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설교 70 편 모음

하반기 주일설교 70편"|주일낮설교
새생명축복 | 조회 36 |추천 0 |2011.09.23. 11:44 http://cafe.daum.net/SermonSchool/HmtY/349

이 가을에

하나님의 은총이 한가위 보름달 마냥 떠오르고

이제 곧 오곡백과 그 결실을 거두어들여

산천 초목 그리고 우리네 삶에 풍요를 노래할 것이기에

짙어오는 단풍이 정겹고

새로운 계절의 풍성함에 더욱 하나님의 은총을 기리는 강단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제목 :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본문 : 갈라디아 5:1, 13-15

자유인의 복을 받으시고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부모님은 자녀가병들 때 그 아이가 속히 일어나서 마음껏 밖에 나가서 뛰어놀고 기쁘고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처럼 우리 인간이 자유를 잃고 죄의222 종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그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우리를 저주의 쇠사슬, 죄악의 쇠사슬, 온갖 질병과 멸망의 쇠사슬, 사망의감옥에서 우리를 건져 자유케 하여 주신 것입니다. 자유는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만 가지 자유가 있어도 하나님이 주신 죄로부터의 자유, 이 하나의 자유가 없는 한 만 가지 자유는 아무 의미가없는 것입니다. 만 가지 자유가 설령 없어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구속함을 받으면 그 사람은 만 가지 이 세상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를 누리며 자유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자유는 절대로 이 세상에 없습니다. 어디 가도 없습니다. 지위가 높다고 자유 있는 것 절대로 아닙니다. 미국에 있는 것 같지만 미국에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것 같지만 우리나라에도 자유 없습니다. 인간이누려야 할 참 자유는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성공하면 있는 것 같고높이 출세하고 돈 많이 벌고 고급자가용 몰면 자유인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자유는 오직 하나님이 주신 선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것입니다.오늘 우리가 6.25사변, 그때에 비하면 백배로 좋아지고 천배, 만배 잘살지만 자유함이 있느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이 고민하고 고통당하고 자살하고 우울증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자유가 아닌 한 앞으로 우리가 더 백만배 좋아질지라도 거기에 자유함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자유, 주님이 주신 자유, 이것만이 참 자유라는 것입니다. 오늘 자유를 모르는 현대인, 자유를 잘못된 곳에서 찾고 일생을방황하는 자유인들을 너무나 많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놀고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자유라고 착각하며 잘못된 자유의 길에서 길 잃고 방황하는 수많은 자유인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자유인이 되지 아니하는 한 이 세상에서 자유를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1967년, 소련 공산 독재자 가운데 가장 무서운 독재자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는 여인이 있습니다. 이분은공산주의 백성들의 고통을 당하지만 공산주의 통치자인 스탈린이야 말로 만 가지 부유함, 없는 것이 없었지만 이 여인이 자유함이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과 사랑해도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나중에는 드디어씽이라고 하는 인도남자와 사랑해서 그와 결혼하지만 역시 그도 죽습니다. 그래서 그의 유해를 인도까지 자기가 운반하면서 드디어 스베틀라나는 러시아를 탈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진영으로 뛰어 들어서 미국의보호를 받아 미국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그때 나이가 41살입니다. 그는 자유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 가면 자유로울 것이다, 자유 진영은 야단이 났습니다. 세계적인 최고의 뉴스였습니다. 세상에 스탈린의 딸이 자유진영으로 탈출해 왔으니 공산주의도 체면이 말이 아니고, 세상에 이런 특집기사가 어디 있습니까? 대서특필이 됐습니다. 날마다 신문기사, 기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미국에 자유가 있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미국에 자유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인이 아니면 미국의 자유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자유케 하신 참 자유인으로 미국에 가야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분은 미국에 갈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서도 미국이상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그는 미국에서 자서전도 기록하고 영웅같이 대접받았지만 그의 마음은 텅 빈 가슴이었습니다. 어디에도 위로받을 수 없었습니다. 월리암 레슬리 피터스와 결혼했지만 또 실패합니다. 그는 미국에 살기 싫습니다. 미국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래서 영국 캠브리지로 1982년 건너가 삽니다. 영국이야말로 미국보다 더 좋을 것이20101128 주일설교자유인으로 사십시오- 2 -다. 세계에서 가장 좋은 나라, 미국 아니면 영국, 영국 아니면 미국인데 영국 캠브리지에 가면 정말 행복할것이다, 아니었습니다. 영국에도 그가 찾는 자유는 없었습니다. 드디어 1983년에는 러시아로 돌아갑니다. 빙빙 돌아서 그 나라를 배반하고 남의 나라로 갔다가 또다시 러시아로 돌아오니 러시아도 이것을 죽여야 되냐살려야 되냐,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되냐. 공산주의 망신을 온 세계에 다 시킨, 그러나 스탈린의 딸이다 보니 어찌할 수 없이 받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에도 돌아간 스베틀라나는 견딜 수 없어서 지금은 캘리포니아로 또 다시 돌아갔습니다.사랑하는 여러분! 자유가 어디 있다고 생각합니까? 누구하고 만나서 어떻게 살면 자유롭다고 생각합니까?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느 교회 가야, 어느 나라에 살아야, 얼마나 잘살아야, 얼마나 좋아야 자유인이될 것입니까? 전 세계를 다 주면 여러분이 자유로울 것 같습니까? 그리스도가 없는 한, 인자가 자유케 하지아니하면 자유함이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대통령이라고 자유함이 있는 것 아닙니다. 대학에서 자유가 오는 것 아닙니다. 그는 헛된 자유의 유혹을 받아 일생을 길 잃고 방황하는 고통스러운 삶이 된다는것입니다. 자유는 주님이 주시는 자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여 주셨습니다. 그가 저주를 받음으로 저주에서 자유, 그가 죽임을 당함으로 죽음에서 자유, 그가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 죽으심으로 모든 질병과 모든 가난과 모든 불행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함을 얻은 사람은 정말 이 세상에 누구도 그를 넘어뜨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이 내 마음에 심어주신 자유, 참 자유, 오늘도 이 자유 안에서 자유인으로, 우리를 축복하신 자유의 날, 거룩한 날, 생명의 날, 자유를 주신 만왕의 왕이신 자유의 나라를 다스리시는 왕의 왕이신 주님께 나아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코끼리가 아무리 능력이 있고 힘이 있다고 할지라도 쇠사슬에 매어있는 한 토끼만한 행복을 누릴 수 없고토끼의 발걸음을 따라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매어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힘이야 무한하고 마음대로 될 것 같지만 매어있는 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독수리 같이 아무리 힘 있고 능력 있어도 매어있는 한 파리 하나를 따라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새 한 마리의 기쁨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힘 있게 능력 있게살려하지 말고 자유의 힘, 자유의 능력을 누리는 성도되시기를 바랍니다.오늘 우리나라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 자유로운 땅에서 더 새로운 자유를 찾아 스베틀라나처럼 벗어나려고 하는 분이 많습니다. 내 남편이 나를 괴롭게 하니까 남편을 벗어나야 되겠다. 그래서 남편과 아들을 버리고 떠나는, 집을 벗어나는 여성들이 너무 많습니다. 집구석 때문에 인생 망친다, 집을 떠나야 되겠다, 우리교회도 너무 많은 어머니들이 집을 나가서 할머니 밑에 자라는 애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옛날 애인하고 다시 만나서 대학 다닐 때의 멋진 애인 다시 만나서 행복하게 살겠다, 자유롭게 살겠다, 그게 자유일 것같습니까? 이런 것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을 죽이고 가는 분이 많습니다. 죽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사람 때문에 불행하다, 벗어나야 되겠다, 죽이고 살 것 같습니까? 버리고누구 만나면 행복할 것 같습니까? 가짜 자유의 맛이 달기는 합니다. 모든 가짜는 답니다. 사탕으로, 설탕으로 다 칠했기 때문에 모든 거짓은 답니다. 그러나 그 단맛은 잠깐인 것입니다. 참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는것입니다. 자유인, 주님이 주신 자유, 참 자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주님이 주신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우리에게 있는 모든 어려움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는능력이 있기 때문에 자녀도 잘 기를 수 있고 남편도 잘 도울 수 있고 내조도 잘할 수 있고 살림도 잘살 수있습니다. 벗어나는 자유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힘 있고 능력 있게 사명을 다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안에 살면서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대한민국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해서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을 벗어나야 되겠다, 그래서 대한민국을 침 뱉고 저주하고 김포공항을 떠나는 분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거기에서 지금은 유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제가 캐나다도 이번에 가니까 캐나다 가는 분보다 돌아오는 분이 훨씬 많답니다.자유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여 나를 자유케 하소서.” 할렐루야! 여러분이 주님이 주신 자유를 누리면 여러분 안에 있는 근심도 떠나가고 질병도 떠나갑니다. 자유인에게는 견뎌내지 못합니다. 있지를 못합니다. 학대받고 멸시천대 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다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떠나가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주신 자유, 거룩한 자유, 위로부터 주신 자유입니다. 사람이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20101128 주일설교자유인으로 사십시오- 3 -님이 주신 자유인 것입니다. 우리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시는 이 놀라운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가 여러분의 가정과 남은 생애, 삶 위에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이 땅위에 험한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 다 예수를 친구 삼아 이 평화를 누리라고했습니다. 평화 어디서 오냐, 평화 하늘에서 내려오네, 주님께로부터 내려오네. 주님이 주신 평화, 주님이 주신 자유, 우리 인간이 가져야 할 참 자유는 위로부터 온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만드는 이세상의 자유는 필요 없느냐? 그렇지 않다라는 겁니다. 이 자유가 있는 곳에는 다른 자유도 있고 다른 자유를 만들고다른 평화를 만든다라는 것입니다. 이 샬롬은 이 세상의 평화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피스메이커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화를 얻는 분은, 죄사함을 받은 이 평화가 있는 분은 가정에 다른 평화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어제 저녁에 정운찬 전 국무총리께서 오셔서 한 시간 동안 간증하셨습니다. 만여명의 성도들이 정운한 전총리를 통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 밑에 지냈는데 어머니가 한번도아들을 보고 이름을 부르거나 그렇게 하지 않았답니다. 언제나 “그러시게나. 밥 먹으시게나. 잠자시게. 일어나시게.” 그렇게 말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그 가정이 얼마나 평화로운 가정입니까? 가난하지만 그래도 그아이들 다 평화, 하나님 주신 평화가 그 집에 있었습니다. 돈이 많지 않아 가난했습니다. 얼마나 가난했느냐?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6년 동안 밥을 한 끼도 못 먹고 전부 죽만 먹었답니다. 이 가정에 평화가 있었습니다. 아들 보고 “그러시게나. 주무시게나.”여러분, 평화 돈으로 만든다고 아직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잘 살아야 평화가 온다고 생각합니까? 이 평화가모든 평화, 이 자유가 모든 자유를 만들어 낸다라는 겁니다. 이 자유가 없으면 잘 살아도 지옥이라는 겁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못살아서 이러냐?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 평화가 없기 때문에, 이 자유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롭게 살지 못한다는 겁니다. 청교도들은 미국에 잘 살려고 간 게 아닙니다. 다른 자유를 찾으려고 미국에 간 게 아니라 유럽에 있는 모든 크리스천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하나님을 잘 믿는 영적자유인이 되려고 고향을 버리고 다 떠나서 간 곳이 미국입니다. 그들이 가서 무엇을 만들었습니까? 다른 자유를 만든 겁니다. 민주주의의 멋진 자유로운 국가를 만들고 자유경제시장의 멋진 경제대국을 만들고 군사강국을 만들고 교육선진국을 만들고 최고의 문화와 최고의 번영과 최고의 발전을 가져온 겁니다. 왜? 참된 자유는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변화를 주고 생산하고 발전시켜 나간다는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 나의 구주로 믿는 어린아이는 가만히 둬도 성공한다는 겁니다. 왜? 자유인은 방황하지 않습니다. 공부 열심히 합니다. 성공한다는 겁니다. 참 자유를 위로부터 받아 죄사함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가정, 사업 잘 한다는 겁니다. 부지런하기 때문에. 죄에 매어서 스트레스 받고 걱정이 많아야 피곤한 것이지,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으니까 열심히 살고 부지런히 살고 정직하게 살고 이러니 잘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잘사는 자가 누구냐 물으신다면 그는 참자유인이라는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이 누구냐 물으신다면 자유인이라는 것입니다. 자유인은 행복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매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주님이 주신 자유입니다.죄로부터의 자유, 마귀로부터의 자유, 온갖 저주로부터의 자유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유가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많은 사람은 교회 나가면 매인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자유의 나라에 매이는 것입니다. 자유인으로 사는것입니다. 자기 멋대로 사는 삶이 자유라고 생각을 해서 여기에 오면 매인다는 생각을 합니다.저는 20살 되어서 일찍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정말 매였습니다. 다 버리고 좁은 길로 들어섰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도 너무 일찍 주의 종이 돼서 걷는 것도 천천히 걸어야 되고 말도 천천히 해야 되고항상 어른들 노인들 상대해서 살아야 되고 심방 다녀야 되고, 내가 너무 매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를 붙잡아주시는 주의 종이 돼서 참 자유인으로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이세상의 어떤 축복보다자유인보다 더 큰 축복으로 알고 주님을 따라 갔습니다. 세상친구들과 다 멀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가 오랜만에 한번 운동회 때 갔는데 그전에 모든 친한 친구들이 운동회 때 다 와서 제 주변을 둘러싸면서“삼환아, 너 전도사라면서? 이 자식 웃긴다.” 그러고 담배를 피우면서 나한테 연기를 뱉고 술 취해 가지고술 냄새가 풍기면서 비틀거리면서 나를 비웃었습니다. 자기는 자유인이고 그전에 나는 너희들보다 훨씬 내가20101128 주일설교자유인으로 사십시오- 4 -똑똑하고 공부도 잘하고 실력 있고 내가 다 잘했지, 싸움도 너희들보다 잘했어. 그러나 나는 이제 자유인이되면서 그런 싸움 안 하고 그런 짓 안 해. 주님 위해 살면서 좁은 길로 들어선 거야. 너희들은 나를 한심하게 느끼겠지. 너희들이 세상으로 마음껏 가니까 자유인이라고 생각했지. 길 잃고 방황하고 그 집이 무너지고그 인생이 다 무너졌어. 그는 사탄에 의해서 끌려간 삶이지 자유로운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다 망하고 다 떠나갔습니다. 주님이 주신 자유, 좁은 길에 있는 것 같지만 그 가는 길에 무한한 자유인의 영광이 오고, 축복이 오고, 영원한 하늘과 땅에 축복이 오는 것을 많은 사람은 모르는 것입니다. 저같이 시골에서 태어나서 좁은 길로 간 사람이 수십개국을 돌아다니고 수많은 지도자들을 만나서 수많은 일을 하는 것은 주님이 나를독수리와 같이 저 영원한 창공을 날면서 자유인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나를 이렇게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이번에 중국에서 아시안게임에 저도 해외에 나가면서 뉴스를 들으면서 다른 것은 다 두고 금메달 딴 거를늘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메달보다 더 중요한 게 일본 몇 개 땄는지, 일본보다 우리가 앞섰다는 것이 너무 기분이 좋은 겁니다. 우리가 일본에게 너무나 오랫동안 억압을 당한 이유도 있겠지만 우리는 일본과 선의의 경쟁을 해서 경제든 정치든 문화든 스포츠든 우리는 앞으로 일본을 따라가서 앞에 서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체면이 있지 일본한테 뒤떨어질 수 없습니다. 일본은 이번에 한국타도를 외치고나왔는데도 그 정도였습니다.이번에 박태환은 메달 7개를 땄습니다. 박태환은 좁은 길로 간 사람, 모든 자유를 포기하고 물속에 있는 시간이 물 밖에 있는 시간보다 많고, 물에 인생을 걸고 아무 것도 보지 않고 물만 보고 물속에서 살았습니다.그러나 오늘 박태환 보세요. 물의 훈련을 잘 받은 박태환은 밖의 길이 다 열립니다. 그 사람 자동차도 버렸지만 세계의 좋은 차가 그의 것이 되고, 온 세계 가는 길이 다 열리고 비행기를 타도 일등실을 타고, 어디에가도 특별대우를 받는 겁니다. 온갖 좋은 것 다 입고 다니고 모든 영광이 다 오는 겁니다. 여러분, 자유인의길을 가면서 좁은 길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교회 생활에 잘 순종하고 먹지 말라는 것 먹지 말고, 하지 말라는 것 하지 말고, 교회라는 하나의 수영장에서 여러분이 훈련을 잘 받으면 좋은 날이 올 줄 믿습니다. 주님을 따라가서 불행한 사람은 역사에 한 명도 없습니다. 주안에 축복, 기쁨, 은혜가 있습니다.빠삐용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다 한두 번은 보셨을 겁니다. 저도 여러 번 봤습니다. 빠삐용 역할을 하는스티브 맥퀸과 그의 친구 드가 역을 하는 이빠진 더스틴 호프먼을 보게 됩니다. 얼마나 멋있는 연기인지모릅니다. 이 빠삐용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입니다. 1930년 파리의 술집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 검사가진범은 놓치고 빠삐용을 지목해서 구속하게 됩니다. 아무 죄 없는 빠삐용은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30년이라는 길고 긴 세월을 감옥에서 고통을 당하며 삽니다. 억울함을 말하면 말할수록 더 독방으로 집어넣고 나중에는 외로운 고도로 가서 상어들이 이글거리는 전혀 탈출할 수 없는 외로운 섬에 가서 그는 갇히게 됩니다.그러나 그곳에서도 기어이 탈출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나를 억울하게 한 그 원수 검사를 내가 꼭 보복을하고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내가 그 원수를 갚지 않고는 안 된다, 반드시 나가서 그 검사를 찾아서 죽일 것이다, 원한에 맺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몇 번 거기서도 탈출하려니까 그때마다 안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밖에 나가서 혼자서 그 물을 보고 있을 때 물이 파도가 치면서 거품을 품으면서 그 물이 돌아나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파도가 친 물결이 다시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면서 드가에서 얘기합니다. 그러나 드가는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드가가 말하기를 “네가 아무리 이 섬에서 탈출한다 해도 네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너는 여전히 감옥이다.” 가나 안 가나 나가봐야 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 증오심을 가지고 사람 죽이려고 나가서 그게 똑같은 감옥이라는 겁니다. 네가 설령 그 사람을 찾아 죽인들 성공이냐는 겁니다. 또 감옥 들어올 텐데. 그래서 드가는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빠삐용은결단을 내립니다. 야자수 열매 넣은 바구니를 던지고 그 위로 탈출합니다. 그리고 친구보고 손을 흔들며 그섬을 져나갑니다. 영화는 거기에서 끝이 납니다. 그다음 이야기입니다. 거기에서 나온 빠삐용은 남미로 가서돈을 벌어서 검사를 찾아 전국을 해맵니다. 유럽천지를 뒤지고 남미까지 가서 이 검사를 찾지만 결국 못 찾습니다. 돌아옵니다. 날마다 잠이 오지 않습니다. 거기에 있을 때도 감옥이고 나와서도 감옥이고, 그 미움으로 사니 세상에 딱 그거 하나밖에 생각 안 합니다. 미운 그 검사 하나만 생각하고 사는 겁니다. 감옥에 있을때도 감옥, 나와 있을 때도 감옥입니다. 먹으나 앉으나 누우나 그 감옥에서 탈출을 하지 못하는 겁니다. 인20101128 주일설교자유인으로 사십시오- 5 -간이 넓다고 넓게 사는 게 아닙니다. 좋다고 좋게 사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죄에서 우리를 건져주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다 갇혀있는 겁니다. 드디어 이 빠삐용은 고향으로 갑니다. 그리고 어렸을 때 다녔던 교회에 들어갑니다. 주님 앞에 회개합니다. 기도 하는데 주님을 만납니다.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자기 마음에 40년동안 가득 차 있던 원한, 울분, 복수심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사라지는 거를 경험하는 겁니다. 한 순간에 다사라지는 겁니다. 빠삐용이 마지막에 기도합니다. “주님 내가 그를 용서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이런억울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님이 도와주세요.” 그리고 자유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에게 행복이 찾아오고 사업을 해도 기쁘고 밤에 잠을 자도 기쁘고 어디에서나 찾아오는 기쁨은 주님을 만나면서 오는기쁨입니다. 교회 왜 나옵니까? 그것 때문에 나오는 겁니다.저는 포항제철 회장을 하고 국무총리도 하신 박태준 회장님의 간증을 하는 걸 들었습니다. 그분도 미움을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해도 못 이겨냅니다. 그런데 딸이 자기가 미국에 가서 다 몸이 아프고 살고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고 자기 인생을 망가뜨린 대통령이 미워서 몸부림 치고 있을 때 그 딸이 교회로 데리고 가는 겁니다. 교회 가서 예수님을 만나서, 교회 오면 다 똑같이 예수님 만나는 겁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만나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몇 년 동안 1분도 떠나지 않던 증오심이 사라지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참 자유, 주님이 주시는 겁니다. 여러분, 자유인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대한민국 뭐가 좋습니까? 내가 주님이 주신 자유인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좋은 것입니다. 우리 아내가 왜좋습니까? 주님이 주신 자유 때문에 저는 저의 아내가 세계에서 최고로 좋습니다. 자유, 주님이 주신 자유,참 자유로 한없는 일에 축복과 능력과 승리와 행복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거룩한 주의 날, 우리 모두 주님께 자유를 주신 주님, 이 자유를 끊임없이주 안에서 누리는 모든 성도들이 이 예배를 주님께 올립니다. 우리 가정에 자유를, 대한민국에 자유를 주님이 주신 자유로 무한한 번영과 발전을 가져다주신 주님, 주와 함께 영원한 자유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

제목 :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오라

본문 : 에스겔 37:1-10 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7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 서론 에스겔서 37장은 에스겔서 전체 중 가장 많이 설교가 되는 장(chapter)입니다. 가장 유명한 장입니다. 에스겔서가 성경 가운데 무시되고 있는 책(the most neglected book)이라고 말을 하지만 에스겔 37장만큼은 많은 목사님들이 설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른 뼈 골짜기가 유명하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서 37장은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를 3차에 걸쳐 침공했습니다. 1차 침공은 B. C. 605년이며 다니엘과 세 친구를 잡아갔습니다. 그 당시에 여호야김이 왕이었습니다. 2차 침공은 B. C. 598년 입니다. 여호야김이 바벨론을 배반하고 애굽과 동맹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여호야김이 폐위되고 여호야긴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훌륭한 모든 일꾼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B. C. 598년 이후로는 예루살렘 땅에는 조금 부족한 사람들만 남아 있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땅을 차지하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곳에 집을 짓고 살자! 여기에는 여호와의 성전이 있는데 감히 누가 우리를 멸망시키겠느냐? 우리가 복 받은 사람이로다.” 하나님은 이들을 보고 도리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예루살렘에 있다가 바벨론으로 옮겨 간 것입니다. “너희는 극히 나쁜 무화과이고, 바벨론에 끌려간 사람들이 좋은 무화과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B. C. 587년에 느부갓네살 왕이 3차 침공하여 예루살렘은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돌아갈 고향이 망해버려 소망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절망이 이들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유다 백성이 한 말이 에스겔 37장 11절에 기록되었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이런 절망적인 상태에 대해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겔 37:11) 에스겔이 답변합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겔 37:11)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절망적인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죽은 뼈라도 살리시면 살리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하실 수 있습니다. 에스겔 37장 5절을 보면 소망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드릴 때에 하나님의 생기가 사방에서 불어 와서 우리가 살아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Ⅰ. 골짜기의 마른 뼈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에스겔은 하나님의 신의 인도를 받아 골짜기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 골짜기를 사람들은 에스골 골짜기라고 하는데 성경에는 에스골이라는 말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름은 알 수 없지만, 그 골짜기에서는 극심한 전투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이 골짜기에는 뼈들이 가득합니다. 이 뼈들이 지표면 위에 있습니다. 원래 뼈들은 지표면에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땅속에 묻기 때문입니다. 뼈가 나와도 땅속에서 나와야 합니다. 즉 이들은 죽었어도 누군가 장사 지내 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뼈들은 햇볕을 오랫동안 쬐어 바짝 말라 버렸습니다. 이 골짜기는 사망의 골짜기요, 적막의 골짜기요, 패망의 골짜기입니다. 이 뼈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역사적으로 생각해 보면, 열방에 포로가 되어 돌아올 소망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의미보다는 영적인 의미가 더 중요합니다. 영적인 면에서는 두 가지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뼈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불신자들을 의미합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입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불신자들의 상태를 그림 같이 표현한 것이 골짜기의 마른 뼈입니다. 구원받기 이전의 인간의 영혼이 죽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과 영적으로 단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신자들이 극도로 악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신자들도 착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불신자들이 동일하게 악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조그만 덕도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열망이 없고, 진리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불신자들은 모태에서 나올 때에도 하나님과 분리되어서 나오고, 살아갈 때에도 분리된 채로 살다가 죽으면 하나님과 분리된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그곳을 가리켜 지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영적으로 사망한 것은 억울한 피해자(victim)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모든 자유와 특권과 생명과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을 반역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범죄자(culprit)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은 듣고도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으면 너는 정녕 죽으리라” 아담과 하와가 영적으로 사망하고, 그 후손들도 영적으로 사망한 채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이 골짜기의 마른 뼈는 영적으로 죽어 있는 불신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둘째, 영적으로 피폐한 교회의 상황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겔 37:11) 바벨론에 끌려간 유다 백성뿐만 아니라 B. C. 721년에 앗수르에 끌려간 북왕국 이스라엘까지 포함해서 이스라엘의 온 족속의 상태가 마른 뼈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20세기에 다섯 번에 걸쳐 큰 부흥을 주셨습니다. 20년마다 부흥되게 해 주셨습니다. 지금은 그 부흥의 열매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의 교회 상황을 보게 되면 부흥기가 아닙니다. 터키를 가보면 알 수 있듯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돌무더기로 바뀌어 있습니다. 유럽의 교회들은 관광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기둥만 높습니다. 예배당이 하루아침에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는 예도 있습니다. 또 선술집으로 바뀌는 예도 있습니다. 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은 상황이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1세기 하나님의 교회는 다시 하나님의 생기가 필요합니다. Ⅱ. 마른 뼈가 살아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역사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B. C. 539년에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칙령을 발표해서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가 더 중요합니다. 영적으로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영적으로 죽어 있는 불신자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면 구원받고,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영적으로 죽어 있는 피폐한 교회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시면 큰 부흥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큰 부흥에는 불신자들이 구원받는 것도 포함되고, 이미 믿은 신자의 영혼이 소생되는 것도 함께 나타나기 때문에 이 두 가지 현상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Ⅲ. 마른 뼈가 살아나기 위해서 에스겔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대언(prophesy)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인데, 그 대언하는 대상이 희한합니다. 마른 뼈(겔 37:4)와 바람(겔 37:9)에게 대언하라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설교하는데 마른 뼈만 있으면 남들이 보고 미쳤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또 바람을 향해 소리를 지르면 재정신이 아니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첫째, 마른 뼈를 향해서 대언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죽은 불신자들이나 피폐하게 된 성도들을 향해서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는 이와 같습니다. 복음 전도는 비록 자신이 말을 못할지라도, 상대가 마른 뼈와 같을지라도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생명을 얻습니다!”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이 골짜기에 에스겔과 뼈만 있으면 에스겔은 미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골짜기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뼈들에게 “생기야 들어가라! 뼈들아 살아나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뼈들에게 생명을 주셔서 무질서하던 뼈들이 맞고, 생기가 들어가 근육이 살아나서 큰 군대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마른 뼈와 같은 불신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미친 짓이 아닌 이유는 들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셔서 듣게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은 마른 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합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겔 37:4-6) 제가 목사 안수를 받자 대흥침례교회 안종만 목사님이 설교하라고 하셨습니다. 35세 때에 처음 설교를 하게 된 것입니다. 설교 전날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 원고를 잔뜩 써서 자정에 강대상에 올라가서 의자를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설교가 소리를 지르는 건지, 속삭이는 건지, 웃기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다음 날 강대상에 서니 사람들 눈이 반짝거렸습니다. 설교 원고 10장을 써 갔는데 20분 만에 설교가 모두 끝나버렸습니다. 1시간 설교해야 하는데 20분 만에 끝나버린 것입니다. 주정미 전도사님 어머니가 그 당시 전도사님이셨는데 광고 30분으로 그 시간을 채웠습니다. 목사들이 처음 설교를 시작할 때에는 소나무 앞에서 소리 질러 연습을 합니다. 그리고 발음이 부정확한 사람들은 연필을 물고 발음 연습을 합니다. 그리고 발음이 자꾸 틀리는 사람은 입을 크게 벌려 소리 내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마른 뼈를 놓고 “뼈들아, 여호와의 생기가 들어가니 살아나라!” 큰 소리로 외치자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전도자는 마른 뼈 같은 불신자를 향해서 “예수 믿으세요! 그리하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습니다.”라고 외쳐야 합니다. 듣거나 안 듣거나 외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들을 귀를 주시면 듣게 되리라는 것을 믿고 외쳐야 합니다. 설교자는 죽어 있는 교회를 향해서도 외쳐야 합니다. “생기야, 사방에서 몰려와라! 그리하면 우리 교회가 부흥이 일어날 것이다!” 교회가 피폐할지라도 성령의 생기만 불어오면 부흥이 일어난다는 것을 확신하고 외쳐야 합니다. 둘째, 바람을 향해서 대언하는 것은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람은 히브리어로 ‘루아흐’입니다. 생기, 영, 성령을 의미합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바람을 향해서 명령합니다. 기도는 명령입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을 향해서 명령할 수 있는 것은 기도입니다. 성령의 바람은 좋은 바람입니다. 이 바람이 불면 잃어버린 영혼들이 살아나고, 교회가 부흥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강하고 급한 바람이 불더니 제자들이 성령 충만을 받아 나가서 전도해 삼천 명이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8절에서도 예수님이 성령을 바람에 비유하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민수기 1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텐트 속에서 울고 있습니다. 모세가 우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백성이 답변하기를 고기가 먹고 싶어서 운다고 말합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합니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찐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니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일 고기를 주겠다고 합니다. 고기를 주는데 코에서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1개월간 먹을 고기를 주겠다고 합니다. 믿음 좋은 모세라도 어떻게 1개월간 먹게 하실 건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하나님이 응답해 주십니다. “바람이 여호와에게로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 곁 이편저편 곧 진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바람이 불자 메추라기 떼가 날아와서 200만 명이 한 달 동안 실컷 먹게 된 것입니다. 교회 부흥도 마찬가지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의 구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바람이 함께 만나면 마른 뼈가 변하여 큰 군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부흥입니다. 저는 다시 부흥을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21세기 한국 교회는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복음을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선교의 대 사명이 있습니다. 사업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 제가 선교 할 테니 사업 잘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를 위해서 기도할 때에도 “우리 자녀가 선교 사명을 감당하는 큰 인물이 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시고, 교회를 위해서도 “하나님, 우리 교회가 선교 많이 하는 교회가 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세계를 향한 선교의 사명을 받은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선교의 대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령이 강한 바람이 다시 불어와야 합니다. 결 론 설교자는 마른 뼈를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신시대가 되었다고 신신학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신학이 어디 있습니까? 복음은 바울 복음, 어거스틴 복음, 루터, 칼빈이 찾은 복음이 복음입니다. 사도들이 증거한 케리그마, 순수한 복음을 그대로 증거하고 성도들은 다시 기도의 불을 붙여야 합니다. “성령이여, 사방에서 불어오소서. 우리에게 생기를 넣어주소서.” 교회와 가정에 생기가 들어가고 우리 영혼에도 생기가 들어와야 합니다. 생명 없는 곳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도 생기요, 질서없는 곳에 질서가 있게 하는 것도 생기요, 소리 없는 곳에 삶의 소리를 불어넣는 것도 생기요, 힘이 없는 곳에 힘을 불어넣는 것도 생기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성령의 생기가 필요한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왜 부흥을 주시는 것입니까?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겔 37:6,13,14) 부흥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부흥은 인간이 영광을 받는 순간 사라집니다. 부흥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하는 그 한 가지 목적을 기억할 때에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기도해야 합니다. “사방에서 불어와 생기를 주시고, 죽은 영혼을 살리시고, 낙심한 영혼에게 생명을 주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나타나게 하시고, 세계 선교의 사명을 이루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우리 기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제목 : 막대기 예언의 영적의미 본문 : 겔-37-15-23 본문 : 에스겔 37:15-23 15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16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17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18 네 민족이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뜻인지 우리에게 고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거든 19 너는 곧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바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취하여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20 너는 그 글 쓴 막대기들을 무리의 목전에서 손에 잡고 21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간바 열국에서 취하며 그 사면에서 모아서 그 고토로 돌아가게 하고 22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로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찌라 23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케 한즉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 서론 에스겔서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에스겔 37장만큼은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에스겔 37장 전반부가 골짜기의 마른 뼈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골짜기에서 마른 뼈들이 생기를 받아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후반부에 나오는 막대기 예언은 잘 알려지지 않습니다. 에스겔 37장 후반의 막대기 예언은 에스겔서의 38장 이후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즉 막대기 예언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지에 따라 38장 이하의 내용에 대한 이해와 적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먼저 막대기 예언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본문 15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이 말씀은 에스겔 개인이 연구한 말씀도 아니고, 묵상해서 생각해 낸 말씀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증거하라고 에스겔에게 맡기신 신탁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막대기 두 개를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막대기 하나에는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하나의 막대기에는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 막대기를 하나로 붙여 하나의 막대기로 만들라고 했습니다. 이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기독교 진영을 나눌 만큼 큰 차이를 보이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Ⅰ. 표면적인 의미 다윗 왕이 즉위한 때는 B. C 1010년입니다. 다윗이 40년 동안 왕 노릇하다가 죽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된 때가 B. C 970년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죽고,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된 때가 B. C 930년입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이 왕은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아 나라를 두 개로 만들었습니다. 남 왕국은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해서 베냐민 자파와 레위 지파가 약간 가담하여 예루살렘을 수도로 형성되었습니다. 다윗의 후손들이 왕이 된 것입니다.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즉 이 말씀은 유다와 유다 지파에 동조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 왕국 유다입니다. 북 왕국은 요셉의 아들 가운데 에브라임이 주축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낳았습니다. 요셉은 야곱과 그 아들들이 생존하는데 큰 공헌을 했기에 하나님이 열두 지파 가운데 두 지파의 몫을 주었습니다. 레위 지파는 빠지고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각각 하나의 지파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 중 에브라임이 더 뛰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 열 지파를 취하여 사마리아를 수도로 하여 북 왕국을 형성했습니다. 여로보암을 첫 번째 왕으로 하여 사악한 왕들이 북 왕국을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북 왕국을 에브라임의 막대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라” 에브라임은 요셉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북 왕국은 이스라엘 열 지파를 취해 사마리아를 수도로 삼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남 왕국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를 중심으로 하여 유다를 건설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남, 북으로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남 왕국과 북 왕국 두 나라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위반했습니다. 북 왕국은 B. C 721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그 당시 앗수르는 멜팅팟(Melting Pot)이라고 불렸습니다. 이 말은 뭐든지 집어넣어 녹여버리는 냄비라는 뜻입니다. 북 왕국 사람들은 앗수르에 포로가 되어 끌려가 앗수르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오래 살다 보니까 앗수르 사람과 결혼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앗수르 사람들을 데려다가 사마리아에 살게 했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그들을 사마리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이 아닌 것입니다. 남 왕국 유다도 드문드문 좋은 왕이 있었지만,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기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다는 B. C. 587년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게 포로 되어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에스겔의 예언을 표면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때가 되면 포로가 된 두 나라를 열국에서 취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여서 한 나라를 이루어 다시는 두 나라로 나뉘지 않게 하겠고, 한 임금 다윗이 영영한 왕이 되어서 다스릴 것이며, 한 나라를 이룬 통일 이스라엘은 다시는 우상숭배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Ⅱ. 표면적인 이해의 문제점 만약 이 예언이 역사적으로 실현되었다고 한다면 피상적인 이해를 해도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예언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할 수 없는 세 가지 중요한 문제점이 있습니다. 첫째,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로 옮겨가서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을 상실했고, 북 왕국이 포로귀환 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북 왕국은 포로에서 귀환한 적이 없습니다. B. C. 721년에 앗수르에 끌려가 민족의 정체성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둘째, 남 왕국 유다도 B. C. 539년에 고레스 칙령으로 예루살렘에 귀환하기는 했으나, 통일된 이스라엘 국가를 세운 것은 아닙니다. 에스라 2장 64절에 보면 고레스 칙령으로 돌아온 유대인의 수가 사만 이천 삼백육십 명이라고 했는데, 유다 지파의 자손(스 2:1)입니다. 포로에서 귀환한 유다 백성도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이룬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 포로에서 귀환한 유다 백성에게도 한 임금 다윗이 영영히 왕 노릇 했던 것도 아니고, 우상숭배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도 아닙니다. 유다 백성은 포로에서 귀환한 후에도 속국으로 지냈습니다. 페르시아의 속국이었고, 페르시아가 망하자 알렉산더 대왕의 속국이었습니다. 또 셀류시드 왕조의 지배를 받았고, 그 후에는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유다의 왕이 있어도 속국의 왕이었지 독립된 국가의 왕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하스모니안 왕조 때 혹은 헤롯 왕조 때에 왕이 있었다고 해도 그들은 다윗의 후손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두매(에서) 후손이었습니다. 야곱의 후손도 아닌 에서의 후손이 왕 노릇 하고 있었던 것이지 다윗 임금이 왕이 되어 영영히 왕 노릇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에스겔 후반부의 막대기 예언은 결코 표면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Ⅲ. 문제점의 해결방식 성경의 영감성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막대기 예언을 거짓된 예언이며, 두드러진 예라고 말합니다. 거짓말이라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에스겔의 예언을 표면적으로 이해하고, 피상적으로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들은 이 예언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신앙인들 가운데에도 두 줄기의 이해가 있습니다. 먼저, 20세기를 지배했던 근본주의(fundamentalism)자들은 세대주의 종말론(dispensational)을 취하며, 막대기 예언을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사건이라고 해석합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가 통일 이스라엘을 과거에 이룬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앞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미래에 통일 왕국이 되어 다윗의 후손이 왕이 되고, 예루살렘에 성전이 지어질 것이고, 피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 구약 시대처럼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을 미래적으로, 특별히 에스겔 37장을 미래적, 여자적으로 해석하려는 방식입니다. 세대주의 자들은 1948년에 시오니즘 운동의 결과로 가나안 땅에 현대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한 것을 보고 흥분했습니다. 그들은 이 예언이 성취되는 시발점이라 믿고 좋아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현대 이스라엘 국가는 아직도 우상숭배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다윗 임금이 왕이 되지 못했는지 물어보면, 이 예언의 실현은 현재 진행 중이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20세기에 수많은 부흥사가 이런 내용의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책이 이런 내용을 기록하여 판매했습니다. 대한민국은 세대주의의 영향력이 너무나 컸습니다. 1948년도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예수님이 한 세대만 지나면 온다고 했습니다. 1988년도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했다가 안 오시자 날짜를 바꿔서 1992년도 오신다고 했습니다. 하얀 옷 입고 산에 올라가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이것을 지켜본 불교인들은 광신자 집단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올바른 신학을 갖지 않으면 광신도가 될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이런 근본주의의 세대주의 종말론은 성경과 맞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해석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 한국에는 세대주의 종말론 사상이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에 현대 이스라엘이 세워졌다고 할지라도 통일 이스라엘로 볼 수는 없습니다. 두 막대기가 붙어서 통일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더욱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는다고 해도 그것을 성전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참된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인 것입니다. 참된 성전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 그러면 삼 일 만에 다시 세우리라.”는 말씀은 자신의 육신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가 참된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가서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성전을 짓는다고 해도 그것을 성전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 에스겔의 내용은 통일된 이스라엘은 통일되면서 즉시 우상숭배가 제하여지고, 다윗이 목자가 되어서 영원히 왕 노릇 한다는 것이지 시간의 간격을 두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세대주의는 성경에 무지한, 무식한 보수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세대주의에서 벗어나려면 성도들도 성경을 연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에스겔 37장의 막대기 예언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올바로 이해하는 것입니까? 첫째, 막대기 예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스겔 37장 24~28절의 내용을 고려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 구절은 통일된 이스라엘 왕국의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특징을 살펴보면, 통일된 이스라엘 왕국은 하나님의 종 다윗이 영원히 왕 노릇 하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B. C. 에 죽었는데 영영히 왕 노릇을 하겠습니까? 여기서 다윗은 문자 그대로의 다윗의 아니며, 환생해서 온다는 말도 아닙니다.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통일된 이스라엘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가 영영히 왕 노릇 하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통일된 이스라엘 왕국은 다시는 가증한 물건과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통일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화평의 언약을 맺어 하나님과 화목하고, 견고하여 번성할 것입니다. 마지막 특징은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너희는 구원받은 백성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통일된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목자로 삼고, 구원받은 백성, 즉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둘째, 막대기 예언은 신약성서를 고려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통일된 이스라엘을 가리켜서 “온 이스라엘”(롬 11:26)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세대주의 자들은 과거, 현재, 미래의 이스라엘이 모두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온 이스라엘’은 통일된 이스라엘이고, 이방인 중에 하나님의 택한 자, 유대인 중의 택한 자가 충만 수에 이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표면적인 유대인은 유대인이 아니요, 이면적인 유대인이 유대인이라. 하나님의 교회가 참 이스라엘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복음 전도와 선교를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짓는 것”(행 15:16)이라고 했습니다. 퇴락한 성전을 다시 짓는 것은 복음 전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성장시켜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리아 산에 다시 성전을 건축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인을 맞은 14만 4천 명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 맞은 14만 4천 명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숫자입니다. 그러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가나안 땅은 “더 낳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것”(히 10:16)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고 했지만, 아브라함은 한 평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아내가 묻힌 묘지 밖에 소유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절망하고 죽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바란 것은 하늘에 있는 가나안 땅 ‘천국’을 바랐다고 히브리서 기자가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막대기 예언은 하나님이 전 세계에 흩어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불러 모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목자로 삼고, 하나님이 거하시고, 영영한 천국을 소유할 백성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언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한 하나님이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나라를 완성해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나라가 있습니다. 이 나라들은 때가 되면 망할 것입니다. 망하지 않는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 역사와 예언을 볼 때에도 신약교회에 대한 예표로서의 의미로만 이해해야지 독립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세대주의 종말론 자들은 하나님이 유대인을 위한 계획과 교회를 위한 계획을 각각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원래 하나님의 나라를 유대인에게 주려고 했는데 유대인이 싫다고 하자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어 교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즉 교회는 유대인이 불순종해서 나온 차선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교회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하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겠다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요, 교회는 영생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구성되어서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되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부활하여 영생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교회에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교회를 위하면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가족이 교회를 위하면 하나님이 가족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를 적대시하고, 우습게 여기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적대시하고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교회를 사랑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같은 관심을 두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제목 : 곡과 이스라엘의 전쟁 본문 : 겔-38-17-23 본문 : 에스겔 38:17-23 17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옛적에 내 종 이스라엘 선지자들을 빙자하여 말한 사람이 네가 아니냐 그들이 그 때에 여러 해 동안 예언하기를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그들을 치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라 18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곡이 이스라엘 땅을 치러 오면 내 노가 내 얼굴에 나타나리라 19 내가 투기와 맹렬한 노로 말하였거니와 그 날에 큰 지진이 이스라엘 땅에 일어나서 20 바다의 고기들과 공중의 새들과 들의 짐승들과 땅에 기는 모든 벌레와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내 앞에서 떨 것이며 모든 산이 무너지며 절벽이 떨어지며 모든 성벽이 땅에 무너지리라 21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모든 산 중에서 그를 칠 칼을 부르리니 각 사람의 칼이 그 형제를 칠 것이며 22 내가 또 온역과 피로 그를 국문하며 쏟아지는 폭우와 큰 우박덩이와 불과 유황으로 그와 그 모든 떼와 그 함께한 많은 백성에게 비를 내리듯하리라 23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존대함과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나를 알게 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 서론 에스겔 38장과 39장은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곡과 마곡이 통일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데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곡과 마곡은 멸망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승리한다는 내용입니다. 20세기 근본주의자들은 에스겔 38,9장으로 소설을 많이 만들어 냈습니다. 2005년도에는 조엘 로젠버그(Joel Rosenberg)라는 사람이「에스겔의 해결책」이라는 책을 써서 많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썼는데, 러시아가 독재 국가가 되고, 이란과 연합을 하여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는데, 이스라엘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스라엘을 매개체로 하여 미국과 러시아가 핵전쟁을 하게 되는데 지구가 핵으로 멸망하기 직전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러시아와 연합군이 패망하게 된다는 소설입니다. 에스겔과 38,9장을 근거로 한 소설입니다. 이것은 소설에 불과하지만, 오늘날 많은 설교자가 이 소설을 성경의 종말론이라고 믿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소설이 나오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까? 에스겔 38장에 나오는 로스라는 나라가 러시아의 첫 글자와 비슷하고, 메섹이 모스크바와 발음이 비슷하고, 두발은 토발스크와 발음이 비슷하다는 것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대주의를 취하는 근본주의자들은 에스겔 38,9장으로 설교하면 설교 제목이 비슷비슷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 나머지 이 군대가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방패와 칼을 가지고 싸우는 것에 대해 말하기를 나중이 되면 현대식 무기는 없어지고, 재래식 무기로 전쟁을 할 것이라고 합니다. 우스꽝스러운 해석입니다. 에스겔 38,9장은 37장과 마찬가지로 문자적인 해석을 할 수 없습니다. 예언서는 상징적인 문헌이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시를 해석할 때에 산문처럼 해석하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Ⅰ. 이스라엘의 원수들은 어떤 존재들인가? 1. 원수들의 구성 곡(Gog)이 두목입니다. 즉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이 두목입니다(겔 38:1-3). 그리고 그 밑에 졸병들이 있습니다(겔 38:5-7). 곡이 대장이 되어 바사와 구스, 붓 등을 거느리고 통일된 이스라엘을 쳐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복잡한 이름들은 성경에 처음 나오는 이름들이 아닙니다. 창세기 10장에 보면 노아의 세 아들 셈, 함, 야벳이 나옵니다. 이들 가운데 하나님이 택하여 진리를 주신 백성은 셈입니다. 이스라엘은 셈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바사, 구스, 붓, 고멜, 도갈마는 함과 야벳의 후손입니다. 복잡한 이름이 있어도 노아의 세 아들 이름만 알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38장은 함과 야벳의 자식들이 셈의 자식을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이 택함 받은 자들을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은 하나같이 이스라엘의 원수들은 현대 국가라고 말을 합니다. 로스는 틀림없이 러시아일 것이며, 메섹은 틀림없이 모스크바이며, 두발은 틀림없이 토발스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지만, 합리적인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첫 글자 스펠링이 같다고 같은 나라입니까? 코리아와 코르시카가 같은 나라입니까? 합리적인 해석이 아닙니다. 상상과 추측에 불과한 것이지 성경에서 확실하게 뒷받침해 주고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성경을 이런 방식으로 해결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비밀문서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여기 나오는 원수 국가들은 지역적으로도 러시아가 아닙니다. 터키 지역입니다. 그러므로 에스겔 38,9장을 러시아가 쳐들어와서 이스라엘과 핵전쟁을 하는 청사진이라고 보는 것은 신기 하기는 해도 영적인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대한 바른 의미의 해석은 아닙니다. 에스겔 37장 막대기 예언에서 이미 말씀드렸듯이 원수들이 공격하고 있는 통일된 이스라엘은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원수 나라들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흑암의 세력, 마귀의 세력, 세속적인 세력들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 이상의 의미가 아닙니다. 2. 원수들의 특징 첫째, 그들은 무장이 잘 되어 있습니다. 공격무기와 방어무기를 잘 갖추고 있습니다. 방패와 창, 활, 투구를 잘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들은 숫자가 많습니다. “너와 함께한 많은 백성이 광풍 같이 이르고 구름 같이 땅을 덮으리라”(겔 38:9) 구름 같이 땅을 덮는다는 것은 사람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셋째, 영적으로 무지한 존재들입니다. 누가 하나님이고, 마귀인지 모릅니다. 진리와 거짓을 구분하지도 못합니다.“인자야 너는 또 예언하여 곡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 이스라엘이 평안히 거하는 날에 네가 어찌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겔 38:14)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 모아서 교회를 이루고 평안히 살게 하고, 전 세계로 교회가 퍼져 나가고 대한민국에도 교회가 많이 세워지는 걸 보면‘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틀림이 없구나.’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넷째, 성도들을 향해 약탈하고 공격하는 존재들입니다. 곡과 마곡은 군대를 모아 세상 중에 평안히 거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하고 약탈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평안히 지내는 것을 못 보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마귀 족속들입니다. 에스겔이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원수들이 그 조직과 세력에 있어서 막강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들은 조직도 강하고, 돈도 많고, 세력도 강하고, 무기도 많다는 것입니다. 곡과 마곡은 세상 세력을 의미합니다. 정치, 종교, 교육, 문화, 예술, 언론 세력 모두 막강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교회는 막강한 세상 세력 앞에 좌절되어야 합니까?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좌절시키기 위해서 예언하고 있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원수들의 세력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하나님이 그 원수들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알고, 하나님의 백성은 좌절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라는 목적으로 예언하는 것입니다. Ⅱ. 하나님은 원수들을 향해서 어떤 일을 행하시는가? 첫째, 하나님은 원수들을 대적(oppose)하십니다.“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I am against you)”(겔 38:3) "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곡을 쳐서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겔 39:1) 하나님은 원수들을 대적하십니다. 하나님은 원수들의 반대편에 가 계시고, 하나님의 교회는 비록 약하지만, 하나님의 교회와 같은 편이 되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편에 서면 잘 되고,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잘사는 것은 잠깐입니다. 둘째, 원수들을 통제하시고 계십니다(control).“너를 돌이켜 갈고리로 네 아가리를 꿰고 너와 말과 기병 곧 네 온 군대를 끌어내되 완전한 갑옷을 입고 큰 방패와 작은 방패를 가지며 칼을 잡은 큰 무리와”아가리가 갈고리에 꿰인 존재는 갈고리를 잡고 있는 이에게 꼼짝 못하는 것입니다. 소가 아무리 커도 어린아이가 재갈을 물려 끌고 가면 끌고 가는 대로 소는 따라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원수들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소용없습니다. 셋째, 원수들을 향하여 노를 발하십니다(judge).“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에 곡이 이스라엘 땅을 치러 오면 내 노가 내 얼굴에 나타나리라”(겔 38:18)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이 세상에는 온갖 재난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큰 지진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훌륭한 문화를 세우고, 웅장한 건축물을 세웠을지라도 하나님이 한 번만 흔들면 모두 땅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수끼리 서로 죽입니다(21절). 또 질병으로 치시고, 폭우, 우박 덩이, 불과 유황으로 치십니다. 에스겔 39장을 보면 하나님이 마곡의 군대를 향해서 진노하신 결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승리했는데 곡과 마곡의 무기를 빼앗아 땔감으로 사용했습니다. 7년 동안 산에서 나무를 갖다가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겔 39:9-10). 그리고 사해 동편 골짜기에 시체를 옮기는 데 7개월이 걸렸습니다. 그 골짜기를 곡의 무리가 묻힌 골짜기라 하여 하몬곡이라고 부릅니다. 에스겔 38,9장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을 과거의 전쟁으로 본다고 한다면 이스라엘 역사 속에는 이런 전쟁이 없었습니다. 7개월 동안 시체를 치운 적이 없습니다. 칠 년 동안 원수의 무기를 가지고 밥을 지은 적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또 미래의 전쟁으로 본다면 나무로 무기를 만드는 군대가 어디 있겠습니까? 방패를 나무로 만들어서 전쟁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미래의 전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에스겔 38,9장은 영적인 해석을 해야 맞습니다. 곡과 마곡, 그 추종자는 교회를 대적하는 흑암의 세력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공격하는 통일된 이스라엘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또 이들이 쳐들어오는 말세는 신약 시대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원수들이 신약 시대가 되면 하나님의 교회를 공격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이 흑암의 권세를 심판하고 교회로 하여금 대승리를 거두게 할 것입니다. 그날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날입니다. 그날은 언론, 스포츠, 정치 등 모두 무너지고 불의 심판이 올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 받은 백성은 모두 부활하여 영생하는 몸을 입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복을 받으며 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잠깐 안개처럼 사는 것입니다. 지금 돈과 힘이 있다고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은 곡과 마곡의 졸개일 뿐입니다. 핍박하는 그들은 결국 망할 것이며,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Ⅲ. 하나님은 무슨 목적으로 곡을 쳐서 예언하라고 하셨나? 때와 날의 개념을 구별해야 합니다. 에스겔 38장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날(day)'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단수로 쓰이기도 하며, 복수로도 쓰인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구름이 땅에 덮임 같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치러 오리라 곡아 끝날에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내 땅을 치게 하리니”(겔 38:16) 곡의 군대가 통일된 이스라엘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복수로 쓰인 것입니다.“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에 곡이 이스라엘 땅을 치러 오면 내 노가 내 얼굴에 나타나리라 내가 투기와 맹렬한 노로 말하였거니와 그날에 큰 지진이 이스라엘 땅에 일어나서”(겔 38:18-19) 여기서는 그날이 단수로 쓰인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날’을 복수로 말씀하시다가 단수로 말씀하신 어법이 자주 등장합니다.“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눅 17:26) 신약 성경에는 복수의 날들을 때라고 번역했습니다.‘때(days)'는 복수이며 '날(day)'은 단수입니다. 그날이 되면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때는 노아가 방주를 짓던 120년 동안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물로 심판한다고 하자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노아를 비웃고, 시집과 장가를 갔습니다. 이제 방주를 만들었던 때는 끝나고 방주로 들어가는 날이 왔습니다. 그리고 홍수가 왔는데 노아의 여덟 식구를 제외하고 모두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때에도 사람들이 똑같습니다. 노아 시대에는 물로 심판했습니다. 21세기에는 불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불로 망할 것입니다. 오늘날도 목사들이 인자의 때에 불로 망한다고 하면 목사들을 멸시합니다. 그런데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는 그 말씀이 진리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그날이 되면 즉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신 날이 되면 불이 임하여 하늘과 땅은 절단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늘도 큰 소리로 날아가고, 땅에 있는 모든 것이 풀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되고, 하나님의 원수들은 완전히 망해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영생의 부활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토록 거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대승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있는 유다 백성을 향해서 예언하는 것입니다. “70년 후면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유다 백성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70년 후면 늙어 죽을 것인데 돌아가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고토로 돌아가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문자 그대로‘고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더 큰 비전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을 지탱시켜 줄 수 있는 역사철학이 필요했던 것입니다.‘비록 내가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있을지라도 바벨론은 망하고 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될 것이고, 하늘의 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내 편이시고, 나를 축복하시고, 내게 승리를 주실 것이다.’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되는 승리의 확신이 필요했습니다. 20세기 근본주의자들은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칠 년 환란, 천년왕국, 바이블 코드처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박수 같은 해석이고, 전혀 성경과 맞지 않는 해석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사도 요한 당시에 로마 황제가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목을 베여 죽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목 베임을 당하고, 죽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사도 요한의 영혼을 하늘 보좌, 천국으로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천국에 가서 요한이 보니깐 목 베임 당한 사람들이 망한 줄 알았더니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이 이것을 보고 내려와서 ‘로마가 너희의 목을 칠지라도 신앙을 지켜라! 목 베임을 당한 사람들은 천국에서 왕 노릇하고 있더라!’라고 전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약하고, 핍박을 받을지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할 사람들입니다. 결론 초대교회 성도들은 헤롯 왕과 로마가 연합하여 핍박할 때에‘다윗이 예언했고, 에스겔이 예언한 대로 세상 열왕들이 뭉쳐 우리를 핍박하는구나. 그 말씀이 맞구나’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행 4:26) 성도들은 이런 원수들 앞에서 떨었습니까? 그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하나님이 우리 편이신대 감히 누가 우리를 대적합니까? 누가 우리를 정죄하고, 송사하겠습니까? 비록 우리는 현세에서는 주를 위하여 종일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을지라도 우리는 넉넉히 이길 것입니다.“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 우리는 죽어도 부활하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므로 이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길 것입니다. 에스겔 38,9장은 미래에 핵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언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을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두려움, 걱정, 염려, 근심을 가지고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패배의식을 가지고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승리할 사람들입니다. 삶의 모든 일에 승리하시다가 궁극적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제목 : 영광스러운 새 성전의 비전 본문 : 겔-40-01-4 본문 : 에스겔 40:1-4 1 우리가 사로잡힌 지 이십 오년이요 성이 함락된 후 십 사년 정월 십일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2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그 땅에 이르러 나를 극히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시는데 거기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3 나를 데리시고 거기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서 있더니 4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할지어다 하더라 ========================== 서론 “우리가 사로잡힌 지 이십 오년이요 성이 함락된 후 십 사년 정월 십일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겔40:1) 에스겔이 사로잡혔다는 것은 여호야긴 왕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는 것인데, 포로가 된 때는 B. C. 598년입니다. 598년에서 25년이 지났으니까 이 이상이 임한 때는 B. C. 573년입니다. 그리고 성이 함락되었다고 했는데 이 성은 예루살렘 성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때는 B. C. 587년이고, 14년이 흘렀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이상이 임한 때가 B. C. 573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에스겔 선지자가 B. C. 573년에 이 비전을 받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있어도 하나님이 임하여 비전을 주시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디 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임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여기 에스겔이 본 이상은 아홉 개의 장으로 내용이 길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의 핵심은 성전이 회복될 것이며, 예배가 회복될 것이고, 이스라엘 땅이 회복되리라는 것입니다. 내용이 어려워서 유대인들도 서른 살이 되기 전까지 에스겔 40~48장을 읽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이 본문을 읽고 무슨 뜻인지 물어보면, 부모들은 엘리야 선지자가 오면 가르쳐 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부모들도 모르고, 유대인들도 모르고, 성서 해석학자도 잘 모르는 대단히 어려운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했기 때문에 피해서 지나가거나 무시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늘은 에스겔 40~42장을 중심으로 에스겔 선지자가 받은 새 성전 비전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여호와의 권능에 이끌려서 이상 중에 이스라엘 땅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에스겔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성령이 에스겔의 영혼을 끄집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에스겔의 육신은 바벨론에 있고, 영혼은 성령에 이끌려 이스라엘 땅으로 가서 환상을 본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체험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극히 높은 산에 내려놓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시온산에 내려놓은 것입니다. 시온산은 해발 750m입니다. 높은 산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산을 극히 높은 산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이 시온산으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시온산은 종교(宗敎)의 핵심이 되는 산이기 때문에 극히 높은 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극히 높은 산에 내려다보니 성읍 형상 같은 것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성읍 형상이 에스겔이 본 새로운 성전이 환상입니다. 그리고 놋 같이 빛나는 사람이 손에 척량기구를 들고 있습니다. 한 손에는 삼줄을 들고 있고, 또 한 손에는 장대가 있습니다. 이 장대는 작은 장대가 아니고 여섯 척이나 되는 큰 장대입니다. 한 척의 길이가 45cm 정도 되지만, 성전을 척량하는 한 척의 길이는 55cm 정도 됩니다. 놋 같이 빛나는 사람이 잡고 있는 장대는 여섯 척이라 했기 때문에 3,3m입니다. 즉 삼줄과 장대를 가지고 성전을 척량하는 것입니다. 놋 같이 빛나는 사람에 대해 학자들은 천사라고 하고, 어떤 이는 성육신하기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라고도 말합니다.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인간이 아닌 영적인 존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분이 에스겔에게 말씀합니다. “에스겔아, 너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생각하여 이것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증거해라”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Ⅰ. 새 성전의 이상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 ‘담’은 동서남북 정사각형으로 되었고, 한 면이 500척(275m)이고, 높이는 6척(3.3m)이고, 넓이는 6척(3.3m)입니다. 엄청 큰 담입니다. 동문, 남문, 북문이 있고 서쪽에는 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서쪽에는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은 대문처럼 열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바깥문과 안문이 있습니다. 바깥문과 안문 사이를 문간이라고 하는데 문간의 길이가 50척(27.5m)입니다. 문간에는 방이 양쪽으로 각각 세 개씩 있습니다. 합 6개 입니다. 이곳은 문지기가 사는 곳입니다. 그런데 담은 무슨 목적으로 쌓은 것입니까? “그가 이와 같이 그 사방을 척량하니 그 사방 담 안 마당의 장과 광이 오백 척씩이라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겔42:20) 이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기 위함입니다. 새 성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동문, 남문, 북문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일곱 계단을 올라가야 갑니다. 그리고 여기에 뜰이 있는데 바깥 뜰, 안 뜰, 성전 뜰이 있습니다. 안 뜰에서 성전 뜰로 들어가는 문도 동문, 남문, 북문 세 개가 있습니다. 바깥문과 구조가 같습니다. 그리고 안 뜰 문간에는 제사장이 살고 있습니다. 또 안 뜰에서 성전 뜰로 가는 계단은 여덟 계단입니다. 여덟 계단을 올라 문을 통과하여 안 뜰로 들어가게 되면 제단과 성전이 있습니다. 이 성전은 세로가 100척(55m), 가로가 20척(11m)입니다. 성전의 2/3는 성소라고 하며, 1/3은 지성소라고 합니다. 성전 좌우로는 방들이 많이 있는데, 이 방은 제사장이 사는 곳입니다. 방들 뒤에 또 방이 있는데, 제사장의 부엌입니다. 백성은 네 귀퉁이마다 있는 부엌에서 밥을 해 먹습니다. 이것이 에스겔이 본 성전인데, 이 성전 안에 들어가면 벽화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벽화는 모두 종려나무 그림입니다. 종려나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생명과 풍요, 영광과 승리를 의미합니다. 에스겔이 본 성전과 다른 성전은 무엇이 다릅니까? 제1성전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입니다. 원래 다윗 왕이 성전을 짓고 싶어 했지만,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짓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재료를 준비하고 아들인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 솔로몬 성전이 유다 백성이 죄를 지음으로 인해 B. C. 587년에 느부갓네살 왕이 파괴해 버렸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은 B. C. 539년에 고레스 칙령으로 돌아와 B. C. 516년에 성전을 새로 지었습니다. 그 성전을 제2성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합니다. 또 예수님 당시에 헤롯 대왕이 스룹바벨이 성전이 작다고 하여 증축했습니다. 이 성전을 제3성전 헤롯 성전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성전들과 에스겔이 본 새 성전의 비전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다른 성전들에도 뜰이 세 곳이 있지만, 이름이 각각 다릅니다. 바깥에 있는 뜰은 이방인의 뜰, 안에 있는 뜰은 여인의 뜰, 더 안쪽에 있는 뜰은 유대인 제사장의 뜰 혹은 남자의 뜰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에스겔 성전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철폐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철폐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남자만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여자도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이방인도 구원하십니다. 둘째, 에스겔이 본 성전 안에는 떡 상, 금 촛대, 분향 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실체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의 떡과 빛이 되시며, 자신이 대제사장으로 기도를 올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에스겔이 본 성전에는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피 흘려 속죄함으로 인해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고,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에스겔이 본 새 성전에는 지성소 안에 언약궤가 없습니다. 그룹 천사가 지키지도 않습니다. 법궤 안에는 원래 세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모세가 받은 십계명의 두 돌비,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가 들어 있습니다. 에스겔이 본 이 성전에는 언약궤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율법을 다 이루시어 우리를 불순종의 저주에서 속량 해 주셨고,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만나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성전 안에는 그림자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던 것들은 다 없어졌습니다. 또 물두멍도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었는데 이제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아 정결함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물두멍이 필요 없습니다. 에스겔이 본 새 성전은 구약 시대의 성전이 아니라 신약 시대의 성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Ⅱ. 새 성전에 대한 해석 1. 문자적으로 해석은 불가능하다. 에스겔이 본 것은 환상이지 육신의 눈으로 물리적인 성전을 본 것이 아닙니다. 환상을 영적으로 해석해야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47장에 보면 새 성전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온다고 했습니다. 이 생명수는 발목을 적시고, 가슴을 적시고, 온 천하가 헤엄칠 수 있는 물이 흘러나온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겠습니까? 문자적인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문자적인 해석을 하는 세대주의자들도 이것은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복음이 생명수가 되어 천하 만민을 구원한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도 문자적인 해석을 포기하고 영적인 해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에스겔의 새 성전은 과거에도 지어진 적이 없습니다. 또 앞으로도 이런 성전을 짓는 다고해도 성전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전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2. 일부 유대인(성전협회)과 세대주의자들은 아직도 문자적, 미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현재 모슬렘 성전이 지어진 곳에 모슬렘 성전이 헐리고, 에스겔의 성전이 지어질 것을 기다리고 있는 세대주의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유대인 중 어떤 사람들은‘templeinstitute(성전협회)’라고 하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예루살렘에 이슬람 성전이 파괴되고, 새 성전을 지으려면 재료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면서 지금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에스겔이 이상 중에 본 성전을 미래적, 문자적으로 결코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3. 바른 성서적인 이해 우리는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스가랴 6:12-13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학개와 같이 포로기 이후의 예언자입니다. 스가랴는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 순이(the Branch)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스가랴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떤 성전을 건축했습니까? 이 예언은 요한복음 2:19-21에서 성취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메시야가 여호와의 성전을 짓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전이 예수님의 육신이고, 예수님의 육신은 죽었다가 부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성전임을 증거하고 있고, 교회도 참 성전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이방 성도들도 역시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엡 2:19-21) 우리가 돌입니다(벧전 2:14). 우리는 성전의 한 돌입니다. 돌이 쌓이고 쌓여서 거룩한 집이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교회요, 제사장은 성도요, 제사는 참된 예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Ⅲ. 새 성전의 실천적 의미 새 성전 안에는 거룩한 사람만 들어 올 수 있습니다. 새 성전 밖에는 속된 것들만 있습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들을 분리하는 담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어 새 성전 안에 들어온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새 성전 안에 들어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까? 종려나무가 상징하는 것처럼, 즉 영원한 생명, 영원한 축복, 영원한 승리가 새 성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밖에 있으면 영원한 생명, 축복, 승리가 없습니다. 지옥에 가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새 성전은 그냥 들어오지 못합니다.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 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 예수 믿지 않은 분들이 계신다면, 오늘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전 안에 들어왔다 할지라도 바깥 뜰에만 있으면 안 됩니다. 안 뜰로 들어가야 하고, 여덟 계단을 넘어 성전 뜰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을 바깥 뜰에만 머무르게 하면 안 됩니다. 안 뜰로, 성전 뜰로 들어가는 성숙이 있어야 합니다. 성전 뜰로 가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한 번도 성령 체험을 못 한 사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바깥 뜰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면 사람은 변화됩니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한 번만 경험해도 변합니다. 그러나 평생 예수 믿어도 하나님의 임재가 무엇인지지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하면 언젠가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해 주실 것이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 사람은 변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가장 기쁠 때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입니다. 그리고 성전 안 뜰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끌고 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와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결론 바벨론에 포로가 된 유다 백성은 칠십 년에 후에 돌아간다고 했지만, 실제로 그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칠십 년이 되기 전에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여기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지금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있어도 이 성전에 거할 백성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백성에게 소망이 되었습니다. 에스겔이 본 성전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죄악으로 멸망해 가는 세상에서 교회가 없으면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데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는 소망이 없으면 인생에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유일한 소망은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다른 것들은 거짓된 소망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에 교회를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사업을 해도 주일에 일하는 사업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 공부를 해도 교회에서 해야 합니다. 교회 밖에서 공짜로 가르쳐 준다고 하는 사람 중 정상적인 사람을 못 봤습니다. 이 성전을 보면 규격이 너무 정확합니다. 하나님은 대충대충 하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계획하시고 그 계획을 정확하게 이루어 가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떨어지지 않는 정확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신앙생활을 대충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위대한 법칙을 주셨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리라.’죄로 심은 것은 죗값으로 거두고, 기도로 심은 것은 은혜로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을 정확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소망을 두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교회 중심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깥 뜰에만 머무르지 마시고, 성전 뜰까지 나아가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체험하는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제목 : 전의 법은 이러하니라 본문 : 겔-42-12- 본문 : 에스겔 43:12 12 전의 법은 이러하니라 산 꼭대기 지점의 주위는 지극히 거룩하리라 전의 법은 이러하니라 ========================== 서론 전의 법은 이전의 법이라는 뜻이 아니라 성전의 법을 의미합니다. 에스겔서 40장부터 48장까지는 아마 성경 가운데서 가장 어려운 말씀일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놋 같이 빛나는 사람의 인도를 따라 새로운 성전을 환상 가운데 보게 됩니다. 그리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에스겔이 처음 보았을 때 성전은 비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에스겔 43장 전반부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동문으로 들어와 성전 전체에 가득해졌습니다. 이어서 제단과 제사장에 대하여 상세한 규례들을 받게 됩니다. 근본주의 혹은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취하는 사람들은 이 성전을 지상 천년왕국 때에 다시 지어질 문자적인 성전으로 해석합니다. 문자적인 성전에서 문자적인 희생제사가 회복될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새 성전은 문자적인 성전이 아니라 성령께서 임재하고 계신 신약 시대의 교회를 상징한 것으로 해석해야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에스겔 선지자가 받은 제단과 제사장에 대한 상세한 규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왜 이렇게 상징을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해놓았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 15절을 보면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집은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거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되셔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양육하시고 교제하시며 훈련을 통해 성장시키십니다. 하나님의 집의 가족이 되는 것은 매우 큰 특권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집의 가족이 된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 집은 무질서한 집이 아닙니다. 확실한 질서와 규례를 가진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자유와 행복이 있지만 제멋대로 행동하는 방종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딤전 3:15) 하나님의 집은 마음대로 행하는 곳이 아니라 마땅히 행해야 하는 법이 있는 집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법을 어기는 사람들을 절대 방관하시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 3:17) I. 하나님의 집의 법은 무엇인가? 에스겔 43장 12절 중반에 그 법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산꼭대기 지점의 주위는 지극히 거룩하니라” 지극히 높은 산은 시온산을 의미합니다. 시온산은 하나님 교회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집 즉 교회의 법을 한마디로 말하면 거룩이라는 것입니다. 왜 교회의 법이 거룩이어야 하느냐? 그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임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거룩하지 못한 것은 함께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느 부분이 거룩해야 할까요? 솔로몬의 성전과 에스겔이 본 새 성전의 차이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솔로몬의 성전에서는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은 오로지 지성소 안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에스겔이 본 새 성전에는 지성소와 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전체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구석구석 거룩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어성경 NIV에서는 산꼭대기 지점의 모든 주위(all surroundings)가 거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목사, 성도, 예배 모두가 거룩해야 합니다. 목사가 나비넥타이를 매고 빨간 양복을 입고 나와서 설교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교회 식당에서 메뉴를 막걸리와 빈대떡으로 하면 되겠습니까? 먹는 것과 마시는 것도 거룩해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교회의 모든 부분이 다 거룩해야 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함을 드러내야 합니다. 교회는 아무도 볼 수 없는 골짜기나 깊은 산 속에 지어진 오두막 집이 아닙니다. 교회는 지극히 높은 산 위에 지어진 집입니다. 숨겨진 기관이 아니라 만천하에 다 노출된 기관입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눅 8:16) 교회는 산꼭대기에 있는 빛입니다. 교회가 재산이 많기로 유명하거나 권력자가 많아서 유명하면 안 됩니다. 교회는 거룩함으로 유명해져야 합니다. 우리 강남중앙침례교회 성도들은 거룩으로 유명해지시기를 바랍니다. 목회자나 교회는 다 노출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전에 교수를 했었는데 강의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자기 사생활이 있습니다. 하지만, 목사는 사생활이 없습니다. 제가 뭘 먹는지 어딜 가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저희 교회에 한 달에 한 번씩 오는 노숙자도 제 이름과 제가 어딜 다녀왔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다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거룩하지 못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이 노출되어야 할 것입니다.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거룩에 대해서 반감이 있습니다. 보통 거룩이라고 하면 성경책을 끼고 조용히 걸어 다니며 말도 없이 웃지도 않고 항상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종교적인 바리새인 같은 사람을 상상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거룩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은 네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분리해 놓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separation).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구별해 놓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해주셔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나는 거룩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하고 있으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룩을 너무 윤리적으로만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따로 구별해놓으셨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따로 구별해놓으신 이유는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헌신 되어 사용되는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dedication). 물그릇 하나도 막걸리 집에서 쓰이는 것은 그냥 그릇입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에 쓰이는 그릇은 거룩한 그릇인 것입니다. 도구가 무슨 윤리성이 있겠습니까? 그저 하나님의 일에 쓰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이란 윤리적으로 깨끗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것보다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 따로 구별해놓으셨다는 의미가 성경에서는 훨씬 강한 것입니다. 셋째로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likeness). 넷째로 거룩이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communion).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사람만이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구별해놓으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별해 놓으신 이유는 교제하기 원하시고 하나님의 일에 쓰시기 위한 것임을 한시라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Ⅱ. 하나님의 법은 어떻게 시행되는가? 법은 아무리 옳은 법이라고 해도 실효성이 있어야 합니다. 법은 타당성과 실효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술은 건강의 적이므로 술 마시는 사람은 징역 10년에 처한다는 법을 국회가 만들어서 통과시켰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대한민국에 술이 없어지겠습니까?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은 땅굴을 파서라도 바다 밑에 술집을 만들어 마시고 올 것입니다. 이처럼 실효성이 없는 것은 법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교회에 거룩이라고 하는 법을 어떻게 실행해 나가실까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먼저 이 법에 순종하는 성도나 교회를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로 축복하십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축복하시고 불순종하는 사람은 징계하심으로 이 법의 실효성이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들이 그 음란과 그 왕들의 시체를 내게서 멀리 제하여 버려야 할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거하리라” (겔 43:9) 거룩하지 못한 것을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임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거룩은 하나님의 임재를 확보하는 조건입니다. 교회가 거룩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교회 안에 사랑과 기쁨이 있게 되고 승리가 있게 되며 결국 부흥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천국의 맛을 미리 볼 수 있게 됩니다. 반대로 이 법에 불순종하고 거룩하지 못한 교회는 어떻게 될까요? 불신자들이 거룩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신경 쓰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신자들이 거룩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이 근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다툼이 일어나고 분리가 일어나며 하나님의 진노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벧전 4:17) 교회나 가정에서 문제와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모두 거룩하지 못한 요소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요소가 있으면 반드시 다툼과 분리가 일어나게 됩니다. 부부싸움 또한 거룩하지 못한 것이 있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교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부패하는 것을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고린도 교회는 온갖 거룩하지 못한 문제들을 많이 안고 있었습니다. 윤리적, 성적인 부패와 교회 내적인 분리 그리고 목회자에 대한 불순종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고린도 교회를 심판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고전 11:30) 물론 사람은 나이가 들어 때가 되면 다 죽게 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가운데 병든 사람이 많고 약한 사람 많아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죽는 사람이 많은 것은 거룩하지 못한 원인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교회를 축복하시고 거룩하지 못한 성도나 교회는 징벌하심으로 거룩이라는 법을 시행해나가십니다. Ⅲ. 에스겔 43~44장에 나타난 다섯 가지 거룩의 원리 에스겔 43장과 44장에는 매우 복잡한 말씀이 있는데 그 내용은 바로 거룩의 원리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것을 거룩의 지도라고 표현하였는데 에스겔 43-44장은 거룩의 원리에 관하여 5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에스겔 43장 13~27절은 "제단의 원리"(Principle of Altar)입니다. 에스겔이 본 성전의 중심에는 제단이 있었습니다. 제단은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고 짐승을 태우는 곳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그 중심에 피 흘려 희생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피 흘려 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이심을 일분일초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목사나 성도가 주인이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 개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진리를 잊어버리는 순간 그때부터 우리는 마귀의 궤계에 놀아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쓰신다고 하실 때에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쓰신다고 하실 때에 못한다고 대답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사신 그리스도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단의 원리입니다. 둘째, 에스겔 44장 1~4절은 "닫힌 문의 원리"(Principle of Closed Door)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동문으로 들어오셨으니까 동문을 닫으라고 명하십니다. 동문을 닫으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못 들어오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나가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교회란 하나님의 영광이 지속적으로 임재하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또한, 거룩한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 즉 성령이 지속적으로 임재하여 충만케 되는 성도를 의미합니다. 여러분, 월요일부터 특별 새벽기도회가 시작됩니다. 모두 참석하시기로 결심하셔서 큰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가지 못하도록 문을 닫아 성령이 지속적으로 임재하여 충만케 되시길 바랍니다. 닫힌 문의 원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오셔서 충만하게 항상 임재하여 나가지 않아야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에스겔 44장 5~9절은 "배제의 원리"(Principle of Exclusion)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인들은 성전에 들어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불신자는 회원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도는 그 속에 거룩하지 못한 것을 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에 불신앙이나 의심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배제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교회는 믿는 자가 이루는 것이고 오직 믿는 자만이 침례를 받는 것이 바로 침례교의 원리인 것입니다. 넷째, 에스겔 44장 10~14절은 "우상거부의 원리"(Principle of Priests)입니다.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은 우상숭배의 방법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섬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나 성도들은 어떤 경우라도 우상의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이 앞일을 알고 싶다고 점쟁이한테 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결코, 우상의 방법으로 우리는 예배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무당이 와서 굿을 하는 방법으로 특별집회를 하면 되겠습니까? 어떤 부흥사는 최면술을 써서 부흥회를 인도한다고 하는데 그러한 예배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상 숭배의 방법은 모두 거부해야 합니다. 다섯째, 에스겔 44장 15~31절은 "제사장의 원리"(Principle of Priests)입니다. 다윗, 솔로몬 시대에 사독과 아비아달이라는 제사장 두 명이 있었습니다. 이 두명 중 아비아달은 다윗의 아들 아도니야가 반란을 일으킬 때 다윗을 배반하고 아도니야의 편을 들었다가 결국 솔로몬에 의해 제사장 직분을 파면당합니다. 그래서 에스겔 44장에는 오직 사독의 후손만이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독은 다윗에게 끝까지 충성했습니다. 결국, 거룩이란 그리스도에게 끝까지 충성함으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사장의 원리인 것입니다. 결론 에스겔 43~44장은 매우 어려운 말씀입니다. 제가 간단하게 원리를 말씀드렸는데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교회에는 거룩이라는 법이 존재하고 있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거룩하지 못했던 언행 심사를 하나님 앞에 진실로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말, 행동, 생각, 거룩하지 못했던 것 모든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는 하나님의 임재를 희생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의 원리가 기록된 법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 성도들은 성경을 읽고 공부하며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거룩을 이루어 하나님께서 항상 임재하시고 동행하는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제목 :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오실 때 본문 : 겔-43-01-9 본문 : 에스겔 43:1-9 1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향한 문이라 2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나니 3 그 모양이 내가 본 이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보던 이상 같고 그발 하숫가에서 보던 이상과도 같기로 내가 곧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더니 4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으로 말미암아 전으로 들어가고 5 성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더라 6 들은즉 누구인지 전에서 내게 말하더니 사람이 내 곁에 서서 7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영원히 거할 곳이라 이스라엘 족속 곧 그들과 그 왕들이 음란히 행하며 그 죽은 왕들의 시체로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8 그들이 그 문지방을 내 문지방 곁에 두며 그 문설주를 내 문설주 곁에 두어서 그들과 나 사이에 겨우 한 담이 막히게 하였고 또 그 행하는 가증한 일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으므로 내가 노하여 멸하였거니와 9 이제는 그들이 그 음란과 그 왕들의 시체를 내게서 멀리 제하여 버려야 할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거하리라 ========================== 서론 오늘 말씀은 에스겔이 환상가운데 본 성전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온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오면 하나님의 임재가 돌아오게 됩니다. 원래 하나님의 영광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의 지성소와 그룹천사의 형상들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왕들이 성전 안에 우상을 세우고 장로들은 동방태양을 경배하고 여인들은 바벨론의 신 밧무스를 위하여 애곡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버리셨습니다. 에스겔서 10장과 11장을 보면 성전 동문으로 나와 성읍 동편 산에 머무르시다가 바벨론의 포로가 된 사람들에게 옮겨 가셨습니다. 그리고 포로가 되어 낙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환상을 보았고, 그 환상 중에 본 성전 동문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오신 것입니다. 에스겔이 본 새 성전에는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도 없었으므로 여호와의 영광이 성소와 지성소를 포함하여 성전 전체에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지난주에는 에스겔이 본 새 성전은 신약시대의 교회를 예언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명을 다하고 때가 되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참 이스라엘이요 참 성전이라 말씀하셨으며 성도들은 참 제사장들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에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임재로 채우신다는 내용의 예언인 것입니다. I.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처소는 어디인가? 하나님은 교회를 세 가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째, 내 보좌의 처소(place of my throne)라고 말씀하십니다. 보좌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보좌는 왕이 앉는 의자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왕은 보좌에 앉아서 무엇을 합니까? 왕은 보좌에 앉아 나라를 통치하십니다. 교회를 하나님 보좌의 처소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말씀을 증거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시며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보좌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업신여기는 사람은 왕궁을 업신여기는 것이고, 왕궁의 계신 왕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둘째, 내 발을 두는 처소(place of soles of my feet)라고 말씀하십니다. 간단히 말하면 발등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언약궤를 가리켜서 발등상이라고도 했습니다. “이에 다윗 왕이 일어서서 이르되 나의 형제들, 나의 백성들아 내 말을 들으라 나는 여호와의 언약궤 곧 우리 하나님의 발판을 봉안할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어서 건축할 재료를 준비하였으나”(대상 28:2)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시 99:5) 교회는 하나님의 발등상이 있는 곳입니다. 발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발은 그 사람의 행동을 의미합니다. 즉 교회가 하나님의 발을 두는 처소라는 말씀은 교회는 하나님의 행동역사의 근거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높이시는 것과 낮추시는 것을 교회를 통해서 하십니다. 또한 사람을 축복하며 심판하시는 것 그리고 세상 역사를 움직이시는 것도 교회를 통해서 하십니다. 세상 역사를 움직이시는 것도 교회를 통해서 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영원히 거하실 곳(place of etenal dwelling)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에스겔이 본 새 성전은 영원히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거하시는 처소이며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교통하는 의식인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항상 충만하게 경험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지상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은 교회에 계신 것입니다. 교회에서 말씀 듣고 기도하며 예배하다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Ⅱ.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교회의 네 가지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진리의 말씀이 진리 그대로 선포되는 곳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왜곡되지 않는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교회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나니”(겔 43:2)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계 1:15) 하나님의 말씀이 폭포수처럼 전파되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지식, 경험, 경륜을 이야기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하면 순종할 수 있는가를 말하는 곳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면 땅에는 빛이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인 흑암 속에 사는 인간들에게 유일한 빛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파되는 곳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계십니다. 둘째, 참된 예배가 있는 곳입니다. “그 모양이 내가 본 이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보던 이상 같고 그발 하숫가에서 보던 이상과도 같기로 내가 곧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더니”(겔 43:3)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기만하면 엎드립니다. 에스겔 1장에서 바벨론 그발 강가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을 때에도 에스겔은 곧 엎드리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겔 1:28)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은 무릎 꿇고 엎드리는 것이 바른 자세입니다. 사람이 엎드리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성신이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성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더라”(겔 43:5)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을 성신이 들어 올리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합니다. 셋째, 우상이 제거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솔로몬 성전을 떠난 이유는 성전 안에 우상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가리켜서 본문은 왕들의 시체라고 했습니다. 왕들이 섬겼던 생명 없는 우상들을 가리켜서 왕들의 시체라고 말한 것입니다. 유다의 왕들 가운데 므낫세는 12살에 왕이 됐습니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된 므낫세는 성전 제단을 없애버리고 우상을 세웠습니다. “또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하여 단들을 쌓고”(왕하 21:5) “또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아세라 목상을 전에 세웠더라 옛적에 여호와께서 이 전에 대하여 다윗과 그 아들 솔로몬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이 전과 예루살렘에 내 이름을 영원히 둘지라”(왕하 21:7) 성전에 하나님과 담 하나를 두고 우상을 세운 것입니다. 그런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도 예배당 안에 온갖 우상들을 두고 있는 교회들은 교회라는 이름은 있어도 하나님의 영광은 머물지 않는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는 교회는 우상이 완전히 제거된 곳입니다. 넷째, 참된 회개가 있는 곳입니다. “인자야 너는 이 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서 그들로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형상을 측량하게 하라 만일 그들이 자기의 행한 모든 일을 부끄러워하거든 너는 이 전의 제도와 식양과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또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알게 하고 그 목전에 그것을 써서 그들로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겔 43:10-11)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회개하여 점점 거룩함을 이루어 나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두 종류의 회개를 해야 합니다. 하나는 자신이 하나님과 원수 되었고 하나님과 분리되어 죄 가운데 살았다는 것을 회개하는 구원받는 회개(Saving repentance)입니다. 구원받는 회개의 특징은 내가 내 힘으로 내 죄를 용서할 수 없고 용서받을 수 없으니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어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는 회개와 믿음은 나눌 수 없습니다. 이런 회개와 믿음을 합하여 회심이라고 말합니다. 회심한 사람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서 천국에 가게 됩니다. 이것은 일생에 한번 있는 사건입니다. 일생에 한번 구원받는 회개를 하면 그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우리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합니다. 구원받는 회개를 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잘못이 있으면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돌이키게 됩니다. 이것을 성화를 위한 회개(Repentance for sanctification)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온 몸을 목욕한 사람은 발만 씻으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화를 위한 회개는 발을 씻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사람은 점진적으로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Ⅲ. 하나님의 영광을 주관적으로 체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교회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는 것과 성도 개개인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가 모인 이곳도 성전이고 내 육신도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고 우리 각자의 영혼에도 영광과 임재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계시는 교회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다가 하나님의 임재를 개별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임재”는 인간에게 최고의 기쁨과 행복을 주는 일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요? 사람의 최고 행복과 기쁨은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면 인간은 행복해집니다. 아무리 환경이 어렵고 처지가 어려워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면 인간은 엄청난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셋째, 교회역사 속에 쓰임 받은 사람들은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중세기 수도사들만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상 쓰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임재를 크게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역사상 쓰임 받은 종들뿐만 아니라 오늘 이곳에 앉아 예배하고 있는 성도들 가운데 상당수는 하나님의 임재를 수시로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17세기 프랑스에 유명한 수학자요 철학자요 신학자인 파스칼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파스칼을 수학자로만 알지만 그는 진리를 선포한 위대한 신학자이기도 했습니다. 파스칼이 31살이 되던 1654년에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강한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나의 영혼 안에 하나님의 영광, 기쁨, 평안, 확신이 충만하게 되었다’라고 고백 했습니다. 그 후 파스칼은 거짓이 만연하던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파하는 종이 되었습니다. 또 19세기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D. L. 무디는 구두 수선공이었는데 거듭난 후 복음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을 증거하면서도 자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큰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중생을 경험한지 16년 후인 1871년 뉴욕에서 기도하면서 걸어가다가 성령의 강력한 임재 가운데 들어갔습니다. 그 후 세계적인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에게 온 세상을 다 준다하여도 그 축복을 경험하기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축복 중에 가장 큰 축복인 것입니다. 1904년 웨일즈에서 일어난 대부흥 운동은 일명 에반 로버츠 부흥운동이라고 불립니다. 에반 로버츠란 사람은 원래 광부였습니다. 1904년 밤에 10시간씩 기도하기를 석 달 동안이나 하는 가운데 그는 하나님의 깊은 임재 가운데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영혼이 삼층 천으로 올라간 것 같이 강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나서 그는 전도자가 되었고 2년 동안에 12만 명의 영혼을 구원하는 대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결론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는 곳입니다. 교회에서 진실로 엎드려 예배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많은 물소리 같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경배하고 무릎 꿇으셔야 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경배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우상은 다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지 않습니다. 돈, 권력, 명예, 인기, 자녀를 우상시하고 하나님보다 더 높이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이 제거되는 곳에 “내가 영광으로 임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악들을 구체적으로 고백하고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죄악을 그대로 가지고 있거나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우상을 가지고 있거나 하나님 말씀을 멀리 제쳐놓고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에스겔은 성령에 이끌려 성전 안뜰로 나아가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바깥뜰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자꾸 안뜰과 성전 안뜰로 들어가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됩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약 4:8)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안뜰로 자꾸만 나아가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까이하시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슬픔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 슬픔은 바뀌어 기쁨이 됩니다. ‘나는 왜 이렇게 연약한가?’, ‘나는 왜 인생을 살아갈 능력이 없는가?’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이 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 인생은 어두움을 방황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십시오. 그리하면 빛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 성도들이 간구하고 사모하며 기도로 체험해야 될 행복의 근원이요 기쁨과 능력의 근원인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제목 : 무리 가운데 계신 왕 본문 : 겔-46-09-10 본문 : 에스겔 46:9-10 9 그러나 모든 정한 절기에 이 땅 거민이 나 여호와 앞에 나아올 때에는 북문으로 들어와서 경배하는 자는 남문으로 나가고 남문으로 들어오는 자는 북문으로 나갈지라 들어온 문으로 도로 나가지 말고 그 몸이 앞으로 향한 대로 나갈지며 10 왕은 무리 가운데 있어서 그들의 들어올 때에 들어오고 그들의 나갈 때에 나갈지니라 ========================== 서론 구약성경을 보면 세 종류의 성전이 나옵니다. 제1성전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입니다. 이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으로 인해 B.C. 587년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파괴됩니다. 제2성전은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다 돌아와서 B.C. 516년에 지은 스룹바벨 성전입니다. 스룹바벨 성전의 규모는 솔로몬 성전보다 작았는데 이것을 예수님 당시 헤롯대왕이 개축을 했습니다. 40년에 걸쳐 개축을 마쳤고 이 성전을 헤롯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헤롯 성전도 A.D. 70년에 로마장군 티투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제1성전과 제2성전은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성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고 결국 두 성전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제3성전은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 가운데 본 성전이며 에스겔 40장부터 47장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의 성전은 한 번도 지어진 적이 없는 환상 속의 성전입니다. 솔로몬 성전과 스룹바벨 성전의 모든 식양과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스겔 성전은 더 나아가 신약시대의 교회를 상징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서가 어려운 이유는 구약시대에 살았던 에스겔이 제사장의 언어를 가지고 신약시대의 교회와 예배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의 용어로 신약을 설명하다 보니 어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에스겔 선지자와 눈높이를 맞춰 제사장의 언어로 보게 되면 신약시대의 교회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에스겔 40장부터 42장까지는 새 성전의 비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43장부터 44장까지는 새로운 성전을 지배할 법 즉 거룩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45장부터 46장까지는 이 성전에서 이루어질 새로운 예배에 관하여 말씀합니다. 마지막으로 에스겔 47장에서 48장까지는 새로운 땅의 분배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 45장과 46장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에스겔 45장 1∼8절까지는 땅의 분배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땅을 분배하되 그 중심에는 성전을 지을 땅을 꼭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살도록 하고 그 양 옆으로 왕의 땅을 주도록 했습니다. 왕은 중앙이 아니라 좌우에 있도록 한 것입니다. 왕이 성전을 보호하고 성전은 그 중앙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가 우리 성도의 삶 변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드시 우리 성도의 삶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45장 9∼17절은 예배를 위해서 정해진 예물을 반드시 드리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라 할지라도 예물 없이 드리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아닙니다. 어떠한 예배라도 예물을 정확히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예배에는 우리 마음의 헌신 그리고 물질의 헌신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45장 18∼25절은 에스겔 성전에서 지켜질 절기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의 절기에는 일곱 가지가 있었습니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장막절 이렇게 일곱 가지인데 에스겔 성전에서는 세 가지를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첫째로 신년절은 성전을 깨끗이 하라는 의미입니다. 둘째로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바로 왕의 노예로 있을 때에 모세가 풀어달라고 요구하자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10가지 재앙을 내리셨고 마지막 재앙으로 천사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장자를 다 죽였는데 어린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은 넘어간 것입니다. 유월절은 바로 그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니까 유월절은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마귀와 지옥의 권세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장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을 방황하면서도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고 반석을 쳐서 생수를 주시므로 자신들이 무사히 가나안 땅에 도착할 수 있었음을 기억하며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도 장막절이 되면 자신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했던 백성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집 옆에 초막을 짓고 일주일 동안 움막에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예배 가운데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에스겔 46장에서는 계속해서 안식일과 월삭에 드리는 제사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안식일과 월삭에 제사 드리되 왕은 백성으로부터 제물을 거둬서 제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풍성하게 공급을 해주고 제사장들에게도 그 음식을 풍성히 주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제사장은 다른 직업을 갖지 않고 제사 드리는 일에만 집중하도록 왕은 백성에게 예물을 거두어 제사장이 먹을 만큼 음식을 주라는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에스겔 46장 9-10절은 새로운 예배의 중요한 세 가지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I. 예배는 “여호와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9절 전반) 결국 예배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정한 절기에 이 땅 거민이 나 여호와 앞에 나아올 때에는”(겔 46:9) 이 짧은 말씀 안에 에스겔은 신약시대의 예배에 관하여 4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배는 “의무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배할 것을 당연히 기대하고 계십니다. NIV 성경으로 에스겔 46장 9절을 보면 if가 아닌 when으로 시작됩니다. 이것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에게 예배는 드려도 되고 드리지 않아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당연히 예배드릴 것을 기대하시고 주일이 되면 먼저 오셔서 환영해주시는 것입니다. 주일날 어디를 갈지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주일날은 당연히 교회에 와서 예배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예배드리는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생기는 것입니다. NIV 성경에서는 에스겔 46장 9절에 shall이라는 조동사가 빠져 있지만 KJV 성경을 보면 “But when the people of the land shall come before the LORD”으로 shall이 들어가 있습니다. KJV 성경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 땅 백성이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결코 스스로 주일날 교회 와서 예배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불신자들에게는 예배 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여자들만 예배드리러 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드리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남자와 여자 비율이 비슷한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남자비율이 지나치게 많거나 여자비율이 많은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받은 사람이면 남자든 여자든 종이든 자유자든 가리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배 드리고자 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세상 불신자들에게는 결코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예배는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당신은 무엇 때문에 오늘 예배에 나오게 되었는지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내가 어려서부터 습관적으로 교회를 다녀서 왠지 주일날 예배 드리지 않으면 불안해서 나왔다고 대답하는 분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주는 점심이 맛있어서 먹으러 나왔다고 대답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잘못된 대답입니다. 이 질문의 정답은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 나왔다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목사 얼굴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데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유명한 청교도 운동의 지도자인 토마스 왓슨은 “왕궁에 가서 바깥 뜰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은 왕과 대화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예배드릴 때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몸이 가까이 있어도 마음이 멀리 있으면 소용없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자 할 때 그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시 예배드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그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것을 탄식하셨습니다.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막 7:6)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은 마음으로 뵙는 것입니다. 넷째, 예배에는 “거룩성”이 있어야 합니다. 개혁한글 성경에는 에스겔 46장 9절에서 “정한 절기에”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KJV 성경에서는 “solemn feasts” 즉 거룩한 절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구별된 시간은 거룩한 시간이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예배 자체도 거룩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전에 많은 교회들이 열린 예배라고 하는 것을 시도했었습니다. 하지만, 열린 예배라고 하는 곳을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 사람들이 즐기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악기도 최신 악기를 구매하고 노래도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가지고 예배를 드립니다. 찬양을 부르는 사람들도 유명한 가수를 했던 사람들로 뽑아서 찬양도 마치 가요처럼 부르면서 사람들의 흥을 돋우는 것입니다. 그런 예배에 참석하면 처음에는 신이 납니다. 사람들의 복장도 현란해서 구경거리도 많으며 기분도 좋습니다. 하지만,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왠지 쓸쓸합니다. 영혼이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열린 예배를 시도했던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열린 예배라고 하는 것이 불과 10여 년 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실패한 예배라고 평가가 내려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배를 사람들이 즐거워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사람이 즐기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 입니다. 이처럼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거룩성이 있어야 합니다. 저 또한 설교 가운데 여러분들이 졸지 않도록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농담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를 해서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너무 지나쳐서 예배의 거룩성을 해쳐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스겔 46장 9절 이 간단한 말씀에도 예배에는 의무성과 은혜성 그리고 거룩성이 있어야 한다는 중요한 원리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Ⅱ. 예배에는 “그리스도 예수님”이 동행하고 계신다 (10절) 왕은 메시야를 예표합니다. “왕은 무리 가운데 있어서 그들의 들어올 때에 들어오고 그들의 나갈 때에 나갈지니라” (겔 46:10) NIV 성경에서 왕은 영어로 prince로 되어 있습니다. 이 prince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릴 왕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유다 백성이 귀환하고 나서는 왕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스룹바벨도 왕이 아닌 총독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헤롯 왕가도 로마와 결탁하여 뇌물을 주고 왕이 된 것이지 정상적인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왕을 대부분의 학자들이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고 해석하며 저 또한 그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예수님을 이사야 9장 6절에서는 “평강의 왕”, 사도행전 3장 15절에서는 “생명의 주”, 사도행전 5장 31절에서는 “임금과 구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백성과 함께 출입하는 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백성과 출입을 함께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왕들은 백성 사이에 거하지 않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만 해도 위험하기 때문에 시민들이 사는 곳에 함께 있지 않고 청와대 안에서 경호를 받으며 지냅니다. 하지만, 에스겔 성전에 나타나는 왕은 백성 가운데 거하시고 백성과 함께 출입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왕은 정치적인 통치자가 아니며 대제사장도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인 것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 예수님께서는 두세 사람만 모여도 그 무리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동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잘 알고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옆에 계시는데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알아보지도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인생이 가장 복되고 바르게 사는 인생입니다. Ⅲ. 예배드리는 사람에게는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9절 중반 이후) 예배를 드리는 사람에게는 참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모든 정한 절기에 이 땅 거민이 나 여호와 앞에 나아올 때에는 북문으로 들어와서 경배하는 자는 남문으로 나가고 남문으로 들어오는 자는 북문으로 나갈지라 들어온 문으로 도로 나가지 말고 그 몸이 앞으로 향한 대로 나갈지며” (겔 46:9) 성전에는 문이 모두 세 개가 있습니다. 서쪽은 성전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문이 없습니다. 그래서 동문, 북문, 남문이 있는데 에스겔 43장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동문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에 에스겔 44장 1∼2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가지 못하도록 동문을 닫아두게 됩니다. 결국, 백성은 남문이나 북문으로만 출입하게 됩니다. 그런데 남문이나 북문으로 들어오되 들어온 문으로는 절대 나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예배에는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에 참석할 때는 복장도 단정하게 입어야 합니다. 헌금위원, 성가대 모두가 규정에 맞는 복장을 착용하고 질서를 지켜 예배가 산만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휴대전화기도 되도록 꺼두시기 바랍니다. 혹시 전화가 와도 예배 중간에 받아서는 안 됩니다. 둘째, 신앙생활은 후퇴가 있어서는 안 되고 오직 전진해야 합니다. 다같이 전진하다 유턴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고가 납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히 10:38-39)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이 뒤로 물러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저는 바퀴 두개 달린 자전거가 쓰러지지 않고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전거를 타고 앞으로 달려가지 않으면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지하는 순간 쓰러지는 것입니다. 셋째, 예배드리고 나면 “좋은 변화”가 있어야 한다. 사람은 좋은 변화를 할 수도 있고 나쁜 변화를 할 수도 있습니다. 나쁜 변화를 하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가 오게 되고 좋은 변화를 하게 되면 하나님의 축복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났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 사람은 이상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조금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변화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 또한 예배를 드리다 하나님을 만나 이렇게 변화되었습니다. 예배는 사람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결론 영국의 유명한 청교도로서 ‘참된 목자’라는 책을 저술한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이 “주일 예배는 영광으로 가는 계단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예배를 통해서 변화되고 궁극적으로는 천국에 합당한 존재가 되도록 준비됩니다. 우리는 매주 예배를 드리면서 지난주에 드렸는데 또 드려야 하느냐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우리는 천국으로 한 단계씩 나가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도 지난주보다는 한주 더 천국에 가까이 왔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이나 교회 밖이나 예수님과 동행하는 인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릴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가 동행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한 단계식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 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제목 : 에베소교회 본문 : 계-02-01-7 주후 90년대 기독교는 로마에게 아주 잔인한 핍박을 받던 시절입니다. 그때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로, 그 사람을 비롯해서 네로 황제 등 대다수 황제들이 기독교 핍박에 앞장섰습니다. 이러한 로마의 잔인한 핍박 속에서 요한계시록 성경이 기록되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상황에 의한 은유적 해석이 많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보셔야 합니다. 따라서 이 요한계시록에는 로마 권력에 대한 비판이 은유적이 많이 깔려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를 지배해 가면서 로마의 상징적 깃발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바로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고 하는 깃발입니다. 로마 정치 두 가지 이데올로기를 말하는 것인데, 하나는 정치적인 안정으로 “로마가 가는 곳은 평화이다. 그러므로 로마에 항거할 생각하지 말고 위대한 로마의 힘에 의한 안정된 사회 건설을 이루어라.” 또 하나는 “그렇게 되면 경제적 풍요가 이루어져서 모두가 다 같이 잘 살게 된다.” 이러한 깃발을 내세우고 약소국가들을 점령해 나갔는데 요한계시록에는 바로 로마의 그러한 정책을 짐승과 음녀라고 로마인들이 전혀 모르는 은유적 기록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음녀가 짐승을 타고 있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음녀와 같이 하고 있는 것을 음행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음행인가? 로마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핍박하면서 황제 숭배를 강요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이 로마 황제 숭배는 기독교인으로서 음녀와 음행에 빠진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로마의 ‘팍스 로마나’ 철학은 과거 일본 제국이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내세운 것과 똑같습니다. 아시아를 점령해서 “우리가 아시아에 한 나라를 만들어서 세계 강대국을 만들면 다 똑같이 행복해진다.” 그러니까 이 일본의 정치 철학에 동조해 아시아의 최강대국을 만들어서 너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하자고 한 것이 일본의 정치 철학이었습니다. 로마가 ‘팍스 로마나’ 정치를 가지고 세계를 지배해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13장 4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능히 이 짐승과 싸울 것인가? 로마와 싸울 자가 누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버리고 음녀인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음행자가 되었다고 기록된 것입니다. “여기서 음녀 로마를 대항해서 싸워 이길 힘이 오직 하나다. 예수 그리스도이다.” 14장 4절에 보면 “구원을 받을 자는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않고 순결한 자다.” 이런 말이 있는데 그 여자가 누구입니까? 로마 황제 숭배, 로마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버리고 황제 숭배를 한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이 요한계시록에 나온 일곱 교회를 조명해 보면 갈보리교회도 가야할 방향이 나오는데 첫 번째로 오늘 에베소 교회를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성지순례하신 분들은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의 흔적을 모두 보셨을 것입니다. 저도 오래전에 가 봤습니다. 일곱 교회는 다 망가졌습니다. 그 망가진 흔적을 보러 가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여러 교회를 창립하고 목회하는 중에 에베소 교회에서 제일 오랫동안 목회를 했습니다. 아마 지금 세계 지도대로 말하면 터키 제일 서쪽 바닷가 항구 도시가 에베소였습니다. 바닷가의 항구도시로 발전했기 때문에 유럽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량 역할을 함으로 무역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래서 상업이 발달했고 경제가 매우 활발한 도시입니다. 인구가 많아지고 외국인도 아주 빈번하게 드나들었고 또 종교적으로 역할이 컸습니다. 그 당시에 세계 7대 불가사이로 여기던 아데미 신전이 에베소에 있었습니다. 외국 상인들이 많이 왕래하던 관계로 자연히 유흥업소가 많아지고 향락 문화가 발달한 자유도시라는 별명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성경말씀과 같이 교회도 활발했습니다. 다 잘되는 도시라고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 도시에 있는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주님이 지금 몇 가지 평가를 객관적으로 내렸습니다. 거기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너는 믿음에 있어서 수고와 인내가 있었다.” 당시에 기독교 운동은 지하 운동입니다. “요한계시록”이라고 하는 이 책은 지하 운동을 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보내진 지하 문서입니다. 로마 황제라는 음녀가 큰 힘을 가지고 기독교를 핍박하는데 그것이 무서워서 그 음녀에게 붙어서 황제 숭배, 즉 음행을 일삼는 절대 다수의 대중 속에서 소수가 지하 운동을 펴가며 그 음녀와 싸우는 기독교인들이 암호 문서를 지하 조직으로 돌리면서 견디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이런 조직의 지하 운동은 위험합니다. 얼마나 힘든지는 우리나라의 과거 독립 운동가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정부에서 독립 운동 유공자들에게 다소 혜택을 주는 것으로 아는데 저는 그런 일을 정부가 아주 잘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런 자유와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이 독립 운동가들의 자손들은 하나같이 다 고통을 겪었습니다. 아버지가 가족을 돌보지 않고 나가서 독립운동을 하느라고 너무 고난을 받고 살았기 때문에 그분들에 대한 예우는 국가가 잘해주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그러한 핍박 속에 이 로마의 세력 앞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오늘 말씀에 “수고와 인내가 있는 교회였다.”라고 나옵니다. 어느 민족이나 초대 교회 시절에는 두 가지 필수 과목이 따라옵니다. 아픔과 고난은 다 겪었습니다. 어떠한 아픔과 고난이 있었는가? 이 초대교회 크리스천들은 제일 고통스러웠던 것이 식량 배급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굶어죽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이것은 “인간을 향한 가장 무서운 고문이었다.” 이렇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왜 공산당 국가들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체제를 도입하지 않고 국민들에게 배급 제도를 실시했는가? 그 제도만 실시하면 국민을 가장 쉽게 길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는 대로 먹어야 합니다. 말 안 들으면 먹는 것을 안주면 끝납니다. 그러니까 하라는 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니까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 음녀와 더불어 음행하고” 황제 숭배를 하고 “그 백성들이 음행을 하면서 마신 포도주에 취해있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러한 환경 가운데서 에베소 교인들은 배고픔을 견디면서 인내했다는 겁니다. 그 고통과 그 고난과 아픔을 견디었다는 것입니다. 여기 수고와 인내라고 했는데 헬라어 원문의 뜻은 “피곤하다”는 뜻입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항상 피곤한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국가 공무원에서 쫓겨났고, 정당한 시민의 권리에서 제외 되었으며, 식량 배급에서 중단되고, 사회생활은 극심한 왕따 문화에서 살아야 했으며 심지어는 생명의 위협까지 참고 견디었으니 얼마나 훌륭한 신앙생활을 했습니까? 이것을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에베소에는 도미티안 황제의 숭배 신전이 있었기 때문에 더 핍박이 많던 곳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이 에베소 교회가 잘한 것을 여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들을 드러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초대교회에서부터 지금까지 그치지 아니하는 교회에 침투하는 보이지 않는 세력, 이단을 말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경험했고 지금도 똑같습니다. 이 이단교파의 교주들은 거의 똑같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자신을 그리스도화합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도 경계하셨고 바울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일지라도 믿지 말라.” 이렇게 강한 표현을 했습니다. 대한민국은 웬 재림주가 그렇게 많이 내려오셨는지 수백 명입니다. 이 에베소교회는 니골라당이라는 이단이 침투해서 어지럽게 하는데 이 니골라당이 바알종교입니다. 구약을 보십시오. 하나님과 바알의 전쟁터 같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바알을 싫어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무자비성 심판이 나타납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바알 지도자들과 싸울 때 450명 모조리 현장에서 죽여 버리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모압 평지에서 모압 여자들이 바알에게 예배드리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찾아와서 남자들이 다 가서 바알에게 예배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너무 화가 나셔서 2만3천명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무자비성 심판이 나타나는 게 바알에 대한 우상 숭배인데 에베소 교회에 니골라당이란 이름으로 침투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인들은 이것을 신학적으로 잘 구분해서 물리쳤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것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영적 지혜는 아주 훌륭했다.”

여러분! 이단 유혹 받으신 적이 없습니까? 저는 제가 목회하던 지역에서 이필재 목사를 아예 목표로 정하고 공략했던 일도 있습니다. 거기서 계획을 짜서 나왔습니다. “이 지역에서 이필재 목사만 이단에 물들게 하면 다 끝났다. 다 쓰러진다.” 그래서 얼마나 세밀하게 교인 가정으로 들어와서 접근했는지 모릅니다. 다 경험한 것입니다. 제가 신학 공부하기 전에는 이 지역에 교회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단이 들어와서 제 동기생은 거기에 빠졌습니다. 이단 앞잡이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명령했습니다. “이 지역에 교회 하나 밖에 없는데 거기에 너희들 친구 이필재만 낚아 와라. 그러면 문제는 간단하다.” 그래서 내 동기생 두 친구가 거기에 빠져서 저를 그곳으로 끌고 가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마지막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예수님 만나게 해줄 테니 가자.” 그 교주가 자기들의 예수님인 것입니다.“아무도 안 만나주시는데 너는 만나주신다고 우리가 약속받아왔다.” 그런 유혹까지 받았습니다. 저는 잘못했으면 재림주를 만날 뻔 한 사람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아주 신학적으로 튼튼합니다. 니골라당이 다 물러갔습니다.

그 다음에 또 칭찬이 하나 있습니다. 게으르지 않은 신앙생활을 했다고 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첫째 조건이 부지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도 직장이 있고 가정이 있고 다 있습니다. 그런 많은 일을 하면서 교회 생활 하나를 더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생활 때문에 다른 것에 손해가 나지 않게 하려니까 자연히 부지런해집니다. 남보다 일찍 일어나야 하고, 쉬는 시간 줄여야 하고, 늦도록 활동해야 합니다.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구역예배, 주일예배, 각종 모임, 봉사생활…. 이처럼 교회에 나와서 많이 활동하는 사람들은 사회생활과 시간이 비슷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부지런하게 일해야 합니까? 그런데 에베소 교인들은 그렇게 한 것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신자들의 생활은 보통 부지런해야 하는 게 아닙니다. 특별히 부지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지가 힘듭니다. 항상 새벽에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자신의 개인 생활도 손해가 안 나도록 해야 합니다.

이만하면 에베소 교회는 객관적 평가에서 대단히 훌륭한 교회라고 볼 수 있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열심 있는 처음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말은 어떻게 우리가 해석할 것인가? 우리가 예수를 믿고 처음에 가장 귀하게 얻은 것이 있습니다. 영생의 진리는 있고 구원받은 감격을 말합니다. 인생에 가장 큰 진리, 인간됨의 최고의 축복입니다. 생명은 불변하는 영생의 진리를 우리가 얻고, 나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성 있는 삶을 가장 기쁘게 해나갈 수 있다는 하나님 자녀의 특권이 내게 주어진 것에 대해 너무나도 감격해서 그 시절에는 이 하나의 조건만 가져도 나는 평생 행복하게 주님 앞에 충성할 수 있다는 감격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신앙생활에 최선과 차선의 축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최선의 축복은 바로 믿음으로 구원받아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감격 하나로 만족하며 온 세상을 다 얻은 듯 한 기쁨이 있었는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최선의 복은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차선의 복에 훨씬 더 마음을 쓰게 됩니다. 차선의 복이 무엇입니까? 이 지상의 삶에서 얻는 것들을 말합니다. 건강하게 살고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복의 일부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런데만 관심을 쓰다가 가장 훌륭하고 좋은 최선의 축복인 영생의 문제는 관심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식량 배급을 받지 못하면서도 에베소 교인들은 처음에 ‘죽으면 그만이지! 안주면 안 먹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영생을 생각하면서 그 배고픔을 참고 견디고 인내했던 그 신앙은 이제 간 곳이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세상 기준에 너무 집착을 하게 되고 작은 일에 너무나 절망하고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만 눈을 뜨게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 영광의 관심보다는 자신의 성취도에 더 관심을 쓰게 됩니다. 이렇게 사람이 좀 변합니다. 에베소 교회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께만 좋으면 되던 일이 이제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더 좋아져 버렸습니다.

가끔 우리 목회자들 간에 듣는 소리가 있습니다. “아! 저 사람은 목회에 성공했다. 저 사람은 목회에 실패했다.” 그러면 누가 성공한 목회자이고 누가 실패한 목회자입니까? 바로 그런 기준이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사람의 소리에 기준을 맞추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신앙이 세속화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이 시간 저 두메산골이나 외딴섬에서 교인 몇 명을 모시고 목회하고 있는 목사는 실패한 목사인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가 더 성공자일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목회자가 자신의 그 빈약한 목회 활동을 비관하며 좌절한다면 그 목사도 첫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처음에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을 때는 거의 똑같은 감격을 하면서 목사를 하고자 합니다. 찬송가에 있잖아요?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죽음인들 막으리까?” 처음에는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못 말립니다. ‘나는 이 길을 가야 돼! 어떤 조건도 못 말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 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이것이 처음 사랑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업주의 원리 문화에 젖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은 다 성공했고 나는 실패했다는 세속적 결론에 슬퍼하면서 울게 됩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오는 겁니다. 이 초심으로 돌아가는 문제는 우리의 모든 삶의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여러분! 결혼 생활을 생각해 보세요. 초심이 뭡니까? “반딧불 초가집도 님과 함께면” 남진 씨가 부를 때 얼마나 좋은지 “나는 좋아 나는 좋아” 그러더라고요. 그 초심은 얼마 안가서 간 곳이 없고 조건부에 의한 행복 추구만 계산하게 되니까 처음 사랑은 다 잊어버립니다. 교회가 부흥회를 합니다. 저도 부흥회는 많이 가는 편입니다. 왜 합니까? 처음 사랑 회복을 위해서 하는 겁니다. 내가 처음에 예수 믿고 성령이 충만하여 믿음이 주어진 그 하나의 조건, 인생의 최고같이 여겼던 영생의 축복에 대한 내 믿음은 지금 어디로 가고 이렇게 초라하게 내가 믿음이 식었는가? 이것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 회복에 대한 믿음은 아주 많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처음 어디서 만나죠? 벧엘입니다. 거기서 뭐라고 그럽니까? 돌기둥을 세워놓고 “과연 하나님이 계시거늘 할아버지가 하나님이 있다고 말했고 아버지가 그랬는데 오늘 나는 비로소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았다. 과연 하나님이 계시다.” 그래서 하나님과 뭐합니까? 서원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 십일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전, 예배당도 짓겠습니다. 하나님 좋아하시는 것만 하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잖아요? 그런데 지키지 않습니다. 20년 만에 돌아올 때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창세기 35장 1절에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던 그 때 나와 만났던 벧엘로 와라.” 갔습니다. “여기서 네가 나한테 무슨 이야기를 했지? 나는 네가 기도한 것을 다 들어주었는데 너는 아무것도 안했지? 처음 사랑 어떻게 된 거야?” 그래서 야곱을 그때 벧엘로 불러서 처음 사랑 회복시켜 주시고 그때부터 야곱이 새로워지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제자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갈릴리로 오라 하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제자들도 지금 예루살렘에 다 있습니다. 거기서 만나면 되는데 왜 나라의 제일 끝인 저 북쪽 지방인 갈릴리까지 걸어서 오라고 하셨습니까? 베드로가 거기 가서 예수님을 만났잖아요?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너 이 자리에서 나한테 뭐라고 약속했니? 내가 죽을지언정 주를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죽음을 다 하고 주님을 따르겠나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니?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우리가 잘못하면 다른 것은 다 풍성하게 하면서 신앙생활은 가장 빈약하게, 하나님을 향한 것은 가장 인색하게 변합니다.

제가 인도에 선교여행 갔다 오는 길에 비행기를 한국 모 재벌 총수와 같이 탔습니다. 내가 이름 말하면 여러분 거의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대한민국 신문과 TV는 그 재벌 기업의 형제들이 서로 싸워서 고소하고 난리 피운다고 막 떠들던 때입니다. 저는 그분의 얼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형제들이 재벌이 되기 전 어린 시절 처음 사랑은 뭔가?’ 누구든지 그렇죠? 동생 매 맞고 들어와 보세요. “누가 내 동생 때렸어?” 찾아가서 “내 동생 건드리기만 해봐라.” 형이 없으면 못살 것 같고 동생은 나의 영원한 보호자이고 우애 있게 “형! 형!” “그래, 내 동생 이리 와!” 이것이 처음 사랑 아닙니까? 그러면 재벌이 되었으면 더욱 사랑해야 될 거 아닙니까? 결국 그 형제는 한 사람이 자살해서 끝났습니다. 처음 사랑 어디로 갔나?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오늘 말씀은 이것입니다. “네가 예수를 믿고 가장 감격스럽게 주님 앞에 감사했던 그 마음은 어디로 가고 너는 지금 마지못해 가장 빈약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구나! 처음 사랑을 회복하자.”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네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네 촛대를 옮기리라.” 촛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축복과 사명입니다. 이것이 촛대입니다. 도로 빼앗겠다는 것입니다. “초심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빼앗겠다.” 여러분! 예수님이 마태복음 21장 43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열매를 제일 먼저 받았습니다. 택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왜? 너희가 이 축복을 온 세상에 다니면서 나눠주라고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안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빼앗아서 다른 민족에게 준 것이 기독교 2천년 역사입니다. 여러분! 빼앗기지 마십시오. 처음 사랑 회복이라는 말은 인간의 모든 삶의 원초적 요소가 됩니다.

지금 추석 명절을 위한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런 기회는 더욱 처음 사랑이 필요한 때입니다. 가족 관계가 행복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그동안 헤어져서 나눌 수 없던 사랑에 대해서 안쓰러운 마음을 뜨겁게 교환해야 추석 명절이고 이 먼 거리를 오고가는 보람이 있는 것이지 잘못하면 명절 증후군이라는 것이 생겨서 이혼 소송이 몇 배나 늘어나는 괴로운 역사가 현실적으로 생깁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각자의 촛대가, 그리고 축복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 사랑과 촛대를, 순결성을 잃지 말고 처음 사랑으로 항상 지켜나가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가 됩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면 가정도, 교회도, 나 자신도 모두 행복해 집니다. 아무리 망가진 인생이라도 처음 사랑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 탕자 비유입니다. 탕자는 다 망가졌습니다. 그러나 생각 하나를 올바르게 함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자. 아버지와 처음 사랑을 회복하자.’ 그 생각 하나가 그로 하여금 돌아오게끔 만들었고 돌아와서 제자리에 앉게 되는 회복이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만이 나의 갈 길이라고 하는 결론을 내려서 믿음이 처음 감격으로 되돌아가서 영원토록 하나님께서 나를 기쁘게 사용하시고, 내 인생에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이 사랑의 사명 촛대라고 하는 기쁨을 가지고 쓰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 제목 : 서머나교회 본문 : 계-02-08-11 예수께서 직접 평가하신 일곱 교회 중에 두 번째는 서마나 교회입니다. 지금 이 서머나라는 이름은 “이즈미로”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서머나 도시는 당시 소아시아의 꽃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가 이렇게 아름답게 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기원전 195년에 이곳에다 로마의 여신을 위한 신전 건축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인과 같이 아름다운 도시 건설을 위해 로마가 경제적으로 후원을 했습니다. 서기 26년에는 로마에 대한 충성 표시로 티베리우스 황제를 위한 신전을 건축했고 아드리안 황제, 카라칼라 황제 신전을 모두 여기에 건축했습니다. 이렇게 서머나는 황제 숭배를 위한 신전의 중심지가 되어 국가 지원을 막대하게 받은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경제 부흥이 잘 이루어진 부유한 도시로 발전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정반대의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들이 생겨지게 됩니다. 황제 숭배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입니다. 당시는 황제 숭배자들이 정기적으로 신전에 모여서 일제히 합창하는 말이 공식적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가이사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하는 것입니다. 가이사는 로마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자연히 로마 국가 원수를 모독하는 결과가 되어지고 거기에서 잔인한 핍박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당시 서머나 기독교인들이 당한 핍박은 다섯 가지 종류로 나타났습니다.

사회 공직에서의 박탈, 직장에서 쫓겨났습니다. 재산 몰수, 모든 재산권은 국가에서 있으며 국가 권력은 로마에 귀속되어 있다라는 논리입니다. 감옥에 투옥되고, 마지막에는 처형되었으며 한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면 8촌까지의 일가친척까지 이런 핍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자기들까지 고난을 당하게 되기 때문에 가문에서 예수를 믿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폴리갑이라는 교회 감독입니다. 바로 서머나 교회 감독이었습니다. 서기 155년 2월 23일 총독에게 끌려갔습니다. 그에게 총독이 간단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너희 책임은 아주 간단하다. 지금 이 공개된 자리에서 ‘가이사는 우리의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라. 그리고 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가르치지 말라. 그러면 너는 평생 복되게 살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네 옆에 쌓아놓은 저 장작더미 위에서 불에 태워 화형을 당할 것이다.” 그 때 폴리갑 감독의 나이 86세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86년 동안 주님은 단 한 번도 나를 버리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저 장작더미는 주님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주시는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화형 당해 죽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고 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분들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너무나 편안하게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까운 중국에서는 기독교 핍박국가라는 오명을 벗어나기 위해 공산당이 교회를 허락하면서 몇 가지 조건을 붙였습니다. 첫째로 삼자 교회에 등록할 것. 국가가 인정하는 교회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3자 교회는 나쁜 교회라든가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다든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조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네 가지입니다. 18세 미만의 어린이는 교회 나오는 것을 금할 것, 외국 선교사를 받아들이지 말 것, 설교 가운데 예수 재림에 대해 말하지 말 것, 특별히 요한계시록을 강조하지 말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지하 교회가 더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지하 교회에서는 가장 강조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워온다고 하는 설교를 제일 좋아합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종말론적 설교라고 합니다. 간단한 통계가 있습니다. 기독교 핍박 국가에서는 모든 교인들의 생각이 종말론적으로 변해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 세상에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일제 핍박 시절에 모두 똑같은 신앙으로 결속되었습니다. 그 때 제일 은혜스럽게 부르던 복음성가는 천국 소망에 대한 노래였습니다. 교회 헌금송이나 특송 부르는 사람은 이런 노래를 많이 불렀습니다.

“꿈결 같은 이 세상에 산다면 늘 살까 일생의 향락 좋다해도 바람을 잡누나.

험한 세월 고난 풍파 일장춘몽이 아닌가 슬프도다 인생들아 어디로 달려가느냐?”

“이팔청춘 그 꽃다운 시절도 다 지나고 혈기방장 그 장면도 옛날이 되누나.

성공 실패 꿈꾸면서 웃고 우는 그 순간에 원치 않는 흰백발에 눈서리 휘날린다.”

이 세상을 포기하고 하늘나라만 생각하는, 그래서 이 세상은 헛되다고 하는 ‘허사가’는 라는 것이 인기가 있었습니다.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공명 장수는 무엇하리요

고대광실 높은 집 문전옥답도 우리한번 죽으면 일장의 춘몽

홍안소년 미인들아 자랑치 말고 영웅호걸 열사들아 뽐내지 마라

유수 같은 세월은 널 재촉하고 저 적막한 공동묘 널 기다린다.”

지금은 복음성가도 다 변했습니다.

“축복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세상이 살기 너무 좋아져서 천국가고 싶은 믿음 열정이 다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실 서구 사회에 교인 감소 원인 중에 가장 큰 것이 생활향상입니다. 이대로 좋은데 ‘천국이 뭐가 그리우냐?’라는 생각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세상 기준으로는 하나도 좋은 것이 없고 오직 고난스러운 일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머나 교회는 다른 교회와 다른 것이 뚜렷합니다. 주님의 책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본 에베소 교회도 여러 가지 칭찬이 있었지만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일곱 교회를 분류하면 칭찬만 있는 교회, 칭찬과 책망이 함께 있는 교회, 책망만 있는 교회인데, 서머나 교회는 칭찬만 있는 교회였습니다. 무슨 칭찬을 하셨는가?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알아주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누군가 나의 진실과 본심을 알아줄 때 매우 행복합니다. 나의 본심이 전달되지 않을 때 같이 답답한 일이 없습니다. 환장하겠다는 말을 쓰는데 배를 째서 속을 다 드러내 보이고 싶을 때 쓰는 말입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나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염려하는 충정의 자기 마음을 몰라줌이 창자가 끊어지는 듯했다는 시입니다.

서머나 교인들은 핍박으로 인하여 말할 수 없이 환란을 당하고 궁핍해졌는데 주님께서 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알아주고 인정하는 환란이나 궁핍은 심할수록 축복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말이“실상은 네가 부요한자니라.”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로마 정권도 그 세력 많던 황제들도 흔적조차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 교인들은 영원한 면류관을 소유했으며 장작더미에 화형 당했으나 폴리갑 감독은 기독교 역사에 영원한 순교자 스승으로 부요해졌습니다. 우리 삶의 가치관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베다니 마리아의 집에 예수님이 방문하셨을 때 마리아가 300데나리온 가격의 옥합을 열어서 예수님의 발을 씻는데 왈칵 쏟아 부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다 놀랐습니다. 제일 놀란 사람은 가룟유다였습니다. “어찌하여 이 비싼 향유를 허비하느냐?” 300데나리온이면 꽤 큰돈입니다. 지금 돈으로 아무리 싸게 계산해도 3000만 원 이상입니다. 어떻게 계산하나? 예수님이 부흥회하셨을 때 모인 사람들이 남자만 5000명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역사적으로 봤을 때 항상 여신도들이 더 많았고 지금도 대한민국 어느 교회든지 군인교회를 빼놓고 여신도가 더 많습니다. 그러면 아이들, 여자들 모두 합치면 5000명에 충분히 배가 됩니다. 만 명 정도입니다. 그런데 빌립이 계산을 했습니다. 이 무리를 먹이려면 200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만 명의 한 끼 식사 가격으로 지금 우리가 3000원짜리 점심을 먹는다고 3000만원이고, 5000원짜리를 먹으면 5000만 원 정도가 200데나리온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마리아는 300데나리온 향유를 발 한번 씻는데 쓴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룟유다의 계산대로 마리아가 그 돈을 가지고 다른데에 사용했다고 합시다. 그것을 재투자해서 돈도 늘리고 장사를 해서 이익도 많이 남겨서 부자가 되어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합시다. 그것과 예수님 발에 부어서 주님이 알아주는 칭찬의 말이 오늘날까지 성경으로 남은 것, 온 세상 설교자들이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린 사건을 예수님 오실 때까지 이야기하는 것, 어느 것이 현명합니까? 이것이 영적 가치관입니다. 주님은 “잘 했다. 괜찮아.” 칭찬하셨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주님의 인정을 얻은 교회요, 그 믿음의 풍요가 실상은 부요한 자가 된 것입니다. 주님을 부요하게 하는 일이 부요한 것입니다. 선교비 많이 지출하느라고 우리 갈보리교회가 실제로 수고 많이 한다고 인정할 것입니다. 힘들다고 해서 만약 안하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주일마다 잔치해서 먹어치워버릴까요? 주님의 인정이 있는 교회 “나는 너를 안다. 네가 왜 힘들고 궁핍한지 내가 잘 알고 있다.” 옛날에 관리들은 억울한 일이 있거나 어떤 소원이 있을 때는 유일한 방법이 하나 있었습니다. 임금님에게 상소를 적어 보내는 것입니다. 그 상소의 글은 최고의 문장으로 가장 진실 되게 정성 드려 올려서 만약 임금님이 그것을 보시고 인정했다면 일은 간단히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인정만 하시면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이것이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인정받았습니다. “ 왜 너희가 궁핍하며 왜 환란을 당하는지 나는 알고 있다.” 그러면 그들에게 어떤 사명이 계속해서 주어지나?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란을 받으리라.” 고난과 궁핍이 끝나지 않고 계속됨을 알리고 더 심해질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이렇게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모든 권세는 마귀가 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역사는 예수 재림시까지 공존한다는 것이 성경의 뒷받침입니다. “10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이 해석은 몇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해석은 길지 않은 시간, 1000일 동안 이라고 했으면 수도 없이 많은 시간의 의미일 텐데 10일이라 했으니 곧 끝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해석되고, 둘째는 핍박하는 황제가 10명이 될 것이라고 해석도 많이 해 왔습니다. “네로, 도미티안, 트랴쟌, 세베루스, 맥시민, 데시우스. 아우렐리안, 발레리안, 디올클레티안, 안토니우스” 이 열 명의 황제들이 계속해서 핍박했으나 멀지 않은 시간에 10일 후에 이 모든 것이 끝나게 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마귀의 권세는 아무리 강하게 나타나도 이미 예수의 십자가 밑에 항복한 권세입니다. 결국 로마는 기독교 국가로 변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세계인이 구원을 받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필연적 요소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핍박을 당해야 되고 누군가는 순교를 당해야 됩니다. 누군가 희생자가 나와야 하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나의 망함을 통해서 세워지는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십자가입니다. 그 누군가가 곧 내가 되고 그 누군가가 내 교회가 되고…. 그래야 하나님께 진정 쓰이는 교회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있어서 우리가 구원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바울이 순교당하고 베드로가 순교 당해서 복음이 세계에 전해진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죽님을 위해 죽을 수만 있다면 죽으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는 죽음으로 주님을 섬긴 사람과 세상적 축복 속에 섬긴 사람 다양합니다. 서머나 교회가 주는 교훈은 주님을 위한 환란은 괜찮다는 것입니다. 견디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인정이 실상은 부요자가 된다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인정 속에 내가 있다는 기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한 희생은 절대 보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면 무슨 보상을 서머나 교회에 약속하셨나?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성경에 면류관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면류관은 최고 영광스러운 상징으로 씌워졌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가시 면류관을 만들어 씌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속죄 면류관의 상징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는 썩을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영광스럽다고 판단해서 열심히 노력하여 얻기는 얻었는데 썩을 면류관, 아무짝에 쓸데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로마 정부에서는 로마에 충성하는 사람에게는 행사 때 면류관을 씌워주는 행사적 면류관이 있었습니다. 이런 행사를 식민지 만드는 방법으로 사용했습니다.

야고보서 1절 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베드로전서 5장 4절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생명의 면류관이란 가장 영광스러운 영생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즉 성도의 승리란 말입니다. 마라톤 경주 우승자에게만 씌워주는 월계관 같은 의미로 약속된 성도의 상급을 말합니다.

그 다음의 약속,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첫째 사망은 무엇이고 둘째 사망은 무엇인가? 첫째 사망은 이 세상 누구나 다 경험하는 죽음을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도 경험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죽었던 모든 사람이 다 부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두 종류의 부활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8~29절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런데 이 때 불신자들은 또 다시 심판을 받는 둘째 사망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머나 교회는 둘째 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이라는 단어를 여러 가지 용도에 사용하고 있는데 편의상 쓰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장례식장에서 다시 살아난 것 모두 예수님이 살려내신 부활사건입니다. 그러나 편의상 부활이라고 말하는 것이지 이것은 진정한 부활은 아닙니다. 그들은 또 죽었습니다. 부활은 예수님과 같은 것입니다. 한번 죽었다가 부활하면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런 부활,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진리 “주님을 향한 어떤 일도 헛되지 아니한다.”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셨는데 또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42절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역사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게 된 진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쇠잔하여 간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문명도 다 없어집니다. 어떤 영광도 다 소멸됩니다. 잉카 문명도, 아즈텍 문명도, 바벨로니아 문명도, 페르시아 문명도, 로마의 영광도, 몽골의 영광도, 알렉산더의 영광이나 바로의 영광 모두 사라집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이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그러므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여러분! 이 세상에서 죽어가면서 충성할 가치가 무엇이죠? 세상의 모든 것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만 필요한 것들입니다. 죽도록 충성할 가치는 오직 하나입니다. 영원성을 얻기 위한 것, “내가 이것을 주리라.” 이 약속 때문에 “죽도록 충성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서마나 교인들이여! 다 빼기고 환란당하고 궁핍당하지만 나는 너의 환란과 궁핍을 알고 있다.” 성도 여러분! 죽음의 핍박을 견디면서 놀랍게 그 믿음을 지킨 서머나 교인들을 우리가 이 시대에 기억하면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시다. =========================================================================================== 제목 : 버가모교회 본문 : 계-02-12-17 요한계시록의 세 번째 교회가 버가모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일곱 교회 가운데 건물보존이 지금까지 가장 잘된 교회로서 헐어지긴 했어도 웅장했던 버가모 교회 원형 모습이 그대로 현재까지 남아있습니다. 성지순례 가시면 보실 수가 있습니다. 이 지역에 대한 주님의 평가가 13절입니다.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왜 버가모 교회가 사탄의 권좌인가? 버가모 지방에 제일 유명한 신전이 있었는데 에스쿨라피우스 신전이 거기 있었습니다. 이것은 제우스 신전입니다. 이 신전이 왜 사탄의 권좌인가? 신의 모습이 뱀의 형상입니다. 뱀의 사탄 상징은 창세기 때부터 나오는 성경기록으로서 뱀이나 바다의 용 모두다 악령의 상징으로 표현이 됩니다. 뱀을 신으로 섬기는 문화는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성행하였습니다. 이집트에 가시면 스핑크스 이마에 붙어있는 형상이 코브라 뱀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중국도 한국도 일본도 용 문화가 발전을 했습니다. 그 원조 모습이 에스쿨라피우스 신전인데 버가모에 원형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이 피곤할 때 마시는 피로회복제 ‘박카스’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도 신의 이름입니다. 박카스 신전도 버가모에 가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아폴로비로스 신전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세계적 신전들이 가득한 곳이기 때문에 사탄의 본좌라고 부른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신전에 소를 끌고 와서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버가모 시장의 식용고기들은 그곳 신전에 바쳤던 고기들이 됩니다.

그런데 이 버가모 교회에 대한 주님의 칭찬이 바로 13절 하반절에 나타났습니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이 버가모 교회의 훌륭한 지도자 안디바에 대한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버가모에 가시면 안디바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이 안디바는 예수 믿는 교회 지도자 역할을 하다가 순교를 당했는데 그를 죽이는 방법이 너무 끔찍해서 교회사에 전해 내려왔습니다. 야외에다 청동 가마솥을 걸어놓고 거기에 물을 가득 채우고 벌거벗겨 그 안에 집어넣고 밑에다 장작불을 때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삶아 죽였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끝까지 믿겠다고 하면 이렇게 죽을 것이니까 이것을 보고 너희 마음을 결정하라.” 이렇게 핍박했는데 안디바가 끝까지 주님을 버리지 않고 그 고난을 이겨냈기 때문에 주님이 그 이름 고유명사까지 기억하시면서 버가모 교회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사탄의 소굴 안에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잡고 믿음을 지킨 안디바와 같은 지도자가 있는 버가모 교회” 이렇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핍박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역사의 소리를 들을 때 사실성에 대해서 의심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굳세다 하여도 그러한 견딜 수 없는 신체적 고통 앞에서 과연 그렇게 죽어갔을까?’ 의심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핍박을 당한 사람은 고사하고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일도 있습니다. 미국에서 미국인 목사들이 모였을 때 한국 교회에서 있었던 기독교 핍박 역사를 보고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영어 잘하는 1.5세 한국인 목사가 미국인 목사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제암리 교회 이야기를 했습니다.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 교회는 그 동네에 사는 안종후라는 사람이 아펜젤러의 전도를 통해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서 첫 번째 예배드리기 시작한 교회입니다. 일본 경찰이 이 제암리 교회에 교인들을 다 몰아넣고 밖에서 무차별 사격하고 불 질러서 29명이 참혹하게 타죽은 사건입니다. 더군다나 불타는 그 건물 속에서 창문을 열고 한 부인이 나는 죽을 테니까 내 어린아이는 살려달라고 내밀었을 때 일본 경찰이 그 어린아이를 반 토막을 내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우리 1.5세 한국인 목사가 미국 교인들과 목사들 앞에서 이야기 하니까 모두가 믿지 않는 표정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사람이 사람을 잔인하게 할 수 있는가?” 안 믿는 겁니다. 그런데 과거에 있었던 우리 신앙 선배들은 정말 우리가 안 믿어질 만큼 순교를 당했는데 이 버가모 교회 안디바 감독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늘 갖고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가장 큰 일을 한 사람이 누군가?’ 저는 순교자라고 생각합니다. 주님도 인정하셨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을 바꾸겠느냐?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생명이니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자기 생명을 믿음을 얻는 일에 가장 귀한 일로 여겨서 바꾸는 순교자는 정말 하나님 앞에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버가모 교회에 대한 책망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교회일지라도 한쪽에는 책망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신앙인일지라도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못한 부분은 하나씩 또 가지고 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인간을 푯대로 정하고 달려가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미완성 단계에서 완성의 세계로 가는 것이 세상과 천국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면 이 버가모 교회의 책망 부분은 뭔가? 여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의 교훈이 도대체 뭔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출애굽해서 모압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모압의 왕이 발락이라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 발락과 발람이 같이 한 시간에 나오기 때문에 혼돈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발락이라는 모압 나라의 왕은 큰 걱정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백성이 자기 나라 앞에까지 왔는데 이 백성이 얼마나 강인한지 40년 동안 전쟁에서 실패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러면 우리 모압 나라는 빼앗기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점쟁이 발람을 불러서 의논을 한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벌이 내려질 수 있을까?” 이 발람이 얼마나 유명한 점쟁이인지 꾀를 냈습니다.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바알 신자들을 대량 투입하되 젊은 신자들을 투입하십시오. 그리고 이스라엘 남자들과 함께 바알 예배에 참석해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참석한 모든 남자들과 바알 제사의 의식대로 행음을 시켜 잠을 자게 만드십시오.” 그래서 성공합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40년 광야 역사에 가장 큰 불행의 사건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적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서 2만3천명이 죽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에베소 교회에서 니골라 당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는데 버가모 교회에서도 똑같이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번 생각할 문제가 있습니다. 이 발람의 바알 제사 사건은 민수기 25장입니다. 민수기 25장 1~3절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 하니라.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민수기 25장에 이렇게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금 요한계시록은 신약에서도 제일 마지막입니다. 그러면 민수기 시대에서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는 시간적으로 천년이 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끈질기게 이 바알 종교가 따라다니면서 계속 문제를 일으킵니다. 더군다나 이 버가모 교회, 에베소교회의 니골라당 유대인들은 모압의 바알 사건으로 인해서 2만3천명 심판받은 것을 다 역사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문제가 되어서 바알 종교를 끊어버리지 못하느냐고 주님의 책망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 사람이나 현대 사람이나 똑같은 심리적 상태가 하나 나타나는데 우상 숭배에 대해서 큰 매력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단은 사람들이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럴듯한 논리 하나만 잘 만들면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붙도록 되어 있습니다. 50년 전 한국교회 안에서 이 문제가 “혼음사건”이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아주 크게 나서 예배 후 집단 혼음 피가름 했다고 한국 교회가 뒤집어엎어진 적이 있습니다. 버가모, 에베소 교회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 적이 있음을 책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내가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이러한 신앙 지키기 싸움에서 지는 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기는 자들, 안디바 같이 죽음으로 신앙을 지키는 자들에게 약속 몇 가지를 주겠다.” 약속이 나와 있습니다. “내가 그런 사람에게는 감추었던 만나를 주겠다.”

만나는 40년 광야 생활에 하나님이 내려주셔서 먹게 하신 양식입니다. 그런데 왜 감추었던 만나라고 했는가? 출애굽 시절에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상징하는 언약궤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언약궤 하나가 이 만나 항아리 하나를 갖다가 감추어 두었습니다. 출애굽기 16장 33절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리신 생명의 근원적 물질을 보관하도록 그렇게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전쟁 과정에서 이 언약궤 보존이 어려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수많은 전쟁에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사회에 전설이 하나 생겼습니다. “만나는 지금 감추어놨다. 엘리야가 감추어놨다. 그런데 이 만나를 찾아낼 사람이 메시야이다. 메시야가 오시면 꺼내서 또다시 만나를 나누어주실 것이며 곧 영생의 선물이 될 것이다.” 전설이 퍼졌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감추었던 만나를 준다는 말의 의미를 잘 알지만 로마 사람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렇게 쓰인 것입니다. 모두다 굶어죽을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서 굶어죽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것과 같이 신앙을 굳게 지킨 자는 메시야가 생명의 만나를 주어 영생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감추었던 만나를 먹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은 감추어진 비밀이라고 하셨습니다. “택한 백성만이 아는 생명의 떡이라.” 여러분! 이 생명의 말씀인 성경은 지금 책방에 나가면 많이 팔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성경책을 날마다 팔고 있는 사람도 그것이 생명의 떡인 줄 알겠습니까? 왜 모를까요? 감추어진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시를 받은 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비밀을 알고 생명의 떡을 먹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흰 돌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의미인가? 옛날 로마 법정은 배심원 제도였습니다. 피고인에 대해서 자기 의견을 표시할 때 흰 돌과 검은 돌 두 가지를 놓고 판결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법정은 배심원 제도가 아니라서 이해가 어려우실 것입니다. 미국과 서구 나라들을 배심원 제도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재판의 배심원으로 나오라는 통보를 10번도 더 받았습니다. 그러면 거기 가서 어떻게 하라는 교육도 받습니다. 아무 법적인 관계가 없는 시민을 무작위로 뽑아서 “이번 사건에 당신이 배심원이 되었다.” 통보 받으면 나가야 합니다. 정당한 이유가 없으면 의무적으로 나가야 하는데 잘못 걸리면 피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재판이 몇 년씩 걸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판 때마다 계속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목사 같은 사람이 그런 재판에 걸리면 목회는 어떻게 합니까? 아주 엉망이 될 수가 있습니다. 목사는 배심원에서 제외하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목사가 정의로운 사람인데 재판을 더 잘하지 왜 부적격인가? 목사가 배심원이 되면 재판이 잘 안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용서해주라는 반응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배심원에서 가능한 빼버립니다.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 하셨는데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셨는데 기독교 국가에서 한번 죄 지은 거 가지고 뭘 그러느냐? 죄 없는 것이다.” 이런 반응을 보이니까 재판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변호사가 설명하고 검사가 설명하고 주민들이 나와서 증언하는 소리를 배심원들이 듣고 “이 사람은 죄가 있다, 없다” 둘 중에 하나만 표시하면 됩니다. 어떤 때는 배심원이 10명이면 5:5도 될 수 있고, 7:3도 될 수 있는데 판사와 변호사, 검사가 모여서 죄의 양을 조정해서 판결하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흰 돌은 뭐냐? 죄가 없다는 표시입니다. 로마에서 했습니다. 그래서 다 들어보고 흰 돌을 갖다 놓으면 “이 사람은 죄가 없다.” 누가 죄가 없느냐는 그것을 보고 판사가 판결을 합니다. 또 다른 문화가 있는데, 로마에서는 테헤세라 제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테헤세라는 아름답게 잘 다듬어진 흰 돌입니다. 큰 권력자나 부자가 테헤세라를 발행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흰 돌에다가 발행자의 이름과 고유 문장을 새겨서 줍니다. 국가를 위해서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이거나 부자가 자기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수 있는 흰 돌 증서입니다. 이것을 받는 사람은 무슨 혜택이 있는가? 크레디트 카드 같은 것입니다. 일정한 기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건 3년짜리이다. 1년짜리이다. 아니면 10년이다. 때로는 평생 쓸 수 있다.” 공로에 따라서 줍니다. 그러면 받은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다니면서 어느 식당에 들어가든지 식사와 술을 마셔도 공짜입니다. 테헤세라를 발행하는 사람이 지불하는 제도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이것을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이 원형 극장의 격투사들입니다. 흰 돌에다가 황제의 암호 문자 SP를 적어주는데 이 문자는 라틴어의 ‘스펙텍터스’라는 말인데 ‘용사’란 뜻입니다. “너는 이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일평생 아무 식당에 가서 밥 공짜로 먹고 최고의 영광스러운 명예를 얻고 운동경기장, 극장을 평생 무료입장하는 흰 돌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흰 돌을 주겠다고 하면 성도들은 금방 알아차립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것이 주어지는 것인데 값없는 은혜, 공짜로 먹는 생명의 떡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같은 맥락의 뜻이 요한계시록에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올 3장에 사데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 “이기는 자는 흰 옷을 입을 것이요.” 19장에 “흰 세마포를 입을 것이요” 20장에 “크고 흰 보좌” 이렇게 흰 색깔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색깔로 흰 돌은 속죄의 표시, 영생의 약속으로 “내가 이것을 주리라” 이렇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은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성경에 이름 바꾼 사람 많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었고, 사래도 사라가 되었고, 야곱도 이스라엘이 되었고, 사울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바꿔주셨습니다. 개신교회는 없지만 가톨릭교회에서는 영세 받으면 누구든지 이름 하나씩 새로 받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 멘토로 대부 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천국 시민 자격의 의미입니다.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 그런 뜻입니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땅과 처음 하늘이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새 예루살렘과 새로운 세계입니다. 이사야 62장에도 있잖아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 9절에 가보면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라는 말이 나옵니다. 뭐든지 새것입니다. 완전히 새것으로 다 바뀐 의미로서 “내가 새 이름을 그 돌에 새겨 주겠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새 이름은 온 우주 만물도 똑같이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에 보십시오. 현재 많은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이 빨리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그래야 자신들도 하나님의 창조의 본래 목적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그러면서 새로운 세계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0절에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것이 비밀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는 “받는 자 외에는 이 비밀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이것은 다 계시에 의해서 영적으로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아무리 설명을 해도 계시를 못 받으면 알아듣지 못합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모든 것을 다 비밀로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계시록’이라고 했습니다. 계시를 받은 자만이 알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자연과학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다시 일어나서 새롭게 산다는 것을 믿겠습니까? 절대 안 믿습니다. 왜냐하면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비밀이어도 하나님이 알려주시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너희에게는 이 하늘 문의 비밀을, 내가 감추었던 것을 이렇게 알려줄 것이니라. 흰 돌을 너희에게 줄 것이며 새 이름을 줄 것이다.” 그러니 어느 국문학자가 이 요한계시록을 알 수 있겠습니까? 어느 논리학자가 이 요한계시록을 풀 수가 있겠습니까? 어느 수사학자가 이 비밀을 자연스럽게 풀 수가 있겠습니까? 어느 누구도 못합니다. 받은 자만이 압니다. 그래서 이 흰 돌과 흰 세마포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계시로 주어졌는데 “이것을 굳게 잡으라. 그러면 너희가 영생하리라.” 버가모 교회의 안디바를 칭찬하면서 “너희가 믿음의 싸움에서 진 사람도 많고” 이렇게 책망도 칭찬과 동시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복음의 성격을 알아야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구원의 속죄, 죄 사함이란 무슨 능력인가? “너희 죄가 주홍 같은 지라도 흰 눈 같이 될 것이요” 없어졌습니다. 이번 추석에 교통법규 위반 범법자 430만 명을 사면해 주었다고 신문에 났습니다. “당신의 죄는 다 사해졌습니다.” 정부에서 그렇게 사면령을 내리면 혜택을 누리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범법자가 경찰서를 찾아가서 “이보시오! 나는 사면령 안 받겠습니다. 내 죄는 그대로 두십시오.” 청와대에 가서 “나라 일 좀 똑바로 하십시오. 나는 죄가 있는데 왜 죄가 없다고 합니까?” 따지는 사람 있습니까? 죄가 하도 커서 세상에 살려둘 수 없는 흉악범도 사면령을 내리잖아요?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러면 누리면 됩니다. 그 이상 묻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재판관의 절대 권력, 판결의 권위입니다. 비록 죄가 있어도 “당신 이 시간부터 죄가 없어!” 그러면 아무 소리 말고 그냥 나오면 됩니다. 전에도 제가 수요 예배 때 한번 예화를 한 거 같은데, 모르는 여자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저는 필라델피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죄를 지어서 재판 받으러 가는데 목사님 도움이 필요합니다.”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물으니 남의 집에 그냥 들어갔다는 겁니다. “왜 남의 집에 들어갔나요? 도둑질 하셨나요?” “아닙니다. 미국 사람과 살다가 이혼했는데 내 아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 집 들어가지 못하게 금지령이 내렸는데도 너무 보고 싶어서 법을 어기고 들어가서 봤습니다. 그래서 재판 받는데 목사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판사 앞에 재판 받으러 가는데 아무도 없고 그 여자와 저만 앉았습니다. 판사가 그 여자에게는 묻지도 않고 저만 쳐다보고 묻는 겁니다. “누구십니까?” “목사입니다.” “왜 오셨습니까?” “이 여자분 도와주러왔습니다.” “뭘 도와줄 수 있나요?” “여기서 명령하는 거 뭐든지 제가 도와줄 수 있어서 따라왔습니다.”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여기 사인하실 수 있나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다시는 이 여자가 그런 죄를 짓지 않도록 사인하고 교육시킬 수 있나요?” “하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인했더니 “나가십시오. 석방입니다.” 그래서 그 여자 분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러니 저는 교육시킬 책임이 있잖아요? “나는 책임이 있으니까 교육하겠습니다.” 여자 분을 세워놓고 “다시는 그 집에 몰래 들어가지 마십시오. 이제 집에 가십시오.” 하지만 일주일은 감옥에 들어가 있어야 한답니다. 그래도 좋아서 감사하다고 가는데 좀 섭섭한 게 냉면이라도 한 그릇 사주고 가야지 그냥 가느냐 말입니다. 재판관이 이제 죄가 없다고 하면 죄 없는 겁니다. 성경에 보십시오. “하나님이 죄 없다고 하신 자를 누가 정죄하리요?” 괜찮은 겁니다. 무슨 죄가 과거에 많던지 “너는 이제부터 괜찮아.” 그러면 괜찮은 겁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힘입니다. 나는 완전히 의인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이 흰 돌은 “너는 죄 없어! 이 약속의 흰 돌을 줄 테니까 어디 가서 이것만 내밀어. 너는 이름이 새로워졌어.” 이렇게 된 겁니다. 이 버가모 교회 안디바와 같이 믿음을 지키고 주님이 주시는 흰 돌을 굳게 잡으시기를 축원합니다.

=========================================================================================== 제목 : 두아디라교회 본문 : 계-02-18- 요한계시록의 네 번째 교회는 두아디라 교회입니다. 이 지역은 매우 유명한데 생산이 많아 경제 활동이 활발한 곳입니다. 그래서 군사적 요충지가 되어 전쟁을 겪은 지역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이 지역을 탐내는 전쟁 전문가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1세기까지 이 지역은 평화가 없던 곳으로 로마가 들어와서 오히려 전쟁이 없어지고 평화지역이 된 곳입니다. 그때부터 두아디라는 그 지역의 특성을 살려서 상업과 제조업이 많이 발달해 경제 번영이 잘 이루어졌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큰 인물 하나가 있는데 바로 ‘루디아’라는 여자입니다. 이 여자는 바울을 만나서 자기 집에서 교회 창립을 한 사람이고 그것이 빌립보 교회가 되었습니다. 루디아는 사도 바울의 평생 선교 동역자 역할을 한 여성 사업가인데 자주 장사를 했다고 했습니다. 바로 루디아가 이 두아디라 지방 출신입니다. 거기서 배운 제조업을 가지고 마게도냐로 진출해서 큰 여성 사업가가 되었고 기독교 역사에 큰 쓰임을 받는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일곱 교회에게 보낸 요한계시록의 편지 내용 가운데 이 교회가 제일 긴 문장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교회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칭찬과 책망 양면성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 양면성의 모습이 곧 지금 이 세상 교회 모습들이며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 조명할 수가 있습니다. 매우 훌륭한 평가를 받는가 하면 반대로 어두운 면이 보여주는 것이 인간 공동체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며 우리 인간들도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거룩한 삶을 살았던 사도 바울도 자신의 어두웠던 면을 인간답게 발표하는 것을 봅니다. “내가 원하는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해서 자기 인격 속에 두 가지 양성면이 존재하는 것을 고백한 일이 있습니다. 이 두아디라 교회가 잘 한 것은 무엇이며 주님 보시기에 잘못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우리가 조명하면 우리의 갈 길이 보입니다.

이 교회는 다른 일곱 교회과 다른 특징이 하나 나타나는데 사업을 잘하는 교회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교회 프로그램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적 사업을 아주 잘하는 교회로 주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두아디라 교회가 주님의 칭찬 받은 그 부분을 우리가 몸담아 있는 이 갈보리교회로 한번 평가를 한다면 주님도 똑같은 칭찬을 하셨을 계획들이 우리 교회에도 있습니다. 선교 사업 부분이라든가 교육 사업, 구제 사업, 봉사 사업, 친교 사업 부분은 잘하는 교회들이 가는 모습을 저희들이 따라가고 있으니까 아마 이 부분은 사업은 잘한다고 칭찬받을 수 있다는 객관적 평가를 할 수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큰 사업을 벌였는데 주님과는 상관이 없을 때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 생각해도 그게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 판단이 안가는 일을 오래 전에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텍사스에 가서 개척교회를 할 때 예배당 건물을 빌린 미국 교회가 교회 사업을 많이 하는데 제가 그것을 배우기 위해서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프로그램에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 교회는 체육관 시설이 아주 좋습니다. 본당보다도 더 좋은 체육관 시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인이 없어서 체육관을 사용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수요일 예배에 아무도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넓은 체육관을 사회사업에 공헌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수요일 오후가 되면 그 교회 체육관을 무엇에 사용했느냐 하면 댄스홀로 사용했습니다. 수요일 저녁마다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구경한 적이 있는데 수백 명이 파티복을 입고 와서 남자, 여자가 음악에 맞춰 댄스를 하는데 제가 장로교 신학을 공부한 보수적 한국 목사라서 그런지 얼마나 놀라고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교회가 이런 것을 못하게 하는 곳인데 이 교회는 왜 이런 사업을 할까?’ 저는 너무 궁금해서 그 교회 담임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교회가 왜 이런 댄스홀을 운영합니까?” 물었더니 “당신은 한국에서 왔기 때문에 이곳 문화를 잘 몰라서 충격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여기 오는 사람들이 자격이 있습니다. 싱글이어야 합니다. 이미 가정생활은 파탄이 나서 함께 살지 못하고 상처를 입은 사람이 오는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 사람들은 못 오고 싱글들만 자격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하게 살려다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여기 와서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상처를 해결하고 여기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게 다시 가정을 가질 수 있는 기회 제공을 교회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답하시며 “당신도 오고 싶으면 오십시오.” 하시는 겁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주님이 인정하시고 칭찬하실 만한 사업이 있었다고 공개적으로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를 보시는 주님의 모습을 두 가지로 오늘 성경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눈이 불꽃같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기도할 때 이 말을 자주 쓰는데 여기 나왔기 때문에 사용하는 겁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살펴주사” 이렇게 우리가 기도하는 게 바로 두아디라 교회를 살피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빈틈없이 보시는 하나님입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제일 잘된 시설이 있습니다. CCTV입니다. 이것은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제일입니다. 아무리 다녀보아도 대한민국같이 잘 된 곳이 없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도 주차장에서부터 엘리베이터 안까지 CCTV가 다 설치되어서 누가, 언제, 어디서 엘리베이터를 탔는지 날마다 남겨지니까 거짓말을 하나도 못합니다. 거리에도 이 CCTV를 설치해서 내가 몇 시에 종로 5가를 어떻게 걸어갔는지 다 보입니다. 이것이 세계에서 제일 잘 되어있는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또,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친구 목회하는 교회에 가봤더니 교회 본당 안에도 CCTV가 되어 있어서 누가 하품을 했는지, 누가 교회 늦게 들어왔는지, 졸았는지 거짓말을 못합니다. 다 기록됩니다. 갈보리 교회는 교회당 안에는 없으니까 마음대로 조시기 바랍니다. CCTV같이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다음에 내비게이션도 참 신통합니다. 그 많은 거리에 그 많은 자동차가 가는데 그 거리의 상황을 앞의 방지턱 하나 있는 것까지 다 가르쳐주니까 내비게이션 같이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지방에 부흥회를 많이 가는데 경기도에서 충청도를 넘어갈 때는 충청도 말이 나옵니다. “충청도유!” 이 도경을 넘어가는 것을 어떻게 알고 그렇게 나오는지 모릅니다. 또 전라도 지방에 제가 부흥회를 제일 많이 가는데 전라도 지방에 가면 일부러 전라도 사투리로 말해줍니다. “전라도랑께!” 기가 막힙니다. 이 문화는 세상에서 제일 잘 된 것 같습니다. 앞으로 인간은 기계의 노예처럼 됩니다. 기계의 말을 잘 안 들으면 큰일 나게 됩니다. 기계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주님의 발이 빛난 주석 같다.”라고 했습니다. 주석은 풀무 불에서 단련된 놋쇠를 말합니다. 어떤 고난과 시련도 이겨낸 쇠를 말합니다. 옛날 로마 군인들이 타던 말 가운데 장교들이 타던 말은 장식을 했습니다. 발목에다 하얀 양말을 신겼습니다. 그래서 말이 걸어가는 것을 아름답게 보이게 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 말발굽에 주석 놋쇠를 달아주었기 때문에 이 말은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고 어떤 험난한 길도 자유롭게 뛸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장교들이 타는 말발굽에는 쇠 방울을 달아줍니다. 그래서 말 발이 움직일 때마다 장단을 맞추어서 “찰그랑찰그랑” 말 타는 사람의 권위를 돋보이게 했습니다. 그래서 로만칼라의 장교복을 입고 장식을 한 말을 타면 그 사람은 아주 돋보이는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빛난 주석 같다. 말을 탄 로마의 지휘관 같이 보이는 하나님의 아들, 그는 영광스럽고 권위스러운 분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조명했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가 하는 사업의 정신을 네 가지로 칭찬의 말이 나와 있는데 첫 번째 “사랑과”라고 했습니다. 이 교회가 하는 모든 프로젝트는 사랑을 기초로 해서 하여야 합니다. 불평하려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인들 선교 사업하기 위해 헌금 많이 하는데 기쁜 자만하라는 겁니다. 불평하려면 선교 사업도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사랑을 기초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움직여 나가는데 이 교회가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하면서도 공연히 불평하려면 안하면 됩니다. 사랑을 기초로 해야 합니다. 여러분! 선교지에 가보십시오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이 자꾸 오라고 합니다. 오라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거기에 꼭 필요한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와서 보고 이 프로젝트를 도와주시오.” 제가 가는 곳마다 100퍼센트 그런 요청 안하는 선교지가 하나도 없습니다. 반드시 무엇을 준비해놓고 이것을 꼭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해주고 싶습니다. 100퍼센트 해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도와주려면 가고 그렇지 않으면 아예 처음부터 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찬송가에 있잖아요?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그런데 마지막에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그대로 선교하러 가는 겁니다. 이 교회는 그런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했기 때문에 지켜 나가는 겁니다.

그 다음에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믿음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업에 헌신합니다. 이상한 통계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나 어느 시대나 이것은 거의 맞는 통계입니다. 돈 많은 사람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십일조도 열심히 하고 헌금을 모아서 프로젝트도 열심히 하지만 돈 많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통계가 이상하게 나옵니다. 하지만 교회 통계인 것을 어떡합니까? 한 나라에서도 굉장히 성공한 재벌, TV에서 선전하고 신문에 나오는 굉장한 재벌이 있는데 그 교회 담임 목사가 제 친구입니다. 그런데 저한테 와서 무슨 고민을 하는지 아십니까? “이 목사! 우리 교회에 재벌 나오는 거 알지?” “그럼! 좋겠다.” “고민 있는데 우리 교회 예배당도 없어. 그 분이 눈만 한번 꿈쩍해도 넉넉히 혼자서 교회 열 개 짓고도 남을 텐데 어쩌면 그렇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지? 나는 이거 너무나도 이상해!” 그래서 제가 그 목사한테 대답한 말이 뭔지 아십니까? “우리 교회로 보내!” 안 움직입니다. 이상한 통계입니다. 교회도 재력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나타나지도 않으려고 하고 가만히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이 십일조 내고 헌금 많이 해서 개민 군단 같이 운영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통계가 그렇습니다. 제가 텍사스에 있을 때 한국의 최고 재벌 기업 직원들이 한 20명 이상 거기 와서 근무를 했는데 외로우니까 교회에 100 퍼센트 전부 나왔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오면 점심에 김치찌개 해서 나눠먹고 그 시절은 70년대이니까 한국 사람들이 적었으니 교회에 오면 사귈 수 있으니까 교회에 다 나왔는데 재벌 회장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건축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신지 그 교회를 직원들 시켜서 사진을 전부 찍으라고 하시며 이렇게 예쁘고 잘된 교회 처음 봤다고 그러시는 겁니다. 사진 전부 찍고 “미국의 넓은데다가 내가 교회를 건축하면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를 건축해야겠다.” 혼잣말같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옆에 있다가 ‘때는 이때다.’ 생각하고 “하나 지으십시오. 이거 하나 지으라 하면 금방 될 거 아닙니까?” “그렇게 한번 해보지요.” 안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이상하게 능력 있고 돈 좀 있는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는 통계는 저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믿음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런 일을 잘하니까 주님이 칭찬하신 겁니다.

그 다음에 이 교회는 ‘섬기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일찍이 말씀하셨잖아요?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교회는 섬기기 위해서 다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갈보리교회가 1,300군데 교회를 섬기고 있지 않습니까? 섬기다 지쳐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섬겨야 합니다. 예수는 인류를 섬기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배우러 다니는 겁니다. 여러분, 섬김을 받고자 마음먹으면 그 시간부터 나는 시험에 빠집니다. 모든 것이 불평스럽고 불만스럽고 내 마음에 안 들게 됩니다. 하지만 섬기는 자는 항상 기쁩니다. 내가 섬기는데 시험 들게 뭐가 있습니까? 받으려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섬기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칭찬하시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이 교회는 ‘인내’가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신앙생활을 한 두 번 하는 것은 쉽습니다.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여서 “불우이웃에게 나눠주기 위해서 김치 담그는 작업 한다.” 유니폼 입고 나가서 하루 한다면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안 불러주니까 못나갈 뿐입니다. “장애우 형제들을 위해서 하루 동안 봉사한다.” 하루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섬기는 것은 평생입니다. 평생 섬기는 생활하기 위해서 교회 다니는 겁니다. 이 교회는 그러한 인내심을 가지고 한두 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 했습니다. 이것이 힘듭니다. “이렇게 사랑이 있고 믿음이 있고 섬김이 있고 인내가 있는 그런 사업을 잘하는 훌륭한 교회다.”

그런가 하면 책망의 부분이 나타납니다. 이 교회가 이렇게 훌륭한 교회인데 무슨 책망이 있는가? 이렇게 말합니다. “자칭 선지자 이세벨의 활동을 막지 아니했다.” 이세벨의 활동이 뭔가? 이세벨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교회에서 교인들을 유혹해서 하나님의 종들까지 유혹을 해서 바알 예배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우상의 제물을 갖다 먹이고 바알 예배의 모범인 행음을 시켰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또, 열왕기상 16장에 나오는 아합의 부인 이세벨의 부인을 우리가 다 기억합니다. “지금 두아디라 교회 안에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과 같은 역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교회가 왜 가만 두느냐?” 책망하시는 겁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의 7대 왕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 나라에서 왕후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웃 시돈 나라의 왕의 딸 이세벨 공주를 데려다가 왕후를 삼은 사람입니다. 왜 그랬는가? 조건부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강대국 시돈과 사돈을 삼아서 평화롭게 지내자.” 하는 정치적 계략이 있었고, 또, 왜 이 이세벨 공주는 자기 나라에서 시집을 안가고 이웃 나라한테 시집을 왔는가? 약속이 있습니다. “아합을 이용해서 하나님 섬기는 것을 버리고 시돈의 국교인 바알을 섬길 것! 그리고 이스라엘의 온 국민에게 바알 선교 힘쓰는 것을 막지 아니할 것!” 조건부로 온 것입니다. 그것을 약속하고 이세벨과 결혼을 해서 왕후 자리에 앉히니까 이세벨은 시집 온 날부터 생명을 걸고 힘쓴 일이 이스라엘 나라의 야훼 종교 하나님 믿는 것을 없애버리고 절대 핍박하고 바알 종교를 세워서 온 국민으로 하여금 바알 숭배 장려 운동을 그렇게 열심히 한 것입니다.

아합 왕이 앞장서서 권력 무기로 강제화 하고 있는데 온 백성은 어떻게 됩니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세벨을 따랐습니다. 하나는 권력의 힘으로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말을 듣지 아니할 경우 엄청난 불이익을 당해서 살기가 힘들어집니다. 살려면 그것을 따라가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나라도 일제 식민지하에서 신사 참배했잖아요? 안하면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목사님들도 안하신 분도 있지만 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가는데, 그리고 교회도 못하게 하는데 어떡하느냐 말입니다. 이런 거나 똑같이 된 겁니다. 그 다음에 왜 국민들이 그렇게 바알을 쫓아가는가? 바알 예배가 너무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예배 마친 다음에 행음을 시키니까 젊은 사람은 바알 종교가 낙원인 겁니다. 다 쫓아갔습니다. 이때 상황을 엘리야가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 열왕기상 19장에 나옵니다. “하나님! 이세벨 때문에 온 나라 다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도 없습니다. 나 혼자 남았습니다. 나도 죽일 것입니다. 그 놈들한테 죽기 전에 하나님! 나도 빨리 죽여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합니다. 이렇게 나라가 다 망했습니다. 이세벨 때문입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에 지금 이세벨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자가 있는데 왜 가만 두느냐? 제2의 이세벨을 없게 하라.” 이렇게 지금 책망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바알 종교는 어떻게 교회 안에까지 침투했으며 왜 교인들은 용납했는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지방의 문화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이 지방의 특색은 두 가지 공업이 발달했습니다. 하나는 염색 세공업으로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했습니다. 루디아도 거기서 자주 장사를 익힌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은 경제 부흥이 주어져서 그 사회에서 잘 살게 되는데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 이 염색 세공업 협동조합에 가입을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도 농업 협동조합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가입하지 않으면 활동할 수 없게 되고 까딱하면 직업을 잃게 됩니다. 그런데 염색 세공업의 협동조합의 우두머리들이 다 바알 종교 신자들입니다. 그러니 큰일이잖아요? 거기서 그래도 벌어먹고 살려면 그 사람들의 말에 순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두아디라 교회 교인들은 교회 나오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 협동조합의 조직원들이 되니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바알 종교의 교회 침투를 막아낼 수 있는 영적 힘이 없습니다. 이것을 주님이 지금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또, 두아디라 지방의 산업으로 또 하나는 구리 세공업이 발달했습니다. 이들은 제우스 신전 종업원들이 많았습니다. 로마 제국의 동전에는 제우스의 아들인 아폴로의 얼굴이 구리로 새겨져 있잖아요? 이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이것을 수호신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 직장에서 밥을 얻어먹으며 살고 있으니까 이것을 버릴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거부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는다는 것은 결정적 위기가 찾아올 수 있고 더 심각해지면 목숨까지 빼앗기는 일까지 생겨버리니까 교회 다니면서 그런 주장에 대해서 함부로 대항하거나 대들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생기기 때문에 바알이 교회에 침투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부분을 책망하시면서 정신 차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는 너희가 행한 배로 갚아 주리라. 우상 숭배를 배격하라. 하나님만 섬기라. 음녀와 행음하지 말라. 로마 권력에 속지 말라. 로마가 음녀다. 바알이 음녀이다.” 이렇게 지금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새로운 약속을 하나 주십니다. “만약 너희가 회개하고 내가 너희에게 준 것을 굳게 잡고 끝까지 싸우는 자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우리가 시간적으로 정리하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초림예수의 사역기간입니다. 출생 때부터 승천까지입니다. 이때에 예수는 고난의 종으로 세상에 오셔서 그의 사역을 마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것으로 초림 예수의 사역은 끝났습니다. 두 번째는 그가 하나님 우편으로 가신 지금 시간입니다. 이때를 가르쳐 말세의 시간, 종말의 시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승천 이후 예수의 재림까지의 시간을 말합니다. 세 번째는 예수 재림의 심판 사역의 시간입니다. 이것은 미래 사건으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입니다. 이때에는 “신앙을 지킨 성도들이 주님으로부터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부여받는 종말적 심판 사역이 남아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마지막 성경 부분에 보면 21장 26절에 “이때는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세세토록 왕 노릇하겠다.” 여러분! 다 세세토록 왕 노릇을 우리가 하면 예수님은 뭔가? 그래서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라고 우리가 표현한 것입니다. 정당에 공천 안 받아도 왕이 됩니다. 투표 안 해도 왕이 됩니다. 선거 운동, TV 토론 다 필요 없습니다. 돈 안 써도 됩니다. 여러분! 다 왕 되신다고 지금 주님이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조금만 나라에서도 왕 되는 거 그렇게 야단인데 만국 권세를 다스리는 왕 되는 권리가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구절은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고 성경이 끝나버립니다. 그때 왕들은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여기 있습니다. “철창을 가지고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무슨 소리입니까? 사탄의 권세 멸망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쇠몽둥이를 들고 여기 지금 질그릇 항아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번 그 질그릇 항아리를 쇠몽둥이로 깨뜨리면 얼마나 속 시원합니까? 와장창 깨져나가듯이 사탄의 권세는 깨져나갈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다소 고난의 시간을 살고 있지만 그때는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가 경험한 이 세상의 역사의 교훈은 아주 분명합니다. 악은 멸망합니다. 당장 승리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절대 아닙니다. 악의 세력, 악의 정권, 악의 권력, 악의 집단 그 결과는 언제나 똑같았습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 악이 비록 성하여도 진리 더욱 강하다 진리 따라 살아갈 때 어려움도 당하리. 우리 가는 그 앞길에 어둔 장막 덮쳐도 하나님이 함께 계셔 항상 지켜 주시리. ♪” 할렐루야!

마지막 약속을 이렇게 줍니다.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새벽 별이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22장 16절에 말했습니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예수님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우리에게 준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과 같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부활할 것이며 예수님과 같이 휴거할 것이며 예수님과 같이 하늘의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며 예수님과 같이 왕이 될 것이며 메시야적 통치로 내가 통치하게 될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복음 진리의 특성은 보상 종교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현세적이며 미래적이고 현실적이면서 미래 지향적, 그리고 철저한 보상 진리입니다. ‘이렇게 하면 내가 이렇게 될 것이다.’ “이기는 자는 만국을 다스릴 권세와 새벽 별을 줄 것이다.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라.”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면 “아멘”하십시오.

=========================================================================================== 제목 : 사데교회 본문 : 계-03-01- 지난 한주간은 우리 대한민국에 너무나 큰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기쁨이란 아시아 게임에 나간 아들과 딸들이 역대 최고의 성적을 내서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여준 데 대해서 아주 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특별히 이런 게임의 마지막 순서인 가장 권위 있는 마라톤에서 우리 한국 선수가 금메달을 받으며 화려한 장식으로 피날레를 마쳐준 것에 대해서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귀국하는 선수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큰 기쁨이 일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 연평도 사건이 터져서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5,000년 역사 속에 항상 이웃나라들에게 얻어맞는 삶을 계속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남북으로 갈라진 후에 같은 동족인 북한에게 항상 테러를 당하는 역사를 살고 있습니다. 6·25전쟁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전면 전쟁이 일어나도 되는 수준의 테러 공격을 끊임없이 당해 왔습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한 번도 보복을 안했다는 것입니다. 연평도 주민은 지금 제2의 6·25를 만난 것입니다. 다 버리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 세계가 북한의 만행을 악으로 규정하고 발표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교인이 한명도 없는 연평도 교회 담임 목사는 텅 빈 교회 안에서 지금 어떤 심정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을까?’ 이렇게 마음 아프게 생각됩니다. 그러면 우리 국민은 아주 울분이 쌓이는 것이 “아니, 왜 우리는 날마다 얻어터지고 사느냐?” 이런 문제에 대해서 저 같은 목사에게 대답을 하라면 저는 성경 구절 한 절을 대답으로 하고 싶습니다.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요한계시록 다섯 번째 교회는 사데 교회입니다. 일곱 교회라고 했는데 이 교회들은 실제로 있었던 교회입니다. 그러나 다른 많은 교회도 있었습니다. 여기 일곱 숫자는 영적 의미로 온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를 뜻하는 영적 의미의 숫자입니다. 그러니까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들은 온 세계에 보내는 주님의 편지 내용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 일곱 완전 수 문화는 기독교의 독특한 숫자문화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째는 쉬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7’ 숫자는 우리 인간 생활에 기본 숫자가 된 것입니다. 어느 나라 문화이든지 일주일은 생활의 기본 단위로 사용하면서 살아갑니다. 성경에 보면 특별히 요한계시록은 다 ‘7’입니다. 일곱 교회, 일곱 영, 일곱 금 촛대, 일곱 별, 일곱 은사, 일곱 집사, 일곱 기둥, 일곱 뿔, 일곱 눈, 일곱 뇌성, 일곱 대접, 일곱 재앙, 일곱 나팔…. 완전수로 영적 의미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서구 사람들은 ‘Lucky Seven’이라는 숫자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을 황당하게 해석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칠성당을 일곱별이라고 하고, 성부 성자 성령은 삼신할머니라고 해석을 하는데 그것은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국 교회는 기독교 역사에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큰 부흥을 가져왔는데 최초의 목사가 7명이었습니다. 방기창, 서경조, 양전백, 한석진, 이기풍, 길선주, 송련서입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이 사데성은 당시에 세계가 알아주는 금 생산지였습니다. 얼마나 금이 많이 났는지 이것 때문에 로마, 페르시아, 알렉산더 모두 다 사데성을 침략한 것입니다. 지금 사데성에 가보면 가장 큰 폐허가 된 건축물 관광지가 있는데 아데미 신전 자리입니다. AD 17년에 지진이 나서 이 사데성이 아이티와 같이 되었는데 이 초토화된 사데를 아우구스투스가 막대한 자금 지원을 해서 재건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금이 많이 나오니까 금방 본전을 뽑을 수 있다고 계산한 것입니다. 바로 이곳에도 복음이 들어가서 교회가 생긴 것입니다. 금생산지라서 자연히 경제 부흥이 금방 이루어지고 도시를 잘 꾸미고 자연도 아름답습니다. 팍톨루스 강변중심으로 조화된 관광명소 도시로 아주 유명한 곳입니다.

그런데 이 사데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칭찬이 하나도 없습니다. 책망만 받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초대 교회 이름을 지금 교회 이름으로 짓는 교회가 더러 있습니다. 제일 많이 짓는 이름이 빌라델비아 교회, 서머나 교회입니다. 이 두 교회는 칭찬만 받았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안 짓는 이름은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찾아보십시오. 하나도 없습니다. 책망만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데 교회가 무슨 책망을 받았는가? 이렇게 말합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실 이 말은 일반성이 없습니다. 죽으면 죽은 자이고 살았으면 살아있는 자이지 “살았으나 죽은 자로다”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데 사람들은 금방 이해가 됩니다. 사데성에는 형벌 문화가 특이하게 있었습니다. 사형시켜야 되는 흉악범을 잡으면 어떻게 죽이느냐 하면 시체와 같이 묶어 버립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그렇게 있는데 시체와 살아있는 사람을 같이 묶어놔 버리니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가 된 것을 보고 같이 묶여 있으니까 사람들이 “저게 산 사람이냐, 죽은 사람이냐?”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살았으나 죽은 자로다.” 이런 말이 생긴 겁니다. 왜 이렇게 사데 교회가 살았으나 죽은 자인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세상에서 많은 질병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는데 제일 치료가 어려운 병은 병든 것을 알지 못하고 있을 때입니다. 날마다 죽어가고 있는데도 자신이 모르고 있으면 절대 치료가 안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육신에 아픔이란 고통을 주셨는가? 이것은 선물입니다. “너는 여기가 고장 났으니까 빨리 고치라. 그래야 네가 더 오래 살 수 있다.” 그래서 아프면 고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프지 않고 죽어가는 병도 있습니다. 이게 제일 무서운 병입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는 지금 죽어 가는데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병든 교회입니다.

사실 교회뿐만이 아니고 이 사회도 21세기 화려한 문명과 편리한 문화를 자랑하고 있지만 죽어가고 있습니다. 살았다고 말하지만 다 죽어가고 있는 것을 모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온 세상이 다 같이 가장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물질문명 성취에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정신문화는 병들었습니다. 그런데 병든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요즘 교육을 보십시오. 오직 생산성 위주의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윤리, 도덕, 공민, 철학 등 옛날에 가장 중요시했던 과목들은 아예 없어져 버렸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은 네가 알아서 해라.” 정서 교육은 아무 학교도 안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은 하버드 철학과 나왔는데 철학 교수를 불러주는 학교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취직이 안 되어서 아버지가 장사하는 마트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문화가 향상되고 경제 부흥이 이루어지면 삶이 풍성해져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사회는 정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범죄율이 얼마나 높아 가는지 모릅니다. 지금 얼마나 범죄율이 많아졌나? 대한민국은 전국에 CCTV를 설치했습니다. 범죄가 그렇게 많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살기 좋아졌으면 잘 살아야 되는데 자살률이 해마다 증가합니다. 금년에도 15,400명이 자살했습니다. 어둠의 문화만 깊어갑니다. 이혼율은 누구도 보장할 수 없이 험악한 수치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인간답게 사는 것이 질이 목표가 아니라 성취라 생각하다 보니까 완전히 거꾸로 가는데 잘못 가는 이 인류의 가는 길을 수정할 사람이 없습니다. 점점 잘 살아서 발전하는 통계는 늘어나는데 인간다운 삶의 질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주님의 관심사를 영적 관찰하여서 주님이 주신 우리의 사명을 잘 감당해 가야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나도 모르게 팽창해가는 나쁜 철학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허무주의’입니다. 그래서 자살하는 겁니다. ‘살아서 뭐하느냐?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의미를 나는 모르겠다. 살수록 고생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허무주의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삶의 의미가 아주 분명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 땅에 태어났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일을 위해서 사는 것이요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다.’ 이렇게 우리는 살아갑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아주 말이 맹랑합니다. 여러분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들은 때가 되면 자녀들이 나이에 맞는 삶의 과정을 이어가기 원합니다. “결혼할 나이가 되면 결혼하고 아기 출산할 때가 되면 아기 출산하고 고난스러워도 참고 견디며 창조적으로 살아가라.”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청년들의 생각이 다릅니다. “내가 왜 그렇게 고난스럽게 살아가야 합니까? 결혼도 귀찮고 아이도 필요 없고 그냥 사는 데까지 살다가 죽으면 되지 왜 고난스럽게 삽니까?” 의무감으로서의 인생철학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질문을 합니다. “그래, 너 같이 모든 사람이 생각을 한다면 인류의 장래는 어떻게 되겠느냐?” 한번 그렇게 질문해 보십시오. “내가 왜 인류의 장래까지 염려해야 됩니까? 나만 살다가 죽으면 그만입니다. 인류가 그때 가서 망하든지 말든지 내가 그것까지 골치 아프게 생각합니까?” 이런 삶의 철학입니다. “망하면 망하는 것이지….” 고등학교 졸업반으로 두 달 있으면 졸업하는데 학교에서 싸움했다고 퇴학 처분 내리니까 아버지가 저한테 와서 목사님이 가시면 좀 낫지 않겠느냐고 미국에서 어떡하느냐고 하시는 겁니다. 교인이 부탁하니 목사는 가봐야 하지 않습니까? 담당 카운슬러를 만나서 한국식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학생이 지금까지 교육받았고 두 달이면 이 학교를 졸업하는데 두 달 남겨놓고 싸움했다고 퇴학시켜 버리면 교육자가 이 학생의 장래는 생각 안하는 것이냐?” 카운슬러가 저를 보고 기가 막힌다는 듯이 “내가 왜 그 아이의 장래를 걱정해야 되느냐? 이 학교의 학칙이 이런 사람을 퇴학시키게 되어 있다. 그래서 퇴학시킨 것이다.” 퇴학당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렇게 사무적입니다. 문명과 문화가 발달하면 인간이 인간답게 삶이 풍성하고 질 높게 편안하게 잘 살아야 당연한 것입니다. 반대로, 옛날에는 스트레스라는 말은 그 말 자체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모든 병이 스트레스에서 옵니다. 경제가 발전하고 잘 살게 되면 스트레스가 없어져야 하는데 더 많아집니다. 그러니까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래 봐야 뭐하냐?’

사데 교회는 금덩어리가 많아서 금광산업이 눈부시게 발전했고 돈이 풍성히 돌아가는 사회였는데 그 교인들은 칭찬은 하나도 없고 “너는 죽은 자야!” 책망만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경고하셨느냐 하면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될 것을 굳게 하라” 여기서 “일깨어”라는 말의 뜻은 “정신 차리고 졸지 말라”입니다. 이 말도 사데 지방 사람들은 잘 압니다. 역사적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데 지방은 헤르무스(Hermus)라는 강과 팍톨루스(Pactolus)라는 강을 끼고 있어서 안보는 동쪽만 굳게 하면 됩니다. 거기만 육지로 연결되어 있어서 옛날에 비행기가 있습니까, 탱크가 있습니까? 강이 있어서 적들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항상 “동쪽만 굳게 하라, 동쪽만 굳게 하라.” 이것이 사데 지방의 안보 교육이었습니다. BC 300년경에 알렉산더가 이것을 놓칠 리가 있습니까? 이 사데성을 함락해야 되겠는데 얕잡아 보고 들어갔다가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아니, 도대체 우리 군대가 사데성 하나를 함락하지 못하고 번번이 이렇게 망신 당하냐?”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작전을 바꾸었습니다. 헤르무스 강과 팍톨루스 강에 몰래 달밤에 배를 띄웠습니다. “올라갈 틈이 있나 찾아봐. 동쪽은 틀렸어. 몇 번이나 시도해도 다 실패했어.” 병사들이 살살 조각배를 타고 틈을 찾는 겁니다. 강변 위에서 보초 하나가 꾸벅꾸벅 졸다가 모자 하나가 덜렁 떨어져서 떼굴떼굴 강가에까지 굴러 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그 병사가 살살 내려와서 모자를 집어가지고 쓰고 올라간단 말입니다. ‘아! 여기 요새가 있었구나. 됐다.’ 알렉산더가 한밤중에 바로 그 자리에 조각배를 집결시켰습니다. “이리로 올라가라.” 올라가서 위에 있는 보초 한두 명을 죽여 버리고 하룻밤 만에 사데성을 완전 함락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 사람들은 “아니, 동쪽은 지금도 굳게 하고 있는데 어디로 들어왔느냐? 졸다가 죽은 것이다. 그리고 그 틈바구니로 알렉산더 군대가 침입했다.” 다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사데성은 안보 철학은 바뀌었습니다. “동쪽만 굳게 하라, 동쪽만 굳게 하라” 바뀌어서 “깨어 졸지 마라. 깨어 졸지 마라. 도적같이 임할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아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굳게 잡지 못해서 빼앗긴 하나님의 축복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에서가 형이잖아요? 성경에는 장자의 축복이 많습니다. 그런데 굳게 잡지 못하고 소홀히 생각하다가 야곱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에서의 하나님”이어야 하는데 에서의 이름이 빠지고 “야곱의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에서는 그 다음부터 소멸되어 없어져버리고 빼앗긴 것입니다. 야곱의 장자 르우벤은 열두 조상의 첫 번째 축복인데 그 자리를 아버지에게 잘못해서 유다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구원 족보에게 르우벤이 빠지고 유다 혈통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데 사무엘 영적 지도자의 말을 듣지 않고 교만을 부리다가 당대에 비참한 몰락이 오고 그 자리를 다윗에게 빼앗겼습니다. 여러분 기억에는 없지만 궁중 대신 셉나는 엘리아김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고 요압과 아비아달은 제사장직에게 충성하지 않다가 그 직분을 브나냐와 사독에게 빼앗겼습니다. 가장 잘 기억할 수 있는 것으로 가룟 유다는 열두 사도의 선택을 받았는데 주님을 배반하고 맛디아에게 그 자리를 빼앗겼습니다. 유대인들은 택한 백성의 자리를 이방 사람들에게 빼앗겼습니다. “네 가진 것을 굳게 하라. 졸지 마라.” 하나님은 귀한 것을 귀하게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빼앗아버리십니다. 빼앗아서 다른 사람에게 “너 가져라.” 이것이 성경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귀한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마태복음 7장 6절에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돼지가 진주를 알아보겠느냐?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인생 최고의 가치 진리를 주었는데 헌신짝같이 취급하니까 빼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네 가진 것을 굳게 하라. 깨어 있으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귀하게 여기라.” 여러분은 오늘 이렇게 교회 나오셨습니다. 왜 나오셨습니까? 창세기 1장에 “이 날은 복 주시는 날로 하나님이 정하셔서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그러니까 이 날을 잘 지키면 복 받는다는 의미로 주셨습니다. 무슨 복이 주워졌나? 예배 열심히 드리는 민족은 모든 필요한 복이 다 왔고 예배당 안가는 핍박 국가들은 다 쓰러졌습니다. 여러분! ‘크로스’라는 영화에 차인표가 주연으로 나옵니다. 한번 보십시오. 공산당 간부가 어느 집에 불심검문하여 들어가서 한 말 “너 교회도 갔었다면서?” 교회 간 사람들은 다 잡아 죽입니다. 오늘도 십일조 헌금하시는 교우님들 많으실 것입니다. 왜 피 땀 흘려 돈을 벌어 10분의 1씩이나 교회에 다 내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손해 보는가? 제가 말라기 3장 한 번도 설교한 적 없습니다. 거기 3장 10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정말인가?’ 못 믿으니까 안 하는 것입니다. 우리 현대 사회는 투자 문화입니다. 저는 평생 한 번도 안 해봤지만 증권 투자, 주식 투자, 펀드…. 온갖 투자 문화입니다. 무엇을 믿고 투자하십니까? 그 회사를 믿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못 믿기 때문에 안하는 것입니다. 한번 하나님을 믿어 보십시오. 증거를 한번 대볼까요? 대한민국이 솔직히 십일조 헌금 세계에서 제일입니다. 북한은 십일조 헌금하는 사람 한 명도 없습니다. 말씀드렸지요? 2010년 어떻게 숫자도 똑같이 북한은 앞으로 1년 동안 식량 150만 톤이 부족하고 남한은 150만 톤 남아돌아갑니다. 정부가 추곡수매하면 쌓아둘 창고가 모자랍니다. 그러면 성경에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것이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이루어졌잖아요? “남북 적십자회담하게 해줄 테니까 50만 톤만 달라.” 북한이 그랬잖아요? 요즘에 쌀 남아돌아가니까 TV, 신문에서 밥 좀 많이 먹으라고 광고하고 쌀국수, 쌀 막걸리 많이 해서 먹으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쌀로 술 만들면 잡혀갔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이 그렇다면 그런 줄 믿으십시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사데 교회 같이 “너희들은 죽었어. 금덩어리만 자랑하고 재산 증식만 하지 하나님께는 믿음이 죽었어.” 현대 문화가 통계만 자랑하고 반짝반짝 화려한 문명만 자랑하지 “하나님 믿어 뭐하냐?”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 약속입니다. “만약 이 믿음의 싸움에서 이기는 자는” 두 가지가 나오는데 하나는 “흰 옷을 입을 것이요” 승리입니다. 제가 도미니카 세례식 하는 것을 여러분께 보여드렸지요? 지금 오히려 후진국들은 세례 받을 때 세례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다 흰 옷을 입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없어졌습니다. 왜 없어졌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흰 옷은 죄 사함, 승리를 뜻합니다. 초대교회는 부활절에 교인들이 100퍼센트 흰 옷을 입고 나왔습니다. 고난주간에는 100퍼센트 검정 옷을 입었습니다. 지금은 한 가지만 남았습니다. 부활주일에 백합꽃 갖다 놓는 것입니다. “이기는 자는 믿음의 승리자로 오신 흰 옷을 입게 될 것이요” 그 다음의 약속은 “내가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 결코 지우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이름이 어디 있습니까? 호적에 있습니다. 내 가문의 호적에 내 이름이 있어야 그 가문에 자손이지 이름이 없으면 “너는 가짜이다!” 여러분! 모두 학교를 졸업하셨을 것입니다. 그 졸업생 명단에 내 이름이 있어야 그 학교 졸업생이지 없는 사람은 “너는 가짜야.” 이름이 빠지면 다 무효입니다. 가끔 신문에 기사가 나오는 것을 봅니다. 유명한 사람에게 “너 정말 예일대 나왔어? 하버드대학교 정말 졸업한 거야?” 그래서 현장에 가서 조회해 보지 않습니까? 이름이 있어야 믿습니다. 여러분! 하다못해 동창회, 향우회, 신우회에도 내가 이름이 있어야 회원인 것이지 만약 그 명단에 없으면 무효입니다. 교회도 교적부가 있습니다. 내 이름이 있어야 회원 자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시간적으로 셋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는 예수님 오시기 전 구약시대입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 오신 시대입니다. 지금은 오실 시대입니다. 그러면 구약의 예수님이 오신다고 예언한 것이 예수 시대에 이루어졌잖아요? 예수 시대에 예수가 예언한 것을 우리가 살펴봅시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이제 왕이 될 것이다.” 예수님이 “아니다. 나는 죽을 것이다.” 예언대로 죽으셨습니다. “그때가 되면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 도망갈 것이다.” “아닙니다.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 안하겠습니다.” 다 도망갔습니다. 베드로에게 “너는 오늘 밤에 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다.” “예수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날 저녁 부인했습니다. “내가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이다.” 아무도 안 믿었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마지막 예언을 주시고 가셨습니다. “나는 다시 오겠다.” 이것 하나가 남은 것입니다. “네 가진 것을 굳게 하라. 너 금덩어리 자랑만 하느냐? 금덩어리 모으는 것이 네 삶에 그렇게 큰 가치이냐? 사데 교회는 죽었다. 일깨워 가진 것을 굳게 하라. 남아있는 작은 믿음을 굳게 잡아라.”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모두 믿음의 승리자가 되십시오. =========================================================================================== 제목 : 라오디게아 교회 본문 : 계-03-14-22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이 대강절에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교회를 조명하면서 마음을 정리하기 원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당시 리쿠스 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도시라서 요한계시록이 쓰이기 200년 전에 안티우쿠스 2세 왕조가 아주 아름답게 이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안티우쿠스 2세 아내의 이름이 ‘라오디게’였기 때문에 자신의 아내 이름을 따서 ‘라오디게아’라고 도시 이름을 부르게 된 것입니다. 주후 70년 전까지는 유대인들이 이 도시에 아주 자유롭게 찾아와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교도 들어올 수가 있었고 기독교가 이 지역에 잘 전파되었습니다. 바울의 제자 ‘에바브라’가 이 라오디게아를 찾아와서 교회를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의 ‘라오디게아 교회’가 됩니다. 그런데 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나쁘게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7개 교회를 계속 보아왔지만 이 교회는 칭찬이 없습니다. 책망만 받은 교회라고 봅니다. 먼저 이 지방과 이 교회 특징을 설명하면 이 지방은 푸른 초장이 아주 많아서 면양 산업이 잘 되었습니다. 그래서 양털이 많이 생산이 되어 흑색 양모가 이곳에 아주 잘 발전했고 카펫 산업이 이 지역의 특산물로 온 지역에 생산되어 나갔습니다. 넉넉한 농산물과 특산물의 조화로 이 도시는 아주 부유한 생활을 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니까 자연히 교회도 부유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 성경말씀에도 그 특징이 아주 잘 반영이 되어 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경제 활성화 도시로 쉽게 말하면 돈 많은 지역입니다. 교회도 부유층 사람들이 나오니까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다른 문제는 몰라도 재정 문제 하나 만큼은 아무 걱정 없는 교회였습니다. 건축 헌금 때문에 상처받는 교인도 없고, 목사님이 십일조 내라고 설교를 해도 시험 받을 교인도 없을 만큼 돈 문제는 편안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 교회를 이토록 책망하셨는가? 일곱 교회 중에 가장 따가운 비판을 하셨고 거기에 대한 구체적 처방까지 내리신 것을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가 읽었습니다. 그 내용을 우리가 한번 보겠습니다. 첫째 구절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이런 말이 적혀있는데 이 라오디게아 교회 특징은 온천 지역입니다. 제가 갔을 때는 온천이 다 말라붙어서 물이 거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흔적만 남아 있었는데 옛날에는 그 온천이 강물같이 많이 나오던 지역이라서 온 세계 온천 좋아하는 사람이 모여드는 관광지였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부산이나 온양 같은 도시는 온천수가 터져 나오는 바람에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관광지로 발전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결혼하면 다 온양온천을 신혼여행지로 갔습니다. 아마 일러스턴에 갔다 오신 분들은 보셨을 겁니다. 365일 뜨거운 온천이 땅에서 강물같이 솟아나는데 아주 많이 흐릅니다. 저도 미국에 있을 때 목사님들과 같이 수십 명이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곳에 갔다가 아주 웃기는 일화를 만들고 왔습니다. 온천이 솟아나서 막 흘러가는 물이 있는데 누가 말을 했습니다. “이 온천물에는 미네랄 성분이 많이 들어있기 때문에 무좀 있는 사람은 발 담그면 금방 낫습니다.” 그러니까 저 같은 사람은 무좀으로 고생하는 사람인데 귀가 번쩍 뜨인단 말입니다. “정말인가요?” “해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나은 사람 많습니다.” 아마 이래서 미신이 생기는가 봅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또 믿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 말을 듣고 무좀파들이 다 모였습니다. 양쪽에 앉아서 다 바지를 걷어 올리고 발을 물에 담갔는데 얼마나 뜨거운지 담갔다 뺐다 하면서 무좀파들이 제발 무좀 좀 없어지라고 하면서 그런 일을 반복하는데 그 일행 중에 목사님 사모님 한분이 올라오셔서는 우리가 발 담그고 있는 것을 보더니 깜짝 놀라시는 겁니다. “어머나!” “아니, 사모님! 왜 그러세요? 뭐가 이상한가요?” 그런데 도랑물을 지나 커버를 돌아서 내려가니까 거기는 위장병파 목사님들이 모였습니다. 누가 이것을 먹으면 위가 난다고 말한 겁니다. 그러니까 컵들을 들고 위장병파들이 한 컵씩 마시는데 내가 보니까 어떤 목사님이 “예수의 이름으로!” 외치며 마시는 겁니다. 우리는 발 담그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떠서 마시니까 이상하잖아요? 사모님은 자기 남편도 거기 있으니까 “그 물 마시지 마세요! 위에서 발 씻고 있어요.” 그렇게 소리 지른 겁니다. 그래서 이것은 아주 웃기는 일화가 되어서 무좀파들이 만날 때마다 항상 놀리게 일이 되었습니다. “능력의 종들이 발 씻은 물을 마셨으니까 나을 것이다.” 내내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온천을 찾는 사람들은 물이 뜨거워야 합니다. 살갗이 데일만큼 뜨거워야 온천입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합니다. 이 온천은 뜨거운 물을 하면 찬 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온천지에 가면 온탕과 냉탕을 함께 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바로 그런 데서 나온 것입니다. 미지근한 물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습니다. “물이 왜 미지근하냐?” 그러니까 이 라오디게아 관광 오는 사람들은 그 뜨거운 온천물에 물을 담그는 그 맛에, 냉탕과 온탕에 가는 그 재미로 찾아오는 것인데 이렇게 물이 미지근하니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가 이렇게 된 것입니다.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미지근한 교회가 되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되었나? 이 라오디게아 교회가 병든 이유는 자만심에서 출발을 했는데 그 자만심이 어디서 왔느냐? 물질의 풍요에서 왔습니다. 이 동네의 물은 아주 경제 발전한 도시라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부족할 것이 없는 자신의 그 자부심이 신앙적 병이 들게 하는 교회로 변질되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아직 라오디게아 교회라는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아직은 아주 훌륭하게 잘 성장하고 뜨겁게 잘 가고 있습니다. 서구사회, 미국 사회에서는 벌써 오래 전부터 “요한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같이 되었다. 이것이 서구 교회이다.” 아주 공공연하게 설교자들이 막 이야기합니다. 왜 그러느냐? 19세기, 20세기에 나타난 서구 사회의 풍요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자이다. 부족할 것이 없다.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똑같은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사실 서구사회 선진국들 뭐가 부족합니까? 세계에서 제일 강대국들입니다. 아무도 못 건드립니다. 영국, 독일, 미국, 프랑스 이런 나라들은 풍요가 말도 못합니다. 신학적인 지식도 세계 제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 목사들도 그런 나라에 가서 유학하고 와야 겨우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재정 능력도 이런 나라들은 세계에서 제일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건물, 교육 시설 완벽해서 교회가 부족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교인이 없습니다. 텅텅 비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부족할 것이 없으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기도 안 해도 얼마든지 부요하게 삽니다. ‘구태여 예배당에 가서 예배드릴 필요가 있나?’ 집에서 그냥 예배드립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풍요한 삶이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기독교 역사에 최고로 교회가 부흥했던 나라가 영국, 러시아입니다. 그 나라 사람들이 이민 가서 세운 나라가 미국입니다. 미국도 1774년까지 영국의 식민지 나라였습니다. 조지 워싱턴이 독립 전쟁을 해서 비로소 독립한 나라 아닙니까? 미국 건설의 영적 기초가 된, 우리가 늘 말하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청교도들입니다. 이 세상의 신앙인들 가운데 가장 훌륭하고 경건한 삶을 살았던 훌륭한 신앙으로 온 세계가 다 그들의 신앙을 인정해서 청교도란 말입니다. 모두 영국 사람들입니다. 그러던 나라가 부요해지니까 어떤 현상이 나타났느냐? 1980년부터 지금까지 30년 동안에 영국에서 문 닫은 교회만 9,000개입니다. 아무도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내가 영국에 갔을 때 영국의 목사 한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한국에 한 번도 못가 봤습니다. 당신이 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왜 기다립니까?” “한국 교회가 어떻게 그렇게 부흥하고 있습니까? 지금 현재 당신이 영국에 발 딛고 있는 이 순간 런던에서 이 도시 하나에서만 교인이 안 모여서 세일 마켓에 나와 있는 교회 건물만 700개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렇게 되었습니다. 청교도 나라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어떻게 그렇게 부흥하고 있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서구 문명은 기독교 문화이지요? 종교가 뭐냐고 묻는다면 무종교자를 빼놓고는 거의 99퍼센트가 “I'm Christian.” 예수 믿느냐고 물으면 “Yes, Of Course. I Believe in Jesus Christ.” 누구든지 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아무 관계없이 교회는 나가지 않습니다. 교회를 문화인의 액세서리 정도로 생각하는 신앙 문화로 떨어졌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와 똑같이 되었습니다. 조상들은 생명을 걸고 교회를 세웠고 신앙을 지켰습니다. 영국과 같은 나라에서 기독교 핍박이 나오니까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 타고 도망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던 신앙은 어디로 가고 그렇게 조상들이 한 푼 한 푼씩 헌금을 해서 지은 이 아름다운 예배당은 예배드릴 사람이 없어서 술집에서 다 사가고 이게 뭐냐?” 이렇게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신앙생활 열심히 한다는 것이 외국에 다 알려졌습니다. LA에서 8·15 기념예배를 드렸는데 외국 목사를 강사로 초청했습니다. 캘리포니아 앤탤로 교회 담임목사는 아주 유명하신 목사입니다. 그분이 오셔서 뭐라고 이야기하시는지 아십니까? “나는 온 세계를 다녔는데 세 가지 현상이 지금 세계에 있습니다. 러시아에 가보면 먹을 것이 없어서 쇼핑백을 들고 식료품 가게 어디를 가든지 뭐 좀 살까하고 줄을 서있습니다. 미국은 록뮤직을 듣기 위해서 사람들이 끝없이 줄을 서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주일날 예배당 입구에서 자동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도저히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줄을 서 있는 곳이 한국입니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샘휴스톤 목사님이라고 LA의 유명한 목사님이 오셔서 “여러분! 미국 청교도 후손들은 여러분에게 청교도 후손 자리를 빼앗겼습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선교사 보내서 여러분의 신앙을 깨우치고 가르쳤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배워야 할 때가 왔습니다.” 베트남의 최고 지도자를 오라고 했더니 이 분은 한국말로 말씀하셨습니다. “한국 교회는 베트남 교회 어머니 교회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라오디게아 교회나 서구 교회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물질의 풍요에서 자만심이 생기더니 “나는 부자야. 부족할 것이 하나도 없어.” 그리고 하나님과 멀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책망 받았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이런 사람이 나옵니다. 한 부자가 먹을 양식을 창고에 가득 쌓아두고 이르되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편히 쉬고 모시자.” 영혼의 문제를 물질에서 안위 받으려고 하는 문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교단지 신문의 한 신앙인이 의미 있는 한 만화를 그렸습니다. 대기업의 총수가 주일 아침에 잠옷 바람으로 자기 집 소파에 앉아서 신문을 읽고 있는데 그 옆에는 남루한 옷을 걸친 예수님이 오셔서 열심히 그의 구두를 닦아주면서 말씀을 하십니다. “회장님! 제발 오늘은 교회 좀 나가시지요.” 만화이지만 사실입니다. 현대인의 고칠 수 없는 병입니다. 영혼의 고독을 물질세계에서 안위 받으려고 하는 겁니다. “이것만 다 되면 아무 문제없다.” 그래서 어느 나라나 GNP 성장과 경제 발전에만 온갖 힘을 기울여서 가고 있는 현대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배운 기억들이 많이 있습니다. 유클라테스가 잡히면 당장 사형을 당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원수의 나라인 아테네 국경을 왜 넘어갔는가? 필사의 도망 작전을 하지 않습니까? 자기 영혼의 고독을 해결받기 위해서, 소크라테스를 만나기 위해서 뛰었지 않습니까?

요한복음을 보십시오. 국가의 최고의 관원이 되어서 권세와 부귀를 자랑하는 니고데모가 자신의 명예 추락과 관직 박탈을 무릅쓰고 한밤중 예수님이 계신 방을 노크했습니다. “왜 왔느냐?”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훌륭한 일이 뭔가? 영혼의 고독을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굶어죽는 사람이 빈번이 쓰러지는 2천 년 전 그 가난한 사막의 나라 유대 땅에 먹을 것과 입을 것에만 몸부림치는 군중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지 말라.”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영혼의 문제를 먼저 치료받으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더할 것이다.” 우리 인간은 영혼의 문제가 고뇌에서 부딪힐 때 그때 비로소 성숙해 집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풍부해진 사람의 이익으로 주어지는 물질문화를 자랑하고 그 아늑한 늪에 빠져서 영혼이 빈곤해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만스러운 자세로 앉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라. 내가 볼 때 너는 벌거벗고 수치를 드러내고 있는 네 영혼의 가련한 모습이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우리 현대인들의 자만심이 있습니다. 생활의 편리한 것을 소꿉장난처럼 만들어냈다고 자랑하는데, 여러분! 하나님이 창조한 이 우주가 지금 현대 과학으로서 200억 광년을 가도 빛의 속도로 끝이 없는 이 우주 안에 지구에서 우리 육안의 눈으로 빤히 쳐다보이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천체 달에 한번 갔다 오고 나서 하나님이 있느니 없느니 살았느니 죽었느니 교만을 부리고 있습니다. 인류 최초의 우주인이라고 하는 유리 가가린의 동상을 하늘 높이 세워놓았는데 그가 최초로 우주를 돌아와서 제일 먼저 기자회견을 할 때 한 말은 “나는 우주를 가봤지만 하나님은 없소.” 이었습니다. 그 말 한지 6개월 만에 죽었습니다. 그래서 시편에 뭐라고 했습니까?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시며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잠언에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인데 미련한 자는 지혜와 지식을 버렸느니라.”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교회답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백성다운 길은 뭔가? 우리가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에서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 구원의 진리를 십자가에서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지금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마구간에서 출생하시고 출생하자마자 헤롯의 살해 명령으로 애굽으로 피난을 떠나시고 빈민촌인 나사렛에서 노동자로 사셨으며 때가 차서 인간 구원 사역을 시작하실 때 심각한 고뇌의 시간을 하나님과 1대 1로 만나서 하시지 않습니까? 광야에 나가서 40일 금식기도를 하십니다. ‘아! 배고픈 인생들에게 빵을 나눠주는 이 풍요가 인간 구원의 길일까? 이 돌멩이로 떡을 만들어 먹을까? 아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나라 식민지 백성인데 이 백성의 최대 소원이 천하만국의 권세를 가지고 저 꼴도 보기 싫은 빌라도와 로마 군인들을 이 나라에서 다 몰아내고 아브라함 후손들의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인간 구원의 길일 것인가? 이 권세를 내가 가질까? 아니다. 이것도 아니다. 그러면 신변 기적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에게 나가서 내가 신변 기적을 일으켜 인간을 황홀 속으로 인도하는 것이 구원일까? 아니다. 이것도 아니다. 그러면 뭔가?’ 최종 그의 결론은 하나님과 1대1로 40일을 맞서 기도하다가 내린 결론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도 빵을 통한 구원을 하시기로 선택하셨다면 이 세상이 다 라오디게아 교회와 똑같이 되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벌판에 데려다 놓고 그 백성을 바라봤을 때 정신적 고뇌가 생겼습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그래서 그 백성들 몰래 영혼의 고독한 길을 선택해서 시내산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생명과 바꿀 각오로 1대 1로 하나님과 맞서서 거기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이제 120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지가 40년이 되어서 지나간 40년 동안 이들 앞에서 내가 온갖 소리를 지르면서 인도하여 여기까지 왔나이다. 그러나 이렇게 불평 많은 이 백성들 가나안 땅, 약속의 땅에 들어간들 애굽에서 사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나이까? 내가 볼 때 아무 차이가 없나이다. 하나님 아버지! 내 영혼을 여기서 불러주시고 이 백성을 다시 보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과 영혼의 고독의 싸움을 1대 1로 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음성에 어떤 대답을 하셨습니까? “이것을 가지고 내려가라. 이것이 인간 삶의 구원의 하나의 지침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인류 역사에 가장 위대한 선물, 인간 삶의 기본인 십계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모세라는 한 영적 지도자의 영혼의 고뇌에서 얻어낸 하나님의 인류 사회의 영원한 삶의 지침서가 그로부터 주어졌습니다.

고독한 영혼 속에서 몸부림치는 자를 통해서 참 진리의 샘은 이 땅에서 솟아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잘못하면 물질세계의 풍요가 라오디게아로 인류를 인도하게 되어서 현대 교회들이 성경에 있는 대로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이 될 수가 있고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 되고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와 같이 쓸쓸하게 되는 겁니다. 인간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가지고 또 가져도 끝없는 욕심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풍요해질수록 주님 앞에 더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지점에 가서는 그 풍요에 자만심이 생겨서 사로잡혀 하나님이 없는 인간 삶의 성숙을 외치고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가난하고 고난스러웠을 때는 그렇게 주님과 가깝더니 지금 내가 무엇 때문에 나와 멀어졌느냐? 풍요할수록 하나님께 더 감사하고 더 가까이 나아가야 될 거 아니냐?” 풍요의 영적 힘은 사라지는가? 그런 힘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은 전혀 없는 것인가? 그렇게 가난할 때 첫 취직을 하여서 첫 봉급을 봉투에 “이것은 첫 열매이니까 하나님께 드려야 된다.” 그 가난하던 시절 그런 모습은 어디로 가고 이렇게 풍요해진 지금은 하나님의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는가? 생활비가 턱없이 모자라던 그 가난했던 때, 수입의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자기의 배고픈 배는 졸라매면서도 하나님께 충성하던 그 신앙은 어디로 가고, 문명과 문화의 최고의 좋은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지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마치 자선이나 베푸는 것처럼 거만스럽게 손을 내미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된 것입니다. “아! 나는 부자다. 부요하여 부족할 것이 없다.” “너는 네 영혼의 벌거벗은 수치를 보지 못하느냐? 네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은 네 영혼의 수치를 보아라. 너의 길은 변화 밖에 없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벌거벗은 네 수치를 면하라. 네가 어느 자리에 있든지 그것은 다 내가 너희에게 내려준 축복이다. 내가 입고 있는 그 교만한 옷을 버리라. 갈아입으라. 너는 나의 택한 백성이 아니다. 세상 문화의 때가 덕지덕지 묻은 그 부정한 옷을 빨리 벗으라. 성도의 흰 옷을 입으라.” 모세 같은 인물에게도 하나님은 “네 발의 신을 벗으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내가 지시하는 새로운 길을 걸으라.” 그러지 않았습니까?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네 눈에는 세상 화려함만 보이느냐? 십자가에 매달려 너를 위해 피 흘리는 나는 보지 못하느냐? 볼지어다. 내가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회개하라. 열심을 내라.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라.” 이게 라오디게아에 주시는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여러분! 구원의 문은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기억할 것은 어느 날 닫힙니다. 성경에 보십시오. 마태복음 25장 10절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다음 구절 11절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그 다음 구절 12절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창세기에 노아가 방주를 준비해놓고 “들어오시오. 문이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안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문을 닫으라.” 닫은 다음에 사람들이 와서 두드렸습니다. “열수가 없습니다. 이미 문은 닫혔습니다.” 무엇을 말해줍니까? 주님은 종말론적 방주를 이 세상에 마련한 것이 오늘의 교회들입니다. 지금은 문이 열려 있습니다. 문이 열려있을 때 들어와야 합니다. 문이 닫힙니다. 주일마나 종소리를 울려서 어서 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수많은 전도 프로젝트를 통해서 두드리고 있습니다. 갈보리교회만 해도 얼마나 주님의 손이 되어 두드리고 있습니까? 매월 군부대에 가서 수천 명 병사들 앞에 가서 두드리고 있습니다. “구원의 문은 열려있으니 병사들이여! 이 문에 들어오시오.” 교도소에 매월 떡을 해가지고 가서 대접하면서 “죄 있는 자들이여! 다 이 문으로 들어오시오. 구원의 길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지나간 20년 동안 끊임없이 두드리고 있습니다. 급식소에 가서 “가난한 자들이여!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십시오.” 두드리고 급식을 나눠주고 이매역에 가서 “오고 가는 여행자들이여! 이 문에 들어오십시오.” 학원에 가서 두드리고 51개국 1,300명의 우리 갈보리 선교사들이 끊임없이 두들기며 “지금은 열려있습니다. 들어오십시오. 오는 사람들은 지체 말고서 문 열었을 때 들어오시오. 생명 길은 오직 구주 예수니 어느 누구나 오라. 어느 누구나 주께 나오라. 어서 와서 주의 말씀 들으라. 하늘 아버지가 오라 하시니 어느 누구나 오라.” 마지막 21절에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겠노라.” 마지막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뭐가 마지막인가?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계획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마지막 사역입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제는 구름을 타고 오실 심판만 남아있지 인간 구원의 방법은 십자가에서 끝났습니다.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린 그 이후의 세계를 종말론적 시간이라고, 말세라고 말하는 겁니다. 마지막 때를 사는 여러분! 이번 성탄절에 주님이 내 마음에 찾아오실 수 있도록 내가 라오디게아 교회 같이 되지 않았는가 살피시고 주님을 영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제목 : 옛 사람을 벗어 버려라 본문 : 고전-04-10-11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11)제 말을 따라서 고백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기쁩니다. 저는 즐겁습니다. 저는 행복합니다. 모든 것이 잘됩니다. 옆에 계신 분도 당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이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다. 여러분 입술의 하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오늘 심리학자가 말하기를 우리 말하는 네 말이 우리 두뇌의 98%를 좌우한다고 그럽니다. 말하는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좋은 말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부간에 이혼하려면 서로 쳐다보고 비난을 계속하면 석달 이내에 이혼한답니다. 말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서론>오늘 저는 “옛 사람을 벗어 버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한번 따라 말씀하십시오. 옛 사람을 벗어 버려라! 어느날 저녁 예수님께서 쉬시고 계시는데 유대인 지도자 중에 한사람인 니고데모가 어둠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당시 니고데모는 유대인 산헤드린 회원중에 한사람이었는데 이 산헤드린 회원이란 유대인의 국회와 같습니다. 굉장히 엄격한 율법주의자들인 것입니다. 한 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는 반드시 내고 십계명을 다 지키는 굉장히 자만스럽고 거만하고 교만하고 고집불통인 이런 유태인이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 왔을 때 예수님을 거역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혀 죽인 당사자들이 이 바리새 사두개 교인 이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 중에도 마음이 깨어지고 온전한 사람이 있어요.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와서 “주님, 하나님이 당신을 보내지 아니하셨으면 당신이 행하는 이런 일은 사람으로서는 결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쳐다보시고 당장 하신 말씀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다른 굉장한 율법의 진리를 말씀할 줄 알았는데 거듭나라는 것입니다. 이 니고데모가 “예? 거듭나라고요? 나같이 나이 많은 노인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서 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거듭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다른 설명을 해봤자 너희들 못알아 듣는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해도 너희가 못알아 듣는데 하늘나라 일을 말하면 어떻게 알아 듣겠는가? 나를 쳐다보고 믿으면 구원을 받고 거듭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올 때 하나님을 심히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서 그들을 물어 죽이게 한 것입니다. 불뱀이 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물매 수많은 사람이 독이 올라 죽을 때 그들이 회개하고 모세에게 살려달라고 하니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구리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높이 달면 그를 쳐다보고 믿는 자마다 치료받을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가 빨리 구리로 뱀을 만들어가지고서 그 머리를 장대에 박아서 높이 매달고 “뱀에 물려서 죽어가는 사람마다 쳐다보라!” “웃기는 소리하네! 저것 쳐다본다고 나을턱이 뭐냐?” 그런 사람은 죽고 순종해서 구리뱀을 쳐다본 사람은 독에서 해방되어서 다 살아난 기록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여러분 우리가 학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적으로 믿는 것도 아니고 이성적으로 과학적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정도의 하나님 같으면 우리 대학교수 정도밖에 안되려고요? 하나님은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시기 때문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고 그를 쳐다본 사람마다 독에서 해소된 것처럼 나도 매달려야 하겠다. 내가 모든 세상 죄를 짊어지고 매달릴 터이니 나를 쳐다보는 사람마다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것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나를 쳐다보므로 거듭나는 것이다.” 오늘 영국의 BBC방송국에서 제게 인터뷰를 하러 런던에서 여기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라왔어요. 제가 주일날 보통 인터뷰를 안하는데 그 머나먼 길을 저와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 방송을 하려고 왔으니 안만나 줄 수가 없지요. 그런데 거기서 하는 말이 “왜 이 교회가 이렇게 발전을 했느냐? 다른 교회들은 다 지금 뒷걸음치고 있는데 왜 오순절교회 또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이렇게 무시무시한 속도로 발전을 했느냐? 왜 그러느냐? 이유가 뭐냐? 한마디로 말해 달라!” 그래서 제가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다른 교회는 신학을 설교한다. 교인들에게 학문을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 교회, 우리 오순절교회는 생명을 전달한다. 그것이 다르다. 학문을 공부하는 것하고 생명을 받는 것하고 그게 다르다.” 그래서 그게 뭐냐고 물어서 “학문이라는 것은 배 등따숩고 배부른 사람들이 학문을 말하지만 현재 배고픈 사람은 밥먹어야 되고 현재 아픈 사람은 치료 받아야 되고 현재 고통당하는 사람은 해방을 얻어야 되는데 오늘 우리가 전도한 사람은 전부 헐벗고 굶주리고 고통 당하고 괴로운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와 의와 치료와 구원과 은혜와 축복을 전한다. 우리 교회 오면은 학문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 하나님 도움을 가져온다.” 몇 번이나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 합니다.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서 변화받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와서 학문을 배우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학문을 말해 줄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학문을 말하지 않고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 몸찢고 피흘려 죽을터이니 나를 바라보고 믿으면 중생하고 영생을 얻는다.” 생명을 전달을 해준 것입니다. <본론>1. 용서와 의를 받음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걸머지는 것을 말합니다. 학문 대상이 아닙니다. 구경 대상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의 사람이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하나가 되어 멸해지고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의 용서와 의의 선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무덤 내 무덤,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천당 내 천당, 예수님 내 주여 내 중심에 오셔서 예수님 한분 만으로 만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떨어져서 학문의 대상이 아닙니다. 연구의 대상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나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 내가 산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러니까 죄없는 예수님이 죄덩어리인 나와 끌어안고 하나가 되버렸습니다. 그러니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무덤 내 무덤,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하나가 되어서 그리스도가 내 죄를 청산한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의를 선물로 받아서 의로움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골로새서 1장 13절로 14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몸찢고 피흘려 돌아가셨다는 것을 우리 생각 속에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 그 내 생각속에 깨달아 알아야 되고 그 다음에는 내가 상상하면서 꿈꿔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내 모습을 자꾸 꿈꿔봐야 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을 만화를 보고서 만화에서 자기가 만화에 있는 주인공처럼 된 것을 상상하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마음에 상상하고 꿈꿔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여러분이 마음 속에 나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를 믿어서 하신 일을 힘입어 우리 주께 나가면 구원함을 얻는다는 말씀대로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중얼거릴 것은 입술로 중얼거리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어서 옛사람 벗어버렸다. 너희 사망의 옛사람아 너는 나와 상관없다. 너는 내가 벗어버렸다. 나는 해방과 자유를 얻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용서와 의가 된다. 입술로 중얼거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내가 걸머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우리가 걸머지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어렵게 어떻게 걸머지느냐. 우리 생각 속에서 내가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생각하므로 내가 상상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상상하고 꿈꿔 보므로 내가 마음 속에 그것을 믿음으로 내가 입술로 그렇게 되었다고 고백하므로 여러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장사지낸 바 된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의를 선물로 받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2. 성결케 하는 성령을 받음둘째로, 불결한 사람이 예수와 합하여 십자가에서 죽었고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옛 사람을 벗어 버렸고 성결케 하는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된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우리가 더러운 옷은 어떻게 합니까? 더러운 옷은 벗어가지고서 목욕통에 가서 빨래통에 옷을 집어 넣어 버리잖습니까? 요사이는 세탁기가 있어서 어떠한 옷이라도 쉽게 세탁기에서 빨게 되니까 참 좋지요. 금년에 제가 보니까 중증장애인들이 사는 곳에 가보니까 장애인들은 옷을 세탁할 수 없으니까 빨래가 태산같습니다. 그리고 입고 있는 옷이 한번 입으면 한달씩 입으니까 옷이 아니라 퇴비에요. 퇴비! 그래서 내가 뭘 해주기를 원하느냐 물으니까 이 옷 빨래 좀 해 입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돈을 내어서 세탁소를 차려 주었습니다. 보통 사람이면 세탁소 갔지요. 큰 회전용 세탁기계를 설치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들은 얼마든지 옷 컴온! 돌리면 돼요. 돌리면... 아예 순복음식으로 깨끗하게 되가지고서 깨끗한 옷을 입습니다. 옛날에 더러운 옷은 지나갔어요. 보라, 이제는 새옷을 입느니라.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못박혀 옛사람을 청산해 버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을 상상하십시오. 나의 더러운 옛사람은 더러운 말, 더러운 행동, 더러운 삶의 옛사람은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상상하여 꿈꾸고 나는 더러운 옛사람은 다 죽어서 벗어버렸다고 꿈꾸고 믿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정결하게 되었다. 깨끗하게 되었다. 의롭게 되었다. 그리하면 그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걸머짐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의 죽음을 걸머지면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론이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 여러분의 생활 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몸에 어떻게 짊어지느냐. 몸에 짊어지는 것이 예수님과 나와 함께 죽었다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믿고 말하면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의 부활의 생명이 여러분 삶 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말했는데 6장 11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성령이 우리를 정결케 해주는 것입니다. 디도서 3장 5절로 7절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여러분이 예수 믿고 용서와 의와 거룩함을 얻게 된 것은 순전히 우리 속에 들어온 성령의 역사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과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훌륭해서 내가 잘나서 내가 기도를 많이해서 내 힘으로 되었다고 생각하면 그건 오해입니다. 성령이 기도도 하게 만들어 주시고 의롭게 살게 해주시고 승리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이 숨을 쉬면 성령님을 숨쉬고 있는 것입니다. 숨쉬는 것과 같이 성령님이 같이 계신 것입니다. 구만리 장천 멀리계신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함께 숨쉬는 것과 같이 성령이 여러분 속에 들어와 있고 여러분 곁에 함께 계신 것입니다. 우리와 같이 계시고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성령은 보혜사인 것입니다. 보혜사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항상 우리와 같이 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보혜사 돕는 자가 여러분과 함께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구만리 장천 멀리 계신 것 아닙니다. 아버지 하나님도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도 성령을 통해서 여러분과 같이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상하고 꿈꿔보고 나와 함께 죽었다고 꿈꿔 보고 믿고 입으로 말하면 같이 계신 성령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3. 치료와 나음을 받음셋째로, 병든 사람이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짐으로 예수와 함께 옛 사람이 죽고 병도 다 청산되어 버리고 새사람으로 치료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병든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 치료받은 새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 믿으면 낫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여러분의 병을 짊어지고 채찍에 맞아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서 돌아가시므로 청산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의 병이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통해서 청산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 예수님을 걸머지면 우리의 병도 예수와 함께 청산되어 버린 것입니다. 병을 벗어버린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이기 때문에 여러분께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병을 짊어진 것을 생각하고 그 다음 꿈꿔 보고 그리스도가 내 죄와 질병을 담당한 것을 꿈꾸어 보고 그 다음 믿고 예수님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다고 입술로 고백하면 성령이 여러분 고백을 통해서 여러분 가운데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치료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고백 안하면 안돼요. 여러분, 남이 듣고 내가 듣도록 입술로 고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성령의 능력으로 와 계셔도 입술로 아무말도 안하면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말도 안할 때 병낫는 것 봤습니까? 예수님께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니까 나았지요. 네 침상을 걸머지고 집으로 돌아가라! 그러니까 침상을 걸머지고 집으로 돌아갔지요.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씀하니까 나왔지요. 예수님이 계셔도 말 안하면 안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바람같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는데 말을 해야 해요.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행복합니다. 그러면 성령이 행복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나는 기쁩니다. 나는 즐겁습니다. 나는 평안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말씀한대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 입술로 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그러므로 여러분 먼저 생각하시고 상상해 보시고 꿈꿔 보시고 믿고 그 다음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좋은 날이다. 좋은 일이 생겨난다. 말하고 직장에 가십시오. 좋은 일이 일어난다. 오늘 나는 축복을 받았다. 오늘 나는 승리한다. 말함을 따라서 성령께서 역사하는 것입니다.이사야 53장 4절로 5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주님이 십자가에서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지불한 대가는 엄청난 것입니다. 그 큰 대가를 지불한 것을 우리는 놓쳐 버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나의 옛사람도 죽고 장사지낸 바 되고 이제 내가 산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입니다. 옛사람은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사람을 살라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 2장 20절 한번 우리 다같이 읽어 보십시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무덤 내 무덤 예수 천당 내 천당 예수 영생 내 영생예수님 내 주여 내 중심에 오셔서 예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옵니다.여러분,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그 다음 말하면 역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 나타나는 것입니다.지난 10월 22일 순복음가족신문에 우리 교회 종로중구대교구의 백원민 장로님의 간증이 실렸습니다.장로님은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했는데 1972년 무렵 갑자기 몸이 야위기 시작하여 힘이 없어 병원에 진찰을 받으니까 신경성 위염이라고 말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더욱 몸이 무겁고 피곤해서 정밀 검사를 해보니까 만성간염에 비장이 붓고 신장이 나쁘다는 진단을 받고 직장을 사직하고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병이 낫지 않고 점점 심각하게 되어서 복수가 차서 배가 남산만큼 불러지고 손과 발이 두꺼비 손발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의원에도 가보고 여러 가지 방법을 해보았지만 별 차도가 없어서 절망하고 있을 때 고향친구가 “야~ 너 서울에 있으면서 여의도순복음교회 나가봤냐? 그곳에 나가면 산다.” 그러니까 천당가려고 믿는 것이 아니라 너무 아프니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우리 교회 나왔어요. 당시 교회 나와서 저녁설교를 듣고 마음에 위로를 받고 주님을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 가서 보혈의 찬송을 테이프로써 틀어 보혈의 찬송만 늘 듣다가 갑자기 성령이 임하여서 마음에 죄책이 떠오르므로 뒹굴면서 2,3시간 회개하고 자복했습니다. 그 다음부터 마음이 평안해져서 밤에 잠을 자는데 꿈에 제가 와서 안수기도를 해주더랍니다. 그 이튿날 화장실에 가니까 가래떡 만한 그 무엇이 몸에서 나오고 난 다음에 몸이 굉장히 편안해지고 전과 같이 고통이 없어지고 아주 날라갈 듯 합니다. 이래서 병원에 가니까 의사들이 깜짝 놀라면서 “아직까지 살아 있어요?” “살아있는게 뭡니까? 이제 안아프다. 조사한번 해보라”고... 조사를 해보니까 의사들이 두 번째 놀랐어요. 병증세가 하나도 없어요. 다 사라졌어요. 그래서 장로님은 남선교회 전도실에서 봉사하며 일해서 장로까지 되었는데 요사이 교회 와서 늘 하는 말이 병고침의 기적을 간증하는 시간을 갖고 세월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면 예수와 함께 병든 옛 사람을 청산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 병이 무슨 병이든간에 요사이 우리 한국 사람중에 제일 많이 죽는 병이 첫째 암이고, 둘째 고혈압이고... 암과 고혈압 우리 사람을 죽이는 가장 무서운 병입니다. 그러나 그 암이 걸렸든 고혈압이 되었든 무슨 병이든지 옛사람을 예수님 십자가에서 벗어서 청산해 버려서 낡은 옷을 던져 버렸는데 뭐 옷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새옷으로 갈아 입는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생각하고 상상해 보고 꿈꿔 보고 믿고 그 다음 입술로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의 십자가에 함께 못박혀서 병든 옛사람은 청산해 버렸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는 나음을 입었다. 그러면 성령이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자매님 한분은 기도를 할줄 모르는데 뇌암이 걸렸어요.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의사들이 소위 수술해서 나을런지 안나을런지 50%, 50%다. 그러니까 이 자매님이 50%, 50% 그것 믿고 수술할 리가 있겠느냐. 그 돈 있으면 하나님께 헌금 드리고 나는 기도하겠다. 기도를 할줄 모르니까 주기도문을 만번을 외웠다고 그러던가? 계속 주기도문을 만번을 외우니까 그 다음 머리 아프던 것이 사라져. 그래서 병원에서 조사해 보니까 나아 버렸어요. 옛사람이 사라진 것을 청산한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나니... 여러분 실제적으로 여러분의 진실한 모습은 나음을 얻은 사람인 것입니다. 병든 자가 아닙니다. 무슨 병을 가지고 왔든지 그것은 옛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요,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인 것입니다. 번지수가 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병보고 말하십시오. 번지수가 틀렸다! 너하고 상관없다. 나는 새사람이 되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므로 예수님과 함께 병든 옛사람이 죽고 치료와 건강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4. 축복과 부요를 받음넷째로, 저주받고 무능한 사람이 예수님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저주받고 태어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값은 사망이요, 죄의 값은 저주이기 때문에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저주받고 태어난 것입니다.시편 51편 5절에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태어날 때부터 저주받은 우리는 이 저주를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로 오시면 우리 저주를 청산해 버리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예수님같이 부자가 어디 있습니까? 순전히 가난하게 된 것은 여러분 때문에 가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님이 가난했으니 나도 가난해야지.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저는 아주 가난하게도 살아보고 또 교회에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부자로도 지금 살아보고 두가지 삶을 다 살아보았는데 부자로 사는게 낫더라고... 왜냐하면 가난하게 살때는 남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 보고도 못도와줘요. 지금은 내가 도와줘요. 내가 있는대로 도와줘요. 왜, 내가 있으니까. 없는데 쥐꼬리도 없는데 뭘 도와줘요. 오늘 영국 BBC인터뷰 하는 사람도 그 질문을 하기에 내가 말했습니다. “우리 60년 전에 이 세상에서 제일 못사는 거지였다. 바로 60년 전에... 나는 그때 산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잘산다. 왜냐, 예수님 덕분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 “나는 제일 못살때도 살았고 지금 우리 한국이 잘살 때도 지금 살고 있는데 그때보다 지금이 좋다! 그러니까 우리처럼 좋아지려거든 예수를 잘 믿어라. 영국도 이제는 타락을 하고 있는데 도로 회개하고 돌아와서 예수를 잘 믿으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제가 말을 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여러분은 자유를 얻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왜, 가난의 종을 멥니까? 저주의 종을 맵니까? 예수님이 청산한 것을 다시 걸머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십시오. 말씀하십시오. 나는 예수 안에서 복받은 사람이다.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종의 멍에를 지지 않는다. 가난함과 저주를 짊어지지 않는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가난은 결코 복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난을 짊어지고 살아온 세대의 그림자를 돌아보면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알 수 있습니다.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남자가 32.4세, 여자는 35.1세로 평균 33.7세에 불과한 것입니다. 워낙 못먹어서 한국 사람의 평균 수명이 33살이에요. 2008년 세계보건기구(WHO)의 “세계보건통계 2008”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 기대수명이 78.5세입니다. 여러분 평균 78.5세는 다 살아요. 일흔살 된사람 한번 손들어 봐 주십시오. 일흔살 된 사람... 전부 어린 애들만 모였어요. 아직 전부 어린 애들이야. 그러니 아직 여러분 살 날이 푸르청청 합니다. 한국인의 평균 기대수명이 78.5세로 남자는 75세, 여자는 평균 82세입니다. 여자가 독하기는 독해... 82세까지 살아요. 그러나 북한은 대포를 쏘고 야단법석을 하더니만 얼마나 못먹고 못사는지 평균 나이가 66세로 남자 64세, 여자 68세. 그 나라에게는 환갑잔치할 필요가 있어. 환갑을 산 사람이 힘들기 때문에... 일본은 평균 수명이 82.5세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오래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앤듀 매튜스라는 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종교적 가르침은 성경의 가르침은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라고 했지 우리에게 가난해지라 굶으라 말 안했다.” 그 말 맞지 않습니까? 성경에 가난한 사람 먹이고 헐벗은 사람 입히라고 했지 가난하라! 헐벗어라! 그렇게 말안한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저주받고 무능한 인간은 예수님을 통해 가난과 저주를 벗고 부요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된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5. 부활 영생의 새 사람을 입음다섯째, 죽어 영혼이 지옥 갈 사람이 예수와 더불어 죽음의 옷을 벗어 버리고 부활의 영생의 새 옷으로 갈아 입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지옥 안가요.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천당 내 천당! 그러니 예수님과 내가 생각으로 하나되고 꿈으로 하나되고 믿음으로 하나되고 말로써 하나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구주요, 나는 예수님 안에 예수님 내 안에 계신다. 예수님 영생이 여러분 것이고 예수님이 부활이 여러분 것인데 여러분 왜 지옥간다는 말인 것입니까?고린도전서 15장 12절로 19절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예수님 안에서 이 땅에만 살다가 끝장이라고 하면 얼마나 불쌍한 일인 것입니까?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0~22)고린도후서 4장 10절로 11절 같이 읽어 보십시다. 굉장히 중요합니다.“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라. 마음에 끌어안고 등에 걸머지고 머리에 이고 어떻게 그렇게 하냐. 생각을 통해서 너 생각속에 내가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생각해라! 따라 말씀하세요. 내가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예수와 함께 살아났다고 생각하고 꿈꾼다. 나는 예수와 함께 부활한 사람이다. 나는 이것을 믿는다. 그리고 말로 시인한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다. 나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치료받았다. 나는 축복받았다. 나는 천국영생을 얻었다.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함께 죽고 장사지낸 바 되고 함께 부활해서 함께 천국에 올라갔으니 완전히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이지. 종교를 얻은 것 아닙니다. 내가 오늘 BBC방송 인터뷰 기자에게 말한 것이 그것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의식이 아니다. 율법이 아니다. 생명을 얻는 것이다. 생명을... 의로움을 얻고 거룩함을 얻고 치료의 생명을 얻고 축복의 생명을 얻고 천국의 생명을 얻는 것이다.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기적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롬 10:10)독일의 문호 괴테가 쓴「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는 문학가이자, 법학가이고, 철학자이자 신학자였습니다. 이처럼 많은 학식과 지식이 있음에도 그는 인생 문제에 부딪혀 해결하지 못하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희망을 잃고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마침 부활의 종소리가 나면서 “네 문제로 내가 죽었고 너도 나와 함께 부활했다.” 하나님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네 문제로 내가 죽었다. 너 죄 때문에... 너 불결한 것 때문에.. 너 병 때문에... 너 가난 때문에... 너 저주 때문에... 너 지옥 때문에 내가 죽었다. 그래서 내가 청산하고 부활했으므로 내 부활을 통해서 너는 살아났다. 너의 죽음은 내가 책임지고 나의 부활은 너에게 선물로 주었다. 아~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지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파우스트는 그 말씀을 듣고 기쁨과 소망이 넘쳐나서 새 삶을 시작했다는 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삶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 옛사람을 걸머지고 몸 찢고 피 흘려 우리의 옛 사람을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은 죽고 장사지낸 바 되고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나는 새사람이 되었다.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길인 것입니다. 우리가 새사람을 입고 살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이것을 자꾸 연습을 해야 돼요. 자꾸 생각하고 자꾸 꿈꾸고 자꾸 믿고 자꾸 말해야 돼요.이번에 광저우에서 개최된 아시안게임에서 박태환 선수가 3관왕으로 출전한 7개 종목 모두에서 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박태환 선수 수영 때문에 내가 잠도 못잤어요. 응원한다고... 이로써 그는 지난해 로마 세계선수권대회에서의 부진과 슬럼프를 깨끗이 씻었는데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박태환 선수는 이번 아시안게임의 성과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끊임없는 반복과 연습으로 승리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폴란드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역시 한 연주회에서“당신은 정말 천재적인 피아니스트입니다.” 라고 하니까 고개를 흔들면서 “아니요~ 저는 천재가 아니라 단지 연습을 다른 사람보다 많이 했을 따름인 것입니다.” 그말 참 참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사님, 설교 참 은혜롭게 합니다.” 그러면 제가 속으로 말합니다. “은혜를 듬뿍 담아서 설교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민을 하는지 아느냐?” 고민을 안하면 그런 설교가 안나오거든요. 오늘 제가 이 설교를 여러분께 할 때 날보고 10번 이상 이 설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구석에서 구석까지 다 아는거에요. 무엇이든지 집중을 하고 노력을 하면은 되는 것입니다. 운동이든 예술이든 탁월한 경지로 오르기 위해서는 반복해서 연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닌 것입니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으로 입으려면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자꾸 생각하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꿈꿔 보고 마음에 믿고 입술로 고백해야 됩니다. 나는 새사람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의로운 사람, 거룩한 사람, 치료받은 사람, 축복받은 사람, 영생복락을 얻은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 자꾸 반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연습이 여러분의 것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결론>우리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으로 갈아입으려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몸에 믿음으로 짊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아침, 점심, 저녁 할 것 없이 걸머져야 됩니다. 가슴에 안고 등에 짊어지고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이라고 입에 중얼거리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믿어야만 되는 것입니다.매튜 헨리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승리를 와서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상처는 여러분의 치료입니다. 그의 고뇌는 여러분의 평온이고 그의 신음은 여러분의 노래입니다. 그의 아픔은 여러분의 위로이고 그의 수치는 여러분의 영광입니다. 그의 죽음은 여러분의 생명이고 그의 고통은 여러분의 구원입니다.”여러분, 우리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으로 갈아입으려면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우리 몸에 믿음으로 짊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따로 있고 나 따로 있지 않습니다. 예수와 나는 하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입니다. 예수 부활 내 부활입니다. 예수 승천 내 승천입니다. 예수 천국 내 천국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 제목 : 복음을 전하는 사명 본문 : 고전-09-16- 본문 / 고린도전서 9장 16~17절제목 / 복음을 전하는 사명16.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7.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이세상에는 나름대로 복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은 예수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인 줄 믿습니다. 에베소서 1장 3절 이하에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받은 복을 가리켜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라고 했습니다. 그 복의 내용을 보면, 예수 믿어 구원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았는가에 대한 비밀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백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주시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죄를 대속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믿게 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앙생활 할 수 있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천국까지 무사히 들어갈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믿게 하는 영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님을 증언해주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게 하고 믿게 하는 역할을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증언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 성령을 받으면 누구나 예수님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6장 3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빠짐없이 모두 다 구원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뜻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100% 그대로 이루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전도를 통해서 예수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보면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스스로는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전도를 하면, 그 전도를 받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도 받아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때, 믿게 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3장 48절에 보면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전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작정한 사람,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며 영생을 누리기로 한 사람은 다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사람 속에 들어가 예수를 주로 믿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를 해서 성공을 했을 때, 우리도 시간과 물질과 몸을 드려 수고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며,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 사람이 예수 믿게 됐으니, 도우신 성령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해야 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구원 계획을 세우시고 100% 그대로 이루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막 16:15)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신 지상명령입니다. 이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반드시 순종해야 하는 우리의 사명이며, 목숨 걸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도서 1장 1~3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1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2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3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전도의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평생 복음 전하는 일을 하다가 순교까지 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셨을까요? 1⃞ 우리가 열심히 전도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신앙을 건강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전도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시간을 내고, 바쁜 중에 수고하고, 양육하며 열심히 주의 일을 하다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은 아주 건강해질 줄 믿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를 열심히 하는 교회는 건강하고 성장을 합니다. 교회에 분쟁이 있고 좋지 못한 소문이 나는 교회들의 공통점은 전도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집사님, 장로님들도 1년에 단 한 명도 전도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지상명령에는 신경 쓰지 않고, 큰소리만 치다 보니 밤낮 교회가 시끄럽고, 부흥이 되지 않고, 병든 교회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자가 시집을 가서 자녀를 낳아 기르면 그 아이들이 장성해서 일꾼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영적 자녀를 낳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를 해서 예수 믿게 하고, 그 사람을 양육해서 그가 우리처럼 주를 위해 사는 일꾼이 되게 만들어서 구원의 열매가 반드시 생기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평생 예수를 믿으면서도, 구원의 열매가 없다면 건강한 신자가 아닙니다. 병든 신자입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예수 믿게 된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을 통해서 예수 믿고 집사, 장로가 된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우리를 통해서 구원의 열매가 있느냐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렇게 전도하지 않아서 구원의 열매가 없는 사람은 회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러자 뿌리까지 말라 죽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잎만 무성하여 예수 잘 믿는 것 같지만, 구원의 열매는 하나도 없는 것은 저주 받을 짓입니다. 이것을 보통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2⃞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주신 것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화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9장 1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라고 말합니다. 복음 전하는 것은 주님의 지상명령이기 때문에 누구나 당연하게 해야 할 일이지, 그것을 했다고 자랑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기 싫어도 부득불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외국에 나가서 우리나라를 보면 금방 망할 것 같이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그것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나라가 아슬아슬한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위기를 당하면서도 망하지 않고,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점점 잘 되어서 G20 국가에 속하게 되었고, 이제는 이것을 주최하는 나라가 되기까지 한 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깨어 기도한 성도들 때문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열심히 전도하는 성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성도들 덕분에 이 나라가 망하지 않고 이렇게 축복받는 것입니다. 깨어 기도하는 성도가 있는 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 성도들이 있는 한 절대로 망하지 않을 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이 깨어 기도하지 않고 전도도 하지 않아서 예수 믿는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고, 교회에는 몇 사람 모여서 밤낮 분쟁하고 나쁜 소문만 난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멸시하겠습니까? 교회가 빛을 잃어버린다면, 이 나라에는 하나님의 재앙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이 땅에서도 고통 속에서 지옥을 맛보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깨어 기도해야 하고, 반드시 전도(선교)해야 합니다. 3⃞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신 것은 우리가 지상에서도 천국을 맛보며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마태복음 28장 18~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18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고 행하도록 가르친다면, 주님이 너희와 끝까지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을 체험하고 싶습니까?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단기선교 팀이 다른 나라에 나가서 말도 잘 안 통하지만 전도하고, 기도해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주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너무나 많이 체험하기 때문에 모든 팀원들이 은혜를 받고 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행하면, 주님이 구체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우리가 날마다 체험하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뿐 아니라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 보면,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백배의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밤낮 먹고 마시고 즐기며, 쓸데없는 일에 빠져 산다고 하면 물질의 축복을 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물질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타락하고 교만해진다면 오히려 더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물질의 복을 구해도 응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살면서 생명까지 바치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까워서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말씀을 잘 깨닫기를 바랍니다. 왜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살면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게 됩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동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면서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4⃞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신 것은 장차 천국에서 우리에게 상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고, 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상 주신다는 것을 성경이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받는 상은 일시적이지만, 천국에서 받는 상은 영원한 영광이 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순교한 사람이 천국에서 면류관을 쓰고 나타날 때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는 그 영광은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옆에 있던 강도 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평생 강도짓만 했으니 천국에 가서도 얼마나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이 들겠습니까. 예수를 믿어도 전도도 하지 않고, 봉사도 하지 않고, 조그만 수고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그저 편하게 예수 믿다가 천국 가려는 분들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장차 주님 앞에 섰을 때, 아무런 상을 받지도 못하고, 영원히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유명한 목사님은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전도하게 되어 있고, 구원의 열매가 생긴다고 말씀했습니다. 구원의 기쁨과 소중함을 아는 사람은 자기 형제나 부모가 지옥에 가는 것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믿는 자는 전도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생 동안 전도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저는 우리 교회에 대해 항상 감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에는 주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누가 주님의 제자입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이것이 제자 되는 길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가는데, 영혼 구원을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어떤 고난이라도 지고 충성하는 사람이 제자인 것입니다. 고난은 안 받겠다는 것은 제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는 제자들이 많아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성전건축이나 교육관을 지을 때에도 헌금 작정을 하지 않아도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짐을 지려는 사람이 많아서 자원해서 드리는 예물로 짓고도 남았습니다. 교육관도 그런 성도들로 말미암아 지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은 주님의 제자가 되길 축원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전도합니다. 전도는 은혜 받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저도 초등학교 6학년 때, 은혜 받고 주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다가 주님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전도하기 시작해서 주일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갈 때, 얼마나 기쁜지 제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공군 군목으로 있을 때 전 장병을 예수 믿게 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커피와 과자를 가지고 장병들을 만나서 먹이고 기도해주면, 그가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문이 나고, 감동을 받은 부대장으로 인해서 일 년 만에 전 장병이 세례를 받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번 <러브 부산>이 바로 그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있는 힘을 다해서 섬기고 대접하고 나누어서 부산 시민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폭발적인 구원의 역사,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길 소원합니다. 부산을 사랑하자는 이 운동이 우리 교회에서 시작해서 부산 전체에 퍼져서 부산을 사랑하는 운동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이 운동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여해서 각자 은사대로 봉사하면, 놀라운 구원의 열매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 제목 : 기다림은 아름다워라 본문 : 눅-02-25-

눅 2:25-33.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 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함이더라.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눅 2:22-33)

12월은 기다리는 달입니다.

대강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을 기다리는 달이 12월입니다.

기다림은 아름답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속에는 아름다움이 들어 있습니다.

라파엘의 모나리자 그림은 유명한 그림입니다. 라파엘이 저녁 노을질 때에 집으로 돌아 가고 있었습니다. 한 여인이 밖에 나와 퇴근하는 남편을 맞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늘 걸어오는 먼 길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미술가의 감각이 발동하였습니다. 그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화선지! 화선지!>

옆에 있던 제자가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화선지가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마침 옆에 있던 방앗간 벽 옆에 술통 뚜껑이 팽개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술통 뚜껑을 갖다 주었습니다

물론 물감도 없었습니다. 라파엘은 옆에 있는 숯덩어리 하나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술통 뚜껑위에 남편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정신없이 그려 나갔습니다.

이 그림이 역사상 그 유명한 모나리자입니다.

기다림은 아름답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기다리는 시므온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기다림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기에 그렇게 기다린 것일까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고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렇게 기다린 것일까요?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는 데 성령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렇기에 기도는 위대한 것입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10,000 성도 교회로 만들어 주시는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어느 날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싶은 성령의 감동이 있었습니다. 성전에 기도하러 들어갔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알고 성전으로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기도중에 받은 성령의 감동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안고 예수님이 어떤 분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므온의 예수님을 향한 고백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입니다.

1. 위로자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시므온은 민족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그 기다림은 바로 예수님을 기다림과 같은 기다림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이스라엘의 위로가 될 것을 알았습니다. 믿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식민지는 고달프기 짝이 없었습니다. 농산물을 모두 가지고 갑니다. 사람 죽이기를 파리 목숨보다 더 쉽게 죽였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종들이었습니다.

위로가 정말 필요한 시절이었습니다. 시므온은 늘 성전에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우리 민족을 위로할 분을 보내 주세요.> 하나님께서는 위로자가 오기까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힘이 났습니다. 그가 기다리는 위로자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위로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민족적인 고통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을 위로하여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태어날 때부터 상처를 입으며 태어납니다. 이를 출생상처라고 합니다. 그래서 상처 때문에 태어나면서 그렇게 악을 쓰며 우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웃으며 태어나는 아이는 한 명도 없습니다. 상처를 받으며 태어나 살아가면서 수없이 상처를 받았습니다. 칼로 난 상처는 금방 아물지만 입으로 난 상처, 말로 난 상처는 평생 아물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는 위로자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위로의 말을 할 줄 아는 것은 최상의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감독회장에 출마하였다가 부담금 문제로 후보에서 제명되었을 때 반응은 두 가지였습니다.

<감독회장 준비한다면서 그런 것 하나 챙기지 못 하는 것이 무슨 감독회장감이냐?>

이런 비난을 하는 이들이 주변에 많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위로의 편지를 보내 주었습니다. 위로의 글 중에 몇 가지만 골라봅니다.

<강문호 목사님 같이 참신한 인물이 감독회장 재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아직 젊고 뭣하나 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 갑자기 확 돌았나 하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 재선거국면에서 최대의 수혜자는 강문호 목사, 그 자신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요?>

<힘내세요, 목사님은 복이 많은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한쪽 문을 닫으시면서 다른 문을 열어주시는 분입니다.>

<역시 법과 질서를 지키시며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선함이 모두를 감동시킵니다.

참으로 잘 하셨습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 예비하심을 믿습니다.>

<인간들의 각축 장에서도 절묘한 하나님의 섭리를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강목사님을 많이 사랑하시는 것 같네요. 강목사님, 존경합니다. 분명히 강목사님의 때가 올 것입니다.>

<후보자리를 잃은것이 아니라 다음세대를 위하여 후보자리를 보관하시는 하나님인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의 언어가 위로자의 언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위로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바닷가에서 조개 둘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습니다. 조개 하나가 말했습니다.

<내 뱃속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한 혹이 생겨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겪고 있어.>

다른 자랑삼아 조개가 말했습니다.

<나는 아무 탈 없이 잘 지낸다.>

이런 이야기를 듣던 지나가던 거북이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건강해서 좋겠네요. 그러나 뱃속에 혹이 있어 신음하는 조개는 지금 진주를 만들고 있어요.>

이 말에 진주 조개는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시므온이 기다는 예수님,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님은 위로자입니다.

동네를 청소하는 미화원이 있었습니다. 얼굴이 항상 어두웠습니다. 직업이 청소부라고 열등감이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청소를 하면서도 항상 흥얼거리며 노래를 하였습니다. 즐겁게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달라졌어?>

그는 아내가 아침마다 자기에게 이런 말을 하여 준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여보! 당신이 이 마을을 어떻게 그렇게 깨끗하게 청소하는지 자랑스러워요. 당신이 아니면 이 마을이 쓰레기로 덮였을거예요.>

모든 사람에게는 위로자가 필요합니다.

오늘 이 아침 모든 성도님들 입술에 위로의 말을 하는 영으로 그득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

2. 구원자

시므온이 기다리는 예수님은 구원자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말했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30)

예수님을 보면서 구원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12월 대강절에 기다리는 예수님은 구원자입니다.

죤 맥닐 목사님이 설교하면서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기차 길 위에 술마시고 취한 사람이 누워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모두가 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빨리 가서 기차길에서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 때 맥닐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심판의 기차가 달려 오고 있습니다. 빨리 가서 내려 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지난 번 프랑스 파리에 갔을 때 이상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 곳에는 개 레스토랑이 있었습니다. 주인이 개를 데리고 갑니다. 테이블에 개를 앉히고 메뉴판을 보고 자기 집 개가 좋아 하는 음식을 주문합니다. 그리고 개에게 먹입니다. 개 내프킨도 있어서 개 목에 씌워주며 먹입니다. 다 먹이고 돈을 지불하고 나옵니다.

그리고 개 호텔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행갈 때 개를 맡기는 곳입니다. 하루 밤에 얼마씩 주고 개를 재웁니다. 그리고 나는 보지 못 하였는데 개들이 예배드리는 곳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개는 영혼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 사람들에게만 영원히 죽지 않는 영이 있습니다. 그 영은 살리는 영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당하여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천하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어느 학교에 법이 있었습니다.

학교 유리창을 깨뜨리면 깨뜨린 학생이 변상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아주 가난한 학생이 공놀이를 하다가 유리창을 깨뜨렸습니다. 집안이 가난하여 변상할 수 없었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유리창 값을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학생을 용서하여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우리가 죄로 인하여 죽어야 마땅할 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오직 예수님 외에 구원자가 이 지구상에는 한 분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인도에서는 구원을 받기 위하여 고행을 강조하는 종교가 있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하여는 못을 촘촘히 박힌 널빤지 위에 옷을 벗고 하루 동안 누워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강조하기도 합니다.

일생동안 한 마디도 하지 말고 벙어리로 살기로 서원하여야 구원을 받는다고 강조하는 이도 있습니다.

전보대 위에 올라가서 24시간 매달려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강조하는 곳도 있습니다.

목욕탕에 들어가서 코밑까지 물을 채워놓고 24시간 움직이지 말고 고행을 하여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수백km를 기어서 가야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는 종교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기에 그 분이 나의 구원자임을 믿고 고백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어느 농부가 지나가다가 독수리가 덫에 걸려 몸부림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농부는 덫에서 독수리를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독수리는 하늘 높이 날라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땅을 파다가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담밑에서 쉬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독수리가 나타나서 농부의 모자를 입에 물고 달아났습니다. 농부는 벌떡 일어나서 독수리를 쫓아 갔습니다. 그 순간 뒤에서 담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대로 있었으면 깔려 죽었습니다.

독수리를 구원시켜 주었더니 독수리가 구원하여 주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면 주님은 우리의 일을 하여 줍니다. 우리는 12월 25일 752명을 구원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입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안고 구원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3. 빛

시므온이 기다리는 예수님은 빛이었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29-30)

예수님은 빛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 성격을 자신이 10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나는 ....이다>라는 말씀이 모두 10가지가 표현되고 있습니다.

1.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 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요10:11-12)

2.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요6:48-51)

3. 나는 길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4. 나는 진리다.

5. 나는 생명이다.

6. 나는 문이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생명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10:9)

7. 나는 양의 문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요10:7)

8. 나는 포도나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9. 나는 부활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10. 나는 빛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 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예수님은 예수님 스스로가 자신을 표현할 때 <나는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은 밝은 것입니다.

어두움의 반대입니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은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 하고>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는 곳에는 어두움은 물러갈 수 밖에 없습니다.

어두운 방에 빛 한 줄기가 들어오면 먼지들이 떠도는 것을 환히 볼 수가 있습니다.가만히 있으면 안 보이던 것이 빛이 들어오면 보이는 것처럼 혼자 있을 때는 모르던 것이 빛되신 예수님이 오시면 자기의 어두운 것이 들어나게 됩니다.

어부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 하였습니다.아침에 실망스럽게 그물을 씻고 있는 데 예수님이 오셔서 집에 돌아 갈 생각으로 그물을 씻지 말고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처음 만난 예수님이지만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그리고 깊은 곳에 그물을 던졌습니다.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엎드리면서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고기와 배와 그물과 가족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아 갔습니다. 베드로의 일생이 획기적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고기를 잡으로 나왔다가 목적을 이룬 순간에 죄인이라는 엉뚱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빛되신 예수님이 임재하시면 안 보이던 죄가 보이게 됩니다.

빛은 생명력이 있습니다.

빛에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창가에 둔 화분에서 자라는 식물이 모두 빛이 들어오는 창가를 향하여 자라나는 것을 발견하며 빛의 신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동굴에 들어가 보면 빛이 들어오는 곳까지 식물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빛은 생명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자신을 생명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말라기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말4:2)

그래서 빛되신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생명을 얻게 됩니다.

어느 교회에서 성탄절에 생긴 이야기입니다.

어느 어머니가 장난감을 모아서 가난한 고아원에 주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래서 장난감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조그만 아들에게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너도 엄마가 하는 일에 동참해야지. 네게 있는 장난감중에 한 개를 가지고 와라. 이왕이면 가장 아끼고 가장 좋아 하고 가장 비싼 것을 바쳐라.> 아들은 어머니에게 순종하였습니다.

아들에게는 4m 정도되는 좋은 모형 비행기가 있었습니다. 비싸고 좋은 장난감이었습니다. 정말 하늘을 날라가는 모형이었습니다. 이것을 드렸습니다. 그 후 18년이 지나 그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어느 가정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 모형 비행기가 그 집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인은 유명한 파이롯트였습니다. 자기 모형 비행기를 선물로 받은 고아가 파이롯트가 된 것이었습니다.

선물 하나가 인생을 바꾸는 생명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한 일은 생명력이 있어서 그 사람을 변회시키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는 성령의 감동을 안고 예수님을 기다리며 산 사람입니다. 그가 아기 예수를 안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위로자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입니다.

예수님은 빛입니다.>

그 때 예수님의 아버지, 어머니조차도 무슨 말인지 몰라서 놀랐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눅 2:33)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미국 뉴저지주 린던 월드 마을에 특이하고 유명한 집이 있습니다. 12월 1일이 되면 집 전체에 성탄절 장식을 합니다. 촛불 46개, 전등 1,000개등 화려하게 장식을 합니다. 15년 동안 그 집은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전기세만도 100만원 이상 나온답니다.

그러나 몇 년전부터 장식이 없어졌습니다. 츄리도 불도 사라졌습니다. 구경꾼도, 관광객도 없어졌습니다. 죤 카솔 부부가 사랑이 식어지자 빛도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입니다.

기다림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기 시작하는 12월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다리는 우리에게 주님은 다가와 주실 것입니다.

=========================================================================================== 제목 : 기다림이 있는 사람들 (2) 본문 : 눅-02-25-

눅 2:25-33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

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

오늘 본문은 시므온이라는 어느 노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사회에 시므온이라는 이름은 우리나라의 김씨처럼 많은 이름입니다. 어느 주석자는 여기 나오는 이 시므온이 AD 13년에 산헤드린의회 의장을 지낸 가말리엘의 아버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시므온은 평생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며 살았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가 700년 전에 장차 세상에 메시야가 탄생할 것을 예고했습니다. 그때는 예언자가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 주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300년 후 말라기가 예언자로 활동을 마치고 주님이 태어나실 때까지 400년 동안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400년간을 영적 암흑기라고 부릅니다. 여기 시므온은 그런 400년 동안 영적 암흑시대를 살면서도 메시야의 오심을 확신하면서 기다렸던 그 시대의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시므온이 확실하게 메시야를 기다렸던 이유가 26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메시야를 만나보고 죽으리라”는 계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대하며 기다렸겠습니까. 그러다 마침내 태어나신 예수께서 결례를 받으러 성전에 왔을 때 만나게 됩니다. 결례는 남자아이는 태어난 지 40일 만에 여자 아이는 80일 만에 제사장에게 가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산모가 해산하면 몸이 부정해지기 때문에 율법적으로 산모와 아이가 깨끗해졌다는 확정을 받는 예식이 정결예식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그 예수가 태어난 지 40일 만에 시므온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때 시므온이 아기를 받아 안고 노래합니다(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또 36절을 보면 아셀 지파의 비누엘의 딸 안나라는 여인도 그런 경우입니다. 이 안나는 시므온과 달리 지파명까지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 아셀지파는 야곱의 여덟 번째 아들 이름입니다. 비누엘은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고 그 곳에 붙인 브니엘이라는 지명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그리고 안나는 히브리어로 한나라는 이름과 동일한 이름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조혼했습니다. 그래서 여기 안나도 14세를 전후해서 결혼하였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14세에 결혼해서 7년 남편과 살았고 남편과 사별하고 84년을 혼자 살았으니까 지금 안나의 나이가 105세쯤 됩니다. 이 여인은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주의 오심을 기다렸습니다. 그 여인은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 찬송 부를 때 그 소리를 듣고 뛰어 나가 아기 예수를 보고 사람들에게 이 아기는 이스라엘을 속량하기 위해서 오신 메시야라고 증거 하였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이 있으면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예수께서 오실 것을 예언하고 선포하고 공개하였습니다. 그 후 많은 유대인들이 메시야의 오심을 대망했습니다. 기다렸습니다. 학수고대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시므온과 안나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결국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다림에도 종류가 있었습니다.

신앙적 기다림

사람들은 메시야가 탄생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시므온과 안나처럼 이제나 저제나 기도하며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 그대로 예수께서 오시면 이 세상이 회복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며 위로가 주어질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이사야가 외친 것처럼 메시야가 오시면 창을 녹여서 쟁기를 만들고 어린 아이가 맹수들과 함께 놀며 뱀의 구멍에 손을 넣는 그런 회복의 세상이 올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진정한 평화를 기대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진정한 평화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갈등과 고뇌와 불화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메시야가 오시기만 하면 이 모든 문제들이 다 해결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기다림이 얼마나 행복하였겠습니까. 이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약속이 있다는 말이고 미래가 있다는 말입니다. 미래에 대한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계시록 1장3절을 보면 “이 계시의 말씀을 듣고 믿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소식이나 뉴스도 믿지 않으면 헛것입니다. 소돔성이 심판받기 바로 직전, 유황불이 쏟아지기 직전에 롯이 사위들에게 빨리 피하라 곧 재앙이 쏟아진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랬더니 사위들이 농담인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노아시대에 홍수 심판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갔을 때 노아가 그냥 있었겠습니까. 노아는 황급히 돌아다니며 준비하라, 이리로 들어오라 이제 심판이 시작되었다고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모두 비웃었을 것입니다. 비웃으면 헛수고 입니다. 그래서 이 믿는다는 일이 복된 일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이 불행입니다. 믿음을 갖고 싶은데 믿어지지 않아서 불행입니다. 여기 시므온이 예수를 만나고 죽으리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말은 예수께서 오시리라는 약속을 철하게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선물입니다.

정치적 기다림

개중에는 신앙적으로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또 대다수 유대인들은 정치적으로 예수를 기다렸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압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로마는 상대하기가 너무 컸습니다. 로마가 몇 년 안에 무너지거나 망할 것이라는 징후는 전무했습니다. 그래서 낙심이 더 컸습니다. 우리민족이 일제 때 일본이 너무 강하고 커서 낙심이 더 컸습니다.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때 유대인들에게 희망의 끈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이 장차 메시야가 오시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현재 상황이 더 열악하니까 유대인들은 그 메시야의 오심을 더 기다리고 대망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의 꿈이 있었습니다. 그 메시야가 오기만 하면 잃어버린 다윗시대의 영화를 회복하고 화려함이 그대로 재현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오병이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빈들에 5천명이나 모였습니다. 어린아이 노년 여인들까지 포함하면 2,3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던 해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수십만 인파가 모였습니다. 왜 모였는가 하면 근래 기적을 행하는 젊은이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예수라는 젊은이가 나타나서 5병2어를 행하고 물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고 나병환자를 고치고 장님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행하고 돌아다닙니다. 사람들은 모두 큰 기대를 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혹시 메시야가 아닌가 해서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은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힘과 능력을 가지고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줄 사람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리고 장차 오시겠다는 메시야는 바로 그런 사람일 것이라고 기대하며 기다렸습니다.

우리나라도 일제 때 모두 그런 기대를 하였습니다. 일본이 망하라고 기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빨리 재림하셔서 일본의 천황부터 심판하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성결교단은 재림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 때에 성결교회가 제일 먼저 교회 문을 폐쇄당하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도 로마 압제로부터 해방되기를 기원하면서 기다렸습니다. 그때 기다린 메시야는 힘을 가진 초능력을 발휘하는 메시야였습니다. 그래서 로마를 무찌르고 우리 민족을 구원해 주실 메시야를 고대하였습니다. 목표를 갖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목표의 초점이 잘못되거나 왜곡되었다면 무서운 결과를 낳습니다. 장차 오실 것이라고 예언된 예수는 구원자 예수입니다. 평화의 예수, 구속의 예수, 하나님의 속량의 역사를 펼치러 오시는 예수입니다. 무력과 해방과 로마를 무찌르는 메시야와는 상관도 없는 예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로마를 무찔러 이기는 예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기대가 어긋날 때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댔던 것입니다. 곡해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신앙인들이 예수를 곡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내 삶을 이익 지향적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내게 유리한 대로 이루게 하고 복을 주시는 예수로 해석합니다. 내 삶에 형통을 주고 고침을 주고 성공하게 하는 예수를 기대합니다. 유대인들이 정치적 메시야로 해석하는 것과 똑같은 해석입니다. 모두 정치적인 예수를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삶에 형통을 주시려고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오셔서 로마로부터 압제에서 정치적으로 해방하는 일들은 생각도 없으십니다. 사람들이 왕을 삼으려고 했을 때 도피하고 다녔습니다. 왕이 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로마로부터 민족을 해방시키고 능력을 발휘했으면 국민적 영웅이 되고 세상에 유명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제자들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내 두 아들을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가룟 유다가 가장 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고 개의치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실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실망한 나머지 예수를 배반한 것이고 유대인들도 모두 실망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강도를 풀어주라고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께 기대를 하고 복을 달라 하고 건강을 달라 하고 입시에 아이들이 붙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나타난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때 모두 유대인들이 실망한 것과 마찬가지로 실망하게 됩니다. 그 결과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듯이 모두 실망하고 어떤 사람은 시험에 들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믿어도 별수 없다 하고 떨어져 나가기도 합니다. 모두 정치적 예수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예수에 대해서 곡해한 것입니다.

기다림이 없는 사람들

기다림이 없는 사람들은 목표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더 무서울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될 대로 되라 하고 포기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될 대로 되라, 이 포기에서 오는 결과는 무서운 짓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거지는 자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먹고 살아야한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살은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먹고 살만한데 살아야 할 이유도 목적도 없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입니다. 무의미나 허무가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목표가 없다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로마치하에서도 목적이 있는 사람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곡해이기는 했지만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날을 기다렸습니다. 우리나라도 일제 때 주님이 재림하기를 고대했었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참고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신앙을 지키고 기다리며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목표가 없고 기다림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목표가 없으니까 때로 쉽게 친일파가 되었습니다. 기다림이 없고 목표가 없기 때문에 친일파가 되어 미래를 현실로 바꾸어 살았습니다. 민족을 이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민족을 팔아먹기도 하였습니다. 목표가 없으면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나치시대에 레지스탕스로 활약하다가 잡혀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불이 났습니다. 빛이 났습니다. 사명감에 불탔습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장사하며 삶을 살아가다가 붙잡혀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항의했습니다. “나는 아무 짓도 안했다, 억울하다, 나는 나치에 대항하지도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때 레지스탕스가 눈을 부릅뜨고 한마디 했습니다. “당신은 왜 아무 짓도 안했는가, 지금 민족이 다 죽어가고 피 흘리고 신음하고 있는데 당신은 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목표가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긴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 이익 챙기는 일만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나라는 그래도 희망이 있습니다. 지난해 보훈처에서 청소년들의 의식을 조사했는데 오늘 젊은이들이 아주 대견했습니다. 한국 일본 미국 중국에서 각각 젊은이 600명씩 모두 2,400명에게 물었습니다. 전쟁이 나면 참전하겠는가 하고 물었더니 중국 74.8 % 미국 49.7% 일본 29.3% 한국 56.3%가 나왔습니다. 또 우방과 관계발전의 의지를 물었습니다. 중국 78.9 % 미국 70.3% 일본 67.1 % 한국 80.1%가 나왔습니다. 또 다문화인들의 사회 기여도를 물었더니 한국이 단연 최고 수치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은 아주 건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국민은 때로는 불평도 많고 요구도 많습니다. 때로는 이기적일 만큼 자기를 챙기는 면도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희망이 있습니다. 데모하는 것을 보십시오. 얼마나 치열하게 열심히 합니까. 그것을 나쁘게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만큼 우리민족이 열정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도 뭔가를 해 내는 것입니다. 교육열을 보십시오. 입시 때가 되면 산속 절간 추운 곳에서 하루 수백 번씩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정성을 다해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금식기도를 왜 합니까. 세상에서 가장 치열한 전쟁이 금식하는 일입니다. 일주일만 금식해 보십시오.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가를 실감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왜 금식을 하는가 하면 당면한 일을 해결하기 위한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금식기도가 순수하게 영적 삶을 위해서 한다면 더욱 뜻이 깊은 기도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금식기도 한다면 더더욱 소중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진리가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한다면 주님이 더욱 기뻐하실 기도입니다. 내가 좀 더 깊은 영적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 내가 좀 더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금식 기도를 한다면, 그 기도가 얼마나 순수하겠습니까. 그런 기도를 하나님이 외면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퓨 리서치가 오늘 미국인의 성인 1,546명을 대상으로 신앙의식을 조사한 통계를 보면 오늘 미국도 희망이 있는 나라입니다. 조사에 의하면 미국인 10명중 4명이 2050년 안으로 주님이 오실 것이라고 믿는다고 응답했습니다. 미국인 41%는 향후 40년 안에 주님이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미국인 중 58%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응답하였고 32% 나는 가톨릭교인 이라고 응답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인 전체에서 기독교인이 90%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세상에 아들 예수를 보내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 약속을 믿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습니다. 시므온은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다렸고 안나는 금식하며 기다렸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매일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기다렸고 목자들은 양을 치면서 주의 오심을 고대하였습니다. 얼마나 행복하였겠습니까. 기다리는 사람은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던 날 동방박사들에게, 목자들에게, 시므온에게, 안나에게 사전에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이다음 주님의 재림의 날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기다림 자체가 없이 어느 날 그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목적이 없으니까 방종하고 무질서하게 살고 까마득히 잊어버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들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어느 날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시므온이 주님을 맞이하듯이 안나가 주님을 맞이하듯이 그렇게 만나게 될 것입니다.

=========================================================================================== 제목 :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부대 본문 : 눅-05-27-39 오늘은 세계 모든 개신 교회가 기념하는 종교개혁주일 49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 종교개혁일을 기준으로 해서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이 개혁 문제를 취급할 때 ‘하나님의 교회도 개혁이 필요한가?’라는 의문을 우리가 가지게 되는데 이 세상의 교회는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로 구분을 합니다. 무형 교회는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교회를 말합니다. 그 교회는 영원히 변함이 없는 교회인데 우리는 그 교회를 알 수가 없고 볼 수도 없고 하나님만이 우리가 알 수 없는 교회를 인정하시는 교회가 있습니다. 갈보리교회와 같이 우리가 몸담고 있으며 눈에 보이는, 이 지상에 세워진 모든 교회들은 유형 교회라고 합니다. 유형 교회에 대한 신학적 정의는 불안전한 교회라는 것입니다. 죄 많은 인간들이 모여서 운영하는 공동체라서 교회도 얼마든지 잘못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를 보면 부끄럽게도 교회가 부패하여서 너무나 많은 죄를 지은 역사가 많았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또, 솔직히 인정을 합니다. 가장 심했던 때가 중세기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 때 이 개혁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본래 교회는 예수님 이후에 한 줄기로 계속 내려오다가 1054년에 두 줄기가 되었습니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으로 변했습니다. 1017년이 되었을 때 이것을 기점으로 또 한 줄기가 갈라져 세 줄기가 되었는데 바로 그 세 번째 줄기를 우리 개신교회라고 합니다. 이 개신교회를 프로테스탄트 교회라고 합니다. “항거했다”는 뜻으로 우리가 규정을 합니다.

그러면 교회가 무엇을 그렇게 항거했는가? 몇 가지 종교개혁의 확실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구원의 진리성이 이유가 되었습니다. 우리 마틴 루터 종교 개혁의 골자가 세 가지로 나타나고 있는데 “인간의 의를 구원의 수단으로 삼지 말라”였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당시 최고 문제 초점이 되었던 것이 “면죄부 판매”라는 것이었습니다. 죄를 지으면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 속죄 표를 사야 되고 그 의를 만들면 죄가 없어지게 된다는 논리입니다. 더군다나 만약 아버지가 죄를 짓고 죽었으면 이 세상에 아직 살아있는 내가 그를 위해서 속죄 표를 사면 그 의가 아버지의 구원을 이루어준다는 교리였습니다. 인간의 의를 구원의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지난 해 고난 주간에 마틴 루터 영화를 우리 교회에서 상영을 했습니다. 관람하신 분들은 아주 넉넉히 뭐가 종교 개혁을 일으켰는지 이해가 되셨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 기독교의 진리를 고행종교로 만들지 말라”입니다. 로마의 라테라노 성당을 다녀오신 분들은 설명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 성당 안에 그 높은 계단을 알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면 무릎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피가 나게 되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나의 이 고행의 의가 공로가 되어서 속죄의 기쁨을 느낀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무용지물 십자가가 됩니다. 사람이 무엇을 좀 선하게 해서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인간의 의가 구원을 이루는 것이라면 십자가상의 강도는 절대 구원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할 수 있는 시간도 이제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 십자가에서 흉악범 죄수로 죽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과 대화한 시간은 1분에서 2분 정도로 우리가 계산할 수 있습니다. 대화 두세 마디 주고받은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자리에서 그에게 구원의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면 그를 구원한 의가 무엇입니까? 그는 흉악범일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핵심 진리가 됩니다. 어떤 누구도 내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의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

20세기 훌륭한 신학자로 평가 받는 칼 바르트는 일반 종교와 기독교 진리를 분리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의 필요와 요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기독교의 구원 진리는 하나님이 그냥 주신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또, 일반 모든 종교는 내가 필요하여서 신을 찾아가는 행위이며,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 진리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길을 헤매셨고 에덴동산에서부터 하나님이 “아담아, 어디 있느냐?” 찾아 나서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잉카네이션(incarnation)’이라고 하는 사건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 세상을 찾아오신 사건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입니다. 우리 주변에 많은 종교들이 있는데 우리나라에 가장 성행한 타 종교 중에 불교를 볼 수 있습니다. 샤카이족의 왕자였던 석가라고 부르는 그는 왕궁의 왕자로서 세상의 고난을 전혀 모르고 성장했는데 어느 날 신하들과 함께 평민들이 살고 있는 거리를 처음으로 나와서 돌아다닐 때 그의 마음에 충격을 주는 몇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너무 늙어서 꼬부라지고 보기 흉한 노파가 길가에서 꼬부랑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얘들아, 저게 뭐냐?” “사람입니다.” “왜 사람이 저렇게 되었느냐?” “늙으면 다 저렇게 됩니다.” “그러면 나도 저렇게 되느냐?” “그렇습니다.” 또 가다가 장례식 행렬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 사람들이 뭘 메고 저렇게 가느냐?” “사람입니다.” “왜 사람이 사람을 메고 가느냐?” “죽었기 때문에 땅에 묻으려고 메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저렇게 되느냐?” “그렇습니다.” 그때 그는 인간의 낳고 늙고 병들어 죽는 ‘생로병사’의 심각한 고뇌에 빠졌습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이렇게 되는 것이 인간이라면 살아서 뭘 하는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양을 통해서 인간 고뇌에 문제를 해결하라는 하나의 수양이 불교라는 종교를 만들게 됩니다. 공자는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인간이 가장 훌륭하게 사는 길이 있을 터인데 그 길이 무엇일까?’ ‘어질 인(仁)’ 하나를 써놓고 어질게 사는 인간 교육 즉, “교육을 통해서 인간을 참되게 사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길이다.” 그래서 삼강오륜을 만들어서 교육을 하는 길을 가르쳤잖아요? “군위신강(君爲臣綱)이요, 부위자강(父爲子綱)이요, 부위부강(夫爲婦綱)이라.” 옛날 대학시험에 우리나라 삼강이 뭐냐고 했더니 “압록강, 두만강, 낙동강”이라고 쓴 학생이 있다고 하는데, “부자유친(父子有親)하며 군신유의(君臣有義)하고 부부유별(夫婦有別)하고 장유유서(長幼有序)하고 붕우유신(朋友有信)을 지킬 때 인간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교육을 만들었더니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이 유교로 발전해 버렸습니다. 종교는 필요에 의한 것을 하다가 그것이 종교화 되어서 완전히 굳어지는 것이 세상의 종교들입니다. 며칠 전 독일에서는 월드컵 축구경기 알아맞히는 문어님이 돌아가셔서 추모제를 지냈다는 것을 봤습니다. 만약 그 문어 어른께서 소천을 안 하시고 계속 그런 일을 했다면 문어 종교가 생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거 신기하지 않냐? 인간들이 하는 일을 이 물고기가 어떻게 이렇게 100퍼센트 맞추느냐? 이것은 신이다.” 이렇게 필요에 의해서 종교가 자꾸 생겨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진리는 사람의 필요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여러분! 이 선물의 개념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나를 위해서 아주 고마운 일을 해줄 때가 있잖아요? 그 일이 너무나 고마워서 나는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고마운 마음을 그에게 전달하느라고 선물을 갖다 주었습니다. 그럴 때 그것은 선물일까요? 아닙니다. 빚을 갚은 겁니다. 진짜 선물이란 내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고, 받을 만한 공로가 전혀 없는데 받았을 때 그게 바로 진짜 선물입니다. 이 복음에 의한 구원은 하나님이 그냥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받을 만 하고 또 공로가 있어서 하나님이 그 공로를 의로 여겨서 우리를 뽑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선택하여 주셨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찬송가 부르잖아요?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택권 안에 내가 들어있다는 기쁨을 가지고 그 기쁨 속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특별히, 이 구원 선물이 인간의 조그만 보행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필요가 없습니다. 무슨 극장표 하나 사는 것같이 속죄 표를 사거나 무릎 조금 아프고 피 좀 흘렸다고 해서 구원이 주어지는 값 싼 종교의 자리로 기독교가 전락했기 때문에 종교 개혁을 일으킨 것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이게 아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하나님이 거저 주신 믿음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의해서 우리가 선택 받았고 선택받은 백성은 감사할 뿐이지 무슨 조그만 일을 했다고 해서 그게 의가 되어서 속죄 표를 샀다고 구원받게 되는 값싼 종교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냐?” 이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만인제사론’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해결합니까? 내가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직자가 중간에서 중재역할을 꼭 해주었습니다. 이때 생긴 제도가 고해성사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지 못하고 성직자에게 다 고백합니다. 나는 이런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면 성직자가 중간에서 그 사람의 기도를 다 듣고 그를 위해서 죄 사함의 기도를 해줄 때 비로소 죄가 사해지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우리 개신교는 이것이 다 필요가 없습니다. 왜 필요가 없느냐? 그 중보 역할을 예수 그리스도가 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나를 용서하고 내 죄를 없이해주는 사함의 권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 예루살렘 성전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고 했습니다. 그곳은 제사장만 들어갔었습니다. 제사장 중에서도 대제사장만 거기 들어가서 백성의 죄 사함을 위한 중보기도를 하던 자리인데 이것이 찢어져 열리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으로 누구든지 제사장의 역할을 자신이 할 수 있는 길을 예수 그리스도가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지은 죄는 내가 하나님과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고 회개를 통해서 사함을 얻는 제도를 가지고 있지 누구에게 고백을 해서 그것을 가지고 용서받는 제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루터는 수도사 시절에 너무나 깨끗하게 살려고 생각하다 보니까 지은 죄가 날마다 있잖아요? 생각만 잘못해도 지은 죄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 신부를 찾아서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신부님! 내가 이렇게 또 나쁜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 그렇게 나쁜 생각이 들어왔었구나. 그러면 내가 사함의 기도를 해주겠다.” 고해성사를 받고 신부님이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청년 시절에 용서함을 받고 나오는데 2~3시간 후에 또 생각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니 어떡합니까? 해가 넘어가기 전에 또 고해성사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또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이 신부님은 마틴 루터 때문에 살 수가 없습니다. 하도 자주 찾아와서 고해 성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루터에게 말했습니다. “일주일씩 모아가지고 오너라. 나는 너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겠다. 너 하나 위해서 신부 생활을 해야 될 정도이다.” 이런 말을 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그때 루터는 생각했습니다. ‘왜 내가 직접 하나님께 고하면 안 될까?’ 이런 심각한 신학적 고민에 빠진 겁니다. 성경을 아무리 연구해 봐도 죄 용서에 있어서 예수님 이후의 중보 역할은 필요치를 않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6절에 뭐라고 합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누구도 거치지 아니하고 내가 지성소에서 홀로 하나님과 직접 교통해서 내 문제를 하나님과 직접 해결하는 이러한 은혜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겁니다. 이것이 바로 ‘만인제사론’입니다. 대제사장만 하던 일을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것이 우리 개신교의 신학입니다. 그래서 개신교는 고해성사를 안 합니다. 우리 갈보리 교인들이 저한테 와서 고해성사 하시는 분들 한 사람이라도 계십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필요가 없는 겁니다. 나와 직접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 직접 해결하는 신학의 기초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이 약간 충돌적 분위기를 주고 있는 여러 가지 말씀들이 있는데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것을 예수님이 개혁하는 작업이 여기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금식하는 문제에서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유대 사람들은 옛날에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해야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안 했습니다. 그래서 와서 따지는 겁니다. “여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은 왜 금식을 안 합니까? 우리 바리새인들은 다 금식하고 있는데 당신들은 하나님 믿는다는 사람들이 왜 안하는 겁니까?” 이렇게 금식의 문제를 가지고 들고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유대 나라 사람들의 그 당시 하루 이틀의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24시간이 아닙니다. 성경에 있는 대로 합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낮과 밤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해가 뜨는 시간과 해가 지는 시간으로 계산을 해서 해가 뜨기 전과 해가 진 후 그것을 이틀로 계산하는 계산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금식하는 날이 되면 이 사람들은 늘 하는 것이 해 뜨기 전에 밥을 잔뜩 먹어 두는 겁니다. 그리고 해가 떠 있는 시간만 밥을 안 먹는 겁니다. 해가 지면 또 많이 먹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먹으면 식량이 더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굶었다 먹으면 더 많이 먹게 됩니다. 이런 금식을 하면서 지금 예수님께 가서 금식을 가지고 따지는 겁니다. 여러분! 이슬람들이 라마단 한 달 동안 금식합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한 달 동안 밥을 안 먹으면서 정상적인 활동을 하고 직장 생활하고 농사지으면서 할 것을 다 합니다. 라마단 금식기도 기간에는 전 세계 이슬람 사람들이 다 합니다. ‘어휴! 한 달씩 굶으면서 어떻게 사느냐?’ 이런 하루 계산법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해뜨기 전에 먹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안 먹습니다. 해 지면 또 바로 먹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겁니다. 사실 마음먹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렇게 하려면 차라리 하지 마라. 차라리 먹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라.” 이러면서 혼인집 비유를 통해서 잔칫집 설명을 하시는 것입니다. 또, 유대 나라 결혼 풍습은 2천 년 전에 전통적으로 밤에 했습니다. 결혼식 하자마자 신랑신부 신혼여행 떠나 버리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일주일 동안 집에 있습니다. 그러면 일주일 동안 신랑신부가 꼼짝하지 않고 손님을 맞이해야 되는데 오늘은 이 친구들이 오고, 내일은 저 친구들이 오면서 일주일동안 잔치 분위기입니다. 유대 나라의 잔치는 보통 일주일을 합니다. 그런데 신랑 신부가 찾아오는 손님을 대접해야 될 거 아닙니까? 음식을 잘해서 대접해주고 기쁘게 해줍니다. 그런데 금식하는 날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찾아온 손님들에게 오늘은 금식하는 날이니까 물 한모금도 줄 수 없다고 할 수 있느냐? 그때는 먹고 마시는 것이 좋으니라. 나중에 신랑신부가 없을 때는 그때 금식하라. 습관화된 종교 의식이라면 개혁을 해서 얽매이지 말고 살아라. 하나님이 밥 굶는 것을 좋아하시냐? 하기도 싫은 종교 의식을 억지로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 나의 의가 쌓아진다고 생각하는 그 따위 신앙은 버려라.”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까? 바로 이런 문제 때문입니다. 잘못 알고 있는 유대교를 뒤집어엎는 바람에 예수님이 끌려가서 개혁자로 살았기 때문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여기 가죽 부대 이야기를 하셨잖아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복음의 성격은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변하는 진리가 있고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습니다. 새 포도주를 사용할 시대가 되면 새 가죽부대를 준비해야 된다는 이 말은 무엇입니까? 복음의 성격이 시대에 따라서 살아있는 말씀으로 움직여 나갈 것을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안식일이 본래 토요일인데 왜 주일날 예배드립니까? 개혁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날을 기념해서 전 세계 개신교회가 “이 날이 안식일이다.” 개혁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을 기념해서 주일이 생겨서 주일 예배를 지금 드리는 겁니다. 옛날이라면 여러분들은 지금 불법자들만 가득합니다. 왜냐하면 옛날 제가 어렸을 때 교회 다닐 때는 남녀 좌석이 따로 있었습니다. 가운데 갈라서 이쪽은 여자, 이쪽은 남자가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래서 부부도 교회 문까지는 같이 걸어오다가 교회 문 앞에서 안녕히 가시라고 헤어졌습니다. 그래서 남녀석을 구분하고 예배 마치고 다시 재회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다 같이 앉아계시잖아요? 시대에 따라서 변해야 되는 진리는 변해야 그것이 살아있는 말씀이 되고 흘러가는 물은 영원히 깨끗한 것입니다. 고여 있는 물은 썩어서 못 먹습니다. 그러니까 이 변해야 되는 진리를 변하지 않게 하는 것이 교회의 신학의 문제요 바로 시대 변천에 따른 살아있는 복음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가끔 쓰는 용어가 있는데 바로 “보수적이다, 보수주의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사용하실 때는 무슨 말인지 알고 사용하셔야 합니다. ‘보수적’이란 옳은 것을 끝까지 지키는 것을 ‘보수적’이라고 합니다. ‘보수주의’란 새로운 것을 안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보수적’인 사람이고 바리새인들은 ‘보수주의’입니다. 그래서 보수와 보수주의가 지금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신학의 방향과 교육의 갈 길의 방향을 아주 훌륭하게 해야 그 시대에 살아있는, 그 시대 사람들을 구원하는 교회가 되는 겁니다. 이제 우리가 현실적인 문제로 종교 개혁을 한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가장 무섭고 흉악한 마귀 집단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정치 이념이나 하나의 권력 유지를 위한 집단들이 내셔널리즘을 종교화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일본의 군국주의를 보십시오. 국가의 세력 확장을 위해서 내셔널리즘을 종교화 했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의기양양한 군가를 가르치면서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옳은 일이 무엇이냐?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국가의 젊은이들이 그와 같은 내셔널리즘의 종교화에 무수한 목숨을 국가 제단에 바쳐서 일본이 그렇게 아시아를 피로 물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얻었습니까? 아시아를 피로 물들인 죄만 남았고 일본은 침략국이었다는 역사의 오점밖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종교의 가장 큰 희생은 순교를 하는 일입니다. 종교화된 내셔널리즘을 가지고 국가 집단에 수없이 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낸 군국주의는 내셔널리즘을 종교화하면 그렇게 됩니다. 여러분! “쇼군”이라는 영화를 보셨을 겁니다. “쇼군”이라는 영화가 미국에 들어왔을 때 미국 언론에서 “이것은 하나의 일본 종교다.”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보십시오. “거기에 사무라이 무사가 정좌를 하고 앉아서 자기 옷을 벗어젖히고 그 예리한 칼을 가지고 자기 배에 찔러서 자기 창자를 자기가 다 끊어버리고 할복자살을 한 것은 종교이다. 내셔널리즘을 종교화하면 이렇게 무서워진다.” 이렇게 사는 것이 가장 훌륭하다는 힘을 주어서 일본의 젊은이들이 가미가제 전투에 천황이 내려주는 술 한 잔을 너도나도 받아먹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거 아닙니까? 어떤 종교가 사람을 그렇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슬람의 자살 폭탄 테러도 똑같은 것입니다. 자신들의 정치 목적 달성을 위해서 내셔널리즘을 종교화해서 시골의 가난하고 소망이 없는 청소년들을 자기들의 종교 교리에 맞추어서 설득을 했습니다. “만약 네가 이렇게 하면 너는 저 세상에 가서 가장 좋은 삶을 영원히 살게 되는데 남자인 경우는 가장 예쁜 여자 일곱을 데리고 영원히 살게 된다.” 이런 이야기를 해서 ‘그래! 그렇게 사는 것이 낫겠다. 나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 세상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 이런 희망 없는 인생을 사는 것보다 그렇게 몸을 던지고 저 세상에 가서 그렇게 좋은 삶을 살아야지.’ 이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이 19~21살에 그 예쁜 처녀, 총각 아이들이 허리에 자살 폭탄을 두르고 버스에 올라가서 심지에 불을 댕겨 죽어버리고 마는 내셔널리즘을 종교화해서 무수한 생명을 죽여 버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잖아요? 이러한 일들이 이 시대에 개혁할 종교개혁입니다. 인간답게 살고 인간의 자유함을 누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그 가치성을 부여하고 인간을 존중하는 세상이 아닌 정반대의 세상인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이 세상을 보시면 어떻게 설교하시겠습니까?

더 심각한 종교가 있습니다. 북한의 정치 세력은 이 세상의 어떤 종교보다도 강한 종교화 개념을 부여했습니다. 갈보리교회 교인 여러분! 여러분 가정에 예수님 사진 걸어놓으셨습니까? 심방 다니면서 봐도 없습니다. 그런데 북한에는 누구의 집에나 김일성, 김정일 사진 걸어놨습니다. 앞으로 김정은 사진까지 셋을 걸어서 삼위일체를 만든다고 합니다. 그리고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들의 신앙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우리 먹고 사는 모든 것은 장군님이 내려주신 은혜입니다.” 이것은 종교화된 거기에서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 지금 예수 믿는 사람 “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먹을 양식 주시고 입을 옷을 주셔서 이렇게 잘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고백을 그렇게 하는데 바로 그 하나님의 자리에 장군님이 계신 겁니다. 북한은 전 국민 내셔널리즘을 다 종교화해서 종교집단이 되어 버렸는데 바로 하나님이 김일성, 김정일이 되어 있는 겁니다. 이러한 일이 지금 세상에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비인간화 문제가 있는 것을 개혁해야 되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집어넣어서 “인간은 인간답게 살라. 하나님의 형상에 자유함을 누리고 세상에서 하나님 형상으로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그래서 기독교 진리가 들어가는 곳은 사람 살 곳이 되게 하고 자유와 평화를 주장하고 온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이 무엇입니까? 절대 신을 절대 신으로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섬기게 하고 그 이상 아무 공로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직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부심과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께 헌신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유대교를 개혁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로 세상이 개혁되어져야 합니다. 끊임없이 앞으로도 이 복음으로 세상을 개혁해야 합니다. 우리 그 개혁 사역에 여러분과 저와 우리 갈보리교회가 계속 쓰임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제목 :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본문 : 눅-08-05-11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눅 8:5~11)할렐루야~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 예수님 안에서 천국 꿈을 꾸는 사람들입니다. 천국 꿈이 가슴속에 없는 사람은 예배 드리러 교회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슴에 손을 한번 얹어 보세요.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계시지요? 여러분 속에 예수님이 안주하고 계시면 천국 꿈을 꾸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도록 해 주십니다. 옆에 있는 분들에게 오늘 당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인사해 주십시오. 항상 사람은 마음속에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것이 강렬한 꿈이든지 희미한 꿈이든지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여러분 꿈 꾼대로 된다는 거서입니다. 그러므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꿈을 꾸는 것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이고 좌절감을 가져오는 꿈을 꾸는 것보다 낫습니다. 기왕 꿈 꿀 바에는 축복의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서론>오늘 저는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에 관해서 여러분과 함께 알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릴 새 첫째,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 했습니다. 아주 슬픈 일입니다. 길가에 떨어져있으니 새들이 먹이로 삼을 수밖에 없지요. 둘째는 바위 위에 떨어지니 습기가 없는데 뿌리가 내릴 수가 없지요. 그러므로 말라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셋째, 가시떨기 속에 떨어져서 가시가 우거지니 길을 막아서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나 넷째, 좋은 땅에 떨어집니다. 아주 옥토에 떨어지니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한 것입니다.성경에 자주 인용되는 겨자씨는 너무 작아서 잘 안보입니다. 언젠가 제가 겨자씨를 가지고 와서 우리 성도들에게 보여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권사님 한분이 날 찾아오셔서 겨자씨 구경을 하겠다고 좀 보여달라고 그래서 제가 성경에 얹어서 보여주니까 “안 보이는데요?”하는데 콧바람에 다 날라가 버렸습니다. 그렇게 적은 겨자씨인데 그게 자라면 4미터나 자랍니다. 눈에 안보이는 겨자씨가 4미터... 제 키 배로 자라서 새들이 와서 둥지를 치고 아름다운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적은 겨자씨 속에 큰 나무가 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넣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주님 비유하시기를 겨자씨와 같다 했습니다. 나는 목사님 믿음이 없어요. 나는 믿음이 형편없어요. 형편없이 적은 믿음에도 굉장한 축복을 하나님이 프로그램으로 넣어 놓은 것입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들을 명하여 저 바다에 던져도 된다고... 그 믿음 속에 하나님이 만들어 넣어 놓은 프로그램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내 마음밭에 심어서 가꾸면 기가 막힌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겨자씨를 좋은 땅에 심어야지 길거리에 심거나 바위 위에 심거나 가시밭에 심거나 하면은 겨자씨가 다 죽어버리지요. 그 믿음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큰 축복이지만 옥토에 심지 않고 잘못 심어 놓으면 믿음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오늘 여러분 저와 함께 우리 마음을 살펴보고 옥토를 만들어 가지고서 하나님께서 여러분 보시고 네 믿음대로 되라. 네 믿음대로 되라. 네 믿음대로 되라. 믿음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론>우리 마음은 농사짓는 텃밭이 아닙니까? 여러분과 내 마음은 다 농사짓는 텃밭인 것입니다. 1. 길 가에 떨어진 씨그런데 첫째로, 길가와 같은 마음밭에 말씀이 뿌려지면 큰일입니다. 길가라는 것은 무관심한 곳입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에 누가 관심을 기울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리는 것입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관심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되지 무관심한데는 주님께서 축복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살이에 굳어진 마음은 완악한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과 하늘나라에 대해서 아주 무관심한 것입니다.요한일서 2장 16절에 보면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세상이 꽉들어차면 하늘나라 일에 대해서 관심이 기울어질 수가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말씀이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세상 임금 마귀가 와서 뿌려진 씨를 당장 주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마귀가 내가 마귀다 하고 돌아다니냐면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생각을 통해서 나에게 끊임없이 유혹하고 내 속에 뿌려진 하나님 말씀을 무관심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마음 속에 자꾸 강하게 뿌리 내려서 세상이 뽑히지 않도록 마귀는 역사하는 것입니다.누가복음 8장 12절에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라고 말한 것입니다.요한복음 5장 38절에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여러분, 하나님을 어디에서 찾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기도원에도 가고 교회도 찾아가고 훌륭한 주의 종의 집회에도 찾아가는데 좋습니다. 그렇게 해야지요. 그러나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말씀속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말씀이 바로 천국이 들어있는 씨앗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교회도 가라! 기도원에도 가라! 집회도 가라! 그러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말라. 그 말씀은 들을 필요 없다.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고 말씀을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큰 원수의 하는 대적적인 일인 것입니다.데살로니가후서 2장 9절로 10절에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진리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사랑하지 않게 하므로 구원을 못받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 세상 쾌락을 다 주고도 말씀 만은 받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랑하게 되면 구원을 받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미국의 제35대 대통령을 지낸 존 F. 케네디의 아버지를 보십시오. 그는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온 사람인 것입니다. 미국에 와서 뭘 했느냐. 술도가를 했습니다. 술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래서 자식들을 다 일류대학에 공부를 잘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여러 아들 중에 한 아들은 중풍병에 걸려서 평생에 병신으로 살다가 죽고, 다른 아들은 비행기 추락사고로 죽고,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는 암살당했고 또한 대통령 후보로 나갔던 로버트 케네디도 총에 맞아 죽었고 상원으로 있던 아들도 여비서 익사 사건에 휘말려 곤욕을 당했습니다. 아들들이 어려움에 빠지고 비참한 생애로 마치게 된 것을 본 아버지는 이렇게 가슴을 치고 탄식했습니다. “내가 수십 년 간 술을 팔아 수많은 사람들이 내 술을 마시고 가정이 파괴되고 인생을 파탄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대가를 내가 톡톡히 받았다. 내 아들들이 다 비참한 생의 결과를 맺은 것은 내가 술장사를 한 그 대가로 된 것이다!” 그렇게 탄식을 했습니다. 그는 술 사업을 한 것을 크게 후회했다는 것입니다. 길 가는 사람이 교통 신호에 빨간 불이 켜지면 정지해야 하듯이 믿음의 사람은 늘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빨간불이 켜지면 회개를 해야 돼요. 여러분 자동차를 운전해 가던 사람중에 빨간불 안본 사람 한번 손들어봐 주십시오. 늘 파란불만 있지 않습니다. 빨간불 있어요.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는데 늘 의롭고 거룩하고 성결한 삶만 살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잘못된 길로 비뚫어진 길로 빗나가는 길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빨간불이 켜져요. 그때는 무엇이냐. 스톱하라는 것입니다. 빨간불이 켜졌는데 그대로 자꾸 나가면 큰 사고를 일으키고 마는 것입니다. 스톱하라는 것입니다. 인생에 빨간불이 켜지면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가 죄없다 하면 거짓말 하는 것이라.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말했었습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우리가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중에 마음에 빨간불이 켜지면 회개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길거리에 뿌려진 씨가 안되는 방법인 것입니다. 길거리에 뿌려진 씨가 된 것은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살기 때문인 것입니다.2. 바위 위에 떨어진 씨둘째로, 바위와 같은 마음밭에 뿌려진 씨가 있는 것입니다.바위는 딱딱하지 않습니까? 깨어지지 않은 마음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깨어지는 사람은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깨어지지 않는 사람은 희망이 없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회개를 하지 아니하면 천국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회개는 말씀을 들을 때 가슴을 치고 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굳어진 사람은 안깨어집니다. 모든 것을 자기가 옳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잘했다고 말합니다. 자기 타당화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씨를 뿌릴 틈이 없어요. 다 내가 옳고 내가 잘했고 내가 훌륭한데 내가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일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깨어진 사람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자백하고 천부여 의지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나님께 항복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이요 마귀적인 마음이 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심어진 곳은 그러한 마음입니다.누가복음 8장 13절에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라는 것입니다.하늘나라의 습기인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바위가 어떻게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입니까? 깨어지지 않은 완악한 마음은 성령이 아무리 역사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마가복음 3장 29절에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된다고 했는데 성령을 안받아 들이는 것입니다.에스겔 36장 26절에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라”우리가 변화되는 것은 내 힘과 능력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성령이 와서 변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회개하고 자복해도 변화 안됩니다. 내 힘으로 변화 안됩니다. 제가 요번 교도소 헌당식에 가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교도소를 짓고 좋은 환경에 사람을 갖다 놓아도 마음이 깨어져서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변화되지 않는다. 교도소에 왔다가 또 나가서 죄짓고 들어와서... 그 마음에 변화를 받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야 된다. 성령이 와서 변화시켜야 돼요. 여러분 오늘 여기와 계시지만 여러분 마음에 여러분 힘으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변화 안돼요. 결심을 하고 돌아가서는 또 그 진흙탕에 들어가고 돌아서서 또 진흙탕에 들어가요. 여러분을 진흙탕에 안들어가게 하는 것은 성령이신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인 것이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내 힘으로 새것이 안됩니다. 성령께서 역사해야 새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마음이 깨어져서 주여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못합니다. 나는 빈손 들었습니다. 천부여 의지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님께 의지할 때 주의 성령이 와서 내 마음을 변화시켜줘요. 술 주정뱅이는 술이 먹고 싶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담배피는 자는 담배가 피고 싶지 않습니다. 세상 쾌락을 취하는 사람은 그 쾌락으로 나가던 발걸음이 돌아섭니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아니되되 주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인정하시면 아멘하십시다. 환영하시면 아멘하십시다. 의지하시면 아멘하십시다. 이 성령께서 여러분을 도와주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와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깨어지기만 하면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안깨어지면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새마음을 주고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준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이 내 마음을 새롭게 해주시고 하나님이 내 완악한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신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특별한 것입니다. 영국의 작가인 C. S. 루이스는 믿음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영국 어떤 노신사가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다가 기독교에 대한 책을 읽게 되었어요. 상당히 관심을 기울여서 아, 하나님이 계신가? 내가 열심히 책을 읽고 알아보아야 되겠다. 그런데 마귀가 와서 속삭인 것입니다. 야, 지금 점심시간이다. 점심먹고 책을 읽을 수 있으니까 지금은 읽지 말고 점심먹으러 가라. 그래서 시계를 보니까 12시가 다 되었거든. 야~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나? 그래서 식당에 가서 식사를 배불리 했습니다. 그리고 도서관에 돌아가니까 마귀가 와서 또 말했습니다. 야, 오늘 너 집에서 할 일이 많다. 도서관에 갈 시간이 없다. 집에 가서 도서관은 언제나 갈 수 있으니까 집에 가서 오늘 할 일을 하고 난 다음에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어도 좋으니까 빨리 집에 가서 할 일을 하라! 그래, 그말 맞구나. 오늘 집에 일이 많구나. 버스를 타고 집에 갔습니다. 집안일을 한다고 정신없이 하고 하루 해가 지나가니까 마귀가 회심의 미소를 하면서 내 말대로 되었다. 내 말만 들으면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없을터이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변화되므로 하나님께 가까이 못가게 하는 것이 내 임무라고 마귀가 그렇게 말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있다가 교회 가겠다. 조금 있다가 하나님 말씀을 읽어 보겠다. 조금 있다가 찬송하겠다. 자꾸 마귀는 조금있다가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들을 때 절대로 미루지 말고 회개할 때 그때 회개하고 기도할 때 그때 기도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그때 기도하고 다음에 하자. 내일 하자. 천천히 하자는 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늦추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3. 가시떨기 속에 떨어진 씨셋째로, 가시떨기 속에 떨어진다는 말은 가시떨기와 같은 욕심과 탐심이 우거진 마음 밭에 말씀이 뿌려지매 욕심과 탐심이 죄를 짓게 하고 죄가 사망을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상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가시떨기가 우거진 그 가운데 무엇이 자랄 수 있습니까? 가시기운에 살아남지를 못합니다. 다 말라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8장 14절에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라고 말했고야고보서 1장 15절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말한 것입니다.갈라디아서 6장 7절로 8절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마태복음 6장 24절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미국의 성공학자인 마크 스티븐스(Mark Stevens)는 최고의 경영자가 되기 위해서는 옛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세 가지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첫째는, 나이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고 적은 것을 떠나 낡은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 나는 이제 나이가 많아서 요사이 책임을 짊어질 수 없다. 저도 종종 그런 말을 합니다. 내 나이가 이제 일흔이 넘었는데 무슨 새 일을 하겠느냐? 그러다가 우리 성도들에게 꾸중을 많이 들었습니다. 목사님이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생각을 하라고 늘 우리에게는 가르쳐 놓고 난 다음에 나이 늙었다고.. 그래서 저도 회개를 하고 나이 문제는 말안하기로 작정을 했었습니다. 나이야 얼마가 되든 하나님이 힘주시면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서 사는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저의 마음에 50세로 생각하자! 여러분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주님 안에서 아직 젊다. 여러분 우리는 다 젊습니다. 늙지 않았습니다. 항상 젊게 살다가 젊게 천국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둘째, 낡은 지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요사이 하도 과학이 발전되고 나날이 이 세상이 달라지기 때문에 옛날에 내 생각에 묶여 있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여야 되겠는데 그렇게 쉽지가 않아요.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는 요사이 새로운 전화기를 가지고 연습을 하는데 아~ 보통 힘들지가 않아요. 손가락만 움직이면 확 화면이 달라지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나 혼자 책을 가지고 연구하다가 연구하다가 안돼요. 김성혜 총장은 보니까 그것을 새로운 전화기를 잘써요.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해보니 안되더라구요. 역시 사람은 배워야 돼요. 옛날 생각에 붙어있지 말고 자기보다 잘하는 사람이 있거든 나이가 젊든 나이가 늙었든 가서 배워야 돼요. 그래서 자꾸 발전해야 우리가 되지 발전 안하면 여러분 세상 가시넝쿨에 휩싸여 기운이 막혀 아무것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낡은 경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과거의 성공과 실패를 잊고, 타성에 젖은 경험에서 벗어나야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너 아버지 시대는 이렇게 안했다. 너희 어머니 시대는 이렇게 안했다. 우리 시대는 그렇게 안했다. 지금은 다 그때 시대보다 달라졌습니다. 향상하고 발전하고 변화된 시대이기 때문에 옛날 시대에 묶여 있어서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에 따라가야 돼요. 머리 스타일도 변화하는 시대에 따라서 머리 스타일도 바꿔야 되고 옷도 변화된 스타일로 따라서 입어야 되고 말도 변화된 스타일로 해야 되고 생각도 변화된 스타일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시대를 잡아 놓으려고 하지 말고 변화된 시대에 우리가 함께 걸어 들어가야 이 세상에서 낙오되지 않는 것입니다. 옛것을 벗어버리고 새것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항상 마음에 믿음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도록 마음이 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성령은 영원히 새로운 것입니다. 성경이 얼마나 오래된 책입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경말씀은 영원히 새롭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새로워요. 이 세상 문화나 문명이 따라잡지 못하게 하나님 말씀은 앞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언제나 이 세상의 최첨단에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밭을 늘 갈아엎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니까 나이에 묶이지 말고 세상 틀에 잡히지 말고 낡은 경험을 버리고 우리 마음에 새로운 삶을 말씀을 통해서 받아들여 하나님 앞에 영원히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될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4. 좋은 땅에 떨어진 씨넷째로, 좋은 땅과 같은 마음 즉 옥토에 떨어진 씨를 생각해 보십시다.우리는 마음이 옥토가 되어야 돼요. 여러분의 마음이 지금은 길거리에 있는 무관심한 마음도 안되고 깨지지 않는 바위같은 마음도 안되고 세상 탐욕에 우거진 가시넝쿨에 우거진 마음도 안되고 옥토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8장 8절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누가복음 8장 15절에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고 말씀한 것입니다.누가복음 8장 14절에는 가시를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인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이 세상에 염려 근심이 꽉 가시덩쿨같이 우거진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살까, 염려, 근심이 마음을 뒤엎어 놓습니다. 이 가시넝쿨 같은 마음 깨어지지 않는 마음이 바로 그런 마음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 세상의 쾌락에 젖은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쾌락은 재물의 유혹과 이 세상의 향락,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생의 자랑 등으로 세속적인 쾌락적인 마음으로 마음이 잡혀 있는 그런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향락 등과 같은 욕심과 탐심으로 채워 있으면 말씀이 뿌리를 내릴 도리가 없습니다. 말씀이 뿌리 내리고 잘 자랄수 있는 좋은 땅이란 먼저, 말씀을 듣고 지켜 말씀으로 다져진 마음이 되어야 되겠는데 어떻게 그런 마음이 될 수 있느냐. 회개하는 도리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씀이 다져진 마음은 야훼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데 하나님 말씀을 즐거워하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기 위해서는 성령이 도와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저도 그럴 때가 많아요. 성경 읽기 싫어요. 성경말씀이 듣기 싫어요. 지칠때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지 아니하고 세상이 들어오면 성경이 멀어지고 성령의 역사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회개를 해야 돼요. 내가 좋든 하찮든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굳어져서 말씀이 싫고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시옵소서. 회개하고 자복하면 곧장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방송에서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한 사막에서 사는 무식한 사람인데 이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아주 뜨거운 신앙을 갖게 되었어요. 그런데 아주 박식한 박사와 함께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박사님이 당신 하나님 언제나 보았느냐? 보지도 못한 하나님을 그렇게 열렬히 믿느냐? 당신 무식하고 사막에만 사니까 하나님이 누군지 보지도 못하면서 그런 소리하느냐? 하니까 무슨 소리 합니까? 나는 하나님을 매일 같이 만나는데... 역시 무식한 사람은 할 수가 없구나. 어디 하나님을 매일같이 만난다. 지금도 만나느냐니까 지금도 내가 하나님과 만나고 있어요. 박사님은 못만나지만 나는 만나고 있어요. 어떻게 만나느냐? 박사님 내 말만 들으면 박사님도 하나님 볼 수가 있어요. 어떻게?? 죄를 회개하여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요. 박사님과 하나님 사이에 죄가 딱 막혀 있는데 죄의 담을 쌓아놓고 난 다음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어요? 죄를 회개해야 돼요. 죄를 회개하고 그 다음에는? 그 다음은 성령충만을 받아야 돼요. 하나님이여 성령으로 충만히 채워 주시옵소서. 예수님 보혈로 성령으로 채워 주시옵소서.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기도를 해야 돼요. 하나님 나와 만나 주시옵소서. 기도를 해야 돼요. 그 다음은? 그 다음은 말할 필요없어요. 하나님 와서 만나 줄테니까 그래서 이 박사가 허허허 웃으면서 무식한 사람은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그리고 헤어졌는데 나중에 가만히 생각하니까 어떻게 그 사람 말대로 해볼까? 주위에 사람도 없고 하기에 무릎을 꿇어 하나님 안계시는 것 물론 알지만 그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니까 나도 시험삼아 해봅니다. 내 죄를 회개하고 성령을 받기 원합니다. 계시면 도와주시옵소서. 그까지만 자기가 말했는데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감화 감동을 받아서 눈물을 흘리고 콧물을 흘리고 죄를 회개해서 이것 내 정신도 아니다. 이것 왜 내가 이러냐? 그러면서도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회개를 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달라고 막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니까 알지도 못하는 혀가 꼬부라지더니만 알지도 못하는 말이 막 나오면서 찬송이 나오고 기도가 나오는데 하나님 배워 달라고 할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을 체험했어요. 그래서 그 박사가 하는 말이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음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보았습니다. 내 몸 속에 들어와 계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너무나 크시기 때문에 여러분 앞에 오셔도 여러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 속에 임하시면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말씀이 하나님을 모시고 우리 가슴 속에 오는데 우리가 마음이 회개하고 깨어지고 성령충만하면 말씀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느껴지게 되고 감동하게 되고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로 25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임재하시고 오늘날도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새로운 삶을 가져와 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 생각을 합니까?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이 달라져야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생각이 달라지지 아니하면 아무리 환경을 아름답게 가꾸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생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생각이 어떻게 달라집니까? 말씀을 통하여 달라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들으면 성경말씀이 우리 생각을 바꿔 놓습니다. 그러나 세상 말을 들으면 세상 말이 우리 마음을 세상적으로 변화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듣느냐, 무슨 생각을 마음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데 요사이 가장 큰 문제는 어린 아이들이 컴퓨터 게임에 정신이 빠져 가지고서 시간만 있으면 핸드폰에서 컴퓨터 게임을 합니다. 부모님하고 서로 대화가 없습니다. 부모님 말씀을 들어야 생각이 건전하게 될 것인데 부모님 말을 들을 여과가 없어요.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하는 말은 뭐냐. 엄마 돈줘! 그 말 밖에 안해요. 그리고 돈 받으면 가서 게임하고... 오늘 게임에 중독된 자녀들 때문에 큰 문제입니다. 그 자녀들이 어떻게 변화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서 생각이 하나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 다음 말씀으로 지은 꿈을 마음에 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옥토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에 꿈이 있는 마음이 옥토가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제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목사님, 자꾸 꿈을 가지라고 하는데 어떻게 꿈을 가집니까? 내가 꿈이 어떤 꿈을 가졌는지 어떻게 압니까? 굉장히 쉽습니다. 꿈을 가지기 위해서는 여러분 소원이 있습니까?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꼭 갖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까? 그 소원이 바로 꿈인 것입니다. 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꿈을 꾸는 사람이요, 꿈을 꾸는 사람은 삶에 바라는 목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에 목표없이 바람부는대로 물결치는대로 사는 사람은 반드시 인생을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옥토가 되지 못합니다. 마음에 인생의 목표를 두고 살기 위해서는 꿈을 꾸어야 되고 꿈은 내 마음 속에 소원과 바라는 것이 있으면 꿈을 꾸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마음 속에 꿈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꿈이 뭐냐. 내 마음에 소원의 제 1호가 건강인 것입니다. 하나님 내게 건강 주시옵소서. 그게 소원이고 그 소원이 바로 꿈입니다. 그것 바라보는 것입니다. 둘째가 하나님 설교 잘하게 해주시옵소서. 그게 내 소원입니다. 소원이 내 꿈이고 그게 바라는 것입니다. 셋째가 하나님 사랑과 행복나누기 운동을 통해서 더 많은 어렵고 고난 당하는 사람을 도와주게 해주옵소서. 그것이 바로 내 소원이니까 그게 꿈이요 바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분명한 꿈을 갖고 그 꿈을 여러분 수첩에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은 그대로 하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꿈을 기록할 수 있으면 굉장한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꿈을 갖고 있는 사람이 믿음을 사용하는 사람이지 꿈이 없는 사람은 믿음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무슨 꿈을 가지고 있습니까? 오늘 수첩에 적으십시오. 그냥 아멘만 하지 말고 집에 가서 꼭 꿈을 적으십시오.꿈을 적으면 그 꿈이 바로 여러분 소원이 되고 그 소원이 생명의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얼룩덜룩이 새끼 양을 낳기 위해서 순수한 색깔의 양이나 염소를 갖다 놓고 그 앞에 얼룩덜룩이 나무를 병풍처럼 세웠습니다. 나뭇가지를 꺾어서 얼룩덜룩 얼룩덜룩 껍질을 벗겨서 병풍처럼 세워 놓고 그 앞에 물구유를 갖다 놓고 물을 마시는 짐승떼가 새끼를 얼룩덜룩이를 밸 것을 마음 속에 상상했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종이에 적는 것보다도 그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얼룩덜룩이 병풍을 만들어서 세웠다구요. 적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저의 수첩 여백란에 자꾸 적습니다. 내 마음의 소원을 자꾸 적어요. 적고 눈 감고 생각하고... 바라보고... 그러면 내 본 대로 될지어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에 적은 꿈을 마음 속에 품고 살면 목표있는 인생을 살게 되고 그 다음에는 목표있는 삶을 살면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냥 생겨나지 않아요. 마음에 소원이 있고 소원이 꿈을 꾸고 꿈이 목표를 가지고 기도하면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성경에 주님이 믿음대로 될지어다 라고 했는데 그 믿음가진 사람이 그냥 하루 아침에 믿음이 생기는 것 아니에요. 마음에 소원을 가지고 꿈을 꾸는 사람이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열두해 혈루병 앓는 여인도 내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대면 낫겠다는 꿈을 꾸고 소원을 가지고 있으니까 믿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거지 바디매오도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내 장님 거지 바디매오가 눈을 뜰것이라고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니까 예수님이 내가 네게 무엇 해주기를 원하느냐?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소원과 믿음은 이콜입니다. 소원이 없는 사람이게는 믿음도 없습니다. 소원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 믿음을 안주시는 것입니다. 소원이 꿈을 만들고 꿈이 삶의 목표를 만들고 목표가 믿음을 생산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믿음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모든 것을 믿음으로 역사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께서 마음에 소원을 확실히 기록해서 꿈을 꾸면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믿습니다. 주여 믿습니다. 믿음과 소망 이것은 언제나 같이 가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으면 믿음이 있고 믿음이 있으면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 옥토가 되기 위해서는 절대로 부정적인 마음을 갖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승리적인 말을 하십시오. 기왕 말할 바에는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마십시오. 부정적인 말이 여러분에게 도움을 안줍니다. 아무 도움을 안줍니다. 부정적인 말이 올바른 말일지라도 여러분에게 도움을 안줍니다. 남이 못되기를 말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 그 생각이 점령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내 마음에 파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기왕 말할 바에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 그놈의 자식 변화되어서 새사람이 되기를 바라네. 그 놈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러면 욕하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마음에 결심을 해야 돼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말을 하라. 아침에 일어나거든 여러분 꼭 제가 부탁합니다. 뭘 하느냐. 오늘도 좋은 날입니다. 나는 오늘 행복합니다. 나는 기쁩니다. 나는 즐겁습니다. 오늘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네 입의 말로 내가 묶였으며 내 입의 말로 내가 사로잡힌 바 되었느니라.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리라. 말로써 묶고 풀며 말로써 여러분 삶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냥 우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가 칠십 평생을 살면서 돌아보니까 과거에 저에게 일어난 모든 불행이 내가 말을 잘못해서 만들어 놓은 불행이었습니다. 내가 그때 그런 말을 안했었으면 참으로 좋았을 것인데 부정적인 말을 했기 때문에 다 내가 덮어썼다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나이가 늙어서.. 늙었다는 말하지 말아야지.. 취소! 이제 오래산 경험을 통해서 보니까 읏는게 우는것보다 낫다고 부정적인 말보다도 긍정적인 말이 좋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0절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로 8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엄청난 말입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어떻게 구하라구요? 원하는대로 구하라. 첫째 소원이 오고 꿈을 꾸고 믿게 되면 그 믿음으로 구하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라는 것입니다. 그냥 구하라고 말안하셨습니다. 너희 원하는대로 원하는대로... 따라 말씀하세요. 나의 원하는대로 소원을 가지고 구하면 믿음이 생긴다. 믿음으로 구하면 꼭 이루어진다. <결론>기독교 신앙이란 종교 의식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저주받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엄청난 은혜를 우리 위해서 갈보리산에서 허락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름 앞에 계좌에 주님은 일생의 죄를 용서하고 의롭다함을 줄 선물을 넣어 놓으셨습니다. 크리스마스 선물입니다. 여러분 앞으로 모든 불의를 용서하고 거룩하고 성령충만의 은혜를 그 계좌에 넣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 이름 앞으로 치료와 건강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앞으로 아브라함의 축복, 거대한 축복을 약속해서 넣어 놓으셨습니다. 물질적인 부족함이 없이 풍부하고 축복받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이 다 예비해서 넣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 앞으로 천국 부활 영생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갈보리 십자가 밑에 나가서 내 앞에 주님께서 허락하신 은혜를 부족한 것이 없어요.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부족함이 없어요. 그런데 왜 부족함이 이렇게 많습니까? 예수님이 말씀 이르기를 세례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 침노하는 자가 점령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진리를 깨달아 알고 그대로 시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옥토가 되기 위해서 여러분 마음에 생각이 주님의 생각으로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말씀을 따라 마음 바탕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이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여러분이 마음 속에 소원을 통해서 꿈을 분명하게 갖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희미하지 말고 분명한 꿈 말입니다. 내가 뜨거운 소원으로 바라는 꿈을 마음 속에 가지고 목표있는 삶을 살면은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렷한 말을 하십시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또렷한 말을 하십시오. 부정적인 말을 하면 여러분 손해를 봅니다. 안됩니다. 패배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할 수 있다는 분명한 말을 하십시오. 그러면 그 말이 여러분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내 말로 내가 묶였으며 내 말로 내가 사로잡힌 바 되었느니라. 죽고 사는 권세가 입에 있으니 말의 혀를 사용하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그래서 저주 받은 세상에서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마음에 받아 들여 새사람으로 변화를 받고 마음에 기쁨, 소망, 사랑, 평화, 희락 등 변화가 다가오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변화를 받습니다. 똑같은 사람으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성령 안에서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달은 금번달보다 달라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변화 받습니다. 변화될 것을 기대 하십시오. 마음문을 활짝 열고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성령으로 오셔서 내 마음에 변화를 가져와 주시옵소서. 맹물같은 인생이 포도주 같이 변화되게 도와주시옵시고 나아만 같이 문둥병 환자인 내가 깨끗하게 낫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적을 일으켜 주시옵소서. 주님은 기적을 일으키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원자과학을 발전시킨 아인슈타인도 말하기를 나는 기적이 없는 세계에 사는 것보다도 기적이 있는 세계에 살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 세상에 반드시 그리스도의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기적을 가지고 우리 영혼을 돌보아주고 범사를 돌보아주고 강건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십자가는 여러분을 위해서 주님이 예비한 하나님의 축복의 밥상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오늘 이 시간에 변화받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제목 : 예수가 누구인지 아는 자 본문 : 눅-10-21-24 10월은 첫 주일과 마지막 주일이 온 세계 개신교회들이 함께 기념하는 주일이 됩니다. 첫 주일은 만국성찬주일로 세계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함께 성찬예식을 거행하는 주일이고 마지막 주일은 종교개혁주일로 지킵니다. 성찬예식의 의미는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미가 됩니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성찬예식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며 그것이 나와 무슨 관계인가? 오늘 우리가 먹는 빵과 포도주는 무슨 뜻인가?’ 기독교를 ‘피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려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 말이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성경 자체는 우리 인간들의 가장 큰 문제를 죄의 문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죄는 이 세상에서도 값을 치르도록 되어있는 것이 문화입니다. 작은 죄를 지은 사람은 작게 값을 치르고 큰 죄를 지은 사람은 큰 값을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때는 벌금 몇 푼만 내면 되는 죄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어야 되는 죄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성경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슨 죄가 그렇게 많은가? 두 가지 죄입니다. 하나는 원죄라는 것입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모든 후손은 자연히 죄인으로 탄생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자범죄라는 죄입니다. 내가 짓는 죄의 종류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 자체를 한번 연구해 보십시오. 인간은 왜 그렇게 죄성이 많은 존재일까요? 죄를 지으라고 누가 가르쳐 주었습니까? 부모님이 가르쳐준 것입니까? 아니면 선생님이 가르쳐준 것입니까? 우리는 죄 지으라고 교육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모두 다 죄를 짓게 됩니다. 도둑질 하라고 어느 선생님이 가르쳐 주었습니까? 그 무서운 강도질 하라고 누가 교육시켰습니까? 아무도 가르친 사람이 없습니다. 살인하는 방법을 교육한 사람 아무도 없고, 거짓말 하라고 가르쳐준 사람도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모두 다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죄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죄 자체가 인간입니다. 다윗은 “날 때부터 나는 죄인이고 모태에서부터 죄인입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보아도 죄의 존재입니다. 왜 그럴까?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길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교육한다고 죄의 문제가 해결될까요? 교육 많이 받을수록 죄의 질이 더 나빠집니다. 교육시키지 않는데 죄의 종류는 수없이 많아집니다. 이런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으며 이런 인간들을 어떻게 구원할 수 있습니까? 인간은 죄의 덩어리입니다.

하와이에 부흥회 하러 갔다가 산책하려고 숙소 앞에 있는 공원을 나갔는데 이상한 푯말이 붙어 있습니다. “주의 하십시오. 이 공원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잔인한 동물이 살고 있습니다.” ‘아니? 공원에 무슨 동물이?’ 그 말을 읽으니 궁금하잖아요? “보고 싶은 사람은 이리로 오십시오.” 푯말 옆에 화살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화살표만 따라가면 됩니다. 안 가보는 사람은 그 공원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것을 보면 다 가봅니다. 마지막까지 가보면 조그맣게 담을 쌓아놓고 아래로 내려다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글을 또 써 붙여 놓았는데 “이 동물은 너무나도 잔인하고 무서워서 땅 속에 가두었습니다. 보십시오.” 그래서 내려다보면 거기에 거울이 하나 있습니다. 결국 “제일 잔인한 동물은 너니까 그런 줄 알아라!” 그런 뜻입니다. 이런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이고 인간답게 사는 것이고 만물의 영장이고 하나님의 형상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문제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구약 시대는 죄의 문제 해결을 짐승 제사로 했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피를 뿌려 “인간이 죽었다. 너는 새로 태어났다.” 그래서 죄의 사함을 제사 의식을 통해서 받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까지만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는 짐승을 잡아서 피 흘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제물로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려서 모든 인류의 죄를 한꺼번에 속죄하는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 그렇게 믿는 사람들만 그 혜택을 받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고 오늘 성경 말씀에 예수님이 약간 탄식스러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는 사람은 누군가? 계시를 받은 자만이 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서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아! 그는 훌륭했던 선생님 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4대 성인 중에 하나이다.” 이런 말들을 합니다. 실제로 한번 생각을 해보면 소크라테스보다 더 훌륭했던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알려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석가보다 더 심각한 인간고뇌의 문제를 연구한 사람 얼마든지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공자가 오히려 서열이 낮습니다. 그 시절에 그분들이 가장 훌륭했기 때문에 그분들을 존경하는 가치관이 그냥 문화적으로 내려왔을 뿐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기록이 성경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5절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세상에 왔으나 아는 자가 없도다.” 일반 대중은 고사하고 예수님의 직계 제자 열두 명도 헛갈리는 말을 합니다. “날 누구라 하느냐?” “네, 세례요한이라고 사람들이 말을 합니다.” “그렇게 말하겠지. 사람들이 본 사람 가운데 세례 요한이 가장 의로웠으니까!”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합니다.” “그럴 듯하게 말하는군. 엘리야가 하나님이 쓰시던 예언자 중 가장 능력 있는 사람으로 나타났으니까!” “어떤 이는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그렇지. 예레미야의 설교와 내 설교가 좀 비슷한 면이 많이 있으니까!” “선지자 중 하나라고 합니다.” “그것도 그럴 듯 하다. 내가 하는 일이 선지자의 일이니까! 그러나 다 틀렸다. 나는 나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누구로 아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 신앙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열 두 제자를 비롯한 유대인들은 메시야관을 어떻게 가지고 있었습니까? ‘아! 이 메시야는 인간 고난의 해결자이다.’ 배고프다고 하니까 기도 한마디로 5천명을 먹이셨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인간의 문제를 순간적으로 해결하시는 메시야다!” 메시야를 이렇게 봤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아프다고 찾아오니까 현장에서 다 고쳐주셨습니다. “인간 고난의 질병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시는 분이다.” 폭풍까지 잔잔케 하시며 천재지변까지 해결하시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죽은 사람 다 살려내십니다. 그러니까 안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메시야의 사역은 인간 고난의 해결사다.” 그래서 예수님을 좋아했는데 가장 필요한 예수님 자신의 고난은 해결을 안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상했던 겁니다.

십자가 밑에 와서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왜 당신은 당신의 고난을 해결하지 않고 그렇게 피 흘려 죽고 있느냐?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 하지만 예수님은 안 내려오십니다. 이것이 메시야관의 차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너희들의 고난 문제인 최고의 인간 가치인 영생과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내 고난은 일부러 내가 해결 안하는 것이다. 이게 십자가의 의미이다. 옛날에 짐승이 인간 죄를 위해서 피 흘려 죽지 않았느냐? 그렇게 피 흘려 죽음으로 인간의 죄는 사하여 지지 않았느냐? 나도 내 피를 흘려줌으로 모든 인간의 죄를 속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자들과 유대 나라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긴 것입니다. “그 문제까지도 해결을 하여야 메시야이지!” 이 차이가 나타났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배척을 받은 것이고 제자들은 다 뿔뿔이 도망을 가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영적 의미를 깨닫는 자는 누구냐? 계시를 받은 자이다. 계시를 받은 자만이 이 십자가의 구원의 의미를 알 것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알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를 죄인으로 취급했고 그 중에서 메시야를 알아본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도 가끔 일이 일어납니다. 저 같은 사람은 아주 이 문제가 생활 가운데 큰 몫을 차지합니다. 제가 이렇게 온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설교를 하러 다니잖아요? 오늘도 4부 예배 마치고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 부흥회를 해달라고 해서 부지런히 가서 며칠 설교를 해야 합니다. 사방에서 그러니까 자연히 얼굴이 많이 알려지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아예 20대 초반부터 안경을 똑같은 것으로 평생 썼습니다. 요즘에는 내가 가만히 있었더니 검은 테로 다시 돌아오더라고요. 그러니까 저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이필재 목사님! 항상 머리도 똑같이 깎고….” 어디를 가도 제가 스타일을 바꾸지 않으니 저를 금방 알아보십니다. 그러면 길 가다가 저를 기억하시는 분은 제가 반가울 거 아닙니까? 막 오셔서 저에게 “아, 이필재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그때 저도 똑같은 반응을 해야 좋을 텐데 제가 그분을 알 수가 있어야지요. 가끔 어디서 뵌 분인지 기억이 안 나는 겁니다. 사실 인간의 기억이 한계라는 것이 있으니까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어떨 때는 괜히 저도 아는 척을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어쩌고저쩌고 하다가 방향이 삐뚤게 나갑니다. 그러면 또 탄로가 납니다. “아니, 나는 그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입니다.” 저도 똑같이 알아봤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이런 경험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자르는데 이발소 아저씨가 내 머리를 자르면서 이필재 목사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 겁니다. “이필재 목사를 잘 아십니까?” “아, 그럼요. 이 동네에서 그 사람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모르는 겁니다. 앞에 두고도 모르면서 뭘 잘 안다는 겁니까? 어떤 사람은 저를 보고서 “어머나! 이 아저씨는 이필재 목사님 많이 닮았네?” 이러십니다. 다 틀린 겁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예레미야 닮았다.” “내가 왜 예레미야이냐?” “와! 세례요한 닮았네?” “틀렸다.” “그러면 엘리야다.” “내가 왜 엘리야이냐? 나는 나다.”

사람이 가장 기쁜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이 전달되었을 때입니다. ‘그렇지. 내가 그래.’ 제일 답답한 것은 마음이 전달 안 될 때입니다. ‘왜 내 마음을 모르냐?’ 이렇게 되잖아요? 여러분도 고등학교, 대학 시절, 한때는 누구나 다 시인이 됩니다. 그때는 감수성 때문에 예민해지고 센티해집니다. 그래서 저도 대학 다닐 때 얼마나 시를 좋아했는지 날마다 세계적인 시만 들여다보고 시도 써보고 세계적인 시인이 된 것처럼 명상에 잠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절친한 제 친구가 “내가 너와 영원한 친구가 되고 싶다.” 그러면서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은 자신의 비밀스런 속사정을 막 털어놨습니다. 그때 저는 결정했습니다. 나를 이렇게까지 신뢰하는 이 친구가 나의 인생의 영원한 대화의 상대라 믿어서 둘이 얼마나 친해졌는지 사람들이 우리 둘을 보며 저 사람들 동성 연애하는가 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피차 떨어지고 헤어지는 것이 싫어서 어떤 경우에 있든지 이 우정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어느 날 시를 써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잘 있느냐는 인사말이나 다른 내용 없이 백지에 시만 써서 우표를 붙여 보냈습니다. 그것을 제가 지금도 기억합니다. “너는 내 앞에 노출되었어. 이제 이 지구상에서 너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야. 그러므로 내가 너를 가장 사랑하게 되었어. 내 영혼 가장 깊은 곳에 들어있는 비밀이 내 영혼으로 옮겨진 거야. 너는 이제 내 앞에 꼼짝 못해. 도망갈 생각 하지 마. 너를 가장 선하게 아는 사람도 나요 가장 잘 아는 사람도 나야.” 이렇게 시를 써서 보냈습니다. 답장이 왔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나와 똑같이 시만 써서 보냈습니다. “아! 들켰구나. 그것만은 감추고 싶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만 드리려고 숨겨온 나의 모습인데 어쩌다 네 앞에 다 내어놓았나? 나는 이제 추해졌어. 네 앞에서 벌거벗겨 졌으니까. 나를 벗긴 너! 너도 내 앞에서 벗어야 돼!” 멋있죠? 그 친구가 죽은지가 17년입니다. 너무 아쉽습니다. 지금도 그 친구가 살아있으면 서로 그런 일을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좋다는 우리가 뭡니까? 다 압니다. 모르는 게 없습니다. 예수님한테 거짓말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예수님! 그 분 앞에서 우리는 벌거벗었습니다. “너는 도망 못가! 내가 너를 너보다도 더 잘 알아. 너는 내 앞에서 벌거벗겼어. 어디로 갈 거야?”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를 내 앞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이제 너는 내 꺼야.” 이런 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너는 나를 얼마큼 알고 있니? 네가 한번 말해봐. 내가 누구야?” “엘리야입니다.” “그렇구나.” “선지자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구나.” “베드로야. 네가 말해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 계시입니다. “이 사람은 내게 오는 자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할 거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나는 너희를 쉬게 할 수가 있어.”

성경에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기대했던 사람들은 다 몰랐습니다.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지식계급!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게 기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를 죄인으로 몰았습니다. 그런데 기대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말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27장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지휘관으로 있던 백부장이 예수님을 향하여 뭐라고 합니까?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빌라도는 “이 사람은 죄가 하나도 없어.”라고 말했고, 십자가 옆의 강도는 “당신의 나라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 사마리아 여인은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어. 와 봐라.” 외쳤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예수님이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바로 알았습니다. 하다못해 귀신들린 사람은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아노니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고 고백하는 겁니다. 오늘 기대했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약간 섭섭한 반응으로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가 무엇입니까? 나사렛 예수를 인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신 메시야로 고백하는 종교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입으로 이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한다면 그 자체가 고린도전서 12장 3절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영적 계시로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격의 사람들이 오늘 “나를 기념하라.” 주님의 식탁에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이 떡과 잔을 통한 영적 은혜가 모두에게 성령님의 임재로 나타나서 하나님 자녀의 행복과 기쁨이 영원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계시를 받아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합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이 식탁의 영적 의미를 깨닫고 매우 행복하고 거룩하게 이 떡과 잔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 제목 : 누가 얻는가? (비유 8) 본문 : 눅-11-0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5)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6)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7)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8)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9)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0)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1)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2)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13)<누가복음 11장 5~13절>할렐루야! 평안하셨습니까?지난 한 주간, 항상/범사에 감사하며 사셨습니까? 정말입니까?지난주일 찬양 잔치를 보면서 언제 그렇게 많은 준비를 하셨나 … 하는 생각과 함께동참하지 않았던 분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습니다.애쓰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금년에 참여하지 못했던 분들도 내년에는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지난주일 저녁 예배 설교 중에 들은 말씀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에만 기뻐하지 말고 항상 기뻐하십시오.- 교회에서만/힘든 일 있을 때에만 기도하지 말고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감사 주일에만 감사하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십시오.여러분 범사에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배추 값이 많이 올랐다고 해서 해마다 김치 모아서 전달하던 것을 금년에는 안하려고 했더니어떤 장로님께서 배추 값이 많이 내렸다고 하셔서이 주간에 김장하시는 분들 계시면 한 포기, 두 포기씩 더하십시오.다음 주일에 김치통을 나눠드리겠습니다.그동안 김치를 받으셨던 분들은 기둥교회에서 김치를 보내주겠지 하고 기다리신다고 합니다.그분들에게 실망이 되지 않도록 우리가 도울 수 있을 때 도와야 합니다.도울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도우며 사시기를 바랍니다.사람들이 경품을 좋아하나봅니다.그동안 찬양잔치를 오랫동안 봐오면서도 한번도 경품에 당첨된 적이 없었습니다.금년에도 청년들이 번호를 주기에 버리지 않고 꼭 가지고 있었는데 역시 경품과는 인연이 없었습니다.지난 주일에 제일 큰 경품, TV를 받은 학생이 그 TV를 도로 교회에 기증했습니다. 꼭 필요한 곳에서 사용되어졌으면 좋겠다고 합니다.얼마나 감사한지요. 그 마음이 참 감사합니다.요즘 이단들이 기승을 부립니다.심지어 제게 전도하러 왔었다고 합니다.제가 없는 동안에 저한테 전도하러 왔었답니다.여러분, 이단들이 기승을 부려도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신앙생활 잘하면 됩니다.그러나 여러분이 잘 모를까봐 이단에 대한 안내장을 드렸습니다.우리가 주일마다 성경을 들고 고백하는 대로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하는 대로 믿으면 됩니다.다른 것에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그 신앙이 분명한 사람은 어떤 이단도 이길 수 있습니다.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아멘.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기도할 시간?요즘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여러분도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운동 많이 하실 것입니다.그러나 정작 영적건강/영혼의 건강을 돌보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 대부분은 운동할 시간은 있어도 예배드릴 시간이 없고,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등산 가고, TV 보고/컴퓨터 하고/사람 만나고/몸 단장 할 시간은 있어도 예배드릴 시간이 없고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예배하는 삶, 기도하는 삶은 자동차에 기름을 넣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급해도 자동차에 기름이 있어야 달릴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기름 떨어진 차는 시간이 없기 때문에 /바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넣어야 차가 달릴 수 있습니다.신앙생활 하면서 기도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그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 없다고 하는 교만한 사람입니다.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교만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겸손하여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생각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하나님께서는 구하면 주시겠다는 약속을 성경에 수없이 반복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도 똑같은 말씀이 있습니다.시편 2편에 보면,“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시 2:8)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33장에는,“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했고마태복음 21장 22절에,“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 ”(마 21:22) 했고마가복음 11장 24절에,“ …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했습니다.이렇게 수없이 기도하라고 했고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얼마나 기도하셨습니까?거절 or 승낙예수님께 한 가지 습관이 있었습니다.누가복음 22장에 보면 그것은 기도하는 습관이었습니다.(눅 22:39)성경은 곳곳에 예수님이 기도하셨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예수님은 새벽에, 날이 밝기 전에 기도하셨고(막 1:35),산에 가셔서 철야[새울 철(徹)/밤 야(夜)] 기도를 하셨습니다.(눅 6:12) ‘철야’기도는 밤을 새워서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예전에는 철야기도를 많이 했습니다.그런데 요즘에는‘심야(深夜)’기도회라고 해서 깊은 밤에 기도하는 모임을 갖습니다.그런가 하면 예수님은 병 고침을 받으러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왔을 때에는한적한 곳으로 물러나셔서 혼자 기도하셨고 (눅 5:16),때로 몇몇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기도 하셨습니다. (눅 9:28)그리고 예수님께서 간절히(간이 저리도록) 기도하실 때에는땀이 핏방울 같이 되어 떨어질 정도로 기도하셨습니다. (눅 22:44)오늘 본문 말씀이 기록된 누가복음 11장은예수님께서 습관대로 하시던 기도를 마치고 난 이후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셨을 때(눅11:1)한 제자가‘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요즘 우리가 알고 하는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시면서“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그리고 이어서, 오늘 우리가 읽은 이야기 하나를 덧붙여 들려주셨습니다.한 사람이 늦은 밤중에 친구의 집을 찾았습니다.예상치 못한 시각에 자기 집에 손님이 찾아왔는데그에게는 찾아온 손님을 대접할 것이 없었습니다.하는 수 없이 밤중이지만 친구의 집을 찾아갔습니다.이스라엘 민족이 거주하던 고대 근동 지방,특별히 유대 팔레스타인 지역은 풀과 나무가 없고 물도 없는 광야지대였습니다.그리고 지형이 험한 산간 지대가 넓게 분포되어 있어 여행하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었습니다.날씨도 얼마나 더운지 모릅니다.이스라엘에 가서 관광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가이드들이 광야를 지나가면서 ‘저쪽에 로뎀나무가 있으니 사진 찍고 오라’고 차를 세웁니다.그러면 그 더운데도 가서 사진을 찍고 오십니다.저는 절대로 나가지 않습니다. 숨이 콱콱 막히고 얼굴이 금방 빨개집니다. 그렇게 힘든 곳입니다.그런데 그렇게 힘든 광야를 여행하는 것입니다.그래서 그 어려운 길을 걸어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이라면극진하게 대접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그러므로 비록 예상하지 못했던 손님의 방문을 받았더라도손님을 융숭히 대접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습니다.<홍순원 『비유로 풀어보는 예수의 윤리』(서울; 가이드포스트, 2010), pp.156. 참조.>예수님께서는 늦은 밤중에 친구집을 찾아간 것은 무례한 것이 맞지만 친구의 청함을 받은 사람은 그래도 청을 들어줄 것이라고 했습니다.그래서 본문 8절에 보면"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눅 11:8) 고 하셨습니다.그렇게 간청하면 요구대로 줄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물은 제자들에게밤늦게 친구를 찾아가 필요한 음식을 구했던 사람처럼간절함과 끈질긴 태도가 있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그래서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고 가르치셨고“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눅 11:10) 고 하셨습니다.‘안 되면 말고’하며 한 번 찔러보는 기도가 아니라,한 두 번 해보고 마는 기도가 아니라,“쉬지 말고 기도하는”사람이 (살전 5:17)응답을 받고, 찾고,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끈질긴 사람이 무엇인가를 얻게 되어 있습니다.세상살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해보다 ‘관둬’하는 사람보다 끈질기게 파고드는 사람이 성공하는 법입니다.소설가‘마거릿 미첼’(Margaret Munnerlyn Mitchell)은「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를 완성하는데 7년 걸렸습니다. 이 소설른 영화로도 제작되었습니다.그러나 그렇게 오랜 시간 공들여 쓴 그 작품이지만여러 출판사에서 출판을 거절당했습니다.이름 없는 미첼의 소설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어느 날, 미첼은 맥밀런 출판사의 사장 레이슨이 출장을 간다는 소식을 듣고 기차역으로 찾아가자신이 쓴 원고 뭉치를 건네며 간청했습니다.“제발 이 원고를 읽어 주세요!” 그러나 레이슨 사장은 미첼의 원고를 읽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그런데 레이슨 사장이 여행을 하는 중에 전보를 받았습니다.전보의 발신자는 미첼이었고 전보 내용은 “제발 제 원고를 읽어 주세요!” 였습니다. 그 다음 날 동일한 전보가 왔고, 다음 날에도 똑같은 전보가 계속 왔습니다.레이슨 사장은 미첼의 집념에 감동했고 원고를 읽어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열차가 목적지에 도착한 줄도 모를 정도로 미첼이 쓴 소설에 빠져 들었습니다. 기도도 이렇게 해야 합니다. 기도는 간청(간절히 청함) 입니다.그러므로 고집스럽게 부르짖어야 합니다.어린 아기가 걸음마를 시작할 때 겨우 한 걸음을 내딛고 기껏해야 3, 4걸음을 내딛습니다.하지만 몇 발자국 못 가서 넘어집니다.그런데 아기가‘이만큼 해봤으니 됐어. 일이 잘 안풀리네. 계속 넘어지네.안되겠다. 그냥 얌전히 기어나 다니자’라고 합니까?계속해서 일어서고, 주저 앉아도 또 일어나고 계속해서 걷고, 계속해서 넘어집니다.포기하지 않는 아이는 결국 걷게 되고 뛰게 되는 것입니다.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걷게 되었습니다.그런데 그런 승리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왜 포기합니까?한두 번 기도해 보고 만족하고 포기해 버립니까?그저 한 번 기도 해 본 것으로 만족한다면 …몇 번 해 본 것으로 그친다면 …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간청 받은 친구우리가 생각해 볼 오늘 본문 비유에 등장하는 또 한 명의 사람은 잠자리에 들려다가 친구의 방문을 받은 사람입니다.그런데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친구의“간청함을 인하여 … 요구대로 주리라”고 하셨습니다.우리 성경에는‘간청함을 인하여’로 번역되어있지만영어 성경에서는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친구가 집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동네 모든 사람을 깨웠기 때문에 …”요구대로 주었다는 것입니다.영문성경(The Message)에 보면 “if you stand your ground, knocking and waking all the neighbors,”라고 되어 있습니다.사실 성경의 ‘간청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이데이안'은‘부끄러움 받지 않는다’는 뜻에 가깝습니다.문을 두드리고 깨우니까 안 줄 수가 있습니까?친구만 깨웠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이웃을 다 깨웠습니다.친구의 방문을 받은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창피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던 것입니다.그렇지 않으면 이웃들 사이에 매정한 사람으로 여겨지거나체면을 잃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습니다.<김득중, 『복음서의 비유들』(서울; 컨콜디아사, 2006), p.289. 참조.>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기도하십니까?어떤 자세로 기도하십니까?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렘 32:17)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신 7:9)우리의 마음과 모든 것을 아시고 (요일 3:20),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 58:9)모든 것을 아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을 믿고 구하시기 바랍니다.단, 조건이 있습니다.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문을 두드리고 깨울 만큼 그 친구와 관계가 유지되어 있어야 합니다.아무데나 가서 두드린다고 해줍니까?문을 두드리고 그 밤중에 먹을 것을 달라고 할 만큼그 사람과의 관계가 원활하게 맺어져 있어야 합니다.여러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하나님과의 관계가 늘 유지되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드리고하나님의 날을 하나님의 날로 구별하여 지키고하나님 마음에 들게 살기 위하여 애쓰며 살 때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어느 날 갑자기 내 뜻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그런데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쉽게 생각합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는 대로 정확하게/반드시 그대로 행하시지는 않습니다.기도는 하나님을 내 뜻에 굴복시키는 무기가 아닙니다.기도는 내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사도 바울은 영적 능력이 충만한 사람이었지만육체적으로는 약점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그래서 고린도후서 10장 10절에 보면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평가하기를 “몸이 약하고 말이 시원하지 않다”고 평가했고(고후 10:10),바울도 자신의 약점을 “육체의 가시”라 고백했습니다.(고후 12:7)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약점을 두고 하나님께 여러 번 기도했습니다.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 더 기도하고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더 큰일로 사도바울 자신을 쓰셨다고 했습니다.여러분에게도 아무리 기도해도 해결되지 않고 응답되지 않는 것 같은 약점이 있고, 허물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까?오히려 그것이 여러분을 더 강하게 만들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지름길을 보여줍니다.저주받아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그렇다면 사도 바울도 저주 받았습니까? 아닙니다.내 뜻을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을 내 뜻에 굴복시키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하심이 무엇인지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뜻에 맞추려고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그래서 자신의 영향력이 커지고 돈이 많아지고많이 배우고 힘이 세지면 쉽게 하는 말이‘성경대로 그렇게 살아야 돼? 성경은 요즘 시대에 맞지 않아’하면서 자기 마음에 안든다고 합니다.돈도 있고, 권세, 힘도 있어서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없는데성경이 오히려 장애가 된다는 뜻이겠지요.혹시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축복을 얻는 성도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예로 들어 기도하는 자가 받을 응답을 강조하셨습니다.비록 악한 사람일지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 것인데 …우리를 지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기도하는 자녀의 요구에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그런데 기도에 대해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별한 시간/특별한 장소에서만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물론 성경에 보면 - 성전에 올라가 기도했습니다.구약성경에도, 신약성경에도, 다니엘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전에 올라가 기도했습니다. 여러분도 기도하기 위해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교회에 와서 기도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시간을 정해 두고 기도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성경에도 시간을 정해 두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생각날 때마다 / 틈날 때마다 늘 ~ 기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하나님 저 여기 있어요. 저 이런 일 하려고 해요. 저 두려운 마음이 있어요. 저 힘들어요. …’이렇게 하나님과의 통화를 끊임없이 계속 해야 합니다.꼭 무릎을 꿇고 앉아서 손을 모아야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저는 순간 순간 생각나는 일이 있을 때/사람들이 있을 때그 때 그때 짧게라도 기도합니다.뉴스를 보다가도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어떤 때는 운전을 하다가도 기도합니다.그러므로 무릎 꿇지 못하고 두 손 모으지 못해서 기도 못한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연결된 줄을 끊지 않는 기도의 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기도에 대한 또 다른 착각은 - 기도하면 특별히 응답을 잘 받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고그분이 기도해야 빨리 응답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물론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했습니다(약5:16, 요 9:31).“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5:16)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그러나 의인을 누가 정하는 것입니까?하나님의 영역이고 우리는 모릅니다.물론 우리는 예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그러나 날마다 하나님 앞에‘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부끄러움이 많습니다.’라고 회개하는 회개자가 되어야 합니다.의인의 기준은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간혹 어떤 사람은‘나는 기도하면 이런 역사가 일어난다. 그러니 나한테 와서 기도 받으라.’고 광고합니다.그리고 그냥 해 주는 것도 아니고 돈을 내야 해줍니다.여러분, 성경에는 그런 법이 없습니다.기도를 돈 받고 해줍니까? 감사를 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그러나 돈을 받고 기도해 주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우리 교회에서는 매주 화요일에 중보기도팀들이 모여 열심히 기도합니다.이름도 모르고 얼굴 본 적도 없는 분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그러면 가끔 어떤 분들이 떡도 해드리고, 음료수도 사다 드립니다.그것은 감사의 표현입니다.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기도해 주었고, 응답 받았는데감사를 표하지 않는 것은 얌체같은 행동입니다.자신을 위해 기도해 준 분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그러나 그런 것을 해 주어야만 기도해 준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목사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하면서 꼭 봉투를 들고 와야만 기도해 준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생각해 보니까요즘은 제가 봉투를 주면서 기도하는 일이 더 많습니다.저는 군대에 갔다가 첫 휴가 나온 청년들에게 용돈을 줍니다.훈련 마치고 첫 휴가 나온 청년과 함께 앉아 식사할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서‘목사가 주는 것인데 이상한 것 먹지는 않겠지?’하며 용돈을 줍니다.그리고 해외에 유학을 떠나는 학생들에게도‘많지는 않지만 내가 널 위해 기도하마. 네가 가서 제일 처음에 가는 책을 내가 사주는 것으로 하자.’하면서 기도해주고 봉투를 줍니다.그것은‘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한다’는 관심의 표현입니다.기도는 돈을 받고 돈을 줘가며 하는 것이 아닙니다.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입을 열어 하는 기도입니다.다른 사람들이 함께 기도해 주고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것, 중요하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제일 좋은 기도는 자신의 입을 열어 기도하는 것입니다.하나님께 직접 아뢰는 것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하나님은 여러분이 직접 하는 기도를 듣기 원하십니다.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마가복음 9장에 (막9:17~29) 귀신들린 아들을 예수님께 데려온 아버지가 나옵니다. 아무 때나 불과 물에 자신의 몸을 던지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막9:2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아버지를 향해“ …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 ”(막9:23) 그러자 그 아버지가 다시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 …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 ”(막9:24) “예수님 도와주세요.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이런 간절함이 있을 때 예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이 고백이 여러분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믿음은 가지고 있으나 믿음이 없는 것 같고, 부족하고,흔들리는 나를 도와 주세요’하는 간절함이 있을 때 예수님은 응답하셨습니다.우리도, 여러분도 다른 길이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붙잡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앞에서는 울어야 합니다.사람 앞에서는 웃어야 합니다.하나님 앞에 울면 …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울면사람 앞에서 울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잘 새겨들으십시오. 유대인의 격언입니다.“하나님 앞에서는 울어라.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는 웃어라”들으시는 하나님께 … 잠자리에서 눈을 떠도, 밥을 먹어도, 걸으면서, 운전하면서, 일하면서 … 언제나 기도의 스위치를 켜 놓으십시오.열심을 다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기도만 하고 그쳐서는 안됩니다.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저는 지난 주간에 목사가 되기 위해 시험을 치르고 합격한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일을 위해 포천에 있었습니다.교육하는 중에 들은 이야기입니다.두 형제가 양도둑질을 하다가 붙들렸다고 합니다.그 옛날에는 도둑질 하다 붙잡히면‘도둑놈’이라고 이마에 새겼습니다.양을 도둑질 하다 붙들렸으니 ST (sheep thief)라고 새겼습니다.동네 사람들이 형제가 양도둑놈이라는 것을 다 알았기 때문에형은 부끄러워 고향을 떠나 먼 곳에 가서 살다가 객사했습니다.그런데 동생은 그 마을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비난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성실히 생활했습니다.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 그 마을을 찾아온 어떤 사람이노인의 이마에 새겨진 ST라는 글자를 보고 묻습니다.‘저 노인의 이마에 새겨진 ST라는 글자가 무슨 뜻입니까?’질문을 받은 사람이‘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ST 성자(Saint)라는 뜻이 아닐까요?’라고 했답니다. 모든 사람에게 본이 되게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온노인을 보고 성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양도둑(Sheep thief) 이었던 그가 사람들에게 성자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삶을 살기도 하지만세상에서 사람들에게도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응답하십니다. 여러분, 기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제가 기도하자고 합니까?늘 듣는 소리, 다 아는 이야기 또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하고 또 했던 말처럼저도 여러분의 영혼의 “안전을 위해” ,세상 삶의 “안전을 위해”또 말씀을 전합니다.(빌3:1)범사에 때마다 일마다 기도하며 살고성실하게 열심히 사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제목 : 누구를 초대하는가? 본문 : 눅-14-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2)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3)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14)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5)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6)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7)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8)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0)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1)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2)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3)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24)<누가복음 14장 12~24절><목회기도>전능하신 하나님!설레임으로 / 기대속에 주일을 맞게 하심 감사드립니다.밤이 길고 날씨가 추운 이 계절에도 가슴 따뜻한 소망을 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그러나 우리들 …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살았던 순간이 많았음을 회개합니다.용서하시고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옵소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원합니다.세상의 어려움과 아픔 가운데 눈물짓는 이들,실망과 좌절 속에서 일어서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저들이 다시 서는 역사를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이 땅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구원받은 기쁨을 전하고 나누기 원합니다.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아끼는 삶이 되게 하여 주셔서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건강할 때,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할 수 있을 때 … 하나님 마음에 합한,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머뭇머뭇하며 허송세월하지 않는 지혜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흩어진 기둥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군대로, 객지로, 외국으로 나가 있는 기둥교회 성도들이 있습니다.몸이 아파 고통 중에 있는 성도들도 있습니다.이런 저런 사정으로 안타까와하며 예배의 자리에 있지 못한 성도들도 있습니다.하나님 저들과 함께 하여 주옵소서.부족한 종, 말씀 들고 섰습니다. 목소리에 기름 부어 주시고 성령의 역사가 있는 시간 되게 하여 주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할렐루야!여러분은 지난 한 주일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기도할 때 육체적으로 건강하기를 기도해야 하지만영적으로도 흔들림이 없는 건강한 신앙생활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누가 뭐라고 하면 금방 토라져서 삐지는 분들이 있습니다.지난 주간에도 ‘임원 안시켜준다고 삐진 분들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 시기 바랍니다. 옆의 분과 인사합니다.“육체적으로 건강하시고 신앙적으로도 건강하게 사시기 바랍니다.”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아멘.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큰 잔치? 실패한 잔치!본문 말씀은 성대한 식사 자리, 큰 잔치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누가복음 14장 1절에 보면“…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눅 14:1)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이 새롭게 번역되어 있지만아직도 번역에 문제가 많습니다.예수님이 떡을 잡수시러 가셨겠습니까.<쉬운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음식을 드시러”가셨다고 번역되어 있습니다.제 생각에는 그 표현이 맞는 것 같습니다.그런데 식사 초대를 받은 사람이 예수님만은 아니었습니다.본문 말씀 이전 누가복음 14장 7절~11절 말씀에 따르면예수님과 함께 몇몇 사람들도 초대를 받았는데그들은 식사하는 자리에서 서로 상석(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했습니다.어느 자리나 가보면 상석이 있습니다.방에서도 불을 때는 곳이면 아랫목이 상석입니다.식당에 가면 초대한 사람이 입구 쪽에 앉고손님은 입구가 보이는 쪽에 모시는 것이 예의입니다.소파가 놓여있어도 주인의 자리와 손님의 자리가 구별되어 있습니다.제 사무실 응접실에 소파가 놓여 있는데 거기엔 제 자리가 있습니다.그런데 오시는 손님 중에 제 자리에 앉는 분들이 있습니다.일어나라고 할 수도 없고 … 자동차를 타도 아무데나 앉는 것이 아닙니다.상황과 차종에 따라 앉아야 할 자리가 있고 앉지 말아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그런데 예수님이 가신 그 집에 모인 사람들은 상석에 앉고 싶어 했습니다.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고 말씀하셨습니다.그리고 예수님을 초대한 사람에게는, 식사를 베풀려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초대하기보다 가난하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청하라고도 하셨습니다.(눅 14:12~13)이렇게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예수님은 ‘잔치를 베푼 한 주인의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본문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거부하는 유대 민족의 보편적인 상황을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했습니다.그런 상황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 본문 말씀입니다.그리고 본문은 큰 잔치를 베푸신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지 않고 하나님을 노엽게 한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잔치로 표현된(비유된) 예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마9:15, 요3:29, 계19:7~9, 사 61:10, 62:5)그런데 본문에 큰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은 잔치에/초대에 거절했습니다.팔래스틴 지역의 풍속에 따르면잔치를 벌일 때는 잔치가 있기 전에 “언제쯤 우리 집에 잔치가 있으니 꼭 오시기 바랍니다.”라고 미리 연락합니다.그러면 연락 받은 사람들은 “축하드립니다. 가겠습니다”라고 하든지“미안합니다. 못갑니다”라고 하여 초대에 응하든지 거절하든지 정한다고 합니다.그리고 모든 잔치 준비가 끝나면 “이제 잔치가 다 준비되었으니 오십시오.”라고 하며처음에 묵시적으로 초대에 응한 사람에게 다시 종을 보내어 손님을 모시고 옵니다(에 5:8, 사:14/잠9:1~5).그런데 오늘 본문(눅14:17)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모든 것을 준비하고 연락했는데 모두 거절했습니다.큰 잔치를 베푼 비유 속의 주인공은잔치를 베풀만한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그리고 그가 초대했던 사람들이‘밭을 사고(눅 14:18)’, ‘소도 여러 마리를 샀던(눅 14:19)’사람들이었음을 보면잔치를 베풀었던 사람은땅을 소유하고 농사도 꽤 규모 있게 지었던 이들과 어울리던유복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구제홍 외, 『예수의 비유』(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9), p.176. 참조.>그런데 그들이 잔치 초대를 거절했습니다.아무래도 …18절에 나오는 사람은“밭을 샀기 때문에”(I have just bought a field, ~)땅을 살펴보기 위해 가봐야 한다는 핑계를 댔습니다.그 사람은 “아무래도”나는 그것을(땅을) 보러 가 보아야만 한다고 했습니다.그 사람의 표현으로는 나는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나는 아무래도 “꼭” 땅에 가보아야겠습니다.“ … I must go and see it.”- NIV이미 자기 소유로 만들어 놓은 땅인데 잔치에 초대된 지금 가보지 않으면 그 땅이 어디로 날아갑니까?그 땅이 줄어드는 것도 아닌데 …이 초청을 거절한 사람은 잔치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그에겐 새로 산 땅, 자기의 재산만 있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사는 우리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거룩한 주일에 /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에 /하나님의 잔치 자리에 … 오지 않은 사람들 중에땅 같은 것 때문에/지킬 것 때문에/먹고 사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잔치 자리에 참석할 수 없다고 거절하는 사람이 많습니다.샀으매 …19절에 보면 소 다섯 겨리를 샀기 때문에 못간다고 거절한 사람이 있습니다.(I have just bought five yoke of oxen, ~)“겨리”라는 말은 짐승 두 마리를 짝하여 헤아리는 단위로 사용되었고, 다섯 겨리는 10마리를 뜻합니다.그 소들을 살펴보기 위해 가봐야 한다는 핑계를 대었습니다. 성경에 “가니”(I'm on my way.)라는 표현은“내 계획과 목적 때문에(할 일이 있기 때문에)가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2000여 년 전 농경시대에 땅이 삶의 터전이라면 소는 그 삶의 터전을 일구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고 도구였습니다.연장, 도구sms 중요한 것입니다.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은 이미 가기로 했던 초대를 삶의 수단을 돌보아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했습니다.당장 중요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소들을 시험해 보려고(to try them out) … 초대를 거절했습니다.소들이 일을 잘 하는지, 돌보아야겠으니 못가겠다는 것입니다.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소 같은 것 때문에 … 도구 때문에 …일이 있어서(I'm on my way)라는 이유로 하나님의 잔치에, 예배의 자리에 올 수 없다고 거절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장가들었으니 …20절에 나오는 또 다른 사람은“나는 장가들었으니 …” (I just got married, ~)이제 막 결혼하여 즐거운(행복한) 시간을 갖고 있는데 남의 잔치에 갈 여유가 어디 있느냐는 뜻입니다.본문에 보면, 그 사람은“가지 못하겠노라”(나는 못가)라고 했습니다.(I just got married, so I can't come.)물론, 결혼은 중요한 것입니다.그래서 신명기 24장 5절에 “결혼한 사람은 군대도 보내지 말고 일 년 동안은 아내 곁에 있으며 즐겁게 지내야 한다”고 했습니다.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가까운 사람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내 사랑하는 사람이, 내 사랑하는 자식이 영적생활에 방해가 된다면 … 잘못하면 그가 우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우상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더 귀히 여긴다는 것입니다.하나님은 그런 것을 싫어하십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싫어하는 사람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처음 인간 아담의 핑계가 무엇입니까?“하나님, 제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아십니까?제가 왜 이렇게 하나님을 피해 숨었는지 아십니까?하나님이 제게 주신 여인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제게 먹게 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축복으로 주신 아내와 남편을 … 부모와 자식을 … 하나님을 외면하는 방패로 사용하고 있습니다.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없으신가요?여러분, 먹는 것/편한 것/즐거운 것 때문에 하나님을 외면해 본 적이 있으신지요?먹고 살기 위해서/내 계획이 있어서/식구 때문에 … 하나님을 외면했던 적은 없으신지요?소중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하나님의 초대를 거절한 적은 없는지요?사람들이 다 잔치에 오지 못한다는 소식을 종으로부터 듣게 되었을 때본문 21절 말씀에 보니 ‘집 주인이 노했다’고 했습니다.성대할 줄로만 기대했던 잔치는 원래 초청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사람들,더 나아가 초대를 받아들일 의사가 없는 사람들까지도‘강권하여(눅 14:23)’데려와야 하는 상황으로 변해버렸습니다.억지로 권해서라도 잔치 자리를 채워야만 했습니다.잔치를 준비했던 주인은 허탈감에 빠졌을 것입니다.모든 사람들이 초대를 거절했다는 사실 때문에동료들, 이웃들로부터 배척당하는 듯한 느낌도 들었을 것입니다.잔치를 준비했던 주인은 이런 저런 일들 때문에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누구를 초대하는가?예수님께서는 실패한 잔치를 비유로 들어 말씀하시기 전에식사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한 가지를 가르치셨습니다.손님을 식사에 초대하려고 하는 경우어떤 사람들을 초대해야 하는지,초청 대상자에 대한 지침이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식사를 대접하려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눅 14:12)하셨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눅 14:13)고 하셨습니다.가깝고 친한 사람들, 부하고 넉넉한 사람들을 먼저 초대했다가그 후에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고 그들에게 먼저 베풀라는 것이었습니다.부유한 사람들, 가까운 사람들, 넉넉한 사람들을 대접하면그들은 다시 초대해서 대접 받은 대로 되갚아주게 됩니다. 그것은 대접이 아닙니다. 대접은 되돌려 받지 않는 것, 되돌려 받을 생각도 없이 하는 것입니다.‘오늘은 내가 낼게, 다음엔 네가 사’라고 하는 것은 대접이 아닙니다.되갚아줄 형편이 안 되는,어렵고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대접하면대접하는 자에게 복이 됩니다.그런데 오늘 본문의 잔치 비유에서 집 주인은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정 반대로 행동했습니다.이미 알고 지내던 사람들,삶의 수준도 비슷하게 높은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했습니다.그들 모두로부터 참여를 거절당하자그 제서야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잔치에 불렀습니다.‘누구를 초대해서 베풀어야 하는가’의 문제에 있어서예수님의 말씀과 반대 되었던 비유 속의 잔치는애초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잔치였습니다.잔치를 벌일 것이면 초청의 대상을 바르게 정해야 합니다.여러분은 어떻게 사십니까?어떤 마음으로, 누구에게 베풀고 누구에게 나누십니까?되돌려 받기 위해서 손을 펼치고 투자하십니까?풍요의 기본은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저수지에는 많은 양의 물이 저장되어 있습니다.그런데 사람들이 그 물을 자기만을 위해 쓰려고 물통으로 담아간다면 저수지의 의미가 없습니다.저수지는 파이프를 통해 물이 흐르게 해야 합니다.저수지에 있는 물이 파이프를 통해, 통로를 통해사람들에게 전달될 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여러분은 바가지 같은 역할을 하고 싶으십니까?아니면 통로가 되는 파이프 역할을 하고 싶으십니까?여러분 모두가 여러분이 필요한 것만 쓰는 바가지가 아니라파이프 같은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 바랍니다.나를 통해 지나가는 것들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이 되고, 삶의 용기를 주고, 일어날 수 있는 힘이 되어 준다면 그것이 축복의 통로인 것입니다.나를 통해 지나가게 두지 않고 자신을 위해 그대로 잡아 두려고만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수많은 일들을 합니다.얼마 전에 김장을 담글 형편이 되지 못하는 분들에게 나눠드리기 위해 각 가정에서 김장을 할 때 한 두 포기씩 더 하시라고 김치통을 나누어드렸습니다.벌써 많은 분들이 가져가셨던 김치 통을정성껏 만든 김장 김치로 채워 교회로 가져다 주셨습니다.모아진 김치통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눠드렸습니다.그러면 ‘고맙습니다’하며 받는 사람보다‘왜 이제야 가져왔냐’하는 태도를 보이는 분들도 있습니다.그렇다고 하지 말아야 할까요?누구에게 전달되었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쓰이는지도 모르는데 이제 그만해야 할까요?성탄절 전날에 새벽송을 돌 때면담임 목사에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시고선물 값에 해당하는 만큼을 봉투를 준비하시라고 합니다.아마 전 세계 교회 중에 담임목사 성탄 선물을 걷는 교회는 기둥교회 밖에 없을 것입니다.금년에도 걷을 것입니다.넥타이 주고 싶으면 넥타이 값만큼, 양말 주고 싶으면 양말 값만큼 … 해마다 어떤 분들은 고급양복을 입을 만큼의 금액을 넣는 분도 있습니다.그리고 어떤 분들은 금액에 상관없이 정성스레 카드를 적어 함께 보내시는 분들도 계십니다.그런가하면 급하게 넣었는지 구깃구깃해진 돈을 성의 없이 넣은 분들도 있습니다.모두 걷어서 성탄절 오후에 교역자들이 정리하여 어려운 곳에 보냅니다. 몇 년 전 인천의 어떤 분에게 전화를 받았습니다.가난하고 어려운 작은 개척교회 목사님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보험료로 해결할 수 없는 엄청난 진료비가 나왔다고 합니다.그런데 하필 성탄절 아침에 제게 그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그래서 새벽송 때 받은 성탄선물비를 정리하여 큰 돈을 보내주었습니다.그리고 그분은 병원에서 퇴원했습니다.그러나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 그래도 고맙다고 전화 한 마디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새벽송 때 성탄선물로 받은 돈을 은행에 넣어놓고어려운 개척교회 열 몇 개 교회에 제 가계수표를 써서 보냈습니다.제가 가계수표를 쓸 때는 제 손으로 직접 쓰고, 받는 분의 이름도 쓰고 도장까지 찍어서 보냅니다.그러면 받는 분은 은행에 가서 신분증을 보여주고 돈을 찾아야 합니다.그러므로 그분이 돈을 찾아갔는지 제가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확인해 보니 모두 돈은 다 찾아갔는데 열 몇 개 교회 중에 딱 한 분만 고맙다는 연락이 왔습니다.그래도 되는 것인지요? 그분들 모두 목사, 전도사들입니다.성탄절 전에 받게 하기 위해 8월에 물품을 모아서 저 멀리 아프리카에 나가있는 선교사와 선교지역 주민들을 위해 컨테이너에 선물을 보냈습니다.거의 20곳에 보냈습니다.지금쯤 모두 받았을 텐데 …그 중에 딱 한분만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하며잘 받았다는 연락이 왔습니다.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그 선교사들이 모두 목사님들입니다.우리교회는 매년 50~70여명의 현역군인이 있습니다.집사님, 권사님, 장로님들의 자녀들이 군대에 가있습니다.해마다 성탄절 즈음에 이것 저것 상자에 담아서 성탄선물을 보냅니다.그러나 고맙다고 연락하는 청년들은 어쩌다가 한 명입니다.그래도 되는 것인가요?사랑하는 여러분!고맙다고, 감사하다고 인사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손길을 접어야 합니까? 그만둘까요?그래도 해야 합니다.그 모든 일들을 우리가 무엇인가를 바라고 하는 것입니까?우리 교회는 TV에, 신문에 이름을 내지 않고 …누가 얼마나 많이 후원을 했는지 밝히지도 않습니다.세상에서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신다고 하셨습니다.힘이 있을 때 약한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머리가 좋거든 그렇지 않은 사람을 도와야 하고,다른 사람보다 특별한 재능을 가졌다면그런 재능이 없어서 힘들고 어려운 이들을 도와야 합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돕고 살라고 각기 다른 재능을 주셨습니다.여러분, 할 수 있으니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미국 독립전쟁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한 무리의 군인들이 부대 내의 시설을 보수하고 있었습니다.여러 병사들이 나무로 된 무거운 대들보를 올리기 위해애를 쓰고 있었고그들을 지휘하던 한 병사는 부하들에게 고함을 치고 있었습니다.그 때 지나가던 한 남자가 지휘자에게 당신은 왜 병사들을 돕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군인은 같은 거드름을 피우며 대답했습니다.“저는 병장이거든요.”지나가던 사람은 “죄송합니다. 제가 몰라보았네요.”라고 대답하고는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병사들과 함께 애써 무거운 들보를 들어 올렸습니다.지나가던 남자가 일을 끝낸 후에 돌아서서 말했습니다. “병장님, 다음에도 사람 손이 모자라면 얼른 본부로 와서 사령관을 부르십시오. 그러면 제가 와서 다시 도와 드리겠습니다.” 지나가던 그 남자는 미국 독립전쟁의 총 사령관이자 초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 장군이었습니다.우리는 다른 사람이 땀 흘리는 것만 쳐다볼 때가 많습니다.할 수 있다면 … 할 수 있을 때 힘이 되어 주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해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그래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고를 헛되지 않게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은 거울을 보는 우리보다 결코 먼저 웃지 않습니다.거울 속의‘나’를 웃게 하는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내’가 웃어야 합니다. 내가 웃어야 다른 사람들이 웃습니다.내가 먼저 다른 사람에게 따뜻함을 보이고내가 먼저 사랑을 베풀면 그 사랑이 하나님께로부터, 사람들에게로부터 되돌아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이 겨울에,여러분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받을까 … 생각하지 말고무엇을 줄까, 무엇을 나눌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사시기 바랍니다.교회를, 세상을, 이웃을 … 특별히 가족을 섬기고,기쁨으로 하나님 주신 것을 나눌 수 있는 삶이 되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나눌 수 있고, 줄 수 있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그 자체가 축복이요, 복 받은 것입니다.여러분의 삶속에서 여러분 스스로가 복 받은 사람, 복받은 사람임을 드러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이 겨울에 따뜻하고 평안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제목 : 회개하는 자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본문 : 눅-15-01-7 본문 / 누가복음 15장 1~7절제목 / 회개하는 자를 기뻐하시는 하나님1.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요한일서 4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까지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는 멸망해야 하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확증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의 죄만 대속해주신 것이 아니고 우리의 모든 저주까지도 속량해주시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을 수 있게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쁩니까. 무엇으로 다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만입이 있어도 전부 감사 찬송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12~13절에 보면 예수님이 세리 마태의 집에서 많은 세리들, 죄인들과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비난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의인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죄가 많이 있는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고 모든 저주를 속량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시민이 되어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시지만, 죄까지 사랑하시지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죄를 버리지 않고, 죄 가운데에서 계속 살게 되면 진노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계속해서 죄 가운데에서 살면 결국은 멸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죄를 많이 범한 사람이라도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인류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후서 3장 8~9절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천 년 전에도 하나님께서 오신다고 하셨는데 지금도 오시지 않으니까 더디 오신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오래전부터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구원받도록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에스겔 18장 21~23절에는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행한 공의로 살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의 하나라도 죄 가운데 있다가 멸망하는 것을 조금도 기뻐하지 않으시며, 모두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좋으신 분입니다.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모든 것이 죄이지만,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는 것입니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서 허랑방탕하며 사는 것이 가장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오기를 날마다 기다리는 탕자의 아버지처럼 죄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마치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고 기뻐하는 목자가 콧노래를 부르고 동네 사람들을 모아 잔치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이렇게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5장 7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인한 기쁨보다 더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처음 나오신 분들이 있겠지만, 그렇게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천군천사들과 함께 춤을 추며 기뻐하십니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와 믿음의 생활을 하는 것은 마치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순간은 하나님과 우리가 손을 맞잡는 순간과 같은 것입니다. 이때 우리를 붙잡으신 하나님의 손은 우리의 손을 영원히 놓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잡았다 놓았다 합니다. 구원받은 것은 취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에게 속지 마십시오. 우리가 한번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생명줄이 있고, 그것은 아무도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게 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되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회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첫째,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자백하며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요한일서 1장 9절에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자백하면 용서해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깨끗하고 거룩하게 만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할 때 거룩해집니다. 둘째,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처럼 회개해야 합니다.누가복음 19장 8~10절에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라고 삭개오가 얼마나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많이 모았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이렇게 갚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감동을 받으셨을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회개는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셋째, 회개는 에스겔 18장 21~22절의 말씀과 같이 해야 합니다.「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행한 공의로 살리라(겔 18:21~22)」 여기에서 보면, 악인이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서 떠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죽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회개는 죄에서 돌이켜 떠나야 하고, 말씀대로 살아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28~29절에는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도둑질하고 더러운 일에서 손을 떼고, 돌이켜 덕을 세우고 은혜를 끼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회개는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넷째, 회개는 원수라도 사랑하고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왜냐하면, 마태복음 18장 35절에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는 사람은 자기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수라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다섯째, 과거에 메이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왜냐하면,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고 기억도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3장 25절에는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과거를 묻지 않고 목을 끌어안고 축복하며 잔치를 했지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에 대해 묻지도 않으시고,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자꾸만 과거의 죄에 대해 죄책감이 들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거에 메이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면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미국 시카고에 유명한 부흥사인 멜 트라더 목사님은 놀라운 과거가 있습니다. 이 분은 알코올 중독자로 세 살짜리 딸을 굶겨 죽게 했고, 그 딸의 장례식에서 죽은 딸의 신발을 벗겨 달아나 그것을 팔아서 술을 마신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악하고 불의하고 파렴치한 과거를 가진 사람이지만, 예수 믿고 회개하고 목사님이 되어서, 20년 후에 그는 시카고에서 수천 명 성도들 앞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님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더라도 과거에 메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정말 회개했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당당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예수님이 만난 사마리아의 수가성의 여인은 과거에도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살고 있는 남편도 자기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이 여인은 부끄러워서 아무도 없는 때에 우물에서 물을 긷는데, 그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알고,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 물동이를 두고 마을로 달려가서 “와 보라. 내가 만난 이분이 메시아가 아니냐!”라며 온 동네에 증거를 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에게 와서 말씀을 듣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더라도 과거에 메이지 마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시기 바랍니다.우리가 철저히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은혜를 주십니다. 용서해 주실 뿐 아니라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래서 철저히 회개한 사람에게는 죄 사함 받은 기쁨,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바르게 믿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 중에는 구원의 기쁨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와서는 말씀을 듣지만, 교회 밖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살고, 말씀대로 살지 않고, 죄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함께하심을 체험하면서 살게 되어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전도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승천 하실 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일 년 동안 단 한 명도 전도하지 않고, 어떤 사람은 평생 한 명도 전도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예수 믿는 기쁨, 은혜 받는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죽어가는 영혼을 전도하면 그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전도하는 사람에게는 신앙이 건강하고, 마음에 기쁨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회개를 해서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살며, 항상 기쁨이 넘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제목 : 누가 바라는가? 본문 : 눅-17-0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5)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6)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7)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8)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9)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10)<누가복음 17장 5~10절>할렐루야! 지난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저는 지난 한 주간 힘들었습니다. 힘든 일이 많았습니다.- 부흥회 해야지- 아시안 게임 신경 써야지- 연평도에 포 떨어져 … 우리교회 해병대 간 청년들 안전한지 확인하느라 신경써야 했습니다.이런 저런 일로 마음 아픈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어떤 분은‘왜 가만히 있느냐, 공격하지’라고 하시는데 …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자기 아들이 군대에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아까운 젊은이들이 죽어간 것, 누구나 다 서글프게 생각하지만큰고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더 많은 생명들이 희생될 것입니다.정부는 그동안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무엇을 한 것인지 …낡은 무기들은 교체하지 않고 도대체 세금 거두어 다 어디에 썼는지 … 답답합니다.여러분도 각자 생각이 다를 것입니다.그러나 평안을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생각이 다르고, 판단이 다를지라도 평안을 위하여 기도하자는 제 말에 반대하실 분은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다시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그리고 여러분은 권세가 있는 말을 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함부로 막말 하지 마세요.기도하는 사람답게 말하고 행동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우리는 바른 길을 가야하고, 바른 길을 가려고 신경써야 합니다.길이 아니면 바른 길로 찾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그런데 대부분의 남자들은 길을 잃어버려도/길에서 헤매도 안물어본다고 합니다.영국의 한 보험회사(Sheilas' Wheels)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영국 남성들은 운전을 하다가 길을 잃어도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를 않는답니다.그래서 1년에 평균 444km를 헛 주행 한다고 합니다.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를 헛고생 하는 셈입니다.여성 운전자의 경우는 3/4이 길을 모를 경우 즉시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만 남자들은 잘 묻지 않는답니다.영국 남자 10명 중의 1명은 목적지를 안 가면 안 갔지끝까지 다른 사람에게 길을 묻지 않는다고 합니다.<조선일보. 2010년 10월 29일. A20면, 참조>우리는 천국 가는 길을 바르게 알았으니길 모르는 사람, 아직도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영생의 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길 가르쳐 주며 사시기 바랍니다.요즘은 네비게이션이 많이 보급되어있어서운전하다 길을 잃을 염려가 많지 않지만 …그래도 길을 잃었을 때 가장 좋은 해결책은길을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길>이라 하셨습니다.“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우리는 진리와 생명의 참 길을 확인했으니 그 길을 잘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부흥회 때 배운 인사 한번 해보겠습니다.<좋아지고 있습니다. 잘되가고 있습니다. 아멘>저는 이번 부흥회 때 배운 이 인사가 마음에 들었습니다.제가 말의 중요성에 대해 늘 말씀드렸는데 ‘좋아집니다. 잘되갑니다. 아멘’하는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아멘.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믿음의 양과 질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들이(5절) / 제자들이(1절) 예수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눅 17:5) 라고 말씀드린 것으로 시작됩니다.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지 말라 가르치셨고 (눅 17:1~2),회개하는 형제는 용서하라고 하시면서 일곱 번 죄를 짓고, 죄를 지을 때 마다 일곱 번 회개할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눅 17:3~4)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쉽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사실 아직도 부족함이 많은 우리에겐 어려운 일입니다.그런 가르침을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던 예수님 제자들도일곱 번 죄를 지은 사람을 그 때마다 회개한다고 해서 용서한다는 것이어려운 일임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행동으로 실천할 것을 생각하자니 마음에 부담도 되었을 것입니다.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눅 17:5)라고 했던 것입니다.믿음이 더해지면 …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지 않고미운 사람, 싫은 사람도 용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던 모양입니다.예수님께 믿음을 더해달라고 요청했던 ‘사도들’이란 말은 좁은 의미로 예수님께 선택받아 복음을 전했던12명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호칭이었습니다.그러나 사도로 번역된 헬라어‘아포스톨로스(απόστολος)’는‘보냄을 받은 자’란 뜻으로 일정한 사명을 위임받아 파견된 자를 의미합니다.『비전 성경 사전』(서울; 두란노, 2006), pp.558~559. 참조.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도’들은예수님 곁에 머물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들을 목격한 이들이었습니다.누가복음 10장에는 예수님께서 칠십 명의 사도를 세우시고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전하도록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그들을 파송했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눅 10:1~16)예수님의 분부대로 세상에 나가 능력을 행했던 그들은귀신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항복하는 현장을 목격했던간증을 가진 제자들이었습니다. (눅 10:17)그들은 모든 일들이‘믿음’안에서 가능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용서’에 대해서 가르치신 예수님께그 가르침대로 살 수 있도록 믿음을 더해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제자들은 믿음이 더해지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일곱 번 용서도 할 수 있고 더 큰 능력도 행할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더하소서”라는 사도들의 요청에 대해오히려 책망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 17:6)“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라는 말은제자들에게는 그러한 믿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조차 없었다는 의미입니다.믿음을‘양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제자들에게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질적’인 성격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즉, 너희들의 믿음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참 믿음이라면 …아주 작은 겨자씨만큼만 있을지라도능히 모든 일을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목회와 신학 편집부, 『누가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서울; 두란노, 2008), pp.340~341. 참조.>믿음을 ‘양적’으로 계산하고‘더 많은 믿음’을 요구했던 제자들은그 믿음으로‘더 많은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자신이 하는 일에만 집중한다면믿음을 주시는 분, 하나님은 사라지게 됩니다.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가지고‘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내가’ 내 능력을 행하기 위해 믿음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우리가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산다고 하면서자기 입장에서, 자기 편하게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말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세 사람이 하나님께 자기 소유를 얼마나 바치는 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저는 먼저 땅에 줄을 긋고 제가 가진 돈을 쏟습니다.그리고 줄 오른편에 떨어진 돈은 하나님께 바치고왼편에 떨어지면 제 주머니에 집어넣습니다.”- 다른 사람이 말했습니다."저는 땅에 작은 원을 그린 후에 모든 돈을 쏟습니다.그리고 원안으로 떨어진 돈만 제가 갖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드립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마지막 한 사람이“저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주께 바칩니다.”하나님을 향하여 저의 돈 전부를 하늘로 드립니다.”이렇게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이 얘기를 들은 다른 두 사람은 마지막 사람의 헌신과 결단에 감탄했습니다.그러자 마지막 사람이 덧붙였습니다.“저는 제 돈 모두를 하늘 높이 던지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공중에 머무는 돈은 하나님 것이고 땅에 떨어지는 것은 제 돈입니다.”예수님을 믿으며 믿음을 지키는 우리는 어떻습니까?우리들의 생활속에, 신앙속에, 말 속에, 행동속에 …이런 신앙자세가 많습니다.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것 같지만 결국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한 것일 때가 많습니다.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처럼’ 보이는 데에 치중하고,하나님께 많이 드리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까?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우리들의 믿음을, 직분을, 섬김을 … 이용하고 활용하는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십시오.목회자들 중에 보통의 방법으로는 목회가 잘 되지 않는 것 같으니까‘특별한 은사’를 소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병을 고치는 치유의 은사, 귀신을 쫓는 축사의 은사 … 여러 가지 은사를 구합니다.그런데 순수한 의미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이런 은사를 받아 목회에 써먹기 위해 / 써먹고 싶어서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서 제자들처럼‘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여러분 마음속에 성령의 은사를 받고 싶은 간절함이 있다면그 간절함의 이유가 무엇입니까?여러분, 성경을 읽으십니까? 왜 읽으십니까?여러분, 성경을 쓰십니까? 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여러분, 성경을 타이핑하십니까? 왜 하십니까?독일의 함부르크 대학의 총장을 지내고 수천 명이 모이는 세인트 스테반교회에서 목회를 했던‘헬무트 틸리케’는젊은 신학자, 목회자들에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왜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지 아는가? 이유는 성경을 써먹기 위해 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듣기 위해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써먹기 위해서 읽는다는 것입니다.교회학교 교사들이 어린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까?젊은 신학생들이 청년들에게 무엇을 가르칠까?속회인도자들이 속도원들에게 무엇을 말할까?목회자들은 설교하기 위해서 … 성경을 써먹기 때문에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여러분, 성경을 읽고 쓰고 타이핑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내 삶에 성경 한 번 썼다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쓰십니까? 그런 목적은 잘못된 것입니다.성경 타이핑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보다 더 빨리 치기 위해서입니까?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고 하지만결국 자기만족을 위할 때가 대부분입니다.내가 만족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하는 것이라면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눅 17:10)종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여러분은 목사만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하십니까?교회에서 임명을 받고 일하는 사람만 하나님의 종이라고 여기십니까?저와 여러분은 모두 다 하나님의 종입니다.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행해야 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그리고 그런 것을 다 행했다고 해서무엇을 얻으리라 기대하거나 / 박수 받거나대접 받기를 요구해서는 안 되는 종일뿐입니다.종인 우리는 아무 것도 내세울 것도 없고 아무 것도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그래서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라고 했습니다.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자기 맡은 일에 충실하기만 하면 칭찬을 받고 존경을 받습니다.곳곳에 자기 일에 불성실한 사람이 많기 때문에오히려 성실한 사람이 칭찬 받고 대단하게 여깁니다.그러나 사실 이런 사회는 바람직한 사회가 아닙니다.모두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성실히 일하는 세상,그래서 묵묵히 자기 일을 한다고 해도 아무런 칭찬을 못 받는 세상그렇게 일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 정상적인 사회입니다.효자상, 효부상을 주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닙니다.모든 사람은 효도해야 하고, 효부가 되어야 합니다.그런데 효도하지 않으니까 특별한 사람을 택해서 효자/효부라고 상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 상을 많이 주는 사회는 결코 좋은 사회가 아닙니다.누구나 자신의 할 일을 책임감 있게 다 하는 세상.그 일을 잘 했다고 칭찬받는 사람도 없고 … 그 일을 하지 않았다고 벌 받는 사람도 없는 … 그런 사회가 좋은 사회입니다.자연스럽게 맡은 일을 다 하며 지내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예수 믿는 우리들이 먼저 성실한 신앙인, 성실한 사회인이 되어야 합니다.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전도 많이 했다고 상 받을 일이 아닙니다.교회에서 봉사하는 것, 잘 했다고 상 받을 일이 아닙니다.왜냐하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 …구원받은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부모가 된 사람은 자식을 길러야 합니다.그러므로 자식을 잘 길렀다고 상 받는 것은 아닙니다.오히려 자식을 잘못 기른 사람이 벌 받아야 합니다.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영혼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해서 상 받을 일이 아닙니다.그렇지 못한 사람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 받는 것입니다. (마 25:26)왜냐하면 당연한 것은 당연히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무익한 종이 되어 …연말이 되면 교회 여러 부서에서 새로운 임원들을 선출합니다.또 새롭게 직분을 받으실 분들도 계십니다.그렇게 새로운 책임을 지게 되신 분들 중에는맡겨진 자리가 부담스럽고 염려되는 분들도 있고감사하며 만족해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그런가하면 어떤 분은 안시킨다고 삐지기도 합니다.회장 선출할 때 ‘나 뽑으면 절대로 교회 안나온다’라고 말하는 분이 있으면 그런 분을 뽑아야 합니다.그 얘기는‘나 뽑아줘야지, 나 안뽑으면 간다’는 뜻입니다.초등학교 때 반장선거를 할 때 보면 ‘나는 절대 반장 안한다.’라고 말하는 애는아무도 자기를 시키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미리 안한다고 하는 것입니다.물론 어떤 아이는‘나 반장 꼭 시켜줘’하는 뜻으로 말하는 것입니다.모든 사람에게는 기대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여러분은 어떤 마음이십니까?교회에서 사람을 뽑을 때 ‘믿음이 있는가’를 봅니다.목사님이 권하셔서 … 전도사님이 설득하는 바람에 …회원들과 팀원들이 떠미는 바람에 … 내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억지로 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어떠한 이유에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공동체를 책임지게 되었든 …부담과 근심과 염려를 이겨내고 잘 감당할 만한 믿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능력을 구하시기 바랍니다.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면 할 수 있습니다.그 믿음이 겨자씨만한 작은 것일지라도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이라고 믿는 사람은 어떤 것이든지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우리가 맡은 / 받아들인 섬김을 위한 직분은명예롭거나 자랑스런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하나님의 종된 우리들이 어떤 새로운 일을 맡게 되었다면조금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 종이 되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그러므로 집사, 권사, 장로 … 직분을 받았든/받게 되든 …각 부서 부장과 팀장, 임원이든 / 임원이 되든 …종된 각자에게 주어진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그리고 일을 다 마친 사람은“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눅17:10)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왜 알아주지 않는거야?’,‘왜 상을 안주지?’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우리는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그리고 우리는 범사에 기도해야 합니다.그러나 기도만 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에는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작가이자 교수이기도 한 앤토니 캠폴로(Anthony Campolo, 1935~현재)라는 목사님이 한 선교단체가 후원한 모임에 참석했을 때 일입니다.그 선교단체 회장이 어느 선교사로부터 받은 편지를 낭독했습니다.편지의 내용은 선교 사역의 어려움을 고백하면서4천 달러, 우리 돈으로 4백 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이 절박하게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많은 사람이 낭독된 편지 내용을 듣고 눈물을 흘릴 때 회장이 말했습니다.“캠폴로 목사님께서 그 선교사님이 필요한 금액을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그러나 목사님은 기도를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나는 선교사님의 필요를 채워 달라고 기도하지 않겠습니다.”라며저도 생각해 보니 기도해 달라고 했는데 거절했던 기억이 있습니다.돌아가신지 오래되었지만 우리교회에‘김용분권사님’이 계셨습니다.하루는 제게 찾아오셔서 ‘기도좀 해주셔’하시는데무슨 기도를 하느냐고 했더니‘죽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아무리 제가 못된 목사라 해도 … 목사가 권사 빨리 죽으라고 기도하는 목사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그래서 제가‘왜 그래요, 무슨 심통이 나서 그러세요’하면서빨리 가시라고 했습니다.그랬더니 “목사가 교인이 기도해 달라는데 기도도 안 해 준다”고,“목사가 사명도 감당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툴툴대셨습니다.저는 빨리 가시라고 쫓았습니다. 그래도 어디로 가시는가 궁금해서‘어디로 가시냐’고 물었습니다.그랬더니 권사님이“약 사먹으러 가요.”하시는 것이었습니다.죽게 기도해 달라고 하시던 분이 약은 왜 사드신다고 합니까? 살려고/살고 싶어서 약국으로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다 그렇습니다.기도 요청을 거절하신 목사님은“대신 제가 무엇을 할지 말씀드리지요. 저는 지금 제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현금 전부를 위에 내놓겠습니다. 여러분도 모두 그렇게 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모은 돈이 4천 달러가 되지 않는다면 그때 하나님께 채워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이렇게 탁자위에 모아지기 시작한 돈은 4천 달러가 훨씬 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저는 이런 것이 신앙인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먼저 하고 그 다음에 기도해야 합니다.자신의 주머니에서는 아무것도 꺼내지 않고 … 자신의 것은 내놓지 않고 기도만 하고 있는 것 … 그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내어 놓는 것”입니다.자신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시간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재능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물질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마태복음에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고 했습니다. 말로만 ‘주여 주여’한다고, 말로만‘아멘 아멘’한다고 해서은혜로운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드러남이 있어야 합니다.그래서 임원을 새로 뽑을 때는 예배에 잘 참석하는지/얼마나 최선을 다하는지/선교회 활동을 잘 하는지/섬김의 삶은 얼마나 하는지/그 사람이 보물을 하늘에 얼마나 쌓는지/헌금생활을 하는지 … 다 살펴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마음을 보기 위함입니다.우리가 한 해를 보내는 이때에‘태신자를 갖자, 전도할 대상자를 적어내라’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하나님 마음에 드는 삶에 소홀했던 우리들이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영혼구원의 일을, 전도하는 일을 이 한해가 가기 전에 하자는 것입니다.사람을 미처 데려오지 못한다 해도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자는 것입니다.저는 이번 부흥회 때 공감 가는 말씀이 있었습니다.<누가 예수를 잘 믿는 사람입니까? 누가 봉사를 잘하는 사람입니까?누가 최고의 봉사자입니까? 삐지지 않고 예수 믿는 사람, 삐지지 않고 봉사하는 사람입니다.>어린 아이들이 삐지면 예쁘기라도 하지만저와 여러분 중에 삐지면 … 보기 안 좋습니다. 밉기만 합니다.다 큰 사람이 왜 저러나 생각합니다.이 사람 때문에 삐져서, 저 사람 때문에 기분 나빠서신앙생활을 방학했다가 개학하고 잠들었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사람이 많습니다.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삐질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종이 왜 삐집니까? 여러분, 종이 삐지면 어떻게 됩니까?그러므로 우리는 꾸준히, 묵묵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 하면 되는 것입니다.가정에 어려운 문제가 있으십니까? 일터에 껄끄러운 일이 있으십니까?“나는 무익한 종이라”는 오늘 말씀을 되새겨 보십시오.가족들, 내 직장 동료들, 친구들… 내 마음에 안 들고 예쁘지 않더라도그들 모두를 내가 섬겨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면 다 편안해 질 수 있습니다.여러분, 주변 사람들에게, 믿음의 형제들에게 주인을 섬기듯 대화하고, 주인을 위하듯 대해주시기를 바랍니다.그러면 어려운 관계가 회복 될 것입니다. 문제가 없어질 것입니다.요즘에는 불편한 일이 있고, 속상한 일이 있고, 부담되는 일이 있으면주저 없이 교회를 옮기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제가 자주 말씀드렸고, 이번 부흥회 때도 들은 말씀일 것입니다.<나무는 묘목 때 한번 옮겨 심을 수는 있습니다.그러나 자꾸 옮겨 심으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열매 맺지 못합니다. 계속 반복하여 옮겨 심으면 깊숙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상하고 병들어 죽습니다.>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여러분, 이 기둥교회에 영적 뿌리를 내리시기 바랍니다.영적 열매를 맺기 위하여 오직 주인이신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고자신의 가정에, 교회에, 일터에 맡겨진 사명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이미 받은 구원의 기쁨에 감사하는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종 된 우리가 바랄 것이 무엇입니까?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럽지 않은 믿음의 사람으로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다”라고 칭찬 받는 자리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제목 : 누가 얻는가?(2) 본문 : 눅-18-0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1)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2)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3)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4)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5)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6)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8)<누가복음 18장 1~8절>할렐루야! 복된 자리에서 만나서 감사합니다.아침에 일어나면 먹을 반찬이 있고, 입을 수 있는 옷이 있고,갈 곳이 있고, 만날 사람, 전화 할 사람이 있는 것 …모두가 감사의 조건입니다.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배추값이 많이 올랐다고 해서 김치통을 안돌리려고 했는데 …우리교회에서 보내는 김치를 기다리는 분들이 계시다고 합니다.그런 분들은 한 포기, 두 포기 들어가는 김치통 하나면 겨울을 지낸다고 합니다. 기다리는 분들을 실망시킬 수가 없어서 조금 준비했습니다.마음에 원하시는 분들은 오늘 김치통을 가져가셔서 채워 다음 주에 가져오시기 바랍니다.교회에서 ‘가져오라고, 돕자고’하는 것이 많은데 … 이런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허락하신 <오늘> 승리의 날, 축복의 날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아시안게임 중계를 보니까 이긴 팀과 이기는 팀이 다른 점이 있습니다.눈빛이 다르고 얼굴에 여유가 있습니다.건강하고 씩씩하고 멋있게 사는 사람의 증거가 눈빛이 살아있는 것입니다.우리 살아있는 눈빛으로(힘이 있는 눈빛으로)옆의 분과 여유 있는 미소를 띠며 인사합시다.“승리의 삶을 사십시다.”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아멘.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내 마음대로 해석하면 …우리는 신문이나 TV같은 언론이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는 일을 종종 보게 됩니다. 대부분 기사를 쓰는 기자나 보도하는 아나운서가 사건의 내용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깁니다.기자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상업적인 의도를 갖게 되면사실여부와 상관없이 자극적인 기사를 쓰게 되고그러면, 전혀 엉뚱한 일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듣습니다.그러나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예수 믿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성구 중 하나가빌립보서 4장 13절의 말씀입니다.“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그냥 이 구절만 떼어놓고 보면 얼마나 힘이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하나님이 나에게 능력을 주시니까, 난 모든 것을 할 수 있어.’라고 불가능은 없다는 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모든 것’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과 다릅니다. 빌립보서 1장에 보면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4장 13절 앞뒤로 보면“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는 말씀과“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빌 4:14)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내가 복음을 전하면서 겪게 되는 고통, 배고픔, 궁핍(몹시 가난함)도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기 때문에 모두 견딜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모든 것’은 ‘복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그런데 우리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모든 것’이 무엇입니까?자신의 진학, 취업, 결혼, 사업확장 같은 도전 … 등 자신의 개인적인 일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인용하여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 편한대로 성경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할 때가 많습니다.그러다보면 하나님 말씀 성경을 잘못 이해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을/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게 되어 전혀 엉뚱한 말을 하고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벧후 1:20)라고 했습니다.다르게 번역된 성경을 보면“제멋대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아무도 성경의 모든 예언을 제멋대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새번역)성경을 제멋대로 해석(own interpretation)하다보면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제 멋대로 해석한다’는 것은 자기가 편리한 대로, 자기가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우리 주위에도 성경을 거짓되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그런 사람들은 결국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이단’(異端: 다를 이, 끝 단)은 출발은 비슷한 것 같고, 똑같은 것 같지만 끝이 다른 것입니다.별 차이 없는 것 같아 보여도 가다보면 전혀 만날 수 없는 다른 곳이 됩니다.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이단자들은오히려 교회와 목사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한다고 말합니다.그래서 성경공부를 아무데나 가서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교회에서 가르치는 것만 잘 배우면 됩니다.이단자들이 유혹하는 것이 무엇입니까?“성경을 기막히게 가르치는 선생이 있다”고 가보자고 합니다.그리고 “배우는데 공짜”라고 가자고 합니다.이런 유혹하는 이단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요즘은 교회 앞에 와서 예배 마치고 가는 이들에게 전단지를 나누어 주면서까지 유혹합니다.여러분, 신앙생활 바르게 하시기 바랍니다.정신차리고 근신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 생활하시기 바랍니다.이단의 유혹에 빠져 믿음이 흔들리고 가정이 파괴되고불미스러운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그런데 한번 유혹에 빠지면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오늘 본문의 말씀도 자칫 잘못 이해하면,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18장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만 놓고 보면예수님께서 ‘끈질긴 기도의 자세’를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이해하려면 말씀의 앞뒤 문맥까지 잘 읽어봐야 그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예수님이 말씀하신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과부와 재판장의 비유오늘 본문의 비유는 끈질기게 기도해서 응답을 받아내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기도의 자세’가 아니라 ‘기도의 내용’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본문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재판장’입니다. 어느 시대나 재판장 정도면 사회에서 벼슬을 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나 재판장을 하지는 않습니다. 또 한 명은 ‘홀로 사는 여인’입니다. 가정을 꾸렸으나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든지아니면 전쟁터나 어디 먼 곳에 가서 행방불명이 되어 홀로 사는 여인을 말합니다.2절에 보면 그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2절) 한마디로 불의한 사람, 의롭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홀로된 여인은 “자주” 그 재판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3절에 보면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말했습니다.‘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이 번역한<메시지(The Message)> 성경에 보면 이 구절을 <내 권리가 침해받고 있으니 나를 보호해 주십시오.>(눅 18:3) 라고 했습니다.즉 ‘재판장님, 나의 사건을 맡아서, 공정하게 처리해 주십시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물론 그녀의 호소를 보복의 개념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 원수를 보복해달라는 탄원이 나옵니다. 구약의 시편이나 이사야에서도 나오고,(시18:47, 사34:8, 사59:17~18) 신약의 고린도후서나 계시록에서도 나옵니다.(고후10:6, 계6:10, 19:2)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보복의 의미는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인간이 직접 원수에게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보복해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즉, 원수에 대한 보복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어쨌든 오늘 본문의 홀로된 여인은 자신의 억울함을 재판장에게 호소했습니다. 한 두 번 그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3절에 보면 “자주”가서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재판장이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4절, 5절 봅니다.“ …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눅 18장 4b-5절)얼마나 자주 찾아왔으면 ‘이 여자 문제는 빨리 해결해야지 안해주면 될 때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히겠구나.’하는 뜻입니다.재판장이 말한 “나를 괴롭게 하리라”는 말의 원래 뜻은 ‘눈퉁이를 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 여인의 말을 듣지 않으면, 내 눈퉁이를 치겠구나’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약자인 홀로 사는 여인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강자인 재판장의 눈퉁이를 칠 수 있었겠습니까?그만큼 그 뜻은 재판장이 그 여인의 간청을 그 정도로 심각하게 느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고그만큼 여인의 형편이 절박하다는 것입니다.7절에 보면 그때 예수님은 ‘하물며’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예수님은 누가복음 11장에서 기도에 대해 가르치실 때도‘하물며’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이렇듯 재판장을 귀찮게 할 정도로 간청을 해도 들어 줄 텐데“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 18:7) 고 하신 것입니다.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도는 끝까지 해야 한다. 매달려야 한다’라는 뜻으로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100% 틀린 것은 아닙니다.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안 되면 말고’하는 식으로 한 번 찔러보는 기도가 아니라,한 두 번 해보고 마는 기도가 아니라 … 끊임없이, 쉬지 말고 계속해서 기도하고 하나님과 연결된 줄을 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그러나 응답 받기 위해서 무조건 끈질기게 기도만 하면 다 됩니까!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가복음 17장 20~37절의 말씀을 먼저 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과 연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7장 후반부는 ‘미래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눅 17:22) 고 하셨습니다.이것은 말세에 환난과 핍박이 심해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몹시도 고대하게 될 것을 말합니다.(눅21:8-9, 마24:21-29, 막 13:5-13) <두란노 HOW 주석 참조>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비유는,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지 말고 …계속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하도록 권면하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믿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고 고통을 당할지라도‘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뤄질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포기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당시의 (종말적인) 상황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큰 어려움과 고난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참아야 하고, 예수 믿기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나는 예수 믿어도 힘든 것이 하나도 없어’라고 말하는 분들은 가짜입니다.찬송가에도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으나”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참아야 하는 것이 많습니다.평상시에는 잘 모릅니다. 내가 참지 못했던 일이 있었을 때,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 만나 얘기를 나누다 보면 ‘옛날에 네가 이랬지.’하며 예전 일을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의외로 뒤끝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누구에게도 ‘섭섭하게 해서는 안되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그리고 혹 누군가를 섭섭하게 했을 때는 즉시 ‘잘못했다’고 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어떤 분이 제게 섭섭함이 있으셨던 모양입니다.그런데 제가 설교 할 때 그분이 앉은 반대편만 보고 설교하더라고 하더라고요.아무려면 제가 한쪽만 보고 설교하겠습니까.그 다음 주에는 그분이 반대 쪽에 앉으셨는데제가 또 그분이 앉은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답니다.‘얼마나 보기 싫었으면 그랬겠느냐’고 하시는데 … 그분이 그렇게 느낀 것이지요.사람이 한번 꼬이면 그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예수 믿기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이 있고, 예수 믿기 때문에 참아야 되는 것이 있고, 이해해야 되는 것도 있습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우리는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상황을 견뎌야 합니다.그것은 예수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예수님은 그런 어려움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께 맡기는 자세로 낙심치 말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인자가 올 때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믿음(눅18:8)”을 소유한 자가 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즉,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을 기다리며, 여인(과부)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면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그러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누가복음의 ‘기다림’여러분은 무엇을 기도하며 무엇을 기다리고 사시나요?4복음서 중에 누가복음은 기다림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성경을 기록한 누가는 기다림을 중요하게 여기고,무엇을 기다려야 할지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 15~16절에 보면천사로부터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들은 들판의 목자들도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그리고 누가복음 2장 25절에 보면“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눅 2:25) 는 말씀이 있습니다.시므온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눅 2:26) 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 보기를 기다렸는데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께 찬송합니다. (눅2:28)예수님 보기를 간절히 기다렸던 시므온은 결국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3장 15절에도“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눅 3:15) 하였고, 누가복음 7장 19절에서도“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눅 7:19)라는 말씀을 통해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누가복음 12장 36절에서는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눅 12:36) 했습니다.다시 말해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23장 51절에는 아리마대 요셉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그는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지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51~52절 말씀에“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눅 23:51~52) 하였습니다.이처럼 - 기다리던 사람이 예수님의 탄생을 보았고, - 기다리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고,- 기다리던 사람이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였습니다. 누가는 누가복음 뿐 아니라 사도행전도 기록하였는데,사도행전 1장 4절에 보면“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고 했습니다.즉, 성령이 임할 것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이처럼 누가는 기다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통해 임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누가복음 전체가 그렇듯이 오늘 본문의 비유도 우리가 무엇을 기다리며 구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까?우리가 구하고 있는 기도제목이 하나님의 뜻인지, 하나님의 원하심인지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나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것인지 … 돌아봐야 합니다.내가 신앙생활 하면서 기다리는 것이내 욕구를 채워 줄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인지 …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기다리는지 … 우리 스스로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가만히 살펴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뤄지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을 위해 기도하고 전혀 상관없는 것을 기다릴 때가 많습니다.우리는 자신을 위해, 남편과 아내를 위해, 자녀들을 위해, 직장을 위해, 사업을 위해, 건강을 위해 … 많이 기도합니다.또 기도해야 합니다.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들을 잘 살펴보면하나님의 나라가 /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지는 것과 아무 상관없이 단순히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기도를 할 때가 많습니다.제가 81년도에 인천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교인은 없었지만 주보를 만들었습니다.교인이 있으면 광고도 있고 여러 가지 넣을 내용이 많겠지만겉표지하고, 예배 순서, 예배시간 안내와 약도를 넣고도 한 면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뭔가 글을 써야 할 것 같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글을 쓰다 보니 글 내용이 좋다고 책으로 내자고 해서<껌딱지 할아버지>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그 책에 있는 내용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어떤 목사님의 설교 시간에 들은 이야기를 정리한 것입니다.백발의 할머니 한 분이 큼직한 돌 두 개를 들고 교회에 들어서셨다. 굽은 허리로 서 계신 모습에서 족히 80세는 되어보였다.기도실로 들어가신 할머니는 돌을 앞에 놓고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고 하셨지요?(마7:7)그리고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셨지요?(막11:24) 여기가지고 온 돌들이 내일 새벽에 금이 되게 해주세요.조금도 의심치 않고 꼭 믿습니다. 이것들이 금이 되면 하나는 교회에 바치고 하나만 내가 쓰겠습니다. 꼭 약속드려요. 틀림없이 하나는 바치겠어요. 주여! 믿습니다. 밤새도록 반복되는 기도는 애절하기까지 했다.새벽에 “주여, 믿습니다!”를 큰 소리로 외치고 눈을 뜨신 할머니는실망하고 말았다. 금이 되었을 줄 알았으나 그대로 시꺼먼 돌이었던 것이다.할머니는 “하나님, 하나님도 너무하슈! 나 혼자 다 먹겠다는 것도 아니고하나는 바치겠다는데 …”우리들의 기도도 이와 비슷한 것이 많습니다.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 같고 하나님께 드릴 것 같이 말하지만엄밀히 말하면 자기의 욕심으로 기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우리는 기도의 ‘수준’을 달리 해야 합니다.수능시험을 본 학생들이 단지 ‘대학에 가게 해주세요. 무슨 과에 합격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그 할머니의 기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무엇을 위해서, 왜 공부하겠다는 것인지에 대한 기도가 없습니다.‘하나님 나는 이런 삶을 살겠습니다. 이렇게 살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세요.내 욕심이 채워지는 인생이 아니라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 삶을 살겠습니다’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작정 좋은 직장을 구하는 기도보다땀 흘려 일하여 얻은 소득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기도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고 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여러분은 무엇을 기다리며 무엇을 위해 기도하십니까?그 기다림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까.그 기도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지요?너희는 먼저 … 우리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것 같은 기도를 할 때가 많습니다.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은 산타클로스가 아닙니다.예수님이 주인공이십니다.그런데 수많은 아이들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기다립니다.아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선물입니다.선물을 받으면 산타클로스에 관심이 없고 오직 선물에만 관심이 많습니다.그런데 아이들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것처럼 표현합니다.우리의 기도 가운데도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예수님은 우리에게 먼저 구해야 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해야 하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기도에는 우선순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는 삶을 살되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눅 18;1)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인지‘주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는기도인지 살펴봐야 합니다.우리 교회는 오늘밤부터 시작되는 부흥회를 합니다.부흥회를 통해 우리가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지 …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 어떻게 신앙생활 해야 하는 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부흥회에 참석하시기 바랍니다.저는 이번 부흥회 주제를 보면서 마음에 확 와 닿았습니다.<역전의 인생으로 다시 서기>라고 했는데목사인 제 자신부터 먼저 은혜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그러려면 두 가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첫째는 포기(give up)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이번 부흥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TV시청을 포기하고,친구 만나는 것을 포기하고, 잠을 포기해야 합니다.두 번째는 우선순위(priority)를 바꾸어야 합니다.이번에 말씀 듣는 일에 우선순위를 둘 수 있어야 합니다.그러지 않고는 영적 전환점(turning point)을 찾기가 어렵습니다.부흥회는 연례행사가 아닙니다.- 바로 저를 위한 기회입니다.- 바로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저는 분명히 믿습니다.오늘 저녁부터 오시는 강사님을 하나님께서 붙드시고 쓰실 것입니다. 그의 입을 통해 주시는 말씀이 저를 향한 말씀이고, 여러분을 향한 말씀이 될 줄 믿습니다.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기다린다고도 말하고, 기도한다고 말합니다.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뜻에 조금만 벗어나면 파르르 떱니다.여러분은 어떻습니까?교회에서 하는 일, 속회, 선교회를 조정하는 일이여러분의 뜻에 맞지 않으면 부르르 떨지 않나요?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산다고 하지만 자기의 뜻을 앞세울 때가 더 많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다리며 무엇을 위해 기도하십니까?하나님의 뜻인지 … 하나님의 원하심인지 … 그것을 먼저 생각하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제목 : 이래서 전도하고 이래서 예수님 믿습니다 본문 : 눅-19-01-10 눅 19:1-10우리는 예수를 믿는 이유가 있습니다. 교인은 열심히 전도하는데 왜 저렇게 지나치게 전도하느냐? 전도할그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교인들은 저렇게 추운 데도 어떻게 교회 나가냐? 추워도 나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교인들은 새벽에 잠도 안자고 교회 나가네? 잠 안자고 나갈 이유가 있다 라는 겁니다.왜 우리가 이렇게 전도합니까? 왜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된다고 생각합니까? 우선 다른 것보다 우리나라만보세요. 우리나라가 선교사들이 대한민국을 전도하려고, 이 나라에 복음을 전하려고 125년 전에 와서 전도하지 않았더라면 이 나라가 이렇게 될 수 있습니까? 오늘 1/10도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모든 발전과 번영은, 민주주의의 아름다운 건강한 나라를 이만큼 만들 수 있었던 것은100% 교회 덕택입니다. 전도한 것 때문입니다.이 무지한 나라, 우상숭배, 미신으로 가득한 나라, 어느 것 하나 바라볼 것 없는 비참한 가난한 나라에 선교사들이 와서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를 믿게 했습니다.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오는 것도 얼마나 어렵습니까?여기에 오는 것이 한두 달에 올 수 없습니다. 여기에 오는 국제선, 비행기가 있습니까? 배가 있습니까? 우리나라에 오는 배가 전 세계에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길이 하나도 없지만 선교사가 여기 저기 거쳐서 대한민국에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학교가 하나도 없는 나라에 이화여자대학교, 연세대학교, 숭실대학교, 수많은중고등학교를 세우고 지방마다 대학교를 세웠습니다. 여성은 공부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여성들에게 공부를 시켜서 오늘 여성의 지위가 이렇게 올라가고 여성이 사회, 정치, 경제, 교육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이만한 국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문화가 있습니까? 우상문화밖에 없습니다. 미신문화밖에 없습니다.그러던 우리를 온갖 기독교 문화로, 건전한 문화로, 건강한 사회와 정신을 가지고 세계와 경쟁할 수 있도록만들었습니다. 스포츠도 선교사들이 가지고 와서, 배구공, 농구공, 축구공 가지고 와서 우리나라를 스포츠 강국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전도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전도해야 나라가 되고예수 믿어야 그 나라가 잘살고 예수 믿어야 그 가정이 잘살고 예수 믿어야 인류가 잘되는 줄로 믿습니다.믿는 나라와 믿지 않는 나라, 지금 보면 똑같지만 예수를 오래 믿은 나라 보세요. 예수를 오래 안 믿은 나라또한 보세요. 하늘과 땅같이 차이가 있습니다. 얼마나 차별이 많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하는것입니다. 인간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분을 만나야 되는 겁니다. 스승을 잘 만나도 사람이 좋은데, 좋은직장을 만나도 좋고 좋은 사람을 만나도 기분이 좋은데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 우리인류의 메시야이신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우리인간을 창조하신 분이라는데,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는데, 창조가 어디 있느냐? 저절로 있었다? 이 세상에 저절로 있는 것은 하나도없습니다. 어느 것 하나 만들어야 있는 것이지 저절로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상식에도 안 맞는이야기입니다. 만물은 창조자가 있고 인간은 창조자가 있고 역사는 지배자가 있고 통치자가 있는 겁니다. 안보여도 대한민국을 통치하는 분이 있는 겁니다. 비행기 조종사가 안 보여도 분명히 있는 겁니다. 그래서 목적지로 향하여 가듯이 이 역사도 한분의 통치자가 있는데 그분은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라는 겁니다. 할렐루야! 금년이 서기 2010년 12월 19일입니다. ‘주후’가 뭡니까? ‘예수님으로부터’를 ‘주후’라고 합니다. ‘AD’라고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카운트 합니다. 역사는 이 땅에 오신 만왕의 왕이신 그분이 역사의 주인입니다. 그분에 의해서 역사가 진행되는 겁니다. 어느 나라 어느 사람이 되고 안 되고는 그분의 손에 있는겁니다. 대한민국의 앞날도 그분의 손에 있고 이 대통령의 앞날도 그분의 손에 있고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나 영국이나 일본이나 다 모두 통치자의 앞날이 주님의 손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역사는 주님으로부터 시작하고 예수님 오시기 전을 ‘BC’라고 합니다. 예수님 전이나 후나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모든 역사의 주인이20101219 주일설교이래서 전도하고 이래서 예수님 믿습니다- 2 -신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우리인간은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미래를 아는 분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약합니다. 우리보다 강한 분을 만나서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리석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지혜로운 분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몸도 마음도 잘 넘어집니다. 우리를 일으켜주는 손길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넘어질 때 바로 잡아주시고 흐트러질 때 우리를 바로잡아 주실 분이 필요한 겁니다. 우리는 인격도 넘어지고 도덕도 넘어지고 정신도 병들 때가 있는데, 우리를 어루만져 치료해 주실 분을 만나야 되는데 그분이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식한 사람이 믿는 게 아닙니다. 세계 최고의 지성인이 믿고 최고의 과학자가 믿고 최고의 부유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믿는 겁니다. 미국의 오바마가 믿고 부시가 믿고 클린틴이 믿고 오늘날 인류의 최대의 과학자들이 다 믿는 겁니다. 아인슈타인이 믿고 최고의 발명가도 믿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지혜와 능력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어떻게 하더라도 부모님을 예수님 믿게 하려고 그러는 거고, 최문개 권사님도 어떻게 하더라도 이 남편 박형통을 데리고 나와야 되는데 형통이 말을 안 들으니까 교회 가는 거 계속 핍박하니까 남편이 울고 기도해서 남편을 데리고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축복입니까? 자녀들이 저렇게 아름답게 잘 크고 잘되니 너무 사랑스럽지 않습니까? 감사한 일입니다. 그 가정이 어려운 위기에서 살아난 것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나 그 가정이 황무지에 장미꽃같이 피어납니다. 어둠이 없는 겁니다. 낮과같이 밝은 거룩한 길로 가는 겁니다. 황무지 장미꽃이 피어나듯이 가정에 꽃이 피어나고 우리 삶에 꽃이 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오늘 조금 전에 기도하고 내려가신 한영득 장로님도 주먹세계의 거두였습니다. 한 장로님 가슴 벗겨보면 전부 칼자국 투성이고 창자도 다 꺼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 믿고 변화돼서 우리교회 장로님이 되셨습니다. 그 아들 주현이는 UCLA 나와서 우리나라 카이스트에 와서 박사학위 받고 여기서 교수 하다가 미국가서 세계항공우주국에 있는데 지난번에 신문에 크게 났습니다. 이 비행기를 이보다 1/3로 가볍게 하는 소재를 주현이가 발명해서 미국신문에도 나왔습니다. 주먹으로 감옥에 왔다 갔다 하던 아들이 교회 장로가 되고 자녀들은 그렇게 잘되었습니다. 예수 안 믿었으면 지금 살지도 못합니다. 술 먹다가 언제 어디 가서 없어졌을지 모르는데 저런 축복을 받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늘 어디를 가면 한 장로님이 저를 보호해 주시고가끔 가다가 중간에 이상한 애들이 있으면 너 무대가 어디냐고, 나한테 이야기하라고 그러면 완전히 기가죽어서 다 떠납니다.이 세상에 가장 귀한 길이 있는데 그 길이 뭐냐? 복된 길,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축복의 길, 은혜의 길이있는데 이 길이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길이라고 그랬습니다. 이 길 따라 오는 분은 인생을 평생 가도 길을 잃지 않습니다. 이 세상 길 잃고 방황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내가 지난 주일에 경동제일교회 가서 주일 오후3시부터 그 교회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저는 주일날 예배를보고 또 다른 곳에 가서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 저녁 오후에도 또 가야 됩니다.경동제일교회는 역사가 107년 된 교회입니다. 그 교회 이기경 목사님은 42년을 그 교회에서 목회하신 존경하는 목사님입니다. 그 교회에 가서 마지막 은퇴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교회는 엄기현 집사라고 하는 1904년에 예수를 믿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왕족인 성동대감 이재형 대감의 마부였습니다. 그래서 늘 말을 몰고 대감님을 태우고 대궐로 왔다 갔다 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서 예수를먼저 믿었습니다. 믿으니까 너무 좋은 겁니다. 믿으면 좋은 걸 압니다. 세상은 가보면 별겁니다. 교회는 가보면 놀라운 걸 발견합니다. 교회는 밖에서 보면 별겁니다. 들어가 보면 좋은 겁니다. 세상은 보기에는 좋습니다. 술집 좋다, 나이트클럽 너무 좋다, 가보면 망치고 인생 끝납니다. 가보면 좋은 게 아닙니다. 교회는 와보면 좋은 겁니다.엄기현 집사님이 교회 와보니 너무 좋은 겁니다. 은혜를 받아 집사가 됐습니다. 자기 대감을 전도해야 되겠는데 너무 높은 대감 전도는 그 당시에는 상상도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대감님 한번 전도했으면 했는데 하루는 말을 몰고 가는데 마음에 용기가 생겼습니다. ‘오늘 대감님 전도해야 되겠다.’ 그래서 “대감님”“왜 그러냐?” “대감님. 대감님” “말을 해라” “대감님, 예수 믿으세요.” 그랬습니다. 깜짝 놀라서 “야, 너 예수믿냐?” “예수 믿습니다.” “몇 년 됐냐?” “3년 됐습니다.” “시시한 예수 뭐 하러 믿냐? 야 이놈아, 상놈이 무20101219 주일설교이래서 전도하고 이래서 예수님 믿습니다- 3 -슨 교회 나간다고 양반 되냐?”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때 엄기현 집사가 그랬습니다. “대감님 교회 다니는 거는 상놈이 양반되려고 가는 건 아닙니다. 예수 믿고 좋은 마부 되려고 교회 나갑니다. 내가 더 좋은 사람 되려고 나갑니다.” 왕족인 대감이 감동을 받았습니다.예수 믿는 것 왜 믿습니까? 천사되려고 믿는 게 아닙니다. 날아다니려고 믿는 게 아닙니다. 일 안 하고 잠만자려고 믿는 게 아닙니다. 편하려고 믿는 게 아닙니다. 사람답게 살려고 믿는 겁니다. 가치 있는 길을 찾는겁니다. 의미 있게 살려고, 보람되게 살려고, 오늘 사람답지 못하지 않습니까? 마부답지 못한 것, 어머니가어머니답지 못하고 젊은이가 젊은이답지 못하고 학생이 학생답지 못하고 오늘의 지식과 문화가 우리답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른이 어른답지 못하고 애가 애답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애들도 선생님을 폭행하고, 지난주에도 나이가 어느 정도 되어 중고등학교라고 그래도 그런데 어린애들이 선생님 두들겨 패고, 애들답지못한 겁니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남자다워야 되는데 요새는 남자로 태어나서 성전환하는 남자가 그렇게 많답니다. 태어날 때 남자로 태어나고 여자로 태어났으면 그렇게 살아야지 태어날 때 여자로 태어났으면 몰라도왜 남자가 여자 되려고 그럽니까? 하나님 주신 거 왜 잘라내고 이해가 안 갑니다. 안 그렇습니까? 답지 못합니다. 그래서 염색하고 남자가 얼굴 만들고 가슴도 원래 있어야지 없는 걸 있게 하는 걸 얼마나 어렵습니까? 만든 게 자기 것도 아닌데 얼마나 한심합니까? 오늘, 답지 못한 겁니다. 동성연애한다, 답지 못하다는겁니다. 사람이면 사람이냐 하는 겁니다. 지내놓고 보면 사람답지 못합니다.교회 왜 나옵니까? 모든 일에 내 위치를 찾고 내 길을 찾고 내 자리에 서고, 교회 나오면 어머니가 아버지되는 게 아닙니다. 좋은 어머니 만들어 주시고 좋은 가정 만들어 주시고, 그래서 이재형 대감님이 교회 나왔습니다. 대감님이 나와서 예수를 믿고 경동제일교회 출석을 하고 너무 은혜를 받아서 대감이 신학을 해서목사가 됐습니다. 그래서 세운 교회가 성동교회입니다. 성동교회 목사가 됐습니다. 예수를 믿으니까 새로워지고 변화를 받은 겁니다. 예수 믿는 나라, 예수 믿는 가정 변화가 일어납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가치 없는 삶을 가치 있게 만들고, 잘못된 삶에서 돌아서게 만들고, 인간의 힘으로, 법으로는이게 잘 안 됩니다. 부모의 노력으로도 안 됩니다. 힘으로 안 됩니다. 본인의 노력으로도 안 됩니다. 잘못된성격 고칠 수 없습니다. 잘못된 습관 고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이렇게 지식과 경제가 발달하고문화가 발달하고 교육수준이 세계최고인데도 자살은 훨씬 많고 도박중독자, 알콜중독자가 얼마나 많고 우리최 권사님도 아버님이 훌륭하셨는데도 도박에 빠지니까 집안 망치고 우리아버지도 훌륭하신데 여기에 빠지니까 집안을 안 돌보는 겁니다. 집안이 비참해 지는 겁니다. 아무 먹을 것 없고 땔감 없어도 계속 도박만 하니 우리는 비참하게 살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거기에서 누가 돌아서게 하겠느냐. 우리는 밤낮으로 ‘우리아버지 예수 믿으면 좋겠다.’ 날마다 눈물로 기도하고, 교회 나갔다 집에 오면 도박해서 잃은 분풀이를 우리한테폭력을 휘둘러서 집안을 그냥 지옥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랬던 우리아버지도 교회 나오시니까 훌륭한 집사님이 되시고 우리교회에서 90까지 사시다가 몇 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고 변화를 받는겁니다. 집에 평화가 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도박에 빠지는 것 1/100만 교회빠지면 이것은 천국 가고도 남습니다. 거기에는 빠지면 빠질수록 인생도 망하고 가정도 망하는데 여기에 빠지면 다 삽니다. 돈, 교회 나오면 헌금하는 것 도박하는 술에 빠지는 것 1/100만 하면 교회는 한없는 복을받습니다. 술 먹는 사람 교회 와서 팁 낸다는 생각만 해도 벼락부자됩니다.얼마 전에 신문에 보니까 어떤 아저씨는 술집에 가서 술값 50만원 내고 25만원을 팁을 줬습니다. 25만원팁이 적다고 그래서 두들겨 맞아서 입원을 했습니다. 병신이 됐습니다. 장애인이 됐습니다. 그래서 그 신문에그렇게 났습니다. 어떻게 25만원 내고 그 아가씨 엉덩이를 만졌냐하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 있는 깡패가 때렸습니다. “바보야. 집에 오면 공짜로 만지는데 거기에서 25만원 내고 엄청나게 얻어터지고 아이고 바보야.”그런 바보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25만원 소고기를 샀으면 일주일 먹고도 남는 겁니다. 잘못된 길로 안가게 하는 길이 예수 믿는 겁니다. 예수님 선생님을 만나는 겁니다. 나를 지도해 주시는 목자를 만나고 선생님을 만나 믿음으로 사니까 그런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잘 달려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더라도 전도하는 겁니다. 전도하는 길이 나라 잘되고 잘못된 길에서 고치고 돌아서고 회복하고 치료하는 길입니다. 우리를 일으켜 주시는 분은 나사렛 예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나라가 다 일어납니다. 세계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20101219 주일설교이래서 전도하고 이래서 예수님 믿습니다- 4 -호주같은 나라는 영국에서 강력한 살인범, 못쓸 마약범등 죄수들만 가져다가 버린 곳이 호주라는 나라입니다. 영국이 세계를 지배하니까 세계 나라에 이래도 저래도 안 되는 폐품 인생만 가져다가 쓰레기처럼 버려둔 것이 호주라는 겁니다. 그래서 버려진 땅, 버려진 인간, 쓸모없는 인간이니까 그곳에 선교사가 도전을 했습니다. 저분들도 예수 믿으면 변화받을 수 있다, 저 쓰레기 같은 땅, 쓰레기 같은 인간들도 예수만 믿으면회복할 수 있다, 고칠 수 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그 나라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들에게 전도했습니다.마음 문을 열었습니다. 예수를 믿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니 마음이 변하니 생활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고, 마음이 변하니 예수님을 모시니 언어문화가 바뀌는 겁니다. 폭력적인 언어, 부정적인 언어가 바뀌는 겁니다.아이디어가 생기는 겁니다. 변화를 받는 겁니다. 가정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건강한 인격으로 회복되는 겁니다. 그래서 호주는 지금 지상의 축복받은 나라, 잘사는 나라가 되는 겁니다. 유럽에 있는 나라가 다 100%그런 나라입니다. 처음부터 좋은 나라 아니었습니다. 다 쓸모없는 나라, 스웨덴이나 덴마크, 노르웨이 다 똑같은 나라입니다. 복음이 들어가서 그 나라를 좋은 나라, 신사나라 만드는 겁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예수 잘믿어서 한없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답은 하나입니다. 이 길 밖에 없는 겁니다.우리나라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 애국자였습니다. 33인 다 모두 애국자였습니다. 교인들이었습니다. 이승훈씨라고 하는 분은 우리나라 훌륭한 33인 최고의 자리에서 나라를 일으킨 분이었습니다. 이승훈씨는 어머니를 8살에 잃고 할머니도 잃고 고아가 돼서 유기점, 그릇 파는 데 가서 취직을 했습니다. 일하고 밥먹고15년을 지나는데 너무 착하니까 그 주인이 모든 재산을 이승훈씨한테 넘겨줬습니다. 이분은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유기그릇을 팔아서 평안남북도의 첫째가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만석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이우리나라를 강제병합해서 우리나라 그릇이라는 그릇은 숟가락까지 다 뺏어가고 교회종도 다 가지고 갔습니다. 다 뺏어가니까 그릇장사가 망하는 겁니다. 달려들다가 오히려 감옥에 가서 5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옥에서 고생하고 나와 보니까 집이 산산조각 나고 다 뿔뿔이 흩어지고 그 부자가 한순간에 폐인이 돼버린 겁니다. 어느 것도 하나 없이. 그래서 대동강에 가서 자살하려고 하는데 조만식 장로님이 전도를 했습니다. 그때는 장날, 주로 전도하고 많은 사람 모인 곳에 모두 나와서 전도하는데 조만식 장로님이 나와서 이 나라를살리는 길이 예수 믿는 길입니다. 여러분, 낙심하지 않고 기다리면 대한민국에도 좋은 날이 옵니다. 우리가예수 믿으면 분명히 나라를 건질 수 있고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는 이런 소망의 메시지를 전한 겁니다. 그래서 이승훈씨가 거기에서 예수를 믿고 교회 나와서 은혜를 받는 겁니다. 그전에는 돈 하나만 바라보던 분이 나라에 대한 눈을 쓰고 인류에 대한 눈을 뜬 겁니다. 그래서 세운 학교가 오산학교라는 학교를 세웠습니다. 오산중고등학교가 이승훈씨가 세운 학교입니다. 3.1운동도 만들었습니다. 105인 사건을 만들어서 나라가어려운 때에 모두 힘을 모아서 독립운동하는 데 선두에 섰습니다. 오산학교, 우리교계는 한경직 목사님도 나오시고 유명한 시인 김소월씨도 오산학교 출신입니다. 모든 각 분야의 훌륭한 분들이 많이 나오셨습니다.사랑하는 여러분! 애국자 보세요. 다 교인들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 조만식 장로님, 이승훈 장로님, 백범김구 선생님, 이승만 대통령 다 교인들입니다. 우리 그때 교인이 2%도 안 되던 때인데도 나라전체를 이끌어서 위기에서 건지는 일에 앞장섰던 분들은 교인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나라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국가관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방황하지 않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나라 살립니다. 가정 살립니다.오늘 삭개오도 돈만 있으면 되고 높은 자리에만 있으면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분은 세관장입니다. 요새로말하면 국세청장입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모았습니다. 요새 국세청은 안 그렇습니다. 그때 그랬다는 겁니다.돈도 많고 권력도 있었습니다. 세상의 권력과 세상에 있는 물질을 가지면 다인지 알았습니다. 세상의 좋은별장만 가지면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별장에서 술 먹는 거고, 고급기생 데려다가 세상적으로 즐기는 그 이상이 없는 겁니다. 전부 그거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오히려 인간의 모든 삶을 더 부패하게 하고 도덕적인우리의 모든 인격도 점점 질을 떨어뜨리는 것이 세상문화입니다. 마음이 허전하고 공허하고 불안한 이분은예수님을 만나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정보를 듣고는 키가 작기 때문에 뽕나무에 올라갑니다. 예수님을 만나려고 교회 나오려면 이렇게 노력해야 됩니다. 사모해야 됩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만났는데 우리도 삭개오같은 이런 심정으로 교회생활 해야 됩니다. 아무리 멀어도 교회 열심히 나오려고하고, 아무리 세상으로 높아도 예수님 위해서는 낮아져서 뽕나무에 올라가야 됩니다. 뽕나무에 올라갔더니예수님께서 지나가시면서, 예수님은 우리마음을 아십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주여, 저를 어떻게 아십20101219 주일설교이래서 전도하고 이래서 예수님 믿습니다- 5 -니까?” 내려와서 예수님을 모시고 집으로 들어가서 잔치를 베풉니다. 예수님이 우리가정에 오셨다. 주님을모시고 주님이 그 가정에 큰 구원의 기쁨을 주십니다. “오늘부터 이집은 구원받은 집이다. 이제는 세리의 집이 아니다. 이집의 이제까지 있었던 삶은 완전히 지나가고 새 삶이 되었다. 새로운 피조물이다.” 할렐루야!예수님을 영접해서 이 가정에 큰 구원이 임하고 기쁨과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겁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에, 이나라와 이 민족에게 이런 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예수를 영접한 가정 누구나 삭개오 가정, 예수님을 영접한 나라 어느 나라나 삭개오의 나라, 예수님을 영접한 기업, 예수님을 영접한 개인 누구든지 하나하나 그 동네의 축복, 가문의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윤보선 대통령은 안국동 윤씨집 종손인데도 믿어서 그 종가를 주님에게로 인도합니다. 종가도 아니면서 나오는 게 얼마나 쉽습니까? 종손이 믿는 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이명박 대통령은 그 어머니가 안 믿는 집에,예수 믿는 어머니가 와서 기도해서 그 집안을 다 구원해서 대통령을 만들어 내는 기적이 일어나는 겁니다.우리 지역에는 상낙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예천군 상낙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 마을이 다 예수믿습니다. 얼마나 축복받은 마을입니까? 이 마을에 두 명의 나무꾼이 장날 나무 팔려고 갔다가 전도를 받고예수를 믿고 돌아와서 두 분이 교회 와서 교회를 세워서 상낙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이 마을이 예천까지 걸어서 50리길입니다. 그 깊은 산골 호랑이, 짐승만 사는 깊은 산골에 복음이 들어가서 이 마을이 복 받는 겁니다. 이 마을에서 재개의 거물도 나오고 그분 아드님 전성천 박사입니다. 예일대학을 나와서 장관도 하시고20년 전에 산골 마을에 교수가 18명, 목사님이 18명, 온 마을이 다 믿습니다. 대학교 총장도 나오고 이 마을에 축복입니다. 상낙이라는 마을이 복을 받는 겁니다. 교회가 들어가면 가정이 삭개오의 가정이 되고 삶이삭개오가 되고 나라가 삭개오가 되고 동네가 삭개오가 되고. “나는 삭개오같이 살리라.”예수 믿어서 시시하게 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이제 잘 믿어서, ‘나는 늦게 믿어서 되겠냐.’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서울대학교 늦게 들어가도 다 잘됩니다. 일찍 들어간 사람이나 늦게 들어가나 마찬가지입니다. 금년에 입학해도 그는 좋은 길이 열리고, 어느 대학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꼭 먼저 들어가야 된다’ 이런 생각하지 마세요. 늦게 들어가도 잘만 믿으면 최고로 잘됩니다. ‘명성교회 10년 전에 나왔더라면좋을 뻔했는데’ 아닙니다. 지금 나와도 잘 믿으면 얼마든지 추월할 수 있습니다. 오늘 모두 삭개오의 축복이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하나님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저희교회 처음 나오신 분도 많은데 큰 은혜를 주셔서 삭개오의 구원의 가정되게 하시고 구원의 인생 되게 하시고 우리대한민국도 예수 잘 믿어 온 나라가 복을 받게 하여 주시고 지금까지도 많은 은혜와 복을 받았지만 더 좋은 나라, 더 좋은 가정 만들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 제목 : 성경에서 솟아나는 감동 본문 : 딤후-03-14-

딤후 3:14-17

오늘은 성서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을 둘 들라고 하면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요 다른 하나는 성경입니다.

성경 유머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영국 제임스 왕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제임스 왕은 성경을 너무나 좋아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그 때 반역자 한 명이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사형수가 왕에게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나는 사형수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왕이 호기심에서 대답하였습니다.

<왕이 번역한 성경을 한번 읽고 죽고 싶습니다.>

왕은 너무나 좋아서 그렇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경을 다 읽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다 못 읽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유를 물었습니다. 성경은 모두 3만절이 넘는 데 하루에 한 구절씩 연구하며 읽고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왕은 감동을 받아서 말했습니다.

<집에 가서 성경을 다 읽고 죽어라.>

그리고 살려 주었습니다.

극동방송에서 늘 성경을 읽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한 명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그 동안에 불러준 성경을 다 베꼈는데 사무엘상 15장만 방송상태가 불량하여 적지 못 하였으니 다시 한번 불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였습니다. 일주일 후 다시 편지가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제서야 나는 성경 한 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 성경은 한 짐입니다.>

화이트 헤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은 나그네 인간의 안내서요, 순례자의 지팡이요, 조종사의 나침반이요, 십자가 군병의 무기요, 크리스챤 생활의 헌장입니다.

성경으로 낙원은 회복되며, 천국은 열리며, 지옥문은 닫혀진다.

성경은 문화의 광산이며, 영광의 파라다이스며, 환희의 강물줄기가 된다.

성경으로 머리가 채워지게 하고, 성경으로 마음을 지배하게 하고, 성경으로 네 행동을 이끌게 하라.>

판다이크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성경은 동양에서 나서 동양 옷을 입고 다니다가 가는 곳마다 자기 집이 된다. 성경은 제왕에게 하나님의 하인임을 가르쳐 주고, 궁전으로 들어가며, 빈민에게 하나님의 자녀임을 가르쳐 주고 초가로 들어 갑니다.

아이들은 재미롭게 그 이야기를 들으며 지식인들은 애써가며 그 진리를 연구하니 이는 무서운 때에 평화가 되며, 슬픈 때에 위안이 되며, 캄캄할 때에 빛이 되는 거룩한 책이다.

악한 자와 오만한 자는 그 앞에서 떨지라도, 회개하며 겸손한 자에게는 기쁨이요 평안이다. 그러므로 이 보화를 가진 자는 가난하거나 고독하지 않을 것이다.>

빅톨 유고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영국은 두 권의 책을 가지고 있다. 영국은 세익스피어를 만들었지만 성경은 영국을 만들었다.>

이같이 성경은 실로 놀라운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1:7-9)

1. 성경은 지혜를 주는 책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성경은 지혜의 책입니다.

이스라엘과 아랍이 싸운 1967년 6일 전쟁을 우리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1억명의 아랍을 400만의 이스라엘이 단 6일만에 이겼습니다. 25대1입니다. 도저히 상상도 못 할 전쟁입니다. 이 때 이스라엘 장군은 모세 다얀이었습니다. 그에게 전법이 어디에서 나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서슴치 않고 대답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전법을 배웠고 성경에서 지혜를 얻었습니다.”

죤 훌리(John Fully)박사가 노벨상 수상자 400명들을 15년간 연구하여 낸 책이 <유대인과 기독교인>(Jews and Christian)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기독교인이 64%, 유대인이 22%, 천주교가 11%, 불교인이 0.9%, 회교가 0.1%였습니다. 그 이유를 보니 성경을 읽는 이들이 97%였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 유대교, 천주교는 다 성경을 읽기에 셋을 합한 수입니다.

노벨상을 받은 이들의 나라는 모두 23개국이었습니다. 1등부터 7등까지 보면 스위스, 덴막, 스웨덴, 화란, 영국, 미국, 독일 순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확실히 성경은 지혜를 주는 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지혜의 저수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읽으면 읽을수록 지혜가 샘솟듯이 솟아 납니다.

그래서 단테의 신곡, 밀톤의 실낙원, 괴테의 파우스트, 세익스피어, 워즈워드, 테리슨, 브라우닝 모두 성경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작품을 썼습니다.

음악가 바하의 고난, 헨델의 메시야, 미켈란젤로의 모세상, 라파엘의 성모상, 머릴로의 거룩한 가족, 루벤의 십자가에서 내리심등은 성경에서 나온 명작들입니다. 성경은 지혜의 저수지입니다. 요즈음같이 어려운 때는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2. 성경은 기도응답을 주는 능력의 책입니다.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바울은 확신있게 살 수 있는 길은 바로 성경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자신감을 줍니다. 확신을 줍니다. 그래서 프랑스 군인들이 전투에 나갈 때에는 두 권의 책을 배낭에 넣고 간다고 합니다. 하나는 성경이고 다른 책은 파스칼이 쓴 팡세입니다.

논어와 맹자 그리고 공자 그리고 불경은 아시아의 빛입니다. 그러나 록키 산맥밑이나 테임즈강가에서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책입니다. 코란은 이란 사막의 등대입니다. 그러나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는 아름다운 초원에서는 코란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세계 어느 호텔 방에 들어가든지 성경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생이 살아가는 데 자신감을 주는 능력의 책이기 때문입니다.

T.A. 헤이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 곳 저 곳에 전하기에 불붙어 사는 이였습니다. 그는 브라질 벨로호리제텐이라는 도시에 출판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 가끔 들렀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 갈 때마다 주변 선교단체들을 일일이 방문하곤 하였습니다. 어느날 비행장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도로 사정으로 비행기 떠날 시간에 임박하여 도착하였습니다. 물론 태워주지 않았습니다. 좌석도 남아 있었습니다. 그 비행기로 선교단체 꼭 가야했습니다. 방을 동동 구르는 데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그는 하나님께 공항 대합실에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바로 그 때 안내 방송이 나왔습니다. 공항이 갑자기 안개에 싸여 비행기 이륙이 지연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헤그레는 하나님의 신비한 인도하심을 알고 비행기 표를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가 비행기에 오르자 안개가 걷히고 비행기는 이륙하였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교 교장은 성경을 펼치자 말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을 읽고는 너무나 장엄하여 무릎을 꿇으며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흑인 땅콩박사로 널리 알려진 카버는 하나님께 땅콩을 아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땅콩으로부터 수백가지를 만들어 냈습니다. 기름, 유약, 색소, 의약품, 각종 식품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것을 만든 그야말로 땅콩 박사입니다.

그가 어느날 상원의원들의 모임에 초정을 받았습니다. 그 곳에서 그는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땅콩으로부터 그렇게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까?>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아주 오래 된 책으로부터 지혜를 얻었지요.>

상원의장이 물었습니다.

<그 책이 무엇이요?>

그는 서슴치 않고 성경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성경책 어디에 땅콩에 대하여 말하고 있나요?>

이렇게 묻자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성경은 땅콩을 만드신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답니다. 나는 하나님께 땅콩을 가지고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지를 기도하며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마다 땅콩을 가지고 만들 수 있는 식품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같이 성경은 지혜를 주고 기도응답을 주는 책입니다.

3. 성경은 새 사람을 만드는 책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가장 많이 팔리는 책입니다.

성경은 매년 4천4백만권이 팔리고 있습니다. 미국의 모든 가정은 평균 6.8권의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권에 3 cm 만 하여도 1억 3천 200만 cm입니다. 1300 km 입니다. 쌓아 놓으면 백두산 높이의 500배쯤 됩니다. 일년에 그렇게 팔리고 있으면 10년이면 백두산 5000배 가량입니다. 상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만도 일년에 400만권 내지 500만권이 팔리고 있습니다. 영국에서만도 일년에 200만권 정도가 팔리고 있습니다.

성경은 가장 많이 읽히는 책입니다.

성경을 100독, 1000 독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느 책을 그렇게 평생 지니고 다니면서 많이 읽을까요? 세계 기독교인들은 20억명 쯤 됩니다. 한 사람이 평균 2장씩만 읽는다고 하여도 4페이지입니다. 그러면 80억 페이지입니다. 보통 책은 300페이지입니다. 그런 책으로 3천만 권쯤 됩니다. 매일 3천만권이 읽힌다고 생각하여 보십시오. 읽고 또 읽어도 또 읽어야 할 책이 성경책입니다. 가장 많이 읽히는 책입니다

성경은 가장 사람을 많이 변화시킨 책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온전케 합니다. 성경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고독한 사람이 성경을 읽으면 참 친구를 발견하게 됩니다.

어둠속에서 헤메는 사람이 성경을 읽으면 참된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길 잃은 사람이 성경을 읽으면 참 된 길, 진리, 생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굶주린 사람이 성경을 읽으면 생명의 양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슬픈 사람이 성경을 읽으면 위로를 발견하게 됩니다.

병든 사람이 성경을 읽으면 건강의 비결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약한 사람이 성경을 읽으면 강하고 담대한 능력을 받게 됩니다.

실패한 사람이 성경을 읽으면 성공의 비결을 발견하게 됩니다.

프라톤은 당시 세계 최대의 사상가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오늘 날 누구에게도 영향력을 미치지 못 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유명한 철학자였습니다. 당시에는 수많은 이들이 그를 흠모하고 따라 다녔지만 그의 말 때문에 회개하고 인생을 바꾼 사람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키바 랍비를 최고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로마까지 아키바 말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에는 그의 이름조차 잘 거론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수천년 전에 주신 말씀이 오늘까지 그리고 영원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찔러서 새 사람이 되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사람들의 마음과 영을 찔러서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한 사람의 간증을 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은 미국에서 제일 유명한 가수였습니다. 시카코 방송국의 프로그램 편성자였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에는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인기를 누리면서 예수님을 잃어 버렸습니다. 세상으로 흘러 갔습니다. 그는 예수님 없이도 살아 갈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고 오랜 세월을 살아 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생이 허무하여 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젊은 전도자가 설교하는 운동장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마음이 뜨거워 졌습니다. 예수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향수가 되살아 났습니다. 그 날 밤 그는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돈도 명예도 다 얻었다. 그러나 인생의 목적을 잃어 버렸었다.>

그 날 밤 그는 주님 앞으로 나갔습니다. 강대상 앞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생을 주님께 바치기로 서원하였습니다. 위대한 결단의 날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책상위에는 얼마 전에 친구가 작곡하여 보라고 준 가사가 있었습니다. 작곡을 시작하려는 순간이었습니다. 방송국에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전속 계약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두 배 이상의 돈을 지불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안하지만 나는 오늘 밤 제 목소리를 주님 앞에 드리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앞으로 제 목소리는 주님만을 위하여 사용될 것입니다.>

전화기를 내려 놓았습니다. 그 때 음률의 영감이 막 떠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작곡을 완성하였습니다. 그 찬송이 바로 이 곡입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는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 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 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그가 바로 빌리 그래햄 목사님 운동장 집회에서 변화받은 죠지 베브리 쉐아(Shea)입니다.그는 지금도 빌리그래햄 목사님 집회마다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새 사람을 만들어 줍니다.

성경 말씀 한 구절이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위대한 생애를 만든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 말틴 루터는 로마서 1:17<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란 말씀으로 강력한 변화를 받았습니다.

고아의 아버지 죠지 뮬러는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는 말씀으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설교가 스펄젼은 이사야 45:22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란 말씀이 일생 지배하였습니다.

썬다싱은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는 말씀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전도자 리빙스톤은 마태복음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라는 말씀을 붙들고 아프리카를 복음화시켰습니다.

김 활란 박사는 데살로니가 전서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는 말씀으로 살았습니다.

말씀은 이같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성경이 바로 그런 책입니다.

그렇습니다.

1. 성경을 지혜를 주는 책입니다.

2. 성경은 기도응답을 주는 책입니다.

3. 성경은 새 사람을 만드는 책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김 홍섭 판사가 있습니다. 그는 재판할 때에는 언제나 성경과 육법전서를 같이 책상에 펴놓고 재판하는 분이었습니다. 판결할 때마다 늘 이렇게 말하곤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당신이나 나나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대한민국의 법관이 되어 당신을 재판하게 되었으니 널리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혼하려고 하는 부부 사건을 맡게 되었습니다. 장농을 방안에 놓는 위치 가지고 싸우다가 결국은 이혼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 부양문제, 재산 나누는 문제가 합의되지 않아 재판을 하는 것입니다.

김 홍섭 판사는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와 살고 싶으냐?>

그 아이는 아버지 어머니를 양 손에 붙들고 함께 살기를 원한다고 울면서 말했습니다. 김판사는 이 모습을 보고 재판을 한 달 연기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그리고 성경 한 권을 주면서 고린도 전서 13장을 하루 3번씩 모두 100번 읽고 다음 재판에 임하도록 판결하였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그런즉 믿음,소망,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4-8,13)

이들은 계속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사랑이 없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성경이 주는 능력이었습니다. 운동력이 있는 살아 있는 말씀이 그들을 변화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드디어 이들은 이혼 소송을 취소하고 아름다운 부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늘 읽어야 합니다.

성경 유모어로 시작하였으니 성경 유머로 마치려고 합니다.

어느 분은 하루에 성경을 15장씩 읽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매일 15장씩 읽으려니 한 시간 가량을 읽어야 했습니다. 잊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결심하였습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멋도 모르고 15장씩 읽기로 작정하였습니다. 5장씩은 꼭 읽겠습니다.>

그리고 매일 5장씩을 읽었습니다.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3장으로 줄였습니다. 그것도 가끔 잊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결심하였습니다.

<하나님! 아침에 일어나자 말자 성경을 아무 곳이 펴고 손가락을 집겠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오늘 하나님께서 붙들고 살라고 하시는 말씀으로 알고 붙잡고 살겠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성경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손가락을 집었습니다.

<그가...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 27:5)

그는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나에게 오늘 자살하라고 하시겠냐? 하나님! 다시 말씀을 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성경을 펼치고 손가락을 집었습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요 2:5)

그는 하나님께 다시 한번 펼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펼쳤습니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

세 번이나 그렇게 한 그는 회개하고 하루에 3장씩 성경을 착실히 읽어 나갔습니다 =========================================================================================== 제목 : 핵심에서 이탈하지 않는다. 본문 : 딤후-04-06-

딤후 4:6-8.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6-8)

무슨 일이든지 어디든지 핵심이 있습니다.

양파를 벗기면 다른 양파가 있습니다. 벗기고 또 벗기고 계속 벗기면 마침내 핵심이 나오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일이도 핵심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핵심을 이탈하지 않고 하여야 그 일을 이루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말씀을 열겠습니다.

몽골을 통일한 징기스칸은 자기 나라를 완전 통일한 후에 세계 정복에 나섰습니다.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지배하였던 이가 징기스칸입니다. 그 때 몽골 인구는 겨우 200만명이었습니다. 동원할 수 있는 군사는 총동원하여 겨우 13만명 정도였습니다.

13만 군사로 아시아를 넘어 유럽까지 지배할 수 있었던 비결은 전쟁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었기 때문입니다. 징기스칸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핵심을 세 가지로 보았습니다.

1. 군사수보다 군사 훈련이었습니다.

훈련받지 못 한 군대는 오합지졸이라고 여겼습니다. 아무리 까마귀가 수 천마리 모여 있어도 조그만 어린 아이가 장대 하나를 가지고 가서 휘두르면 모두 도망치고 맙니다. 그러나 훈련받은 군사 한 명은 100 명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2. 무기입니다.

아무리 군대가 훈련을 잘 받았어도 무기가 형편없으면 나약한 군대가 됩니다. 무기가 좋아야 합니다.

3.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동력입니다.

몽골 민족은 말을 타고 넓은 광야를 달리며 목축하던 민족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말타는 데 익숙하였습니다. 징기스칸은 기동력이 두 배 빠르면 전력은 9배나 늘어나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말위에 말젓을 가공한 흰 음식과 붉은 음식 말린 고기를 얹어 놓고 반달칼을 주면 군사 한 명은 며칠 동안도 말에서 내리지 않고 종횡부진 달리면서 싸웠습니다. 재빠른 기동력을 적은 추격할 수가 없었습니다.

말위에서 먹고 자며 달릴 수 있는 기동력이 전쟁의 핵심이라고 징기스칸은 여겼습니다. 이런 장점을 가지고 있는 13만 군대를 가지고 세계를 정복한 것입니다.

반면에 징기스칸과 싸우는 군대는 싸우는 군대보다 보급품을 공급하는 후방 군대수가 더 많았습니다.

징기스칸이 제일 좋아 하는 말이 있습니다.

<성을 쌓는 자는 망한다.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이길 수 있다.>

몽골족의 조상이자 장군인 동유쿠트가 한 말입니다. 그리고 그의 무덤 묘비에 기록되어 있는 말입니다.

기동력이 최고 중요한 핵심임을 간파하고 온 세계를 지배한 징기스칸은 끊임없이 성을 쌓지 말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자 후손들은 궁궐을 화려하게 지었습니다. 그 곳에 금은보화를 채우기 시작하였습니다. 미녀들을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징기스칸이 이루어놓은 왕국을 100도 유지시키지 못 하고 망하게 하고 말았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핵심에서 이탈하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사형당할 날이 얼마 안 남았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 디모데를 향하여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가 오늘 우리가 들여다 보고 있는 디모데후서입니다. 바울이 이 땅에 마지막 남겨 놓은 글입니다. 바울이 쓴 성경 13권중에 마지막 성경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관제란 제사를 드릴 때 포도주를 붓는 제사를 말합니다. 전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제사의 마지막 순서입니다. 이제 인생의 마지막 순서가 되었습니다.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이렇게 말할 때에 바울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착찹하였을 것입니다. 이 때 바울은 자기 일생을 돌아보면서 선한 싸움을 싸운 일생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 말씀속에서 3가지 단어가 보이고 있습니다.

1. 싸우고

2. 마치고

3. 지켰으니

성공적인 전쟁의 핵심은 훈련과 무기와 기동력입니다. 그러면 성공적인 인생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이 세 단어입니다.

1. 싸우고

선한 싸움을 싸웠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고나>라고 되어 있는 데 이는 격투기 선수들이 혼신을 다 하여 싸우는 모습을 그리는 말입니다. 로마 원형 경지장은 2000년전에 세워진 운동장입니다. 그런데 5만명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그 운동장 가운데 사자같은 맹수와 사형수를 싸움을 시킵니다. 그러면 사자밥이 되느냐 살아남느냐 둘 중에 하나였습니다. 맹수와 싸워서 이기면 살려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생명을 건 결사적인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5만명의 군중들은 그런 실제적이고 잔인한 싸움을 보면서 즐겼습니다. 이 때 사형수는 죽느냐 사느냐의 싸움이라 그야말로 필사적인 싸움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에서 지냈으니까 이런 경기를 보았거나 들어서 알고 있거나 둘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생각하며 감옥에서 자기는 선한 싸움을 일생 싸워 왔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기 힘든 싸움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내가 가장 이기기 힘든 상대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솔로몬은 말했습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작가 최 인호와 김 수한 추기경이 이런 대화를 나눈 이야기가 잡지에 실렸습니다.

추기경이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도 긴 여행이 무엇인지 아세요?>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하자 김 추기경은 손을 들어 머리부터 가슴까지 만지면서 말했습니다.

<바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지요. 나 역시 평생 이 짧은 것처럼 보이는 여행을 떠났지만 아직도 도착하기엔 멀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항상 자기반성과 회개를 통해 조금씩 조금씩 우리 마음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하느님께 나아가고 예수를 닮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과오가 있다 하더라도 그나마 종교인들이 소금 역할을 해줌으로써 이 나라가 굳건히 지탱될 수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와 싸움이 얼마나 어려웠는 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자기와 싸워 이기는 것은 승리의 핵심입니다. 이 싸움에서 지면 모든 것에서 지게 됩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가장 승리하는 동물은 낙타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물은 모든 것이 신비롭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 낙카는 더욱 신비롭기만 합니다. 낙타를 사막에 살기에 적합하게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비밀입니다.

낙타의 머리는 사막의 모래바람을 견딜 수 있도록 눈썹과 눈두덩이 길고 두껍게 되어 있습니다.

허파를 보호하기 위하여 코에 예민한 근육이 있어 모래가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두꺼운 가죽과 털이 있어 낮의 태양과 밤의 추위를 견디게 합니다.

넓은 발굽은 뜨거운 모래 위를 걸을 수 있도록 합니다.

낙타 등의 육봉은 지방을 저장하는 곳입니다. 낙타 한 마리가 평균 45킬로그램의 지방을 육봉에 가지고 있어서 오랫 동안 먹지 않아도 육봉으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습니다.

낙타의 소변은 농도를 높여 수분의 배출을 최대한 줄입니다.

물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물을 되새김질합니다. 낙타 곁에 가보면 끄르륵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물을 되새김질하는 소리입니다.

사막의 밤낮의 일교차를 쉽게 견디게 하기 위하여 체온이 가변적입니다. 낮에는 41도로 올라가고 밤에는 34도로 내려옵니다. 물이 부족하면 주위의 조직으로부터 수분을 공급받아 체중의 25퍼센트까지 수분을 혈액에 빼앗기고도 살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물도 음식도 항상 되새김질하기에 두 번 먹고 마시는 것이 됩니다. 항상 내장 운동을 시켜서 건강하게 합니다. 낙타는 사막에서 자기와의 싸움에서 철저히 승리하게 만듭니다. 자기를 철저히 이기는 동물이 낙타입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는 이가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2. 마치고

<마치고>라는 말은 목표가 분명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산 정상에 오르려는 이는 정상에 도착하면 <다 왔다>라고 말합니다.

목표가 없으면 마침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 마쳤는 지 못 맞쳤는 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목표가 없는 사람은 반드시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목표가 분명하였습니다. 온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목표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바울은 이방인의 선교사로서 최종 목표가 있었습니다. 로마에 복음을 심는 것입니다. 당시 온 세계를 지배한 나라가 로마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온 세계를 지배하기 위하여 온 세계를 향하여 길을 닦았습니다.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복음이 그 길을 타고 온 세계를 향하여 뻗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바울의 생각은 그대로 맞았습니다.

로마 복음화는 온 세계 복음화였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복음을 심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여러분은 금년 두 달 남았는 데 <금년에 할 일을 다 마쳤다>라고 고백할 만한 목표가 있습니까? 나는 금년 12월 31일 <금년 할 일을 다 마쳤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12월 25일까지 1225시간 기도를 마치고, 성탄절에 300명 전도를 마치면 바울 처럼, 예수님처럼 외칠 것입니다.

<금년 목표를 다 이루었다.>

그리고 평생 다음의 것을 이루고 나면 다 마쳤다고 자신있게 하나님앞에 가고 싶습니다.

1. 우리 교회를 10,000 성도 교회를 이루고 나면 갈보리 교회를 향하여 할 일을 다 마쳤다고 외칠 것입니다.

2. 그리고 개인적으로 성막 쎄미나에 목사님을 5만명을 돌파 하고 나면 성막의 할일을 다 마쳤다고 선언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36,000명 공부를 하셨습니다.

핵심을 잃으면 안 됩니다.

성공적으로 인생을 바울처럼 마치려면 세 가지 핵심을 벗어나면 안 됩니다.

1. 싸우고

2. 마치고

3. 지켰으니

3. 지켰으니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믿음을 지켰으니

이는 오직 한 길을 걸어 왔다는 것입니다. 믿음 하나 지키려고 지금까지 헐벗고 굶주리고 매맞고 고생을 하여 왔습니다.

누가 무어라고 하여도, 상황이 어떻게 바뀌어도 믿음을 지키고 죽기까지 걸어가는 삶은 아름다운 삶입니다.

요즈음에 나온 새로운 법칙 하나가 있습니다.

<1만 시간의 법칙>

무엇에 전문가가 되려면 그 분야에 1만 시간 투자 원칙을 지키면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루에 3시간씩 투자 하면다면 10년 정도 그 일에 전념하여야 합니다. 하루 5시간이면 5년, 하루 10시간씩 투자하면 3년이면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을 지킨 이들이 큰 일을 하여냈다는 것입니다.

2009년 1월 16일 허드슨강의 기적이 있었습니다.

새벽이었습니다. 승객 155명을 태운 US air 비행기가 이륙후 4분만에 허드슨 강으로 추락하였습니다. 추락하는 그 당황한 순간에도 침착하게 지상으로 연락을 하였습니다. 강으로 추락하는 것을 알렸습니다. 지상에서는 대형 풍선을 실고 추럭이 달렸습니다. 조정사는 비행기를 물위로 미끄러지듯이 마치 활주로처럼 달리게 하였습니다. 모든 비행기 문을 철저히 닫았습니다. 온 세계가 집중하였습니다. 한 명도 죽지 않고 구출되었습니다. 조정사는 1만 9천 시간을 비행한 슬렌버거였습니다.

1만 시간의 법칙이 적용되어 해석되었습니다.

만일 1만 시간 이하로 비행한 조정사였다면 155명을 다 죽였을 것이라는 것이 해설이었습니다.

나는 이 설교를 준비하며 놀란 것이 있습니다.

지난 번까지 성막 쎄미나 240기를 끝냈습니다. 성막 쎄미나는 언제나 월요일 3시에 시작합니다. 언제나 수요일 1시에 끝납니다. 그러면 모두 46시간입니다. 240기면 나는 성막 쎄미나 한 시간만 10,040 시간입니다.

꼭 1만 시간을 돌파한 것이 지난 쎄미나였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국 초교파 기독교 협의회 회장님이 나를 만나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팔레스 호텔에서 만났습니다.

<강 목사님! 일년에 한번 시상하는 기독교 대상이 있습니다. 목회자 부분에서 한 명, 부흥사 부분에서 한 명, 선교사 부분에서 한 명, 남자 평신도 한 명, 여자 평신도 한 명 5명을 뽑아 일년에 한번씩 표창하는 한국에 기독교 노벨상입니다. 목회자 부분에 대상이 목사님으로 뽑혔습니다. 모두가 목사님을 추천하였습니다.> 나는 왜 내가 그 상을 받게 되었는 지 모릅니다. 꿈에도 생각하여 본 적이 없습니다. 단 한번도 생각하여 본 적이 없습니다.

금년이 19회입니다. 1회에 한 경직 목사님이 받으셨습니다. 두 번째 조 용기 목사님이 받으셨습니다. 신현균 목사님, 나겸일 목사님도 받으셨습니다. 그런 반열에 저를 넣어 주셨습니다. 나는 돌아 와서 안 받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직 자격이 안 된다.>이것이 제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변에서 만류하여 받기로 작정하고 세 주 지난 지금 처음으로 말씀드립니다.

성막 쎄미나를 21년 동안 지켰습니다. 36000명 목사님들이 공부하셨습니다. 10,040시간을 성막만을 위하여 지내고 받은 결과입니다.

날치라는 고기가 있습니다.

날치는 수면 위로 뛰어올라 가슴과 배의 지느러미를 펴서 공중을 활주하는 물고기입니다. 놀랄 이야기입니다. 한번 나르는 데 4. 5KM를 날기도 합니다. 어떤 때에 그런 힘이 생기는 것인가요? 두 경우에 그렇게 멀리 나른답니다. 하나는 다른 큰 물고기가 잡아 먹으려고 따라 올 때 그런 능력이 나옵니다. 또 한 경우가 있습니다. 즐거울 때 떼를 지어 자유롭게 공중을 비행하며 그렇게 멀리 나른다고 합니다.

우리도 핵심을 잃어버리지 않고 전진할 때에는 그런 능력이 나올 수 있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을 지키고 핵심을 잃지 않고 나갈 때 멀리 나를 수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말리브에 있는 페퍼다임 대학교 졸업식에 나는 가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이가 꼭 와 달라고 초청하여 일부러 갔었습니다. 그 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1천명 학생들이 학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평균연령이 40세 가까웠습니다. 고령의 졸업자 가운데 67세의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는 10명의 자녀와 27명의 손자 손녀를 가진 할머니였습니다. 그 할머니가 학사 학위를 받으려고 단상에 올라 갔습니다. 환호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 드디어 해내셨군요.>

<할머니, 잘하셨어요. 드디어 성공하셨어요.>

졸업식이 끝났습니다. 그 할머니는 자기 목사님을 만나 격정에 못 이겨 눈물을 흘리면서 목사님의 손을 꼭 붙잡고 말했습니다.

<목사님, 나에게 만약 믿음을 심어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내가 좌절할 때마다 나에게 새 힘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시작하자마자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핵심을 잃지 않고 믿음을 굳게 지킨 이들에게 하나님은 성취의 축복을 주십니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간 바울은 핵심을 벗어나지 않고 일하였습니다. 핵심을 벗어나지 않는 비결을 바울은 분명히 세 가지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런 이야기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아프리카 정글에 표범같이 생긴 치이타가 있습니다. 동물중에 가장 빠르게 달리는 동물입니다. 한 시간에 70 키로미터를 달릴 수 있습니다. 차와 경주할 수 있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치이타가 먹일 구할 다니다가 수 십마리 사슴들이 풀을 뜯고 있는 것을 멀리서 봅니다. 그러면 한 마리를 목표로 정합니다. 그리고 그 동물만 보고 맹추격을 합니다. 바로 옆에 다른 사슴이 있어도 멈추지 않습니다. 쉽게 잡아 먹을 수 있는 다른 동물이 옆에 가만히 있어도 관심도 없습니다. 오직 처음에 정한 그 목표물만 바라 보고 달립니다. 그리고 기어코 그 동물을 잡아 먹습니다.

바울 사도는 오직 전도만을 위하여 일생을 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사형당하기 직전에 이렇게 고백하고 죽었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6-8)

한 마디로 말합니다.

바울은 평생을 핵심에서 이탈하지 않았습니다. =========================================================================================== 제목 : 언약백성과 기도 본문 : 렘-33-01-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라 무리가 이 성읍의 가옥과 유다 왕궁을 헐어서 갈대아인의 흉벽과 칼을 막아 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와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 시체로 이 성에 채우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의 모든 악을 인하여 나의 얼굴을 가리워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여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내게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나의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것이요 나의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강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렘 33:1~9) I. 본문의 배경 유다 나라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기 전 하나님께서는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에 보내신 뜻을 상기시키셨고, 불순종과 악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 백성답게 살도록 축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지루할 정도로 이어진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끊임없이 우상숭배의 길로 나아갔으니,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시위대 뜰에 갇혀있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로 됨과 포로귀환에 이르는 앞으로 전개될 역사, 곧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 백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II. 언약백성을 다루시는 하나님 본문 말씀에는 하나님이 언약 백성을 다루시는 섭리적 방식 네 가지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A. 진노: 버려두심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 앞에 올바르고 덕스러운 삶을 살면 그것이 우리 힘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같은 공식을 행악하는 데 적용해서도 안 됩니다. 마음으로 악을 행하고 죄를 짓고 하나님이 그것을 막아주시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에게는 악을 행할 능력은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인간이 형언할 수 없는 수많은 방법들로 마음에 품은 죄악들이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지 않도록 억제하시고 막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가 완고하고, 하나님의 공의의 원칙에 위반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냥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라기보다 자신의 악한 의지대로 하나님을 떠나 살게 하심으로써 그 고통을 맛보아 하나님 안에서 순종하는 삶이 얼마나 복된지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로마서는 이방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커다란 진노가 그들이 마음에 원하는 대로 살도록 정욕에 내버려 두시는 것임을 분명히 밝힙니다(롬 1:24) 불신자들을 향한 내버려 두심은 절대적 방임인 반면, 언약백성들은 상대적으로 잠시 내버려두심으로써 그들이 악의 결과가 얼마나 쓰라린지 몸소 체험하고 인격적으로 깨달아,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지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행악하고, 불순종하자, 하나님은 붙드신 손을 잠시 놓으셨고, 앗수르에 의해 북왕국이 망한데 이어,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서 파멸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 가운데 어떤 이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을지 모릅니다. 행악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데 일체의 속박을 느끼지 않고 양심의 가책마저 멈추었다면, 분명 죄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잠시 버려두신 것입니다. 누구도 그 가운데 항구적인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 바깥에서 얻으려는 자유는 잠깐 해방의 기쁨을 주지만 그것이 끝나고 난 후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속박이 다가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참한 포로생활 가운데 마음이 겸비해졌습니다. 고통의 순간에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부르짖으며 하나님을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B. 치료 : 고쳐주심 그때 하나님은 치료를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내가 이 성을 치료하고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의 풍부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치료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신적 성품 두 가지를 보이십니다. 하나는 바로 평강의 풍성함입니다. 이 평강(shalom)은 하나님과의 평화로 말미암아 사람들 사이에서 혹은 개인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안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평강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까지 포함합니다. 욕망에 이끌려 하나님 앞에서 행악하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말씀과 기도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제일 먼저 마음의 평강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불안과 동요에 자신의 마음이 굴복하고, 그 속에서 거짓된 평화를 잠시 맛보고자 하는데, 이 세상의 즐거움과 쾌락에 대한 탐닉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하고 무궁한 평강을 흉내 내고, 그것을 하나님 바깥에서 누려보려는 것입니다. 거짓된 평강 뒤에는 더 큰 악의 심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과의 평화가 있으면 세상이 요동치고, 시련의 한복판을 지날 때에도 마음속에 평강이 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이 거기서 나오고 천만인이 나를 에워쌀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바로 그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옵니다. 곧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현재적으로 누리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평강을 잃어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뉘우치는 자들을 치료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평강의 하나님이심과 당신과 평화를 맺는 모든 이들에게 험한 폭풍우 속에서도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풍부히 드러내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을 예고하시면서 그들에게 당신의 성실하심을 보여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하나님의 진실한 성품에 기초하여 인간과 맺으신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신적인 행동의 일관성을 말합니다. 곧 자비와 사랑에 기초한 하나님의 행위의 신적인 일관성입니다. 그런데 언약 없이는 이것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이고유한 의미에서 성실하심은 자연 모든 세계보다 언약 백성들에게 나타납니다. 이러한 언약 관계 안에서의 성실하심을 가르쳐서 우리는 신실하심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주님의 은혜를 배반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불순종하고 악을 행할 때 종아리를 걷어 피가 나도록 회초리를 때리십니다. 그러나 피가 맺히도록 맞을 때 여러분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지만 때리시는 주님의 마음에는 피가 흐릅니다. 그 마음을 알고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이 바로 회개가입니다. 당신을 멀리 떠난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마음에 피가 흐르면서도 회초리로 모질게 때리시는 그 끔찍한 징계를 통하여 범죄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고 역사 속에서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일관된 사랑을 느낄 수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기까지 부를 수 없었던 노래를 애가 속에서 선지자가 부른 것입니다. 아무 희망 없이 하나님에 의해서 내동댕이쳐진 것같이 버림받은 이스라엘의 역사의 심판의 장에서 그는 범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C. 용서: 회복시키심 주님은 이렇게 당신의 평강과 성실의 풍성함을 보이시면서 세 번째로 용서를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그들을 회복시키시는 것이었습니다. 때가 되자 포로기간이 끝난 것을 미리 알리시고,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보이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언약 백성들의 죄를 끊임없이 용서해 주심으로써 그들을 당신과의 관계 안으로 불러들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녀 됨을 후회할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자녀 삼으신 것을 후회하시는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불순종과 죄에 의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질 때마다 용서의 길을 예비하셔서 다시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게 해 주십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언약 관계 속으로 부르셨을 때, 특별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 사함을 성취하시고, 그의 몸에 한 지체로 삼으셨을 때, 은혜 언약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특권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잘못이 무엇이든지 마음의 중심으로 용서를 빌면 우리의 의로움이 아니라 아들이 우리를 위해 쏟으신 그 공로를 의지하여 용서해 주시기로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는 용서 받기에 너무 무거운 죄는 없습니다. 따라서 한 사람이 불순종의 길에서 떠나지 않고 영원히 하나님 앞에 범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명예를 현저히 해치고 스스로 불행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돌이킨다면 그 끔찍한 죄 가운데 그들이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를 경험함으로써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 드러내는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슴 속에는 우리를 그 끔찍한 죄에서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새겨집니다. 사도 바울로 하여금 모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복음에 빚진 자가 되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 같은 신적 강제력에 사로잡히게 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주님께 또 다른 구약의 율법을 부여받아서나 저주와 심판이 무서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같이 죄인 중의 괴수요, 흉악한 인간 중에 가장 포악한 핍박자였던 자신을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영혼 깊이‘그리스도의 노예’라고 하는 놀라운 사실을 지울 수 없도록 아로 새겨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하시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종종 주위에서 아주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곧 같은 죄악에 미끄러지는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의심합니다. 아마도 얼마 전에 그들의 회개는 가식이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하게 회개한 것도 사실이고, 또 은혜에서 금세 미끄러져 믿을 수 없을 만큼 옛생활로 돌아간 것도 사실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 둘 사이의 모순이 바로 정결의 개념에서 발견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여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고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에 대한 용서만 말씀하시지 않고, 그들을 깨끗케 해 주실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 때에는 그 죄가 끔찍하게도 밉지만 그 속에서 동일한 죄를 향해 기울어진 습성은 그렇게 뜨겁게 흐르는 한 번의 눈물로 씻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아래 거하여야 합니다. 자신의 뼛속 깊은 곳까지 배어 자신이 알 수 없는 그 타락한 본성과 죄 짓기를 원하는 악한 성향들을 말씀의 빛으로 탐사하여 발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없음을 절실히 깨닫고 매일 열렬하고 간절한 기도로 맨 처음 회개하고 돌아왔던 그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물론 그는 주님의 찢으신 육체로 갈라진 휘장을 지나 맨발로 그 길을 걸어 보좌 앞에 새롭고 산 길에서 무릎을 꿇어 하나님 아버지를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그리스도의 피로 모두 씻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주님의 놀라운 사랑은 오직 시작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한번 주님의 사랑을 받고 다시 죄로 돌아가는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겸손해야 되는지, 얼마나 주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하는지, 얼마나 하나님의 은총에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하는지, 또 얼마나 자기를 미워하고 십자가를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지 날마다 알아가야 합니다. D. 기쁨: 강복하심 이렇게 될 때에 하나님이 용서하신 이 사람을 정결하게 하시면서 그에게 기쁨이 되게 하시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강복하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내게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나의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나의 이 성읍에게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강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사랑이 사라진 마음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지 묻는 것이 아니라, 어느 선까지는 하나님이 채근하지 않으실까 묻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구원은 그런 식으로 이해될 수 없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아는 성도의 질문이 될 수 없습니다. 낭떠러지가 아니고 벼랑이라면 끝까지 가보겠다는 마음일 뿐입니다. 그것이 확장 되어서 결국 자신의 인생을 벼랑 끝에 세우게 됩니다. 당신을 멀리 떠나서 죄로 어두워진 이 땅에 작은 반딧불이라도 하나 밝혀 사람들에게 희미하게나마 빛이라도 던져줄 수 있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 같이 쓸모없는 사람을 위해 자기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위해 구원해 주신 주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 마음 최대의 소원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III. 기도하는 자에게 알리심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언약 백성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비밀을 알게 하시려고 선지자에게 ‘기도하라’고 명하셨습니다.“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A. 부르짖는 자와 교통하심 주님은 부르짖는 자와 교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부르짖음은 마음을 물같이 쏟는 간절한 외침이자 경외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목소리를 높여 소리치는 것만이 아니며, 말 없는 탄식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중심으로 부르짖는 사람들 곁에 가까이 계셔서 당신의 위대한 일들을 그들에게 미리 보이시고,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일을 성취하십니다. 이성의 능력이 뛰어나서 어려운 교리를 듣고도 남보다 잘 이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견고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기도 속에 마음을 쏟지 않는 사람보다는 적은 지식을 가지고 기도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쏟는 사람이 훨씬 거룩해지고 견고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물론 많은 지식을 가지고 많이 마음을 쏟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그는 거목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수많은 작은 새들이 그 나무 아래 깃들도록 하고, 물을 머금어 메마른 대지에 물을 공급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나무들과 얽혀 교회에 뿌리내릴 것입니다. B. 기도하는 자를 기뻐하심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와 교통하실 뿐만 아니라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여기서 비밀은 히브리어로 감추어진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감추어 놓으신 것을 마음을 쏟으며 그분께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터인데, 이는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가장 잘 아는 길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는 볼 수 없었던 진리들을 주님을 사랑할 때는 발견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신앙의 성장입니다. III. 결론: 기도하라 만약 우리가 불신자들이 포기하는 그 지점에서 포기하고, 불신자들이 잔재주를 부리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지점에서 정면대결을 피하고 돌아갈 길을 찾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고 그 분과의 평강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어디에 있습니까? 삶과 죽음 사이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주님의 능력에 붙들려 사는 사람들에게 능치 못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도전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돌아와 용서를 비는 자들에게 사죄의 은총을,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는 자들에게 은혜의 능력을, 그리고 갈 길을 몰라 자신의 무지함을 고백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인생의 심각한 위기를 맞아서 머리를 쥐어뜯을 정도로 절망하면서도 그 에너지를 기도에는 쏟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와서 자신의 방황하는 모든 마음을 그대로 구하고, 주님만이 나에게 진정 위로가 되심을 분명히 깨닫고, 사람과 세상에 걸었던 모든 소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종종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 삶에 대하여 양심이 여러분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받아들여지는 것은 우리의 좋은 행실과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그 보좌에 이르는 새롭고 산 길을 주님이 피 흘리심으로 여셨기 때문인 것을 말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신실하고 충성되게 살 때만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것이 아니라 실패한 인생의 벼랑 끝에서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생의 벼랑 끝에서 여전히 우리가 돌아오도록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을 쏟아 아버지 앞에 기도의 보좌로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이길 수 없는 현실을 이기게 만드시고, 도저히 극복할 길이 없는 그 난관을 생각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극복하게 하십니다. 또한 주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벼랑 끝까지 걸어오게 된 자신의 악함을 인해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의 어깨위에 날개를 달아, 주님을 향해 날아오르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이렇게 열한 번에 걸친 기도 시리즈의 막을 내립니다. 설교의 시리즈는 막을 내렸으나 여러분의 기도생활의 시리즈는 막을 올려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십시오. 우리가 방황하고 때로는 넘어지나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인 것을 마음을 쏟는 기도 속에서 보이십시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그의 피로 여러분을 사신 것을 기억하십시요.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 신실하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주님 앞에 신실한 사람들이 되어서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도록 그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 제목 : 사차원의 삶 본문 : 렘-33-02-3 “일을 행하시는 야훼,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야훼, 그의 이름을 야훼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2~3)주님이 이 자리에 와 계십니다.옆에 계신 분들에게 당신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인사해 주십시오.<서론>“사차원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한번 따라 말씀해 주십시오. 사차원의 삶. 사차원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기하학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두 점 사이에 선을 그으면 그 선을 기하학적으로는 선. 이렇게 말하지 않고 1차원이라고 부릅니다. 1차원. 그 1차원이 많이 그어 놓으면 뭐가 됩니까? 평면이 되지요. 그지요? 이런 평면 분석을 하면 선을 그으면 많은 선이 합쳐가지고서 평면이 됩니다. 이는 1차원이 돼요. 그리고 이 평면을 쌓아 놓으면 입체가 되지요. 3차원이 됩니다. 그러면 3차원은 더 이상은 어떻게 되느냐. 없어요. 3차원을 둘러 쌓고 있는 4차원이 있습니다. 그 4차원이 제가 늘 여러분께 말하는 우리 인간의 생각과 이해, 꿈과 환상, 믿음, 입술의 고백 이러한 것은 형체가 없습니다. 선도 없고, 평면도 아니고 입체도 아니고 형체가 없어요. 그리고 여러분의 생각은 4차원에 속해요. 여러분의 꿈과 환상도 4차원에 속해요. 여러분의 믿음도 믿습니다! 4차원에 속해요. 왜냐면 보여줘요. 믿음. 못보여주지요? 4차원에 속해요. 그 다음에 여러분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기쁩니다. 나는 성공합니다. 나는 승리합니다. 어디 행복 한번 보여줘요. 보여줘. 기쁨을 한번 보여줘. 땅팔 노릇입니다. 보여줄 수 없어요. 보여주지도 못하면서 뭘 있다 없다 하느냐? 안보여도 있는 것은 4차원에 속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창세기 1장 1절로 3절에 보면 처참히 파괴된 3차원의 세계가 있습니다.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더라.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거든요.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더라. 그런데 그 위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더라. 비유컨대 여러분의 삶을 땅으로 취급합시다. 우리 땅에 속해 있으니까. 우리가정, 우리사업, 우리생활 우리 다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이게 내 마음이 내 삶이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처참합니다. 삼차원의 세계 보이는 세계는 다 말할 수 없이 뒤죽박죽이 되어 있어요. 병들고, 못먹고 살고 못입고 형편없어요. 그럼 이것을 누가 고치느냐. 그 위에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더라. 땅, 눈에 보이지요.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 눈에 보이는데 하나님의 신은 눈에 안보입니다. 하나님의 신을 보신 분 한번 손들어 봐 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성령은 안보이니까 없지요 그죠? 없지요? 솔직히 말하세요. 안보이는데 왜 있어요? 안보여도 하나님의 신은 있거든. 그것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는 것은 일차원, 이차원, 삼차원 위에 사차원인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자 성경에 삼차원의 세계가 만들어집니다. 빛이 있으라. 눈에 보이는 빛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경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창 1:1~3)높은 차원이 낮은 차원을 다스립니다. 일차원은 이차원 평면이 다스립니다. 평면은 입체가 다스립니다. 입체는 사차원 생각이 다스립니다. 꿈이 다스립니다. 믿음이 다스립니다. 말이 다스립니다. 그 때문에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산, 집, 생활. 이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여러분 속에 있는 사차원 말씀으로써 여러분 생각을 다스리면 여러분 생각이 환경을 다스리고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꿈, 환상이 현실을 다스리고 믿음이 내 믿음대로 될지어다. 현실을 다스리고 내 입술의 말이 현실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내 말한 대로 될지어다. 그러므로 이 사차원의 세계를 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이 발달해도 아직까지 우주의 신비에 대해 3% 밖에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듣고 보는 것의 대부분에 대해 인간은 무지한 것입니다. 인체에 대해서도 인간은 마치 다 알고 있는 듯 말하지만 90% 이상 인간의 인체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한 세계적인 암 전문가는 “과학이 10년을 노력해서 이만큼 발전해서 가보면 하나님의 세계가 우주보다 더 크게 열려져 있다는 것을 발견할 뿐이다.” 아무리 발견해도 이 발견한 것은 그보다 더 우주만큼 큰 하나님 세계가 앞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떠한 노력으로도 광대한 우주의 세계를 알 수 없습니다. 뉴욕 하이덴 천문대의 한 천문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문학자 중에서 무신론자를 만나본 적이 없는데, 우주의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연구하는 천문학에서는 우주의 위대한 설계자이신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것 뭣도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이 어디 계셔? 내 주먹을 믿으라. 하나님 안계신다. 그런 엉터리 같은 말을 하지. 조금이라도 지혜 있고 학식 있는 사람은 아 숫제 모르면 모른다고 하지 하나님 계신 것은 틀림없어도 나는 너무 크시기 때문에 모릅니다. 내 생각으로는 내 지혜와 총명으로는 알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솔직한 사람이고 좋아요. 모른다는 것은 모르니까 모르는 것이지. 모르면서도 아는척하고 하나님 어디 계시냐? 내 주먹을 믿으라. 그런 건방진 소리하는 그 주먹은 얼마 안있어 썩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삼차원의 세계는 인간의 그 어떠한 과학으로도 알 수 없는 4차원의 세계에 의하여 창조되고 둘러 쌓여 있는 것입니다. <본론>1. 일을 행하시는 야훼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은혜를 받고자 하는 것은 첫째, 일을 행하시는 야훼,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야훼에 대해서 알아 보십시다.야훼는 하나님은 영이시라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라. 사차원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사차원의 근본이기 때문에 삼차원인 인간세계는 물질세계는 하나님이 다 지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꿈대로 하나님의 믿음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인간 세계는 다 다스려지고 운행하는 것입니다. 이 세계와 만물이 움직이는 근원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그 근원을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엄청나게 훌륭하게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에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보면 모든 만물은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궁창이 생겨나라. 명령하셨지만 사람은 하나님께서 명령해서 만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 이 만물을 다스리게 하자.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졌느냐?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이 하나님께 명령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께 사람 만들어라. 누가 만듭니까? 내가 만든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손길이 만들었는데 사람은 하나님이 하나님께 명령해서 네 형상대로 나오라. 그래서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개나 고양이나 원숭이나 사자나 곰이나 사람이나 같다. 어림도 없는 소리하지 마십시오. 안같습니다. 그런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지었지만 사람은 하나님이 직접 당신 자신이 비추어서 하나님의 손으로 지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손으로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차원적인 영인 것이므로 여러분도 영입니다. 영이 육체 속에 사는 것입니다. 사차원이 삼차원 속에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도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삼차원의 세계를 매니지하고 다스리는 것처럼 여러분도 여러분이 생각을 통하여 꿈을 통하여 믿음을 통하여 말을 통하여 삼차원의 생활을 매니지하고 다스리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의 인생을 매니지하고 다스리고 돌보는 일을 자기의 생각을 다스리므로 자기 소원과 꿈을 다스리므로 자기의 믿음을 다스리므로 자기 입술의 말을 다스리므로 자기의 운명을 다스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든 것이 내 운명이요 팔자라고 말하는데 운명이나 팔자를 우리는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은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해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꿈꾸고 하나님 말씀을 의지해서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말하게 되면 그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처럼 다스리고 창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면서 하나님처럼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을 갖고 다스리고 생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 예수를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따라서 살면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적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같은 생각, 같은 꿈, 같은 믿음, 같은 말씀을 하므로 작은 하나님이 될 수 있다. 굉장히 여러분 귀하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I'm wonderful person. 나는 귀한 사람이다. 이제 조금 더 들어 보세요. 깜짝 놀랄 일이 말씀을 할테니까.요나를 하나님께서 훈련하실 때 놀라운 경험을 통해서 훈련했습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통해서 바다의 파도와 기후, 여러 가지 일을 다스리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요나는 선지자중의 한 사람이며, 가드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로 하나님으로부터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대한 심판을 외치라는 명령을 받았었습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40일 만에 멸할 것이다. 하나님이 40일 만에 파멸할 것이다. 그러므로 왜쳐라. 그런데 요나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항상 앗수르의 침략을 받으니까 40일만에 회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멸하겠다고 하니까 이렇게 좋은 소식이 어디 있느냐? 우리가 직접 칠 필요가 없이 하나님이 때려서 망하면 얼마나 기쁘고 좋은 일인가. 우리 사람들도 그런말 생각할 때가 있지요? 굉장히 내가 원치 않고 미운 상대방인데 어휴 저 사람이 손대지 않고 하나님이 그냥 막 확~ 해줘버리면 내 맘이 시원하겠다. 그래서 이 요나가 니느웨로 가는 배를 탄 것이 아니라 욥바에 내려가서 다시스로 니느웨 정반대로 가는 배를 표를 샀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로 가라고 하는데 그는 다시스로 정반대편으로 가는 배를 탔는데 그 배가 지중해 가운데 가다 큰 풍랑이 와서 배가 완전히 파산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사공들이 아주 기가 막힙니다. 그러나 요나는 배 밑창에 들어가서 잡니다. 왜, 나는 절대로 하나님 명령에 순종 안할테니까 아주 죽을 각오했으므로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걱정할 것 없다. 나는 다 맡겼다. 잡니다. 그런데 사공들이 와서 깨워 일으켜서 너 누구게 이런 풍랑에 발뻗고 자느냐? 빨리 일어나서 제비 뽑으라. 이 풍랑이 누구를 통해서 오는지 알아보자. 제비뽑자. 보통 때 다 제비뽑으라는 것은 아니에요. 이는 특별한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기도도 할줄 모르고 하니까 제비뽑을 수밖에 없지. 그 제비를 뽑으니까 제비가 딱 요나에게 떨어져요. 이는 누구냐? 왜 풍랑을 만났느냐? 요나는 솔직히 말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사람으로 하나님이 니느웨에 가서 회개하지 아니하면 40일 동안만에 망한다는 말씀을 전하라고 해서 니느웨가 망하는 것을 보고 싶어서 반대되는 다시스로 가는 이 배를 탔다. 나 때문에 이렇게 풍랑이 왔으니까 나는 회개 안할테니까 나를 바다에 던져라. 아 지독한 놈이지요. 어지간하면 회개할 터인데 나 죽어도 회개 안한다. 하나님이 요나가 그런 생각을 할 것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해 놓았었어요. 그래서 사공들이 요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지니까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배 뒤에 따라오던 큰 물고기가 입을 벌리고 왠 떡이냐? 그냥 삼켜 버렸습니다. 그러자 즉시 바람이 잠잠해지고 바다가 잠잠해졌습니다. 야~ 이것 사람의 생각과 힘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하시는구나. 그것을 하나님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주와 만물을 하나님이 다스린다.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4절에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이시다.그 하나님이 큰 주재이시니까 여러분과 나는 조그마한 주재인 겁니다. 하나님 따라 다니면서 하나님 심부름하는 꼬마 주재에요. 요나서 1장 12절에 보면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우리가 하나님과 틀리면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믿고 순종을 잘하면 하나님이 우리 환경을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전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리하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너 복주는 자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에게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 하리니 네가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나님이 복을 주면 복의 근원이 돼요. 그러므로 여러분이, 여러분이 사는 동리나 여러분의 나라에나 여러분의 집안이나 복의 근원이 될 수도 있고 화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축복을 가져오는 당사자가 될 수도 있고 저주를 가져올 수 있는 당사자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요번이 G20 전세계 부자나라 세계의 85%의 생산을 하는 부자 나라들이 오잖아요. 열 나라 중에 아홉 나라는 기독교 국가입니다. 다 예수 믿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니까 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도 크게 축복을 받았다 말입니다. 어제 텔레비에서 해설하는 사람도 못내 그 말을 하더군요. 하는 말이 왜 지금까지 이 G20 모임이 전부 기독교 수도에서 갖게 되었느냐.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잘사는 나라는 다 예수 믿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불교 국가나 이슬람국가나 그런 나라에 이것을 가져갈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그 텔레비를 보면서 그것 좀 더 보탰으면 좋은데 우리나라도 이렇게 잘살게 된 이유는 복음이 전파되어서 그렇다고... 그말 한마디만 했으면 좋을뻔 했는데... 왜냐하면 여러분 우리나라가 60년 전에만 하더라도 이 세계에서 제일 못사는 나라가 우리 한국이었습니다. 제일 못살아요. 두 번째 못사는게 아닙니다. 제일 못살아요. 국민의 1년 소득이 60달러였습니다. 불과 60년 전이었어요. 60년 전. 우리가 해방 되었을 때... 거기에다가 6.25사변을 겪어서 전쟁까지 겪었으니 완전히 have no 지... 그런 나라가 한 세기도 되기 전에 이 세상에서 12번째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 이것은 누가 뒤에서 밀어주고 위에서 부어주고 앞에서 끌어주지 아니하면 이렇게 될 턱이 없어요. 턱이 없어. 저는 실제로 이런 좋은 날 볼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일정시대에 태어나서 자랐고 6.25를 통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밥이나 안굶고 살아봤으면 좋겠다. 그런 제가 요사이 밥이 너무 많아서 감당할 수가 없어요. 우리 성도들이 다 밥주겠다고 오라고 하는데 밥만 얻어 먹으려면 죽을 때까지 스케쥴 짤 수 있어요. 말씀 전해주고 기도해주고 밥 얻어먹고... 하나님이 축복을 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불과 100년도 되기 전에 5만교회, 1,200만 성도가 되었습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세계에서 이렇게 제일 큰 교회가 세워질 줄은 온 세계에서 몰랐어요. 한국에 이런 교회가 세워질줄... 그래서 이 G20에 우리 대통령만 바쁜 것이 아니라 저도 굉장히 바뻐요. 왜냐면 모두다 오는 나라가 기독교 국가에서 오기 때문에 그들 다 하는 말이 뭐냐면 제일 첫째, G20 회의에 참석하고 둘째, 여의도순복음교회 참석하고 오느라고... 그게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아니고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는 하나님이시고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 잘 믿으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고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느웨에 가지 아니하고 다시스로 가던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했습니다.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니까 기가 막히거든. 그러니 사람이 아무리 완악해도 대단히 어려우면 회개합니다. 풍랑도 회개 못시켰는데 물고기 뱃속에 캄캄한 뱃 속에 사흘동안 들어앉아 있으니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러니까 회개하니까 하나님이 명령하시매 물고기가 니느웨 해변에 와서 확 토해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요나가 밖으로 나오자 물고기도 사흘 동안 소화가 안되어서 배가 아파 견딜 수가 없었는데 어~ 시원하다. 앞으로 인간은 절대로 먹지 말아야 되겠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 성에 가서 성 이곳에서 저 끝까지 이틀을 걸어가는 성입니다. 자동차 탄 것이 아니라 자동차가 없었으니까 걸어서 이틀 걸리는 성이니까 굉장히 큰 성이지요. 이틀동안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40일 만에 이 성이 하나님의 심판받아 망한다고 했는데 놀랍게도 그 성 사람들이 전부다 마음이 노골노골해요. 이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금식하고 통회하고 자복하고 회개를 해서 변화되니까 하나님 마음도 변화된다 말입니다. 40일 동안 복음을 증거하고 난 다음 앉아 가지고서 니느웨 망하는 몰골을 보겠다고 요나가 기다리는데 햇빛이 내리비치고 동풍이 불어오니 얼마나 덥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하루저녁 자고 나니까 박넝쿨이 하나 생겨서 입사귀가 머리를 촥 가리우는데 어~ 시원하다. 아~ 시원하다. 이럴 수가 있느냐. 박넝쿨이 나다니... 그런데 하루만에 박넝쿨이 벌레가 기어와서 싹뚝싹뚝 잘라먹고 바짝 말라 버려요. 동풍이 불고 햇빛이 비취니 덥고 땀이 나고 못견디겠어요. 막 불평을 말하고 아~ 박넝쿨이 나서 시원하게 앉아있는데 하나님이 나를 안돌봐주셔서 벌레가 와서 먹어버린 이 쪼글쪼글 박넝쿨이 쪼글쪼글 대고 나는 더워서 죽겠으니 이럴 수가 있느냐고..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야 알겠지? 박넝쿨이 하루저녁에 이렇게 우거질 수 있느냐? 하나님이 아니고는 그렇게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축복하니까 박넝쿨이 하루저녁에 머리를 덮었다. 그러나 하루저녁에 하나님이 벌레 한 마리를 명령하니까 벌레가 와서 박넝쿨을 잘라버리니까 말라 버렸다. 하루 저녁에 박넝쿨이 났다가 하루 저녁에 말라버리는 것도 하나님이 섭리하시는데 하물며 이 성에 앞길을 가리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이 얼마냐? 12만명이 있다. 그리고 짐승들도 많다. 어른들은 죄를 짓고 나빠도 애들은 너무나 억울하지 않느냐. 불쌍하지 않느냐.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성에 있는 생명들을 아끼는 것은 마땅한 일 아니냐?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모든 일을 돌보신다는 것을 증명해 준 것입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는데 큰 일도 적은 일도 은혜를 베푸십니다. 마태복음 10장 30절에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다.시편 17편 8절에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그 머리털 수를 다 하나님이 헤아려 알고 계십니다. 에이~ 세세하게 이런 머리털까지 하나님이... 박넝쿨도 하나님이 일어나고 벌레도 하나님이 기어오게 만드신 것입니다.마태복음 6장 31절로 32절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얼마나 큰 축복을 받고 얼마나 큰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이 모든 것이 믿음만 가지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환경은 삼차원의 세계는 사차원의 세계인 믿음만 가지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시편 127편 1절로 2절에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1절로 2절 “야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삶이란 집을 짓고 생업이라는 성을 쌓는데 하나님이 안도와주시면 집을 짓고 성을 쌓는 일이 엄청나게 불가능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 삼차원의 세계에 집을 짓고 생업을 이행하는 삼차원의 세계 우리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다. 삼차원의 세계를 삼차원으로 해결하려면 힘듭니다. 그러나 삼차원의 세계를 하나님이 주시는 사차원의 세계로 해결하자면 차원이 높으니까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룬 그 어떤 과학 기술 문명도 하나님이 한번 콧김을 불어 보시면 그로써 끝장입니다. 인간의 과학이나 수단이나 방법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문을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아 놓으면 열자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란 집을 짓고 생업이라는 성을 쌓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아 주시지 아니하시면 이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또 헛되고 헛되게 무너지고 흐트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9편 10절은 “야훼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여러분을 안버리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찾으시면 우리는 삼차원의 세계 속에 삽니다. 사차원의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운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구와 같아서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눈에 보이지만 눈에 안보이는 하나님이신 성령이 우리 위에 운행하십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생겨나라. 찾아져라. 나아라. 말씀한대로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보통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떠한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의 깊은 곳에 빠져 있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위에 성령이 운행하십니다. 성령은 헬라어로 공기와 같습니다. 프뉴마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프뉴마. 프뉴마는 영이라가도 하고 공기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공기가 운행하시더라. 여러분 위에 이 프뉴마, 숨쉬는 공기와 하나님의 영 성령이 동시에 운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거대한 창조를 가져올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 이 자리에 있어요. 그래서 우리 주의 종들이 설교하고 난 다음에 회개할 신앙고백을 시키는 것은 신앙고백을 따라 속이 새로워지니까. 그리고 아픈데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은 실제로 나으니까. 낫게 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운행하고 있으니까. 문제를 가진 사람 가슴에 손얹고 기도하자는 것은 기도하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 성령이 운행하고 계시니까. 가짜가 아니라 진짜로, 정말 위대한 창조의 역사가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로 보통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둘째로,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한 것입니다.하나님의 영이 우리 위에 운행하면 이제 우리 부르짖어야 돼요.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에 왔을 때 예수님께 부르짖는 가나안 여인이 있었습니다. 따라오면서 큰 소리로 내 딸이 비참하게 귀신 들렸으니 내 딸을 고쳐 주시옵소서. 예수님이 들은체 만체 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예수님 제자들의 옷자락을 들고 선생님께 말씀 좀 해서 좀 돌봐주게 해주십시오. 그러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지금은 유대인에게 보내심을 받았다. 지금 유대인의 때다. 이방인의 때가 아니다. 내가 이방인에게는 유대인에게 줄 것을 이방인에게는 안준다. 그러니까 여자가 와서 예수님 앞에 길을 막고 엎드려 가지고서 주님 내 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니까 예수님께서 가혹한 말을 하셨습니다. 뭐라고 하느냐면 자녀에게 줄 떡을 취해서 너 이방인 개에게는 안준다. 가혹한 말 아닙니까? 그런데 이 여자가 주님! 옳습니다. 개들도 자녀가 먹는 밥상 밑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이 개들이 정말 상 밑에 오면 부스러기를 주워 먹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주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가 이 말을 했으므로 집에 돌아가라! 네 딸이 귀신이 나갔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 말 잘해야 돼요. 내가 이 말을 했으므로 귀신이 나갔다. 한마디 말로 천냥빚을 갚는다고 말을 잘못하면 많은 축복을 잊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끝까지 낙심하지 말고 응답할 때까지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다.끝까지 부르짖어야 되는 것입니다.이사야 58장 9절에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야훼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마태복음 7장 7절에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이 말은 뒤로 물러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으니 끝까지 매달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두번 기도해서 안된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이판저판 여러분과 같이 계십니다. 좋은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그 위에 하나님이 운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모든 것이 잘되고 아름답고 평안하면 하나님이 와 계시겠지? 아니올시다.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아주 팔자 사납고 절망적일 때 그때 거기에 하나님이 와 계신 것입니다. 성경에 주님이 행하신 기적은 다 시련과 고난에 빠진 사람에게 행한 것은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잘먹고 잘입고 배부르고 등따뜻한 사람에게 예수님이 찾아와봤자 무슨 소용 있어요? 대낮에 여러분 촛불켜서 가지고 와서 무슨 효과가 있어요? 밤에 촛불켜서 가져와야지. 주님은 빛이시라. 어두운데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평안이시라. 폭풍우가 있는데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생명이시라 사망있는데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있으면 주님이 떠나지 않고 와 계시기 때문에 계속해서 믿음으로 부르짖으면 삼차원의 세계에는 사차원이 와야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3.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셋째로, 주님께서는 여기에 뭐라고 말했습니까?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삼차원의 세계는 물질적, 인간적인 해답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 안믿는 사람이 물질적으로 인간적으로 답을 가져오는 것은 삼차원에 대한 삼차원의 해답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차원의 세계는 삼차원의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사차원의 세계 즉, 크고 은밀한 성령의 역사가 해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문제를 삼차원 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해결하지만 사차원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믿음, 하나님의 말씀, 기도를 통해서 해결하는 것입니다.히브리서 11장 3절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현재 눈에 보이는 것은 현재 보이는 그대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안보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보이는 삼차원의 세계보다 높은 차원 사차원의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사차원의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크고 은밀한 일이란 뭐냐 새로운 생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우리가 생각하는 그 생각 아니고 새로운 생각입니다. 에베소서 3장 20절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성경을 읽으면 문제 해답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크고 은밀한 일이라는 것은 크고 은밀한 새로운 생각을 가지자. 둘째는 새로운 꿈을 가지자.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소원이 뭡니까? 꿈이 바로 소원인 것입니다. 너 소원이 뭐냐? 너 꿈이 뭐냐? 그러므로 하나님이 꿈을 넣어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꿈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크고 은밀한 일이라는 것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생각, 새로운 꿈 그 다음 불가능을 믿는 믿음, 도저히 인간으로 믿을 수 없는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느니라. 그리고 네 번째는 창조적인 고백, 잠언 18장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어떠한 어려운 문제가 있을지라도 새로운 생각, 새로운 꿈을 가지십시오. 새로운 믿음, 새로운 입술의 고백을 가지십시오. 아~ 그것 보통때 듣지 않은 것인데 보통으로 우리가 다 알고 듣고 보고 체험하는 것은 물질적인 환경적인 삼차원의 세계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예수 믿고 새로운 세계가 우리 속에 들어왔습니다. 사차원의 세계인 것입니다. 삼차원의 세계를 품고 변화시키는 사차원의 세계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꿈이 여기에 있고 하나님의 믿음이 여기에 있고 하나님의 선언이 여기에 있고 하나님의 영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삼차원의 육체와 환경 속에 살면서 사는 방법은 사차원의 생각과 꿈과 믿음과 말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결론>3차원의 세계는 인본주의적 삶의 방법입니다. 잊지 마세요. 세상에 예수 안믿는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은 인본주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믿음, 하나님이 주시는 신앙고백은 4차원의 세계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몸과 환경은 3차원 마음은 4차원으로 살아갑니다. 우린 차원이 두 개 있어요. 몸과 환경은 삼차원입니다. 여러분 지금 몸은 꼬집어 보십시오. 아프지요? 보이지요? 느낄 수 있지요? 삼차원입니다. 삼차원인 여러분이 사차원 속에 삽니다.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믿음, 하나님의 말씀, 이것은 사차원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운명, 환경에 운행하시므로 기도를 통해서 믿음을 통해서 찬송을 통해서 운행하시므로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4차원이 3차원을 다스리고 창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운명과 환경을 다스리고 창조하는 사차원이 여러분 속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더불어 사차원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불가능할지라도 우리가 새로운 생각, 새로운 꿈, 불가능을 믿는 믿음을 고백하고 나갈 때, 사차원의 능력으로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평범한 삶을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어두운 곳에 들어가서 빛을 가져오고 무질서에는 질서를 가져오고 무에는 유를 가져오고 절망에는 소망을 가져오고 불행에는 행복을 가져오고 변화를 가져와야 되는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삶을 가져와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속에는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차원의 세계가 들어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무리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어도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면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우리 한국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이 나라에 복음이 들어와서 우리 한국에 운행한 결과에 불과 60년만에 세계 꼴찌에서 열두번째 잘사는 나라로 변화됐습니다. 이제 얼마 안있으면 첫째로 갈거에요. 그러므로 저는 우리 북한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습니다. 북한이 먹을 것이 없어 절절 기고 있지만은 그러나 남북이 통일되면 북한에 가서 교회 세우고 복음만 증거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운행하면 창조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노르웨이가 지금 북부에서는 제일 잘사는 나라 아닙니까?100년 전에 노르웨이는 많은 사람이 굶어죽고 헐벗고 굶주린 나라였습니다. 아무도 노르웨이가 일어날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100년 전에 한 젊은이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기 위해서 글을 배워가지고서 성경을 읽고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자 오늘날 100년 이내 노르웨이가 된 것입니다. 어제 그 노르웨이에서 대학교수가 나를 찾아왔어요. 그 부인하고... 제가 노르웨이에서 집회할 때 와서 그때 자기가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그래서 왜 왔냐고 그러니까 가만 보니까 이렇게 한국이 잘사는 것은 기도원이 저렇게 많기 때문에 한국이 이렇게 잘된다. 그렇게 생각해서 노르웨이에 기도원을 세워야 되겠다. 그런데 기도원을 세워야 되는 것은 알지만 어떻게 세우는지는 모르겠다. 저보고 가르켜 달라고 배우러 왔어요. 그래서 배우러 와서 내가 배워주겠다고 하니까 기도원을 어떻게 세우는지 배워만 줄 것 아니라 좀 돈을 주어서 지어달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내가 참 인간팔자 시간문제라고... 왜 내가 앙천대소 웃었냐면 옛날에 제가 온 세계 다니면서 조금 달라고 이랬습니다. 제가 복음 전도하고 우리 한국에 하나님 사업 위해서 조금 달라고.. 왜냐하면 우리가 돈을 못버니까 선교사들이 선교하러 나가서 고생을 많이 하니까 그들 도와주는데 내가 안도와주면 도와줄 자가 없습니다. 이제 그 잘사는 나라가 나에게 와서 조금만... 사람팔자 시간 문제에요. 그처럼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니 우리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런 날에 주님께서 성찬예배를 갖게 하시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너가 내안에 내가 너 안에 있는 것을 알리라. 이 말은 뭐냐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고 너 삼차원의 인생이 사차원의 영혼으로 나와 하나가 되라. 오늘 더욱 주님이 여러분 속에 계신 것으로 믿고 기도하고 믿음, 생각을 고치고 꿈을 고치고 믿음을 고치고 말을 고치고 삶이 고쳐지는 것입니다. 바다 저 건너편으로 가야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가 바다 건너편에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께서 교회 와서 말씀 듣고 생각이 달라지고 꿈이 달라지고 믿음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지 아니하면 인생은 안 달라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변화시키고 달라지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이 자리에 계십니다. 성령이 이 자리에 여러분 속에 계시고 여러분 위에 운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에는 들어오며 나가며 꼴을 얻고 가는 곳마다 운명과 환경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일꾼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제목 : 가장 큰 감사의 이유 본문 : 롬-0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롬 6:17~18). I. 본문해설 로마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범죄했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드러내는 기회로 삼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혹시 사도의 이 같은 설명을 들으면서 그러면 은혜를 더하려 죄를 지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염두에 두고 그럴 수는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그 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우리의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죄를 향하여 살던 우리들을 의를 향하여 살도록 하시려고 베푸신 구원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 됨은 구원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무한한 감사로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II. 가장 큰 감사: 구원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을 통해 가장 큰 감사가 구원임을 밝히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야말로 우리들이 받은 나머지 모든 은혜의 기초이자 핵심입니다. 성경은 이 구원의 사실을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A.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됨 먼저는 우리가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죄의 종살이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과 약속을 파기하고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대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칠게 반항하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과의 관계도, 자연과의 관계도, 자기와의 관계도 파괴되었습니다. 특히 인간의 영혼과 정신은 본래 기능을 잃어버렸습니다. 죄로 물들기 전 영혼은 하나님을 향해 밝게 빛나고 주님의 진리를 응시할 수 있었지만 죄의 종이 된 후에는 영혼에 어두움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지성은 눈멀게 되었고, 인간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많은 사실들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설령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더듬어 안다고 할지라도 이것을 바로 해석하고, 자신에게 연결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오히려 우상을 섬기는 데 치달았습니다. 인간의 지성뿐만 아니라 감정도 지극히 혼란스러워졌습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빛과 선, 아름다움, 그리고 참된 것에 의해서 자극 받고 사랑의 정동이 일어나기 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정욕을 주체하지 못하여 욕망에 사로잡힌 존재가 되었습니다. 의지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는 대신 거칠게 저항하고 충동에 따라 움직여 인간은 모순으로 가득찬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종 된 모습입니다. 자신을 주인 삼고 자신에게 봉사할수록 섬김을 받는 대신 오히려 거칠고 무서운 죄에 종속되어 갑니다.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복되게 살도록 부르심 받았음에도, 점점 하나님으부터 멀어져 비참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여러 시도를 한 적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계몽주의의 도래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인간다운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굳게 믿기를 인간이 만약 거친 감정과 충동적인 의지를 버리고 온전한 이성의 도움을 받으면 세계는 인간에 의해 확실하게 파악될 수 있고, 인간은 이성적으로 인류의 갈 길을 정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국가 간에 선한 질서를 세우고, 서로를 정복할 마음을 버리고 평화를 추구하면 인간의 힘으로 얼마든지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비참한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다시금 주님께 의지하고 돌아갔어야 했는데, 인류는 신뢰할 수 없는 이성을 끌어내리고, 인간의 감정과 욕망을 내세웠습니다. 그래서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을 규율할 수 있는 가치의 체계는 모두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을 억압하는 구조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진정한 자유는 이러한 가치체계를 허물어 버림으로써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을 근원도 알 수 없이 우주에 던져진 존재로 규정하고, 절대적인 가치는 없기 때문에 인간은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로서 온전히 그 자유에 직면하기 위해서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부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모든 가치를 다 부정하고 나면 인간은 지극히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데, 그런데 그 자유는 무시무시한 자유다.”라고 말한 현실이 그들에게 적용된 것입니다. 이 자유는 그들 말대로 무시무시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눈을 똑바로 뜨고 직면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무시무시함을 잊기 위해 많은 현대인들은 쾌락에 탐닉합니다. 성적인 쾌락뿐만 이 아닙니다. 가치 없는 일에 자신을 몰두하면서 시간을 허비하며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죄의 종살이 하는 모습이고,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이러한 처지에서 스스로를 구해낼 수가 없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인하여 우리를 그곳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그 크고 놀라운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기에 그것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복음 안에서 되새길 수 있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단 한 번이라도 이 벌레 같은 인간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구원해 주신 은혜에 감격하며 기뻐하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신자의 마음속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사라질 때, 자기를 주인 삼고자 하는 온갖 정욕과 더러운 욕망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주님과 평화를 누리며 살아야 할 존재가 마음속으로 주님을 시기하고 대적하게 될 때에 그의 정신과 영혼에는 안정이 사라지고 삶은 무질서와 모순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종살이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처지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믿음 안에 살아가는 삶이 좀 어렵다고 생각될 때마다 죄의 종살이하던 그 비참한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어려움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B. 의를 위해 섬기는 자가 됨 구원의 또 다른 측면은 주님이 이제는 우리가 의를 위해서 섬기며 살아갈 사람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첫 번째 보다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모아 교회를 이루셨으니 교회는 영적으로 보면 이 세상에 아직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복음과 사랑으로 정복하여 주님께 순종하며 주님의 창조하신 뜻을 따라 살도록 만들기 위해 부름 받은 군대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의의 종으로 부름 받았다면 나라에 점점 군인의 수가 늘어나는 것 같은 뿌듯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이상하게 병원만 늘어나는 것 같은 느낌을 떨쳐낼 수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수없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가끔 눈물을 흘려도 절대로 복음을 전하지 않는 교인들, 티끌만한 일에 상처를 받고 교회를 향해 복수하듯 하거나, 교회를 떠나버리는 막무가내의 교인들, 이런 사람들이 과연 진정한 교회의 번영을 위해서 얼마나 봉사하는 사람들일 수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눈앞에 전쟁이 벌어져서 전투에 나가야 되는데 같이 뛰어나가던 동료가 자기 발을 좀 밟았다고 총을 팽개치고 탈영을 하는 것 같은 일들이 교회에서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잘 적응하면서, 스스로를 챙기며 교회에 출석하는 정도로 정의한다면 너무나도 슬픈 일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리는 교회의 모습과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우리가 본래는 죄의 종이었는데 이제는 우리가 의를 위해 사는 사람이 되었구나!”사도는 이렇게 의를 위해 섬기는 자가 된 이 놀라운 신분의 변화를 두 가지 원인으로 제시합니다. 1. 복음이 전파됨 첫째로 복음이 우리에게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세상에는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더 착하게 산 것도 아니고 그들이 예수를 믿었더라면 살았을 그 삶보다 우리가 훌륭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유도 알 수 없이 그들에게는 전파되지 않은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누군가 꽃다운 젊음을 바치며 선교지에서 쓰러져 갔고, 이후 밀알같이 솟아난 젊은이들이 선배들의 뒤를 이어 아무도 알지 못하던 은둔의 땅 조선에서 순교의 피를 뿌렸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들이 복음의 혜택을 입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대치할 수 없는 소명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먼 곳에 는 가지 못한다 할지라도 주님을 믿지 않고 어둠 가운데 방황하는 이웃들, 죽음의 때가 임박했으나 서서히 죽음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부모님들, 그리고 아직까지도 회심하지 못한 자식들에게 만약 여러분이 하루에 한번이라도 눈물로 기도하고, 거절을 당할지라도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예수의 십자가 사랑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과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의 마지막 소망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증거해 주었다면, 아마 상당수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의 가장 중심적인 관심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이 녹을 줄 모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뜨거워질 수 없다면 여러분의 마음을 뜨겁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에서의 성공과 번영, 육체의 자랑이 여러분의 피를 끓어오르게 만들고 있다면 끓어오르십시오. 마지막에는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밖에는 남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유일한 희망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주님이 나 같은 인간을 위해 베푸신 이 구원의 가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깊이 감사하며 어찌하든지 무명의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함으로써 복음을 나에게 전파해 준 것처럼 나도 이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기를 다짐해야 합니다. 2. 마음으로 순종 둘째로 사도는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었다”라고 말합니다.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아닙니다. 복음이 전파될 때 어떤 이들은 더 완강히 그 복음을 거절하고 마음이 강퍅해 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복음이 전해졌을 때에 마음으로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의의 자녀로서 주의 종이 되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힘으로 한 것입니까? 주님이 은혜로써 우리를 움직이시지 않았더라면 뼛속 깊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던 우리가 그 복음을 받아들였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의지와 연합을 이루어서 우리의 마음과 의지를 움직여 복음을 받아들이게 만들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그리스도의 교훈에 순종할 마음을 갖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기에 우리가 구원을 얻었으니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넘어질 때도 있고 쓰러질 때도 있었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진 것은 우리 스스로 악해서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요,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힘으로써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이 변화무쌍한 우리를 사로잡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결심을 주셨기에 우리는 이제껏 믿음 생활을 이어올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III. 의를 위해서 살아감 결국 이러한 구원의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우리들이 살아 선택할 수 있는 현재외 미래의 삶은 여러 가지가 아닙니다. 오직 의를 위해서 사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소명은 다시 죄의 종살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주님의 교회를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사는 삶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고 돌보지 않으시기 때문에 곤고하고, 비참한 삶을 이어간다고 생각할지 모르짐난, 성경은 거꾸로 말합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의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시 107:10-11).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순종의 삶을 사는 대신 불순종하고 있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관심사인 교회의 영적인 번영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영달과 자신의 번영을 위해 살고 있다면, 시련과 고난을 만나 번민과 갈등하는 것을 이상히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여러분을 올바른 길로 이끌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의 효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동안 죄 없으신 그분이 비참한 죄의 결과를 경험하셨습니다. 굶주림,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야 하는 슬픔, 육체의 곤함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러실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속에는 이 불쌍한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났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들과 함께 계시며 경험한 모든 슬픔과 이별, 눈물과 결핍, 고통에 대한 모든 체험은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간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늘 보좌에 오르셔서 통치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이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은 당신의 탁월한 사랑을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이 성육신 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교회가 받는 그 모든 사랑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분여된 하나님의 사랑의 부은바 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렇게 우리 인간들을 가장 잘 알고 계신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며, 인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위로를 받게 됩니다. IV. 결론: 소명을 따라 살자 이 모든 감사의 제목들을 등진, 오늘날 유행하는 번영주의와 성공주의는 복음이 아니라 인간의 거짓이고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성도들은 이 가짜 복음을 혐오하고 미워합니다. 거기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향취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죄의 유혹을 받지만 그때마다 우리의 힘으로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어린 아이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붙듭니다. 우리가 온 마음으로 주님의 손을 붙들 때 우리가 거절할 수 없는 유혹들을 거절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내가 이길 수 없는 시련을 만났을 때에도, 나의 힘으로는 인내할 수 없는데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나를 인내하게 만들어 주고, 이길 수 있게 합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믿음의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은혜에서 미끄러졌다면 주님 앞에 정직하게 나와서 진실하게 기도하십시오. 자신의 잘못과 부주의함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주님의 은혜로 다시 세워달라고 기도할 때 주님이 어찌 여러분들을 거절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크신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채워주시려고 그리고 소명을 따라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의 교회를 살피며 미끄러진 지체들을 일으켜 하나님이 자신들을 구원해 주시는 은혜에 감격하는 살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이 벌레 같은 우리를 위해 큰 해 받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자기를 찢으시기까지 아낌없이 버리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 우리 자신을 버려야 할 때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최고의 기쁨은 주님을 믿게 된 것이며, 내 생애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잊어버릴 수 없는 찬송 제목은 이 쓸모없는 죄인을 구속해 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과 감사에 붙잡혀 복음과 함께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제목 : 족보속의 메시지 (4) 본문 : 마-01-12-16

마 1:12-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오늘 읽은 본문은 신약성경 첫머리 부분에 위치해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첫머리에는 4복음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4복음서의 특징은 모두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부활까지 순서적으로 기록해 놓았다는 점입니다. 그 4복음서 중에서도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과정을 가장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 우리에게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족보

마태복음의 첫 장 첫 부분 1장1-7절을 보면 예수님의 가계 즉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족보는 옛날이나 오늘이나 재미없는 책입니다. 모처럼 성경을 읽으려고 성경을 들고 펼치면 제일 먼저 마태복음을 읽게 되는데 마태복음 첫 장은 족보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모처럼 성경을 읽으려다가 시험 들게 되어 포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모처럼 성경을 읽어보자 하고 성경을 펼쳐 보니까 족보가 나왔습니다. 내용을 보면 낳고 낳고 한없이 낳는 이야기만 나옵니다. 그래서 재미가 없어 다른 곳을 펼치자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마태복음18장6절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좋으니라”는 구절입니다. 연자맷돌은 곡식을 가는 작은 맷돌이 아니고 보리를 찧는 큰 맷돌을 말합니다. 기분이 좋지 않아 다른 곳을 읽어보자 하고 또 다른 곳을 펼쳐 보니까 야고보서1장25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실천하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 이 족보는 재미없는 것입니다. 족보는 이런 이야기를 낳습니다.

그런데 이 족보는 재미는 없지만 그런데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기 이 족보는 몇 가지 의미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역사를 알려 주는 역할입니다. 족보를 보면 구약시대의 계보와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긴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밝히기가 어려운데 이 족보가 그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족보는 아브라함 때부터 예수 때까지의 역사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부름 받은 때가 기원전 1921년입니다. 아브라함 이후 이삭, 야곱, 모세, 다윗, 솔로몬을 거쳐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말라기 이후 400년간의 영적 암흑시기를 거쳐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가 기원전 4년이니까 이 족보는 대략 2천 년간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족보가 없으면 그 긴 역사를 설명하고 밝히고 알기가 불가합니다. 이 족보는 역사를 잘 정리해서 보여줍니다. 또 하나는 이 족보의 특이성입니다. 대부분 족보는 남자들로 이루어집니다. 모든 나라의 족보는 다 남자들이 등재됩니다. 그런데 예수님 족보는 좀 다릅니다. 이 족보 속에 네 명의 여자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은 상당한 메시지를 지닌 여인들입니다. 라합은 기생출신입니다. 유대인들이 여리고 성을 점령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준 여인입니다. 룻은 이방여인인데 후에 다윗의 조모가 됩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와 부정한 관계로 대를 이은 여인입니다. 후에 그 혈통에서 예수가 탄생합니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는 다윗과 부정한 관계에 있던 여인입니다. 후에 그 몸에서 솔로몬이 탄생합니다. 이 족보를 보면 밧세바를 제외한 세 여인이 이방여인입니다. 그리고 룻을 제외한 세 여인인 불륜에 의한 여인입니다. 아마도 이방여인을 포함시킨 것은 예수께서 이방의 빛으로 오시기 때문이고 불륜의 여인을 등장시킨 것은 죄인을 구원하려 오신다는 상징과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보여 집니다. 이 족보는 예수님이 인간임을 증명하고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신적 존재가 아님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났으니 철저한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주고 또 마리아에게서 태어났으니 철저한 인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족보가 주는 의미입니다.

3가지 메시지

마태복음1장1절을 보면 예수님의 계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족보는 순전히 예수가 누구인가를 말하려고 써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족보는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 족보를 보면 예수가 누구인가를 말씀하고 있고 여기서 세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우리나라는 이 족보를 상당히 중요시 하는 나라입니다. 근래에 와서는 좀 멀어지기는 했어도 여전히 이 족보를 중요시 합니다. 유대인들도 족보를 아주 좋아하고 중요시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면 아론의 자손이다 모세의 자손이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최고의 영예로 알고 살아갑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의 시조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이스라엘의 민족을 형성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것을 영광으로 선민으로 알고 자랑하였습니다. 그런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에게 세례요한은 새로운 영적 해석을 하였습니다. “너희는 회개하지도 않고 세례도 받지 않으면서 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하지 말라.”(요한복음8장33절, 마태복음3장9절, 요한복음8장39절) 요한은 당시 바리새인들을 무섭게 힐란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육신적인 아브라함의 혈통을 말한 것이 아니고 주께로부터 택함 받은 백성들을 그리고 구원받은 백성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방인이라도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면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과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육신의 혈통을 말하고 세례요한은 영적 혈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은 민족의 역사를 연 사람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소개할 때 아브람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성경도 그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세상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손이 예수를 통해 복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족보를 보면 아브라함을 강조합니다. 이 족보에서 예수님은 그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강조합니다. 그것이 이 족보에 나오는 특징 중 하나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유대인의 왕입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다윗 왕을 강조합니다.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로 8번이나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부르고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습니다. 복음서에서 병자들이 예수를 부를 때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하고 부르짖었는데 그 이유는 예수는 이스라엘의 왕이요 메시야로 오셨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만나자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마가복음 15장2절)고 물었습니다.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십자가 위에 붙인 명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붙였습니다. 사람들은 비웃듯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지만 역으로 말하면 성경의 예언을 그대로 이루는 행위였습니다. 성경은 장차 예수께서 다윗의 왕통을 이어 오실 것을 예언하고 (시편132편11절, 예레미야23장5절, 에스겔37장25절)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라는 명칭 속에 예수께서 왕 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뜻이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는 제사장과 왕과 메시야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는 왕통의 계열에서 태어납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다윗의 혈통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만왕의 왕,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흔히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 말로 “예수아”(yesua)이고 이 예수아를 헬라말로 말하면 “예수스”(Iesous)라는 말로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원래는 예수라는 말은 “여호수아”(yehosua)였습니다. 그 말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유대인 사회에서 흔한 이름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가 신성한 이름이 된 것은 마태복음1장21절에서 천사 가브리엘이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한 이후부터 입니다. 그리고 예수 이름 다음에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따라 붙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그리스도라는 표현이 21번이나 나옵니다. 1장1절부터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헬라어로 “크리스토스”(Christos)라는 말이고 아람어로는 “메시야”(meschicha)라는 말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 성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당시 제사장, 왕, 메시야를 말할 때 사용한 말입니다. 이 그리스도와 메시야는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보낸 구세주를 의미하는 말이고 구세주가 유일하시다는 뜻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말이고 그 말은 “기름부음 받은자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라는 말입니다. 이런 표현으로 마태가 성경에 기록했으니 당시 고루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이 끈질기게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을 짓을 많이 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죄사하는 권세가 있다, 성전을 헐고 3일 만에 짓는다,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런 발언을 했으니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이상의 발언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믿을 때만 용납되고 이해할 수 있는 말들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지 못하니까 갈등이 조장되는 것입니다. 이 갈등은 생각에 차이가 날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신학적으로 상당한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극심한 갈등이 발생하고 마침내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이렇게 세 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 이것이 족보가 주는 메시지입니다.

예수 누구인가.

예수께서 태어나기까지 천사들이 주고받은 계시를 보면 예수를 대략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죄로부터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요셉에게 장차 마리아가 낳을 아들 이름을 알려줍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누가복음 1장31절).” 성경에 보면 태어날 때 혹은 그 후에 이름을 지어주신 사람이 몇 사람이 있습니다. 삼손이 그런 경우입니다. 세례요한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그의 이름이 계시적으로 주어졌습니다. 바울, 베드로는 후에 계명 된 이름입니다. 이름이 참 중요합니다. 이름에는 뜻이 들어 있기도 하고 사명이 들어 있기도 하고 의미가 들어있기도 합니다. 이사야는 그 시대에 심판을 경고하였습니다. 임박한 시리아의 침략을 경고하였지만 사람들이 듣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장차 태어날 아들 이름을 마헬살랄 하스바스라고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뜻은 심판이 임박하였다는 뜻입니다. 이사야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는 아들 이름을 경고적 의미를 담고 있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명을 부여받은 후에 개명된 사람도 있습니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입니다. “응답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몬을 “베드로”라고 개명해 주셨습니다. 헬라어로 게바(Kepas) “바위”(rock)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장차 큰 사명자, 사명의 삶, 큰 역할을 해야 함으로 이름을 새로 지어주셨을 것입니다. 이름이 참 중요합니다. 사울이 바울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은 히브리어로 "sa'ul"로 “희망, 구하다”라는 뜻입니다. 세속적인 의미로는 크다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후 부름받고 사명을 받은 후에 사울은 헬라식 이름 “바울”(paulos)로 개명됩니다. “작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회심 전에는 큰 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큰 자가 되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유별나게 핍박하는데 열심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고 회심한 후에 그는 자신을 “작은 자”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 중 괴수니라”, “나는 사도 중 작은 자”,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마침내 바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의 이름이 참 중요 것입니다. 이름에는 메시지가 들어있고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천사들이 장차 태어날 아기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가 무슨 뜻인가 하면 히브리어 이름으로 “예슈아”입니다. 그리고 헬라어 이름으로는 “예수스”입니다. 그 뜻은 “구원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의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할 분”이라는 뜻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죄뿐 아니고 모든 질고에서부터도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시자마자 하신 일이 각종 질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쫒고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일입니다. 죄뿐 아니고 모든 질고에서, 제약에서, 무능에서, 무지에서 회복하시고 구원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 점은 또 바리새인들과 갈등을 조장하게 된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습니다. “당신은 목수의 아들인데 어디라고 죄를 사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느냐, 정신 나간 소리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돌아다니며 병자를 고치고 죄를 사한다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은 너무 다른 신학을 터트리셨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라는 뜻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구세주라고 부르고 메시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마태는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의 몸에서 나셨다고 증언합니다. 그것은 이사야7장14절의 예언을 성취한 것입니다.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요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 “임마누엘”(immanuel)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임마누”(immanu)와 “엘”(el)의 합성어 입니다. “임마”는 전치사로 “함께한다”는 뜻이고 “누”(nu) 는 대명사로 “우리” 라는 뜻이고 “엘”은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부를 때는 “임마 -누-엘”입니다. 할렐루야도 마찬가지입니다. “할렐루야”(halleluyah)는 히브리어로 “주를 찬양하라” “야웨를 찬미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할렐루”(hallelu)는 “찬양하라”는 뜻이고 “야”(Yah)는 “야웨”(Yahweh),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찬미하라”는 말로 부를 때는 “할렐루야”가 아니고 “할렐루 - 야” 해야 정상적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을 설명하다가 할렐루야까지 설명하게 되었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28장20절을 보면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그 말씀을 이행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18장20절을 보면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을 받기를 가장 소원합니다. 그런데 제일 좋은 복은 어떤 복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복입니다. 그것이 최고의 복이고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영원한 우리의 예수님이시고 우리의 임마누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의 그리스도시고 메시야이시고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함께 하심”, 이 함께 하심이 최상의 은혜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입니다. 이 은혜가 늘 항상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제목 : 추수할 일꾼을 부르심 본문 : 마-09-35-

“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 9:35-38) I. 본문해설 이 성경 본문의 말씀은 복음서에서 획을 긋는 중요한 분기점입니다. 즉, 마 10장 1절을 기준으로 이전까지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신 시기였다면 10장에서는 제자들을 사도로 세우심으로 그들을 이 세상에 나아가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님이 하시던 일들을 뒤잇도록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파송하신 사건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의 교회를 통해 이루어질 당신의 지속적인 사역을 보증하는 단서가 되었습니다. II.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사역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삼중 사역으로 제시됩니다. 선포하고, 가르치고, 모든 약한 자들을 고치고 돕는 섬김의 사역이었습니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천국의 복음을 능력 있게 선포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더 깨우쳐 주어야 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눈을 뜨게 해 주시는 사역이었습니다. 병을 고쳐주시고, 먹을 것을 주시고, 삶의 문제에 개입하셔서 육신의 피로를 채워주신 섬김도 예수님의 생애 중 두드러진 사역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삼중 사역은 사도들로 계승이 되고 다시 성령 강림 이후에 이루어진 교회에 전수되고 그래서 교회가 바로 이 사도성을 가지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신 그 일을 뒤이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열린교회가 창립된 지 16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주일에 이 설교 본문을 택한 이유는 하나님이 이 말씀으로 열린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밤에 기도를 하는데 그때 하나님이 생각나게 하신 말씀이 바로 이 구절이었습니다. 어느 순간에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직접 교회를 개척해서 영혼들을 찾아 교회에 채우며 주님의 사랑으로 자랄 수 있도록 봉사해야겠다라는 강한 압박이 마음속에 밀려왔습니다. 삼일동안 똑같이 그렇게 기도 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집사람에게 얘기했더니 ‘1년 전에 기도를 하는데 개척을 하게 된다면 이름을 열린 교회로 해야지’ 그런 마음이 기도하는 가운데 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왜 그러냐?’ 그랬더니 ‘하나님이 하늘을 활짝 열어주셔서 하늘의 복을 부어주시는 그런 열린 교회가 됐으면 참 좋겠다’라고 했고 성경을 찾아보니 계시록에 나오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기록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열린 교회 간판을 달게 되었고, 11월 15일 날 첫 번째 준비 모임을 갖고, 12월 12일 날 교회를 얻어서 수리를 끝내고 개척 예배를 드렸습니다. 7명이 모여서 첫 주에 예배를 드리고, 그 다음날은 8명의 교인과 감격 속에 새벽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말씀을 주셨을 때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을 열린 교회에 보내주겠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런 사람들만 계속 왔습니다. 그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모습은 목숨을 건 예배였습니다. 계속 성도들이 와서 12월 12일에 개척을 했는데 1월 셋째 주에는 30명의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나면 사람들이 은혜를 받은 다음에는 꼭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배반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할 때 품으라고 명령하는 사람은 복수였지만 품게 하고자 지시하는 그 마음은 단수였어요. 사람은 달라도 같은 마음을 품고 주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게 하셨던 것이죠. 정말 온 마음을 다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III. 예수 섬김의 동기 A. 버려진 영혼들의 상태 예수님이 이런 삼중 사역으로 영혼들을 섬기셨는데 그 예수 섬김의 동기는 버려진 영혼들의 상태, 그것을 직시하시는 예수님의 영적 통찰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니’ 이것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눈으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영적인 통찰입니다. 1. 고생하고 유리함 예수님이 직관적인 통찰력으로 백성들을 보았을 때 그들은 고생하고 유리하고 목자 잃은 양같이 방황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 주위에는 항상 가난뱅이만 몰려다녔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그들의 영혼의 상태를 두고 1차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2. 목자 잃은 양떼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교적인 민족이었습니다. 당시에 유대교가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백성들의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이 백성들의 목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비참한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고생하고 유리한다라는 단어는 희랍어 성경에는 완료형 분사 수동태 남성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고생하고,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괴롭게 하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이고, 누군가가 그를 버렸기 때문에 버림받은 채로 이리저리 떠돌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영적인 세력들이 백성들을 붙들고 있었고, 그래서 목자도 없이 방황하는 그런 양떼들이 되었습니다. B. 민망히 여기신 마음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민망히 여기신 마음’으로 보시고 계시며, 에스프랑크니스테(ἐσπλαγχνίσθη) 라는 이 희랍어 단어는 수동태인데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을 받다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등가번역을 하면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고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으니’ 라고 번역을 하면 가장 온전한 번역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예수님의 찢어지는 마음으로 백성들에게 천국 복음을 설교하고, 가르치고, 섬기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은 다른 장보다도 유난히 고통 받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당신의 큰 능력으로 사도들을 세우실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상황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서 바로 그렇게 고통에 얽매여 있는 인간들을 바라보시면서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는 듯 아픈 사랑의 마음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인간의 아름다움과 같아서 인간의 아름다움이 영혼의 아름다움이라면 교회의 아름다움도 역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영적인 연합의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의 마음속에는 우리 주님의 심정이 있듯이 이렇게 그리스도의 연합을 구현한 교회의 마음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이 바로 제자를 파송하신 마음이고, 자기의 사랑하는 양떼들과 같은 제자들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신 것 같은 마음이었으며, 당신의 교회를 이 세상에 사도성을 주셔서 파송하시는 주님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없이 방황하는 영혼에 대한 고통 하는 눈물이었으며 그리고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고 입을 모든 것과 아름다운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곳에서 모든 복을 최종적으로 소비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복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여 가나안에 들여보내신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의 계획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그 모든 수단들을 잘 사용해서 이방의 빛으로 나타나야 했고,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여야 했습니다. 우리도 남은 일생을 교회와 함께 하며, 변절되고 주님을 배반하지 아니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거짓된 배신으로 되갚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매일매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승천 하신 후에 영적으로 다시 임재 하셔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 후에 이루실 그 교회의 몸이 당신과 함께 한 운명에 참여하며 어떤 모습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될지를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까지 당신 자신의 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볼 수 있도록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고통 받는 수많은 영혼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고통 받는 자신의 처지를 궁극적으로 고칠 수가 없는 무능한 인간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세상의 자원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자원의 문제였고, 영적인 자원을 삼위의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지 못하게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세상의 자원의 부족이 아니라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고통 하는 이 세상의 궁극적인 대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의 용서함을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주님께 사로잡혀서 죄를 이기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이렇게 성도들을 품어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말씀으로 먹여 주님의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 부름 받은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IV. 추수할 일꾼을 부르심 예수님께서는 큰 능력을 당신의 열두 제자들에게 부어주셨지만 그들끼리 이 일을 하라고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일군을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 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도록 당부하셨습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나라의 한 모퉁이에서라도 영혼을 구원하는 이 일에 봉사하도록 소명을 느끼는 것은 바로 사도들의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주님의 그 크신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은혜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이 믿음의 길, 신앙의 길을 가기로 결심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눈물의 기도를 필요로 하고 있고, 땀과 눈물이 섞인 복음의 전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자기를 기꺼이 버려 그들의 영혼을 위해 수고하고 분투할 사명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벌레 같은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이 사셨던 그 모본을 본받으면서 그렇게 영혼을 위해 헌신하며 살도록 부름 받은 추수할 일꾼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V. 결론 온 마음을 다해서 이렇게 추수할 계절에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셨으니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좋은 은혜와 육적인 모든 것들을 사용해서 이 복음을 전파하고, 예전에 여러분처럼 주님이 없어서 인생의 벼랑 끝에서 죽음의 계곡을 바라보며 절망하는 인간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당연한 보람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17년, 16년의 세월을 지난 이즘에 다시 한 번 지하실에서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던 그 부르심을 새삼 느끼면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다시 한 번 현재적으로 경험하고 이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게 고난을 받으면서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그들로 참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도록 우리와 함께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섬기는 이 아름다운 전도자의 삶을 살도록 우리 모두 헌신하기로 다짐하는 창립 주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제목 : 예수님은 누구신가? 본문 : 마-16-13- 본문 / 마태복음 16장 13~17절제목 / 예수님은 누구신가?13.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2월 25일은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탄생하신 날을 기념하며 축하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부터 시작해서 12월 한 달 동안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지금도 그렇지만,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똑바로 아는 사람은 매우 적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이 고향의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얼마나 지혜롭고 능력이 있는지 모든 사람이 감탄하고 감격했습니다. 그렇지만 고향 사람들은 “저 사람이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동생과 누이들이 우리 가운데 살고 있지 않느냐.”라며, 그저 목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라는 것을 보았으니까 예수님을 잘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몰랐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했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예수님의 친족들이 예수님에게 더러운 귀신이 붙었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잡으러 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입니다.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수만 명이지만 그중에 예수님이 누구 신지 똑바로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시기를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시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세례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고,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도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모두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때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아주 만족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라고 하셨습니다. 이 베드로의 대답은 그의 신앙고백입니다. 교회는 베드로와 같이 주는 그리스도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수만 명이 모여도 베드로와 같은 이런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였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만큼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중요한 것입니다.성경에 보면 사람을 가리켜서 ‘주(主)’라고 부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창 23:6)」라고 했습니다. 또한,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벧전3:6)」에서처럼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주여’라고 하면서 순종했습니다. 또, 야곱은 에서를 만나기 전에 사람들에게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창 32:4)」라고 불과 몇 십분 정도 차이 나는 쌍둥이 형에게 ‘주(主)’라고 말합니다. 민수기 11장 28절에는 「내 주 모세여」라고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상 1장 26절에는 한나가 엘리 제사장에게 「한나가 이르되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고 말합니다.이와 같이 사람에게 ‘주(主)’라고 하는 것은 힘이나 권세가 있는 사람에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높여서 부르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는 주인을 부를 때, “주인어른 안 계십니까?”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나이가 어리든지 많든지 이렇게 최고의 존칭으로 불렀습니다. 종이 자기 주인에게 ‘주(主)’라고 말할 때에는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고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옛날에는 종이 주인의 소유물이자 재산이었습니다. 그래서 종은 자기의 것이 없고, 목숨과 몸도 주인의 것이고 주인의 뜻대로만 살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 예수님의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며, 소유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런데 이런 주인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바로 군주(왕)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라와 국토와 국민과 재산이 모두다 군주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국민들 모두가 다 군주의 종(노예)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군주의 명령이 떨어지면 모든 것을 다 내놓아야 하고, 무조건 복종해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절대적인 군주였던 것입니다. 현재 지구 상에 남아 있는 군주가 한 사람 있는데, 바로 김정일입니다. 나라의 재산은 모두 자기의 것이고, 백성들이 굶어 죽어도 상관이 없이 자기는 넓은 집에서 배부르게 삽니다. 이렇게 군주(왕)를 가리켜 ‘주(主)’라고 할 때는 그야말로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로마 황제 가이사는 온 백성이 신과 같은 존재로 여기고 ‘주(主)’라고 불렀습니다. 네로는 백성들에게 강제로 자신을 신과 같이 여기도록 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헤롯왕은 얼마나 어리석은지, 아첨쟁이들의 칭찬에 교만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가 하나님의 대접을 받으려고 하자, 벌레가 그 몸을 먹어서 죽었습니다. 그것은 교만한 자가 아무리 신과 같은 영화를 누려도, 한낱 벌레보다 못한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입니다.로마 황제들이 기독교를 핍박한 이유 중의 하나는 황제만을 주(主)라고 해야 되는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주(主)’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가리켜 주(主)라고 말한 사람들은 죽을 각오를 하고서야 그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순교를 각오하지 않으면,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주(主)라고 고백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 9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입으로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은 지금은 너무나 쉬운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죽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믿음이 필요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고백을 하는 자들에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고 하셨습니다.사도 바울은 항상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감옥에서도 지진이 나서 간수장이 달려왔을 때,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느냐고 하자 “주 예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주(主)라고 고백한 것은 베드로처럼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주(主)라고 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군주가 아니고, 그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주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오직 주님만 위해서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포기했습니다. 자신을 위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결혼할 수 있지만 결혼하지 않았고, 재산도 모을 수 있지만 모으지 않았고, 부귀영화를 포기했습니다. 사도로서 교회에서 대접받고 영광을 얻을 수 있지만 전부 내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사람들이 사도 바울처럼 살라고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그렇게 살 수 있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있느냐 하는 사랑의 문제입니다. 믿음의 사람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원해서, 기쁨으로,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고 충성할 수 있습니다.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은 디베랴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찾아가셔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이 말을 주님의 음성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도 주님이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주님이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 21:15)」라고 대답하자 그때야 주님께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주의 백성 양 무리를 목양하는 일을 하고, 돌보아라, 주님의 일을 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사랑을 확인하고 나서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믿음의 사람들이 주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자원해서 기쁨으로 헌신하고 봉사하고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감동을 받으십니다. 헌금을 해도 인색한 마음으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면 주님께서 감동을 받으십니다. 그뿐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 주님이 한없이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게 되었을 때 이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두려울 것이 없고, 죽음도 두렵지 않아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복음이 힘 있게 전파되어 오늘날 이 땅에 수십억의 기독교인이 있게 된 것입니다.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에 가셨을 때, 예수님이 만나신 수가성 여인은 처음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유대인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 4:9)」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당시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5절을 보면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15)」라고 예수님에게 주(主)라고 합니다. 호칭이 달라졌습니다. 19절에는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점점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25~26절에서는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메시아를 만난 기쁨이 너무 커서 물동이도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가서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요 4:29)」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수가성 사람들이 모두 달려 나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이 여인이 변화되는 과정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알게 되는 만큼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합니까? 예수님을 누구라고 전하고 증거 하시겠습니까?도마는 요한복음 20장 28절에서 예수님의 상처를 만져 본 후에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고백했습니다. 비로소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잡아서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핍박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평생 헌신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만나면 변화가 됩니다. 저도 주님을 만난 후에 놀라운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저는 주님을 만난 후에 하루 24시간을 교회에서만 살고 싶고, 주의 일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24시간 온종일 교회에서만 살고, 주의 일만 하고 싶은데 언제 그런 날을 허락하시느냐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면 이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고, 차라리 저를 거두어가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내가 산다면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주님을 위해서 살지 않게 된다면 이 세상에서 밥벌이에 시달리면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난 후에는 내 남은 생애를 오직 주님의 뜻대로만 사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제가 금식기도 하다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응답을 많이 받았는데, 그때의 기도제목은 저의 소원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만 사는 것이 소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말씀해주세요. 무조건 순종하겠습니다.”라는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셨고 그 뜻을 따라 살다 보니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저는 오직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살다가 재림하시는 주님을 만나든지, 아니면 순교하게 되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예수님을 만난 후에 변화된 수가성 여인을 생각해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그 몸의 상처를 만진 후에 변화된 도마를 생각해보십시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평생 교회에 다니고 예배드리지만 주님을 만난 체험이 한 번도 없는 것,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사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그 사람이 목사든지 장로든지 직분은 차이가 없습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 삶의 목적과 자세, 가치관이 너무도 다릅니다. 주님을 만난 체험을 한 사람들은 자원해서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을 기쁨과 영광으로 알고,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서 덕을 보려고 하고, 이용하려고 하니 평생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되도록이면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해도 자원해서 드리며 일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바라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교회에서 해주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제가 아는 분 중에는 피아노 반주를 하면서 받는 수고비를 모두 감사헌금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나를 지금까지 키워주셨고, 이 재능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할 것이므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쁨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감동 받으실 줄 믿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하시는 분들을 보면 주님을 만난 사람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아주 차이가 많습니다. 우리 교회 건축을 담당하시는 장로님은 월급 받는 것도 아닌데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봉사하십니다. 그러면서 헌금도 제일 많이 하십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은 다릅니다.저는 우리 교회가 주님을 만난 사람들로 가득 차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자원해서 기쁨으로 주를 위해서 살고 싶은 사람이 많아서 모든 일에 자원해서 봉사하고 충성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남은 설교는 다음 파일을 열어 보시기 바랍니다.

첨부파일 유명 하반기 설교70편 인용.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