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을 누리는 법 외 15편

복에 복을 누리는 비결 15편"|주일낮설교
새생명축복 | 조회 40 |추천 0 |2011.10.19. 14:40 http://cafe.daum.net/SermonSchool/HmtY/353

죠지 에이치. 부림홀은 십일조를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 버는 모든 것의 십분의 일

이는 주님 몫이니

내 보관할 것도 내 사용할 것도 아니며

이는 그분 것 주님이 원하시는대로 사용하실 것이니

내 버는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은 주님 몫이로다

내 마음의 넓음을 시험하려

모두를 주시고 일부를 원하시니

내 버는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은

주님의 몫이로다

주님의 몫이로다

그 분의 몫은

내 축복받은 열 개 중 처음 것이며 제일 좋은 것이며

내 버는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은

주님의 몫이로다

주님의 몫이로다....

하나님께 더욱 기꺼이 드리는 믿음이 되고, 십일조 액수도 점점 많아지는 축복이 있길 바랍니다.

십일조의 영성 (본문 : 창세기 14:17-20)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저는 한 서너 번 정도 미국의 흑인 교회 예배를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설교한 일도 있구요. 그런데 이 흑인들이 굉장히 아주 emotional하고 감정적이고 그래서 예배 시간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굉장히 당황하기도 했는데 제가 설교를 할 때 한 마디를 하면 회중석에서 성도들이 두 마디, 세 마디씩 해요. 그래서 처음에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요. 우리 한국식으로 말하면 옳소, 맞습니다, 그렇게 하십시다, 나갑시다, Ye brother, preacher, let's go. 막 그냥 떠들고 그러니까 당황하고 그랬는데 나중에는 너무 너무 재미있더라구요. 그러다가 한국 교회에 와서 하려고 하니까 너무 조용하고 심심하고 그렇더라 구요.

흑인 교회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흑인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면서 이런 말로 시작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이제 교회는 일어나서 걸어야 합니다. 그랬더니 한 흑인 성도가 걷게 하소서 그랬다 말이죠. Let it walk. 다른 성도들이 일제히 걷게 하소서. 걷게 하소서. 걷게 하소서. 목사님도 계속 말씀하시면서 오늘 교회는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시간은 너무나 없습니다. 이제 교회는 달려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달려가야 합니다. 또 그 성도가 달려가게 하소서. Let it run. 달려가게 하소서. 달려가게 하소서. 달려가게 하소서. 일제히 막 그러는 거예요.

목사님이 계속 설교를 진행하면서 지상명령의 성취를 세계 복음화의 과제는 우리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우리가 전 세계를 가슴에 품고 세계를 복음화 하기 위해서 교회는 달려가는 것 정 도로 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날아가 야 합니다. 뭐라고 그랬을까요? 날아가게 하소서. Let it fly. 날아가게 하소서. 날아가게 하소서. 막 소리를 지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우리가 전 세계를 복음화 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명령이 땅 끝까지 전파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가 선교에 헌신해야 되고 특별히 선교 헌금에 헌신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각자 다 이 선교 헌금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아까 그 말을 시작했던 흑인 형 제가 갑자기 걷게 하소서. 걷게 하소서.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아요. 돈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돈 얘기라는 것은 매우 필요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돈 얘기를 하셨을까요 안 하셨을까요? 하셨어요. 적게 하셨을까요 많이 하셨을까요? 성경 읽어 보셨습니까? 굉장히 많이 하셨습니다. 한 신약학자는 복음서의 예수님의 교훈의 6분의 1은 돈과 관련된 교훈들이라고 정리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읽어보시면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3분의 1은 돈하고 관련되어 있습니다. 저 유명한 달란트의 비유, 이 달란트가 화폐 가치거든요. 또 포도원 품꾼의 비유, 품삯을 받는 돈에 대한 비유입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진 자의 이야기,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 불의한 돈으로 친구를 사귀는 이야기, 이 비유 가운데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 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다. 거기서 지극히 작은 것이라는 것은 돈에 대한 관리를 뜻해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리차드 포스트라는 영성 운동으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목사님은 그래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의 돈에 대한 태도를 알아보면 하나님께 대한 태도를 알아볼 수가 있다. 그 분은 돈은 영성의 척도가 된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침례교의 신학자인 헤롤드 피케트 라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출발점은 바로 십일조의 실천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분의 말에 동의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의 십일조 사건, 십일조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장은 창세기 14장입니다. 이 창세기 14장은 소위 팔레스타인 땅에서 요단강 동쪽 편으로 있었던 4명의 왕이 그돌라오멜이라는 사람을 맹주로 해서 요단 강을 건너 이스라엘 땅, 가나안 땅을 침범하는 데서부터 창세기 14장의 스토리가 시작됩니다. 창세기 14장1절을 한 번 보십시다.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그돌라 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이것은 다 바벨론 파사 지역의 지명들의 이름입니다. 그 지역들을 다스리고 있었던 동쪽의 왕들 4명이 연합해서 그 돌라오멜 이라는 사람이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들이 요단 강을 넘어와서 팔레스타인 땅 가나안 땅을 침입했는데 특별히 사해 남쪽의 소돔과 고모라 지역을 중심으로 한 다섯 도시 국가의 왕들을 침략했습니다. 2절에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왜 전쟁이 일어나느냐? 우리는 전쟁의 동기를 4절을 통해서 알 수가 있어요. 자, 14장4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 십삼 년에 배반한 지라"

어떻게 배반했을까? 상대적으로 약소한 도시 국가였기 때문에 동쪽에 있는 큰 나라들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섬겨왔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어느 날 아마도 조공을 더 이상 바치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들 편에서 볼 때는 반역이었습니다. 그래서 경계선을 넘어서 가나안 땅을 침략해 들어와 다섯 개의 도시를 초토화시키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는 그 과정에 있어서 저 유명한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이 포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만히 있을 수 없죠. 자, 창세기 14장14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 고 연습한 자 삼 백십팔 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조카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헤브론 지역에 있었던 아브라함도 일종의 도시 국가의 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의 군대, 자기가 길렀던 일종의 사병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삼백십팔 명을 데리고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그 들을 데리고 이스라엘 저 북쪽의 단까지 쫓아갔습니다. 15절에 보시면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일종의 기습작전을 감행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밤중 에 쳐들어오니까 아브라함의 군대가 얼마인지 모르는 당황했던 사람들이 이제 막 서로 좌충우돌하는 과정에서 아브라함이 승리한 것입니다. 기적적인 전쟁의 승리를 얻었던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전쟁에 승리한 개선 장군이 되어 돌아옵니다. 개선의 퍼레이드를 펼치면서 그 가 돌아오게 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17절 "아브람이 그돌라 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18절에 보시면 그를 맞이하고 환호하던 행렬 가운데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는 예루살렘의 왕이기도 했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19절 축복했어요. 개선 장군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서 하나님의 축복을 빌었을 때 20절에 보시면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 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감격해 하며 그가 얻었던 전리품에서 십분의 일을 바쳤더라. 성경에 최초의 십일조 사건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일조의 영성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사건 이래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여전히 십일조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십일조를 할까요? 십일조를 해야 한다면 무엇 때문에 해야 할까요? 십일조의 영성이 주는 교훈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당연한 응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린 이유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마땅한 응답으로써 드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전쟁 에 승리했습니다. 그 자체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개선의 여로에서부터 만났던 살렘 왕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이 다시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무얼 깨달았을까? 아! 나는 축복을 받는 자로구나. 왜냐하면 이 때 특별히 등장했던 멜기세덱 이라는 사람은 왕이었을 뿐만 아니라 제사장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제사장이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제사장은 한 마디로 말하면 쉽게 어떤 사람이라고 연 상이 됩니까? 제사장은 하나님을 대 표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에게 축복을 받았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고 있구나. 그래서 내가 전쟁에 승리했고 또 승리하고 돌아오는 우리를 맞아주면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그들을 환영하고 있는 이 풍성한 대접을 받으면서 아브라함이 무엇을 느꼈을까요?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이 축복에 대한 깨달음과 동시에 하나님께 십분의 일을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십일조 사건의 출발점은 축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만남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우리가 맨 처음 만나시는 하나님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의 이미지가 많아요. 하나님의 역할이 다양합니다. 창세기 에 보시면 맨 먼저 만나는 하나님의 모습은 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이 십니다. 아담과 하와, 첫 사람을 창조하시고 성경에 보시면 창세기 1장에 그들을 축복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땅을 다스리라. 우리가 성경에서 맨 처음 만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축복하시는 하나님.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이유, 하나님의 축복 때문이라 고 믿으십니까? 우리가 생존하는 것, 우리가 호흡하는 것, 우리가 일할 수가 있는 것, 우리가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가정을 꾸미고 그리고 오늘 일을 할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 때문에 가능하다. 이것을 확실히 믿으십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다. 이 축복을 깨닫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하나님 앞에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일조의 영성이고 십일조의 정신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문제는 뭐냐 하면 저와 여러분들은 너무 나 쉽게 축복을 망각합니다. 쉽게 잊어버려요. 그래서 시편 103편2절 에 보시면 "너희는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여기 아브라함을 환영하고 축복하는 멜기세덱 이라는 존재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성경은 그가 살렘 왕 제사장이었다고 말합니다. 이름은 멜기세덱, 세덱이란 말은 본래 의라는 말입니다. 의의 왕. 예루살렘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의 설명을 읽어보면 히브리서 7장3절에 특별히 이 사람은 처음도 마지막도 없다 족보도 없는 존재다. 이상한 인물이예요. 그는 영원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신약 성경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대답하기를 이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한 자다.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 그림자가 된 존재가 바로 이 멜기세덱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재미난 것은 오늘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는데 신약에서 우리의 제사장이 되시는 예수님도 제자들과 이 땅에서 마지막 밤을 지내실 때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제자들을 만나주십니다. 떡을 나누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세요? 이 떡은 너희들을 위하는 나의 몸이다. 또 잔을 나누시면서 이 잔 은 너희를 위해서 흘리는 나의 언약의 피다. 너희가 이 떡을 먹을 때마다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 Remember me. 나를 기억하라. 나를 잊지 말아라. 나의 십자가의 희생을 기억하라.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 그의 피 흘리심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으신 것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축복, 우리가 구원받은 것 이예요. 우리가 구원받은 것,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구원뿐만이 아니라 삶의 여로에서 오늘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 우리의 생존, 우리의 존재 그 전체가 하나님의 축복 때문에 가능하다. 이것을 기억하는 사람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드림이 시 작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의 삶에서 증가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걸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십일조를 하는 사람입니다. 왜 그래요? 십일조가 늘어나는 것은 내 생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 증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십일조 하는 사람은 그것을 실감해요. 십일조 안 하는 사람은 그걸 몰라요. 그냥 헌금을 내는 사람은 잘 모르죠. 그러나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은 십일조가 늘어나는 것이 나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물질이 증가하고 있는 하나의 사인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십일조가 늘어가는 것이 좋은 일입니까 나쁜 일입니까? 싫어요? 십일조 느는 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이 증가하는 거란 말이죠. 이것이 얼마나 축복입니까? 어떤 사람은 축복은 증가하는데 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계속 증가하는데 헌금은 그대로예요. 그런 사람들은 실감을 하지 못할 거예요. 십일조를 내는 사람은 십일조가 증가하면서 내 생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 이만큼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얘긴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어떤 젊은 청년 하나가 십일조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도 십일조를 내자 결심을 했습니다. 사람이 그 당시에 한 달 월급이 10불이었어요. 10불이니까 십일조 얼마 내야 합니까? 1불. 1불 내는 것 별로 어렵지 않았어요. 한참 내다보니까 드디어 이 사람의 한 달 월급이 100불이 되었습니다. 얼마 내야 할까요? 10불. 조금 힘들었지만 내었습니다. 조금 더 있다가 이 사람의 한 달 월급이 드디어 1000불이 되었습니다. 얼마 내야 됩니까? 100불. 좀 떨려요. 100불 내기는 힘들었어요. 이 악물고 100불을 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자 드디어 이 사람이 한 달에 10000 불을 벌게 되었어요. 이번에는 얼마 내야 됩니까? 1000불. 여러분, 1000 불내는 것 쉽지 않죠? 1000불 내려니까 떨리기 시작해요. 도저히 낼 수가 없었어요. 이 사람이 순진한 청년이라 목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 제가 십일조를 서약하고 결심한 이래로 지금까지 실천해 왔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한 달 월급이 10000불이 되고 나니까 1000불 낸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혹시 십일조 서약을 cancel하면 안 될까요? 목사님이 웃으시면서 cancel은 안되구요 형제가 십일조를 쉽게 낼 수 있도록 제가 도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어떻게요? 그러면 형제가 옛날처럼 한 달에 10불만 벌도록 제가 기도해 드리죠.

여러분, 내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축복이 증가한다는 것 그와 동시에 십일조가 증가한다는 것, 저는 신앙 생활의 재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축복하신다. 나와 함께 하신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우리의 응답, 감사의 응답 그러므로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과 저의 인생에 있어서 한 평생이 하나님의 축복의 응답의 생이 펼쳐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일조는 바로 축복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 번째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십일조는 우리의 성취의 원인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의 성취, 우리의 성공의 원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단순히 돈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헌금 행위가 아닙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십일조는 신앙 고백적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제사장의 축복을 받으면서 다시 제사장은 아브라함에게 중요한 메시지 하나를 전달합니다.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이게 무슨 메시지입니까? 아브라함은 지금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극적인 승리였습니다. 아군은 불과 318명. 성경학자에 따라서 그 당시 적군의 숫자는 1만 명에 가까웠다고 전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300명 정도 갖고 승리한 거란 말이죠. 기드온처럼.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얼마나 프라이드 가 생겼을까요? 내 전략이, 기막힌 전략이 맞아 떨어졌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이 정말 조심해야 할 순간이 있다면 성공 다음입니다. 우리가 성공한 다음에는 어느 정도 자만심이 생겨요. 자기 자신에 대한 자만심. 성공 다음에 우리는 죄를 짓기 쉽습니다. 어떤 죄를 짓기가 쉬울까요? 그것은 우상숭배의 죄, 어떤 우상숭배의 죄일까요? 자기를 높이고 싶어합니다. 내가 이렇게 놀라 운 일을 했단 말이야. 그것이 하나님의 도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함께 하심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 든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고 싶어하는 그런 유혹을 누구나 받을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내 전략은 얼마나 기막힌 전략인가! 나는 드디어 성공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신 메신저인 이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메시지를 전합니다. 네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이 메시지의 핵심은 뭐예요? 너 의 승리의 원인은 네가 아니다. 나야. 하나님이 너를 도와 준거야.

여러분, 헌금하기가 왜 어렵습니까? 아깝죠, 돈? 왜 아깝습니까? 이 돈이 어떤 돈인데 내가 어떻게 땀 흘리고 내가 어떻게 열심히 일해서 벌었는데 그런데 내가 일할 수 있었던 건강, 누가 주셨습니까? 나의 지혜,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주께서 건강을 주시고 주께서 지혜를 주시고 주께서 여건과 환경을 마련해 주시고 주께서 도와주셨다면 나의 삶은 전적으로 그 분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 아니예요? 나의 성공의 원인, 나의 성취의 원인, 누구 때문입니까? 하나님 때문이예요. 그것을 기억하자마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아브라함은 나는 그냥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였어. 그러나 도구로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주신 본래의 이유였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너는 축복의 근원이 되리라. 그런데 축복의 근원이라는 말 이 정확한 말이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 옮기면 축복의 통로라는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쓰신 것에 불과해요. 내가 쓰임을 받았다. 나 같은 사람도 쓰임을 받았다. 얼마나 기뻐요? 그것만으로도 감사하죠. 감격이죠.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하셨고 하나님이 하셨고 그러나 다만 나를 도구로 쓰셨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는 지나간 한 주간 동안 미국 가서 참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쓰시는구나 실감을 할 수 있었던 기적 적인 사건 하나가 있었습니다. 제가 지난 목요일 날 미국 워싱턴 공항에 딱 도착을 하니까 저를 마중 나오신 분이 메모지 한 장을 전해줘요. 메모지에는 워싱턴 지역에 사는 목사님 한 분이 아주 긴급한 일로 저를 꼭 만나야 하겠다는 전화번호가 그 안에 적혀 있었어요. 제가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피곤한 상태 속에서 떠났기 때문에 너무 너무 피곤했어요. 다른 아무 생각도 없고 자자 그 생 각 밖에는 없었습니다. 무언데 이렇게 만나자고 그러나 우선 나는 쉬고 봐야 되겠다 그래서 가서 우선 쉬었습니다. 하룻밤을 푹 잤습니다. 며칠 후에 연락하고 싶었습니다. 하루 딱 자고 일어나니까 그 이튿날 새벽에 그 메모지가 왔다 갔다 해요. 뭐가 그리 긴급 하길래 나를 꼭 만나자고 했을까? 그 이튿날 제가 전화를 드렸습니다. 목사님 꼭 만나서 얘기했으면 좋겠습니다. 토요일 날 만났습니다. 이 분은 은퇴를 앞에 두고 둔 목사님이었습니다. 평생 성실하게 목회를 하던 분이었습니다. 저도 전에 워싱턴에 있을 때부터 교제하던 분이고 저하고 성경 공부도 하던 목사님이었는데 이 분이 은퇴를 앞에 두고 한 수년 전에 워싱턴 버지니아 쪽에 미국 교회가 쓰던 아주 좋은 땅을 얻었습니다. 7.5에이커. 7.5에이커면 어마 어마하게 큽니다. 8000평이 넘어요. 아주 큰 땅 이예요. 워싱턴의 한 복판에 그리고 1000석이 들어가는 본당과 교육관이 다 있는 빌딩을 땅과 함께 인수했어요.

그런데 이제 이 분의 은퇴가 가까워지는데 교회가 생각처럼 부흥이 되지 않았고 마땅한 후임자를 찾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분들 은 와서 이 분에게 목사님 그걸 팔라고. 팔면 어마어마하죠. 땅 값만 해도 500만불 이상을 받을 수가 있어요. 그런데 목사의 양심으로 이걸 팔 수는 없다. 내가 목회하던 교회 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 기도하는데 갑자기 버지니아 지구촌 교회가 생각이 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좀 의탁하고 싶은데 버지니아 지구 촌 교회의 장세규 목사님, 저하고 같이 있던 목사님인데 잘 몰라요. 젊은 목사님이고 그래서. 이동원 목사가 생각이 나더래요. 내가 이동원 목사하고 이야기를 한 번 해보자. 그래서 저를 만나자고 그런 거예요. 이 분이 제 정신으로 말을 하나 안 하나. 여러분 7.5에이커면 굉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화요일 날 만났어요. 장세규 목사님이랑 저랑 제 와이프랑 그 목사님이랑 다시 그 교회당에서 만났어요. 워싱턴의 한복 판 금싸라기 같은 곳에 있는 아주 넓은 땅을 딱 보자 저는 생각이 하나밖에 없었어요. 요 땅을 딱 가지고 한국의 수지에 갖다 놓았으면 좋겠다. 같이 손을 잡고 교회당에서 기도하는데 목사님이 눈물을 흘리더라구요. 하나님이 저를 인도하셨어요. 이제 이 목사님이 증인이 되시고 이 목사님이 축복하시고 이 목사님이 기도해 주신다고 약속하신다면 저는 조건 없이 오늘 이 시간이 교회를 지구촌 교회에 위임하겠습니다. 그래서 다 끝났어요. 3월 첫 주에 버지니아 지구촌 교회가 옮겨요. 그 장소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여러분 실감이 안 나요? 제가 가만 히 비행기 타고 오면서 이번에 하나님이 이런 일을 위해서 나를 보내셨구나. 나를 쓰셨구나. 하나님이 하셨어요. 하나님이 하신 일 가운데 쓰임을 받는 기쁨이 얼마나 커다란 기쁨인 줄 아십니까? 내가 주인이 될 필요가 없어요. 나는 통로가 되면 돼요. 주인이신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그 일에 내가 겸허하게 통로가 되기를 원할 때 우리를 쓰시는 하나님, 그리고 한 평생 하나님,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고자 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축복을 위임해 주시는 하나님. 저는 여러분의 생애 가운데도 이런 놀라운 축복이 경험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려면 십일조부터 내셔야 되요. 우리의 성취의 원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일조의 영성 무얼까요? 마지막으로 세 번째 십일조라는 것은 우리의 자발적 헌신의 상징인 것입니다. 본문에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드렸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입니까 아니었습니까? 아니었어요. 하나님이 명령한 일 없어요. 너 드려라 이런 명령한 것 없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냥 드렸어요. 자발적인 것이었어요. 자원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명령이 아니어도 자원해서 헌신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브라함 이후에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이 되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이삭의 아들 야곱, 창세기 28 장22절에 보시면 야곱이 베델의 들판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서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 돌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를 원하구요. 그리고 저는 십분의 일을 반드시 하나님 앞에 드리겠습니다. 야곱이 십일조 서원을 해요.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 어도 이것이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어요.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 최초의 십일조를 드린 이후에 그로부터 500년이 지나가서 모세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모세 시대에 십일조가 율법의 한 부분이 됩니다.

종종 십일조를 반대하는 사람 가운 데 십일조가 신약적이 아니다 복음적이 아니다 반대하는 분이 있어요. 왜냐하면 율법이 폐기되었다면 십일조도 폐기되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기억할 것은 율법 이전에 이미 십일조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십일조의 정신은 언제나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마태복음에 보시면 그 율법의 형식만 붙들고 있었고 율법의 진정한 정신을 잃어버린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는 가운데 거기 십일조를 언급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것도 버리지 말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 볼 수가 있습니다.

십일조의 정신의 핵심이 뭔 줄 압니까? 십분의 일 드리는 것 아니예요. 절대로 아닙니다. 십분의 십 전체를 드리는 것입니다. 십이란 숫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만수(滿數)를 말합니다. 꽉 찬 수. 옛날 숫자를 셀 때 손가락으로 세는 것이 가장 기본이었다는 말이죠. 열 그러면 전체를 나타내는 것이예요. 모든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이 전체를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십분의 일을 구체적으로 드린 것은 이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 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분의 일을 드릴 때 십분의 일만을 드리는 것이 아니예요. 십분의 십 전체를 드리는 것입니다. 전체의 상징으로, 내 존재를 드리는 표시로, 내 인생을 드리는 표시로 십분의 일을 주 앞에 드립니다.

신약에 와서 십일조가 강조가 안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한 신약 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 신약 성경에 십일조가 강조되지 않았는가?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십일조는 기본이었다. 그것은 언급 할 필요도 없었다. 누구나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십분 의 일 이상 얼마나 더 드릴 수가 있느냐가 그들에게 문제였을 따름이다. 그들은 전체를 드리기를 원했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체를 드리는 정신,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전체를 드릴 수가 있을까요? 십분의 일을 드리되 그 속에 전체를 드리는 헌신이 어떻게 고백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나에게 전체를 주신 그 주님을 바라보시면 돼요. 우리 주님 은 나에게 전체를 주신 주님, 그의 생명을 나를 위해 드려 주신 바로 그 분이 아니겠습니까? 그 분을 바라보십시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멜기세덱 제사 장이 아브라함을 만났던 그 장소가 창세기 14장17절에 보시면 왕곡이라는 장소였어요.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서 그를 영접하였고. 왕곡이란 말은 왕의 골짜기란 말입니다. King's valley 왕의 골짜기. 성경학자들은 이 왕곡이 그 감람산과 예루살렘 성전 사이에 있는 계곡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이것이 기드론 계곡이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겟세마네 동산이 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마지막 그 분은 이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이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지 직전에 최후 의 마지막 만찬을 나누셨다고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때 마치 오늘 본문에 아브라함을 만나주던 제사장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던 것처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도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사랑하는 제자들을 만나주십니다. 그 때 예수님 심정이 어땠을까요? 떡을 돌리면서 이 떡은 말이야 너희들을 위해서 내일 십자가에서 찢길 내 몸이야. 잔을 나누어주시면서 이 잔은 말이야 내 일이면 너희들을 위해서 흘리게 될 나의 보배로운 피야. 이런 심정으로 잔을 나누시던 우리 주님의 심정이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사랑하는 제 자들을 위해서 그 전체를 내어주신 주님. 그의 피흘림, 그의 자신을 내어주심, 그의 전부를 내어주심, 그의 희생 때문에, 그의 피 흘림 때문에, 우리가 죄사함 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있었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신을 또한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은 너무나도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1858년 영국에서부터 독일로 건너와 유학하고 있었던 여학생 하나가 있었습니다. 22살 먹은 여학생, 목사님 딸이었어요. 그러나 많은 목사님의 딸이나 재직의 자녀들이 그런 별로 뜨겁지 않은 신앙에 머물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것처럼 익숙하다는 이유 때문에 이 자매도 소위 nominal Christian 명목상의 기독교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별로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공부하다가 병이 들었어요. 자기 친구가 초청을 했습니다. 독일의 뒤셀도르프라는 친구의 별장 같은 저택에 초청을 받아서 왔을 때 친구의 집 복도를 걷다가 그림 한 장이 이 자매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유명한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 에크 호머, 이 사람을 보라. 빌라도의 법정에서 채찍을 맞고 가시의 면류관을 쓰고 고난 받고 모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받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던 그림이예요. 갑자기 그림이 자매를 끌고 있었습니다. 잡아끌고 있었습니다. 얼어붙듯 그 그림 앞에 섰습니다. 그림 아래 글귀 하나가 있었어요. 이 글귀가 자매의 가슴을 확 사로잡았습니다. 이 글귀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나 너를 위해 이렇게 고난을 받았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주느냐? 너는 나를 위해서 무엇을 주느냐? 갑자기 자매의 눈에서 는 눈물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주님을 잊어버리고 나를 위해 희생하시고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망각하고 살았구나. 주님 이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주님을 위해서 드리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온 자매는 붓을 들어서 그 그림에서 받았던 감동과 자기 헌신의 결심을 한 편의 찬송시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찬송가 185장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을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위해 무엇 을 주느냐

주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생명 그 자체를 주셨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 앞에 무엇을 드리겠습니까? 주를 위해 드려지는 전체에 대한 헌신, 그 헌신의 시작은 십분의 일에 대한 헌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 이 헌신을 주님께 드리셨습니까? 기도하십시다.

온전한 십일조 (본문 : 말라기 3:7-12)

김조 목사(삼락교회)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또한 자식이 복 받고 살아가는 것이 어버이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이 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민 6:25민 6:25)

"너희의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12절)는 말씀이 그것을 증거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형편이 지금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하나님은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덕질 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고(9절)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축복 받고 살아야 합니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의 복이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10절) 하시고도 계속 약속해 주셨으니 오늘은 "온전한 십일조"에 대해 깨닫고 실천하여 더욱 큰 은혜 받는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일조를 제2의 복음이라고 까지 말합니다. 제1이야 십자가입니다. 죄악으로 영 죽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십자가 복음이요, 온전한 십일조로 "나를 시험하여 보라 하늘 문을 열고 복이 쌓을곳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셨으니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이 있겠나요. 그러기에 영적인 축복은 십자가로 받고 육적인 축복은 십일조로 받는다면 제2 복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수입의 10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 쉽지 아니하여 시험도 되고 신앙의 잣대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온전한 십일조란 무엇인가 몇 가지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십일조를 해야할 이유를 생각해 봅 니다.

①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해야 합니다. (8절)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8) 나의 것을 도적질 하였느니라(9)고 하셨으니 이는 분명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다 주신 하나님이 왜 그 중 열의 하나만 하나님 것이라고 하실까요? 그것이야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나타내신 것이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니 십일조는 엄격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족장시대에 아브라함이(창14장) 살렘왕 멜기세덱에게 드린 것을 히7:1-10히7:1-10에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린 것이라 했습니다. 또 한 축복의 조상이라는 야곱도 십일조를 약속하고 드렸으며(창28:22창28:22),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에는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은 의무금으로 드리라고(레27:30, 32레27:30, 32, 신14:22신14:22) 하셨습니다. 의무로 드리는 것이라 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드려야 할 것입니다.

②하나님이 복 주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10-12절)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고 복을 쌓을 곳이 없게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시던 하나님은 무엇이 없어서가 아니라 복 주시기 위한 하나의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자에게 복을 주시고 불순종하는 자에게 저주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려서 축 복 받은 사람은 많습니다. 맨소래담의 왕이라 하는 미국의 실업가 하이드씨는 문방구점을 하다가 엄청난 부채를 지고 파산하였으나 십일조를 정성스럽게 드렸을 때 친구인 의사의 권유로 시작한 연고사업이 잘 되었고, 그는 10의 9조까지 바쳐서 주의 일을 했습니다. 그는 10의 8을 드릴 때보다 10의 9를 드릴 때가 더 크게 복 받았다고 간증했으며 록펠러는 어머니의 유언으로 시작하여 큰 복 받고 "십일조 바치는 사람은 가난할 수 없다"했습니다. 미국 10대 기업의 총수였던 웰리암 골게이트는 십일조 드림으로 복 받았음을 첫번째로 신문 기자 들에게 밝혔습니다. 성도들이여! 믿음의 열쇠로 천국을 열고 기도의 열쇠로 문제를 해결하고 십일조의 열쇠로 축복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

2. 십일조에 대한 바른 자세

율법이니 안해도 된다는 자도 있으나 마23:23마23:23에 예수님이 이것도(십일조) 행하고 저것도(의?신?인) 버리지 말라 하셨으니 십일조를 더욱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빚을 졌기에 못한다 하나 하나님께 맡겨야 빚도 갚을 수 있지 어떻게 내 사정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겠습니까? 많아지면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받은 아홉은 아니보고 어찌 하나만 크게 본단 말입니까? 그러니 어떠한 핑계도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에게 복 주시기 위함이니, 아니하면 삶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십일조는 다른 헌금(주일헌금, 감사, 구제)으로는 쓸 수 없습니다. 섬기는 본 교회에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의 것을 자기가 하고 싶다고 아무데나 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모으지 마십시오. 사람이기에 그것이 시험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필수로 해야할 의무이나 복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겨 드려야 합니다.(고후 9:7고후 9:7)

3. 십일조는 전체의 삶으로 하라

하나님께 받은 것이 어찌 재물만이겠습니까. 십일조하면 재물만 생각하는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을 빼버린 결과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시간, 건강, 재능, 지식, 이 모두가 하나님의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삶의 전체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그 마음으로 하나님의 역사 위해 우리의 시간 드려 봉사하고 몸 바쳐 충성하며 매일의 삶 속에서 헌신하는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십일조이며 우리에게 복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제 말씀을 줄이겠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알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뜻이요, 우리가 축복 받을 수 있는 길이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해야할 것이요, 부정적인 생각 버리고 아낌없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요, 믿음으로 적극적으로 드려서 주의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꼭 재물로만 이해하지 마시고 내 몸으로 내 시간 내 재능의 십일조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십일조임을 잊지 말고 하나님께 드려서 더욱 큰 역사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십일조를 온전히 바친다(I) (본문 : 창세기 14:17-20)

석원태 목사(경향교회)

하나님과 이스라엘 선민 사이에 맺은 대대에 이를 영원한 3대 표징이 있었습니다. 그 첫째는 난 지 8일만에 받는 할례였습니다. 그것은 선택 언약의 선민된 표시였습니다. 이것은 신약의 세례와 같습니다. 둘째는 유월절이었습니다. 이것은 신약의 성찬과 직결하고 있습니다. 세번째는 안식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신약의 주일입니다. 예외가 없이 절대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신명(神命)의 규례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백성된 선민(選民)의 표요 성민(聖民)의 표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영적 차원의 표징들이었습니다.

또 하나 다른 종류의 표징이 있다면 소득의 십일조를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헌제행위였습니다. 이것은 물질적 축복과 직결하는 하나님 자신의 명령입니다. 거룩한 구속사의 전통을 따르는 경향인도 예외가 없이 소득의 십일조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복된 생활 강령으로 여기며 영예롭게 여깁니다.

Ⅰ. 십일조의 기원과 역사

십일조가 맨 처음 언제, 어디서, 누구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뚜렷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에 나타난 확실한 기록을 보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그가 취한 전리품 중 십분의 일을 바쳤다는 사실입니다(창 14:20창 14:20). 그 후 그의 손자 야곱이 하나님께 십일조 서원을 하였습니다(창 28:22창 28:22).

이것이 모세 시대에 와서, 시내산에서 여호와로 말미암아 선민의 생활 규례로 입법화되었습니다(레 27:30-34레 27:30-34, 민 18:20-32민 18:20-32, 신 14:22-29신 14:22-29).

선지 시대(예언)에 와서 히스기야 왕 때 신앙부흥과 함께 십일조 운동이 일어나고, 경제적인 축복을 받았습니다(대하 29:, 31:5-7대하 29:, 31:5-7). 느헤미야 시대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향한 십일조 생활을 복구하였습니다(느 13:10-13느 13:10-13). 말라기 선지 시대에는 하나님의 십일조를 도적함으로 하나님의 엄한 책망을 받은바 있습니다(말 3:7-10말 3:7-10).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 400여 년 어간에도 외경(Apocrypha)과 탈무드(Talmud)에서 계속해서 십일조 문제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신약시대의 도래와 함께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은 십일조 생활을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십일조 생활을 칭찬했는데, 그것이 외식화 되었을 때는 꾸중을 하였습니다(눅 18:12, 11:42눅 18:12, 11:42).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분으로 자신도 십일조 생활을 성실히 하셨을 것입니다(마 5:17마 5:17).

초대교회는 십일조선을 넘어서 버린 유무상통과 복음 선교활동을 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행 2:44-47, 4:32-35행 2:44-47, 4:32-35).

바울은 전도자의 생활에 대하여 말할 때 구약의 레위인이나 제사장들이 성전의 십일조에 의존했던 것처럼, 신약 교회의 십일조와 연보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고전 9:13-14고전 9:13-14, 민 18:21, 24민 18:21, 24, 신 18:1신 18:1). 히브리서 저자도 십일조를 언급하였습니다(히 7:8히 7:8).

초대교회 교부들 가운데 이레니우스(Irenius)는 "유대인들이 십일조를 바쳤거든 하물며 은혜 아래 있는 성도라면 소유의 전부라도 주를 위해 바쳐야 할 것인데, 십일조를 기쁘게 바치지 않는다면 이것은 확실한 모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구약의 십일조에 얽매이기보다, 자유를 얻은 크리스천은 주님 사업을 위하여 모든 재산을 바칠 각오를 하고 필요할 때까지 재산의 가치 있는 부분을 즐겁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바쳐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교부 크리소스톰(Crysostom)은 오리겐(Origen)이 한 말 즉 "크리스천은 구약시대의 유대인보다 헌금에 있어서 앞서야 된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면서 구약의 십일조를 능가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터툴리안(Tertullianus)은 "십일조는 창조의 법칙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Augustinus)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의 유익과 축복을 위하여 헌금정신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십일조를 태만히 하는 것은 확실히 범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고, 하나님을 섬긴 아담(?)과 아벨(?) 이후에 아브라함 때 나타나고, 모세 시대에 법제화되었습니다. 왕정시대에 경제부흥의 요건이 되었으나, 선지 말기 시대에 와서는 십일조를 불이행하다가 개인과 가정과 나라가 궁핍하여 선지자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 후 신약시대에 예수님이 이 제도를 시인했고, 오순절 이후 교회 시대는 확실히 십일조선을 더 넘어서는 헌금의 내용들을 볼 수 있습니다.

Ⅱ. 십일조 신학

전 성경에 나타난 십일조의 참된 의의는 사실상 십일조 신학을 정립시키고 있습니다.

1. 십일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① 성부 하나님 자신의 명령입니다.

레위기 27장 30절에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고 하였습니다. 말라기 3장 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라고 하였습니다(레 23:16-18레 23:16-18, 민 28:26-31민 28:26-31, 잠 3:9-10잠 3:9-10).

② 성자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마태복음 6장 19-20절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③ 성령님의 축복 역사였습니다.

사도행전 4장 32절에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 하였습니다. 34, 35절에는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고 하였습니다.

신약 교회는 물질이 성도들을 섬기는 중대한 역할을 하였고 후한 연보, 거액의 연보가 복음 전파행위에 힘있는 수단이 되었습니다(행 11:28-30행 11:28-30, 롬 16:, 고후 9:, 빌 4:1 8빌 4:1 8…). 이미 신약 교회는 구약의 십일조 한계를 훨씬 넘어서고 말았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였습니다. 구원의 날에 드려지는 감심적인 헌금 행위가 되고 말았습니다.

2. 재물의 참된 소유주를 알려주 는 계시의 원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주요 소유주이심을 알려주는 계시행위가 십일조 명령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시 24:1시 24:1, 역대 상 29:11-14, 요 1:3요 1:3).

학개서 2장 8절에 「은도 내 것이 요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 의 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신명 기 8장 18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재물의 창조주요 소유주가 하나님 자신을 알리는 방법 중에 하나가 십일조 명령이었습니다.

3. 성민된 삶의 표식입니다.

① 그것은 하나님 경외를 물질적으로 나타내는 가시적 행위였습니다.

잠언 3장 9-10절에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하였습니다. 할례는 몸의 성별이었습니다. 안식일은 시간의 성별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영의 성별이었습니다. 십일조는 물질의 성별이 됩니다.

② 그것은 또한 사랑과 감은의 표식이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한 표식입니다(고후 9:15고후 9:15).

③ 그것은 또한 복음전파를 위한 수단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십일조와 그외 여러 가지 물질 봉사의 행위는 바로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수단이 됩니다.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교회를 세우는 필연적인 수단이 됩니다(마 6:33, 28:19-20마 6:33, 28:19-20). 십일조는 위대한 복음 선교의 자원이 됩니다.

4. 청지기 의식과 사명의 표식입니다.

① 십일조 생활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살 동안 하나님의 물질을 위탁받은 자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욥은 이러한 사실을 고백하기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라고 하였습니다(욥 1:20-21욥 1:20-21).

② 주인의 뜻대로 사용한다는 고백적 표식입니다(출 23:19출 23:19, 시 96:8시 96:8).

③ 그리고 주인께 그 마지막을 결산한다는 표식입니다(마 25:13-30마 25:13-30, 롬 14:12롬 14:12, 갈 6:7갈 6:7).

5. 축복계시의 원리입니다.

① 영적인 축복이 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고후 9:7고후 9:7). 또한 그것은 그가 십일조의 신명(神命)에 순종하는 축복입니다. 그의 순종 신앙에는 성장하는 성화의 축복이 따라옵니다.

② 물질적 축복이 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어주시는 축복을 받습니다(말 3:10말 3:10). 이 말은 하늘에서 늦은 비와 이른 비와 소낙비를 내려주심을 뜻합니다. 칼빈 (Calvin)은 말하기를 "하늘의 하나님이 하늘을 열어주지 아니하는데 어찌 땅이 그 소출을 낼 수 있겠는가? 하늘이 열리지 않은 땅의 창자들은 모두 말라 버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부어주시는 축복'이라고 하였습니다(말 3:10말 3:10). '쌓을 곳이 없도록 가득히 채워주시는 축복'이라고 하였습니다(말 3:10말 3:10). 모든 재앙에서 보호받는 복이라고 하였습니다(말 3:11말 3:11). 모든 자원의 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아름다운 땅'을 가리킵니다. 비옥한 땅, 기름진 땅, 생산력의 자원이 있는 땅을 가리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인생에게 명령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명령은 우리에게 신앙과 순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지고하신 명령이 인생에게 무수한 축복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주 예수를 믿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는다고 영생의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요 3:16요 3:16, 행 16:31행 16:31).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하면 네가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한다고 하는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출 20:12출 20:12, 엡 6:1-2엡 6:1-2). 모든 소득 의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하면 하늘의 문을 열고 너희에게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부어주신다고 하는 물질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말 3:10말 3:10).

우리가 잘 아는 세계적인 치약회사 '콜게이트'는 바로 그 회사의 창설자의 이름을 따라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는 영국에서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아버지와 폐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로 인해 거지생활을 하며 방황하던 자였습니다.

그는 미국으로 가는 상선 짐짝 사이에 숨어 있다가 나중에 발각이 되었습니다. 그는 끌려가서 매를 맞으며 문초를 당하는 중 울면서 자기 가정 사정을 이야기하며, 돈벌이를 하러 가기 위해 몰래 배를 탔다고 실토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선장은 콜게이트를 그 날부터 자기 양자로 입적하였습니다. 나중에 그 선장이 늙은 후 그 배를 팔아 치약회사를 설립하고 그 회사 이름을 콜게이트라고 하였습니다.

콜게이트는 어릴 때부터 독실한 신자인 부모로부터 주일예배 생활과 십일조 훈련을 엄격히 받은 자였습니다. 항상 오른쪽 주머니에는 십일조를, 왼쪽 주머니에는 수입금을 넣도록 훈련받으면서 자랐던 것입니다. 그는 미국에 와서도 어릴 때 그 습관을 따라 수입이 많든지 적든지 간에 십일조를 정성껏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현재 이 콜게이트 치약회사의 하루 수익은 금으로 바꾸어 네 사람이 질 수 없을 만큼이 된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 회사는 십일조를 구별시키는 축복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고 합니다. 그는 지금 콜게이트대학까지 설립하여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죤 워너메이커는 전세계에서 제일 먼저 백화점을 창설한 사람으로 백화점 왕이라고 칭송 받는 사람입니다. 또 그는 주일학교 왕이라고도 불립니다. 미국 정부로부터 장관으로 부름을 받았을 때도 주일학교 교사직을 계속한다는 단서를 받고 장관직에 취임할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가 경영하는 벽돌공장에서 일하면서 독실한 기독교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가 아홉 살 때 벽돌공장에서 쉬는 시간에 성경을 읽다가 이런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이시여! 나로 하여금 천하에서 헌금을 하나님께 제일 많이 바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 신앙의 사람이고 보면 백화점 황제가 된 결과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석유 대왕이라 일컫는 록펠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주일학교에 다니던 여덟 살 때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큰복을 주신다는 성경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때 그가 갖고 있던 20센트에서 십일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소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한 그였지만 1870년에 스탠다드 석유회사 소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비망록에 쓰기를 '나는 재산이 자꾸 늘어나도 어기지 않고 그대로 십일조를 꼭꼭 바치는 것이 내 평생의 행복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녀들에게 이 축복의 비결을 가르치고 또 실행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그 막대한 재산을 조금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각종 공공 사업에 희사하고, 또 시카고대학을 설립하였습니다. 록펠러 재단의 설립자로 병원과 의학연구소와 교회와 학교 등 문화사업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록펠러가 '만일 내가 주급이 1달러 50센트였던 나의 첫 봉급에서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다면, 내가 바친 100만 달러의 십일조도 바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한 말은 우리에게 축복의 명언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잘 살고 행복하게 되는 원리는 사람 스스로가 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계와 그 가운데 법칙들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께서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 십일조의 원리도 하나님 자신 이 인생에게 축복의 수단으로 정해 놓으신 법칙입니다. 십일조 행위를 통하여 재물의 소유주는 오직 하나 님 자신이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물질을 맡은 청지기임을 알려 줍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림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민(聖民) 된 고백의 표시를 삼습니다. 결국 물질 소득에 대한 하나님의 십일조 명령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30배, 60배, 100배로 물질적인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이 위대한 축복의 명령은 지금 경제적으로 세계의 머리가 되고 있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들이 이 사실을 웅변적으로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여러분의 현재 십일조가 30배, 60배, 100배로 더하여지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십일조를 온전히 바친다(Ⅱ) (본문 : 잠언 3:9-10)

석원태 목사(경향교회)

이사야 43장 7절에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사람된 본래의 창조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 지음 받은 것입니다.

시편 19편 1절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존재하는 전 피조물의 피조적 본연(本然)이 하나님의 영광 선포를 위한 수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전 피조세계를 동원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 영예로운 본 연으로 돌아가야 합니다(전 12:13전 12:13).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영감의 성경은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하였습니다(잠 3:9-10잠 3:9-10).

※ 우리가 받은 모든 물질 소득의 십분의 일을 성별 시켜 하나님을 경외하는 고백적 표시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물질 헌제를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가시적 표식으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십일조 생활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 행위의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십일조 교훈에 대한 두 번째 메시지를 받게 됩니다. 실제론적 입장에서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Ⅰ. 십일조의 여러 유형

1. 반대 유형

① 신약시대는 은혜의 시대요 구원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율법적 규례는 없어져야 하고,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입니다(롬 6:14롬 6:14).

② 재물의 소유주는 인간 자 신이라는 주장입니다.

③ 또한 나의 수입이 너무 적다는 이유입니다.

④ 반대로 나의 십일조가 너무 많아서 그것을 다 드릴 수 없다는 이유입니다.

⑤ 자기 십일조에 대한 산출근 거가 없다는 이유입니다.

⑥ 교회가 헌금을 잘못 사용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습니다.

⑦ 십일조는 구원과 전혀 무관하기 때문에 그것을 율법화할 수는 없다는 이유입니다. 이 모든 것이 전혀 성경 교훈과 모순되는 인간 중심의 생각입니다.

2. 마지못해서 드리는 유형

① 마지못해서 억지로, 의무감으로 내는 유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요구는 즐겨내는 것 이라고 하였습니다(엡 6:6-7엡 6:6-7, 고후 8:7고후 8:7).

② 하나님의 응징(벌)이 두려워서 내는 유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의 신 이 아니라 사랑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③ 자기 기분대로 내는 십일조 유형입니다. 형편 따라 적당하게 사전에 준비 없이 내는 십 일조입니다. 자기가 급한 대로 우선적으로 다 쓰고, 여유가 있거나 나머지 부분을 십일 조라는 이름을 붙여서 냅니다. 그러나 십일조 헌금은 최우선의 제물이 되어야 하고(마 6:33마 6:33),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을 공경함이 되어야 합니다(잠 3:9잠 3:9).

④ 공명주의나 체면, 눈치껏 내는 십일조입니다. 자기의 교회 직분상, 또 타인과 비교해가 면서 이른바 체면세 우기식(?)의 십일조입니다.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십일조입니다.

3. 기복적 십일조의 유형

이는 일종의 상리적 축복관념입니다. 하나님께 어떤 뇌물(?)을 드리는 심정이나 십일조를 축복 받는 공로처럼 여기는 유형입니다. 결코 십일조는 하나님과의 상거래 행위나 기복적 공로행위가 될 수 없습니다.

4. 교회를 존속시키려는 목적으로 드리는 유형

물론 십일조 헌금이 교회 재정운 영에 결정적인 힘이 됩니다. 그럼에도 교회를 존속시키고 부흥시키는 원동력은 주님 자신이고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이런 이유로 십일조를 내는 자는 자신이 교회의 주인역(主人役)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5.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드리는 십일조

십일조는 하나님 자신의 지고하신 명령에 감심으로 순종하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기쁘시게 하는 영광의 수단으로 드린다 는 사상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는 사상입니다(고전 10:31고전 10:31).

이런 의미에서 아드리안 로저스 (A. Rogers)는, "십일조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통로이다. 왜냐하면 십일조 생활을 통하여 당신 안에서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윌리엄 C. 번즈(W. C. Burns)가 중국선교를 위하여 떠날 때 누군가 그를 비꼬듯이 "중국인 모두를 개종시킬 모양이죠?"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그는 단호히 대답하기를 "아니오. 나는 단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중국으로 갑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당신은 축복을 받기 위하여 십일조를 드립니까?"라고 한다면 "아니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십일조를 드립니다." 라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예배행 위의 종목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Ⅱ. 십일조에 대한 실제적 문답

1. 십일조가 연보의 전부인가?

아닙니다. 십일조는 모든 연보의 기본입니다. 성경에는 그 외에도 여러 류의 감사행위가 많습니다.

2. 십일조 계산은 총수입에서 할 것인가, 아니면 순이득에서 할 것인가?

성경은 소득의 십일조라고 하였습니다(눅 18:12눅 18:12). 또 온전한 십일조라고 하였습니다(말 3:10말 3:10). 모든 경우의 소득의 십일조를 바쳐야 합니다.

3. 십일조의 액수가 너무 적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경우나, 또 너무 많아서 고액일 경우에는 어찌하는가?

양자 다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적거나 많거나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4. 십일조를 드려야 할 창고가 교회뿐인가?

그렇습니다. 교회뿐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고 하였습니다(말 3:10말 3:10). 그렇다면 '나의 집', '나의 창고'가 비단 교회만을 가리킴인가?

① 신학교나 기타 자선사업단체나 선교기관, 농촌 모(母)교회에 자기 십일조를 나누어 보낼 수 있지 않은가?

② 심지어 십일조 중에서 자기를 위해 기도해주는 특정한 교역자나, 자기가 벌여놓은 복음 사업을 위해서, 아니면 교회 각종 기관에 월정회비나 교역자들 접대비 등으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은가?

대단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런 종류는 십일조에 대한 개념이 잘못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공금(公金)입니다. 그러므로 소유권이나 사용권도 오로지 하나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의 몸된 기관인 교회에 바쳐야 하고, 교회는 공적으로 선용해야 합니다.

이런 종류의 경우 대부분은 공명심이나 이기심, 기복적인 마음에서 십일조를 자기 중심으로 사용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사욕을 좇는 스승을 두고 따르는 위험에 빠집니다.

울트(E. C. Wolt)는 "나는 온전한 십일조 헌금을 교회를 통해서 주님께 드림으로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고, 타이완에서 성경을 가르치게 되고, 스위스랜드에 있는 병원의 환자를 돌보고, 동시에 하이티 섬과 인도네시아의 방언으로 신약성경을 번역하며, 베트남과 한국의 고아들을 사랑으로 돌볼 수 있음을 기뻐한 다."라고 말했습니다.

6. 십일조는 목사의 생활비로, 다른 연보는 일반경상비로 사용함이 옳은가?

전혀 불합당한 말입니다. 신약의 목사는 구약의 레위인이나 제사장일 수가 없습니다. 목사들이 교인의 십일조를 개인화 함은 일종의 탐심입니다.

7. 십일조를 드릴 여유가 전혀 없는 경우에는 어떻게 함이 옳을까?

질문 자체가 온당치 못합니다. 성경은 의인의 자식은 걸식하는 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십일조에 대해서 내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어떤 차별대우나 혜택을 받으려고 하는 그 자체가 벌써 영적인 가난이 아닌가? 십일조 생활은 내가 살아가는데 물질이 소용되는 것만큼 언제든지 따르기 마련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자기 생활비 전부를 주께 드렸다고 하지 않았는가?

8. 빚더미 속에 앉아 있을 때에도 십일조를 드림이 마땅한가?

마땅히 드려야 합니다. 모든 크리스천들은 이 세상 사람들과 꼭 같이 여러 경우에 부채를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빚더미 속에 앉아 있을 때에는 그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십일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9. 용돈을 부모에게서 받아쓰는 어린이들도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가?

아직까지 재정적으로 생산성이 없는 어린아이들은 사실상 적은 액수를 부모로부터 받고 있습니다. 또 그것은 이미 부모가 십일조를 드린 후에 주어지는 십 분의 구 중에 일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소유권이나 인간의 청지기 의식, 그리고 축복의 비결을 가르치는 신앙 교육적 차원에서 어린이들에게도 십일조 생활을 교육해 야 합니다.

10. 퇴직금이나 유산을 받았을 때 도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가?

당연히 드려야 합니다. 종신토록 받을 퇴직금은 종신토록 주의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유산은 유언에 따를 것이나, 특별한 유언이 없을 때에는 그 유산을 받아 자기 소유가 되는 재산 중에서 십일조를 구별시킴은 당연한 일이 될 것입니다.

사무엘 영(S. Young)은 말하기를 "우리가 드리는 모든 헌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에 대한 보은 중심이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리(J. Wesly)는 "사람에게 있어서 마지막으로 개종작업이 일어나야 할 부분은 돈지갑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마틴 루터(M. Luther)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로 변화체험을 해야만 한다. 먼저는 심령이요, 그 다음은 돈지갑이다. 신자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음으로 인하여 받는 영적 고통과 괴로움은 당연하다. 이것은 믿음 있는 신자의 건강한 괴로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십일조는 결코 우리가 받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받은 구원에 대한 지극한 보은행위 중에 하나입니다.

누군가 십일조 생활에 대하여 말하기를, "첫째, 십일조를 드림으로 자기 신앙이 더욱 확고해짐을 보고 놀랐고 둘째, 자신의 물질적 생활이 넉넉해짐을 보고 놀랐고 셋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어찌 내가 이런 돈을 낼 수 있는가 하는 사실에 놀랐고 넷째, 믿음의 담력이 더하여짐 에 놀랐고 다섯째, 나머지 십의 구(10/9)도 지혜롭고 규모 있게 사용 할 수 있게 됨에 놀랐고 여섯째, 이 축복을 알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고 살았던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놀랐다."라고 하였습니다.

확실히 십일조는 하나님 자신의 명령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축복을 위한 명령입니다. 그래서 록펠러는 두 가지 가훈(家訓)을 정했다고 합니다. 첫째로 나는 자녀들에게 십일조를 가르치겠다는 것과, 둘째로 부자가 되어도 돈을 절대로 낭비하지 말라고 가르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상 하나님을 향한 십일조 행위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경외의 고백이요 표식입니다. 미국의 죤 필립스란 사람이 200년 동안 하나님을 잘 섬긴 가정과 그렇지 못한 가정을 골라 통계를 낸 기록이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한 예를 보았습니다.

교회를 망치고, 주의 종을 쫓아내고, 자기마저도 교회를 떠나버렸던 일본계 미국인인 마스시꼬 가문을 조사하니 그 가정에서 거지가 306명, 강도가 63명, 살인자가 7명, 매음자가 26명, 바보가 203명, 하급관리가 73명, 그 외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나단 에드워드 목사의 가문을 조사했더니 대학교 총장이 13명, 교수가 108명, 목사가 203명, 부통령이 1명, 전권대사가 1명, 국회의원이 21명, 기자가 81명이나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실로 상상을 불허하는 대조가 아닙니까?

※ 오늘 주어진 잠언 3장 9-10절에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한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출애굽기 20장 6절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30배, 60배, 100배로 확대 되어 가는 축복의 약속이 아닌가? 십일조 행위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30배, 60배, 100배의 재물을 얻을 첩경이요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신 8:18신 8:18).

그리스도인의 재테크 (본문 : 역대상 29:10-17)

이철신 목사(영락교회)

어릴 때, 일년 중에 가장 거금이 생기는 때가 설날 때입니다. 설날에 어른들께 세배하고 세뱃돈을 받지요. 그럼 그 거금을 어떻게 관리합니까? 아주 어릴 때는 그것을 엄마에게 맡깁니다. 그러나 조금 크면 엄마한테 맡기는 것이 다 없어진다는 것을 알고는 그 때부터는 엄마한테 맡기지 않고 돼지저금통에 넣어놓았다가 자기 필요한 일이 있을 때 꺼내 사용합니다. 유치원 선생님한테 얘기를 들으니까 설날 지난 다음에 아이들하고 대화를 나누는데, 한 아이가 세뱃돈으로 수십만원을 받았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가 그 큰돈을 어디에 썼는가 궁금해서 그 돈을 어디에 썼느냐고 물었더니 주식투자 하는데 썼다고 합니다. 요즘엔 아이들도 재테크를 합니다.

여러분, 재테크가 뭡니까? 기업에서 재무관리를 하는 지식과 기술을 통틀어서 재테크라고 합니다. 개인의 살림에 있어서도 재테크라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금을 굴려서 재산을 증식시키는 것이 바로 재테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재테크는 무엇일까요? 우리 그리스도인의 재테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 줄 알고 감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재테크입니다.

가. 주인이신 하나님(10-12)

1. 다윗이 하나님께 송축(10)

다윗 왕이 이제 늙어 자기 인생을 정리하고, 왕으로써의 일들을 정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떠나게 된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습니다만 자기 삶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가 정리해 봤을 때에, 자기 당대에 하지 못했던 성전 건축을 준비하는 것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준비하고 정리할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 너무 피를 많이 흘려서 안된다고 하셨기 때문에 다윗은 성전건축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들 솔로몬에게 그 과업이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성전 건축의 기회를 갖지 못했지만, 아들 대에는 꼭 성전을 건축해야 한다는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성전건축을 위해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먼저 자기 자신의 재물을 성전 짓는 일을 위해 모두 헌신했습니다. 왕이 이렇게 솔선수범하니까, 다른 귀족들이 따라서 자신의 재물을 성전건축에 헌신했습니다. 또 왕과 귀족들이 앞장서니까 그 뒤를 따라 모든 백성들도 기쁜 마음으로 성전건축에 헌신했습니다. 이렇게 모든 백성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헌신하여 많은 재물이 쌓이게 되니까, 다윗이 기쁜 마음으로 헌신하는 마음을 하나님 앞에 찬양하고 노래한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2. 주인이신 하나님(11)

1) 그는 하나님 앞에 노래할 때에 제일 먼저 하나님께서 창조자이심을 노래했습니다. 하나 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우주 만물 안에 있는 모든 위대한 것과 아름다운 것과 영 광스러운 것들을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2) 하나님은 그 모든 것들을 창조하시고 그 모든 것들을 주인이 되셨습니다. 온 우주 만물 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속하였고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들의 주인이 되셨다는 말씀입 니다.

3) 그리고 하나님은 통치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의 우두머리이시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모든 것들을 다스리시고 지배하시고, 모든 나라와 모든 정부와 모든 정권을 가 진자들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왕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주 인이시다. 천지와 나라의 주인이시라고 하나님 앞에 노래를 불렀습니다.

3. 하나님께서 주심(12)

그리고는 12절 말씀에, 하나님이 주인이셔서 그것을 쥐고 계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주셨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독자적인 선택과 판단과 결정에 따라 사람에게 부나 귀나 권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서 사람들에게 왕을 세우기도 하시고, 나를 부하게도 하시고 권력을 강하게도 하셨습니다. 다윗 자신의 경험을 보아도 분명합니다. 다윗은 한낱 목동에 불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기름을 부으셔서 왕이 되게 하셨고,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셔서 넓은 국토와 부강한 나라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다윗의 노력과 공로가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다윗의 왕위나 부강한 나라나, 어느 것도 다윗의 것은 없습니다. 다윗이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왕이고 부강한 나라를 가지고 그것을 다스리고 통치했지만, 다윗 자신이 주인이고 다윗 자신이 왕이고, 다윗 자신이 다스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인이시고, 하나님께서 자기 같은 사람을 택해서 왕이 되게 하고 다스리게 하고 부강한 나라를 가지게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우리 신교의 영성에 대해서 좋은 책을 많이 쓰신 미국 Azusa Pacific University의 Richard J. Fester교수님의 책 중에 ?Money, Sex and Power(돈, 섹스, 권력)?이란 책이 있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탐욕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잘 조절하고 극복할 것이냐에 대해서 쓴 책인데 아주 통찰력이 있는 글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소유권에 대한 회심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인 노릇 하는데서 하나님이 주인인 것으로 돌아서는 것이 회심입니다. 즉,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쓰여져야 된다는 사실을 그는 소유권에 대한 회심이라고 말합니다. 이 소유권에 대한 회심을 ‘내적인 단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하나님 앞에 바칠 때에 아들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소유권, 즉 내적인 단념을 한 것입니다. 내적인 단념을 하게 될 때에, 소유에 매여서 소유의 종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를 우리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p.44)

다윗은 이렇게 소유권의 회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든 권력과 재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고, 자신의 왕위와 재물은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고백하므로, 권력과 재물에 매이지 않고 자유할 수 있었습니다.

나. 하나님께 감사(13,15)

1. 1) 다윗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볼 때, 이 모든 것들을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셨다고 받아들이게 되니까 주신 하나님께 대해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3절 말씀에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한낮 목동이었습니다. 왕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집안에서도 많은 자녀들 가운데 인정받는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시고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사울 왕에게 쫓겨다니는 엄청난 고난 동안에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잘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왕이 된 이후에도 자신의 교만으로 인해 죄를 지을 때도 있었고 아들의 반역으로 쫒겨 다니는 때도 있었습니다. 엄청난 인생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고 붙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한 왕이 되었고,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렸습니다. 이제 돌이켜 보니까, 자신의 소유는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요, 자신이 누리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물론 다윗도 땀을 흘리며 수고했고, 피를 흘리며 전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현재 그가 소유하고 누리는 것들은, 자신의 노력의 결과이기보다는 자신의 노력 속에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역사 하셔서 그 모든 것들을 통해서 자신을 세우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 속에 나가서 열심히 땀을 흘리며 수고합니다. 그런데 땀 흘리고 수고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일하는 현장에 임재 하시고 간섭하십니다. 우리가 땀 흘리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유를 얻게 되고 물질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될 때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2) 15절 말씀에는 다윗 자신이 나그네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금왕위를 차지하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지만 얼마 있지 않아서 자신은 죽을 것이며, 지금의 부귀영화는 잠시동안 누리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 솔로몬이 왕위를 이을 것이지만 그러나 이 모든 것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지할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되니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2. 또한 자기 민족이 강한 나라를 형성한 것을 돌이켜 볼 때,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 민족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비참한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셔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셨다. 그들은 주변의 부족국가의 침략을 받아 늘 어려움을 겪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을 세우셔서 그 나라를 강한 나라로 만들고 주위 나라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나라로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교회 성도님들과 만나서 대화를 해 보면, 감사가 넘치는 경우를 봅니다. 특별히, 이북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남에 와서 이만큼 풍요를 누리고 삶을 살게 된 데에 대해서 감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6.25 때 죽을 고비를 너무 많이 넘기고, 또 마치 거지같은 삶을 이어갔지만, 오늘날 이렇게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된 것을 감사하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과 비교하면, 감사할 일이 없고 늘 불평할 일밖에 없습니다. 우리 회사 동료 아무개는 별로 능력도 없는 것 같은데 진급을 잘한다고 생각하면, 감사가 나올 수 없습니다. 옆집 아이는 수능 점수가 잘 나왔는데, 우리 아이는 왜 못 나왔나 생각하면 감사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옆집은 큰집을 샀고 큰 차를 샀다는 식으로 비교를 하기 시작하면 불평 밖에 나올 게 없고 감사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바라보면 감사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바라보면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설교 끝난 다음에 우리가 489장 찬송을 할 텐데요, 489장을 보면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지금까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을 세어 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복을 주셨는지,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복을 주셨는지 알게 되고 감사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세어보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 하나님께 헌신(14-17)

1. 즐거운 마음으로 드림(14a)

다윗이 그렇게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니까 그 다음에는 저절로 하나님 앞에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14절 말씀을 보시면,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라고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각하고, 감사한 마음이 솟아나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위하여 재물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29장 말씀에 ‘즐거운 마음?으로 드렸다는 말씀이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 ‘즐거운 마음?으로 드렸다는 것은 자원해서, 자발적으로, 아낌없이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윗과 그 모든 백성들이 감사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드린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체면 때문에 할 수 없이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 받기 위해서 드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심방 다닐 때, 어쩌다 심방 받는 댁에서 헌금 봉투를 내놓으며 기도 좀 잘해달라고 하는 때가 있습니다. 꼭 복채 받고 기도해 주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물론 기도는 잘 해주지만 헌금은 주일날 교회에 가서 하나님 앞에 드리라고 말합니다. 복 받기 위해서 드리는 것은 진정한 감사, 진정한 헌신이 아닙니다. 감사함으로 드릴 때에 진정한 헌신이 되는 것입니다..

2. 드릴 힘이 있음 (14b)

다윗은 또한 자기들에게 드릴 힘이 있다는 것을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드릴 힘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물질이 있어서 물질을 드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저는 성가대에서 찬양할 때에 솔리스트가 나와서 솔로를 하면 얼마나 부러운 마음이 드는지, 나도 저거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그러나 저 한테는 안 시켜줍니다. 왜냐하면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기 재능을 드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3. 주께 받은 것으로 주께 드림 (14c)

1) 다윗은 또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 중에서, 작은 일부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립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지만, 그 중에 일부만을 그러나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도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열매를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모든 소유를 대표해서 처음 열매를 거룩하게 하나님 앞에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직장인 사역을 하시는 방선기 목사는 [크리스천@직장] 이란 책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모든 지출에 우선되어야 한다(p.132)?고 권면합니다. 다 쓰고 나머지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먼저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의 기준은 십일조입니다. 수입을 대표하여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모든 것을 드리는 헌신을 의미합니다. 어떤 분은 십일조를 분배합니다. 주일헌금, 선교헌금, 구제헌금, 선교회 회비 등으로 분산시킵니다. 그 분은 제대로 십일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따로 구분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십일조를 자기 마음대로 사용합니다. 일부는 본 교회에, 일부는 개척교회나 선교현장에 보냅니다. 헌금이라는 것은 교회가 사용하는 것이지 개인이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사용하게 되면 자기 이름을 내게 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이 영광을 받게 되고, 그것은 덕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2) 로널드 사이더 라는 분이 십일조의 누진제를 제안하는 것을 봤습니다. 십일조 누진제라는 것은 십일조를 기준으로 해서 수입이 많아짐에 따라 헌금의 비율도 많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100만원의 십일조는 10만원인데, 가령 500만원의 수입을 가진 분은 100만원, 즉 10의 2조를 드린다든지 누진해서 비율을 높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성도님들 가운데는 십일조 정도가 아니고, 십이조 정도가 아니고 자기 물질 전체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분들도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우리교회의 자랑스러운 점이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 자랑스러운 한 가지는 우리 교회가 사용하는 시설들의 대부분이 우리 교인들이 기증한 것입니다. 기도원, 묘지, 남한산성에 있는 여자신학교, 설악산수양관 등이 모두 교회에서 산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기증한 것입니다. 금년에도 연세 많으신 분이 자신의 전 재산인 땅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에 여러 가지 시설들이 많은데, 그 많은 시설들 가운데 상당부분을 우리 영락교회 교인들이 기증했습니다. 군대교회나 시골교회 등을 지어서 기증했습니다. 그렇게 헌신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헌신합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누린 것이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재테크를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것,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을 하나 하나 세어 보시고, 그 모든 것들을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하나님께 기쁜 뜻으로 그 주신 물질을 사용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대로 행하였더라 (본문 : 출애굽기 7:1-7)

윤대영 목사(부천제일교회)

'한 사람이 성숙 하냐? 성숙하지 않느냐? 하는 것을 판단하는 데는 그가 당연히 해야할 바를 즐겁게 하면 그는 성숙하다. 그러나 당연히 해야할 바를 하지 않는 사람은 미성숙하다.'라고 임마누엘 칸트가 말한 바가 있습니다. 아이들을 키워보면 당연히 공부를 해야하는데 공부를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부모님이 여러 말로 권면하지만 그렇게 공부하기를 싫어합니다. 아직 미숙하기 때문입니다. 올해 수능시험에 환갑이 넘은 할머니가 응시를 했습니다. 그 분은 말합니다. '내가 젊은 날에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이 너무 후회스러워 여건이 좋지 않아 못했지만 지금이라도 하고 싶어 응시를 했다. 인생은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 그 할머니는 성숙한 분이십니다. 중년이 되면 꼭 운동을 해야 합니다. 운동하지 아니하면 건강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운동하지 아니하면 결국 노년에 가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조금만 더 힘을 내면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서는 걸어야 합니다. 뛰면 더 좋고요. 하여간에 온 몸을 자꾸만 움직여야 중년 이후의 건강, 노년 때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눕기를 좋아하고 쉬기를 좋아하고 편하기를 좋아합니다. 연세가 들었지만 아직 그 정신 연령은 어린것입니다. 운동하는 어른은 성숙한 어른이에요. 그래야 자녀들에게 폐해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또 미숙한 사람은 도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돕지 않아요. 남에게 사랑할 수 있는데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미숙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편적 이해는 받는 것이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주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입니다. 주는 것 중에 가장 고귀한 것이 영혼을 살리는 복음을 주는 것이 가장 고귀합니다. 물론 교회학교에서 어린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성바탕을 진리로 세워 가는 것, 이것 보다 더 고귀한 일은 없습니다. 이것은 마땅히 어른 된 자, 믿음의 선조 된 자가 후배를 양육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런 일을 꼭 해야 되는데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미숙한 신앙 정도일 것입니다. 또 미숙한 사람은 할 수 없는 일, 자기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그것을 위해서 시간과 정력을 소비하는 사람이 미숙한 사람입니다. 제가 잘 아는 목사님의 자녀는 명문대학 S대학의 법과를 10년 동안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실패했습니다. 홧김에 군대에 가버리고 서른이 넘어서는 아예 대학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스스로 자학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복권 사지 마세요. 수백만 사람 중에 한 사람이 행운을 잡았다고 해서 많이 사면 될 것이라는 확률을 기대하는 사람은 하지 못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요행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시중에 탤런트 H양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어떻게 마약을,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합니다. 결국은 아직 그 정신이 미숙해서 그렇습니다. 보기에는 다 큰 것 같고, 보기에는 아름다워 보이고, 맡은 배역이 성숙한 여인상을 해냈기 때문에 사람들은 '괜찮은 사람인가?'하는 생각을 했지만 실제 내용은 아주 유치하기 짝이 없는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모세가 등장합니다. 여러분, 모세의 일생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모세는 행복하게 살았다고 생각되십니까? 아니면 불행하게 살았다고 생각되십니까? 모세의 일생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했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실패 인생으로 평가하시겠습니까? 모세는 120년을 살았습니다. 전반기 40년은 바로의 왕궁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호화롭게 자랐습니다. 중반기 40년은 미디안 광야에 가서 양들을 치는 목동으로 살았습니다. 후반기 40년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태어나자마자 사형선고를 받고 태어났습니다. 당시 바로 왕은 '히브리 여자가 아들을 낳거든 무조건 죽여라.'는 사형선고를 하였고 이 당시에 모세가 태어났으므로 그는 사형 선고를 받고 태어났습니다. 그 어머니와 누이의 기지로 나일강에 갈 상자에 실어 띄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바로의 공주를 만나게 하고, 바로의 공주의 양자로 자라게 되었던 것입니다. 정말 행운으로 인생을 출발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은 처절합니다. 40년 간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바로 목전에 가나안 땅을 바라봅니다. 손이 닿을 듯 합니다. 그러나 느보산 위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만 해라.' 요즘 말로 하면 명퇴를 당한 것입니다. 여러분, 40년간 광야생활에서 고생을 했으면 마지막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서 즐겨야지요. 이것은 야구에서 9회말 투수를 바꾸는 것과 같습니다. 모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결과로 보면 불행한 인생처럼 보이고, 실패한 인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4절에서 26절 말씀,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했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 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은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결국 성경은 모세가 보람찬 인생을, 성공적 인생을 살았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가 마땅히 할 일을 하는 인생 여정으로 마감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 성공적 인생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복된 인생이 되기까지 처음부터 모세는 그러한 인생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6절 말씀,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시는 대로 곧 그대로 행하였더라'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리라.'는 이 말씀이 모세에게 이루어지기까지 많은 험로와 여러 가지 어려운 과정을 통하여 이러한 성숙에로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왜 처음부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자기가 하는 것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일을 내가 하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세는 그 어려운 여러 여정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7장 1절에서 5절 말씀에 보면, 모든 주어가 '내가'로 계속 반복되는데 여기 '내가'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하는 말씀입니다. 1절 말씀 보면,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 즉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 2절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내가 너를 사용하여 내 뜻을 이루어 간다.' 3절 '내가 이적을 많이 행하리라. 내가 바로의 강퍅한 마음을 완전히 뛰어 넘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가는 것은 내가 기적적 사건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4절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더하여' 했습니다. 이 역시 '내 군대 이스라엘 백성을 내가 이끌어 나올 것이다.' 5절 '내가 애굽을 내 손위에 펴서'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느냐? 당연히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주의 일을 해야 되는데 왜 안 하려고 하느냐? 내가 하려고 하니까 부담이 돼서 안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반복, 반복 모세에게 하신 뜻이 있습니다. 모세를 성숙시키기 위해서 모세의 의식을 바꾸기 위해서 사역의 주최를 '나'라는 것을 확고히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말씀을 모세에게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처음에는 모세는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왜? 자기 힘으로 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장 1절에서 15절 말씀에 보면 이러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자기 동족들이 애굽 사람에게 노역하고 즉 노예 생활 간역자에게 강제 노동을 당하고 있을 때, 그 현장에 나갔을 때에 그 간역자가 자기 동족을 아주 괴롭히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자기 이름으로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힘으로 그 간역자를 쳐죽여 버립니다. 그의 마음속에 불일 듯 울분이 차 올라왔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왜 이방 이집트 사람이 고통을 주느냐? 내가 해방하리라. 그는 자기가 배운 군사적 힘, 과학적인 지식, 그리고 자기가 여태까지 쌓아온 완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일로 미디안 광야로 도피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 말씀에 보면, 예수님과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그리고 또한 사랑하는 제자 셋이 함께 변화산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나머지 제자들은 산아래 있습니다. 이때, 한 아버지가 자기 아들이 귀신들려서 간질 증세를 드러내는 아이를 데리고 와서 그 제자들에게 낫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성경에는 자세히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미루어 짐작해 볼 때에 이 제자들이 이 아이를 주님 없는 때에 낫게 해서 아마 별의 별 방법을 동원했을 것입니다. 머리채를 잡고 안수를 했을 것이고 아니면 쓸어안고 기도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예수님께서 하시던 여러 가지를 답습해서 아마 그 아이에게 적용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는 더욱 간질 증세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세 제자와 함께 하산하셨습니다. 그때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을 보자 반가워서 예수님께 뛰어갔습니다. '예수님, 이 아이를 낫게 해주십시오.' 곧이어 예수님이 그 아이를 낫게 해주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그때 혼이 난 실패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 오랜만이지요. 아무리 별 방법을 다 동원해도 실패했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주님은 할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7장 20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만일 믿음이 겨자씨만큼 있다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느니라' 여기서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 나는 하나님께 쓰임 받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면 사역의 주최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 하신다'고 ale는 믿음을 의지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많은 주의 종들을 보면 처음에는 사역을 시작할 때 아주 힘있고 즐거운 마음으로 사역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시무룩해지고 탈진 상태로 들어가는 분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처음 임직을 받고 안수 받을 때는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일을 자기 혼자 다 할 것처럼 아주 포효하는 사자처럼 얼굴을 아주 결단이 차게 만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년, 2년, 3년이 지나면 풍선에 바람 빠지듯 쭈글쭈글 해지는 모습을 봅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가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해보겠다.' 작심 삼일이지요. 시작할 때, 누가 뭐 잘 안 하겠다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 하려고 하지요. 결국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성경에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 받고 끝까지 충성한 사람들 보면, 모두 '사역의 주최는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일한 사람들입니다. 사사기에 보면 사사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사는 모두 자격이 미달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봐도 '저 사람들이 무슨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인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모두 부름 받아서 능력 없고부족함에 하나님 앞에 철저히 의지했으며 이들이 성공적 사역을 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중에 삼손 같은 사람은 너무나 장대하고 힘이 있어서 오히려 넘어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사사 중에 여성 드보라도 있습니다. 드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이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전폭적으로 의존하고 하나님이 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늘 내주었기 때문에 성공적 사역자가 되었던 것을 사사기 4장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모세는 왜 이 자리에 쉽게 오지 못했던가? 그것은 부정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여호와의 산 호렙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그에게 나타나서 모세에게 말합니다. 10절에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이 때, 모세가 대답합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부정적인 의식으로 꽉 차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저 파라오의 왕궁에서 쫓겨난 사람이요, 나는 지명 수배되어 지금 숨어 다니는 사람이에요. 나는 40년간 저 양들을 기르는 양치기로 전락한 존재요, 이제는 내 나이도 80이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가 부정적인 생각을 하자 그에게 할 수 있는 부분은 하나도 생각되지 않고, 장점은 전혀 발견되지 않고 할 수 없는 요소만 보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부정적 의식을 긍정적 의식으로 바꾸기 위해서 많은 표적을 보여주셨는데 세 가지를 압축해 드리면, 출애굽기 4장에 '네가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것을 던져라.' 던졌더니 뱀이 됐습니다. '뱀을 잡아라.' 뱀을 손으로 다시 잡았더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또 '너의 손을 품속에 넣어라.' 품속에 넣었다가 내보았더니 하얗게 자기 손이 문둥병으로 만연했습니다. '다시 품속에 넣어라.' 다시 보았더니 건강한 손이 되었습니다. '하수를 길러다가 육지에 부어라.' 부었더니 피가 확 쏟아졌어요. 이토록 하나님께서 그에게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정적 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는 혀가 둔합니다. 나는 입이 뻣뻣합니다. 나는 말을 잘 할 수 없습니다.'하는 것입니다. 왜? 왜 의식이 성숙치 못하는가? 사역을 하되 자기 홀로 사역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더불어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자기 홀로 사역을 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4장 14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노를 발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화를 내셨습니다. '모세야 네가 부정적 의식을 가졌더니 이제는 또 하나님의 일을 홀로 하려고 하느냐? 하나님 일은 더불어 하는 것이다. 네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탈진하는 사람들을 보면 교회 일을 자기 혼자 다 하려고 해요. 부서를 맡으면 그 부서원들하고 함께 협력하고 대화하고 일을 나누어서 이렇게 하면 되는데 '나 혼자, 다른 사람 아무도 하지 마.' 그러다 혼자 시험 들어 혼자 넘어져요. 다른 사람도 못하게 하고 자기도 탈진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사역을 시작하실 때 제자들을 둘 씩 짝지어 보내셨어요. 뿐만 아니라 열왕기상 19장 10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한 엘리야가 탈진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굴속에 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흐리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나 혼자, 의인입니다. 의인은 나 하나 남았습니다. 이제 선지자는 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 나 혼자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두어 가십시오.' 이 때, 하나님께서 열왕기상 19장 18절 말씀을 통해서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 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엘리야야, 너는 어찌하여 너 혼자라고 생각하느냐? 너 혼자 주의 일 하려고 하느냐? 내가 준비한 칠 천명의 훌륭한 선지자, 종들이 있느니라. 왜 더불어 할 생각을 하지 아니하느냐?' 여러분, 주님의 일은 더불어 하는 것입니다. 옛말에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함께 더불어 일을 하자.' 협력할 줄 아는 사람, 이렇게 주의 일을 해야 성공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종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최종적으로 모세를 주의 종되게 하셨습니다. 1절 말씀에 '내가 너로 바로 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에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자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은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것을 생명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 생명 구원에 관한 말씀은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바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명 구원이라고 합니다. 된 다음에 왜 되게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 되게 했습니다. 권세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일을 권세라고 말하는데 즉, 성화적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는 일로 신앙의 완성으로 생각하는 것은 값싼 은총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내가 그 마음속에 시인하고 입술로 고백해서 하나님 자녀 되었다. 이것으로 신앙의 완성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값싼 은총을 받은 거예요.' 내가 주일이면 교회에 나와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조용히 나의 가정과 사회로 돌아가서 사회와 가정 속에서 하나님 자녀답지 않게 세상 사람이 볼 때는 자기들과 똑같은 사람처럼 조용히 부담 없이 살아가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올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 자녀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 일 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 하시는 일을 우리로 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 구원만 받아 가지고는 이것을 온전히 구원이 아닙니다. 성화적 거룩해지는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부유함까지 장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일을 내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소위 being과 doing의 문제, 즉 '나의 됨과 나의 함, 어느 것이 먼저냐' 하는 문제로 논란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나를 나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 받아 하나님의 자녀 되었던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누린 것인데 그 특권을 누린 것은 거룩해지는 것이고 거룩해 지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사를 주십니다. 은사는 시간도 은사입니다. 공간도 은사입니다. 내 생명도 은사입니다. 내 건강도 은사입니다. 내 아내도 은사입니다. 내 자녀도 은사입니다. 나에게 주시는 경제력도 은사입니다. 나에게 주시는 모든 환경은 다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우리에게 맡겨준 은사들입니다. 여러분, 이 은사를 나를 위하여 쓰겠습니까? 나를 위하여 이 은사를 쓴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것을 우상에게 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내 자아가 우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바로 알고, 이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때에 하나님의 은사를 은사로 서명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까지 여러 사람과 더불어 주님을 섬기면서 경험한 경험 중에 틀림없는 하나의 사실이 있습니다. '돈벌면 교회에 헌금하겠습니다.'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돈 버는 것을 보지 못했고 벌어서도 헌금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하겠습니다.'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물부터 부어주시지 '하나님, 제가 퇴직하면 교회일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분이 퇴직하고 3일만에 돌아가셨어요. 직장 나가면 바쁘니까 직장 끝나면 주의 일 하겠다구요. 주님께서 그런 사람은 안 썼어요. 하나님이 이 모든 만물을 은사로 주시는 뜻은 하나님의 일 하도록 주신 것이고, 하나님의 일 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이 주 뜻대로 할 때에 더 많은 은사를 그에게 허락해 주는 줄로 믿습니다. 많은 은사 받는 방법, 많은 은사 받는 비결, 하나님의 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면 하나님께서 건강주시고 하나님이 일하시면 그 일할 수 있도록 물질주시고 하나님의 일하시면 그에게 성령도 충만히 줘서 마음껏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아론에게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오늘 교회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성가대하라. 하나님께 찬양할 사람은 찬양하라고 하나님이 지금 부르시고 계십니다. 교회학교 교사가 부족해서 하나님께서 교사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재가 복지에 있는 고독한 노인을 사랑하라고 여러분을 복지 선교하라고 부르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교회 오는 주의 성도를 서로 사랑하고 돕기 위해서 저 주차장에서 주차 정리하도록 여러분을 부르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세상에 보내는 것은 하나님 일하도록 파송 하는 파송적 의미에서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은사를 여러분에게 맡기십니다. 일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사의 창고에 키를 맡겨 주실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한번도 부정함이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쏟으시고, 광야에서 메추라기를 쏟으시고, 광야에서 반석에서 샘물 나도록 하시고, 구리 뱀을 쳐들어서 불 뱀에 물린 자들이 믿고 쳐다볼 때 낫는 역사를 주셨습니다. 모세처럼 그대로 행하는 자가 될 때에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역사 하셔서 그 일을 이루도록 협력하시고 주관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하라 (본문 : 민수기 15:32-41)

김조 목사(삼락교회)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롬3:10)고 하셨으니 더욱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완전을 향하여 날마다 우리는 자신을 새롭게 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모양과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지음 받은 대로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할지어다?(벧전1:16벧전1:16)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함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재주나 힘이나 기술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기에 우리는 그렇게 되도록 힘써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고의적으로 안식일을 범한 자를 돌로 쳐서 죽이는 32-36절 말씀과 거룩한 자가 되도록 옷단에 술을 매어 달라는 것입니다. 옷 끝에 술을 매어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행하며 하나님 앞에 거룩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옷단의 술을 매어다는 뜻을 바로 깨달아 하나님 앞에 거룩한 자가 되시기를 바라며 어떻게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될 것인지를 몇 가지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임을 깊이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41절)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 하여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려고 억압과 고통 속에서 종 되었던 곳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이는 죄와 사망에 매였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그를 믿는 자에게는 깨끗함을 주시고 영 죽었던 우리를 살려주시고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닫고 살아가라고 옷단에 술을 매어 달아서 볼 때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 지심으로 의식법은 폐지되어 옷단에 술을 매어 달지 않는다 해도 그 뜻만은 잊지 말고 나는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신분이 바뀌어서 거룩한 자 되었으니 이제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인식을 하고 살아갈 때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삶이 달라지고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믿는다 해서 하루아침에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 결심이 바르게 서게 되면 날마다 조금씩 이라도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신분이 바뀌었으니 생각도 바뀌어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겠다는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이 있을 때에 능치 못할 일이 없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는 이 땅에 살아도 하늘나라 시민권을 갖고 있음을 기억하시고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지?하고 살아가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룩한 자가 될 줄 믿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준행해야 합니다. (39,40절)

“그 술은 너희로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기 위함이라?고 반복하셨고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니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명 곧 말씀을 기억한다는 것은 이미 성령의 역사입니다. 요14:26요14:26에 보혜사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일이 생겼을 때나,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에, 갑자기 읽었던 성경이나 목사의 설교가 생각이 나서 깨우쳐준다면 이미 성령께서 역사 하셨음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렇게 성령의 역사를 따르는 자, 그가 곧 하나님 앞에 거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하나님이 관리하시니 깨우치시고 위로하시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러기에 일찍이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10가지 계명을 주셨고 네 번째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시며 그 날에는 불도 피우지 말라고(출35:3출35:3) 하셨습니다. 이 계명은 땔감을 구하고 밥을 짓는 노예의 일 까지도 노동을 중지하고 참된 안식을 얻으라고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알고 있음에도 고의로 범하여 나무한 자를 돌로 쳐서 죽게 했습니다.(32-36) 이렇게 엄하게 한 것은 성결한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의식법은 폐지되었으나 의미는 지금도 있습니다. 주일을 범하면 신앙이 죽게 되고 사단의 종노릇을 하게 되니 영적인 죽음입니다. 그 결과를 우리는 체험하고 목격하였으니 우리를 성도, 집사, 권사, 장로, 목사로 세우신 것은 옷단 끝에 술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준행 하라는 직분임을 기억합시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날마다 내 자신을 새롭게 하며 거룩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육체의 정욕을 버려야 합니다.(39절 중)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하셨으니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옷단에 술처럼 흔들거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니 육체의 정욕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버릴 것을 버릴 때에 거룩한 자가 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린다고 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롬8:6롬8:6) 하셨으니 인간의 정욕대로 방종케 하는 마음과 눈의 욕심을 끊고 버리는 절제는 당장은 괴로우나 결국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는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4벧전1:14)는 말씀을 기억합시다.

말씀 마치겠습니다.

개혁이란 날마다 이루어져야 합니다. 잘못된 것, 미흡한 것 계속 깨닫고 고쳐 나아가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없으나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러기에 옷단에 술을 달듯이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인식과 말씀을 기억하고 준행하도록 하며 자꾸만 유혹하는 육체의 정욕을 버려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옷단에 술을 달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 의미는 상실한 채 형식과 의식이 되어 옷 술을 크게 하고 경문을 넓게 하여 자신들의 신분의 우월성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옷단의 술로 자신들의 경건과 성결의 인식표로 삼아야 함에도 자기의 자랑과 교만의 도구로 흘러갔기에 알맹이를 잊어버린 의식적 율법주의로 흘러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이 형식이나 의식이 되지 말고 말씀을 기억하고 준행합시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기억하고 세상에 속한 욕심과 정욕을 버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 거룩한 자가 되어 가는 변화의 역사를 이루는 성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룩한 삶 (본문 : 요한복음 17:14-19)

이철신 목사(영락교회)

가. 세상과 교회(성도) (14,16)

1. 우리 예수님께서 사역을 제자들과 함께 3년 동안 함께 생활하며 제자들을 양육하며 사역해 오다가 이제 사역을 마칠 때가 다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로 돌아가실 때가 왔습니다. 제자들과 헤어질 때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 세상에 두시고 떠나시면서 남아있는 제자들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중보기도한 말씀이 오늘 본문 요한복음 17장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고, 그 자리에서 여러 가지 교훈을 주신 다음에 이제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7장을 “대제사장의 중보기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하는 중에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이 처한 현실이 어떤 현실인가를 먼저 하나님 앞에 고합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제자들이 세상 속에서 미움을 받게 되는 현실을 말씀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고 새생명을 얻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게 된 것입니다. 세상 속에 살고는 있지만 그러나 이 세상 속에 속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이 세상 속에 살고는 있지만 세상의 규율과 법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세상의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세상의 죄악에 물들지 않고 세상을 따라가지 않고, 세상의 기준을 따라가지 않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성도들이고 교회입니다.

교회가 처음 생기는 로마제국 당시의 사회상은 말할 수 없이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이었습니다. 사치한 식사가 성행을 했고, 사치한 목욕이 발달했습니다. 거기에 필연적으로 성도덕이 문란했습니다. 향락문화가 발달되고 퇴폐하고 타락하였습니다. 그 사회에서는 사람과 사람을 싸움 붙여서 그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게임을 했습니다. 사람과 맹수를 싸움 붙여서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가는 것을 보는 게임을 즐겼습니다. 가장 자극적인 쾌락을 찾아서 퇴폐하고 타락한 삶을 살아간 것이 바로 그 당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사회와는 달리 교회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교회 성도들은 검소하고 건전한 삶을 살았습니다. 순결하고 깨끗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의 마음 자세가 고상했고, 삶의 태도가 고결했습니다. 한마디로 줄이면 거룩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2. 그 당시 세상은 타락하고 퇴폐한 세상이었는데, 성도들은 고결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 당시 악한 로마 사람들이 자기들과는 다른 교회와 성도들을 미워했습니다. 자기들과 다른 마음 자세를 가진 성도들을 미워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순결하고 순수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비웃었습니다. ‘그렇게 살아 가지고 험악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나? 저희들만 잘났구만.? 하며 비웃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도들의 고결한 삶을 핍박했습니다. 미워한 나머지 그 미움을 행동으로 옮기게 된 것입니다. 소수지만 비교적 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성도들의 거룩한 삶을 두려워하면서 존경했습니다. 자기들과 수준이 전혀 다른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그 삶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초대교회가 세상과 달랐을 때 그 교회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핍박을 받았는지, 정상적으로 집에서 삶을 살아갈 수 없었고, 정상적으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들에서. 토굴 속에서, 지하동굴에서 예배를 드리며 살아갔습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세계 각국에서 교회와 성도들이 핍박을 받습니다. 단지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하고 노예로 팔려가고 집이 불태워지고, 교회가 불태워지는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북녘 땅에서도 우리 동포들이 핍박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여서 세상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 미움 받고, 업신여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나. 예수님의 기도; 보전(15)

1. 우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남겨두고 떠나시면서 그렇게 세상에서 미움 받고 핍박받는 교회와 성도들을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립니다. 15절 말씀을 보시면,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을 위해서, 또 성도들과 교회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는 그들을 세상 속에서 보전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악한 세상 속에서 저들을 보호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세상 속에서 사랑하는 제자들이 미움과 핍박을 받는다면 저 사람들을 그런 악한 세상에서 좀 데려가 달라고 기도할 것도 같은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자들을 고생하지 않고 데려가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 같지만 실상은 도피적인 태도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하시고자만 하시면 세상에서 제자들을 데려가시는 것은 별일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에녹과 엘리야를 데려가신 것과 같이 불 말과 불 병거를 보내서 제자들을 데려가신다면 기분은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도피적인 태도입니다. 세상이 어렵다고 해서 세상으로부터 도피해 가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부정적인 방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이 험한 세상에서 데려가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 있지만 저들을 보호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의 죄악에 물들지 아니하고, 이 세상 죄악에 지배받지 아니하고 성도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존해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2. 여러분, 우리가 주기도문 외울 때 이렇게 외우지 않습니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가 이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세상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물들지 않고 삶을 살게 해달라고 이렇게 기도 드립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 속에 삶을 살아가지만 성도로서 건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동자로 살피시고 감찰하시고 지켜봐 주시고 붙잡아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보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붙잡아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지배당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불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살펴보시고,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우리를 보호하시고, 보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 예수님의 기도 ; 거룩(17-18)

예수님께서 이렇게 세상 속에서 미움 받고 핍박 받는 이 교회와 성도들을 보전해 달라고 기도하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그치지 아니하고 기도가 더 발전되어 좀더 적극적으로 이 성도들을 거룩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1. 교회(성도)는 거룩해야만 한다.

1) 17절 말씀을 보시면,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을 거룩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과 교회는 거룩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에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깨끗케 하시고,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길 원하신 것입니다. (레 11:45, 20:26레 11:45, 20:26, 벧전 1:16벧전 1:16) 그래서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거룩해야만 합니다.

2) 또 우리 성도들과 교회가 거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을 보시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여러 가지 묘사한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묘사한 것을 볼 때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청보석, 녹보석, 홍보석으로 꾸며진 것과 정금 바다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의 주제는 보석이 주제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가장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는 것은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있는 성도들은, 천국의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거룩으로 찬양을 드립니다.(계 4:8, 20:6계 4:8, 20:6) 그 나라에는 흰옷을 입은 자만이 들어갑니다. 그 나라에는 거짓이 없고 더럽혀 지지 않고 흠 없는 자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계 14:3-5계 14:3-5) 거룩한 곳이며 거룩한 백성들만이 모이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거룩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정결하고 순수해야 하며 세상과는 구별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2. 여러분, 그러면 교회와 성도들이 어떻게 하면 거룩해 질 수 있을까요? 17절 말씀을 보시면, ‘진리?로 거룩해 진다고 말씀하십니다.

1)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으로, 진리로 거룩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13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좌우의 어떤 날선 검보다도 예리해서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고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해서 만물을 하나님의 눈 앞에 온전히 벌거벗은 것처럼 다 드러낸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날카로운 칼과 같이 우리 속에 숨겨져 있는 모든 죄를 백일하에 다 드러냅니다.

여러분, 해부를 하면 겉으로는 알 수 없는 오장육부가 다 드러나게 됩니다. 그 속의 지저분하고 잘못된 것들이 다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수술하게 될 때면 그 속의 더러운 모든 것들을 수술해서 도려내고 잘라내게 됩니다. 그렇게 했을 때에 건강을 되찾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칼과 같아서 사람들 속에 깊이 숨겨져 있는 모든 죄를 다 드러내고 그것을 도려내어 제거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 거울과 같아서 우리에게 있는 죄와 더러운 것들을 속속들이 다 드러냅니다. 거울에 우리 얼굴이 비취면 더러운 것이 다 보이는 것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비추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가 다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깨끗하게 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추를 매단 다림줄과도 같습니다. 벽돌을 쌓아 올라갈 때에 추를 매달아서 수직으로 다림줄을 늘어놔야 벽돌을 쌓을 때에 똑바로 쌓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우리 삶의 기준이 됩니다. 삶을 살아가다가 우리가 삐 뚫어 나가거나 잘못되어 나가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준에 비추어서 보고 잘못 나간 것을 바로잡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우리의 죄를 다 드러내고 그것을 씻어내고,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고 거룩하게 만듭니다.

2) 지금 우리 교회는 회개와 영적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전개하는 중에 있습니다. 여러분 그 동안에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우리도 알지 못하는 동안에 세상에 물들어서 세속화되었습니다. 교회의 거룩성과 순수성, 순결성이 점점 더러워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가 다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속화되고 더러워 진 것들을 회개하고 교회의 거룩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리고 있습니다. 지난 한 주간에는 십계명을 가지고 우리의 죄를 살펴보았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의 계명을 가지고 나 개인의 죄, 가정의 죄, 교회의 죄, 우리 사회의 죄를 한번 비춰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볼 때에 우리의 죄가 얼마나 더러운지 낱낱이 다 드러났습니다. 더럽고, 추하고 지저분한 모든 것들이 다 드러났습니다. 적나라하게 다 드러나서 우리가 너무나 부끄러워하고 마음에 찔림을 가졌습니다. 그 모든 죄를 하나하나 하나님께 고백하고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그 죄를 씻어 주셨습니다. 마치 대청소를 하는 것과 같이 구석구석에 있는 먼지와 더러운 것들을 털어 내고 씻어내는 기간을 우리가 가지는 것입니다.

3주간동안 하는데 이제 2주간이 남았습니다. 이번 주일에는 요한계시록의 소아시아 7교회를 비춰보면서 우리 교회의 모습을 비춰보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이 기도회 주간 중에 철저히 하나님 앞에 회개의 기도를 해야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드러내고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겠습니다. 우리의 죄를 다 씻어내는 기간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의 더러운 것들을 잘라내고 제거하는 기간이 되어야겠습니다. 지저분한, 냄새나는 모든 죄를 다 닦아냄으로 인해서 거룩한 교회를 회복해 나가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이번 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더러운 죄를 다 드러내고 회개하고 씻어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거룩한 교회로 돌아가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과 교회를 위해서 거룩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거룩하게 된 교회를 세상 속으로 보내시기를 기도했습니다.

18절 말씀을 보시면,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의 기도의 구절을 쭉 보십시오. 미워하는 이 세상 속에 제자들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을 데려가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 속에 있으면서 죄에 물들지 않고 거룩하고 깨끗하게 만들어서 세상에 보내겠다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나아가서 세상에 대해서 도전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거룩하고 깨끗한 교회만이 세상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거룩하고 깨끗한 교회만이 세상 속에 나가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최근의 우리 한국교회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한동안 교회가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있을 때 어떤 집사님이 그런 말씀을 합니다. 회사 동료들이 술집에서 술을 마실 때에 제일 많이 화제 거리로 올리는 것이 교회라고 합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여러분,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교회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속에서 여러 가지 범죄 행위가 벌어지고 있을 때에 교회의 직분 맡은 지도자들이 거기에 가담되고 지탄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세상의 범죄행위가 있을 때마다 거기에 목사, 장로라는 이름이 오르내릴 때마다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교회가 세상의 지탄거리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여자분들 몇 분이 허위진단서를 끊어서 보험료를 타는 사기를 벌였는데, TV 아나운서가 그 얘기를 전하는데 중간에 교회 친구들한테 소개해 줘서 그렇게 했다는 얘기를 듣고서는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돈 거래하지 마십시오. 교회는 돈 거래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곳이지 돈 거래 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는 점이 없으니까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깨끗하고 순수, 정결, 거룩해야 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거룩해 질 때에 그 거룩한 교회만이 세상 속에서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교회가, 거룩하지 못한 성도가 세상 속에 나가서 뭐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갖춘 자만이 세상에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두려운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하고 세상으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하고, 세상으로부터 귀하게 여김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자기들이 가지지 못한 거룩함과 순수함과 순결함을 교회와 성도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러워하는 선망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은 신앙생활을 못하지만 여건이 되면 나도 저 사람들과 같이 예수 믿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그 반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가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의 성도들이 순수하고 순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을 전할 수 있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해야만 합니다.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정결하고 깨끗하고 순수하고 순결해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거룩해 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죄를 다 드러내고 회개하고 씻어내야 합니다. 그래야 거룩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철저히 씻어내야 순수하고 순결한 교회로 설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거룩한 교회가 될 때만이 세상 속에 나가서 복음을 증거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거룩한 교회로 돌아갑시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순결하고 깨끗한 교회를 회복합시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우리 영락교회가 거룩하고 순결한 교회가 되어서 세상 속에서 주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성도, 거룩한 교회 (본문 : 사도행전 5:1-11)

이병각 목사(예담교회)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아름답게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을 때에는 제자들이 두려워 숨었지만, 오순절 성령의 충만을 받은 후에는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담대히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많은 이적과 표적이 나타나서 교회는 급성장했습니다. 3천명, 5천명으로 성장했습니다.

외적인 성장만 아닙니다. 성도들은 핍박과 박해로 인해 경제적으로도 궁핍한 생활을 했지만 성도들의 아름다운 사랑으로 어려움을 극복했습니다.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재산을 바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바나바라는 자기 밭을 팔아서 교회에 내놓은 분입니다. 원래 이름은 요셉인데 사도들이 바나바(권위자)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참으로 슬프고 비극적인 이야기가 기록되었습니다. 아나나아 삽비라 부부가 성령을 속인 죄로 죽었습니다. 밭을 팔아 구제 헌금을 드리는데 절반을 숨기도 전부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성경을 일부러 미화하기 위해 쓴 책이라면 이런 이야기는 생략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초대교회의 가장 비극적인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기록합니다. 교훈을 주기 위함입니다. “거룩한 성도, 거룩한 교회가 되라? 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1.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

오늘 비극의 주인공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입니다. 아나니아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뜻이고, 삽비라는 사파이어에서 유래된 “아름답다?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름답지도 못했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도 못했습니다. 도대체 왜 이들은 죽었습니까? 이들의 죄는 어떤 것입니까?

1) 스스로 범한 허영과 명예심의 죄입니다 : 당시 교회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자기 재산을 스스로 헌납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4장 끝에 소개하는 바나바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4:36-37).? 그들은 마땅히 존경과 칭찬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자기 밭을 팔아서 교회에 헌납할 생각을 한 것도 그런 분위기에 힘입은 바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고 자기 명예심이나 허영심으로 했습니다. 혼자 한 것이 아니고 부부가 함께 의논하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자기 소유를 팔아 헌금하는 일은 의무나 강제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으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4절).? 남에게 핑계할 것이 없는 스스로 범한 죄입니다.

2) 성령을 속인 죄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아니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3절).? 밭을 판 값의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일부분을 드리면서 전부를 드리는 것처럼 속인 것입니다. 단순한 거짓말이 아닙니다. 인간 베드로를 속인 것이 아니라 성령을 속였다 합니다.

왜 성령을 속인 것이라고 합니까? 아나니아가 속인 대상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헌금을 받으시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을 속인 것은 성령을 속인 것입니다. 달리 이해하면, 땅을 팔아서 교회에 내고 싶은 마음은 성령이 주신 것인데, 사단의 유혹을 받아서 성령을 거역하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겉으로는 성령으로 행하는 것처럼 하지만, 속으로는 성령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성령의 감동으로 은혜가 충만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성령을 속이는 것입니다. 법을 어긴 것도 죄이고, 양심을 어긴 것이고 죄입니다. 성령을 속인 것은 더욱 죄입니다.

2. 하나님의 엄한 심판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5절).?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즉각적으로 숨이 끊어지고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입니다.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급히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세시간쯤 지나 삽비라가 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왔습니다. 과연 죽은 자의 장례가 세시간만에 진행될 수 있을까? 아내가 모르는데 남편을 장례 지낼 수 있을까? 이런 의구심이 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심판을 받아 죽었기 때문에 일반 장례처럼 거행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가능한 일입니다.

베드로가 다시 삽비라에게 묻습니다.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랴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8절).? 삽비라는 부부가 합의한대로 또 거짓말을 합니다.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 대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8-9절).?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의 발걸음을 의미합니다. 아나니아와 마찬가지로 삽비라도 즉각적인 심판으로 죽었습니다. 우리의 입술의 말 한마디고, 우리의 걸음의 한 걸음도 하나님의 눈 앞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어도 우리의 영혼 속까지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숨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엄한 심판은 참으로 두렵습니다.

심판의 참된 교훈 : “너무 가혹한 심판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무서운 분이라면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보면 우리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보다 더 의롭고 참되기 때문에 잘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밭의 절반이라고 바쳤습니다. 이런 저런 말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두둔하고 변호할 수 있습니다. 이영자씨 지방흡입술에 대해 말이 많습니다. 그 사실을 밝히지 않은 것은 거짓말 한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그 정도는 문제라고 봐 줄 수 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가수나 연예인의 사생활을 담은 음란 비디오에 대해서도 “공인이 그럴 수 있는가? 하고 분개하기도 하는가 하면, 개인 사생활 침해라고 옹호하기도 합니다. 우리 시대의 분위기에서는 도무지 아나니아 사건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성경의 전체 맥락에서 읽어야 합니다. 당시 초대교회는 크게 부흥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다운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구제하는 모습은 세상 사람들에게 정말 하나님의 나라가 이 지상에 임한 것처럼 보여주는 큰 증거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주도하는 분이 누구입니까? 성령입니다. 사도행전은 인간 사도들의 행적이 아니라 성령의 행전입니다. 초대교회의 주인공은 성령입니다. 성령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는 능력의 영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만약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거짓이 그냥 지나쳐진다면 성령은 이제 더 이상 역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허영심과 자랑과 거짓이 독버섯처럼 퍼져간다면 초대교회의 장래는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은 비상적인 역사를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기적을 행하듯, 아나니아 사건을 통해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교회와 세상에 드러낸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아간이 아골 골짜기에서 돌에 맞아 죽습니다. 여리고성의 전리품을 숨긴 죄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은 것입니다. 감추고 거짓말한 것은 아간이나 아나니아나 비슷합니다. 아간의 죄도 단순한 거짓말이 아닙니다. 여리고 전투와 앞으로 있을 가나안 정복 전쟁의 모든 성격을 좌우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실 거룩한 전쟁을 인간의 죄로 얼룩지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고 계심을 천하에 보여주기 위해 아간을 심판한 것입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문둥병자가 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사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돈 몇 푼으로 바꿀 수 없음을 세상에 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십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도 아끼지 않는 사랑이 많은 분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인간의 거짓과 허영으로 범할 수 없는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거룩해야 합니다. 교회도 거룩해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무섭다고 하지만 사실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다만 듣기 싫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인데, 성경에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은 이야기를 하느냐고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아나니아 부부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입니다. 무엇으로 하나님의 거룩을 외면할 수 있습니까?

3. 거룩한 심판이 주는 축복

1)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5절).? 아나니아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삽비라가 죽은 다음에도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11절).? 여기서 두려움은 경외심입니다. 경외심은 신앙의 기본입니다. 경외심이 없는 신앙은 가짜입니다. 신앙이라 할 가치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있다 없다, 하나님이 살았다 죽었다,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시는 분이고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말아라.? 이런 생각은 천박하고 오만한 것입니다. 가뭄이 극심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는 것이 당연합니다. 한 사람의 출생과 죽음을 보고 생명이 주인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는 것이 마땅합니다. 티끌 같은 인생이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경외심을 갖는 것은 축복입니다. 초대교회는 들뜬 축제만 있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마음 속을 깊이 살피는 경외심으로 새로워지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런 경외심을 맛보았습니다.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3-5사6:3-5).?

2) 거룩한 부흥은 더욱 불같이 일어났습니다 : “사도들이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12절).? 사도들은 이 사건을 통해 더욱 성령의 거룩한 능력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성령을 속이고 성령을 훼방하는 쓴 뿌리와 기사가 제거됨으로 더욱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임했습니다. 사도들만 아닙니다. 일반 성도들도 거룩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속임과 위선과 허영이 제거된 그곳에 참다운 일치와 연함이 이루어졌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활력이 없습니까? 우리의 신앙 생활에 변화가 없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영과 함께 하십시오. 거룩한 생활, 거룩한 신앙이 우리의 믿음을 부유하게 합니다. 좋은 음식은 깨끗한 그릇에 담깁니다. 좋은 음식은 손을 깨끗하게 하고 먹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아는 생활이 우리에게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속이 좋지 않으면 우리 몸은 생리적으로 토하여 냅니다. 그래야 속이 편합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결한 것이나 더러운 것이나 거짓된 것이나 성령을 거역하는 것을 토하여 냅시다.

교회가 부흥되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거룩을 순종하는 교회가 부흥합니다. “주께 믿고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14절).?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교회의 숫자적인 부흥을 가져 왔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다 하도록 방임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까? 아닙니다. 인간에게 편한 말로 사탕을 주고 내보내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까? 아닙니다. 현대교회는 적당히 인간적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인간적이라는 말이 세속화된 인간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아닙니다. 거룩한 교회가 부흥합니다. 거룩한 부흥이 참된 부흥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외모만 거룩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속사람이 거룩합시다. 전통과 법에 안주함으로 거룩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할 일을 하면서 거룩합시다. 세상에서 하던대로 하기에 편한, 세상과 유사한 교회를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하든지 세상과 다른 교회를 만듭시다.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가 부흥합니다. 거룩한 성령에 붙들리는 교회가 됩시다. 그리하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한 마음으로 모이고 무슨 일이든지 뜻을 모아서 감당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질적인 부흥과 양적인 부흥이 별개의 것인 줄 알고 있습니다. 양보다는 질이다. 아니다. 질보다는 그래도 양이다. 이와 같은 이 부분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을 통해서 질적인 성장을 하면서 계속적으로 양적인 성장을 지속했습니다. 이것이 참이고 이상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부흥하기를 원합니다. 엘리트가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거룩한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거룩한 공동체가 부러워서 나도 이 공동체에 속하기를 원한다는 소문나는 교회가 되도록 합시다.

거룩한 성도, 거룩한 교회가 되기 위한 지침

1) 돈과 물질을 주의합시다 : 돈 때문에 성령을 거역하는 죄인이 되지 맙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딤전6:10).?

2) 마음을 잘 다스립시다 : “그러므로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 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다른 사람들이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1-5빌2:1-5).?

3) 성령 안에서 기도합니다 :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엡6:18엡6:18절).? 주기도문을 생활화합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9마6:9).?

4) 마음에 계명을 새깁시다 :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희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20:1-2출20:1-2).?

5) 교회와 공동체의 권위와 지도를 존중합시다 :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5:5벧전5:5절).?

6) 기꺼이 회개하는 심령을 가집시다 :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니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51:7-11시51:7-11)

깨끗함을 입자 (본문 : 누가복음 17:11-19)

피종진 목사(남서울중앙교회)

귀한 것을 담기 위해서는 깨끗한 그릇과 견고한 그릇이 준비되어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열 문둥병자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고쳐주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경계지역에 거주하던 열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호소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 부르짖음을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그들을 다 깨끗하게 치유하여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 '깨끗하다'라는 이 말은 '정결하다, 순결하다'라는 의미로 처참한 모습으로 썩은 문둥병자의 살이 다시 돋고, 녹아버린 손가락, 발가락 등이 다시 나며, 피부가 온전해지고, 머리카락, 눈썹 등의 털이 다시 남으로써 정상인의 상태로 돌아온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열 문둥병자에게 깨끗함을 입게 하셨습니다. 오늘 깨끗함을 입는 여러분이 되시고 더욱 더 하나님께서 주신 밝은 새 해에 하나님 앞에 더 귀한 보화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레위기 20:7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22에도 보면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디모데후서 2:21에 보면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하나님께서 귀히 쓰는 그릇으로 삼아 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잠언 21:8에 보면 "죄를 크게 범한 자의 길은 심히 구부러지고, 깨끗한 자의 길은 곧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구부러진 길과 곧은길의 차이는 죄를 크게 범한 것과 깨끗함의 차이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깨끗함을 입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연말이 되면 목욕탕마다 사람들이 더 붐빕니다. 깨끗하게 씻고 좋은 옷을 입고 새 해를 맞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열 번, 서른 번을 목욕한다 할지라도 몸의 깨끗함만 가지고는 그것이 깨끗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마음이 깨끗해져야 됩니다. 영적으로 깨끗함을 입어야 됩니다. 주의 보혈로 씻음을 받고, 모든 더러운 죄에서 사함을 받고, 또 모든 불의한 생각과 사악한 생각들이 선하고 아름다운 생각으로 바꾸어지는 마음의 정결함, 마음의 깨끗함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이 말씀 가운데 우리 모두가 깨끗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보혈로 더욱 깨끗해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더욱 새로워지며 성령으로 더욱 거듭나서 이제 우리는 주님이 주신 이 세계를 무대로 삼아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창조한 60억의 모든 영혼을 위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대로 귀히 쓰임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열 문둥병자를 고쳐주셨을 때 그들을 '고쳐주시니라' 하지 않고, 그들을 '깨끗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저들이 어떻게 해서 깨끗함을 입었는가에 대해서 네 가지 내용으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13절) 이 열 문둥병자는 그들을 긍휼히 여겨달라고 소리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긍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입음으로 깨끗함을 입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수양이나 노력으로, 수단과 방법으로 우리가 깨끗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셔야 됩니다. 여기에서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헬라어에 보면 '깊은 동정심과 깊은 애정을 베풀어준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깊은 동정심과 깊은 애정을 베풀어주심으로 우리의 모든 더러운 것에서 깨끗함을 입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쌍히 여겨달라고 호소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십니다. 우리는 성경의 많은 무리들이 하나님께 긍휼을 호소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소경 바디매오도 불쌍히 여겨달라고 했습니다(막 10:46,47막 10:46,47).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운 곤경 중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구할 때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의 손을 펼쳐주시고, 때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저들의 갈 길을 분명히 똑바로 알게 해주시고 제시해주시며, 모든 대적을 막아주시기도 하고, 긴급조치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서라도 저들을 굶지 않게 이끌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말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 때는 하나님께 몸부림치게 됩니다. 또 때로는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사람을 찾고 의지하다가 멸시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주님의 계명을 지킬 때(느 1:5느 1:5), 회개할 때(잠 28:13잠 28:13), 환난 중에 주님께 도움을 청할 때(느 9:28느 9:28), 이웃을 긍휼히 여길 때(마 5:7마 5:7)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둘째,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14절) 열 문둥병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즉각 순종하여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순종의 모습이 나타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역사해 주십니다. 우리가 때때로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감동을 받고 내가 이렇게 살아야 되겠구나, 저렇게 살아야 되겠구나 하고 결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대로 실천할 때 하나님께서 손길, 발길마다 기사와 이적을 나타내주시고, 제2의 홍해가 갈라지게 하시며, 제2의 아말렉이 거꾸러지게 하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수많은 대적들과 싸워야 됩니다. 질병과도 싸워야 됩니다. 가난과 마귀와 악한 자와 싸우고, 죄악과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됩니다. 모든 강퍅하고 사악한 자들에게 우리는 말과 주먹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내하며 참고 싸워야 됩니다. 참는 자체가 바로 싸우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체가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자체가 싸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역사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축복 받은 이유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지시를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창 22:2,3창 22:2,3) 아브라함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즉시 순종했습니다. 그가 100세에 낳은 아들을 죽여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고 했을 때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기 위해서 아침에 일찍이 출발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순종한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 22:16창 22:16~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을 사는 길이 그렇게 쉬운 세상은 아닙니다. 많은 태산 준령을 넘어야 되고 험한 풍파를 헤쳐나가야 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순종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순종은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할 수 있는 순간이 됩니다. '순종은 제사보다 낫다'(삼상 15:22삼상 15:22)고 했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여러분의 순종의 생활을 통해서 여러분을 가까이 만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부요한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신명기 15:4에 보면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5:32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고 말씀했습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이 임한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성령을 받고, 말씀을 지켜 행할 때, 찬송할 때, 사역을 감당할 때, 사모할 때, 예배할 때도 성령이 임하지만 순종하는 생활을 할 때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하여 역사해주십니다.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할 때는 우리의 생각도 깨끗해지고, 영이 맑아지며, 행동도 거룩한 행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15,16절)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릴 줄 아는 자가 깨끗함을 입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열 사람을 다 고쳐주셨는데, 아홉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도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 예수님께 찾아와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하고 영광을 돌렸습니다.

무엇을 달라고 하는 것보다 평상시 감사의 생활을 잘하면 감사할 일이 넘치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감사할 일이 있게 하십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감사의 길을 열어주고, 감사할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을 조성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감사하는 기도를 많이 드려야 됩니다. 생각도 감사하는 생각을 할 뿐 아니라 기도도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됩니다. 감사하는 말, 감사하는 찬송, 감사하는 생각을 많이 해보세요. 하나님께서 깨끗함을 입게 해주십니다.

사도행전 12:23에 보면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감사하지 않으니까 헤롯이 한순간에 충이 먹어 죽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하게 되면 있던 충도 제거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질병도 치료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도 앞으로 잘되게 해주실 줄 믿고 감사해보세요. 그것으로 인하여 배나 더 좋은 일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삶의 우여곡절 중에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감사하며 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넷째,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19절) 확고한 믿음이 있을 때 깨끗함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늘 말씀을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게 이 말씀을 하셨고(눅 8:48눅 8:48), 여리고 소경 바디매오에게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눅 18:42눅 18:42).

본문에 나오는 열 명의 문둥병자가 주님을 만나 다같이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단 한 사람 사마리아인뿐이었습니다. 똑같이 주의 은혜를 입었지만 아홉 사람은 단지 일시적인 육체의 구원만 받은 반면, 단 한 사람 사마리아인만은 영육이 모두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께 찾아온 한 문둥병자는 아홉 문둥병자보다 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영육이 모두 깨끗함을 입었습니다. 히브리서 11:1의 말씀대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입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즉시 순종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고, 확고한 믿음을 가져 깨끗함을 입게 해주신 주의 은총 아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더욱 더 크게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장 위대한 믿음 (본문 : 마가복음 16:1-6)

피종진 목사(남서울중앙교회)

예수님 당시 주변에는 많은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겠노라고 고백했던 제자들도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적 행하심을 바라고 좇아 다녔던 군중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시기하고 모함하려고 하였던 종교적인 지도자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다녔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 제일 먼저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사람들은 제일 나약하다고 여겨졌던 여인들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 이 세 여인은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일이 지난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유대인들의 무덤은 우리나라와 달리 굴과 같은 곳에 시체를 넣고 무덤 문을 큰 돌로 막아놓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은 무덤으로 가면서 서로 말하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3절) 하고 심히 걱정을 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가장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려면 어떠한 믿음을 가져야 되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염려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염려를 많이 합니다. 괜히 지나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도 염려 때문에 자기 마음이 상하기도 하고, 일이 지연되기도 하며, 다른 사람에게까지 불쾌감을 주기도 하고, 생활이 어두워지기도 합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 주님의 능력으로 염려가 사라지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이 여인들은 가면서 '누가 돌문을 굴려 줄까' 하고 염려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무덤을 찾아가 보니,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이미 돌이 굴려져 있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없는 것을 주님께서 이미 해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염려하는 자에게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 6:27마 6:27)고 말씀하시면서,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마 6:30마 6:30~32)고 말씀했습니다.

염려는 불신앙의 산물이고, 하나님의 본질을 무시하는 행위이며, 마음의 질병입니다. 염려는 약이 없습니다. 염려를 고칠 수 있는 분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사람이 염려하는 이유는 ①삶의 주권이 내 손에 있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권자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②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예비해 두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2마 6:32) ③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마 6:33)

잠언 17:22에 보면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살이 빠진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뼈가 마른다'는 것은 최고의 고통을 표현한 말입니다. 마음이 고통을 당할 때 육체는 따라서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5:7에 보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염려를 없애는 비결은 모든 염려를 다 주님께 기도로 맡기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입니다.

비록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갈 때는 염려하면서 갔지만, 예수님의 빈 무덤을 목격하고, 천사로부터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또 부활의 예수님을 직접 만난 이 여인들은 너무 기뻐서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그 말을 믿지 않고 의심을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요 20:2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요 20:28)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요 20: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심은 병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가다가 물 속에 빠지게 되었던 것은 바람을 보고 그의 마음에 의심이 생겨서 믿음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6에 보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예수님을 의심치 말고 확실히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됩니다.

셋째, 파선되지 않는 믿음입니다.

어떤 분은 끝까지 믿음을 지킴으로 승리하여 주님 앞에 가서 면류관 상급을 받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 분은 중도에 탈락하는 자도 있습니다. 중도에 탈락하는 것은 배로 말하면 파선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19에 보면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믿음도 파선될 수가 있습니다. 배만 파선되는 것이 아닙니다. 파선되지 않는 믿음, 깨어지지 않는 믿음, 전복되지 않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배가 파선되는 이유는 ①바람이 세게 불 때 파선됩니다. 너무 강한 세파가 갑자기 몰아닥칠 때 우리 믿음이 파선되기 쉽습니다. ②올무에 걸릴 때입니다. 인생의 길에는 암초와 같은 올무가 많습니다. 정말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③나침반이 고장났을 때 파선됩니다. 나침반이 고장나면 방향감각을 상실하여 엉뚱한 방향으로 가다가 파선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침반이 분명해야 됩니다. 나침반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지, 절대 좌우로 치우치면 됩니다. 말씀대로 살면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하나님이 절대로 허락지 않고, 시험을 당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피할 길을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④포로될 때 파선됩니다. 파도치는 대로 포로 되어서 왔다 갔다 하다가 파선되는 것입니다. 오늘 세상의 파도는 너무 높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먼저 믿음으로 역청을 칠해서 파선되는 것을 방지해야 되고, 의의 빛을 받아 어두움을 식별하고 구별해서 항상 파선되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천성 항구까지 파선되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려면 ①예수님이 선장이 되어야 됩니다. 주 예수님이 나의 선장이 될 때에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② 말씀의 나침반을 가지고, 영의 눈을 분명히 떠야 됩니다. 배가 잘 달려가다가도 왜 암초에 걸립니까? 안개나 먹구름 등으로 시야가 흐리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4:7에 보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기도할 때 영의 눈이 밝아집니다.

③기름이 준비되어 있을 때입니다. 자동차가 가다가 주유소에서 기름을 공급받지요? 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배도 기름이 떨어지면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절대 성령의 기름이 떨어져서는 안됩니다. ④믿음의 닻을 잘 세워야 됩니다. 닻을 잘 이용하면 가는 길을 더 빨리 갈 수 있습니다. 때로는 풍랑이 없으면 좋은 것 같지만 풍랑이 있음으로 더 잘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항해사는 바람과 파도를 이용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⑤인내가 있어야 됩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계 14:12)

넷째, 부요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 여인들은 부요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다려가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살아나셨습니다"라고 이렇게 외친 것입니다. 그러나 도마 같은 사람은 믿음이 빈약하니까 의심만 꽉 차서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요 20:25)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9:29에 보면 예수님께서 소경들의 눈을 고쳐주시면서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그 믿음대로 하면 모든 일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믿음을 앞세우면 응답도, 축복도, 좋은 일도, 영광도, 재물도 줄줄 따라오게 됩니다.

마태복음 15:28에 보면 예수님께 흉악한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한 가나안 여인에게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야고보서 2:5에 보면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고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염려하지 않는 믿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 파선되지 않는 믿음, 부요한 믿음을 소유하여 가장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의 사람 (본문 : 히브리서 11:23-30)

최성규 목사(인천순복음교회)

오늘 이 시간에는 "믿음의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한 번 따라하시겠습니다. "믿음의 사람", "믿음의 사람."

여러분들은 믿음의 사람입니까? 축하합니다. 신약 성경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 "믿음의 사람"장입니다. 희망을 걸었던 2001년이 안타깝게도 테러, 전쟁, 보복, 탄저균 살포 등 앞날이 캄캄합니다. 이 때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믿음입니다.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냐구요? "믿음의 사람"입니다. 존 칼빈은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이란 저수지 물을 집으로 끌어들이는 수도관과 같다." 즉, "하나님의 보물을 지구에 날라다 주는 수성 파이프이다"고 했습니다. 또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고 말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식인이 필요합니다. 정치인이 필요합니다. 기업인이 필요합니다. 예술인이 필요합니다. 군인이 필요합니다. 교육가가 필요합니다. 노동자도, 군인도, 학생도, 경찰도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이 있는 지식인, 믿음이 있는 정치인, 믿음이 있는 기업인, 믿음이 있는 예술인, 믿음이 있는 군인, 믿음이 있는 경찰, 믿음이 있는 공무원, 믿음이 있는 교육가, 믿음이 있는 노동자가 다 필요합니다. 정말 필요한 사람은 나도 잘 되고, 남도 잘 되게 하는 사람입니다. 나도 잘 되고, 남도 잘 되게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나도 잘 되고, 남도 잘 되게 할 수 있습니다. 나도 살고, 남도 살게 할 수 있습니다. 나도 구원받고, 남도 구원받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 믿음을 가진 믿음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지금 필요한 때입니다. 이 시간, 믿음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히브리서 11장에 자신의 이름과 믿음의 발자취를 새길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꿈을 꾸는 사람

믿음의 사람은 꿈을 꾸는 사람입니다.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꿈을 꾸는 사람." 그런데 우리는 꼭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냥 꿈이 아닙니다. "하나님" 한 분만을 영원토록 꿈꾸는 사람입니다. 꿈은 다 꿉니다. 돼지꿈도 꾸고, 소꿈도 꾸고, 개꿈도 꾸고 다 꿉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도 꿈을 꾸고, 다른 종교인들도 꿈을 꿉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은 무엇을 꿈꾸냐, 누구를 꿈꾸냐, 이것이 다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 한 분만을 영원토록 꿈꾸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꿈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합시다. "하나님을 꿈꾸는 사람." 우리의 전 존재가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 우리의 말, 우리의 행동 모두가 다 하나님의 생각으로 꽉 차 있어야 합니다.

바울처럼 다른 모든 것을 분토처럼 여기고 예수님만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입니다. 또 바울은 누구보다도 지위와 명예, 권세를 가진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다른 모든 것들을 분토처럼 버릴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빌립보서 3장 8절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아무리 좋은 꿈과 이상이라도 하나님이 없는 것은, 그것은 믿음의 사람의 꿈이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꿈과 이상이라도 하나님이 없는 것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누구도 살릴 수 없습니다. 자기도 살지 못하고, 남도 살릴 수 없습니다. 젊은 시절에 모세는 민족을 구원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 꿈에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젊었을 때, 힘있고, 권세 있고, 건강이 있었을 때 모세는 어떻게 민족을 구원할까 하는 사상은 있었지만, 그 가슴속에 하나님의 꿈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이상이 없었습니다. 결국 모세는 실패해서 살인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로 피난 갔습니다. 처가살이 40년, 고통 속에서 어려운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요셉은 어떤 환란 가운데도 승리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그들은 하나님의 꿈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꿈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꿈이 아브라함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꿈이 요셉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듣고, 묵상하고 나가 실천하면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 예수님의 영인 성령세례 받고, 성령충만 하고,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찬송을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를 통해서 들을 때, 지금 이 시간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인 것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들을 때, 묵상할 때, 전할 때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꿈이 생깁니다. 성령세례 받고, 성령충만 하고,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일 때 성령 하나님과 함께 살기 때문에 하나님을 통하여,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꿈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꿈은 인간의 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광대하십니다. 하나님의 꿈은 영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꿈은 기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꿈은 하나님의 큰 축복이 있는 것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모세가 민족 해방만을 꿈꾸었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 국가로 만드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꾼 꿈과 하나님이 꾸신 꿈이 달랐어요. 그래서 출애굽기 19장 6절에 보니까,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모세가 꿈꾼 것은 자기 민족이 고통을 당하니까, 애굽 나라 종이 되어서 고통을 당하니까 그 민족을 애굽 나라에서 해방시키는 꿈만 꾸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꿈은 그것만이 아니예요. 민족을 해방시키는 꿈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 나라, 선민 국가, 제사장 국가가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요셉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평생토록 부여잡아야 합니다. 꿈을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꿈을 놓쳐버리는 자가 아니라 꿈을 잡고, 꿈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꿈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환경과 고난도 뛰어넘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꿈만 꾼다면 어떤 유혹이 와도, 어떤 핍박이 와도, 어떤 고난이 와도 그 꿈을 붙들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꿈은 우리 대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손 대에라도 이루어질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꿈은 지금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저 세상 천국 가서 면류관 받고, 상급 받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꿈이 아브라함의 대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삭에게로 갔습니다. 야곱에게로 갔습니다. 열두 지파에게로 갔습니다. 마지막에 어디까지 갔습니까? 메시아,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브라함의 꿈이 이루어진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꿈에 헌신 할 때 나도 살고, 너도 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꿈에 헌신하자 하나님의 일꾼이 되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는 지도자로 주님이 써 주셨습니다.

둘째, 긍정적으로 말하는 사람

두 번째 믿음의 사람은 긍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긍정적으로 말하는 사람." 긍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긍정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입을 열어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그냥 마음속에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더더군다나 하나님이 주신 꿈도 아닌데 자기 생각을, 육신적인 꿈을 꾼 것을 말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꿈을 꾼, 그 꿈을 가슴에만 담지 말고, 입에만 담지 말고,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이 긍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부정적일 수가 없습니다. "안 된다"는 말을 절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긍정적이 됩니다. 일이 잘 안되어도 "안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말합니까? "아직 안 되었다"고 말합니다. "안 된다"는 말과 "아직 안 되었다"는 말은 다릅니다. "아직 안 되었다"는 말은 뭡니까? "장차 된다"는 말입니다. "앞으로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아직까지 여러분들이 어렵습니까? 안 된 것이 아닙니다. 아직 안 된 것이지 앞으로 됩니다. 됩니다. 치료받습니다. 해결 받습니다. 응답됩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렇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이 주신 꿈의 관점에서 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형편으로, 내 환경으로, 내 힘으로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그 꿈을 가지고 말하면 안 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되게 해주시니까. 세상과 똑같이 말하지 말고, 세상 사람처럼 말하지 말고, 누구처럼? 예수님처럼.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말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사람들은 "죽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잖아요? 사람들은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었다. 다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잔다", "잔다", 성경이 말합니다. 요한복음 7장 46절에 보니까,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하나님이 주신 꿈을 믿고 선포할수록 우리는 긍정적인 사람, 적극적인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입술의 고백과 선포가 우리의 인생을 결정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우리의 선포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그 인생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서 18장 21절 말씀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그랬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마 18:18).

자꾸만 부정적이고 실패의 말을 하면, 그 인생은 그대로 실패하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열 정탐꾼이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들을 따르던 많은 백성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부정적으로 말했습니다. 부정적으로 말한 사람들을 따라갔던 사람들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들은 살았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포는 우리 인생을 이끄는 나침반이 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빨리 달려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바르게 가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날마다 긍정적인 말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꿈에 이끌리는 인생,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하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셋째,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

세 번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 다시오. "대가를 치루는 사람." 참 중요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은혜 받은 성도들이, 성령세례 받은 성도들이 꿈을 꿉니다. 긍정적인 말을 합니다. 그러나 어디서 걸리느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대가를 지불하는 데서 걸립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아니하고 꿈을 꾸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면 자기에게 모든 것이 돌아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위대한 사람은 꿈만 꾸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말한 것에 대하여, 자기가 꿈꾼 것에 대하여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입니다.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입니다. 이 시대의 아픔이 뭡니까? 이 사회가 어려운 이유가 뭡니까? 꿈은 많이 꾸는데, 긍정적인 말은 많이 하는데 꿈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기 꺼려합니다. 꿈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기 꺼려합니다. 싫어합니다. 피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시 126:5)고 말씀했습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6시 126:6)고 말씀했습니다. 또 자연법칙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콩을 심어야 콩이 나옵니다. 팥을 심어야 팥이 나옵니다. 기도해야 응답을 받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사람은 "성취자"가 아니라 "망상가"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공짜는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참 공짜 좋아해요. 특별히 요사이 많은 전자제품 광고가 젊은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황폐화시키고 있습니다. "난 공짜가 좋아!" "○○○를 하면 300분은 공짜야!" "공짜야, 공짜야!" 청소년들의 가슴을, 청소년들의 삶을 완전히 무너지게 하는 겁니다. 따라합시다. "공짜는 없다, 공짜는 없다." 여러분 공짜가 있습니까? 절대로 없습니다. 그럼 그럴 거예요. "아, 예수 믿는 것, 구원받는 것은 공짜 아닙니까?" 하고 그럴 거예요. 우리 편에서는 공짜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엄청 큰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한 분밖에 안 계신 독생자 아들 예수를, 하나님 되신 예수를, 아들 되신 예수를, 죄도 없으신 예수를 이 땅에 죄 지은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어디에서? 마구간에서. 어디에? 말구유에 누이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그렇게 고생하셨습니다. 그렇게 배고프시고, 그렇게 헐벗으시고, 그렇게 매 맞으시고, 그렇게 가시관 쓰시고, 그렇게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시고, 그렇게 십자가에 피 흘리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기만 하면 구원받게 하기 위해 우리 하나님이 치루신 대가, 예수님이 치루신 대가는 세상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무서운 대가를, 너무 큰 대가를 우리 하나님이 치루신 거예요. 예수님이 치루신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조차도 예수님의 피라는,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대가가 지불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성경의 위인들처럼 광야와 시련의 대가를 기쁘게 지불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대가가 없었나요? 이삭을 위해 25년 동안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이삭은 모리아 산에서 죽기를 각오하는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 중 누구 한 사람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꿈만 꾸었나요? 긍정적인 말만했나요? 아닙니다. 거기에다가 대가를 치루었습니다.

모세의 위대함은 꿈에 대한 대가를 엄청 지불한 데 있었습니다. 모세가 모세 되기 위해서는 모세의 어머니인 요게벳이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3절에 보니까,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임금인 바로 왕은 남자아이가 나면 죽이라고 했습니다. 목을 눌러 죽여서 하수구에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 명을 어기면 죽습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를 석달 동안 숨겨 길렀습니다. 어린 아이는 수시로 웁니다. 밤에도 울고, 낮에도 울고, 젖 먹고 싶어서 울고, 아파서 울고, 아이가 막 웁니다. 그 울음소리가 밖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발각되면 죽어요. 무서운 대가를 어머니인 요게벳이 치룬 겁니다.

모세는 또 자기 스스로 부귀와 영화가 보장된 세상 권세와 능력을 거절했다고 그랬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4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그랬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5절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랬습니다. 모세는 혹독한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들어서 민족의 지도자로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써 주셨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도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앞에 여리고 성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여호수아는 분명히 장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서 여호수아에게 하는 말이 무엇이냐? "무장을 해제하라. 싸우지 말아라.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 여리고 성을 하루에 한바퀴씩 돌아라. 둘째 날도 한 바퀴, 셋째 날도 한 바퀴, 넷째 날도, 다섯째 날도, 여섯째 날도 한 바퀴씩 돌아라. 맨 마지막 일곱째 날 일곱 바퀴를 돌아라. 그때까지 입도 열지 말아라.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무기 사용하지 말아라. 그 때가서 일곱 바퀴 다 돈 후에 소리를 질러라." 여러분, 장군에게 무장을 해제하라는 것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라는 의미입니다. 장군은 자기 힘을 과시하고 싶어합니다. 싸우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싸우지 말라는 겁니다. 엄청난 대가를 지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30절입니다.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우리 모두 믿음으로 꿈에 대가를 지불함으로 말미암아 꿈의 성취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꿈이 다 이루어지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항상 기뻐하는 사람, 항상 감사하는 사람

네 번째 마지막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구요? "항상 기뻐하는 사람, 항상 감사하는 사람." 한 번 따라하시겠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사람, 항상 감사하는 사람."

그렇습니다. 지금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잘 될 수 있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천국의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아들의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예수의 신부의 믿음이 있는 사람은 환경이 어떠할지라도 항상 기뻐할 수 있고, 항상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는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럼에도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말을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17절, 18절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믿음의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구요? 항상 기뻐하고, 항상 감사하는 사람. 환경이 어떠할지라도 믿음이 있기 때문에, 꿈이 있기 때문에,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온갖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꿈을 줍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은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합니다. 히브리서 11장 28절입니다.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문제도, 역경도, 고난도, 슬픔도, 질병도 다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히브리서 11장 29절 상반절입니다.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그랬습니다. 믿음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다고 했습니다. 홍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 뛰어넘는다는 것입니다. 죽음도 뛰어넘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어떤 대적도 우리 앞에서 패배합니다. 믿음의 사람 앞에 믿음이 없는 사람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 앞에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많이 가진 것 같으나 그는 없는 자이며, 승한 것 같으나 패한 자입니다. 보세요. 히브리서 11장 29절 하반절에 보니까,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믿음이 있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원수 앞에서도 상을 베풀어주십니다. 넘어지는 것 같으나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망한 것 같으나 흥하게 해 주십니다. 병들은 것 같으나 치료해 주십니다. 없는 것 같으나 있게 해 주십니다. 약한 것 같으나 강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무엇이? 믿음이 우리의 삶을 바꾸어 주시는 것 아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은 고통 속에서도 하늘의 상을 바라보고, 그 상급을 얻게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26절에 보니까,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또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이 세상에서는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 또 저 천국 가서는 상급과 면류관을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꿈을 품고 그 꿈을 말하고, 꿈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항상 기뻐하고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세상 어떤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그래서 나도 잘 되고, 가정도 잘 되고, 교회도 잘 되고, 나라도 잘 되고, 세계도, 세상도 잘 되게 하는 주인공들이 됩시다. 분명히 전쟁, 테러, 보복이 다 사라지고, 다 그쳐지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살기 좋은 사회, 맑고 밝고 환한 사회, 부족함이 없이 넉넉하고 풍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만이, 성령으로 충만한 믿음만이, 말씀 충만한 그 믿음만이 나도 살고, 너도 살고 이 시대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영혼을 주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이 모두 인정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야 합니다. 말만 믿는 사람이 아니라 그 믿음을 따라서 헌신하고 생명을 바치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야 합니다. 인천 260만 시민 속에도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남한의 4천 6백만 우리 국민들 속에도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북한의 2천 3백만 동포들 속에서도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세계 64억의 많은 인구 속에서도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막 일어날 때 이 땅은 전쟁없는 평화, 살기 좋은 세상으로 바꾸어지게 될 것입니다. 절망의 세상이 희망의 세상으로, 미움의 세상이 사랑의 세상으로 분명히 바꾸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와 의를 세우는 주인공들이 됩시다.

- 기 도 -

하나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올라가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산 믿음 되기를 원합니다. 힘으로 안 됩니다. 능으로 안 됩니다. 여호와 신으로 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을 인정합니다. 환영합니다. 모셔들입니다. 성령세례 받고 성령충만함으로 주님 오실 때까지 믿음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본문 : 마태복음 15:21-28)

김성광 목사(강남교회)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태복음 15장 21~28)

A. 믿음과 소원에 대하여

1. 믿음과 소원

사람은 대개 다 소원을 가지고 살지만, 종종 어떤 사람은 소원 없이 살기도 합니다. 소원이 없는 사람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죄악 가운데서 삽니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타락하고 방탕한 삶을 삽니다. 반면 소원이 있는 사람은 목표를 정하고 열심히 삽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응답을 받고 소원을 이룹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이 소원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의 평화와 평강'이 소원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행복한 가정'이 소원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직장'이 소원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친구'를 갖는 것이 소원일 수 있습니다. 또한 '풍부한 물질', '열심 있는 신앙', '명예'를 가지는 것이 소원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소원이 막연한 소원으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소원을 가지되 우리는 불타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고, 남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창조적인 믿음을 가지고 소원을 성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소원과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면 때가 되면 반드시 응답을 받고 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세종대왕(世宗大王)도 불타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배울 만한 우리 글이 없는 것을 보시고 쉬운 우리 글을 만들어야겠다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만드신 것이 바로 한글입니다.

또한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도 불타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일제의 침략 앞에 날로 기울어지는 조국의 비운을 보고 어떻게 해서든지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고 말겠다는 간절한 소원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 간절한 소원이 그로 하여금 위대한 애국자가 되게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도 불타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19세의 소년이었을 때, 노예시장에서 쇠사슬에 묶여 마치 짐승처럼 이리 팔리고 저리 팔리는 흑인들을 보고 노예제도를 쳐부수고야 말겠다는 간절한 소원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훗날 법을 공부하고 대통령이 되어, 당시로서는 불가능해 보였던 노예해방의 역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젊은 사람도 불타는 소원을 가져야 하고, 나이든 사람도 불타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인생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성공한 백만장자 4천 명을 대상으로 그들이 성공하고 존경받는 인물이 된 비결을 조사했더니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공통점이 나왔습니다. 첫째, 그들에게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둘째, 열정적인 소원이 있었습니다. 셋째, 참고 또 참는 인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쉽게 낙심하고 포기한 것이 아니라 끝까지 참고 인내했습니다.

시편 37편 4절에는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이루어 주신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까?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부지런히 살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소원을 성취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본문 배경 설명

본문 말씀 마태복음 15장 21~28절은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한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나와서 귀신 들린 딸의 병을 고쳐달라고 믿음으로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가나안 여인의 간절한 소원이 성취되어 그 딸이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어떻게 하여 예수님께 응답을 받고 소원을 성취하게 되었습니까? 본문 말씀을 통해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제목을 가지고, 가나안 여인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는지 네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소리 질러 간구한 믿음'이었습니다. 둘째, '대답이 없어도 포기하지 않은 믿음'이었습니다. 셋째, '자신을 개로 비유한 겸손한 믿음'이었습니다. 넷째, '소원을 이루는 큰 믿음'이었습니다.

B.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1. 소리 질러 간구한 믿음 - 부르짖음, 기도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마 15:21마 15:21~22)

두로와 시돈은 항구 도시로, 유대 땅이 아닌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땅이었습니다. 또한 가나안 사람은 유대인에게 천대받는 이방인이었고, 이스라엘과는 조상 대대로 분쟁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방 땅에 사는 가나안 여자 하나가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천대받는 이방인이었고 유대인들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환경과 조건을 개의치 않고 자기의 소원을 간구하기 위해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용기와 결단을 가지고 외쳤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이 이방 여인은 예수님을 어떻게 불렀습니까? '주'라고 했습니다. 대개 예수님을 처음 만난 사람들은 '랍비', 즉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주인님'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또한 이 여인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로 인정했던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비록 이방 땅에 살고 있는 이방 족속이었으나,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있었고 그 예수님을 믿었으며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예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불쌍한 사람이 참 많습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고통과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이 불쌍한 처지에 있는 것을 모릅니다. 자기는 불쌍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병으로 죽어 가는 사람, 죄악으로 파멸되는 사람, 물질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도 자신이 왜 불쌍하냐고 오히려 큰소리를 칩니다. 우리는 이 가나안 여인에게서, 자신의 처지를 알고 예수님께 나아오는 겸손한 모습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으니 고쳐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체면 때문에 귀신 들어도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고 하고, 병들어도 병든 것이 아니라고 하고, 죄를 짓고도 죄를 안 지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가나안 여인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다고 한 것은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담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합니다. 자신의 처지를 솔직히 고백해야 합니다.

다윗 왕은 시편 3편 4절에서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다윗이 나이 많아 노년이 되었을 때 그의 아들 압살롬이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아버지에게 대항하자 아들을 피하여 한밤중에 도망을 치면서 쓴 비탄의 시입니다.

위기에 처하자 다윗은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만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왕권을 다시 되찾게 하실 뿐만 아니라, 나라도 번창케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기도입니다. 우리는 간절히 부르짖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6절 이하에 나오는 소경 거지 바디매오도 나사렛 예수께서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달려 나왔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옆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잠잠 하라며 그를 꾸짖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께 나오려고 하면 도와주지는 않고, 불쌍히 여기지는 않고, 오히려 훼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더욱 심히 소리 질러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보기를 원하나이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래서 그는 곧 보게 되어 길에서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소경의 믿음이 자신의 눈을 뜨게 한 것입니다.

우리도 기적을 체험하려면 기본적으로 마음속에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가 와서 자기를 도와주기를 바랍니다.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기적의 열쇠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나가서 예배는 드리지만 믿음이 없습니다. "주여! 주여!"는 외치지만 믿음이 없습니다. 찬송은 부르지만 믿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믿음으로 예배드리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통해서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基督敎)'를 '기도교(祈禱敎)'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기도를 많이 하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도할 때는 반드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한 기도가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하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설교자 헨리 비처(Henry Ward Beecher)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기도에 대해서 말하기를 "나는 기도할 때 포도주가 병마개를 밀어내듯이 기도한다."라고 하였습니다.

포도주를 담글 때 처음에는 포도를 병에 담고 마개를 꽉 덮어놓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발효가 되어 가스가 생기고 거품이 올라옵니다. 나중에는 가스가 병마개를 확 밀어 버려서 터져 버리고 맙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쌓이고 쌓인 소원이 점점 밖으로 표출되어, 하나님 앞에 소리내어 부르짖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가 하늘 보좌에 상달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부르짖는 기도를 통해서 응답하시고 역사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집사님 가정에 건강하고 잘생긴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백일이 지나자 소아마비에 걸려 점점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지팡이를 짚고 다녔습니다. 나중에는 걸을 수가 없어서 휠체어를 타고 다녔습니다. 어떤 약도 소용이 없고 의학으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바라볼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번민을 느꼈습니다. 아들의 장래가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새벽기도회가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도, 철야기도회가 끝난 뒤에도 이 어머니는 계속해서 기도만 했습니다.

'하나님, 내 아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아들이 비록 다리는 쓸 수 없었지만, 공부를 잘했습니다. 그래서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약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 한의학을 공부하고, 미국에서 한의사 시험에 합격하여 국제적인 한의사가 되었습니다. 약국을 차렸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람들이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로, 소아마비 아들이 의사가 되어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돈도 벌고 착한 일도 많이 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자녀를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감당치 못할 문제와 역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2. 대답이 없어도 포기하지 않은 믿음 - 포기, 낙심, 인내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마 15:23마 15:23~25)

가나안 여인의 간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즉 "나는 내 민족을 위해 일하지 다른 민족을 위해 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너와 상관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한 번 거절당했다고 해서 포기하고 가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와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 하고 다시 한 번 간청했습니다. 우리는 가나안 여인의 모습을 통해서 믿음과 인내를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적극적인 믿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다윗 왕도 시편 40편 1절에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전진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8장에서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를 통해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8장 7절에서 마지막 결론으로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원한이 있습니까? 여러분 마음속에 맺힌 한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새벽에도 기도하고, 한낮에도 기도하고, 밤에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철야하고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응답하여 주십니다.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말하기를 "인내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그가 바라는 바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인내하며 나아가야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골길을 가다보면 종종 마당에 돌을 잔득 쌓아놓고 돌탑이라든지 다른 여러 가지 조형물을 만드는 석수장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석수장이가 큰 돌덩이를 깨서 자신이 원하는 모양을 만들기 위해 몇 번이나 망치질을 하는지 아십니까? 석수장이는 열 번, 백 번, 천 번, 만 번, 두들기고 쪼개서 점점 아름다운 모습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이와 같이 해야 합니다. 몇 번 기도해 보고는 응답이 없다고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석수장이가 대리석을 깨고 또 깨서 자기가 원하는 형상을 만들듯이, 우리는 소원이 응답될 때까지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합니다. 내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될 때까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역사 하실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석수장이가 불필요한 부분을 깨뜨려버리듯이 불신앙을 깨뜨리고, 의심을 깨뜨리고, 교만함과 완악함을 깨뜨리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보면 기도하는 사람은 많지만 응답을 받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 누구는 기도해서 응답 받고, 누구는 응답 받지 못합니까? 응답 받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기도하다가 낙심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다가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응답하시지 않더라도, 우리를 연단 시키시고 훈련시키셔서 세월이 지나 때가 되면 응답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때를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뿐 아니라 다른 데서도 우리는 인내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현대 스피드 디지털 문명은 사람들의 인내심을 다 말살시켰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잘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조급합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슈퍼마켓 계산대에서는 5분, 은행 현금지급기 앞에서는 6분이 지나면 짜증을 내시 시작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부부가 화목하고 자녀교육을 잘하려면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직장이나 사업장에서도 회사가 잘되고 성공하려면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가 잘사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도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우리에게 참고 인내하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미국 어느 마을에 어려서 부모가 돌아가시고 동생들만 남게 되어, 열두 살에 가장이 된 웨인 오츠라는 한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린 동생들을 벌어 먹여야 했기 때문에 국회의사당 앞에 있는 구두수선가게 옆에서 구두를 닦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워싱톤 출신의 한 상원의원이 와서 구두를 닦게 되었습니다. 의원은 이 소년을 측은하게 여기며 그의 나이를 물었습니다.

"너 몇 살이니?"

"열두 살입니다."

"고생이 참 많구나."

"예, 저는 소년 가장입니다."

"그래? 낙심하지 말고 힘내거라. 나도 열두 살 때 너처럼 구두를 닦았단다."

그는 소년을 격려하며 등을 두드려 주고는 갔습니다. 아주 짤막한 대화였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그 대화를 통해서 서광이 비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심장은 고동쳤습니다. 그는 꿈에 부풀었습니다.

'아, 저렇게 훌륭한 국회의원도 12살 때 나같이 구두를 닦았다니…. 그러면 나도 이다음에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어. 나는 이대로 구두닦이로 살수는 없어. '

그 후로 그는 틈틈이 시간을 내서 책을 보고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비록 고아이고 늦은 나이였지만, 야간에 학교를 나와 대학에 들어가서 박사학위까지 받았습니다. 그리고 켄터키대학의 유명한 정신의학과 교수요, 치유상담학에 있어서 세계적인 권위자가 되어 많을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과거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미래를 내다보고 현재를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앞으로의 운명이 결정되고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앞으로 3년, 5년, 10년 후에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인가,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고,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열심히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응답하시고 역사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3. 자신을 개로 비유한 겸손한 믿음 - 겸손, 교만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마 15:26마 15:26~27)

예수님께서는, 도와달라고 절하며 간청하는 가나안 여자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개 같은 존재라고 모욕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 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의도를 알았는지 이 여자는 그래도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말을 받아서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의 말을 통해 우리는 겸손과 낮아짐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는 모욕적인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혜롭게 처신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귀신을 쫓아내고 딸의 병을 고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 대우도 안 해주고 무시한다고 교회를 안 나갑니다. 이 교회, 저 교회, 빙빙 돌다가 결국은 교회를 정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하고 절망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겸손을 요구하십니다.

열왕기상 3장에는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 한 기도가 나옵니다. 열왕기상 3장 7~9절에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아는 척하지 않고, 자기는 아는 것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고, 없으면서도 있는 척하고, 잘나지도 않았으면서 잘난 척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척' 병에 걸린 사람이 많습니다. 대단치도 않은데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도 교만하게 서겠습니까? 시편 10편 17절에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하지 않으십니다. 교만한 자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겸손한 자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도 야고보서 4장 6절에서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랑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며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중세시대의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는 "겸손한 마음은 은혜를 받는 그릇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축복도, 사랑도 겸손한 사람만이 받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축복도, 사랑도 받지 못합니다. 짐승도 사나운 짐승은 산악지대에서 혼자 외롭게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주인 말을 잘 듣는 온순한 짐승은 주인의 사랑을 받으며 편안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한국인들이 집착하고 있는 아주 무서운 병중의 하나는 '서열병'입니다. '서열병'이란 계급을 따지고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을 만나면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하고 먼저 나이부터 묻습니다. 조금만 나이 차이가 나도 형, 동생 나누어 나이 많은 사람이 잘난 척을 합니다. 또한 젊은 사람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동창회에 가면 학번을 따집니다. 군대를 갔다온 사람들은 군번을 따집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꾸 권력 구조적인 사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서열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더 겸손한가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택하셔서 역사 하십니까? 겸손한 사람을 높이 들어서 사용하십니다. 교만한 사람은 대적하십니다.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을 가져서 축복과 사랑을 받고 큰일을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소원을 이루는 큰 믿음 - 기도 응답, 소원 성취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8마 15:28)

가나안 여인이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모습을 보이자,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크도다!" 하고 그를 칭찬하셨습니다.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겸손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믿음이 작거나, 아예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작은 사람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면 믿음이 점점 커져서 하나님께서 칭찬하시고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겸손한 사람에게는 큰 믿음이 주어지고, 그 믿음을 통해 소원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즐거운 말씀입니까? 이런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할 수 없습니다. 사장이 직원에게 할 수 없습니다.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네 소원대로 되라"고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 마음속의 불타는 소원, 기도하며 세운 목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145편 19절에도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는 믿음 좋은 한 백부장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사랑하는 하인이 중풍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 나와 그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서 고쳐주시겠다고 하자,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습니다."(마 8:8마 8:8)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겸손한 마음과 믿음을 가지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마 8:10마 8:10)고 칭찬하시며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의 고백처럼, 우리는 말씀만 들어도 축복을 받습니다. 말씀만 들어도 병 고침을 받습니다. 말씀만 들어도 인생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시 10:17시 10:17), 믿음을 가지고(마 15:28마 15:28) 충성?봉사?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받고 능력을 받아서(롬 15:13롬 15:13), 여러분 마음속의 소원을 성취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찾으십니까? 겸손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을 찾으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응답하시고 역사 하여 주십니다.

지난(2001년) 9월 미국에서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 폭파 붕괴 사건이 있었을 당시, 저는 현지에서 미국이 돌아가는 사정을 주시하여 보았습니다. 그때 제가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미국 대통령선거에 고어와 부시가 후보로 나왔을 때 고어를 더 좋아했습니다. 그래도 미국의 대통령쯤 되려면 고어처럼 세계 정세에 밝고 똑똑하고 말도 야무지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기대와는 달리 부시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부시는 어딘지 모르게 좀 부시시하고 모자란 것 같고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과연 부시가 일을 잘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태 동안 TV를 보면서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똑똑한 사람은 분명 고어였지만, 기도를 많이 하고 겸손한 사람은 부시였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한 시대의 영웅, 한 시대의 지도자로 세우시는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겸손하게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목적을 달성하고 큰일을 하시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똑똑한 사람을 찾지 않으십니다. 잘난 척하는 사람을 찾지 않으십니다. 인간적으로 출중한 외모를 가진 자를 찾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자를 들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앞으로 대통령을 뽑을 때 기도하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학식이 뛰어나고 집안이 좋고 잘난 사람보다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구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나라도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나타나 형통하고 잘되게 될 것입니다.

새도 우는 새끼에게 먼저 먹이를 줍니다. 어미 새가 나갔다가 먹이를 가지고 돌아오면, 대여섯 마리 되는 새끼들은 둥지에서 입을 쫙쫙 벌리고 먹이를 달라고 짹짹거립니다. 그런데 어미가 골고루 먹이를 주어도 어떤 새는 아주 건강하게 무럭무럭 크는데, 어떤 새는 비실비실 하다가 결국은 병들어 죽고 맙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아무래도 어미 새가 입을 제일 크게 벌리고 크게 우는 새에게 더 먹이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 새는 점점 커지고 비실비실 한 새는 병들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 시간을 빼먹거나 예배 시간에 앉아서 비실비실 조는 사람은 축복을 못 받습니다. 기도 시간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 교만한 사람은 굶어 죽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도 "주여!" 하고 입을 넓게 열고 적극적으로 기도하는 사람, 열심히 전도하고 충성하는 사람은 성공합니다. 그러므로 '작은 믿음 가지고 살 것이 아니라, 큰 믿음 가지고 하나님 앞에 충성, 봉사, 헌신하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큰 믿음 가지고 큰 축복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느 교회 여집사님 한 분이 7평짜리 작은 가게를 얻어 학생복을 만드는 교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담당 전도사님이 심방을 와서 축복기도를 하신 뒤 집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집사님, 몇 벌 파는 게 목표십니까?"

"600벌만 팔면 돼요."

그러자 옆에 있던 남편이 기왕이면 1000벌이라고 하라고 해서 다시 1000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로 집사님 부부는 1000벌을 목표로 열심히 기도하며 일했습니다. 그랬더니 진짜로 1000벌을 팔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1500벌, 2000벌, 3000벌로 목표를 높여 나갔습니다.

그러자 학교 앞에 다른 교복사들이 많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교복사만 점점 성장하여 매상을 가장 많이 올리게 되었습니다. 분명한 소원과 큰 믿음 때문에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막연하게 기도하지 말고 목표를 세워서 구체적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뉴욕에서 목회할 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동포들은 대개 과일가게, 생선가게, 세탁소 등을 하고 있었는데, 저는 처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가게에서는 항상 한 달 매상이 얼마가 되기를 원하는지 물어서 목표를 세워주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하루에 1000불씩 벌기를 원하면, 계산대 앞에 '1000불'이라고 써 붙이게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달, 두 달, 석 달이 지나면 진짜 1000불이 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히 11:1)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고 목표를 정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입술로 시인하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담대한 믿음, 큰 믿음을 통해서 역사 하시고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십일조도 막연하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10만 원이 30만 원이 되게 하시고, 50만 원이 되게 하시고, 100만 원이 되게 하옵소서. 건축헌금도 드리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면 입술로 시인한 것이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통해서 풍족하고 넘치게 채워주시고, 소원대로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C. 가나안 여인처럼 부르짖어 기도하는 믿음, 포기하지 않는 믿음, 겸손한 믿음, 소원을 이루는 큰 믿음을 가져서 응답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똑같이 기도하고 똑같이 신앙생활 하는 것처럼 보여도, 믿음에 따라서 결과는 달라집니다. 얼마나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열심히 충성하느냐에 따라서 열매가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 회사 기획실에서 일을 하던 40대 초반의 정 씨라는 사람이 갑자기 만성 신부전증으로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병원에서 신장기를 통해 피를 항상 걸러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간염에 걸렸습니다. 뒤이어 황달에서 흑달까지 덮쳤습니다. 요독이 쌓여서 몸무게가 60kg까지 늘어나 남의 도움 없이는 움직일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체중이 35kg까지 떨어져 해골을 연상케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병원에서는 그의 아내에게 장래를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의사도 더 이상 치료할 방법이 없으니까 회진만 하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손발에서 경련이 일어나고, 구토증, 견딜 수 없는 가려움증에 시달렸습니다. 나중에는 신경이 마비되어 고통조차 느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정 씨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나는 아직 40대 초반이야.'

'나는 아직 할 일이 많아.'

'나는 살아야 해!'

'하나님! 나 좀 살려 주세요.'

그는 기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의사도 바라보지 않고, 약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는 한밤중에도, 아침에도, 낮에도, 정신이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 눈물로 간절히 부르짖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하얀 광선이 자신의 온몸을 환히 비쳐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일을 체험하고 나서 그는 하나님께서 살려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때부터 몸이 점점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식욕이 생기고 몸에 살이 토실토실 붙었습니다. 여러 증상이 사라졌습니다. 기적적으로 완치되어 병원에서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의사도 놀라고, 부인도 놀라고, 주변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그는 건강을 되찾고 나서, '나를 살려 주시면 하나님 앞에 죽도록 충성하겠습니다.' 하고 자신이 기도한 대로, 다른 모든 일을 그만두고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마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제는 제가 마음먹고 주를 위해 보답하겠습니다.' 하고 하나님 앞에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을 사람이 살아났습니다. 믿음의 기도가 기적을 체험하게 한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네 소원대로 될지어다!" 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속에 불타는 소원을 이루려면 먼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면,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반드시 응답하시고 역사 하여 주셔서 소원을 성취케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다운 믿음 (본문 : 요한계시록 1:8-20)

김창인 목사(광성교회)

오늘은 요한계시록 1장 8절에서 20절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믿음다운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남자들이 결혼하여 한창 돈을 벌어 기세가 등등할 때 여자들의 경우는 남자의 많은 학대를 받고 살아왔습니다. 요즘은 좀 나아졌습니다. 때로는 매를 맞기도 하고 때로는 나가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였습니다. 여자에게 나가라고 하는 소리 이상 더 듣기 싫은 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소리를 들으면 교회에 나와서 울면서 기도합니다. 때로는 당회장실로 찾아와서 상담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저는 '희망이 있으니 잠깐만 기다리십시오'라고 말해줍니다. 처음에 남자가 한창 돈을 벌고 기승을 부릴 때는 여자가 뭐라고 해도 견디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역전이 되기 시작합니다. 남성이 남성 구실을 못하게 될 때 즉 남성 호르몬이 끊어질 때가 되면 그 때부터는 남성을 잃어버리고 여성 호르몬이 많이 나와서 여성화되어 집니다. 그런가하면 여자는 여성을 잃어버리고 여성 호르몬이 끊어지게 되면 남성 호르몬이 많이 져서 남성화되어 집니다. 그 때부터 뒤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못되게 굴던 남자일수록 나중에는 여자에게 꼭 쥐어서 꼼짝을 못합니다. 그러면 남자는 그 때부터 집안에 들어앉아 있게 되고 여자는 내 세상 만났구나 하면서 밖으로 나돌기 시작합니다. 제가 오늘 아침 2부 예배에 이런 설교를 했더니 미국에 가 계신 이신일 집사님이 당회장실로 찾아 들어오더니 그 말씀이 맞다고 하면서 자기의 경험이 꼭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남성이 남성을 잃어버리고 여성화되어지고, 여성이 여성을 잃어버리고 남성화되어지는 것은 어떤 의미로 보면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남성은 남성다워야 하고 여성은 여성다워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도 언제 어디서나 믿음은 믿음다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믿음다운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정신적인 믿음 (8-)

여기에서 말하는 정신은 마음이라 정신이라 할 때 쓰는 정신이 아니고 바를 正자 즉 정직하다고 할 때 쓰는 正자와 믿을 信자를 씁니다. 바로 믿는 믿음이 믿음다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정신의 반대말은 미신입니다. 미신은 길을 잃고 헤메는 믿음이요, 잘못된 믿음을 뜻합니다. 어떻게 하면 바로 되고 어떻게 하면 잘못되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 신관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믿음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에 10년을 나오고 20년을 나왔을지라도 하나님을 이 세상의 그 많은 귀신들 중에 으뜸이라 하는 정도로 믿는 사람은 10년 20년을 믿었다 할지라도 의미가 없습니다. 미신적인 신앙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관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귀신을 섬기는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첫째는 회개가 없습니다. 귀신에게 제사 그리면서 '내가 시어머니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는데 귀신이여 귀신이여 나를 용서해 주옵소서. 다시는 범죄치 않겠습니다'라고 하면서 회개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귀신 섬기는 사람은 절대로 회개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귀신 섬기듯 하는 사람은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권사이면서도 회개 안하고 여전도회 회장 며느리도 회개를 안합니다.

둘째는 귀신 섬기는 사람은 귀신과 흥정을 합니다. 천하의 복은 다 가져다 달라고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잡수시는 것은 말라빠진 북어나 돼지 몸통은 내가 먹을테니 돼지 머리나 먹고 천하의 복은 다 가져다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말끝마다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라고 합니다. 10년 20년을 하나님을 믿고도 하나님을 귀신 섬기듯 하는 사람은 첫마디에서부터 마지막까지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라고 하다가 끝납니다. 셋째로 귀신 섬기는 사람은 귀신을 위해서 희생하는 법이 없습니다. 귀신 섬기는 사람이 귀신을 위해서 손해 보는 것을 보셨습니까? 귀신을 위해서 순교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조금 손해만 보면 '이 놈의 귀신 못쓰겠다'고 하면서 내 팽개쳐 버립니다. 하나님을 귀신 섬기듯 하는 사람은 내가 조금 어려움을 당하고 손해를 보게 되면 '하나님이 계시면 이럴 수가 있습니까'라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버리고 맙니다. 그런 믿음을 어디에 써먹겠습니까?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오, 예수님이 어떤 분이다 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믿을 때 그 믿음은 정신적인 믿음 즉 바로 믿는 믿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8절을 보면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하면서 첫째로 예수님을 주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먹어야 되고 자야 되고 입어야 되는 사람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와 똑같은 신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질적으로 똑같은 신인 동시에 우리와 똑같은 인간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주 하나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되신 예수님만 믿으면 안됩니다.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을 보면 둘째로 우리의 전부라고 하였습니다. 즉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나의 전부라는 말씀입니다. 헬라 말의 처음 글자가 알파요, 마지막 글자가 오메가입니다. 그래서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은 처음과 나중이요, 전부다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을 때 예수는 나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나를 위해 다 살아 버리고 예수를 위한 삶은 부분 밖에 헌신하지 않습니다. 나의 전부라고 믿는 믿음이 바로 믿는 믿음입니다.

본문을 보면 셋째로 영원하시고 전능하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영원하시다라는 뜻입니다. 과거 현재 그리고 앞으로도 무한히 계실 영원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능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을 분명히 하고 믿을 때 그 믿음이 바로 믿는 믿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믿음이 순교할 수 있는 믿음이요, 그 믿음이 믿음 구실을 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나가서 세상에서 빛 노릇을 하고 소금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토마스 제퍼슨이라고 하는 사람이 '아무 것도 안 믿는 사람이 잘 못 믿는 사람 보다 낫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10년 20년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잘 못 믿는 사람보다 차라리 아무 것도 안 믿는 사람이 낫다는 것입니다. 잘 못 믿는 믿음이 그렇게 무섭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의 증인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도 다 믿는다고 합니다. 우리와 똑같은 성경을 가지고 다닙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꼭 둘씩 짝지어서 교패가 붙은 집만 찾아다닙니다. 그들이 초인종을 누르면 집 주인이 '누구십니까?'할 때 '여호와의 증인입니다'하면 문을 열어 주지 않으니까 워치 타워에서 왔다고 합니다. 집주인이 아무 것도 모르고 문을 열어 주면 집으로 쑥 들어와서 그 때부터 자기 정체를 나타냅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신앙이 어떤지 아십니까? 사람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들 적에 흙으로 빚은 다음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니 생령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부터 아담은 펄펄 뛰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활동하는 활동력이라고 합니다. 죽으면 활동력을 잃어버리듯이 영혼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령도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그 능력이 바로 성령이지 성령이 하나님의 어떤 독립적인 인격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천국도 지옥도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까닭에 시작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참 신이 아니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증인에 가입하여 14만 4천명의 축에 들어야만 이 다음에 부활할 때 천년 동안 왕 노릇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증인에 빨리 가입해야 된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설명하는 골자가 이것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모르면 답변을 못합니다. 그리고 14만 4천명은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것으로 유다 지파의 1만 2천이요, 베냐민 지파의 1만 2천이요 하면서 그 합계가 14만 4천입니다. 그러면 그 14만 4천이라고 하는 문자는 그대로의 숫자를 믿으면서 바로 전에 나오는 르우벤 지파 혹은 유다 지파라는 말은 왜 완전히 빼버립니까? 14만 4천명을 문자 그래도 믿는다고 하면서 르우벤 지파라고 하는 것도 그대로 믿어야 하지 않습니까? 르우벤 지파를 없애고 한국 사람으로 대체하면서 14만 4천명을 왜 그대로 믿습니까? 그것은 유대인의 구원받는 숫자입니다. 우리는 르우벤 지파가 아니지 않습니까? 유대 지파, 베냐민 지파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 사람들은 성경을 놓고 그렇게 잘 못 해석하기 까닭에 잘 못 믿어서 얼마나 피해를 주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잘 못 믿는 믿음보다는 오히려 안 믿는 것이 낫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와 반대로 잘 믿는 믿음 즉 바로 믿는 믿음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고, 성령님이 어쩐 분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령도 하나님이시요, 아들 예수님도 하나님이시요, 아버지 하나님도 똑같은 인격체를 가지신 각각 다른 별개의 하나님입니다. 분명히 세 분입니다. 그러면서도 본질은 꼭 하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삼위일체입니다. 이렇게 분명히 알고 믿을 때 믿음은 믿음다워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대상을 분명히 알고 믿어서 바로 믿는 믿음, 믿음다운 믿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참여하는 믿음 (9상-)

예수님의 비유 중에 달란트 비유가 있습니다. 한 부자가 외국에 나가면서 종들을 불러 자기의 전 재산을 맡겼습니다.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은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주인의 일에 끝까지 참여합니다. 그래서 주인이 돌아왔을 때 계산해 보니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겨 온갖 칭찬과 상급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주인의 일에 참여하는 사람은 복됩니다. 그러나 그 더위와 추위에 온갖 고생이 있다는 것도 감안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려면 고생도 손해도 어려움도 많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참여하는 날 우리에게는 영광과 축복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은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달란트는 맡아 놓고도 주인의 일을 손톱 끝만큼도 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주인이 돌아온 다음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쫓겨나고 평생동안, 아니 영원토록 이를 갈았습니다.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이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실패요, 멸망하는 것 밖에 없지 않습니까? 수지 맞았다고 주인의 것 가지고 먹고 누리면서 놀았습니다. 얼마나 재미있었겠습니까? 주인의 일에 참여하지 않고 자기 재미만 누리는 사람은 결국 이렇게 됩니다. 주인의 일에 참여하는 사람이 복된 줄로 알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9절 상반절을 보면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신앙공동체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너희의 형제요'라고 합니다. 둘째는 예수의 환란에 동참하였습니다. 사도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쓸 때가 언제입니까? 다른 사도들은 전부 순교를 당했으나 열두 제자 중에 사도요한만은 순교 당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자기 집 안방에서 와석종신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쓸 때는 로마 정부가 얼마나 핍박을 가했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도 지중해 한 가운데 있는 밧모 섬에 정배를 보냅니다. 정배를 보낸 그 자리에서 요한계시록을 씁니다. "내가 왜 이렇게 환란을 당하지? 믿음을 지키기 위한 환란, 주님의 일을 하기 때문에 당하는 환란은 예수님의 환란이라는 것이 본문입니다. 내가 지금 이제라도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면 곧 평안한 자리로 돌아갈 수 있으나 나는 그 믿음 때문에 예수의 환란에 끝까지 동참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나라에 동참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또는 천국의 일에는 즉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자기가 목숨 받쳐 동참했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버티어 낸다, 견디어 낸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나에게 온갖 박해를 가해도 자기는 끝까지 버티어 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이렇게 주님의 일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괴롭든지, 즐겁든지, 고난을 당하든지, 평안하든지를 막론하고 주님의 일은 매사에 참여하는 자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주님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서 처음부터 끝까지 괴로우나 즐거우나 참여하는 자가 복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자녀 중에 자폐증을 가진 자녀가 있습니까? 어른이 된 사람 중에서 혹은 이웃에서 그런 사람을 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가 하늘빛 학교를 운영하고 있지 않습니까? 즉 특수 유치학교입니다. 특수 유치학교에는 정신발달이 지체되고 있는 정신지체아 그리고 정서 장애 아동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폐증 어린이들까지는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폐증에 걸리면 증상이 어떤지 아십니까? 자폐증에 걸린 사람들은 표정이 없습니다. 일년 4계절, 365일 동안 표정이 한결 같습니다. 웃음에 대한 표정, 슬픔에 대한 표정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나 자기가 하는 행동 하나만 반복합니다. 그것도 무제한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으로 반복합니다. 판에 박힌 듯이 그 동작만 합니다. 다른 사람과는 전혀 교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디에 참여를 하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바닷가에 모래알 같습니다. 그 부모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이웃이 볼 때 얼마나 따분하겠습니까? 자폐증 환자는 공통적으로 열 명이 모이면 열 명의 증상이 모두 다 다릅니다. 지금 말씀드린 것은 공통적인 것뿐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한 사람을 일대 일로 가르치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믿음의 자폐증 환자가 있습니다. 나는 나요, 너는 너라고 하면서 전혀 어울리거나 동참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봉사를 하자고 하면 너희나 하라고 합니다. 기도하자고 하면 너희나 하라고 하고, 성경공부를 하자고 하면 너희나 하라고 하고, 전도하자고 하면 너희나 하라고 하면서 모래알처럼 절대로 참여를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자폐증에 걸린 신자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님의 일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는 자가 복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감동받는 믿음 (9하-20)

본문으로 돌아가서 9절 하반절에서 20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에도 사도요한이 혼자 살아 남아 에베소 교회를 담임하면서 전 세계 교회를 이끌어 나아갈 때 로마 정부가 그를 박해하여 밧모라고 하는 섬으로 정배를 보냈는데 주일날을 당한 것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지금 주일을 당해서 모였을 텐데 어떻게 하고 있는지 속이 상하고 분통이 터졌습니다. 그 때 사도요한은 돌 바위틈에 엎드리어 기도를 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늘의 세계를 보고 쓴 것이 바로 오늘의 요한계시록입니다.

첫째로 밧모라고 하는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중에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유배 생활처럼 고통 당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도요한은 고통이 막심할 때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마음에 참 평안이 옵니다.

둘째로 주의 날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주의 날에 모여서 예배할 적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셋째로 주의 큰 음성이 들렸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아니하면 절대로 말씀이 내 가슴에 뜨겁게 부딪혀 오지 않습니다. 넷째로 금촛대 즉 교회 사이를 다니면서 잘 보살피고 돕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을 때 말씀 속에 계신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이라는 것이 믿음 생활이 이렇게 귀한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신약신학을 가르치신 분이 킨슬러 목사님이십니다. 이 분은 평양신학교 때부터 교수생활을 하셨습니다. 제가 광나루 신학교에 다닐 적에 요한복음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성령에 대한 문제가 나올 적에 그 분이 "서양 사람들에게 제일 크고 무서운 욕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시기에 제일 무서운 욕이 무엇입니까? "성령 받지 말고 즉 성령 없이 목사 노릇하라"는 것이 그렇게 큰 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성령의 능력, 성령의 감동 없이 어떻게 목사 노릇을 합니까? 무당이 무당 귀신이 안 내리고 어떻게 무당 노릇을 합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성령의 감동 없이 목사 노릇을 할 수 없다면 여러분들의 믿음생활도 성령의 감동 없이는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감동할 때 주님의 말씀이 부딪혀와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말씀 속에서 주님을 발견학도 하고, 환란과 고난이 닥쳐와도 다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목을 내 놓고라도 끝까지 믿고 순교하는 이유가 성령의 감동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누가 당합니까? 천하가 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승리는 이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때마다 일마다 항상 성령의 감동으로 믿음다운 믿음을 가진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믿음다운 믿음은 첫째 정신적인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바로 알고 믿는 정신적인 믿음이 믿음다운 믿음입니다. 둘째 주님의 일이라면 끝까지 참여하는 믿음이 믿음다운 믿음입니다. 주님의 일에 참여할 적에 고생이요, 손해도 많지만 참여하고 나면 영광과 승리와 축복이 있습니다. 셋째 성령의 감동 받는 믿음이 믿음다운 믿음입니다. 성령의 감동 없이는 믿을 재간도 없고, 일할 재간도 없고, 목을 내 놓고 충성할 수도 없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천하가 못 당하는 믿음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복중의 복입니다 (본문 : 열왕기하 4:42-44)

김창인 목사(광성교회)

오늘은 열왕기하 4장 42절에서 44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믿음은 복중의 복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 복이라 할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첫째 건강해야 합니다. 제가 건강을 잃어 본 후에 비로소 건강이 귀한 복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항상 건강하게 사는 사람은 '나는 으례히 건강해야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절대로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합니다. '나는 으례이 건강해야 하는 사람인데'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건강이 참 귀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던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둘째 가정이라고 하는 것이 큰복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가정 없이 살 때에는 명절이 돌아오면 그렇게 슬펐습니다. 갈곳이 없었습니다. 여느 때는 친구에게 놀러 가고 친구가 놀러 와 주기도 하지만 명절 때는 어디로 놀러 가며 누가 놀러 옵니까? 그 외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가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복인지 모릅니다.

셋째 쓰며 먹으며 하는 재물이 큰복입니다. 재물이 없다고 해서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생활이 너무 불편합니다. 그러므로 재물도 큰복입니다.

넷째는 일감이 큰복입니다. 일감이 없다고 상상해 보십시다. 일할 수 있다는 것이 큰복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다 가졌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믿음을 가지지 못했다면 궁극적으로는 이런 것이 복일 수는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믿음이 복중의 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을 '믿음은 복중의 복입니다'라고 정하였습니다. 본문의 말씀의 따라 믿음을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바치는 믿음(42)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유월절에 혹은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4번밖에 없습니다. 그리고는 전부 갈릴리를 중심으로 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한번은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셨습니다. 우리처럼 헌금 시간에 헌금 주머니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성전 입구에 연보궤를 놓아두면 각자가 알아서 연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바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셨습니다.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뜻입니다. 잠깐 보고 가시려면 서서 계시지 왜 앉으셨겠습니까? 부자가 헌금을 많이 하고 갑니다. 이어서 가난한 과부가 오더니 두 렙돈을 헌금했습니다. 두 렙돈은 액수로 하찮은 돈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때 '가난한 과부가 저 부자보다 더 많이 넣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헌금에 대한 칭찬은 처음입니다. 성경에는 칭찬으로 끝이 났지만 주님이 칭찬하신 후에 어떻게 하셨겠는지는 여러분들이 상상해 보시면 됩니다.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실 만큼 예수님은 헌금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십니다. 제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기 까닭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머니에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얼마나 신경이 쓰입니까? 그러나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면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첫째 헌금궤를 대하여 앉으신 것은 헌금에 관심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부자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비교하셨습니다. 부자는 많은 것 중에서 실컷 누리고도 많이 남았습니다. 그 중에 얼마는 떼어서 받쳤는데 액수는 많았습니다. 그러나 부자의 전 재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난한 과부의 두렙돈은 그 날 하루 종일 온 식구가 함께 먹고 살 수 있는 생활비의 전부였습니다. 과부의 돈이 액수 자체는 적었습니다. 그러나 비율로 따져보면 부자는 극히 적은 것이지만 가난한 과부는 그렇게 많다는 것입니다. 셋째 만천하에 공포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어느 곳에서 봉사를 하든지 봉사하는 것은 다 드러납니다. 그러나 누가 얼마를 했다고 하는 헌금은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헌금을 한 번 천하에 공개해 볼까요? 언젠가 한번 공개했더니 왜 신경질을 그렇게 부립니까?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떳떳하면 왜 신경질을 부리겠습니까? 주님은 공개를 하셨습니다. 넷째 돈 부자가 꼭 믿음 부자는 아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다섯번째 돈이 가난하다고 해서 믿음도 가난한 것은 아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돈보다는 믿음이 귀하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바칠 줄 아는 믿음은 그 자체가 귀한 보배가 되고 복중의 복이 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42절을 보면 '한 사람이 바알살리사에서 부터 와서 처음 익은 식물 곧 보리떡 이십과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저가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내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바알살리사라고 하는 곳에서 농사를 짓는 농사꾼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흉년이 들어서 많은 것을 거두지 못할 때입니다. 그런데 농사를 지어서 제일 처음 익는 곡식은 따로 베어 타작을 해서 하나님께 바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선지자에게 드리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냐고 하시는 분들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무엘상 9장 9절을 보면 '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으니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일컬었더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선지자에게 나아갈 때에는 엘리사라고 하는 사람에게 나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심정으로 나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사에게 드린 것은 곧 하나님께 드린 것이라는 뜻입니다. 농사지어 처음 익은 곡식은 하나님의 것으로 내가 손을 대면 안되고 반드시 하나님께 바치는데 하나님의 법이 제사장에게 가져다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선지자에게 드렸습니까? 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때는 이스라엘 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예루살렘과 성전은 남왕국 유다에 속해 있습니다. 북왕국에서는 모든 백성들이 명절이 되면 성전으로 예배하러 가게 되는데 백성들의 마음이 돌아설까 염려가 되어 이스라엘의 왕이 그것을 두려워해서 절대로 절기를 지키러 가지 못하게 막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송아지 우상을 북쪽과 남쪽에 만들어 세워 놓고 그 송아지 우상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이 그것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북왕국 이스라엘에 있는 제사장들이 모두 남왕국 예루살렘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북왕국 이스라엘에는 제사장이 없습니다. 그럴 때 바알살리사의 농부는 핑계거리가 얼마나 좋습니까? 제사장이 없으니 차라리 잘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농부는 제사장이 하나님의 종이라면 제사장이 없는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종은 누구인지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 같은 하나님의 종인 엘리사에게 가져다 바쳤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바칠 줄 아는 믿음이 복된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할 때에 자기의 믿음만큼만 봉사를 하면 됩니다. 제가 아들 딸을 길러 보니까 유치원에 열심히 다닙니다. 평시에는 잠꾸러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치원에 갈 시간이 되었다고 하면 벌떡 일어납니다. 하루도 안 빠지고 얼마나 출석을 잘하는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유치원생만큼의 어린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생 만한 믿음, 중고등학교 만한 믿음, 대학생 만한 믿음, 대학원생 만한 믿음, 심지어 박사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도 주일 낮 시간에 나옵니다. 주일 낮 시간에는 여러 층의 믿음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도대체 누구의 믿음에 표준을 맞추어 설교를 해야 합니까? 주일 낮 시간 설교가 그래서 참 힘든 겁니다. 유치원에 다닐 적에 어리지만은 결석을 하지 않고 출석은 꼭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혹시 유치원 다닐 만한 믿음밖에 안 되는 분들이 계실지라도 교회에 출석은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음으로 아이들은 유치원에 다니면서 글공부를 합니다. 유치원생 만한 그런 정도의 믿음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성경공부는 해야 되지 않습니까? 또 유치원생은 선생님의 말씀에 순종을 잘합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말은 잘 안 들어도 유치원 선생님이 하는 말은 어떻게 잘 듣는지 모릅니다. 몇 시까지 오라고 하면 그 시간에 꼭 맞추어 갑니다. 숙제를 해 오라고 하면 꼭 숙제를 해 가지고 갑니다. '너는 왜 이렇게 늦게 자곤 하느냐? 밤 10시면 꼭 자거라'고 하면 컴퓨터 게임을 하고 싶어도 10시가 되면 꼭 잠자리에 듭니다. 그렇게 말을 잘 듣습니다. 우리가 유치원생 만한 믿음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선생 중에 선생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순종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유치원 학생들이 봉사도 잘 합니다. "아빠!" "왜?" "돈 백원" "야 너 이름을 백원이라고 짓고 말자"라고 우스개 소리도 해 봅니다. 그럴 때 돈 백원을 그냥 주면 안됩니다. "신문 가지고 와"라고 합니다. 그러면 현관으로 달려가서 아침 신문을 가지고 옵니다. 이것이 봉사가 아닙니까? 유치원 학생으로서 제딴에는 아버지께 큰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문을 가지고 오면 백원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출근할 때 "구두는 왜 안 닦아 놓았지?"라고 하면 구두를 닦습니다. 유치원생이 구두를 닦으면 제대로 닦겠습니까? 그렇지만 구두 닦아주는 봉사를 합니다. 그러면 돈 백원을 주는 것입니다. 몇 만원씩 주는 것이 아닙니다. 유치원생도 그렇게 아버지께 봉사할 줄 아는데 우리가 유치원생 만한 어린 믿음을 가졌을지라도 하나님께 내가 할 수 있는 봉사는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아이가 조금 더 크면 아버지의 것과 자기의 것을 분별할 줄 압니다. 그 전에는 아버지의 것도 내 것이요, 엄마의 것도 내 것이요, 내 것도 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분간할 줄 압니다. "너 아버지 주머니에 손 넣어서 꺼내 가면 무엇이 되는지 아느냐? 아버지 주머니에서 아버지의 것을 가져가거나 다른 사람 것을 가져가거나 똑같이 도둑질이야" 알아듣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것과 자기의 것을 분간할 줄 압니다. 우리가 믿음이 어리더라도 하나님의 것이 무엇인지, 내 것이 무엇인지 분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제는 많이 성장하여 수입이 생깁니다. 그래서 "십일조 바치라"하면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 다음에는 아버지에게 십일조를 가지고 와라 하면 그 중에서 십일조를 다시 떼어서 아버지에게 가지고 옵니다. 왜 그러는 것입니까? 아버지에게 용돈을 바치라는 뜻입니다. "네가 지금부터 용돈 바치는 버릇을 가져야 돼 그렇지 않으면 이 다음에 장가가고 시집갔을 때 내가 너희들 집에 가 봐라 그러면 뭣하러 왔나? 그럴텐데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께 바칠 줄 알아야 하는 거야"라고 가르쳐 줍니다. 용돈을 바칠 줄 아는 때가 되면 돈 백원으로 떨어집니까? 주었다 하면 뭉치 돈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바칠 줄 아는 믿음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만큼 큰복입니다. 여러분의 믿음도 나 중심으로 달라고만 하던 믿음에서 하나님께 바칠 줄 아는 믿음까지 큰 믿음이 되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믿음이 복중의 복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나누는 믿음 (43)

본문으로 돌아가서 42절 하반절에서 43절을 보면 '저가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그 사환이 가로되 어찜이니이까 이것을 일백명에게 베풀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무리가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알살리사에 농사꾼이 살고 있었습니다. 농사를 지어 제일 먼저 익은 곡식은 따로 베어 타작을 해서 하나님께 바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 농부는 처음 익은 것으로 떡을 만들었는데 떡이 스무 덩어리입니다. 그리고 자루에는 채소를 담아 갖고 왔습니다. 잘 먹는 장정이면 두 사람이 먹어도 모자라는 양입니다. 그 때 엘리사가 그것을 받아 감추어 두고 자기만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이 흉년에 함께 굶주리는 무리가 있으니 나누어 먹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 그리하였고 그 다음에도 사환이 와서 "선생님! 무리가 백 명이나 되는데 이것으로 어떻게 합니까?"할 때 "잔말말고 나누어 먹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먹고 남는지 안 남는지 한 번 주어 보라는 것입니다. 그대로 했더니 먹고 남지 않았습니까? 혼자 먹고 싶지만 함께 나누고 더불어 사는 것이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예수님의 정신이 없으면 우리는 그것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예수님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정신은 내몰라라 하는 사람들의 수가 적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더불어 살고 나누며 살고 함께 사는 믿음이 복 된 것입니다.

잠언 19장 17절을 보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기에 돈이 아쉽습니다. 그럴 때 도와주라고 하십니다. 그 사람이 네게 갚지 못하면 하나님 자신이 그것을 꼭 기억하셨다가 필요로 하는 때에 꼭 같아 주겠다고 하십니다. 나눔이 이렇게 복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을 보면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꼭 갚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요즘은 쌀 파는 집에 가보면 아예 푸대에 넣어서 10Kg, 20Kg으로 넣어서 팔고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박이나 됫박에 되어서 팔았습니다. 그 때 푹 떠서 쌀을 담지 않고 살살 담습니다. 말을 세울 때에도 살그머니 세워 놓은 다음에 팍 깎아서 한 말이라고 주지 않습니까? 그것을 집에 와서 다시 한번 되어 보십시오. 한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말입니다. 한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안 되는 이유 가 무엇입니까? 말박에 쌀을 담을 때 그것을 누르고 흔들게 되면 쑥쑥 내려가 버리기 때문에 살그머니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베풀어 준 것에 대해서 갚아 주실 때에는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고 넘치도록 하여 네게 안겨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중간의 사람이 가로채면 안되기 까닭에 '네게 안겨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도로 받을 것이요'라는 말씀은 인색한 마음으로 벌벌 떨면서 베풀어주면 하나님도 복을 주실 때 인색한 마음으로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남에게 베풀고 더불어 사는 그 믿음에는 하나님이 이렇게 후하게 복을 주신다는 그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나누는 믿음이 복된 믿음입니다.

셋째, 말씀의 믿음 (44)

말씀을 그대로 복창을 하고 그대로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에덴 동산에 각종 아름다운 과실나무를 만들어 놓고 한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나무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없는 상황에서 하와가 혼자 동산을 거닐었습니다.

여자가 혼자 다니면 안 좋습니다. 얼마 전에 세분의 목사님들이 오셔서 점심을 같이 하자고 해서 교외에 있는 음식점에 갔더니 남자는 우리들뿐이었고 전부 여자들이었습니다. 두 명도 오고, 네 명도 오고, 여섯 명도 짝을 지어 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제 남편들은 돈을 벌기 위해 뼈가 빠지게 일을 하는데 마누라들은 와서 지지고 볶고 굽고 마셔대다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여자 혼자 내 보내지 마십시오. 혼자 나가면 좋은 것이란 좋은 것은 다 사 먹고 돌아다닙니다. 그리고 남편이 부산에 취직했으면 주말 부부가 되지 마십시오. 남자 혼자 가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보따리를 싸들고 따라가십시오. 왜 남자 혼자 내버려둡니까? 우리 교회에서 한 가정이 없어져도 괜찮습니다. 부산에 가서 예수 믿으면 되지 않습니까? 남자 혼자 내보내도 좋지 않습니다.

하와가 남편 혼자 내버려두고 자기 혼자 에덴 동산을 거닐었는데 마귀란 놈이 찾아옵니다. "하와야 하나님이 뭐라고 하든?"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했느니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만지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왜 마음대로 덧붙이고 싶으면 덧붙입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정녕 죽으리라'하셨는데 하와는 '죽을까 하노라'고 했습니다. 전혀 딴말이 아닙니까? 우리가 붙이고 싶은 것은 붙이고 떼고 싶은 것은 떼어버리면 하나님의 말씀은 변질이 되어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때 마귀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녕 죽으리라'했는데 마귀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전혀 딴 소리 아닙니까?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하라' 하신 것은 떼어버리기를 잘합니다. 그러면 안 하지 않습니까?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가져다 덧붙이고 해 버립니다. 솔직히 우리들의 생활 가운데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지 말라' 하신 것은 해 버리고 '하라' 하신 것은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더하고 빼는 것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더하고 빼버리면 믿음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열매를 맺기 까닭에 그대로 생활 속에 축복으로 열매가 맺어 질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44절을 보면 '저가 드디어 무리 앞에 베풀었더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다 먹고 남았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스무 개의 떡 덩어리를 가지고 백명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먹고 남으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 그대로 하였더니 그대로 먹고 남았다는 이야기가 본문입니다.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믿으면 먹고 남게 되는 것입니다.

독일에 죠지 뮐러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독일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영국에 가서 고아원을 많이 경영하면서 고아들을 많이 길러냈습니다. 왜 독일 사람이 영국에 갔습니까? 세계 제1차 대전 때 독일이 얼마나 많은 영국의 사람들을 죽였는지 모릅니다. 마지막에는 1차 대전에 독일이 망했지만 한참 싸우는 중에 영국 사람들이 많이 희생되었습니다. 독일 군대가 가서 이렇게 희생시킨 영국 사람들에게 내가 그 빚을 우리가 졌으니 나 혼자라도 가서 갚으리라 생각하고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 독일 군대들이 죽인 아버지 어머니의 고아된 아들 딸들을 전부 끌어 모아 고아원을 운영하였습니다. 그런데 뮐러는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고 좋은 것으로 주셨습니다. 소위 일생에 5만번 기도 응답 받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입니다. 그 날도 저녁거리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고아원의 선생들이 오더니 "원장님!" "왜 그러지?" "저녁 시간이 되었는데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습니다" "식탁을 차려 놓으시오" 저녁 먹을 것이 없다고 하면 그 아이들이 뭐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식탁을 차려 놓고 포크와 접시를 가져다 놓고 기다렸습니다. 시간은 지나가는데 먹을 것이 있어야 어떻게 하지요? 그래서 죠지 뮐러는 기도할 때 덮어놓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에 있는지 꼭 찾아서 "하나님 여기에 이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면 응답을 받곤 했습니다. 그 날도 이 말씀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다 먹고 남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주십시오. 왜 엘리사에게만 주십니까? 조금 있으려니까 말들이 방울을 울리면서 몇 대의 마차가 옵니다.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우리가 빵 공장을 크게 하는데 그만 빵을 많이 주문했던 분이 사정이 생겨서 취소를 했습니다. 이 빵을 그대로 두면 내일 못 팔아먹지 않습니까? 그 때 고아원 아이들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얼마나 빵이 먹고 싶을까? 그 아이들이나 가져다주어서 실컷 먹게 하자 싶어서 가지고 왔습니다" 그냥 풀어서 베풀어주는데 실컷 먹고도 남지 않았습니까? 죠지 뮐러의 일화 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말씀대로 믿고 기도했더니 말씀대로 먹고 남았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믿음입니다. 이런 말씀의 믿음은 복중의 복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바치는 믿음이 복중의 복입니다. 바칠 줄 아는 사람이 받아도 크게 받습니다. 둘째 나누는 믿음이 복중의 복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말씀의 믿음이 복중의 복입니다. 하나님은 입술의 열매를 짓기 때문에 믿는 대로 되어지는 까닭입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들의 것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