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므비보셋이 받은 은총(삼하9:1-13
므비보셋은 이스라엘 첫번째 왕 사울의 왕자였던 요나단의 아들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사울 왕가의 직손이요, 계승자였다. 그러나 그는 불행한 시대에 숨쉬고 살던 자였다.
므비보셋의 오늘은 실로 형언키 어려운 비운 속에서 아픔과 수고로 가득찬 나날이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었다.
1.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
사울왕의 맏아들이 요나단이요 또 요나단의 아들이 므비보셋이다. 사울의 아들 중에도 므비보셋이라 이름하는 자가 있었으니 사울의 첩 리스바의 아들로 태어나서 불행하게 죽은 자가 있다(삼하21:8).
그와는 숙질간이나 공교롭게도 이름이 같았다. 요나단은 부왕 사울과는 달리 인품이 출중하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독실하며 다윗과의 우정을 끝까지 지킨 사랑의 사람인데 그 아들이 므비보셋이다.
1). 왕가에 태어난 왕자이다.
사울왕-->요나단-->므비보셋-->왕자(삼상20:42, 요난단과 맺은 언약)
2). 왕위를 이을 왕자이다(대상8:35, 40:9, 40-44)
아버지 요나단을 이어 왕이 될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 요나단의 권한에 의해서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유모의 부주의로 절름발이가 되었으므로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게 되었다.
2. 비참한 므비보셋
1). 절름발이 므비보셋이다 (삼하4:4, 9:3-13)
사울 왕가가 기울어져 가던 때였다. 저 길보아산에서 블레셋과 싸우던 사울왕과 그 아들 요나단 곧 므비보셋의 아버지는 거기서 패전하여 그 운명적인 종말을 당했다(삼상31:1-13).
사울 왕과 요나단이 전사하자 이스라엘에는 두 정권이 생겼다. 하나는 유대 사람들에 의하여 헤브론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세운 일이 있다(삼하2:1-7).
때를 같이 하여 사울의 군대 장관이었던 넬의 아들 아브넬이 사울의 다른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삼아 이 두 정권이 대립되었다(삼하2:8-10).
그 후 민심은 다윗에게 기울고 아브넬이 자기가 세운 왕 이스보셋을 배신하여 다윗에게로 돌아갔으나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에게 쳐죽임을 당했다(삼하3:27-36).
나중에 이스보셋은 또 다른 자기의 군장 바아나와 레갑에 의하여 배가 찔려 죽임을 당했다(삼하4:5). 이렇게 사울 왕가는 장수하지 못하고 당대로 끝을 보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이렇게 사울 왕가가 기울어지는 난리통에 유모가 요나단의 다섯 살된 아들 므비보셋을 떨어뜨려 두 발이 절게 되고 말았다(삼하4:4, 9:13).
그는 죽음의 위기 속에서 남의 품에 안겨 도망을 치다가 떨어져 두 발이 다 절름발이가 되고 말았다. 어릴 때부터 절름발이가 되었던 것이다. 유모의 손에 이끌려 갔으니 아비는 전사했고, 어미의 사적이 없으니 그도 죽었을 것 같고, 다만 므비보셋이 유모의 손에서 몰래 키움을 받아 성인이 되었다.
2). 왕궁에서 살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 숨어 살고 있던 므비보셋이다(삼하9:4).
다윗은 여러 가지 선정을 베푸는 중이었다. 그는 옛 사울의 아들이었던 자기 친구 요나단을 생각하고 사울 왕가에 은혜를 베풀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자기의 신하들에게 사울의 집에 생존자가 누구냐고 물었다(삼하9:1). 그때 불려온 사울 왕가의 옛 종 시바는 대답하기를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절뚝발이니이다고 했다(삼하9:3).
왕이 그 시바에게 또 묻기를 “그가 어디 있느냐 시바가 왕에게 고하되 호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라고 했다(삼하9:4).
므비보셋은 로드발에서 살고 있었다. 그 뜻은 “목초가 없는 곳”이란 뜻으로 황무지 같은 곳에 살고 있다는 말이다.
그곳은 왕실로부터 멀리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다. 세상의 부귀와 영화로부터 떨어진 외딴 곳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왕궁과 상관없는 왕손이었다.
므비보셋의 이러한 비참한 상황은 죄로 말미암은 인간의 한 비참함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절름발이 불구자였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한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미침과 같다(롬5:12).
선왕 사울의 불신앙과 교만과 불법으로 말미암아 그의 후손들에게 임한 비극적 아픔이었다. 그는 어릴때부터 절름발이였다. 이것은 마치 인생이 모태에서부터 죄 중에서 출생하는 비극과 같다(시51:5, 요9:1).
그래서 므비보셋은 자기의 삶을 원망하고 한탄하고 저주했다. 그 이름의 뜻이 이것을 포함하고 있다.
어떤 경우든지 므비보셋은 비참한 인간, 절망의 인간, 어둠의 인간, 괴로움의 인간이었다. 이것이 바로 죄로 타락한 인간의 한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3. 은총을 입은 므비보셋
1). 하나님의 은총이다(1, 3, 7)
본문 1절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고 했다. 3절에는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고 했다. 7절에는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고 했다.
이 말은 다윗왕이 한 말이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베푸는 은총이다. 그런데 다윗은 분명히 말하기를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했다.
이것은 다윗의 신앙이 얼마나 신본주의적이었던가 하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그에게 있는 권력(왕)도, 물질도, 그가 백성들에게 베풀 수 있는 선정도 결코 자기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임을 확신했다.
그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그 어떤 소유의 원천도 오직 하나님 뿐이라고 확신했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베풀 수 있었던 은총!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받을 수 있었던 은총!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것이었다.
*+ (그 하나님의 은총은)
(1) 의리에 기초한 은총이었다.
다윗은 말하기를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삼하9:1, 7)고 했다.
다윗과 요나단은 생명적 우정의 관계였다(삼상18:1-5). 다윗은 이러한 옛날의 우정에 기초하고 그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 싶었다. 참으로 다윗은 의리에 기초한 은총의 윤리를 실행한 사람이었다.
(2) 여기서 하나님의 인간에게 베푼 것과 같은 은총이란 희생을 동반한 은총을 말한다.
(3) 또한 이 은총은 경건에 의한 은총이며 하나님을 생각하고 행하는 은총일 뿐 아니라 끝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은총이다.
(4) 신본주의 사랑에 기초하면서 겸손하게 은총을 베풀었다.
다윗은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얼마나 겸손한 정치인가? 이 얼마나 의리의 사람인가? 이 얼마나 인생철학을 나누고 살아가는 자인가?
마지막으로 이 은총은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은 자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다(요일4:19-21).
2). 하나니의 은총이 어떤 것인가?
(1). 인격적인 대우이다(인격상의 축복)(6절)
본문 6절에 “---다윗이 가로되 므비보셋이여---”라고 했다. 이름은 인격의 대명사이다. 그는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었다(삼하9:6).
다윗이 그의 이름을 불러줌은 바로 므비보셋에게 무한한 영광이다. 그것은 다윗이 그를 사랑했다는 애정의 표현이다. 그것은 므비보셋의 본래를 찾아준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2). 평안이다(구원의 축복)(7)
본문 7절에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고 했다. 이 얼마나 크고 또 큰 은혜인가?
지금 므비보셋은 어쩔 수 없는 역사의 심판장 앞에 나온 처지가 아닌가? 그 사실은 므비보셋 자신이 한 말 가운데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8)하는 사실로도 충분하다.
이러한 므비보셋에게 평안을 주었다. 이것은 사단의 왕가에서 쾌락을 추구하던 우리들을 당신의 나라로 인도하시고 영원한 안전을 보장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관대함을 상징한다(요14:27).
(3). 사울왕의 밭을 모두 되돌려 주겠다고 한 것이다(기업의 축복, 회복의 축복)(7절)
본문 7절 중에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은 다 네게 도로 주겠고---”라고 했다.
다윗은 기업이 그 본주인에게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하나님의 율법(말씀)에 크게 유념하였다. 결코 그는 그의 권력으로 선조의 사유 재산을 침해하지 않았다.
이처럼 참된 사랑의 행위는 말 뿐이 아니라 구체적인 필요까지 채워주는 것이다(약2:16).
(4). 항상 다윗의 식탁에서 함께 먹게 된 영광이다(영예의 축복)(7절).
본문 7절에 또 말하기를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고 하였다. 11절에도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고 했다.
다윗은 므비보셋을 왕의 아들 중의 하나처럼 그 자신의 식탁에서 항상 같이 먹을 수 있는 귀빈의 위치로 후대해 주기까지 하였다.
(5). 예루살렘에 거하게 되었다(왕도의 축복)(13절)
본문 13절에도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거하니라”고 하였다.
예루살렘은 왕도이다. 평화의 성이다. 안전과 기쁨의 상징이다. 성별의 왕도이다. 이는 므비보셋이 받은 그 영예를 말한다.
그는 왕의 아들이 되었다. 그는 왕의 아들이 받는 기업을 받았다. 그는 왕의 아들이 누릴 영예를 누렸다. 그는 항상 예루살렘에 거했다.
이것은 영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고난에 처해 있을 때에라도 하나님의 보상과 위로를 생각하며 고난을 극복해 나갈 수 있음을 보여 준다.
4. 보은하는 므비보셋
죽을 죄인 므비보셋이 구원의 은총을 입었다. 그에겐 어쩔 수 없이 받은 구원의 은혜에 보답하는 감사의 생활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1). 엎드려 절하는 것이다(6-8)
본문 6절에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서 엎드려 절하며”라고 했다. 본 문 8절에 “저가 절하여 가로되”라고 했다.
이는 최대의 경의를 나타내는 감은의 표현이다.
2). 겸손 또 겸손이다(8절)
본문 8절에 “저가 절하여 가로되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라고 한 말이다.
이 이상 더 므비보셋은 자기를 표현할 길이 없었다. 어쩔 수 없는 겸손의 고백이요, 감은의 폭발이 아닌가?
이것은 감사의 한 표현이며 그와 다윗 사이의 비교할 수 없는 신분의 차이를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로 낮아질 때는 스스로 겸비한 마음을 지니는 것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다시 높이시기 때문이다.
3). 의리를 지켰다(삼하16:1-4, 19:24-30)
다윗이 나중에 자기 아들 압살롬의 난을 피하여 도망할 때 므비보셋은 발을 쓰지 못할 뿐 아니라 자기 종 시바가 그를 배신하고 함께 데리고 가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므비보셋을 참소하여 다윗에게 이르기를 므비보셋이 이제야 자기 아비의 나라를 도로 찾겠다고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이었다. 그는 다윗이 떠난 이후부터 다윗이 돌아올 때까지 그 발을 맵시내지 아니하고 수염을 깎지 아니하고 옷을 빨지 아니하고 기다리다가 환도하는 다윗왕을 맞이하였다(삼하16:1-4, 19:24-30).
다행히 다윗은 이 므비보셋의 의리있는 충성을 알아주었다. 그는 실로 의리의 후손이었다.
5. 결론
성도 여러분! 므비보셋이 받은 하나님의 은총! 이것은 바로 오늘 우리가 받은 은총이다. 죄에서 구원받은 은총이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하고 움직인 계약적 은총이요 사랑이다.
이 구원은 잃어버린 본래의 나를 찾아주는 은총이다(이름). 평안의 은총이다. 기업의 은총이다(물질). 예루살렘(평화의 집)에 함께 거하는 은총이다.
바로 그것은 교회 생활의 은총이며 새 하늘 새 땅의 은총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로운 왕가의 직분을 받았다. 새로운 기업, 새로운 영예, 새로운 거소를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자에게는 불가항력적인 보은 생활이 불타게 된다. 그것이 주 앞에 앞드려 절하기 원하는 예배이다. 죽도록 충성하고도 또 앞에 엎드려 감사, 감은하는 겸손이다. 영원히 주님과 맺은 불변의 언약 앞에 나의 나된 생명을 굳게 결탁하여 사는 연합의 생활이다.