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설날설교 5편
2011 설날설교 5편
① 제목: “개척자”(여호수아 17:14~15)
― 정월명절 추모예배, 신자들만의 예배
개척의 삶
오늘은 정월명절입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서 당신이 걸어왔던 삶이 얼마나 만족합니까? 사람들은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지 못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더 많은 것에 대한 욕구가 결국 우리로 하여금 불평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불평하는 삶이 우리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경제적, 정신적, 영적인 유산에 대한 만족함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불만족하여 불평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들 속에서 개척하는 사람이 되어 한 해를 출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함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큰 민족에 대한 약속, 창대한 이름, 복의 근원이 될 것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창 12:1~3).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의지하여 75세의 나이에 어려운 여행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직까지 그 약속을 누리지 못하고 수많은 세월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 때에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에 근접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이미 정착해 있는 원주민들과 끊임없는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도 그들은 불완전한 땅을 차지하고 있지만, 차지한 땅을 분배하는 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분을 분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셉 지파가 지분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여호수아에게 와서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파에게 분명히 큰 축복을 주셔서 어느 지파보다 큰 지파가 되었는데 왜 땅을 분배하는데 있어서는 불공평하게 작은 비분은 주냐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당한 항의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 누구도 땅의 지분에 대해서 불평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오히려 요셉지파에게 주어진 축복의 나머지 분복은 개척을 통한 소유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요셉 지파에게 “스스로 개척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으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대신 그들이 개척자적인 태도를 가지고 적극적인 삶을 출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요셉지파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들은 “넉넉하지도 못하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철병거를 갖추고 있다”고 불평합니다. 요셉지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불신앙”이었습니다.
믿음의 개척자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좋은 조건들을 많이 허락해 주셨습니다. 부모님들에게서 좋은 유산들을 많이 물려받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의 물줄기가 풍성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혹시 근시안적인 눈으로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불평하고 있는 한 우리는 나아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불평하려고 하는 우리들을 향해 “스스로 개척하라”고 말씀합니다. 보무님을 탓할 것이 아닙니다. 물려받은 유산이 적다고 탓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최선의 것을 주셨습니다. 대신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개척자로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개척자로 출발하려고 하는 당신은 하나님께서 함께 싸우고 계심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스스로 개척하라고 말할 때 인간적인 계산을 해서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변 땅이 넉넉해 보이지 않아도, 주변 국가들이 철제 무기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출발하는 것입니다. 불평하기보다는 찬송하면서 자신 있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커다란 장애물들이 놓여 있을 수도 있지만 “스스로 개척하라”는 말씀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출발하는 개척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니다.
※ 전형준, <장례 추모예배 이렇게 준비하라>, 아가페, 2005, pp.392~395
② 제목: “아버지의 부탁”(대상 28:9~10)
― 정월명절 추모예배, 불신자와의 연합예배
기도의 힘
어떤 처녀가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고등학교까지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순진하고 착하게 자라왔습니다. 서울로 올라오니 예전처럼 부모님의 간섭도 없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새장에 갇힌 새처럼 자유롭지 못한 구속된 생활을 하다가 자유로운 환경이 되자 자꾸 방종으로 흘러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러한 삶을 거부한다는 것이 좀처럼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의 신앙생활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생활과 신앙을 붙들어 주었던 힘이 있었습니다. 새벽기도 마치고 집에 와서 사랑하는 딸의 손을 잡고 기도하시던 아버지, 듣는 줄 모르고 기도하시는 아버지의 기도 내용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품을 떠날 수 없었고, 방종으로 흘러갈 수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애를 정리할 때가 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왕의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면서 부왕으로서 간곡한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였습니다. 비록 다윗이 왕이었지만,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는 “내 아들 솔로몬아”라고 부릅니다. 사랑의 음성입니다. 그의 부탁은 사랑에서 나오는 부탁입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다윗의 뒤를 이을 솔로몬이 반드시 알아야만 할 것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섬겼던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고, 그를 인도하셨던 하나님을 아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호소했습니다.
여호와는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을 알고 계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를 찾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만나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솔로몬이 그를 버리고 찾지 않으면 그도 솔로몬을 영원히 버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기를 자주 시도하십니다.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과 사사들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셨고, 좀 더 확실한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제자들과 사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와 만나기를 시도하셨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다가오십니다. 오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예수 믿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합니다. 이제 솔로몬의 하나님을 알았으므로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힘써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자
우리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부탁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주변에서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그를 믿어야 한다고 부탁하던 사람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애 속에서 만났던 보배로운 분이기에 예수님은 함께 나누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자신만 알고 있기에는 너무도 소중한 분이기에 당신에게 소개했습니다. 이제 당신이 그 부탁을 듣고 예수님을 찾게 되면, 그분은 당신을 만나주실 것이고, 당신의 삶에 놀라운 일들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그분 안에서 놀라운 변화와 기쁨을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 부탁을 저버리고 예수님을 차지 않는다면 언젠가 되 돌이킬 수 없는 고통과 불행의 늪으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의 부탁을 듣고 이제 그의 삶을 선택해야 하듯이 당신도 당신에게 들려오는 부탁을 듣고 선택해야만 합니다. 오늘 정월명절 추모예배에 참석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그를 섬길 수 있는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전형준, <장례 추모예배 이렇게 준비하라>, 아가페, 2005, pp.409~412
③ 제목: “부활신앙으로 달려갑시다”(빌립보서 3:10~14)
― 설날 성묘 예배, 신자
지금 우리는 000의 육신이 잠들어 있는 곳에 모여 있습니다. 000의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영혼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지금 그는 그곳에서 편히 쉬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지친 몸과 마음이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000처럼 천국에 들어가 쉬게 될 것입니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즐거운 안식이 되기 위해 지금 힘껏 달려야 합니다. 몸이 피곤할수록 쉼이 달콤합니다. 수고한 만큼 즐거운 안식이 될 것입니다. 또 그날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얼마나 잘 달렸는지를 보시고 상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읽은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과거의 일을 잊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는 고백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미 중년의 나이가 지나고 있는 바울이었지만 또 그 동안 이룬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는 것처럼 모두 잊어버리고 오직 앞으로 해야 할 일들만 생각하며 달릴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고백대로 자신의 생명이 있는 동안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하여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은 한 번도 없었고 쉬지 않고 계속하여 전도하였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예배 설교를 위해 나이 많은 목사님을 초청하였습니다. 나이 많은 목사님은 최선을 다해 설교하였고 많은 성도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에 젊은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훌륭한 설교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사님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또 목사님은 지금까지 아주 많은 일을 잘 하셨습니다. 이제 마무리를 위해 브레이크를 밟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목사님이 말하였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브레이크를 밟는 사람이 아니라 불을 붙이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는 브레이크를 밟지 말고 엑셀레이터만 밟아야 합니다. 엔진에 불을 붙이며 열심히 달려야 합니다. 나이도 힘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는 “이만하면 갈만큼 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 “이만하면 할 만큼 했다”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천국입니다. 천국에 도착할 때까지 열심히 달려야 합니다. 힘이 없어질 때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성경의 바울은 거의 노인이 되었고 또 몸은 병이 들었고, 또 옥에 갇혀 자유까지 빼앗긴 상태였지만, 바울은 여전히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달려갔습니다. 감옥으로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또 오늘 읽은 빌립보서와 여러 편지들을 써서 멀리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며 용기를 주며 여러 가지 교훈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쉬지 않고 달릴 수 있었던 이유는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라”
바울은 천국에서 영화롭게 부활할 것을 믿으며 달렸습니다. 천국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받을 때까지 쉬지 않고 달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머지않아 천국에서 편히 쉴 것을 알기에 이 땅에서 할 일은 목표를 향하여 달리는 일뿐이었습니다. 천국과 부활과 면류관이 바울에게 큰 용기와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부활 신앙으로 힘껏 달려야 합니다. 천국을 바라보며 달립시다. 새해에 이루고자 하는 목표와 또 평생의 푯대를 향해 열심히 달려갑시다. 과거의 일은 교훈으로만 삼고 모두 잊어버린 채 오직 목표만 바라보며 달려갑시다. 천국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또 000을 만날 때에 우리의 이마에 여전히 땀이 흐르도록 계속하여 힘차게 달려갑시다. 바울이 품고 있던 부활 신앙의 능력이 우리에게도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 하천덕 외, <추모 설교집>, 청우, 2005, pp.92~95
④ 제목: “미래를 준비합시다”(누가복음 16:1~9)
― 설날 성묘 예배, 불신자
오늘 성경의 말씀은 불의한 청지기가 내일을 지혜롭게 준비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의한 사람이었지만 내일을 준비하는 지혜에 대해서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 청지기처럼 새새를 시작하는 이때에 미래를 준비하는 계획도 세워야 합니다.
프랑스 파리의 어느 수도원 입구에 큰 비석이 있습니다. 그 비석에는 ‘Apres cela(아프레 쓸라)’라는 글입니다. 그 글의 뜻은 ‘그 다음은’입니다. 이 글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습니다.
법학대학에 다니는 어느 여학생이 마지막 한 학기 수업을 남기고 학비를 준비하지 못하여 어느 신부를 찾아갔습니다. 학생의 사정을 들은 신부가 말했습니다.
“마침 조금 전에 한 사람이 좋은 일에 써 달라고 돈을 놓고 갔는데 이건 분명히 자네를 위한 것 같군.”
신부가 돈을 청년에게 건네주자 너무 쉽게 돈을 얻은 청년은 오히려 당황했습니다.
“이거 정말 가져도 되는 겁니까?”
“물론이지 하나님께서 자네에게 주는 것일세.”
“감사합니다.”
청년이 인사를 하고 막 돌아서려는데 신부가 불렀습니다.
“잠깐, 내가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가서 뭘 하려나?”
“예, 물론 학기 등록을 해야지요.”
“그 다음은(Apres cela)”
“공부해야지요.”
“Apres cela”
“졸업하죠.”
“Apres cela”
“변호사가 되어서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서 변호를 하겠습니다.”
“Apres cela”
“돈을 좀 벌고 결혼도 해야지요.”
“Apres cela”
“….”
질문이 반복되자 학생은 신부의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립니다. 학생이 머뭇거리자 신부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 다음은 내가 말하지. 그 다음은 자네도 죽어야 되네. 그 다음은 자네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네. 알겠는가?”
“알겠습니다.”
청년은 신부와 헤어지고도 그 음성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Apres cela”
학생은 계속 들리는 음성에 고민을 하다가 학업을 그만 두고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Apres cela’를 좌우명처럼 여기고 선한 일에 힘썼습니다. 비석에 쓰인 ‘Apres cela’는 그 수도사가 평생 동안 묵상하던 글이었습니다.
우리도 천국을 준비해야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큰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믿음만 있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을 잃지 않도록 늘 예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고 기도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천국에 들어가지만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다가 믿음을 잃어버리고 멸망당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믿음을 잃지 않도록 매일 예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또 하나 준비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열매입니다. 하나님과 성도들과 천사들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이 하나님께 상과 면류관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보여드릴 좋은 열매를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좋은 열매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열심히 충성할 때 맺혀집니다. 사랑의 열매, 봉사의 열매, 전도의 열매, 겸손의 열매 등등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는 자기 것이 아닌 것으로 미래를 슬기롭게 준비했습니다.
새해가 시작되는 지금 우리는 000의 무덤 옆에서 죽음을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한 해의 목표를 정하는 이 때에 우리는 천국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염세주의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소망을 품고 더 열심히 살아갈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를 얻고 있는 것입니다.
내일 또 내일, 그 다음 또 그 다음이 되면 사람들은 차례로 죽게 됩니다. 아무도 피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금년 한 해의 여러 가지 계획 중에 천국을 준비하는 것을 포함시켜야 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준비하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미래의 어느 날 하나님 앞에 설 때 큰 상과 면류관을 받고, 천국에서 또 000를 부끄러움 없이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하천덕 외, <추모 설교집>, 청우, 2005, pp.96~99
⑤ 제목: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의 권세”(마가복음 1:21~28)
― 민속절기
깡패로 소문났던 ‘김익두’가 변화되어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어느 여름날 부흥집회를 인도하러 높은 산길을 오른 후에 잠시 나무 그늘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술 취한 어떤 사람이 올라오더니, 다짜고짜 그를 때렸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때리는 대로 아무 저항 없이 한참 맞다가, 그가 지쳐 잠잠해지자 느닷없이 “예수님은 나 김익두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라고 말했습니다. 그 뜻을 알지 못한 술주정꾼은 김익두란 말에 ‘이젠 죽었구나’ 생각하며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습니다.
그 때 김익두 목사는 “내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이런 일을 다했다면, 자넨 여기서 끝장이었을 텐데 내가 예수님을 믿은 덕에 자네가 살지 않았는가? 그러니 내가 예수님을 믿고 복은 자네가 받은 셈이지”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가 미안해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묻자, 김 목사는 그에게 부흥집회에 참석하자고 제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김익두란 깡패를 변화시키어 목사로 만들었고 술주정꾼을 변화시키어 장로가 되게 하였습니다. 예쑤님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나세렛에서 배척을 받자, 가버나움으로 옮겨서 선교활동에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선교본부라고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회장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었습니다. 당시 종교자도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는 권세가 있어 사람들에게 놀라운 감동과 생명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사람의 나쁜 성품도 변화시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합니다.
예수님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권세란 말은 영어로 ‘authority’라고 하는데, 이 말은 ‘강력한 힘’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은 모든 것을 잘 처리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행사합니다. 그래서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시 74:1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고 권세를 가지고 있고, 악한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변화시킬 권세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런 권세를 주시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회당은 오늘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회당은 주일날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평일에는 교육, 토론, 재판 등의 장소로 사용하였습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영적, 정신적, 도덕적, 요람이며 자주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런 회당에서 예수님이 말씀을 가리치실 때, 권세가 있었습니다.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22)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진리 자체로서 말씀을 가르치시니, 그 말씀에 권세가 있었고 영적 기갈이 든 사람들의 마음을 채워주었고 방황하는 사람에게 분명한 삶의 목적과 의미를 제공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실현될 소망을 주었고 마음이 상한 자를 위로해 주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주며 모든 슬픈자를 위로하는(사 61:1~2)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권세 있는 말씀을 줍니다. 그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의 심령, 곧 골수를 쪼개는 능력으로 임하고(히 4:12)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하여 영생의 문에 들어가도록 인도합니다(요 6:68).
그러면 회당에서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가르치셨을까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1장 15절에 보면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 말씀을 가르치셨을까요? 당시 유대인들은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탐욕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생활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생활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복음을 올바로 믿고, 생활화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두개인처럼 말씀을 자기 입장에서 가르치지 않았고, 솔직하고 명백하게 성경 말씀 자체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 회당에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발견했을까요?
첫째, 예수님이 인간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발전시키지만, 특별히 사람들을 변화시켜 새롭게 살도록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 그자체가 샘에서 솟아나는 생수이며(요 4:10) 우리의 골수를 윤택하게 하는 생명력(잠 3:8)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정의를 실현하도록 용기있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불의와 죄악이 가득 찬 사회에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도록 능력을 주기고, 미움과 분노가 가득 찬 사회를 사랑이 가득 찬 사회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주고 있습니다.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인간의 의식과 마음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인간의 의식과 마음은 정치적, 경제적, 조직적 힘으로 지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힘으로는 인간의 의식과 마음을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의식과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악을 정복하시고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말씀이 있고, 말씀이 있는 곳에 예수님의 권세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영적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항상 모든 유익한 생활을 탈취해 갈 뿐만 아니라 탐욕에 눈이 어두워 악을 범하도록 우리를 유혹하고 사악한 마음을 갖고 질서를 파괴하는 악한 사람으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가르치실 때,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들어와 소리 질러 회당의 분위기를 혼란하게 만들었습니다. 마귀가 회당에 들어왔던 것처럼, 교회 안에도 들어와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일을 방해하고 말씀을 비판하고 거부하고 하나님과 함께 생활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마귀는 정신적으로 불안전한 사람에게는 강하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힘을 쓸 수 없습니다.
본문 23~24절에 보면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실 때,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 마귀도 예수님이 메시아이고, 자기를 멸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사람들은 왜 예수님의 권세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가”(2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 들린 환자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시고 건강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중생의 경험을 하기 전에 마귀의 유혹에 넘어져서, 때때로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였고, 교회를 볼 때마다 알레르기 거부반응을 보였으며 말씀을 무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도록 영성을 개발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하지 말고, 하나님이 좋아하는 일만 생각하고 말과 행동을 해야 하겠습니다. 마귀는 우리 신앙생활의 최대의 적입니다. 이 시간 우리 안에 있는 마귀를 예수님의 권세로 몰아내어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의 권세는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 있었던 유대인들은 마귀를 쫓아낸 예수님의 권세를 보면서 깜짝 놀랐고,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다 놀라고 예수님의 권세 있는 새 교훈과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 즉 순종하는 권세를 온 갈릴리 사방에 전파하였다(27~2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의 ‘갈릴리 사방’이란 말은 ‘그 근처 사방’(눅 4:37)이란 말과 동일하며, 갈릴리 지역보다 더 넓은 범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귀를 쫓아낸 예수님의 권세가 세계만방에 전파되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권세는 어느 한 곳에 제한되어 있지 않고 성령이 임재하는 곳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있는 곳의 마귀는 쫓겨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권세를 믿는 사람은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달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