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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
성령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할뿐만 아니라 성령의 은사들을 가지고 말씀을 전파하며 교회에 덕을 세우고 봉사의 일을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소개하는 성령의 은사는 다음과 같은 개념범주를 갖는다.
성령의 은사에 대한 개론
1) 성령의 은사들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으로서 선물의 성격을 갖는다. (성령의 은사들을 표시하는 카리스마타는 카리스마의 복수형으로 \"은혜의 각양선물들\"을 의미한다.) 성령에 충만한 기독교인들이 다른 사람에게도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줄 수 있다(참조. 롬 1:11). 그럴 경우에도 성령의 은사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주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자기 뜻대로 주시는 것이다. 그 사람은 도구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2) 성령의 은사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다. 모든 기독교인에게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의 은사가 주어진다. 모든 기독교인은 다 똑같은 은사를 받은 것은 아니며 또 어느 누구도 모든 은사를 다 가지려고 기대해서도 안된다. 3) 모든 은사는 유익이나 가치를 자아내기 위해서 주어진다(참조. 고전 12:7). 즉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기독교 공동체의 유익을 위함이다. 상이한 은사를 받은 사람은 종말론적인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 이 몸을 이루는 구성원들은 이 종말론적인 존재 안에서 각기 그들의 위치를 지니고 있으며 서로 조화를 이루며 서로 봉사하며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4) 성령의 은사는 그것이 아무리 순수하고 굉장한 것이라도 영적 성숙의 정도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고린도교인들처럼 성숙치 못한 그리스도인들, 심지어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도 은사에 관한한 탁월할 수 있다(참조. 고전 1:7; 3:1-3).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된다. 5) 성령의 은사는 최고의 은사이며 동시에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지반으로 해서 나타나야 한다. 사랑이 없는 은사는 무익하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신령한 은사를 대신하는 대치물은 아니다. 그것은 신령한 은사 위에 덧붙여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사를 가진 그리스도인은 \"제일 좋``은 길\"인 사랑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고전 14:1a). 6) 성령의 은사에는 귀천이 없다. 은사는 선물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것을 자기의 것처럼 자랑해서는 안되며, 자신의 선물이 다른 사람의 선물보다 더 영적이라고 말해서도 안된다. 또 다른 교인이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고 해도 그를 시기하거나 불쾌하게 여겨서도 안된다. 그리고 어떤 교인들에게 이같은 은사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서 다른 교인이 그를 멸시해서도 안된다. 그가 고통스러워한다면, 그만이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를 멸시한 자신을 포함해서 교회 전체가 고통받게 된다. 모든 교인은 하나님께서 모두의 유익을 위해 한 사람에게 부여하신, 다시 말하자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집단 전체에게 부여해준 은사 안에서 함께 즐거워해야 한다.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과 기쁨에의 한 운명공동체로 결합된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다. 7) 성령의 은사는 모두 다 귀중한 것이다. 은사를 무시하는 자는 하나님과 성령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자이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그와 같은 일을 행하지 않는다. 기독인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주어진 성령의 은사를 잘 사용해야 할뿐만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해야 한다(고전 14:12b). 성령의 은사가 풍성하게 되면 그것은 한층 더 유용한 것이 될 것이다. 기독교인은 이 은사를 잘 사용하여 이러한 도움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도움으로 경험되도록 해야 한다. 8) 성령의 은사는 다양하다(참조. 고전 12:5-6): 은사도 여러 가지 이고, 직임(봉사)도 여러 가지 이고, 역사(능력행사)도 여러 가지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동일한 성령, 동일한 주, 동일한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이와 같이 은사는 다양하지만 동일한 하나님 안에 그 뿌리를 갖고서 서로 연결되며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9) 성령의 은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아홉 가지 은사보다 더 많은데 이 은사들을 크게 나누면 말씀과 관련된 은사, 믿음과 관련된 은사, 봉사와 관련된 은사, 교회의 일에 관련된 은사, 자신과 관련된 은사들이 있다. 10) 바울서신에서 은사에 대한 보도는 세 군데 있다(고전 12:8-10; 28-31; 롬 12:6-8). 고전 12: 8-10절에서 우리가 잘 아는 9가지 은사들이 소개된다. 그리고 27-31절에서도 성령의 은사자들과 은사들이 언급된다. 이 은사 목록들과는 다르게 바울은 롬 12:6-8에서도 은사들을 정돈하여 그 목록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을 목록으로 만들어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설명
고전 12:8-10에 나오는 은사 목록이 유명하기 때문에 이것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그 다음에 고전 12:27-31과 롬 6:8-10에 나오는 은사목록들 가운데 맨 앞의 목록에서 다루지 않은 것들만을 설명하겠다. 성령은 인간을 살려서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고 인격적 교제를 가능케 하는 인격적인 능력이다. 그런고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대한 의사소통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일차적인 사역이 말씀과 관련된 사역이다. 이 은사가 교회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봉사를 한다. 이런 활동에 의해 교회가 세워진다. 이 사역을 위해서 기독인을 깨우치는 말씀과 관계하는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이 은사로 주어진다.
-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 - 이 두 가지 은사를 정확하게 구별하기는 쉽지가 않다. 확정할 수 있는 것은 이 두 은사는 계시적 은사로서 다음처럼 교회 공동체의 삶에 커다란 기여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은 공동체 사건 안으로 개입하여 사람이 스스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공동체의 의사소통에 깊은 통로를 열어준다. 이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어렵고 위태한 상황을 위해서 주어진다. 이 은사가 주어진 은사자는 문제의 요점을 정확하게 맞추어 그 난제를 해결케 한다. 그때 이 은사자는 자기에게서 나가는 것에 대해 그의 청중처럼 똑같이 놀란다. 그는 그가 항상 마음대로 소환할 수 있는 지속적인 지혜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새로운 상황에서 그에게 부여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만약에 우리가 이 두 가지를 구별하길 원한다면, 다음처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혜는 그리스도께서 해명해 주시고 교회의 선포와 고백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뜻을 표시하기 때문에 지혜의 말씀은 계시를 통하여 드러난 진리를 일반적인 삶의 상황에 효과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도록 깨우쳐 주시는 권면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지식의 말씀은 신자들의 신앙을 심화시킬 목적으로 기독교적 진리, 즉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그리스도의 사역, 죽음과 부활에 의한 구원발생 그리고 신자들에 대한 구원수여 등에 대한 해명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믿음 - 믿음은 바울에게서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우선 믿음은 구원의 소식을 받아들임이다. 이 믿음은 모든 기독인들에게 있다. 은사로서의 \"믿음\"은 모든 기독인이 갖고 있는 그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믿음은 어떤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 바울서신에서 \"신뢰의 믿음\" 혹은 \"기적 믿음\"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그 믿음이다(고전 12,9; 롬 4, 18이하; 12,3; 고전 13,2). 이것은 삶의 한복판에서 불가능한 것이 전능한 하나님의 개입을 통해 가능해진다고 생각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개입은 인간이 완전히 절망적으로 내던져진 부정적인 인과고리들을 폭파시켜버리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그러므로 믿음의 은사는 수많은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다. 이 은사로 무장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초자연적인 신뢰를 가지고 교회 안에서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신앙의 일치를 유지하는 데에 기여한다.
- 병 고치는 은사 - \"병 고치는 은사\"는 의술의 결과가 아니라, 신령한 능력에 의해 병을 고치는 것을 말한다. 이 은사는 모든 기독교인들은 치료하고 구원하는 성령의 능력에 참여하며, 특별한 믿음과 신뢰가 충만한 기도가 기적적인 것을 가능케 하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이름으로 병을 고쳐서 건강하게 만드는 권세를 주신다는 초대교회의 근본경험과 관계가 있다. 병 고치는 은사를 소유한 사람은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병을 고치는 것이 항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참조. 고후 12:8-9). 그러나 그는 그런 놀라운 일을 행하기에 적합한 환경에서는 신유의 도구가 되었다. 병 고치는 활동은 우선 중요한 예수님의 사역에 속했다. 이 활동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예수의 메시지에 결부되었고 이 나라를 현재적으로 유효하게 했다. 그에게 있어서 말씀 선포와 치유행위는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전해주어야만 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내적으로 새롭게 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 은혜는 인간의 육체도 함께 포함한다. 부활절 이후의 공동체에 있어서도 이러한 치유활동은 계속된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질병을 달가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의 모범을 본받아 하나님의 성령과 전권으로 무장해서, 공동체 안에서 질병을 치유했다. 이 병 고치는 은사의 출현은 강한 신뢰 신앙이 특징적인 무리들, 즉 자신이 사실적으로 질병의 승리자로 나타나리라는 하나님께 대한 기대의 태도가 특징적인 무리들 안에서만 전적으로 가능하다. 바울은 병 고치는 은사들이란 복수를 선택한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질병의 치유는 어떤 유일적인 기회가 아니라 특수한 경우를 위한 특별한 은사들이기 때문이다.
- 능력 행함 -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능력 행함\"에 관한 은사가 있다. 능력 행함은 믿음과 병고치는 은사와 같은 범주에 속한다. 능력 행함은 병을 고치는 것보다 그 범위가 넓은 반면에 (병을 고치는 것은 단지 능력의 한 가지 형태에 불과하다) 믿음만큼 광범위하지는 못하다. 바울은 이 능력을 복수로 사용한다. 그는 그것을 통하여 능력 행함이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이 용어로 그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생각했는지 확정하기는 어렵다. 분명히 바울은 능력 행함 아래에서 병고침을 생각한다. 역시 질병의 치유자도 하나의 \"기적행사자\"이기 때문이다. \"능력 행함의 기적적인 능력\"이 주어진 자는 역시 치유자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나아가 성령에 의해 다른 방법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아마도 귀신 축출, 자연 기적들, 죽은 자를 다시 살림, 소경이 되게 한 것 등등). 그래서 질병치유의 기적(이것이 대체로 가장 중요한 기적임)을 위한 \"병 고치는 은사\" 개념 곁에 기적 능력으로의 무장을 위한 개념이 바울에 의해서 발견되어졌음에 틀림이 없다.
- 예언 - \"예언\"(프로페티아)은 은사들 가운데 가장 오해를 많이 받고 있는 은사이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예언이라고 하면 미래의 일을 예고한다든가, 예견한다든가, 알아 맞추는 일처럼 생각하기 쉽다. 물론 그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언은 미래의 일을 예고하는 것 이상의 깊은 의미가 있다. 이 말이 1세기에서 사용될 때 그것은 메시지를 선포한다거나 신들의 신탁을 해석하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그 말을 쓸 때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독교의 진리를 전파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 예언에 대한 정의는 고전 14장에서 발견된다. 가장 중요한 정보는 3절에서 제공된다: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교훈, 권고와 위로(관주성경에는 덕, 권면, 안위이다)를 말한다\". 주목할 것은 거기서 권고(파라블레시스)란 말이다. 이 말은 원어에서 더 많은 의미, 즉 일깨움(각성), 장려(격려, 위로)를 내포한다. 그것은 올바른 길을 지시하고 죄로부터 자유케 하는 행위인 새로운 삶에로의 가능성에 대한 장려를 뜻한다. 그러므로 권고를 포함하는 예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의 표현이 된다. 예언에 있어서 그 대상에는 개인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체공동체가 중요하다. 예언자를 통하여 그들에게 교화가 주어진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아서 예언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공동체에게 그들의 나아갈 길에 대하여 지시한다. 예언이 없이는 어떤 올바른 방향성도 없다. 예언은 설교와 동시에 계시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한 하나님의 통보이며 회개에로의 경고와 권면이며 핍박받는 교회에 대한 위로와 약속으로서 \"공동체 집회에서 가장 순전한 영의 표현\"이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자이다. 그는 예언의 말씀을 통하여 죄인을 성령과 대면케 하고 공동체와 개별신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며 하나님 앞에서 지기인식을 하도록 돕는다. 이 예언적 말씀의 구체적인 성격은 항상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의 독특성은 그것이 가르침과 비교될 때 특별히 분명해진다. 가르침에서는 보존, 전달과 전통의 해석이 중요하다. 그 반면에 예언적 선포에서는 하나님의 지시 사항을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시간에 공동체에게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예언은, 바울의 이해에 따르면, 미래의 어떤 예견이나 예고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길을 잘 되게 하길 원한다. 그것은 미래에서 좋은 것으로 나타날 거기에로 결단을 불러일으키길 원한다. 그것은 어떤 결정이 미래를 가로막고 있고 어떤 결정이 미래를 열어 놓고 있는지를 안다. 그러나 예언적인 말씀은 사랑 안에서 일어나는 안내하는 그리고 친근한 말씀이며 새로운 태도의 가능성들에로의 권고이다. 현대적으로 표현하자면, 예언적인 말씀은 \'자기 발견\'과 \'자기 정체성의 확립\'을 위해 다른 사람을 돕는 말이다. 예언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점점 더 인간을 아는 자가 된다. 그는 인간의 마음의 갈피 못잡음(과실)을 통찰하고 그리고 조심스럽게 방황과 절망에서 길을 보여줄 수 있도록 명석하게 된다. 만약에 공동체가 이런 방법으로 불신자들과 교류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면, 그들은 실로 불신자들이 \'하나님이 사실로 여러분 가운데 계십니다\'(참조. 고전 14:25)라고 고백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 영들의 분별 - 초대 기독교는 항상 되풀이되어 거짓 선지자들과 사기꾼들에 의해 내습 당해 왔다. 그들은 첫눈에 복음의 진지한 선포자들과 구별될 수 없었다. 영들을 분별하여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복음의 변질을 막는 것이 교회의 과제 중에 하나가 되었다. \"영들의 분별\"의 은사는 참 복음과 거짓 복음에 대한 구별이 교리와 신학적으로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시기에 많이 주어졌다. 이 영분별의 은사는 교리와 신학이 점점 체계적이 될수록 상대적으로 감소되어 갔다. 이 은사가 어떻게 변모해 가는지는 마 7: 15-23과 디다케 11장이 잘 묘사해주고 있다. 마 7:15-23에서는 거짓선지자들의 구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삶의 열매라고 강조하고 있다. 신자들은 삶의 열매로 선지자들이 참된지 거짓된지 판단해야 한다. 디다케 11장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너희에게로 오는 모든 사도는 하루만 머물러야 한다. 만약 필요하다면 이틀만! 그가 그러나 3일 머무른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이다. 그 사도가 계속 나아간다면 그는 밤을 보낼 때까지 빵 외에는 아무 것도 얻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이다 ... . 영으로 말하는 자 모두가 선지자는 아니다. 그의 삶의 방법이 주를 따를 때에만 선지자다. 삶의 방법에서 너희는 한 사람이 진짜 선지자인지를 파악해야만 한다 ... . 진리를 가르치는 모든 선지자가 만약 그가 자기가 가르치는 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이다.\" 마 7:15-23과 디다케 11장에서 말하고 있는 기독교인은 분명히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영감을 통해 특정 인물들과 그들의 사역에 대한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대신에 이제 이성적인 숙고를 통해 얻은 범주들에 의해 판단을 하려고 한다. 이것은 이미 기독교 2세대와 3세대에서 영분별 은사와 그 은사에 대한 지식이 적어도 상당히 상실되어졌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바울의 시대의 공동체에서 영들의 분별에 능력이 있는 자는 공동체를 위해 위험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아가는지(혹은 여행하는 선포자로부터인지 공동체 회원 자체로부터인지)에 대한 초자연적인 \"후각 능력\"을 갖는다. 그리고 그는 이 인식 능력으로 해당하는 사람을 면책하고 그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폭로 할 수 있었다.
- 방언 - 고전 14, 1-25에서 바울은 방언을 자세히 다루나 우리에겐 방언이 도대체 무엇인지 충분할 정도로 분명하지 않다. 방언의 자세한 정의를 위해서 종교사적인 유비가 필요하다. 우선 구약적인 유비인 이사야 28, 7-13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입술 더듬음이 보도된다. 그리고 그리이스와 헬라적 종교성의 영역에서 유비가 있는데 그것은 황홀경적-더듬는 말이다. 이러한 유비가 방언을 정확하게 규명해 주지는 못하지만 종교사적 비교가 우리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것이다: 의미론적인 언어 영역 없는 말은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진술 가능성들의 저편에서 보통 인간의 말하는 것의 범위 안으로 뛰어오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이것을 역시 고전 14장 자체에서 경험한다. 방언은 분명히 의미론적 언어 영역이 빠져있는 그러나 표현적이고 소리내어 부르짖는 언어 영역이 보존되는 일종의 준언어이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방언은 음성의 흐름이다. 그것은 듣는 자나 말하는 자에게 이해되지 않는다(음성적 요소에 어떤 특정한 내용이 부가되지 않았다는 의미에 있어서) 그것은 표현의 성격과 부르짖음의 성격을 갖는다(그것을 통해서 방언은 대개 의미가 충만한 것으로 느껴진다). 방언을 통하여 의식의 감독 기관을 지나서 고유하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말해지며 그러한 원시적인 감정이 표현되어질 수 있다(인간이 하나님과 대면하여). 이 기쁨은 보통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발음 가능성의 저편에 놓여있다. 이 발음 가능성은 보통의 의사소통 안에서 주제화 될 수 없다. 방언에 대한 중요한 언급이 14:28절에 나온다. 여기서 만약에 방언 통역자가 없으면 방언하는 자는 교회의 집회 때 조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 경우에 홀로 하나님께 말해야 한다. 바울은 공공적인 방언과 사적이고 개인적인 방언을 구별한다. 공공적인 방언은 매우 절제되어서 나타나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령의 은사의 개인적인 사용은 자물쇠를 잠그면 안된다. 바울은 방언하는 자는 자신을 교화한다(4절)는 것을 안다. 그리고 개인적 방언을 통하여 자신을 교화하는 가능성에 의해서 신자는 방해받지 않은 채 사용해야 한다. \"교화하다\"의 개념은 여기서 인격의 본질적인 세움을 표시한다. 방언은 심리 위생적 기능을 채우고 영적인 심층에 만족할만한 영향을 준다. 바울은 이 관계를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방언의 개인적 사용을 제한하지 않았으나 매우 조심한다. 그 자신은 홀로 종종 그리고 철저히 방언의 은사를 실행한다.
- 방언들의 해석 - 방언 해석의 은사에 어떤 과제가 떨어지나? 이 통역자는 방언을 보통 언어로 번역한다. 이 가설에 대한 유비는 꿈해석이다. 심층심리학적 견해에 따르면 꿈에서 무의식적인 것이 말로 된다. 그의 상징 언어 안에서 의식의 감독기관을 지나 표현된다. 꿈해석자(심리치료자)는 이 상징언어를 의식에 이해되도록 만든다. 그것과 비슷하게 방언의 해석은 진행된다. 고전 12:28-30절의 은사 가진 자들과 은사들 이 목록은 8-10절의 목록과 일치하는 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 동일한 장에서 바울은 두 개의 다른 은사적 능력들을 열거한다. 이것은 바울이 은사적인 현상들을 정돈하고 분류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공동체 안에 성령의 충만한 표시가 있다. 8-10절의 첫 번째 목록에선 예언의 은사가 이야기되는 반면에 두 번째 목록 28-30절에선 예언의 은사를 가진 자가 언급되는 것이 현저히 눈에 뜨인다. 예언과 관련해서는 분명히 한 과정이 진행된다. 그것은 때때로 수여되는 은사였다. 그러나 그것은 개별적 은사를 가진 자에게 지속적인 능력으로 머물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두 번째 목록에서 이렇게 은사가 지속적인 능력으로 머문 사람들의 그룹이 언급된다: 그 첫째는 사도이고, 둘째는 예언자이고, 셋째는 교사이다. 세 가지 은사자들을 통한 말씀의 세 가지 활동은 그리스도교의 일차적인 활동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세 집단의 중요성은 문장을 두 번 끊음으로써 강조되고 있다. 그 다음에는 더 이상 순위가 나오지 않고, 은사를 가진 사람들 대신에 은사들이 언급된다. 8-10절의 목록에 대비하여 28-30절의 은사 목록 안에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이 새롭게 덧붙여진다. 여기서는 앞의 첫 목록에 나오지 않는 세 은사자들과 새로 나온 두 가지 은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 사도 - 사도는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자, 또는 복음전파를 위해 그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부활하신 예수를 보는 것이 그들의 필수적인 자격이었다. 그러나 부활을 목격한 자들 모두가 사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특별히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사도라고 일컬음을 받는다. 그들은 예수님의 공생애에 함께 했던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했던 열두 사도들과는 구별되었다. 그들의 일은 그 자체가 종말론적 사건이었다. 그들은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고 그들의 삶 속에서와 교회에 개종자들을 입회시키는 일에 있어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나타내는 종말론적인 복음전도자들이었다.
- 예언자 - 예언자는 예언의 은사를 행한 사람들이었다. 예언의 은사는 위의 해당 항목을 참조하라. 예언자는 순회하는 방랑선교자들이 아니라 지역교회에서 영감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에, 경우에 따라서는 비그리스도교인들에게 전달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도들에게 결합되어 있었고 그들을 도와서 그리스도 복음에 관한 신학을 형성하게 하거나 전개하게 하였다. 그들은 그 때에도 계시와 신앙에 관한 창조적인 통찰들이 주어진 곳에서, 즉 사도들과 예수의 제자들로부터 전달된 복음의 범위 내에서 자기의 메시지, 신학, 지시, 권고, 약속들을 전개해야 했다. 그들도 교회의 신앙고백 안에서 표현된 객관적인 신앙규범을 지켜야 했으며 새로운 구원의 지평을 열거나 새로운 구원의 체계를 만들려고 하지 말았어야 했다.
- 교사들 - 교사들은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의미와 도덕적 내용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들은 한편으로 사도들이 전해준 기독교 복음에 대한 좋은 지식과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이 복음을 교의(敎義)적으로 새롭게 고쳐 써서 이해시킬 수 있는 재능을 소유하였다. 그들의 주요업무는 비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적인 신앙을 소개해서 복음을 받아드리게 하고, 집회 시에 신자들의 신앙을 심화시키며, 어떻게 기독교인으로서 이방세계에서 살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데에 있었다. 그들은 가르침에서 특별히 구약성서의 그리스도교적인 의미를 설명하였던 것 같다. 이 교사들은 교회 안에 있었고, 교회와 함께 살았으며, 교회를 위해서 봉사했다. 그들은 사도 다음으로 공동체에서 복음의 선포와 복음의 교수에 지도자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을 굳게 부여잡고 그것을 조직화하며 발전시켜서 속사도시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다.
- 서로 돕는 은사 - 남을 돕는 직무는 이웃사랑의 계명을 인간관계의 원리로 삼아 그것을 공동체에서 수행하는 일에 해당한다. 남을 돕는 은사를 지속적으로 가진 자는 집사들이었다. 그들의 주된 직무는 교회의 보조로 궁핍한 자들을 박애적이며 기술적이고 조직적으로 돌보는 일이다. 그들은 공평하고 투명하게 이 직무를 수행하여야 한다. 그 때에 잘난 체하지 말고, 권력을 이용하려고 하지 말아야 하며, 사심이 없이 진심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 가난한 자들과 교제할 때 그들의 복지를 염려하는 사랑과 열정 이외에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을 정도의 지혜와 배려가 필요하다. 동시에 직업적인 가난한 자들에 의하여 악용되거나 오용되지 않을 정도의 인간에 대한 깊은 지식과 총명을 겸비해야 한다.
- 다스리는 은사 - 다스리는 은사( )는 행해사, 키잡이 등의 의미를 갖는 말로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다스리는 은사를 가진 사람은 말하자면 교회의 항해사 내지는 운전사에 해당된다. 그러한 은사를 지속적으로 소유한 자는 감독들이었다. 그들의 과제는 교회의 일을 관장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일들은 사도들의 순회 선교활동과는 대조적으로 지역적인 활동이었고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행한 말씀 사역에 비하여 이차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봉사가 없었다면 어떤 교회도 세워지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그들의 임무수행이 없으면 어떤 교회도 장래가 없어 보였을 것이다. 그들의 지도 역할에는 교회의 치리, 예배의 관장, 사목 활동 등이 포함되었다. 그 당시 교회에서는 어떤 공식적인 위계질서가 없었지만 교회가 잘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이러한 은사가 주어진 사람들이 있었다. 롬 12:6-8에 나오는 은사들
- 예언 - 예언은 영감된 설교의 은사이다. 이것의 내용은 교화와 권고와 위로이다. 여기서 예언의 은사는 다음에 나오는 두 가지 은사를 , 즉 가르치는 은사와 권위하는 은사로 전개된다. 예언의 은사에 관하여는 고전 12:6-8의 은사에 대한 설명을 참조하라.
- 섬기는 일 - 섬기는 일은 헬라어로는 디아코니아이다. 이 말은 선포의 봉사를 표시할 수 있고, 더 광범위하게 공동체 안에서 행하는 모든 책임있는 봉사활동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 은사는 여기 목록에서 마지막 세 가지 은사, 즉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로 전개된다. 섬기는 일은 굉장히 중요하고 존귀하다. 왜냐하면 가장 많이 섬기는 자가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친히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7-28). 그러므로 기독인은 이 섬기는 은사가 풍성하기를 구하고 그 은사를 마땅히 활용하여야 한다.
- 가르치는 일 - 가르치는 일은 교회의 업무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에 속한다. 이것은 예언, 즉 영감적인 설교를 통하여 복음을 선포하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것으로서 설교에서 선포된 내용을 상세하게 해설하는 일이다. 이 가르침이 영적인 결실을 얻으려면 이해, 예증, 응용에 있어서 성령으로 말미암는 능력이 요청된다. 가르치는 일은 말에 의해서 뿐만이 아니라, 시범과 인격의 미묘한 감화력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 가르치는 은사가 지속적으로 머무는 사람은 고전 12장의 두 번째 은사목록에서 교사로 지칭되고 있다.
- 권위하는 일 - 헬라어로는 파라클레시스로 \"보혜사\" 파라클레토스와 그 어원을 같이 한다. 이들 단어의 동사는 파라칼레오로서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옆에서 돕는다\", \"돕기 위해서 더불어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단어에서 나온 낱말 권위는 기독교에서 \"신앙을 격려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 권위하는 은사는 예언적 설교의 주요한 범위에 속하는 것으로 패배의 잔을 마신 자, 실망중에 있는 자, 시련을 당한 자, 슬픔을 당한 자들의 신앙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이다. 또한 이 은사는 다른 사람들의 수준을 높여주며, 헌신을 심도있게 해주며, 마음에 품은 의도를 순화하는데 도움을 준다. 오늘날의 세계는 격려와 위로의 은사가 대대적으로 요청되는 시대이다. 다음의 마지막 세가지 은사는 자선적이고 기구적인 종류의 행위로서 섬기는 은사의 일종이다. 이 세가지 은사에 관해서는 각각 사용법이 첨가되어 있다.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해야 한다.
- 구제하는 일 - 자기의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 대한 개인적 차원의 도움을 표시하거나 궁핍한 자에 대한 공동체의 구호물을 나누어 줌을 의미한다. 첫 번째 경우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 두 번째의 경우는 나누어 주는 자는 절대적으로 공정하고 정직해야 한다. 이것은 타인의 필요를 보충 혹은 담당하는 것이며 박애적 정신, 그 이상의 것으로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적 사랑으로 충만된 마음으로 베푸는 것이다. 구제할 때 인색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낌없이 주는 것이 구제의 은사이다. 다른 은사들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구제의 은사를 사모하는 자는 적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란 주님의 말씀과 양과 염소에 관한 심판의 비유에 따라 우리는 구제의 은사를 함양해야 할 것이다.
- 다스리는 일 - 다스리는( ) 은사를 가진 자는 공동체와 가정교회의 감독을 의미한다. 이 은사를 가진 자는 공동체 구성원들을 다스리고 돌보아야 한다. 이 은사에 대하여는 고전 12장의 두 번째 은사목록에 나오는 다스리는 은사( )와 용어는 다르나 의미는 같다. 그곳을 참조하라.
- 긍휼을 베푸는 일 - 긍휼을 베푸는 일은 동정이나 관심, 곧 타인에 대한 관심이다. 그것은 타인의 감정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인데 아마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감정이입과 같은 것이다. 즉 자신을 타인의 입장에 놓고 그 사람의 감정에 동화되어 그를 구체적으로 돕는 희귀하고도 중요한 능력이다. 이 은사는 병자를 간호하고 갇힌 자를 돌보고 주린 자를 도와주는 등의 구제를 포함한다. 이러한 은사로 타인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된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불평없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해야한다. 마리아 테레사가 극명하게 보여준 은사로서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은사로 재발견되었다고 하겠다
예언의 은사
특별 예언 성경 속에는 많은 예언자들의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그 예언들은 이미 이루어진 것도 있고 더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있다. 그런데 그 이루어진 예언은 이미 이루어졌다고 해서 이제는 예언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다. 그 예언들은 아직도 예언으로서의 싱싱한 생명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선지자 나흠이 쓴 나흠서는 니느웨 멸망을 예언한 예언서이다. 그리고 이 예언들은 나느웨가 멸망함으로써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나흠의 이 예언들은 자금도 싱싱하게 살아서 그것을 읽는 우리들의 마음을 두렵게 만든다. 그것은 이 예언들이 고대 니느웨의 멸망 뿐 아니라 현대의 니느웨, 타락하고 죄로 가득한 현대의 도시들의 멸망을 동시에 예언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 속의 예언은 그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예언으로서의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성경 속의 예언은 모든 시대를 통해 예언으로서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예언만을 참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성경 속에서 선지자의 입을 통해 하신 예언만이 참 예언이 아니라. 실은 성경 전체가 다 예언인 것이다. 성경 전체가 다 예언인 것이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특별 예언이라고 말한다. 성경 말씀만이 절대로 변개될 수 없고, 또 반드시 성취되는 절대 예언인 것이다.
보통 예언
성경 말씀만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절대적 참 예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예언도 있다는 것을 일고 있다. 성령의 은사로서의 예언이 그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을 보자.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또 3절에는,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5절에는,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또 24-25절에서는,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다시 39-40절에서는,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씀하신 이 예언은 성령의 은사로서의 예언이다.
예언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구약 성경 66권의 완성을 위해 특별히 성경 기자들에게 주사 기록하게 하신 특별 예언이고, 다른 하나는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성도들에게 주신 성령의 은사로서의 예언, 말하자면 보토 예언이다. 특별 예언은 흠이 없고 온전하다. 그러나 보통 예언은 그것을 받는 사람의 영적 능력이나 그때의 영적 상태에 따라 잘못 받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예언은 그것이 틀리는 겨우도 많이 있는데, 이 점은 예언을 하는 사람이나 또 예언을 듣는 사람 도두가 명심해야 할 일이다. 특별 예언은 성경 기자들에게 특별히 주신 예언이기 때문에 이제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 특별 예언은 임하지 않는다. 이미 성경 66권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성경 66권이라고 하지만, 실은 성경은 70권이다. 시편 전체를 한 권으로 보면 66권이지만, 시편은 모두 5권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성경은 모두 70권인 것이다.) 보통 예언은 성도들의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예언의 은사를 받아 나름대로 예언을 하고 있다. 특별 예언은 성경 안에만 있으며, 또 성경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언을 한다고 할 때에는 성령의 은사로서의 예언 즉 보통 예언을 말하는 것이다.
예언의 종류
예언에는 성경 신구약 66권을 완성을 위해 성경 기자들에게 특별 계시로 주신 특별 예언과 성도들의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은사로 주시는 보통 예언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우리는 예언에 대해 좀 더 알기 위해 이 두 예언을 몇 가지로 나누어 보기로 하자. 먼저 특별 예언을 그 성격에 따라 나누어 본다면, 1) 직접 예언 성경 안에서 직접적인 예언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 가)“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혹은“여호와의 말이니라”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옮긴 것. 나) 예언자 자신의 예언의 형태로 말한 것. 다) 예수님께서 직접 예언하신 것.
2) 간접 예언
가) 사건이나 역사를 통한 간접적인 예언 나)시편과 같이 문학적 표현을 통한 간접적인 예언 다)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한 예언 3) 성경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언과 성경 밖에서 이루어지는 예언 가) 성경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언 예를 들면,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잡혀 갔다가 70년이 차야 다시 돌아오겠다고 예언했다. 이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고, 그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곧 성경에 기록된 예레미야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고 그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었다. 또 예수님에 대한 구약의 여러 예언들은 신약 성경 안에서 이루어졌다. 이것도 성경 안에서 이루어진 예언이다. 나) 그러나 그 성경의 예언이 성경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많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1장 11절에,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신 그 모습 그대로 오시리라고 한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예언했다. 이 예언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꼭 이루어질 것으로 우리는 믿고 있다. 이런 예언이 성경 밖에서 이루어지는 예언인 것이다. 요한 계시록의 대부분의 예언들도 성경 밖에서 이루어질 예언들이다.
성경 밖에서 이루어지는 예언이란 그것이 지금 현재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예언이다. 말하자면 <다음 세대>에 이루어질 예언들이다. 그 예언들이 이루어지면 세대가 바뀌는 것이다. 구약의 많은 예언들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므로 이루어졌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구약 성경의 입장에서는 성경 밖에서 이루어진 예언이다. 그리고 이 구약의 예언들이 이루어짐으로 구약 시대에서 신약 시대로 시대가 옮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신구약 전체로 볼 때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의 죽음은 성경 안에서 이루어진 예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성경에서 예언된 많은 예언들이 성경 안에서 역사적 사실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성경의 예언들도 아제 곧 역사적 사실로 이루어질 것을 믿어라.” 성경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예언들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예언들의 진실성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 성경의 대부분의 예언과 또 구약의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예언들은 모두 성경 밖에서 이루어지는 예언들이다. 이 예언들이 이루어질 때 또다시 세상이 바뀌게 될 것이다.
어떻게 바뀌는가? 신약 교회 시대에서 천년왕국 시대로 바뀌는 것이다.
보통 예언의 종류 이번에는 보통 예언을 그 예언의 성격이나 대상에 따라 몇 가지로 나누어 보자. 먼저 그 예언의 대상이 누구인가, 누구를 행해 그 예언을 하는가 하는 것에 따라 사회적 예언과 개인적 예언으로 나눌 수 있다.
1) 사회적 예언 그 사회 구성원 모두를 향해 하는 예언은 사회적 예언이며, 어느 한 개인을 위해 하는 예언은 개인적 예언이다. 사회적 예언의 내용은 당연히 그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거나 적어도 관심거리가 되는 것이다. 사회적 예언은 이것을 다시 둘로 나눌 수 있다. 가) 성경 말씀에 의한 예언 나) 단순한 예언 성경 말씀에 의한 예언이란 성경 말씀과 관련된 예언이다. 단순 예언은 성경 말씀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미레에 일어날 사회적, 자연적 현상에 대한 예언이다.
2) 개인적 에언 개인적 예언은 개인의 신상 문제에 대한 예언이다. 개인적 예언도 이것을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가) 문제 해결을 위한 예언 나) 단순한 예언 문제 해결을 위한 예언이란 신상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하나님께 기도해서 그 기도의 응답을 통해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당사자는 기도를 해서 응답을 받을만한 능력이 없으므로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그를 위해 기도를 하고 대신 응답을 받아 주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 단순한 예언은 가까운 미래에 어느 개인에게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다. 이런 단순한 예언이 필요한 것은 그것을 미리 알고 적절한 대책을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적 예언은 또 그 예언의 내용에 따라 다시 다음의 둘로 나누어 불수가 있다.
다) 신앙과 관련된 예언 라) 신앙과 관련이 없는 예언 그런데, 앞에 말한 가)문제 해결을 위한 예언, 나)단순한 예언과 여기의 나)신앙과 관련된 예언, 다)신앙과 관련이 없는 예언은 서로 연결을 갖는다. 한 예로, 한 신학생이 목회자의 사명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그에 대한 기도를 요구해 왔다면, 이것은 가)문제 해결을 위한 예언인 동시에, 다)신앙과 관련된 예언인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이 그의 아들이 대학에 합격할 것인지에 대해 예언해 줄 것을 요구했다면 이것은 나)단순한 예언인 동시에 라)신앙과 관련이 없는 예언인 것이다.
사회적 예언
1) 성경 말씀에 의한 예언 이것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제 이러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라고 하는 예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성경 해석과 성경 말씀에 의한 예언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이사야 24장 19-20절“땅이 깨어지고 깨어지며 땅이 갈라지고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땅이 취한 자같이 비틀비틀하며 침망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지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 하신 말씀을 읽고, 이 세상 마지막 날에는 이 땅에 지구적 규모의 대지진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하자. 여기까지는‘성경 해석’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세상을 향해 “종말의 날에는 무서운 대지진이 온 지구를 뒤덮을 것입니다.”하고 세상을 향해 소리 높이 외쳤다고 해도 이것은 성경 말씀에 의한 예언은 아니다. 단지 성경을 그렇게 해석하고 그 결과를 세상 사람들을 향해 외친 것뿐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언이 예언으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계시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계시가 없는 예언은 예언이 아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예언이 거짓인 것은 하나님의 계시 없이 자의로 예언을 하기 때문이다.
이사야 24장 19-20절의 말씀을 읽는 순간, “이 말씀은 이제 곧 일어날 종말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니 너는 이 사실을 세상을 향해 외쳐라.”하는 하나님의 계시가 있다면, 그래서 이 계시를 따라 세상을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면 이것이 비로써 예언 곧 성경 말씀에 의한 예언이 되는 것이다. 명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사람이란 보잘 것 없는 존재이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를 잘 못 받는 일도 많으며, 계시 아닌 것을 계시고 속는 일도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예언을 할 때에는 신중을 기해야 하고 또 남의 예언이 빗나갔다고 해도 그것을 이해하고 감싸 줄만한 아량을 가져야 한다. 또 남의 예언을 무조건 믿거나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잘 분별해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버릴 것은 버리고 해야 한다.
2) 단순한 예언
단순한 예언이란 성경 말씀과는 관계가 없는 일반적인 일에 대한 예언이다. 예를 든다면, 이번 선거에서는 누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든가, 몇 년에 남북통일이 된다든가 하는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언들이 여기에 속한다. 1987년 6월 25일 발행된 <부르는 소리> 제1부 끝 부분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예언을 했다. “1987년 월 5일 낮기도 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다. 음성은 나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알게 해 주셨다. ㅡ차기 정권은 계속해서 민정당이 잡게 될 것이다ㅡ 이 예언은 이듬해 그러니까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씨가 당선됨으로 그대로 이루어졌다,
성경 말씀에 의한 예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위한 예언이고, 단순한 예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예언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성경 말씀에 의한 예언을 해도 성경 그 자체를 믿지 않으니까 이해하지도 못하고 믿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단순한 예언을 해야 하는 것이다.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그들로 믿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 단순한 예언은 순수한 계시에만 의존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악한 영들의 방해를 받기가 쉬우며 그 만큼 예언이 빗나갈 위험도 큰 것이다. 따라서 이 예언을 할 때에는 몇 번씩 분별을 해서 각별히 신중을 기해야 한다.
개인적 예언
개인적 예언은 그 상대가 개인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안고 있는 문제가 다르고 처해 있는 환경이 다르고 신앙의 수준이 다른 것만큼이나 다양하고 까다롭고 복잡하다. 무엇보다도 예언을 하는 사람은 예언을 위한 영적 능력 외에 안위하고 권면하는 은사가 있어야 하고 깊은 신앙심과 말씀에 대한 깊은 깨달음,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따사로운 애정과 온유한 인격과 상담에 대한 기술과 열성이 있어야 한다. 점쟁이처럼 기도해서 응답받아 예언만 불쑥 해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놓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해결하려는 사랑과 관심과 열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언하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 중요한 위치란 교회의 높은 직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바르게 이끌어 가야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 교회에 예언하는 사람이 한 둘은 꼭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신도들의 영적 생활을 바르게 인도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예언을 한다고 하면 아주 그릇된 신비주의나 샤머니즘쯤으로 여기고 무조건 배적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은사도 없는 사람들이 있는 척 함부로 예언을 해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현재의 우리 교회의 영적 고갈을 뜻하는 것이다. 교회의 외형은 커지고 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 예언을 할 때의 유의 사항
예언의 은사를 받아 예언을 하고 있는 사람이 예언을 할 때에 조심해야 할 몇 가지를 여기에 적어 보자. 1) 선입견이 바른 예언을 방해한다. 개인적 예언에 있어서 예언을 하는 사람이 예언을 해 받는 사람에 대해 평소 잘 알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런 사전 지식이 응답에 섞여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어떤 사항들이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응답처럼 마음 에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평소 기도를 잘 안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에게 어떤 어려운 일이 생겨서 나에게 왔다고 하자. 나는 그가 평소 기도를 잘 안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가 그를 위해 응답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그가 기도를 잘 안한다는 사실이 내 머리 속에 떠오르고 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응답으로 착각을 한다. 그래서 나는 그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저, 하나님 말씀이 기도를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한 40일 쯤 작정기도를 해 보시죠.”
나는 거짓말을 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예언의 응답을 받기 위해 기도를 할 때에는 마음속을 완전히 비우고 오로지 하나님의 응성만을 기다려야 한다.
2) 그의 인산(印象)이 바른 예언을 방해한다.
초면의 사람의 경우에는 그와 대면해서 대화를 하는 동안에 받게 되는 그의 인상이 바른 예언을 방해한다. 한 남자 성도가 있었다. 그는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자신은 광장한 사명을 받은 사람인데 그 사명을 위해 지금 이렇다 할 기업체를 가지고 있으며 해외 선교를 위해 외국에 지사를 설치했는데 그곳에 나갈 사원들은 모두가 선교사 사명을 가지고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그런 해외 선교의 사명이 있다는 사실과 이 사명을 위해 해외에서 벌리게 될 사업은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크게 성공하게 되리란 것을 아무개 유명하신 목사님께서 예언을 통해 자신에게 알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으니 기도를 해서 응답을 받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정직하고 성실해 보였다. 그리고 확신에 차 있었으며 기쁨으로 넘쳐 있었다. 나는 그를 위해 기도해고 그리고 그의 사업이 아주 잘 될 것이란 응답을 받았다. 그런데 나의 이 예언은 빗나갔다. 1년도 못되어 하나님만을 믿고 무리하게 시작했던 그의 사업은 완전히 망하고 그는 빗 더미에 올라앉고 말았다. 그의 솔직해 보이고 자신에 찬 인상이 내 안에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처럼 나를 속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 대면하는 사람일수록 그와 대화하기 전에, 그와 자리를 같이하자마자 우선 목상으로 기도부터 하고 그에게 들려주어야 할 응답을 미리 받아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가 무엇에 대해 응답 받기를 원하고 있는지를 아시고 내가 그를 위해 해야 할 말을 미리 알게 해 주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미리 기도를 드려 놓으면 그와 대화하는 중 내가 해 주어야 할 말을 그때그때 내 머리 속으로 보내주신다. 또 이것은 비단 예언의 경우 뿐 아니라 심방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우선 묵상으로 기도를 드리면 이 가정에 대한 형편과 내가 해 주어야 할 말을 미리 다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
3) 사회적 예언에 비해 개인적 예언은 분별하기가 어렵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회적 예언에 있어서는 대개의 경우 갑작스런 성령의 감동으로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알게 해 주시는 경우가 많다. 이 때의 하나님의 메시지 곧 계시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나에게 보내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 계시는 비교적 정확하게 전달이 된다. 그러나 개인적 예언에 있어서는 이와는 반대로 내가 먼저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응답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또 사회적 예언의 경우는 계시를 받고 세상에 발표하기까지 그것을 분별할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으나 개인적 예언의 경우는 그 자리에서 예언을 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분별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따라서 본의 아니게 거짓 예언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서 예언을 해 주기보다는 문제만을 듣고 기도를 해서 응답을 받아 하루나 이틀쯤 마음속에 묻어 두고 분별을 한 다음에 말해 주는 방법도 좋다.
4) 사람들은 대개는 자기에게 좋게 들리는 예언만을 믿으려고 한다.
사람들은 자기네들 마음에 드는 예언은 잘 믿지만, 마음에 안 드는 예언은 그 예언이 틀렸다고 말한다. 좀 심한 경우에는 화를 내고 돌아간다. 따라서 받은 응답을 그대로 전해 줘야 할지, 아니면 적당하게 해석을 가해서 암시적으로 전해 주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나쁜 것을 좋다고 말할 수는 절대로 없다. 그렇게 하면 거짓 예언이 되기 때문이다.
5) 훨씬 후에야 이루어지는 예언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응답을 받아 확신을 가지고 예언을 해 준 그 예언은 지금 당장 이루어지는 것도 있지만 몇 년 후, 때로는 몇 십 년 후에 이루어지는 것도 있고 더러는 죽은 다음에 이루어지는 예언도 있다는 것을 알아 두자.
6) 어느 예언이든 그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예언은 점이지 예언이 아니다.
7) 한두 번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곧 예언의 은사를 받은 줄로 알고 예언을 하기 시작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의 은사를 주신 사람에게는 반드시 훈련을 시키신다. 수도 없이 여러 번 반복해서 환상이나 음성을 통해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계시해 주시고 그것들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하게 하시면서 그를 예언자로 훈련시키신다. 이런 훈련 없이 예언을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무면허 예언이다. 무면허 운전과 마찬가지로 사고를 내고 이웃을 다치게 한다.
8) 개인적인 사업 관계나 돈에 대한 예언은 웬만하면 하지 마라.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있는 한 집사님이 있었는데, 그가 새로운 사업을 착수라기 위해 그가 속한 교회에서 예언 잘 하시는 권사님께 물었다. “이러이러한 사업이 있는데 거기에 투자를 해도 될까요?” 권사님은 잠시 눈을 감고 기도를 하더니 마음 놓고 투자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 권사님은 교회에서 늘 예언을 하는 말하자면 교회 안에서는 예언자로 인정받고 있는 분이었다. 그 집사님은 권사님의 예언을 100% 믿고 몽땅 투자를 했다. 그러나 나타난 결과는 예언과는 정반대였다. 완전히 망해버린 것이다. 물질에 대해서도 기도를 하면 응답을 주신다, 그러나 모든 예언 중 물질에 대한 예언이 가장 위험하다. 악령의 장난을 가장 많이 받는 것이 바로 이 물질의 이익을 구하는 기도, 물질을 위한 예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틀리기 쉬운 예언이 물질을 위한 예언이다. 물질에 대한 예언은 그것이 빗나가면 물질적 손실을 주기 때문에 두고두고 원망을 듣게 될 뿐 아니라 그의 신앙생활에도 아주 나쁜 영향을 준다. 또 설사 그 예언이 맞아서 돈을 좀 벌었다고 해도 그것이 그의 신앙생활에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재물에 대한 예언은 웬만해서는 하면 안 된다.
10)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 중에는 사회적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고 개인적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다.
개인적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사회적 예언은 하지 못한다. 그 받은 은사가 개인적 예언으로 한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개인적 예언도 겸하여 할 수 있다. 그렇긴 하지만, 사회적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개인적 예언은 가급적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개인적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교회 안에서 신도들을 위하여 예언하며, 또 그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여 그들에 대한 어떤 응답을 받으면 그것을 그들에게 전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 이것이 개인적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반면, 사회적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교회 밖으로 나와 세상을 향해 외쳐야 한다.
예언하기를 사모하라
성령의 은사는 다 귀한 것이지만, 예언의 은사는 모든 은사 중에서도 가장 귀한 은사이다. 모든 은사 중에서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에게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하는 은사이다. 예언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언어와 인간의 언어를 함께 알고 있어야 한다. 예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바꾸어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이다. 예언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세상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성령의 모든 은사 중에서 그 받은 은사로 인해 목숨까지도 버려야 하는 은사가 둘 있다. 하나는 믿음의 은사이고 또 하나는 예언의 은사이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예언자들인 선지자들은 거의가 예언을 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예언의 은사를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믿고 열심히 기도하며 구하는 길밖에는 없다. 그러나 기도만 열심히 한다고 다 주시는 것은 아니다. 예언의 은사는 다른 어느 은사보다도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하는 은사이다. 하나님께 보다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땅의 욕심을 버려야 한다. 세상의 욕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그 참 뜻을 깨달으며 내 마음을 온전히 비우고 오직 예수님만으로 내 마음을 채워야 한다. 그런 다음에 예언의 은사를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예언의 은사를 구하면 귀신의 조롱거리가 되거나 아니면 영력의 부족으로 자기 자신의 마음속의 생각을 하나님의 계시로 착각을 하는 거짓 예언자가 되고 만다. 예언의 은사를 받기 위해서는 나를 버리고, 저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예언의 영이 내게 임하게 된다. 예언의 은사를 구하는 기도는 약을 쓰며 외치는 기도가 아니라 조용히 깊이 들어가는 기도이어야 한다. 깊은 기도가 방해를 받을 때에는 방언 기도를 해도 좋다. 방언으로 기도를 할 때에는 크게 소리 지르지 말고 작게 입속으로 소리를 내되 온 정신을 쏟아야 한다. 그러면 내 생각은 뒤로 물러나고 영이 앞으로 나온다.
늘 하나님과 대화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며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늘 귀를 기울여 보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한두 번 계시 비슷한 것이 왔다고 해서, 음성이 들렸거나 환상이 보였거나 했다고 해서, 은사를 받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에게는 음성이 들린다거나 환상이 보인다거나 하는 일은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닌 것이다. 예언의 은사를 주실 때에는 하나님께서는 수도 없이 여러 번 반복해서 그를 훈련시키신다. 그런 훈련을 직접 체험하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훈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전까지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것은 아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또한 영들 분별의 은사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영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영계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 마귀나 귀신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야 한다. 참 하나님의 음성과 마귀(귀신)의 음성과 내 마음속의 음성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메시지
하나님께서는 부단히 우리를 향해 계시의 말씀을 보내시고 계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런 계시의 말씀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심령의 안테나에 녹이 슬어 있기 때문이다. 녹이 낀 안테나를 청소하고 우리 심령의 수화기를 수리해서 하나님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 이것을 우리는 기도라고 말한다. 기도를 해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은 녹슬고 고장 난 안테나와 수화기를 가지고 그대로 통화를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녹이 낀 안테나를 철저하게 청소하고 고장 난 수화기를 철저하게 수리하고 강력한 배터리로 갈아 끼운 달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아 그것을 세상에 전하는 것, 이것을 우리는 예언이라고 말한다. 안테나에 낀 녹은 죄를 뜻한다. 녹이 낀 안테나를 청소한다는 것은 죄를 회개하고 죄에서 멀어지는 것을 뜻한다. 고장 난 수화기란 세상 욕심으로 병들어버린 우리의 심령을 뜻한다. 고장 난 송수화기를 이렇게 수리하는가? 세상을 향했던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이다.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께로 돌리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영력을 공급 받는다. 이 영력이 곧 배터리이다. 깨끗하게 청소된 안테나를 하나님께로 향하고 수리된 수화기로 강력한 배터리의 전류가 흐르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보내 주시는 계시의 말씀을 뚜렸하게 수신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예언자의 조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뭔가? 예수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세상을 버리고 예수만을 소유하는 것이다. 나를 버리고 예수를 갖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다. 예언의 은사도 이와 비슷하다. 예언의 은사를 받는다는 것은 예언의 은사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을 버리고 예언의 은사 하나만을 내 것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언의 은사는 나에게 오지 않는다. 예언의 은사는 다른 은사와는 좀 다른 것이다.
다음과 같은 사람에게는 예언의 은사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1) 돈이 많은 부자 2) 세상 일로 바쁜 사람 3)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4) 욕심이 많은 사람 5) 고집이 센 사람 6) 사치하고 미식을 즐기는 사람 7) 술 답배 많이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영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만일 이 일곱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가진 사람 중에 예언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다. 몇 마디 덧붙인다면, 사치와 미식(美食)은 사람의 영을 소경으로 만들어 버린다. 지나친 육식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 이전에는 인간에게 육식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때까지의 인간의 식량은 나무 열매와 푸성귀 즉 과일과 야채였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 육식을 하락하셨지만 먹을 수 있는 동물과 먹을 수 없는 동물, 그리고 동물을 먹어도 되는 부위와 먹어서는 안 되는 부위를 율법으로 엄격하게 구분하셨다. 점쟁이나 무당들도, 엉터리 사이비를 제외하고는, 신접한 무당이나 점쟁이들은 육식을 제한한다고 한다. 육식을 많이 하면 그들이 섬기는 신과의 교접이 잘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영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귀신을 섬기는 그들도 그러는 것이다. 불교에서 육식을 금하는 것은 살생을 금한다는 데서 온 것이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육식을 하면 영이 무디어지고 육이 살아나며 마음은 자꾸 속세를 향하게 되기 때문이다. 담배와 술도 영을 마비시킨다. 특히 지나친 음주, 습관적인 음주는 사람을 영적 무능자로 만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끔 이 일곱 가지를 다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도 예언의 은사를 주신다. 단 하나님께서는 강권적으로 이 일곱 가지를 버리게 만드신 다음 은사를 주시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바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나는 이 일곱 가지를 다 가지고 있지는 못했지만, 그 중 네 가지는 가지고 있었다. 부자가 아니었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지는 못했지만, 나머지 넷은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몇 푼 되지도 않는 재산 다 거두어 가시더니 직장 그만두게 하시고 세상 욕심 다 누르고 누르셔서 다 포기하게 만드시고 나의 고집 다 꺾어 버리시고, 자가용 타고 먼 길 마다 않고 맛있는 것 찾아 먹고 다니던 못된 버릇 이제는 돈 없으니 하라고 해도 못하고, 하루에 두 갑씩 피우던 담배 딱 끊게 하시더니 나에게 예언자의 훈련을 시키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