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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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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이 반백이 된 중년 남자에게 두 명의 연인이 있었다. 그 중 한 여인은 그 남자보다 훨씬 젊었고, 또 다른 여인은 그 남자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런데 젊은 여인은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을 연인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젊은 여인은 남자가 올 때마다 흰 머리카락을 뽑아주곤 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나이 많은 여인은 자기보다 젊은 남자가 연인이라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남자의 검은 머리카락을 뽑아냈다. 결국 그 남자는 대머리가 되고 말았다. 남자는 두 여인중 어느 한 쪽으로부터도 진실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들이 남자를 진실로 사랑했다면 그는 대머리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신은 혹시 사랑하는 사람의 결점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가.
그 긍정의 사랑이 그 사람을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요일 3:14] 1. \'주님의시선\' 카페와 카페지기가 섬기는 \'마산시민교회\'가 더 풍성해 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합니다. 2. 명절기간에 우리의 가계가 우상으로 세상의 죄로 범죄한 것은 없는지 돌아보고 회개의 중보기도를 드립시다.
오늘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저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commitment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commitment란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Lystra)에서 사람들에게 돌로 맞아 거의 죽을 뻔 했습니다. 두 사람이 죽은 것으로 알고 성 밖에 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셨습니다. 두 사람에게는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그 사명(使命)을 다 할 때까지는 죽지 않는다」라고 말한 리빙스턴의 말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사명을 기뻐하시면 그 사람은 그 사명을 다 할 때까지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러면 모세는 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모세가 사명을 다 하지 못하고 죽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의 사명은 가나안 땅 입구에까지 자기 백성을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여호수아에게 맡겨진 사명이었습니다. 저는 그 부분의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의 섭리에 감탄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사명을 주신 것이 80세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지금보다 결코 더 오래 살았다고 볼 수 없지요. 80세면 사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노인입니다. 이 노인에게 「출애굽」이라는 중대한 과업이 맡겨졌습니다. 모세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고사(固辭)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 사명을 맡겼습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가 \"이 사람 모세는 온유(humbleness)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수기 12:3 )라고 했는데, 이 말씀도 달리 해석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겸손했다고 하지만, 80세 노인이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40세의 모세라면 광야에서 불평하는 자기 백성들과 매일 부딪쳐서 싸워야 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죽은 것이 120세입니다. 이 말씀도 그래요. 40세의 모세였다면 네가 내 백성을 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긍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그의 나이가 120세나 되었습니다. 육체의 기력도 떨어질 대로 떨어지고, 욕심을 부릴래야 부릴 기력이 없습니다. \"하나님, 그렇게 하시고 싶으시면 그렇게 하십시오.\" 하나님은 모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일은 나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명이 아니라 지나친 욕심입니다. 욕심이 지나쳐서 독재자가 나옵니다. 욕심이 지나쳐서 지금까지 쌓아 온 것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립니다. 성경에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것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로마서 12:3)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은사(恩賜, gifts)에 대한 말씀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사명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돌 세례를 받고도 죽지 않았던 것은 결코 욕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20절 말씀을 보세요. 두 사도가 돌에 맞아 죽었다고 생각한 루스드라의 그리스도인들이 죽 둘러 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일어나서 그 다음 사역지 더베(Derbe)로 갔습니다. 깜짝 놀란 제자들이 이 몸으로 어디를 가느냐고 말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도는 만류를 무릅쓰고 더베로 갔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더베까지는 무려 96km나 떨어져 있습니다. 꼭 60mile입니다. 60마일로 달려도 한 시간을 달려가야 합니다. \"에이 생각보다 안 머네.\" 하시는 분이 계tl겠지요? 이 거리는 대구에서 포항까지 보다 더 먼 거리입니다. 거기를 돌에 맞은 몸으로 가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그 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commitment입니다. 한번 그리스도을 위하여 헌신하기로 했으면 그 일에 목숨을 내놓는 것입니다. 조금 상황이 나에게 불리해졌다고 해서 그 일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여건이 좋지 않다고 해서 그 일을 그만 두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고 그 일을 그만 두는 것이 아닙니다. 루스드라의 제자들은 더베로 떠나는 두 사도의 뒷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오늘 우리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두 사도들이 보여줬던 total commitment가 있습니까? 언제가 바울은 자기의 심정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린도후서 5:13-15 ) 나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살게 하는 그 힘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랑이 내 속에서 나를 강권한다고 했습니다(Christ?s love compels us).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내가 그 덕분에 살았는데, 이제부터 내 삶의 의미는 나를 위해서 죽으신 그분을 위해서 사는데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고백에서부터 그의 total commitment가 나왔습니다. 루스드라가 어디입니까? 불과 며칠 전에 돌세례를 받아 죽을뻔 했던 곳입니다. 거기로 왜 들어 갑니까? 바울의 사역의 특징은 복음을 한번 전파 해 놓고 얼마 후에 다시 돌아와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내가 전도를 했으면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지 돌아보고 챙기는 것입니다. 그에게 한 시도 눈을 떼지 않는 것입니다. 22절 말씀을 보십시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저는 이것을「세우고 격려하는 사역」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복음을 들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면,「세우고 격려하는 사역」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됩니다. 처음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연약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 어린양을 먹이라.\"(요한복음 21:15)고 했습니다. 그들은 어린양입니다. 어린양은 먹이고 돌보아야 합니다. 어린양들은 여기 저기서 공격을 받습니다. 그들은 시험(temptation) 받기 쉽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연약해지기 쉽습니다. 확신이 흔들리기 쉽습니다. 어린양들은 세워주고 격려해야 합니다. 시카고에 있는 휘튼대학(Wheaton College)의 교목으로 있던 팻 패터슨(Leroy Pat Patterson)목사님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이 어느 프로 야구팀을 위해서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선수들 중에 매우 의기소침해 있는 한 선수를 발견하고서는 이렇게 그를 격려했습니다. \"내 며느리가 아주 열성적인 야구 팬인데, 수년 동안 당신을 좋아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만난 것을 알면 내 며느리가 정말 기뻐할 것입니다.\" 이 말에 놀란 그 선수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나는 오늘 야구를 그만 둘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라고 정색을 하면서 말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그 선수의 실력을 칭찬하면서 야구를 계속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며칠 후에 이 선수에게서 무슨 답장이 온지 아십니까? \"목사님, 저는 목사님의 말씀대로 야구를 계속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패터슨 목사님은 그 자신이 휘튼대학 시절에 재정적인 압박과 공부에 대한 중압감으로 낙심해 있었을 때 어떻게 그것을 이겨냈는지를 소개했습니다. 어느날 역사학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한 교수님이 그를 불러 세웠습니다. \"나는 너를 죽 지켜 봤는데, 정말 힘이 없어 보이는구나.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한가지 사실만은 잊지 말아라. 너는 우연히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너를 이곳에 인도하셨고 또 너를 계속 보살피시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성경에 보면, 신앙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에게도 이런 사역이 필요했습니다. 디모데후서 1:16-18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저가 에베소에서 얼만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그가 이 외로운 사도를 위해서 무슨 일을 했겠습니까? 성경에 그런 말씀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네시보로가 바울을 위해서 했음직한 일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음식을 만들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의 옷을 빨아 주었을 것입니다. 냄새 나는 감옥을 깨끗이 청소해 주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바울의 긴 머리를 깎아 주었을 것입니다. 글을 쓸 수 있도록 종이를 사다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용히 이 외로운 사도의 옆에서 말 동무가 되어 주었을 것입니다. 대단한 일이 아닌 것 같지만 이 일이 이 사도로 하여금 용기를 잃지 않게 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가 나를 자주 유쾌하게 하였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He often refreshed me and was not ashamed of my chains.).....이 말씀에 묻어나는 여운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한번 왔다가 바울이 쇠사슬에 매인 모습을 보고는 돌아섰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보로는 바울의 그런 모습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습니다. 오네시보로의 이런 모습을 보고 바울은 용기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세워주는 사역과 격려하는 사역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이유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환란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라고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믿음을 정직하게 전파했습니다.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믿음의 본질(本質)을 말해 주었습니다.
\"예수 믿으면 사업이 잘 되는 것만은 아니다.\" \"예수 믿으면 꼭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말을 듣지 못하고 예수를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으면 축복이 임할 줄로 믿고 교회에 나옵니다. 그러다가 시험에 듭니다. 그에게는 이 시험을 감당할만한 믿음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예수를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 지금 바울은 처음 믿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과거 예수 믿기 시작했을 때 이 사실을 몰랐던 분들 계시면 오늘이라도 이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큰 고난도 있고 작은 고난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써 감당해야 할 어려움이 있습니다. \"We must go through many hardship to enter the kingdom of God.?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예수를 믿음으로써 받는 불 이익이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손해 보는 일이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불편한 일이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참아야 하는 고통이 있습니까? 놀라지 마세요. 지금 바울과 바나바 두 사도는 이 말을 해 주기 위해서 돌에 맞아 죽을뻔 했던 루스드라에 다시 왔습니다. 두 사도는 루스드라로, 이고니온으로, 안디옥으로, 비시디아를 지나 밤빌리아로, 버가로, 앗달리아로, 그리고 처음 출발지 안디옥으로 다니면서 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두 사도는 환란 중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세워주고 격려했습니다. 세워 주는 사역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를 강하게(strengthen)하는 것입니다. 어린양들에게 말씀을 먹이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에게 음식을 떠 먹여 주듯이 그렇게 하나님 말씀을 떠 먹여 주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말씀으로서가 아니라 알아 듣기 쉬운 말씀을 먹이는 것입니다. 믿음의 골격이 튼튼하게 자라도록 말씀을 먹이는 것입니다.
국가 경제가 침체되어서 직업을 얻기가 어려워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두 사람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모여서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가 하고 궁금해 했습니다. 며칠 후 그 중의 한 사람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너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찾았어. 히브리서 6:10절 말씀이야. 하나님은 불의치 아니하사 너의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 버리지 않으신다고 했어. 네가 주님께 성실한 것처럼 주님도 너에게 신실하실꺼야. 나는 그 사실을 깨달았어.\" 그들은 그 말씀을 책상 위에 붙여 놓고 기도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곧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여전히 내 삶 속에서 유효(有效)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보다 더 신나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삶이 해석되어질 때 참 격려를 받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지속적으로 「세우고 격려하는 사역」이 필요합니다. 이 사역을 누가 감당해야 합니까? 그리고 누가 감당할 수 있습니까? 목사가 감당해야 할 사역입니까? 물론 목사는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5 서로가 돌아보아 연약한 사람들을 세워 주십시오. 서로를 돌아보아 격려하십시오. 특히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세우고 격려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