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감정의 치유

상한 감정의 치유

사실 모든 사람이 상처받으며 살아간다.

어느 누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 번도 상처를 받지 않고 살 수 있겠는가?

상처란 혼자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대인관계 속에서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 속에서 대인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기억해두어야 할 분명한 사실은, 모든 상처가 치유 받아야 하는 것이지만 웬만한 작은 상처들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저절로 치유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가 될 만한 큰 상처들 몇 가지만 치유된다면 살아가기에 그다지 어려움이 없을 정도가 되는 것이다.

 

간혹 치유기도를 해달라고 해서 “어떤 문제가 있으십니까?”하고 질문하면 “문제가 너무 많아서 무어라고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예요”라고 엄살을 크게 떠는 사람이 있다.

 

몇 가지의 큰 상처와 문제들이 겹치면 모든 것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큰 상처나 문제가 1~2가지 정도 해결되면 갑자기 모든 것이 잘될 것처럼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상처받은 감정들을 어떻게 치유하면 되는가?
첫째는 감정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을 온통 흔드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이란 것이 사실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감정이 우리 자신의 전부가 아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 안에는 육과 혼, 그리고 영이 존재하는 데  ‘혼’ 안에 감정과 이성과 의지가 결합되어있다.

 

즉 감정이란 혼의 영역 안에 있는 것 중에 하나의 요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정자체가 나 자신의 삶 전체를 흔들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감정이 나 자신의 주인이 되면 안 된다. 도리어 내가 감정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감정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요.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다.

우리는 감정을 통하여 인생의 기쁨을 느끼고, 행복이란 감정을 맛볼 수 있다.

기독교의 가장 큰 덕목인 사랑도 감정이란 통로를 통하여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감정을 통하지 않고서 사랑의 기쁨과 감동, 환희를 맛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더 나아가서 이웃의 상처와 아픔을 함께 느끼며 나누는 것도 감정이란 매체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감정 자체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매우 값진 것이다.

이처럼 감정 자체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온 것이지만, 상처받은 감정은 하나님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끌어가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감정은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공생 애가운데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드러내셨다.

성전을 정결케 하실 때에,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주님은 감정을 나타내셨다.

 

그러나 주님은 감정에 끌려 다니신 것이 아니라 감정을 다스리시고, 감정을 통하여 당신의 깊은 마음들을 표현하셨다.

우리는 자신에게 질문을 해볼 수 있다.

 

 “나는 분노를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가?”,

 “나는 두려움을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가? 라고. 감정 그 자체는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다.

 

감정에 지배당하느냐 아니면 감정을 다스리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자신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분노와 두려움, 아니면 불안이나 슬픔,

중독적인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다면 그것을 시인하고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어야 한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연약함을 솔직히 시인하고 고백하여야 한다.

주님의 능력만이 우리를 치유하실 수 있다.


셋째로, 감정은 치유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가운데 자신에게 치유를 원하는 자들에게 한 번도 거절하신 적이 없으시고,

못 고치신 적이 없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여기에 상처받은 자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있다.

그 메시지는 바로 “치유 받지 못할 사람이 없다!”라는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시지 않는가?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약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