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이 약한 사람과 영적 통찰력

@ 영이 약한 사람과 영적 통찰력

Ubtc

 

 

 

신체가 건강하고 힘이 센 사람이 있듯이

영이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 있고,

그와 반대로 병들고 유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경험이라는 삼 요소에 의해서

강건해지고 힘이 생기게 됩니다.

 

 

이 세 가지 요소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영은 기형이 되고 한 쪽으로 치우쳐 힘을 내지 못합니다.

영이 강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영이 지금 어느 상태에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하고 어느 부분으로 치우쳐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영이 약한 사람은 무기력하고 외부의 자극에 반응을 하지 못합니다.

무기력하다는 말은 영적인 일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전히 세속적인 일에만 흥미를 느끼고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도 않고 흥미도 없습니다.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마지못해서 가거나 할 수 없이 끌려가는 수준입니다.

예배 시간보다도 교제의 시간이 더 즐겁고 세속적인 이야기만 하며 세상사는 것처럼 행동하며 교회 생활도 세상살이의 연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 이야기만 하면 신바람이 나다가도 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금방 풀이 죽고 시큰둥합니다.

 

영이 약한 사람은 영적 감흥을 제대로 느끼지 못합니다.

부흥회에 가도 낯설기만 하고 그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합니다. 그 자리가 거북스러워 견디지 못합니다. 기도는 물론 전혀 할 줄도 모르고 할 필요도 못 느낍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은 영이 아사직전입니다. 이런 사람은 스스로 영을 키우고 강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주변의 도움이 절대로 필요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영이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말씀을 먹이고 기도에 합류시켜 영에 힘을 불어넣어주어야 합니다. 스스로는 일어설 힘이 전혀 없는 무기력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영이 약한 사람은 방향감이 없습니다.

정신이 흐리멍텅하며 자신이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위치 파악이 안 되는 것처럼 이런 사람은 지금 자신이 가고 있는 방향이 어디인지를 모릅니다.

목표와 방향이 없기 때문에 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무엇 때문에 교회에 출석하고 봉사하는지를 모릅니다. 무엇 때문에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방향을 모르기 때문에 위치 파악이 되지 않고 주변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이리 저리 방황하며 어찌 할 바를 모르지요.

 

기도는 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무작정 닥치는 대로 이렇게 해보고 저렇게 해봅니다. 그리고는 쉽게 포기합니다.

 

영이 약한 사람은 감정을 이기지 못합니다.

속사람이 겉사람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겉사람의 요구에 끌려 다닙니다.

감정적인 사람은 감정에 이끌리고 이지적인 사람은 논리에 끌려 다닙니다.

그러므로 한 쪽에 치우쳐서 생활하게 됩니다.

감성과 이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자연인의 상태로 더욱 기울어집니다.

감정적인 사람은 즉흥적인 행동을 하게 되고, 이지적인 사람은 논리적으로 따지게 됩니다.

감정적인 사람은 대부분이 여성이고, 이지적인 사람은 남성들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감정적인 사람이 무언가 부족하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취급을 받지만 실상은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문제입니다.

교회도 주도권이 남성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게다가 영이 약한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지적이고 논리적인 것이 올바른 것처럼 오해되고 있습니다.

 

말씀과 능력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한 쪽으로만 치우쳐 있기가 쉽습니다.

이 둘이 균형을 이루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어려운 과정을 거쳐 바람직한 영적 균형을 이루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이 약하면 균형을 이루기가 쉽지 않습니다.

약한 영은 모험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모험을 필요로 합니다.

학문적인 과정을 통해서 배우는 이론적이고 교리적인 지식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성령을 통해서 배우는 지식은 많은 도전을 필요로 하고 위험하게 보이는 모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학교를 광야의 학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영이 약하면 이 과정을 소화할 수 없습니다.

 

영이 약한 사람은 광야의 시험을 두려워합니다.

영이 약한 사람은 새로운 것을 거부합니다.

안전하고 일상적인 것을 좋아하고 새롭고 낯선 것은 싫어합니다. 항상 똑 같은 절차와 방식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일정한 수준과 경계를 만들어 놓고 그 범위를 넘어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태도는 본능에 기인한 것입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본능적으로 영역에 대한 집착이 있습니다. 늘 다니던 길로만 다니고 자신의 영역 안에서만 활동합니다. 생명의 위험이 닥쳐도 영역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영이 약한 사람은 안전하고 예측이 가능한 길로만 갑니다.

그래서 성령의 변화와 다양한 역사를 받아들일 여지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기적을 만드는 삶은 더더욱 꿈도 꾸지 못합니다. 제사장들이 율법에 기록된 대로 하듯이 틀에 박힌 종교 행위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영이 약한 사람은 기도가 형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늘 같은 수준의 기도와 같은 방법의 기도만 합니다.

기도 역시 틀에 박힌 교과서적인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이 인도하는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영이 약하기 때문에 성령의 충격을 받아들일 만한 자신감이 없습니다.

기도하다가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게 되면 두려워서 기도를 끝내고 더 이상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상한 현상이 나타날 것 같으면 마귀라고 생각하고 거부합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틀에서 벗어나면 모두 위험하고 마귀의 침해라고 여깁니다.

자신의 방식으로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면 모두 거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 응답이라는 것을 별로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가며,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란 도무지 이해되지도 않고 이해할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영이 약한 사람은 삶에서 영적 경험이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일이란 성경을 읽고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 이상은 오히려 신비주의로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의지로 판단하고 세상적 안목으로 결정하려고 합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상식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습니다. 합당한 논리도 있고 말씀에 근거하기도 하므로 이상하게 여길 것이 전혀 없습니다. 이런 결정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들이 삶은 봉사의 수준은 될지언정 기적을 만들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는 맺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에 맞추어 희생을 드리고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런 행위는 누구도 나무랄 수 없는 완벽한 율법준수였고 하나님이 정하신 법에 충실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도 흠을 잡을 수 없는 완전한 것이었지만 이런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은 신물이 난다고 표현합니다.

이들이 드리는 제사는 짐승의 목을 비트는 행위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사술을 행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들의 제사를 전혀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기록된 말씀에만 따라서 행동하였기 때문입니다. 기록된 말씀에 비추어서는 전혀 이상이 없지만 그런 행위를 하는 배경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영이 약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이 성령으로 인해서 단련되고 훈련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영이 강건해야 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지 않고서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수준에 이르기까지 불가불 지도자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영이 강건해지는 법을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영이 강건해지는 세 가지 요소 (말씀, 기도 경험)를 우리가 어떻게 균형 있게 행하는가 하는 문제가 영성을 개발하는 과제인 것입니다.

이 과정은 개인적 성향과 특성으로 인해서 일률적으로 공식화할 수 없다는 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성훈련은 개별적이고 개인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12명을 한계로 설정하고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실제로 한 사람이 다룰 수 있는 제자는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다양한 특성을 지닌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가르쳐야 하는 영성훈련은 말처럼 쉽지 않음을 저는 20여년의 경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수십명 수백명을 상대로 하는 제자훈련이나 속사람치유(내적치유)는 분명히 바람직하지 못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교리교육이나 이론 교육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법을 배우는 데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육방식은 피라미드 방식입니다.

제자가 제자를 길러내는 것이지요. 그 한계가 12명 이하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접촉을 통해서 스승이 지닌 능력과 지식을 제자에게 전하고 제자는 그 능력을 받아 더욱 강하게 키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엘리사가 엘리야의 능력을 받아 더 많은 사역을 했던 모델입니다.

인간적 교제 속에서 경험하면서 배우는 것이 하나님의 제자 세우기 방식입니다.

 

제자 훈련이라는 말은 온전한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저는 이 말보다는 제자 만들기 또는 제자 세우기 라는 말이 적당하다고 봅니다.

제자를 만들고 세우는 일은 함께 인격을 나누고 교제하는 친밀함 속에서 가능합니다. 그러려면 절대로 소수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여기까지는 장봉운 목사님께서 <영이 약한 사람> 이라는 글이 마무리 되는데,  이 말씀과 맞물리는 말씀이라서 덧붙여 편집했습니다)

 

 영적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것들은 많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중요한 것을 들라면 저는 ‘통찰력’을 꼽을 것입니다.

영어에서 통찰력에 해당하는 단어로 ‘insight’ 이외에 ‘penetration’이나 ‘vision’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단어들은 모두 보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내면의 어떤 형상을 읽어내는 기술이나 능력을 통찰력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닌 장점이나 단점 등은 물론이거니와 문제의 핵심을 바로 읽어내는 능력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갖추고 있는 재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강력한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평균수준을 넘어서 강력한 통찰력이란 어떻게 해서 생기는 것일까요?

사람에 따라서는 개발하거나 학습하지 않아도 그 능력이 나타나는 형태의 천부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오히려 예외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어떤 능력을 알아차리고 개발해야 하는 부담이 주어져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 잠재능력을 개발해서 평균치 이상으로 끌어올릴 때 그 능력은 탁월한 것이 되어 지도자의 위치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통찰력은 지식의 말씀이나 지혜의 말씀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 보면 그것은 일종의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어떤 노력에 의하여 증대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오히려 예외적이라고 보아야 하며 잠재되어 있는 능력을 찾아내어 개발함으로써 은사 못지않게 활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통찰력을 끌어내는 과정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첫째, 성경말씀을 묵상함으로써 개발됩니다.
통찰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는 과정에서 개발됩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통찰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의 영이 임하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수시로 읽고 깊이 묵상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도 모르게 통찰력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계속 읽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경의 뜻이 깨달아지고 이면에 있는 내용을 알아가게 됩니다. 성경 66권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 그 내용이 머릿속에 충분히 저장되면 자연적으로 말씀이 서로 연결이 되면서 예전에 알지 못했던 내용들이 깨달아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으로 말미암아서 통찰력이 생기게 되며, 지식과 지혜가 솟아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의 이면의 내용을 깨달아진다는 것 자체가 이미 통찰력을 얻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경험을 통해서 얻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기록된 말씀을 삶 속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매 순간마다 어떤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아주 평범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 삶은 물론이고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경우나 돌발적인 상황을 맞게 되는 사건적인 경우에나 모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중요하지 않은 평범한 삶에 대해서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찾아내려고 하지 않지만 중대한 일을 경험하게 되면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들며 그 생각을 통해서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의미를 알아가게 되면서 통찰력이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눈치가 빠릅니다. 그만큼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눈치가 빠르다는 것 역시 통찰력이 있는 것입니다. 분위기를 파악하고 즉시 대처하는 능력이 없으면 사회생활에서 뒤지게 됩니다.

 

셋째, 학습을 통해서 얻게 됩니다.
경험을 많이 할 수 없는 경우에는 전문적인 지식을 얻음으로써 통찰력이 생기게 됩니다. 학문적 지식은 그 방면에 대한 간접 경험을 얻는 과정이기 때문에 많은 지식을 얻는 것은 통찰력을 깊게 하는 지름길이 됩니다. 전문적인 지식을 얻음으로써 그 방면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게 되며, 따라서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경험을 다할 수는 없지만 지식을 갖추게 되면 나타나는 영적 증거에 대해서 당황하지 않게 되며,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아는 것이 힘이듯이 많은 지식은 여러 상황에서 힘이 되어줍니다. 그러므로 영적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지식은 상황에 부닥칠 때 두려움을 떨쳐내고 자신감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자신감이 생기게 합니다. 통찰력은 자신감이 생길 때 강화되는 것입니다. 주저하지 않고 자신 있게 상황에 대응할 수 있으려면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통찰력은 믿음과 연관이 깊습니다.

믿음이란 지식이나 경험을 바탕에 깔고 있을 때 더욱 강해진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통찰력이란 직관이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기도 합니다.

직관이란 이성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감성적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능력으로 주로 여성에게 더 강합니다. 말로는 표현할 수는 없지만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내면적 공명’이라는 말로 설명하는 것인데, 일종의 텔레파시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영적 충돌’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의 세계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것입니다.

강한 영이 약한 영을 압도하며 약한 영은 강한 영에게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이 강하고 약하다는 차이를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고정된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무척 주관적이고 가변적이기 때문에 확정적으로 설명하는 데는 많은 제한이 있습니다. (윗글 참조)

 

예수께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속박한다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 사실을 우리들에게 일깨워주었는데(마 12:29, 막 3:27), 영적 힘의 차이에 따라서 공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약한 자의 영이 강한 자의 영에 파장으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 충돌로 인해서 내면의 흐름을 읽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막연하게 느끼는 것이 일반인들이 감각하는 직관입니다.

영의 작용이 강해지고 영적 지식이 갖추어지면 직관의 흐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자신으로부터 능력이 흘러나가는 것을 직관으로 느꼈습니다. 그러나 같이 있었던 제자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아서 서로 밀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들은 영적 흐름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자연적인 어떤 작용이거나 물리적이고 환경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무시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절대로 그런 막연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으로 영의 흐름을 인지하는 것이 직관을 바로 이해하는 지름길이며, 이는 통찰력에 대한 믿음을 만들어내어 실질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작용하는 영의 흐름이나 움직임을 몸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직관을 예민하게 관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매일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부닥치는 다양한 경험들 속에서 영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말씀으로 그 의미를 찾으려고 해야 합니다.

일상으로 경험하는 평범한 삶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삶은 말씀을 떠난 삶이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의미를 찾아내려는 태도를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삶을 말씀에 적용하는 방법도 익혀야 합니다.

통찰력은 말씀을 제대로 적용하는 과정과 삶을 말씀으로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서 증대됩니다.

수많은 경험들을 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찾아내지 못한다면 통찰력은 자라나지 못합니다.

‘지혜의 영’ ‘계시의 영’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 등이 임하면 우리는 깊은 통찰력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 영들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그런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을 때 우리 안에서 제한되지 않고 풍성하게 작용하는 영입니다.

 

자유로의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