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성령님의 열매
(The Fruit of the Spirit) (갈 5:22-24)
바울은 이제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정의해주고 있다. 그것은 곧 성령님이 맺어주시는 인격적인 열매이다. 바울이 “열매”라고 부르는 것은 성령님을 소유한 사람만이 생산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성령님의 열매이지, 신자의 열매가 아니다. “열매는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호 10:1. 14:8).
그러므로 열매는 우리 안에 보이지않게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님의 표출이요,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인격 속에 그리스도의 성품을 옮겨심으시는 것(transplantation)이다. 이런 열매는 성령님의 내주하심과 내적 사역의 절정이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음의 결과를 형성해주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열매맺음을 세 가지 영역으로 정리해 준다.
1)열매의 근원과 기초 / 요한복음 15장
2)열매의 본질과 결과 / 갈 5:22-23
3)열매를 맺어가는 인생의 과정 / 벧후 1:5-9
그런데 성령의 열매는 단수로 표현되고 있음을 주시하자. 이것은 성령님의 사역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격만큼은 전인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주신다는 큰 뜻을 지니고 있다.
성령님은 죄인에게 있어서 가장 결핍되어 있는 연합성과 통일성, 그리고 완전성을 갖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맺어주시는 열매는 “통일된 다양성”(unified variety)을 갖고 있다.
마치 포도원지기는 한 사람이나, 포도의 종류는 다양한 것과 같다.
가) 열매의 이중 활동
성령님의 열매는 행동이기 전에 성품이요, 행위이기 전에 존재이다.
(The fruit of the Spirit is character rather than conduct ― being rather than doing)
사실상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하도록(to do)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무엇인가가 되기를(to be) 더 원하신다. 즉 섬김(service)도 중요하 나, 성성(sanctity)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열매는 신자의 삶 안에서, 그리고 삶을 통하여 그분이 하실 수 있는 생 명의 에너지를 생산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성령님의 열매는 우리 가 꾸며낼(manufacture)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다만 우리가 드러낼(manifest)뿐이다.
나) 열매의 연합된 절정
포도 열매가 포도나무의 절정이듯이, 바울에 의해 묘사되고 있는 성령님이 맺어주시는 외 적 열매는 그분의 내적 생명과 능력의 표상인 것이다. 즉 열매는 뿌리와 수액의 입증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과 성화의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얼마나 성품과 행동과 고백으로(character, conduct, confession) 복음을 널리 퍼뜨리는 삶을 살고 있는가?
다) 열매의 세 쌍둥이
ꊧ조건(condition) : 하나님을 향한 열매 / 사랑. 희락. 화평
ꊨ행동(conduct) : 사람들을 향한 열매 / 오래참음. 자비. 양선
ꊩ성품(character) : 자신을 향한 열매 / 충성과 온유와 절제
1. 사 랑(Love)
사랑을 맨 위에 놓는 것은 다른 여덟 가지의 은혜를 움직이는 원리와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죤 번연은 말한다. “사랑은 복음의 정수다.”
이처럼 사랑은 모든 것을 다 포함하며, 모든 열매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아홉 개의 열매는 별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세 쌍둥이를 이루고 있다. 즉 뿌리와 줄기와 열매는 하나이다.
“사랑은 기초요, 기쁨은 상부구조요, 평화는 모든 것의 면류관이다.”
성령님의 열매를 하나로 묶어주고 있는 사랑의 다양한 형태를 이렇게 노래할 수 있다.
희락은 기뻐뛰는 사랑이요
화평은 안정된 사랑이요
오래참음은 견디는 사랑이요
자비는 품위있는 사랑이요
양선은 행동하는 사랑이요
충성은 신뢰하는 사랑이요
온유는 머리를 숙이는 사랑이요
절제는 진정한 자기사랑이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총체는 오직 사랑이다. 즉 사랑이 기관차라면, 나머지는 모두 객차이다.
또한 성령님의 열매가 사랑이라면, 성령님 자신이 사랑이심을 입증한다(롬 15:30). 그래서 사랑은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의 가장 위대하고 우아한 결과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심장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가슴에 부어주셨고, 성령님은 그 사랑을 우리 심령에서 솟아나게 하신다(요 13:34).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띠로 묶여지게 되는 것이다(고전 13:4-8,13. 14:1).
한센 박사는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미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건강상의 문제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스런 생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 첫째는 용납하는(forbear) 사랑이요, 둘째는 용서하는(forgive)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며, 모든 것을 믿어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기다려 준다』
2. 희 락(Joy)
기쁨이란 외부 환경보다는 내면적인 것이며, 선택적인 것이다. 기쁨이란 태도요, 선택이다.
기쁨이란 고통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사랑이 첫 열매라면, 기쁨은 사랑의 꽃이다. 이 기쁨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항상 기뻐하며 살게 된다. “그리스도 자신이 성령으로 기쁨이 넘치셨기 때문이다”(눅 10:21).
그러므로 기쁨이란 성령님께서 만들어내시는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런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았다(행 2:13,46. 5:41. 8:8,39. 13:52). 우리 역시 진정으로 성령 안에서 기뻐하며 살 수 있다(롬 14:17). 더구나 이 기쁨은 성령님의 것이기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fleeting) 충만한 것이요(full), 산란한 것이 아니라(perturbed) 완전한 것이다(perfect).
즉 성령님이 주시는 기쁨은 그리스도를 알므로 오는 모든 죄사함과 율법적 정죄로부터의 해방과 믿음과 하나님과의 교제, 성도들과의 교제, 전능하신 하나님의 돌보심 밑에서의 안전, 그리고 영생을 위한 영광스런 부활을 소망하는데서 오는 기쁨인 것이다.
3. 화 평(Peace)
“평화란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관련하여 취하게 되는 휴식상태”를 말한다. 평화란 “믿음이 맨 먼저 머무는 장소이다.” 곧 사랑과 기쁨 위에 세워진 평화란 고통의 부재가 아니라, 인생의 즐거움과 고통을 포함한 모든 환경 속에서 실제적인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과 기쁨은 평화의 기반 위에서만 자랄 수 있다.
이 평화에는 삼중적 본질이 있는데, 하나님과의 평화(peace with God), 하나님의 평화(peace of God),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의 평화(peace in God)이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이요, 하나님의 평화는 당신 자신의 속성을 우리에게 심어주신 것이요(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화), 하나님 안에서의 평화는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영혼의 고요한 태도를 말한다.
그래서 『마음이 평안하면 생가가 도나, 시기하는 마음은 뼈까지 썩게 한다』(잠 14:30).
성령님께서 이런 평화를 우리 속에서 생산해주시는데, 혼란스런 인생의 와중에서도 깊고 완전하고 안정된 심령과 마음의 평안이다. 다윗은 이런 내적 평안을 누린 자답게 그의 시를 읽는 자들에게 심령의 고요함을 맛보게 한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라』(시 4:8).
강물과 같이, 찬연하도다. 하나님의 완전한 평화여
완전한 승리 이후에도 더욱더 선명해지는 평화여
완전하면서도 매일 매일 더 충만하게 흘러넘치는도다.
완전하면서도 매일 매일 더 깊게 자라가는도다.
우리는 이와같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게 해야 한다”(골 3:15).
여기 아름다운 한 찬송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평화, 완전한 평화가, 과연 이 어두운 죄악의 세상에서 가능할까?
그리스도의 피가 심령의 평안을 속삭이는도다.
평화, 완전한 평화가, 과연 일에 억눌리는 자들에게도 가능할까?
예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이 곧 휴식이로다.
평화, 완전한 평화가, 과연 슬픈 일들이 주변에 널려있는 자들에게도 가능할까?
예수님의 가슴에 완전히 안기기만 하면 고요함을 누리도다.
평화, 완전한 평화가, 과연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떠났는데도 가능할까?
예수님의 돌보심 안에서는 누구든지 안전하도다.
평화, 완전한 평화가, 과연 아무도 알 수 없는 미래에도 가능할까?
예수님, 우리가 아는 그분은 보좌에 계시도다.
평화, 완전한 평화가, 과연 죽음의 그림자가 덮고 있는데도 가능할까?
예수님은 죽음과 그 모든 세력들을 몰아내셨도다.
충분하도다! 땅의 모든 싸움은 머지않아 사라지리니,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늘의 완전한 평화에로 불러주시리라.
이처럼 성령님의 열매를 맺는 자로서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게 지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롬 12:18). 예수님은 “화목이 헌신보다 우선이라”고 말씀하신다.(마 5:23-24). 그리고 성경은 “성취보다는 화목을 더 중요시한다.”
사실 우리는 서로를 배척하지 않으면서도 일치할 수 있고, 똑같이 통일하지 않고도 단결할 수가 있다. 우리는 서로 간의 상이점을 인정하면서도 한 마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천편일률적인 목표달성을 강요하지 않고, 다만 화목을 요구한다. 화목을 힘쓰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은 오직 “평안의 매는 줄”로만 가능하다(엡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