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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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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바이처 박사가 소년시절, 벌에 쏘여 한참을 운 일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 통증은 이미 사라졌는데도 계속 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울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결국 누군가가 자신을 위로해 주기를 바라고 있던 것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하찮은 일에도 위로를 받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위로 받고자 하는 이는 많아도 위로하는 이는 적은 것이다. 이것이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로 가게 된 첫 동기라고 한다. 교회에서도 위로 받고자 하는 이가 많다. 그래서 가난한 자의 약점을 이용한 기복 신앙적 교단이 위세를 떨친다. 심지어 고아원 방문, 봉사활동, 전도를 해도 자기 위안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방글라데시아나 이디오피아 난민에게서나 볼 수 있는지 알았던 이들이 이 화려한 한국 땅 아래도 살고 있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추운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날들이 근 한달 가까이 이어졌다. 그러기에 하루아침에 실직으로 말미암아 노숙자로 내 몰린 사람들, 추운 겨울을 허름한 단칸방에서 난방도 없이 지내며 떨고 있고 얼어 죽고 굶주려 죽는 노인들. 겨우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세상을 한탄하며 하루하루를 때워 가고 있는 이들이 생각이 난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위로의 손길이다. 죽은 나사로의 누이 앞에서 눈물 흘리시던 예수님이 생각난다. 위로에 굶주려 있는 이 땅의 모든 버림받은 이들의 눈물 속에서 슬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이가 우리 그리스도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주님은 은밀한 것을 지켜보시는 분이심을 당신은 아는가?
[마 6:4] 마태복음 6:1-4
주님은 오늘 마태복음 5장 20절 말씀에서 그리스도인이 바로 서야 함에 대해서 강하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런데 이 말을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열심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해야함을 가리키는 교훈이 아닙니다. 바른 신앙에 기초해서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 우리 이웃을 바로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나름대로 열심은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해석하지 못함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왜곡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이 사람들의 잘못들을 바른 뜻으로 교정시키시면서 참으로 엄청난 그리스도인의 신앙 및 윤리의 대헌장을 선언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기독교 신앙의 근본 뿌리는 죄인까지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이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을 본받는 것입니다.
이제 마태복음 6장부터는 실제 생활을 통해서 신앙과 삶의 참된 원리를 우리 주님께서 가르치십니다. 6장 1절 말씀은 6장 전체 내용의 서론에 해당되는 것이고 6장 2절~18절까지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삶을, 그리고 6장 19절에서 마지막 34절까지의 말씀은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일반적 생활에 대해서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염두해야 할 점은 교회에서의 경건생활과 세상에서의 봉사생활을 따로 구분할 필요도 없고, 구분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구분해서 따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땔 레야 뗄 수 없는 분위기의 관계요, 이 둘은 항상 같이 이루어져야 우리 주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 본문 1절 말씀에서 그리스도인이 신앙과 윤리의 지침이 되는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우리의 신앙적 동기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 자체만으로 만족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잘 보이고 칭찬 받기 위해서 신앙생활 하게 되면 우리의 마지막은 비참하게 되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한다고 우리 주님은 경고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님은 거듭해서 이점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6장 2절 말씀에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장 5절 말씀에서도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5장 16절 말씀에서도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여기 받았다고 하는 말은 보수를 전액 다 받았다고 하는 전문적인 상업 용어입니다. 이제 더 받을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에게 인정 받을려고 하는 모든 행위는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상도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에게 잘 보일려고 행한 모든 선한 일들, 비록 자기를 내어주는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하더라도 이 모든 선행이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보다 더 무서운 심판의 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으로부터만 상을 받아야겠다는 선한 동기를 가지고 신앙생활과 봉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일려고 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먼 변질된 행위요, 하나님께서 열납하시지 않은 가인의 형식적인 제사와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고 있습니까?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신앙생활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애쓰고 수고하고 있습니까?
우리 주님의 말씀을 마음 판에 깊이 새기십시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유대인들은 종교 생활의 3대 행위, 즉 경건하고 의로운 삶에 대해서 크게 3가지를 들고 있는데. 첫째가 구제요, 둘째는 기도이며, 셋째는 금식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 3가지에 대해서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시고 있는데, 오늘은 구제에 대해서만 생각하겠습니다. 구제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우 신성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제와 의를 같은 단어로 사용해, 체다카(tzedauah)라 합니다.
즉, 다른 사람은 구제하는 것과 의롭게 사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일한 개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지혜 문서인 토비트서 1장 8절 말씀에 금을 쌓아 모으는 것보다는 구제하는 것이 더 좋으니 구제는 사망에서 구해주고, 모든 죄를 깨끗게 한다>했습니다.
또한 랍비의 교훈 가운데도 <\"구제를 행한 자는 모든 제사를 드린 자보다 크다.\"> 했습니다. 구제는 선행 중에 가장 첫 번째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도 구제에 대해 가장 먼저 가르치고 있는데, 문제는 구제를 하되 어떤 자세를 구제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구제를 하되 어떤 마음으로 어떤 동기로 구제해야 하는가?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점에 대해 우리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2~4절)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첫 번째는 구제할 때 외식하는 자 같이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외식이 무엇입니까?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말고 행위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런 외식하는 자를 가장 미워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를 가장 크게 꾸짖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구제는 물건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깊은 곳에 있는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정성이, 사랑이 담기지 않는 것은 구제가 아닙니다. 체면 때문에, 자기 이름을 내려고,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구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구제해야 합니다. 감동된 마음으로 구제해야 하며.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 없이 구제해야 합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구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구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감격으로 구제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은혜가 은혜되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 주님께서는 구제할 때 은밀하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왜냐하면 구제는 사람에게 보일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구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밀하게 구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구제받는 사람의 인격이 손상되지 않도록 은밀하게 해야 합니다. 고아원이나 불우시설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가장 싫어하는 것은. 물건 전달하면서 사진 찍는 것이라고 합니다. 구제했으면 그걸로 끝내세요. 사진 찍고 요란 떨지 마세요. 이것이 상대방을 실족하게 만듬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구제하면서 생색내어서도 안 됩니다. 자기이름 드러내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기쁘고 고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에 부담을 지는 일이 됩니다.
인격적으로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도움을 받는 사람의 정서적인 면들을 잘 고려해서 구제하기 위해서는 은밀한 구제가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참다운 구제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보상해 주심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본문 4절 말씀에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니라.>
6절 말씀에도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18절 말씀에서도 <……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아버지께서 갚아 주신다고 3번씩이나 보증을 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행위대로 갚아주십니다.
마태복음 10:42절 말씀에도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우리의 삶 가운데서 영원히 남는 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구제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되는 것은 주님의 사랑으로 남에게 베푸는 일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세상과 더불어 끝납니다. 그러나 구제는 하나님 나라에 이어집니다. 그러기에 사도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말씀하기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 갚아 주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