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 강해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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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허용한 상태에서 원문 전체를 꾸준히 올려주시면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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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자는 어떠한 사람인가? (암 3:3-8)
3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4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고야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5 창애를 땅에 베풀지 아니하고야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아무 잡힌 것이 없고야 창애가 어찌 땅에서 뛰겠느냐 6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8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이 시간에는 “사명자는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제목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가시떨기에 불로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사명을 받습니다. 가시떨기에 붙은 불은 바로 사명자의 모습입니다. 가시와 같이 보잘 것 없고 죄 많은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사명의 뜨거운 불길로 함께 하시면 귀한 사람이 되고 큰일을 이룹니다. 오늘 본문의 아모스의 모습이 바로 그 모습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이스라엘 심판의 예언에 반문하는 백성들에게 아모스 선지자의 첫 번째 답변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는 답변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제기되는 또 한 가지의 의문 즉 아모스의 예언이 참 예언인가? 아모스의 선지자적 권위에 관한 의문에 대한 두 번째 답변입니다. \"네가 도대체 무슨 권위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고 있느냐? 너는 한낱 목자에 지나지 않지 않느냐? 정말 너는 하나님의 선지자냐?\" 하는 질문입니다.
이건 있을 수 있는 질문입니다. 사단에게 속아서 한 거짓예언이 많기 때문입니다. 성경기자는 100%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성령의 은사 받은 자라 할지라도 항상 참 예언만 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잘못될 수도 있어요. 은사자의 영적상태가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분별하라고 했겠습니까? 구약에도 거짓선지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자 아모스는 주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예언하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말씀을 주시되 보통 같이 아니라 내 가슴 속에 이렇게 이렇게 주셨다. 하나님과 나는 일심동체가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여호와께서 말씀을 주실 때 선지자의 마음에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가를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오늘 날 성령 받은 참 사명자의 마음은 과연 어떠한가를 엿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내가 진정 사명감 가운데 있는지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명자는 과연 어떠한 사람일까요?
1. 하나님 앞에서 사명 받은 확신을 가진 자입니다.
3절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여기 두 사람은 하나님과 선지자 자신을 비유한 말입니다. 즉 내가 한 말들은 나 자의에서 한 말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에게서 직접 받았다. 나는 하나님의 그 마음이 내 마음이 되어 내 하나님과 같이 일심동체로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품고 계신 그 불타는 마음이 내 심령에 성령으로 타오르는 것이 바로 사명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사명을 받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사명은 내가 받는 것입니다. 남이 하라 해서가 아니라 그것은 참고일 뿐 사명은 내가 직접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자가 이것을 해라 말한다 해도 그것은 참고일 뿐입니다. 내 가슴에 하나님의 부름 받은 사명감이 일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사명감은 뚜렷함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에게나 이미 와 있습니다. 항상 이루고 싶은 어떤 마음 그 마음이 사명은 아닌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아모스처럼 나는 하나님께 사명을 받았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명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어 동행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늘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2. 사명자는 사명에 사로잡힌 자입니다.
4절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고야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사자는 먹이를 사냥할 때는 소리 지르지 않습니다. 사냥할 때는 상대에게 들키기 않기 위해 자세를 낮추고 살금살금 기어갑니다. 그러나 일단 사냥에 성공하게 되면 우렁차게 소리를 지릅니다. 왜 그럴까요? 이 먹이를 노리는 다른 동물에게 먹이에 눈독 들이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내가 움킨 먹이를 누구에게도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나 다른 짐승들에게 양보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때 부르짖는 소리는 공포감을 안겨주는 소리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면 선지자의 마음은 온통 그 메시지에 사로잡힙니다. 기쁨의 내용이라면 좋겠지만 슬픔의 메시지라면 그 고통을 누가 이해할까요? 그러므로 선지자의 외침은 단순한 문장의 나열이 아니라 자기의 내뱉는 신음소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 사명을 완수하기까지는 그 부담감이 떠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명을 주시면 그 사명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사명에 사로잡혀야 사명자입니다. 사명감에 충분히 사로잡히게 되면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릴 수 없습니다. 저리가 이건 내가 받은 사명이야. 이걸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고 양보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어. 먹이를 움켜쥐고 으르렁대는 사자와 같이 그 사명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내가 받은 사명이라는 확신 가져야 합니다.
3. 사명자는 사명에 사로잡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자입니다.
내가 받은 사명이라고 사명만 받아 놓지 않습니다. 5절 “창애를 땅에 베풀지 아니하고야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아무 잡힌 것이 없고야 창애가 어찌 땅에서 뛰겠느냐” 창애는 덫입니다. 원문에는 ‘먹이를 놓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새 잡는 그물을 치고 먹이로 유혹해서 새를 덫에 걸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가 덫에 걸려 펄덕펄덕 난리가 났습니다.
이렇게 아모스는 자기를 새에 비유합니다. 나는 덫에 걸렸다. 내가 덫에 걸리지 않고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니까 덫에 걸린 새처럼 발악(발선?)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새가 덫에 걸리면 살아나려고 발악하다보니 날개가 떨어지고 다리가 부러지고 머리가 깨지듯이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받고 보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심정을 가져야 사명자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에 진정 사로잡히면 나와서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고, 전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고,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자기에게 맡긴 그 일에 힘쓰지 않고는 살 수가 없어요. 마치 덫에 걸린 새가 살아야겠다는 마음처럼 오직 그 길밖에는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도 감화 감동 주장 충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저 감화 감동만 받지 말고 주장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사명자는 사명감을 가슴에 안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4. 사명자는 사명감이 불타서 견딜 수 없는 자입니다.
6절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가장 공포스런 소식은 전쟁입니다. 이스라엘에 전쟁이 나면 나팔을 불었습니다. 군사전문가의 말을 빌리면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전쟁은 멀어진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일반적으로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받은 선지자는 가만히 있지 못할 정도가 아니라 견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세요. 렘20:9에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사야도 주님의 마음을 알았기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과 아울러 성령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입니다.
이렇게 사명에 불타 견딜 수 없어야 사명자입니다. 견딜만 하면 안 됩니다. 견딜 수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루터가 그랬고 칼빈이 그랬고 쯔윙글리가 그랬고 역사 속에 많은 하나님의 참 종들이 그랬습니다. 이단 정죄를 받고 화형을 당하고 추방을 당한다 해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청결케 하셨습니다. 유대의 쟁쟁한 권력자들이 장사하고 있는데 거기에 도전하셨으니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요2:17) 제대로 딱 걸린 것이지요.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알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아버지께서 그들의 그 일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고 아프시고 또 아프심을 아셨으면 그렇게 하셨을까요? 얼마나 아버지의 마음을 아셨으면 자기 몸을 십자가에 매달도록 내맡기셨을까요? 이 마음이 바로 사명감입니다.
5. 사명자는 사명에 죽고 사명에 사는 자입니다.
7-8절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여기 7-8절의 말씀이 오늘 읽은 본문의 결론입니다. 결국 이 말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 주셨음을 의심하지 말라. 여호와의 말씀은 나에게 사자의 부르짖음과 같다. 그러므로 나는 말씀을 주신대로 목숨 걸고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동족에게 심판 예언 누가 전하고 싶겠습니까?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이 맘에 든다고 전하고 들지 않는다고 전하지 않을 수 있나요? 가슴 속에서 사명감이 불타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나요? 그보다 핍박을 받더라도 그 사명에 목숨 거는 것이 더 편한 것이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사명에 죽고 사명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명자는 다른 말로 순교자입니다. 헬라어 \'마르튜레오\'(martyreo)는 본래 \'증인\'을 뜻하는 \'마르튜스\'(martus)에서 온 말인데 그 말은 후에 \'순교자\'를 칭하는 말로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명자 설교자는 다른 말로 순교자입니다. 예수님도 사명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스데반도 말씀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으며, 모든 사명자들이 목숨 걸고 자기를 불태웠습니다. 사명은 우리에게 목숨을 걸만큼 강력한 불을 던져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사명자입니다. 우리 주님은 죄인을 구할 불타는 사명감 가지고 세상에 오셨고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품고 목숨까지도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 내가 받은 불타는 사명감이 있습니까? 자기 사명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은혜로 충만 받아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의 불로서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다 이루는 아모스와 같은 참 사명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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