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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에는 전도하게 하소서.
이 해가 지나가기 전에 전도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개인 개인 성도들이
구역(속회)의 권속들이
온 교회가 합심하여 총동원되어
영혼을 거두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옵시고
축복을 나누어
생명의 열매를 거두는 역사가 일어나길 소원합니다.
전도자의 준비 (본문 : 막 6:7-13)
여러분 전도자, 혹은 전도인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마음에 어떤 그림 혹은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아마도 어떤 분은 서울역 광장이나 혹은 전철 안에서 아주 큰 소리로 예수천당 이라고 소리치는 어떻게 생각하면 매우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 또 어떻게 생각하면 사이코한 비정상적으로 열심 있는 그리스도 프로전도자를 마음속에 연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또 어떤 분은 왕년의 영화 엘마칸트리에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약간은 사기성을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집회를 인도하는 떠돌이 부흥사를 연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전도자. 그러면 전세계 유수한 도시에 도시의 대표적인 스테디움 광장에 사람을 가득가득 채워놓고 고고한 복음의 메시지를 사자굴을 토하는 빌레그레함 같은 세계적 전도자를 마음 속에 연상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전도자와 동일어라는 것을 알고계십니까? 전도자는 그리스도인이고 그리스도인은 전도자입니다. 예수님 영접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전도자가 아닌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어떤 사람은 자기가 전도자인줄 알고 사명을 다하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전도하는 일에 쓰임을 받고자 노력하는 전도자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전도자로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망각하고 전도와는 상관없이 살고있는 전도자와는 아무상관 없는 전도자.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두 가지 종류의 전도자만이 존재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크리스천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특히 수제자 베드로를 부르실 때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나를 따라 오너라" 그 다음에 어떤 약속을 하셨습니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러니까 한사람이 정상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라가면 신실하게 그리스도를 따라가다 보면 지금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 되어 있어야 마땅합니까? 사람을 낚는 어부. 즉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에게 접근해서 하나님을 소개하고 그래서 그가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는 일 살아가는 것이 정상적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우리교회 같은 곳에서도 지난 한 주간 동안 전도폭발 임상훈련이 있었어요. 우리교회에 많은 성경공부 프로그램이 있지만 전도폭발..그러면 교인들 사이에 악명이 높은 것 같아요. 그래서 그건 특별한 사람만 받는 훈련. 이런 개념이 좀 있지요? 특공대에게 필요한 훈련. 여러분 특공대가 뭔지 아시죠? 특별히 공격적이고 대담한 사람. 여러분 예상하고 빗나갔죠? 아주 특별한 사람만이 받는 훈련이다. 이런 생각이 우리마음에 있습니다. 사실 이 훈련은 모든 사람이 받아야 할 훈련입니다. 전도폭발 훈련이 저는 유일한 전도훈련의 방법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다른 여러 가지 전도훈련 방법도 있을 수가 있어요.
그러나 제가 아는 한 또 세계 교회가 경험한 최선의 훈련이기 때문에 이 훈련 방법을 통해 우리는 전도자로 훈련을 받습니다. 모두가 훈련을 받고 모두가 전도하는 삶의 자리에 머물러 서 있어야 마땅합니다. 자. 그러나 정말 내가 전도자로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이라면 어떻게 나 자신을 전도자로 준비하고 주님 앞에 설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위해서 예수께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과 함께 하시고 이제 그들을 내보내시면서 어떤 준비를 시키셨는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도자의 준비. 뭐가 필요할까요?
첫째로 전도자의 준비로서 필요한 첫번째 스탭은 교회 공동체의 비전과 전략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비전과 전략을 수용하는 것이 저는 전도자의 첫번째 스탭이라고 생각합니다.
자 오늘 본문이 이런 구절로 시작됩니다. 7절. 우리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6장 7절. 우리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열두 제자들을 부르사 둘씩둘씩 보내시며"
네..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개인적으로 한사람 한사람씩 만나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만은 그들을 부르신 다음에 열두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의 공동체로 되게 하셨다. 이것을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열두 제자들을 바로 이 신약교회 공동체의 모체가 됩니다. 나중에 계시록 20장을 보시면 천국을 설명할 때 새 하늘 새 땅을 설명할 때 그것은 열두 기초석 보석 위에 천국이 세워진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열두 보석은12사도 12제자들을 가리킵니다. 12제자는 그냥 무리가 모인 단순한 무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교횝니다. 신약교회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12제자들을 부르시사 교회가 되게 한 것입니다. 공동체가 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하러 둘씩 보내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한사람씩 뿔뿔이 보내시는 상황하고 둘씩 짝지어 보내신 것과 차이가 있을까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여러분이 혼자 나가서 전도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전도가 쉽지 않죠. 하다보면 어려움을 느낍니다. 혼자 하다가 지치면 뭐 혼자 집에 오면 그만이예요. 언제든지 땡땡이 칠 가능성이 있어요.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묶여서 하다보면 상당히 상대방을 의식할 것입니다. 긴장도 하고. '내가 여기서 그만두면 저 사람이 어떻게 생각해.' 인간에게는 공동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둘씩둘씩 짝지어 전도하러 보낸 데는 그밖에도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우선 이 둘이라는 숫자는 신약이나 구약성경의 전체를 통해서 법정 증거의 효율적인 숫자입니다.
우리가 구약성경 신명기 19장 19절에 보시면 사람이 죄인으로서 증명을 받기 위해선 증인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사람으론 증인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객관적 그 사람이 죄인 됨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증인이 필요하다. 구약성경의 전통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어요. 심판 날에 하나님 저는 전도 받은 일이 없습니다. "증인이 있느니라" 한 사람이 아니고 증인을 몇 사람 부르실까요? 두 사람씩. 두 사람 이상씩 "그들이 전도하지 않았느냐?" 법정 증거의 효율성을 성립하기 위해서 두 사람 이상을 짝 지워 보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의미가 있을 거예요. 두 사람은 공동체의 최소단위. 전도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죠? 두 사람이 한사람보다 나음은 한사람이 넘어질 때 또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해요? 붙들어 일으켜 세워준다. 격려하면서 살수가 있어요. 교회를 격려의 공동체가 될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 둘씩 짝지어 보낸 데는 또 다른 의미도 있다고 봅니다. 제자들의 인격적 영적 성숙을 겨냥한 주님의 전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마가복음에는 어떻게 짝을 지었는지 나오지 않지만 사건을 취급하고 있는 마태복음을 읽어보시면 두 사람씩 짝이 될 때 그 짝을 공부해 보면 흥미롭습니다.
예를 들어 안드레와 베드로가 짝이 됩니다. 환상의 짝이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뭐예요? 형제였습니다. 자라나면서 함께 보조를 맞춘 것이죠. 그러나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짝도 있어요. 시몬과 유다. 시몬은 아주 격렬한 열심당원 출신입니다. 아주 열심히 많은 사람이예요. 예수님의 제자가 된 다음에도 아주 특별한 열심을 보였던 제자입니다. 그러나 가롯유다는 배신자입니다. 유다와 시몬의 짝 아주 희한한 짝이었을 거예요. 시몬이 고민 많이 했을 거예요. 이 유다를 생각하면서 유다를 어떻게 가슴에 품어야 할까? 비판적인 유다.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를 다독거리면서 아마 시몬에게 굉장한 성숙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이 맞아야만 성숙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안 맞는 사람과 짝을 이루어서 공동체에서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를 용서하는 것을 배우고 이것이 공동체의 성숙의 하나님의 전략인 것입니다. 저는 우리 시대의 신앙 속에서 정말 그리스도인 다운 신앙생활을 저해하는 장애물의 하나가 이 시대의 정신이라고 생각해요. 이 시대의 정신가운데 하나가 개인주의입니다. 철저한 개인주의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도 예외 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공동체의식을 상실하고 살아갑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교회라는 공동체가 필요해서 교회를 세우셨을까요? 전도하기 위한 공동체. 여러분 전도한다는 것이 보통사건이 아닙니다. 전도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변화시킨다. 여러분 이말을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세상을 변화시킨다. 내가 나 같은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켜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부족한 대로 우리가 그 연약한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그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공동체가 될 때 그 공동체의 저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교회라는 공동체에게 지상명령의 과제와 숙제를 위임한 것입니다.
마지막 11제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 세상을 바꿔라. 모든 족속으로 네 제자를 삼으라. 이것은 교회 공동체의 원형을 향해서 이 공동체 의식이 있어야 해요. 근데 이 공동체 의식이 어렵습니다. 시대의 영향을 받아서 우리 모두가 뿔뿔이 개인으로 살아갑니다. 저는 우리 시대가 어떻게 흘러가는가 그것을 젤 잘 아는 방법중의 하나는 두 가지라고 생각해요. 그 시대의 유행가. 그리고 그 시대의 유머. 제가 아무리 바빠도 유행가를 들춰봅니다. 배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살고 있는가. 또 그 시대의 유머는 그 시대를 풍자하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 가운데 유행하고 있는 것이 사오정시리즈라고 해요. 사오정시리즈. 나이 많은 사람들은 아예 알지도 못할 지도 모르죠. 제가 이 사오정 시리즈를 연구해봤어요. 연구해보니까 참 썰렁하더라구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웃음이 안나와요. 근데 그것을 유머시리즈라고 해놓았단 말이죠. 그런데 이 사오정시리즈를 검토해 보면서 한가지 공통성을 발견했어요. 이 사오정이 기가 막히게 현대인을 대표합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모습이예요.
예를 들어 사오정집에 강도가 들어옵니다. 그러면서 강도가 손오공은 어디 있느냐? 집에 있어요. 강도가 깜짝놀래요. 그러면서 "삼장법사는 어디에 있느냐?" 그러니까 더 놀래면서 그러면서 "저팔개는 어디 있느냐?" 그러니까 사오정이 "저는 사오정이란 말이예요"소리칩니다. 썰렁하죠.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죠. 그러니까 사오정이 의식하고 있는 것은 "나는 사오정이다" 라는 것 밖에 없어요. 다른 것은 아무 관심 없어요. 이 사오정 시리즈의 공통점이 뭐냐면요 서로 다른 얘기를 해요. 대화가 없어요. 마음들이 통하지 않아요.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사오정 1과 2가 목욕탕 앞에서 만납니다. 사오정1이 2를 보고 "아 목욕탕에 오십니까?" 그랬더니 사오정2가 말하기를 "아니요. 목욕탕에 갑니까"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러니까 사오정1이 "미안합니다. 나는 목욕탕에 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죠. 도무지. 서로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서로 각자 얘기가 달라요. 통하지가 않아요. 대화가 없어요. 그런데 사랑하시는 여러분. 똑같은 비극이 우리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비극이예요. 주일날 교회 와서 예배드리고 가요. 그러나 통하지 않습니다. 만남이 없습니다. 만남의 접촉점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배드리고 또 흩어져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의도하는 교회는 진정한 공동체예요.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그리고 삶의 역경과 삶의 환희를 함께 나누면서 그리고 실패의 상처도 함께 나누면서 서로 위로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일어나는 공동체. 교회 안에 깊이 들어가다 보면 마음에 안 드는 사람도 만나요. 그들을 용납하고 그들을 용서하는 것을 배웁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하는 공동체가 되고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면서 우리는 사랑과 용서를 모르는 세상을 향해서 이렇게 외칩니다. 당신에게도 이런 사랑이 필요치 않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이 공동체를 통해서 세상을 바꾸시길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교회생활을 하세요? 특별히 지식인일수록 교회생활 에 이런 경향이 많습니다. 교회생활 젤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축도가 끝나자마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교회에 깊이 들어가면 골치 아파. 이것이 오늘 교회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어요. 교회에 나오면서 등록도 안하고 나와요. 등록도 안하고. 그것이 편하거든요. 무척 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두 가지. 주님에 의해서 효율적으로 쓰임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관계 속에서 인간관계의 다이믹스 안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서로 위로하고 또 용서해주고 이러한 경험이 일어 다시 말하면 성숙이 일어나지 않아요. 성숙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전도자가 된다. 굉장한 걸 생각하지 마시고 훌륭한 전도자 첫번째 스탭은 교회전체가 선교공동체예요. 전도하기 위해서 묶여진 교인이 먼저 되는 거예요. 그것이 전도자가 되는 첫번째 스탭이예요. 그러니까 등록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등록하고선도 뺀질뺀질. 등록 해놓고도 아무데도 참가를 안해요. 마을목장예배에도 참여를 안해요. 동네사람들과 모여 앉아서 내 인생의 좌절과 슬픔을 말하세요. 끌어안고 교회 안의 소그룹 안에도 소속하고 위원회에도 소속하고 여러분이 성경공부 그룹의 소속. 나이별로 형제와 자매들을 만나요. 함께 웃고 함께 울면서 인생의 애환을 나누고 그 안에서 우리를 치료하시는 그리스도, 우리를 성숙시켜 주시는 그리스도를 경험하며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이렇게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가 소망이십니다. 그리스도가 구원이십니다. 이 복음을 증거 하는 강력한 공동체. 우리가 세상을 바꾸는 선교의 위대한 사명은 이 공동체의 비전과 전략을 내가 따라 그러니까 뭐 나 혼자서 전도한다. 세상을 바꾼다. 어마어마하고 안되는 일이지만 여러분 교회안의 좋은 교인이 되어서 정말 제자리를 찾고 성도들과 교제하면서 교회가 전도합시다. 하면 같이 전도하고 훈련받읍시다 하면 훈련하고 함께 이번에 특별히 전도하십시다 하면 우리가운데 작지만 영향을 미쳐요. 세상은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공동체로 세우신 것입니다. 전도자가 되는 첫번째 스탭입니다.
둘째는 주님의 능력을 철저하게 신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 본문의 8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전대의 돈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뭐만 가지라고 했어요? 지팡이 하나. 신발은 아직 안나왔어요. 그 다음에 나와요. 9절에. 자, 9절 다같이 읽어요 '신만 신고 두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두 가지만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뭡니까? 지팡이와 신발. 이것은 팔레스타인의 지형을 이해하면 여러분 성지순례를 해보시면 예루살렘-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해발 750m나 되는 고지대에 건설된 예루살렘에서 버스 타고 30분만 내려가면 사해바다에 도착해요. 근데 이 사해바다는 어떻습니까? 소위 sealevel 바다의 표면에서 밑창까지 398m나 내려가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지형. 가장 높은 곳과 가장 낮은 곳. 그 사이에는 사막이 펼쳐집니다. 이런 데를 왔다갔다 아주 작은 나라이지만 지형이 험해요. 다니려면. 뭐가 제일 필요하겠어요? 지팡이가 필요하고 신발이 필요해요. 나이키. 네. 신발이 필요해요. 그건 최소한의 준비예요. 그러나 나머지를 걱정하지 말아라. 나머지는 어떻게 해요? 나머지는. 나를 믿어라. 나를 의지해라
여러분 전도자에게 너무 많은 것이 소유되어 있으면 거추장스럽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삶이예요. Simple life예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전도하다 보면 사건이 일어나요. 그러나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주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의 명령에 순종해서 전도를 시작하게 되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대상이 있습니다. 뭔줄 아세요? 귀신을 만나요. 여러분 귀신 만나보셨습니까? 귀신을 만나보지 못한 사람 아직 전도해 보지 못한 사람이예요. 전도하면 귀신을 만납니다. 전도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자, 그러면 전도는 누가 제일 싫어할까요? 귀신이 제일 싫어하는 일이예요. 그래서 전도를 시작하면 누가 먼저 공격할까요? 귀신의 공격이 시작 되요. 그런데 주님은 걱정하지 말아라. 7절에 보세요. 제자를 보내시기 전에 먼저 뭘 주셨습니까? 열두 제자를 부르시사 둘씩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다. 귀신을 만날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아라. 귀신을 제압하는 권세를 주셨다. 믿습니까 여러분.
전도하면 귀신을 만납니다. 그러나 귀신은 패배할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귀신을 패배시키는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종종 선교지에서 선교사님의 선교보고를 듣게 됩니다. 기적이 일어났다는 기적의 리포트를 듣게 됩니다. 그때 어떤 소감이 드세요? 아니, 선교지에서 일어나는 기적이 왜 우리 교회에서는 왜 우리 주변에서는 일어나지 않을까? 저는 여기서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어요. 다만 선교사들처럼 전적인 순종을 통해서 복음전선의 최전선에 살 때 하나님은 거기에서 전능하신 당신의 능력을 부여하시는 것처럼 전도의 명령 앞에 순종하여 이 자리에 선다면 기적은 여기에서도 일어날 줄 믿습니다. 저는 인생이 바뀌는 체험을 한 번 해볼려면 선교사가 안 되도 좋으니까 단기선교 떠나십시오. 목회하면서 늘 이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젊은 청년뿐 아니라 장년들도 단기선교를 한 번 가보세요. 우리와 전혀 다른 문화권에 가서 우리보다 더 가난한 곳. 더 어려운 곳 영적인 어둠이 있는 곳 그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땀을 흘리는 수고를 해보십시오. 인생이 바뀌어서 돌아와요. 한 번 워싱톤교회에서 젊은이들을 맥시코에 보낸 적이 있습니다. 매해 단기선교가 축복이지만 그 해 단기선교는 특별한 축복이 있어요. 갔다온 사람이 다 인생이 바뀌었어요. 어느 빈민 지역에 가서 실제로 약품가지고 가서 치료도 해주고 또 기도도 해주고. 어떤 젊은이가 기도를 하다가 소경이 눈을 떴어요. 소경이. 누가 제일 놀랬을까요? 기도한 사람이. 있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거든요. 이게 진짠가 아닌가 자꾸 만져봤대요. 이 친구가 희한한 사건이 일어나니까 진짜 떴나 안 떴나 만져보고 진짜 떴어요. 이 사람 변하겠어요? 안 변하겠어요? 이 사람 미치도록 변해요.
신학교 갔어요. 여러분. 지금도 우리가 정말 주님의 명령 앞에 순종하면 거기서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을 경험할 줄로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전적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 아니, 그러면 나는 직장 있는데 직장 때려치울까요? 어떤 사람은 직업을 버리고 전적으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향해서 주님이 부르시는 사람도 있습니다. 목사와 전도사 선교사 이런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겠죠. 그러나 생활 속에 있는 사람들. 어떤 사람들은 생업이나 직업을 포기하지 않고 직업의 장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부르십니다. 이런 부르심의 문제를 공부하고 싶으시면 고린도전서 7장을 읽어보시면 독신의 부르심. 결혼의 부르심이 나옵니다. 독신자도 부르시고 기혼자도 부르십니다. 독신자는 독신자로 쓰시고 결혼한 사람은 결혼한 사람대로 쓰십니다. 여러분 독신자와 기혼자 가운데 누가 더 주님 열심히 섬길 수가 있을까요? 독신자가 더 편하죠. 기혼자가 되면 마누라걱정, 남편걱정, 자식걱정, 걱정이 많잖아요.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각자 부르심을 받은 대로 주님을 섬겨라. 부르심이 다르단 말이예요. 목사나 전도사처럼 풀타임으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하고 직업의 장에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하고 어떤 것이 더 힘들까요? 저는 평신도의 부르심이 더 힘들다고 생각해요. 여러분이 더 힘든 거예요. 직장에서 전도하는 것. 직장에서 전도하려면 직장생활 그 자체를 잘 해야 됩니다. 직장생활은 적당히 하고 예수 믿으십시오. 하면 누가 그 소릴 듣겠어요? 무슨 설득력이 있겠어요? 안 믿는 사람보다 직장생활 배로 충성스러워야 합니다. 야근도 더 하고 더 일 열심히 하고 생활의 모본이 되고 예수님은 구원이십니다. 그때 그 메시지가 설득력을 갖지 않겠어요? 그럼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 되고 그리고 거기서 복음을 전한다. 쉬워요? 어려워요? 어렵죠. 그런데 제가 아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아니지만 직장생활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보면 물어보면 "힘들지 않으세요?"
"힘들죠. 그러나 즐거워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의 능력이 지금도 부어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주의 능력은 지금도 복음의 명령을 순종하는 사람. 어떤 형태의 부르심이든 부르심을 받은 삶의 장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여 드리며 그 명령에 순종하여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 주의 능력 나타날 줄 믿습니다. 문제는 그 능력을 신뢰하십니까? 주님이 내 삶을 책임져 주신다. 그리고 이 삶을 감당할 수 있도록 주님이 능력을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전도자의 준비예요. 그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
그리고 세번째로 환영과 핍박을 함께 받을 각오를 하셔야 합니다.
전도자는 환영과 핍박을 함께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10절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것은 환영입니다. 전도하면서 내가 환영받고 대접받을 수가 있어요. '또 가라사대 어디서든지 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어떤 집에 가면 '아, 수고하십니다. 저의 집에 머물러 가시지요.' 너무너무 대접을 받고 환영을 받아요. 자, 전도하다가 우리가 인정을 받고 환영을 받으면 얼마나 용기 백배합니까? 그럴 수가 있습니다. 전도자들을 하나님은 격려하기 위해서 그런 상황을 펼쳐주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도하는 사람의 삶의 전부가 아니예요. 어떤 때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냉담한 거절과 핍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그 다음절입니다.
11절 우리 다 같이 읽겠습니다. 11절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어떤 분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나머지 어느 집에가 전도하다가 안 받아들이면 나오면서 문닫아 놓고 발에 신발은 떨구고 먼지를 털고 떠난다는 분이 있어요. 이것이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것을 잘 알아들으셔야 해요 제대로, 먼지라는 것은 세속성 죄악의 상징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은 영접하지 않고 복음을 거절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사람들이 말은 하지 않지만 숨겨진 가장 중요한 동기 하나는 죄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안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래서 발에 있는 먼지를 떤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죄악에 나는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제가 전도했던 사람 가운데서 솔직하게 나는 죄 짓는 것이 좋아서 예수 믿지 않습니다. 말하는 사람 꼭 한사람 만나 봤어요. 꼭 한사람. 제가 이 사람 이름 얘기하면 모를 사람 한사람도 없을 거예요. 한국의 유명한 가수예요. 미국에서 6개월 동안 저하고 비슷한 지역에 살면서 거의 매주 만났습니다. 그 집에 가서 자기도하고 우리 기숙사에 와서 자기도하고 그랬어요. 많은 얘기를 나누었어요. 사람들은 그가 성가를 잘 부르기 때문에 그가 크리스천이라고 착각을 했습니다. 아니올시다예요. 나한테는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말하니까 솔직히 예수님 영접하면 죄 지을 수 가 없지 않느냐? 맞다고 그랬습니다. 자기는 죄 짖는 것이 너무 좋대요. 그래서 열심히 죄를 짖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 사람은 솔직해요. 사람들이 복음을 거절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죄 짖는 것이 좋아서 그래요. 자, 우리는 그들에게 나는 당신의 죄에 동참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심판 날에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 표시예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버리라는 얘기가 아니예요. 우리는 그들의 냉대, 그들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와서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의 날에 주 앞에 설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계속 촉구해야 합니다. 핍박은 더해질 수가 있습니다. 더 큰 핍박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 전도하다가 목숨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끊임없는 사랑으로 다가서는 것. 이것이 진정한 용기 아니예요? 과거에 기독교 신앙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던 사람들이 신앙을 갖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어디 있느냐? 이것은 마음이 약하기 때문에 위로 받으려고 종교를 갖는 것이다. 약자의 지팡이다. 철학자 니체 같은 사람이 그런 소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전도할 때 이것은 진정한 크리스천의 용기를 나타내는 장면입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서 목숨도 버릴 수 있습니다.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사람.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느니라.' 순교자들, 복음 때문에 목숨을 버렸습니다. 이것이 약자예요? 하나밖에 없는 목숨,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러나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수가 있다. 진정한 용기 , 이 위대한 용기, 저는 크리스천이어야말로 정말 용기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만이 세상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천국의 스타. 누굴까요? 계시록 20장에 보면 사도 요한이 '내가 보니 보좌에 앉아있는 주와 함께 앉아서 세상을 마지막에 영원토록 다스리는 사람들. 그들은 주의 말씀과 복음의 증거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영혼들이 주와 함께 다스릴 것이다.' 그들은 천국의 스타가 될 것입니다. 진정한 영웅,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때로는 사람들에게 냉대와 거절을 받으며 목숨까지 버리는 사람들, 진정한 영웅들. 세상은 이런 영웅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타이타닉 이 영화가 전세계에 하나의 선풍적인 인기를 가져왔습니다. 이 아름다운 영화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것은 이 비극 속에 나타난 영웅들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영웅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 마지막 목숨을 내어놓고 그리고 그 여인을 살리는 그 재프라는 주인공. 영웅이죠. 일종의 영웅입니다. 또 침몰하는 배를 끌어안고 마지막까지 침착하게 그 키를 붙들고 배와 함께 침몰하는 캪틴 스미스, 그 함장도 일종의 영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라이프 보트에 사람들을 실어주고 살리기 위해서 끝까지 노력하는 선원들, 그들도 영웅들입니다. 그러나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감동을 많이 받은 장면은 마지막 순간까지 악기를 붙들고 음악을 연주를 하고 있었던 악사들의 모습이예요. 이 밴드팀의 단장의 이름이 월레스 하틀리라는 사람입니다. 다른 것은 영화이기 때문에 각색 된 부분이 많습니다. 주인공의 얘기는 특별히 가짜입니다. 픽션입니다. 그것은. 그러나 밴드를 플레이하고 있었던, 끝까지 침착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며 그리고 찬양의 가사 속에서 메시지를 통해서 하늘의 거룩한 소망을 바라보도록 촉구하고 있었던 이 밴드 플레이의 캪틴은 월레스라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전도하기 위해서 이 화려한 무너질 수 없는 배, 이 배에 타고 이 바다를 횡단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는 자진해서 그 배에 탄 악장이었어요. 그는 이 혼란한 판국,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버리고 있는 이 판국, 무너질 수 없는 배라고 착각하고, 이 배에 소망을 두고 탔던 사람들이 그들의 생명이 잃어져 가는 마지막 장면까지 침착하게 자기의 팀 맴버들을 격려하면서 그는 마지막 이 장엄한 음악을 연주하면서 그는 계속 소리쳤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의지하십시오. 그를 가까이 하십시오. 그가 소망이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지막 침몰해 가는 배속에서 이 찬양을 통해서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월레스 이 형제는 이 음악을 들려주면서 끝까지 외쳤다고 합니다. '예수, 그분을 의지하십시오. 그가 소망이십니다.' 진정한 영웅들, 이 무너지는 세상이라는 배 안에 타고 살면서 소망의 근거를 잘못 착각했던 사람들, 그래서 이 세상이 무너지자 아무것도 기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소망이십니다. 이 메시지를 토할 수 있는 영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크리스천들은 이런 영웅이어야 합니다. 전도자들 그들은 이 시대의 빛나는 영웅일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약속하기를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사람들, 그들은 나중에 별처럼 영원토록 빛나리라. 우리 시대는 이런 영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과 내가 그런 복음에 대한 소망을 던지는 영웅적 전도자가 되시겠습니까? 기도하십시다. 조용히 기도하시면서 '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이 가사의 뜻을 생각하면서 한번 찬송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인간이 만든 배. 무너질 수 없는 배라고 착각했던 사람들, 우리는 우리의 사회가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는 비극들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든 것은 무너집니다. 무너지는 세상에서 무너질 수 없는 소망이신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를 붙들고, 그 그리스도를 가까이 하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가까이 하도록 이 소망을 나누는 삶, 이 삶보다 더 고귀한 삶이 어디에 있을까요? 주님 가까이하며 살겠습니다. 한평생 주님 의지하고 살겠습니다. 그리고 내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주님 가까이 하라고 증거하면서 살겠습니다. 도와주시옵소서. 함께 해 주시옵소서.
자비로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 앞에 나옵니다. 주님을 가까이하게 도와주시옵소서 . 덧없는 세상 , 무너지는 세상. 하나님, 그러나 무너질 수 없는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삶, 하나님, 이 예수 그리스도를 높여드리며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이 삶 속에 우리의 삶이 드려지고 바쳐지도록 역사 해 주시옵소서. 주님 함께 해 주시옵소서. 성령으로 역사 하시고 오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 속에서 가장 존귀하고 움직일 수 없는 우리의 소망이 되어 주시옵소서. 주님, 의지합니다. 주님 붙들고 살겠습니다. 도와 주시옵소서.
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내 삶 속에 가장 존귀한 분이 되어주시옵소서. 당신은 우리의 소망, 당신은 우리의 반석, 당신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주님 의지하겠사오니, 주여, 우리의 소망 흔들리지 아니하고 주님 때문에 우리의 삶이 비로소 소망의 인생인 것을 선포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도하는 사람 (본문 : 행 2:37-41)
오늘 이 시간에는 "전도하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한번 따라 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도하는 사람. 나도 전도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믿으시면 아멘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순복음인천교회는 바꾸지 않는 4대 표어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전도하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1999년도, 금년도의 4대 목표 가운데 두 번째가 "전 성도 한 해 3명 전도, 3명 양육"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전도가 하나님의 뜻이요, 교회의 목적이요, 또 성도가 복 받는 길인 것을 굳게 믿고 이에 힘쓰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전도를 많이 할까? 어떻게 하면 전도를 열심히 그래서 정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주의 뜻을 이루어 드릴까? 성도가 신앙의 복도 받고, 생활의 복도 받고, 건강의 복도 받게 할까?" 하고 거룩한 고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는 언제나 전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전해진 복음이 아무리 전 인류를 구원하는 좋은 소식일지라도 이것을 전하는 사람이 없다면, 오늘날의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도 전도자요, 초대교회시대로부터 역사상 교회를 세우고 이끌어간 모든 사람들이 다 전도자들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전도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다면 이 시대뿐만 아니라 장차 다가올 시대의 모든 사람들을 불행한 삶 가운데 버려 두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성령충만을 받아서 처음 한 일이 전도였습니다. 그 결과로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8-41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모두 "전도하는 사람이 되겠다." 또 "전도하는 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지기 위해서 꼭 알아두어야 할 사항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전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한 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가 은혜 받는 신앙이 뭐냐고요? 순종입니다. 복 받는 신앙이 뭐냐고요?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순종한다, 순종해야지" 하는 말을 많이 해요. 과연 그 순종이 뭐냐?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 전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또 전도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입니다. 또 전도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에 힘쓴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요, 또 예수님이 그렇게 유언처럼 남기신 말씀에 우리가 따라 간다 그런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6장 15절에서 예수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부활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는 효자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느냐? 전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이요 하나님의 뜻인 전도를 하는 사람, 전도에 관심이 많은 사람, 전도를 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 실제로 전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효자 중의 효자인 것입니다. 효자는 부모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특히 그것이 여러 사람에게 유익하고 좋은 것이라면 더욱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 전도는 명령이기 전에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의 뜻인 것입니다. 전도가 뭐냐고요? 하나님 아버지의 뜻. 그래서 디모데전서 2장 4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너무너무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냐? 우리 아버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이 다 잘 되는 것입니다. 누구누구만 잘 되는 것이 아니라,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누구나 다 잘 되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현재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만 잘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있는 사람들마저도 하나님은 다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잘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직은 심판의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은혜의 시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고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모두가 다 잘 되기를 원하십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16년 전에 제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교무국장으로 있다가 인천에 교회를 개척하며 나올 때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당회장 되시는 조용기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최 목사! 열 손가락 깨물어봐. 안 아픈 손가락 있는가?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야. 이것이 하나님 마음이지." 그 말씀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 말씀 듣고 뭐 알고 있는 일이지만, 손가락을 입에 넣어 가지고 슬쩍 한번 깨물어 봤어요. 세끼 손가락을 이렇게 하니까 아파요. 또 명지 손가락을 넣고 깨물었지요. 아파요. 장지 손가락을 넣고 깨물었지요. 아파요. 그 다음에 검지 손가락을 넣고 깨물었지요. 아파요. 그 다음에 엄지손가락을 넣고 깨물었지요. 안 아픈 손가락이 하나도 없어요.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똑같다 그 말인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은 똑같다 그 말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머리에 가시관 쓰시고,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시고 죽으셨습니다. 나만 위해서일까요? 현재 교회에서 구원받고 예배드리는 사람만 위해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교회에 들어오지 못한 세상 사람, 아직까지 구원받지 못하고 세상에서 지금 방황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도 예수님은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집 떠나간 자식처럼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고대하시는 것입니다. "어서 돌아와, 어서 돌아와" 누가복음 15장 7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교회 안에 99명이 있는 것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교회밖에 서 있는 한 사람,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한 사람, 죄인 된 한 사람, 방황하는 그 한 사람, 병든 한 사람, 소외된 한 사람, 그 사람마저도 주님은 다 찾고 계십니다. 다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모두가 다 구원받고, 모두가 다 성령세례 받고, 모두가 다 성령충만 하고, 모두가 다 잘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것이 뭡니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 중요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뭡니까?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서 그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직 구원받지 못한 가족, 친척, 친구, 이웃, 그 사회, 그 지역, 그 나라, 온 세계 사람들을 전도해서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요,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요, 이것이 진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가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는 최상의 삶인 것입니다.
둘째로, 전도는 남을 살리는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남을 살리자." 행복한 사람이 누구냐고요? 남을 살리는 사람이라고요.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한 아내가 누구냐고요? 남편을 살리는 사람은 행복한 아내인 것입니다. 행복한 남편이 누구냐고요? 아내를 살리는 사람은 행복한 남편인 것입니다. 자식을 살리는 사람, 그 부모님은 행복합니다. 뿐만 아니라, 부모님께 효하고,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고, 부모님 마음을 평안하게 해 드리고, 부모를 살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식은 행복한 것입니다. 행복이 어디 있냐고요? 남을 살리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는 남을 살리는 것입니다. 전도는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립니다. 전도는 마귀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켜 주고 살립니다.
또 전도는 저주를 변하여 축복이 되게 하는 첫 번째 비결인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살리고, 학교를 살리고, 직장을 살리고, 친척과 이웃을 복되게 하는 방법이 전도다 그 말인 것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남을 살릴 수 있어요? 무엇을 가지고 살릴 수 있어요? 오직 복음을 가지고, 복음은 생명이에요. 이 전도를 통해서 살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나라가 복음화 될 때, 이 나라가 더 믿음의 백성이 더 많아질 때, 믿음의 성도가 많을 때, 교회가 부흥할 때, 교회가 성장할 때, 때가 되매 남북통일도 전쟁 없이 평화로이 통일될 줄 믿습니다. 이 민족에 더욱 희망이 있게 될 것입니다. 복음 때문에, 이 전도를 통해서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또 전도는 이 사회를 살리는 것입니다. 전도는 우리 영혼을 살리고, 정신을 살리고, 그래서 이 사회에 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 많아지게 한다 그 말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아들 된다구요. 예수 믿고 성령세례 받고 성령충만함 받으면, 정신이 살아요, 삶이 살아요. 그럴 때 이 사회는 더 맑고 밝고 환한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삼서 2절에서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영혼이 잘 되면, 예수를 구원을 받아서 성령세례 받고 성령충만함 받아서 영혼이 잘 되면, 범사가 다 잘 됩니다. 직장도 잘 되고, 가정도 잘 되고, 자녀도 잘 되고, 친구도 잘 되고, 친척도 잘 되고, 사돈도 잘 되고 다 잘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건강하고 우리가 장수를 누리면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마귀와 귀신들이 가져오는 질병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건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여러분들이여! 다 건강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요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전도는 기쁜 소식을 이웃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52장 7절입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전도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줍니다. 절망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준다 이것이지요. 질병으로 절망하는 사람, 죄악으로 절망하는 사람, 가난으로 절망하는 사람, 특히 IMF 경제체제에서 실직을 당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통하여, 전도를 통하여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인 것입니다. 기독교를 가리켜 뭐라고 말합니까? 믿음, 소망, 사랑, 예수를 믿으면 소망이 있고, 소망이 있으면 사랑합니다. 사랑하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죽은 자에게 살 소망을 주고, 병든 자에게 치료받을 소망을 주고, 낙심한 자에게 다시 일어날 소망을 주고, 부도난 사람에게 다시 회복될 소망을 주고, 안 되는 사람에게 잘 될 소망을 주는 것이 복음인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도인 것 믿으시면 아멘 하겠습니다.
이 사회 문제는 뭐가 문제입니까? 내일에 대한 꿈과 구체적인 비전과 소망이 없는 것, 이것이 이 사회의 문제인 것입니다. 꿈을 잃어버린 것, 소망을 잃어버린 것, 비전이 없는 것,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보다 높은 이상향을 꿈꾸며 "내일은 오늘보다 낳을 것이다. 분명히 내가 지금은 부도가 났고, 내가 사업이 어렵지만, 직장이 없지만, 나는 직장이 있을 것이다. 내 사업은 다시 일어날 것이다. 우리 가정은 다 행복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어려움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다시 우리 가정은 화합될 것이고, 화목 될 것이고, 다시 모아질 것이고, 다시 잘 될 것이고, 우리 가정은 행복할 것이다. 희망이 있다. 희망이 있다." 살아갈 때 분명히 개인이 살고, 가정이 살고, 사회가 살고, 민족이 살고, 나라가 살게 될 줄 믿습니다. 희망이 살아야 나라가 삽니다. 희망이 살아야 가정이 삽니다. 희망이 살아야 기업이 삽니다. 희망이 살아야 경제가 삽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남을 사랑하기 때문에, 남을 살리기 위해서, 남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사랑인 것입니다. 나보다 남을 더 잘 되게 하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어야 된다 그 말입니다. 나만 위해 살지 아니하고 남을 생각하는 것, 그러므로 전도는 남을 살립니다.
셋째로, 전도는 내가 사는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전도는 내가 사는 것이다." 전도하면 나도 살아요. 우리 속담에 그런 말 있잖아요. 다른 사람을 물에 넣고 하면 자기가 먼저 물에 빠져야 된데요. 반대로 남을 살리면 나도 사는 거예요. 전도는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모님 말씀을 잘 들으면 잘 사는 길이 열리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대로 전도에 힘쓰면, 범사에 잘 되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다 그렇게 되기를 정말로 원하시면 아멘 하겠습니다. 원하시면 아멘 하겠습니다. 그렇게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전도가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왜 사느냐구요? 전도하기 위해서, 내가 왜 직장에 나가 일하느냐구요? 전도하기 위해서. 내가 왜 더 큰 사업을 해야 되냐고요? 전도하기 위해서. 왜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학교에 가서 더 좋은 삶을 살아야 되냐고요? 전도하기 위해서. 돈을 버는 이유도 전도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이유도 전도하기 위해서, 더 많은 기술을 습득해서 좋은 직장에서 일하는 이유도 전도하기 위해서, 교회에 다니는 이유도 전도하기 위해서….
특히 순복음인천교회는 이웃과 함께 하는 교회예요. 성산 어린이집이 있어요. 순복음유치원이 있어요. 또 성산 사랑의 집이 있어요. 베데스다교육원이 있어요. 효도대학원대학교가 있어요. 효행봉사단이 있어요. 청소년육성제단이 있어요. 여성교육문화원이 있어요. 순복음신문이 있어요. 성산서원이 있어요. ICI대학교가 있어요. 여러분! 왜 만들었냐구요? 전도하기 위해서. 목적이 뭐냐? 전도입니다.
어떻게 교회가 더 성장 하냐고요? 성장비결이 뭐냐고요? 사도행전 2장 47절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왜 사느냐? 전도하기 위해서. 또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전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교회나 성도는 더 힘을 써야 됩니다. 그런데 교회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교회는 힘을 잃어버려요. 전도하지 아니하는 성도도 무기력하고, 전도하지 아니하는 교회도 무기력합니다. 그러나 전도하면 충만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여러분 모두가 다 믿음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도할 때 우리는 자신에게 믿음이 얼마나 있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남에게 전도하기 앞서서 자기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자기가 자기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지금 죽어도 천국 갈 수 있다고 믿는가?" "예수님 나의 구세주이시면 삶의 주인이라고 믿는가?" 또 세 번째는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고 있는가?" 세 가지 질문마다 "아멘, 아멘, 아멘" 할 수 있으면 여러분은 일등 신자예요. 주님이 지금 당장 오셔도, 한 사람도 낙오되지 않고 몽땅 휴거 되어서 상급 받는 자리에 올라가게 될 줄 믿습니다. 전도할 때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를 깨닫게 되고, 그뿐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먼저 나의 믿음을 견고하게 할 수 있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하면 내 믿음이 살아요. 내 신앙이 살아요. 내 사명이 살아요.
또 전도하면 영적인 힘을 얻게 됩니다. 마가복음 16장 17-18절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전도하는 사람은 기도의 힘이 생기고, 또 믿음으로 기도하게 되고, 기도할 때 능력의 체험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의 효과를 위해서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각종 은사를 허락해주셨습니다. 특히 능력 행하는 은사, 병 고치는 은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여러분 모두가 다 성령 충만함 받아서 전도할 수 있는 사람되어지기 위해서 능력 행하는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방언의 은사, 방언 통역의 은사, 영분별의 은사와 같은 각종 은사를 다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전도하면 건강의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여러분들이 전도함으로 말미암아 다 건강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일하는 사람을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여러분들이여! "내가 어떻게 건강할까? 내가 병들면 어떻게 할까?" 염려근심하지 마시고, 열심히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안타깝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아이고! 병들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오래 살아야 되는데, 내가 건강해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 될까?" 뭘 어떻게 해요 전도하면 되지요. 주님 말씀하셨잖아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일하는 사람을 도와주세요. 건강하게 하세요. 먹여주세요.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디모데전서 5장 18절 말씀입니다.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전도하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는 거예요. 전도하는 사람에게 병들어서 전도를 막는 일을 하지 않게 하시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전도하는 사람에게 능력과 권능을 주세요. 전도로 이 몸을 쓰니까. 전도의 병기로 쓰니까 주님이 받아주시는 증거인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전도하면 내가 살아요. 신앙이 살고, 가정이 살고, 정신이 살고, 영이 살고, 몸이 살고….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전도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모두가 다 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로, 전도는 내가 상 받는 것입니다.
한 번 따라 하세요. "전도는 내가 상 받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상 받기 위해서 전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전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상을 주시되, 큰상을 주세요. 우리 주님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보니까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했습니다.
전도하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은 영광 받으신다 그랬어요. 그런데 여러 가지 열매 가운데 가장 알차고 소중한 열매가 뭡니까? 전도의 열매인 것입니다. 전도의 충실한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애써야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의 기초원리가 뭐냐고요? 성령충만, 제자양육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양육하셨어요. 부활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받으라.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받는다. 권능을 받으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지금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성령충만 하고 제자 양육하면, 그것이 다시 재생산되고 재생산되어서 계속 전도, 전도, 전도가 잘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 성령충만 받으시고 제자양육 받으셔서 전도를 잘 할 수 있고, 또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이 남을 또 다시 재생산함으로 말미암아 계속 전도가 이어지고 상 받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전도의 기초원리는 제자양육과 성령충만, 그러면 또 다른 제자를 낳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전도자에게는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장차 천국에 갈 것입니다. 상급 받는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열심히 전도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신앙생활 잘 하는 사람은 상급 받는 자리에 가서 면류관의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고 구원받고 은혜를 받았는데, 전도를 하지 아니하고 봉사하지 아니하고 나누어주지 아니하고 베풀지 아니하고 자기 혼자만 은혜 받다가 왔으면, 모두가 다 개털모자처럼 아무 상급이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상급 받는 자리에 서시고, 칭찬 받는 자리에 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면류관에는 여러 가지 면류관이 있습니다. 의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영광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8절은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말씀했습니다. 또 야고보서 1장 12절에서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말씀했습니다. 또 그뿐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5장 4절입니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주님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여러분 모두가 다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다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전도하는 사람은 우리가 천국 가서만 상급과 면류관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누가 잘 되느냐? 자손이 복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전도를 많이 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자녀가 다 잘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37편 25-26절입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전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의 면류관뿐만 아니라, 천국 가서의 면류관뿐만 아니라, 이 세상 살아가면서 자손이 잘 되는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여러분의 자녀가 잘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입니다. 전도는 하나님 아버지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남을 살리는 것입니다. 전도는 내가 사는 것입니다. 전도는 내가 상 받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좋은 것이 어디 있어요? 세상의 무엇을 해서 하나님께 순종도 하고, 남도 살리고, 나도 살고, 내가 상 받는 일, 자손이 잘 되는 일이 무엇이 있겠어요? 사업만 한다고요? 명예만 얻는다고요? 세상 무엇 가지고도 이렇게 좋은 축복을 받을 길이 없어요. 오직 한 가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가 성령세례 받고 성령충만한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전도하면,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고 전도하면, 이런 상급, 이런 복이 오는 것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따라 하세요. "오직 예수! 오직 성령충만! 오직 전도!"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전도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전도하는 자가 받는 상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안드레의 전도 (본문 : 요 1:40-42)
유명한 성경 주석가 벵겔(Bengel)은 요한복음 1장 35-51절 중에 나타나는 예수의 최초 제자들의 모습을 가리켜 '기독교회의 새 기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복음 운동의 처음 제자들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가운데 나타난 처음 제자들 중에는 세례 요한에 의하여 예수의 제자가 된 안드레와 요한 같은 자도 있습니다(요 1:35-42). 또 안드레의 전도에 의해서 예수의 제자가 된 게바, 곧 베드로 같은 자도 있습니다(요 1:40-42). 또 예수의 직접적인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된 빌립도 있습니다(요 1:43-44). 또 먼저 부름을 받은 빌립에 의해서 전도를 받은 나다나엘도 있습니다(요 1:45-51).
역사의 한가운데서 조용한 별들의 전쟁이 시작되는 모습입니다. 마침내 전세계를 흔들어 놓고, 새 역사를 창조해 내고야 말 별들의 움직임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안드레의 전도를 만나기 원합니다. 안드레의 전도는,
Ⅰ. 기독교 역사상 가장 처음으로 행해진 자발적인 전도였습니다.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였습니다(요 1:40). 그는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36-37)이라고 믿게 된 자입니다.
요한복음 1장 41절에 「그가」라고 한 말은 40절의 안드레를 말합니다. 그와 사도 요한은 「가서」, 예수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예수와 「함께 거한」 일이 있었습니다(요 1:39). 그때부터 저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된 자리에서 예수의 제자로 자리를 옮긴 자들이었습니다.
사도 요한과 안드레가 예수 계신 곳을 ① 찾아가서 ② 보고 ③ 그 날 함께 거하기 시작한 이 사실을 가리켜 '그 날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탄생한 날'이라고 웨스트 콧(Westcott)은 말하였습니다. 안드레는 예수 계신 곳에서 큰 만족과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러던 그(안드레)가 그의 형제 시몬에게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의 제자가 되기 시작한 직후에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하는 행복이 자기 자신만의 독점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Ⅱ. 골육 복음화에 최우선을 둔 자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41절에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먼저」라 함은 ① 사도 요한이 자기 형제 야고보에게 전한 것보다 앞서 전도했다는 뜻입니다. ② 그러면서 이 말은 또한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기 전 제일 먼저, 최우선적으로 자기 형제 시몬(게바)에게 전도했다는 말입니다. ③ 뿐만 아니라 '먼저'라는 이 말은 시간적으로 '아침 일찍'이란 개념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나타내신 주님의 선교전략을 따르면 제일 먼저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 땅끝의 순서입니다. 전도자 바울도 골육 전도가 우선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첫째는 유대인이요'라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마음에 큰 근심과 고통이 있는 것을 그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거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롬 9:1). 그의 큰 근심과 고통은 바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의 복음화라고 하였습니다(롬 9:3). 이 일은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한이 있어도 원하는 바라고 하였습니다(롬 9:3).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받아 구원인이 되고 난 후의 그 첫 번째 과제가 골육의 구원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사실상 자신들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과 관계되어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상 별들의 전쟁은 가족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Ⅲ. 그의 전도 내용은 바로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1절에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라고 하였습니다. 곧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드레는 예수 계신 곳으로 가서 보고, 예수와 접촉하는 가운데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발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유대교 4,000년이래 실로 대 발견이요, 대 폭발이요, 대 사건입니다. 안드레의 이러한 발견과 그 전파는 실로 금광의 노다지나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한 것하고도 비교할 수가 없는 위대한 것입니다.
모든 구약성경은 사실상 예수께서 인류의 메시아, 곧 그리스도로 오실 것이라는 내용이 그 주제였습니다. 그러나 유구한 세월의 변천과 함께 이스라엘의 메시아관은 전혀 엉뚱하게 발전되어 버렸습니다. 저들이 바벨론 포로 시기와 페르시아 그리고 헬라, 로마로 이어지는 세계 패권주의 압제에 시달리면서, 저들은 한결같이 경제적, 정치적, 민족주의적 메시아를 기다리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메시아를 구원의 메시아로 바로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임을 체험하고 그 형제 게바에게 전도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복음 전도의 본질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곧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구원의 주님으로 전도해야 합니다. 결코 예수는 이 세상의 육신적 기복의 주님이나, 어떤 육신적 치유의 요행을 가지고 세상에 오신 분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죽을 죄인을 완전히 구원하시러 오신 구세주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저 빌립보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전도한 것입니다(행 16:31).
Ⅳ. 그의 전도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행동적이고, 실천적인 개인전도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42절에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라고 하였습니다.
안드레는 자기 자신이 예수 계신 곳을 가서 친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함께 거하면서 예수가 세상에 오신 메시아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때 그는 전혀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가슴은 영열(靈熱)로 불타 올랐습니다. 그리고 벅차 오르는 이상한 기쁨으로 가득 차 버렸습니다. 그때 그는 그 분을 자기 형제에게 알리고, 소개해 주고 싶었습니다. 자기의 마음에 일어나고 있는 그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생명의 희열을 나누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임한 그 이상한 메시아적 힘이 그 마음과 몸을 움직이게 하고, 입을 움직이게 하고, 눈을 움직이게 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침내 실제로 자기 형제 시몬을 움직이게 하여 예수께로 데리고 오게까지 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일대일의 전도를 시작한 사람입니다. 안드레는 개인전도의 선구자였습니다. 이렇게 생명을 받은 자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생명 그 자체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성격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언제나 요동(搖動)이요 요진(搖進)입니다.
안드레의 마음에 임한 메시아적 은총의 힘은 저렇게도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행동적이고 실천적인 간절한 전도운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Ⅴ. 그의 전도는 효과적인 전도, 곧 열매맺는 전도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42절이 다시 말합니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안드레가 인도해 온 시몬을 보고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게바'를 음역하면 '베드로' 곧 '반석'이란 뜻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새 이름을 예언해 주었습니다. 주님이 그에게 '게바'라고 하는 새 이름까지 주심은 ①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② 뿐 아니라 장차 그가 사람 낚는 어부로 주님이 얼마나 크게 사용할 유용한 인물인지를 알려 주는 내용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미래적 가능성을 예시해 주었습니다. 지금은 '요한의 아들 시몬'이지만 장차는 '게바'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반석'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결코 예수는 우리를 현재, 지금의 상태로만 보시지 않습니다. 미래를 약속해 주는 내일(來日)의 사람으로 사용해 주십니다.
그것은 마치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창 17:5), 야곱을 이스라엘로(창 32:28), 사울을 바울로(행 13:9) 개명해 주심과 같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사람 속에 있는 가능성을 찾아내어 주십니다. 중대한 것은 안드레가 자기 형제 베드로를 전도함으로 장차 예루살렘과 세계 교회의 기수가 될 예수의 대 사도 베드로를 얻게 된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예언하신 게바의 이름은 마침내 저 유명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그의 신앙고백과 함께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마 16:18). '안드레'란 이름의 뜻은 '강인함', '남자답다'인데, 과연 그는 그 이름대로 큰 일을 남자답게 해낸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장차 세계 교회를 창설할 베드로를 주께로 인도한 것을 볼 때 그는 실로 남자다운 큰 일을 한 사람이 아닌가!
벌써 지난해의 일이 되었습니다. 1998년 12월 2일(수) 79세를 향년으로(1919. 8. 27. 生) 천국에 가신 고 신철석 집사님이 우리 교회에 계셨습니다.
그 분은 고향이 경북 대구인데, 경북고를 졸업하고 일본 명치대 법학과를 졸업하셨습니다. 경남 마산 북면 창북중학교 교장으로 봉직하시다가 63세 때 공로 퇴직을 하신 훌륭하신 교직자의 사표였습니다. 퇴직 후 서예 작품 활동을 하셨는데, 우리 고려신학교 교장실에도 그 분이 기증하신 작품이 2점이나 걸려 있습니다. 유족으로 부인되신 우리 교회 김경 집사님과 장남 신호일 집사님, 그리고 자부 장점숙 집사님이 있고, 또 두 아들과 자부, 딸 하나(3남 1여)가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손자와 손녀들이 있습니다.
이분은 98년 1월 4일에 등록을 하고, 그 해 4월 12일에 세례를 받고, 5월 31일에 교회서 행한 서리 집사 추가 임명시에 전격적으로 서리 집사 임명까지 받은 분입니다.
그는 97년 8월 심근경색증으로 여의도 성모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는데, 그때 가족들은 돌아가실 줄 알고 거기에 따르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병원에서는 별다른 처방이 없어서 집으로 퇴원하셔서 투병생활을 하던 중 그 해 12월 즈음에, 안방에서 비몽사몽(의식 반 꿈 반) 중에 흰옷을 입으시고 키는 천정에 닿을 정도로 크신(9척쯤으로 생각됨) 예수님이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문을 열고 들어오심을 보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라 흰옷을 입고 가시면류관을 쓰신 열한 분이 함께 들어와서 누워 계신 할아버지 둘레에 서서 허리를 굽히고,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한참 동안 계시더니 한 분씩 문을 열고 나가시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기막힌 장면을 보신 할아버지는 그 후에 곧 병이 나아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 12월에 맏아들 신호일 집사가 아버지께 "아버님, 우리 한길을 가셔야죠."라고 하면서 교회에 나가실 것을 권하자, 그는 바로 그 다음 주일(98년 1월 첫째 주일)에 교회에 등록을 하신 후 한 주일도 빠짐없이 나오셨습니다. 이 사실을 본 그 부인 김경 집사님도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좋아하셨습니다.
평소 과묵하신 할아버지는 교회 나온지 3, 4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예수님이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자기를 찾아 주셨던 사실을 자녀들과 교역자들에게 알리고, 자부 장점숙 집사님에게 가시 면류관을 쓰신 예수님의 사진을 구해 오라고 해서 그 사진을 자기 방에 걸어 두고 지냈습니다.
이 할아버지가 주님을 만난 후 교역자들의 심방을 받을 때는 천사를 영접하고 환영하는 것같이 하셨습니다. 심방이 있는 날은 항상 한복을 입으시고, 상(床)을 펴놓고, 방석을 깔아 놓고 심방 받을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이 일은 아무도 가르친 일이 없었는데 그 분 스스로가 그리하였습니다.
전에는 교역자가 가면 방에서 나오시지도 않으시던 분이 먼저 현관에 나오셔서 영접을 하고, 교역자의 신발을 정리해 놓고, 또 떠날 때는 배웅 인사를 극진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나 구역예배나 가정 심방시에 그 예배 태도는 참으로 진지하고 경건하였습니다.
교회가 하는 영적 사역들을 알리고 동참할 것을 권하자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동참하여 선교헌금, 신학교 헌금을 작정하고 각종 예배 헌금에 즐겁게 참여하셨습니다. 부인되신 김경 집사님께서 우리는 모두 한 주머니인데 별도로 할 것이 무엇이냐고 하면, 할아버지는 각자의 몫을 각자가 감당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주일예배와 구역예배를 기다리고 사는 것이 이 분의 낙이었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으시고, 눈이 잘 보이지 않을 때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간절한 기도생활을 하였습니다. 사실 그 아버지의 주일예배 참석 때문에 아들과 자부의 주일예배가 강화된 셈이었습니다.
소천하시기 한 주일 전에 교역자가 심방을 했는데 "이제 몸이 좋지 않아서 이번 주에 교회에 갈 수 있을는지…"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구역예배 때는 "천당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 하시면서 항상 하셨듯이 구역원들이 먹을 빵을 사서 들고 오셨습니다. 소천하시기 전날 밤에는 전과 같이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로 계속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화요일 밤에 입원하여 수요일 11시경에 소천하셨습니다. 부인되신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돌아가신 그 얼굴이 꼭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고인의 장례식은 참으로 은혜로웠습니다. 장남 되시는 신 집사님이 아버지 이름으로 건축헌금을 드리고(건축위원 됨), 아들과 자부도 또 건축헌금과 함께 건축위원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당회장 앞에서 아들 되신 신 집사님께서 친히 1999년부터는 보다 더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약속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전도는 확실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는 역사적 사건의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의 생명 곧 영생 문제와 직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전하는 전도의 힘이 약하거나 또 사람의 전도를 거절할 때는 오늘 우리가 듣게 된 이 할아버지처럼 주님이 직접 나타나서 결정적인 전도 효과를 나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듣든지 듣지 않든지 전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라고 하였습니다.
안드레의 전도! 바로 우리의 전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름다운 별들의 전쟁입니다. 자기 형제 시몬을 예수께로 돌아오게 해 버린 안드레! 그는 분명히 별과 같이 빛나고(단 12:3) 있지 않은가!
희생 없는 전도는 없다 (본문 : 행 11:19-21)
얼마 전 신문에 가족이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강물에 빠진 기사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기의 두 아이를 건지기 위해서 필사의 노력을 하여 애들은 살렸지만 그는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린다는 것은 그만한 대가를 지불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영적인 생명을 살리는 전도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희생을 하지 않고는 전도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한 사람을 예수 믿게 하려면 빈손으로 안됩니다. 왜냐하면 전도는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기 때문에 희생 없이는 생명을 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을 향하여 "죽었다"라고 선언합니다. 살았으나 실상은 산 자가 아니고 죽은 자라고 정의합니다.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롬5:15)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전 인류가 죽음의 노예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이 세상에서 70-80년 동안 사는 것을 생명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대단한 것이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눈에는 이 세상에서 몇 십 년 사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마치 어항에 있는 고기가 그저 몇 달 살다가 죽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아침의 이슬처럼, 안개처럼 금방 사라지는 것이 인생의 길이요, 인간의 현주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원래 의도하신 생명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 영원한 생명을 인생이 소유하고 있지 못하므로 하나님 눈에 인생은 단지 죽은 것에 불과하며,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전도
이처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죽은 인생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여 영생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도입니다. 복음을 전하면 듣고 믿는 자가 살아납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라고 말하였습니다. 복음은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가 영원한 죽음의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을 깨워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하는 능력이기에 바울은 복음 전하는 것 즉 전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죽은 존재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알 수도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21절은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머리가 똑똑하고 남보다 더 출중하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압니까?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제대로 압니까? 전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 내가 살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결코 자신이 처한 영원한 죽음의 운명을 알 수도 없고, 그 죽음에서 구원받을 방법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절망적인 인간의 운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참으로 기이한 한가지 방법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라고 바울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알려 주고 있습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마련하신 전도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미련한 것입니다.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예수 믿으십니까? 예수 좀 믿으시죠." 하면 '뭐 이런 이상한 놈이 다 있나. 재수 없게시리...' 이런 눈으로 쳐다봅니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 전도는 너무나 어리석은 방법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미련하게 보이는 전도를 통하여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며, 예수를 믿어 영원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미련해 보이는 이 전도를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전도만큼 귀한 일이 없습니다. 선교만큼 보람 있는 일이 없습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할만한 가치 있는 일이 바로 전도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희생
구원을 위하여 성삼위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희생을 치렀습니다. 성부 하나님이 어떻게 희생하였습니까? 자기 외아들을 포기하셨습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는 희생을 치렀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어떻게 희생했습니까?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놓았습니다.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어떻게 희생했습니까? 그는 이 세상에 오셔서 교회 안에서 이 세상 끝날 때까지 떠나지 않고 계십니다. 이처럼 성부, 성자, 성령 삼위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먼저 희생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매우 좋은 예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
라."(요12장24절) 여기서의 "한 알의 밀"은 누구를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까? 하나님, 자신, 성령을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기 위해서 썩는 밀알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희생함으로, 하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희생 없이는 생명을 건질 수 없습니다.
복음 증거자들의 희생
하나님만이 희생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희생에 동참한 자들이 있었기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게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게 된 것은 누군가 우리를 위하여 희생을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로 기도해 주었기에 내 심령이 열려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희생해 준 사람이 있습니다. 시간을 바치고 심지어 돈을 써 가면서 나를 위해 수고한 사람 덕분에 내가 오늘 예수 믿은 것입니다.
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의 '예'자도 모르는 시골 마을에 선교사님이 오셨습니다. 산 넘고 물 건너 저 깊은 벽촌까지 선교사가 찾아 와서 보리밥 먹어가면서 모기 쫓아가면서 그들과 함께 며칠을 보내며 서툰 한국말로 전도했습니다. 그때 증조 할아버지가 먼저 예수 믿었습니다. 그리고 무지무지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교사와 증조 할아버지가 치른 희생의 대가로 구원이 제게 임하였고, 오늘날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를 위한 누군가의 희생 없이 과연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전 인구의 1/4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통계를 내놓을 만큼 부흥하였습니다. 전 세계 교회가 놀라고 부러워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축복을 누리게 된 배후에는 엄청난 피가 있었고, 눈물이 있었고, 땀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피와 눈물과 땀은 계속하여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27살 때에 선교하기 위하여 영국에서 중국으로 머나먼 바닷길을 건너온 토마스 선교사, 그러나 중국으로 건너오자마자 꽃다운 나이에 아내를 잃었습니다. 아내를 잃고 그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그는 중국 한 모퉁이에 붙어 있는 한반도에 사는 조선 민족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민족은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고 있으며 복음을 들은 일이 없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아내를 잃은 슬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국말로 된 성경책을 배에 싣고서 대동강을 따라 올라왔습니다. 그 때는 대원군이 한참 쇄국 정책을 펴고, 카톨릭 신자들을 잡아죽이는 살벌한 시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성경을 전해 주려고 노력을 하다가, 결국 우리 관군들의 공격에 의해 배가 불타게 되고, 그는 강변으로 끌려 내려 칼날에 맞아 순교를 했습니다. 순교하는 그 순간에 그는 자기 목을 치는 사람에게 성경을 던져 주며 "이것을 읽어보시오."라고 소리치고는 죽었습니다. 그를 칼로 친 사람이 그 성경을 주어서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읽고는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 젊은이의 피가 그 강변에 흘렀기에 그 피 값으로 오늘 우리가 존재하게된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면부지의 이 땅에 와 쏟은 수많은 벽안의 선교사들의 피와 땀을 먹고 우리의 생명은 싹텄고, 한국교회라는 나무는 성장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기초하고 있는 이 희생의 반석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양화진에 가면 많은 사람들의 비석들이 서 있습니다. 한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1세기 전에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풍토병에 걸리고 적응하지 못해서 죽은 어린 아이들의 무덤과 어떤 선교사 부인의 무덤이 있습니다. 명대로 살지 못한 젊은 선교사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무명의 선교사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 한국 교회가 존재하게 되었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빚진 감정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희생 없이는 생명이 살아나지 못합니다. 희생 없이는 지옥으로 가던 영혼이 천국으로 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희생하셨는데 어떻게 희생 없이 전도가 되겠습니까?
안디옥교회를 세운 희생
본문을 보면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안디옥으로 와서 전도하게 된 배경이 19절에 있습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좀 더 자세하게 이 구절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오순절 날에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120여명 되는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예수가 부활하셨다. 너희들이 죽인 예수가 살아나셨다. 너희들이 못 박아 죽인 예수가 살아나셨다."라며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가슴을 치면서 하루에 삼천 명, 오천 명씩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아침에 예루살렘이 교회로 바뀐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온 성에 있는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전무후무한 사건이 일어나자 악한 사단과 그 영들이 드디어 교회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 분을 믿으십시오. 그 분을 믿으면 당신의 모든 죄가 용서받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십니다."라고 외치던 평신도 전도자 스데반을 끌어다가 돌로 쳐죽였습니다. 피 맛을 들인 무리들은 사나운 야수가 먹이를 덮치듯이 믿는 자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감옥에다가 집어넣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그리고 공중 앞에 사람들을 끌어내서 "예수를 욕하라. 예수를 모욕하라. 그러면 내가 석방해 주겠다."라며 회유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거부하다가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무서운 핍박이 예루살렘을 하루아침에 뒤집어 놓았습니다. 이 무서운 핍박을 피하여 많은 성도들이 가까이는 사마리아 지방으로부터 유대 나라 멀리 북쪽까지 피난을 갔습니다. 그 중 어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450km나 떨어진 안디옥이라는 도시까지 흘러 들어갔던 것입니다.
안디옥은 당시 로마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인 그때에 인구가 50만 명이 넘었을 정도로 거대한 도시였습니다. 도시의 중앙대로 길이는 6km나 되었고, 바닥은 대리석이 아주 아름답게 깔려 있었으며, 길 양쪽에는 대리석 기둥이 가로수처럼 쭉 서 있었고, 당시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밤에 가로등을 켜 놓고 있었던 도시입니다. 굉장히 화려하고 번화한 도시였으므로 로마제국 각지로부터 수많은 부족과 다양한 민족들이 몰려들어와 살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도시의 종교는 온 민족의 신들로 뒤범벅이 되어 몹시 혼탁해 있었고, 성적으로도 방탕하고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경제적으로 번영한 항구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쾌락에 젖어서 흥청망청 살아가는 도시였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뉴욕시가 갖는 이미지와 비슷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귀족으로 살던 사람들은 은퇴하면 안디옥에 와서 별장을 짓고 거기서 여생을 보내는 것을 큰 소원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그곳의 온천에 들어가 목욕을 하면서 음담패설이 난무하는 잡담을 즐기거나, 아니면 경마장에 가서 돈을 걸고 도박을 하면서 즐겼습니다. 그야말로 형편없는 도시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죽은 시체들만 가득한 공동 묘지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러한 도시로 핍박을 피해 도망 온 사람들이 복음을 들고 들어온 것입니다. 대부분은 유대 사람을 상대로 전도했지만, 구레네와 구브로 지방 출신의 몇 성도들이 혤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20절)
그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21절) 너무나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자 "주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성령이 그들과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그들과 함께 하시어 안 믿을 것 같은 무수한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도무지 들을 것 같지 않던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는 돌아온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리하여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안디옥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세계 선교의 발상지입니다. 이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주치의로서 일생동안 그의 충성된 동역자로 함께 일하였던 의사 누가가 이 안디옥 전도를 통해 구원을 받았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이처럼 몇 사람의 전도로 인하여 안디옥에는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경이로운 부흥이 짧은 시간에 안디옥에서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이 대답은 매우 중요하지만 의외로 너무나 간단합니다.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한 자들은 가장 큰 희생을 치른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값을 가장 비싸게 지불한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에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핍박을 피하여 성을 빠져 나온 이들의 수중에는 한 푼도 없었을 정도로 온통 다 털리고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족도 제대로 데리고 나오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성을 빠져 나왔지만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얼마나 외로웠겠으며, 얼마나 그 마음이 허전했겠습니까? 기댈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계속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신세를 망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신앙 때문에 그 정도로 신세 망쳤으면 예수 믿으라는 말을 절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신앙을 포기하고 예수를 저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는 곳마다 사람 만나면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메시아,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라고 전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복음을 위하여 그들의 전 삶을 대가로 지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이제 남은 것이라곤 생명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마저도 아끼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바치겠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주님의 제단에 올려놓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기에 그 전도가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들의 가슴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예수가 누구이기에 저 사람들은 예수 때문에 온통 다 빼앗겨 남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으면서도 저렇게 얼굴에 기쁨이 충만해서 날 보고 예수 믿으라고 하는가? 예수란 분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영생을 얻는 것이 그렇게 소중한 것인가?' 라는 생각이 자연히 들게 되며, 상대방의 진지함에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강하게 역사 하는 전도의 현장에는 반드시 생명을 거는 희생자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희생하기를 꺼리는 사람은 능력 있는 전도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희생
우리 모두는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얼마나 값진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하고 있는가?'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매우 귀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만 구원을 누리는 것을 절대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문 밖에서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구원하신 이유는 우리가 빨리 가서 하나님이 기다리는 잃은 양들을 찾아서 하나님의 집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심정을 알면서도 어떻게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아무런 희생과 노력 없이 내 이웃이 구원받기를 바라고, 내 가족이 구원받기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을까요? 희생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 썩어 문드러진 한국 사회가 치료되어 건강한 나라로 거듭나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희생 없이 과연 이러한 일들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결코 불가능합니다. 희생 없이는 생명도 갱신도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친하지도 않는 사람을 위해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그들이 구원받기를 기도하는 것도 보통 큰 희생이 아닙니다. 저 역시 몇 사람을 놓고 시간을 따로 내어 정기적으로 기도를 하는데 참으로 쉽지 않다는 것을 종종 느낍니다. 기도를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자식들이라면 과연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내 애들 같으면 그냥 대충하거나 안 할 수도 있을텐데...' 이처럼 피곤하고 바쁘고 쉬어야 되는 시간인데도, 그들을 생각하면서 계속 엎드려서 기도한다는 것은 작은 희생이 아닙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그만한 대가도 치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죽은 영혼이 살아날 수 있을까요? 어떤 경우에는 인격적으로 멸시를 받거나 자존심을 구기는 일들도 있습니다. 굉장한 희생이지요. 자신을 위해서는 구두쇠처럼 살면서도 상대방을 위하여 돈을 써야 될 때도 있습니다. 그를 위해 돈을 쓴다고 해서 그가 나를 알아줍니까? 이 바쁜 세상에 중요한 약속이나 스케줄을 뒤로 미루고 일부러 시간 내서 만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매우 큰 희생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만나 준다고 해서 상대방이 나의 마음과 정성을 이해하고 고마워합니까? 이해하기는커녕 어떤 때는 귀찮아하기조차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작은 수고 하나 하나가 희생의 제물이 되어 활활 타오르며 향기를 토할 때, 죽은 생명이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희생을 통해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다른 사람도 우리 자신의 그와 같은 희생을 통해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최근에 나온 교회 신문인『우리지』에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신동아 아파트의 순장들이 지난 5월부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여리고성 기도」를 시작했다는 기사가 그 중 하나입니다. 「여리고성 기도」가 어떤 것입니까? 아파트 단지를 하루에 한번씩 돌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닭장 같은 아파트를 쳐다보면서 그 닭장 속에 있는 모든 죽은 영혼들이 구원받기 위해서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가 여리고성을 매일 한바퀴 돌듯이 돌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감동적이고 도전적인 이야기입니다. 보통의 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못하는 일입니다.
잠실 우성 다락방 어느 순장은 3월부터 매주 월요일마다 순원들과 함께 두 시간씩 그 지역에 있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을 쉽게 접촉하기 위해서 남이 싫어하는 반장 일도 자진해서 맡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찌 쉬운 각오이겠습니까?
서초동지역을 맡아 있는 11개 다락방 순장들은 6월부터 매주 화요일마다 모여서 약200여명의 태신자를 놓고 기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희생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전도단에 소속되어 있는 어느 집사님은 김포에 개척된 사랑의교회에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해 주고 싶어서 일부러 그곳까지 가서 주변의 아파트를 다니며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 집사님이 하루 종일 100가정의 벨을 눌렀지만 문을 열어 준 가정은 오직 한 가정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문을 열어준 가정이 예수 믿기로 결신하고 그 다음 주일 김포사랑의교회로 출석했습니다. 100번의 큰 희생을 지불하고서야 얻은 생명입니다. 이와 같은 수고, 이 정도의 땀을 흘리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은 영혼이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날 수 있는 기적은 생길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쓴 『Why not the best'』(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라는 글을 읽고 깊은 도전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수십 년 전에 자기 교회의 전도집회를 10년 동안 참가했었다고 합니다. 매년마다 전도집회가 열렸는데 매년마다 14가정을 꼭 책임지고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10년 동안 그 전도집회에 참석했으니까 140가정을 전도한 것입니다. 매우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나는 10년 동안 140가정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였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예수 믿은 사람도 있다.'라는 은근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66년도에 주지사로 출마를 하여 선거운동을 하였는데, 3개월 동안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과 악수를 했다는 것입니다. 주지사에 당선된 뒤 그의 마음에는 부끄러운 가책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를 위해서는 3개월에 30만 명을 만나보면서 하나님을 위하여서는 14년 동안 겨우 140가정에게 복음을 전하였다니... 이것은 보통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카터 전 대통령이 느낀 가책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가책을 받아야할 부분은 없을까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온갖 정성을 다 쏟아 붓고, 없는 시간도 억지로라도 만들고, 돈도 아낌없이 쓰며 전력을 다 기울이면서,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잃은 양, 기회 놓치면 영원히 망할 수밖에 없는 그 불쌍한 영혼을 위해서는 시간도 별로 안 드리고, 돈도 안 쓰려고 하고 관심도 별로 기울이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하기에는 참으로 부끄러운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위한 희생을 각오해야만 합니다. 사랑이라는 나무는 희생을 먹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사랑의교회 장애인 선교를 담당하고 있는 김해용 목사님이 지난 여름 LA의 몇 교회가 연합하여 개최한 「장애인 사역을 위한 세미나」에 주강사로 초청 받아 그곳의 많은 분들하고 좋은 교제를 나누고 돌아왔습니다. 그들 중 어느 남자 집사님의 이야기를 목사님이 전해 주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한국을 떠난 지 벌써 30여 년이 되었고, 그곳에서 상당한 기반을 닦아 이제는 큰 걱정 없이 살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사랑의교회가 10월에 『대각성 전도집회』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김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한국에 아직도 예수님을 안 믿는 친구들이 있는데 아무래도 내가 그들을 전도해야겠습니다. 그들을 내가 태신자로 정하고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대각성 전도집회 때 그들을 그 집회에 인도하기 위하여 내가 그때 한국으로 가야겠습니다. 그리고 미국에도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 친구가 한 명 있는데, 내가 한국으로 들어갈 때 그 친구를 데리고 같이 가야겠습니다. 그러니 목사님께서 이 일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이러한 정성과 마음을 쏟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통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러한 정성과 마음, 노력과 수고와 희생과 눈물과 땀과 지출이 따를 때,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희생이 아니라 축복
전도를 하기 위해서는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지금까지 살펴보았는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수고를 하고 값을 치른다고 해도 그것을 무슨 대단한 희생이나 한 것처럼 생각하거나 생색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살펴봅시다.
첫 번째, 우리가 아무리 전도하기 위해서 많은 값을 지불했다고 해도 자신이 하나님이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치르신 그 희생을 생각하면 그것을 희생이라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빚 진 것 생각하면 내가 지금 조금 하고 있는 그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전도는 내가 진 빚을 갚는 것일 뿐입니다.
세 번째, 한 영혼을 전도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은 영원히 멸망당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생명을 영원히 살리는 너무나도 가치 있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애쓰고 투자한 것이므로 우리의 조그마한 수고를 희생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네 번째, 복음을 전하기 위해 충성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엄청난 하나님의 상급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중에 그 나라에서 주님이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너무 수고했어. 너무 잘했어." 하시며 우리에게 주실 영광의 상급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전도하느라고 수고하고 애쓴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엄청난 영광의 상급에 비교할 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땀 흘리고 조금 수고한 것을 가지고 희생했노라고 감히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사랑의교회에서 WEC선교대회가 있었는데, 그 선교단체를 창설한 C.T. 스터드라고 하는 위대한 선교사는 항상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하나님이시며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그분을 위한 나의 어떤 희생도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말을 마음 속 깊이 새겨 두어야 합니다.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선교사로 일하다가 생을 마친 아프리카 선교의 선구자요, 대영 제국이 자랑하는 위대한 아프리카의 개척자 리빙스턴이 16년 간 밀림에서 선교하다가 잠시 영국에 귀국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27번째 말라리아에 걸려 사선을 헤매다가 아직 회복이 제대로 되지 않은 연약한 몸을 가지고 귀국했습니다. 사자에게 물린 한쪽 어깨와 팔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마치 썩은 나무토막 마냥 몸에 힘없이 달려 있는 나약한 모습으로 캠브리지 대학에서 설교를 한 일이 있습니다. 그는 설교에서 이렇게 도전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아프리카에 들어가 그곳에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 일, 그 일을 위해서 나를 불러 주셨다는 것을 놓고 즐거워하지 아니한 날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그곳에서 많은 희생을 한 것으로 생각하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도무지 갚을 수 없는 하나님께 진 큰 빚의 작은 부분을 갚았을 뿐인데, 이것을 어찌 희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장차 영광스러운 소망과 복된 상급을 약속 받고 있는 일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찌 희생이 되겠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희생한다라는 말과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것은 절대로 희생이 아닙니다. 오히려 특권이라고 말하십시오. 모든 것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위해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결코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이런 심정을 가지고 전도하고, 선교해야 합니다.
지난 8월에 5,268명이라고 하는 사랑의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장기기증을 하겠다고 약속하여 매스컴에서 크게 보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분위기를 몰아가거나 담임목사가 장기기증을 하라고 자꾸 강조를 해서 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발적으로 장기기증을 약속한 것이라 더욱 화제가 되었습니다. 뇌사 시 장기기증을 하겠다는 사람이 2,668명, 골수기증을 약속한 사람이 160명, 신장기증을 약속한 사람이 140명, 그리고 1,580명은 죽으면 시신을 병원에 기증하겠다고 서약했습니다.
이 기록을 보고 받고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런 힘이 어디서 폭발한 것일까? 아무 대가도 기대하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자기의 장기와 시신, 자기의 육신의 일부분을 내어놓겠다고 결심하는 이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두 가지 정도로 그 이유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나의 조그마한 희생으로 누군가가 평생의 고통에서 자유케 되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최고로 가치 있는 삶이 아니겠느냐?"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만큼 가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설교한 목사님이 주었던 삶의 감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평생동안 매년 수 차례씩 헌혈하고, 장기기증 운동에 너무나 헌신한 나머지 자녀의 이름마저도 "또 뽑자. 또 뽑자."하여 "박뽑기"라고 이름을 짓고, 자신의 신장을 벌써 몇 년 전에 기증하여 한 생명을 살렸다는 그 분의 삶이 굉장한 감동과 도전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삶에 감동을 받아 한 생명을 살리는 것이 귀한 줄 깊이 느끼게 되었고, 한 육신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소중한 육신이라도 기꺼이 내어놓겠다 라고 하는 놀라운 헌신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육신의 생명을 살리는 정도가 아니라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장기를 기증하여 그 사람이 새 생명을 얻어도 기껏해야 70-80년의 삶이 연장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전도는 그 사람에게 영원히 사는 생명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죽어질 육신의 생명을 위해서도 기꺼이 희생을 치른다면,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어찌 희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 목사의 헌신적인 삶에 감동을 받는다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때문에 받은 그 감동은 얼마나 큰 것일까요? 사람에게 감동을 받고도 자신의 장기를 기꺼이 내어놓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감동된 사람이라면 어떻게 전도를 안 할 수 있을까요?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어떻게 희생하지 않겠습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희생하지 않겠습니까?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신 주님의 사랑에 감동 받은 우리가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전도는 희생 없이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희생을 해도 주님의 은혜에 감동된 사람은 그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런 자세를 가지고 전도한다면 성령의 역사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한국이 변화되며, 이 지역이 변화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완고하게 마음을 닫고 있고, 적대감을 품고 우리를 공격하던 그 불신앙의 영혼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될 줄 믿습니다. 온 세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줄 믿습니다.
슈테른베르크가 그린 유명한 예수님의 그림이 있습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빌라도와 유대인들 앞에서 조롱을 받으면서 서 있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 그림의 제목은 『이 사람을 보라』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 밑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이렇게 하였다.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 이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은 하버겔이 쓴 찬송가가 185장입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주님의 은혜에 감동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이 구원을 받도록 조그마한 수고로부터 큰 희생에 이르기까지 값을 치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울처럼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사랑과 열정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3-24) 이처럼 자기 자신 전부를 불태울 수 있는 열정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날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구주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랑이 사람들로 하여금 어두움에서 깨어나게 합니다. 그 사람들의 영혼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게 합니다. 그 사람들의 눈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합니다. 부활의 영광 앞에서 환희하는 새 생명으로 태어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즐겁게 희생할 수 있는 사람되기를 바랍니다.
전도자의 사명 (본문 : 단 12:1-4; 딤후 4:1-8)
제정 러시아 시대의 정교회 성도는 전 국민의 98%를 육박하였다. 그러나 사제들은 쓸데없는 예전 논쟁과 투쟁 가운데 교회는 힘을 잃고 기독교인이 가장 많은 나라가 공산주의의 종주국이 되었다. 우리나라도 교회의 본질적 사명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비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면 쇠퇴하게 될 것이다. 전도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다. 전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이릴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은 누가복음 15장의 세 가지 잃은 것에 대한 비유에 잘 나타나 있다. 작은 것이지만 끝까지 찾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1. 전도는 강력한 하나님의 명령이다.
바울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고 있다. 얼마나 엄한 명령이기에 하나님, 예수님, 하나님의 나라를 걸고 명하겠는가? 전도는 가장 중요한 것을 다 걸고 명할 만큼 막중한 명령인 것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해야 하고, 듣든지 안 듣든지 해야 한다. 전파하다는 헬라어로는 다양한데 선포하고, 공포하고, 전하고, 남김없이 말하고, 얘기하는 전부를 말한다. 전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복음과 사랑이 마음에 있으면 전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 전도는 오래 참음과 근신과 고난이 필요하다.
전도는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해야 한다. 인내는 전도의 첫째 요소이다.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하는 것은 전도자가 해야 할 일이다. 전도는 또한 근신과 고난이 필요하다. 전도는 한번 하는 것이나 잠시동안 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심을 가지고 오래 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잃은 양을 찾는 목자는 양과 함께 고난을 받았다. 바울은 고난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전도는 고난을 받는 것이다. 신약에서의 증거는 순교와 같은 뜻이다.
3. 전도자에게는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다.
바울은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는 것을 확신하였다. 이러한 확신은 바울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확신된 것이다. 많은 사람을 좋은 데로 인도한 사람은 별과 같이 빛날 것이다. 썬다싱의 경험처럼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은 자신이 살고 다른 사람을 살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도 죽는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살리면 우리도 산다. 성경에는 많은 면류관이 있다. 면류관은 항상 좋은 것이고 자랑스런 것이고 영광스런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필수과목이며 기본인 전도에 힘쓰고 면류관을 쓰는 자들이 되자.
증인인가? 이렇게 준비하라 (본문 : 겔 3:1-11)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을 불러서 무엇인가를 맡기려고 하실 때 선뜻 응하는 자가 몇 안 된다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시면 대개는 주저하거나 버티거나 겁을 집어먹고 안 가겠다고 거절을 하는 그런 예를 자주 봅니다. 아마 모세가 가장 전형적인 예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의 에스겔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아직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또 바벨론으로 잡혀와 포로 생활을 하는 사람 중에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그를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본문에는 그가 하나님의 이 명령을 주저하고 거부하는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님이 그를 다루시는 과정을 주의해서 보면 그가 얼마나 주저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는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으로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증인입니다. 우리는 다 복음을 전해야 될 사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우리 중에 아무도 전도를 놀러 가듯 쉽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전도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마음 한 구석에는 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또 어떤 면에서는 부끄러움도 느끼고, 자기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입을 열기가 어렵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명령하시는데도 안 가겠다고 버티는 사람이나 전도하라고 하는데도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 오늘날의 우리의 경우나 비슷비슷합니다.
에스겔이 두려워하고 주저하는 것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사전에 그를 철저하게 준비를 시키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누구한테 가서 어떻게 전해야 할 것인가를 철저하게 준비시키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도 이와 같은 준비를 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만이 전도 할 수 있어요. 에스겔은 준비된 전도인으로서의 좋은 모델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먹음
첫째,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말씀을 먹도록 하셨습니다. 환상 중에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두루마리를 내어 주시면서 먹으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유대나라나 바벨론에서는 짐승가죽으로 만든 두루마리를 종이로 사용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종이가 없었기 때문에 짐승 가죽에다 글을 써서 들고 다녔습니다. 네모 반듯하게 가죽을 잘라 가지고 그것을 바늘로 기워 크게는 길이가 9미터 정도까지 되는 것을 둘둘 말아 들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두루마리는 한 쪽에만 글을 썼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양면에다 다 쓰기도 있다고 합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글을 읽는 사람이 마음대로 가필을 하지 못하도록 양쪽에다 빽빽하게 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먹으라고 주신 두루마리는 이처럼 앞뒤가 가득하게 글이 쓰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2:10)
하나님은 1절에게 에스겔에게 이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1절) 인자는 에스겔을 부르는 하나님의 호칭입니다. 에스겔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는 "인자"라고 부릅니다. 이 명령에 따라서 에스겔이 입을 벌려 그 두루마리를 먹었습니다. 이것은 환상입니다. 실제로 누가 그 두루마리를 먹을 수 있습니까? 아무도 먹을 수 없습니다. 환상 중에 하나님이 주신 두루마리를 먹었더니 그 두루마리가 다 들어갔습니다. 배 안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이 두루마리의 맛이 꿀송이처럼 달았다고 합니다. "네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게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송이 같다."(3절)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왜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하셨을까요? 이 의미를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두루마리를 먹는가는 것은 두루마리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식탁에 있는 음식을 우리가 먹어야 나의 살과 피가 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내 것이 되어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그 말씀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내면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루마리를 먹는 행동은 먼저 내가 말씀을 통해서 은혜 받는 것을 보여 주는 상징입니다. 남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먼저 그 말씀을 소화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먹듯이 내 안에 가득히 채우고 그 말씀이 입에 꿀송이처럼 단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 어떻게 남에게 확신을 가지고 전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남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까? 어떻게 감동을 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먼저 먹으라"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전하라고 주신 말씀은 듣기 좋은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 두루마리 앞 뒤에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2장10절은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 두루마리에는 슬픈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이야기만 잔뜩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이 입에 꿀송이처럼 달았습니다. 오히려 쑥과 같이 쓴 말씀이었지만, 에스겔은 그것을 먹으니까 달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지만, 그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심판을 달게 받으면서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간절히 사모하는 자에게는 심판의 말씀, 저주의 말씀이 꿀송이처럼 단 은혜의 말씀으로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자기 앞에 나와서 엎드리는 자에게는 심판을 선언했다가도 나중에는 무궁무진한 긍휼과 자비로 그를 위로하시고 그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보기에는 쓴 말씀 같지만 우리가 그 말씀을 먹고 내 안에 은혜를 받으면 달디단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먼저 우리도 에스겔처럼 복음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우리는 손에 성경을 들고 있습니다. 이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내용을 꿰뚫는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신 그 이야기가 쓰여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그 아침의 이야기가 그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죄사함을 받은 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축복으로 얻게 된다는 엄청난 약속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우리가 먼저 내 것으로 먹기만 하면 그 말씀이 내 입에 꿀처럼 달 수 밖에 없습니다. 에스겔에게 준 하나님의 말씀이 심판과 저주를 가득히 담고 있어도 에스겔의 입에 꿀송이처럼 달았다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내 모든 죄를 다 씻어 주시고 나를 무조건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겠다고 하는 화려한 약속이 담겨 있는 그 말씀이야말로 우리에게 얼마나 단 말씀이 되겠습니까? 먹지 않으므로 그 말씀이 단 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영광스러운 복음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왜 우리가 밤낮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려고 합니까? 먹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왜 설교를 자주 들어야 합니까? 왜 차 속에 카세트 테이프를 넣고 설교를 계속 들으려고 합니까? 왜 성경 말씀을 공부하려고 합니까? 그러한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잘 차려진 잔칫상도 먹어야 내 살이 되고 내 피가 되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내가 먹어야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먹어 봐야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로 구원과 영생의 기쁜 소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말씀의 단 맛을 아는 사람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할 때마다 행복한가요? 만일 행복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먹은 사람이요, 그 복음의 단 맛을 아는 사람입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의 십자가만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 옵니까? 그렇다면 십자가의 말씀을 먹은 사람입니다. 말씀의 단 맛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죄 용서 받았다는 사실을 순간 순간마다 확인할 때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내 안에서 솟아오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먹은 사람이요, 단 맛을 아는 사람이요. 그래서 이렇게좋은 복음이 너무 좋아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아니하면 안될 정도로 흥분합니까? 여러분은 말씀을 먹은 사람입니다. 그 맛을 아는 사람입니다.
한참 미국에 부흥의 불길이 번지고 있던 1860년대 에이 씨 행키(A.C.hankey)라고 하는 젊은 여성이 사람들이 많이 모인 집회에서 눈물을 흘리며 낭송한 유명한 시가 하나 있습니다. 찬송가 236장의 가사입니다.
"주 예수 크신 사랑 늘 말해 주시오/
평생에 듣던 말씀 또 들려 주시오/
저 뵈지 않는 천국 주 예수 계신 곳/
나 밝히 알아 듣게 또 들려 주시오./
아침의 이슬 방울 쉬 사라짐 같이/
내 기억 부족 하여 늘 잊기 쉬우니/
잘 알아 듣기 쉽게 늘 말해 주시오/
날 구속하신 사랑 또 들려 주시오./
주 예수 나를 위해 이 세상 오셔서/
날 구속하신 은혜 말하여 주시오/
나 같은 사람 위해 주 보혈 흘렸네/
이 복스러운 말씀 또 들려 주시오./
평생에 듣던 말씀 평생에 듣던 말씀/
주 예수 크신 사랑 또 들려 주시오.'
행키 양의 가슴처럼 주님의 사랑, 주님의 복음을 더 듣기를 사모하는 갈증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말씀을 먹은 사람이요, 그 단 맛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야 다른 사람에게 "예수 믿으시오."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날마다 말씀을 읽으며 십자가 앞으로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기도하는 무릎으로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값없이 받은 죄사함의 은혜를 찬송하기 바랍니다. 이렇게 복음의 말씀을 내가 먼저 먹을 때, 나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놀라운 힘이 다른 사람을 향해서 뻗어 나갑니다. 그리고 그 완악한 사람이 내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내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되는 것입니다.
동족에게 보내심
두번째,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자기 동족에게 보내셨습니다. 5절 한번 읽어볼까요?
'너를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지금 이 사람들은 수년 전에 바벨론으로 잡혀 와 가지고 인질이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상당히 어두운 생활을 하루하루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에 와서 살고 있어도 그들은 당시 세계통용어인 아람어에도 능통했겠지만, 이스라엘 말을 사용하고 있는 동족들이었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다 알아 듣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전하라고 해서 에스겔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족속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우리의 예루살렘인 우리 이웃, 우리 동족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받고 있습니다. 말이 다 통하는 사람들입니다. 선교사들처럼 따로 말을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 못 알아들을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정제순 선교사부부처럼 10년간 갖은 고생해서 '마우니 마망아 이방아'라는 어려운 말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선교사들이 참으로 위대하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에게 찾아 가지고 말을 1, 2년 배워 가지고 됩니까? 얼마나 죽을 고생을 하면서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배워서 나중에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많은 눈물과 땀을 흘려야 만이 가능한 일입니까?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을 전하던 선교사들은 대부분이 영어를 이야기하는 영어권 선교사들이었습니다. 미국이나 영국에서 온 분들이었습니다. 영어권에서 온 사람들이 한국말을 배우는 것은 정말 어렵다고 합니다. 우리가 영어를 배우는 것 보다 몇 배나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니 초창기에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이 얼마나 죽을 고생을 많이 했겠습니까? 그래서 참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여러 가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알렌 선교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고종 황제의 주치의였고, 의사로서 이 땅에 와서 현대 의학에 문을 열어 놓은 위대한 선교사입니다. 그 사람이 처음에 와 가지고 열심히 한국말을 배웠습니다. 배워 가지고 어느 정도 말이 통하고 조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나 부활에 대해서 가르칠 만한 하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드디어 성경 공부 시간을 오픈을 했습니다. 좀 큼직한 방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앞에 서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안내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전부 남자 여자 따로 따로 앉았습니다. 우리처럼 이렇게 섞여 있지 않았습니다.. 알렌 선교사가 앞에 서서 사람들을 이렇게 사람들을 이렇게 안내를 했다고 합니다. '숫컷들은 이쪽에 앉고 암컷들은 저쪽에 앉으십시오.' 영어로는 male이나 female하면 사람에게도 쓰이는 말입니다. 그러나 한국말의 성격상 숫컷, 암컷 하는 것을 사람에다가 갖다 붙이면 그것은 맞지 않는 표현이고 모욕인 언사가 됩니다. 그러나 선교사가 그것을 알 리가 있습니까? 그러니 그저 암컷이면 여자고, 수컷이면 남자라고 생각을 하고 자연스럽게 말을 했는데, 얼마나 나중에 그 마음이 송구스러워 했겠어요? 이처럼 말을 배운다는 것, 그것도 그 사람들이 사용하듯이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준으로 배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제가 지난 7월 달에 일본의 동경에서 한 600명 되는 목사님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제자훈련에 대한 강의를 하는 동안 참으로 우습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던 에피소드를 겪었습니다. 그 세미나에 우리 교회 김광석 장로님이 동석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지금 대한항공 동경 부책임자로 가 계시는데, 얼마나 일본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열심히 하는지 전도 하는 스케쥴이 아주 빡빡하게 짜여 있는 참 놀라운 장로님이십니다. 제가 강의를 하다가 "제자훈련을 하면 사랑의교회처럼 아름다운 평신도 지도자들이 참 많이 생깁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사랑의교회는 목사의 기를 죽이는 평신도들도 참 많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김 장로님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 "여기에 그분 중에 한 분이 나와 있는데, 여기 김광석 장로님이야말로 목사 뺨 치는 사람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저의 통역을 맡은 분은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시미즈라는 일본 목사님이었습니다. 너무 통역을 잘 하니까 제가 안심하고 자연스럽게 한국 사람들에게 말하듯이 하였던 것입니다. 시미즈 목사님이 잘 전달할 줄 알았지요. 그리고 제는 일본말이라곤 '모시모시' 정도 외에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일본말이 갖는 뉘앙스라든지 어감이라든지 또 슬랭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한국에서 말하듯이 별 생각 없이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 뺨친다"는 말을 우리가 사용하는 뉘앙스대로 표현할 일본말이 없었나 봅니다. 그래서 시미즈 목사님은 "김 장로는 옥 목사의 뺨을 친 사람입니다." 라고 그대로 직역해서 통역을 하였습니다. 그 순간 제가 보기에도 일본 목사님들의 눈이 둥그래졌습니다. 나는 왜 그렇게 다들 놀라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나중에 강의를 다 마치고 나서 몇 분의 일본 목사님들이 통역하신 목사님에게 찾아와서 "김 장로님이 왜 옥 목사님 뺨을 때렸어요?"라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김 장로님도 저에게 와서 "목사님 때문에 제가 일본 목사님들 앞에 얼굴을 못 들게 됐어요."라고 민망해 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겪으면서 남의 나라말을 배우고 그 말을 이용해서 복음을 전하고 설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다시 금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다 건너가서 말이 안 통하는 사람에게 전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뭇거리며 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주저합니까? 왜 두려워합니까?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자문해야 합니다.
담대한 마음
세번째,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담대한 마음을 갖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7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워낙 마음이 독한 백성들이었습니다. 구약을 보면서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원래 본성이 강퍅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경향이 짙었습니다. 이런 백성에게 하나님은 에스겔을 보내십니다.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즉 바벨론에 지금 포로가 되어 있는 네 백성에게 가서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하시더라"(11절) 그들에게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안 듣든지 상관말고 무조건 전하라는 명령입니다.
안 들을 줄 뻔히 알면서도 전하라는 것입니다. 듣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자꾸 전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아마 입을 열지 못하게 협박 할 것입니다. 그들은 수가 많습니다. 다수의 힘을 가지고 에스겔이 나중에 견디지 못하도록 왕따를 시킬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전하라고 합니다. 이 명령은 너무나 어려운 명령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아무런 대책 없이 막무가내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특별히 준비 시키셨습니다. 마음씨 좋고 성격이 부드럽고 어떤 면에는 소심한 에스겔을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방법으로 준비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어떻게 준비시켰습니까? "내가 그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대하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네 이마로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라."(8,9절) 하나님은 에스겔의 얼굴을 금강석처럼 굳게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얼굴에 철판을 깔아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강심장을 갖도록 해주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유약한 에스겔을 "얼굴에 철판 깔고 강심장을 가진 전도인"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점잖게 표현하면 "담대한 전도인"으로 만드셨습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이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스겔이 전하는 말씀을 잘 안들을 이유는 충분히 있었습니다. 원래 강퍅하기도 했지만, 그 메시지 내용이 도무지 그들의 비위를 맞출 수가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들의 흥미를 끌 수 없는 내용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1, 2년 안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예루살렘이 함락이 안됐고, 유대 나라가 아직도 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얼마 후에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이 나와서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서 1년 후에 그들이 반드시 돌아갈 것이라고 하는 거짓 예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전하라고 하는 말씀은 "예루살렘은 곧 내가 심판해서 함락된다, 예루살렘은 반드시 함락된다, 너희들은 1년 안에 절대 못 돌아간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이러한 완전한 멸망의 예언을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그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의 우상 숭배에 찌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회개해야 했습니다. 포로가 되었음에도 그들은 회개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마음이 아주 굳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좀 징계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정결케 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너희들은 앞으로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돌아간다는 헛된 꿈을 꾸지 말고 여기서 장가가고 시집가서 자녀 낳고 그 다음에 밭 갈고 농사 짓고 정착해라. 70년 후가 되면 내가 너희를 그 때는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겠다. 그 때가 되면 너희들의 마음이 깨끗해 질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내가 유대 나라도 다시 재건시켜 주겠다."
과연 이러한 약속이 그 사람들의 귀에 들어오겠어요? 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었을 때 그들은 아마 이렇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약속이 뭐 이래? 뭐라고70년이나 더 지나야 된다고? 그 때가 되면 내 나이가 140살인데 그때까지 내가 어떻게 살아? 이건 말도 안되는 소리야." 이처럼 그들에게는 에스겔이 전하는 이 메시지가 전혀 기쁜 소식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가서 전하라고 명하십니다. 에스겔이 얼마나 어렵고 곤혹스러운 사명을 받았는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보통의 마음을 가지고는 백성들을 상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얼굴에 철판을 깔고 담대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천 명이 그를 상대하든, 만 명이 그를 상대하든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천대를 받아도 ,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아도, 생명의 위협을 받아도 전혀 마음에 동요가 일지 않는 철인 같은 사람으로 하나님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만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 좋아하느냐?" 라고 물으면 아마 우리 모두는 "아니요."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아무도 "예수 믿으라"는 말을 듣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죄인"이라는 말 자체가 그들의 비위를 벌써 건드리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고 구원 얻는다"라고 하면 자기하고는 아무 관계없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천당이 있고 지옥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기분을 나쁘게 합니다. "있기는 뭐가 있어? 너 가봤냐?"라고 공격합니다. "예수만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들으면 그들은 독선이라고 말하며 욕을 퍼붓기도 합니다. 아무도 우리의 말을 즐겨 듣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입니다만 세상에 있는 사람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도리어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잘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에스겔과 같이 담대한 사람으로 무장되는 것입니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강심장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의 권세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 힘으로 못 하는 일이기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조금만 창피스럽다는 생각이 들어도 얼굴이 빨개지는 아주 소심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소심한 우리를 들어서 세상을 향하여 예수의 복음 전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여기서의 권능이 무엇입니까? 담대함입니다. 성령의 권능은 담대함과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권능을 받았습니까? 그러면 에스겔처럼 담대해집니다. 권능을 못 받았습니까? 여전히 소심한 체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권능을 받았습니까? 용기가 생깁니다. 권능을 못 받았습니까? 비겁한 자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권능을 받았습니까? 생명을 내 놓고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권능을 못 받았습니까?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곳에서는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합니다.
사도행전4장에 보면 예루살렘에 핍박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어떤 신자들은 벌써 감옥에 끌려 들어가기도 하고,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하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핍박 속에서 몇 십 명의 성도들이 다락방에 모여 밤중에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행4:29)
너무나 놀라운 기도가 아닙니까? 이들은 "하나님, 이 핍박이 빨리 물러가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집을 다시 원상복구 시켜 주십시오." "내 생명 보호해 주십시오." 이런 식의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두려워서 하루라도 빨리 평안해 지기를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하나님이여, 핍박이 지금 폭풍처럼 몰려옵니다만 이런 중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람들입니까? 그들이 기도를 다 끝내자 마자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시 한번 성령이 충만해졌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나가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31절)
핍박의 폭풍이 여전히 매섭게 몰아치고 있는 거리로 나가 그들은 담대히 예수의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이러한 것이 성령의 능력이며, 성령이 주시는 권능입니다. 성령은 이처럼 우리를 담대하게 만듭니다.
산헤드린 법정에 선 베드로를 보십시오. 당장 돌맹이가 날아 올 수 있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천사와 같이 환한 얼굴로 복음을 전한 스데반을 보십시오. 총독과 왕 앞에서 초라한 죄수의 모습으로 재판을 받고 있었지만, 당신들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큰 소리를 외치는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모두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은 담대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눈치 보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된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최근에 저는 감동적인 종이 쪽지를 읽었습니다. 잘 알다시피 북한에서 굶주리다 못해서 중국으로 넘어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중국으로 넘어 오게 되면 복음을 듣게 됩니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세기가 넘도록 거짓에 속아온 사람들이 이제는 배까지 고프니 얼마나 그 영혼이 갈급하겠습니까? 그런 그들이기에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라는 복음을 듣는 순간, 눈물을 펑펑 쏟고 가슴을 치며 십자가 앞에 거꾸러져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값없이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되는 축복을 가슴에 가득히 담게 되자 그들은 이 흥분, 이 행복을 도무지 억누를 수가 없어서 자기들끼리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서 복음을 전하자는 조직입니다. 그리고 "예수 전사들의 수칙"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이 수칙에는 약 5가지가 있는데, 첫번째가 이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천대받게 되어 있다. 천대받는 그것이 긍지요 기쁨이다. 우리는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오한다."
북한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들어가 복음까지 전하고자 하는 그런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어디에 그런 담대함이 있을까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평범한 사람들이요, 비겁한 사람들이요, 배고파 못 견뎌서 사선을 넘어온 사람들이요, 빵만 주면 해결이 다 될 것 같은 쓸모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는데, 어떻게 하여 예수님을 모르는 자기 동족 때문에 생명을 걸고 들어가겠다고 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바뀝니까? 그것은 성령이 그들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세속화된 사회는 개인의 자율성과 자유를 당연한 기본권으로 인정합니다. 이 자율성과 자유는 하나님이 간섭할 수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부를 축재하고 인생을 마음껏 즐기는 것을 최고의 덕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간섭을 싫어합니다. 자기의 악함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도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살기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복음의 원수들은 점점 더 많아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어 이런 사람들을 상대해서 복음을 전하도록 무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은 사람들과 대결하는 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논쟁을 싫어합니다. 독선이라는 말을 죽어도 안 들으려고 합니다. 양식을 가진 신사로서 대접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지를 못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불행한 일입니다.
조지 바나라고 하는 유명한 리서치 회사에서 지난 10년 동안 미국에서 진지한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늘었는지를 조사한 일이 있습니다. 그 결과는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10년 전에는 12%의 진지한 그리스도인이 있었는데, 10년이 지난 후에 그 숫자가 오히려 6%로 반이나 줄었던 것입니다. 진지한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만이 나의 구원자다'는 것을 철저하게 믿는 신자를 일컫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담대하게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진지한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런데 미국 교회가 점점 세속화되고, 경제적으로도 호황을 누리고 잘 살게 되니까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으로 점점 돌아서 이제는 진지한 그리스도인의 수가 10년 전보다 1/2이나 줄어들어 6% 밖에 되지 않는 실정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국에서 1년에 3500개의 교회가 문을 닫는 현실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혀 이상한 것도, 놀랄만한 현상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전도는 논쟁이나 대결을 해서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논쟁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는 험한 싸움에 말려 들 수 있다는 것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워낙 사람들이 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담대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담대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악령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우리가 전하는 복음 앞에 영혼들이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능력 하나님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능력으로 우리를 무장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 없이는 안됩니다.
소돔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앞두고 있을 때까지, 또 심지어 유황불이 떨어져 그 성이 망하는 그 날 아침까지, 성문에 서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어떤 노인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든 우화인지, 아니면 진실이 전해져 내려온 것인지는 모릅니다만 그 이야기 속에는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될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있는 그 노인에게 찾아가서 누군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아무리 할아버지가 외쳐도 사람들은 변화되지 않는데, 왜 쓸데없이 날마다 외치고 있습니까?" 그 말을 들은 노인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들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도록 계속 외치고 있소."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소돔, 고모라는 굉장히 악한 도성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의로운 롯과 같은 사람이라도 점점 자기도 모르게 소돔 사람을 닮아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노인은 자기가 가만히 있다가는 나중에 소돔 사람처럼 되어 버릴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위기감을 느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외치고 있는 동안 나는 소돔 사람이 되지 않는다. 내가 외치고 있는 이상 소돔 사람은 변화를 받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절대로 소돔 사람을 닮아 가지는 않을 것이다. 외치고 있는 동안 나는 건재할 수 있다.' 이러한 긴박감이 그를 외치는 자로 살게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긴박한 상황에 지금 놓여있지 않습니까? 전도하라고 해도 입을 열지 않고, 안 믿고 세상 즐기다가 내일 당장 죽어야 될 생사의 기로에 놓인 사람을 보아도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이 태연하게 입 다물고 있지는 않습니까?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외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세상 사람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세상 사람 쪽으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담대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복음을 듣든지 안 듣든지 상관하지 않고 외치면, 세상도 구원하고 자신도 구원합니다. 담대하게 외치기를 거부하면 세상도 구원하지 못하고 자신도 구원하지 못합니다. 세상도 망하고 자신도 망합니다. 잠잠한 교회는 결국은 세상을 닮아가게 되어있고 세상을 닮아 가는 교회는 반드시 망하게 됩니다. 서구 교회가 우리에게 그것을 지금 가장 잘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담대함을 가지고 전도해야 되는 것은 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지만, 설령 그 사람들이 결국 듣지 않고 한 사람도 돌아오는 자가 없다 할지라도 전도는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전함으로서 내가 살기 때문입니다. 전함으로서 교회가 건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극단적인 상황은 아닙니다. 모두가 복음을 거부하는 지독히 악한 세대는 아닙니다. 아직은 전하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전도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은혜의 문이 아직 열려 있는 세대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의 문이 닫히기 전에 우리는 복음을 들고 내가 전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증거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먹읍시다. 복음의 말씀을 내가 먹고 하나님의 사랑의 샘물에 빠져 봅시다. 그 말씀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읍시다. 그 다음에 내 동족이 옆에 있다는 것을 항상 인식합시다. 나는 그들에게 보냄 받았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삽시다. 그리고 성령의 담대함을 하나님께 구합시다. 그리고 그 담대함을 가지고 나가서 전도하면 엄청난 복음의 열매들이 오늘도 내일도 열린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직 복음의 문을 닫지 않았습니다. 한국 교회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은혜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습니다. 아무리 예수 믿는 사람이 냄새를 피워도 하나님은 아직도 이 땅에 긍휼과 자비를 베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하게 전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담대한 성령의 은혜 우리 모두 이 시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도란 무엇인가
성경본문 : 마가복음 1 : 35-39
오늘날 한국교회에 가장 큰 병이 든 것은 전도 의 힘을 잃어버린 데 있다. 전도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이요 교회가 세워진 목적을 감당하는 일이요 가장 귀한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본장에서는 성경상에 나타난 복음전도의 의의에 관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첫째 전도란 기쁜소식 을 전하는 것이다
헬라말의 유앙겔리조() 곧 영어의 Gospel은 복음 기쁜소식 이라는 말이다.
세례요한이 잡힌 후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 나타나셔서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막 1 : 15)고 하셨다. 이것은 기쁜소식 을 전하셨다는 뜻인 것이다. 이 말은 신약 성경안에 자주 사용되었는데 다른 말로는 선전 이란 뜻도 된다. 즉, 시장에서 상인들이 자기의 상품을 팔기 위하여 선전할 때 외치는 소리이다.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의 요소가 필요하다.
1. 자기의 상품을 정확하게 알려야 한다 배추인지 갈치인지, 아니면 사과, 배, 혹은 신발인지, 내가 팔고 있는 상품을 정확히 선전해야한다.
2. 열심이 필요하다 나의 물건 곧 갈치든 사과이든 꼭 팔아야 되겠다는 열의가 있어야 한다.
☞눅 2:10∼11
둘째 복음전도란 예고한다 는 것이다
그때에 세례요한이 이르러 유대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 3 : 1∼2). 세례요한은 주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예고했다.
마태복음 4 : 23에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의 케롯소() 곧 전파하다 (to herald)는 말은 옛날에 왕이 백성들에게 법령을 알리기 위하여 전령으로 하여금 말을 타고 다니면서 혹은 걸어서 여러 동네를 다니며 법령문이나 방(오늘의 공고문과 같다)을 써서 붙이도록 하였는데 그때에 왕의 전령자를 묘사한 말이 케롯소 인 것이다. 왕이 하고자 하는 말을 전령자가 대신 선포하는 것이다. 전령자는 왕의 뜻을 백성들에게 바로 전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마4 : 23
셋째 복음 전도란 가르친다 는 뜻도 있다.
헬라말이 디다스코()란 말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실 때 제일 많이 사용하시던 낱말이다(Education). 마 4 : 23에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 9 : 35에는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 마 13 : 54에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 요 18 : 20에는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 마 5장의 산상보훈을 말씀하실 때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때로는 해변에서, 때로는 길을 가시면서, 때로는 집안에서 끊임없이 가르치셨다.
주님의 가르침은 서기관들과는 달리 위대했고, 능숙하였고 분명했다. 주님의 예화, 비유, 은유, 실물 교훈등은 실로 위대한 교사의 교육 그것이었다. 가장 휼륭한 전도자란 역시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 것이며 교육방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요 18:20
넷째 복음 전도란 증인이란 뜻이다
증인 은 곧 증명 혹은 증언 이다. 헬라어 말투스()는 영어의 증거(Witness)와 같은 말이다. 사도행전의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 : 8)는 주님의 말씀은 너희는 내 증명이다. 너희는 살아 있는 내 신임장이다. 라는 뜻이다.
여기의 증인 이란 말은 말투레스() 순교자 의 대명사가 되기도 한다. 행 22 : 20에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킬 줄 저희도 아나이다 계 17 : 6에도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곧 순교자는 자신의 피로써 자신의 증거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순교자는 복음을 위하여 기쁨으로 죽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증거하는 증언에 확신을 갖고 그의 주장을 위하여 죽음을 택하는 것이다.
스데반 집사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최초의 순교자였다. 그는 복음전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그는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스데반 집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까지 내걸고 그리스도를 위한 증인이 되었다.
☞행 1:8
다섯째 복음증거란 제자 라는 뜻도 있다.
마데테스(), 곧 제자(disciple)라는 뜻이다. 마 28 : 19의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의 제자로 삼으라 는 말은 마데테우스테()라는 동사형으로 개인적으로 개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할 뿐더러 교회적으로는 조직하며 교육하는 곧 학생이 되게하여 가르치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훈련시키라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마 28:19
맺는말
위에서 살펴본 복음전도의 정의 다섯가지를 요약하면 복음전도란 정열에 넘치는 마음과 주를 향한 순교자적인 정신으로 모든 사람을 개심시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으려는 목적을 갖고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이다.
전도의 목적
성경본문 : 마가복음 16:14-20
현대교회의 공통된 과오 중의 하나는 교인의 수를 증가시키기 위하여 복음전도에 힘쓰며, 그것이 전도의 목적인양 오인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교회당을 세우고, 어떻게 하면 내 교회의 교인수를 증가시키느냐 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주님 당시의 제자들도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심이 더 하였고, 자신들의 출세나 영달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이스라엘의 독립이 언제 될 것이냐 하는 땅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질문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의 관심과 대답은 그것은 너희의 알 바가 아니요,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땅 끝까지 나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다. 왜 복음전도가 급선무요, 주님의 바램이었는지 그 구체적인 복음전도의 목적에 대하여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복음전도의 목적을 바로 안다는 것은 교회의 사명을 정상적으로 수행하는 길이요, 주님의 뜻을 이땅에 바로 이룰 수 있기도 한 것이다.
첫째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 순종하기 위함이다
마 28 : 19의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라는 말씀과 막 16 : 15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와 행 1 : 8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는 말씀은 모두가 주님의 지상 명령이다.
주님의 뒤를 따르는 우리 성도들은 이 명령에 절대 순종해야 한다. 주님의 명령에는 아멘 이 있을 뿐이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 성도들을 가리켜 십자가의 군병 이라고 하셨다.
성도들은 주님을 대장으로 모신 군병들인 것이다(딤후 2 : 3, 4). 군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현대적인 장비이다. 그리고 강한 군대는 훈련된 군인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이 되어야 한다.
☞딤후2:4
둘째 주님의 유언을 지키기 위함이다
유언 이란 생전에 부인이나 자녀들에게 사후의 법률 관계를 발생시킬 것을 목적으로 남겨 두는 의사 표시이다. 유언의 방식은 글로도 할 수 있고, 말로도 할 수 있다(현대에 와서는 법적으로 ① 자서증서 ② 녹음 ③ 공정증서 ④ 비밀증서 ⑤ 구속증서 등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주님의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은 주님의 자녀와도 같은 모든 성도들에게 남겨 주신 주님의 유언의 말씀이다.
부모님의 유언은 아무리 못된 자식이라도 지키는 법이다. 이것마저도 지키지 않는다면 불효자식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주님의 유언인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고 하신 말씀을 잘 지켜야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며 내 자신도 복을 받는 것이다.
행 1:8
셋째 죄인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천사가 요셉에게 현몽하기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 (마 1 : 21)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을 통하여 주님이 오신 목적에 대하여 예고하셨으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도 눅 19 : 10에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고 그의 오신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또한 요 12 : 47에도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주님께서 하늘의 영광 된 자리를 비워 두시고 인간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는 끝내 십자가 위에서 희생의 제물이 되셨다.
☞고전 9:22
넷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함이다
고전 9 : 22에 사도 바울은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라고 하였다. 복음전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알리거나 교육함에 그치는 것이 목적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그를 믿게 하고 그를 구원함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회개시키는 것 곧 개심 시키기 위함인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함으로만 만족할 것이 아니다. 또한 약 2 : 19에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니라 고 한 대로 복음전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도록 하는 전달에만 해서는 안된다. 모든 삶에는 하나의 선택이 필요한 것과 같이 영생이 멸망이냐의 기로에 서 있는 인간들에게 영생을 선택하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복음전도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로 영접하고 믿도록 이끌어 줌에 있다.
롬 1:16
다섯째 영적 추수하는 것이 전도의 목적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심같이 이 시대는 곡식이 무르익어서 추수하기에 이르른 때이다. 이미 뿌려 놓은 씨가 열매를 맺어서 추수를 기다리고 있는 때인 것이다. 속히 추수하지 않으면 수확이 줄어든다. 주님께선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요 4 : 35)라고 하였다. 오늘날 우리들의 주위에는 선택받고 부름받지 못한 추수꾼을 기다리는 익은 곡식과 같은 이들이 많이 있으니 우리는 열심히 나가서 거두어 들여야 한다.
☞ 마 9:37∼38
여섯째 하나님나라 성취를 위함이 전도의 목적이다
모든 성도들의 최대의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께서 이 땅에 재림하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때를 기다리는 것, 이것은 먼저 간 성도들이나 오늘날 그리고 오는 모든 성도들의 최대의 소망임에 틀림이 없다. 이 큰 소망이 성취되는 비결을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마 24 : 14에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전세계에 복음이 전파된 후라야 종말이 온다는 주님의 약속인 것이다. 이 사상은 사도들에게도 계승되었고(롬 11 : 25∼27), 오늘에 와서는 전세계에 복음이 전파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주님의 재림은 이 예언의 성취로 이루어질 줄 믿는다.
☞ 롬 1:16
일곱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전도의 목적이다
요 15 : 8에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고 말씀하셨다. 열매를 맺는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에 있고 이는 성도의 제일되는 목적인 것이다. 반면에 열매를 맺지 않는 성도들은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했다.
주님을 포도나무로 성도들은 포도나무 가지로(요 15 : 1∼27)비유하셨다. 성도들이 맺을 열매가 많이 있다. 회개의 열매(마 3 : 8), 사랑의 열매, 인내의 열매, 화평의 열매, 충성의 열매(갈 5 : 22) 등이 있으나 생명의 열매 곧 전도의 열매 는 무엇보다 귀한 것이다. 그러므로 열매 맺지 않는 가지는 잘라 불에 사르겠다고 하셨다.
☞ 요 15:4
여덟째 전도하지 않으면 화가 미치기 때문이다
1. 아람 군대의 멸망을 알린 문둥이들 처럼 전하는 것이다 왕하 7장에 나온 기사이다. 사마리아성을 포위했던 아람 군대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기적으로 아람 군대의 귀에 병거와 말소리, 수많은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함으로 혼비백산하여 다 도망치고 말았다. 이 사실을 문둥이들이 발견하고 자기들만 먹고 마시고 은금과 의복을 감추고 하다가 회개하고 사마리아 성에 가서 이 기쁜소식 을 전파하였던 것이다.
2. 수가 성 여인의 전도(요 4:) 물길러 왔다가 예수를 만난 남편 다섯을 둔 여성이 예수가 메시야임을 믿고 알았을 때 물동이를 버려두고 정신없이 동네로 뛰어 들어가서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 고 소리 높여 전도하였다.
3. 바울 사도가 전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열심히 전도하였다(고전 9 : 16) 바울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강한 소명감과 강박감을 볼 수 있다. 이와같이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미친다는 복음전도에 대한 강한 소명감에서 우리 성도들이 복음을 전한다면 한국의 복음화는 멀지 않을 것이다. 모든 주의 종들을 비롯하여 성도들이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미친다 고 하는 신앙에서 살 때에 복음의 놀라운 역사가 교회마다 일어나리라 믿는다. 그렇게 할 때만이 온 한국이 복음으로 화할 것이다.
☞ 왕하 7:9
아홉째 전도의 목적은 성도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롬 1 : 14에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고 하였다. 바울이 언제 돈을 빌어 쓴 일이 있는가? 그는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러므로 경제적으로 빚을 진 일이 없었다. 다만 그의 깊은 사명감과 의무감에서 한말인 것이다. 빚진자 ()라는 말은 빚을 갚으려는 깊은 의무감에서 살고 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을 대하는 겸손한 신앙의 태도로써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의무감에서 그는 살았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사람에게 곧 헬라인이나 야만인 그리고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빚을 졌다고 말한 것이다. 바울은 그가 받은 은혜와 직분 곧 자신이 표현한 대로 죄인중의 괴수였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름을 받고 이방 전도의 직분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채무감에서 일생을 살았고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남의 돈을 빌려 쓰고 갚지 않으면 도둑놈 소리를 듣게 된다. 우리는 바울이 말한대로 복음의 빚진자들이다.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복음의 도둑이 되는 것이다.
☞막 16:15∼16
맺는말
우리는 전도의 목적 아홉가지를 생각해 보았다. 목적달성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자. 교인전체가 총궐기하자. 전도는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꼭 해야 되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순종 잘 하여 많은 전도의 열매를 맺자.
복음전도의 긴급성
성경본문 : 베드로전서 4 : 7∼11
우리는 말세 지말이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있으며, 첨단을 걷는시대, 첨단과학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 첨단이란 말은 끝을 달린다는 뜻이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이때에 할 일이 많고 많겠으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에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하고 가장 시급하며 긴급하고 중대한 사업임을 인식하고 열심히 전도해야 하겠다.
첫째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
전도서 3 : 1절 이하를 보면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전 3 : 1∼10)라고 기록하였다.
이는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신 이 세상이 이제는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것이다.
1. 노아 홍수심판을 생각해 보자 홍수의 무서운 심판은 다가 오고 있으나 그때 사람들은 너무나 안일주의·향락주의·퇴폐주의에 빠져 노아의 긴급한 구원의 메시지를 듣지 아니하고 다 멸망하고 말았다(창 6 :∼8:).
지금 시대도 그때와 같다(눅 17 : 26∼27).
2. 소돔·고모라 성의 심판을 생각해 보자 얼마나 죄악의 관영에 빠졌던지 천사를 상대하겠다는 그 성을 유황불로 멸망을 시켰다(눅 17 : 28∼32).
3. 의인 한 사람이 없어 망한 예루살렘 성을 보자(렘 5 : 1) 예레미야의 긴급 메시지를 그때 사람들은 역으로 듣고 예레미야를 거짓 선지자라고 많은 박해를 가하였다. 결국 바벨론에 비참하게 망한 역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4. 지금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 모든 것이 끝을 달리고 있다. 이때 우리는 노아가 되고 예레미야가 되어 종말을 알리는 사명자들이 되어 보자.
☞ 벧전 4:10
둘째 예수님 재림 나팔 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세상의 끝과 예수님의 재림은 동일시에 이루어 지리라는 것이 성서적인 교훈이다. 우리 예수님은 세상종말, 즉 예수님의 재림의 징조를 마24장에 잘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다 이루어지고 있으니 그 징조 하나 하나가 재림 나팔 소리로 알고 복음전도의 긴급성을 가지자는 것이다.
1. 적 그리스도의 극성을 재림 나팔소리로 듣자(마 24 : 5) 적 그리스도의 극성은 천지를 진동하는 것 같이 날뛰고 있다. 우리 성도들은 이 것이 재림의 소리로구나 하고 그들의 도전에 복음으로 응전하여 열심히 전도하는 성도들이 되어 보자.
2. 난리와 난리 소문 역시 재림 나팔 소리로 듣자(마 24 : 6) 이 세상은 질서와 평안을 잃은지 오래이다. 이기주의 자들로 가득찬 지옥과 같은 세상이다. 우리 성도들은 영안도, 영적귀도 떠서 잘 보고 잘 들어 하나님의 뜻을 바로 전해야 할 것이다.
3. 기근과 지진 역시 재림 나팔 소리로 듣자(마 24 : 7) UN의 보고에 의하면 세계 인구중 42%가 기아에 죽어 간다고 하며 처처에 지진은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흔들어 회개를 촉구하는 무서운 재앙이 되어 있다.
이게 바로 재림의 나팔소리가 아닌가?
4. 불신과 미움의 풍조가 만연한 것 역시 재림 나팔 소리로 듣자(10∼11)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선생이 제자를 제자가 선생을, 친구가 친구를 믿지 못하여 가슴치는 세상이 되고 말았고, 사랑이 식어져 미움만 남은 원인은 이기주의 때문이다. 우물 물 속에 물 말라 가는 올챙이 떼들 처럼, 나만 살아 보겠다고 아비규환을 이룬 세상이 지금이고 보니(딤후 3 : 1∼5)이 역시 재림의 징조요, 재림의 나팔 소리로 듣자는 것이다.
5. 무화과 나무의 비유가 역시 그러하다(24 : 32)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이스라엘의 회복이 예수님의 재림과 큰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 24:9
셋째 불 심판이 다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1.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된 세상(벧후 3 : 7)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핵무기로 장치된 이상한 폭발물이 되어 있다. 누가 스위치를 먼저 누르느냐?가 주목 거리이다. 현재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만들어 높은 핵무기가 지구를 40번 멸할 수 있는 량을 확보해 놓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 뇌관에 불을 지르느냐?가 주목된다. 지금 불이 타오고 있다는 긴급성을 가져야 한다. 아니 내 몸에 불이 붙어있다는 긴박함을 떨쳐 버려서는 안된다
이렇게 되어버린 세상에 우리 성도들의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이 사실을 우리 가족, 이웃, 친구, 친척, 그리고 세계 도처의 뭇 영혼들에게 알려야 하는 것이 전도이다.
2. 체질이 불에 풀어지고 땅과 모든 것이 타버린다는 것이다(벧후 3 : 10) 이는 무서운 불심판이 온 세계에 아니 천체에 까지 행해 진다는 것이다.
장작 나무가 잘 말라 있으면 잘 타는 것과 같이 오늘날 우리 인간들의 정서, 인격, 눈물, 사랑, 인정, 의리, 의분, 푸근한 마음 등등이 불타기에 잘 맞도록 바싹 말라있다. 우리 성도의 가슴도 바싹 말라 있고 불신자들의 마음도 바싹 말라있다. 이러한 때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주님의 품에 안겨야 불 심판을 이길 수 있고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우리의 마음이 풍성하여서 불 심판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3. 이렇게 풀어지는데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할까?(벧후 3 : 11∼13)
(1)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여야 하겠다(예수님 재림을).
(2)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 보아야 한다.
(3)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며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벧후 3 : 9)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전도의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다.
☞겔 33:8
맺는말
복음전도는 긴급성을 가져야 한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요. 예수님의 재림 나팔 소리가 들려오고 있기 때문이요. 불 심판이 다가 오고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전도해야 할 사람이 전도를 받지 않고 죽으면 그 사람의 피 값을 내 손에서 찾겠다고 까지 전도를 강조하신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는 성도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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