞에서 공적으로 떳떳한 감사를 드리십시오. 온 맘과 힘을 다하여 드리는 감사의 절기가 되게 하십시오. 믿음을 가지게 되었음을 감사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감사하는 절기가 되게 하십시오. 할렐루야!
19.감사하게 하소서
본문 : 시-116-01-14
시편 116:1~14
오늘 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온 가족이 한 자리에서 이렇게 예배드리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시편 116편의 말씀은 지은이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칼빈은 여러 가지 내용의 분석으로 미루어 볼 때 다윗이 쓴 시가 아닌가 라고 추측했습니다. 다윗이 이 시편을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기록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내용으로 보아서 이 시인은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로부터 구원받는 놀라운 사실을 회고하면서 이 시편을 쓴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 시인은 큰 환난을 만나 사람 편에서 보면 거의 소망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기도가 응답되어 문자 그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짐을 받은 체험을 했습니다. 그는 너무 감격한 가운데 이 시를 쓴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 2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 도다.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이 시인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시편 50편 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인은 이 말씀을 그대로 믿고 하나님을 부르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모든 환난에서 건짐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한 이 시인은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고 그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이 시인의 신앙고백일 뿐만 아니라 이 시편 전체의 내용이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이 시인은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얼마나 큰가를 그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통해 실제로 경험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셨도다\" 이 시인은 환난 중에서 겸손하면서도 진지하게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간구를 들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은혜롭게 받아들이셨고 그의 처지를 감찰하실 뿐더러 그에게 평안의 응답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자녀인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기다리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하면 응답의 선물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인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 위해서 기도하는 입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어린애가 말을 잘해서 그 말에 감동되어 아버지가 아이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어린아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도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가 무엇을 소원하는지를 알고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논리적이고, 조직적이고, 신학적이고, 성경적이고, 감동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줄로 생각하면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소원을 아십니다.
예레미야 8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귀를 기울여 듣는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 우리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굽어살피십니까?\"하는 말씀이 저절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 시인은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차고 넘치는 사랑의 고백으로 이 시를 시작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시인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부부도 같이 살면서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가정을 이룬지가 40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저도, 제 아내도 서로 사랑을 고백합니다. \"나는 당신 밖에 없어\"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만을 사랑합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고백을 우리 모두가 이 시인처럼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더구나 우리는 더욱 더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이 시인은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기도하리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게 될 때 우리로 하여금 계속 기도할 수 있도록 격려가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까?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되면 기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내가 평생 기도하리로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내 생명의 끝날 까지 매일 매일 기도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생명 끝나는 그 날까지 살아있는 동안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고 계십니다. 이사야서 49장 15, 16절을 보면,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 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정말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오늘 주신 말씀 5절에 시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환난 중에 있을 때에 은혜로 대해 주셨습니다. 언제나 우리를 친절하게 대해 주셨고 우리를 도와주셨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시인의 경험을 보세요. 오늘 주신 말씀 3절에 보면 그가 당했던 경험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쳤었다\"고 했습니다. 육신적으로 말하면 사망의 줄 이상 무서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음부의 고통 그러니까 지옥의 고통 이상의 고통이 어디 있습니까? 인간으로는 육신면으로나 심령면에서 그 이상의 고통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 하나님이 기억하는 사람도 사망의 줄이 두를 때가 있습니다.
요셉을 보세요. 이유를 알 수 없는 사망의 줄이 그를 무려 13년 동안이나 두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순간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느브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느브갓네살 왕의 노를 사게 되었고 평소보다 일곱배나 뜨겁게 한 풀무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문자 그대로 꺼지지 아니하는 음부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그 뜨거운 불이 그들을 태우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사자굴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굶주렸던 사자들이 사람을 공중분해해 버리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했기 때문에 다니엘이 상처 하나 나지 않았습니다. 다리오 왕이 간신들의 모략을 알고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게 하고 그들을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 굴에 던져 넣었더니 그들이 굴 밑에 닿기도 전에 사자가 그들을 움켜서 그 뼈까지 부숴뜨렸다고 했습니다.
우리 개인들도 이런 경험을 간증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셨도다\" 이 얼마나 겸손하고 간절한 기도입니까? 이런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 받은 후에 너무 감격해서 이런 말로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오, 주님 나는 너무 늦게야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여 말하기를 \"주님, 내일 하루 주님의 얼굴을 본다면 이 세상에서 무슨 고통이라도 받겠습니다\" 이 얼마나 의미 심장한 기도입니까? 우리는 늘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만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영생 얻는 길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면 이것은 성숙한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서 환난 중에서 구원받는 것도 귀하지만 그보다 더 귀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옛날 성 카타린은 주님께 기도하는 중에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고난 당한 줄을 아느냐? 너는 나를 위해 고난받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그는 그의 일생을 주님께 바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염병 환자도 헌신적으로 돌보고, 나병환자를 간호하는 봉사생활을 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어렵게 생각지 아니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당했습니다.
중국 내지 선교를 처음 시작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를 여러분은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는 중국 내지에 선교를 하면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 우리의 필설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가 아무리 선교에 힘을 썼지만 전혀 성과가 나지 않았습니다. 본래 중국 사람은 대국인이기 때문에 빨리 반응이 없지 않습니까? 선교본부에서는 중국 선교는 별로 소망이 없어 보이니까 철수하라고 지시가 왔습니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는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이 불쌍한 심령들을 위해서 나를 보내셨고 성경에도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면서 본국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계속 열심히 일했습니다. 여러 해가 되어도 예수 믿기로 작정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선교본부에서는 본부의 지시를 따르지 아니하니까 몇번 편지를 보내고 나서 선교비 지원을 중단했습니다.
그 때 허드슨 테일러가 당한 어려움을 우리가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간절히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무실에는 두가지 기도제목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여호와 이레\' (여호와께서 준비하셨다)이고 다른 하나는 \'에벤에셀\'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이었다고 합니다. 나는 모르나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시고, 지금까지 도와주신 하나님이 앞으로도 도와주시리라 믿고 계속 그는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중국에는 7천만명의 그리스도인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의 기도를 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시인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7, 8절을 보세요.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찌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먼저, 하나님은 그를 환난 가운데서 도와주셨습니다.
6절 하반에 보면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깊은 불행 속에 빠졌을 때 도와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최악의 상태에서도 인내하며 소망을 잃지 않게 도와주셨으며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북돋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오늘 이 자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영원한 주님으로부터 건짐을 받고 날마다 거룩해 지는 자리로 나아가 장차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게 서게 될 것을 생각할 때 감격스럽지 않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눈물에서 건져내셨습니다. 말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 건져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십니다. 통곡하는 자의 베옷을 풀어 주십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실 때는 우리의 눈을 눈물에서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우리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를 죄에 빠지는 데서 건져 주셨고, 불행으로 떨어지는 것에서 건져내 주셨습니다. 우리의 발이 넘어지려 할 때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은 낮에도 밤에도 우리를 지켜주시며 실족지 않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영혼이 평안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찌어다\" 인간이 그렇게도 갈망하는 참 평안이 어디에 있습니까? 돈에 있습니까? 권력에 있습니까? 명예에 있습니까? 지식에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불안해 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렇습니다. 참된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찌어다\"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이 여러분의 영혼과 가정 위에 차고 넘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이와 같이 영혼의 축복을 받은 사람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감사와 헌신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9절을 보세요. \"내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이 얼마나 신실하고 귀한 결단입니까? 이 말은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겠습니다\"하는 다짐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다짐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와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 감격하여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작정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이 다른 것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마지못해서 두려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한 가운데서 감격하여 그렇게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 주신 말씀 10절 이하에서 우리는 이 시인의 경건한 결의를 볼 수가 있습니다.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 사도 바울도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3절에 \"내가 믿는 고로 말하셨다함과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다윗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와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사무엘에 의해서 그의 목동의 지팡이를 왕의 홀로 변케해 주신 확증을 특별히 믿었습니다. 다윗은 이와 같은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신념을 가지고 견뎌냈습니다. 비록 사울 왕의 시기심 때문에 큰 곤란을 겪었지만 다윗은 그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그 소망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말했습니다.
이 시인이 얼마나 어려움을 겪었습니까?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내가 경겁 중에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놀랐을 때에 내가 겁이 나서 소스라쳤을 때\'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울 왕이 나를 추적할 때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이라 하셨도다\" 사실 다윗과 관계를 맺었던 모든 사람, 사울 왕과 그 신하들 모두가 거짓말쟁이였습니다. 자기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다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성도라고 하지만 완전한 신앙의 소유자는 없습니다. 분명히 믿고 말했지만 정말 어려운 자리에 이르렀을 때 이 시인은 두려움이 생기고, 그 믿음이 흔들릴 수가 있습니다. 이 어려움이 오래 걸리면 지치고 낙심하고 좌절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변에 어려움 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멸시의 눈으로 보지마시고 오히려 \'내가 저와 같은 처지에 이르렀으면 어떻게 하나\'하고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꼭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입니다.
이 시인은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했습니까?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하나님은 이 시인을 곤란 속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놀라운 은혜를 깊이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놀라운 은혜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보답할 수 있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감사와 감격이 없는 신앙생활은 옳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이 시인은 여기서 그의 결의를 표현합니다. \"내가 구원의 장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몇 해전에 캐나다 에드몬튼에 갔다가 어느 권사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한국에서 캐나다 대사관에서 일했었는데 나이가 차도록 아기가 없어서 양녀를 두었습니다. 캐나다로 이민 가서 딸아이가 고등학교 갈 때까지 양녀된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가 말했더니 큰 충격을 받고 반항해서 고생을 많이 했고 거의 집에도 안 오고 벤쿠버에 있는 학교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이 차 사고가 나서 의식을 잃게 되고 거의 사경을 헤매게 되었는데 의사는 아무래도 소생할 가능성이 없으니 공연히 환자만 더 오래 고생시키지 말고 산소호흡기를 뽑아 편히 보내드리는 것이 났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 되는 분도 동의했는데 벤쿠버에서 어머니 사고 소식을 듣고 쫓아온 딸이 극구 반대하고 자기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24시간 간호하고 목사님이 오셔서 기도하는 것 외에는 누구도 출입하지 않게 하고 간호했는데 이 어머니가 열흘만에 의식이 회복되기 시작해서 한달 만에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담당의사선생님 말씀이 이것은 따님의 정성과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권사님은 \"내가 산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래서 내 여생은 캐나디안 인디언 전도를 위해서 바치려 합니다.\"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 받은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하시겠습니까?
20.제목 :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본문 : 시-118-28-
나의 하나님, 내가’ ‘나의 하나님, 내가’로 연결되어 있는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구원을 체험하고,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신앙인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높이겠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첫째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이는 믿음의 사람 시편 기자가 하나님과 자기와의 내밀한 관계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그에게 있어 하나님은 피상적 존재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과 번영, 미래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에게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his God)’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my God)’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게 객관적인 분이 아니라 주관적이신 분이시요, 남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어머니, 나의 어머니’ ‘우리 교회, 내 교회’ ‘우리 나라, 내 조국’이라고 일컫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하나님이심으로 우리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시며, 이렇게 될 때만이 하나님과 나와의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믿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목사의 설교를 듣고, 어떤 성도의 간증을 듣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설교나 간증이 신앙을 갖거나 믿음을 성장케 하는 데 도움은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믿음 그 자체는 될 수가 없습니다.
신문에 실린 어떤 기독교 대학 교수의 글입니다. “학교에서 수많은 학생들을 만나며 그들로부터 많은 인사를 받는다. 그러나 거의 의례적인 인사이다. 허나 때로는 의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진정한 감사가 담긴, 나를 가르쳐 주시는 나의 고마우신 선생님으로 알고 진심으로 인사하는 학생도 있다. 그러면 교수도 그 학생 신상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고 기억 속에 입력을 시키며 깊은 마음을 주게 된다.”
추수감사예배는 매년 연례 행사로 드리는 형식적인 예배가 아닙니다. 과거에도 은혜를 주셨고, 지금도 은혜를 주시며, 미래에도 은혜를 주실 나의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리는 특별하고도 뜻깊은 예배입니다.
특히 오늘, 1999년 11월 21일의 추수감사예배는 단순히 1999년의 추수감사예배가 아니라 20세기에 마지막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 죄를 사해 주시고, 크고 작은 고난, 삶의 구석구석, 순간순간에 은혜를 베풀어 주신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과 감사로 관계되어야만 합니다.
가장 완전한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요, 감사의 봉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내 삶을 만들어 주신 내 하나님을, 내 주님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하나의 작은 축복에 감사함이 또 다른 큰 축복을 받는 통로입니다.
둘째 : 내가 감사하리이다
감사란 타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나의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20세기 마지막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며 잃어버렸던 감사를 찾으시고 쏟았던 감사를 회복하십시오. 기독교인들의 최대 치욕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정신의 결핍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마음을 찾고 회복하여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만 있다면 21세기라는 내일에는 복되고 건강한 나, 가정, 교회, 그리고 나라가 될 것입니다. 여기저기에 분쟁이 있고 미움이 있으며, 문제가 생김은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겐 매사가 감사로 귀결되나 불평하는 자에겐 모든 일이 불만으로 끝납니다. 기독교인들의 생은 불만 속에서 피폐한 삶으로 종지부를 찍어서는 안 됩니다.
감사는 은혜의 산물이요 신앙의 표현이며, 축복의 열매요, 천국 생활의 상징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최고의 제사입니다.
내 속에 감사한 마음을 두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들리지 아니하며, 먹어도 맛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만족도 기쁨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감사란 기독교인을 나타내는 표시이며 감사가 나타나는 곳에 참 신앙이 있습니다.
독일 재무장관을 지낸 마르티 바덴 이야기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말할 수없이 궁핍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지방 여행을 갔다가 싸구려 여관에 투숙,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의 신발이 없어졌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어떤 죽일 놈이 내 신발을 훔쳐갔냐.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나같이 가난한 사람의 신발을 도둑질해가게 그냥 놔두시다니…”라고 하나님을 원망했답니다.
그러자 여관 주인이 창고에서 헌 구두를 꺼내주며 그에게 “오늘은 주일인데 나와 같이 교회에 가지 않겠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는 마지 못해 여관 주인을 따라 교회에 갔습니다.
헌데 그의 옆 자리에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이 앉아 눈물을 흘리며 찬송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더랍니다. “저 사람은 신발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아예 두 다리를 잃었구나. 신발이 있다고 해도 신을 수 없구나. 저 사람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복된가? 신발이야 또 사서 신으면 되는 것을….” 마르티 바덴의 삶에 변화가 왔습니다. 그는 삶의 상황에 따라 감사하는 자가 아니라 삶 그 자체로서 감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명 재무장관이 되어 국가와 국민에게 크게 봉사하였고 국민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감사하며 사는 생활이 올바른 삶이며 축복 받는 인생입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가 올바로 살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다.” 어거스틴(Augustine)의 말입니다.
왜 없는 것만을 가지고 불평불만을 하십니까? 지금 내게 있는 것으로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세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이기는 능력에 의하여 증명됩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뇌는 대략 140억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헌데 기억을 관리하는 것은 대뇌의 후두부이며, 여기에 저장된 기억은 되새기지 않은 상태에서 얼마를 지나면 잊혀지고 그 자리에는 새로운 것으로 저장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저장된 기억은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으로 분리되며, 전자는 의지를 사용해서 노력해야만 기억되는 것이고, 후자는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절로 떠오르는 기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는 조건을 조사하고, 찾아 내어 어거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생활 속에서, 그냥, 나도 모르게, 당연히, 저절로 내 속에서 살아나야만 합니다.
폭풍우로 인하여 미국의 에반 스톤 해안에서 배가 난파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노스웨스턴대학생들이 인명 구조에 나섰는데 그 가운데 에드워드 스펜서(E. Spen- cer)라는 학생이 17명을 구조했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 토레이(Torray) 박사가 LA의 한 모임에서 그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 스펜서 씨가 지금 여기에 참석해 계십니다.”라고 외쳤습니다.
토레이 박사가 그를 강당 위로 초대하자 백발의 노인이 우레 같은 박수 속에서 올라왔습니다. 토레이 박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그 때의 일들 가운데 특별히 인상에 남는 것이 있으신지요? 스펜서의 대답입니다. “단 한 가지 있습니다. 제가 구했던 17명 중 그 누구도 내게 감사하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감사할 줄 몰랐던 17명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감사를 잃어버리고 사는 현대인들입니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 17장).”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쳐주었건만 한 사람만이 감사했을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십니다. 주님께선 지금도 아홉을 찾고 계십니다.
셋째 : 내가 높이리이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자가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와 감격이 없이는 하나님을 높일 수가 없습니다.
영국의 어떤 학교에서 무신론자 과학 선생이 무신론을 주장하고자 칠판에 ‘No where is God(하나님은 어디에도 없다)’이라고 썼습니다. 그러자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 나가 칠판에다가 ‘Now here is God(하나님께선 지금 여기에 계시다)’라고 고쳐쓰더랍니다.
하나님을 알고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높임에 있어 언제, 어디서,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고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주저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선 우리가 높이는 만큼 높아지십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의 수가 늘지 아니하고 있음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땅에 떨어뜨리는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은 내가 보잘 것 없는 낮은 존재임을 시인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아니시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높이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겸손이란 나를 낮추는 것이요 자기를 감추는 것이며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면 나를 낮추고 내가 숨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높이려 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내세우며 나를 포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릴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원인이 있습니다.
성 프란체스코(St. Francesco)의 제자 중에 마태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겸손의 덕을 영원한 생명으로 알고 겸손의 은혜를 얻기 위해 불붙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늘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에게 “마태오야, 마태오야, 네가 간구하는 은혜를 내가 주면 너는 그 대신 나에게 무엇을 바치려느냐?”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주여 저는 저의 가장 귀한 눈을 빼어드리겠나이다.” “나는 네가 원하는 은혜도 주고 네 눈도 보존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바로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라고 하는 것이랍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절).”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는 결정을 하십시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결단을 내리십시오. 그리고 실천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내 것이 될 것이요,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해 주실 것입니다. 에머슨(R. W. Emerson)은 말합니다. “마음에 결정된 것을 주의하라 그것이 네 것이 되는 까닭이니라.”고…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애인이 될 것이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자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좋은 신부가 될 것입니다. 새로운 마음은 새로운 삶을 창조하고, 새로운 삶은 내 생활을 복되게 할 것입니다.
내가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의 하나님을 내가 높인다면 허락하신 모든 은혜와 축복이 나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객관적인 분이 아니시라 주관적이신 분으로, 그의 하나님(his God)이 아닌 나의 하나님(my God)이십니다.
·가장 완전한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요, 감사의 봉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하나의 작은 축복에 감사함이 또 다른 큰 축복을 받는 통로입니다.
·분쟁이 있고 미움이 있으며 문제가 생김은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은혜의 선물이요 신앙의 표현이며, 축복의 열매요 천국 생활의 상징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최고의 제사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감사란 기독교인임을 나타내는 표시이며, 감사가 나타나는 곳에 참 신앙이 있습니다.
·감사란 삶의 상황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로서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요,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은 내가 보잘 것 없는 낮은 존재임을 시인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아니시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나를 낮추는 것이요 자기를 감추는 것이며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면 나를 낮추고 내가 숨어야 합니다.
21.제목 : 그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본문 : 시-116-01-14
시편 116:1~14
오늘 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온 가족이 한 자리에서 이렇게 예배드리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시편 116편의 말씀은 지은이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칼빈은 여러 가지 내용의 분석으로 미루어 볼 때 다윗이 쓴 시가 아닌가 라고 추측했습니다. 다윗이 이 시편을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기록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내용으로 보아서 이 시인은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로부터 구원받는 놀라운 사실을 회고하면서 이 시편을 쓴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 시인은 큰 환난을 만나 사람 편에서 보면 거의 소망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기도가 응답되어 문자 그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짐을 받은 체험을 했습니다. 그는 너무 감격한 가운데 이 시를 쓴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 2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 도다.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이 시인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시편 50편 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인은 이 말씀을 그대로 믿고 하나님을 부르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모든 환난에서 건짐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한 이 시인은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고 그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이 시인의 신앙고백일 뿐만 아니라 이 시편 전체의 내용이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이 시인은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얼마나 큰가를 그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통해 실제로 경험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셨도다\" 이 시인은 환난 중에서 겸손하면서도 진지하게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간구를 들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은혜롭게 받아들이셨고 그의 처지를 감찰하실 뿐더러 그에게 평안의 응답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자녀인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기다리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하면 응답의 선물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인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 위해서 기도하는 입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어린애가 말을 잘해서 그 말에 감동되어 아버지가 아이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어린아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도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가 무엇을 소원하는지를 알고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논리적이고, 조직적이고, 신학적이고, 성경적이고, 감동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줄로 생각하면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소원을 아십니다.
예레미야 8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귀를 기울여 듣는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 우리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굽어살피십니까?\"하는 말씀이 저절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 시인은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차고 넘치는 사랑의 고백으로 이 시를 시작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시인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부부도 같이 살면서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가정을 이룬지가 40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저도, 제 아내도 서로 사랑을 고백합니다. \"나는 당신 밖에 없어\"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만을 사랑합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고백을 우리 모두가 이 시인처럼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더구나 우리는 더욱 더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이 시인은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기도하리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게 될 때 우리로 하여금 계속 기도할 수 있도록 격려가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까?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되면 기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내가 평생 기도하리로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내 생명의 끝날 까지 매일 매일 기도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생명 끝나는 그 날까지 살아있는 동안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고 계십니다. 이사야서 49장 15, 16절을 보면,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 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정말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오늘 주신 말씀 5절에 시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환난 중에 있을 때에 은혜로 대해 주셨습니다. 언제나 우리를 친절하게 대해 주셨고 우리를 도와주셨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시인의 경험을 보세요. 오늘 주신 말씀 3절에 보면 그가 당했던 경험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쳤었다\"고 했습니다. 육신적으로 말하면 사망의 줄 이상 무서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음부의 고통 그러니까 지옥의 고통 이상의 고통이 어디 있습니까? 인간으로는 육신면으로나 심령면에서 그 이상의 고통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 하나님이 기억하는 사람도 사망의 줄이 두를 때가 있습니다.
요셉을 보세요. 이유를 알 수 없는 사망의 줄이 그를 무려 13년 동안이나 두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순간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느브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느브갓네살 왕의 노를 사게 되었고 평소보다 일곱배나 뜨겁게 한 풀무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문자 그대로 꺼지지 아니하는 음부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그 뜨거운 불이 그들을 태우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사자굴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굶주렸던 사자들이 사람을 공중분해해 버리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했기 때문에 다니엘이 상처 하나 나지 않았습니다. 다리오 왕이 간신들의 모략을 알고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게 하고 그들을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 굴에 던져 넣었더니 그들이 굴 밑에 닿기도 전에 사자가 그들을 움켜서 그 뼈까지 부숴뜨렸다고 했습니다.
우리 개인들도 이런 경험을 간증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셨도다\" 이 얼마나 겸손하고 간절한 기도입니까? 이런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 받은 후에 너무 감격해서 이런 말로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오, 주님 나는 너무 늦게야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여 말하기를 \"주님, 내일 하루 주님의 얼굴을 본다면 이 세상에서 무슨 고통이라도 받겠습니다\" 이 얼마나 의미 심장한 기도입니까? 우리는 늘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만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영생 얻는 길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면 이것은 성숙한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서 환난 중에서 구원받는 것도 귀하지만 그보다 더 귀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옛날 성 카타린은 주님께 기도하는 중에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고난 당한 줄을 아느냐? 너는 나를 위해 고난받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그는 그의 일생을 주님께 바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염병 환자도 헌신적으로 돌보고, 나병환자를 간호하는 봉사생활을 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어렵게 생각지 아니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당했습니다.
중국 내지 선교를 처음 시작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를 여러분은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는 중국 내지에 선교를 하면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 우리의 필설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가 아무리 선교에 힘을 썼지만 전혀 성과가 나지 않았습니다. 본래 중국 사람은 대국인이기 때문에 빨리 반응이 없지 않습니까? 선교본부에서는 중국 선교는 별로 소망이 없어 보이니까 철수하라고 지시가 왔습니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는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이 불쌍한 심령들을 위해서 나를 보내셨고 성경에도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면서 본국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계속 열심히 일했습니다. 여러 해가 되어도 예수 믿기로 작정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선교본부에서는 본부의 지시를 따르지 아니하니까 몇번 편지를 보내고 나서 선교비 지원을 중단했습니다.
그 때 허드슨 테일러가 당한 어려움을 우리가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간절히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무실에는 두가지 기도제목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여호와 이레\' (여호와께서 준비하셨다)이고 다른 하나는 \'에벤에셀\'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이었다고 합니다. 나는 모르나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시고, 지금까지 도와주신 하나님이 앞으로도 도와주시리라 믿고 계속 그는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중국에는 7천만명의 그리스도인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의 기도를 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시인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7, 8절을 보세요.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찌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먼저, 하나님은 그를 환난 가운데서 도와주셨습니다.
6절 하반에 보면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깊은 불행 속에 빠졌을 때 도와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최악의 상태에서도 인내하며 소망을 잃지 않게 도와주셨으며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북돋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오늘 이 자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영원한 주님으로부터 건짐을 받고 날마다 거룩해 지는 자리로 나아가 장차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게 서게 될 것을 생각할 때 감격스럽지 않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눈물에서 건져내셨습니다. 말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 건져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십니다. 통곡하는 자의 베옷을 풀어 주십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실 때는 우리의 눈을 눈물에서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우리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를 죄에 빠지는 데서 건져 주셨고, 불행으로 떨어지는 것에서 건져내 주셨습니다. 우리의 발이 넘어지려 할 때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은 낮에도 밤에도 우리를 지켜주시며 실족지 않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영혼이 평안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찌어다\" 인간이 그렇게도 갈망하는 참 평안이 어디에 있습니까? 돈에 있습니까? 권력에 있습니까? 명예에 있습니까? 지식에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불안해 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렇습니다. 참된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찌어다\"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이 여러분의 영혼과 가정 위에 차고 넘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이와 같이 영혼의 축복을 받은 사람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감사와 헌신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9절을 보세요. \"내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이 얼마나 신실하고 귀한 결단입니까? 이 말은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겠습니다\"하는 다짐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다짐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와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 감격하여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작정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이 다른 것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마지못해서 두려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한 가운데서 감격하여 그렇게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 주신 말씀 10절 이하에서 우리는 이 시인의 경건한 결의를 볼 수가 있습니다.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 사도 바울도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3절에 \"내가 믿는 고로 말하셨다함과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다윗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와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사무엘에 의해서 그의 목동의 지팡이를 왕의 홀로 변케해 주신 확증을 특별히 믿었습니다. 다윗은 이와 같은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신념을 가지고 견뎌냈습니다. 비록 사울 왕의 시기심 때문에 큰 곤란을 겪었지만 다윗은 그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그 소망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말했습니다.
이 시인이 얼마나 어려움을 겪었습니까?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내가 경겁 중에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놀랐을 때에 내가 겁이 나서 소스라쳤을 때\'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울 왕이 나를 추적할 때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이라 하셨도다\" 사실 다윗과 관계를 맺었던 모든 사람, 사울 왕과 그 신하들 모두가 거짓말쟁이였습니다. 자기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다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성도라고 하지만 완전한 신앙의 소유자는 없습니다. 분명히 믿고 말했지만 정말 어려운 자리에 이르렀을 때 이 시인은 두려움이 생기고, 그 믿음이 흔들릴 수가 있습니다. 이 어려움이 오래 걸리면 지치고 낙심하고 좌절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변에 어려움 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멸시의 눈으로 보지마시고 오히려 \'내가 저와 같은 처지에 이르렀으면 어떻게 하나\'하고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꼭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입니다.
이 시인은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했습니까?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하나님은 이 시인을 곤란 속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놀라운 은혜를 깊이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놀라운 은혜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보답할 수 있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감사와 감격이 없는 신앙생활은 옳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이 시인은 여기서 그의 결의를 표현합니다. \"내가 구원의 장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몇 해전에 캐나다 에드몬튼에 갔다가 어느 권사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한국에서 캐나다 대사관에서 일했었는데 나이가 차도록 아기가 없어서 양녀를 두었습니다. 캐나다로 이민 가서 딸아이가 고등학교 갈 때까지 양녀된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가 말했더니 큰 충격을 받고 반항해서 고생을 많이 했고 거의 집에도 안 오고 벤쿠버에 있는 학교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이 차 사고가 나서 의식을 잃게 되고 거의 사경을 헤매게 되었는데 의사는 아무래도 소생할 가능성이 없으니 공연히 환자만 더 오래 고생시키지 말고 산소호흡기를 뽑아 편히 보내드리는 것이 났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 되는 분도 동의했는데 벤쿠버에서 어머니 사고 소식을 듣고 쫓아온 딸이 극구 반대하고 자기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24시간 간호하고 목사님이 오셔서 기도하는 것 외에는 누구도 출입하지 않게 하고 간호했는데 이 어머니가 열흘만에 의식이 회복되기 시작해서 한달 만에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담당의사선생님 말씀이 이것은 따님의 정성과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권사님은 \"내가 산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래서 내 여생은 캐나디안 인디언 전도를 위해서 바치려 합니다.\"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 받은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하시겠습니까?
22.제목 :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본문 : 시-118-28-
나의 하나님, 내가’ ‘나의 하나님, 내가’로 연결되어 있는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구원을 체험하고,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신앙인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높이겠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첫째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이는 믿음의 사람 시편 기자가 하나님과 자기와의 내밀한 관계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그에게 있어 하나님은 피상적 존재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과 번영, 미래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에게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his God)’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my God)’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게 객관적인 분이 아니라 주관적이신 분이시요, 남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어머니, 나의 어머니’ ‘우리 교회, 내 교회’ ‘우리 나라, 내 조국’이라고 일컫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하나님이심으로 우리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시며, 이렇게 될 때만이 하나님과 나와의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믿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목사의 설교를 듣고, 어떤 성도의 간증을 듣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설교나 간증이 신앙을 갖거나 믿음을 성장케 하는 데 도움은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믿음 그 자체는 될 수가 없습니다.
신문에 실린 어떤 기독교 대학 교수의 글입니다. “학교에서 수많은 학생들을 만나며 그들로부터 많은 인사를 받는다. 그러나 거의 의례적인 인사이다. 허나 때로는 의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진정한 감사가 담긴, 나를 가르쳐 주시는 나의 고마우신 선생님으로 알고 진심으로 인사하는 학생도 있다. 그러면 교수도 그 학생 신상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고 기억 속에 입력을 시키며 깊은 마음을 주게 된다.”
추수감사예배는 매년 연례 행사로 드리는 형식적인 예배가 아닙니다. 과거에도 은혜를 주셨고, 지금도 은혜를 주시며, 미래에도 은혜를 주실 나의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리는 특별하고도 뜻깊은 예배입니다.
특히 오늘, 1999년 11월 21일의 추수감사예배는 단순히 1999년의 추수감사예배가 아니라 20세기에 마지막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 죄를 사해 주시고, 크고 작은 고난, 삶의 구석구석, 순간순간에 은혜를 베풀어 주신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과 감사로 관계되어야만 합니다.
가장 완전한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요, 감사의 봉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내 삶을 만들어 주신 내 하나님을, 내 주님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하나의 작은 축복에 감사함이 또 다른 큰 축복을 받는 통로입니다.
둘째 : 내가 감사하리이다
감사란 타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나의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20세기 마지막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며 잃어버렸던 감사를 찾으시고 쏟았던 감사를 회복하십시오. 기독교인들의 최대 치욕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정신의 결핍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마음을 찾고 회복하여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만 있다면 21세기라는 내일에는 복되고 건강한 나, 가정, 교회, 그리고 나라가 될 것입니다. 여기저기에 분쟁이 있고 미움이 있으며, 문제가 생김은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겐 매사가 감사로 귀결되나 불평하는 자에겐 모든 일이 불만으로 끝납니다. 기독교인들의 생은 불만 속에서 피폐한 삶으로 종지부를 찍어서는 안 됩니다.
감사는 은혜의 산물이요 신앙의 표현이며, 축복의 열매요, 천국 생활의 상징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최고의 제사입니다.
내 속에 감사한 마음을 두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들리지 아니하며, 먹어도 맛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만족도 기쁨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감사란 기독교인을 나타내는 표시이며 감사가 나타나는 곳에 참 신앙이 있습니다.
독일 재무장관을 지낸 마르티 바덴 이야기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말할 수없이 궁핍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지방 여행을 갔다가 싸구려 여관에 투숙,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의 신발이 없어졌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어떤 죽일 놈이 내 신발을 훔쳐갔냐.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나같이 가난한 사람의 신발을 도둑질해가게 그냥 놔두시다니…”라고 하나님을 원망했답니다.
그러자 여관 주인이 창고에서 헌 구두를 꺼내주며 그에게 “오늘은 주일인데 나와 같이 교회에 가지 않겠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는 마지 못해 여관 주인을 따라 교회에 갔습니다.
헌데 그의 옆 자리에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이 앉아 눈물을 흘리며 찬송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더랍니다. “저 사람은 신발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아예 두 다리를 잃었구나. 신발이 있다고 해도 신을 수 없구나. 저 사람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복된가? 신발이야 또 사서 신으면 되는 것을….” 마르티 바덴의 삶에 변화가 왔습니다. 그는 삶의 상황에 따라 감사하는 자가 아니라 삶 그 자체로서 감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명 재무장관이 되어 국가와 국민에게 크게 봉사하였고 국민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감사하며 사는 생활이 올바른 삶이며 축복 받는 인생입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가 올바로 살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다.” 어거스틴(Augustine)의 말입니다.
왜 없는 것만을 가지고 불평불만을 하십니까? 지금 내게 있는 것으로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세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이기는 능력에 의하여 증명됩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뇌는 대략 140억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헌데 기억을 관리하는 것은 대뇌의 후두부이며, 여기에 저장된 기억은 되새기지 않은 상태에서 얼마를 지나면 잊혀지고 그 자리에는 새로운 것으로 저장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저장된 기억은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으로 분리되며, 전자는 의지를 사용해서 노력해야만 기억되는 것이고, 후자는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절로 떠오르는 기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는 조건을 조사하고, 찾아 내어 어거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생활 속에서, 그냥, 나도 모르게, 당연히, 저절로 내 속에서 살아나야만 합니다.
폭풍우로 인하여 미국의 에반 스톤 해안에서 배가 난파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노스웨스턴대학생들이 인명 구조에 나섰는데 그 가운데 에드워드 스펜서(E. Spen- cer)라는 학생이 17명을 구조했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 토레이(Torray) 박사가 LA의 한 모임에서 그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 스펜서 씨가 지금 여기에 참석해 계십니다.”라고 외쳤습니다.
토레이 박사가 그를 강당 위로 초대하자 백발의 노인이 우레 같은 박수 속에서 올라왔습니다. 토레이 박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그 때의 일들 가운데 특별히 인상에 남는 것이 있으신지요? 스펜서의 대답입니다. “단 한 가지 있습니다. 제가 구했던 17명 중 그 누구도 내게 감사하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감사할 줄 몰랐던 17명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감사를 잃어버리고 사는 현대인들입니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 17장).”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쳐주었건만 한 사람만이 감사했을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십니다. 주님께선 지금도 아홉을 찾고 계십니다.
셋째 : 내가 높이리이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자가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와 감격이 없이는 하나님을 높일 수가 없습니다.
영국의 어떤 학교에서 무신론자 과학 선생이 무신론을 주장하고자 칠판에 ‘No where is God(하나님은 어디에도 없다)’이라고 썼습니다. 그러자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 나가 칠판에다가 ‘Now here is God(하나님께선 지금 여기에 계시다)’라고 고쳐쓰더랍니다.
하나님을 알고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높임에 있어 언제, 어디서,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고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주저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선 우리가 높이는 만큼 높아지십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의 수가 늘지 아니하고 있음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땅에 떨어뜨리는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은 내가 보잘 것 없는 낮은 존재임을 시인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아니시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높이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겸손이란 나를 낮추는 것이요 자기를 감추는 것이며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면 나를 낮추고 내가 숨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높이려 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내세우며 나를 포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릴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원인이 있습니다.
성 프란체스코(St. Francesco)의 제자 중에 마태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겸손의 덕을 영원한 생명으로 알고 겸손의 은혜를 얻기 위해 불붙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늘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에게 “마태오야, 마태오야, 네가 간구하는 은혜를 내가 주면 너는 그 대신 나에게 무엇을 바치려느냐?”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주여 저는 저의 가장 귀한 눈을 빼어드리겠나이다.” “나는 네가 원하는 은혜도 주고 네 눈도 보존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바로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라고 하는 것이랍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절).”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는 결정을 하십시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결단을 내리십시오. 그리고 실천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내 것이 될 것이요,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해 주실 것입니다. 에머슨(R. W. Emerson)은 말합니다. “마음에 결정된 것을 주의하라 그것이 네 것이 되는 까닭이니라.”고…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애인이 될 것이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자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좋은 신부가 될 것입니다. 새로운 마음은 새로운 삶을 창조하고, 새로운 삶은 내 생활을 복되게 할 것입니다.
내가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의 하나님을 내가 높인다면 허락하신 모든 은혜와 축복이 나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객관적인 분이 아니시라 주관적이신 분으로, 그의 하나님(his God)이 아닌 나의 하나님(my God)이십니다.
·가장 완전한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요, 감사의 봉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하나의 작은 축복에 감사함이 또 다른 큰 축복을 받는 통로입니다.
·분쟁이 있고 미움이 있으며 문제가 생김은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은혜의 선물이요 신앙의 표현이며, 축복의 열매요 천국 생활의 상징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최고의 제사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감사란 기독교인임을 나타내는 표시이며, 감사가 나타나는 곳에 참 신앙이 있습니다.
·감사란 삶의 상황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로서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요,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은 내가 보잘 것 없는 낮은 존재임을 시인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아니시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나를 낮추는 것이요 자기를 감추는 것이며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면 나를 낮추고 내가 숨어야 합니다.
23.제목 : 여호와께 감사(感謝)하라.
본문 : 시-136-01-
시 136:1-26절
오늘 우리 교회는 추수감사절을 지키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추수감사절은 1621년 11월부터 있었습니다. 1620년 12월 21일, 청교도들은 63일간의 긴 항해 끝에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했습니다.
청교도들은 신대륙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예배당을 짓고, 학교와 병원을 세운 후에, 자기 집들을 지었습니다. 그후 2만 5천여평의 땅을 개간해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 눈물과 땀으로 일군 농토에서 풍성한 열매와 곡식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비록 102명의 동료 중 거의 절반이 풍토병과 인디안의 습격으로 숨을 거두었으나, 남은 자들의 기쁨은 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그들이 거둔 가장 좋은 곡식과 열매들을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로 바쳤고, 동료들의 생명을 빼앗던 인디안들을 초청, 풍성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것이 첫 번 추수감사절이었습니다. 그후 미국의 와싱톤대통령이 11월 26일을 감사절로 선포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감사절은 이미 구약시대에 지켜졌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킨 수장절이 바로 추수감사절이었습니다(민29:12-38절). 그 절기는 유대월력으로는 7월 15일부터 일주일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秋收感謝節)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절기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면서, 시편 136편의 말씀을 중심하여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제목으로 다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시편에는 5개의 감사의 시가 있습니다.
그것은 105편, 107편, 108편, 135편, 136편입니다. 그중에서도 오늘 읽은 136편은 제일 마지막 편으로, 보다 자세하게 감사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감사의 시편들은 서로 비슷한 것이 많습니다만,
136편은 감사의 조건 중에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말씀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 그 특징입니다. 그러면 이 시편기자가 감사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감사할 제목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감사해야할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하심때문입니다.(1-3절). 성경에서 말하는 감사는 권장사항이 아니고 기독교의 본질에 속하는 것입니다.
스승의 은혜를 감사할 줄 안다면 좋은 제자입니다. 부모의 은혜를 감사할 줄 안다면 효자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은혜를 아는 것은 사람의 인격을 가진 증거이고, 이것이 바로 윤리며 도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와 그의 위대한 존재를 감사할 줄 아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위대한 일때문에 감사(感謝)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사람끼리도 감사해야겠지만 하나님께 감사해야 바른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사가 하나님 중심의 감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절 이하에 보니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사실상 소망이 없는 세상,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 선하신 하나님,
인자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그 자체가 우리의 소망이며 기쁨입니다. 2절 말씀에도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시인은 감격과 환희에 찬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은 누구신가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람들이 상상해 낸 종교의 대상자가 아닙니다. 그 하나님은 세상에 잡된 신들 중에 하나가 아닙니다. 그분은 천지만물(天地萬物)을 창조(創造)하신,
인격적(人格的)인 하나님이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위해 만물을 만드시고 소망 없는 우리를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농사로 말미암은 추수도 귀하지만 우리의 영적인 추수를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내 사업에 대한 추수도 있을 것이고, 학문에 대한 추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추수이든 간에 손익 계산을 해보고 이익이 많았던 만큼 감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런 감사의 신앙은 매우 타산적이며 인본주의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이제 지난 한 해를 뒤돌아보면서,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있는 것은,
추수의 손익과 관계 없이 하나님은 선하시며, 하나님이 모든 신 위에 뛰어나신 창조주이신 것을 믿고 살아온 그 자체가 감사한 일인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것은 온 우주를 소유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의 칼을 피해 다니는 비참한 삶 가운데라도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했으며, \"내 잔이 넘치나이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믿는 자에게는 늘 감사하고, 늘 풍족하고, 늘 만족함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내 처지를 보고 다른 사람을 볼 때 늘 불평하고 불만하기 쉽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모든 소망을 거는 자에게는 감사가 터져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지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것 때문입니다.(4-9절). 이 성경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에서 저자는 그의 감사의 이유가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하심 때문이란 사실을 밝힙니다. 우리는 감사의 조건을 항상, 내 자신의 이해관계에서 찾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금년 한 해는 사업이 잘 되어서 감사하다든가, 진급을 해서 감사하다든가, 새집을 마련해서 감사하다 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축복을 깨닫고 구체적인 감사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하나님의 창조와 그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좋고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제의 태양이 오늘 다시 떠오르는 것도 감사하려니와 봄이 오는 것도 감사하고 겨울이 오는 것도 감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보면서도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영원한 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공중에 새가 나는 것도 감사하거니와 바다에 고기가 노는 것도 감사할 뿐입니다. 산이 높은 것도 감사하거니와 골짜기가 깊은 것도 감사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의 창조를 증명하고 노래하기 때문입니다. 이 우주와 이 땅덩어리가 우연히 생성되어 우연히 끌려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날마다 초조하고 날마다 불안하고 날마다 불평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를 믿고 아는 사람은 언제나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기독교신앙의 척도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크리스찬입니다. 범사에 감사할 줄 알면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입에서 언제나 감사가 터져 나오고 그 감사가 구체적으로 삶으로 옮겨졌을 때 더 큰 감사로 증폭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때문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10-22). 이 시인은 이 부분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속하여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사실로 인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저 출애굽사건보다 더 큰 사건은 없었습니다. 물론 출애굽 이후에도 그들의 고난과 고통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보다 더 큰 슬픔과 고통의 나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하나님께 기회 있을 때마다 불평을 털어 놓았습니다. 물이 없다느니, 고기가 먹고 싶어 죽겠다느니, 양식이 없다느니, 춥다, 덥다 등 어느 것 하나 불만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사건을 회상시켜 주셨습니다. 물론 지금 생활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그것은 벌써 구원 받은 후의 일이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를 향하는 희망의 걸음이란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권능으로 애굽에서 구속해 내신 사실을 생각해야 감사가 터져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기자도 출애굽 사실을 그대로 노래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사실 애굽의 장자를 치시는 중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고,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셨고, 애굽군대는 바다 가운데 멸하신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구원행위입니다. 이 세상은 광야와 같습니다.
마치 구속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의 아픔이 있었듯이 우리도 구속함을 받기는 했지만 여전히 광야생활에서 오는 피곤함과 슬픔도 있고 질고와 고통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했던 것처럼 애굽에 있을 때는 고기가마 곁에서 고기냄새라도 맡았는데,
광야에는 그것마저도 없다고 불평(不評)했습니다. 구원(救援)받은 후에 고통(苦痛)이 덜할 줄 알았는데 더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광야생활 중에서라도 하나님이 나같은 죄인을 그의 권능으로 그의 은혜로 구속하여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신 사실 하나만이라도 내 삶 전부를 다 드려도 주님을 다 찬양못할 것입니다.
나를 구속하신 주님의 은혜 하나만 생각해도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섭리로 인도해 주심을 감사해야 합니다(23-26).
사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시지만 그는 옛날 옛적에 계시던 하나님, 저만치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셔서 우리를 간섭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기에는 시시한 사건 중에서도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본문 24절과 25절에 있는 대로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서 건져주시고,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의 대상일 뿐 아니라 우리의 날마다의 삶 중에 우리와 함께 하시며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감사하면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로 깨달으면 감사할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감사(感謝)는 감상적(感傷的)이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創造)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救援)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恩惠) 때문에, 하나님 자비(慈悲)와 긍휼(矜恤) 때문에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상 생활 속에서 범사에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돌리는 복된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祝願)합니다.
24.제목 : 청교도와 감사절
본문 : 시-136-01- 시편 136:1, 25~26
19세기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였던 다니엘 웹스터는 “청교도들은 구라파 대륙의 풍요로운 유산, 즉 도덕, 철학, 과학, 예술, 문화의 유산을 가지고 신대륙에 건너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은 성경책을 가지고 신대륙에 왔다. 성경은 청교도들의 믿음의 토대가 되고, 미국을 만들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멋있는 정치가의 초기 미국관입니다. 사실상 미국과 미국의 역사, 미국의 축복은 청교도 종교개혁의 산물이었습니다. 미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영국의 신교 자유(信敎 自由)의 박해를 떠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신앙의 순례를 감행한 위대한 사람들이 이룩한 축복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순례자들이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영국 해안의 땅끝(Land\'s End)인 플리머스를 떠나면서 ‘프랜시스 행긴손’(Francis is Hangginson)은, “…우리들은 영국 교회에 대한 분리주의자로서 뉴잉글랜드를 떠나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는 교회개혁에 대한 적극적인 분야를 실천하고 미국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가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미국을 찾아갔던 청교도들은 성경에 기초한바 ‘언덕 위의 도시’를 건설하고, 새로 거듭날 수 있는 기독교 나라를 꿈꾸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최소화폐단위인 1센트짜리 동전에 조차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In God we trust.)라고 새겨놓을 정도였습니다.
Ⅰ. 메이플라워 계약서
1620년 9월 2일은 이른바 ‘오월의 꽃’이라고 불리는 배 메이플라워호가 영국 플리머스를 떠나, 신대륙 미국을 향하여 항해를 시작하던 역사적인 기록의 날입니다. 그 배안에는 청교도 분리주의자(English Separatist of Church) 35명, 그리고 영국의 종파주의자(English Sectarians) 60명, 메이플라워호 승무원 6명 등 총 101명(남자 72명, 여자 29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청교도 순례자들은 65일간의 모진 고난의 항해 끝에 1620년 미국 매사추세츠(Massachusettes)주의 케이프 가드만(Cape God Bay)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배의 선장은 크리스토퍼 존스(Christopher Jones)였습니다. 저들은 케이프 가드만 선상에서 역사적인 메이플라워 계약서를 작성하고 서명하였습니다. 그 내용 전문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멘하라.
하나님의 은총에 따라 대영제국, 프랑스, 아일랜드의 왕이 된 신앙의 옹호자 제임스 폐하의 충성된 국민인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독교 신앙의 진흥, 우리의 왕과 조국의 명예를 위하여 버지니아의 북부 지방에서 최초의 식민지를 창설하고자 항해를 시도하였다. 여기 본 증서에 의하여 엄숙하게 상호 계약하므로 하나님과 각 개인 앞에서 계약에 의한 정치 단체를 만들어 이것으로서 공동의 질서와 안전을 촉진하고, 그 위에 상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법령의 제정과 제도 조직을 구성한다. 동등한 법률, 법령, 조례, 헌법과 행정부를 때때로 구성한다. 이 모두는 식민지의 일반적 안전을 위한 간편하고 적합한 생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모두 여기에 대하여 당연한 복종을 바칠 것을 계약한다. 이에 우리의 이름으로 서명한다. 1620년 11월 11일 케이프 가드만에서 카이버, 브래드포드, 윈스로우, 부루우스터를 위시하여 41명이 서명한다. 이때까지 저들은 아직 육지에 내리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그해 12월 20일에 플리머스 땅에 첫발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한 달(30일)하고도 9일의 항해가 남아 있었습니다. 저들은 저들이 목적하는 육지에 내리기 전에 바다 배위에서, 적어도 저들이 미국에 온 목적과 의미를 함께 마음으로 새기고 하나님 앞에 이것을 서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들의 계약, 곧 메이플라워의 계약내용에는 청교도들의 분명한 신앙고백이 들어있음을 보게 됩니다. ① 하나님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God) ②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by the grace of God) ③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for the glory of God) ④ 하나님의 존전에서(in the presence of God) 생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국가정치단체(for civil body politic)와 평등한 법률(equal laws)을 제정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들의 동맹서약은 사실상 위대하신 하나님 사상으로 꽉 차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저들은 적어도 목적있고, 의미있고, 내용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철학을 가지고 미국의 새 땅을 밟기로 서약했던 것입니다.
Ⅱ. 첫 번 추수감사절
오늘 세계 교회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저 미국을 찾아갔던 청교도들의 감사축제에서 그 기원을 찾게 됩니다. 저들은 이미 미국을 향해 떠나기 전에, 영국의 종교박해 때문에 1609년 네덜란드로 제1차 순례의 길을 떠났던 순례자들(Pilgrim Father)이었습니다. 저들은 암스테르담(Amsterdam)과 레이던(Leyden)에서 12년간이나 살았습니다. 그 후 저들은 다시 영국으로 되돌아갔으나(1620. 7. 20)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수장령을 발표하고 저들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다시 미국을 향하는 새로운 순례 길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1620년 11월 9일 미국 매사추세츠의 케이프 가드만에 도착하고, 그로부터 이틀 후인 11월 11일 메이플라워호 선상에서 역사적인 메이플라워 계약서를 체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39일 후인 12월 20일에 플리머스 땅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101명의 사람들은 혹독한 대륙의 추위와 굶주림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디언의 습격의 공포 속에서 첫해 겨울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간 속에서 거의 과반수가 괴혈병과 폐렴 등 질병에 걸려 죽어가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해인 1621년 2월 28일까지 무려 50여 명이 세상을 떠났고, 봄이 오기까지 하루에 2-3명이 숨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고난 속에서 남은 청교도들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과 개척의 의지를 불태우면서 현명하고 강력한 윌리암 브레드포드(W. Bradford)의 지도 아래 정착의 꿈을 펼쳐 나갔습니다. 1621년 3월 이후 다가온 새봄과 함께 청교도들은 저들이 가지고 온 밀과 완두콩 등을 심었으나, 저들이 심은 밀과 완두콩밭을 인디언들이 짓밟아 절단을 내버리는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저들이 쓰던 농사 도구마저 훔쳐가는 일들이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저들은 낙심치 아니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인디언들의 손에서 살아남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저들의 간절한 기도는 응답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뜻밖에 인디언 부족 왐 파노아그(Wam Panoag)족 추장인 마사소이드(Massasoid)와 통역을 맡았던 스쿠안토(Sguanto)가 찾아왔습니다. 상호협력, 불가침조약을 맺자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미국 최초의 대외조약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 후 저들은 인디언들과 우호적 공존관계를 맺고 밀과 옥수수 경작법 등을 많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때 청교도들은 일주일에 3일씩 금식기도를 하면서 어렵게 지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인디언들이 짐승들을 잡아가지고 와서 식료를 도와주기도 하였습니다. 그해 청교도들이 25에이커에 해당되는 땅에 보리와 밀, 옥수수 등을 심었는데, 가을추수가 풍작이 되었습니다. 이때 청교도 지도자 브레드포드 주지사는 인디언을 초청하여 함께 추수감사절을 지키고, 함께 하나님께 감사하고, 축하하기로 하였습니다. 청교도들은 추장 마사소이드를 초청하였습니다. 추장은 90명의 용사들을 데리고 참석하였습니다. 이때 청교도들은 들새를 잡으러 나갔는데, 많은 칠면조(turkey)를 잡았습니다. 인디언들은 다섯 마리의 사슴을 잡아가지고 왔습니다. 저들은 함께 모여 음식을 요리하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며, 식사를 나누고, 노래하며 춤을 추면서 기쁨의 축제를 만끽하였습니다. 실로 청교도들이 바라던 신앙자유를 만끽하는 시간이 드디어 오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 추수감사의 예배가 그해 1621년 11월 마지막 주 목요일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저들이 받은 축복의 땅 미국에서 드린 최초의 청교도 추수감사예배가 되었습니다. 그 후 1789년 초대 미국 대통령이 된 조지 워싱턴은 독립전쟁 승리와 헌법제정을 축하해서, 11월 26일(목요일)을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로 선포하였습니다. 이날 전 미국인들은 교회에 모여 하나님이 베푸신 크신 은혜를 감사하며, 서로의 축복과 감사를 기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감사절이 더 크게 보급된 해는 1863년 남북전쟁 중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전쟁의 조기종언과 국민단합을 위해,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감사절로 갱신하여 국가적 축제일로 선언한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그 다음 1939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11월 셋째 주간의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선포하였습니다. 추수하는 시기에 맞추기 위함이었습니다. 실로 미국의 경우 추수감사절은 개척 초기의 미국 청교도 이민 역사와 직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미국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의 회관(Meeting House)과 제일교회(First Church)에서는 그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매년마다 영화로 상영하고 있습니다. 초기 청교도들의 기묘한 옛 복장을 한 시민이 처음 겨울을 맞아 죽어갔던 희생자들이 잠들고 있는 언덕을 향해 행진하고, 거기에서 기념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현재 이 플리머스는 청교도 유적지로 많은 사람들에게 관광명소가 되어버렸습니다. 플리머스란 이름은 청교도들이 미국을 향해 출항하였던 저들의 고향 영국 웨일스 남쪽 지방 플리머스 항구의 이름을 따라 붙여진 것이고, 매사추세츠란 주 이름은 인디안 추장 마사소이드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현재 이곳에는 저들 조상들이 대서양을 가르고 타고 왔던 그때의 메이플라워호를 재건조하여 전시하고 있습니다. 플리머스의 부리알 언덕(Burial Hill)에 세워져 있는 현관에는 ‘너희 조상이 어려움 속에서 성취한 것들을 비겁하게 포기하지 말라.’는 글이 씌어 있는데, 이것이 오늘의 미국인들에게 좌우명이 되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추수감사절은 사실상 그 역사적 기원이 미국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시작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 류(類)의 감사축제를 계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그 후손들에게 약속의 땅을 예언하였습니다. 먼 훗날에 모세와 그를 따르던 백성들은 그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40년의 기나긴 순례행진을 하였습니다. 저들은 그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찾아가기 위하여 출애굽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마침내 약속의 땅에 도착한 저들은 그곳에서 농작하여 얻은 물질로 하나님께 맥추절, 추수절의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감사축제는 종된 애굽에서 하나님 경외의 신앙자유를 찾은 결과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역사 속에 다시 시작된 미국의 추수감사절도 하나님 경외의 신앙 자유의 소산이었습니다. 스위스에서는 기독교 개혁파를 중심으로 하여 매년 9월에 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11월 셋째 주일을 지킵니다.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로 말미암아 소개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136편에 나타난 영감의 기록은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사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여기 인자(헤쎄드)는 하나님이 베푸신 특별한 은혜를 의미합니다. 그 감사의 내용은 천지를 창조하고, 통치하고, 섭리하고 계시는 존재와 능력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시 136:4~9). 그리고 구원의 하나님, 곧 종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살려주신(구원)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시 136:10~24). 말하자면 제1창조(천지만물)와 제2창조(구원)를 감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는 지음받은 피조세계 중에서 인간만이 받은 영예로운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아니 하나님을 향한 감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그리스도인들만이 받은 삶의 요긴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금세와 내세에서 영원토록 계속되는 예배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감사는 꼭 해야 할 의무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 감사를 받을 권리를 가진 것은 아니다.’(Rousseau)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감사를 받을 권리가 확실한 자는 하나님뿐이십니다. ‘만약 우리가 감사절을 가지지 못했더라면 금으로도 갚을 수 없는 빚이 언제나 남아 있었을 것이다.’(Fred Beck)라고 하였습니다. 청교도들의 추수감사! 하나님을 향한 신앙자유의 영광과 은혜를 송축하는 감사가 아닌가! 새로운 땅 아메리카 대륙을 하나님 섬기는 수단으로 주신 자연은총에 대한 감사가 아니었던가! 바로 오늘 그 청교도의 후예들인 우리의 감사가 아닌가! - 아 멘 -
25.제목 : 여호와께 감사하라
본문 : 시-136-01-26
성경본문 : 시편 136편 1절 - 26절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시는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땅을 물 위에 펴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애굽의 장자를 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을 저희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홍해를 가르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로 그 가운데로 통과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왕들을 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유명한 신들을 죽이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바산왕 옥을 죽이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저희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비천한데서 기념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건지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오늘 22주년 창립예배입니다. 22년 전에 대치동 작은 골목에서 시작한 교회가 스물 두 살이 되었습니다. 대학생으로 치면 아마 대학교 3학년 쯤 되었겠지요? 앞으로가 창창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교회를 시작하신 분들 또 그 동안 수고하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오늘까지 인도하신 것,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더욱이 오늘은 감사주일인데 우리가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서 과일들을 가져왔습니다. 이제 예배가 끝나면 다 모아서 이 동네의 독거노인들과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합니다. 1부 예배를 마치니까 어느 분이 제게 와서 “목사님, 그 쌀은 제가 가져온 것입니다.”라고 하시더군요. 그러시더니 “제가 매년 쌀을 가져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저 쌀알보다도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 쌀을 매년 가져옵니다.”라고 하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헤아려 본 사람입니다. 안 해 본 사람은 가져올 것이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세어본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가 그 쌀알만큼 많습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백을 제가 아침에 들으면서 마음에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산수를 배우고 수학을 배우는데 수학중에 제일 어려운 수학이 감사의 제목을 헤아려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 영어 찬송에도 있지요. 주께서 주신 복을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세어 보아라”라고 합니다. “Count your blessing one by one...\", 하나씩 하나씩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세어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뿌듯해지고 즐겁고 밝아지고 삶에 의욕이 생기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밝은 삶, 환한 삶, 즐거운 삶, 찬양하는 삶,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감사를 세어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감사를 세어보면서 생각나는 것마다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틀 전에 20년만에 어떤 분을 만났습니다. 아내는 교회를 다니는데 본인은 아직도 교회를 안 나간다고 합니다. 그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계속해서 불만을 표시하시더라구요. 인생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차 있어요. 제가 다른 질문을 하다가 그 분의 입에서 감사가 나울 수 있도록 대화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그 분의 입에서 감사한 제목이 나오면 제가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러면 그 분이 “아 ,참 감사한 일이군요.”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누구에게 감사하지요?” 인생을 돌이켜보면 불평뿐만이 아니라 감사할 제목들이 있는데 감사하다고 마음에 생각하면서도 감사할 대상이 없는 거에요.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바로 감사를 드리면서 그 감사가 승화되고 초월화 되는데 이 분은 혼자 중얼대면서 감사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감사할 대상이 있어야지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 많은 감사가 보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감사는 하나님의 명령이에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도 그랬지요. “여호와께 감사하라”,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감사를 명령하고 받는 것도 좀 그렇지요? 옆구리 찔러서 절 받는 것처럼. 그런데 하나님은 절을 받으시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려는 겁니다. 감사가 전혀 없던가 불평이 많던가 감사가 있던가 세 가지 중에 하나인데 만약에 여러분들의 입술에 인생에 대해 계속해서 불만만 있다면 여러분도 고생이고 고생하는 얼굴을 보는 옆의 사람은 또 얼마나 고생이겠어요. 내 삶이 어둡고 내 얼굴이 어둡고 내 목소리와 나의 태도가 어둡게 살면서 불행한 삶을 사는 불평으로 가득찬 사람, 그 사람과 같이 사는 가족들은 또 얼마나 불행입니까. 그러나 감사로 가득찬 사람들은 날마다 그 입술에 고마움이 있으니까, 고마움을 표시하는 남편과 함께 사는 아내의 모습, 얼마나 좋겠어요. 감사를 표현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사는 아내는 얼마나 감사하고 좋겠습니까? 감사가 가득찬 자식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부모는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다 충만한 삶, 행복한 삶, 고마움을 알면서 인생에 대해서 하나님께, 부모님께 또 이웃에게, 나라에 감사를 표현할 줄 아는 사람으로 환하고 밝은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감사하라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감사가 그렇게 쉽지가 않아요. 이건 하나의 이야기지만 하늘의 천사가 바구니 두 개를 들고서 하늘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데 한 손에는 ‘간구의 기도’를 가지고 가고 또 한 손에는 ‘감사의 기도’를 가지고 간답니다. 근데 땅에서부터 두 바구니를 하나님 앞에 가져갈 때 ‘간구의 기도’는 그 바구니가 가득차서 철철 넘치는데 ‘감사의 기도’가 들어있는 바구니에는 거의 비어서 올라간다고 합니다. 이 증거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아이들이 산타클로스에게 좋은 선물을 하나 받으려고 기다리지 않습니까? 아이들이니까 순진하게 편지를 써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금년에는 컴퓨터를 하나 보내주세요,” 이런 내용들을 써서 보내 온답니다. 크리스마스 때만 되면 우체국에 수많은 편지가 옵니다. 그러면 우체국에서 또 그 편지를 분류하지요. 산더미같이 온답니다. 그리고는 크리스마스 이브가 지나갑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머리맡에 선물들이 와 있지요. 기뻐서 다 풀어봅니다. 연말이 지나고 나서 우체국에는 “Thank you!\"의 편지가 단 한 통 왔답니다. 산타클로스에게 달라고 할 때는 엄청난 양의 편지가 왔는데 그 선물을 받고 감사를 표시한 편지는 단 한 통뿐이었습니다. 이 내용을 뉴욕 타임스지의 사설을 쓰는 분이 공개해 놓았습니다. 어째서 감사의 편지는 하나밖에 없을까? 감사를 헤아릴 줄 아는 것이 인간에게는 제일 어려운 산수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1년을 돌이켜 보면서 여러분들의 가슴속에는 감사가 보이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감사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하셔서 이 우주속에, 이 땅위에 백만 종류의 생물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바다에 백 오십만 종류의 생물을 만들어 놓으셨어요. 땅과 바다속에 있는 생물만 해도 이백 오십만 종류에요. 이백 오십만 종류인지 아닌지 제가 알겠습니까? 그렇게 발표했으니까 알지요. 과학자들이 말하기를 이백 오십만 종류의 생물이 땅과 바다속에 있다고 하지요. 여러분이 원하는대로 있어요. 여러분이 만약에 포도를 먹고 싶으면 포도가 있어요. 사과가 먹고 싶으면 사과가 있어요. 호박을 잡수시고 싶으면 호박이 있어요. 배추, 무, 귤 등등 이 땅위에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다 있어요. 이북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쩔쩔매는데 우리는 가게에 가면 산더미처럼 많습니다. 먹고싶은 대로 골라서 먹승 수 있어요. 단 물론 돈은 내야지요. 돈만 낸다면 먹고싶은 대로 먹을 수 있습니다. 갖고싶은 대로 얼마든지 이 땅에서 여러분이 즐기고 누리고 살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말 한 것처럼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느니라” 시시때때로 우리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이 우주속에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창조자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감사합니다. 더욱이 우리 자신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생명은 신비한 생명입니다. 우리 몸 속에 296개의 뼈가 있어서 우리를 걷게하고 앉게하고 눕게하고, 우리 몸 속에 혈관이 있어서 필요할 때마다 모든 것을 공급해 주지요.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나면 혈관은 알아서 신비하게도 기차 철로처럼 가다가 간에는 간에 맞는 영양분은 내려놓고 가고 심장에는 심장에 맞는 영양분을 내려놓고 가고 온 몸에 필요한 영양분을 다 공급해 주시면서 신비한 생명을 유지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무한하고 위대하고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면, 능력의 하나님이 아니고는 우리같은 인간을 어떻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나 여러분과 제가 시작할 때는 단세포였습니다. 눈에도 보이지 않는 작은 단세포였어요. 그러나 그 작은 정자와 난자가 합해 졌을 때 그 속에 우리의 오장육부와 우리의 성격과 우리 조상들의 모습 등 모든 것이 다 그 안에 들어있어서 신비스러운 인생, 하나님의 창조를 체험하며 우리들이 환히속에 살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5절부터 9절 사이에 보면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땅을 물 위에 펴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즐기게 하시고 누리게 하시고 이런 놀라운 축복을 주신 좋으신 하나님, 창조자 하나님께 이 시간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 되시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10절부터 22절 사이의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다가 그 노예생활을 끝내고 하나님께서 해방을 시키셔서 자유로운 민족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육신적인 자유를 누렸지만 영적인 자유, 죄로 인해서 악한 세력으로 인해서 마귀로 인하여 우리의 죄성 때문에 죄의 종으로 살아왔던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그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영원히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구원해 주신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고 살뿐만 아니라 저 하늘나라에 가서도 우리가 마지막 호흡을 하는 그 순간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은혜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 구원의 하나님께 갈 때에 우리는 그 분께 감사와 찬송을 올릴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 창조자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이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감사합니다.
또 그뿐이 아니라 공급자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23절부터26절에 보면 “우리를 비천한데서 기념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건지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이에게 감사하라” 라고 합니다. 이 땅에서 식물에 필요나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영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다 공급해 주셔서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있고 감사를 표현하고 천송을 올리고 미래에도 하나님께서 돌봐주실 것을 믿고 살 수 있게 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육적인, 물질적인 공급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필요한 것들도 우리에게 공급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죽음에서 승리하게 하셨고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복음을 듣고 이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고 살 수 있도록 불러주신 것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모든 것을 놓고 감사한 마음이 우러나서 감사를 표현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위선적으로라도 감사하는 것이 전혀 감사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심지어 그것이 위선이라 할지라도, 겉으로 하는 이야기일지라도 오히려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전혀 감사를 표현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서로간에 집에서도 감사를 표현한다면 암 우리 가정을 훨씬 더 살기 좋은 가정이 될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도 말이 없어요. ‘맛있지요?’라고 물어보면 ‘그래.’ 그러고 끝입니다. 억지로 물어야 겨우 대답하고 나가버리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좋은 음식을 먹을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감사할 수 있다면 얼마나 더 아름다운 가정이 되겠습니까? 제가 미국에 가서 제일 좋은 인상을 받았던 것중에 하나가 미국 사람들은 무조건 ‘Thank you!\' 그럽니다. 무엇을 하던지 \'Thank you!\'에요. 처음에는 ’참, 저 사람들 속 없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래 살다보니까 ’아, 이 사람들은 감사가 습관이 되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부딪혀도 “Excuse me.\', \'Thank you.\' 그저 그렇게 고맙다고 표현하는 그 모습들이 ’기독교 문화인가보다‘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받은 많은 영적인, 육적인 은혜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쌀알만큼 많아지기 바랍니다.
또 그런가하면 형제들 때문에, 자매들 때문에 감사합니다. 성경에 보면 로마서 6장 17절(?)에 다른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그렇게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제가 이야기를 들었는데 한 분이 제 아내에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사모님, 너무 감사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하면서 말씀하기를 그 사돈 집안이 예수 믿기를 원해서 말을 하고 싶지만 사돈이라 참 조심스럽지요. 그러나 아주 조심스럽게 기도하면서 종종 테이프도 갖다 드리고 하셨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그 사돈이 그동안 들은 테이프를 통해서 이제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제 생애에 가장 기쁜 일입니다.’라고 하시더군요. 왜 그렇게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합니까? 한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서 영원한 세계를 알고 이 땅의 인생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 감사한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에도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고 감사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보여준 믿음, 참 어려운 인생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지금은 어렵지만 이것이 영원히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이러면서 신앙을 표현했을 때, 믿음이 나타날 때마다 옆에서 보는 사람들은 감사가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이에요. 또 다른 사람들이 보여준 사랑과 은혜와 열정 때문에 감사합니다. 다윗을 보면 성전을 지으려고 하니까 모든 사람들이 힘을 합해서 자원해서 하나님께 드려서 그 성전을 준비하는 것을 보면서 다윗이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감사의 원인 제공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시간에 내 가족들에게 감사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고통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습니까? 나는 오늘 이 시간에 사람들의 감사의 제목인가, 아니면 불평의 제목이 되고 있는가. 우리 자신을 한 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감사의 원인 제공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때문에 가족들이 감사하고 여러분 때문에 직장의 동료들이 감사하고 여러분 때문에 교회의 성도들간에 감사해서 여러분을 생각하 때마다 ‘아, 참 그 분 너무 좋아. 너무 감사해.’ 이런 마음이 여러분을 볼 때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어나도록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에게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가 필요해요. “하나님, 제 인생에 은혜를 주셔서 감사의 제목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룻을 기억하시지요? 룻은 모압의 여자요 유대의 여인도 아닙니다. 이방의 여인이 유대땅에 왔을 때 보아스가 하는 말이 ”당신은 일곱 아들보다도 더 귀한 여자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다른 사람에게 축복을 일으키고 감사를 일으킬 수 있는 삶이 되도록 꼭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감사의 제목이 되지 못한다면 불평의 제목이 될 수 있어요. 인생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인생에 특히 가족들의 인생에 불평의 제목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은 반드시 복의 근원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감사하나? 성경에 보니까 첫째로 “예수의 이름으로 감사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감사하라.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께로 갈 수 있으니까요. 또 “감사의 제물을 드리며 감사하라.” 그랬습니다. “찬양으로 감사하라.”, 어떤 때는 “시를 써서 하나님께 감사하라.”, “하나님을 드놀이면서 감사하라.”, 성전에 나갈 때마다, 그 궁전에 들어갈 때마다 맨 먼저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올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에 도착하자마자 조용히 자리에 앉으면 고개를 숙이고 지난 한 주를 생각하면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올라십시오. 성경에 그렇게 하라고 되어 있어요. 또 과거의 신앙인들을 그렇게 하나님께 감사를 표시함으로 마음에 밝아지고 하나님의 좋으심이 느껴지고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는 것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언제 감사드려야 하는가? 성경에 보니까 여덟 가지가 있더군요. 공예배에서 감사드립니다. 즉 오늘같은 이런 시간이지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모여있을 때 거기에서 대표로 기도하는 분들이 우리 모두를 대표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요. 또 둘째는 개인예배에서 혼자 예배를 드리던지 가족들이 예배를 드리던지 그 예배시간에 감사의 기도들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어려서부터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늘 부모님들이 감사의 제목들을 하나님께 올리는 것을 본다면 그 감사를 배우면서 자라난 그 아이가 얼마나 축복이겠습니까? “하나님, 철수로 인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말을 아이가 듣고 자라났다면 ‘아, 우리 아버지는 내가 감사한가 보구나. 나 때문에 아버지가 기뻐하시는구나. 어머니께서 기뻐하시는구나.’이런 말을 듣고 자란다면 그 자녀들이 얼마나 힘이 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시는구나.’, ‘우리 아버지가 나 때문에 감사하는구나.’ 개인예배에도 감사가 표현되어야 됩니다. 또 기도중에 감사를 하고 중보기도 할 때 감사를 해요. 중보기도는 남을 위해서 하는 기도지요. 남을 위해서 기도할때도 역시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서 감사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얼마나 마음이 풍성해지겠습니까. 또 큰 일을 마치고 감사를드립니다. 느헤미야 11장에 보니까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완공한 다음에 온 백성들과 함께 큰 감사의 축제를 드렸어요. 식사할 때 감사를 드립니다. 이건 내가 만든 거 아니요 농부들이 만들었고 하나님이 비를 주셨고 하나님께서 햇빛을 주셨고 하나님께서 물을 주셔서 내 앞에 내 밥상에 밥이 올라와 있다는 거 얼마나 감사합니까 또 감사하고 먹으면 맛있어요. 감사하고 먹으면 소화가 잘 됩니다. 성경에는 감사하면서 식사하라고 했습니다. 또 범사에 감사하라고 그랬어요. 즉, 다시말하면 무엇이든지 감사의 제목을 찾는거지요. 어떤 형편에 있어도 심지어 어려운 사정이 있어도 하나님 아버지 이번에 이 어려운 일을 통해서 나 자신을 새롭게 해주시고 내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걸로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모습이 믿는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데살로니가 1장 1절에 보면 항상 감사했습니다. 신앙인들은 제가 성경에 찾아 보니까 언제나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예수님도 감사 드렸습니다. 천사들, 다윗, 레위인, 다니엘, 요나, 시몬, 안나, 바울, 수 많은 성도들,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늘 감사가 넘쳤습니다. 여러분의 입술에도, 여러분의 가슴에도 감사가 넘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두 가지가 있어야 되요. 첫째, 감사하려고 하는 마음의 결정이 있어야 되요. 또 감사를 습관화해야 됩니다 시편 18편 49절에 보니까 ‘내가 하나님께 감사를 하리로다’. 이렇게 자기의 결의를 마음에 가졌어요. 난 앞으로 감사하며 살겠다 언제든지 감사를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을 올리며 나는 일생을 살겠다. 이렇게 언젠가는 여러분의 인생에서 인생을 감사하며 살겠다고 결정하는 날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오늘이길 원합니다. 여러분 감사할 때가 있어요. 언제요? ‘좋은일생길때만’ 그것은 누구는 못합니까 좋은일있는데 왜 감사를 못해요.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다 감사를 할 수 있는 거에요.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가 이방인들보다 더 나은 것이 뭐냐, 새리들보다 더 나은 것이 뭐냐, 다른 사람이 감사할 때 너희들이 그 때만 감사하면 무엇이 예수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냐’ 언제나 감사를 찾아서 다른 사람이 안 보일때도 감사하며 살아 가겠다고 하는 결단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감사를 습관화해야 합니다. 다니엘도 6:10절에 보니까 습관대로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했다고 그랬습니다. 느부가네살 왕국에 총리로 있던 다니엘에게 감사가 습관이 되어 있어요. 결단하고 늘 감사를 드렸기 때문에 감사가 생활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감사가 습관이 되어 있고 생활화되어 있어서 언제나 감사를 찾을 줄 아는 눈이 밝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골로세서 2:7절에 보면 믿음이 풍성해진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것입니다. 감사의 결단이 있고 감사의 습관이 있고 생활화가 되면 믿음이 왕성해진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응답이 있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응답하시니까 감사하고 기뻐하고. 여러분과 제가 감사가 넘치는 신앙생활을 해서 믿음이 풍성해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26.제목 : 감사와 찬양
본문 : 시편 138편 1-5절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 02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높게 하셨음이라 03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하셨나이다 04 여호와여 땅의 열왕이 주께 감사할 것은 저희가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음이오며 05 저희가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
외국에 나가보면, 은혜를 많이 받으신 집사님들 중에 주의 종들을 섬기기를 사모하여 자신의 집에서 가장 좋은 방 하나를 구별하여 준비해 놓고, 어느 때든지 목사님이나 선교사님이나 전도사님이 그 도시를 방문하게 되면, 며칠이고 내 집처럼 편안하게 머물다 가실 수 있도록 배려해놓고 계신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집을 다녀간 이후에 감사의 편지나 전화로 고마움을 표시한 사람은 이십 명 중에 한 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께서 문둥병자 열명을 고쳐주셨을 때에, 돌아와 엎드려 절하며 감사를 표시한 사람은 단 한사람뿐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사하는데 그다지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해서는 안되는 원망불평들은 아주 쉽게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다가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머문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축복을 베풀어주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기보다는 늘 원망불평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일본의 [우찌모라 간죠]는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메마른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저주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은혜를 많이 입었어도 도무지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다면 그 마음 자체가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해도 감사하는 마음이 충만한 사람은 은혜가 충만한 사람으로, 은혜가 충만해지는 자체가 곧 축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 더욱 행복해지나, 감사하는 마음이 없을 때 불평불만이 생기고 더욱 불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 감자를 드셔보셨는지요? 얼마나 맛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 감자를 몇 개나 드실 것 같습니까? 별로 많이 드시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적당히 소금을 쳐서 드셔보세요. 이런 감자는 몇개든지 드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게 되면 자기 자신도 행복해지고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하며 사는 가정은 감자에 소금을 쳐서 먹는 것과 같고, 감사없이 사는 가정은 소금을 치지 않고 먹는 감자와 같습니다. 부부사이에도 남편은 자기 아내를 향해 늘 고맙다고 말하고, 아내도 남편에게 늘 고마움을 표시한다면 그런 사람들이 사는 가정은 행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감사할 때 기쁨이 있고 더 큰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도시는 폐허되고 많은 아이들이 제대로 먹지 못하여 굶주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독일의 어느 마을에 사는 한 부유한 노인부부가 매일 빵을 만들어 거리에서 굶는 아이들을 먹였습니다. 이들 부부가 빵을 만들어 나오면 아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큰 것을 먹겠다고 덤벼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여자아이는 예외였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다 골라가지고 난 다음 맨 마지막으로 아주 못생기고 찌그러진 작은 빵 하나를 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부부에게 다가와 “할머니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늘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껏 많은 아이들이 같이 빵을 먹으면서도 감사를 표시한 아이는 이 여자아이뿐이었습니다. 이를 눈여겨본 이들 부부는 참으로 기특한 이 여자아이를 위해 작고 아주 못생긴 빵속에 금화 한 닢과 메모지를 넣어 그 아이가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메모지에 “이것은 감사할 줄 아는 너를 위해 준비한 작은 선물이란다.”라고 썼습니다. 이처럼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헨리 포드가 자동차 왕으로 돈을 많이 벌어 한창 유명할 때의 일입니다. 어디서나 돈을 많이 벌었다는 소문이 나면 전국 어디에서나 도와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헨리포드도 그런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일일이 다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골 벽지의 한 여선생님이 학교에 피아노를 한 대 들여놓고 싶다며 피아노를 살수 있도록 일 천불의 돈을 보내줄 수 없는지 도와달라는 간곡한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이에 회사는 회사규정을 따라 헨리 포드의 이름으로 10센트를 보냈습니다. 그 당시 화폐로 10센트가 작은 돈이 아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여선생님은 비록 그녀가 원한 천불은 아니었지만, 그 돈도 고맙게 생각하고 그 돈을 가지고 땅콩 씨를 사서 학생들과 함께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습니다. 이 여선생님은 그해 땅콩을 수확하여 그 중에 한 봉지를 소포로 감사의 편지와 함께 헨리 포드에게 보냈습니다. 이 편지에 감동을 받은 헨리 포드는 이 학교가 요청한 일 천불이 아니라 그 열 배인 일만 불의 돈을 보냈다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인줄 믿습니다. 작은 것을 받고도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을 보낼 때, 굶어죽은 사람도 없었고, 발이 부르튼 사람도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옷이 낡아서 못 입었다거나 신발이 해어진 사람도 없었습니다(신 29:5).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불리 먹이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해주셨습니다. 반석에서 생수가 나게 하셨고, 날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사랑해주시고 축복해 주셨으면,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며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려야 마땅하나 도리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불평만 했습니다. 도무지 감사를 모르는 목이 곧은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선민의 도리가 아닙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이 적어도 일년에 세 번 이상은 하나님 앞에 정성껏 준비한 감사의 예물을 드리며 하나님의 성막에 나아와 감사의 절기를 보내도록 규례를 만드셨습니다. 이 세 절기가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입니다. 그중에 초막절이 우리의 추수감사절기와 같습니다. 따라서 이 세 절기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에 있든지 말든지 의무적으로 누구든지 예물을 드리면서 감사의 절기를 지키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습관이라고 해서 모든 습관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좋은 습관은 매우 좋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나면 교회에 나가 새벽기도를 드리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라든가, 날마다 온 가족이 모여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은 좋은 습관입니다. 이런 좋은 습관이 들게 되면 하루라도 새벽기도를 하지 못한 날은 뭔가 이상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저는 어려서부터 하루에 세 번씩 교회에 나아가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매일 성전에 엎드린다고 해서 항상 기도가 잘 되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마음이 컬컬하고 몹시 답답하고 고민이 되고, 기도할 제목이 있을 때,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부르짖게 됩니다. 이렇게 저는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고 늘 교회에 가서 기도하다 보니 기도의 시간을 많이 갖게 되었고, 응답도 많이 받게 되었음은 물론, 은혜도 많이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습관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주 교회에 나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좀처럼 기도하기가 힘듭니다. 감사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밥을 먹고 나면 언제나 “잘 먹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하는 인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도 밥을 먹고 나서 주방에 계신 권사님, 집사님께 감사의 인사를 해보세요! 그분들이 얼마나 좋아하시겠습니까. 저는 가끔 다른 교회에 일이 있어서 갔을 경우 식사를 대접받게 되었을 때, 가만히 보면 그 교회 목사님 장로님들도 잘 먹었다고 감사하다고 주방에 들려 인사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일부러 주방에 들려 잘 먹었다고, 수고하셨다고, 맛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직장에 가셔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 언제나 주방에서 수고하시는 분들께 인사해보세요! 그분들이 인사하는 여러분을 유심히 살펴 볼 것입니다. 잠자리에 누웠을 때 그리고 아침에 잠자리에서 눈을 떴을 때에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감사의 기도를 드려보세요! 또 예배를 드린 후 바깥으로 나아갈 때, 설교한 목사님에게 “목사님 감사합니다.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인사해보세요! 그런 인사 받을 때,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그 말 한마디가 피곤이 다 물러가는 보약이 됩니다. 또 병원에서 치료받을 때에도 의사 선생님께 감사하다고 말하고, 주사 놓는 간호사에게도 매번 감사하다고 말해보세요! 더 친절한 진료를 받게 될 것입니다. 또 장사하시는 분들, 비록 손님이 물건을 팔아주지 않고 돌아가더라도 또 다시 이 가게에 들릴 마음이 생기도록 감사하다고 말하고 또 오시라고 인사해보세요! 다시 들리고 싶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부산 사람들은 얼마나 퉁명스러운지, 안 사고 나오면 뒤통수에 대놓고 재수없다고 말하고, 혹시 욕먹을까봐 어떤 가게는 물건 사러 들어가기가 겁이 날 정도입니다. 그런데 요즘 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부산의 어느 백화점에 들렸습니다. 한 매장에서 물건을 구경하고 나오는데, 아가씨들이 한결같이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물건을 팔아주지 않았는데도, 그런 말을 듣고나니 어찌나 고마운지 사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습니다. 참으로 고객감동을 만들어 내는 사원교육을 잘 시키는 기업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사는 신앙과 인격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감사하는 조건이 있을 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감사할만한 조건이 없을 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오히려 원망불평하는 마음을 가지기가 더 쉽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게 되는 것은 현재의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의 문제입니다. 현재의 상황이 어려워도 과거를 돌이켜보면 하나님 앞에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아무리 어렵다 어렵다 해도 과거 이삼십년 전과 비교해보세요! 그때 그 시절에 비해 지금은 얼마나 잘 살고 있습니까? 과거 큰 어려움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서 극복하게 해주시고 해결해주신 일을 생각하면 더욱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고 전화위복이 되게 하셨던 과거를 생각하면 미래가 아무리 불확실하고 앞길이 막막해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줄 믿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은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다윗의 시로, 시편 전체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이유는? 1. 과거를 돌이켜 볼 때,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축복이 얼마나 컸는지 를 깨닫고 감사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인하여 감사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간구할 때마다 주께서 응답하셨던 과거를 돌이켜보며 감사했습니다. 사실 다윗의 생애를 보면 얼마나 위기가 많았는지 모릅니다. 죽음의 고비도 수십 번 넘겼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위험한 고비 때 마다 자신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시고 위기에서 건져주셨던 과거를 돌아보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위태로울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응답을 해주셔서 오늘날 이렇게 살아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과거에 그러한 체험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잊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시 103;2).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을 잊지 않고 사는 방법은 다윗처럼 늘 간증하며 찬양하며 사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감사]한다는 단어는 [기억]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감사의 뜻은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恩惠)의 반대말은 배은망덕(背恩忘德)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원망불평이 많았던 것은 배은망덕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홍해 앞에 있을 때에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 육지같이 건너가게 하심으로 살려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흘뒤에 도착한 마라라는 곳에 이르러 물을 찾았을 때, 물이 써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불과 사흘 전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먹고 원망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광야 1세대는 원망불평이 습관이 되어 망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살았습니다. 늘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큰 고통이 되는 것은?쥱 기도가 잘 되지 않고 기도해도 응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기도응답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불행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쥲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벽이 생기면 기도를 해도 응답이 되지 않고, 말씀도 잘 들리지 않습니다. 이는 영적위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어느 순간 펀뜩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사람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깨달아지는 것은 더욱 더 큰 축복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장 행복한 때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감사가 넘칠 때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 [가장 긴밤]등을 집필한 작가인 [코넬리어스 라이언]은 5년간 암으로 투병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그는 날마다 아침에 일어나게 되면 감격에 찬 목소리로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좋은 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의 아내가 도대체 무엇이 그리 감사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사랑하는 당신을 또다시 볼 수 있게 된 것과 가족들의 음성을 듣게 된것, 그리고 병들어 눕기 전에 탈고한 것과 병마와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신 것과 무엇보다도 주님이 지금까지 나와 함께 계신 것을 감사하다고 고백했습니다.여러분들은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곰곰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 기쁨이 있고, 평강이 있으며 행복이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더 큰복을 받습니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7.제목 : 감사의 영적 의미
본문 : 시편 22편 3절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는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고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며 은혜를 베풀어주신 이웃에게 감
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감사는 객관적으로 볼 때 지극히 자기중심주의적이고 이
기주의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감사는 자기 개인의 이해관계에 직
접 간접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내게 유익이 되지않거나 손해가 오고 고통이 다가올 때는 감사하지 않습니다. 성
경에는 우리에게 유익될 뿐 아니라 손해와 고통이 될 때에도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을 하
고 있습니다.
1. 불평은 마귀가 우리의 마음을 여는 열쇠
아담과 하와가 왜 타락했습니까? 마귀가 성공적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불평을 심어주었
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하와에게 와서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들의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
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궤변을 토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 모든 실과의 나무를 다
먹되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아는 실과는 먹지 말라. 너희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했는데 마귀는 그것을 엉뚱하게 해석해서 ‘모든 실과를 다 먹지 말라고 하더냐?’고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의 마음속에 불평을 심어주는 마귀의 궤계인 것입니다.
하와는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
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
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선악을 안다
는 것은 주권적인 행사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네가 선악
과를 먹는 날에는 너도 좋고 나쁜 것을 마음대로 판단할 수 있는 주권적인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되는 것이 샘이 나서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게 했다’고 불평을
심어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평이 결국 반역죄를 짓게 하고 타락하여 에덴에서 쫓겨나게 만든 것입니
다. 마귀는 온갖 궤계를 동원해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불만을 품게 하였던 것입니다. 원망
과 불평은 사람의 마음을 점령하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불뱀에 물려 죽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21장 4절로 6절에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
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
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
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
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
은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면서 길이 험하고 고달프고 괴로웠습니다. 충분한 음식과
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망과 불평은 심판을 가져오게 한 것입니다.
광야에는 원래 불뱀이 많이 서식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은 하나님이 막아 주셨습니다. 그
렇지만 원망과 불평을 할 때 하나님은 그 막았던 손길을 떼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광
야에 사는 불뱀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어서 많이 죽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원망과 불평
은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마귀의 궤계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산 사건은 민수기 11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악한말로 하나님을 원망하매 하나님이 불을 보내어서 그들의 진을 사른
적이 있습니다. 가나안 정탐 후 그들의 악행으로 10명의 정탐꾼은 재앙으로 죽었으며, 그들
의 말만 듣고 밤새 통곡하고 원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로 회진해 멸함을 받게 된 것이
었습니다.
민수기 14장 27절로 30절에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
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
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
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심판이요 하나님의 진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원망
하고 불평할 수 있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해서 정탐
해 보니 아주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거하는 사람은 네피림의 후손 아낙자손
대장부였기에 그들과 비교해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뚜기와 같았습니다. 들어가 차지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불평할 이유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이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고 불평하고 원망하자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버림 받고 만 것입니
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와 심판을 재촉하는 길이 되
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감사와 찬양은 그렇게 하기로 결심을 하고 우리 스스
로를 훈련하지 않고는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 이후로 타락한 인간들은 불평
하고 원망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마음에 변화를 받지 않고는 원망과 불평의 세계에서
떠날 수가 없고 떠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마귀에게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고 하나님께 꾸중을 듣고 심판을 당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살 때가 많은 것입니다.
2. 감사의 영적 의미
시편 50편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
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능력
과 구원과 은혜를 받는 열쇠입니다. 원망과 불평과 탄식이 마귀에게 마음문을 열어주는 열
쇠가 된다면 감사와 찬송은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문을 열어 드리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유다의 여호사밧이 통치하던 시대에 모압과 암몬과 마온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였
습니다. 갑자기 외세의 침략을 받은 여호사밧 왕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는 백성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서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역대하 20장 12절로 13절에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
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유다 모든 사람은 그 아내와 자녀와 어린 자로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할 때 여호와의 신이 레위 사람 야
하시엘에게 임하여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마주 내려가라 저희가 시스 고개로 말미암아 올라오리니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
엘 들 앞에서 만나려니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
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
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역대하 20장 15절-17절)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역대 전쟁사에 없던 희한한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전쟁에 나가면서
성가대를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군사들 앞에 성가대들이 거룩한 옷을 입고 찬양을 부르면
서 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 기사는 역대하 20장 20절로 23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백
성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
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
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
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
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산 거민을 쳐서 진멸하
고 세일 거민을 멸한 후에는 저희가 피차에 살륙하였더라”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인 것입니다. 그들이 노래를 시작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입니
다. 가만히 있을 때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시작할 때 하
나님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사와 찬송은 하나님이 역사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호사밧은 여호와께 감사하고 찬미한 결과 대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증거하다가 잡혀서 빌립보 감옥에 갇힌 사건이 있습니다. 그들은
빌립보에서 점치는 여종을 구출해 주었습니다. 한 여종이 귀신에 들려 점을 치는데 매일 그
들을 따라 다니면서 괴롭혔기 때문에 바울이 ‘이 귀신아 예수 이름으로 명하니 나가라’고
말해 여종에게서 귀신을 몰아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종의 주인이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
게 되자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관원에 넘겼습니다. 그리고 관원들은 그들의 옷을 벗기고 매
를 때렸습니다. 그리고 쇠고랑을 채워서 빌립보 감옥 깊숙한 곳에 투옥시켜 버렸습니다. 그
러므로 바울과 실라는 원망하고 불평할 조건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6장 25절로 26절에 “밤
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
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고 기
록하고 있습니다. 한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자 하나님이 보내신 지
진이 일어난 것입니다.
찬송을 통해 자유와 해방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울
때 찬송하면 그 묶임에서 해방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생활과 환경이 고통과 괴
로움으로 묶였을 때 찬송하면 하나님께서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주십니다. 영적인 진동, 우
리의 생활에 진동을 일으켜서 흑암의 세력을 쫓아내고 자유와 해방을 갖다주는 능력이 바
로 찬송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이 오셔서 함께 일할 수 있는 길
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간수가 와 보니 옥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죄수들이 다 도망친줄 안 간수
는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그때 바울이 “자살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다”고 말리자 간수
는 그들에게 나아와 “선생들이여 내가 어찌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
도행전 16장 31절)고 답변했습니다. 그 말에 간수와 그 식구들이 다 회개하고 세례받고 구
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감사와 찬송은 자유와 해방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게 구원의 문도 열어준 것입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이 항상 원망, 불평, 탄식하는 것만 보면 불신자들이 어떻게 마음에 감동
을 받고 예수를 믿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고통과 괴로움 속에도 감사하고 찬송하며 눈물
을 흘리고 주께 영광을 돌리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마음에 변화를 얻을 수 있
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와 찬송은 우리의 원수를 물리치는 힘이 되고 감사와 찬송은 우
리를 속박에서 해방과 자유를 주는 놀라운 역사가 되며 복음 증거의 큰 원동력이 되는 것입
니다.
3. 감사하기 위하여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은 태어날 때부터 마음속에 원망과 불평과 탄식을 하도록 만들어졌
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 세상에는 원망과 불평과 탄식이 가득합니다. 두, 세사람만 모
이면 원망과 불평과 탄식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
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내어쫓고 하나님께서 우리속에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구원의 은총을 베풀기 위해서는 감사하는 것을 배우고 훈련하고 항상 관심을 가지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불평하는 말보다는 감사하는 말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됩니다.
시편 50편 14절로 15절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
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로 제사를 드리고 난 다음 환난날에 하나님께 부르
짖으면 하나님이 건지시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때는 먼저 감사 제
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1620년 9월 영국의 102명의 청교도들이 영국 제임스 1세의 국교정책으로 심한 박해를 받
자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두 달이 넘게 대서
양을 항해하는 동안 질병과 굶주림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구사일생으로
신대륙에 도착하였으나 극심한 추위와 풍토병, 그리고 인디언들의 습격으로 태반의 사람
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살아 남은 사람들은 시련에 굴하지 않고 교회를 세워 신앙생
활을 하였으며, 이듬해 봄에 농지를 개간하고 옥수수를 심어 가을에 대풍작을 이루게 되었
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눈물로 감사의 제단을 쌓고 또 농사법을 도와준 이웃 인디언들을
초청해 3일간 큰 잔치를 베푼 것이 오늘날 추수감사절기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 세운 하버드나 프린스턴 대학교 등은 오늘날 세계 최고의 대학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불평할 것을 찾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불평
할 사건 중에도 감사할 일들을 찾으면 풍성한 감사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
평할 것 가운데서도 감사할 보화를 찾아서 그것을 가지고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
면 우리의 삶은 원망과 불평이냐, 감사와 찬송이냐 하는 영적전쟁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에서 지면 낭패를 당하고 전쟁에 이기면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잠언 4장 23절에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
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음에서 감사와 찬송을 하면 생명이 넘쳐나고 원망과 불평
만 하면 사망이 넘쳐 나옵니다.
우리는 이웃과의 대화중에서 감사보다 불평을 말하도록 심리적으로 타락해 있습니다. 사
람을 만나면 벌써 남의 흉을 보거나 원망하거나 불평하도록 심리적으로 타락해 있습니다.
시편 34편 13절로 14절에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악
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에베소서 5장 4절
에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편 141편 3절에도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
술의 문을 지키소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감사한 말이 나오고 원망과 불평
이 나오지 않도록 관심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입술로 먼저 감사를 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
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기
록하고 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풀어놓는 길이 됩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우
리 구원받은 성도의 입술의 열매입니다. 감사와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제물을 드려 하나님께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96편 8절로 9절에 “여호와
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아름
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찌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 6장 20절에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4장 18절로 19절에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
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때 입술로 감사의 제사를 드릴뿐 아니라 실제로 예물을 가지고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
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
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물질로 감사하면 하나님
께서 물질로 우리에게 보답해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가장 크게 감격하신 것이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린 것입니다. 이스
라엘에서는 처녀가 시집을 갈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옥합에 향기로운 기름을 조금씩 모읍
니다. 그리고 그것을 팔아 시집을 가게 됩니다. 마리아도 자신의 결혼을 위해 오랫동안 기
름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마리아가 그 기름이 든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주었습니다. 이 광경
을 본 제자들은 마리아의 행동을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이 나에게
참으로 좋은 일을 했다. 그리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인의 선행도 함께 전파될 것
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앞둔 그 자리에서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은혜
와 구원에 너무 감사해서 그가 가지고 있는 가장 귀한 옥합을 깨뜨려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
다. 그러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겠다’고 하신 그 말씀대로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감사를 할 때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납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손길을 초청해 오는 길이 됩
니다. 그러므로 병자가 의사를 찾는 것처럼, 배고픈 자가 음식을 찾는 것처럼, 어려움에 처
했을 때 하나님의 도움을 찾는 것이 바로 감사의 길인 것입니다. 감사가 하나님을 초청해
올 수 있는 길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서 항상 영적 전쟁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 전쟁 중 마
귀가 가져다주는 것은 불평이요, 원망입니다. 그러나 감사는 확실하게 하나님을 모셔들이
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사와 찬양이 있는 곳에 보좌를 배설하고 임재하시는 것
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작은 일에서 큰일까지 영적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 감사의 문을 열면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을 하
면 하나님이 계실 수 없습니다. 결국 마귀를 받아 들여서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으며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결과를 얻고 싶으면 감사를 하십시오. 그러나 도적질 당하
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며 고통과 슬픔을 당하기를 원하면 원망과 불평을 하십시오.
선택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이 일
을 힘껏 행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하셔서 큰 은총과 축복과 영광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
니다.
28.제목 : 전천후 감사생활
본문 : 욥-2-7-10
옛날에는 농사를 지을 때 비가 오면 농사를 짓고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못지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농사 기술이 개발되면서 저수지를 만들어서 날이 가물어도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만들었는데 최근에는 더 발전해서 겨울에도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겨울에도 딸기가 나오고, 수박이 나오고, 모든 과일 채소가 나와서 1년내내 과일과 채소를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후에 전혀 제한받지 아니하고, 일기에 제한받지 아니하고 1년내내 짓는 농사를 전천후 농사라고 말합니다.
저희는 어렸을 때 천수답이라는 것이 있어서 산등성이에 있는 논은 비가 오면 농사를 짓고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못지었습니다. 또 모를 심었어도 비가 오지 않으면 다 말라버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밭에까지 수리시설이 되어서 비가 오지 않아도 농사를 짓습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환경이나 우리에게 오는 시련이나 역경에 영향을 입지 아니하고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전천후 감사라고 말합니다.
비가 오면 감사하고, 날이 가물면 한탄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비가 와도 좋다, 가물어도 좋다, 겨울이 와도 좋다, 가을이 와도 좋다 계절에 관계없이 어느 때든지 좋다\' 이렇게 감사하며 살 수 있는 축복,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똑같은 예수를 믿지만 즐겁게 믿는 사람이 있고, 괴롭게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고 행복을 얻은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전혀 마음에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여전히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한 분명한 기대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이 예수를 믿고 늘 감사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왜 감사하기를 원하느냐? 내가 감사하므로 나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첫째, 감사함으로 내 생이 행복해집니다. 두 번째로, 감사하므로 내 삶의 의미가 새로워집니다. 삶의 가치가 형성됩니다. 세 번째로, 감사하므로 내 인격이 높이 성숙합니다. 이 세 가지는 감사가 주는 최대의 축복입니다. 감사한 만큼 행복합니다. 감사한 만큼 우리 마음이 기쁩니다. 똑같은 부부가 살면서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행복합니다. 내가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살 맛이 납니다. 그러나 감사를 잊어버리면 그때부터 인생은 아무 살 맛이 없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받고 살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감사를 찾아내야 됩니다.
성경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고난의 승리자를 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은 부자였습니다. 양이 7천이요, 약대가 3천이요, 소가 5백 겨리요, 암 나귀가 5백 마리인 당시의 사회로 말하자면 대 재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존경과 추앙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정에서는 후덕한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악을 떠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아들들이 생일잔치를 할 때는 혹시나 먹고 마시면서 잘못됨이 없을까 해서 아들들을 성결케 하고 다음날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감사를 했습니다.
욥은 늘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감사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잘될 때 교만하지 않고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잘될 때 교만하지 아니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복입니다. 부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만하지 아니하고 가난할 때 마음을 갖고 산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잘못될까 해서 모세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신명기 8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두 번째로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이 힘으로 내가 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내게 재물을 얻을 능을 주셨음이니라\"
안될 때도 감사해야 합니다. 욥에게 어려운 때가 왔습니다. 재산은 일시에 없어졌습니다. 자식이 태풍으로 일시에 다 죽었습니다. 몸에 병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정수리로부터 발끝까지 질그릇 조각으로 긁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악창이 온몸에 덮쳤습니다. 아내까지도 \"당신이 지금까지 하나님을 온전히 믿어봤자 뭐 나온 것이 있나 그래도 온전함을 끝까지 지킬 것이냐 하나님을 저주하고 욕하고 죽으라\"고 하면서 욥의 심기를 건드립니다. 그때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어찌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같이 말할 수 있느냐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나님께서 주신 것 하나님께서 가져가셨는데 무슨 불평할 것이 있겠느냐\"
이런 일이 생겼을 때 보통 사람 같으면 충격받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욥은 자기를 비웠습니다. 속에 물질로 가득찬 사람은 물질을 잃어버리면 죽습니다. 권력으로 가득찬 사람은 권력을 잃어버리면 죽습니다. 자기 속에 가득찬 것을 빼앗기면 죽습니다. 그런데 욥은 마음을 비웠습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현재 내게 있는 것으로 족하다. 알몸으로 나왔은즉 알몸으로 돌아갈지라\" 이것이 우리 마음에 차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죽어 넘어질 시간에 욥은 일어났습니다. 기절하지 않았습니다.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이미 비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욥에게서 한가지 놀라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욥은 까닭없이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1:9-11)
사단이 하나님께 참소하기를 \"욥이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이 조건이 있으니까 감사하지 조건없이 감사하겠습니까 욥이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그의 집과, 사업과, 그의 모든 일들이 잘되니까 감사하지 그것을 한번 쳐 보소서. 당장 하나님을 원망할 것입니다.\"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욥은 까닭없이 하나님을 찬양했기 때문에 욥을 내리쳤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1년 한해를 보내면서 가장 우리 생에 중요한 감사절을 맞았습니다. 감사라는 것은 우리 생의 중요한 운명을 결정합니다.
감사하는 자는 자기 존재가 영광스럽게 됩니다. 사람들이 불평하고, 원망하면 천해집니다. 그런데 감사하는 사람은 은혜를 기억했다는 인간됨 때문에 훌륭합니다. 공부를 많이 한 지성인이라 할지라도 불평하는 사람은 천해집니다. 우리가 자기 존재를 영광스럽고 위대하게 만드는 비밀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공부 많이 하고 출세한 자식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못해서 출세는 못했지만 부모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 부모는 자식에게 고마운 생각이 듭니다. 자식을 길러가면서 어렸을 때는 인물 좋은 자식이 마음에 듭니다. 자라면서는 공부 잘하는 자식이 괜찮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자녀들이 결혼도 하고 형편에 따라서 출세도 하는데 마지막 늙어서 부모님 마음 속에는 그런 것이 다 의미가 없고 부모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효도하는 자식이 최고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을 길러가면서 효자를 길러야지 공부 잘하는 자식 기르려고 신경쓰지 마십시오. 부모의 은혜를 감사하는 자식이 최고의 자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택했는데 하나님이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너 내 아들 되었으니 출세해라 공부 잘 해서 나에게 영광 돌려라 사업도 잘 해서 사회에서 잘 되면 좋지 그런데 내가 원하는 것은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효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최고로 영광을 받으시는 비밀입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을 알아 사는 것도 아니요, 지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IQ가 높아야 최고였지만 지금은 EQ가 높아야 합니다.
감사한 마음이 속에서 우러날 때 우리 존재가 영광스럽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됨입니다. 사람됨이 따로 있나요. 은혜를 기억하고 사는 것이 사람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사람 중의 사람은 은혜를 은혜로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은혜를 기억하면 내가 행복하게 됩니다. 감사할 때 행복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는데 모든 것을 가졌구나!\' 그러면 감사한 마음 때문에 살았다는 것이 가슴에서 뭉클한 감격이 있습니다.
청년들에게 \"그대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질문할 때 감격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메말라가는 이 세상에서 모두 다 말라버린 인정 속에서 감격하고 감동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복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자에게는 언제나 그 마음속에 행복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나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을지라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그 순간에 \'아,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이 행복하다.\' 하고 행복감이 솟아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삶 속에서 행복을 창조해 나가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인생을 살 용기가 생깁니다. 창조적인 존재가 됩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인생은 무한한 가능성을 부여해 줍니다. 과거를 불평한다든지 후회하는 자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과거의 모든 것들이 다 나에게 의미를 주고, 보람을 줄 때 미래에 대한 패달을 가속화할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과거를 후회하고 과거를 탄식하면 미래가 없습니다. 과거의 어떤 것도 후회하지 마십시오. \'아,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미래에 소망을 주려고 하는 예정된 코스였다.\' 그렇게 생각하십시오.
저는 이번에 제 생애 책을 하나 만들어 가면서 하루 한가지 한가지 사건이 하나님의 예정된 코스였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너무 감사하고 있습니다.
현재 내가 삶의 현장에서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그 삶 속에서 감사를 만들어 내십시오. 감사의 보약을 만들어 내십시오. 그때 우리의 골수가 윤택해질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감사한 마음으로 먹을 때 소화가 됩니다. 부부가 살면서도 감사한 마음으로 살 때 거기에 사랑이 싹터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감사한 마음을 가질 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한없는 영광을 돌리며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나의 것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한신교회 개척 이후에 최고의 헌금을 하는 여종이 있습니다. 시장에서 장사하면서 번 돈을 하나님 앞에 바칩니다. 매주 감사헌금을 드립니다.
제가 한번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한주간도 빠지지 않고 감사를 합니까?\" 했더니 옛날 구역장이 매주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라고 가르치더랍니다. 이 분이 구역장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잘 믿습니까?\" \"감사를 해야지\" \"감사를 어떻게 합니까?\" \"매주 해야 됩니다.\" 이 분이 구역장 얘기를 듣고 매주 감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3개월이 되어도 별로 잘 되는 것도 없고 감사를 했다고 은혜가 쏟아지는 것도 아니고 해서 \"3개월 해도 별 것 없네요.\" 했더니 \"3개월 가지고 되나요 1년은 해야지\" 해서 1년동안 계속했습니다. \"1년 해도 별 것 없네요.\" 했더니 \"1년 해가지고 되나요 10년은 해야지\" 하더랍니다. 그런데 이 분이 매주 감사헌금을 드리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IMF가 와서 경기가 안좋을 때 제가 한번은 물었습니다. \"요즘 사업이 잘 됩니까?\" \"사업 잘 됩니다.\" 제가 안된다는 얘기를 듣고 물었는데 잘 된다고 그래요. 그래서 \"무슨 사업이 잘 됩니까?\" 했더니 \"예, 저는 한가지 사업은 불경기가 없습니다. 하나님 사업은 불경기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향하는 사업은 불경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 여종에게 절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여종이 매주 감사하는 것을 보고 저도 감사를 매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천후 감사가 우리 속에 흘러서 하늘을 품에 안고 땅을 디딜 때 \'모든 것이 은혜다, 모든 것이 감사다, 모든 것이 축복이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9.제목 : 첫 열매를 드리라
출애굽기 23:14~19
11월은 교회가 감사의 달로 지키고 또 12월은 성탄의 달로 지키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성경에는 장차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 하나님께 드려야 되는 많은 조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계명도 출애굽기 20장에서 주어졌고 이것을 기초로 많은 신앙 규례서가 출애굽기에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여러 가지 규례들을 받을 당시 그들은 광야에서 고난스럽게 살았습니다. 생활에 필요한 조건들이 하나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 고난스러운 민중을 향해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들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영원히 지켜야 되는 민족 절기 3가지를 명령문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무교절을 지키라.” 성경에 나오는 단어들 중에 중복된 것이 많고 같은 사건을 조금씩 다르게 표현해서 어떤 때는 저 자신도 조금 혼란할 때도 있습니다. 무교절과 유월절은 같은 말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날을 기념하는 날인데 영어로 ‘Passover’라고 하는 것은 ‘넘어갔다’는 뜻으로 유월절이라고 합니다. 그때 누룩 없는 떡을 먹은 것을 기념하는 말로 무교절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3,500년 전 사건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도 일 년 중에 가장 큰 절기로 일주일씩 지키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맥추절을 지키라고 했는데 추수감사절입니다. 유대 나라는 쌀 수확이 없습니다. 보리농사만 있기 때문에 맥추절을 추수감사절로 지켰습니다. 일 년 농사지은 것 중에서 첫 곡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로 “이 절기는 일 년 중에 반드시 드리도록 하라.” 이렇게 명령하셨고, 그 다음에는 초막절로 40년 동안 광야에서 천막 생활하던 것을 기념해서 장막절이라고도 말합니다. 과거 고난의 때를 잊지 말라는 영적 의미로 ‘이 세 가지 절기는 반드시 드릴지니라.’ 라고 지금 이렇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추수가 마무리 단계에 이르고 있는 계절인데 금년에도 우리 대한민국의 들판은 일용할 양식이 황금물결이 출렁거리는 대풍년이 주어졌습니다. 간혹 어려운 소식이 들려오고도 있지만 1차 산업인 농업은 풍년이 와서 정부는 곡식 보관을 고민하게 되었다는 현실을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추수의 계절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먹을 식량이 많아 처치 곤란하다는 것은 성경에 있는 대로 하나님이 창고가 넘치도록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 부어주신 축복을 보지 못하고 안 보이는 것만 불평하는 것은 믿음의 문제가 됩니다. 구약에 나오는 맥추절이나 미국에서 시작된 청교도 추수감사절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고난이 극심할 때 감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다수확의 기쁨이나 풍성한 조건에서는 예수 안 믿는 불신자들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쓰면서 감사해 합니다. 추수감사절이 세계인의 풍요한 절기가 된 것은 바로 고난 중에 드린 감사제였기 때문에 그것이 영적 문화로 번져서 온 세상의 절기로 발전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감사해야 할 이유와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이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인생에 되어지는 일을 하나님의 섭리로 볼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없고 우연으로 보기 때문에 감사한 마음이 안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의 주변에 맞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하는 믿음을 가지고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일도 크게 감사할 때가 있고, 어떤 고난스러운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면서 감사 생활하는 것이 영적 초능력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반드시 우수하게 되었다든지 표준치가 넘는 수확이 있기 때문에 감사생활 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내 마음에 기준치를 정하고 사는데 그 기준에 도달해 보세요. 또 다른 기준이 생겨 끝없는 욕심을 부리도록 되어있는 것이 인간의 문제점입니다. 우리가 오래전부터 들어오던 예화가 있잖아요? 나라의 땅을 임금님 마음대로 하던 시절에 한 임금이 어떤 한 사람을 놓고 “네가 오늘 이 자리를 출발해서 네가 발로 밟는 땅을 다 너에게 주겠다. 네 마음대로 다녀와라. 그러나 해가 떨어지기 전에는 이 자리에 돌아와야 한다.” 그런 조건으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신이 납니까? 점심이나 먹으면서 했으면 좋으련만 그 시간에 더 뛰어야 되니까 넓고 넓은 땅을 그냥 막 돌아서 다 내 땅이 된다는 기쁨에 해가 떨어지기 전에 제자리에 돌아왔는데 너무 지쳐서 쓰러져 죽었습니다. 임금님은 그에게 무덤 한 평을 선물해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사람은 불쌍하고 미련하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그런 약속이 주어졌을 때 어떤 반응을 나타낼 것인가? 똑같습니다. 이 기준치가 없기 때문에, 끝없는 욕심을 인간들이 가지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감사 생활을 못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되어진 역사를 은혜로 보지 못하고 자기 공로로 평가하기 때문에 감사를 못합니다. “내가 피땀 흘린 결과를 놓고 무슨 하나님의 은혜, 은총이라는 말을 쓰느냐? 당연한 내 수고의 열매이지!” 우리는 내 노력의 찬양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가서 밭 갈고 걸음 주고 땀 흘려 가꾸고 거둬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피 땀 흘려 수고를 많이 했어도 은총적인 선물이 없을 때는 아무 것도 수확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적당하게 햇빛을 내려주시고 적당하게 비를 주시고 싹이 나서 열매가 열리는 기적을 베풀어 주실 때만 내 수고가 보람 있는 열매로 돌아오는 것이지, 그런 하나님의 은총적 개념이 없을 때는 나의 노력도 아무 소용이 없어지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 손에 수확이 들려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개입되었다고 하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이 감사생활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은총 개념에서만 감사가 나올 수 있고 내 공로 찬양만 하면 절대로 감사하지 않게 됩니다.
그 다음에 사람들이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남과 비교해서 내 몫이 적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감사생활을 못합니다. 우리 사람은 누구나 상대적인 행복과 상대적 불행을 갖도록 되어 있습니다. 상대적 행복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은 평생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이 능력은 성령 충만입니다. 우월성에서만 감사한 마음을 갖는 사람은 평생 불안합니다. 왜냐하면 나보다 우월한 사람이 항상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온 세상을 다녀보니까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세계에서 행복한 조건이 너무 많다고 객관성 있게 판단할 수가 있겠습니다. 기후 조건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평생 여름인 곳도 있습니다. 세월이 가는지 마는지 날마다 똑같습니다. 평생 추운 곳도 있습니다. 기후 조건만 해도 사시사철 변화무쌍하니 얼마나 정서적으로 좋은지 모릅니다. 우리나라 날씨는 싫증 날만 하면 바뀝니다. 교회에 하얀 눈이 쏟아졌다가 여름이면 장마가 지는 변화가 나타나고 단풍이 들었다가 새싹이 나왔다가…. 얼마나 기후적 축복입니까? 저는 성경에 엘리야가 기도했더니 3년 6개월 동안 비가 안 왔다는 말을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어떻게 3년 6개월 동안 비가 안 오나?’ 제가 세상을 다녀보고 이 말씀을 믿게 되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비 안 오는 곳이 있습니다. 충분히 있습니다. 제가 어디를 갔더니 보슬비가 조금 내리는데 그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서 모두 웃통을 벗고 보슬비를 맞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그랬더니 목사님이 오셔서 비가 왔다며, 저는 비를 몰고 간 적도 없는데도 그렇게 말하면서 일 년에 지금 처음 비가 내리는 거라고 조금 내리는 것 가지고 그렇게 난리치는 겁니다. 우리나라에 한강물이 저렇게 시퍼렇게 365일 흘러내리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세상 다녀보고 ‘아! 이 대한민국에 넘치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구나.’ 옛날에는 산에 땔감이 없어 나무를 다 베어버려 민둥산이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산이 모두 녹색으로 변하고 가을이면 단풍이 들어 휘황찬란하게 변하고 지금은 오히려 민둥산이 구경거리가 되는 좋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저도 대한민국 남자이지만 대한민국 남자들은 세계에서 제일 행복합니다. 대한민국 남자들은 어디를 가나 왕 대우를 하는 문화! 이런 문화 대한민국 밖에 없습니다. 어디를 가도 남자를 부르는 호출이 “사장님” 아니면 “회장님”이더라고요. 하루에도 몇 번씩 사장, 회장 소리를 들으니까 이게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요즘엔 어디를 가도 나이가 이 정도 되니까 저를 “아버님”이라고 부르더군요. 다 내 아들이고 딸입니다. 제가 쓰는 이 핸드폰은 사실 갈보리 교인들도 번호를 모르는데 이 번호를 어떻게 알고 하루에도 두 번 내지 세 번, 네 번 문자가 뜹니다. “오빠, 오늘 나하고 놀아.” 내가 놀지는 않았지만 목사더러 “오빠, 오빠” 하는 나라는 대한민국 밖에는 없습니다. 하여튼 대한민국 남자들은 복에 겨웠습니다. 이런 대우 어디를 가서 받아 보겠습니까? 여자들은 어떻습니까? 지금 세계 어느 나라 여성 문화보다 신나는 문화가 한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미국도, 일본도, 프랑스, 이태리 어림도 없습니다. 온갖 문화생활 자유롭게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시간이 있고 경제력도 생겨지고….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엄마가 뿔났다.’라는 드라마를 보니 그 여자는 막 집을 나가서 살더라고요. 한국 교회 활동이 활발한 것은 시간을 낼 수 있는 여신도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을 내서 교회 사역에 몸 바치고 사니까 삶이 풍성하고 영적으로 행복하지 않습니까? 이민 간 사람들을 이런 생활 어림도 없습니다. 내 몫이 크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믿음이 충만하고 삶이 풍성해지고 감사가 나오지 내 몫이 항상 적다고 하면 그런 사람은 불평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다른 교회나 다른 목회자들과 절대 나를 비교하지 않습니다. 아예 습관적으로 안합니다. 저는 나에게 주시는 것만 해도 늘 행복하게 생각하는 목회자입니다. 여러분과 생활한지 6년이 넘었지만 제가 찌푸리고 짜증내는 것 보셨습니까? 날마다 행복하게 삽니다. 그러나 나 자신의 과거와 늘 비교합니다. 제가 개척교회를 5개나 했잖아요? 경험이 많잖아요? 첫 번 개척교회 할 때 교인이 한 명도 없습니다. 개척교회 시작한지 6개월 만에 처음으로 헌금을 시작했습니다. 헌금을 가르치기 위해서 6개월이 걸렸습니다. 누구도 상관없이 교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얼마나 예뻐 보이는지, 천사 같고 눈물 날 것만큼 고마웠습니다. ‘저 사람이 교회를 나와 주시다니!’ 교인이 50명 되었을 때 제가 얼마나 울면서 하나님 앞에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고 기도했는지 아십니까? 새벽기도 나 혼자 얼마나 많이 했는데요? 겨울이 너무 추우니까 전기방석 하나 갖다 놓고 나 혼자니까 담요 하나 깔아놓고 기도하다가 어떨 때는 잠이 들잖아요? 아무도 안 오면 계속 잤겠는데, 뚜벅뚜벅 한 사람이 옵니다. 그러면 자다 말고 번개같이 일어나서 안 잔 척 하려고 “주여! 주여!” 그렇게 한번 개척교회 일을 해보세요. 그런 교회를 내가 미국과 한국에 다섯 교회를 경험했기 때문에 저는 절대로 누구를 부러워하지 않고 비교도 하지 않고 나에게 주시는 것만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목회도 욕심이 잉태하면 죄가 된다. 선하고 거룩한 일일수록 욕심을 버려야지 사업 번영시키는 것처럼 하면 진정한 목회가 안 된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가 되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이 된다. 목회도 죽는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감사의 조건을 내게 주신 것을 볼 수 있을 때 발견하는 능력! 이것이 없으면 감사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감사하며 살아야 될 이유를 찾는다면 이렇게 찾을 수가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밭은 하나님이 계신 증거가 됩니다. 감사가 많으면 불평이 없어집니다. 삶이 풍성해지고 영혼이 살찌고 행복감이 커져옵니다. 생활의 습관이라고 하는 것은 제2의 천성을 조성하면 힘이 있음을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증명했습니다. 사람이 긍정적인 말을 계속하면 나도 모르게 긍정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긍정적인 일이 생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히면 헤어 나오지 못하는 늪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이런 말이 있죠?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아니하면 문제가 안 된다.” 우리 청소년 인격 지도 지침서에 이런 예화가 나오잖아요? 아침에 집을 나갈 때 거울 앞에 서서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말하라는 겁니다. “너는 훌륭한 하나님의 자녀야. 하나님은 너를 사랑해. 너는 어떤 일도 해낼 수 있어. 나가! 이 사회는 너를 기다려. 행복할 거야.” 자기한테 말하라는 겁니다. 하는 사람은 효과 있다는 겁니다. 나는 불행의 마귀가 악착같이 따라다닌다고 생각하면 마귀는 그런 사람을 좋아합니다. 여러분, 성경 보세요. 불평이 많은 사람과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안하셨습니다. 오히려 절망적 저주가 임했습니다. 출애굽기, 신명기, 모세오경 가운데 나오는 가장 많이 나오는 똑같은 단어가 뭔지 아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아우성 친 말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여 가로되” 이 문장으로 시작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최종 결정을 원망하던 사람들은 한 사람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긍정적인 여호수아, 갈렙만 들어가고 다른 사람은 한 명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너희들이 날마다 원망만 했지, 하나님의 역사에 무슨 동참을 했느냐?” 그래서 광야에서 출생한 그 후손들만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하시는 하나님 역사를 우리가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고난당한 사람도 감사할 자격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공적인 출세나 풍요로 정착한 사람만 감사할 수 있다면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말씀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감사는 모든 인간의 공동성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누구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열심히 얻고자 하는 목표물이 금덩어리라고 합시다. 베드로전서 1장에 뭐라고 그럽니까?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믿음이라.” 캘리포니아에 이민온 목사님 가족이 이민 목회를 했는데 교회가 잘 안 됩니다. 교인도 늘지 않고 교인들끼리 싸움을 하고 그 책임이 목사한테 오고, 10년을 고생했는데 열매가 없어요. 도저히 안 되니까 어느 날 사모님과 아이들이 아빠인 목사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아빠가 한국에서는 목회를 잘하셨는데 풍토가 다른가 봐요. 이민자들과는 아빠의 목회 스타일이 안 맞는 거예요. 그러면 돌아가시든가 아니면 목회를 접으시고 다른 일을 하셔야 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목사가 양보를 했습니다. 왜? 안되니까요. “좋아. 그렇게 하자. 내가 그만 두겠다. 그러면 뭘 하냐? 생계를 위해서 장사해 보자.” 가장 적은 자본으로 양말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잘되는지 모릅니다. 매일 돈이 들어오는데 교회에서는 돈이 안 들어오다가 장사하니까 돈이 막 들어오니 가게 하나 내고 또 하나 내고 세 개 내고 명품 사 입고 고급 자동차 사고 좋은 주택 사고…. “이야! 신난다!” 가족들이 너무 좋아하고 친구 목사들도 “저 친구 어떻게 저렇게 부자가 된 거야? 벤츠 타고 다니다니….” 어느 날 아침 그 목사가 자기 친구 목사에게 전화를 해서 “친구야! 나는 지금 내 생애 가장 불행한 시간을 살고 있다.” “왜 그래?” “목사가 예배드릴 데가 없어.” “그게 무슨 소리야?” “목회는 그만 두었어도 내가 예배는 드려야 될 거 아니야? 미국 교회 갔더니 아무 소리도 못 알아듣겠고 조그만 한인 교회를 가니까 목사님들이 나를 다 알아보잖아? ‘목사님 여기 왜 오셨어요?’ 날마다 물어보니까 미안해서 갈 수가 없어. 주일날이 제일 고민스러워. 목사가 예배드리러 갈 데가 없으니 나 어떻게 살란 말이야?” 나중에 그 사람은 호텔 경영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 호텔에서 목회자 세미나를 해서 제가 강사로 갔습니다. 수백 명 놓고 호텔을 빌려서 하는 겁니다. 그 호텔 주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습니다. 저는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끝나고 나서 그 호텔 주인이 나에게 자기를 밝히면서 “목사님! 부탁이 있습니다. 나 목사님 교회의 부목사로 데리고 가면 안 됩니까? 진심입니다. 제발 나를 데려가 주세요. 그리고 제가 목회할 수 있게, 옛날로 돌아갈 수 있도록 목사님, 날 좀 도와주세요.” 와서 마구 눈물 흘리며 사정을 했습니다. 일에 분주한 마르다가 자기를 도와주지 아니하고 예수님 설교만 듣고 앉아있는 얌체 같은 마리아를 보고 불만 섞인 질투를 했습니다. 주님이 뭐라고 하셨죠? “마리아는 좋은 선택을 했다. 너 그거 다 안 해도 괜찮아. 너도 와서 들어라.” 그러셨잖아요? 이것이 주님의 가치관입니다. 우리 영적인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적인 무엇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는 믿음! 그런 사람이 감사 생활도 하는 겁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될 이유는 누구나 다 아직 잃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딜 로빈슨 씨가 다이제스트 잡지에 자신의 간증을 실어서 미국 목사들이 다 읽었습니다. 트럭 운전사로 일했거든요? 사고가 났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장애인이 되어 3개월 동안 병원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살아났거든요? 그래서 간증을 한 겁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잃어버린 3개월 동안 일평생 얻은 것보다 더 귀한 삶의 진리를 얻었다. 감사란 잃어버린 자만이 할 수 있는 보화다. 나는 평생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내 생애를 바치겠다.” 그리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오늘 이렇게 건강하게 교회 나오신 여러분과 저는 얼마나 감사 생활을 열심히 해야 되겠습니까? 감사는 발견하는 보화, 아직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있는, 잃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을 발견한 사람들이 하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 “맥추절을 지키라. 추수감사절을 지키라. 방법론에 있어서 첫 번째 곡식 수확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 그러면 이 말씀을 우리가 의미적으로 평가해 볼 때 하나님이 물질을 좋아하시는가? 아니면 필요하신가? 둘 다 아닙니다. 왜 드리라고 하는가? 여기에 신학적 해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할 때 계약적 관계라고 말을 합니다. 언약의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 인간과 하나님이 무슨 계약을 했는가? 하나님은 인간이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모든 물질과 시간을 주셨습니다. 창세기에 보세요. 제일 먼저 나오는 말이 천지만물을 다 창조하시고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노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모두 주셨잖아요? “너 가져라.” 그런데 다 주셨으면서도 하나는 찾으십니다. “받은 것 중에 일부는 네가 가져와야 된다.” 우리 시간을 보세요. 일주일동안 우리가 뭐든지 할 수 있잖아요? 여행가지 말라고 하나님이 말리십니까? 친구와 밤새워 논다고 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마음대로 해라. 시간은 마음대로 결정해서 써라.” 마음대로 쓰잖아요? “그러나 안식일은 나한테 와야 돼!” 이것이 계약입니다. 주시고 하나를 요청하십니다. 물질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잖아요? 우리가 다 쓰잖아요? 우리가 열심히 돈 벌어서 집 산다고 하나님이 사지 말라고 하십니까? 우리가 좋은 자동차를 사려고 할 때 하나님이 사지 말라고 하십니까? “네가 마음대로 결정해라. 네가 필요한대로 해라. 그러나 하나는 가져와야 돼. 내가 준 것 중에서 십일조는 내 것이다. 만약 이 계약을 깨뜨릴 때는 도적의 개념이라. 너희는 내가 다 주는데 왜 하나마저 도적질 하느냐? 그러면 나도 네 것을 뺏겠다.” 믿음이 없어서 십일조도 못하고 예수 믿은 지가 벌써 평생인데도 그러며 살 겁니까? 한번 해보세요. 절대 손해 안 납니다. 물질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 다음에 11월은 이런 것을 많이 생각하는 추수감사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 “사람들이 수확이 생길 때 마음이 변하기 전에 첫 번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 이렇게 명령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뭐든지 수입이 생기면 먼저 십일조부터 떼는 사람은 그래서 그런 것입니다. ‘첫 번 것을 하나님께 먼저 드리고 나서!’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며 사는 겁니다. 그래서 첫 열매를 드리라고 한 겁니다.
어떤 남자가 심장병으로 고생을 해서 병원에 입원을 했어요. 이제는 회복 가능성이 전혀 없어요.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부인은 너무나도 가난하고 돈도 없고 병원비도 없고 먹고 살기도 힘들고 거기다 남편마저 죽으면 어떻게 사나 걱정하는데 시장에 갔다가 우연히 로또를 보고 ‘이거 하나 사보자.’ 로또를 샀더니 이게 당첨이 되어서 벼락부자가 되어 수백만 달러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이런 사람이 얼마든지 있잖아요? 너무 기뻤는데 문제는 이 소식을 남편에게 말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왜냐하면 남편이 쇼크를 받을까봐서 입니다. 남편이 심장병으로 가물가물한테 이 소리를 듣자마자 죽을까봐 입니다. 그렇잖아요? ‘이거 어떻게 하나? 알려주고 싶지만 그러다가 쇼크 받아 죽으면 나 때문에 죽는 것인데….’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사실대로 이야기 했습니다. “목사님, 이것을 알려야 되겠습니까?” 목사님이 막 야단치시는 겁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무슨 돈 때문에 쇼크 받아 죽다니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얘기하십시오. 괜찮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 오히려 더 좋아하고 병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고민이라고, 괜찮습니다. 가서 이야기하십시오.” 막 목사님이 야단치셨습니다. “예수 믿는 집사가 무슨 돈 때문에 쇼크 받아 죽는다니 무슨 미친 소리예요? 가서 말씀하세요.” “그러면 목사님이 나와 같이 가주세요.” “좋아요! 같이 가지요.” 그래서 함께 갔습니다. 부인이 망설이는데 목사님이 “빨리 얘기하세요. 괜찮습니다.” 그래서 부인이 조심스럽게 사실대로 이야기했더니 그 남편은 하나도 놀라지 않는 겁니다. “보세요! 뭐가 놀랍니까?” 남편은 편안하게 “그런 적이 있었습니까? 참 다행이네요. 하나님이 축복해주셨네요. 내가 아파서 돈을 못 버니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아주 편안하게 말합니다. “보세요! 무슨 쇼크입니까? 쓸데없는 걱정하고는….” “그러면 이 많은 돈을 어디다 쓰면 좋겠어요?” “그래요? 그러면 결정권을 나한테 주는 거예요?” “그래요. 당신이 결정하는 대로 내가 쓸게요.” “나는 그 돈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없어요. 나에게 결정권을 준다면 하나님이 주신 거니까 50퍼센트는 당신이 쓰세요. 하나님이 주시면 누리면 되는 겁니다. 마음대로 쓰세요. 50퍼센트는 당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그냥 주신 것이요. 하나님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니 50퍼센트는 하나님의 선한 사업에 쓰세요. 그러나 당신의 지혜로 그럴 능력이 없으니 50퍼센트는 목사님께 드리시오. 목사님이 알아서 선한 사업에 잘 쓰실 테니 그렇게 결정합시다.” “아, 그럽시다.” 그러자 그 소리를 옆에서 들은 목사가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었답니다.
물질은 관리할 줄 아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소식은 많지만 대한민국은 올해 태풍도 한번 불어오지 않고 황금물결이 되어 일 년 동안 먹을 양식이 넉넉해진, 창고가 넘치도록 쏟아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감사의 달을 감사하며 보내야 합니다. 여러분, 물질 문제에 있어서만은 이것이 손해가 나는지 결단해서 한번 해보세요. 하나님의 축복 약속이 들어있습니다. 이 풍만한 가을철에 모두의 가정이 풍요해 지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옛날 왜 하나님은 이렇게 추수감사절을 첫 곡식으로 드리라고 말씀하셨는가 그 영적 의미를 잘 깨닫고 물질 문제가 시험이 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날마다 즐거움이 되고 기다림이 되는 은혜를 내려 주사, 성도들 가정이 다 하나님께 축복받아 이 황금물결이 이는 가을철과 같이 성도들의 가정도 축복이 넘칠 수 있게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30.제목 : 믿음, 감사 그리고 행복
본문:히브리서 13:10-16
2007년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1년 동안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복이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상하신 몸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여 떡을 떼고 잔을 드시는 여러분에게 구원의 확신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떻게 하면 생명을 부지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삶의 질을 생각할 여지가 없습니다. 소말리아나 북한에서 무엇을 먹을까? 그것을 생각하며 고픈 배를 움켜쥐고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행복하십니까? 하고 묻는 것은 그들을 너무 아프게 하는 가혹하고 잔인한 고문과도 같은 것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
지상에서 숨 쉬는 모든 사람은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삶의 질을 생각하고, 행복추구권을 주장하며 웰빙을 말하는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돈 쓸 곳을 궁리하다가 좀 더 예뻐지고 싶어서 얼굴을 고치고 주름살을 제거하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 사람만 아니면 더욱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생각 끝에 쉽게 이혼해 버리는 그런 세상이기도 합니다. 몸이 망가진다하여 아이를 낳지 않는 그런 세상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런 일들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고 조건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쯤에서 행복을 추구하며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난 그 분에게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장에서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보다는 불행하다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행복의 길을 찾고 행복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으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습니다.
과연 땅에서 사람은 행복할 수 있는가? 있다면 행복한 삶의 비결은 무엇일까? 감사절 아침에 주님의 성찬 상 앞에서 이것을 생각해보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핵심내용
히브리서는 구약성경을 잘 아는 히브리인 곧 유대인 가운데서 예수를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으나 여전히 의문에 빠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가지고 있던 유대교의 어두운 그림자가 그들의 심령을 점령하고 족쇄를 채우고 있기 때문에 율법의 정죄와 죽음의 공포에서 헤어나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입장에 서있기 때문에 심령에 참 평안과 기쁨이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흔들림이 없는 분명한 믿음을 갖도록 도움을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 목적을 가지고 기록한 책이 바로 히브리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히브리서는 구약을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구약 적입니다. 히브리서를 읽을 독자가 구약의 전통과 율법에 익숙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오랜 세월동안 율법으로 길들여졌기 때문에 복음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율법과 복음을 비교해서 보여줌으로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것을 스스로 알고 믿게 할 목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히브리서의 핵심은 입니다. 왜 그렇게 썼는가하면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히브리 사람들에게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고 완전하시다. 그러니 더 이상은 두려워하거나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옛적부터 여러 모양, 여러 부분으로 말씀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선지자와도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하신 선지자로 오셔서 볼 수 없으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천사들보다 월등하신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 탁월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어떤 제사장보다도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강조하고 역설해서 확신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의 일군으로서 일한 사람인데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집의 아들로서 집주인으로서 일하신 권위와 영광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아론의 반차를 좇아 태어나서 짐승의 피로 성소에서 제사했으며 그 제사는 죽을 때까지 반복해서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아론의 반차가 아닌 살렘 왕이요, 평강의 왕이신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대 제사장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드린 제사
예수 그리스도는 짐승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로서 제사했으며 반복해서 드리는 불완전한 제사가 아니라 단 한 번으로 모든 제사를 완결하셨으며 성소가 아니라 영문 밖에서 십자가 위에서 짐승의 피를 뿌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피
흘려 제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기만 하면 다시는 제사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제사는 과연 누구를 위한 제사였습니까? 나를 위한 제사였습니다. 여러분을 위한 제사였습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속죄의 제사였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읽은 본문에 \"우리에게 제단이 있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제단은 구약 성도들이 제사 드리던 그 제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제단과는 전혀 다른 제단이 우리들에게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표 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구약 제사들의 실체입니다.
그의 몸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라고 했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영원한 속죄를 위하여 드려진 그 몸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 몸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직접 그리고 단 번에 드려졌으며 그 제사는 죄 값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하게 채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실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8:1에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제 하는 이 말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중요한 그 말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입니까? 믿는 우리들에게는 대제사장 한 분이 계시다는 그 말입니다. 이것을 알고 믿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제사장의 할 일이 없어졌기 때문에 제사장들이 없어졌는데 오히려 우리에게는 대제사장이 있다는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4:15-16에 \"우리들에게 있는 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않으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신 분\"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 계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이 아직은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아직은 가야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행복을 추구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때를 따라 주시는 은혜가 있어야합니다. 이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영원한 제사장으로 살아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먹과 같이 검고 주홍처럼 붉은 죄를 단 번에 용서하신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 있었습니다. 이 피를 의지하여 은혜의 보좌요 제단을 향하여 나아가서 우리가 항상 드릴 세 가지 제사가 있습니다.
감사와 항상 드릴 세 가지 제사(10-16절)
10절에 “우리에게 제단이 있다.”고 했습니다. 제단이 있다는 말은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제단은 유대인들이 제사하는 그런 제단이 아니듯이 우리가 드릴 제사역시 유대인들이 드리는 염소나 황소의 피 제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제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그 제단에 전혀 새로운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양이나 소를 잡아 드리는 속죄의 제사보다도 더 온전하고 신령한 제사요 진정으로 드리는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첫째 헌신의 제사입니다.
13절에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서 우리들의 헌신의 제사를 드리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들의 몸으로 드리는 산제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피로써 우리들을 거룩하게 하려고 능욕의 십자가를 지시고, 성문 밖, 골고다에서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들도 우리의 십자가를 달게 지고, 예수님의 십자가 있는 곳, 성문 밖으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아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로서 이제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 거룩한 제사, 산제사를 드려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속죄함을 받은 자로서 마땅한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제사는 우리의 몸으로 드리는 산제사입니다. 우리의 전 생애를 하나님께 드려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은혜를 아는 자로서 마땅히 드려야하는 제사입니다.
둘째 찬미의 제사입니다.
15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아 멘!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드리신 속죄제사가 있기 때문에 다시는 속죄의 제사를 드릴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지만 우리가 드릴 마땅한 제사가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갚을 길이 있습니까? 부모의 은혜도 깊고 크고 높아서 도무지 갚을 길이 없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우리 위해서 내어 놓으신 사랑,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이루신 속죄의 은혜.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을 삼아 쓴다 해도 다 기록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늘 울어도 갚을 길이 없는 은혜입니다. 필설로는 형용할 수 없는 큰 은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입술과 마음과 뜻을 모아서 감사드리는 것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엡 5:19절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의무입니다. 그뿐 아니라 놀라운 은혜요 축복이며 특권입니다. 이 찬미의 제사는 단지 예배 시간에 한 순서로서 드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 삶이 찬미요 찬송이어야 합니다.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음에서 터져 나오는 찬양이요 감사일 때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선행의 제사입니다.
16절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아 맨!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마음으로 감사하고 입술로 찬양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단지 마음으로만 감사하고 입술의 찬양으로 그친다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자 않습니다. 우리들이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면 그 복음에 합당한 행실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입니다.
오늘 믿는다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과 기도를 하며, 예배를 드리지만, 나가서는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이것이 큰문제입니다. 불신자나 우리나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생활에 전혀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다면 그런 사람의 찬미를 받으시며 그런 사람의 감사를 고마워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변화된 삶을 통해서 영광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헌신의 제사를 드리고, 또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찬양의 제사를 드렸다고 해서 이것으로 다 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제사가 있습니다. 그 제사를 요구하십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중심의 선한 행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십니다. 모든 현실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선한 생각과 선한 행실을 가질 때 하나님은 그것을 제사처럼 기쁘게 받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전에는 사건을 만날 때 마다 자기를 먼저 생각하고 자기중심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 확 바뀌어서 모든 현실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나아가려는 그것이 선한 행실입니다. 이전에는 자신만을 생각하고, 살던 사람이 자기의 가진 것으로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여 나누어주고 베풀어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선행의 제사입니다.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을 때 비로소 우리의 심령에는 기쁨이 넘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최고로 행복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인생 최고의 행복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행복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제단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제사장이심을 믿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의심하지 말고 구원 받은 사실을 믿고 간증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하는 심령에 기쁨이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 또 다른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
은혜를 받고 복을 받은 사람으로서 헌신의 제사와 찬미의 제사와 선행의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서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나의 잔이 넘친다고 나는 행복자라고 간증하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